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1)
청하는 간신히 가물거리는 눈을 떴다.
서서히 밝아 오는 시야에 각종 그림과 족자, 도자기들로 꾸며진 화려하기 짝이 없는 방이 눈에 들어왔다. 수없이 많은 예술품들과 비단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방은 자칫 정신없거나 천박해 보일 수 있었으나, 모든 장식품들이 전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방을 꾸민 이의 안목이 대단할 것이라 짐작되는 부분이었다.
청하는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청하가 누워 있던 곳은 그토록 화려한 방 한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침상이었다. 금실이 수놓인 붉은 비단이 천장에서부터 사르륵거리며 내려와 침상 주변에서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청루각에 있는 내 방도 사치스러웠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청하는 혀를 내두르며 아직도 살짝 어질어질한 머리를 잠시 손으로 짚었다.
‘여긴 마교의 본거지인가?’
아마 그렇겠지? 청하는 기억을 잃기 전, 마지막 순간에 저를 향해 사술을 쓰던 주세민의 얼굴을 떠올렸다. 차가운 얼굴 가운데서도 유독 빛났던 붉은 눈동자가 선명히 청하의 기억을 파고들었다. 왠지 어디서 본 듯한 낯익은 눈매였는데…… 착각인가?
아무튼 청하는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체 왜 나를 납치한 거지?’
청하는 도저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주세민과 남궁휘가 만나지 못하면서 원작 전개가 크게 틀어졌다는 것은 이해하였으나, 그것과 자신이 이곳 마교 소굴에까지 끌려온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야?
청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저으며 우선 영기를 일으켜 몸속에 있는 내공부터 점검했다. 곧 청하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떠올랐다.
‘큰일 났다……. 움직일 수 있는 내공이 거의 없는데.’
좀 전에 주세민의 기습을 막느라 갑작스레 영기를 발산하기도 했고, 또 마교의 사술에 당한 여파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오늘 아침 청연과 백진에게서 전달받았던 영기는 거의 다 흩어져 미약한 기운만이 남아 있었다. 청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어쩔 수 없지. 예로부터 호랑이 굴에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우선 내 상태를 숨기고 좀 허세를 부릴 수밖에 없겠는데…….
그때, 밖에서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청하는 잔뜩 긴장한 채 화려하기 짝이 없는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주변을 더듬어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창천검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화려한 선반 위에 올려진 도자기라도 집어 던져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던 찰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 안으로 들어선 것은 하나로 묶은 머리를 어깨 아래로 늘어뜨린 작은 체구의 젊은 청년이었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맥이 탁 풀려 버렸다.
“류재겸?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재겸은 무표정한 얼굴로 방에 들어서서는, 침대 위에서 잔뜩 방어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청하의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재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제가 바로 이곳, 천마신교의 장로인데, 제가 여기에 있는 것이 청루각주가 이곳에 있는 것만큼이나 의아할 일입니까?”
그건…… 그렇긴 하지. 청하는 딱히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지난번 청루각에 쳐들어왔을 때는 그토록 그린 듯한 미소를 지은 채 겉으로나마 정중한 말투를 꾸며 내었던 재겸이었으나, 지금 이곳, 마교의 본거지에서 딱딱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청하를 관찰하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마교 대장로로서의 위엄과 함께 청하를 향한 감출 수 없는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청하에게 어느 쪽이 더 낫냐고 묻는다면, 속을 알 수 없는 뱀처럼 교활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때보다는 차라리 대놓고 그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는 지금이 더 낫다고 대답할 것이다.
재겸이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대체 네 무엇이 그리 특별하길래 교주님께서 네게 관심을 보이는 거지?”
“……뭐?”
청하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무슨 관심? 그러나 재겸은 청하에게 그런 것을 일일이 설명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재겸이 거슬린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으나, 곧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뭐, 어차피 상관없지.”
그러더니 그는 두 손으로 인(印)을 맺으며 입 속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청하는 문득, 이 방의 바닥 전체가 복잡한 진으로 꽉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청하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건…….”
재겸이 주문을 끝마치자, 바닥에 그려져 있던 진에서 우웅, 하는 낮은 소리가 들려오더니 검붉은 빛이 번쩍였다. 청하는 그렇지 않아도 별로 움직일 것이 남아 있지 않던 자신의 영기가 진이 가동됨과 동시에 더욱 움직임이 둔해지는 것을 느꼈다. 청하의 얼굴에 떠오른 당황한 표정을 바라보며 재겸이 경고하듯 말했다.
“영기의 위력을 약화시키는 진법이니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아니…… 좀 너무하는 거 아냐? 내가 하면 무슨 짓을 한다고, 안 그래도 쓸 수 있는 영기도 얼마 없는데! 그러나 재겸은 제 할 말만 하고는 휙 몸을 돌려 밖으로 사라졌다. 재겸의 등 뒤로 문이 다시금 굳게 닫혔다.
청하는 잠시 동안 침상 위에 뻣뻣하게 굳어 있다가, 곧 황급히 일어나 재겸이 나간 문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굳게 닫힌 문은 덜컹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단단히 잠겨 있었다. 몇 번 몸을 부딪혀 보았으나 아무래도 마기로 단단히 봉인된 듯, 문은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청하는 완전히 당황한 얼굴로 닫힌 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이게 뭐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어쩔 수 없이 청하는 닫힌 문을 쾅쾅 두드리며 바깥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이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일단 우리 대화를 좀 해 보는 게 어떻겠나? 대체 날 여기에 가둬 두고 뭘 하려는 거야? 호, 혹시 다른 사람이랑 나를 착각한 거 아냐? 남궁휘라든가…… 남궁휘 알아? 남궁 세가의 후계자인데, 아니, 그러니까 내가 걔를 팔아넘기겠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고…….”
청하가 횡설수설하며 말을 늘어놓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까지 와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릴 정도로 아직 여유가 있나 보군.”
청하는 홱 몸을 뒤로 돌렸다. 방금 전까지 아무도 없었던 방 한가운데에 온통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청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눈동자에서 위험해 보이는 붉은 기운이 넘칠 듯이 어른거렸다. 청하의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마, 마교주 주세민…… 대체 언제 나타난 거지?’
청하의 떨리는 시선이 힐끗 바닥에 그려진 복잡한 진으로 향했다. 주세민이 밟고 선 진의 일부가 검붉은 빛으로 일렁였다. 외부로 연결된 이동진인 모양이었다. 주세민이 방 안으로 들어올 때 어떻게든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려 했던 청하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스쳤다.
청하는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주세민의 얼굴을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마주 바라보았다. 마교의 교주라고 하면 흔히 떠올릴 법한 인상과는 달리, 주세민은 혈색 좋은 얼굴에 조각같이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남이었다. 길거리에서 만난다면 스쳐 지나가다가도 다시 뒤돌아볼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과연, 그토록 예쁜 것을 좋아하는 외모 지상주의자 남궁휘가 끝내 설득되어 넘어갈 만한 외모다. 지나치게 차가워 보이는 표정이 약간 흠이긴 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나른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청하를 응시했다.
세민이 그를 향해 성큼 발을 내딛자 청하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으나, 곧장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힌 문에 등이 부딪혔다. 청하는 입술을 깨물며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체 나를 왜 이곳으로 납치해 온 거지? 목적이 뭐냐?”
주세민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청하를 바라보며 슬쩍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적이라…….”
다음 순간, 순식간에 청하의 앞으로 성큼 가까이 다가온 주세민이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눈을 질끈 감은 청하는 제 턱을 붙잡는 강한 손길을 느끼며 가까스로 눈을 치켜떴다.
주세민이 청하의 턱을 붙잡고 위로 치켜든 채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청하의 얼굴을 빤히 관찰하고 있었다. 주세민의 모양 좋은 입술이 매끄럽게 열렸다.
“일단은 네게 궁금한 것이 몇 가지 있기 때문이라 해 둘까.”
청하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턱을 붙잡은 주세민이 손가락을 움직여 청하의 매끄러운 뺨을 슬쩍 쓰다듬었다. 청하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본 주세민의 붉은 눈동자에 얼핏, 위험한 웃음기가 돌았다. 청하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여기서 겁을 먹었다는 걸 들키면 안 돼.’
어쨌든 자신은 대단한 절정 고수로 이름 높은 청루각주였다. 아무리 다짜고짜 마교의 소굴로 납치당했다고 해도, 주세민의 앞에서 벌벌 떨며 겁먹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대로 영기를 쓰지 못하는 지금 상황에서 청하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청루각주로서의 자신의 명성 하나뿐이었다. 청하는 자꾸만 움츠러드는 제 몸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우선, 첫 번째.”
주세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요즘 우리 천마신교 내부에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쥐새끼들이 몇 있는데…… 최근 그쪽이 아무래도 소위 말하는 ‘정파의 무리’와 손을 잡은 것 같단 말이지. 그게 혹시 네가 아닌가?”
뜻밖의 말에 청하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러나 곧 청하의 머릿속에 지난번 청루각에서 류재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교 내에 어떤 다른 세력이 있고, 청하에게 독을 쓴 것은 교주가 아닌 그쪽이라던 말.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지금 주세민이 말하는 거슬리는 쥐새끼도 그들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청하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는 나한테 독을 먹인 게 그쪽이라며? 그런데 이젠 나보고 그쪽과 손을 잡은 게 아니냐니, 그게 무슨 소리야?”
주세민이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마치 탐색하듯 청하의 얼굴을 살피던 세민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마교의 독을 먹고도 그리 멀쩡히 살아날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따로 해독제를 구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면…….”
뚫어질 듯 저를 바라보는 세민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청하는 당혹스러움에 눈을 깜빡였다. 아니…… 내가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독 같은 건 다 해독되고 난 후였다고! 해독제니 뭐니 그런 건 알지도 못하는데.
동시에 청하는 지난번 류재겸이 청루각에 쳐들어왔던 것이 단순히 교주의 전언을 전달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그들은 마교의 독을 먹고도 멀쩡히 살아난 청하의 상태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청루각에 찾아왔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청루각주 백청하가 마교의 독을 먹고도 살아난 것은 원작에도 있던 설정인데.’
그러나 주세민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청하는 억울한 심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세민을 마주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겠지만 난 모르는 일이야. 그런 녀석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때 류재겸이 말해서 처음 알았다고!”
한동안 날카로운 시선으로 청하의 얼굴을 관찰하던 주세민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렇다면 지난번 양산에서 흑마부대의 흔적을 없앤 것도 단순한 사고였던가?”
“……흑마부대?”
“쥐새끼들이 감히 요즘 내 시선을 피해서 그런 깜찍한 짓도 하고 있더군. 쓸어버리려고 갔더니 누가 벌써 선수를 쳤던데……. 동굴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흑마부대에 관한 흔적도 더 찾을 수가 없었고. 일부러 그랬던 것이 아니었던가?”
청하의 머릿속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겁에 질린 채 마구 검을 휘두르던 자신의 모습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다. 청하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그쪽 짓이었나? 전혀 몰랐는데…….”
솔직히 말하면 전혀 관심도 없었다. 대체 그가 무엇 때문에 그 무섭게 생긴 좀비 같은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그것을 만들어 낸 것이 주세민이든, 아니면 그를 적대하는 다른 세력이든, 청하로서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당황한 청하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며 세민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주세민은 의외로 순순히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다면 좋아. 확실한 증거도 없으니 그 건은 일단 넘어가도록 하지. 그럼 두 번째.”
다음 순간, 세민은 청하가 미처 긴장을 풀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불쑥 손을 뻗어 청하의 늘씬한 허리를 단숨에 한 팔로 휘감았다. 청하는 세민의 한 손에 단단히 턱을 붙잡히고 반대쪽 팔에는 허리를 끌어안긴 채, 그의 품 안에서 꼼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당황으로 물들어 가는 청하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세민은 천천히 청하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싹 가까이 들이대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청하는 세민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결이 제 뺨을 간질이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세민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내가 이런 짓을 하는데도, 그토록 자존심 강하고 고강한 무공의 청루각주는 어째서 반항조차 하지 않는 거지?”
청하의 몸이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턱을 쥔 세민의 손가락이 다시금 희롱하듯 청하의 뺨을 간질였다. 모양 좋은 입술이 딱딱하게 굳은 청하의 입가를 장난치듯 지분거렸다. 고작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재밌다는 듯이 반짝였다.
“마치 무언가 몸에 이상이 있는 것처럼……. 예를 들어…… 마음대로 영기를 쓸 수 없다든가?”
주세민의 입가에 싱긋,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에 얼핏,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잔인한 흥미가 깃들었다. 다음 순간, 주세민의 입술이 숨도 쉬지 못하고 굳어 있는 청하의 입술을 거칠게 파고들었다.
청하는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쳤으나 그의 허리를 휘감고 있는 강철 같은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청하의 턱을 쥐고 있던 주세민이 강한 악력으로 뺨을 누르자, 어쩔 수 없이 청하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 틈으로 순식간에 세민의 혀가 파고들었다.
“읍……!”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혀에 청하가 숨 막히는 소리를 내었으나 세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청하가 마구 몸을 비틀자 세민은 청하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그를 강하게 벽으로 밀쳤다. 또다시 쿵, 하는 소리가 나며 청하의 등이 단단한 문에 세게 부딪혔다. 청하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사이, 세민의 혀가 청하의 입 안을 마구 헤집기 시작했다.
마교 수장의 입맞춤은 과연 거칠고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세민은 마치 호기심에 가득 찬 어린아이가 궁금한 것을 탐구하듯, 청하의 입 안을 샅샅이 핥고 문질러 대었다. 예민하고 여린 살과 민감한 점막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세민의 몸짓에 청하는 속수무책으로 숨 막힌 신음을 흘렸다.
절로 후들거리는 다리 사이로 세민의 탄탄한 허벅지가 파고들었다. 꽉 짜인 근육이 단단하게 자리 잡힌 허벅지가 민감한 부분을 노골적으로 짓누르며 압박해 오자, 청하의 몸이 어쩔 줄 모르고 파드득 떨려 왔다. 이 세계에 와서 지금까지 꽤나 여러 번의 입맞춤을 해 보았지만, 정말로 이렇게 ‘강제적으로’ 당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도, 청하는 속으로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청하가 제 마음대로 영기를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낸 사람은 주세민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그 누구도 청하가 직접 말해 주기 전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청하의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졌다.
‘그냥 떠보는 건가? 아니면 정말 확실히 알고 있는 건가? 하지만 대체…… 어떻게?’
청하가 패닉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주세민은 착실히 청하의 입 안을 유린하고 있었다. 뜨거운 혀가 집요하게 청하의 입 안 구석구석을 헤집듯 건드려 대는 것이, 제대로 작정하고 달려드는 모양새였다.
“흐읏…… 응…… 하, 읍…….”
어떻게든 벗어나려 고개를 틀어 보아도, 간신히 벌어진 잇새로는 그저 숨 막힌 듯한 젖은 신음 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커다란 손이 허리의 민감한 부분을 쓸어내리며 단단하고 두꺼운 혀가 입 안쪽 여린 점막을 마구 헤집어 대자 오싹한 느낌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리가 떨리는 것을 감지한 주세민이 청하의 다리 사이에 끼워 넣은 제 허벅지를 더욱 안쪽으로 밀착시키며 집요하게 문질러 대었다. 청하는 세민의 몸과 벽 사이에 짓눌린 채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바르작거릴 뿐이었다.
청하로서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대체 이 짓거리는 뭔지, 얘는 또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그러나 주세민의 입맞춤에 담겨 있는 것은 어떤 흠모의 감정이라기보다는,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듯한 흥미 또는 호기심이었다. 마치 새로 산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처럼, 세민은 청하의 목구멍 저 안쪽까지 혀를 집어넣어 간질거리다가 입천장의 민감한 살을 긁어내리기도 하고, 희롱하듯 청하의 혀에 제 혀를 얽어 대기도 했다. 세민이 저를 가지고 노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청하의 배 속으로 확, 열이 뻗쳤다.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청하는 턱을 움켜쥐고 있는 세민의 팔목을 확 잡아채며 제 입 안을 헤집고 있는 세민의 혀에 콱, 이를 세웠다.
무언가를 감지한 세민이 재빨리 턱을 움켜쥔 손에 꽉 힘을 주어 혀가 잘리는 것은 모면했지만, 혀끝이 조금 씹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순식간에 청하의 입 안에 비릿한 피 맛이 퍼져 나갔다. 세민이 이것 봐라, 하는 듯한 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나 청하의 반격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청하의 오른손에 갑작스레 푸른 영기가 맺혔고, 청하는 그대로 손바닥을 뻗어 주세민의 배를 가격했다. 영기를 가득 머금은 손이 주세민의 배에 닿는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영기가 터져 나갔고, 정통으로 배를 얻어맞은 주세민의 몸이 약간 흔들렸다. 옆으로 튕겨 나간 영기의 일부가 방 한편에 놓여 있던 화려한 장식장을 덮치며, 온갖 귀중한 것들로 가득 차 있던 장식장은 그대로 와르르 부서져 버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청하는 잽싸게 제 허리를 휘어 감고 있는 주세민의 팔에서 빠져나왔다.
“하아, 흡……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청하는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가리며 재빨리 방의 맞은편으로 몸을 물렸다. 세민은 별다른 동요 없이 그저 재미있다는 듯 그런 청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방금 전, 청하의 영기에 복부를 정통으로 후려 맞았음에도 별다른 타격이 없는 듯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뭐야, 진짜 저 자식……! 청하가 이를 가는 사이, 세민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이게 다인가?”
“뭐?”
“그토록 대단하다는 강호 제일 고수의 무공이라는 게, 고작 이 정도인가?”
이것도 방금 전 주세민이 억지로 입을 맞추는 틈을 타, 그의 영기를 어느 정도 흡수했기에 가능한 반격이었다. 순간적으로 세민의 영기를 흡수하며 그를 통해 움직일 수 있는 제 영기를 닥닥 긁어모아 던진 회심의 일격이었으나, 세민은 어디에 가볍게 긁히기라도 한 듯 간지럽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청하는 입술을 깨물며 소리쳤다.
“이…… 이 진법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냐! 영기를 약화시키는 이 진법 때문에…….”
“역시 영기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지? 그렇지?”
주세민이 이제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청하는 입을 다물었다. 주세민이 마치 다 잡은 먹잇감을 앞에 둔 육식 동물처럼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청하를 향해 다가왔다.
“아무리 진법의 영향이 있다고는 해도, 양산의 동굴 벽에 네가 남긴 영기의 흔적은 결코 이 정도로 끝날 만한 수위의 무공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고작 이 정도밖에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세민이 제게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청하는 코너에 몰린 초식 동물처럼 주춤거리며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청하의 다리가 하늘거리는 붉은 비단에 둘러싸인 화려한 침상에 닿았다. 더 물러날 곳도 없어진 청하는 할 수 없이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어 선 채 앞에 선 세민을 마주 노려보았다.
주세민이 한가롭게 입을 열었다.
“지난번 우리가 청루각을 방문했을 때에도, 굳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네 제자와 입을 맞추는 것이 이상하다 했다.”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약간의 웃음기를 머금고 청하의 몸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때도 영기를 쓰기 위해 급하게 네 문파의 심법을 운용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이지?”
청하의 등골을 따라 소름이 내달렸다. 그때 있었던 마교의 무리들 중에 주세민이 있었던가.
문득, 그의 사력을 다한 공격을 받아 내었던 한 복면 사내의 모습이 청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처음부터 계속 청하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던 그 복면 사내. 청하는 그 사내의 짙은 눈동자 안에서 순간적으로 붉은 기운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게 착각이 아니었단 말인가?
청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설마 그때 그 복면 사내…….”
세민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입꼬리만을 슬쩍 끌어 올렸지만,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하…… 그래, 어쩐지 그때 뭔가가 이상하다 했어. 역시 너였구나!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느낌에 청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대체 그것만 보고서 어떻게 저 사실을 눈치챘단 말인가? 정말 소름 끼치도록 눈치가 빠른 자였다.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제 청하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몇 개 없었다. 청하는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쩔 것이냐? 천하의 청루각주가 사실은 제 영기도 마음대로 쓰지 못한다고 강호에 널리 알려 비웃기라도 할 셈인가? 아니면, 무기도 빼앗고 영기도 쓰지 못하는 날 공격해서 죽이기라도 할 것이야? 그야말로 마교의 무리답게 비겁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로군.”
세민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마교주 주세민은 제 평판에 신경을 쓰는 자였다. 손속이 잔인하다거나 가차 없다는 평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비겁하다든가 소인배 같다는 식의 말을 듣는 것은 무척이나 싫어했다. 청하는 지금 검도 없고 영기도 쓸 수 없으니, 사실상 일반인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마교의 교주씩이나 되는 자가 그렇게 무력한 상태의 청루각주를 공격한다는 것은 분명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다.
‘그러니까 죽이지 말라고……!’
결국 청하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누구에게나 목숨이 제일 중요하지 않겠는가? 청하는 세민의 눈치를 살피며 겉으로는 최대한 뻔뻔하게 가슴을 펴고 턱을 치켜들었다. 설마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 영기도 못 쓰는 나를 죽이겠다고 나오진 않겠지? 주세민이 그런 캐릭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청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세민의 얼굴을 힐끗거렸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세민의 입꼬리가 재밌다는 듯 꿈틀거렸다.
“그러니까…… 영기를 쓸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
“……뭐?”
“나도 지금 무기를 들고 있지는 않으니, 네가 영기를 쓸 수 있다면 조건은 똑같겠군. 아, 진을 그려 놨다고 불평하진 말아. 그렇다고 기껏 잡아 온 대어를 놓쳐 버릴 수는 없으니까.”
청하는 세민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약간 입을 멍하게 벌린 채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주세민이 싱긋,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청하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널 일방적으로 공격하진 않겠다. 대신 네게 반격할 기회를 주지.”
“그게 무슨…….”
그러나 청하는 미처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갑작스레 손을 뻗은 주세민이 청하의 옷깃을 거칠게 잡아 쥐었다. 청하가 무어라 말을 내뱉기도 전에, 주세민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청하의 단정한 옅은 푸른색 옷자락을 단숨에 찢어발기듯 잡아 벌렸다.
“이게 대체……!”
청하가 기함을 하며 밀어내려 하였으나, 주세민은 훤히 드러난 청하의 목덜미에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순간,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청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세민이 청하의 목덜미에 이를 세우며 거칠게 잇자국을 남겼다.
청하는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차오르는 치욕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반쯤 옷이 벗겨진 채로 다짜고짜 남에게 목덜미가 물리는 기분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목덜미를 깨물고 있는 세민으로부터 강력한 영기가 흘러 들어온 것이 그나마 유일하게 긍정적인 점이었다.
그를 이용해 손에 잔뜩 내공을 실은 청하가 주세민의 가슴팍을 강하게 밀쳤으나, 세민은 마기를 일으켜 제 몸을 보호하며 오히려 청하의 몸을 뒤로 밀어 넘어뜨렸다.
휘청거리며 뒤로 쓰러진 청하의 등에 쓸데없이 넓고 화려한 침상이 닿았다. 길고 매끄러운 청하의 검은 머리카락이 흰 이불 위에 그물처럼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 위로 주세민의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 왔다.
청하의 목덜미를 맛있는 사탕이라도 되는 양 잘근잘근 씹어 대던 주세민이 만족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내 혀를 씹어 놓은 데 대한 복수다.”
이 미친놈이 진짜……! 이거 완전 또라이 아냐?! 청하는 대꾸도 하지 않고 제 위를 짓누르는 세민의 복부에 다시금 주먹을 날렸다. 세민은 여유롭게 웃으며 청하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막아 내었지만, 그 순간, 청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끝에 모은 영기를 폭발시켰다.
좁은 곳에 강하게 집중된 채 폭발하듯 쏘아진 영기에, 청하의 위를 짓누르던 세민의 몸이 들썩이며 뒤로 밀려났다. 천장에서부터 하늘하늘하게 늘어뜨려진 아름다운 붉은 비단이 청하가 쏘아 낸 영기를 맞고 볼품없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다.
청하가 재빨리 침상 머리맡으로 몸을 빼내며 으르렁거렸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내가 청루각주라는 것을 잊었느냐? 청루각의 심법이 무엇인지 몰라? 나를 건드릴수록 네 녀석의 영기를 흡수해서 더 많은 내공을 움직일 수 있다고!”
주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흥미롭게 반짝거렸다.
“그래, 그러니까 더욱 궁금하군. 과연 내가 널 어디까지 건드릴 수 있는지. 그리고 넌 어디까지 반격할 수 있을지.”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반응이야?! 청하는 그 비상식적인 대답에 정신이 다 아득해졌으나, 세민은 더 이상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청하를 향해 빠르게 다가온 세민이 이미 반쯤 흘러내린 청하의 옷자락을 홱 잡아채었다. 우아한 선을 가진 흰 어깨와 매끈한 가슴팍이 흐트러진 옷깃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서늘한 공기가 맨살에 와 닿는 선득한 느낌에 청하는 피부가 온통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황급히 뒤로 몸을 빼내는 청하의 가슴팍을 주세민의 커다란 손이 덮쳐눌렀다.
“하앗!”
세민의 손이 제 몸에 닿자마자, 청하는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영기를 있는 대로 빨아들이며 세민의 옆구리를 영기로 감싼 무릎으로 찍어 올렸다. 퍽, 하고 꽤나 아플 것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으나, 세민은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은 채 검붉은 마기로 감싼 손으로 청하의 가슴을 다시금 침상으로 찍어눌렀다.
청하는 포기하지 않고 오른손에 다시 한번 더 영기를 모아 세민을 향해 푸른 영기탄을 쏘아 보냈다. 이번엔 세민도 그대로 맞아 버리기엔 부담스러웠는지, 슬쩍 몸을 옆으로 굴리며 제게 향한 공격을 피해 내었다. 목표를 맞추지 못한 영기가 방 안 어딘가에 부딪혀 폭발하며 무언가가 와르르 쾅쾅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민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내 방을 아예 작살을 내 버릴 생각인가?”
“그것도 나쁘지 않지.”
청하는 지지 않고 맞받아치며 세민이 옆으로 몸을 굴린 틈을 타 재빨리 침상 반대편으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미처 바닥에 발을 딛기도 전에, 뒤에서 뻗어 나온 강철 갈고리 같은 세민의 손아귀가 청하의 팔을 덥석 움켜쥐고는 다시금 침상으로 휙 끌어당겼다. 속수무책으로 끌려간 청하는 다시금 푹신한 침상에 내던져지듯 눕혀졌다. 다시금 몇 번의 격렬한 공방이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하의 옷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찢겨진 채 흐트러졌다. 귀하고 아름다운 물건으로 가득했던 화려하기 그지없는 방도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잔뜩 정신을 집중해 세민의 영기를 흡수하고 그것으로 제 내공을 움직여 영기를 일으키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청하는 눈앞이 다 어질어질해졌다.
그러나 청하는 이를 악문 채 끝까지 세민의 손 아래에서 반항을 멈추지 않았다. 슬슬 짜증이 나는 것 같은 주세민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너도 참 대단한 고집이로군.”
너 같은 사이코만 할까! 청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세민의 얼굴을 향해 영기를 실은 주먹을 내질렀다. 고개를 비틀어 그것을 피해 낸 주세민이 청하의 양 손목을 꽉 붙잡고는 한데 모아 머리 위에 고정시켰다.
“가만히 있어.”
“아까는 내가 어디까지 반격할 수 있는지 보고 싶다며?”
청하가 비꼬듯 말하며 세민을 걷어차기 위해 무릎을 들어 올렸으나, 세민은 잽싸게 자신의 무릎으로 청하의 허벅지 안쪽을 내리누르며 온몸으로 청하를 짓눌러 대었다. 청하보다 두 뼘은 더 큰 거대한 주세민의 몸 아래 눌려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청하가 이를 갈았다.
“저리 안 비켜?”
그러나 주세민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제 아래에 누워 있는 그 이름도 유명한 청루각주 백청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부드러워 보이는 긴 검은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진 채 새하얀 이불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모습이 묘하게 선정적이었다. 몇 시간이나 계속된 공방으로 인해 살짝 붉게 상기된 뺨이 백옥처럼 흰 피부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씩씩거리며 분한 듯 숨을 내뱉고 있는 입술은 마치 갓 피어난 꽃봉오리처럼 붉었다. 주세민의 시선이 천천히 더 아래로 내려갔다.
반쯤은 제가 찢어 버린 너덜너덜한 옷자락 사이로 잡티 하나 없이 흰 피부가 드러나 있었다. 체형에 비해 약간 큰 듯한 가슴은 보기 좋게 잘 짜여진 잔근육으로 덮여 있었다. 가쁘게 오르락내리락거리는 하얀 가슴 끝에 자리 잡은 분홍빛 유두가 마치 자석처럼 세민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세민의 입술이 갑자기 바짝 타들어 갔다.
주세민은 저도 모르는 사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청하의 가슴에 제 얼굴을 갖다 대었다. 타들어 가는 것처럼 바싹 말라 오는 입술이 본능적으로 제 시선을 잡아끄는 분홍빛 과실을 머금었다. 세민의 아래에 짓눌려 있는 몸이 경련하듯 펄쩍 튀어 올랐다. 그것을 더욱 제 아래로 단단히 잡아 누르며, 세민은 정신없이 입에 머금은 분홍빛 유실을 욕심껏 탐했다.
혀끝을 뾰족하게 세워 솟아오른 첨단을 파고들듯 헤집어 대자, 입 안에서 부드럽게 뭉개지던 유두가 한층 제 주장을 하며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솟아오른 돌기가 까끌거리며 혀에 걸리는 것을 즐겁게 입 안에서 굴리며, 세민은 유두 주변의 부드러운 가슴에 잔뜩 이를 세웠다. 젖은 살과 살이 마찰하며 나는 자극적인 소리가 기껍기 그지없었다.
단단해진 유두를 가볍게 깨물다가 긁어내리기도 하며, 동시에 입에 문 돌기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한 손으로는 반대쪽 가슴을 크게 움켜쥐고 본능적으로 주물러 대자, 아래에 짓눌린 몸이 애처롭게 파드득 떨려 왔다. 몸에 비해 비교적 큰 가슴이 주세민의 커다란 손안에 빠듯하게 들어차며 단단한 손바닥 아래에서 마구 이리저리 뭉그러졌다. 어찌할 새도 없이 세민의 몸 안에서 확 불길이 일었다.
문득, 세민은 방 안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를 쓰고 제게 달려들며 반항을 포기하지 않던 청루각주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 조금 이상했다. 세민은 정신없이 탐하고 있던 청하의 가슴에서 입술을 떼고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순간, 청하의 얼굴을 올려다본 세민의 차가운 붉은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순간, 청하의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아래로 뚝 흘러내렸다. 방울져 흘러내리는 투명한 눈물 너머로, 흠뻑 젖어 있는 긴 속눈썹이 천천히 깜빡거렸다. 청하의 입술이 떨리듯 달싹였다.
“……하지 마…….”
세민의 심장이 순간, 덜컹, 하고 흔들렸다.
재겸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교의 총본산, 천마신궁 본궁의 화려한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천마신궁은 험악하기 그지없는 천혜의 요새인 천랑산맥 자락을 따라 지어진 여러 건축물의 집합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본궁은 교주의 거처가 있는 곳으로, 가장 화려하면서도 또 가장 경비가 삼엄하기로 이름 높았다.
재겸은 화려한 복도의 모퉁이마다 경계를 서고 있는 교원들이 저를 보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별다른 감흥 없이 지나치며 긴 복도를 걸어 내려갔다. 복도가 끝나고 작은 내원으로 이어진 회랑으로 막 들어섰을 때, 옆에서 매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 장로, 교주님을 뵙고 오는 길인가?”
재겸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띠를 이마에 두르고 재겸처럼 긴 머리를 단정하게 하나로 묶어 내린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재겸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재겸은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며 남자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강 장로. 임무를 수행하러 나가신 줄 알았는데 벌써 돌아오셨군요. 교주님은 미처 못 뵈었습니다.”
재겸을 향해 창백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는 강재헌이라는 인물로, 재겸과 함께 마교의 실세이자 주세민의 왼팔로 평가받는 이였다. 마교에 대한 엄청난 충성심으로 이름 높은 강재헌은, 전대 교주 대부터 그 충실함을 인정받아 교주의 최측근으로 중용받고 있었다. 류재겸과 함께 마교를 떠받치고 있는 핵심 인물 중 하나인 그는, 주세민이 죽으라고 하면 망설임 하나 없이 즉각 그 자리에서 자결할 정도로 맹목적인 충성심을 가진 자였다.
그러나 재겸은 그다지 강재헌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같은 배분임에도 그보다 한참 나이가 어린 재겸을 약간 얕보는 듯한 티를 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저 마교 실세들 간의 흔한 알력 다툼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영 재겸은 그와 맞지가 않았다.
강재헌이 다시금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 나도 임무 복귀 보고를 드리려 하는데, 지금은 급한 용무 중이라 뵐 수 없다는 전갈만을 받았다네.”
“그렇군요.”
재겸은 별다른 반응 없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재헌이 재겸을 향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오며 약간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듣자 하니, 오늘 교주님께서 비무대회가 열리는 양회루를 습격하시어 청루각주를 납치해 오셨다고?”
“예에…….”
어차피 퍼질 대로 퍼진 소문이라 재겸은 그저 어깨만을 들썩였다. 재헌이 조금 더 그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들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자가 지금 교주님의 침소에 감금되어 있다던데…… 혹시 얘기 들었는가?”
“예. 제가 침소에 있는 진법을 좀 손보았습니다.”
“역시……! 교주님께서는 그자를 왜 납치해 오신 건가? 고문이라도 하시려는 거겠지?”
재헌이 약간의 기대감이 어린 목소리로 빠르게 물어 왔다. 재겸은 세민의 침소를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방 안의 모습을 떠올렸다.
별다른 고문 기구가 준비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마교의 교주쯤 되면 별다른 도구 없이도 얼마든지 상대방이 차라리 죽여 달라 애원할 정도의 고문을 할 수 있었다. 주세민은 마교다운 고문보다는 오히려 정파의 협객들이나 좋아할 법한 결투를 선호하는 편이었으나,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체 그자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볼일이 끝나고 나면 그냥 곧장 죽여 버리지 않을까? 그보다 재겸은 지금까지 아름다운 예술품이나 진귀한 보석이 아닌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전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던 주세민이 갑자기 청루각주를 납치까지 해 왔다는 점이 더 신경 쓰였다.
그러나 재겸은 대충 고개를 기울이며 애매하게 대답하였다.
“저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러실 수도 있겠지요.”
“교주님께서 나도 고문에 참여시켜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청루각은 우리 천마신교가 중원을 제패하기 위해 반드시 무너뜨려야 하는 집단이 아닌가. 천마(天魔)님께 이 중원을 바칠 수 있는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듯해.”
재헌이 묘한 열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한 채 흥분한 듯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재겸은 약간 질린 마음으로 빠르게 말을 뱉어 내는 재헌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진짜 나랑 안 맞는다니까. 재겸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래서 광신도들이란…….
천마신교가 천마를 신으로 모시는 종교 단체에서 시작하긴 했으나, 이미 오래전에 그 속성은 변질되어 단순히 강호에 난립하는 수많은 문파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그에 속한 교원들도 신도라기보다는 무공을 수련하는 수련생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나 뼛속까지 철저하게 실리주의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재겸으로서는, 강재헌의 저런 극단적인 맹목성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재겸은 반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직장 동료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어…… 교주님께서 다 계획이 있으신 게 아니겠습니까.”
재헌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네. 나는 가끔 교주님께서 너무 온건한 방식만을 고집하시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역시 괜한 기우였어. 청루각주를 납치하다니, 이렇게 대담한 계획을 세우실 줄은……!”
그 이후로도 한참을 더 무어라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어 대는 재헌을 앞에 두고, 재겸은 흐리멍덩한 눈빛을 한 채 노련한 유체 이탈 화법으로 재헌의 말에 추임새를 넣어 주었다. 그러나 재겸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그런데 진짜 교주님께서는 대체 청루각주와 침소에서 뭘 하고 계시는 거지?’
* * *
세민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제 아래에 있는 청루각주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청하는 애써 눈물을 삼키려는 듯 입술을 깨물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발개진 눈꼬리를 타고 넘쳐 흐르는 눈물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빙옥처럼 싸늘하고 북풍한설처럼 차가운 성정으로 이름 높은 그 ‘창천빙옥’ 백청하였다. 방금 전까지도 이를 악물고 끝까지 제게 달려들던 그 고고하고 자존심 높은 자가, 제 아래에서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차갑고 서늘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
세민은 본디 예쁜 것을 좋아했다. 예쁘고 강한 것이라면 더욱 좋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무생물이 아닌 그 어떤 살아 있는 것도 세민의 관심을 끌지 못해 오늘에서야 겨우 알아차린 것인데, 세민은 예쁘고 강한 것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감각이 세민의 배 속을 간질였다. 세민은 도무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당황한 제 속을 가까스로 숨긴 채 제 아래에 짓눌려 있는 청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단연코 이런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아랫배를 쑤시는 듯한 짜릿한 감각이 등골을 따라 내달렸다.
청하는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눈물로 흐려진 시야를 어떻게든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세민의 앞에서 이토록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나,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은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당장이라도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온몸이 굳고 눈물이 터져 나오는 경험은 청하로서도 처음이었다.
‘무…… 무서워!’
그것이 청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져, 무공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남자와 교합을 해야 하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기절초풍할 것 같은 설정 속에 자신이 내던져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도, 청하는 이토록 무섭고 두려운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를 둘러싼 제자들은 청하를 향해 부담스러울 정도로 뜨거운 눈빛을 보내면서도, 감히 제 스승을 강제로 어떻게 하려고 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청연이나 서윤도 마찬가지로 청하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시킬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청하의 몸을 회복하는 데 필요하거나, 무공을 수련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백진과 청연, 그리고 서윤과 남궁휘를 떠올리자 마치 무거운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청하의 가슴이 턱 막혀 왔다. 지금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엄청 놀랐겠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렇게 납치당했으니 분명 기절할 정도로 놀랐을 것이다. 날 찾고 있을까? 엄청나게 걱정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순간적인 두려움과 당혹감에 미친 듯이 쿵쾅거리던 심장도 비로소 약간 진정되는 것 같았다. 조금 가라앉은 머리로 코를 훌쩍거리며 눈앞에 있는 주세민의 반응을 살피려 하는데, 갑자기 아래에서 무언가 뜨겁고 단단한 것이 허벅지를 누르는 게 느껴졌다.
‘음……? 이게 뭐지?’
뿌옇게 흐려진 시야 속에서 눈을 깜빡거리며 위를 올려다본 청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뚫어질 듯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세민의 붉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언제나 차갑게 빛나던 붉은 눈동자에 약간의 당혹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세민이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몰라 눈을 깜빡이고 있던 청하의 허벅지에, 다시금 불타는 것처럼 뜨거운 무언가가 닿아 왔다.
‘설마…….’
청하의 머릿속에 문득 지난번 양산의 동굴에서 제 허벅지에 닿아 왔던 남궁휘의 ‘검’이 스쳐 지나갔다. 황급히 고개를 내려 아래를 내려다본 청하의 얼굴에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경악의 표정이 어렸다. 청하의 잇새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미친…….”
진짜 미쳤나? 청하는 방금 전까지 제 눈꼬리를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리던 눈물이 거짓말처럼 뚝 멈추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 순간, 청하를 짓누르고 있던 주세민의 몸이 움찔거리며, 허벅지에 닿아 있던 딱딱한 것이 조금 더 커졌다. 이제 불타는 검이 아니라 불타는 기둥쯤 된 것 같은 그것이, 세민의 움직임에 따라 부지불식간에 청하의 아랫도리에 문질러졌다.
청하의 몸이 파드득 떨렸다. 순식간에 청하의 몸에서도 확 열기가 치솟았다. 붉은 비단이 깔린 침상 위의 공기가 갑작스레 위험한 열기를 띠었다.
세민이 다시금 뜨겁고 딱딱한 것을 청하의 아래쪽에 치대듯 문질렀다.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고 움직였다기보다는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갑작스레 아래를 자극당한 청하의 입술 사이로 저도 모르는 사이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윽... 아, 아읏... 응!”
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에 당황한 청하가 세민을 올려다보았다. 세민 역시 당황하여 차가운 얼굴을 굳히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그가 얼마나 당황한 것인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청하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허억...!”
무어라 항의의 말을 내뱉던 청하의 목소리가 급하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뚝 끊어졌다. 세민이 다시금 제 아랫도리를 청하의 하반신을 향해 추삽질하듯 퍽 하고 쳐올린 탓이다. 청하는 당혹 속에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처음 것은 몰라도, 이번에는 완전히 의도적인 몸짓이었다.
두 손목은 세민의 손아귀에 잡힌 채 머리 위에 고정되어 있고 다리는 주세민의 거대한 몸에 빈틈없이 짓눌려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 청하로서는, 세민이 제 무게를 실어 묵직하게 쳐올리는 것을 그대로 고스란히 받아 낼 수밖에 없었다. 얇은 옷자락을 사이에 두고 뜨겁고 단단하며 민감한 부위가 서로 맞닿아 비벼지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아, 자, 잠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오싹한 느낌과 함께 청하의 아랫배가 확 조여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운 마음이 앞섰으나, 지금은 당혹감이 더 컸다. 이런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온몸의 신경을 자극당하는 듯한 짜릿하고 오싹한 감각에 청하는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깜빡였다.
당황한 눈으로 다시금 아래쪽을 향해 힐끗 시선을 던진 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옷자락에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아까 전보다도 더욱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세민의 아랫도리를 보며, 청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 이건 아냐, 이건… 이건 정절의 위협이 아니라 목숨의 위협이다.’
위기감에 바짝 긴장한 청하의 머리가 미친 듯이 팽팽 돌아갔다. 청하는 지금껏 흡수했던 세민의 영기를 이용해 있는 대로 내공을 끌어모으며, 저를 짓누르고 있던 세민을 향해 벼락같이 푸른 영기를 떨어뜨렸다. 동시에, 청하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비틀며 세민의 중심을 향해 무릎을 쳐올렸다.
퍽!
쿠콰콰콰쾅!
청하의 무릎이 세민의 중심을 가격하는 것과 푸른 영기가 내리꽂히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방금 전 세민의 행동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영기를 흡수할 수 있었던 청하는, 제가 끌어올 수 있는 내공을 모두 끌어모아 사정없이 세민을 향해 퍼부었다.
주세민은 순간적으로 마기를 일으켜 몸을 보호했으나, 아래에서 가해진 충격과 위에서 내리꽂힌 영기의 힘에 밀려 이때까지 청하를 짓누르고 있던 침상에서 몇 발자국이나 떨어진 곳까지 밀려나 버리고 말았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아 볼품없이 바닥에 나뒹구는 것은 면했으나, 이번에는 세민에게도 꽤 타격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는 것을 보니 내상을 입은 듯한데, 그럼에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세민의 얼굴에는 분노보다는 당황스러움이 어려 있었다.
청하는 재빨리 침상에서 빠져나와 세민의 반대편 벽에 등을 붙이고 서서는, 노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너 이 자식, 어디서…… 어디서 그런 숭하기 짝이 없는 것을 들이밀어? 어? 행여나 그…… 그딴 것을 가지고 나한테 억지로 뭘 어떻게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방금 봤지? 네가 내 가슴에 대고 그…… 그런 짓을 하니까 벼락을 맞은 거다! 그 숭한 걸 나한테 들이밀었다간, 이다음엔 정말 네 녀석 몸뚱어리를 갈기갈기 찢어 주겠어!”
청하의 말은 단순한 협박이나 허장성세가 아니었다. 세민은 진한 피 맛이 올라오는 입가를 손등으로 꾹 누르며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 청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활화산처럼 기세등등한 청하의 모습도 나쁘지 않았으나, 방금 전, 차갑고 서늘한 인상의 미인이 고고한 방벽을 무너뜨리며 눈물을 보이던 장면이 세민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허어……. 세민은 살짝 눈가를 찌푸리며 제 아래를 향해 힐끗 시선을 던졌다. 검은 옷자락 아래로 청하가 기겁을 했던 물건이 아직도 꼿꼿이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이건…… 좀 곤란한데.
세민은 눈썹을 찌푸리며 다시금 청하를 바라보았다. 청하는 노기등등한 얼굴로 바로 옆의 장식장에 놓여 있던 옥피리를 낚아채서는 마치 검을 쥔 것처럼 그를 향해 곧추세우고 있었다. 세민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도 내가 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만 닥쳐!”
“화를 내는 모습도 잘 어울리지만…… 우는 게 확실히 예쁜데.”
“닥치라니까!”
청하가 옥피리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러나 세민은 꼼짝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저를 향해 바짝 날을 세우고 있는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세민은 아직도 속에서 올라오는 피 맛을 삼키며 속으로 마기를 일으켜 몸 안의 내상을 치료했다.
청하의 협박은 사실이었다. 세민은 방금 전 청하가 저를 향해 퍼부은 영기의 벼락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떠올렸다. 이보다 더 위험한 짓을 했다가는 청하가 경고했던 대로 제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최소한 제가 손쉽게 무시하거나 받아넘길 수 있을 정도의 공격은 아닐 것이다. 방 안에 깔린 진법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청루각주의 내공이란 것은 과연 무시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세민은 저도 모르게 짙은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인가 보군.”
“무엇이 말이냐?!”
“내가 너를 건드릴 수 있는 것이.”
아직도 그 얘기야? 이…… 미친 사이코패스 같은 자식이……! 청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한편, 세민은 정말 아쉽다는 듯이 입술을 실룩이며 청하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제 이자를 어떻게 할까.’
마음 같아서는 더 건드려 보고 싶었지만, 예쁜 꽃에 달린 가시가 너무 아팠다. 솔직히 말하면 ‘가시’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귀여운 수준도 아니었다. 청루각주 백청하는 과연 그 명성만큼이나 대단한 무공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완전한 공력의 청루각주와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역대 교주들 중 가장 강력하다는 자신조차 결과를 장담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죽여 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그래, 그건 절대 안 되지.’
주세민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청하가 제 앞에서 죽는 장면을 떠올리자마자 굉장히 기분이 불쾌해졌다.
애초에 누군가를 더 건드려 보고, 더 만져 보고, 더 울려 보고 싶다는 이 감정 자체를 세민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 보는 것이었다. 아름답고 귀한 예술품을 수집하고 싶어 하는 심리와 비슷한 것일까? 그런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또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이자를 죽일 수는 없다. 다시금 세민의 배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감각이 꿈틀거렸다.
‘그래, 차라리 이대로 이곳에 가둬 두고 가시가 다 빠질 때까지 길들이면…….’
그때, 바깥에서 요란스러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 교주님, 괜찮으십니까?”
“그래, 괜찮다.”
세민이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금 전, 청하가 일으킨 푸른 벼락이 세민을 정통으로 가격하며 엄청난 굉음을 일으켰으니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는 것도 당연했다. 세민은 약간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여긴 별일 없으니 방해하지 말고 꺼져라!”
그러나 밖에서 들려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교주님! 본궁에 침입자가 있습니다!”
“……뭐?”
쿠콰콰콰쾅!
세민이 반 박자 늦게 되물었을 때,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청하가 서 있던 쪽의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미친 듯이 휘날리는 흙먼지와 쏟아지는 돌덩이를 피해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던 청하는, 다음 순간,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고함 소리에 황급히 눈을 떴다.
“스승님!”
“백진?”
청하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다음 순간, 자욱한 흙먼지를 가르며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흰빛의 영기가 세민을 향해 작렬했다. 세민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피했으나, 그 뒤로 곧장 또 다른 영기가 내리꽂혔다. 간신히 마지막 순간에 옆으로 몸을 비틀었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한 영기가 그의 왼쪽 어깨를 스쳤다. 날카로운 고통에 세민이 이를 악물자마자, 눈앞에 또다시 세 번째 영기가 작렬했다.
쿠콰쾅!
끝내 세 번째 영기에 정통으로 얻어맞고야 만 주세민이 방 안 저 구석까지 밀려났다. 청하는 지금까지의 여유롭던 모습을 벗어던진 주세민이 입술을 깨물며 내상을 다스리는 모습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때, 강한 팔 힘이 청하의 허리를 낚아채듯 끌어안았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눈앞에 딱딱하게 굳은 백진의 갈색 눈동자가 있었다. 청하는 놀라움에 무어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런 백진의 얼굴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청하의 입술이 달싹였다.
“너…….”
“청하야!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선배님!”
희뿌옇게 휘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두 사람의 인영이 더 모습을 드러냈다. 진청연과 남궁휘가 각자의 검을 뽑아 든 채 청하의 앞을 지키듯 막아섰다. 청하가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다들…… 어떻게…….”
“이러고 있을 틈이 없다! 마교 놈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으니 빨리 후퇴해!”
청연이 아직도 청하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백진을 향해 날카롭게 말하며 검을 고쳐 쥐었다. 남궁휘도 사방을 향해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청하를 향해 괜찮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청하는 얼떨떨하게 마주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남궁휘가 빠르게 말했다.
“우선 선배님께서 몸을 피하시면, 그 뒤에…….”
그 순간, 들끓는 듯한 검붉은 마기가 그들이 서 있는 곳을 덮쳤다.
쾅!
청연과 남궁휘, 그리고 청하를 끌어안고 있는 백진 사이로 강력한 마기가 작렬했다. 재빨리 옆으로 몸을 굴린 이들의 앞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의 주세민이 그의 영검인 천마검을 꺼내어 들고 서 있었다. 주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렸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세민이 일갈하며 검을 휘두르자, 그의 검에서 줄기줄기 검붉은 마기가 뻗어 나왔다. 청연과 남궁휘가 동시에 검을 들어 올리며 공격을 막아 내었으나, 강력한 마기의 후폭풍이 주변을 강타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이 뚫고 들어오며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던 주위의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긍정적인 부분은, 바깥과 연결된 벽이 온통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그들의 도주가 한층 더 용이해졌다는 점이며, 부정적인 부분은, 마찬가지로 무너진 벽의 복도 너머로 마교의 호위대가 말 그대로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는 것이다. 류재겸과 강재헌이 검을 뽑아 든 채 호위대를 이끌고 있었다.
“교주님, 괜찮으십니까?”
류재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외쳤으나, 세민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청하와 청하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백진을 불타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세민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내놔!”
“스승님은 네 물건이 아니다!”
백진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기세로 맞받아쳤다. 세민의 눈동자에서 붉은빛이 번뜩였고, 백진의 얼음장 같은 눈에서 분노와 한기가 동시에 뚝뚝 떨어져 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히는 순간, 마치 허공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청하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외쳤다.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튀어!”
대체 왜 저딴 소리를 하면서 시간을 끄는 거야?! 지금 한시가 급한데! 지금 청하의 수중에 창천검이 있었더라면, 청하는 벌써 한참도 전에 냉큼 검에 올라타 튀어 버렸을 것이다. 어검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영기가 아직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청하는 다급한 마음에 검을 쥐고 있는 백진의 손목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백진이 입을 꾹 다물고는 청하를 끌어안은 채 재빨리 청수검 위에 뛰어올랐다. 그때, 세민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게는 안 되지!”
다음 순간, 천마검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검붉은 마기가 솟아 나와 곧장 백진을 향해 쏘아졌다. 청연이나 남궁휘도 미처 막지 못한 마기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백진을 향해 노호하는 해일처럼 쏟아져 내렸다.
엄청난 공력이었다. 청하는 직감적으로 백진이 그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청하의 시야가 순간 아득해졌다. 본능보다도 빨리, 몸이 움직였다.
“스승님!”
백진이 경악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따뜻함이었다. 무언가 따뜻한 것이 청하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뒤이어 목구멍까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꽉 들어찼다. 청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다음 순간, 입술 사이로 무언가 뜨끈한 것이 흘러내렸다.
“청하야!”
“선배님!”
청연이 눈을 부릅뜬 채 소리쳤다. 남궁휘의 놀란 시선도 그를 스쳤다. 순간, 배 속이 타는 듯이 뜨거워지며 청하는 왈칵 피를 토해 내었다.
“스승님!”
백진은 제 앞을 가로막은 청하의 몸이 스르륵 무너져 내리는 것을 간신히 붙들었다. 청하는 자꾸만 흐려지려는 정신을 붙잡으며 백진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뭐해…… 빨리…… 튀라고…….”
백진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백진은 힐끗 고개를 들어 올려 이쪽을 향해 흔들리는 눈빛을 보내고 있는 세민에게 죽일 듯이 타오르는 형형한 시선을 보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백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청하를 끌어안은 채 재빨리 청수검 위에 올라타 그대로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류재겸을 선두로 한 마교의 무리들이 도망가는 백진을 저지하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세민이 벼락같이 일갈했다.
“청루각주는 손끝 하나 다쳐서는 안 된다!”
……아니……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는데?! 청하는 가물거리는 정신 속에서도 기가 차 코웃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곧장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핏덩어리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청하는 다시금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교원들이 주춤하는 틈을 타, 대나무 기운이 느껴지는 청량한 영기가 그들 앞에 방벽처럼 내리꽂혔다. 청연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화무검을 들고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곧 청연의 검 끝이 번뜩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류재겸과 강재헌을 비롯한 마교의 장로들이 청연의 검에 가로막히자, 세민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금 천마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세민이 백진의 뒤를 쫓으려는 순간, 날카로운 검날과 영기가 하늘을 뒤덮듯 쏟아졌다. 남궁 세가의 비기, 만천검무(滿天劍舞)였다. 남궁휘가 싸늘한 표정으로 주세민의 앞에 버티고 섰다.
“네 녀석은 내가 상대해 주겠다.”
남궁휘의 싸늘한 시선과 주세민의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주세민이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얼굴만 반반한 건방진 애송이가…….”
“얼굴만 그럴듯한 납치범한테서 들을 말은 아니지.”
날카로운 시선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순간, 남궁휘와 주세민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새끼 진짜 재수 없다……!’
곧, 비류검과 천마검이 굉음을 내며 허공에서 격돌했다.
* * *
흐릿한 시야 가장자리로 옅은 안개에 휩싸인 푸른 산맥이 휙휙 지나갔다. 청하는 단단한 팔이 제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는 것을 느끼며 잇새로 앓는 듯한 신음을 내뱉었다.
‘백진…….’
청하는 무어라 말을 꺼내고 싶었으나, 날아가는 검 위에서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말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이 걱정했나?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아왔지? 여기까지 밀고 들어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방금 전의 공격으로 다친 건 아니겠지? 두서없는 생각이 자꾸만 청하의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묻고 싶은 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하를 안아 든 백진은 천랑산맥 자락의 어느 구석진 동굴 앞에 내려섰다. 급하게 우연히 발견한 동굴치고는 그럭저럭 입구도 잘 숨겨져 있는 데다 깊이도 적당한 곳이었다. 청하는 백진이 조심스럽게 자신을 동굴 벽에 기대어 앉히는 것을 느꼈다. 다시금 울컥 올라오는 피를 삼키며 청하는 간신히 시선을 들어 백진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청하의 몸이 흠칫했다.
백진은 밀랍처럼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청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말로 꽉 차 있던 청하의 입술이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백진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표정으로 청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낯설었다. 백진과의 거리는 불과 일 미터도 되지 않았지만, 청하는 백진이 마치 수천 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청하의 가슴이 순간, 낯선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피 묻은 청하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백진…….”
낯선 눈동자로 한참 동안이나 그런 청하를 빤히 내려다보던 백진이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혀 청하의 앞에 주저앉았다. 청하의 시선도 백진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청하와 눈을 맞추고 앉은 백진의 입술 사이로, 처음 들어 보는 듯한 낯선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왜…….”
“…….”
“왜, 그러셨습니까.”
뭐가? 청하는 눈으로 물었다. 백진이 여전히 밀랍처럼 굳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
“왜, 제 앞을 가로막으셨습니까.”
“……왜냐니?”
간신히 청하의 입술 사이로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청하는 백진의 질문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의 앞을 가로막았냐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제자이고 자신은 그의 스승이 아닌가? 자신은, 그를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방금 전 주세민의 공력을 실은 마기를 정통으로 맞은 것이 백진이었더라면,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숨도 붙이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청하쯤 되니까, 비록 운용할 수 있는 영기는 얼마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정도의 내공을 쌓은 절정 고수쯤 되니까, 그런 마기를 정통으로 받아 내고도 이 정도 수준의 내상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청하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 묘사된 주세민의 무공 수준은 보통이 아니었다. 지금의 백진으로서는 분명 역부족이다.
그러나 백진에게 구구절절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입술도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결국 청하는 바람 빠지는 것 같은 픽, 소리를 내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스승이 되어서는 제자의 뒤에 숨어서 네가 나 대신 공격을 받고 쓰러지는 꼴을 보고 있으란 말이냐?”
“예.”
그러나 백진은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그렇게 대답했다. 심지어 백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금 끄덕이기까지 했다. 그 얼굴에서 웃음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백진은 낯선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승님은 원래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스승님께선 분명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를 버리고 희생시키셨을 겁니다.”
아…… 그래. 원작의 백청하였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청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감정도 없고, 냉정하고, 자신의 무공에만 미쳐 있었던 백청하였다면……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을지도 모르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백진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청하는 달랐다. 청하는 그럴 수 없었다.
백진이 천천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랬더라면…… 차라리, 그러셨더라면…….”
“뭐라고?”
청하는 백진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아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그때, 백진이 고개를 아래로 푹 숙인 채로 두 손을 들어 올려 청하의 양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백진이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속삭였다.
“왜…… 제게 자꾸 희망을 주시는 거죠.”
그게…… 무슨 말이야? 청하는 그저 눈을 깜빡이며 백진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백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청하의 어깨를 쥔 백진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순간적으로 백진의 얼굴에 씌워진 가면에 금이 가며 감출 수 없는 짙은 감정이 깨어진 틈 사이로 막을 새도 없이 흘러나왔다. 청하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것은 나타났던 것만큼이나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어둑어둑한 동굴에는 가라앉은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청하의 어깨를 쥔 백진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
눈을 깜빡이던 청하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파.”
문득, 백진이 고개를 들었다. 일그러져 있던 백진의 시선이 그때까지 있는 힘을 다해 청하의 어깨를 꽉 쥐고 있던 제 손으로 향했다.
“아.”
백진이 천천히 청하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 놓았다. 동시에, 청하의 입가에서 다시금 가느다란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다음 순간, 백진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순종적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청하를 향한 눈빛에는 주인을 앞에 둔 강아지 같은 충성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청하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얼굴이다. 방금 전 나타났던 고통스러운 얼굴은, 마치 겨울바람 앞에 휙 꺼져 버린 촛불처럼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백진이 청하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빨리 상처를 치료해야 합니다, 스승님.”
아…… 그렇지. 청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이 청하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손가락으로 청하의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부드럽게 닦아 내었다. 핏자국이 남아 있는 입술가에 제 입술을 지분거리며, 백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백진의 길쭉하고 단단한 손가락이 청하의 옷자락을 헤쳤다. 세민과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에서 이미 한참 전에 너덜너덜해진 옷자락은, 몇 번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백진의 손 아래에서 볼품없이 해체되며 스르륵 아래로 미끄러졌다. 훤히 드러난 청하의 상체를 내려다보던 백진의 시선이 문득 그 자리에 멈추었다. 백진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청하도 따라서 힐끗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가슴 위에서 발갛게 부어 있는 유두와 유두 주변에 잔뜩 새겨진 잇자국이 동굴 입구로 스며드는 햇살 아래에서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청하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아니, 젠장, 저 남사스러운 자국들은 대체 뭐야……!
백진의 손가락이 천천히 부어오른 청하의 유두에 가 닿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그곳에 서늘한 손가락을 가져다 댄 백진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자가…… 강제로 이곳을 만졌습니까?”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어딘지 모르게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
“예? 스승님.”
아…… 뭐라고 대답하지.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