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다음 날 아침, 청하는 흑마부대가 습격했다는 청루각의 수장고를 살펴보고 있었다.
청루각의 수장고는 곧 청루각의 역사와 함께한 건물이었다. 역대 청루각주들이 관리해 온 문파의 귀중품들이 보관된 수장고는, 단순히 귀하고 값비싼 재보들뿐만 아니라, 위험하거나 특수한 효과를 가진 법기들도 여러 개가 봉인되어 있었다.
청루각의 수장고는 태선봉의 뒤편에 위치해 있었는데, 흑마부대는 다른 곳에는 관심도 없이 오직 수장고만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각원들이 많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
청연이 아직도 약간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청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청연을 돌아보았다.
“아직 몸이 완전히 다 회복되지 않으셨는데, 이렇게 움직이셔도 됩니까?”
“이 정도는 괜찮단다. 다 네가…… 어젯밤 도와준 덕분이지.”
청연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청연의 눈빛은 언제나 다정하고 부드러웠지만, 오늘은 유독 더 꿀이라도 떨어질 듯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괜히 어제의 일이 생각난 청하는 슬쩍 청연의 시선을 피하며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렸다. 하아, 간신히 잊고 있었는데……. 청하를 바라보는 청연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고, 청하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괜히 바닥을 두리번거렸다.
옆에서 반파된 수장고의 내부를 살펴보고 있던 백진의 갈색 눈동자가 약간 차가워졌다.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으나, 백진은 모르는 척 자연스럽게 청연과 청하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혹시, 흑마부대가 무언가를 찾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백진이 약간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청하를 향해 다정한 시선을 보내던 청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백진을 돌아보았다. 청연의 입술이 마지못한 듯 열렸다.
“……사실 그런 생각이 들긴 했다. 사람을 노린 것이 아니라 건물을 습격했으니까.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무언가를 가져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
“혹시 그게 무엇일지 짐작이 가십니까?”
청하가 청연을 향해 물었다. 청연은 약간 어두워진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청연의 시선이 엉망이 되어 있는 수장고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자연스럽게 청하와 백진의 시선도 그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반쯤 무너져 있는 수장고와, 그 안에 보관되어 있던 재보들의 잔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수장고는 청루각 내부에서도 가장 보안이 철저한 구역이었다. 이곳에 보관된 물건들이 보통의 것이 아니다 보니, 수장고는 각원이라 하더라도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다. 지금 다른 이들은 제외하고 청하와 청연, 그리고 백진만이 이곳을 조사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수장고에 보관된 물품들의 내역을 정확히 알고 있는 자는 오직 역대 청루각주들뿐이었으나, 바로 그 청루각주 백청하는 지금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
청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수장고에 있었던 물건 중에 대충이라도 기억나는 것이 있느냐?”
그러나 청하는 그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야 단순히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아예 사람이 바뀌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청하는 한숨을 삼키며 건물의 잔해와 재보들이 엉켜 엉망이 되어 있는 수장고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정말 알뜰히도 파괴해 놨구먼. 청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뭐 하나 제대로 남아난 것이 없는 것 같은 아수라장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빛과 어둠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발아래에서 깨진 자기 조각이나 각종 보석류, 검, 그 밖의 다른 예술품들의 잔해가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밟혔다.
이렇게 많은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었다면, 분명 흑마부대는 그중에서도 어떤 특정한 물건을 노리고 침입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청하가 문득 입을 열었다.
“사형, 혹시 이곳 수장고에 붉은 돌 같은 것이 보관되어 있었습니까?”
청연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붉은 돌이라고? 글쎄, 잘 모르겠는데……. 나야 이곳에 들어와 본 적도 몇 번 되지 않으니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만. 왜, 무언가 기억이라도 난 것이냐?”
“그게 아니고, 지난번 대림현의 습격 당시 흑마부대가 제갈 세가의 사당에 봉인되어 있던 붉은 돌을 가져갔었습니다. 혹시 비슷한 것이 이곳에도 보관되어 있었나 하여…….”
청하의 설명을 듣는 청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청연이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말을 이었다.
“글쎄, 만약 이곳에도 같은 것이 보관되어 있었고 흑마부대가 그것을 찾은 것이라면, 아무래도 보통 일은 아니겠구나. 그 돌이 무엇에 쓰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청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대림현 사건 이후 서윤이 제갈 세가에 연락을 넣은 지 좀 되었던 것 같은데, 아직 답신을 받았다는 말이 없었다. 서윤한테 다시 좀 자세히 알아보라고 닦달을 해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내딛던 청하의 몸이 어둠 속에서 갑작스럽게 한쪽으로 기우뚱거렸다. 어지러운 바닥에서 무언가를 잘못 밟은 듯, 발이 앞으로 쭉 미끄러지며 미처 어찌할 새도 없이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아, 여기서 넘어지면 좀 아프겠는데.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청하의 어깨가 단단한 손아귀에 붙들렸다.
“조심하십시오, 스승님.”
백진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어느새 백진이 청하의 뒤에 바짝 붙어 선 채, 넘어지려는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청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백진을 향해 약간 민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맙구나.”
넘어지려는 자신을 백진이 잡아 준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민망하구먼. 청하는 힐끗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대체 무엇을 밟았던 것인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마음이었다.
“……이게 뭐지?”
청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발밑에 있던 것을 집어 들었다. 바로 곁에 있던 백진이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수장고 내부를 살펴보고 있던 청연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청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붉은색 물체였는데, 무언가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인 듯했다. 유심히 그것을 들여다보던 청하는 약간 확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납작하고 얇은 조각인데…… 이 붉은색은 무엇으로 칠한 것인지 모르겠군.”
“내가 한번 보마.”
청연이 가까이 다가와서는 청하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 갔다. 가만히 조각을 이리저리 돌려 보던 청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모양새가 무슨 가면의 일부 같지 않느냐?”
“가면……?”
청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피처럼 붉은색을 띤 가면이라. 순간, 청하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거…… 원작에 나왔던 혈마교의 가면이잖아?’
제갈서윤은 눈썹을 찌푸리며 손에 들린 서신을 읽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제갈 세가에서 쓰는 꽁지깃이 짧은 흰 매가 부리부리한 눈을 빛내며 발톱을 다듬고 있었다. 흰 매는 제갈 세가의 가주만이 쓸 수 있는 전령 새였다. 서윤은 차가운 낯빛으로 가주에게서 온 서신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언제나 장난기 넘치고 여유로운 한량 같던 표정이 돌덩이처럼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표정만 봐서는 도저히 아버지에게서 온 서신을 읽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윤은 들고 있던 서신을 차곡차곡 접어 손아귀에 쥐었다. 곧 서윤의 손안에서 약하게 발산된 영기가 서신을 흔적도 없이 깨끗이 태워 버렸다. 서윤은 어깨에 앉아 있는 흰 매의 깃털을 잠깐 쓸어 주고는, 품에서 작게 접힌 자신의 서신을 꺼내어 매의 다리에 매달고 그대로 하늘로 날려 보냈다.
잠시 사라지는 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서윤은 천천히 뒤로 몸을 돌렸다.
다음 순간, 서윤의 시선이 지금 막 숲 안으로 걸음을 옮겨 놓던 늘씬한 사내에게 가 닿았다. 싸늘하던 서윤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기를 띠며 부드럽게 풀어졌다. 사내를 향해 다가가는 서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대체 이 구석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청하가 머리 위로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를 치워 내며 투덜거렸다. 서윤이 웃으며 청하의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은 나뭇잎을 털어주었다.
“본가에서 흰 매가 왔는데, 아무래도 남들도 다 보는 청루각 한복판에서 서신을 펼쳐 보고 있기가 좀 그래서.”
서윤이 그런 말을 하며 자연스럽게 청하의 팔을 붙잡고는 같이 걸음을 옮겼다. 청하는 별생각 없이 서윤에게 팔을 내맡긴 채 두 사람은 천천히 태선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 대림현에 있던 붉은 돌에 대해서 제갈 세가에서는 뭐라고 해?”
서윤이 약간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그건 왜?”
“이제 슬슬 답신이 올 때가 된 것 같아서.”
청하가 방금 흰 매가 날아간 쪽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전 가문으로부터 전해져 왔던 서신의 내용이 제갈서윤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서윤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사당이 너무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이라, 그 안에 봉인되어 있던 물건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고 하더군. 하나 알아낸 건, 그 사당의 봉인은 제갈 세가의 피를 이어받은 자만이 해제할 수 있다고 해. 그래서 흑마부대가 대림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봉인을 풀지 못했는데, 하필 그때 내가 사당 안에 있던 산신상을 건드리는 바람에 봉인이 풀려서 그놈들이 그걸 가져갈 수 있었던 거야.”
청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재수도 없었군. 어쨌든, 그걸 직접 봉인해 놓은 가문에서도 그 붉은 돌이 뭔지 모른다고 하면 어떡하자는 거야?! 서윤이 미안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남궁 세가에서는? 그쪽도 알아봤다며.”
청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갈 세가에서도 모르는 것을 남궁 세가라고 알 리가 있겠어. 방금 습격당한 수장고를 확인해 봤는데, 안을 헤집어 놓은 걸 보니 거기서도 무언가를 가져갔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대림현에 있던 붉은 돌 같은 것이 청루각 수장고에도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곳에도 있었을 거다.”
청하와 서윤은 동시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태선각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던 인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세민이 느릿한 발걸음으로 천천히 그늘 아래에서 걸어 나왔다. 세민이 탐색하는 야수 같은 시선으로 서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제갈 세가에서 그 돌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는 게 신기하군. 사당을 세워 봉인까지 했다는 건 분명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의미일 텐데.”
“그 사당이 세워진 지 300년도 넘었으니 그사이에 기록이 유실된 것이겠지.”
서윤이 약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세민은 잠시 서윤을 바라보다 입가를 실룩이며 청하를 돌아보았다.
“그 붉은 돌은 혈석이라고 한다.”
뜻밖에 흘러나온 확신에 찬 목소리에, 청하와 서윤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졌다. 주세민은 그 붉은 돌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것인가? 세민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최근에서야 알게 된 정보다. 다른 말로는 소환석이라고도 하지.”
“소환석?”
청하가 당황한 말투로 되물었다. 소환석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서윤이 옆에서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소환석이라니…… 무슨 귀신이라도 소환하는 건가?”
세민은 잠시 눈을 깜빡이며 생각하다 의외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면에서는 그것도 맞는 말이겠군.”
세민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맴돌았다. 청하가 어이없다는 듯 세민을 바라보다 눈살을 찌푸리며 재촉하듯 말했다.
“그 혈석이라는 걸로 뭘 소환하는 건데?”
세민의 눈동자가 청하를 향했다. 뚫어질 듯 빤히 청하를 바라보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세민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세민의 수려한 입술 사이로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천마.”
* * *
“확실한 정보인가?”
남궁휘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세민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세민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그쪽을 향해 차가운 시선만을 던졌다. 청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한 손으로 꾹꾹 누르며 주변에 둘러앉은 이들을 힐끗 둘러보았다. 다들 말은 하지 않아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 믿기 어렵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청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민의 충격적인 발언 이후, 청하는 수장고를 살피고 있던 백진과 청연, 그리고 남궁휘까지 태선각으로 불러들여 이번 일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검은 눈동자를 가진 멀끔한 청년이 바로 그 마교주 주세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청연이 약간의 소란을 피웠으나, 곧이어 흘러나온 충격적인 이야기에 분위기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청연이 팔짱을 낀 채 세민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천마를 소환해서 무엇을 어쩌려는 거지? 흑마부대를 만들어 낸 녀석들이 정말로 마교에서 파생된 다른 세력이라면, 너도 그 목적쯤은 추측할 수 있겠지.”
그것은 청하도 궁금하던 것이었다. 세민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자, 세민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원래 천마신교는 천마를 섬기는 종교 집단에서 출발했다. 초기 천마신교는 천마를 소환해서 천마의 뜻을 이 땅에 실현시키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았었지.”
“초기 천마신교에서 그랬다는 말은,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뜻인가 보군.”
청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민은 청하를 향해 시선을 옮기며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은 그냥 다른 문파와 비슷한 집단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흑마부대를 만들어 낸 녀석들은 정말 이 짓거리에 진심인 모양이로군.”
한심하다는 듯한 세민의 목소리를 들으며, 청하는 품속에서 조심스럽게 붉은 가면의 조각을 꺼내어 들었다. 사람들의 앞에 조각을 내려놓은 청하가 말을 이었다.
“이것은 조금 전 습격당한 수장고에서 발견한 것인데, 아무래도 흑마부대를 이끌고 있는 자들이 남긴 흔적인 것 같아. 붉은 가면 조각인 것 같은데…… 혹시 이것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조각으로 향했다. 눈썹을 찌푸린 남궁휘가 손을 뻗어 알 수 없는 재질로 만들어진 가면 조각을 집어 들었다. 유심히 그것을 들여다보던 남궁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요즘에 급부상하고 있다는 신흥 사교 세력 중에 이런 붉은 가면을 쓰는 자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가주님께 듣기로는…… 분명 혈마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역시. 청하는 눈을 감은 채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들이 원작에서 등장했던 바로 그 혈마교임이 분명했다. 짐작하고 있던 것들이 점점 사실로 드러나는 것을 보며, 청하는 정리하듯 입을 열었다.
“그럼 정리를 좀 해 보지. 이 혈마교라는 집단은 최근 마교에서 갈라져 나온 신흥 사교 세력인데, 혈석이라는 붉은 돌을 모아서 천마를 소환하려고 한다, 이렇게 이해하면 되는 건가.”
“그 과정에서 흑마부대도 만들어 내고, 반로환동 같은 사장된 천마신교의 사술도 동원하고 있지.”
세민이 덧붙였다. 청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남궁휘가 여전히 찌푸린 미간을 펴지 않은 채 말했다.
“빨리 본가에 알려야겠군요.”
옆에서 제갈서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다른 문파와 세가에도 이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천마를 소환하는 데에 혈석이 몇 개나 필요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문파에서도 혈석을 보관하고 있다면 그곳이 흑마부대의 다음 공격 대상이 되리란 것은 명백했다.
“천마의 뜻을 이 땅에 실현시킨다라…….”
청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분명 혈마교 같은 집단에서 원하는 것이 세계 평화 같은 귀여운 것이 아니란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원작에서도 최종 악역으로 혈마교가 등장한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분명 원작에서도 비슷한 흐름으로 갔겠지……. 큰일이로군.’
청하는 심란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개입으로 순서가 조금 헝클어지긴 했지만, 결국 혈마교가 등장해서 천마를 소환하려 드는 흐름은 원작과 비슷하게 진행된 것 같았다. 청하의 입장에서는 나름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아직 주세민과 남궁휘 사이의 관계는 원작과는 달리 아무것도 진전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청하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세민과 남궁휘를 힐끗 바라보았다. 초조한 제 속도 모르고 두 주인공들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청하가 작게 고개를 가로젓는 사이, 청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원맹에도 빨리 소식을 알려 줘야겠군. 무림맹에도 그렇고…… 전 강호에 소식을 알려야겠다.”
백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청조를 띄우겠습니다.”
청하는 백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지금이라도 어느 정도 실마리를 잡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청루각의 습격은 막지 못했지만, 앞으로의 습격이라도 대비할 수 있다면 다른 문파와 세가에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날 청루각에 도달한 소식은, 그런 청하의 안일한 생각을 단번에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청하는 각주의 집무실에서 굳은 표정으로 도원맹에서 도달한 전서구를 받아 들었다. 긴급을 알리는 붉은 깃이 꽂힌 서신을 빠르게 훑어보며, 청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백진을 향해 탄식을 뱉어 내었다.
“도원맹에서 긴급하게 지원을 요청하는군. 흑마부대가 도원맹의 본당을 습격했다고 한다.”
백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옅은 갈색 눈동자가 심각한 빛을 띠고 청하를 향했다.
“시기를 보아하니 청루각이 습격당했을 때와 비슷한 시점인 것 같군요.”
청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신을 들고 있는 청하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현재 정파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청루각과 도원맹을 동시에 습격하다니, 보통 간이 큰 자들이 아니었다. 또한, 이제는 더 이상 자신들의 존재를 숨길 생각이 없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청하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도원맹으로 가야겠구나. 흑마부대의 첫 번째 습격은 도원맹주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막아 냈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습격이 예상된다고 하는군. 이를 막아 내기 위해 급하게 지원군을 요청하고 있다.”
백진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토록 자존심 강한 도원맹이 청루각에 지원 요청을 할 정도면 보통 상황이 아니겠군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청하는 손에 든 서신을 갈무리하며 입술을 오므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도원맹의 상황이 심각한 것은 사실인 듯했다. 청루각에 도착한 지 아직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또 자리를 비울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청하의 심란한 표정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백진이 약간 망설이다 천천히 청하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시선을 내리깐 채 서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청하가 뒤늦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청하의 바로 곁으로 다가온 백진의 그림자가 청하의 옷자락 위로 길게 늘어졌다. 백진이 부드럽게 청하의 소맷자락을 정리해 주며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스승님?”
청하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 채 백진을 올려다보았다. 뭐…… 괜찮지 않으면 어쩌겠어. 청하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 상황이 좀 걱정스럽긴 하지만…… 괜찮다.”
백진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천천히 뻗어 나온 백진의 손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청하의 손을 가볍게 잡아 쥐었다. 조심스럽게 청하의 손을 들어 올린 백진이 약간 허리를 숙였다. 눈썹을 치켜올리는 청하의 앞에서, 백진의 입술이 부드럽게 청하의 손등 위에 내려앉았다.
“……혹시 힘들다고 느끼시면…… 제게라도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백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하는 머뭇거리며 그런 백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백진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부드러운 빛을 띤 채 청하를 향했다.
청하는 백진의 손아귀 안에 잡혀 있는 제 손가락을 조금 꼼지락거렸다. 백진의 배려가 고맙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백진에게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백진이 그의 제자라서가 아니라, 청하의 고민은 이 세계에 속해 있는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청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백진의 손에서 부드럽게 제 손을 빼내었다.
“고맙구나. 하지만…… 나는 정말 괜찮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백진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청하를 내려다보는 갈색 눈동자가 약간 짙은 빛을 띠었으나 청하는 눈치채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 주거라. 급한 일만 정리하고 도원맹으로 출발하도록 하지.”
백진은 잠시 동안 물끄러미 청하를 바라보았다. 잠시 무언가 말을 할까 망설이던 백진은 결국 입을 다문 채 허리를 숙였다.
“예, 스승님.”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청하는 다시금 어검에 올랐다.
태선각의 앞마당에는 불안한 표정의 제자들이 줄줄이 서서 각주를 전송하고 있었다. 청하는 제자들의 어두운 표정을 둘러보며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무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시끌시끌한 전송을 받으며 떠나던 지난번과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였다. 청하는 가라앉은 분위기의 제자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돌아올 테니 너무 불안해하지 말거라.”
제자들과 장로들이 청하를 향해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숙였으나, 청하는 신경 쓰인다는 표정으로 몇 번이나 그들을 돌아본 끝에 어검을 출발시켰다. 청하를 따라온 일행들도 일제히 검에 올라타 그의 뒤를 따랐다. 백진은 물론이고 주세민과 남궁휘, 제갈서윤, 그리고 이번에는 청연도 함께였다.
청연의 옆으로 따라붙으며, 청하가 걱정스럽다는 듯 전음을 보냈다.
<혹시라도 몸이 안 좋다고 느껴지시면 지체 없이 제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청연이 청하를 향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걱정하지 말거라. 정말 거의 다 회복되었으니까.>
청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청연을 향해 몇 번이나 염려의 시선을 던졌다. 일행의 선두에 있던 남궁휘가 침착하게 말했다.
<도원맹까지는 거리가 좀 있는 편이니, 속도를 좀 높이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어검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청하는 일행들과 보조를 맞춰 속도를 올리며 속으로 약간의 신음을 내뱉었다. 각오를 하긴 했지만 앞으로의 일정이 만만치 않을 것이 분명했다.
‘영기가 버텨 줘야 할 텐데…….’
청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일행의 뒤를 쫓았다.
청루각이 위치한 청주와 도원맹이 위치한 월주는 아주 멀지는 않아도 제법 거리가 있는 편이었으므로, 하루 종일 거의 최고 속도로 어검을 탔음에도 어쩔 수 없이 중간에 멈춰서 숙소에 들러야 했다. 도원맹까지는 반 정도가 남은 지점이었다.
이미 시간은 한밤중이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청하 일행들 때문에 깜짝 놀란 객잔의 주인이 잠옷 바람으로 구르듯 뛰쳐나왔다.
“방 있나?”
청하가 피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장은 놀란 표정으로 그들을 위층으로 안내했다.
가장 가까운 도시의 아무 객잔에나 내려선 것이었지만, 운이 좋았는지 방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한 사람당 하나씩 방을 차지한 일행들은 다음 날의 강행군을 견디기 위해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는 방으로 흩어졌다. 운기조식 후 곧장 잠자리에 들 생각인 것이다.
간단히 몸을 씻은 청하가 막 침상 위에 자리를 잡았을 때,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청하는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문간을 바라보았다.
“들어오거라.”
청하의 말이 끝나자,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 백진이거나 아니면 청연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문 뒤에서 드러난 얼굴은 제갈서윤의 것이었다. 청하는 놀란 표정으로 서윤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서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서서는 성큼성큼 청하가 앉아 있는 침상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서윤이 청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좀 걱정돼서. 안색이 파리하던데, 혹시 몸이 어디 안 좋기라도 한 거야?”
역시 예리한 눈썰미다. 청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한시가 급했기 때문에, 청하는 중간에 내려서 다른 이들로부터 영기를 보충하는 대신 바닥의 바닥까지 남은 영기를 긁어모아 내공을 운용했던 참이었다. 다행히 영기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객잔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내공을 운용하느라 청하는 심신이 완전히 지쳐 있었다. 청하는 서윤의 눈치를 보며 어깨를 약간 으쓱였다.
“아…… 좀 피곤하긴 한데, 그래도 어디가 아픈 건 아니야.”
“맥 좀 짚어 볼게.”
서윤이 침상 곁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청하가 얌전히 팔을 내밀자, 서윤은 자연스럽게 청하의 손목을 붙잡은 채 진맥을 시작했다. 한동안 눈을 내리깐 채 청하의 맥을 짚고 있던 서윤이 슬쩍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영기 흐름이 원활하진 않은 것 같네.”
“으응…… 피곤해서 그래.”
청하가 서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서윤은 아직 그가 마음대로 내공을 운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청하가 슬금슬금 서윤에게 붙잡힌 손목을 빼내려는 순간, 서윤이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좀 도와줄까?”
“뭐……?”
청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윤을 바라보았다. 서윤은 드물게도 진지한 표정으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네 문파의 심법 말이야. 나랑도 할 수 있잖아.”
청하는 약간 입을 벌린 채 서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서윤에게서 이런 제안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청하는 약간 당황한 눈으로 서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그거야 그렇지만 너까지 도와줄 필요는 없어. 백진도 있고 소각주도 계신데…….”
“나는 안 돼?”
서윤이 다시금 물었다. 청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아니 딱히 안 될 건 없지만……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청하가 약간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굳이 네가 도와주겠다고 한 적 없었잖아.”
“자주 도와준 건 아니지만, 너 기억 잃기 전에는 나랑 자기도 했는데, 뭐.”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서윤의 말에, 청하는 순간적으로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어지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 그래…… 그 얘기는 옛날에도 듣긴 했다만……. 청하가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을 달싹이자, 서윤이 약간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랑은 그보다 훨씬 더 한 짓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나만 안 될 건 없잖아.”
청하는 눈을 끔뻑이며 서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서윤의 목소리에는 무언가 평소 느껴 보지 못했던 묘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뭐지? 청하는 서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서윤은 평소에 실없는 소리도 많이 하고 짓궂은 농담도 자주 던지긴 했지만, 지금 그의 표정에는 장난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정말 진심인 것 같았다. 평소와는 약간 다른 분위기가 신경이 쓰이긴 했으나, 모처럼 저를 향해 진지한 눈빛을 던지고 있는 서윤을 애써 거절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청하는 머뭇거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조금만 부탁하도록 할게.”
“그래.”
청하의 말이 끝나자 서윤은 천천히 청하가 앉아 있는 침상 위로 옮겨 앉았다. 어색한 표정으로 그런 서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청하와는 달리, 서윤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청하의 두 팔을 붙잡은 채 가까이 몸을 붙여 왔다. 서윤의 한쪽 손이 천천히 청하의 뺨을 감쌌다. 청하가 약간의 긴장감이 어린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서윤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린 순간, 서윤의 고개가 부드럽게 청하를 향해 숙여졌다.
“……응…… 으음…….”
청하의 속눈썹이 천천히 위아래로 깜빡였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고, 서윤의 혀가 청하의 입술을 가볍게 핥아 왔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서윤의 혀가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청하의 입술 사이로 부지불식간에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도 모르게 슬쩍 시선을 들어 올린 청하는, 반쯤 눈을 내리깐 채 입맞춤에 열중하고 있는 서윤의 표정을 보고 약간 놀란 심정이 되었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녀석이었나…….’
문득 청하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쳤다. 평소와는 달리 서늘한 표정이 내려앉은 서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낯선 느낌이 들었다. 청하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 사이, 서윤의 혀가 더욱더 깊숙이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제는 나름대로 익숙해진 질척거리는 소리가 좁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읏, 하으…… 으음…… 하아, 응…….”
청하는 가빠 오는 숨을 삼키며 서윤의 영기를 착실히 흡수해 나갔다. 확실히 몸 안으로 타인의 영기가 흐르며 움직이지 않던 청하의 내공과 섞이자, 피곤에 지친 몸 상태가 아까보다 훨씬 더 나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유일하게 이 세계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인물과 아무도 없는 좁은 방 안에서 혀를 섞고 있는 이 상황이 약간 어색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어쨌든 서윤의 영기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한동안 입맞춤을 이어 가던 청하는, 어느 정도 영기를 흡수한 것이 느껴지자 주춤거리며 제 팔을 붙들고 있는 서윤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었다. 어차피 피곤함이 가실 정도로만 영기를 흡수할 생각이었던지라,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서윤은 석상처럼 그 자리에 붙박인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황스러움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순간, 서윤이 무게를 실어 청하에게 몸을 기울여 왔다. 순식간에 무게 중심이 기울어진 청하는, 어, 하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만 침상에 등을 대고 누워 버리고 말았다. 당혹스럽게 눈을 치켜뜨는 청하의 위로 서윤의 그림자가 떨어졌다.
“아, 으…… 잠깐, 무슨…… 읍…….”
잠시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불만 어린 소리를 뱉어 내던 청하의 입술이 다시금 순식간에 서윤의 입술로 막혀 버렸다. 탄탄한 몸이 청하의 몸을 짓누르며, 뜨거운 혀가 거침없이 입천장 안쪽 민감한 점막을 문질러 대었다. 청하는 당혹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었으나 서윤의 아래에 깔린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서윤의 커다란 손이 청하의 뺨을 감싸고는, 고개를 기울여 더욱 깊게 혀를 밀어 넣었다. 빈틈없이 맞물린 입술 사이로 헐떡이는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새어 나왔다. 혀뿌리 아래를 간질이고 입 안을 휘젓는 서윤의 혀가 낯설었다. 제 몸을 짓누르는 무게감도 마찬가지였다.
서윤의 혀가 민감한 곳을 찌르듯 훑어내릴 때마다 청하의 몸이 조금씩 떨렸다. 이리저리 몸을 비트느라 흐트러진 옷자락 사이로 서윤의 반대쪽 손이 파고들었다. 판판한 배와 늘씬한 허리를 훑고 올라간 서윤의 커다란 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단단한 손끝이 민감한 돌기를 스치는 순간, 청하의 놀란 눈동자가 그를 뚫어질 듯 내려다보고 있던 서윤의 눈과 마주쳤다. 문득, 거침없이 움직이던 서윤의 손이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
잠시 굳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던 서윤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짙은 색을 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는 청하의 눈동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청하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던 서윤의 손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청하를 짓누르고 있던 무게감이 옅어지더니, 서윤이 입술을 떼고는 몸을 일으켰다. 빈틈없이 맞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지자, 청하는 급하게 숨을 들이켜며 헐떡이는 숨을 뱉어 내었다. 청하가 주춤주춤 몸을 일으키며 서윤을 노려보았다.
“뭐야 너, 갑자기 왜 그래?”
서윤은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청하를 바라보았다. 서윤의 얼굴에는 또다시 그 알 수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뭐야 진짜,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는 거야? 청하는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그런 서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의 서윤은 뭔가가 이상했다. 지금까지 청하가 알던 제갈서윤이 아닌 것만 같았다. 미간을 찌푸린 청하가 다시금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인 순간, 서윤이 피식 미소를 지으며 한쪽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미안, 놀랐어?”
서윤이 반쯤은 곤란한 듯하기도 하고, 또 반쯤은 장난기 어린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서윤은 평소와 똑같은 빙글거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장난 좀 친 거야.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청하는 무어라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 그저 그런 서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청하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너…….”
그러나 청하가 무어라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서윤이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얼마나 영기가 필요한지 몰라서 좀 오래 해 봤어. 안색을 보니 아까보단 훨씬 나아진 것 같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편하게 쉬어.”
서윤은 청하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제 할 말만 그렇게 쏟아 내고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문으로 향했다. 문간에서 잠시 멈춰 선 서윤이 살짝 고개를 돌려 아직도 멍하게 침상 위에 앉아 있는 청하를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약간 가라앉은 것 같은 서윤의 눈동자가 청하를 향했다.
“……잘 자.”
그 말을 끝으로, 서윤은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홀로 텅 빈 방에 남은 청하는 잠시 동안 서윤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뭐야, 진짜?”
청하의 입술 사이로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의 제갈서윤은 정말 이상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청하는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으며 흐트러진 옷자락을 추스르고는 침상에 몸을 뉘였다.
모르겠다, 일단 자고 나서 생각하자. 영기를 흡수한 덕분인지, 아까보다 훨씬 가벼워진 몸에 빠르게 수마가 덮쳐들었다. 따뜻한 물속에 잠겨 드는 것처럼 순식간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서윤의 가라앉은 눈빛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청하는 빠르게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