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4)

6.

수호의 상담이 끝난 것은 여덟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집에 들러서 옷을 갈아입은 그는 밀로드MILORD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신현제의 등에 매달린 기타를 도저히 빼앗아올 방법이 없었기에 그는 장일에게 기타를 빌리기로 한 것이다. 가게에 도착하니 열 시가 넘어 있었다. 우장일이 맡기고 간 기타를 받아들고 가게 구석에 앉아 뚱땅거리기를 삼십 분.

항상 사용하던 기타가 아니라 소리가 낯설긴 해도 자신의 싸구려 기타와는 질적으로 다른 깊은 소리가 났다. 드럼도 잘 치는데 좋은 기타까지 갖고 있는 우장일에게 약간의 질투를 느끼며 이수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갈게요.”

이수호는 민혜나 사장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래. 잘 가라. 근데 너 오디션 나간다면서.”

태섭에게 슬쩍 얘기한 사실이 이미 민 사장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수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너에게는 독이 될지 득이 될지 모르겠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괜찮아요. 어린 나이에도 이런 재능이 있다는 걸, 사람들은 좀 알 필요가 있어요.”

민 사장은 자신만만한 얼굴을 한 수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요즘 노래 만들고 있는 건 어때?”

“좋죠, 당연히. 죽음, 죽음.”

이수호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그의 어색한 장난에 민 사장은 볼을 토닥여주었다.

“빨리 가. 아까 보니까 비 오는 거 같던데.”

“그래요? 우산 있어요?”

“저기, 하나 있어.”

이수호는 구석에 세워져 있는 비닐우산을 집어 들었다. 이거라면 간신히 기타가 비에 젖지 않도록 가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는 가게에 있던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쏟아지는 비를 보며 이수호는 자신이 가진 우산으로 기타를 무사히 보호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 ……음.”

기다리는 수밖에.

이수호는 입구에 서서 비가 잦아들길 기다렸다. 하지만 빗줄기는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더 거세질 뿐이었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다시 가게로 올라가야 하나 고민을 하던 그의 눈에 익숙한 남자의 인형(人形)이 들어왔다.

“……뭐야.”

신현제였다. 아이를 안듯이 기타를 앞으로 끌어안고 그 위에 교복을 입혀놓은 모습이 지독히도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우산을 기타에 씌워서 혼자서 비에 쫄딱 젖은 신현제는 빠른 걸음으로 건물의 입구 안으로 들어왔다.

“어…….”

이수호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자 신현제가 놀랐는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수호 역시 말없이 뺨을 긁적거렸다.

학교에서 그 지랄을 떨고 이렇게 다시 만나니 몹시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푸른 카디건으로는 담벼락에서 헤어지고 처음이었다.

“오늘 공연은…….”

신현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못 했어요.”

이수호의 시선이 기타에 머물러 있음을 확인한 신현제의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기타를 제시간에 건네주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자신이 없어서 공연을 혼자 해내지 못한 사실에 대한 뿌듯함, 어색함, 난감함. 그리고 약간의 설렘까지.

“그거.”

이수호가 기타를 가리키자 신현제가 교복재킷으로 둘둘 말아놓았던 기타를 내려놓았다.

“악! 악!”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이수호가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기타를 끌어안았다.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에는 기타를 바닥에 함부로 내려놓았다가는 측판이 뒤틀릴 수도 있었다. 이수호는 깐수호라서 이렇게 대놓고 기타에 대한 집착을 드러낼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비 안 맞게 하려고 하긴 했는데.”

신현제가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기타에 둘러져 있던 교복 재킷에는 박성곤의 명찰이 달려 있었다. 그는 신현제를 교실에 붙들어 놓은 일등 공신이었다. 교복 재킷이 벗겨진 채 집으로 돌아갔을 박성곤을 떠올리자 이수호는 슬며시 웃음이 났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구한 비닐봉지로 기타 헤드 부분이 칭칭 동여매져 있었다. 신현제가 기타를 보호하려고 나름 최선을 다했음을 확인한 이수호는 타오르던 분노가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요.”

이상한 기분이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피를 토하는 분노를 담아 칠판에 신현제를 잡아라 라고 휘갈겨 썼는데, 지금은 이렇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부득부득 억지를 써서 기타를 전해주러 온 신현제가 기특해 보이기까지 했다.

학교에서의 이수호와 밀로드MILORD의 푸른 카디건의 마음이 다르다니. ……이렇게 가다가 이중인격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문득 고개를 드는 불안감에 이수호는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무거워요? 들어줄게요.”

수호의 표정을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한 신현제가 손을 내밀었다.

“됐어요.”

“내가 매니저니까 내가 메죠.”

거절을 해도 소용없었다. 신현제는 다시 건네주었던 기타를 빼앗아 들다시피 해서 자신의 어깨에 멨다. 됐다고 말해도 신현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수호는 한숨을 내쉬다가 계단 위로 올라갔다.

“어디 가요.”

그렇게 묻는 신현제의 표정에서 초조함이 스쳐 갔다.

“이거 갖다 주고 오려고요.”

자신의 기타를 찾았으니 장일에게 빌린 기타는 짐이 될 뿐이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차라리 가게에 맡기고 가는 편이 자신과 우장일의 기타의 안녕을 위해서도 좋았다.

“금방 갔다 올게요.”

이수호는 가게로 올라가 기타를 맡기고 돌아왔다. 신현제는 기타를 멘 채, 입구에 서서 수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빨간 눈의 귀신이 멍한 얼굴을 하고 쪼그려 앉아있었다.

빗줄기는 전보다 한층 더 거세어졌다. 신현제의 옆에 선 이수호는 눈가를 찡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신현제도 같이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표정은 오히려 밝아 보였다.

비가 점점 거세어지자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도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입구에는 둘만 남게 되었다. 더는 구경할 것이 없자 빨간 눈의 귀신조차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이수호는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려면 한참이 걸릴 것 같았다.

신현제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의 옆에 앉았다. 물론 기타는 자신의 무릎에 곱게 올려둔 채.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병신. 술버릇은 해괴망측해서 괜히 사람 쪽팔리게.

이수호는 손바닥으로 열이 오르는 뺨을 문지르다 기타나 만져야겠다는 생각에 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줘 봐요.”

신현제가 순순히 기타를 건넸다. 이수호가 기타를 자신의 무릎에 올려두고 케이스를 벗겼다. 다행히 록산느는 온전한 자태를 드러냈다. 오래된 싸구려 기타지만 이수호는 무엇보다 자신의 기타를 아꼈다. 용돈을 모아 낙원상가에 가서 이 기타를 사 오던 날을 잊지 못한다. 혼자 기타 교본을 사서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피가 나도, 행복했던 그날들을.

이수호는 손가락으로 지판을 짚으며 기타의 스트링을 손끝으로 퉁겼다. 귀에 익은 소리가 흘러나오자 마음이 안정되었다.

신현제가 주머니를 뒤적거려 동전을 꺼냈다.

“한 곡.”

“…….”

어김없이 백 원짜리 동전이었다. 이수호는 이제 따지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공짜로 노래를 불러주고 싶은 생각은 없어 동전을 받아들었다.

빗소리가 시원했다.

그대의 손끝이 내 피부를 스치는 것을,

야자나무가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생각해보아요.

그대는 나에게 스페인 자장가를 불러주었죠

가장 달콤한 슬픔이 그대 눈에 가득 차.

영리한 속임수군요.

그의 목소리에는 기억이 담겨 있었다. 시간의 너머에 망각의 뒤에 숨겨져 있던 감각과 기억들을 이수호는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간단히 불러 일으켜 세웠다.

난 절대 그대의 불행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대도 나와 같은 생각하리라고 여겼었죠.

살짝 눈을 내리감은 채 노래를 부르는 옆모습은 무엇도 파고들 수 없는 치열함을 느끼게 했다.

안녕, 내 사랑이 될 뻔한 이여

안녕, 내 희망 없는 꿈들이여

그대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그냥 날 내버려 둘 수는 없나요?

안녕, 나의 불행했던 사랑이여

난 이미 그대에게서 돌아섰어요.

내 심장의 아픔이 당신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는데

사랑이 될 뻔했던 이들이 언제나 그렇듯.

기타와 소년의 목소리가 빗소리와 어우러져, 듣는 사람의 마음을 온통 휘저었다.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슬프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소년은 이 사람을 통해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이 노래를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노래를 계속 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이 계속 자신의 앞에서 노래 부를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노래에 빗소리가 채색되어 이어질수록, 소년의 초조함은 더해져 갔다.

안녕, 내 사랑이 될 뻔한 이여

안녕, 내 희망 없는 꿈들이여

그대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그냥 날 내버려 둘 수는 없나요?3)

도저히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신현제는 저도 모르게 기타를 연주하고 있던 이수호의 손을 움켜잡았다.

“……?”

방금 전까지 노래에 온통 정신을 빼앗겼던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보자 신현제는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스치는 듯한,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이수호는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게 대체 뭐지.

“……술 마셨어요?”

간신히 상황판단을 한 뇌가 내린 결론이었다.

“아니…….”

“……취하지 않고서…….”

“술 마시면 해도 돼요?”

“아니.”

이수호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신현제의 입술이 잠시 닿았던 것뿐인데, 파스를 바른 것처럼 입술이 화끈거렸다. 저 빌어먹은 놈이, 입술에 뭔가를 바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이수호는 소매로 입술을 닦았다. 신현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 마세요. 이런 거.”

그렇게 말한 이수호는 기타를 케이스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현제가 다급하게 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왜요.”

이수호는 손목을 뿌리치려 했지만 우악스러운 힘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수호는 대체 이놈이 왜 이러나 싶었다.

“왜 그래요? 나한테.”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것이라면 어제 끝냈어야 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은, 신현제 본인이었다.

어제 마신 술이 아직까지 깨지 않은 것도 아닌데. 신현제는 어쩌면 술기운이란 것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오래 지속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시간이 지나면 더 심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제보다 속이 더 울렁거리고 어지러우니까.

“저기…….”

뭔가를 말하려던 신현제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이수호는 잡힌 손목이 화끈거려 얼른 얘기하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빗소리와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휘감았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이수호는 몰래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걸 신현제 놈이 알아차리지 않길 바라며.

드디어 큰 결심을 한 듯이 신현제가 호흡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햄버거 하러 갈래요?”

빗소리가, 유난히도 시원하게 울렸다.

“……허.”

냅킨으로 옷의 물기를 닦아내고 있던 이수호는 신현제가 들고 온 트레이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먹어요.”

이수호는 혹시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이 오기로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햄버거 열 세트라니.

“이걸 어떻게 다 먹어요.”

비가 오고 교복을 입은 신현제 때문에 가게에 다시 올라갈 수는 없고, 배는 고팠다. 결국 근처의 맥도널드로, 신현제의 표현에 의하면 햄버거를 하러 왔다.

하지만 햄버거를 하러 왔다는 말이, 햄버거를 배 터지도록 먹는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었다. 햄버거뿐만이 아니었다. 산처럼 쌓인 감자튀김과 콜라는 도저히 두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신현제는 대답하지 않고 수호의 맞은편에 앉았다. 햄버거가 수두룩하게 쌓인 쟁반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신현제 역시 산처럼 쌓인 햄버거가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주문을 하다 보니 끊지를 못하고 이것도 주문하고 저것도 주문하다 빚어진 결과였다. 이상하게도 주문을 하면 할수록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토디? 상하이? 치즈?”

신현제가 햄버거를 이것저것 들어 보이며 물었다.

“베토디? 그게 뭐예요?”

“베이컨 토마토 디럭스요. 난 베토디.”

신현제가 가장 두툼한 햄버거를 집어 들고 포장지를 벗겼다. 이수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또래의 학생들과 소통이 없는 그에게는 그런 사소한 줄임말 하나조차도 생소했다.

햄버거의 포장지를 벗겨 한입 베어 먹는 순간에도 이수호는 신현제의 집요한 시선을 느꼈다.

“……왜요.”

“뭐가요?”

“왜 쳐다보냐고요.”

“내가? 내가 쳐다봤다고요?”

오히려 신현제가 놀랍다는 듯이 되묻는 바람에 이수호는 머쓱해졌다.

“안 쳐다봤는데.”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신현제의 시선은 여전히 이수호의 얼굴에 고정된 채였다.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

햄버거를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면서도 이수호는 바로 앞에 앉은 신현제의 시선이 신경 쓰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베토디 맛있죠.”

“네?”

“베토디.”

신현제가 손으로 이수호가 들고 있는 햄버거를 가리켰다.

“어, 아.”

이수호는 그제야 자신이 먹고 있는 것이 드럽게 긴 이름을 가진 햄버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맛있죠?”

신현제는 마치 자신이 베토디라는 햄버거를 만든 사람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수호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햄버거가 맛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신현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햄버거 먹기에 집중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2층에 있는 손님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신현제는 두 번째 햄버거의 포장지를 벗겼다.

산처럼 수북하게 쌓인 포테이토를 집어먹으며 이수호는 운명의 기괴함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굴러 떨어지는 수레바퀴 같은 것이라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지. 자신의 운명은 굴러굴러 슈퍼스타에 닿을 것이라 믿었는데, 정말 우습게도 신현제와 비 오는 날 단둘이 맥도널드에 앉아 햄버거 열 개를 쌓아놓고 있는 오늘에 닿아 있었다.

우습다.

이수호는 햄버거를 손에 들고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맛있어요?”

“……?”

“막 웃음이 나게. 이것도 먹어요, 그럼.”

신현제가 마지막으로 남은 베토디를 내밀며 선심을 쓰듯 말했다.

“아니, 됐어요. 이거면 되는데.”

“먹어요.”

“됐어요.”

“먹어요. 이거.”

아무래도 신현제에게는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남은 것을 집으로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수호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실 말이에요.”

이수호는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원래 있던 연습실의 귀신을 보내버렸으니 호사스러운 연습실과도 작별을 고해야 할 순간이었다. 딱 하루 맛본 호사였는데 그게 사라진다니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사람이란 이렇게 요사스러운 동물이구나.

“다시 홍대 쪽으로…….”

“계속 논현동에서…….”

두 사람의 말이 엇갈렸다. 이수호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신현제를 쳐다보았다.

“논현동 연습실 계속 쓰시라고요.”

“……왜.”

“왜긴 왜예요. 쓰라니 쓰는 거지.”

“허어…….”

“왜요? 마음에 안 차요?”

“아니, 마음에 차고 안 차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유가, 이해가 안 되어서.”

뺨을 긁적거리며 이수호는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고민에 빠져들었다. 개인적인 식견을 넓힌다는 명목이었지만, 신현제가 자신들에게 보여주는 호의는 흔쾌히 받아들이기에 지나치게 컸다.

“매니저잖아요. 제가.”

이것도 그렇다. 굳이 매니저를 해가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나.

특히 신현제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저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싫증을 내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연습실을 빼앗아갈지도 모르는 놈인 것이다. 이수호는 차라리 그럴 거면 지금 당장 빼앗기는 쪽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봤던 것도, ……아직 해결해야 하고.”

신현제가 어물어물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

얘는 거짓말을 할 때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새로운 발견이다.

“그거 해결하려고 내가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시죠?”

이 새끼가. 어디서 생색이야. 잡은 건 우리 누나고, 너는 그저 나를 안 때리겠다는 평화협정에 사인을 했을 뿐이잖아.

“매니저 일은 이렇게 힘들군요. 참.”

신현제가 테이블에 턱을 괴고 몹시 고단한 표정을 짓자 이수호는 어이를 상실하고 말았다.

황당하네, 진짜.

이수호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신현제가 손을 뻗어 그의 턱밑을 쥐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신현제는 허리를 앞으로 숙여 또 입을 맞추었다.

“왁!”

이번에는 단번에 상황파악이 된 수호는 괴성을 지르며 현제를 밀어냈다. 2층에 있던 몇 명의 사람이 두 사람이 앉아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쳤어요?”

이수호는 소리를 죽여 신현제의 이해할 수 없는 행위에 항의했다.

“이거 술버릇인가 봐요.”

약간 멍한 얼굴로 신현제가 중얼거렸다.

“…….”

“술 마시면 나오는 그런 거.”

이수호는 말없이 신현제의 앞에 놓여있는 음료수 집어서 쪼옥 빨아마셨다. 사이다였다.

“술 아닌데?”

“어제 마셨어요.”

야, 이 머저리야! 어제 마신 술에 오늘까지 취해있으면 대체 어쩌자는 거야!

“술에 취하면 사람들은 한둘쯤, 그런 주사를 갖기 마련이잖아요.”

이수호는, 존나게 귀하게 자라 술도 제대로 마셔보지 못한 이 미친 도련님을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지 막막했다.

“일단…….”

이수호는 허리를 숙여 신현제의 얼굴 앞에 자신의 코를 가져다 대었다. 킁킁 두 번 냄새를 맡아보고 확신에 차서 말을 이었다.

“술은 확실히 깬 거 같고, 그리고 아무리 그게 주사라고 해도…….”

이수호는 손가락을 치켜 올리고 삿대질을 하며 강한 어조로 상대를 제압할 생각이었다. ……신현제가 목덜미까지 새빨개지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어…….”

“……!”

신현제도 본인의 상황을 눈치챘는지 손바닥으로 목덜미와 얼굴을 문지르며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놀랐잖아요. 시발, 욕 나오려고 하네.”

“해놓고, 뭘.”

“은근슬쩍 나한테 말 놓네요?”

“…….”

실질적으로 동갑이고 공식적으로는 이수호가 연상이었다. 말을 놓는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말 편하게 해요.”

신현제가 대단한 선심을 베풀 듯 말했다.

“아니요.”

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라도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날이 오면 자신은 끝까지 너에게 존대를 같이 해줬다는, 개미 다리털만큼이나 미약한 자기방어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튼, 난, 술주정이든 뭐든, 그거……하지 마요. 아까도 말했지만.”

이수호는 주절주절 말하며 소맷자락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잊고 있었던 입술과 혀의 감촉이 떠오른 것이다.

신현제는 불쑥 심술이 솟았다. 자신도 어쩌지 못하고 저지른 술주정을 상대가 지나치게 엄격하게 비난한다는 생각이 든 터다.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닙니다.”

“…….”

놀림을 받고 있단 생각에 이수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현제가 그를 붙들었다.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고요.”

이수호는 적잖이 놀랐다. 신현제의 표정에서 자신을 놀린다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본인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설명하고자 필사적인 얼굴이었다.

아, 꼴불견.

이수호는 그런 신현제의 얼굴이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었다.

“안 할게요. 그러니까, ……햄버거 먹어요.”

이수호는 하는 수 없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아직 밖은 쏟아지는 비에 갇혀 있었다. 신현제가 어디선가 박스를 가져와 씌워주지 않았다면 비 때문에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신현제와 빈 박스라…….

이수호는 학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이상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 상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신현제의 외모는 병신 같은 내면을 배신하고 여전히 지나치게 멀쩡했다.

사람들은 이놈이 이렇게 이상하고 병신 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교내 방송으로 그 사실을 낱낱이 알리고 싶었다.

“먹어요.”

신현제가 햄버거를 가리켰다.

“네…….”

두 사람은 다시 한동안 조용히 햄버거 먹기에 집중했다. 구석에 있던 한 커플이 사라지자 이 층은 한층 더 조용해졌다.

알바생의 취향인지 한물간 가요가 흘러나왔다. 이수호는 저도 모르게 그 노래를 허밍으로 따라 불렀다. 최대한 많은 노래를 외우려는 본능적인 습관이었다.

“노래가 그렇게 좋아요?”

신현제가 물었다.

“네.”

“다른 취미는?”

“흐음, 글쎄요. 없는 듯.”

“특기는?”

“노래.”

“다른 특기는?”

“…….”

귀신잡기. 부적쓰기. 주문 외우기. 제령, 퇴마, 기타 등등.

절대 입에 담을 수 없는 특기가 한가득이었다.

“혈액형은?”

“……호구 조사 나왔어요?”

이수호는 아까부터 쏟아지는 질문에 인상을 쓰며 쏘아붙였다.

“매니저는 원래 이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진짜 매니저도 아니잖아요.”

“진짜 매니저 하면 알려줄 건가요?”

“…….”

“그럼 합시다. 진짜로.”

“……공부나 하세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자신이야 진로가 확실히 정해져 있기에 성적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신현제는 아니었다. 적당히 좋은 대학의 적당한 과를 간다고 본인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나 공부 잘해요, 적당히.”

“네, 적당히.”

이수호의 맞장구에 신현제가 발끈해 외쳤다.

“그럼 제가 성적이 매우 좋으면, 진짜 매니저 해도 상관없겠군요.”

“완전, 진짜, 미친 듯이, 좋으면.”

이수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현제의 성적은 말 그대로 그런대로 좋을 뿐이었다.

“몇 등?”

“아, 글쎄요. 전교 10등 안으로?”

이수호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비현실적인 숫자를 입에 담았다. 신현제의 현재 성적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받을 수 없는 성적이었다.

“그때 되면 진짜 매니저로서 행동해도 된다?”

“네.”

불행을 닮은 기적이 일어나 신현제가 전교 10등 안에 들게 된다면 이수호는 진짜 슈퍼스타처럼 그를 부려먹어 주겠노라 다짐했다.

“좋아요. 딜.”

신현제가 손을 내밀었다. 이수호는 더이상 이놈과 불필요한 스킨십은 나누고 싶지 않았다. 어쩔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신현제의 단단해 보이는 손바닥에 자신의 손바닥을 대고 철썩 내리쳤다.

“하이파이브.”

“…….”

“예에.”

어색한 환호성을 내며 이수호가 양손을 공중으로 올렸다. 단박에 주변 온도가 5도는 내려갔을 만큼, 상대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이수호는 손을 내리고 다시 햄버거에 열중하는 척했다.

“저는요.”

신현제가 사이다를 쪼르륵 빨아 마시며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비가 오면 어릴 때, 항상 할머니랑 내기를 했어요. 비가 언제쯤 그칠지.”

그의 시선은 창문을 두드리고 있는 빗줄기에 고정되었다.

“난 비가 그치는 시간을 늘 할머니보다 이르게 잡아서, 항상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는데.”

비가 오는 창밖을 바라보는 신현제의 시선 끝에 그리움이 머물렀다.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그에게서 인간성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구석이었다.

“할머니는 창밖을 바라보는 제가 배고픈 강아지 같다고 귀여워하셨죠. 그때가 좋았어요.”

“……그렇죠.”

이미 고인이 되신 분에 대한 그리움을 어떤 말로 위로할 수 있단 말인가. 이수호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쳐주었다.

“한 판에 백만 원.”

“네?”

“한 판에 백만 원이었어요, 내기.”

“…….”

이런 빌어먹을 부르주아 할머니의 개새끼 같으니.

“그때가 그리운데…….”

신현제는 웃으며 뒷말을 흐렸다. 그때가 그리웠다. 할머니의 강아지로 온 사랑을 독차지했던 그 시절의 자신은 늘 비가 그치기만을 기도했다. 한 판에 백만 원이었으니까.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이수호는 햄버거를 베어 먹으며 조금씩 따라 불렀다. 빗소리와 함께 그 조그만 노랫소리는 신현제의 마음속에 젖어 들었다.

지금은 내리는 비가 잦아들지 않기를, 그래서 햄버거를 먹고 있는 이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길어지길, 그는 바랐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수호는 혼비백산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이 시간에 들어오고! 넌!”

어머니가 뱃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호통을 내질렀다. 이수호는 아직도 파닥파닥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현관 벽을 더듬어 불을 켰다.

“어? 어디 나가시게요?”

자정을 훌쩍 넘은 시간인데 외출복을 차려입은 어머니의 모습에 이수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국 각지로 제령을 하거나 굿을 하러 다니기는 했지만 이 시간에 일을 하러 나가는 어머니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요즘 좀 이상한 일들이 많아서 진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아무리 그래도 이 시간에 나가요?”

“일은 많은데 사람은 없으니 어쩔 수 없지. 그러니까 너 같은 애가 업계로 팍팍 들어와 줘야 할 거 아니냐.”

“에비.”

수호는 웃으면서 신발을 벗었다. 자신의 길은 무당이 아니라 음악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거기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젊은 피의 수혈이 필요하다. 수호야.”

어머니가 짐짓 진지한 얼굴로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수호는 웃는 낯으로 어머니의 손을 쳐냈다.

“누나 있잖아요. 수현이 누나.”

“너희 누나는 안 그래도…….”

“안 그래도 뭐요?”

“……빠질에 빠져가지고.”

이수호는 어머니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이수호는 저쪽 세계와 자신을 구분해두고 싶었다. 도움을 주지 않을 거면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 낫다.

“빠질에 빠져도 일 잘하잖아요. 오늘도 또 어디 내려갔다던데.”

누나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이수호는 영 마음에 걸려 상담이 끝나자마자 다시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하루에 두 번이나 자신에게 전화를 건 남동생이 귀찮다는 티를 팍팍 내며 본인의 목적지를 말해주었다.

요즘 빠져있는 아이돌의 지방 콘서트를 도는 겸, 근처의 일을 보러 간다는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 이수호는 빙긋 웃었다. 성질이 급한 누나는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을 좋아했다.

“다 너 좋으라고 하는 소리다. 인석아.”

“제가 좋아하는 건 이거잖아요.”

이수호가 어깨에 메고 있는 기타를 슬쩍 올려 보이며 대답했다.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공부하는 건 게을리하지 마라. 여차할 때 네 몸을 지킬 수 있는 수준은 되어야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태어난 순간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거야.”

“그렇죠. 나 같은 천재는 범인이랑 완전 다르죠.”

“인석아. 아이고. 답답해.”

어머니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 이수호는 능청을 부렸다.

“차 몰고 가세요?”

“그럼 이 시간에 뭘 타고 가겠냐.”

“그럼 가다가 드세요. 출출하실 때.”

이수호는 미처 먹지 못하고 싸온 햄버거를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봉투 안에 든 햄버거를 보며 어머니가 놀라 물었다.

“뭐야. 이걸 다 사왔어? 너 햄버거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 붙었냐?”

“그런 귀신도 있어요?”

“아직 못 봤지만 본다면 네 뒤에서 보이겠다.”

“무서워요. 엄마가 그런 농담하면.”

이수호가 정색했다.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무당이 귀신 농담을 하면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번에도 햄버거 가져오지 않았냐?”

“어, 예…….”

신현제가 자꾸 햄버거를 하러 가자고 하는 바람에 집에 다 먹지 못한 햄버거를 싸온 것이 이번이 세 번째였다.

“너 혹시, 요즘 늦게 들어오고 이러는 거…….”

어머니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보고 이수호는 뜨끔했다.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속일 수 없는 상대가 집안에 둘이나 있다는 사실은 종종 이렇게 그를 괴롭혔다.

혹시라도 신현제와 본의 아닌 입맞춤을 한 것을 어머니에게 들킨다면, 망설임 없이 여기에서 목매달리라.

“햄버거 가게에서 알바하냐?”

“뭔 소리예요! 웬 알바.”

“그럼 왜 이렇게 자주 햄버거를 싸와?”

“아, 그냥 어쩌다가. 먹다 남았어요.”

대충 둘러대긴 했지만 참으로 성의 없는 변명이었다. 어떤 미련한 인간이 햄버거를 한 번에 이렇게 많이 주문해 다섯 개를 포장해온단 말인가.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의심을 받아도 마땅한 미련함이었다.

“고3인데 쓸데없는 짓 하고 다니지 마라.”

“알겠어요. 그럼 언제 오세요?”

“주말 지나서 올 거 같아. 이번에 일이 좀……. 흐음, 글쎄다.”

어머니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자정이 지난 시간에 나가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 잡아먹는 귀신이라도 나왔어요?”

“그런 귀신은 없어. 공부 좀 해라.”

“드라큘라 같은 거. 으앙.”

이수호가 두 손을 위로 올리며 괴물소리를 냈다. 그런 아들을 한심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던 어머니는 문단속을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혼자 집안에 남겨진 이수호는 콧노래를 부르며 적막함을 달랬다.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면서도 그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물로 얼굴을 적시는 중에 희미한 시선을 느꼈다. 이수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기분 탓인가. 다른 곳이었다면 귀신의 존재를 의심해봤을 법하지만, 이곳은 태천무의 집이었다. 웬만한 잡귀는 얼씬도 하지 못할 곳이었다. 김이 서린 거울을 손바닥으로 슥슥 문지르자 앞머리를 뒤로 넘긴 자신의 멍한 얼굴이 보였다.

“뉘집 아들인지, 잘생겼다.”

이수호는 씨익 웃어 보이며 다시 고개를 숙이고 세수를 시작했다. 자신의 외모에 대해 감탄하느라 그는 거울 구석에 있는 푸른 얼룩을 신경 쓰지 못했다.

세수를 마친 이수호는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며 자신에게 진심어린 감탄을 내뱉었다.

“미래의 슈퍼스타감이야. 흐음.”

이수호는 자신에 대한 감탄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욕실을 나왔다. 그와 동시에 푸른색의 얼룩은 벌레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그대로 제 모습을 감추었다.

오늘 아침, 교실에 들어오는 아이들은 알 수 없는 위화감에 한기를 느꼈다. 그 위화감의 실체가 교실 맨 뒤에 앉아있는 신현제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허걱, 너 뭐하냐.”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온 박성곤이 낯선 모습의 신현제를 발견하고 기겁을 하며 물었다.

“몰라 묻냐. 공부하잖아.”

“……아침부터?”

“그럼 고3이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해야지.”

“네가 언제부터 그런 훌륭한 고3이었다고?”

“오늘부터.”

신현제가 문제집을 한 장 넘기며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뒤따라 들어온 윤민철도 친구의 믿을 수 없는 모습에 괴성을 지르며 놀라워했다. 적당히 공부를 잘하는 신현제는 집에서 붙여준 비싼 과외를 받으며 적당히 공부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학교에서 아등바등 공부를 하거나 길을 다니면서 단어장을 들고 다니거나, 밥을 먹으면서 책을 보는 행위는 꼴사납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었다. 한마디로 모양 빠지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주의였다.

그런 그가 아침에 학교에 오자마자 책을 펴놓고 뿔테 안경을 쓴 채, 단어를 외우고 있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너 어디 아프냐?”

박성곤이 신현제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앞머리가 위로 올라가자 신현제의 살벌한 표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박성곤은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손을 내렸다.

“그런데 진짜 갑자기 너 웬 공부? 부모님이 뭐라 하셔?”

“아니.”

신현제의 부모님은 5대 독자에게 절대로 잔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한숨을 내쉬거나 하늘을 올려다보실 뿐.

“나한테 누가 뭐라고 그래.”

신현제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그렇지. 넌.”

“네가 그렇지……. 그런데 왜 갑자기 공부를 하는 건데. 이유나 알고 놀라자.”

신현제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에 올려놓았다. 손가락으로 콧잔등을 누르며 인상을 쓰는 모습에서 그의 더러운 성격이 어디 안 가고 거기에 고대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고 싶어서 한다. 됐어?”

“…….”

“말 시키지 마. 단어 외우는데 헷갈려.”

신현제는 다시 안경을 쓰고 영어 문제집을 푸는 데 집중했다.

“……도수도 없는 안경은 왜.”

“냅둬.”

박성곤과 윤민철은 숙덕거리다가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성실한 성격이 아닌 신현제의 변덕이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거라고 두 사람은 예상했다. 박성곤은 오늘 점심시간까지에 윤민철은 오늘 수업이 끝나는 시점에 돈을 걸었다.

예상외로 신현제는 끈질기게 공부에 매달렸다. 하지만 2교시가 지나고 3교시 쉬는 시간이 되었을 무렵에는 그의 인내심은 결국 바닥나고 말았다.

“으아, 젠장.”

그는 들고 있던 문제집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책상에 머리를 댔다. 박성곤은 자신의 승리를 예감하며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렸다.

책상에 이마를 대고 욕설을 중얼거리던 신현제가 고개만 홱 돌리고 자신의 옆에 앉아있던 녀석에게 물었다.

“우리 반에서 누가 영어 제일 잘해?”

“어? 영어?”

“그래. 영어.”

신현제가 가장 약한 과목이 영어였다. 수학이나 국어는 어느 정도 수준이 되었지만 영어는 유난히 그에게 어려운 과목이었다.

“우리 반에서 누가 영어를 제일 잘하는데!”

그렇게 묻는 신현제의 시선은 이미 맨 앞줄에 앉아있는 반장에게 향해 있었다. 전교 1등을 놓치는 날에 먹을 약을 벌써 상비해뒀다는 소문이 도는 반장은 늘 죽을 기세로 공부를 했기에 당연히 그가 영어도 최고일 거라 생각한 터다.

“쟤가 제일 잘해.”

하지만 짝이 가리키는 방향은 반장이 앉아있는 자리와 반대였다.

“뭐?”

“쟤가 제일 잘한다고, 영어는.”

“……뭐?”

신현제가 다시 물었다.

“전 과목 다 합치면 반장이 1등인데, 영어는 쟤가 제일 잘해. 좀 의외긴 하지.”

짝의 손끝에 걸려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수호였다. 혼자 고개를 푹 숙이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뭔가를 읽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본 신현제는 짝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영어를 누가 제일 잘한다고?”

“……이수호.”

“확실해?”

“응. 쟤는 항상 만점이야. 한 번도 틀려본 적이 없어. 영어 선생님이 그래서 예뻐하잖아.”

그 말을 들은 신현제는 울컥했다. 비싼 영어 과외를 듣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쭈욱 원어민이랑 스피킹 수업까지 하는 자신은 영어가 이 모양인데 별거 없어 보이는 무당집 아들이 영어를 그렇게 잘한다니 심술이 삐죽 돋아난 것이다. 신현제는 자리에서 일어서 공책에 뭔가를 끼적이고 있는 이수호의 옆으로 다가갔다. 누가 자신의 옆에 서 있는지도 모르고 이수호는 혼자서 신이 나서 공책에 뭔가를 휘갈겨 쓰고 있었다.

“야. 너.”

신현제가 그를 불렀다. 귀에 꽂은 이어폰 때문인지 이수호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왠지 모를 울컥함에 신현제는 이수호의 이어폰을 손으로 잡아챘다.

“……?”

“사람이 불렀으면 대답을…….”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신현제가 잠시 멈칫했다. 어디선가 들었던 음악이었다. 이수호는 화들짝 놀라 아이팟의 전원을 껐다.

“어, 나 음악 듣느라고…….”

“뭐 들었어. 방금.”

“응?”

“뭐 들었냐고.”

“…….”

난감하다.

이수호는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방금 전까지 밴드 멤버들과 논현동 녹음실에서 녹음했던 곡을 듣고 있었다. 노래를 통째로 외우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반복해서 듣는 것이었다. 악보를 보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효과적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직접 부른 노래를 들으면 모니터링까지 할 수 있으니 말 그대로 일석이조였다.

“나는, 그러니까…….”

다른 노래 제목을 떠올리려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이수호의 눈에 건너편에 앉은 녀석의 필통이 들어왔다.

“나, 아이허니 들었어!”

“뭐?”

“아이허니. 아이허니 몰라?”

요즘 유행하는 아이허니의 사진으로 도배한 필통을 가진 녀석이 잔뜩 인상을 구기고 이수호를 돌아보았다. 너 같은 놈의 입에서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아이돌 이름이 나온다는 자체가 몹시 불쾌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수호는 아이돌 그룹 매니아 흉내를 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얘네 짱인데. 완전 짱. 너도 들어 볼래?”

“아이허니도 뭐고 알 게 뭐야. 그나저나 너, 영어 잘한다며.”

신현제는 그제야 제가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어? 영어?”

“그래.”

“……음, 뭐 그냥. 대충.”

“몇 점?”

“대충 백 점?”

신현제는 졸업 전까지 이 녀석을 때리지 않겠다는 계약을 한 자신에게 저주를 퍼붓는 중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놈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었다.

대충 백 점이라니! 대충 백 점이라니!

“영어는 왜?”

이수호는 앞머리 틈으로 신현제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학교에서는 신현제와 이렇게 대화를 하는 것이 몇 배는 더 어색하고 어려웠다.

“너 말이다, 그러니까…….”

신현제가 검지와 엄지로 윗입술을 매만지면서 말을 고르느라 고심했다. 이수호는 저 입술이 여기에 닿았었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라 얼굴이 활활 달아올랐다.

“아, 뭐라고 해야 해.”

신현제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을 냈다.

“……뭐.”

“그러니까, 네까짓 게 나한테 과외를 한다는 말을 하기도 그렇고, 날 가르치는 것도 우습고, 젠장. 적당한 말이 안 나오네.”

“돕다?”

“네가 날 돕긴 어떻게 도와!”

“……알려준다?”

“나도 다 알아.”

“…….”

그럼 치워. 멍청아.

이수호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심 중인 신현제를 떫은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공헌.”

신현제가 불쑥 내뱉은 단어였다.

“뭐?”

“공헌해. 나한테.”

공헌(貢獻). 힘을 써 이바지하다.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의 뜻에 이수호는 어색한 미소조차 지을 수 없었다. 어째서 내가 힘써 이바지해야 하지? 무엇을? 누구를 위해?

“무슨 공헌을 해?”

“내 영어 성적을 올리기 위한 공헌이다.”

신현제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자 이수호는 잠시 혼동이 왔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에 위에서 신현제의 영어 성적을 올리라는 지령이라도 내려왔던 것인가.

“내가 왜?”

이수호가 되물었다.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왜 나는 신현제를 도와 그의 영어 성적 증진에 이바지해야 하는가.

“그게…….”

신현제조차 뾰족한 이유는 찾지 못한 듯, 잠시 곤혹스러워하다 입을 열었다.

“사인 받아다주지.”

“뭐?”

“아이허니인가 하는 애들 전원 사인받아다 준다고.”

“…….”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는 말을 누가 만들어냈는지는 몰라도 지금 이 상황을 그 사람이 본다면 손뼉을 치며 좋아했을 게 분명했다.

“아이허니 사인……?”

“너 좋아한다며. 아니야?”

“그렇지.”

맞은편에 앉아있던 녀석이 사인이란 말에 잔뜩 눈을 빛내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넌 내 영어성적에 공헌하고, 나는 너한테 사인을 받아다 주고. 어때?”

“…….”

조오오온나 싫다는 대답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아이허니의 사인 따위 받아서 무엇하겠는가. 그네들의 이름조차 다 외우지 못하는데. ……아니, 애초에 몇 명인지도 모르겠어.

“나도, 나도. 신현제. 나도.”

아이허니 광팬을 자처하는 녀석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신현제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신현제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 녀석을 떨궈내고 이수호에게 재차 대답을 요구했다.

“좋지? 엄청 좋지?”

“아, 그게……. ……좋아.”

사실 멤버 이름도 모른다는 대답을 했다간 이번엔 소화 비상벨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래. 그럼 점심시간에 남아. 어디 가지 말고.”

“안 되는데. 나 이번 주는…….”

당장 며칠 뒤에 있는 오디션 준비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신현제의 영어 과외 따위 해줄 시간은 없었다.

“멤버 전원 사인인데?”

신현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물었다. 뒤에서 눈을 빛내던 아이허니 광팬이 다시 끼어들어 나도, 나도, 하고 손을 파닥거렸다. 커다란 손으로 신현제는 귀찮은 녀석을 제압하고 이수호에게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잘 생각해. 유진, 리나, 제희, 미아라고.”

“…….”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젠장, 그중에 단 한 명도 얼굴을 모르는데!

“아, 좋아.”

신현제가 대단한 선심을 쓰는 듯이 말했다.

“직접 찍은 사진에 사인, 딜?”

“……딜.”

결국 이수호는 힘없이 딜을 외쳐야 했다. 신현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제 자리로 돌아갔다.

이수호는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어째서 거기에 여자 아이돌의 이름 따위가 나갔던 것일까. 왜 나는 내 노래를 듣고 있다고 당당히 말하지 못했던 걸까.

바보. 병신. 머저리. 천하의 등신. 나는 개똥이야!

책상에 머리를 쿵쿵 찧는 그를 건너편에 앉은 아이허니 팬은 세상 누구보다 부러운 얼굴을 하고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이 대한민국 최고의 슈퍼스타 싱어송 라이터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이수호는 그렇게 얼굴도 모르는 아이돌의 사인으로 노예 계약을 맺고 말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이수호는 재빨리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현제는 급식을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나중에 기다리다 못 찾아서 나갔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어디 가냐?”

“힉.”

가방을 갖고 앞문으로 나가던 이수호는 자신을 가로막아 서는 커다란 몸에 놀라 괴성을 내질렀다.

“어디 가냐고.”

“아, 밥…….”

가방에서 주섬주섬 빵을 꺼내 보이며 대답했지만 신현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밥을 어디서 먹는데?”

“으, 음악실.”

음악실의 열쇠를 갖고 있는 수호는 조용히 생각을 하거나 노래연습을 하고 싶을 때 혼자서 그곳에 찾아가곤 했다.

음악실은 이 학교 내에서 오롯이 그가 혼자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이수호에겐 그곳이 성역이었다.

“음악실? 좋은데. 가자.”

“뭐?”

“음악실로 가자고.”

“너, 밥은? 밥 먹어야지.”

자신의 성역에 악마 같은 신현제를 들여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 이수호는 필사적으로 그를 떼어낼 궁리를 했다.

“밥? 아, 밥.”

신현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김진철이 자신의 친구들과 둘러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한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샌드위치를 낚아챘다.

“아직 뼈도 안 붙었을 텐데, 이런 거 먹으면 쓰나.”

“뭐?”

“급식 먹어. 급식. 오늘 점심 메뉴 사골국 나왔더라.”

신현제가 자신의 교복 재킷에서 급식카드를 꺼내 김진철에게 던져주고 이수호에게 나가자고 턱짓했다.

“신현제! 너 어디 가냐! 밥 안 먹고.”

“공부하러.”

신현제가 샌드위치의 포장지를 이로 물어뜯으며 대답했다. 박성곤이 질색하며 손을 머리에 대고 빙글빙글 돌려 보였다.

“너 미쳤냐? 점심도 안 먹고 공부한다고?”

“먹고 있잖아.”

신현제는 방금 전 김진철에게 빼앗은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먹으며 말했다. 한입에 벌써 샌드위치의 반이 사라졌다. 이수호는 자신의 팥빵이 저 괴물 같은 놈의 입안으로 사라질까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너 요즘 뭐 잘못 먹었냐. 죽을 때가 됐나.”

“죽기는…….”

이수호는 저도 모르게 꿍얼거렸다. 이수호에게는 귀신을 보는 능력 말고도 사람의 앞날을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수호는 웬만하면 그 능력은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특히 자신의 운명이나 운세는 더더욱.

〈위대한 힘에는 그만큼의 책임감이 따른다.〉

엄마랑 누나랑 같이 보러갔던 영화에서 나온 대사를 듣고 어머니는 저걸 가훈으로 삼자는 말씀을 했었다. 심지어 그날 저녁에 수호에게 붓을 쥐여주며 그 대사를 쓰라고 해서 액자로 만들어 거실 벽에 걸어두기까지 했다. 큰 힘을 가졌으니 책임감을 갖고 사용하라는 의도였지만, 이수호에겐 힘을 되도록 사용하지 말라는 뜻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굳이 보지 않으려 해도 운명이 한눈에 드러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요컨대 곧 죽음을 맞이할 사람들의 주변은 어둡다. 단순히 검다, 라는 단어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 어둠이 그들의 주변을 떠돌아다닌다. 그런 사람에게 경고를 해주는 것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운명을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걸 선택하는 것은 보는 사람의 몫이라고, 수호의 어머니는 늘 말했다. 이수호는 그런 어둠이 주변에 떠돌아다니는 사람과는 되도록이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반대로 광채가 눈부셔서 보지 않아도 그 운명이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곱 빛깔 무지개를 등 뒤에 다는 것으로도 모자라 황금색 띠를 두르고 다니는 인간들이 드물게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신현제가 바로 그런 인간이었다.

정확히 읽어보진 않았지만 신현제는 호화롭고 찬란하게 천수를 누리다 갈 티켓을 쥐고 태어난 인간이었다.

“내가 죽기는 왜 죽냐.”

신현제가 눈을 부릅뜨고 박성곤을 노려보았다.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그렇지. 원래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더라. 점심시간에 농구도 건너뛰고 공부를 한다고 하지 않나, 심지어 …….”

박성곤의 시선이 이수호를 위아래로 한번 훑었다. 요즘 들어 신현제가 걸핏하면 저 왕따 놈과 얽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은 터다. 뭔가 저 무당 놈에게 약점을 잡힌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째서 졸업 전까지 저놈을 때리지 않느냐고 물어봤지만, 신현제는 입을 다문 채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저놈이랑 대체 뭘 한다는 거냐.”

박성곤이 불만족스러운 투로 물었다.

“공부.”

어느새 갈색 뿔테안경까지 갖춰 쓴 신현제가 옆구리의 문제집을 내보이며 대꾸했다. 샌드위치는 이미 모두 삼켰는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왕따 놈이랑 모양 빠지게, 뭐하는 짓이냐. 쯧.”

박성곤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책상이 넘어졌다. 떠들썩하던 교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신현제가 넘어진 책상에 한 발을 얹고 물었다.

“뭐라고? 모양이 뭐?”

“…….”

“내 모양이 뭐? 어떻다는 건데?”

긴 다리를 책상 위에서 건들거리며 신현제가 물었다. 카메라와 감독만 있다면 학원 폭력물 영화를 찍어도 좋을 법한 모습이었다.

“신현제 왜 그러냐. 분위기 더럽게.”

윤민철이 달려와 험악한 분위기를 무마하려고 신현제의 어깨를 흔들었다.

“너도 왜 그러냐. 현제 성격 더러운 거 알면서.”

“농담도 못 하냐. 신현제.”

박성곤이 쯧, 하고 혀를 차며 자신의 친구를 쳐다보았다.

“그런 농담하지 말라고. 난 간다.”

신현제가 교실을 나가자 이수호는 머뭇거리다가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박성곤이 화를 내며 애꿎은 책상을 걷어찼다.

“저 새끼 왜 저래? 뭘 잘못 처먹었나. 무당 새끼한테 진짜 무슨 약점 잡힌 거 아니냐고.”

“낸들 아나.”

“아, 시발 존나 맘에 안 드네.”

어느새 두 사람의 뒤로 다가온 김진철이 맞장구를 치며 끼어들었다.

“맞아. 존나 맘에 안 들지. 그 새끼.”

“뭐라고?”

“이수호 말이야. 무당 놈.”

“말이라고 하냐.”

“나중에 손 좀 봐줘야겠어.”

윤민철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김진철을 쳐다보았다. 신현제에게 그렇게 얻어맞고도 아직도 저러냐 싶은 것이다.

“아서라. 신현제 새끼 성격은 더러워도 지가 한번 말한 건 지킨다. 정말로 학교 졸업식 전까지는 무당 새끼한테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걸.”

“졸업식 날 두고 보라지.”

김진철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그려졌다. 박성곤이 키득거리며 그때 자신도 부르라는 농담을 던졌다. 신현제와 가장 오래된 친구인 윤민철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더럽네.”

음악실에 들어온 신현제가 처음 내뱉은 감상이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곳은 음악실 옆에 딸려있는 음악 준비실이었다. 수업 시간에 사용하는 악기와 악보들을 보관하는 창고 같은 곳이었다. 작은 교실 여기저기 악기들이 쌓여있기에 그렇게 쾌적한 환경은 아니었다.

“더럽고 낡았어.”

그렇다고 자신의 소중한 성역을 오늘 처음 이곳에 와본 신현제가 저따위로 말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더러우면 교실에서 있든가.”

이수호가 불퉁하게 맞받아쳤다.

“교실은 시끄러워.”

신현제가 낡은 책상을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공부는 조용한 곳에서 해야지.”

“…….”

“아, 이제 공부해야지.”

신현제가 문제집을 펼치며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짜 끝내주게 재수 없어 보였다. 이수호는 구석에서 혼자 팥빵과 우유를 꺼내어 우물우물 먹기 시작했다. 신현제의 재수 없는 표정이 무너지기까지는 3분도 걸리지 않았다.

“젠장.”

그는 샤프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눌렀다. 문제가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공부 졸라 싫어.”

“……그렇지.”

이수호도 공부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외국어는 노래의 가사전달력을 위해 공부를 하다 보니 성적이 잘 나오는 과목일 뿐.

“아아. 젠장. 어쩌자고 그런 약속을 해서.”

신현제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투덜거렸다.

“약속한 건 아닌데…….”

“뭐?”

“아니, 그냥. ……그래.”

이수호는 어물어물 덧붙였다.

약속한 것은 아니었다. 전교 10등 안에 든다면 실제 매니저를 해도 좋다는 말을 한 것이지, 꼭 10등 안에 들라는 얘기를 한 게 아니었다.

“빨리 처먹어. 나한테 공헌하기로 했잖아.”

“알았어.”

이수호는 남아있는 팥빵을 들고 크게 한입 베어 먹었다. 저쪽에 앉은 신현제가 턱을 괴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어서 목이 메는 기분이었다. 이수호는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빵 한 번 베어 먹고, 우유 한 모금. 우물우물. 꿀꺽꿀꺽. 우물우물.

“뭘 이렇게 조금씩 처먹어!”

보다 답답해 속이 터질 것 같아진 신현제가 벌떡 일어나 이수호의 손에서 빵을 빼앗았다.

“어!”

“내가 도와주지.”

그렇게 말한 신현제는 이수호가 들고 있던 빵의 반쪽을 접어서 자신의 입안에 구겨 넣었다. 오물오물 빵을 먹고 있는 이수호의 모습을 계속 구경하다간 답답함에 뒤로 넘어갈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물론, 샌드위치로 채워지지 않은 배도 그런 그의 행동에 추진력을 더해주었다.

빵을 빼앗긴 수호는 입을 벌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디션에 입고 갈 옷과 신발 등을 사느라 용돈 잔고가 바닥이 난 상태였다. 요 근래 점심은 보통 매점에서 파는 싸구려 크림빵이 전부였다.

오늘은 어제 어머니가 놓고 가신 돈으로 큰맘 먹고 학교 앞 제과점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단팥빵을 사온 것이다. 단팥과 크림이 같이 들어있어서 부드러운 단맛이 입안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소중한 보물과도 같은 빵이었다.

그런 내 빵을! 저놈이! 저 영어 고자 같은 자식이!

“됐지? 빨리 이 문제나 풀어봐. 왜 봐도 이해가 안 되는지.”

신현제가 문제집을 이수호의 앞에 밀어주며 빨간색으로 별표를 쳐놓은 문제를 가리켰다.

“풀 수 있지?”

관계대명사 문제였다. 가장 헷갈리기 쉽고 귀찮은 문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수호는 순식간에 눈으로 문제를 훑는 것만으로도 답을 낼 수 있었다.

“이거 설명해 봐.”

“선행사가 장소, 시간…….”

“선행사가 뭔지 좀 설명해 봐. 만날 선생들이나 과외 선생이 선행사 선행사 하는데 대체 선행사가 뭐냐.”

“그건 네 과외 선생님한테 물어봐.”

“싫어. 쪽 팔리게.”

“…….”

수호의 침묵의 의미를 눈치챈 신현제가 씨익 웃었다.

“너한테는 쪽 안 팔려. 너한테 팔릴 쪽은 없거든.”

“그러냐.”

공짜로 준다 해도 네 쪽은 안 산다, 이 자식아.

이수호가 투덜거리면서 무심코 앞머리를 넘기려고 손을 들었다가 흠칫했다.

“잘 생각했다. 존나 더럽고 답답해. 네 앞머리 좀 치워봐.”

“아, 아니야.”

이수호는 고개를 흔들며 손바닥으로 앞머리를 꾸욱 눌렀다. 앞머리를 올렸다가는 자신을 알아본 신현제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것이다.

“답답하다니까. 보기만 해도 답답해.”

“괜찮아.”

“내가 안 괜찮다고.”

신현제가 과학실의 암막 커튼 같은 이수호의 앞머리를 넘겨버리려 손을 뻗었다. 철썩, 하는 소리가 낡은 교실에 울렸다.

신현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과 이수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오, 옮아.”

“뭐?”

“내 눈을 보면, ……옮는다고.”

“뭐가 옮는데? 눈병?”

“아니. 귀……, 외계인.”

“외계인?!”

“외계인이 너 따라다닐 수도 있어. 그러니까, ……나랑 눈 마주치지 마.”

신현제가 기가 찬다는 듯이 헛, 하고 짧은 웃음을 삼켰다. 이수호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신현제의 손가락 끝이 닿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미친놈이 자신에게 막무가내로 입을 맞춘 다음에 생긴 이상한 증상 중 하나였다.

이수호는 앞머리를 가지런히 만들며 중얼거렸다.

“눈 마주쳐서 좋을 거 없잖아. 나 같은 놈하고.”

“하긴 그렇지.”

이수호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신현제가 순순히 자신의 말에 수긍하자 다행이란 생각과 섭섭한 마음이 교차했다.

본의 아니게 이중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이 짓도 오래할 게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 고개를 쳐드는 이중적인 생각에서 균형을 잡는 게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어렵다.”

이수호가 저도 모르게 마음속의 말을 뱉었다.

“그렇지. 이 문제가 좀 어렵지.”

자신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신현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이수호는 한숨을 쉬며 문제 설명을 시작했다. 선행사의 의미에서부터 차분하게 문제의 의미를 풀어주었다.

“선행사 별거 아닌데? 그럼 이 문제 해봐라.”

신현제가 문제집을 다음 장으로 넘기며 다른 문제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바보 같은 놈. 눈앞의 슈퍼스타도 못 알아보고. 눈 병신. 귀 병신. 머리 병신. 영어 병신. 병신 벼엉엉신.

“왜? 못 푸냐? 아이허니가 그립지 않은 모양이지?”

“……풀어줄게. 잠시만.”

이수호가 연필 끝을 입으로 물고 문제를 읽기 시작했다. 영어를 읽을 때마다 우물거리는 이수호의 입술이 신현제의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인지 신현제는 어제 자신이 저지른 술주정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 비슷하게 숨을 내쉬었다.

“흠…….”

“……?”

이수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신현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 더럽고 낡은 교실에는 창문도 작다고 성질을 부리며 창문을 열어젖혔다. 얼굴이 후끈거렸다. 신현제는 손으로 아무리 부채질을 해도 얼굴에 몰린 열기가 가시지 않아 연습장을 들어 바람을 일으켰다.

얼굴이 창백하리만치 하얀 이수호는 턱을 괴고 책상 끝에 앉아 그런 신현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얀 피부 때문인지 수호의 얼굴에서 조그만 입술이 몇 배는 더 도드라져 보였다.

“미치겠네. 진짜.”

신현제는 욕을 삼키며 술에 취하면 며칠이나 지나야 깨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시작했고, 이수호는 저 머저리가 언제쯤 자신을 알아보는 비극적인 날이 올까 하는 상념에 잠겼다.

조그맣게 열린 창틈 사이에서는 무더운 바람이 한 점, 흘러들어왔다. 무더운 음악실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잠깐, 스톱.”

이태섭이 연주를 멈추자 김병두가 또냐, 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박자가 미묘하게 안 맞잖아. 쿵쓰 따, 하고 네가 들어오면 니가 둥둥둥둥하고 받아쳐야 하는데, 그리고 너 계속 왜 박자 놓쳐. 엇박으로 올라가는 건데.”

생긴 것답지 않게 이태섭은 음악에 있어서 매우 꼼꼼한 성격이었다. 혼자서 작업을 하고 노래를 부르던 것에 익숙한 이수호는 다른 사람들과 맞춰서 연습을 하는 것이 생소한 만큼 즐거웠다.

“원만아. 엇박으로 들어오라고. 엇박으로. 악보 못 외웠어?”

“……죄송해요.”

이수호가 순순히 사과했다. 며칠 뒤에 있을 오디션 준비 때문에 완벽하게 악보를 외우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오디션 준비하는 것도 좋은데 합주는 확실히 해야지. 자, 그럼 흘려버린 시간,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태섭의 손짓에 우장일이 스틱으로 박자를 맞추었다.

“잠시만요.”

그러나 밖에서 마이크에 ON이 되며 신현제의 목소리가 합주실 안에 들어왔다.

“뭔데, 넌.”

방음 유리 건너편에서 문제집을 풀고 있던 신현제가 마이크를 잡고 물었다.

“오디션이라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얘 오디션 보러 가잖아. 그 케이블 방송사에서 하는 이번에 새로 생긴 오디션 프로그램에.”

“금시초문인데요.”

마이크를 쥐고 있는 신현제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했다. 이수호는 아이고 두야, 하고 중얼거리며 손으로 이마를 두드렸다.

“지금 들었으면 됐지. 자, 다시 시작한다.”

“아니요. 전 안 됐는데.”

신현제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무슨 오디션인데요? 혼자 나가요?”

“네.”

이수호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디션에서 빵하고 터져서 학교 아이들을 놀라게 한 후, 우쭐우쭐 데뷔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꼴을 봐서는 오디션에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쓰고 나가야 할 판국이었다.

“나가면 데뷔해요? 어디랑 계약하는데요?”

“모르죠, 그건.”

“계약 조건은 어떤데요? 잘 알아보고 나가는 거예요?”

“알아보긴 했는데……. 돼봐야 알죠.”

나가면 당연히 내가 우승이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굴러갈지 모른다. 그래서 이수호는 계약 걱정은 그때 가서 하자고 생각했다.

“조건도 잘 알아보지 않고 나간다고요?”

“그게…….”

이수호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자 우장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자도 아니고 뭐가 그리 궁금해.”

“매니저입니다.”

이수호는 물론이고 밴드의 멤버들 모두 기함을 금치 못했다. 이런 음악이 팔릴지 궁금하다고 밴드 옆에 잠시 있겠다고 한 주제에 말은 잘한다 싶었다.

“그게 지금 중요해? 나중에 해라. 마이크 좀 꺼.”

“중요합니다.”

신현제는 마이크의 온 버튼을 끌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중요하니까 묻고 있는 거죠.”

“글쎄. 개인적인 문제 같아 보이는데.”

우장일과 신현제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쉬었다 해요.”

이수호가 기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는 합주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디 가?”

“어디 가요?”

방금 전까지 대치상태에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물었다. 이수호는 화장실이요, 하고 힘없이 대답했다. 복도로 나오자 우장일이 먼저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힘들지. 합주.”

“생각보다는. 태섭이 형이 의외로 많이 깐깐하네요.”

“그러니까 리더지.”

수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일의 말에 동조했다. 이 바닥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밴드의 리더를 하려면 그 정도의 완벽주의는 갖추어야 했다.

“목 아프겠다. 물 사러…….”

장일의 말이 끝나기 전에 뒤에서 불쑥 생수병이 내밀어졌다.

“마셔요.”

신현제였다. 이수호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생수병을 받아들었다. 이수호는 물을 마시며 신현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신현제가 자신에게 차가운 생수병을 준비해 전해주는 날이 오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오디션 진짜 볼 거예요?”

“네.”

“왜요?”

이수호는 생수병을 입에 물고 눈을 끔뻑거렸다. 이건 마치 해는 왜 하늘에 떠있나요, 하는 질문을 듣는 기분이었다.

“왜긴 왜예요. 유명해지려고 그러지.”

유명해진다는 부분에서 신현제는 배 부근에서 뜨끈한 불쾌함이 울컥 치솟는 것을 느꼈다. 텔레비전을 가진 인간이라면 이 사람을 다 볼 수 있게 된단 말인가.

“꼭 유명해져야 해요?”

“그럼요.”

이수호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난 슈퍼스타가 될 거니까.”

“난 그럼 네 뒤에서 드럼이나 치고 있어야겠다.”

“오, 좋은데요.”

농담이 아니고 장일의 실력이라면 세션맨으로도 흠잡을 데 없는 실력이었다.

“나는요?”

신현제가 불쑥 물었다.

“네?”

“나는 그때 뭐하냐고요.”

“……글쎄요. 여기 사장?”

당연한 대답인데도 신현제의 부루퉁한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이수호는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나 싶어 연신 그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나는…….”

신현제가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연 순간 이수호가 어, 하고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복도 반대편에서 낯익은 여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K&P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여자 아이돌 세리였다. 짧은 반바지에 킬힐을 신고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바비 인형이었다. 이수호는 눈을 빛내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 뒤를 따라 걷는 신현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지 멀쩡한 남자라면 눈앞의 아리따운 아이돌을 보고 좋아서 눈을 빛내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상대는 지금 최고의 주가를 자랑하는 바비걸즈의 메인 보컬이었다. 복도를 가로질러 달려가지 않은 것만 해도 상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신현제는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갑자기 배가 아프다. 이상하게 배가 아팠다. 위 부근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매사 모든 일에 초탈할 것 같던 푸른 카디건이 예쁜 여자가 앞에 나타나자 눈을 반짝이며 걸음을 빨리하는 모습 따위, ……배가 아프다.

신현제는 한 손으로 위를 누르며 인상을 찡그렸다.

반대편에서 그것도 모두 제법 괜찮은 외모를 한 세 명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자 세리도 이쪽을 의식하는 눈치였다.

우장일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수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신현제는 배를 움켜잡고 그 뒤를 따랐다. 이수호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약간 우울해 보이는 그의 눈동자에 웃음이 반짝 어렸다. 신현제는 시발, 이라고 욕을 삼키며 배를 움켜잡았다.

일 미터만 더 가면 손이 닿을 거리였다. 이수호는 자신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잔뜩 의식을 한 얼굴로 상냥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인은 나중에…….”

“와! 신난다!”

고개를 숙이다 못해 바닥에 납죽 엎드린 이수호가 외친 한마디였다. 복도 중간에 선 세 사람은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피크. 클레이튼 독수리 시리즈.”

이수호가 바닥에서 주운 피크를 들어 보이며 외쳤다.

“어? 그러네.”

우장일이 피크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빙긋 웃었다.

“저 이거 모으고 있었는데, 딱 이걸 잃어버렸거든요. 횡재야.”

이수호가 바닥에서 주운 피크를 옷 위로 슥슥 닦으며 재잘거렸다.

“이거 단종되서 나오지도 않던데. 이런 데서 줍게 될 줄이야.”

피크를 쥐고 몸을 일으킨 이수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를 발견하고 잔뜩 긴장해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면 그렇지. 세리는 속으로 씨익 웃었다.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바닥에서 자신을 보고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단 한 가지 종류였다.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

보아하니 세 사람 모두 그쪽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

“어……, 혹시…….”

잔뜩 긴장해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이수호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인은 거절하려고 했는데 저렇게 귀여운 표정을 짓는다면, 어쩔 수 없었다. 세리는 가방에서 펜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이수호는 한층 더 우울해진 눈을 하고 물었다.

“……피크 주인이세요?”

그 한마디에 여자는 분노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한 명의 남자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기침을 했고, 또 한 명의 남자는 씻은 듯이 복통이 나은 기쁨에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사건의 중심에는 원하는 피크를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는 창백한 얼굴의 한 소년이 서 있을 뿐이었다.

“대박인 듯.”

“……그게 심한 거예요?”

“대박이지. 넌 대한민국 남자의 자격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다.”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약 십여 분간 배를 잡고 웃던 김병두가 던진 말이었다.

“어떻게 세리를 못 알아보냐. 너희는 알았지?”

“뭐, 가끔 봐서?”

신현제가 그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대답했다. 이수호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특수한 집안 환경을 가진 신현제는 애당초 기대도 하지 않았다.

“여자 아이돌한테 별로 관심 없을 수도 있지.”

우장일이 수호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죠? 그렇죠?”

이수호는 우장일 역시 그 여자를 보고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매사 무심해 보이는 그라면 분명히 나와 같을 것이다!

“장일이 넌 알지? 세리가 누군지.”

“얼굴 정도는.”

우장일의 대답에 수호는 좌절했다.

“어떻게 걔를 모를 수 있냐? 넌 우리 밴드의 수치다.”

“……모를 수도 있죠. 그게 뭐 대수라고.”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이수호가 동요하고 있음을 모두 알아차렸다. 증거로 이수호는 일부러 기타 줄이 느슨하다고 중얼거리며 가방에 고이 넣어두었던 기타를 굳이 꺼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 얼굴 외우는 게 뭐가 중요해요. 걔들이 내 얼굴을 외우게 하면 되지.”

신현제가 그가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자기 본위의 주장을 펼쳤다. 이수호는 흘끔 신현제를 쳐다보았다. 저게 나름 내 편을 들어주는 거겠지. 그런데도 이렇게 기분이 묘하게 더럽다니.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래. 나중에 슈퍼스타가 되면 걔들이 너보고 인사하겠지.”

우장일이 이수호를 도닥였다.

“당연하죠!”

이수호가 기운을 되찾고 주먹을 움켜쥐며 외쳤다.

“장일이 너는 얘가 진짜 마음에 들었나보다. 은근 편들어주고?”

태섭의 놀림에 장일이 응, 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신현제는 잠시 잊었던 복통이 뜨끔하고 다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드셨나. 이 무뚝뚝한 부산 사나이 마음을 뭐가 그렇게 녹였어.”

이수호가 후후 웃으며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받치며 대답했다.

“역시 얼굴?”

“…….”

“……물론 얼굴이 나쁜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농담을 못 받아줘.”

썰렁해진 분위기에 이수호가 꿍얼거리며 기타 스트링을 풀었다 조였다를 반복했다.

“노래가, 특이해.”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장일이 대답했다.

“얘 목소리 좀 특이하긴 하지. 노래 부르는 창법은 평범한데, 음색이 진짜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그런 목소리야.”

이태섭이 아직은 어린 수호를 밴드에 영입시킨 결정적인 이유는 그 목소리였다.

“그게, 가까이 들을수록 좋아.”

“뭐?”

“무대 아래서 듣는 것보다, 가까이 듣는 것이 훨씬 좋다고. 이 녀석 노래.”

우장일이 기타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수호의 머리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신현제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알고 있었어요. 그거.”

불쑥 내뱉은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신현제에게 꽂혔다.

“뭐?”

“이 사람 노래, 가까이서 들을수록 더 좋다는 거, 알고 있었다고요. 제가 먼저.”

제가 먼저, 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신현제는 억울했다. 분명히 자신이 먼저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무대에서 듣는 것보다 옆에서 들으면 훨씬 더 좋은 목소리라는 것도, 어떤 사람에게서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라는 것도.

“그럼 난 어떡해? 가수 되면 사람들 귓가에 노래를 속삭여줄 수도 없고.”

이수호가 난감하다는 듯 낯을 찌푸리고 투덜거렸다. 신현제는 무심코 푸른 카디건이 자신의 귓가에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을 떠올렸다. 귀가 간질거리며 열이 오르는 것 같아 그는 연신 손바닥으로 귀를 문질렀다.

“뭐야. 모기 물렸어?”

이태섭이 오지랖 넓게 신현제의 귀를 가리켰다.

“아니요.”

“귀가 빨간데?”

“둬요, 그냥.”

신현제는 다시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근데 여기 몇 시까지 있어도 되는 거냐.”

“원하시는 만큼.”

“그럼 좀 늦게까지 하다 가자. 이런 곳 언제 이렇게 마음껏 써보겠냐.”

다들 본능적으로 매니저를 자처한 신현제 저 새끼가 언제 마음을 바꿀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는 늦게 들어가도 되냐? 고딩이.”

이태섭은 수호에게 물어놓고 아차 싶었다. 이수호가 저놈 앞에서는 절대로 자신이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저는 상관없는데요.”

이 중에서 공식적인 유일한 고등학생 신현제가 문제집을 읽으며 대답했다. 이수호는 저놈이 남에게 관심이 없어 천만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상대가 누구를 바라보며 말하는지 확인할 텐데, 신현제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 그렇지. 하하하. 너는 괜찮냐?”

태섭이 수호에게 물었다.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마침 집에 혼자 있어서 언제 들어가도 상관없었다. 오디션 준비가 조금 걱정될 뿐.

“나중에 내가 데려다줄게.”

이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차가 있는 장일이 수호에게 말했다.

“아니요. 집 여기서 별로 안 멀어요. 택시 타도 기본요금 나올걸요.”

“늦었으니까 데려다줄게.”

“야, 나도.”

“나도, 나도.”

태섭과 병두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니네는 알아서 가. 새끼들아.”

“사람 차별 쩌네.”

“와. 장일이 형이 욕도 하네요?”

“몰랐어? 얘 입 걸어. 욕도 잘하고.”

그렇게 말하는 병두의 팔뚝을 우장일이 주먹으로 내리쳤다.

“악! 봐라. 심지어 폭력적이다!”

“김병두. 까분다, 너. 형한테.”

세 사람이 서로 친구처럼 말을 놓고 지내긴 해도 우장일이 그중 가장 연장자였다. 두 사람이 장난스럽게 주먹질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며 태섭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수호에게 내밀었다.

“가서 김밥이랑 떡볶이, 이런 것 좀 사와라. 배고파 돌아가시겠다.”

“왜 제가 가요?”

“네가 여기서 제일 어리잖아. 원래 이런 심부름은 제일 어린놈이 가는 거야.”

“같이 갈래?”

장일이 수호에게 묻자 신현제가 문제집을 탁 덮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가 제일 어린놈입니다. 같이 가요.”

이수호는 엉겁결에 제일 어린놈의 뒤를 따라나서게 되었다. 이태섭이 쫄면이 불으면 맛이 없으니 음식을 받으면 냉큼 달려오라고 등 뒤에서 간절히 외쳤다.

뭔가 화가 났는지 앞서 성큼성큼 걷던 신현제는 지하에서 계단참에 서서 이수호에게 빨리 오라고 턱짓했다.

“왜 이렇게 느려요.”

이수호는 어, 하고 후다닥 달려가다 발이 꼬이는 바람에 계단에 손을 짚고 넘어지고 말았다.

“으아.”

다행히 크게 넘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수호는 얼른 앞으로 쏠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몸을 일으켰다. 신현제가 그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워주었다.

“괜찮아요?”

“예.”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얼굴 괜찮고 손 괜찮으니, 뭐.”

이수호는 몸에서 가장 중요한 두 군데를 확인하고 씨익 웃어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신현제의 표정은 굳어진 채였다.

“손이랑 얼굴만 안 다치고 다른 데는 다쳐도 돼요? 그럼?”

“어…….”

“어디 봐요. 다친 데 없나.”

신현제가 이수호의 어깨를 붙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수호는 기분이 묘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두들겨 패던 상대가 계단에 손을 대고 넘어진 것 정도로 이런 얼굴을 하다니.

“괜찮아요?”

신현제가 다시 걱정스럽다는 듯이 묻는다.

“…….”

꼴불견이다. 신현제. 쌤통이고, 메롱이다.

이수호는 짐짓 냉정한 척 그의 손을 밀어내며 괜찮다고 중얼거렸다.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신현제가 자신의 얼굴을 흘깃흘깃 살피는 모습에 이수호는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손끝을 강아지풀로 간질이는 것 같았다.

“뭐 사오래요?”

“글쎄요. 김밥이나, 떡볶이, 쫄면, 뭐 그런 거.”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난 그냥 아무거나 다 괜찮아요. 다 잘 먹어서.”

“아, 나는 순대 이런 거 싫던데…….”

신현제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왜요? 맛있는데.”

“그거 내장이라면서요. 젠장. 굳이 내장을 왜 돈 주고 사 먹어야 하는지.”

“……내장이요?”

순대가 돼지 창자에 소를 넣어서 만드는 음식이긴 해도 내장이라고 표현될 정도는 아니었다.

“몰랐어요? 그거 돼지 내장인데. 그 안에 든 것도 돼지가 죽기 전에 먹은 거잖아요, 더럽게.”

“…….”

이수호는 할 말을 잃었다.

모르긴 몰라도 세상에 그런 음식이 있으면 시중에 유통 자체가 안 될 텐데. 그러나 신현제는 순대라는 음식이 돼지의 내장과 돼지가 생전에 먹어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로 만들어졌다는 이해하기 힘든 가설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 눈치였다.

“그런 더러운 음식을 대체 왜 사람들은 돈 주고 사 먹는지 모르겠어요.”

“……누가 그래요?”

“네?”

“순대가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이라고.”

“할머니요.”

“…….”

신현제의 할머니라는 분은 아무래도 범인과 거리가 좀 먼 분이신 것 같았다.

“할머니가 좀 장난을 좋아하셨나 봐요?”

“네. 엄청 짓궂으셨는데. 장난도 좋아하시고, 좋은 분이셨죠.”

그 좋은 분에게 속아서 아직까지 순대의 정체성을 곡해하고 있는 손자가 다정한 눈을 하고 고인을 회상했다.

“그 쓸데없는 것에만 집착하지 않으셨더라도, ……지금도 살아계셨을 텐데.”

“…….”

이수호는 기분이 우울해졌다. 엉터리 무당에게 속아 병세가 깊어져 타계하신 신현제의 할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자신이 무당대표는 아니지만, 그쪽과 연관이 있는 사람으로서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아, 진짜.”

신현제가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왜 자꾸 이런 얘기를 하나 모르겠네.”

“네?”

“다른 사람한테 이런 얘기한 적 없거든요. 쪽팔리게.”

“적당한 거리라서 그런가 봐요. 전에 그랬잖아요. 나는 적당한 거리라고.”

이수호가 웃었다. 그러고 보면 신현제는 참 별스러운 인간이었다. 어떻게 상대를 앞에 놓고 적당한 거리니, 뭐니 하는 얘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거 취소예요.”

신현제가 빌딩의 문을 열어주면서 말했다.

“네?”

“적당한 거리, 그거 취소라고요.”

신현제의 눈이 진중하게 이수호를 응시했다. 어떤 얘기를 했을 때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 이라고 가볍게 말하던 그때의 표정이 아니었다. 이수호는 문득 신현제의 시선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때 그랬잖아요. 나 믿어준다고.”

“……아, 예.”

외계인에 관한 얘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같이 겪었던 귀신.

“난 솔직히 그 얘기 누가 믿거나 말거나 상관없었거든요.”

솔직한 심경이었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대에게 외계인 얘기를 꺼낸 것은 어느 정도 변덕이 앞선 마음이었다. 혼자 알고 있기엔 너무 황당한 일이라서 툭 내뱉은 얘기였다.

그때 이 사람은 자신조차 믿기 힘든 그 얘기를 믿어주겠노라고 답했다. ‘누군가 믿어주지 않으면, 외롭잖아요.’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신현제는 잠시 동안 그 말의 의미를 머릿속으로 되새겨보았다. 믿어주지 않으면 외롭다, 믿어주지 않으면 외롭다. ……외롭다.

“그런데 상관이 있어졌어요.”

“무슨 상관이요?”

“그쪽이 날 안 믿어주면 외로워질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상관.”

외롭다도 아니었다. 외로워질 수도 있다, 라는 가정형이었다.

“외로워 본 적이나 있어요?”

이수호는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가시가 돋친 말투로 내뱉고 말았다.

신현제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그가 구태여 다가가지 않아도 사람들이 저절로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번듯한 외모와 적당히 좋은 머리, 뛰어난 신체적 조건과 화려한 환경까지.

남자들 사이에서 군림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인간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무리의 우두머리로 군림했다. 졸업과 동시에 모든 것을 손에 쥐게 될 신현제가 과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외로움을 느껴보긴 했을까.

“아니요. 아직.”

역시, 신현제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앞으로 외로우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네?”

“그때 그쪽 대답을 듣고 나서 그런 걱정이 생겼다고요.”

“현대인의 쓸데없는 걱정.”

이수호가 깔끔하게 결론 내려주었다.

“그러게요. 애초에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말하며 신현제가 옆에서 걷고 있는 이수호를 흘깃 쳐다보았다. 창백한 피부 때문에 도드라져 보이는 입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에 신현제는 무심코 시선을 빼앗겼다.

“으앗!”

갑자기 날아든 손바닥이 신현제의 얼굴을 내리눌렀다. 코에 전해지는 급작스러운 고통에 신현제가 윽, 하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뭐, 뭐예요. 갑자기.”

이수호가 기겁하며 물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인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를 문지르며 신현제가 대답했다.

“지금, ……나한테 키, 키…….”

이수호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신현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심지어 눈빛에는 억울함마저 엿보였다.

“방금 나한테 키…….”

이수호는 말끝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신현제는 분명 고개를 숙여서 입술을 바싹 갖다 댔다. 손바닥으로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면, 입술이 맞닿았을 상황이었다.

“……키스하려고 했잖아요, 지금.”

이수호는 고개를 숙인 채 랩을 하듯 재빨리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제가요?”

“네.”

“안 그랬는데.”

“그랬어요.”

“술도 안 마셨는데. 설마…….”

신현제가 살짝 인상을 쓴 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설마 나, 아직도 술이 안 깼나?”

“…….”

이수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존나게 귀하게 자란 신현제는 술이 취한 건지 깬 것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분식집 앞에 도착한 이수호는 이태섭이 준 돈에 맞추어 이것저것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두 사람은 밖에 있는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집에 어떻게 갈 거예요?”

“걸어서요.”

“안 멀어요?”

“그냥 뭐. 괜찮아요.”

이수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바람도 선선하겠다 오랜만에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택시를 타기에는 갖고 있는 돈이 빠듯했다. 밴드를 해서 가장 좋은 점은 밥을 먹을 때 형들이 돌아가면서 돈을 낸다는 것이었다. 주머니 사정을 떠올리면 이태섭이 사주는 지금 이 야식은 은혜롭기 그지없었다.

“그 사람 차타고 가는 건 아니죠?”

“그 사람?”

“우장일. 드럼이요.”

“아아, 장일이 형.”

이수호는 장일이 차로 태워다 준다 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것도 영 나쁘지는 않다. 일단 예의상 거절을 하긴 했지만, 굳이 데려다준다고 하면 못 이기는 척 차에 탑승할 계획이었다.

“그 차 타지 마요.”

“네?”

“그 차, 타지 말라고요.”

“왜요?”

마치 그 차에 타면 새우잡이 어선에 팔려가기라도 한다는 듯한 어투였다.

“타지 말라면 타지 마요.”

험악한 얼굴로 신현제가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내가 그 차를 타건 말건 무슨 상관이에요.”

“…….”

신현제는 말문이 막혔다. 무슨 상관이냐는 물음에 본질적인 의문이 떠오른 것이다.

나는 대체 여기서 왜 이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구구절절 하고 있는 것인가. 어째서 이 사람이 문신쟁이의 차에 올라타는 게 위가 뒤틀릴 정도로 싫은 것인가.

왜. 어째서, 나는…….

“음식 나왔어요!”

아주머니의 외침에 이수호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야식을 받아들고 나왔을 때 신현제는 사라진 후였다.

“뭐지.”

이수호는 주변을 둘러봤지만 신현제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가 이수호는 손에 든 음식을 보고 녹음실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쫄면이 퉁퉁 부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이수호가 골목 모퉁이를 돌았을 때, 길 한가운데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신현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해요? 여기서.”

“…….”

“뭐 있어요?”

바닥에 금붙이라도 떨어져있나 싶어서 이수호도 그 옆에 쭈그려 앉아 신현제와 눈높이를 맞췄다. 신현제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박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래요?”

“…….”

“설마, ……어디 아파요?”

이수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앞에 설마가 붙는 것이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신현제가 어디 아프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길 한가운데에서 움직이지 않고 이러고 있으니 그 질문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파요.”

정말 믿기지 않는 대답이 돌아왔다.

“진짜요?”

“아파요, ……배가.”

신현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배가? 어디가?”

“다…….”

거짓이 아닌지 신현제의 이마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웬만한 통증으로 이놈이 이럴 리가 없었다. 설마 맹장이 터진 것인가 싶어서 이수호는 통증의 위치를 물었다.

“오른쪽? 왼쪽? 어디가 아파요? 여기?”

오른쪽 복부 하단을 손끝으로 누르며 묻자 신현제가 고개를 흔들었다.

“택시 부를게요.”

조금만 나가면 큰길이었다. 병원으로 데려가야겠다 싶어 이수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현제가 수호의 손목을 움켜잡은 것도 그와 동시였다.

“……잠시만, 이러고 있어요.”

“네?”

“이러고 있으면 괜찮은 거 같아.”

“맹장이 터진 거면 빨리…….”

“아니라고, 맹장!”

신현제가 버럭 외쳤다. 그가 소리를 지르자 이수호는 겁을 집어먹고 습관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뒷걸음질 쳤다.

“미안해요. 내 맹장은 건강하니까……, 택시 부를 거 없어.”

“…….”

이수호는 주춤거리다가 다시 신현제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의 말대로 그의 안색은 점점 나아지는 것 같았다.

“맹장, 정말 안 아파요?”

“내 맹장 괜찮아요.”

“맹장이 터지면……, 근데 맹장이 아픈 거 맞나?”

“그럼 심장이 아프겠어요.”

참으로 바보 같은 말을 주고받는다고 생각하며 이수호는 신현제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잔뜩 인상을 쓰고 있던 신현제가 눈이 마주치자 조그맣게 욕을 중얼거렸다.

“……시발.”

“왜요?”

“……쪽팔려서.”

“…….”

쪽팔릴 만하다. 지금 이 상황을 사진으로 찍어다가 학교 교문에 붙여놓으면 애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박장대소할 텐데. 이수호는 자신에게 핸드폰이 없는 것이 처음으로 몹시 안타깝게 느껴졌다. 오디션이 끝나면 우선 핸드폰부터 장만해야겠다는 몹시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신현제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바닥만 노려보았다.

“왜 먼저 갔어요?”

이수호가 물었다.

“…….”

“화……, 났어요?”

이성적으로 신현제가 자신에게 화를 낼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수호는 직감적으로 그가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음을 알아챘다.

“내가 뭐 잘못했어요?”

“……아니요.”

“그런데 왜요?”

“…….”

신현제가 또 한 번 시발, 이라고 중얼거렸다. 이수호는 겁이 덜컥 났다. 이놈이 자꾸 욕을 하는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불길한 예감이 한여름 밤에 피워놓은 모기향처럼 모락모락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의 손목은 아직도 신현제 놈에게 잡혀있는 상태였다.

그때 갑자기 신현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이수호를 질질 끌고 골목 안으로 걷기 시작했다.

“왜요? 왜요? 왜 여기로 가요? 저쪽인데.”

이수호는 필사적으로 길 건너 빌딩을 가리켰다. 인적이 드문 골목은 수호에게 좋지 않은 기억만 떠올리게 할 뿐이었다.

이놈이 갑자기 나를 알아보고 두들겨 패려는 것은 아닌지, 지금까지 사준 햄버거를 뱉어내라고 생트집을 잡는 것은 아닌지. 불안과 초조로 수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저쪽…….”

빌딩을 가리키던 이수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몹쓸 신현제가 이수호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들고 키스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의 탐색하는 듯한, 조심스러운 키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혀가 거침없이 입안을 탐했다. 놀란 이수호는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그대로 놓치고 말았다. 신현제는 그를 벽에 몰아세우고 몸을 바짝 가까이 댄 채, 키스에 열중했다. 열중, 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상대의 얼굴을 소중하다는 듯이 감싸 쥐어, 호흡하는 것조차 잊은 듯이 격렬하게 입을 맞추는 소년의 모습은 열중 그 자체였다.

부드러운 혀가 살아 움직이는 또 하나의 생명체처럼 젖은 입안을 탐닉했다. 빠듯하게 맞물린 다리 사이에서 묵직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수호가 놀라서 허리를 뒤로 빼려 했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등 뒤에 닿는 차가운 콘크리트 벽과 대조되는 열기가 이수호의 몸을 잠식해갔다. 떨어질 듯 다시 이어지고, 끝날 듯 또 시작되는 입맞춤 사이로 신현제의 뜨거운 호흡이 전해졌다. 이수호는 온몸이 덜덜 떨렸다. 신현제를 밀어내고 싶어도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버티는 것이 전부였다.

신현제의 손바닥이 이수호의 옷자락 안을 파고들었다.

“뭐, 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수호가 덜덜 떨리는 입술을 움직여 물었다. 물론 뭐하는 짓이냐는 온전한 문장을 내뱉진 못했지만 신현제는 그의 말을 알아들은 얼굴이었다.

“모르겠어요.”

“……예?”

“모르겠는데, ……시발, 키스하고 싶어 죽을 거 같아.”

“…….”

“키스하고 싶고, 껴안고 싶고, 만지고 싶어요. 그러면 안 돼요?”

“다, 당연히 안……!”

신현제가 이수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겹쳐진 몸을 타고 뜨거운 피가 심장을 통해 요동치는 소리가 전해졌다.

“……상관하고 싶어.”

“예?”

“상관하고 싶다고. 너랑.”

“왜 반말을, 아니……, 무슨 상관을…….”

말이 이어지지 않고 생각에 렉이 걸린 듯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이수호는 눈을 끔뻑거리면서 대체 이게 뭔 상황인가 정리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왜 사람을 돈 주고 살 수가 없는 거죠?”

신현제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네?”

“그럼 간단한데, 젠장.”

“뭐가 간단, 이보세요, 잠깐만…….”

안겨 있는 상황이라 신현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수호는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신현제는 손에 힘을 주어 악착같이 매달릴 뿐이었다.

숨 막힐 듯한 단단한 품속에서 이수호는 이것이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신현제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다. 숨을 황소처럼 거칠게 몰아쉬며, 절대로 놓아줄 수 없다는 듯이 단단하게.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뜨거운 몸을 하고.

“배가 안 아파…….”

“네?”

“배가 안 아프다고요. 지금.”

“다행, 아니, 일단 이것 좀 놓고…….”

신현제가 이수호의 양어깨를 손으로 쥐고 몸을 바로 세웠다. 공중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실타래처럼 엉켰다.

처연해 보이는 수호의 눈동자가 조심조심 신현제의 표정을 더듬었다. 신현제가 쥐고 있는 어깨가 아팠지만, 차마 그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제가 싫어요?”

신현제가 물었다.

“네?”

“제가 싫으냐고요.”

“…….”

이수호는 할 말을 잃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당연하지, 이 병신아! 라고 바락 외쳤겠지만 지금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신현제의 더없이 진지한 얼굴이, 어깨를 움켜쥔 손에서 전해지는 열기가, 길바닥 한가운데에서 배가 아프다고 웅크려 앉아있던 그 꼴사나운 모습이, ……그런 것들이 이수호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 안 싫으면 나랑, …….”

말을 잇는 것이 어려운지 신현제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수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목울대가 울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망가트릴 귀신조차 주변에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수호는 타인의 운명이나 처한 상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재주를 타고 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능력이 없는 범인이라도 다음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신현제의 눈이나 몸짓에서 이수호는 다음 말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엄마……. 이 미친놈이……, 나를 좋아하나 봐.

“나랑……, 나는…….”

신현제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말을 내뱉는 사람처럼, 잔뜩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이수호의 심장은 파득거렸다. 그것이 공포 때문인지, 신현제의 입에서 나올 죽었다 깨어나도 들을 수 없을 것 같던 그 말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제 심장은 골목 옆을 지나는 행인에게 들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심하게 뛴다는 사실이었다.

휘영청 밝은 달이 도시의 건물 끝에 걸려 있었다. 예로부터 보름달은 음기를 가득 지녀, 귀(鬼)를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징조로 해석되었다. 보름달이 뜬 밤에 미친 사람들이 활보를 하고 늑대인간이 달리는 이야기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수호에겐 환하게 밝은 저 달이 그렇게 해석되었다. 이 상황은 그에게 도시괴담이었다. 신현제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될 말이, 나오려 하고 있다. 저 달빛이 그를 미치게 만든 게 분명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늘로 기어 올라가 달을 뜯어내고 싶었다.

신현제가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마음을 굳게 굳힌 모양인지, 그가 고개를 바로 세우고 입을 열었다.

“나랑…….”

열병을 앓는 소년처럼, 진심을 담은 달뜬 눈빛으로 신현제가 이수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수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휘황한 달의 부근에 뿌옇게 젖은 달무리가 몰려들었다. 도시괴담이 탄생하기에 퍽, 어울리는 밤이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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