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단체] 성주안 : 전처럼 게릴라 던전만 갑자기 터지지 않는다면 한 3~4일 충분히 쉬었다가 스테이지 1부터 공략해 가는 게 어떨까요?
[단체] 공세윤 : 네에? 3일이나 기다리라고요?!
[단체] 주지찬 : 바보 같은 소리 마. 차라리 그게 나아. 그 전에 던전 공략 가면 오히려 차례가 늦어져.
주지찬이 웬일로 공세윤을 다 설득해 주나 싶었는데, 이어지는 말에 기가 찼다.
[단체] 주지찬 : 내 차례는 가장 뒤라고.
[단체] 성주안 : ?
[단체] 주지찬 : 아니, 뭐. 꼭 널 만나고 싶다는 말은 아니야.
[단체] 성주안 : ……어쨌든 3일 뒤에 첫 번째 스테이지 게이트 앞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다들 동의하는 것으로 대화가 끝이 났다. 그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내려 국회 안으로 들어갔다.
국회는 각성자 관리센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성좌들이 이끄는 세계답게 성좌와 소통할 수 있는 각성자 출신의 국회의원 집무실이 따로 모여 있다는 것 정도였다.
오늘 성주안과 백은후가 만날 국회의원도 A급 각성자이지만 싸움보단 권력에 더 관심이 많다고 했다.
긴 복도를 지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미리 온 사진 기자가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있었고 국회의원인 백용석이 잠시 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상이 별로인 것 같은데…….’
백용석의 얼굴엔 탐욕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게다가 사람을 깔보는 듯한 눈빛이 각성자라기보단 전형적인 국회의원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기죽을 것 없잖아. 성좌들 앞에서도 기죽은 적 없는데!’
성주안은 눈을 똑바로 뜨고 백용석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십니까? 귀한 분을 모셔서 영광입니다. 자, 우선 앉으시죠. 불쌍한 사람들을 빨리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은. 사진 기자가 와서 적당히 사진을 찍는 동안 백은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피차 바쁘니 본론부터 말씀드리기로 하죠.”
무기강화 마석이 쉽게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다 보니 파티원들이 비상용으로 열 개씩 가지고도 4,950개가 남았고 시세보다 약간 비싸게 팔려 기부금은 5,000억 조금 넘게 마련된 상황이었다.
백은후가 기부금 전액을 부상자를 위한 피해 보상에 쓰겠다고 설명하는 동안 백용석은 앞에 있는 카메라에만 관심을 보였다. 백은후도 그런 상대의 반응을 눈치챘는지 대충 설명하고 적당히 포즈를 취한 채 백용석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1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직접 일일이 찾아가서 돈을 전달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고 그 돈을 나눠주고 남은 돈을 처리하는 것도 문제였다. 제도적으로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국회의원의 도움을 받는 게 나았다.
성주안은 백은후가 하는 대로 적당히 분위기를 맞추며 백용석과 악수를 하고 간간이 미소도 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사진은 이제 충분히 찍은 것 같습니다.”
사진 기자의 말에 백용석의 표정에 미소가 사라졌다. 이제 슬슬 본색을 드러낼 모양이었다. 그가 거만하게 다리를 꼰 채 말을 꺼냈다.
“제가 단장님의 말씀을 듣고 이 일을 함께할 국회의원들을 모으는데 말입니다. 무슨 일이든 활동비가 필요한 법이라서요. 그 범위를 얼마나 지정해도 좋은지부터 정하라고 하시더군요. 좋은 일을 하는데 쓸데없는 오해를 사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한마디로 수수료를 달라는 뜻이었다. 소중한 마석을 판 돈을 단 한 푼도 국회의원들에게 주고 싶지 않아서 백은후를 쳐다보았다.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했으니 저런 요구는 간단히 무시하겠지? 하지만 백은후의 입에선 의외의 답이 흘러나왔다.
“숙부님, 얼마가 필요하신 겁니까?”
……숙부님?
하아, 어쩐지 백은후와 성이 같더라니. 약점 어쩌고저쩌고하기에 원수지간인 줄 알았더니 친척이었던 거다. 하긴 백은후처럼 욕심 많은 새끼를 믿은 내가 잘못했지, 누구 탓을 하겠어?
성주안은 당장 백은후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일단 참고 있었다.
“5,000억 정도 되는 돈을 100명에게 나눠주면 한 사람당 50억이나 됩니다.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합리적인 척하는 말에 성주안은 저도 모르게 콧방귀를 끼었다. 이쪽을 힐긋 쳐다보는 백용석을 성주안은 눈을 치켜뜨며 노려봐 주다가 백은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 저 말도 안 되는 의견에 동의할 건 아니지?
그러나 백은후는 이번에도 성주안의 기대를 배신했다.
“5억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뭐? 배, 백은후……. 그럼 사람들에게는 500억만 쓰고 나머지를 설마……? 차라리 남은 돈을 우리가 갖는 게 낫지. 쟤들한테 왜 줘? 미친 거냐?
백용석의 입꼬리가 광대까지 올라갔다.
“하하,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남은 돈은 활…….”
백은후가 말꼬리를 잘랐다.
“절반은 각성자 관리센터로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전국의 소방센터에 구급차를 사서 지원하도록 하세요. 저희 길드에서 파견된 대원이 모든 활동을 감시할 테니 돈 빼돌릴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성주안은 입을 딱 벌렸다. 백은후가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하다니……. 친척이라고 해서 당연히 비리로 연결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백용석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백은후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숙부님. 처음에 활동비를 얼마나 원하느냐고 했을 때 그냥 적당한 금액을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랬다면 저도 한 5,000만 원 정도는 외식하시라고 제 사비로 지원할 생각이 있었는데요.”
아아, 그랬구나. 오해해서 미안하다. 백은후.
문득 백은후의 캐릭터를 만들 때 이런 생각을 했던 게 떠올랐다. 백은후가 적이 되면 누구보다 곤란하고 빡 치게 하는 인간이지만 우리 편일 땐 한없이 든든할 것 같다고.
지금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활동비 명목으로 돈을 챙기려던 그의 숙부이자 각성자에다 국회의원인 백용석은 욕심을 내는 바람에 땡전 한 푼 못 챙기게 생겼다.
이렇게 고소할 수가!
백용석은 패색이 짙은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니, 뭐 꼭 제 몫을 챙기자는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보는 눈이 많은데 부상을 당했다고 한 사람당 너무 많은 돈을 가지게 되면 다른 국민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까 우려한 것이지요.”
누가 국회의원 아니랄까 봐 말은 잘했다. 그런데 좀 찝찝한데……. 저렇게 순순히 포기할 리가 없잖아?
백은후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백용석을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숙부님 어쭙잖은 연기는 집어치우시고요. 명심하셔야 할 것은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제가 무엇을 막아드렸는지에 대해서지요. 그것만 생각하세요.”
백용석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가는 것을 보며 성주안은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 그러게 심보를 좀 곱게 쓰시지 그랬어요. 아저씨.
어쨌든 백은후의 한백 길드에서 사람을 보낸다니 뒤로 돈을 빼돌리진 못할 것이다.
여기서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에 백은후의 허벅지를 쿡쿡 쑤시자 그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돈은 저희 대원이 직접 가지고 올 겁니다. 그럼 바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주안은 백은후의 뒤를 따라 주차장으로 이동하면서 물었다.
“믿을 수 있어요? 빼돌리지 말라고 한다고 안 빼돌릴 위인이 아닌 것 같은데.”
“당연히 백용석을 믿는 건 아니야. 내가 믿는 건.”
백은후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성주안을 향해 씩 웃었다.
“내가 들고 있는 약점이지.”
분명 웃고 있는데 미소가 사악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백은후가 손을 올려서 성주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올라온 손은 성주안의 머리를 흩뜨리고 다시 내려갔다.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내가 아직은 네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네, 그러시군요. 그것참 다행입니다.”
성주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백은후의 뒤를 따라가 차에 탔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아니면 아직 몸 상태가 돌아오지 않은 건지 차에 타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일단 자고 일어나면 스테이지 1 던전 공략 계획이나 세워볼까?
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르륵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깨어나 무심코 고개를 옆으로 돌렸더니 백은후가 태블릿 피시를 들고 뭔가를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 액정을 확인했다.
<데이트하기 좋은 산책 코스 20개 추천>
이라는 글자가 화면에 커다랗게 떠 있었다.
아니, 데이트라니. 나 버리고 여자 만나러 가게? 하여튼 의리 없는 놈. 성주안은 괜히 서운해져서 입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
“데이트하러 가시려거든 저는 그냥 시설에 데려다주시는 게 어떨까요? 길드는 좀 낯선데.”
백은후가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데이트라니?”
“데이트하려고 장소 물색하시는 거 아닙니까?”
백은후가 이상한 표정으로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 잘 보여야 할 사람이 있어서.”
“그러니까 절 데려다주시라고요.”
“……뭐, 그러지.”
차가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 데이트를 하러 갈 생각인가 보다. 참 팔자도 좋다. 누구는 던전 클리어해서 보상받을 생각밖엔 없는데 누구는 데이트도 하고. 이 세계나 저 세계나 세상이 불공평한 건 마찬가지지.
성주안은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평일 오후라 그런가 아니면 직전에 위험한 일이 터져서 그런가? 밖엔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고 차도 별로 밀리지 않았다.
잠시 후, 백은후가 처음 보는 곳에 차를 세우고 말했다.
“내려.”
“여기 어딥니까?”
“어디긴 어디야. 데이트 장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