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성주안이 웃으며 거실 창 쪽 반대편 창문을 열었다. 쏴아아……. 맞바람이 들어오며 둘의 머리카락이 날리기 시작했다.
“이제 바람도 들어왔네요. 햇빛, 그림자 그리고 바람. 세윤 씨가 혼자라고 느끼는 그 순간에도 세윤 씨는 혼자가 아니었어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다른 존재와 함께할 수 있으니까요.”
공세윤이 놀란 것 같은 눈으로 창을 보다가 그림자를 보다가 성주안을 봤다. 초점 없던 갈색 눈동자가 제 빛깔을 찾은 듯했다.
참 예쁜 색이네. 인공적인 그래픽으로는 절대 저 색을 닮을 수 없겠지.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는데 공세윤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애 달래는 스킬이 부족했나? 엄마 흉내를 낸다고 냈는데…….
공세윤이 훌쩍거리며 말했다.
“뭐 도와드리면 되는데요? 할게요.”
그렇지! 일단 집 밖으로 나가는 것부터 하자.
성주안은 공세윤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아직 퇴근 시간 전이라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이불을 털기 좋았다. 공세윤의 손에 한쪽 이불 끝을 쥐여주고 난 다음 자신은 반대편을 쥐고 위에서 아래로 흔들었다.
“이렇게 탈탈 털어요.”
성주안의 움직임에 맞춰 공세윤도 이불을 세차게 흔들기 시작했다.
“으악!”
공세윤이 너무 세게 흔드는 바람에 성주안의 몸이 중심을 잃고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
“…….”
잠시 침묵이 흐르고 공세윤이 화들짝 놀라며 성주안의 몸을 밀쳤다.
아니, 누가 안아달랬나? 자기가 힘 조절 못 해서 당겨놓고 왜 성질이야. 아니다. 참자. 쟤는 정상이 아니니까, 정상인 내가 참아야지.
성주안은 화를 참고 억지로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하하, 잘했는데 힘을 조금만 덜 주면 좋겠어요.”
그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동자를 굴렸다. 마치 겁을 먹은 듯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 그만하죠.”
손에 이불을 쥔 채, 공세윤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랑 함부로 닿지 마세요. 이렇게 닿았다가 떨어지면 너무 추워요. 그리고…… 저는 성좌님 거니까 다른 사람이 만지면 싫어요.”
몸이 닿았다가 떨어지면 너무 춥다니. 대체 얼마나 혼자 있었고 또 얼마나 외로우면 저런 생각을 하는 거야?
공세윤을 스쳐 지나갔을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대했을지가 예상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공세윤을 오늘 안에 꼭 웃게 만들고 싶다는 이상한 오기도 생겼다.
“알겠어요. 만지지 않을게요. 우선 오늘은 늦었으니까 밥부터 먹고 좀 쉬다가 씻고 자요.”
공세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성주안을 쳐다봤다. 이제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이 갔다. 그래서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혼자 두고 가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저 배고픈데 집에 먹을 건 있습니까?”
“머, 먹을 거요? 어……. 저 밥 안 먹은 지가 좀 되어서요. 성좌님이 접속 거부했을 때부터 안 먹었으니까…….”
미친. 그럼 대체 밥을 얼마나 굶었다는 말이야? 가슴을 짓누르던 죄책감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세상에! 밥을 안 먹으니까 더 우울하죠. 얼른 와요. 이불 넣어놓고 장부터 보러 갑시다. 저 어차피 장비도 사야 하고.”
“……밖에 나가자고요?”
원래 우울하면 움직이는 게 귀찮아지는 걸 안다. 저런 상태에서도 센터를 찾아와 치료를 받으려 했던 건 아마도 희생의 창조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겠지.
그런 사람에게 희생의 창조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니,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의지마저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주안은 그를 더 움직이게 하고 싶었다.
“저 배고파 죽겠어요. 설마 저도 같이 굶자는 건 아니죠?”
“그, 그렇지만 밖에 나가는 건 좀…….”
“어차피 여기도 밖이잖아요? 얼른 이불 갖다 놓고 각성자 전용 쇼핑몰 갑시다. 저 물약도 없는데 갑자기 던전 열려서 죽으면 어떡해요?”
“그건 그러네요.”
도망치지 못하게 공세윤의 손을 꽉 잡은 채로 집으로 올라갔다. 이불을 침대 위에 예쁘게 펼쳐 놓고, 곧장 다시 나오려고 하자 공세윤이 두 발에 힘을 꽉 주고 서서 버텼다.
“왜요? 가기 싫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요…….”
잠시 머뭇거리던 공세윤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지갑을 가져가야 장을 보죠.”
공세윤이 방안을 향해 목을 쭉 뻗었다. 이대로 놓고 지갑을 가져오라고 할까? 가지러 가는 척하면서 도망가는 건 아니겠지.
모준영에게 받은 카드가 있어서 이대로 데려나가도 되긴 하지만 엄청나게 비싼 장비값과 물약값이 마음에 걸렸다. 코인과 화폐의 가치가 다르니, 화폐로 장빗값을 감당하려면 억 소리 나겠지.
성주안은 공세윤의 손을 풀어주지 않고 말했다.
“손잡은 채로 지갑 가지러 갑시다. 그래도 되잖아요?”
공세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너는 완전히 포위됐다. 무장을 해제하고 스킬을 잠근 후에 순순히 항복하라!”
수색대장이 백은후의 집 앞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겉으로 보기엔 관리센터에서 나온 헌터들이 백은후가 두려운 나머지 진입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 이것은 작전이었다.
수색대장이 건물 앞에서 백은후의 시선을 빼앗는 사이 진짜 수색대는 모준영이 직접 이끌고 백은후의 집 뒷문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백은후가 성주안을 납치하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었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건 집이 홀로 떨어진 곳에 있는 저택이라 여기서 백은후가 날뛰어도 민간인의 피해가 없다는 거였다.
후문으로 진입을 성공한 모준영은 어마어마한 집의 크기에 당황했다. 백은후가 상급 각성자들을 데려가 길드를 운영한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이건 너무…….
“센터장님, 센터장님? 제 말씀 못 들으셨습니까?”
“아, 다시 말해 봐.”
“방이 너무 많아서 백은후가 어디에 있는지 찾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비싸 보이는 집을 부술 수도 없고.”
“그렇군.”
모준영은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미친 각성자들을 상대로 정의를 실현하면서도 그놈의 법과 규칙을 따라야 한다니. 모준영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할 수 없다. 문을 하나씩 다 열어보고 찾는 수밖에. 백은후보다 성주안을 먼저 찾을 수 있으면 좋으…….”
“어? 센터장님, 저기!”
수색대원이 손짓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저기 복도 끝에서 어둠의 기운이 느껴졌다. 무장한 상태인 백은후가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양동작전이 먹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지? 성주안을 데려간 거로도 모자라 내게 책임이라도 물으러 왔나?”
백은후가 감정이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 표정만 봐서는 성주안을 숨기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모준영은 그의 도발을 무시한 채 공무원답게 이곳에 온 목적을 말했다.
“백은후 씨, 당신을 성주안의 납치 및 감금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뒤이어 미란다 원칙을 말하려는데 백은후가 코웃음 쳤다.
“납치 및 감금이라고? 모함도 어느 정도여야지. 신사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들이닥쳐서 빼돌려놓고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때, 백은후의 뒤로 그가 이끄는 한백 길드 소속 헌터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백은후가 미리 불러 놓은 것인지, 아니면 헌터들을 데리고 사냥이라도 갈 생각이었는지 꽤 많은 수였다.
여기서 전면전을 치른다면 양쪽 다 손해가 큰 싸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모준영은 딜을 걸었다.
“백은후 씨가 당당하시다면, 우리가 집을 좀 수색해 봐도 되겠습니까?”
정중한 제안이었으나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 제안에 백은후는 입매를 비틀어 웃을 뿐 길을 터주지 않았다. 좁은 복도에 많은 인원이 팽팽하게 대치된 상황에서 숨소리조차 시끄러울 정도의 침묵이 내렸다.
역시 전면전밖엔 답이 없는 건가?
생각하고 있을 때,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을 확인해 보니 양동작전을 위해 밖에 남겨 둔 수색대장의 연락이었다.
“무슨 일이지?”
― 센터장님, 여기가 아닙니다. 성주안 씨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고요.
다른 곳이라니……. 당연히 백은후가 납치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준영은 백은후를 주시한 채로 전화를 끊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만약 성주안을 찾았다는 걸 백은후가 안다면 어떻게든 찾아내서 납치하려고 할 게 뻔했으므로 들키지 않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백은후 씨는 기어이 저와 전면전을 치를 생각이란 말입니까?”
“내 집을 뒤지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모준영. 뭔가 이상하지 않아?”
또 무슨 요설로 사람을 홀리려는 걸까?
모준영은 어깨를 빳빳하게 굳힌 채 경계를 풀지 않았다.
“가장 이상한 것은 백은후 씨죠. 그 외에 뭐가 이상하단 말입니까?”
백은후가 피식했다. 상대를 얕잡아 보는 듯한 웃음에 기분이 상했으나 이를 꽉 물었다.
“그 녀석 없어졌다고 하지 않았나? 이거 실망인데……. 똑똑한 모준영이 녀석의 속셈을 알지 못했다니.”
“백은후 씨가 납치한 거 아닙니까?”
일단 백은후를 응대해주고 있긴 했지만 얼른 성주안을 찾으러 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여길 뒤지는 척하다가 적당히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희생의 창조자에 대해서 안다고 하던 녀석이 갑자기 S급 버퍼로 각성하고 사라졌다면, 뭘 의미하는 걸까?”
생각지도 못한 말이긴 했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무한대의 코인을 가진 성좌가 갑자기 나타난 것도, 그리고 그를 아는 일반인이 갑자기 귀하디귀한 S급 버퍼로 각성한 것도 모두 수상했으니까.
모준영은 성주안의 행동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확실히 수상하긴 하단 말이야. 일반인 주제에 센터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나, 희생의 창조자에 대해 먼저 운을 띄운 것도 그렇고 주소도 계좌도 모른다는 게…….
설마 혹시?
모준영이 눈을 부릅뜨자, 백은후가 비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이제 눈치챘어? 녀석이 실은 미리 희생의 창조자와 계약해 놓고 아닌 척했다는 걸.”
모준영은 백은후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백은후 씨 말대로 성주안이 희생의 창조자를 빼돌렸다고 칩시다. 그런 사람이 S급들이 자주 오는 센터에 제 발로 와서 센터장을 찾는다고요? 의심받을 게 뻔한 짓을 왜 합니까? 바보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