어둠의 포식은 무엇이든 삼킬 수 있었다. 그것이 살아 있는 존재라도 말이다. 그러니 스킬도 삼킬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고요해진 앞에는 하늘을 덮고 있던 거대한 창이 사라져 있었다.
잔디가 바람에 날리고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정말… 정말 사라진 건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허공에 떠 있는 백루찬이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나를 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입을 달싹였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스템의 종용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생각은 그다음이었다. 나는 녀석을 보며 무어라 입을 떼려 앞으로 한 발 움직였다.
그러나 그때였다. 등 뒤에 있던 진마하가 나를 끌어안았다. 목덜미 사이로 녀석의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꽉 끌어 안겨서 나는 바짝 굳고 말았다. 진마하가 속삭였다.
“나에게로 돌아온 거야?”
“헛소리하지 말고 떨어져.”
나는 녀석을 밀어냈다. 앞에 백루찬이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본 다면 녀석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내가 냉정하게 밀어내자 진마하는 서운한 듯 눈썹을 늘어트리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백루찬이 천천히 허공에서 내려왔다. 뒤집혀진 땅과 무너진 잔해들로 두 사람이 얼마나 격렬한 싸움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백루찬이 성큼성큼 다가와 내 팔을 잡아챘다.
“형 대체 뭐한 거야? 어떻게-.”
“아니 루찬아, 잠시만. 잠시만. 우리 싸우는 거 잠시만 미루자.”
“하, 형 이게 지금 무슨… 게임이라도 하는 거야? 스톱 버튼이 있어? 여긴 게이트 안이야. 저놈은 그 게이트를 만들어 낸 자식이라고.”
“알아, 알고 있어. 하지만.”
“하지만? 형, 내 말 제대로 이해한 거 맞아?”
그때 진마하가 끼어들어 내 목을 감싸 안았다. 아, 이 자식 언제 다가온 거냐. 매달리듯 꽉 끌어안은 녀석의 팔을 느끼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백루찬의 눈에서 불똥이 튀기는 것 같았다.
이 자식 일부러 이렇게 들러붙는 거지. 아까까진 살벌하게 서로 죽이려 했으면서. 진마하는 지금 살기를 모두 지운 채 내 등 뒤에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녀석을 툭툭 밀쳐 떨어트리고 으르렁거리듯 덤비려 하는 백루찬을 막아섰다.
“루찬아, 잠시만이라고 했잖아. 잠깐만. 영혼석을 찾았어. 찾았는데….”
“그럼 바로 부숴 버리지 않고 뭐 하는 거야!”
“해준아, 알아챈 거야? 너무 늦었어. 내가 말했잖아. 너에게 내 모든 것을 주겠다고.”
둘 다 시끄럽게도 떠든다. 하씨, 이게 내 의지였겠냐고. 나도 어쩔 수 없었다니까!
나는 잔뜩 굳은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그러자 내 표정을 읽은 백루찬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조금만 더 했더라도 진심으로 화낼 뻔했다.
진마하는 싱글싱글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내 손안에 자신을 파괴할 영혼석이 들려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나를 본다. 나는 녀석을 밀쳐 내고, 영혼석을 쥔 손을 들어 올렸다.
“진마하, 착각하지 마. 내가 지금 너를 도운 건….”
“내가 메인 캐릭터이기 때문이겠지?”
맞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진마하는 흐릿하게 웃었다.
[세계선의 붕괴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남은 제한 시간: 00:36:52…]
멀리서 우르릉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이 울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지평선을 바라봤다. 멀리 아스라이 서 있던 도시들이 하나씩 무너지고 있었다. 이제 여기까지 닿는 것도 금방이다.
“그래, 이제… 끝내자.”
진마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에 잠겨 들었던 밤하늘은 이제 슬슬 해가 떠오르려는 것처럼 푸르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구름들 사이로 금이 가듯 하늘을 뒤엎은 균열이 보였다.
게이트 안은 모든 것이 부서지고 있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영혼석까지 부순다면 이 게이트는 이대로 닫힐 것이다. 시스템은 계속 진마하가 불안전하다고 말했으니 놈은… 다시 게이트를 열지 못할 것이다.
지금이 끝낼 때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니까 지금이야말로.
“이제 정말 끝이야. 네가 뭘 하든 소용없어. 여기까지 하자.”
진마하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백루찬을 감싸듯 앞에서 서서 말했다.
녀석은 그런 나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무엇을 그만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왔다는 건 해준아, 네가 더 잘 알잖아.”
“여기서 멈추면 돼, 진마하. 그럼 끝나는 거야.”
“하- 해준아, 정말 너는 순진하구나.”
진마하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한 발짝씩 움직일 때마다 등 뒤에서 마력이 모이며 전류가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백루찬의 손을 꽉 잡았다. 진마하는 내 앞에서 살짝 허리를 숙여 고개를 가까이 내밀고는 싱긋 웃었다.
“그래서 내가 널 사랑해.”
“…진마하.”
“세계는 오류를 그냥 두지 않아. 오류가 있다는 건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니까. 더군다나 나는 필요의 존재로 태어났으나 그들에게 반항한 자. 이런 나를 그냥 두려 할까. 내가 여기서 그만두면…. 해준아,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네가 원하는 게 멸망이라면, 얻을 수 없어. 어떻게든 내가 막을 거니까.”
“해준아 내가 원하는 건….”
진마하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다, 뒤로 물러났다. 한 걸음씩, 되돌아 걷듯이.
“모르겠어. 이제.”
“진마하…!”
“이제 나도 끝을 내고 싶다.”
진마하의 몸이 점점 떠올랐다. 내가 녀석을 붙잡으려 했지만, 백루찬이 나를 붙잡아 말렸다.
“형, 마력이 이상하게 흐르고 있어. 다가가면 안 돼.”
진마하는 내내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던졌다. 나는 그 손을 보고 놀랐다. 형체만 간신히 남긴 손은… 투명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진마하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세계는 오류인 그를 그냥 둘 생각이 없던 거다. 그럼 왜 내게…! 자꾸 살리라고 말하는 거야!
진마하의 눈이 푸른빛으로 빛이 났다. 그와 함께 엄청난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진마하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녀석은 어느새 완전히 허공에 떠올라 양팔을 벌렸다.
- 우르릉.
사방이 무너지는 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봤다. 도시가 무너지고 땅이 뒤집히며, 세계의 뒤틀림이 이제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앞에서는 진마하가 폭주를 하고 있었고, 뒤에선 붕괴가 다가온다. 진퇴양난이었다. 손에 쥔 영혼석을 바라봤다. 부숴야, 부숴야 할까.
나를 보던 백루찬이 내 손을 잡았다.
“형, 왜 망설여?”
“…백루찬.”
“형이 끝낼 수 없다면 내가 끝낼게.”
백루찬은 내 손에서 영혼석을 빼앗아 가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뒤로 뺐다. 아니, 이런 결정, 네가 내리게 하고 싶지 않다.
영혼석이 얌전히 부서질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백루찬이 깨트려서 위험에 처하면 나는 정말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백루찬은 답답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그렇게 불쌍해? 그래서, 지금 눈앞의 나보다, 밖의 사람들보다… 저 자식을 구하려고 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야.”
어떻게 해도, 영혼석을 부숴도, 혹은 부수지 않아도, 진마하를 죽여도, 죽이지 않아도, 세계가 멸망하는 건 똑같았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 건지, 망설이는 거였다. 오류를 지우지 않으면 멸망한다. 하지만 놈은 메인 캐릭터다. 대체 신은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이런 결정을 하라고 만든 것인가! 그냥 멸망시키고 싶었던 건 아닌지. 하 젠장, 욕이 튀어나왔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으며 폭주하기 시작하는 진마하를 쳐다봤다.
바람이 미친 듯이 불었다. 진마하를 중심으로 흐르는 마력의 흐름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아도 느껴진다.
하 나는, 대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이를 악물었을 때였다. 띠링 소리와 함께 시스템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메인 퀘스트!
메인 캐릭터 진마하를 구출하라!
진마하의 폭주를 막고 그를 구하세요!
실패 시: 세계 멸망
성공 보상: ???]
[메인 퀘스트!
세계의 오류를 바로잡으세요!
치명적인 오류로 차원을 붕괴로 물들이는 오류를 바로잡으세요.
실패 시: 세계 멸망
성공 보상: ???]
두 개의 퀘스트였다. 폭주를 막으라면서 오류를 바로잡으라고 말한다. 자세한 설명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이런 식으로 자꾸 나에게 선택하라는 거지.
“그래, 내가 끝낸다.”
내가 선택하마. 빌어먹을 시스템아.
진마하는 금이 가기 시작한 얼굴로 웃었다. 무리하게 움직이는 마력 때문에, 지금 녀석은 남아 있는 몸까지 부서지고 있었다.
진마하를 중심으로 모여 있던 마력이 사방을 삼키며 파괴하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를 향해 쏘아지는 거친 마력의 해일을 피해 몸을 띄웠다. 백루찬을 붙잡아 이형환위를 전개하며 덮치는 공격들을 피해 진마하와 멀어졌다.
“백루찬, 백업 좀 해 줘.”
“뭐 하려고.”
“끝내려고.”
“형…!”
나는 한야를 꺼내 들었다. 지금 막아야 했다. 퀘스트를 깨지 않으면, 결국 맞이하는 건 세계 멸망이다. 나는 눈앞의 백루찬을 바라봤다. 그리고 씩 웃었다.
“형이 해결할게. 나는, 네가 있는 세계를 지킬 거야.”
“차해준!”
“걱정하지 말고.”
손안에 익숙한 검이 잡혔다. 백루찬을 보며 웃어 주곤 나는 진마하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자 진마하를 중심으로 돌고 있던 마력이 실체화되며 광선과도 같은 공격이 내게 쏘아졌다. 미친…! 사랑한다면서 아주 죽이려 하네.
멀리서 보이는 진마하는 이제 완전 정신을 놓아 버린 것 같았다. 몸부터 사라지고 있는데 제정신인 게 더 말이 안 된다.
나는 내게 쏘아지는 공격을 막아 내려 한야를 들어 올렸다. 그때 뒤에서 백루찬이 욕을 하며 전류로 그것을 막아섰다.
“진짜… 가만 안 둬…!”
오냐. 내가, 아니 우리가 살아서 돌아가면 네 투정 다 받아 줄게. 일단… 일단은.
나는 몸을 더 높이 띄웠다. 진마하가 눈앞에 보였다. 시퍼렇게 눈을 빛내며 부서지고 있는 진마하가.
진마하가 나를 본다. 나는 시선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스킬을 준비했다. 어둠을 물들이는 폭야.
그리고 진마하에게서 어마어마한 마력 폭풍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것을 삼킬 것처럼 어둠을 뿌리며 놈에게 몸을 날렸다.
[제한 시간: 00: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