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
모준영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눈앞에 쌓인 선물 더미를 바라보았다. S급 각성자들이 방송을 타면서 간혹 선물을 보내오는 팬들이 있긴 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모두 성주안 씨에게 온 거라고?”
“네, 아무래도 이 기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민재는 오늘 사거리 사건이 실린 기사를 모아 모준영에게 건네주었다.
<불법 헌터들과 맞서는 S급 각성자들>
<한낮에 벌어진 인질극>
여기까진 평소에 실리던 기사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음은 기자가 무슨 생각으로 썼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기사 같지 않았다.
<연예인 뺨치는 외모로 팬클럽까지 결성된 버퍼의 실제 모습>
기사를 훑는 모준영의 얼굴이 왈칵 찌푸려졌다. 사건을 기사화해서 불법헌터들의 위협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성주안의 사진과 자극적인 제목으로 조회수만 뻥튀기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래 달린 댓글들은 더욱 가관이었다.
<형 양심 있으면 운동은 하지 말자>
<몬스터도 눈이 있으면 못 때리지>
<미래의 와이프는 세금 두 배로 내야 할 듯>
댓글까지 다 확인한 모준영은 코웃음을 쳤다. 성주안에게 무지성으로 집착하는 각성자들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일반인 팬이라니…….
“그나저나 성주안 씨와 같이 온 거 아닙니까?”
“차에 있습니다.”
워낙 곤하게 자는 통에 깨우기 곤란해서 혼자 왔다는 말을 하긴 좀 그래서 말을 돌렸다.
“잠시 우편물을 확인하러 왔는데…….”
“아,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성주안 씨 집에 옮겨 놓겠습니다.”
모준영은 그러라고 대답한 뒤 다시 차로 돌아갔다. 쌓여 있는 선물들을 보니 이상하게 신경이 거슬리고 조바심이 났다. 이대로 성주안과 함께 있는 시간을 잠으로 다 보낼 수는 없었다.
모준영은 조심스레 주안의 어깨를 흔들었다.
“일어나세요. 도착했습니다.”
쉬이 잠이 깨지 않는지 준영의 손을 밀어냈던 주안이 뒤늦게 일어났다. 몇 차례 눈을 깜빡여 잠을 몰아낸 그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길게 하품을 했다.
“도대체 밤엔 뭐 했기에 업어가도 모를 만큼 깊이 잠이 드는 겁니까?”
그냥 단순한 질문일 뿐이었는데 주안이 꼭 잘못한 일을 들킨 사람처럼 눈을 굴렸다.
“납치될 뻔했을 때 저도 모르게 긴장했나 봅니다.”
거짓말이다.
모준영은 각성자들의 거짓말을 눈치채는 데는 도가 튼 사람이었다. 관리센터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각성자들을 관리하는 게 주 업무였으니까. 게다가 성주안의 거짓말은 특히 더 알아채기 쉬웠다.
그래도 모르는 척하는 게 낫겠지.
모준영은 별말 하지 않고 주안의 안전벨트를 풀어주며 말했다.
“올라가서 좀 씻고 저녁 먹으러 갑시다.”
“네.”
주안은 모준영과 함께 거주 시설 안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자신의 집으로 갈 줄 알았는데 엘리베이터에 탄 모준영은 전혀 다른 층의 버튼을 눌렀다.
“그 층이 아닌데요?”
“선물 더미에 압사당하고 싶지 않으면 제 집으로 가는 편이 나을 겁니다.”
“선물이요?”
“모르는 사이에 팬클럽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인기 많아서 좋겠네요.”
어딘지 불편한 기색이 섞인 말에 주안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어딜 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데다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는 사람들도 꽤 만났던 터라 팬이 생겼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선물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관심에 어안이 벙벙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모준영의 집 앞에 도착하니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모준영이 집 앞에 놓인 음식을 보며 물었다.
“주안 씨, 음식 시켰습니까?”
“아닙니다. 이건 아마도 주지찬 씨가 해 놓고 간 거 아닐까요?”
“…….”
“주지찬 씨, 음식 잘하잖아요. 본인 말로는 저 먹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요리가 취민데 먹을 사람이 없어서 주는 거래요.”
주안은 포장된 음식을 집어 들며 생각했다. 배도 고픈데 잘 됐다.
이건 아마도 돈가스겠지? 이렇게 묵직한 걸 보면 양도 꽤 될 것이다.
모준영은 문을 열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선 채로 주안을 바라보았다. 눈빛에 날이 서 있는 것 같은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왜요?”
“하, 아닙니다. 들어갑시다.”
오늘따라 뭐가 저리 못마땅한 건지 모르겠지만 배가 고프니 빨리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오자마자 포장된 음식을 뜯었다. 돈가스, 생선가스, 치킨가스……. 돈가스를 먹고 싶다는 말에 튀길 수 있는 건 모두 튀겨놓은 모양이었다.
“이야, 엄청나네요!”
당장 먹어보고 싶어 젓가락으로 돈가스를 집으려던 순간, 모준영이 주안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러곤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밖에 나갔다 왔으면 손부터 씻는 겁니다.”
“……아, 예.”
욕실로 들어오기에 내심 긴장하고 있었던 주안은 머쓱하게 웃으며 손을 씻었다. 다 씻고 나와 식탁에 앉으니 잠시 후 모준영이 나와 함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돈가스를 한입 집어 먹을 때까지만 해도 잔뜩 굳어져 있던 모준영의 표정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저럴 거면서 괜히 못마땅한 척은…….
돈가스는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웠고 소스는 달콤하면서도 감칠맛이 났다.
주지찬 참 대단하단 말이야. 시간도 부족했을 텐데 이런 걸 뚝딱 만들어 내고.
연신 감탄을 쏟아내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모준영이 뭔가 고민이 많은 듯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요즘 모준영은 자주 저를 그렇게 쳐다봤다. 속내를 알기 어렵지 않았던 사람이 자꾸 저러니까 신경이 쓰였다.
“준영 씨, 입에 안 맞아요?”
“아니, 맛있습니다.”
“그런데 왜 많이 안 드세요?”
“먹고 있습니다.”
할 말은 있는데 말하기 곤란할 때의 표정이 분명한데…….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는 꼿꼿한 자세로 깨끗하게 음식을 집어삼켰다. 스테이크 집과 태도가 달라진 건 아닌데 시선이 저에게만 향해 있어서 불편했다. 주안은 더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모준영 씨,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 체할 것 같습니다.”
모준영이 젓가락을 반듯하게 놓고 차분히 말을 꺼냈다.
“조금 불쾌할 수 있는 질문인데 해야겠습니다. 오늘 저는 성주안 씨를 계속 관찰했습니다.”
그 말에 성주안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제 추측이 틀렸길 바랐지만 맞는 것 같군요.”
아무래도 어젯밤 백은후와의 일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티가 나버린 걸까? 주안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채 입술을 꾹 다물었다.
“혹, 억지로 당한 겁니까?”
비밀로 하겠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이미 들켜버린 상황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것도 이상하고 아니라고 잡아떼는 것도 웃길 것이다. 그래도 오해는 풀어야겠지.
“억지로 당한 건 아닙니다.”
“하……. 동의했다는 말이군요.”
“굳이 따지자면 그렇긴 한데……. 술기운에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했다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모준영의 눈꼬리가 올라갔지만 주안을 탓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마치 원하지 않는 진실을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비밀로 해주실 거죠?”
“……그래야 합니까?”
“네, 그래 주세요.”
“…….”
“모준영 씨한테도 버프 잘 드릴 테니까 소문만 내지 말아주세요. 아시겠지만 공세윤 씨 귀에 들어가면 우리 파티는 파국입니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한참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물을 한 잔 마신 후에 대답했다.
“소문내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기분이 좋진 않군요.”
무엇이? 비밀로 해달라는 말이? 아니면 백은후와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많은 게 생략된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할 것 같았다. 지금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공세윤 귀에 들어가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으니까.
모준영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하게 될진 몰랐는데…….
눈치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고, 모르는 척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타인의 호감을 읽는 데 둔감한 저라도 이만큼 눈치를 줬으면 알아채는 게 당연했다.
“……실수였습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시다니 미안합니다. 의도한 건 아니었어요.”
모준영이 많은 말을 생략했으므로 주안도 그렇게 했다. 다행히 이성적인 모준영은 금세 표정을 풀고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했다.
만약 오늘의 차례가 모준영이 아니라 공세윤이나 주지찬이었으면 어땠을까?
감각이 예민한 사람들이니 그들도 눈치를 챘을 테고 그랬다면 부드럽게 지나가진 못했을 것이다.
“고마워요. 이해해 줘서.”
모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깨끗한 욕실에서 씻고 나오니 모준영이 가운 차림으로 서 있었다. 가운 안에 큰 근육을 억지로 욱여넣은 듯 가슴 부분이 넓게 벌어져 있었다. 허리에 묶인 끈은 간신히 매듭만 지을 정도라 언제 풀려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그도 백은후처럼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로 이상한 걸 요구할까 봐 겁이 덜컥 났다.
“…….”
“…….”
둘은 잠시 가운 차림의 서로의 모습만 바라본 채로 서 있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누구도 먼저 발을 떼지 않았다. 조용한 집 안, 들리는 것은 살짝 거칠어진 숨소리뿐이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더는 감당하기 힘들어 주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영화라도 한 편 볼까요?”
그가 가라앉은 눈으로 주안의 허리 부분을 훑었다.
“지금 그 상태로 영화 보자는 말이 나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