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교주님, 괜찮으십니까.”
강재헌이 특유의 살짝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세민을 향해 열렬히 말했다. 주세민은 입가에 가늘게 흘러내린 핏자국을 손등으로 대충 문질러 닦으며 엉망이 된 자신의 침전을 슥 휘둘러 보았다.
그 청루각주조차 감탄했을 만큼 화려하고 귀중한 소장품으로 가득했던 침전은, 마치 폭풍에 휩쓸리기라도 한 듯 엉망진창으로 부서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침전을 둘러싸고 있던 사방의 벽도 거의 반파되어, 뻥 뚫린 벽 너머로 천랑산맥의 서늘한 안개가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강재헌이 세민의 입가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안타깝기 짝이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아아…… 그 건방진 정파의 개들을 그렇게 놓쳐 버린 것은 정말 뼈 아프군요. 특히 청루각주를 놓쳐 버린 것은……. 그자의 사지를 찢어 천마님의 제단에 바쳤어야 했는데…….”
세민의 미간이 명징한 불쾌감으로 찌푸려졌으나 무어라 입을 열지는 않았다. 재헌은 세민의 반응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습격자들에 대한 무시무시한 저주가 담긴 말을 퍼부어 대었다. 저쪽에서 류재겸이 어검을 타고 나타나자, 세민은 곧장 재헌을 무시한 채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흔적은?”
“끊겼습니다.”
재겸이 간단히 대답하며 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세민의 앞에 부복한 재겸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교주님.”
세민은 입을 꾹 다문 채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눈동자 위로 눈꺼풀을 반쯤 내려 감았다. 가슴속에서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이 꿈틀거렸다.
재겸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고 있는 세민의 안색을 살폈다. 한낱 인간 하나 때문에 이토록 동요한 감정을 내보이는 세민은 처음 보았다. 대체 그자가 무엇이기에. 재겸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잠시 침묵하던 세민이 휙 몸을 돌리더니 소맷자락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소맷자락 안쪽에는 아공간 주머니가 있었다. 온갖 진기하고 희귀한 보물이 넘쳐나는 강호에도 단 하나밖에 없는 그것은, 대대로 마교의 교주에게만 내려오는 마교의 보물이었다. 역대 마교주들은 오직 가장 귀하고 중요한 것들만 그 주머니에 넣어 언제나 제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가지고 다니곤 했다. 세민은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그 안에서 길쭉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세민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눈이 시리도록 빛나는 푸른 검신을 가진 청아한 검이었다. 투명하게 빛나는 검날에는 차디찬 겨울 하늘처럼 푸르른 영기가 감돌았고, 손잡이는 고요한 산에 내린 첫눈처럼 희었다. 주인의 영기를 닮은 청아하고 고아한 빛을 내뿜고 있는 그것은 바로 그 유명한 창천이었다.
세민은 눈처럼 흰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세민의 반대쪽 손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투명하고 푸른 검신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손끝으로 차갑고 단단한 감각이 파고들었다. 검의 주인과 가장 다른 점이었다. 그는 뜨겁고 부드러웠으므로. 세민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알 수 없는 감각이 세민의 속을 온통 헤집었다. 가슴이 술렁거렸다.
청하와 백진이 마을까지 가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천랑산맥 자체가 굉장히 험하고 넓은 지역이기도 했고, 너무 가까운 마을로 갔다가 혹시라도 그들을 추적해 온 마교의 무리들과 마주칠까 걱정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청하의 수중에는 검이 없었기 때문에, 청하는 어쩔 수 없이 백진의 청수검에 같이 합승한 채 백진의 뒤에 매달려 마을까지 날아갔다.
백진의 손을 잡고 검에 올라탄 청하는, 백진의 뒤에 서서 가볍게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백진은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어검을 조종하는 것에만 집중했으나, 청하는 의아한 마음으로 백진의 뒤에서 입을 열었다.
“백진아, 혹시 더운 것이냐? 왜 그리 귀가 빨개?”
아니, 겉옷까지 벗어 주고 자기는 흰 포만 하나 걸치고 있으면서 그렇게 더워할 건 뭐지? 청하는 이해할 수가 없어 백진의 붉어진 귓불과 빨간 목덜미를 빤히 바라보았다.
백진은 그저 아닙니다, 하고 대답하며 입을 꾹 다물었으나, 청하는 약간 뻣뻣해진 백진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그의 붉어진 뒷덜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때, 백진이 제 허리를 감싸고 있는 청하의 손에 슬쩍 제 손을 올려놓고는 청하의 눈치를 살피며 슬며시 입을 열었다.
“아직 스승님의 몸이 좋지 않아 혹 중심을 잡지 못하실 수도 있으니, 꼭 붙잡으십시오.”
허어…… 그런가? 그 말에 실제로 약간 겁이 난 청하는 백진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잔뜩 힘을 주었다. 혹시 진짜 떨어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청하는 고목나무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백진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백진은 제 허리를 꽉 끌어안은 청하의 손을 제 손으로 감싼 채 한마디 말도 없이 묵묵히 하늘을 날았다. 백진의 입가가 슬쩍 허물어졌다.
하루 종일 어검을 타고 날아간 청하와 백진은, 날이 저물 무렵이 되어서야 그래도 어느 정도 규모가 되어 보이는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청하가 가장 궁금해하던 것은 바로 청연과 남궁휘의 소식이었다. 일부러 좀 규모가 있는 마을까지 날아온 것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근처의 공터에 내려서 성안으로 걸어 들어간 청하는, 성문 근처의 대로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청하는 불쑥 호기심이 일어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 보았다.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는 것은 각 마을마다 소식을 전하는 방이 붙어 있는 커다란 나무판이었다. 별생각 없이 그곳을 들여다본 청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큼지막한 종이에 쓰여져 있는 커다란 글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어떠한 위엄과 박력을 내뿜고 있었다.
<무림대회의(武林大會議)>
청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무림대회의?! 오랜만에 들어 보는 낯익은 단어에 청하는 어렴풋한 기억을 필사적으로 더듬어 보았다. 무림대회의가…… 지금 열린단 말인가?! 벌써?
무림대회의는 원작에서도 언급된 사건이긴 했다. 강호에 무언가 큰일이 닥치면, 정파 연합의 내로라하는 세력들이 모두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단결하여 궐기하는 자리가 바로 이 무림대회의였다. 지금껏 기나긴 강호 역사에서도 몇 번 개최된 적이 없는 이 무림대회의는, 그러나 원작에서는 거의 후반부 끄트머리에나 등장하는 사건인 것이다.
‘아니, 비무대회는 분명 원작에서도 극초반에 벌어진 사건이었는데, 거기서 갑자기 무림대회의로 건너뛴단 말이야?’
청하는 얼떨떨한 심정이 되어 멀거니 방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역시나 무림맹에서 붙인 것이었는데, 내용 자체에는 별다를 것은 없었다. 모월 모일에 도원맹의 본산인 월정원(月停園)에서 무림맹이 주관하는 무림대회의가 열릴 예정이니, 강호의 각 문파들에서는 참석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청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원작에서 무림대회의가 왜 열렸더라……?’
사실 청하는 원작의 내용을 전부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소설 《검 끝에 걸린 달》은 아직 연재 중인 소설이었고, 청하는 그저 내용을 한 번 검수해 주던 사람일 뿐 원작자도 아니었기에 아직 연재되지 않은 뒷부분의 내용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청하가 기억하기로, 원작의 후반부에는 혈마교라는 집단이 등장하여 강호에 일대 파란을 일으킨다. 남궁휘와 주세민의 요란스러운 사랑 이야기로 떠들썩하던 강호에 갑자기 몰아닥친 피바람에, 무림맹에서는 부랴부랴 뒤늦게나마 무림대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아직 혈마교라는 집단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원작의 흐름대로라면 그들의 등장은 한참이나 먼 이야기였다. 사실 혈마교에 대한 것은 아직 원작에서도 거의 풀리지 않은 내용이었기에, 청하는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왜 벌써부터 무림대회의가 열린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청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방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때, 그의 옆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 내 생에 무림대회의가 열리는 것을 다 보다니,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마지막 무림대회의가 열린 지도 벌써 한…… 팔십 년은 되지 않았나?”
“이번 무림대회의는 도원맹의 강력한 요청으로 열린다는 얘기가 있던데? 그래서 열리는 곳도 도원맹의 본거지라고.”
“남궁 세가도 합세했다더구먼. 그, 왜, 이번에 남궁 세가의 후계자가 ‘그곳’까지 쫓아갔다지 않은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행인은 행여나 누군가가 들을까 두렵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리며 옆 사람에게 속삭였다.
“천마신궁 말이야.”
청하는 가슴이 철렁하여 저도 모르게 그쪽을 돌아보았다. 벌써 소문이 퍼졌나? 남궁휘는 어떻게 된 거지? 청연은? 그러나 자기들끼리의 대화에 푹 빠진 그들은 주변은 둘러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그것 때문에 남궁 세가에서도 적극적으로 무림대회의를 열자고 했다던 모양이로군.”
“그 후계자는 돌아왔다던가?”
“글쎄, 그랬다는 거 같기도 하고……. 그 기세등등한 가문이 후계자를 지원하러 천랑산맥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대신에 무림대회의나 열고 있는 것을 보면, 뭐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는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는 사내의 말을 들으며, 청하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청하와 함께 옆에서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진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남궁 공자와 소각주님은 무사히 몸을 빼내신 모양입니다.”
청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그럴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직접 남들의 입을 통해 소식을 듣고 나니 훨씬 마음이 놓였다. 주세민과의 충돌이 벌써 이틀 전이니, 그때 즉시 몸을 빼내어 돌아갔다면 청연과 남궁휘는 벌써 무림대회의가 열린다는 월정원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옆에 있던 사내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탄식을 늘어놓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청루각주가 납치된 사건이 아닌가. 강호에서 실력으로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초절정 고수인데, 진짜 말세지, 말세야…….”
“무림맹에서 무언가 대책을 내놓긴 해야 돼. 이거 원, 마교 놈들 무서워서 살겠나?”
그 이후로도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낮은 목소리로 마교의 횡포에 대한 개탄을 늘어놓았다. 청하는 심각한 얼굴로 백진을 돌아보았다.
“백진아, 아무래도 나도 무림대회의에 가 봐야겠다.”
백진이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청하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나 청하는 백진의 표정 따위를 살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청하는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보아하니, 이번 무림대회의가 열리게 된 것이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구나…….”
“도저히 이런 식의 만행은 더 이상 용납할 수가 없소! 마교주 주세민이라? 하, 참으로 건방진 자가 아닌가!”
서릿발 같은 목소리를 높인 사람은 단상의 중앙에 마련된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던 녹색 무복을 입은 사내였다. 그의 머리에는 붉은색으로 된 띠가 둘러져 있었고, 이마 중앙에서 빛나는 도(桃) 자는 금실로 수놓아져 높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청하는 속으로 신음을 내뱉으며 드넓은 월정원의 중심, 도화당의 앞마당을 꽉 채운 수많은 인파들과 그들 앞의 높다란 단상 위에 둘러앉은 강호 맹주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방금 전, 월정원에 도착하자마자 청하는 과연 무림대회의가 보통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무대회 때도 온 강호인들이 여기 다 모였나 싶을 정도로 바글바글했던 인파였다. 그러나 지금, 푸르른 월정호(月停湖) 자락에 세워진 거대한 월정원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은, 그러한 어중이떠중이 강호인들이 아닌 내로라하는 문파들의 수장 혹은 장로들이었다. 비무대회의 구경꾼들과는 기세부터가 달랐다. 날카로운 눈빛을 한 고수들이 도화당의 앞마당에 발 디딜 틈도 없이 들어차 있었다.
청하는 딱히 제 모습을 감추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백진과 함께 수많은 인파에 휩쓸려 얼떨결에 무림대회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단상 근처까지 밀려갔다. 청하는 일단 입을 다문 채 사람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아이고…… 하 맹주, 좀 진정하시지요.”
도원맹주 하유신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비분강개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난처한 얼굴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허연 얼굴의 사내는 분명 무림맹주 금양수일 터였다. 본디 무림맹주라는 자리가 허울뿐인 명예직일 뿐이라지만, 현 무림맹주는 역대 무림맹주 중에서도 무능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자였다. 대대로 자금력이 좋기로 유명한 금가장의 가주가 아니었더라면, 그나마 명예직인 무림맹주 자리도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금양수의 옆에는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가 펼쳐 든 접선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불쾌함은 흥분한 하유신이나 쩔쩔매고 있는 금양수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하유신이 언급하고 있는 그 ‘건방진 자’를 향한 것임이 분명했다. 곧, 여자가 탁 소리를 내며 접선을 손바닥에 내리치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강호인들로 가득 찬 양회루에 난입하여 다른 사람도 아닌 청루각주를 납치해 간 것은 그야말로 강호 전체를 향한 도발이 아니겠소? 도저히 그자의 오만한 횡포를 더 이상 보아 넘기기 어렵군.”
접선이 걷어지고 드러난 얼굴은 눈이 번쩍 떠질 정도의 미인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와 얼굴에는 감히 범인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권위가 서려 있었다. 청하는 그를 보자마자 그와 똑 닮은 누군가의 얼굴을 당장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세계관 최고 미인인 남궁휘를 쏙 빼다 박은 듯한 그 얼굴은, 분명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현 강호의 절대 강자, 남궁 세가의 가주이자 남궁휘의 어머니인 남궁서련임이 분명했다.
그때,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백의의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말씀하셨다시피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그’ 청루각주를 납치한 자입니다. 그자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다들 감정에 치우쳐 객관적인 판단력이 흐려진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겠군요.”
싸늘하고 냉정한 목소리에 하유신과 남궁서련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단상 아래쪽에서 맹주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다른 문파와 가문의 사람들 사이에도 불안하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그 누구도 쉽게 지적하기 어려워하던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놓고 지적하는 이 냉정한 말투는 제갈 세가 특유의 것이었다. 머리에는 마치 서생처럼 유건을 쓰고 몸에는 길게 늘어진 흰 장포를 걸친 제갈 세가의 가주 제갈유연은, 학선만 하나 손에 딱 들고 있으면 그야말로 제갈공명의 화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비록 청하는 제갈공명을 직접 본 적은 없었으나 그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건 제갈 세가의 컨셉인 거야, 뭐야? 청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유신이 대번에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즉, 애초에 우리는 주세민의 상대가 되지 못하니, 이대로 손 놓고 그의 만행을 지켜보기나 하라는 뜻이오?”
“그렇다기보단 현실을 직시하자는 뜻이지요.”
“그대의 말대로라면, 더욱더 우리 정파가 힘을 합쳐 주세민 그자의 오만을 꺾어 놓든, 숨통을 꺾어 놓든,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 위험한 자가 그토록 오만방자하게 강호를 휘젓고 다니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하유신이 한 치의 물러남도 없이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저기서 그에 동조하는 외침과 환호, 그리고 박수 소리가 잇따랐다. 회의의 분위기가 달아오르며 점점 더 공기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언제나 남자답고 화끈한 성미의 도원맹주는, 그 시원시원하고 정의로운 성격으로 강호인들의 피를 들끓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청하도 그 점 때문에 원작에서 하유신 캐릭터를 가장 좋아했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지금 상황은 조금 난감했다. 청하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했다.
‘주세민은 원작의 주인공인데…… 이런 식으로 그를 적대하는 게 나한테, 아니…… 정파 연합에 도움이 될 리가 없잖아?’
이곳은 소설 속 세계관이다. 무슨 수를 써도 주인공을 이길 수는 없다. 심지어 주세민은 원작에서 악역도 아니었고, 결국 모든 것은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된다. 물론 청하가 원작을 끝까지 본 것은 아니었지만 새드 엔딩이라는 말은 못 들었으니…… 뭐, 결국 주세민은 사랑하는 사람도 얻고, 남궁휘와 함께 무림도 제패하고, 뭐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사람은…… 자고로 줄을 잘 서야 되는데.’
평안하고 무탈한 인생을 보내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물론 누차 말했듯이 애초에 주세민이니 남궁휘니, 이런 사람들하고는 엮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았겠지만……. 하, 그러고 보니 정말 어쩌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거지?! 대체 원작의 흐름이 어디까지 뒤틀려 버린 거야?!
그때, 하유신과 남궁서련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냉정한 표정으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던 제갈유연이 뒤쪽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한번 말해 보거라. 그 현장에 있었으니.”
그때, 제갈유연의 뒤쪽, 길게 늘어진 그림자에 반쯤 몸이 가려져 있던 한 남자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청하의 눈이 동그래지며 대번에 반가움으로 가득 찼다. 어디서 뭘 하나 했더니, 역시 여기에 있었구먼!
제갈서윤이 제 아버지를 똑 닮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비록 그날 양회루에 있긴 했으나, 도원맹주님과 마찬가지로 마교의 교주라는 자와 직접 검을 맞대 본 것도 아니니 정확한 판단은 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저보다는 다른 분께 여쭈어야 할 것 같군요.”
제갈서윤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문 채 도화당의 안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제갈서윤의 시선을 따라 그쪽을 돌아보았으나, 청하만이 눈을 끔뻑이며 서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쟤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녀석이었나? 하긴, 원래 무표정한 얼굴을 하면 좀 싸늘한 인상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러나 제갈서윤에 대해 약간 실없고 호구 같은 캐릭터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던 청하로서는 딱딱한 표정의 서윤이 낯설기만 했다. 어쨌든 그러고 있으니 제 아비와 어찌나 분위기가 비슷하던지, 어렸을 때 어디 놀러라도 갔다가 부모 잃어버릴 걱정은 없었겠다 싶었다.
청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도화당의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다른 사람들을 따라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청하의 눈이 번쩍 커졌다.
침착한 발걸음으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자는 두 명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청하의 눈동자가 짙은 반가움과 감출 수 없는 안도감으로 밝게 빛났다.
진청연과 남궁휘가 진지한 표정을 한 채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 있었다.
‘역시 무사했구나!’
반색하고 있는 청하의 시선을 받으며, 청연과 남궁휘는 각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청연이 먼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시 운기조식을 마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남궁휘는 제 어머니의 옆자리에 앉아 단정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보다는 한참이나 연배가 높은 선배들이 앉아 있는 자리였으므로, 남궁휘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청연을 바라보았다. 청연이 그 시선의 뜻을 알아듣고 먼저 입을 열었다.
“마교의 세력은 상당하나, 천마신궁에서 본 바에 따르면 우리 정파 연합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마교의 장로 둘과 검을 섞어 보았는데, 나름의 경지에는 올라 있으나 아주 인상적일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마교주 주세민에 대해서는…… 남궁 공자의 말을 들어 보아야 할 것 같군요.”
청연의 말에 남궁휘는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들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는 남궁서련의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 내며, 남궁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마교의 교주는 내공이 상당하고, 무공도 대단한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우연인지 어떤 이유 때문인지, 마교의 사술이 제게는 통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덕분에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올 수는 있었으나,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은 아닙니다. 현재의 저보다는 분명 한 수…… 아니, 분하지만 몇 수는 위인 것으로 보입니다.”
남궁휘의 담담한 말에 도화당의 앞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던 사람들 사이로 술렁거리는 분위기가 흘렀다. 비록 아직 배분은 어리나, 후기지수 중 첫손가락에 꼽히는 남궁휘의 실력은 강호에서도 이미 모르는 자가 없었다. 남궁휘가 저런 말을 할 정도면 분명 마교주 주세민의 무공은 보통 수준이 아닐 것이다. 단상에 둘러앉아 있던 맹주들의 얼굴도 살짝 굳었다.
그러나 남궁휘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남궁휘는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또한 추가적으로 이 자리에 계시는 분들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비무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저는 의주 근처 양산이라는 곳의 동굴에서 흑마부대와 마주쳤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경악이 내려앉았다. 잠시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침묵에 휩싸여 있던 도화당은, 곧 앞다투어 그게 무슨 소리냐며 고함 섞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의 아비규환으로 꽉 찼다. 남궁서련은 이미 알고 있던 소식인 듯 그저 눈살만을 찌푸렸으나, 하유신과 금양수, 그리고 제갈유연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때, 사람들 사이의 동요가 조금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마당을 가득 메운 강호인들을 둘러보던 남궁휘의 시선이, 단상 근처에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던 청하의 것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남궁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곧 그의 눈동자가 반가움으로 반짝이며 아름다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남궁휘가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입을 열었다.
“그때 저는 청루각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당시 흑마부대를 쓸어버리신 것도 그분이니까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청루각주님께 직접 여쭈어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남궁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훌쩍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사람들을 헤치며 청하의 앞으로 다가온 남궁휘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청하를 덥석 끌어안았다.
“무사하셨군요, 선배님!”
청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저를 꽉 끌어안고 있는 남궁휘의 등을 몇 번 토닥여 주었다. 청하의 정체를 눈치챈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놀란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단상 위에서 청연이 벌떡 일어나는 것도 보였다.
“각주님!”
청연이 당장이라도 이쪽으로 달려오려는 듯 몸을 들썩였다. 청하는 부담스러운 마음에 이쪽으로 달려오려는 청연을 제지하며, 아직도 강아지처럼 저를 꼭 끌어안고 있는 남궁휘를 간신히 떼어 놓았다.
청하가 남궁휘를 떼어 놓자마자 백진이 딱딱한 표정으로 남궁휘와 청하 사이에 탄탄한 철벽같은 제 몸을 끼워 넣었다. 남궁휘가 힐끗 백진을 노려보았으나 백진은 물러나지 않고 남궁휘의 앞에 버티고 섰다.
약간 난처한 기분이 된 청하는 괜히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제 앞에서 기 싸움을 하고 있는 둘을 외면한 채 천천히 단상으로 다가갔다. 훌쩍 단상 위로 뛰어오른 청하는 둘러앉은 맹주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청루각주 백청하입니다. 본의 아니게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린 것 같아 송구스럽군요.”
무림맹주 금양수가 벌떡 일어나 청하에게 자리를 권했다. 어차피 이 자리에 참석해야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청하는 거절하지 않고 남궁휘의 자리와 청연의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청연이 바로 곁에서 염려가 가득한 얼굴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괜찮으냐, 청하야.”
청하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연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한 얼굴이었으나, 일단은 입을 다문 채 자리에 앉았다. 남궁휘도 다시 자리로 돌아오고, 백진은 조용히 청하의 뒤에 시립했다.
제갈서윤 쪽을 바라보자 그도 안심이라는 듯 싱긋 웃으며 청하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제 아비처럼 싸늘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서윤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호구처럼 싱글벙글거리는 얼굴로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청하도 슬쩍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자리에 둘러앉은 사람들과도 간단한 인사를 나누자, 남궁서련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고초가 많으셨소, 각주. 그때의 상황에 관해 우리에게 알려 줄 것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말해 주는 것이 좋겠군. 흑마부대에 관해 내 아들이 한 말은 사실이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청하에게로 향했다. 청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양산에서 흑마부대와 마주친 것은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런……!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짓이로군! 흑마부대가 얼마나 사악한 사술로 만들어지는지는 여기 계신 모두가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 주세민, 그 천륜도 모르는 자가 이미 예전에 정파 연합에서 한 번 멸절시켰던 그 사악한 것을 다시 만들어 내다니!”
도원맹주 하유신이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저기서 그에 동조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흥분하여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며 주세민에게 저주를 퍼부어 대는 사람도 있었다.
청하는 난처한 기분에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 주세민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러나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회의의 분위기는 이미 주세민을 천하에 다시없을 악당이자 인간의 도리도 모르는 사악한 괴물로 몰아가고 있었다.
청하는 난감한 기분으로 힐끗 제 옆자리에 앉아 있는 남궁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원작대로라면 주세민은 남궁휘와 이어져야 하는데, 남궁휘라도 그의 편을 들어 주지 않을까? 비록 서로에게 첫인상은 그리 좋게 남지 않은 것 같지만…….
그러나 청하의 간절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남궁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진지한 얼굴로 하유신의 격양된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눈앞에 주세민의 머리통이 있다면 단숨에 부수어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꽉 쥔 주먹을 힘차게 흔들어 대기까지 하고 있었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너희는 이어져야 한다고! 청하는 답답한 마음에 속으로 푹푹 한숨을 내쉬었지만, 딱히 그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느새 주세민은 천하에 둘도 없이 비열하고 사악한 정파 연합의 공적(公敵)이 되어 가고 있었고, 청하는 이 분위기가 못내 불편해졌다. 아니…… 이건 너무 누명이잖아?!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청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어쩔 수 없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천마신궁에서 마교주 주세민이 말하기로는, 흑마부대는 자신이 아닌 마교 내의 다른 세력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청하의 말에 제갈유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날카롭게 물었다.
“그것은 무슨 소립니까? 마교 내의 다른 세력이라니요?”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주세민이 말하기로는 마교 내에 그의 의지와는 달리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어떤 세력이 있는 듯합니다.”
“그런…… 그저 핑계가 아닌가?”
남궁서련이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으나 청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소견으로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각주가 그것을 어떻게 아시오?”
청하는 대답이 궁해 몇 번 입술을 달싹였다. 그것은…… 딱히 근거가 없긴 하지. 이곳은 소설 속 세계이고 주세민은 사실 이 원작소설의 주인공인데, 원작에서도 그런 설정은 없었다고 대답할 수도 없고.
결국 청하는 약간 궁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 제가 보기에 주세민은 그렇게까지 사악한 짓을 할 만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청하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저를 강제로 침상 위로 내리누르던 주세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으나, 청하는 재빨리 머리를 흔들어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털어 내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각주는 그자에게 납치까지 당하지 않았나?”
하유신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그게 또 그렇긴 한데…… 그때, 옆에 있던 제갈유연이 살짝 의심스럽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청루각주께서는 자꾸 마교의 교주를 두둔하는 것 같은 발언을 하십니까?”
“예? 아니…… 딱히 그런 것은…….”
“제가 듣기에는 그렇게 들리는군요. 그자가 설사 그런 말을 했다 하더라도, 당연히 거짓말이 아니겠습니까? 독사가 독을 뱉는 것이 본능이듯, 혀끝에 언제나 거짓을 달고 사는 마교의 교주라면 응당 그러하겠지요.”
“아, 아니 뭐 또 그렇게까지…….”
청하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남궁서련이 미심쩍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주세민 그자가 각주를 납치한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소?”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청하에게 날아가 꽂혔다. 자기들끼리 시끌벅적하게 목소리를 높이던 단상 아래의 수많은 사람들도 그 순간 쭉 고개를 뻗어 청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 그것은…….”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던 청하의 머릿속으로, 번개같이 어떤 생각이 스쳤다.
주세민의 말에 따르면, 흑마부대를 만들어 낸 자들은 정파의 어떤 세력과 손을 잡고 있다. 그가 청하를 납치했던 것도, 혹시 그들과 손을 잡고 있는 세력이 청루각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일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정파의 세력과 손을 잡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그들과 한패일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청하는 갑작스러운 깨달음 속에서 제 주변에 앉은 이들의 면면을 돌아보았다. 남궁서련은 반쯤 접선을 펼친 채 청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제갈유연은 미간을 찌푸린 채 청하에게 의심스럽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하유신은 팔짱을 낀 채 고집스러운 턱을 치켜들고 있었고, 무림맹주 금양수는 그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지금 그 말을 할 수는 없겠다.’
이 단상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저 아래의 마당을 빽빽히 채우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누가 그들과 손을 잡은 배신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지금 상황에서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결국 청하는 말끝을 흐리며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뭐라고 둘러대지? 살짝 당황한 청하는 아무것이나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을 뱉어 내었다.
“그…… 마교주가 제게 조금…… 개인적인 관심이 있었던 듯합니다.”
“예?”
그때까지 그저 난처한 표정만을 짓고 있던 무림맹주 금양수가 약간 얼이 빠진 표정으로 청하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남궁서련을 포함한 다른 이들도 눈을 끔뻑이며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혀를 깨물었다. 아, 젠장…… 말실수했다……. 이거 아무래도 뉘앙스가 조금……. 청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 그…… 특별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럼 무슨 뜻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의심스럽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던 제갈유연이 이제는 숫제 청하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며 추궁하듯 물어 왔다. 청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러니까…… 그것이……. 옆에서 청연이 거의 불타는 것 같은 눈으로 청하를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자가 네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청연이 이를 갈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고, 반대편에서는 남궁휘가 마찬가지로 이글거리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백진이 바라보고 있을 뒤통수에서 찌르는 듯 따끔거리는 눈초리가 느껴지는 것은…… 내 착각이겠지? 심지어 제갈서윤마저 눈썹을 치켜올린 채 청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 참…… 하하……. 청하가 어쩔 줄 모르고 어색한 미소와 함께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 갑자기 마당 한쪽 구석에서 소란이 일었다.
“무슨 일이지?”
이변을 제일 먼저 감지한 하유신이 그쪽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이들의 시선도 일제히 그쪽을 향했다.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을 헤치며 누군가가 황급히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자를 위해 길을 비켜 주었다. 무복 차림의 한 여자가 맹주들이 모여 있는 단상 앞으로 달려왔다.
난데없는 인물의 등장에 몇몇 사람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자의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입고 있는 무복도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어 무언가 큰일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게 했다. 여자가 빠르게 그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입을 열었다.
“보고드립니다! 대림현에 흑마부대가 습격했습니다!”
* * *
청하는 눈앞에 펼쳐진 넓은 정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붉은 복숭아꽃이 구름처럼 펼쳐진 정원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이곳이 바로 도원맹(桃源盟), 그 역사 깊은 문파의 본산이 자랑하는 그 유명한 도화원이었다. 청하가 서 있는 별채는 드넓은 도화원의 한 면과 맞닿아 있었는데, 도원맹을 방문한 중요한 손님들에게 내어 주는 숙소였다.
청하는 별채의 입구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 짙은 분홍색 꽃잎이 비처럼 떨어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저물어 가는 저녁노을이 붉은 꽃잎으로 덮인 정원에 붉은빛을 더했다. 누군가의 눈동자를 떠올리게 하는 그 아름다운 광경에 청하는 마음이 못내 심란해졌다.
그때, 옆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은 괜찮니?”
청하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청연이 염려가 가득한 얼굴을 한 채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자세를 바로 한 청하는 그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예, 괜찮습니다. 걱정하셨죠, 사형.”
“당연하지.”
청하의 앞에 우뚝 멈춰 선 청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청하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청하는 어색한 표정을 한 채 청연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제 온몸을 확인하듯 더듬어 내려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청연의 손바닥이 잔뜩 괴롭혀진 가슴 위를 스쳤을 때, 청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청연이 살풋 미간을 찌푸리며 그런 청하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청하는 청연의 시선을 모른 척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한참이나 그렇게 청하의 몸을 더듬으며 만져 보던 청연이, 마침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미련이 남은 손길을 떼어 내었다. 청연이 가볍게 숨을 내쉬며 들고 온 길쭉한 꾸러미를 불쑥 내밀었다. 의아한 얼굴의 청하가 꾸러미를 풀어 보니, 안에서는 검은색 검집에 싸인 검 하나가 튀어나왔다. 청연이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창천을 빼앗겼다는 말은 들었다. 이제부터 갈 곳에서는 검이 필요하겠지.”
청하는 손을 뻗어 화려한 장식 없는 정갈한 모양의 손잡이를 쥐어 보았다. 창천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으나 견고하게 만들어진 좋은 검이었다. 도원맹에서 수소문해 구해 온 검이 분명했다. 청하가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표했다.
“마침 가장 필요했던 것을 구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사형.”
“당연한 일이다.”
청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연의 눈동자가 약간 어두운 빛으로 가라앉았다. 청연의 애정 어린 손가락이 청하의 뺨을 쓸어내리다 아직도 약간 부은 기가 남아 있는 아랫입술을 슬쩍 문질렀다. 청하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자, 청연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소굴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임무에 자원하다니…… 부상도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지 않았는데.”
청하는 청연의 목소리 마디마디에 묻어 있는 숨길 수 없는 걱정을 느꼈다. 청연의 마음이 오늘따라 무겁게 청하의 어깨를 짓눌렀다. 청하는 부러 밝은 표정으로 가볍게 입을 열었다.
“흑마부대가 습격했다고 하니, 당연히 흑마부대를 상대해 본 적 있는 제가 가서 조사를 해 봐야겠지요.”
“그래도…….”
청연은 여전히 불만 어린 표정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청하를 다시금 위험한 곳으로 보내야 하는 이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더군다나 청연 자신은 청하의 곁에 있어 주지 못하는 상황이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청하는 자신에 대한 청연의 이런 걱정과 염려가 과보호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새끼를 싸고도는 어미 오리처럼 무조건적으로 저를 보호하려 드는 청연의 행동이 싫지만은 않았다. 가족도 친지도 없이 홀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세계에 떨어진 청하에게, 청연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가족에 가깝게 느껴지는 존재였다.
청하는 약간의 애교를 섞어 부드럽게 청연의 팔을 붙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형. 저는 괜찮습니다.”
청하는 방금 전 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무복을 입은 여자의 입에서 흑마부대의 습격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회의장은 발칵 뒤집혔다. 잔뜩 흥분한 사람들이 저마다 앞다투어 무어라 말을 뱉어 내었고, 순식간에 도화당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상황을 정리한 것은 남궁서련의 서릿발 넘치는 한마디였다.
[조용!]
내공을 실어 외친 남궁서련의 목소리에, 수련 정도가 낮은 강호인들 몇몇은 그 자리에서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순식간에 소란이 가라앉자 남궁서련은 냉정하지만 위엄 어린 목소리로 꿇어앉은 여자를 향해 말했다.
[습격이 언제 일어났는가?]
[3일 정도 지났습니다. 흑마부대는 한 차례 마을을 휩쓴 뒤 곧장 사라졌습니다.]
[사상자는?]
[그것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습니다. 흑마부대가 인간보다는 건물을 중점적으로 파괴했기에…….]
[건물을……?]
남궁서련이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서 제갈유연도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상하군요. 과거 나타났던 흑마부대는 철저하게 인명을 살상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도 이상하다는 듯, 저마다 불안한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남궁서련이 단호하게 말했다.
[조사단을 꾸려야겠군. 휘아야, 너는 흑마부대를 만난 적 있으니 대림현에 가서 그들의 흔적을 조사해 보도록.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보거라.]
남궁휘는 묵묵히 어머니이자 가주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공수했다. 옆에서 제갈유연이 입을 열었다.
[대림현이라면 우리 제갈 세가의 관리 아래에 있는 마을이군요. 저희 가문의 사람을 안내자로 붙여 드리겠습니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제 뒤에 서 있는 제갈서윤에게로 향했다. 서윤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듯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청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스승님!]
[각주님!]
청하가 입을 열자마자 옆과 뒤에서 곧장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청하는 일부러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맹주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흑마부대를 만난 적 있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무언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있겠지요.]
분명 그럴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흑마부대가 일으키는 만행이 주세민의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중에서 청하밖에 없었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흑마부대를 조사한다면, 분명 다른 가능성은 생각도 하지 않고 무조건 주세민과의 연관성만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것은 남궁휘도 마찬가지였다. 흑마부대의 진정한 목적을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청하밖에 없었다.
게다가 원작의 흐름이 이렇게까지 어긋난 이상, 앞으로의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단서라도 알아 두어야 했다.
[스승님, 아직 몸도 다 회복되지 않으셨잖습니까.]
뒤에서 백진이 이를 악문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하는 슬쩍 뒤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너도 따라오거라.]
[하지만……!]
그때, 남궁서련이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각주만 괜찮다면 그게 좋겠군. 그렇다면 조사단의 구성은 그렇게 하도록 하지. 내일 바로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다들 수고해 주시게.]
그렇게 80년 만에 열린 무림대회의는 끝났다. 청하가 팔자에도 없는 탐정 노릇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연유였다.
* * *
다음 날, 청하와 백진, 남궁휘, 그리고 제갈서윤은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도원맹을 출발했다.
도원맹주 하유신이 먼저 앞으로 나서며 그들의 앞길이 무탈하기를 바라는 인사를 했다. 일행들을 둘러보며 한마디씩 인사를 건넨 유신은, 마지막으로 청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도 아닌 그대가 먼저 이런 일에 자원할 줄은 몰랐다. 내가…… 아무래도…… 지금까지 그대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 같군. 사과하지.”
청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이토록 솔직하고 정직한 사과를 받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도 하지 못했기에, 청하는 끈 떨어진 종이 인형처럼 어물거리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 저, 나…… 나도 사과하겠네. 지, 지금까지 내가 뭔가 기분 나쁘게 했다면 미안하고……. 그, 사실 나는 예전부터 시원시원하고 정의로운 그대의 성격이 싫지 않았네. 지금까지는 딱히 말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런 일로 사과를 받으려니 약간 양심에 찔리긴 했으나, 어쨌든 이 기회를 틈타 청하는 잽싸게 하유신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 보았다.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원작의 백청하였을 뿐, 지금의 그가 도원맹과 척을 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청하가 원래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가 그였던 것은 사실이기도 했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내 편은 많이 만들어 놔야지.
하유신은 약간 생경한 표정으로 그런 청하를 빤히 바라보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의 귓가가 왠지 모르게 약간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음으로 청연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와 청하에게 다시금 당부의 말을 건넸다.
“아직 몸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 조심하십시오, 각주님.”
“걱정 마십시오, 소각주. 그동안 청루각을 부탁드립니다.”
조사가 얼마나 길어지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청연은 결코 청하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으나, 각주와 소각주가 모두 청루각을 비운 지 오래되었는지라 어쩔 수 없이 청연은 먼저 청루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청연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청하의 옷깃에 붙은 먼지를 부드럽게 털어 내었다. 청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주세민 그자가 너무 신경이 쓰이는구나. 흑마부대도 그렇지만, 그자가 대체 네게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 건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사형. 저 혼자 움직이는 것도 아니니 별일 없을 겁니다. 남궁휘나 제갈서윤도 항상 옆에 붙어 있을 거고, 또 백진도 있으니까요.”
문득, 청연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백진 쪽을 힐끗 바라본 청연이 거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글쎄…… 물론 백진이 충성스럽긴 하지…….”
“예?”
청하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청연이 곧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별일 아니다. 항상 몸조심하거라, 청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