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1)

생각지도 못했던 재회를 겪고 집으로 돌아오는 - 물론 재운의 집이었다.  상혁이 매일 살다시피 들르던 - 시환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태형 태형 태형... 

큰일이었다.  생각한 대로라면 큰일일 지도 몰랐다. 

"형...헝?  시환형...?" 

멍해 있는 시환을 툭 툭 쳐 보이던 상혁이 생긋 웃으며 시환의 뺨을 쥐어 쭈욱 늘리자, 그제야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리며 상혁을 향해 눈을 흘기는 시환이었다. 

왜 이렇게 되는 지 모르겠지만 상혁에게는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모질게 대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재운과 말 한 마디라도 터 보라며 열심히 한글을 가르쳐 주고 있는 그를 보며 싱긋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하는 말을 따라하고 있는 자신이 아니던가. 

장난삼아 '우시환은 바보다' 나, '재운이새끼보다 내가 나아' 라고 알려주는 상혁의 농담을 늦게야 알아듣고는 툭탁대기도 하고.  이제는 꽤나 문장을 구사해 낼 줄 알게 된 시환이지만 재운에게는 놀래주려는 생각으로 아직 알리지 않은 상태였다. 

"...형.  재운이 새끼가 그렇게 좋아?" 

“?E?n?¾?Æ?(뭐라고?)...응?...천...천...히..." 

"그러니까..." 

시환을 흐뭇한 듯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짐짓 진지하게 얼굴을 굳히며 물어오는 상혁에 꿀꺽.  마른 침 한 번을 넘기고는 긴장된 표정으로 그의 입모양을 바라보았다. 

시환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는 그 손가락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즈음. 

시환은 본능처럼 벌떡 일어나 자리를 피하려다가 그보다 더 빨랐던 상혁의 손길에 털썩.  어깨를 붙들린 채 다시 자리에 앉혀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난...안되냐고." 

"..." 

갑자기 나타난 태형도 그렇고, 이렇게 진지한 상혁도 그렇고.  김씨 형제들과 전생에 무슨 인연이었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과 함께 시환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뜻은 짐작이 가는 상혁의 말에 희미한 쓴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다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해 형." 

"..." 

"나 형...아니, 사랑해.  사랑한다구." 

"...사...랑...?" 

흠짓.  책상 대용으로 쓰던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옮기려던 시환이 상혁의 답지 않은 진지한 목소리에 움찔하며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한 채 자리에 묶여 버리고 말았다. 

말로는 부족했던지 슥슥 재빨리 평소 글자를 가르칠 때 쓰던 노트에 커다랗게 적어 눈앞에 가져다 놓는 그 단어들은. 

이러지 말아 상혁아. 

내가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했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 말을 왜 네가 하는데...응? 

상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겅중하니 큰 키에 빼빼 마른 몸으로 요즘 더 먹지도 자지도 않았는지 까칠한 몰골을 해 가지고는 그런데도 그저 시환만 보면 으헤헤.  사심없이 웃어 보이던 착하고 순진한 녀석. 

제 먹을 것보다 시환을 더 먼저 챙기고, 또 시환이 밖에라도 나갈라 치면 걱정돼서 견디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얼굴 가득 숨기지도 못하던 녀석. 

그리고... 

재운이 나타나면 은근슬쩍 시환을 밀어 그에게 붙여 주며 찡긋. 

귀엽게 한쪽 눈가를 찡긋거리며 아프게도 웃어주던... 

이런 상태까지 몰고 와선 안되는 것이었는데... 

"...아읏...!!!..." 

"사랑한다고!  내가 형 사랑한다고.  못 알아들어?  응?" 

"...놔..." 

"이제 한국말 조금은 하쟎아.  모르는 척 하지 말란 말이야.  재운이가 그렇게 좋아?  응?  난 죽었다 깨나도 안돼?  오재운 그새끼 아니면 죽겠어?" 

"...너...무...빨...라..." 

"아하.  그럼 천천히 말해줄까?  나.  형.  사.  랑.  해.  알아들어?  재운이 그새끼보다 훨씬 더!  아니.  비교도 못하게 죽도록 사랑한다고." 

"..." 

쿠당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탁자 위로 눕혀져 젖혀진 허리가 아팠다.  아프게 두 손목을 잡아 누르는 상혁의 얼굴이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밀어내지도 어쩌지도 못한 채 하얗게 질린 얼굴을 어쩔 줄 모르는 시환의 두 눈에 그렁하니 물기가 차오른다. 

벌써 툭툭거리며 시환의 얼굴 위로 떨어지는 상혁의 분한 눈물이 너무 가슴아파서 또 미안해서. 

따지고 보자면 다 시환의 책임이 아니던가.  은근히 재운에게 받지 못하는 따듯한 대우를 야금야금 받아먹고는 넌 싫어 라니.  죽도록 맞아도 될 성 싶은가 모를 잘못이 아니던가 말이다. 

뭐래도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우시환은 적어도 김상혁에게는. 

"진짜...흑...안돼?  응?" 

"..." 

"형.  부탁이니까.  나 아무것도 안 바랄테니까아...응?  재운이 그 새끼만 말아라.  응?  그자식 아니라도 좋은 놈 쌔고 쌨...내가 여자라도 소개해 줄까?  응?  착하고 형 말 잘 듣는.  형처럼은 안 이쁘더라도...응?" 

"..." 

"씨발!  병신같으니까 그새끼한테만 당하지 말란 말이야!  결혼이라도 해서 잘 먹고 잘 살란 말이야!  형...헝...!!!..." 

"...미...안..." 

마구 소리지르며 눈물을 못 참던 상혁이 순간 입술을 꽉 깨물고는 정지해 버렸다.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또 따로 할 말이 없어 시환 역시 죄 없는 입술만을 물어뜯고 있는데. 

자꾸만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이는 머릿속이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열심히 가르쳐 주던 한국어.  기껏 베워서 한다는 첫 마디가 '미안' 이라니... 

"...그 말 밖에는...할 말이 없는 거야?" 

미안해 상혁아.  미안해... 

너한테는 그것밖에 할 말이 없었어... 

미안해.  미안하다. 

"...형." 

"...응?" 

"...나 미워해라." 

"...?" 

무슨 말이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커다랗게 부릅떠진 눈 위로 거뭇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흘러내리며 순식간에 상혁의 입술이 겹쳐진 것은.  시환은 놀라 말릴 새도 없이 그대로 내려앉은 상혁의 입술에, 그 혀에 입술을 열어 주고 말았다. 

입 안을 조심스레 해집고 들어오는 말랑한 그 느낌에 그제야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를 깨달은 시환이 완강히 저항하며 상혁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이미 엉켜들 대로 엉켜든 그의 혀는 시환을 놓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 거부하려다 힘의 차이에 허탈해짐과 동시에. 

시환이 무슨 짓을 하든 동요치 않을 재운이 떠오르고...그리고 낯선 여자와 엉켜있던 그가 별안간 홀로그램처럼 눈가를 맴도는 통에 움찔. 

그래.  오재운.  넌 아무렇지도 않지? 

갈수록 싸늘해지고 자신을 거추장스럽게만 느끼던 재운이 생각나자 머릿속에서 그간 잠들어 있던 묘한 오기가 치솟았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알면서도 자신만을 원하고 바라보는 바보같은 상혁이 또 있었고.  그 덕택에 그런 억한 심정에 가슴을 허락했는지도 몰랐다. 

움찔거리던 손가락들을 한번 힘있게 쥐었다 편 시환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떨어진 상혁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여전히 축축하게 물기가 어린 그 억울한 눈을 또 한 번 응시하고는. 

"...미안..." 

상혁의 작은 머리 뒤로 흐트러진 머리카락들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넣으며 그의 고개를 잡아당겨 입술을 겹쳤다. 

놀란 듯 움찔하던 상혁은 이윽고 또 익숙하게 혀를 엉키며 시환의 입안을 마음껏 해집어 놓는다. 

나는 순진하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아. 

나는 요조숙녀도 아니고 순애보의 주인공도 아니라고. 

너는 단 한번도 내게 부드럽게 키스해 주지 않쟎아. 

늘 그랬었다. 

사실 재운을 원하는 것이 시환이니 만큼.  먼저 좋아했다 라는 죄로.  또 재운을 너무 좋아하는 벅찬 마음에 그저 손길 한 번 닿아도 흐뭇하니 얼굴이 화끈거리는 어린애같은 심정을 느끼기도 하지만. 

재운과의 상태는 사랑이라는 감정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정말로 따스히 키스 한 번 해주지 않은 그가 아닌가. 

사랑을 구걸하며 물었던 그날도 욱하는 욕구에 그저 거칠게 혀만 섞다가 떨어져 나간 재운이었고, 그 이후 단 한번도 시환을 '연인' 으로써 부드럽게 대해 줄 기대 따위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에게 처음부터 그런 것을 바랬던 자체가 잘못이었겠지. 

하지만... 

하지만... 

"...으응..." 

"...하아...형...형..." 

흠짓.  딱딱히 굳은 상혁의 하반신이 밀착된 상태에서 단단하게 일어서는 것을 느끼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시환이 번쩍 눈을 뜨고 말았다. 

재운을 생각하다 또 잠시 망각했던 상태에서 어느새 상혁의 헐렁한 티셔츠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그를 자극하고 있던 자신을 깨닫고는 찬물을 머리 위에서부터 뒤집어 쓴 것처럼 흠짓.  또 흠짓. 

하지만 정작 놀랄 일은 그 다음이었다. 

"..." 

' 콰아앙 -!! ' 

차갑게 식은 무서운 눈. 

싸늘하게 입가를 장식한 조소. 

그리고 나직히 흘러나오는 비웃음. 

거칠게 닫기는 문 사이로 폭풍우 앞의 나뭇잎처럼 흔들리던 긴 머리카락. 

“?¿?a、?¿?a?A?Æ…?W?????q???N!!!…” 

(자, 잠깐만...재운아!!!...) 

"...뭐...?" 

"재운...재운이가..." 

"...씨발...또 오재운이지..." 

서둘러 반쯤 풀어진 버클을 바로 채우며 일어서는 시환의 등 뒤로 나직하게 읊조리는 상혁의 음성은 애처롭게도 젖어 있었지만.  이미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시환은 그를 생각할 여력이 더는 없었다. 

그냥 뛰쳐 나가려는데 '밖에 추워' 하며 시환의 어깨에 자신의 점퍼를 벗어 얹어 주는 상혁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지만, 그 입가가 미미하게 웃고 있었다는 사실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일이었다. 

"...가..."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못 하고서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온 시환은.  그래도 변함없이 재운만을 찾아 흔들리는 자신의 눈을 확인하고는 또 울컥. 

상혁에게 미안하고.  재운에게 미안하고. 

자신에게 미안하고. 

떠나야 옳은 지도 몰랐다. 

애초부터 이곳에 남은 것이 잘못이었는 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시환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비웃는 재운을 모른체 하며 매일같이 전단지를 흩뿌리고 다니던 자신이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자신의 얼굴 모를 부모들의 소재를.  그리고 현재를. 

그들에게 미래가 더 없다는 것도. 

덕택에 자신을 만날 수도 없으리라는 것도. 

그렇게 잘 알고 있는데... 

그런데 그럼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일까. 

어디로 가지? 

난 어디로 가야 하지? 

응?  재운아.  나 모두 잘못만 하고 있는 거지 지금?  그럼 난 어디로 갈까?  응? 

난 어떻게 해야 하냔 말이야!!! 

"...으앗...!..." 

"...입 닥치고 가만 있어." 

"...종..." 

생각만 해도 가슴속이 답답해지는 재운이란 이름조차 다 부르지 못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물어뜯듯 시환의 입술을 점령한 재운의 이가 잘근거리며 간간이 거친 숨소리를 불어넣고 있었다. 

"...씨발...입 안 벌려?" 

"...재운...ㅇ..." 

확 끼쳐 오는 술냄새에 뭐라 더 말 하려 입술을 열자 그 사이로 거칠게 침투해 들어오는 재운의 혀가 시환의 것을 찾아 억지로 엉켜 왔다. 

무슨 짓이냐며 벗어나고 싶었지만 우악스럽게 시환의 턱을 잡아 고정하는 그의 손에 힘이 잔뜩 실려 있어 그저 움찔거리며 고통스런 신음을 새어낼 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너는 날 사랑하지 않쟎아. 

그런데 왜 이렇게 화가 난거야? 

화가 날 대로 난 혀와 입술과 손길로 공격하는.  이것은 말 그대로 공격이지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해도 되냐고 묻자 그러라고 허락하던 그는.  역시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었다. 

우악스레 밀어붙여 으득 소리가 날 것처럼 세게 맨 벽에 부딛힌 등이 너무 아파 찔끔 눈물이 새어나올 것 같았지만, 여전히 힘을 잔뜩 실어 움켜쥔 턱도, 잡아채듯 움켜쥔 머리카락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애원하듯 밀어내는 가슴이 단단하게 긴장되어 있었고.  정말 화가 난 게 맞는 것 같았지만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가 화날 이유가 있었다면 그건 하나일 텐데. 

...넌 아니라며!!! 

그럼 뭐야.  뭐 때문에 이러는데.  무슨 짓이냐고 오재운! 

킥. 

해답은 너무도 쉬웠다. 

허무해서 눈물이 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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