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
“아, 머리야.”
별로 많이 마신 것 같지도 않은데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일어났습니까?”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네이비 슈트에 넥타이까지 맨 모준영이 말끔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얼른 정신 차리세요. 던전 수습도 해야 하고 저번에 마석 판 돈으로 들어온 후원금 정산도 해야 하고 바쁩니다.”
힘겹게 일어나 씻고 나와 옷장을 열어보았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옷이 몇 벌 없었는데 어느새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의아한 눈으로 모준영을 보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쇼핑몰에 갈 수 없으니 제가 몇 벌 주문해놓았습니다.”
이런 걸 입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옷들이라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백은후의 집에서 입었던 옷처럼 하나같이 다 정장이라 움직이기 불편할 것 같은 게 문제였다.
성주안의 얼굴을 보고 있던 모준영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마음에 안 듭니까?”
“좀 편한 옷은 없습니까?”
“있기야 하지만 웬만하면 정장 입고 다니는 게 좋을 텐데요?”
그런 게 어딨어. 무슨 대기업에 다니는 회사원이나 영업사원이면 또 몰라. 옷은 편한 게 최고지.
“그냥 편한 옷 주세요.”
모준영이 다른 옷장의 문을 열고 편안해 보이는 베이지색 니트와 청바지를 꺼내주었다. 딱 마음에 드는 옷이라 그대로 입고 모준영을 따라나섰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1층에 도착할 때까지 모준영은 자꾸 이쪽을 힐끔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저래? 어제부터 참 이상하게 군다고 생각했지만 모준영이 그러는 이유를 아는 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일제히 몰려온 것이다. 백은후의 길드 앞에서 겪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성주안은 모준영 옆에 꼭 붙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모준영 옆에 붙어 있으려니 새삼 자신이 입은 옷 상태가 쪽팔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장을 입고 나오는 건데……. 모준영도 그래. 밖에 기자들 기다릴 거라는 말 한마디 해주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이라고…….
“진짜 너무한 거 아닙니까?”
모준영이 자기는 무고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아니, 말이라도 좀 해주지 그랬어요.”
“그러게 제가 정장 입고 가는 게 좋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벽을 두고 말하는 게 낫지 모준영하고 뭔 대화를 하겠냐. 성주안은 포기하고 모준영 뒤에 꼭꼭 숨었다.
“이리 앞으로 좀 오세요. 기자들이 저 최대한 못 보게요.”
모준영은 어쩐지 즐거운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봐야 어차피 다 찍힙니다. 차라리 당당하게 서서 가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은 꼭 범죄자 같잖아요.”
그런가? 그래도 쪽팔린데 어떡하냐? 애초에 성주안은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원래도 그랬는데 이상한 사람들이 가득한 블랙기업에 들어가고 나서는 더 심해졌다.
일단 모준영의 차에 탈 때까지만 잘 숨어 있어야지, 이런 생각으로 그의 팔을 딱 잡고 가고 있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 혀엉? 혀어어어엉!”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이 목소리는 안 봐도 공세윤이었다. 쪽팔려서 대답하지 않자 더 큰 소리로 불렀다.
“형, 주안이 형!”
더는 모른 척할 수가 없어서 그를 향해 손을 흔들자 공세윤이 달려와 주안의 앞에 섰다. 그때 기다렸던 것처럼 셔터가 파바밧 터지기 시작했다.
공세윤은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있어서 성주안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세윤 씨,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밥은 먹었어요?”
“네, 네네! 저 활기찬 상태라서요. 밥 엄청 먹었어요.”
“근데 그 짐은 다 뭐예요?”
가만히 서 있던 모준영이 경악하며 입을 열었다.
“설마…….”
공세윤은 모준영의 반응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이거요? 모르셨어요? 저도 각성자니까 거주 시설 이용하려고요. 우선 간단한 짐만 챙겼어요. 형 옆집으로요!”
“네? 이사할 거라는 말이에요?”
“네! 당연하죠. 형이 여기 있는데 제가 왜 따로 살아요.”
여기서 공세윤과 더 대화를 나눴다간 기자들에게 쓸데없는 가십거리를 줄 것 같아서 다급하게 말했다.
“그럼 이사 잘하시고, 우리는 이만 가볼게요. 세윤 씨, 나중에 전화로 얘기해요.”
“네에? 전화요? 저 짐만 가져다 놓고 관리센터 갈 건데요?”
종일 따라다니겠다는 말일까? 마뜩잖은 표정으로 공세윤을 바라보자 그가 멈칫하며 말을 이었다.
“스, 스토킹하는 거 아니라요. 저 오늘 검진받는 날이라서요. 얼마 전에 우울함이 왔었으니까요.”
신빙성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말에 반응한 것은 모준영이었다.
“활기찰 땐 굳이 올 필요 없습니다.”
공세윤이 뾰족하게 반응했다.
“끼어들지 말지? 지금 형이랑 대화하고 있잖아. 형, 형…… 저 진짜 스토킹 아니에요.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럼요. 세윤 씨는 제가 걱정되는 거뿐이잖아요. 그래서 지켜주려고 하는 거 다 알아요.”
공세윤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역시 형밖에 없다며 어깨에 이마를 비비다가 얼른 짐을 두고 오라는 말에 냉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속내가 저렇게 훤하게 보이는데도 밉지 않다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캐릭터들이 개발자에게 본능적으로 끌리는 것처럼 개발자도 제가 만든 캐릭터에 본능적으로 끌리는가 보다. 거기에 공세윤은 유난히 더 마음이 쓰이는 캐릭터이기도 하고.
공세윤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모준영이 팔을 잡아당겼다.
“갑시다. 이러다가 이상한 사진만 잔뜩 찍히겠습니다.”
다시 걷기 시작하자 기자들이 뒤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성주안 씨, 이번에도 보상금을 후원하실 생각이신가요?”
“이번 게릴라 던전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위험이 닥쳤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매번 위기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성주안 씨, 성좌의 도움을 안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쏟아지는 질문을 무시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버렸다. 어제 전투가 끝났는데 기자들은 꽤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가만히 두면 멋대로 소설을 쓸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모준영 씨, 인터뷰 같은 거 잘합니까?”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상부에 보고하기도 바쁩니다.”
“S급 각성자에 공무원이라 인터뷰 요청이 많았을 것 같은데…….”
기자들 앞에서 거침없이 말하던 백은후가 떠올랐다. 그러자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각성자들이 활약할 때마다 백은후가 대신 인터뷰했다면 제게만 유리하게 말했을 게 뻔했다.
“금강불괴 씨, 억울한 일 많았겠습니다.”
옆으로 돌아본 모준영의 얼굴이 엉망으로 찌푸려져 있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억울한 일은…… 하.”
말끝에 섞인 한숨에 안 들어도 뻔히 알 것 같았다. 예상대로 백은후 때문에 일이 많았나 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나서는 수밖에.
성주안은 기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곤 백은후가 했던 대로 흉내 냈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갑작스레 나타난 던전으로 인해 시민들의 불안함이 많겠지만 다행히 이번에도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어깨에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발을 쿵쿵 울려 박수를 대신했다. 성주안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질문에 차례대로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이번엔 마석이 나오지 않아 보상금은 없습니다. 던전 안에서 예상치 못한 위기가 있었지만 여기.”
성주안은 모준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당황한 모준영이 반항 없이 끌려왔다.
“모준영 씨 덕에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해결 방식이라는 게 참 낯 뜨겁긴 했지만 거기까진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리고 성좌들의 도움을 받지 않는 이유는…….”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일반인들이 이해할 만한 수준의 대답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성좌 1인과 각성자들과의 파티를 구성하는 게 일반적인 세계에서 뭐라고 말해야 각성자들만으로 이뤄진 파티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때 저기 먼 곳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성좌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기자들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백은후는 어깨에 딱 맞게 떨어지는 짙은 회색 슈트를 입고 있었다. 날리지 않게 고정한 은발과 한 몸처럼 어우러진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무슨 시상식에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백은후가 이쪽을 보며 희롱하는 듯한 미소를 날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진짜 생긴 거 하나는 더럽게 잘생겼다.
넋 놓고 쳐다보고 있으니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백은후가 친한 척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성좌들이 협조해 주지 않아도 우리에겐 S급 버퍼가 있으니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입만 나불대는 성좌들보다야 함께 몸 부대끼며 싸우는 버퍼가 훨씬 낫지요.”
답지 않게 칭찬을 늘어놓는 백은후가 얄미웠다. 이게 다 자기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라는 걸 안다. 그래도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질문에 대한 답은 충분히 된 것 같았다.
“그럼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또 언제 던전이 터질지 모르니까요.”
짧은 한마디로 기자들을 떨어낸 백은후가 한발 물러서서 성주안의 전신을 훑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곤 모준영을 향해 말했다.
“옷을 좀 챙겨 입히지 그랬어.”
“정장을 권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성주안은 한숨을 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가만히 두고 보고 있으니 희롱이 끝이 없었다.
“제가 무슨 인형입니까? 입으란다고 입게. 그나저나 백은후 씨는 여기 웬일입니까?”
“보고 싶어서 왔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해서 잽싸게 피해 모준영의 뒤에 섰다. 아까까지만 해도 심드렁하게 반응하던 모준영이 갑자기 손을 잡아 왔다. 얜 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이러지? 모준영이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아직 제 차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다음은 주지찬 씨고요.”
백은후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나도 알아. 그냥 자연스레 할 일 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