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비무대회가 열리는 양주의 화양성까지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잠깐잠깐의 휴식 시간과 수면 시간을 제외하면 한시도 어검에서 내려오지 않는 강행군 끝에, 청하와 남궁휘를 포함한 일행들은 정확히 비무대회가 시작하기 하루 전에 화양성에 도착하게 되었다. 청하가 이렇게 빡빡한 강행군을 고집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는, 비무대회까지 남은 시간이 실제로 꽤 촉박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남궁휘의 애교 섞인 막무가내식 들이댐을 감당하는 것이 꽤나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남궁휘는 숙박을 위해 객잔에 들를 때마다 어떻게든 청하와 같은 방을 쓰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고, 틈이 날 때마다 청하에게 찰싹 달라붙어 한마디라도 더 말을 붙이기 위해 안달이었다. 뿐만 아니라,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저에게도 꼭 말해 달라는 깜찍한 신신당부까지 곁들였다.
남궁휘가 청하에게 들이대면 댈수록 점점 더 험악해지는 백진과 청연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아도 곤란한 심정의 청하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유일하게 긍정적인 점은, 남궁휘의 등장으로 인해 백진과 청연 사이에 약간의 휴전 비슷한 기류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랄까. 어쨌든 청하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여행을 끝내고 싶었다.
청하 일행이 화양성에 도착했을 때, 이 유서 깊은 무림맹의 본산은 이미 비무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중원 각지에서 모여든 강호인들로 인해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간신히 비무대회가 열릴 양회루에서 참가 등록까지 마쳤을 때는 이미 날이 거의 저물어 있었다. 남궁휘가 아쉽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작별을 고했다.
“정말로 저와 같이 가지 않으실 생각인가요, 선배님?”
“하하…… 남궁 세가에 폐를 끼칠 수는 없지. 청루각주가 되어서 별다른 연고도 없이 남궁 세가의 장원에 묵을 수는 없지 않겠어.”
“저는 그래도 상관없는데…… 정말 아쉽네요.”
남궁휘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청하를 향해 그윽한 눈길을 보냈다. 아니, 그러니까 너 같으면 지금 이런 상황에서 네 뒤를 쫄래쫄래 쫓아가겠냐고. 청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남궁휘의 등을 슬쩍 떠밀었다.
“그럼 다음에 만날 때까지 몸조심하도록. 건투를 빌겠다.”
“예에…… 분명 비무대회에서 마주칠 테니 작별 인사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기왕이면 결승에서 만났으면 좋겠네요.”
남궁휘가 그림처럼 예쁜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했다. 안타깝지만 결승에서 만나게 되진 않을걸. 청하는 속으로 그런 말을 삼키며 그저 얼른 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남궁휘는 아쉽다는 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어지러운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청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드디어 가는군요.”
마치 앓던 이가 빠졌다는 듯 속 시원한 말투였다. 옆에서 백진이 무언의 끄덕임으로 동의를 표시했다. 제갈서윤은 무어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도 요 며칠간 이어졌던 일행들 간의 기 싸움에 기가 질린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청하는 얼른 백진과 청연의 등을 반대편으로 밀어내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도 천성이 나쁜 애는 아닙니다……. 약간…… 성격이…… 조금 이상해서 그렇지……. 아무튼, 우리는 최대한 멀리 있는 숙소를 잡도록 하죠.”
청하와 일행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궁 세가의 별장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거리로 향했다. 이미 온갖 문파와 세가에서 온 비무대회 참가자들로 숙소가 꽉 차 있었기 때문에, 빈방을 구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결국 청하는 웬만한 문파나 세가에서도 쉽게 발걸음을 하기 힘든 화양성의 최고급 객잔에서, 그중에서도 가장 비싸다는 객실이 딱 두 개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청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말했다.
“남은 객실 전부 주게.”
이미 상당히 발품을 판 후였기 때문에 다른 일행들의 얼굴에도 다행이라는 빛이 떠올랐다. 정말로 객실을 구하지 못하면 여기까지 와서 노숙을 할 판이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남궁 세가를 방문하는 수도 있겠으나, 그들 중 누구도 그런 선택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청연이 노골적으로 큼큼,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끌었다. 청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자, 청연이 슬쩍 청하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럼…… 객실이 두 개밖에 없으니 각주님께선 저와 같은 방을 쓰시지요.”
그러자 즉각 백진이 반박하고 나섰다.
“스승님께선 이것저것 심부름할 사람이 필요하실 테니 제가 같은 객실에 묵겠습니다.”
“심부름은 나도 할 수 있다.”
“소각주님께선 스승님의 사형이시잖습니까. 아무래도 스승님께서도 제가 더 편하시겠지요.”
“대체 그렇게 싸우고 또 싸우냐? 지겹다 지겨워.”
청연과 백진의 팽팽한 눈빛이 마주치는 사이로, 제갈서윤이 지겹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미 지금까지 몇 차례나 반복된 광경이기에 청하도 서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대체 이깟 방이 뭐가 어떻다고 저러는 거야? 제갈서윤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청하는 나랑 같은 방을 쓰도록 하지.”
백진과 청연이 모두 말도 안 된다는 눈빛으로 제갈서윤을 노려보았다. 백진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외부인과 각주님을 같이 묵게 할 순 없습니다.”
청연도 질세라 말을 받았다.
“게다가 백진과 내가 같은 방을 쓰는 것도 여러모로 적절치 않은 듯하군.”
그리고 둘은 동시에 짜 맞추기라도 한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아주 그냥 저럴 때만 죽이 척척 맞지. 서윤이 황당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뭐가 어때서? 듣다 보니 진짜 너무하네! 나도 청하랑 같은 방 쓸 거야!”
“진짜 너까지 왜 그래?”
청하가 제갈서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핀잔을 주었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의 청연과 백진을 번갈아 보며, 청하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상황에서의 유일한 해결책인 마법의 말을 내뱉었다.
“둘이 번갈아 가면서 자, 번갈아 가면서!”
* * *
청하가 마침내 지친 몸으로 방 안에 놓인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 옆에서는 백진이 오랜만에 보는 만족스러운 강아지 같은 미소를 지은 채 얌전히 서 있었다.
무림맹의 본산이 있는 이곳 화양성에서도 가장 좋은 객잔의 가장 좋은 객실이었으니, 과연 청하가 앉아 있는 방도 요 며칠간 강호를 지나치며 묵었던 그저 그런 숙소와는 차원이 달랐다. 널찍하고 쾌적한 방 안에 놓인 두 개의 넓은 침상을 둘러보는 청하의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깃들었다.
그때, 승리감 어린 미소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백진이 청하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스승의 구겨진 옷자락을 정성스럽게 정리해 주었다. 왠지 그 모습이 약간 얄미워 보여, 청하는 저도 모르게 심술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이 그리 좋아 실실 웃고 있는 게냐?”
그러나 백진은 별로 주눅 들지도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야 스승님께서 저와 먼저 방을 쓰시겠다 하셨으니까요.”
“내일은 소각주가 대신 올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저를 먼저 선택하셨잖습니까.”
백진은 물러서지 않고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청하는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청하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백진의 얼굴은, 어떻게 보면 충성스러운 강아지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그 맹목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순종적이고 충성스러운 얼굴에, 청하는 충동적으로 백진의 머리 위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청하의 길쭉하고 우아한 손이 백진의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단정하고 수려한 얼굴에 약간의 놀라움이 어렸다. 청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것이 그리도 좋으냐.”
잠시 그 자리에 굳어 있던 백진이 손을 들어 올려 제 머리를 쓰다듬는 청하의 손을 천천히 붙잡았다. 청하의 손바닥에 조심스럽게 제 뺨을 갖다 대며, 백진이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예.”
백진의 입술이 천천히 청하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청하는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
문득, 손바닥에 무언가가 간질거리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따뜻하고 축축한 무언가가 간질이듯 손바닥 위를 스쳤다. 손이 절로 움찔거렸다.
“너…….”
청하가 기가 막혀 입을 열자 백진이 슬쩍 시선을 들어 올려 청하와 눈을 맞추었다. 순한 강아지처럼 부드럽게 처진 눈꼬리가 휘어지며 미소를 그렸다. 이게 진짜…… 웃기만 하면 다야? 청하의 입술 사이로 황당함이 섞인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백진은 왜 이렇게 나를 따르는 걸까? 청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사실 별로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좀…… 과한 것 같지 않나?
사실 청하를 마치 무슨 신처럼 떠받들고 우러르는 것은 비단 백진만이 아니다. 청하도 익히 겪었듯, 청루각의 다른 각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백진의 행동을 보면 단순히 스승에 대한 존경이나 충성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청하가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백진의 손아귀에서 재빨리 자신의 손을 빼내었다. 졸지에 손을 빼앗긴 백진이 사탕을 빼앗긴 아이 같은 표정이 되어 청하를 바라보았으나, 청하는 단호한 얼굴로 긴 소맷자락 안에 손을 감췄다. 그런 청하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백진이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문득 눈에 띄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싱글벙글하던 백진의 얼굴을 보며 약간 얄밉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또 막상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청하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청하는 우물쭈물거리다 결국 백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기 전에 우, 운기조식을 도와줬으면 좋겠구나.”
눈을 내리깔고 상심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백진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언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백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청하의 등 뒤로 바짝 다가들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스승님.”
느슨하게 옷깃을 벌린 웃옷을 등 아래로 끌어 내리며, 백진의 커다란 손이 청하의 맨살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가볍게 모아 쥔 백진이 청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자, 뜨거운 숨결이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와 닿았다. 부드러운 솜털이 올올히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청하는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 소리를 흘렸다. 뒤에서 백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아무래도 영 버릇을 잘못 들이고 있는 것 같은데. 제 몸으로 파고드는 백진의 영기를 느끼며, 청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비무대회 첫날, 아침부터 청하의 영기 공급을 도와주겠다고 백진과 청연이 한바탕 기 싸움을 벌였다.
비무대회가 치러지는 방식은 간단했다. 참가 등록을 한 순서에 따라 각자에게 번호가 부여되고, 그 번호들을 무작위로 뽑아 대전 상대를 정한다. 그리고 토너먼트 형식으로 각 대결의 승자가 한 단계씩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 때문에 첫날에는 가장 많은 경기가 치러지고, 일자가 지나갈수록 하루에 치러지는 시합의 숫자는 점점 적어진다. 하지만 시합에 임하는 사람들의 실력은 그만큼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참가자들이 싸움에서 부상을 입거나 피로를 회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때문에 대전 일정도 뒤로 갈수록 여유롭게 짜여져 있었다.
이 규칙은 청루각주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때문에 청하도 비무대회 첫날부터 대전 일정이 잡혀 있었다. 만일 오늘의 대결에서 전부 승리한다면, 아마 엄청난 이변이 없는 한 그렇게 되겠지만, 오늘 하루에만 총 다섯 번의 결투를 치르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백진과 청연은 아침 댓바람부터 침상 위에 단정히 앉아 있는 청하를 앞에 두고 서로를 못마땅하다는 듯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방도 제가 스승님과 같이 썼으니까요.”
“그러니 더더욱 이번에는 내가 도와줘야지. 간밤에 운기조식도 거들어 주느라 힘들었을 텐데.”
“전혀 힘들지 않았으니 염려 마십시오, 소각주님.”
결국 청하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두 사람을 향해 번갈아 말했다.
“어차피 첫날이니 그렇게 힘을 많이 뺄 것도 없습니다. 솔직히 한 명만 도와줘도 되는…… 그, 그냥 두 명 모두 도와주시지요.”
날카롭게 번뜩이는 두 사람의 눈빛을 보며 청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청하가 백진과 청연을 향해 손을 내밀자, 둘 모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청하를 향해 달려들었다.
청하는 양옆에서 제 목덜미를 향해 파고드는 두 사람의 입술에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그러나 백진과 청연은 묘한 경쟁심을 불태우며 청하의 맥박이 뛰는 곳을 찾아 각자의 입술을 붙여 왔다.
동시에 몸 안으로 흘러드는 서로 다른 영기의 기운에 청하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두 줄기의 영기가 빠르게 몸 안으로 파고들며 내공을 자극시키는 느낌에 청하는 정신이 없었다. 건장한 체격의 두 남자가 양쪽에서 청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자 몸이 버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 잠깐…….”
풀썩, 청하의 몸이 푹신한 침상 위로 쓰러졌다. 그러나 둘 모두 청하의 목덜미에서 입술을 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부드러운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던 청연이 침상에 눕혀진 청하의 명치 위, 단전 부근에 손을 올려놓았다. 청하는 제 배를 어루만지는 청연의 손길에 움찔 몸을 굳혔으나, 단전에 고여 있던 내공이 청연의 손짓에 따라 천천히 혈맥을 타고 돌기 시작하자 긴장했던 몸에서 서서히 힘이 풀렸다.
동시에 백진의 손이 청하의 손목 안쪽, 맥이 뛰는 부근을 천천히 매만지다가 소맷자락 안쪽을 파고들며 혈맥을 타고 청하의 팔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맨살을 쓸어 올리는 감각에 청하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그를 따라 시원한 영기가 몸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순식간에 온몸이 나른해졌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청하는 잔뜩 흐트러진 옷차림을 한 채 겨우 두 사람에게서 놓여날 수 있었다.
“이거 앞으로 매일매일 이래야 하는 거야?”
저도 모르게 질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청하의 혼잣말을 들은 청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좀 더 깊게, 더 오랫동안 하셔야 할 텐데요. 더 강한 상대들과 맞붙게 되실 테니까.”
청하는 생각만으로도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청하가 나른해진 몸을 간신히 일으키며 흐트러진 옷자락을 바로잡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비무대회만 끝나면 어떻게 어디 다른 곳으로 튀든가, 무슨 수를 쓰든가 해야지.’
청하가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비무대회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청루각의 백청하! 승리입니다!”
무림맹 측에서 나온 관계자가 대전 종료를 뜻하는 붉은 기를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청하의 앞에 있던 상대방은 이미 한참 전에 전의를 상실한 채 볼썽사납게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가 무기로 쓰고 있던 커다란 도가 단상에서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가장자리까지 데굴데굴 굴러가 있었다.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던 관중들 사이에서 감출 수 없는 경탄이 터져 나왔다.
휘날리는 푸른 영기에 따라 펄럭거리던 흰 옷자락이 나풀거리며 서서히 내려앉았다. 청하는 들어 올렸던 검을 천천히 아래로 늘어뜨리며 반쯤 내리깔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고 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은 청아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고아하고 아름다운 선인의 자태에 몇몇 사람들이 경외심 어린 한숨을 내뱉었다. 과연 온 강호에 명성이 드높은 바로 그 청루각주, ‘창천빙옥’ 백청하다운 모습이었다.
청하는 뭇사람들의 선망 어린 시선을 뒤로하고,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무심히 쓸어내리며 약간 높게 설치된 단상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청하가 아래쪽으로 내려오자 단상 곁에 구름같이 몰려들어 구경하던 사람들 사이로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 넓은 공간이 생겼다.
군중들은 청하를 향해 찬탄의 시선을 보내면서도 감히 가까이 다가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옅은 냉기가 서린 아름다운 미인의 얼굴에는 마치 주변 사람들을 밀어내는 것 같은 차갑고 어려운 분위기가 있었다. 청하는 들고 있던 창천검을 갈무리하며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 미친…… 방금 전에는 진짜 깜짝 놀랐다.’
아직도 긴장이 채 가시지 않은 청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청하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며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청하는 방금 막 오늘 예정되어 있었던 다섯 번의 대전을 모두 끝낸 참이었다. 물론 전부 시작하자마자 청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실 청하가 모든 대전을 그리 속전속결로 끝내 버린 것은 자신의 검술이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으나,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떤 인상을 남겼는지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청하는 거의 검과 검이 맞부딪히기도 전에 압도적인 영기의 힘으로 상대방을 날려 버리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던 청하의 다섯 번째 대전 상대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낸 것이 문제였다.
자신을 양주에 근거지를 둔 호산파의 일원이라고 소개한 젊은 남자는, 대전이 시작하기도 전에 청하를 향해 정중하게 두 손을 모아 공수를 하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온 강호에 명성이 자자하신 청루각주님과 경합을 벌이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앞서 보아하니 각주님께서는 단 일 합 만에 모든 대전을 끝내시던데, 혹여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부족한 후배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즉, 단합(單合)으로 대전을 끝내지 말고, 몇 번 더 합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뜻이었다. 청하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는 부탁이었다. 차라리 무례하거나 건방지게 굴었다면 간단히 무시해 버릴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나 정중한 말투와 공손한 몸짓으로 가르침을 청하니 또 무림 선배이자 청루각주로서의 사회적 체면이 있는 청하로서는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자신을 향해 존경이 뚝뚝 흘러넘치는 눈빛을 보내고 있는 백진 또래의 젊은 남자를 바라보며, 청하는 어쩔 수 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던 군중들은 벌써부터 기대감에 가득 찬 채 흥미진진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남자는 감격한 표정으로 거대한 도를 움켜쥔 채 청하의 앞에 섰다. 청하의 온몸에서 긴장이 흘러넘쳤다.
‘아 젠장…… 어떡하지? 이걸 어떻게……. 검술이라고는 하나도 모른다는 걸 들키면 어떡하지?’
그나마 청루각에는 무언가 문파를 대표할 만한 검법 같은 것이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갑자기 대뜸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청루각의 대표 검법인 XX 검법을 일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하면서 자신에게 매달린다면 그야말로 큰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같은 뜻밖의 상황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청하는 잔뜩 긴장한 채 손에 든 검을 들어 올리지도 못하고 자신 앞에 있는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장면을 구경하고 있는 다른 이들의 눈에는, 고고한 청루각주가 그토록 위명이 자자한 창천검을 비스듬히 내려뜨리고 여유롭게 상대방을 응시하고 있는 것으로만 보였다. 심지어 청루각주는 단정한 얼굴빛을 바꾸지도 않은 채 관대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먼저 공격하시게.”
과연 절정 고수의 품격.
후배에게 먼저 자신의 기량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감탄 가득한 흠모의 시선들이 순식간에 청하에게 달라붙었다. 청루각주가 차갑고 아름다운 얼굴만큼이나 그리도 냉정한 성격이라는 소문을 익히 들어 온 사람들은, 으레 강호에 떠도는 풍문이 그렇듯, 그의 외견만 보고 소문이 와전된 것이라 여겼다. 지금 그들의 눈으로 본 청루각주는 이름 없는 문파의 젊은 후배에게도 이토록 관대하고 친절하기까지 하지 않은가.
청하의 앞에 서 있는 청년 역시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도 감격한 표정이었다. 청루각주를 상대로 자신의 무공을 펼쳐 보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은 흔치 않다. 청년은 가슴 앞에 문파의 상징인 검은 도신을 곧추세우며 청하를 향해 신중히 발을 내딛었다.
“하앗!”
날카로운 기세가 허공을 가르며 흰 영기에 감싸인 도가 몸을 곧추세운 뱀처럼 빠르게 청하를 향해 쇄도했다. 노련하고 세련된 맛은 없어도 기본기가 탄탄하게 잡힌 묵직한 움직임이었다. 과연 대담하게도 청루각주에게 직접 가르침을 청할 정도로 본인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나이대치고 상당한 수준의 영기가 바람을 가르며 청하를 향해 휘몰아쳤다.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하며 수축했다.
그러나 뭇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청하는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그저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있던 검을 가슴 앞으로 치켜올리는 것만으로 간단하게 청년의 회심의 일격을 막아 내었다. 푸른빛이 도는 영기가 순식간에 불타오르듯 창천검의 검신을 휘감았고, 방금 전까지 청년의 영기가 휘몰아치던 곳의 공기를 찢어발기며 새파란 영기가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검과 도가 부딪히는 순간, 귀청이 떨어질 듯한 소리와 함께 푸른 불꽃이 터져 나왔다. 창천검에 실려 있던 청하의 영기가 제힘을 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넘쳐흐르며 강력한 후폭풍을 일으켰다. 안타깝게도 청년은 그만 일 합도 채 버티지 못하고 손에 쥐고 있던 도를 놓치며 볼썽사납게 바닥에 뒹굴 수밖에 없었다. 관중들 사이에 경악 섞인 정적이 내려앉았다.
‘헉…… 나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대전 종료를 선포하기 위해 허겁지겁 단상으로 뛰어올라 오는 무림맹 관계자를 바라보며, 청하는 내심 속으로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청년이 도를 들고 자신에게 짓쳐들어오자, 청하는 그만 각오했던 것보다 한층 더 당황하고 말았다. 자신은 그저 검을 휘두를 줄 모르니 먼저 공격하라고 말했을 뿐인데, 청년은 왠지 모르게 의욕이 백배하여 죽을힘을 다해 덤벼드는 것이 아닌가.
얼떨결에 내공을 실은 창천검을 들어 올려 그의 일격을 막아 냈으나, 그만 과도한 긴장으로 인해 검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영기를 불어넣었던 모양이었다.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요란스러운 결과에 청하는 당혹스러운 심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 또 단합으로 끝내게 되어 미안하군.”
청하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으나, 청년이 그 말을 들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는 자신을 덮친 영기의 충격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무슨 악당 최종 보스 같은 대사를 내뱉게 된 청하는 미안한 마음에 내심 어쩔 줄을 몰랐으나, 관중들 사이에서는 경탄 어린 탄식이 퍼져 나갔다.
청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약간 머쓱한 마음으로 단상을 내려왔다. 아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청연이 웃으며 청하를 맞았다.
“훌륭하십니다, 각주님.”
그의 시선에 깃들어 있는 자부심 어린 애정에 청하는 머쓱한 기분이 되어 그저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청연이 옷자락을 정리해 주려는 듯, 청하의 앞에 바싹 다가들어 다정한 손길로 옷깃을 매만졌다.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귀 뒤로 쓸어 넘겨 주는 청연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청하의 귓가와 목덜미를 매만졌다. 간지러운 느낌에 목을 움츠리는 청하를 향해, 청연의 입술이 조용히 달싹거렸다.
“이대로라면 네가 마교의 독에 당해 큰 타격을 입었다는 세간의 소문은 유야무야 가라앉을 것 같구나. 청루각의 명성도 예전과 다를 바 없을 듯하다.”
청하는 멈칫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지금까지 그 일은 머릿속에 떠올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참, 내가 이번 비무대회에 굳이 직접 참가한 목적이 그거였지. 제 앞가림하기만도 바쁜 청하로서는 지금 청루각의 명성 따위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딱히 제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오늘의 모든 대결을 단합으로 끝낸 것이 그의 시합을 관전하던 주변의 강호인들에게 상당한 인상을 남긴 듯싶었다.
청하는 재빨리 낯빛을 바꾸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보일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신경 쓴 보람이 있군요.”
천연덕스러운 말을 내뱉으며 청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은 비무장에 마련된 여러 개의 단상에서는 아직도 다른 사람들의 대전이 한창이었다. 청하가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백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까?”
청연은 별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지만, 결국 청하의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직이겠지. 너처럼 모든 대전을 단합으로 끝낸 이는 아무도 없을 테니, 다른 사람들의 경기가 끝나려면 아직 좀 시간이 걸릴 듯하구나. 아마 비무대회 역사를 통틀어도 너 같은 기록은 몇 번 없을 거야.”
다시금 청연이 자랑스럽다는 듯 싱긋,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을 향해 청하는 애매한 미소를 마주 지어 주었다. 검술을 못 한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면 앞으로도 최대한 단시간 내에 모든 대전을 끝내야 하는데, 계속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더 시끄러워지는 거 아냐?
어쨌든 지금 당장 그것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청하가 청연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백진의 경기를 보러 가시죠.”
청연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청하가 제 팔을 붙잡아 오는 것을 뿌리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청연은 못 이기는 척, 청하의 손에 이끌려 백진이 대전을 펼치는 단상 쪽으로 향했다.
백진은 날카로운 표정으로 제 앞에 선 대전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청하는 언제나 순하고 얌전한 표정의 백진이 그토록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평소 청연과 티격태격하거나 사형제들과 이런저런 마찰이 있을 때에도, 백진은 언제나 담담한 얼굴을 한 채 최소한의 예의를 잃지 않았다. 지난번 류재겸을 선두로 한 마교의 무리들이 쳐들어왔을 때를 제외하고, 청하는 백진이 이토록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팔짱을 낀 채 단상 아래에서 백진의 대전을 지켜보고 있던 제갈서윤을 향해 청하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서윤이 청하에게 힐끗 시선을 던지며 단상 쪽을 향해 가볍게 턱짓을 했다.
“저쪽에서 한바탕했지, 뭐.”
저쪽? 청하는 의아한 눈으로 단상을 돌아보았다. 백진의 앞에 서 있는 자는 덩치가 크고 체격이 탄탄한 사내였는데, 붉은빛의 도복을 입고 머리에는 약간 폭이 넓은 푸른색 띠를 두르고 있었다.
별다를 것 없는 그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던 청하의 시선이 사내가 이마에 두르고 있는 푸른 띠에 가 닿았다. 띠의 중앙에는 동그란 원 안에 도(桃) 자가 쓰여져 있었다. 청하의 머릿속에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쳤다.
‘저 사람 혹시……?’
청하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서윤이 혀를 쯧쯧 차며 말을 이었다.
“누가 도원맹 사람 아니랄까 봐 벌써부터 도발하는 게 예사롭지가 않던데. 네 제자 엄청 화났다.”
청루각주와 도원맹주가 마치 개와 원숭이처럼 으르렁거리는 사이라는 것은 온 강호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자연히 청루각과 도원맹의 사이도 극히 좋지 않았는데, 강호를 양분하는 두 거대 문파의 반목에 무림맹에서도 상당히 골치를 앓고 있었다.
‘이것 참, 갑자기 도원맹 사람들이랑 날을 세울 필요 없다고 말해 줄 수도 없고, 난감하군.’
원작의 백청하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의 청하로서는 도원맹주는 물론 도원맹 자체에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도원맹주에게는 상당한 호감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집단의 감정의 골이 이토록 뿌리 깊어진 지금에 와서, 갑자기 손에 손을 잡고 이제 우리 그만 친하게 지내자, 뭐 이런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청하가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묘한 기분에 휩싸여 있을 때, 도원맹의 띠를 머리에 두른 사내가 백진을 향해 비웃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네 스승이라는 자가 마교의 독에 당해서 빌빌거린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강아지처럼 그 뒤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니면서 스승 수발이나 들 것이지, 무엇 하러 비무대회에는 머리를 들이밀었지?”
……정정. 청하는 단숨에 생각을 바꿨다. 친하게 지내긴 개뿔, 그 건방진 자식한테 본때를 보여 줘라, 백진! 지면 가만 안 둬!
백진의 눈에서 순간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백진의 몸에서 단숨에 사나운 영기가 봇물 터지듯 솟아올랐다. 언제나 예의 바르게 영기를 갈무리하며 절대 남들 앞에서 함부로 제 기운을 드러내지 않는 백진이, 그토록 노골적으로 공격적인 영기를 일으키는 것은 청하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백진이 뿜어내는 날카로운 영기가 순식간에 주변을 압도적으로 점령해 갔다.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백진을 도발하고 있던 맞은편 사내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어렸다.
백진이 자신의 영검인 청수검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어디까지 하나 보려고 놔뒀는데, 더 이상은 안 되겠군요. 스승님에 대한 모욕은 이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봐 드리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리고 백진은 두 번 다시 경고하는 것도 없이 그대로 검을 앞으로 내뻗으며 사내를 향해 돌진했다. 동시에 온 사방을 꽉 채우고 있던 백진의 영기도 사내를 향해 사나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사내는 살짝 당황한 빛을 보이면서도 침착하게 검을 들어 올려 백진의 공세를 막아 내었다. 그러나 쩡, 하는 소리와 함께 검과 검이 부딪히자, 사내는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중심을 흐트러뜨렸다. 백진은 조금도 봐주는 기색 없이 그 틈을 타 매섭게 검을 휘두르며 사내를 압박해 갔다.
사내는 허겁지겁 제게 향하는 칼끝을 막아 내느라 바빴으나 누가 보더라도 실력의 우위는 명백했다. 도원맹에서도 고르고 골라 출전시킨 맹원인 만큼, 사내의 실력도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했다. 청하는 아슬아슬하게나마 백진의 공격을 몇 번이나 받아넘기는 사내의 움직임을 보며, 그 역시 후기지수 중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실력자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런 자도 정말 진심으로 달려드는 백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백진이 검을 쓰는 것을 이렇게 제대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백진의 실력이 보통이 아닌 줄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청하는 문득 백진의 무공이 후기지수 중 단연 최고로 평가받는 이 원작 소설의 주인공, 남궁휘와 비교해서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녀석…… 잘하는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도 더 고수였잖아? 평소에는 엄청 얌전하고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는 타입이라 잘 몰랐는데…….’
청하는 속으로 감탄하며 백진의 검이 신들린 듯 종횡무진으로 사내를 압박하는 것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몇 번의 합이 더 오갔으나, 백진의 일방적인 공세를 사내가 가까스로 받아 내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의 예상대로 사내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백진의 공격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저 멀리 튕겨 나갔다.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둘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무림맹원이 황급히 붉은 기를 들어 올렸다.
“종료! 종료! 청루각의 사백진, 승리!”
그러나 백진은 검을 멈추는 대신 가쁜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사내의 목에 제 검을 바짝 가져다 대었다. 사내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관중들 사이로 술렁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백진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하십시오.”
“무, 무슨…….”
“제 스승님을 모욕한 점, 사과하십시오.”
사내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않자, 백진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지며 사내의 목젖에 닿아 있는 칼끝이 조금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대, 대협…… 진정하시지요.”
두 사람의 대결을 주재하던 무림맹원이 불안한 눈빛으로 백진을 바라보며 어떻게든 그를 말리려 하였지만, 백진은 한 치도 물러나는 기색이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하는 결국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그만하거라, 백진.”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청하의 목소리가 단상 위로 울려 퍼지자, 순간 뭇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청하에게로 쏠렸다. 이쪽을 힐끔 바라본 사내 역시 청하의 서늘한 얼굴을 마주하자, 그가 누구인지 눈치챈 듯했다.
사내의 얼굴에서 빠르게 핏기가 사라졌다. 뚫어질 듯 사내를 노려보고 있던 백진의 눈빛도 청하의 목소리를 듣자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백진은 사내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스승님……!”
“네가 이겨 내 체면을 세워 주었으니, 그만하면 되었다.”
청하의 담담한 목소리에 백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감히 스승의 명을 거역할 수도 없어, 백진은 결국 치켜들었던 검날을 서서히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사내가 비로소 헐떡이는 숨을 내뱉으며 허겁지겁 서늘해진 목덜미를 감쌌다. 백진은 그런 그를 향해 싸늘한 일별을 던지고는 휙 몸을 돌려 단상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스승님,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백진이 언제 그런 싸늘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강아지 같은 눈매를 늘어뜨리며 청하를 향해 약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청하가 막 입을 열려는데, 제갈서윤이 먼저 불쑥 선수를 쳤다.
“저 녀석이 마교의 독 운운할 때부터 있었지. 너무 봐준 것 같은데, 좀 더 때려 주지 그랬느냐.”
웬만해서는 이런 일에 잘 끼어드는 법이 없는 서윤마저 저런 말을 할 정도면, 저 도원맹원이 그에게도 꽤나 밉보인 것이 분명했다.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청연이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도 보는 앞에서 감히 각주님에 대해 저런 말을 지껄이다니, 비무대회 중이 아니었다면 목숨을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저자가 운이 좋았군.”
살벌한 말이 오가는 가운데, 청하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만하면 되었습니다. 그보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청하가 백진의 몸을 살피듯 훑어보았다. 잠시 침묵하던 백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백진이 청하의 안색을 살폈다.
“스승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응? 무엇이?”
청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백진을 올려다보았다. 백진이 머뭇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 그 녀석이 무어라 한 말 때문에 그러는 건가? 그야 맨 처음 들었을 때는 좀 화가 났지만, 어차피 백진이 찍소리도 못 하게 눌러 줬잖아? 청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백진을 바라보았으나, 백진은 제가 더 상처받고 자존심 상한 얼굴이 되어 청하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스승님께서 저딴 소리를 듣게 되시기 전에 제가 진작 처리했어야 했는데.”
침울해진 백진의 얼굴을 보자 청하는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조금 불편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청하는 흐트러진 소맷자락을 매만지며 천천히 말했다.
“글쎄, 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만…… 좀 교훈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청하의 시선이 이제 막 단상 아래로 어기적거리며 내려오고 있는 도원맹원에게로 향했다. 청하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그가 자신에 대해 건방진 소리를 했다는 사실보다도, 그 때문에 백진이 이토록 의기소침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청하는 소맷자락을 떨치며 단상 아래로 내려선 사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백진을 물론이고 청연과 서윤도 그런 청하의 뒤를 따랐고, 웅성거리며 막 해산하려던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하여 이쪽을 기웃거렸다.
청하가 사내의 앞에 멈춰 서자, 막 이쪽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던 사내의 얼굴빛이 다시금 새파랗게 질렸다. 청하는 무심한 눈길로 사내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듣자 하니, 내가 요즘 그, 뭐라 했더라…… 빌빌거리고 있다고?”
사내가 질린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내는 손까지 휘저어 가며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그, 그것이…… 아, 아니, 제가……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청루각주님. 그, 그것이 아니라…….”
그러나 청하는 온화하게 웃으며 한 손을 들어 사내의 어깨 위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청하가 사내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아직도 그리 생각하나?”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친근한 행동처럼 보였으나, 청하가 사내의 어깨를 한 번 토닥일 때마다 내공을 실은 손바닥이 사내의 어깨를 사정없이 내려치고 있었다. 사내는 황급히 영기를 끌어 올려 몸을 보호했으나, 저를 후려치는 청하의 영기를 막아 내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으헉……!”
사내의 입에서 절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르긴 몰라도 청하의 영기가 그의 속을 상당히 진탕시켜 놓았음이 분명했다. 사내가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청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실언하였습니다, 청루각주님.”
청하도 그쯤에서 손을 떼고는 사내를 향해 빙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디에서나 말조심하는 것을 잊지 마시게. 비무대회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야. 앞으로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도록 하게.”
“예, 예에……. 물론입니다…….”
사내는 몇 번이고 청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청하는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제 옆에 서 있는 백진을 올려다보는 청하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어떠냐고 묻는 듯한 청하의 표정에 백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백진이 옅은 갈색 눈동자에 묻어난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역시 스승님이십니다.”
존경과 애정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청하도 슬쩍 미소 지었다. 청연이 아직도 불만족스럽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정도로 봐주다니…… 나 같으면…….”
제갈서윤이 피식거리며 청연을 향해 말했다.
“어차피 도원맹주의 귀에도 곧 소식이 들어갈 테니, 잘하면 한바탕 소란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아, 그런가. 청하는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오늘 일이 도원맹주의 귀에 들어갈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맹원이 청루각주에게 호되게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서로를 무슨 원수 보듯 하고 있는 두 사람의 관계상, 씩씩거리며 청하에게 항의하러 올지도 모를 일이다. 청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때, 저쪽에서부터 인파를 뚫고 웃음기를 머금은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계셨군요.”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긴 머리를 하나로 높게 올려 묶고 맵시 있는 남색 옷을 차려입은 남궁휘가 예쁜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여자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붉은 입술이 매력적인 호선을 그렸다. 청하는 저를 향해 눈꼬리를 휘며 미소 짓는 남궁휘의 얼굴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약간 주춤거렸다.
아니…… 비무대회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너무 이른 재회 아닌가? 원래 원작에서 백청하와 남궁휘가 비무대회에서 마주치게 되는 것은 지금보다도 한참 더 나중이었다. 그러나 남궁휘는 마치 이렇게 될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청하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파죽지세의 청루각주님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벌써 온 양회루가 선배님에 대한 이야기로 들썩이던데요.”
“하하…… 좀 전에야 막 마지막 대결이 끝났는데, 소문이 참 빠르기도 하지. 사람들이 참 과장하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야.”
그러나 남궁휘는 어색한 표정의 청하를 향해 선망과 흠모로 반짝이는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남궁휘가 살짝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금 전 대결도 흥미롭게 잘 보았습니다. 준비는 다 끝나셨는지요?”
“준비라니?”
청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남궁휘의 마지막 말은 그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남궁휘는 백진을 돌아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분명 그림처럼 아름다운 미소였으나, 청하는 남궁휘의 미소 속에서 알 수 없는 견제와 함께 미처 감추지 못한 호승심을 읽을 수 있었다. 남궁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 소협, 다음 상대는 저입니다.”
백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히는 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꽃이 튀어 올랐다. 남궁휘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금 전 소협의 무공이 상당히 인상적이긴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이번엔 제가 이길 것 같군요.”
백진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불쾌한 듯 꿈틀거렸다. 즉시 서늘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그야 결과를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지요, 남궁 공자. 검을 맞대 보지도 않고 판단이 성급하시군요.”
그러더니 갑자기 두 사람이 동시에 청하 쪽을 돌아보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까, 선배님? 선배님이 보시기엔 누가 이길 것 같으신가요?”
“스승님, 스승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청하는 난감한 표정을 한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니…… 하필 또 남궁휘와 백진이 붙게 될 건 뭐지.
그야 청하는 결과를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 비무대회에 할애된 분량만 해도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 남궁휘는 당연히 이런 곳에서 조연 중의 조연인 백진에게 패배해 퇴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에게 퇴장이란 단어는 절대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리고 실제 남궁휘가 진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더욱 큰일이었다. 원작의 흐름이 어긋나게 된다면 당장에 주인공과 주인수가 만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청하 그 자신의 안녕과 이 무림의 미래에는 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
“예? 선배님?”
“스승님?”
그러니까, 그런 얘기를 대체 어떻게 하냐고! 그리고 얘네들은 왜 나한테 자꾸 이런 걸 물어보는 거야?! 물어보지 마! 너네들끼리 알아서 해결해!
청하의 시선이 아득히 먼 곳을 더듬고, 입술 사이로는 고뇌에 찬 한숨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하아아아…….”
“정말 괜찮겠느냐?”
“예, 괜찮습니다.”
백진은 담담하게 대답했으나 청하는 불안한 시선으로 백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바깥에서는 웅성거리는 관중들의 기대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기자들을 위해 마련된 간이 막사의 바닥에 앉아 운기조식을 하고 있던 백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옷자락을 정리했다. 문득 저를 바라보고 있던 청하와 눈이 마주친 백진은, 오히려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스승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청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남궁휘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고집을 부려?”
백진은 대답 없이 그저 미소만을 지었다. 청하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도 이기기 어려운 상대인데…….”
“제가 남궁 공자에게 질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스승님?”
“아, 아니…… 꼭 그렇다기보다는…….”
청하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백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제 실력의 문제겠지요. 더 정진하겠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 정진을 하라는 거잖아, 지금……. 청하는 답답함에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오늘은 백진과 남궁휘의 대결이 예정된 날이었다. 며칠 동안이나 진행된 대전으로 인해 이제 남아 있는 참가자들의 숫자는 확연히 줄어 있었다. 청하는 첫날 다섯 번의 대전을 치른 뒤 그 이후로 두어 번의 대전을 더 치른 상태였다. 물론 전부 청하의 승리로 끝났음은 당연하다.
반면, 약간 순서가 밀린 백진은 역시 첫날에 치른 다섯 번의 대전 이후 오늘 처음으로 다음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곳에서, 백진은 남궁휘와 결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청하는 이번 대결에서 남궁휘가 이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대로 백진의 시합에 관해 손을 놓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자신은 그의 스승이 아닌가? 그리고 그는 청루각의 일원이기도 했다. 청루각주의 수석 제자가 남궁 세가의 후계자에게 너무 볼품없이 패배하기라도 한다면, 청루각과 백청하 자신의 명성에도 영향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청하만은 아닌 듯, 시종일관 백진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청연조차 어젯밤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수련한 지 좀 되었겠군. 내가 도와줄 수 있으니 필요하면 말해라.”
그러나 백진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청연의 제안을 거절했다.
“감사합니다만 저는 괜찮습니다, 소각주님.”
청하는 청연이 말한 ‘도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청루각의 ‘수련’이란 것은 모두가 익히 다 알고 있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수위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 남자와 남자 간의 접촉과 교합으로 내공을 쌓고 영기를 단련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진은 담담하지만 단호한 얼굴로 청연의 제안을 거절했다. 청연은 두 번 다시 묻지 않았지만, 청하는 못내 그것이 신경 쓰였다. 이제 남궁휘와의 대결이 몇 시간도 남지 않은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청하는 대기실로 마련된 막사에서 운기조식을 끝내고 이제 검을 손질하고 있는 백진을 향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혹 소각주가 불편해서 그러는 건가? 소각주가 네게 퍽 살갑게 대해 주는 성격은 아니다만, 수련은 수련이니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밖에 있는 소각주를 데려오면…….”
“아닙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백진이 끝내 고개를 젓자 청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러니까 대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냐고…….
청루각의 청해심법이 조금 숭한 면이 있긴 해도, 어쨌든 그것은 강호 제일 문파인 청루각의 대표적인 심법이었다. 효과도 확실할 뿐만 아니라,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청연도 백진을 썩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백진을 도와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그런 제안을 한 것이다. 그러니 청연이 수련에 도움을 주겠다고 하면, 백진으로서는 냉큼 받아들이는 것이 좋았다.
청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어째서 굳이 소각주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냐?”
백진이 청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던 백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서는 아무하고나 그런 것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잖습니까.”
“그…… 그랬지.”
청하는 속으로 뜨끔하며 대답했다. 백진이 그를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청하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거렸다. 그런…… 그런 것치고 나랑은 뭔가를 엄청 많이 하지 않았나? 결국 청하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까지 나와 한 것들은 뭐지?”
“그건 스승님이셨잖습니까.”
백진이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태연히 대답했다. 청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라서…… 괜찮았다고? 나는…… 아무나가 아니니까……? 아니, 뭐 내가 스승이니 따져 보면 맞는 말이긴 한데…….
한데 꼭 그것만이 다는 아닌 것 같은 미묘한 기분에 청하는 입을 다물었다. 문득 청하는 제갈서윤이 원래의 백청하가 수련 과정에 감정을 개입시키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던 청하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내가 도와주면 어떻겠느냐?”
“예?”
백진이 약간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청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 남궁휘가 이기게 된다고 해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그래야 지게 된다고 해도 후회가 없을 터였다.
청하가 다시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도와주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지금까지 너도 몇 번이나 나를 도와주었으니, 나도…… 어느 정도는…… 네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한데.”
사실 이것은 청하의 마지막 양심에 가까웠다. 어쨌든 명색이 스승이 되어서, 뻔히 질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제자를 시합에 내보내는 것이 조금 찔렸던 탓이다. 하지만 청하는 모른 척, 뻔뻔하게 고개를 들어 올려 백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진은 청하와는 달리 영기를 전달받는다고 당장 엄청나게 내공이 상승한다거나 무공이 강해지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그 청루각주와 영기를 교환하는 것이다. 청해심법을 잘 활용한다면 당장 있을 남궁휘와의 대결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엄청 대단한 것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백진이 했던 것처럼 입을 맞추거나 혈맥을 통해 영기를 교환하는 정도는 청하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장 그러겠노라 대답할 줄 알았던 백진이 뜻밖에도 대답을 망설이고 있었다. 청하는 백진의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에 갈등의 빛이 어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뭐, 정말로?”
“예.”
백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째서?”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며, 청하는 어째 그와 백진의 역할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백진이 애써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스승님께서 저 때문에 억지로 원하지 않는 일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 말을 하며 백진은 청하의 표정을 살피듯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청하는 눈을 끔뻑이며 백진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딱히…… 억지로 하려는 것은 아닌데…….”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스승님. 스승님께서는 그렇지 않아도 저와 닿는 것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잖아요. 저는 스승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번 대결에서 진다고 해도 제가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수련하겠습니다.”
조심스러운 것을 넘어서서 약간 소심하게까지 느껴지는 말이었다. 아니, 얘가 또 저런 소리를 하네.
청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 나는 너와 닿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는단다. 그리고 방금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고 한 것도 억지로 한 말이 아니었어. 입맞춤 정도는 해 줄 수 있으니,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백진은 놀란 표정으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청하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것이라고는 전혀 손톱만큼도 생각해 보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내가 이 세계에서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서 쫓아냈던 게 그렇게 인상적이었나? 그래서 백진이 이렇게 항상 내 눈치를 보는 걸까? 청하가 설핏, 미소를 지으며 백진을 향해 손짓했다.
“이리 오거라.”
백진이 마치 나무토막으로 만든 인형처럼 뻣뻣한 걸음걸이로 청하를 향해 다가왔다. 청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백진의 뺨을 두 손으로 가볍게 붙잡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청하는 백진의 얼굴을 조금 더 아래로 끌어 내리며 제 고개를 더욱 위로 치켜들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좀 더 깊게 서로를 향해 파고들었다. 자연스럽게 입술이 벌어지고, 젖은 살과 살이 맞닿는 소리가 조용한 막사 안에 울려 퍼졌다.
남에게 영기를 받기만 해 보았지, 이렇게 제 영기를 나눠 주는 것은 청하로서도 처음이었다. 사실 일방적으로 나눠 준다기보단 백진과 영기를 주고받는 것에 더 가까웠다. 청하는 머뭇머뭇 제 혀를 백진의 것과 얽으며 조심스럽게 제 영기를 백진에게로 밀어 넣었다. 동시에 백진 특유의 시원한 영기가 제 안으로 파고 들어오자, 청하는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백진의 뺨을 감싸 쥔 청하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고, 허공에서 머뭇거리던 백진의 손이 청하의 등과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백진의 손이 청하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청하는 무언가 뜨거운 것이 제 아랫배를 간질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했던 키스였지만 오늘은 무언가가 달랐다.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주기 위해 하는 입맞춤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한참이나 혀와 함께 영기를 섞으며 서로의 입 안을 탐색하던 청하와 백진은 거의 시합이 시작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간신히 입술을 떼어 내었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청하의 입가로 흘러내렸다. 백진이 약간 짙어진 갈색 눈동자로 번들거리는 청하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스승님…….”
백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청하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눈을 반쯤 내리깐 채 잠시 멍한 기분으로 호흡을 고르고 있던 청하의 시선이 천천히 백진에게로 가 닿았다. 언제나 얌전하게 가라앉아 있던 백진의 옅은 갈색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 억눌린 불꽃 같은 것이 일렁거렸다.
잠시 뒤, 백진이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스승님께서는…… 정말 관대해지셨군요. 예전 같으면 정말 상상도 못 했을 텐데.”
살짝 짙어진 백진의 눈동자가 아득해졌다. 청하는 백진이 그가 알지 못하는 저 먼 과거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진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하지만…… 하지만, 저는 언제나.”
백진의 입술이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달싹거렸다. 언제나…….
묘한 느낌이 들었다. 청하는 백진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문득 제가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좀 부적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진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자신인지, 그렇지 않으면 원작의 백청하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말할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백진은 결국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을 하는 대신 입술을 꾹 다문 채, 백진의 손가락이 타액에 젖어 있는 청하의 아랫입술을 가만히 내리눌렀다. 마침내 백진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응원해 주세요, 스승님.”
눈을 깜빡이던 청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하의 입술이 어색하게 미소를 그렸다.
“건투를 빈다.”
“종료! 종료되었습니다. 승자는 남궁 세가의 남궁휘!”
붉은 기가 펄럭이며 무림맹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시합을 관전하던 군중들의 한편에서 와아, 하는 환성이 터져 나왔다. 남궁 세가에서 온 가솔들인 듯했다. 남궁휘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저를 향해 환호하는 사람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승리감에 반짝이는 남궁휘의 눈동자가 제 가솔들을 휙, 지나쳐 군중 속에 있을 한 남자를 찾아 헤맸다.
‘보셨겠지? 선배님도…… 분명 내 실력을 보고 감탄하고 계시겠지?’
남궁휘는 확신에 가득 찬 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군중 사이에서 단숨에 그가 찾던 아름다운 사람을 발견한 남궁휘는, 상황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남궁휘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청하는 남궁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승자가 아닌 패자에게 못 박혀 있었다. 남궁휘는 청하의 아름답고 차가운 얼굴에 떠오른 무표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에 남궁휘는 청하가 약간 화가 난 것이라 생각했다. 그야 제 수석 제자가 다른 가문의 사람에게 패배했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하의 얼굴에 어려 있는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남궁휘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으나 청하의 시선은 끝내 그를 향하지 않았다.
남궁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백진은 청수검의 끝을 바닥에 박아 넣은 채 간신히 검에 의지하고 있었다. 대전 상대로서 평가하자면, 그는 분명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상대였다. 깜짝 놀랄 정도의 재능과 끈기, 그리고 대단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에 비하면 아직 조금 부족하긴 했으나,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껍질을 깨고 나온다면, 이 다음번엔 분명 자신도 쉽게 대적하기 힘든 상대가 되리라.
남궁휘는 다시 청하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청하는 아직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백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제자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저 패자를 향한 연민? 아쉬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지 않다는 것, 그 자체가 문제였다. 남궁휘의 가슴속에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어떤 감정이 꿈틀거렸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남궁휘에게 부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가문은 강호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세가 중의 세가였고, 그 자신의 미모와 무공마저 온 강호에 견줄 자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보자마자 즉시 사랑에 빠졌고, 그렇지 않던 사람조차 남궁휘가 그림 같은 미소를 몇 번 지어 주기만 하면 곧바로 빗장을 풀고 함락당하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남궁휘는 한 번도 이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감정. 이렇게……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불안하고 무력한 감정.
질투 같은.
* * *
“방금 청루각주가 검을 놓친 거야?”
“말도 안 돼…….”
“그렇게 밀리는 기색도 아니지 않았어?”
“순간적으로 손에서 검이 미끄러진 건가?”
“그게 말이 돼? 저 정도의 고수가…….”
“설마…… 이렇게 끝인 건가? 에이, 아니겠지.”
“하지만 규칙상…….”
관중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단상 위에까지 들려왔다. 청하는 굳은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남궁휘의 앞에 빈손을 들어 올려 보았다.
“이런, 검을 놓쳤군.”
“…….”
“승리 축하하네, 남궁 공자.”
그러나 남궁휘의 굳은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대전을 주관하는 무림맹원도 대전 종료를 선언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남궁휘의 입술이 마침내 움직였다.
“지금 무슨 짓인가요, 선배님?”
“무슨 짓이냐니?”
“왜 방금…… 일부러 검을 놓치신 거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청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앞에서 남궁휘가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청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남궁휘는 여기서 반드시 그를 이겨야 한다. 그것이 청하가 따라야 하는 원작의 스토리였다.
지금은 비무대회의 준결승이 한창이었다. 백진을 꺾고 승리한 남궁휘는 그 뒤로도 몇 번의 대전을 거쳐 무난하게 준결승에 진출했다. 마찬가지로 줄줄이 이어지는 대전에서 승리를 따낸 청하 역시 준결승에서 바로 그 남궁휘와 맞부딪히게 되었다.
‘원작에서 백청하와 남궁휘가 처음 마주치는 장면이 바로 이 비무대회의 준결승이었지. 그리고 남궁휘는 여기서 누구나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청루각주 백청하를 꺾는 이변을 보이고…….’
그리고 결승에 올라간 남궁휘는 도원맹주 하유신과 대결하게 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스토리만큼은 절대 바뀌어서는 안 되었다. 남궁휘가 결승전에 진출해야만 그곳에서 마교주 주세민과 마주칠 수 있기 때문에.
그러나 청하는 원작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도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궁휘는 분명 후기지수 중 첫손가락에 꼽히는 실력자였고, 청루각주의 수석 제자인 백진도 무너뜨릴 정도의 고수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청하가 당해 내지 못할 정도의 상대는 또 결코 아니었다.
원작에서는 마교의 독에 당했던 백청하의 몸이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았기에 남궁휘가 아슬아슬하게 그를 이길 수 있었다는 묘사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청하는 지난번 청연의 도움 덕분에 몸이 거진 완벽하게 회복되었고,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남궁휘가 그를 이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청하는 반드시 남궁휘를 이기게 만들어야 했다. 때문에 청하는 어쩔 수 없이 기회를 보아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한 듯 검을 놓아 버린 것이다. 다만, 청하는 남궁휘가 이토록 정색을 하고 그를 추궁해 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우물쭈물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던 무림맹원이 앞으로 나서며 붉은 기를 들어 올리려 하였으나, 남궁휘는 먼저 재빨리 제 손에 든 검을 바닥에 팽개쳐 버렸다.
“무슨……!”
청하의 눈동자가 커졌다. 주변에서도 경악에 찬 수군거림이 퍼져 나갔다. 남궁휘는 청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님께서 그런 식으로 제게 져 주시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이미 지난번 양산의 변고 때 선배님의 무공 수위를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그리 일부러 검을 놓아 버리시는 것을 제가 눈치채지 못할 줄 아셨습니까.”
“아니, 나는…….”
그러나 남궁휘는 청하의 변명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무림맹원을 돌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와 선배님 둘 모두가 검을 놓쳤으니 다시 시작해야 할 듯합니다. 그만 내려가십시오.”
그렇게까지 나오니 무림맹 관계자도 어쩔 수 없이 다시금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청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남궁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가 아까 전에 드린 말씀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그…… 뭐? 아, 아니, 그런 것은 아니다.”
청하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궁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일부러 제게 져 주려 하시는 거죠?”
남궁휘가 입술을 깨물며 떨어뜨렸던 검을 주워 들었다.
“저를 동정하시는 거라면 필요 없어요. 정정당당하게 선배님을 이겨 보이겠습니다!”
청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대체 이게 말이 왜 그렇게 되는 거야?
방금, 준결승전이 시작하기 직전에 청하가 대기하고 있던 간이 막사에는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 있었다. 남궁휘는 청하의 막사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거리끼는 기색도 없이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다른 분들은 다들 관중석으로 가셨습니까?]
청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과의 대결이 있던 날 이후 처음으로 보는 남궁휘였다. 비무대회가 이어지는 내내 한 번 청하를 찾아올 법하면서도, 남궁휘는 백진과의 시합 이후 한 번도 청하를 찾아오지 않았다. 청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조금 있으면 경기가 시작될 텐데, 무슨 일이냐?]
남궁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문득 선배님, 하고 그를 불렀다. 남궁휘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비단결같이 부드러웠으나, 청하는 그의 목소리에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무언가가 깔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같이 여행하는 동안에는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불쑥 남궁휘가 청하의 앞으로 바싹 가까이 다가들었다.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들어 저를 빤히 바라보는 남궁휘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고 있으려니, 남궁휘가 초조한 듯한 목소리로 빠르게 입을 열었다.
[만약…… 만약, 이번 대결에서 제가 선배님을 이긴다면…… 그러면, 그때는 저를 봐 주실 건가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청하는 남궁휘의 말을 잘 따라갈 수가 없어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남궁휘는 입술을 깨물며 약간 고개를 숙였다. 어딘가 모르게 처연해 보이는 그 얼굴에, 청하는 영문도 모르고 그저 당혹스러운 심정이 되었다. 남궁휘가 속삭이듯 말했다.
[제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분은 선배님이 처음이에요.]
[응……? 그게 무슨…….]
[제가 이번에 선배님을 이기게 되면, 그때는…… 그때는, 저도 봐 주세요, 선배님. 네?]
청하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봐 달라니, 마치 내가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잖아? 남궁휘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청하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이번 대결은 남궁휘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청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경기가 끝나고 다시 얘기해 보자꾸나.]
네 소원대로 이기게 될 테니까. 청하가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남궁휘는 그저 예쁘게 미소 지었다.
[예, 선배님.]
그것이 바로 조금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남궁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굳은 얼굴을 한 채 청하의 앞에 서 있었다. 언제나 저를 향해 생글거리며 예쁜 미소만 짓던 남궁휘가 이토록 딱딱한 얼굴을 하는 것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청하는 이번에는 확실히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내가 저 녀석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인데……. 청하는 신음을 삼키며 다시금 창천검을 들어 올렸다.
남궁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또 선배님께서 저를 봐주려고 하시는 게 느껴지면, 저는 당장 항복 선언을 할 겁니다. 진지하게 상대해 주세요.”
청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올 건 없지 않아? 이 녀석아, 이게 다 널 생각해서 하는 일이라고……! 물론 나 자신의 안녕과…… 그리고 또 무림의 미래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청하가 미처 생각을 이어 가기도 전에, 남궁휘가 하앗, 하는 기합 소리를 내며 청하 앞으로 빠르게 짓쳐들어왔다. 청하는 이제 제법 익숙해진 동작으로 영기를 실은 창천검을 들어 올려 남궁휘의 공격을 막아 냈다. 부딪히는 순간 일부러 검에 불어넣었던 영기를 살짝 흐트려 보았으나, 단숨에 남궁휘의 눈꼬리가 샐쭉해지는 것을 보고 청하는 뜨끔한 심정이 되었다. 남궁휘가 경고하듯 말했다.
“선배님.”
으…… 알았다, 알았다고! 진짜 귀신 같네. 역시 양산에서 같이 다니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일이 아직도 제 발목을 잡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한 청하는 난처한 심정이 되었다. 남궁휘는 날카로운 공세를 이어 가면서도, 청하가 조금이라도 손속을 늦추려 할라치면 자신도 마찬가지로 검을 멈춘 채 청하를 노려보았다.
“자꾸 이러시면 저 정말 항복 선언 할 거예요.”
남궁휘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청하도 어쩔 수 없이 들고 있는 검을 고쳐 잡았다. 그가 항복해 버리면 지금까지 이 고생을 하며 비무대회에 참가한 의의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청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단상 아래에 있는 관중들을 힐끗 돌아보았다.
아는 얼굴들이라 그런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또렷이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청하를 응원하고 있는 제갈서윤과 팔짱을 낀 채 진지하게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진청연의 지적인 눈매가 보였고, 그 옆에서는 뚫어질 듯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백진도 있었다. 그래, 저들까지 줄줄이 달고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일을 그르치면 안 되지.
그때, 앞에 있던 남궁휘를 이를 악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게 집중해 주십시오, 선배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폭풍 같은 검격이 청하를 향해 휘몰아쳤다. 수천 개로 쪼개진 것 같은 날카로운 검 끝이 하나하나마다 가공할 만한 영력을 품고 청하를 향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남궁 세가의 비기, 만천검무(滿天劍舞)였다.
청하는 당황 속에서 허겁지겁 창천검을 들어 올려 제게 쏟아지는 검무를 막아 내었다. 동시에, 청하의 온몸에서 본능적으로 폭발하듯 영기가 치솟아 올랐다.
쿠콰콰콰쾅!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굉음이 넓은 양회루 안을 뒤흔들었다. 관중석까지 덮친 영기의 파동에, 구름같이 몰려들어 구경하던 인파들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허우적대며 바닥에 쓰러졌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간신히 정신을 차린 무림맹원은 단상 위를 올려다보며 침음을 삼켰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무림맹원은, 붉은 기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준결승전 종료! 청루각의 백청하, 승리!”
청하는 얼떨떨한 얼굴로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남궁휘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며칠 전의 백진처럼, 남궁휘는 한쪽 무릎을 꿇고 비류검의 끝을 바닥에 박아 넣은 채 간신히 검에 의지하고 있었다. 남궁휘의 입술 끝이 피식, 웃음기를 머금은 미소를 지었다. 청하를 올려다보는 남궁휘의 아름다운 눈꼬리가 둥글게 휘어지며 미소를 지었다. 청하가 익히 아는 바로 그 미소였다.
“결승전 진출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아. 청하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하아…… 사고쳐 버렸다…….
* * *
“보아하니 마교의 독에 당해 몸이 좋지 않다는 얘기는 정말 뜬소문이었던 모양이로군.”
청하는 제 앞에서 싸늘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내뱉고 있는 키가 큰 사내를 바라보았다.
탄탄한 몸에는 실용적으로 만들어진 기품 있는 붉은색 무복을 걸치고 머리에는 폭이 넓은 붉은 띠를 두르고 있는 것이, 거대 문파의 수장이라기보다는 아직도 혈기왕성한 젊은 청년 같은 느낌이었다. 시원시원하게 잘생긴 얼굴은 남자다운 인상이었으나, 묘하게도 이마에 두른 붉은 띠에 새겨진 복숭아 도(桃) 자와 무척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청하는 가슴속 깊이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되어 버린 거야…….’
정말이지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청하는 제 앞에서 그 위명이 자자한 적염검을 길게 늘어뜨린 채 저를 향해 적대적인 눈길을 보내고 있는 도원맹주 하유신을 약간 영혼 없는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다면 청하는 그와의 만남을 무척 흥미롭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세등등하게 호승심을 불태우고 있는 유신과는 달리, 청하의 머릿속은 그저 난처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젠장, 어떻게든 결승에는 남궁휘가 올라왔어야 했는데.’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청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허리춤에 꽂혀 있던 창천검을 아무렇게나 뽑아 들었다.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자꾸만 청하의 가슴속을 심란하게 헤집었다. 이대로 그냥 튀어 버리고 싶다는 강력한 욕구가 청하의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청하의 머릿속에서 문득, 결승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청연이 저를 향해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청하야, 괜찮으냐?]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청연이 청하 곁에 가까이 몸을 붙인 채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렇게 물었다.
[……예?]
청하가 멍한 얼굴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청연이 천천히 손을 들어 청하의 귓가에 내려온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뒤로 넘겨 주었다. 청하의 안색을 살피던 청연이 염려가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언가 걱정거리가 있는 듯하구나. 결승전이 신경 쓰이는 것이야?]
[아, 저는…….]
청연의 말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청하가 어물거렸다. 그렇게 티가 났나? 하…… 솔직히 심란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청연의 손가락이 청하의 귓불을 살짝 쓸어내리자 청하는 저도 모르게 주춤 목을 움츠렸다. 청연이 머뭇거리며 청하에게서 손을 떼어 내면서 속삭였다.
[나 혼자 넘겨짚은 것이라면 미안하구나. 그냥…… 네가 신경 쓰여서.]
[아닙니다. 좀 피곤했던 모양이에요.]
청하가 어색하게 말을 맺었다. 청연이 그런 청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괜찮다. 하지만 혹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언제든 내게 의지해도 괜찮단다. 내가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다면 좋겠구나.]
내 욕심인 건 알지만. 청연이 나지막이 말을 덧붙이며 청하를 향해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청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턱 막혔다.
이런 순간에조차 청연은 그가 필요로 하는 말을 들려 주었다. 청연의 무조건적인 신뢰와 애정은 분명 청하에게 큰 위로가 되었으나, 이것은 그가 결코 남에게 의지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원작의 전개를 안다는 것, 즉, 다가올 결승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안다는 것을 청연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문득 느껴지는 거리감에, 청하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진짜 ‘청루각주 백청하’가 아닌 이상,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청연이나 백진이 아무리 지금의 백청하를 걱정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은 그 혼자만이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무게인 것이다.
결국 청하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해진 대답을 뱉어 내었다.
[전 정말 괜찮습니다. 사형의 말씀은……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것으로 청하는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 그들이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였다.
다른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는 청하를 향해 하유신이 딱딱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참, 우리 맹원에게 손을 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아…… 청하는 마치 전생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그 일을 가까스로 머릿속에 떠올렸다. 청하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그건…….”
“우리 쪽 맹원이 말실수를 했다고. 그 일은 내가 사과하지.”
그러나 무어라 비난을 퍼부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유신은 깔끔하게 잘못을 인정하며 청하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청하는 새삼스레 약간 감탄한 시선으로 살짝 눈썹을 치켜뜬 채 유신을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본래 청하가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는 다름 아닌 바로 눈앞의 이 도원맹주 하유신이었다. 하유신은 시원시원하고 뒤끝이 없으며 정의감에 넘치는 캐릭터로, 불같은 성미가 흠이기는 하지만 분명 선하고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다만 태생적으로 차갑고 냉정하며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청루각주 백청하와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맞지 않았다. 하필 자신이 다른 사람도 아닌 청루각주 백청하로 빙의했다는 것이 청하로서는 애석하다면 참 애석한 일이었다.
청하는 그런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유신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사과까지 했으니 그 일은 이제 그만 잊도록 하겠네. 앞으로 그 일로 더 이상 무어라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지.”
청하가 선선히 그렇게 말하자 유신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청루각주 백청하는 결코 이렇게 순순히 그의 사과를 받아 줄 인물이 아니었다. 갑자기 성격이 변하기라도 한 걸까?
그러나 유신은 잠깐의 당황을 빠르게 털어 버리고 손에 든 적염검을 들어 올렸다.
“그럼 이제 그만 대결을 시작해 볼까.”
하유신의 눈동자가 번쩍 빛을 발했다.
청루각주와 도원맹주는 강호를 양분하는 두 거대 문파의 수장인 만큼, 강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절정 고수들이었다. 게다가 개와 원숭이처럼 사이가 나쁘기까지 하니, 그렇지 않아도 고수들의 서열을 매기며 누가 더 낫네, 누가 별로네, 하는 평을 늘어놓는 것을 좋아하는 뭇강호인들 사이에서 그들 중 누구의 무공이 더 뛰어날까 하는 주제는 끝없이 좋은 안주거리가 되었다.
유신 역시 세간의 평을 의식하고 있었다. 청루각주가 이번 비무대회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들은 유신은, 다소 무리하게 시간을 내어 비무대회에 참가 신청을 하였다. 정파의 두 기둥이나 다름없는 청루각주와 도원맹주의 대결은 강호에서도 어마어마한 화제를 모았기에, 결승전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대전보다도 몇 배는 더 많았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패배하게 된다면 앞으로 몇 년, 혹은 몇십 년 동안이나 세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유신은 호승심을 불태우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청하는 기계적으로 창천검을 들어 올리면서도 사실 눈앞에 있는 하유신에게는 전혀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청하의 주의는 온통 단상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 쪽으로 쏠려 있었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청하의 시선이 관중석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남궁휘와 제갈서윤, 청연, 그리고 백진을 스쳤다. 백진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스승님? 백진이 눈으로 묻고 있었다. 청하는 그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곧 다른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디 있지? 대체 어디서 나타나는 거야?’
청하가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청하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하유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러나 청하는 그쪽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입술만을 꽉 깨물었다. 지금쯤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분명 원작에서, 막 결승전이 시작되려고 하는 참에…….
그때, 비무대회가 펼쳐지고 있던 양회루의 공기가 크게 술렁거렸다.
‘왔다!’
청하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이변을 느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앞에 서 있는 하유신이 불길한 예감에 미간을 찌푸린 순간, 갑작스레 양회루의 바깥에 검은 구름이 모여들었다. 이미 한 번 본 적 있던 그 광경에 단상 아래에 있던 백진은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저것은……!”
검은 구름이 걷히자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어검을 타고 있는 수십 명의 복면 사내들이었다. 청하는 그들 중 제일 앞에 서 있는 키가 큰 사내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는 유일하게 복면을 쓰고 있지 않았는데, 아직 거리가 멀어 얼굴이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차가운 얼굴 위에 자리 잡은 선명한 붉은 눈동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청하를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저자가…… 바로 마교주 주세민…….’
드디어 원작 주인공의 등장이다.
정파 중의 정파이자 바로 그 남궁 세가의 후계자인 남궁휘와 세기의 사랑을 펼치게 될 바로 그 마교의 교주 주세민. 과연 주인공답게 그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으며 수백 명은 되는 강호인들을 제 턱 끝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하는 입술을 깨물며 방어적으로 창천검을 들어 올렸다. 남궁휘와 주세민의 첫 만남. 그것은 바로 마교주 주세민이 마교의 무리를 이끌고 비무대회 결승전이 한창인 양회루에 쳐들어옴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곳에서 그 장면이 재현되려 하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를 깨달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지막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여기저기서 허둥지둥 검을 뽑아 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옆에서 유신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교의 교주가 여긴 대체 어떻게……?”
그때, 마치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무리의 제일 앞에 서 있던 주세민이 냉혹함이 느껴지는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큰 행사가 열렸는데 우리 천마신교는 초대도 해 주지 않다니, 실망이로군.”
싸한 정적이 양회루 안에 내려앉았다. 청하는 긴장감에 속으로 침을 삼키며 눈동자를 굴려 남궁휘를 찾았다. 원래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남궁휘였다. 그리고 남궁휘는 감히 비무대회에 쳐들어와 결승전을 망쳐 놓은 주세민과 이 자리에서 한바탕 결투를 펼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세민은 남궁휘의 빼어난 미모와 뛰어난 무공에 그만 첫눈에 반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남궁휘가 아니라 청하가 있었다. 청하는 주세민의 시선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을 향해 곧게 내리꽂히는 것을 바라보며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아, 역시 이 자리에는 남궁휘가 있었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자리를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은 모양이었다. 젠장, 뭐 어떡할 거야? 남궁휘가 아니라고 날 죽이기라도 할 거야? 어? 아니, 물론 그렇다고 진짜 죽이면 안 되는데……. 죽이진 말아 주세요, 주인공님. 급작스럽게 비굴해진 청하의 가슴이 다시금 불안하게 쿵쿵대었다.
아직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다시 눈동자를 굴려 저 아래에 있을 남궁휘를 찾고 있는 청하의 머리 위에서, 왠지 모르게 조금 전보다도 더욱더 온도가 낮아진 듯한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 때문에 기껏 이곳까지 행차했는데, 아무래도 나는 그 사람에게 그닥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 같군.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인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게 무슨 말이지? 청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다시금 주세민 쪽을 바라보았으나,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이게 무슨……! 갑작스레 몰려오는 서늘한 한기에, 청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창천검을 내리쳤다. 영기를 가득 머금은 창천검이 푸른빛을 내뿜으며 허공을 갈랐으나, 곧 깡, 하는 소리와 함께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바로 눈앞에서, 주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강렬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검보랏빛이 도는 마기로 감싸인 검으로 청하의 검격을 받아 낸 주세민이 흥미롭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재밌군.”
붉은 눈동자가 청하를 향해 번뜩였다. 그 눈매가 왠지 낯익은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청하는 갑작스레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스승님!”
“청하야!”
“선배님!”
저 멀리서 쏟아지는 비명 같은 외침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가물거리는 시야 속에서, 청하는 주세민의 왼손이 복잡한 인을 맺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원작에서 남궁휘가 튕겨 내었던 바로 그 마교의 사술이었다.
정신을 잃고 무너져 내리는 청하의 몸을 세민이 가볍게 받아 들었다. 버드나무처럼 늘씬하고 탄탄한 몸을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가볍게 안아 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돌아간다!”
어검을 탄 수십 명의 복면 사내가 빠르게 검은 구름에 감싸인 채 퇴장했다. 뒤에서 온갖 고함 소리와 함께 그를 겨냥한 영기가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 어느 것도 주세민의 발을 늦추지 못했다.
정신을 잃은 청하를 안아 든 세민과 그를 따라온 복면 사내들의 무리는, 그렇게 검은 구름과 함께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