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수레바퀴가 터덜거리며 굴러갔다.
멱리로 얼굴을 가린 늘씬한 여자가 입을 꾹 다물고는 수레의 짐칸에 탄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늙은 말 한 마리가 수레를 끌고 있었고, 마부석에는 키가 훤칠한 청년이 긴 머리를 하나로 묶어 내리고는 챙이 넓은 삿갓을 쓴 채 한가로이 수레를 몰고 있었다. 얼핏 보면 제법 평화로워 보이는 장면이었다.
중원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인 강주로 통하는 길은 비교적 평탄했으며, 그럭저럭 관리도 잘되어 있었다. 강주에 거의 근접했을 무렵부터는 길바닥에 돌까지 깔려 있어, 낡아 빠진 수레로도 제법 속력을 낼 수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침묵 속에서 수레를 몰던 청년이 힐끗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직도 화가 난 건 아니겠지?”
“…….”
청하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팔짱을 낀 팔을 풀지 않았다. 세민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래도 덕분에 아침도 얻어먹고 좋지 않았나.”
“……난 이미 예전에 벽곡 수련을 끝내서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다고 했을 텐데.”
“간밤에 그리 힘을 썼는데 뭐라도 든든히 먹어야지. 체력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던데, 평소에도 보양식 같은 것 좀 챙겨 먹고 그래.”
청하는 기가 막힌다는 듯 하, 하고 코웃음만을 뱉어 내었다. 세민이 슬쩍 청하의 눈치를 살폈다. 청하가 냉랭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객잔 주인에게 쓸데없는 소리까지 했나?”
“뭐어…… 수레를 빌리려다 보니…….”
“주인장이 날 얼마나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봤는지 알기나 해?”
세민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거슬리면 내가 죽이겠다고 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마!”
결국 청하는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세민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들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큰 소리는 내지 않는 게 좋겠군. 모처럼 그런 옷까지 입고 변장을 했는데 말이야.”
청하는 씩씩거리는 호흡을 애써 가다듬으며 다시금 단단히 팔짱을 꼈다. 세민은 청하 쪽을 힐끗거리며 다시금 착실히 수레를 몰았다.
청하가 이토록 싸늘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제 그 난리를 쳐 놓고는 피곤하지도 않다는 듯 아침 일찍부터 일어난 세민은, 괜스레 아래층을 어슬렁거리다가 새벽부터 객잔을 쓸러 온 주인장과 마주쳤다. 세민은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주인장에게 강주까지 타고 갈 만한 마차나 수레를 빌려 달라는 말을 던졌다. 그리고 세민은 망설이고 있는 주인을 향해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제 부인이 어젯밤 너무 무리를 해서 꼭 수레를 타고 갔으면 좋겠다는 핑계를 대었던 것이다.
결국 주인장은 수레를 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아침상까지 거하게 따로 챙겨 주었다. 세민은 뻔뻔한 얼굴로 아침상을 받아 들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청하가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무렵에는 주인장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청하 쪽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청하로써는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민이 둘러댄 핑계가 완전한 거짓말도 아니라는 점이 더욱 그러했다.
“어쨌든 그래도 덕분에 빨리 도착했군.”
세민이 중얼거리며 저 앞에 높다랗게 솟아 있는 성문을 바라보았다. 청하도 하늘거리는 면사 너머 그쪽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계화성은 남부 상권의 중심이자 넘쳐나는 부유함으로 이름 높은 강주의 중심 도시였다. 그 유명한 계화성의 붉은 성문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위풍당당하게 우뚝 서 있었다. 현재 정파 연합을 이끌고 있는 최고 명문가, 남궁세가의 본관 역시 바로 이곳에 있었다. 청하는 속으로 긴장을 삼키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벌써부터 온 거리에 우리를 찾는 안내문이 쫙 깔려 있고 그런 건 아니겠지?”
청하의 긴장된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세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안으로 들어가면 가능한 한 말을 하지 말도록. 내가 다 알아서 하겠다.”
과연 다 알아서 할 수 있을까? 청하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세민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그 역시 별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꾹 다문 채 북적이는 인파에 섞여 자연스럽게 성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도 멱리로 얼굴을 가리고 삿갓을 푹 눌러쓴 채 수레를 타고 있는 두 남녀를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수레를 멈춰 세우는 사람도 없었다. 청하와 세민은 무사히 성문을 통과해서는 계화성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어디로 가지?”
세민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청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우선은 남궁세가 쪽의 동향을 확인하는 것이 제일 급선무일 것 같았다. 청하가 세민을 향해 물었다.
“남궁세가가 마지막 남은 혈석을 관리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아무래도 남궁세가의 본관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겠지?”
세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제갈세가에서는 다른 마을의 사당에 봉인해 놓고 있긴 했지만, 그런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가문의 장원에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역시 남궁세가 쪽에 한번 가 봐야겠군.”
청하의 말에 세민은 두 번 묻지도 않고 그쪽으로 수레를 몰았다.
남궁세가의 본관은 계화성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계화성 북쪽에 자리 잡은 야트막한 언덕 전부가 남궁세가의 땅이었다.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청하는 무언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세민도 그것을 느낀 것인지, 마부석에 앉아 뒤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분위기가 흉흉하군.”
실로 그러했다. 청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고 있는 무림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짙은 남색의 도복을 걸치고 있는 것을 보면, 남궁세가의 가솔들인 것이 분명했다. 청하는 면사 아래에서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객잔의 주인장이 슬쩍 언급하기로는 남궁세가의 가주가 총동원령을 내려 강호 여기저기에 나가 있던 식솔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더니, 정말로 본관의 주변에는 온통 굳은 표정의 남궁세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더 가까이 가도 괜찮겠나?”
세민이 청하 쪽을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주변 거리를 거닐고 있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남궁세가 사람들이긴 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한 다른 많은 사람들도 호기심에 넘치는 눈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흠, 이 정도면 조금 더 가까이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청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하와 세민이 탄 수레가 사람들을 헤치고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자, 저 앞에 활짝 열려 있는 남궁세가의 대문이 보였다. 문 근처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 서 있었다. 세민이 수레를 멈춰 세우고 말했다.
“내려야겠다.”
청하는 군말 없이 휙 몸을 일으켜 수레 아래로 뛰어내렸다. 평범해 보이는 여인의 날랜 움직임에 주변 사람들 몇몇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른 청하의 옆으로 다가간 세민이 자연스럽게 청하의 허리에 한 손을 올렸다. 청하가 면사 뒤에서 세민을 향해 허튼짓하지 말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었지만, 세민은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어쩔 수 없이 청하 역시 세민의 곁에서 나란히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그저 금슬 좋은 부부처럼 보이는 다정한 모습이었다.
대문 근처까지 다가간 청하는, 안쪽에 더욱 많은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모여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얼굴에, 공기에는 긴장감이 넘쳤다. 마치 전투라도 준비하는 듯한 일촉즉발의 모습이었다.
‘와, 진짜 분위기 장난 아니다.’
안쪽을 유심히 살피던 청하는,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유독 시선을 잡아끄는 얼굴을 발견했다. 마치 여자처럼 아름답고 선이 고운 얼굴이었다. 순간, 청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남궁휘……!’
오랜만에 보는 남궁휘의 얼굴에 청하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남궁휘가 이곳에 있다는 말은, 즉 도원맹에 있던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에 따라 흩어졌다는 뜻이었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총동원령을 내렸으니 남궁휘가 가문으로 돌아오는 것은 당연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백진이나 청연은 어디로 갔을지, 청루각으로 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혹시 남궁휘를 따라 이곳으로 오지는 않았을지, 청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때, 심각한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던 남궁휘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대문 바깥에서 웅성거리며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별다른 표정 없이 둘러보던 남궁휘의 시선이, 문득 청하의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남궁휘의 커다란 눈동자가 똑바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마치 예전 무림대회의 때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그때도 남궁휘는 도원맹에 모여 있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정확히 청하를 찾아내었었다. 청하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설마…… 날 알아본 건 아니겠지?’
상식적으로 그럴 리가 없었다. 지금의 청하는 적어도 겉으로는 전혀 무림인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는 모습이었다. 검 하나 들고 있지 않은 데다, 심지어는 여성의 옷을 입은 채 머리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멱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자신이 청루각주 백청하임을 알아본다면, 남궁휘는 무공을 닦을 것이 아니라 점집을 차려야 했다.
세민도 남궁휘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심기가 불편한 듯 몸을 꿈틀거렸다.
“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거지?”
순간, 청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자신이 아니라 세민의 모습을 알아본 것은 아닐까? 세민 역시 평범한 여행객의 복장을 한 채 얼굴 태반을 가리는 커다란 삿갓을 푹 눌러쓰고 있긴 했으나, 훤칠한 키와 탄탄한 체격은 평범한 사람들 틈에서 지나치게 눈에 띄는 감이 있었다. 청하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혹시 우리를 알아본 거 아냐?”
“글쎄…….”
세민이 석연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음이 급해진 청하는 세민의 옷소매를 마구 잡아끌었다.
“어, 어떻게 좀 해봐! 난 그렇다 치고, 널 알아본 거면 어떡해.”
“날 알아봤다고……?”
세민이 드물게도 난처한 표정을 지은 채 눈썹을 찌푸렸다. 초조해진 청하는 면사 뒤에서 슬쩍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에 와서는 다른 곳으로 슬쩍 몸을 빼기도 여의치 않았다. 그들의 주변은 이미 다른 사람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어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고, 이미 남궁휘의 주목을 끈 상황에서 행여나 소란이라도 일으켰다간 정말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청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쩔 수 없지…….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연기라도 하는 수밖에.
다음 순간, 청하는 어깨를 움츠리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세민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심각한 표정으로 웅성거리고 있는 사람들과 흉흉한 분위기가 무섭다는 듯, 청하는 세민의 품으로 파고들며 매달리듯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순간적으로 세민의 몸이 당황한 듯 뻣뻣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세민은 곧장 청하의 의도를 눈치챘다. 세민은 자연스럽게 청하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겁에 질린 부인을 안심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세민이 부드럽게 청하의 어깨와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멱리 너머로 무언가를 속삭인 청하가 고개를 숙인 채 세민의 품에 몸을 기대자, 세민은 삿갓을 끌어 내리며 듬직하게 청하의 몸을 감싸 안았다. 다정하고 애틋하기 그지없는 젊은 부부의 모습이었다.
그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남궁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동안 그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남궁휘가 마침내 천천히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궁휘의 관심이 그들에게서 완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청하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이제 그만 놔도 돼.”
그러나 세민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청하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엔 힘을 주었다.
“……내 말 못 들었어?”
“언제 다시 이쪽을 돌아볼지 모르는데, 확실하게 해야지.”
뻔뻔한 목소리에 청하는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내뱉었다. 은근슬쩍 허리를 쓸어내리는 세민의 손등을 사정없이 꼬집으며, 청하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대체 뭘 하는 거지.”
사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흑마부대를 상대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거겠지. 당장이라도 전투가 벌어질 것을 대비하고 있는 것처럼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까지 안쪽을 기웃거릴 수 있도록 대문을 활짝 열어 둔 채, 안에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보통 외부 세력이 가문의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 호법진을 준비하는 것이 정석일 텐데…….
마찬가지로 남궁세가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세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세민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안쪽에 모여 서 있는 남궁세가의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세민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왠지 느낌이 영 좋지가 않군.”
“…….”
그것은 청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어라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왠지 알 수 없는 찝찝한 느낌이 청하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확실히, 뭔가 느낌이 별로 좋지 않은데.
세민이 빠르게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이만 돌아가지.”
청하 역시 두말하지 않고 세민을 따라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들이 막 발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저 멀리서 날카로운 휘파람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딘가 스산하면서도 불길함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순간적으로 청하와 세민의 고개가 동시에 그쪽으로 휙 돌아갔다. 청하의 눈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빛이 어렸다.
“설마…….”
청하와 세민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세민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자 청하는 세민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이는 분명 도원맹에서 한 번 들어 본 적이 있던 그 소리였다. 그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는 자는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흑마부대다! 전투 준비!”
남궁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남궁세가의 사람들에게 소리치는 것이 보였다. 소가주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주변에 모여 서 있던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순식간에 대열을 정비하고 각자 무기를 뽑아 들었다. 남궁휘가 외쳤다.
“폐문!”
그 즉시 몇 사람이 달려가더니 방금 전까지 활짝 열려 있던 남궁세가의 대문이 굳게 닫혔다. 문 뒤에서 무거운 빗장을 닫아거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흑마부대에게 담이나 문 같은 것은 물리적으로 큰 의미가 없을 것이나, 진법의 결계를 강화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터였다. 얼마 있지 않아, 청하는 문 안쪽에서 강력한 진법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대문이 닫히자 청하와 세민은 더 이상 안쪽의 상황을 살필 수가 없었다. 청하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마부대가 대체 어느 쪽에서 습격한 거지?”
세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세민의 날카로운 시선이 빠르게 남궁세가의 본관 일대를 훑었으나 별달리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계화성 북쪽의 언덕에 자리한 남궁세가의 장원은 무척 넓었고, 어느 방향에서든 습격이 가능했다. 세민이 여전히 찌푸린 미간을 펴지 않은 채 말했다.
“일단 이쪽 방향은 아닐 것 같군.”
그들이 있는 곳은 계화성 중심부로 이어지는 거리가 있는 쪽이었다. 대부분의 구경꾼들 역시 이쪽에 몰려 있었다. 흑마부대 자체에는 아무런 이지가 없었으나, 교활하기 짝이 없는 혈마교가 그것들을 부리고 있는 이상 괜한 장애물이 많은 이쪽 방향으로 남궁세가를 습격할 것 같지는 않았다.
세민이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청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일단 이곳까지 온 이상, 흑마부대가 마지막 혈석을 가져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러나 남궁휘까지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남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 역시 탐탁지 않았다.
청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말했다.
“일단 흑마부대가 습격한 곳으로 가자.”
그곳에서 상황을 보아 행동을 결정할 생각이었다. 남궁 가는 현재 무림에서 가장 위세를 떨치고 있는 강력한 무력 집단이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어쩌면 이들은 정파 연합 중 처음으로 흑마부대를 완전히 몰아내고 혈석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청하는 그런 희망 섞인 상상을 하며 세민과 함께 빠르게 남궁세가의 거대한 담장을 따라 달렸다.
남궁세가의 서쪽으로 이어진 언덕은 지형이 험했고, 그 때문인지 다른 인기척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청하는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사람들의 고함 소리, 강한 영기의 부딪힘을 느낄 수 있었다. 청하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인 것 같군.”
세민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세민이 약간 석연치 않은 눈빛으로 높게 솟아 있는 남궁세가의 담장을 올려다보았다. 세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쪽이 확실한가?”
그러나 청하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담장 안쪽에서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높다랗게 울려 퍼졌다. 청하의 마음이 급해졌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마, 남궁휘는 아니겠지?
청하가 다급히 말했다.
“서둘러!”
그리고 청하는 재빨리 뛰어올라 가볍게 담장을 딛고는 그 위로 날아올랐다. 입을 꾹 다문 세민이 빠르게 청하의 뒤를 쫓았다.
순간적으로 담장 위로 올라온 청하는 재빨리 아래쪽을 둘러보았다. 담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소란스러운 싸움 소리와 함께 영기의 빛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청하는 신중히 몸을 숨긴 채 빠르게 그쪽으로 달려갔다.
마침내 청하가 소란의 근원지에 다다랐을 무렵, 갑작스레 넓은 공터가 펼쳐졌다. 사방에 흩어진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무기를 뽑아 들고 혼전을 벌이고 있었다. 청하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긴장한 청하의 시선이 흑마부대의 흔적을 찾아 몇 번이나 공터를 이리저리 오갔다.
그러나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흑마부대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청하는 당황한 눈으로 제자리에 우뚝 멈춰선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그저 검을 뽑아 든 채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아무 곳에나 영기를 쏘아 대고 있는 남궁세가의 사람들뿐이었다. 순간, 청하의 등골을 따라 불길한 기운이 흘러내렸다.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비로소 청하의 뇌리를 스쳤다.
“함정이다!”
세민이 청하의 뒤에서 이를 악문 채 낮게 소리쳤다. 청하는 즉시 몸을 빼내기 위해 땅을 박찼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청하의 머리 위에서 선녀의 날개옷처럼 촘촘하게 짜인 커다란 그물이 떨어져 내렸다.
이것은 지난번 도원맹에서 제갈세가의 사람들이 펼쳤던 영기의 그물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이었다. 그때는 순수한 영기로 이루어진 형체 없는 그물이었다면, 이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법기였다. 무척 강력한 제어 주술이 걸려 있는 이 그물은, 아마 남궁세가에서 대대로 보관해 온 유서 깊은 보물일 터였다.
청하는 어떻게든 그물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틀었으나 거대한 그물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치맛자락 아래에 감춰 두었던 검을 꺼내 휘둘러 보았으나, 창천검도 아닌 평범한 영검으로는 그물에 구멍을 내기는커녕 흠집 하나 낼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물이 몸에 닿자, 설상가상으로 청하는 제 몸에서 순식간에 영기가 빠져나가 그대로 그물에 흡수되는 것을 느꼈다. 청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자식들이……!”
청하의 옆에서 마찬가지로 그물에 걸린 세민이 길길이 날뛰는 것이 보였다. 단숨에 천마검을 뽑아 든 세민은 무시무시하게 일렁거리는 강력한 마기를 일으키며 당장이라도 그물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듯 난폭하게 날뛰었다. 실제로 세민을 뒤덮은 그물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연약하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영력을 제어하는 정도로 마기를 제어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 그물을 조정하고 있던 남궁세가의 가솔들 사이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쯤 하도록. 더 이상 날뛴다면 청루각주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마구 날뛰던 세민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청하는 휙 몸을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서련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청하의 입술 사이로 낭패감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남궁세가의 가주가 움직였다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 정도까지 준비를 한 것에서 어느 정도 짐작하긴 했지만, 남궁세가는 정말 작정하고 그들을 사로잡으려 한 것이 분명했다.
남궁서련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고 있는 세민을 바라보았다. 남궁서련의 아름다운 입술 끝이 비틀렸다.
“과연…… 천하의 마교주 주세민이 청루각주의 안위를 신경 쓴단 말이지. 제갈유연의 말이 사실이었군.
“청루각주를 놔줘.”
세민이 남궁서련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남궁서련은 차가운 눈으로 세민을 바라보았다.
“청루각주를 납치한 죄,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나는 납치한 것이…….”
“납치한 게 아니라면, 청루각주가 제 발로 널 따라가기라도 했다는 것이냐?”
남궁서련이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녕 청루각주가 정파 연합의 배신자란 말이냐? 문파와 동료, 사형제와 제자들을 등지고 배신한 채 사특한 마교주와 손을 잡은 것이 사실이란 말이냐?”
세민은 입을 다물었다. 세민의 짙은 색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빛이 번뜩였다. 잠시 침묵하던 세민이 목구멍 저 안쪽에서 짓씹는 것 같은 목소리를 뱉어 내었다.
“……내가 청루각주를 납치했다.”
청하의 고개가 휙 그쪽으로 돌아갔다. 청하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냐, 그렇지 않……!”
“내가, 강제로 청루각주를 납치해서 억지로 이곳까지 끌고 온 것이다.”
세민이 청하의 말을 자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청하는 당황한 눈으로 세민을 바라보았지만 세민은 결코 이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남궁서련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서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주 주세민의 죄질이 매우 좋지 않군. 죄인을 끌고 가라!”
남궁세가의 가솔들 몇몇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세민이 두려운 듯 우물쭈물거리는 기색이었으나, 세민은 그들이 억지로 저를 끌고 가는 순간에도 반항 한 번 하지 않았다. 청하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세민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그러나 세민은 청하를 바라보며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민의 검붉은 눈동자가 가만히 청하를 향했다.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품고 있는 듯한 깊은 눈빛에, 청하는 그만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을 달싹였다.
세민은 그대로 남궁세가 사람들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 청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런 세민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본관 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청하는 그들의 선두에 남궁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청하의 신경은 온통 멀어져 가는 세민을 향해 쏠려 있었다. 청하를 발견한 남궁휘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청하 곁으로 다가온 남궁휘가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선배님. 하지만 선배님을 구하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용서해 주세요.”
날 구하다니? 청하의 머릿속에 느릿한 의문이 떠올랐다. 대체 날 누구에게서 구한다는 거지? 주세민에게서? 하지만…… 그의 손을 잡은 건 나 자신인데. 그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서기로 결정한 건 나 스스로의 의지인데.
그때, 남궁휘의 뒤쪽에서 눈에 익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제갈유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청루각주는 마교주와 함께 움직이는군. 제가 분명 청루각주를 잡으면 마교주 주세민도 함께 잡을 수 있을 거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청하를 바라보는 제갈유연의 시선에는 경멸이 묻어 있었다. 마치 배신자를 바라보는 듯한 차갑고 싸늘한 눈빛이었다.
청하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청하는 비로소 남궁휘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청하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즉, 제갈유연의 고발로부터 청하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뜻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그들은 세민을 청하의 납치범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청하의 머리 한구석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동시에 갈 곳 없는 분노로 뒤통수가 뜨끈해졌다.
청하는 차가운 시선으로 제갈유연과 남궁서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청하의 입술 사이로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체 이게 무슨 짓들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빙설처럼 싸늘한 인상의 미인이 서리라도 내릴 듯한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자 순식간에 주위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남궁서련은 별다른 말 없이 입을 꾹 다문 채 청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으나, 제갈유연은 코웃음을 치며 청하를 향해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니, 그것은 이쪽에서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청루각주? 도원맹의 본원에서 건물을 부수기까지 하며 도망간 것은 각주가 아니오? 이게 바로 마교주 주세민과 손을 잡았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분노로 청하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들이 이렇게 나올 것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으나, 막상 정말로 이런 상황이 닥치자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청하는 제갈유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말을 뱉어 내었다.
“그보다 그쪽이 마음대로 날 도원맹에 감금하고 외부와의 연락 수단까지도 전부 차단해 버린 것이 먼저 아닙니까? 분명 정파 회의를 열겠다는 명목으로 잠시 신병의 구속을 허락했던 것인데, 그 약속은 지켜졌습니까?”
제갈유연은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청하는 그대로 남궁서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남궁세가의 가주께선 도원맹과 제갈세가로부터 정파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전갈을 받으셨습니까?”
남궁서련이 미간을 찌푸렸다. 남궁서련이 제갈유연을 향해 힐끗 시선을 던지고는 다시금 청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청루각에서 띄운 청조를 받은 이후로, 나는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던 혈석을 지키기 위해 정신이 없었네. 하지만 도원맹으로부터 아무런 전갈을 받지 않은 것은 확실하군. 제갈세가에서도 마찬가지로 연락을 받지 못했다.”
청하는 기가 막힌 심정으로 제갈유연을 바라보았다. 짐작했던 사실을 직접 확인받으니 더 어이가 없었다. 청하가 제갈유연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것은 대체 어떻게 설명하실 생각입니까?”
제갈유연이 미처 입을 열기 전, 불쑥 어떤 사람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건 내가 설명하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청하는 창백한 얼굴의 하유신이 도원맹의 사람들 몇 명을 거느린 채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하유신의 안색으로 보아, 지난번 흑마부대와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하유신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당시 네 거취에 대해 제갈세가의 가주와 나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나는 본래 얘기했던 대로 곧장 남궁세가와 무림맹에 연락해 정파 회의를 열자는 입장이었지만, 제갈세가에선 그 전에 너의 신병을 제갈세가의 본관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뭐……?”
청하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하유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청하의 입술 사이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체 왜?”
유신은 드물게도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유신이 난감한 표정으로 힐끗 청하의 눈치를 살폈다.
“그건…….”
유신이 말꼬리를 흐리는 사이, 남궁휘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갈세가의 본관 근처에 절멸옥이 있기 때문입니다.”
청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순간적으로 남궁휘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절멸옥은 무림맹이 관리하는 유서 깊은 감옥으로, 죄를 지은 거물급 무림인들을 투옥하는 용도로 쓰였다. 한번 그곳에 들어가면 목숨과 무공이 전부 절멸할 때까지 나오지 못한다 하여 그런 무시무시한 이름이 붙은 곳이었다.
그러나 거의 백 년 가까이 계속되어 온 평화로운 시대 덕분에, 현재 절멸옥은 과거의 유물이 되어 옛 명성만을 남긴 채 텅텅 비어 있었다.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절멸옥에 들어갔던 죄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곳이 언급된 것이다.
청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청하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가 정파 회의에서 유죄로 판명 날 것이 확실하니, 절멸옥 근처에 있는 제갈세가의 본관으로 옮겨야 한다는 뜻인가?”
“……혹시 모를 도주의 위험이 있으니, 예, 그렇습니다.”
남궁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하가 말문이 막혀 있는 사이, 남궁휘가 어두운 얼굴로 청하에게만 들리도록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선배님께서 그렇게…… 사라지신 후, 저희는 선배님께서 분명 마지막 혈석이 있는 남궁세가로 오실 것이라 생각하고 강주로 오기로 했습니다. 저와 도원맹주, 그리고 제갈세가의 가주님이 먼저 움직이고, 나머지 분들은 그 뒤를 따르기로 하였지요. 마침 가주님께서 총동원령을 내리시기도 했고……. 그러나 이곳에서 선배님을 기다리는 사이, 저희는 흑마부대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뭐? 청하는 휙 몸을 돌려 남궁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깜짝 놀랄 만한 말이었다. 이미 흑마부대가 이곳을 습격했단 말인가? 청하의 놀란 표정을 본 남궁휘가 씁쓸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혈석은 빼앗겼어요.”
청하의 입술 사이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결국 그들은 마지막 혈석까지 전부 빼앗긴 것이다. 순간적으로 청하의 맥이 탁 풀렸다. 그토록 중요한 마지막 혈석이 빼앗기는 장면은 직접 보지도 못했다. 청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이미 혈석까지 빼앗긴 상황에서, 오직 날 붙잡기 위해 이런 함정을 꾸몄다는 것이군.”
“……죄송합니다.”
남궁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비로소 상황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것 같았다. 청하는 새어 나오는 한숨을 막지 못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남궁휘가 제갈유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마교주 주세민은 이미 자신이 청루각주를 납치한 것이라 인정했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주세민을 데려가셨으니, 청루각주님의 일은 이제 불문에 부치십시오.”
역시, 그런 조건이었던 것이군. 청하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제갈유연이 청하를 배신자로 고발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남궁세가에서는 차라리 주세민을 넘겨주고 청하를 구하기 위해 이 작전에 동의한 것이다.
이제 상황은 이해가 갔으나,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남궁휘의 말을 들은 제갈유연은 대답하는 대신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제 이해득실을 따져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주세민을 얻은 것은 분명 대단한 성과였으나, 이대로 청하를 놓아주는 것이 내키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제갈유연이 대답을 하지 않고 시간을 끌자, 남궁휘가 초조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하셨잖습니까!”
그때, 청하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남궁휘의 말을 가로막았다. 청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 전에 내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단숨에 청하에게로 집중되었다. 청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 자신이 나서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지, 너무 무모한 시도는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청하의 머릿속에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끌려가던 주세민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 한구석이 싸늘하게 가라앉으며 심장이 거칠게 쿵쿵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대로 세민을 팔아넘긴 채 모른 척 제 안위만을 쫓을 수는 없었다.
청하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청루각주의 신분으로서, 지금 이 자리에서 정파 회의의 개최를 요구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술렁이는 목소리가 흘렀다. 남궁세가의 사람들과 제갈세가의 사람들, 그리고 하유신까지도 놀란 표정으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선배님!”
남궁휘가 다급한 목소리로 청하를 향해 말했다.
“선배님과 관련된 일은 불문에 부치는 조건으로 주세민을 제갈세가에 넘긴 겁니다. 굳이 다시 정파 회의를 여실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청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청하가 정파 회의를 요구하는 것은 그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세민은 지금까지 충실하게 청하의 곁을 지켜 왔다. 여기서 그와는 상관도 없는 자신 때문에 죄인처럼 정파 연합 사람들에게 끌려갈 이유가 없었다. 청하는 어떻게든 세민을 지킬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청하는 고개를 빳빳이 든 채 제갈유연을 노려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는 저, 청루각주와 도원맹주, 남궁세가와 제갈세가의 가주까지 있으니, 정파원로 5명 중 무림맹주를 제외한 네 분이 계신 상황입니다. 정파 회의를 열기에 충분한 인원인 것으로 보이는군요. 다른 시간과 장소를 정할 필요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정파 회의를 개최할 것을 요구합니다.”
남궁서련의 흑단같이 새까만 눈이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남궁서련의 입가가 재밌다는 듯 꿈틀거렸다.
“좋소, 각주. 과연 그대의 말대로 지금 이 자리는 정파 회의를 열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군. 그대가 제시하는 회의의 안건은 무엇이오?”
청하는 심호흡을 했다. 지금, 말해야 한다. 지금이 아니라면 할 수 없었다.
청하의 시선이 똑바로 제갈유연을 향했다. 청하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안광이 번뜩였다. 청하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이 자리에서,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유연이 혈마교와 손을 잡은 정파 연합의 배신자라는 의혹을 제기하겠습니다.”
주변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청하와 제갈유연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갈유연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러나 청하는 순간적으로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난폭한 안광이 그를 향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청하는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남궁서련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각주. 방금 그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오. 제갈세가에서 그대를 정파의 배신자로 고발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이런 상황에서 역으로 제갈세가의 가주를 배신자로 지목하는 것은, 자칫 자신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누명을 씌운다는 오해를 살 수 있소.”
청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이유로 저자를 고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거가 있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청하의 진지한 답변에 주변에서는 당황스러운 술렁임이 지나갔다. 남궁휘도 놀란 눈으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청하는 지금 이 자리에 제갈서윤이 있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어떻게든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처럼 쿵쾅거렸으나, 청하는 어떻게든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부러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자꾸 저를 계속해서 정파의 배신자로 몰아가려는 저의를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설사 마교주 주세민과 손을 잡았다 하더라도, 마교는 혈마교와 다른 집단입니다. 이 모든 사건의 배후는 혈마교이니, 그들과의 연결 고리를 캐는 것이 순리겠지요. 하지만 제갈세가의 가주는 자꾸만 그 논점을 흐린 채 저와 주세민의 관계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남궁휘가 동그래진 눈으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긴장한 청하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청하는 그대로 다음 말을 이었다.
“또한, 도원맹에 저를 감금한 채 계속 시간을 끌었던 것도 이상합니다. 그 당시 도원맹은 흑마부대의 공격을 받아 혈석을 빼앗긴 상태였고, 그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머지 혈석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당장 남궁세가로 지원군을 보내도 부족할 판에, 저와 주세민의 관계를 꼬투리 삼아 쓸데없이 시간을 끌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모자라 저를 제갈세가로 데려간다는 명분을 위해 다른 곳에는 연락도 하지 않고 헛되이 며칠을 낭비한 것도 저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청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이제 주변은 쥐 죽은 듯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청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덧붙었다.
“결국 남궁세가에서 보관하던 마지막 혈석도 빼앗겼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남궁세가 가솔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남궁서련은 안색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뚫어질 듯 청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남궁서련의 새까만 눈동자가 천천히 차갑게 가라앉았다. 청하는 몸을 돌려 제갈유연 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는 이 모든 것들이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행해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청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제갈유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청하의 입술이 천천히 달싹였다.
“바로 혈마교를 돕는 것입니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기 속에서 마치 손으로 잡힐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남궁서련이 고개를 돌려 제갈유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돌처럼 무겁고 단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고발에 대해 제갈세가의 가주는 어찌 답하시겠소?”
남궁서련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제갈유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제갈유연을 향해, 남궁서련이 충고하듯 입을 열었다.
“잘 대답해야 할 거요. 매우 설득력 있는 고발이었으니.”
남궁휘 역시 청하를 바라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휘의 얼굴에 비로소 약간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남궁휘가 청하를 향해 입술을 움직였다.
‘정말 잘하셨어요.’
순간, 청하의 가슴을 가득 채웠던 긴장이 탁, 하고 풀어지며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행히 생각보다 괜찮았던 모양이지? 청하는 애써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제서야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유신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의혹 어린 눈으로 제갈유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하의 말에 상당히 설득된 것이 분명했다. 무림맹주가 이 자리에 없었으므로, 남궁서련과 하유신이 전부 청하의 편을 들어 준다면 지금의 판을 뒤집는 것도 결코 불가능하지 않았다. 청하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희망이 자라났다. 제갈유연이 혈마교와 손을 잡았다는 의혹이 힘을 얻으면 반대로 청하와 세민의 혐의는 더욱 옅어질 것이고, 마교의 교주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하게 죄인 취급을 받고 있는 세민을 구명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제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전부 제갈유연에게로 집중되었다. 제갈유연의 학자 같은 고고한 얼굴에는 여전히 별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으나, 소맷자락을 꽉 움켜쥔 손가락이나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턱을 보면 그가 꽤나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긴장감 넘치는 침묵이 흘렀다. 제갈유연이 어떤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분위기 역시 점점 더 가라앉아 갔다. 제갈유연을 바라보는 수십 쌍의 눈초리에도 점점 더 의혹의 빛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청하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승리의 예감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잘하면, 내가 이길 수도 있겠군.’
청하의 가슴은 이제 아까 전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빨리 지금의 상황을 마무리 짓고 세민을 구해 내야겠다는 생각이 청하의 마음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때, 지금 이곳에서 들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익숙한 목소리가 단번에 청하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중요한 말씀을 나누시는 와중에 송구하오나, 급하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갈유연에게 향해 있던 시선이 순식간에 그쪽으로 쏠렸다. 마찬가지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던 청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청하의 입술이 멍하게 벌어지고 그 사이에서 신음 소리에 가까운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백진…….”
그곳에는 백진이 굳은 표정의 제갈서윤과 청연과 함께 서 있었다. 남궁휘가 말했던 후발대가 마침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이로써 얼마 전 도원맹에 있었던 이들 전부가 다시금 이곳에 모두 모이게 되었다.
청연이 애틋한 눈으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걱정과 염려에, 청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청연을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청연이 입술을 꾹 깨물며 마주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들의 안부 인사는 끝이 났다. 청하는 천천히 백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청하는 약간 착잡한 표정으로 지난번의 고백 이후 처음으로 마주하는 백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백진은 며칠 전에 비해 상당히 날카로운 인상이 되어 있었다. 언제나 부드럽게 빛나던 옅은 갈색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으며, 단정한 얼굴에는 본 적 없던 냉막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달라진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백진은 청하를 바라보지 않았다.
청하는 순간,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위화감을 느꼈다.
“백진……?”
청하가 이번에는 조금 더 커다란 목소리로 백진을 불렀다. 그러나 백진은 여전히 청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백진의 옅은 갈색 눈동자는 딱딱한 빛을 품은 채 힐끗 남궁서련을 향했다가 천천히 제갈유연을 바라보았다. 정파의 맹주답게, 남궁서련이 먼저 나서서 입을 열었다.
“급하게 할 말이라니 무엇이냐?”
그녀의 시선이 백진과 함께 온 제갈서윤과 청연 쪽을 향했으나, 그들 역시 백진의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사전에 의논한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백진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저는, 청루각의 수장이자 제 스승인 청루각주 백청하를, 혈마교의 공범이자 정파 연합의 배신자로 고발합니다.”
* * *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경악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모든 사람들이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백진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청하 역시 마찬가지로 그저 멍한 표정으로 백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백진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머릿속에 잘 입력되지가 않았다.
“뭐……?”
청연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청연의 얼굴에서 새파란 안광이 번뜩였다. 다음 순간, 청연의 두 손이 순식간에 백진의 멱살을 잡아채었다.
“이 자식,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진정하시오, 소각주!”
남궁서련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으나 청연은 백진의 멱살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얼어붙게 했던 경악의 순간이 지나가고, 사람들은 저마다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들 제가 들은 것을 믿지 못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삽시간에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조용!”
남궁서련이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사자후를 내질렀다. 영기의 파동이 주변을 휩쓸자, 수련이 약한 몇몇 사람들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주변에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남궁서련이 단호한 표정으로 청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저자는 정식으로 정파 회의에 배신자를 고발한 것이오. 이 자리에서 무력 사용은 삼가 주기 바라네.”
청연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랐으나, 이 자리에서 더 이상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남궁세가의 가솔들 몇 명이 청연을 제지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으나, 청연은 그 전에 먼저 백진의 멱살을 놓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청연은 여전히 백진을 노려보고 있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씹어 뱉듯이 말을 뱉어 내었다.
“네 스승을 고발하다니, 네가 제정신이냐? 드디어 미쳐 버린 것이야?”
“모욕적인 언행은 삼가시오, 소각주.”
남궁서련이 여전히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궁서련은 그대로 백진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권위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대, 청루각의 제자는 네 고발의 중대성을 알고 있느냐? 근거는 있는 말이겠지? 제대로 된 근거도 없이 그와 같은 패륜적인 고발을 한 것이라면, 무거운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남궁서련이 경고하지 않아도 백진을 바라보는 청연의 살기 어린 눈빛을 본다면 누구든 그리 생각할 것이다. 청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모든 것들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묘하게도 현실감이 잘 느껴지지가 않았다. 백진이 나를 고발한 건가? 대체 어째서? 무엇 때문에? 굳어 버린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남궁서련의 엄한 말투에 백진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백진은 여전히 청하 쪽을 바라보지 않은 채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우선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알고 계신 분들이 많지 않으시겠지만, 저의 스승님께선 몇 달 전 크게 앓으시고 난 뒤로 기억을 잃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부터 저희 스승님께선…….”
백진은 놀람으로 눈이 휘둥그레진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백진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더욱 짙은 빛으로 가라앉았다. 백진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되신 듯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백진의 말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청하는 마치 연극을 구경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백진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백진이 지금 대체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갑자기 왜 자신을 고발하는 것인지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청하는 무심코 청연 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백진으로부터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청연 역시 청하를 향해 초조한 시선을 던졌다.
청하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백진과 청연 정도뿐이었다. 청루각 외부의 사람들 중 청하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청루각주 백청하가 마교의 독에 당해 쓰러졌다는 소문이 돌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었고, 청루각에서는 한 번도 공식적으로 외부에 그러한 사실을 공표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청하가 정말로 습격을 당했는지, 습격을 당했다면 회복은 했는지, 회복 후 무언가 달라진 점은 없는지와 같은 것들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바로 그러한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굳이 청루각주가 직접 지난번 비무대회에 참가했던 것이 아닌가.
하유신이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비무대회에서 오랜만에 만났을 때도 성격이 무척 달라졌다고 생각하긴 했지.”
남궁서련이 신중하게 백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백진은 침착하게 남궁서련과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살짝 눈을 아래로 내리깐 백진이 천천히 말했다.
“그 이후부터 스승님께서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이유로 그전과는 무척 다른 행동을 하셨습니다. 스승님께서 회복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청루각에는 일단의 마교 사람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쳐들어왔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겠지요.”
이것은 청루각 외의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했던 이야기였으므로 다들 놀란 눈으로 백진을 바라보았다. 백진이 약간 뜸을 들이며 말을 멈추었다.
“스승님께서 몇 달 전 크게 앓으셨던 것은, 바로 마교의 독에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 독에서 회복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마교의 무리들이 청루각에 예고도 없이 쳐들어왔습니다. 원수나 다름이 없으니 보통이라면 큰 충돌이 일어나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이상하게 그때도 마교는 아무런 충돌 없이 물러갔습니다. 그때 청루각에 찾아왔던 마교 사람들 중에 실력이 아주 뛰어난 복면 사내가 하나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백진이 말끝을 흐리며 찬찬히 주변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자가 바로 마교주 주세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당황스러운 침묵이 주변에 내려앉았다. 백진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 하는 마교주 주세민이 왜 독을 보낸 당사자에게 찾아온 것인지, 스승님께서는 어째서 독을 먹인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충돌 없이 물러가게 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모종의 연대가 있지 않다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문득 두 분이 어떤 접점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독 사건을 꾸민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모론이다. 멍하게 백진을 바라보고 있던 청하의 머릿속에 천천히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백진이 한 말 중에 사실이 아닌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럴듯한 말로 사실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얼핏 보아서는 정말 수상쩍은 정황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청하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백진이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왜 저런 짓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남궁서련의 날카로운 눈이 청하를 향했다.
“저 말이 사실이오, 각주?”
청하는 순간적으로 화들짝 놀라 남궁서련을 바라보았다. 마치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고 있던 배우가 갑작스레 관객석에 있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아득하던 현실감이 갑작스레 수면 위로 끌어올려지며, 먼 곳에서 웅성이고 있던 것 같은 소음이 순식간에 청하에게로 다가들었다.
“아…….”
청하의 마음속에 갈등이 솟아올랐다. 그 복면 사내가 주세민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중에 그 혼자뿐이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거짓말을 할까 하는 생각이 청하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청하는 결국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청루각에 찾아온 마교 사람들 중에 마교주 주세민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침착하자…… 일단 뭐라도 대답해야 해. 술렁이는 사람들을 향해, 청하는 틈을 주지 않고 곧장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저도 그자가 주세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마교에서 저를 찾아온 이유는, 저에게 독을 보낸 것이 마교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라는 사실을 해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이들이라면, 그 역시 혈마교의 짓이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주장이지?”
“마교의…… 주세민의 주장입니다.”
남궁서련이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각주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로 마교를 보내 주었단 말인가?”
청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청하로서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주세민이 굳이 거짓말을 해 가면서까지 그런 짓을 할 만한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쉽게 설득된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이 몸에 들어오게 된 이상 청하로서는 제게 독을 보낸 자들이 마교이든 마교가 아니든 별 상관도 없었을뿐더러, 딱히 엄청난 복수심에 불타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때는 영기도 거의 없었던 데다 도와줄 이들도 마땅치 않았으므로, 어떻게든 그저 무사히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백진 역시 당시의 상황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저리 뻔뻔한 말을 뱉고 있으니 청하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청하는 어쩔 수 없이 약간 궁색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그저 그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해 믿은 것뿐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가 없지 않나?”
하유신이 미심쩍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혈마교라…… 그들의 실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어. 오직 너와 마교주만이 혈마교라는 집단에 대해 말하고 있지. 그들이 정말 실존한다는 것은 누가 증명하지?”
“지난번 도원맹에서 붉은 가면을 쓴 자가 흑마부대를 부리는 것을 보지 못했나?”
청하가 답답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하유신은 여전히 찌푸린 미간을 펴지 않았다.
“그자가 마교의 일원이 변장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에 있나? 누구나 붉은 가면쯤은 쓸 수 있어.”
청하의 숨이 턱 막혀 왔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의심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청하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설마하니 혈마교의 실체 자체를 문제 삼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원작에서 혈마교가 등장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청하는 혈마교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원작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백진이 다시금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한, 지난번 주세민이 스승님을 납치해 갔을 때에도 대체 그가 왜 하필 스승님을 납치해 간 것인지, 그곳에서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청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백진을 노려보았으나 백진은 여전히 청하를 바라보지 않은 채였다. 청하의 가슴이 점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때,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으로 일관하던 제갈유연이 청하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역시 그때부터 주세민과 함께 손을 잡고 이 모든 일들을 꾸민 것이로군.”
이제 제갈유연은 다시금 평정심을 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제갈유연이 차가운 눈으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청루각주는 마교주와 손을 잡고 있지도 않은 혈마교라는 가상의 집단을 만들어 우리들을 현혹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오? 저자들이 흑마부대와 혈석을 가지고 무슨 짓을 꾸미려는 것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마지막 말은 남궁서련을 향한 것이었다. 청하는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제갈유연과 백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를 신경 쓰지도 않은 채 각자 하고 싶은 말을 내뱉고 있을 뿐이었으나, 마치 사전에 모의라도 한 것처럼 손발이 척척 맞았다.
‘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청하의 마음속에 문득 어떤 깨달음이 스쳤다. 청하는 씁쓸한 고통과 충격 속에서 저를 바라보지 않는 백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백진은 배신자였다.
백진과 제갈유연은 한패였다. 그들이 바로 정파의 배신자이자, 정체를 알 수 없던 혈마교의 공범이었다.
솔직히 조금 전 청하가 제갈유연을 몰아붙일 때만 하더라도, 그는 자신이 하는 말에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제갈유연이 여러모로 수상쩍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어떤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청하는 그저 정황상 몇 가지 의심스러운 점을 언급하며 주세민에 대한 혐의를 벗겨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청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백진은, 그의 수석 제자는 정파 연합의 배신자였다. 대체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갈유연과 백진은 오래전부터 혈마교를 위해 일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지금 그들은 청하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었다.
충격적인 깨달음에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갈 곳을 잃은 청하의 시선이 어지럽게 주변을 배회했다. 그러나 청하가 혼란스러워하는 도중에도 상황은 계속해서 변해갔다. 내부 고발자가 등장하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청하에게 너무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흔들리던 청하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남궁휘의 얼굴에 가닿았다. 남궁휘는 아름다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청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휘가 붉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다음 순간,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남궁휘가 남궁서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선,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청루각주님의 신변은 저희 남궁세가에서 맡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순간적으로 남궁서련의 새까만 눈동자가 아들을 향했다. 남궁서련의 눈이 가늘어졌으나 남궁휘는 어머니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매달리듯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남궁서련이 입 속으로 쯧, 하고 작게 혀를 찼다.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갈등하던 남궁서련은 결국 제갈유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 그대들의 말은 알겠네. 잠시 이쯤에서 멈추고 각자의 고발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겠군. 그리고 그동안 청루각주는 우리 남궁세가에서 보호하도록 하겠네.”
“그게 무슨…… 저자는 죄인입니다!”
제갈유연이 즉각 반발했으나 남궁서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런 단언을 내리기엔 시기상조가 아닌가.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어.”
차갑게 말을 뱉은 남궁서련이 턱을 치켜들었다.
“이 자리에 무림맹주가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무슨 결정이라도 내리자는 말인가? 그리고 청루각주뿐만 아니라, 그대에 대한 고발도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제갈유연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듯했다. 남궁서련이 빠르게 말을 맺었다.
“내일 다시 논의를 재개하도록 하지. 지금 당장 무림맹에 연락을 넣어 무림맹주를 불러들이도록 하라.”
그리고 청하는 남궁휘를 비롯한 남궁세가의 사람들에게 겹겹이 둘러싸인 채 남궁세가의 본관으로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