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
비서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백은후의 집으로 가는 길, 성주안은 눈을 크게 깜빡였다. 시야에 잡히는 백은후의 얼굴이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화가 많이 난 표정이었다.
거래도 잘 성사되었고, 모준영의 도움으로 위험한 일도 없었는데 왜 저런 반응인지…….
“다 보여.”
“뭐가 보인다는 겁니까?”
“내 얼굴 훔쳐보는 네 눈빛.”
“……참나, 꿍해 있으니까 그렇죠.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니면 삐지셨나?”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말투에도 백은후는 고개를 돌려 감정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쳐다만 볼 뿐이었다. 의미 없는 눈싸움을 이어가던 그가 돌연 말을 툭 내뱉었다.
“집에 가서 한잔 더 할까? 아깐 편하게 못 마셨지?”
갑자기 부드러워진 말투에 당황스럽긴 했으나 제안이 나쁘진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로 백은후와 함께 잠들 바엔 술에 취해 쓰러지는 편이 차라리 낫지.
“좋은 술 있어요?”
“비싼 게 좋은 술이면 차고 넘치지.”
“좋습니다. 까짓 한잔해요!”
백은후가 입꼬리를 쓱 올리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주안은 시트에 등을 기댄 채 이마를 짚었다. 헤실헤실 웃음이 나오고 차가 움직이는 대로 몸이 움직였다. 진짜 딱 한 잔만 더 마시면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주안은 그때까지도 그게 가능할 줄 알았다.
“괜히 마시자고 했나?”
샤워하고 나오니 갑자기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자겠다고 하는 건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되돌릴 수 없었다. 대충 물기만 턴 수건을 빨래통에 던져놓고 거실로 나왔는데 백은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위로 올라와.”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백은후가 2층 계단 위에서 저를 불렀다. 나선형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 보니 가장 먼저 한쪽 벽면을 차지한 홈바가 보였다.
성주안은 불편한 의자 대신 바 앞에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급스러운 우드톤의 조명과 잘 어울리는 테이블과 비싼 술이 보기 좋게 진열된 벽 앞에, 백은후가 서 있었다.
소매를 두 번 접어 입은 흰색 니트는 그의 가슴 근육을 편안하게 감쌌고 베이지색 슬랙스는 긴 다리를 돋보이게 했다. 니트로도 감출 수 없는 섬세한 근육을 눈으로 훑는 중에 잔을 꺼내는 백은후와 눈이 딱 마주쳤다.
“…….”
“…….”
눈이 마주치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해져서 주안은 재빨리 그의 시선을 피했다. 술 때문인가? 오늘따라 백은후가 더 아름답게 보였다. 잘생긴 건 알았지만 이건 마치…….
정신 차려, 성주안.
속으로 외치며 백은후 몰래 제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무리 오래 쌓였기로서니 백은후한테 그런 욕망이라니. 미친 게 틀림없었다.
어느새 다가와 옆자리에 앉은 백은후가 돔 페리뇽 화이트 골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병이 우아하면서도 동시에 퇴폐적인 백은후의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졌다.
그가 화이트 골드로 감싸진 병을 기울였다. 샴페인 잔에 채워진 액체가 어서 마셔달라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여기.”
술을 내미는 백은후의 손등에 푸릇하게 돋아난 힘줄을 눈으로 훑다가 잔을 받았다. 받자마자 한 모금 머금은 성주안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괜히 비싼 술이 아닌지 입에 확 퍼지는 달곰씁쓸한 맛이 기가 막혔다.
“괜찮지?”
“그러네요.”
간단한 대화 후,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술을 채우고 잔을 부딪치고 시선을 주고받는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백은후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
“걱정하지 마. 술이 문제가 된 적은 없었어. 난 잘 취하지 않는 스타일이라.”
뭘 걱정하지 말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답했다.
“저도 술이 문제인 적은 없었는데…….”
성주안이 반쯤 풀린 눈으로 백은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법 많이 마셨는데도 얄미울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백은후가 눈꼬리를 살짝 내렸을 때, 주안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문제가 될 것도 같네요. 백은후 씨가 예뻐 보이는 걸 보면.”
그렇게나 솔직하게 말했는데도 백은후는 흘려들었는지 별 반응이 없었다. 괜한 오기가 생긴 주안은 그가 잔을 들었을 때 팽팽하게 당겨진 팔근육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하하.”
백은후가 귀엽다는 듯한 눈으로 웃었고, 주안 역시 따라 웃었다. 아까운 술을 흘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서로의 팔과 가슴을 찌르는 유치한 장난을 이어갔다.
두 사람이 웃는 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이곳은 마치 아무도 없는 외딴섬인 것만 같았다.
조용한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꾸만 오르는 열기 때문일까?
어쩌면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세계 멸망의 위기를 잠시 치워두고 두 사람은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공간에서 오직 서로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취했을 때, 술잔을 내려놓은 백은후가 주안의 팔을 들어 어깨에 걸쳤다.
“성주안, 잘 시간이야.”
“……응.”
몸이 붕 뜬 채 이끌려 간 곳은 백은후의 침대였다.
“왜, 왜 벗어요?”
“나도 취했어. 얌전히 자.”
그가 니트를 벗으면서 탄탄한 가슴팍이 드러났다. 주안은 서투르게 숨을 삼키며 이불을 끌어 올렸다. 침대에 누우면서부터 꼬집은 허벅지는 이제 아예 피가 날 정도였다.
눈을 떼야 하는데, 그래야 동하지 않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곧은 어깨와 잘 갈라진 가슴 근육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호리호리한 곡선도 아니고 남자 몸을 보고 이거는 좀…….
분명 주안은 이때까지만 해도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그런데, 백은후가 옆에 눕자마자 확 풍기는 향수 냄새에 머리가 어질어질 해졌다. 그리고 채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입술이 맞물렸다. 뺨부터 목덜미까지 감싸 쥔 백은후의 손이 뜨거워 목을 가눌 수가 없었다. 입술은 금방 떨어졌지만 뺨을 감싼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코가 맞붙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긴 손가락이 주안의 입술을 느리게 훑었다. 천천히 내려온 손가락이 목울대를 지나 쇄골을 쓸다가 배까지 내려갔다.
그를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욕망이 짙게 밴 푸른 눈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성주안은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가 백은후라는 것이 신기했다. 천하의 백은후가 이토록 섬세하고 다정한 터치라니.
그제야 주안은 깨달았다.
꿈이구나!
이게 현실이면 백은후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다정한 손길을 보낼 리가 없잖아. 꿈에선 뭐든 가능하지.
상황 판단을 마친 주안은 양손으로 백은후의 뺨을 덥석 잡았다. 그가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피식 웃었다. 꿈에서도 재수 없는 건 똑같네.
오기가 난 주안은 그의 입술에 마구잡이로 부딪쳤다. 분명 먼저 덤빈 건 저인데 키스를 하면 할수록 제가 잡아먹히는 느낌이었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백은후의 혀가 뜨거웠다.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꿈인데도 숨을 쉬기가 어렵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다 그의 혀끝이 치아 사이사이를 훑었을 때 배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저릿한 감각에 절로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목덜미를 감싸던 손이 조금씩 척추를 타고 내려갔다. 어깨가 움찔거리고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불에 덴 듯 뜨거워서 꿈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입술을 뗀 백은후는 눈을 감고 있는 성주안을 보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술에 취한 듯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사람을 데리고 뭐 하는 짓인지 자괴감이 밀려들었으나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백은후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의 귀에 속삭였다.
“성주안, 잠들었어?”
“……아니. 안 잡니다.”
자는 것처럼 보였는데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그만하길 원하면 밀어내.”
술에 취한 와중에도 그만하길 바라는 듯 목에 둘린 주안의 왼팔이 살짝 들렸다가 내려왔지만 그뿐이었다.
“안 밀어내는군.”
거부할 줄 알았던 주안이 제 쪽에서 다시 입술을 맞춰왔다. 순간 백은후의 머릿속에 파티장에서 주안을 향했던 사람들의 눈빛과 은수정의 말이 떠올랐다.
일련의 장면들이 차례로 떠오르자 승부욕과 소유욕이 뒤엉켜 머리가 엉망이 될 지경이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주안의 몸을 덮고 있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모두 벗기고 자신도 나신이 되었다. 새하얀 허벅지를 살짝 문지르자 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백은후는 성급하게 행동하고 싶은 본능을 애써 억누르며 그의 아래에 입술을 묻었다.
“하아……. 아니, 그, 미친!”
기겁하며 도망가려는 주안의 허리를 잡아 숨을 불어넣고 가슴을 간지럽혔다. 그의 입에서 터진 신음이 차오르는 흥분에 기름을 부었다. 백은후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성주안의 곳곳에 입을 맞췄다. 그제야 딱딱하게 굳어 있던 몸이 부드럽게 풀렸다.
“하아…….”
“긴장하지 말고.”
귀에 속삭이자 주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입이 벌어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를 밀어 눕혔다.
“하, 미치겠네. 진짜.”
성주안이 저를 잡아먹을 듯 감싸왔다. 적당히 하고 말 생각이었는데 이래서야 날을 꼬박 새워도 갈증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성주안.”
이름을 부르자 반쯤 풀어진 눈이 저를 향했다. 열기가 가득 담긴 눈이 어서 움직이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아하고 뭐…… 빠리.”
발음이 꼬여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욕망이 서린 눈동자가 주안도 저를 원하고 있음을 알리는 것 같았다. 벌어진 입에서 나오는 뜨거운 숨결을 삼키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긴장 풀고.”
“흐읏…….”
주안은 신음하며 시트를 꽉 쥐었다. 힘을 풀라니까 오히려 힘이 들어가는 이유는 또 뭐야?
백은후는 주안의 입에 키스하며 긴장이 풀릴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