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공세윤의 손을 잡고 3층에 도착하자 직원이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공세윤 님, 저희 매장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주안은 그가 먼저 입을 뗄 때까지 옆에 서서 기다렸다. 공세윤은 불안한 눈으로 직원을 바라보고 어깨를 약간 떨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음…… 여기 혹시 버퍼나 힐러 장비는 있나요?”
직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실례지만, 어떤 등급의 장비를 찾으세요?”
대답하려는데 공세윤이 말을 채갔다.
“S급이면 좋겠네요.”
직원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S급 버퍼요? 우리나라에서 S급 버퍼가 있었나요?”
‘제가 그 S급 버퍼입니다!’라고 말하려는데 공세윤이 또 말을 채갔다.
“아니요! 없어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나, 여기에 있는데 왜 없다고 하는 거지? 혹시, S급 버퍼인 게 들키면 곤란한 일이라도 있나? 주안은 그런 세윤의 행동이 조금 의아했지만 굳이 말을 바꾸지 않고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놔두었다.
“그런데 왜…….”
“……왜요? 저 돈 많은데 S급 버퍼 장비 좀 사 놓으면 안 돼요? 장식하려고 그러는 건데.”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이내 친절한 미소를 짓자 공세윤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 웃으면 저렇게 예쁜데……. 웃는 얼굴을 보니 더 자주 웃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성주안은 그의 얼굴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단, S급 전용 몰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을 따라가자 명품관처럼 생긴 곳이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각종 장비가 유리관 안에 들어가 있었다.
“우와…….”
감탄이 절로 튀어나왔다. 제가 심혈을 기울여 속성을 설정한 장비들을 실물로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무기들과 방어구 그리고 액세서리들을 차례로 구경하고 있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공세윤도 마치 처음 보는 것을 보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뭐예요? 처음 온 거예요?”
“네.”
“그럼 그동안엔 장비들은 어떻게 했어요?”
“필요할 때마다 솔플 던전 클리어하거나 아니면 배달시켰어요. 전화해서 이름 말하면 알아서 보내주더라고요.”
아아, 그런 제도도 있었구나. 그러니 집돌이로 살아도 별문제가 없었겠지. 그나저나 진짜 화려하긴 하네.
보면 볼수록 감탄만 나왔다. 제작할 당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예산으로 잡힌 돈이 많아서 무기나 방어구들은 어느 정도 디자인 시안을 뽑았었다. 다만 버퍼나 힐러는 없었기에 처음 보는 장비들이 많았다.
“공세윤님, 어떤 계열로 보여드리면 좋을까요?”
그러게, 뭐가 제일 필요하지? 스킬이 악수, 포옹, 키스……. 이따위니까 무기는 필요 없을 것 같고 아무래도 방어구를 챙겨 입는 게 낫겠지?
생각하고 있는데 공세윤이 불쑥 말했다.
“무조건 제일 튼튼한 S급 방어구로 보여주세요. 위험하니까요.”
갑자기 왜 이렇게 적극적인 거야? 이상하긴 했으나 겁먹고 주춤하는 것보단 훨씬 나으니 가만히 두고 보았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아무래도 방어구는 장착해 보시고들 구매하세요.”
“네!”
자기가 입는 것도 아니면서 참 해맑게도 대답했다. 직원의 뒤를 따라가니 또 다른 직원이 로브처럼 생긴 옷을 가지고 나왔다.
“아쉽게도 저희 매장에서 보유하고 있는 버퍼 방어구 중에 가장 높은 등급이 A급밖에 없네요. 앞으론 던전에서 아이템이 나오면 꼭 갖춰 놓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으로선 A급 방어구만 해도 감지덕지했다. 스탯을 부여하는 방식이 기존의 게임과 비슷하다면 버퍼의 방어구는 물리 방어력이 낮은 대신 회피율이 높을 테니까 그것만 해도 어딘가.
문득 모준영에게 들었던 물약 값이 생각나면서 가진 돈으로 장비를 다 맞출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런데 이 로브 가격은 얼마죠?”
직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2억 4천 5백 50만 원입니다.”
“네?”
2억이라니……. 보조금으로 받은 돈이 15억이니까, 장비를 다 맞추고 나면 밥을 사 먹기도 곤란해지겠는데?
옷을 만져보다가 눈물을 머금고 인벤토리로 넣으려 할 때였다. 공세윤이 옷을 쥐고 놔주지 않았다.
“왜 넣어요? 입어봐야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사이즈는 알아서 맞춰지잖아요.”
“누가 사이즈 안 맞을까 봐 그래요?
“그럼요?”
공세윤이 잠시 머뭇거리며 볼을 빨갛게 물들였다.
왜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건데…….
“제, 제가 입혀보고 싶으니까요. 그거 보면 안 우울해질 것 같기도 하고…….”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인지 묻고 싶었으나 우울함이 나을 것 같다는 말에 설득되어 그냥 바라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앞의 직원은 그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세윤은 주변의 시선 따위 상관없다는 듯 주안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로브를 몸에 가져다 대자마자 감촉이 좋은 천이 스르륵 몸을 감싸는 느낌이 났다. 마치 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가벼운 데다 촉감도 부들부들해서 꼭 이세계의 옷 같았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입을 헤 벌리고 쳐다보는 공세윤과 눈이 마주쳤다.
저건 또 무슨 표정이야.
주안이 인상을 팍 쓰자, 공세윤이 흠칫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직원에게 이것저것 주문하기 시작했다.
“마법의 지팡이랑 목걸이랑 팔찌랑 귀걸이도 주세요. 아, 맞다! 신발도 필요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섭다고 울먹거려놓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모습이 장난감 코너에 온 아이처럼 들떠 보였다. 아니, 웃으니까 예쁘고 좋긴 한데……. 그래도 이렇게 많이 주문하면 어떡해? 더구나 무기는 필요도 없는데. 돈 없어서 못 산다고 하면 체면이 구겨지긴 하겠지만 돈을 아껴야 했기 때문에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성주안은 공세윤의 귀에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세윤 씨, 저는 방어구와 마력 스탯이나 회피 스킬 올릴 수 있는 액세서리면 충분해요. 마법의 지팡이 같은 건 제 스킬에 별로 도움도 안 되…….”
말을 다 하지도 못했는데 공세윤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쟤는 내가 뭘 어쨌다고 울려는 걸까. 우는 애 앞에서 말을 더할 수도 없어서 입을 다물자 공세윤이 직원들을 재촉했다.
“뭐 해요? 지금 당장 가져다주세요.”
직원이 난감해하며 대답했다.
“저, 공세윤 님도 아시겠지만 상급 무기와 액세서리는 비싸…….”
공세윤이 직원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수빙계 헌터답게 눈빛이 차갑고 매서워 주변이 다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돈 있으니까 가져오라고요.”
직원들이 빠르게 움직여 아이템을 챙기는 동안 공세윤은 성주안만 보고 있었다. 시선을 받고 있기가 민망해서 로브를 벗으려고 하자 공세윤의 눈꼬리가 뾰족하게 올라갔다.
“벗지 마세요. 아이템 맞춰봐야 하잖아요.”
“굳이 그럴 필요…….”
으, 눈빛 봐라. 진짜 차갑네.
겁먹고 있을 땐 몰랐는데 진심으로 노려보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왜 표정만 보고 도망갔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알겠어요. 맞춰보면 되죠.”
그제야 공세윤의 얼굴에 냉기가 사라졌다. 이윽고 직원들이 아이템을 가져왔다.
옷은 입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신발을 신으려 하자 공세윤이 손을 덥석 잡았다.
“왜요?”
“잠시만요. 제가 신겨보고 싶어요.”
“……굳이요?”
공세윤은 대답할 말이 궁했는지 눈을 부릅떴다. 가만히 있어도 발에 착 달라붙는 마법 아이템을 왜 굳이 신겨주려는 걸까? 이해가 안 되지만, 뭐만 하면 울거나 성질부터 내니까 참아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화난 표정이 너무 예뻐서 거절하면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진짜, 생긴 게 사기네, 사기야.
“알겠어요. 가만히 있으면 되잖아요.”
공세윤이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몸을 굽히고 신발을 가져다 댔다. 그 속으로 발을 넣자, 세윤이 입꼬리를 올리며 앞축을 꾹꾹 눌러보기도 하고 뒤축도 눌러본 후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야, 딱 맞는다.”
그야, 당연하지. 이게 왜 마법 아이템이겠어. 자기 알아서 맞으니까 마법 아이템이지.
한참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공세윤이 몸을 일으키더니 이번엔 귀고리와 목걸이를 달아주곤 눈웃음을 지었다.
오늘 쇼핑의 목표가 공세윤을 웃게 하는 것이긴 했지만 자꾸 웃으니까 피부가 간질간질한 게 자꾸만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반지였다.
“손 줘봐요.”
“…….”
“어서요.”
공세윤이 손목을 낚아채곤 하필이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자꾸 분위기가 야릇하게 흐르는 것 같은 건 그냥 내 착각……이긴 개뿔.
주변에서 우리 둘을 보고 있던 직원들이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잘 어울린다는 충격적인 소곤거림도 함께였다.
얼굴에 화끈하게 열이 올랐다. 민망해 죽겠는데 거절하면 우울이 심해질까 봐 거절할 수도 없고, 참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이야, 반지도 딱 맞네요!”
성주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모자를 쓰고, 지팡이까지 들었다. 눈 뜨고 보고 있을 수 없을 만큼 민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장착하자 본래 제 것이었던 것처럼 잘 어울렸다.
곁에 있던 공세윤이 만족스러운 듯한 웃음을 흘리더니 엄청난 말을 내뱉었다.
“이거 싹 다 계산해 주세요.”
직원들뿐만 아니라 성주안의 입도 딱 벌어졌다.
“이걸 다요?”
“세, 세윤 씨, 일단 진정하시고…… 이렇게 많이는 필요가…….”
공세윤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던전에 들어가 본 적 있어요?”
그 던전 내가 만들었다, 인마. 라고 말할 순 없으니 고개만 저었다. 그러자 공세윤이 겁을 주기 시작했다.
“던전도 못 들어가 봤으면서 필요한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두 개씩 사고 싶은 거 참고 참아서 하나만 사는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나? 네 물건을 사러 온 게 아니잖아.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공세윤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지갑을 꺼내더니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일시불이요.”
“네, 버퍼의 로브, 버퍼의 신발, 마법의 지팡이, 성좌의 이어링, 성좌의 목걸이, 성좌의 반지까지 다 합쳐서 총 12억 8천만 원 결재하겠습니다.”
뭐라고? 1, 12억이 뭐가 어쩌고 저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