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공세윤은 무시하고 접속을 종료하려고 하다가 나중에 언제 또 필요해질지 몰라 인사치레라도 하기로 했다.
“전사 씨, 지금 보니까 조금 멋있는 거 같아요. 오늘 입은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성좌, 전차를 타는 전사가 뭘 그런 걸 가지고 감동하냐고 웃습니다.>
<성좌, 전차를 타는 전사가 계약…….>
<접속이 종료되었습니다.>
공세윤은 바로 메시지창을 꺼버렸다. 바로 내일 던전이 터진다고 했으니 시간이 없었다. 늦은 밤이긴 했지만 한시라도 빨리 알려야 한다는 마음에 핸드폰을 꺼내 성주안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신호음이 아무리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벌써 잠들었나? 설마 혹시 백은후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했다. 아직 뽀뽀도 못 해 봤는데 백은후와 먼저 그렇고 그런 일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안 되겠어. 직접 가야지.”
공세윤은 급히 세수하고,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려다가 멈칫했다. 아무리 바빠도 성주안을 만나러 가는데 그냥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거울 앞에 서서 크림도 바르고 머리도 만지고 향수도 뿌렸다. 표정이 어두워서 씨익 웃었더니 우울한데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우울함 상태일 때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다니. 이 모든 게 다 성주안 덕분이었다.
“꼭 마음을 얻어야지!”
공세윤은 주문을 걸듯 그렇게 중얼거리고 집을 나왔다.
* * *
쿵쿵쿵!
성주안은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뻑뻑한 눈을 억지로 떠서 핸드폰을 확인했더니 액정에 공세윤의 이름만 50개 넘게 쌓여 있었다.
대체 이 밤에 무슨 일이야.
“뭐야.”
옆에서 착 가라앉은 백은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잠에서 깬 것 같았다.
쿵쿵쿵!
밖에선 계속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은 한백 길드에서도 가장 꼭대기 층이라 몇 개의 보안을 통과해야 해서 각성자가 아니면 저렇게 바로 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 누굴까요?”
“나가보면 알겠지.”
백은후가 이불에서 나왔다. 시선이 저절로 가운 사이로 향했다. 제가 그랬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서 고개를 들어 올리다가 그와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
“…….”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을 때 다시 문소리가 들렸다.
쿵쿵쿵!
“주안이 형!”
현관에서 방까지 꽤 거리가 먼데도 다 들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성주안이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여는 사이 백은후는 가운을 고쳐 입고 그의 뒤를 따랐다. 문을 열자 공세윤이 씩씩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세, 세윤 씨…….”
“도대체가 보안 수준이 엉망이군. 어떻게 들어온 거야.”
백은후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지만 공세윤의 시선은 성주안에게만 가 있었다.
“혀, 혀엉! 크,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이에요? 일단 진정하고 말해봐요. 부재중 전화 많이 온 건 봤는데.”
성주안은 공세윤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당기고는 현관문을 닫았다. 백은후는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굳이 제재하진 않았다. 아직도 숨을 헐떡이는 세윤에게 물을 가져다주고 소파로 데려와 앉혔다. 물을 마신 공세윤이 말했다.
“형, 형이 성좌에 정보 얻으라고 했잖아요.”
“헉. 설마 성공한 거예요?”
“네, 네네! 제가 성공했어요!”
공세윤이 100점 시험지를 받아와 자랑하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우울해하지 말라고 시킨 일인데 이걸 진짜 성공하다니. 공세윤 생각보다 똑똑한데? 하긴 지난번에 계약서에 잘못된 조항도 공세윤이 발견해서 고치긴 했지.
“이번에도 우리는 난이도에 따라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어요.”
그 말엔 가만히 지켜보던 백은후가 반응했다.
“그럼? 저번처럼 또 게릴라라는 거야?”
공세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내일 9시 한백 길드 앞이요.”
뭐, 뭐라고? 내일이라고? 성좌들이 일을 꾸밀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다음 던전을 들고나올 줄은 몰랐다. 일부러 기간을 짧게 잡아서 차례대로 던전을 클리어할 생각이었는데 내일 던전이 열린다면 그것부터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한백 길드 앞이라니. 이건 필시 성좌들이 일부러 저를 위험하게 하려고 벌인 일이 분명했다.
“확실한 거야?”
공세윤이 입을 삐죽였다.
“믿기 싫으면 믿지 말든가. 나는 주안이 형만 믿어주면 돼.”
“……하긴 네가 성주안에게 거짓 정보를 가져왔을 리는 없지.”
백은후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내일 당장 길드 앞에 던전이 열린다면 우선 하급 각성자들부터 대피를 시켜야 했다.
“성주안, 너는 파티원들부터 빨리 소집해. 나는 길드원들 정리를 하고 올 테니. 그리고 공세윤 너는 성주안…….”
“걱정하지 마. 주안이 형은 내가 알아서 지킬 테니까.”
백은후는 고개를 끄덕하고 빠르게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후 밖으로 나갔다. 단장이니까 알아서 잘할 테지만 성주안은 그가 길드원만 챙기고 주위에 사는 민간인들은 나 몰라라 할까 봐 걱정이었다.
“백은후 씨!”
성주안이 큰 소리로 부르자 그가 뒤돌아보았다.
“주변에 사는 민간인들의 안전도 부탁드립니다.”
백은후가 믿음직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했다. 그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파티원들에게 연락했다. 모준영은 일하는 중에 전화를 받아 바로 올 수 있다고 했고 주지찬은 연락이 되지 않다가 뒤늦게 연락이 되어 조금 늦겠다고 했다.
“그나저나 세윤 씨, 정말 대단해요. 대체 어떻게 설득해서 정보를 빼낸 거예요?”
“저요? 저 잘했어요?”
“그럼요. 엄청나요. 세윤 씨 덕에 이 일대 사람들의 안전이 보장된 거잖아요.”
“저는 그냥…… 형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건데요.”
이런 와중에도 제가 한 일을 과시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공세윤이 귀여워서 성주안은 엄지를 척 치켜들고 환하게 웃어주었다. 공세윤이 따라 웃으며 주안의 곁에 찰싹 붙었다.
“앞으로도 필요한 일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줘요. 자신은 없지만 최선을 다해서 할게요. 형이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요.”
성주안은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해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져서였다.
얘는 왜 이렇게 날 좋아하는 걸까?
제가 만든 캐릭터니까 본능적으로 끌리는 건 이해하지만 이렇게까지 맹목적일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말은 괜찮다는 말이 아닐 것이다.
“고마워요. 세윤 씨가 있어서 든든하네요.”
공세윤이 눈부시게 웃었다. 우울한 상태가 맞나 싶을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 * *
파티원들과 한백 길드 소속 A급 이상 헌터들이 모두 길드 앞에 모였다. 늦은 밤부터 아침까지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출입을 통제하고 장비를 갖추는 등 준비를 끝내놓았으니 지금부턴 전략을 세워야 할 때였다.
지난번 공략한 던전은 스테이지 3, 이번엔 5. 갑자기 난이도가 훌쩍 뛰어버렸으니 쉽지 않을 전투가 될 게 뻔했다.
“이번 던전도 어떤 몬스터가 나올지 예상 가능한가?”
백은후의 말에 성주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번처럼 성좌들이 장난질을 친 게 아니라면 날개 달린 도마뱀이 나타나야 했다. 하지만 아직 던전이 생기지 않는 상황에서 섣불리 예상해서 파티에 혼란을 주기보단 게이트 앞에서 상태창을 열어 확인하는 게 낫겠지.
그때였다.
우르르 쾅! 두두두두!
길드 앞 땅이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엄청난 폭발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귀를 찢을 듯 커다란 소리에 성주안은 양팔로 몸을 감쌌다. 예상하는 일이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땅이 폭발하자 공포에 몸이 떨렸다.
“모두 몸을 웅크리고 귀를 막아!”
헌터들에게 경고한 백은후가 성주안의 몸을 제 몸으로 감싸자 다른 헌터들이 그 주위를 둘러쌌다.
쿠르르릉!
몸이 달달 떨릴 정도로 땅이 진동하고 튀어나온 돌들이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소리가 멎는 것을 확인한 주안은 백은후의 품 안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이라곤 주변을 겹겹으로 둘러싼 전투복뿐이었다.
공세윤이 고개를 숙이고 눈을 마주쳐왔다.
“형, 형! 다친 데 없어요?”
“네, 없어요. 그나저나 백은후 씨, 이제 끝난 것 같은데…….”
백은후가 팔을 푼 사이로 빠져나왔다. 버퍼이긴 하지만 그래도 S급이긴 한데 영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길드원들의 시선이 부끄러워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행히 이쪽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성주안은 그들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다.
“허억.”
파티원들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던 던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만 보일 뿐인데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규모가 어느 정돈지 가늠할 수가 없겠네.”
어느 정도 스킬을 개발하고 공략하는 5번 스테이지에다가 규모까지 크다니……. 시작하기도 전부터 기가 질렸다.
성주안은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성좌들이 하는 짓거릴 보고 있으니 점점 더 용서할 수가 없었다. 성좌 무리에서 저를 쫓아낸 건 핵을 쓴다고 오해를 했으니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자기들의 이득을 위해 민간인들을 다치게 하는 건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성주안은 다리에 힘을 주고 던전으로 가까이 가기 위해 발을 뗐다. 누군가 뒤에서 팔을 잡았다. 닿은 부분이 화끈했다.
“어딜 혼자 가려고!”
주지찬이었다.
“그래요, 형. 위험하니까 다 같이 가는 거예요.”
공세윤이 반대쪽 팔에 붙었다. 둘 사이에 껴서 던전으로 가는 길에 백은후와 모준영도 따라붙었다.
파티원들에게 둘러싸여 게이트 앞에 도착하자마자 던전 레벨부터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