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의 난(亂) 1편 (서생일기 외전 2)
“하아..하아..”
인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아슬아슬하게 얻어 탄 나룻배 한 켠에 기대앉아 멀어져가는 고향땅을 조금은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떠나는구나. 내 결국 이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언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앞날을 알 수 없어 그저 모든 것이 걱정스럽기만 한 소심한 서생은 잔잔한 물결을 가르며
힘 있게 뻗어나가는 뱃머리를 가만히 응시하며 아직도 긴장과 흥분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려 노력하였다.
‘마음대로 죽지도 못할 바에야 차라리 도망이라도 쳐야겠다!’ 라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전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치욕스런 일을 당한 뒤로 완전히 결심을 굳힌 인은
그날부로 최대한 머리를 굴려 사내에게서 벗어날 궁리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도 싫다 하였거늘, 어찌.. 그런 짓을 벌이고도 세인들의 얼굴을 대할 낫이 있단 말인가,’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안절부절, 몸 둘 바를 모르고 전신이 불에 덴 듯 확확 달아오르는 통에 인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분명 자신을 꾀여내려고 짜낸 구실은 ‘답답할테니 오랜만에 바깥바람이라도 쐬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노을 지는 저녁 무렵, 일찌감치 간단히 요기를 하고 요즘 관심 있게 보고 있는 역사서를 정독해보려던 찰나,
갑자기 들이닥쳐 다짜고짜 두툼하게 옷을 입히더니 강한 힘으로 손목을 그러잡고
밖으로 나가려는 사내에게 기겁하여 인은 하마터면 크게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웬일인지 검은 옷이 아닌 수수한 평상복 차림으로 쳐들어 온 것도 신기한데, 바깥출입이 너무 드문 것 아니냐며 나무라는 투로
걱정하듯 얘기하며 재촉하는 사내에게 정신없이 이끌려나와 등 떠밀리듯 올라탄 것은 칠흑 같은 검은 종마였다.
잘 발달한 근육에 매우 거칠어보였지만 사내에게는 순종적으로 복종하는 그 말이
조금은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여 인은 호기심에 살짝 목 부분에 손을 대보았다.
뒤에서 고삐를 조율하며 천천히 인가를 벗어나 한적한 숲길로 들어서는 것에 신경을 집중하던 사내는
어느 순간 인의 아이같이 천진한 행동에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덥석 가녀린 손목을 그러잡고 부드러운 털을 만져보도록 해 주었다.
갑작스런 사내의 세심한 배려에 당황한 인이 얼른 손을 빼내며 창피함에 붉게 달아오른 볼을 감추려 허둥지둥 애썼지만 허사였다.
이내 허리춤에 강하게 파고들어 자신에게 밀착시키듯 당겨 안는 사내의 단단한 팔을 느끼며
인은 한숨을 쉬며 살짝 몸의 긴장을 풀어 사내가 이끄는 대로 그의 품에 살며시 등을 기대며 편하게 자세를 고쳤다.
어차피 반항해 본들, 당해낼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저절로 길들여진 습관이었다.
“우와..”
탁 트인 야트막한 절벽에 올라 정면에서 하늘이며 바다 위를 온통 주홍색으로 물들이고
서서히 사그라지는 태양을 바라보던 인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 같은 감탄이 쏟아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제는 본인도 모르게 완전히 품에 안긴 채 손을 뻗어 하늘을 움켜쥘 듯 가느다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감상에 빠져있는 인의 섬세한 얼굴선을 눈으로 훑어 내리던 사내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살며시 고개를 내려 드러난 인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움찔. 순간 느껴지는 차가움에 잠시 몸을 굳힌 인은, 그러나 이내 별다른 움직임 없이 입술만 간지럽게 놀리며
장난치듯 행동하는 사내에게 곧 경계심을 풀고 다시금 눈앞의 황홀한 풍경 속으로 정신없이 빠져들며 손장난에 여념이 없었다.
“참, 그러고 보니 말이오.”
‘네??’ 갑작스럽게 고개를 들고 한손으로 인의 턱을 잡아당겨 아쉬워하는 그의 시선을 돌려놓고서 사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기록서를 다 썼다고 하지 않았소? 내 기억으론 새것이 하나 필요하다 청했었던 것 같은데, 그동안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했구려.
마침 어제오늘 서역에서 들어온 진귀한 고서와 책이 몇 권 있는데, 그중에 기록서도 두어 권정도 있었던 듯싶소만...”
그의 말에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길게 여운을 남기며 끝말을 줄이는 사내의 의도를 알아 챈 인의 얼굴은 이내 걱정으로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에게 무언가를 청할 때에는 반드시 ‘부탁’을 해야만 했고,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매번 사내가 요구하는 일들은
참으로 기발하고도 남사스러울 지경이라 인은 여지껏 정말 급할 때가 아니면 결코 사내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법이 없었다.
“아..아니 뭐...”
‘아무래도 예전에 자습용으로 쓰다 남은 빈 종이들을 모아서 재활용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하며 막 인이 거절을 하려는데,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이마를 탁 치며 꺼낸 말에 인은 몸을 홱 돌려 감탄어린 시선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진정이오? 정녕 그 서책을 구했다 하셨소?
“그런 것 같소. 아마도... 뭐, 꽤 고생했다더군. 명나라에서도 [주자전서]는 자취를 감춘 지 꽤 오래된 것 같소.
덕분에 그동안 잊고 지내고 있다가 이번에 어찌어찌하여 얻어 낸 모양이오만. ”
꿀꺽 침을 삼키며 인은 간절한 눈빛으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학문을 하는 선비에게 있어서 [주자전서]는 기본서 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가치 있고 중요한 책이었다.
단 그 책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워낙 오래 된 고서이다 보니 웬만큼 돈을 들이지 않고서야
감히 만져보지도 못 할 만큼 귀하디귀한 책인 것을 감안할 때,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그 책을 구했다고 시큰둥하게 말하며
몸이 달은 인을 본체만체 딴청만 피우는 눈앞의 이 사내는 과연 어떤 인물인지 인은 가끔씩 의구심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저.. 잠시만 제게 견식 할 수 있도록 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옳다커니’ 사내는 자신 없이 들려오는 조그만 목소리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관심 없다는 투로 인을 떠보기 시작하였다.
“날씨가 참으로 좋지 않소? 이젠 정말 완연한 봄이오. 이런 날일수록 야외에서의 재미도 쏠쏠한 법이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저 말속에는 함정이 있다.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애간장만 태우고 있는 인을 보다 못한 사내가 인심 쓰는 척 달래기 시작했다.
“이번 한번 만이오. 인. 그럼 그 책들은 물론, 당분간은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겠소.
게다가 저번처럼 춥지도 않을 테니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을 테고. 음? ”
명백한 사내의 의도를 알아채자마자 두 눈 가득 두려움을 담고 금방이라도 말에서 뛰어내리려는 자세를 취한 인을
성급한 사내의 손이 거칠게 휘어 감으며 저고리 앞섶을 풀어헤치기 시작하였다.
“윽.. 이게 무슨. 싫소! 제발.. 이런 곳에서는 싫어요!!”
갑작스런 그의 거친 행동에 사색이 되어버린 인이 벌벌 떨며 최대한 사내의 손길을 막으려 발버둥을 치는 사이
어느새 반쯤 벗겨진 헐렁한 의복사이로 차가운 손이 쑥 들어오자 그대로 기겁하여 비명을 지르려는 입을 사내의 입술이 그대로 덮어버렸다.
“읍... 으읏..윽...”
채 뱉어지지 못한 신음을 속으로 삼키며 그저 자신을 굴복시키려는 의도가 명백한 색정적인 키스세례를 받으며
인은 감은 두 눈 사이로 또로록 한줄기 눈물을 흘렸다.
“미안하오. 이번엔 울어도 달래주지 않을 거요.”
거친 숨소리와 함께 귓가에 낮게 속삭이듯 으르렁거리며 덥석 중심을 잡아 곧추세우는 손길에 예민한 피부가 금방 빨갛게 자국을 남겼다.
말 등위에 두 다리를 벌리고 올라탄 자세인지라 다리를 오므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조급한 손길이 간지럽게 자극하는 느낌에 굴욕감으로 입술을 꽉 깨물며 인은 말 머리에 어깨를 기대며 오열한 채 몸을 비틀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닿은 엉덩이 뒤쪽 사내의 중심부가 터질 듯 부풀어 올라 금방이라도 흉폭한 무기로 변해
자신을 찔러댈 것이 두려우면서도 인은 ‘설마..이 자세로는.. 아니겠지.’라는 한줄기 희망을 품고 그만해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핫.. 싫어!! 제발 안 돼요. 이것만은....으..으앗!!”
재빠르게 인의 사정을 유도한 후, 그가 품어낸 부끄러운 액을 담고서 그대로 손을 더 깊숙이 뒤로 미끄러뜨려
꽉 다물어진 입구에 대고 문지르듯 바르며 삽입을 준비하는 사내의 손길에 인은 경악하고야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허벅지에 흘러내리듯 걸쳐진 바지는 앉은 자세 때문에 벗지도 다시 입지도 못할 상황이 되어 버렸고,
어느새 준비를 마친 건지 살짝 들어 올려져 엉거주춤 그의 허벅지위에 걸쳐진 채 차가운 엉덩이 사이로
뜨끈하고 단단한 살점이 압박하며 밀려들어오는 느낌에 인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웃.. 너무 조이는구려. 하아.. 이러면 서로 힘들어 진다는 것. 물론 잘 알고 계시겠지요? ”
“아앗...무리,, 할 수 없습니다. 이건.. 이러면...아악..”
힘이 드는지 잠시 주춤거리다 이내 완전히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게끔 인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사정 봐주지 않고 그대로 파고들자 자지러지듯 인이 몸을 떨며 비명을 울려댔다.
반면, 사내는 파들거리며 자신의 대물을 자극시키며 움칠거리는 인의 몸속에서 쾌감에 겨운
달디 단 신음을 내뱉으며 인의 허리를 양손으로 힘껏 움켜잡고 위아래로 거칠게 움직이며 사정감에 몸을 떨었다.
‘아직은 이르지’
사내는 고통에 겨워 발버둥치는 인을 곁눈질하며 씩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사내가 누구인가. 언제나 한없는 기교를 부려 결국에는 인을 두 손 들게 만들지 않았던가.
갑자기 거칠기만 하던 동작을 멈춰 잠시 지옥 같은 고통에서 벗어난 것에 안도한 인이 방심한 사이,
사내는 인의 오른쪽 다리를 홱 들어 올려 반대쪽으로 가지런히 모았다.
“윽..”
그의 움직임에 쑥하고 빠져나가는 양물을 느끼며 불쾌감에 인이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한손은 허리에 그리고 다른 한 손은 단단히 힘을 줘 양 허벅지를 모아 쥔 자세로 당겨 안은 사내가 조급하게 허리를 들이밀었다.
“히익!! 하지...아앗..아퍼..아퍼...흐윽...”
꼭 부끄러운 새색시마냥 가지런히 옆으로 안긴 자세에서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사내의 대물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덕분에 비명을 지르며 저도 모르게 사내의 목을 힘껏 끌어안으며 허리를 띄운 인은
이내 강한 힘으로 아래로 잡아당겨져 다시금 쳐올리는 사내의 거친 행동에 하릴없이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뿌렸다.
“우웃. 너무 좋아. 인. 그대는 정말.. 최고요! 하앗..”
연신 들뜬 신음을 내뱉으며 무섭게 파고드는 사내의 움직임에 인은 움츠렸던 허리를 꺽으며 사내의 목에 두른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아아..그저 수치스러울 따름이구나. 엉덩이와 허벅지를 타고 진득한 애액이 미끌거리며 적셔지는 느낌에 인은 몸서리를 쳤다.
아직은 쌀쌀한 공기가 이제 막 후퇴하며 숨을 고르는 사내의 양물을 알맞게 식혀놓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불끈 솟은 사내의 그것이 사정없이 인의 여린 속살들을 짓누르며 파고들기를 수어차례.
아픔과 함께 찾아온 참을 수 없는 야릇한 감각에 겨워 사내의 어깨에 이를 세워 물으면서 인은 머릿속으로 단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도망쳐야한다. 이리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차라리 백정노릇을 한들 이보다는 낫겠지.’
“하..하악, 제발.. 이제 그만 좀..흑..”
“무슨 소리요. 이제 시작인 것을. 후우. 모처럼이니 제대로 즐겨봅시다. 후훗”
정신없이 흔들리는 와중에 사내 모르게 속으로 결심을 굳히던 인은 갑자기
중간에 멈추고는 다급히 자신을 빼내는 사내의 변덕스런 행동에 작은 신음을 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다음순간, 말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사내가 인의 다리를 잡아당김과 동시에 좀 전에 잠시 벗어두었던 두루마기를
바닥에 휙 펼쳐놓더니 중심을 잃고 허공에서 허우적대는 가녀린 인의 허리를 덥석 끌어다 두툼한 천위에 눕혀놓는 것이 아닌가.
정녕 여기서 끝을 볼 모양이구나. 질끈 감았던 두 눈을 뜨며 인은 거침없이 다리를 벌리려는 사내의 손을 덥석 부여잡고 또다시 애원하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차라리... 차라리 돌아가서 하...도록 하십시다. 내 더 이상은... 남사스러워서 안 되겠소.
이런 백주대낮에 혹여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아읏!! 흑...허억...”
전혀 개의치 않고 강하게 허리를 밀어붙이는 사내의 힘에 밀려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콱 손톱을 박으며 공중에 다리를 띄운 인은,
채 말을 맺지도 못한 채 뻐끔거리며 신음하기 시작했다.
“음.. 그런 걱정일랑은 접어두시게나. 이미 한 식경 전부터 수하들을 시켜 이곳을 감시하도록 해 놓았다오.
아읏.. 후...다리를 좀 더 이쪽으로.. 옳지. 설마하니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의 아름다운 모습이 들키도록 내버려둘 것 같소? 으음..인.. 인!!”
짓궂게 농하며 헐떡거리는 인의 입술을 벌려 그대로 말캉한 혀를 집어넣어 기겁하며 이리저리 숨으려고 방황하는 따뜻한 혀를 찾아 감아올렸다.
으윽.. 선홍색으로 부풀은 입가를 타고 한줄기 타액이 반짝이며 흘러내려도 전혀 개의치 않던 사내는
아예 인의 혀를 깊숙이 흡입하여 자신의 입안에 머금고 쭉쭉 빨아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입맞춤을 주고받으며 뼈 속까지 사내에게 점령당해 슬슬 머릿속이 몽롱해질 무렵,
기다렸다는 듯이 인을 뒤집어 놓고 벌려진 다리사이로 파고들어 거칠게 찔러대는 사내의 움직임에
인은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며 쾌감에 들뜬 신음을 토해냈다.
“으흐흑... 아학...흐윽...윽...”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과는 달리 점점 몸을 뒤로 빼 최대한 엉덩이를 사내에게 밀착시키며
그의 까실거리는 체모가 거칠게 비벼 올려지는 느낌에 부르르 온 몸을 긴장시키며 수축하기 시작했다.
“음, 핫.. 조금만 더.. 인.. 같이 느끼고 싶소. 흐읏..앗...”
“으흑...싫어..아...안 돼...하아..악...”
“우...큭...인... 인.”
부들거리며 경련하는 인의 엉덩이를 강하게 붙잡고 이미 먼저 사정하여 찔끔거리며 사내를 조여 대는 색정적인 몸에 만족하며
사내도 마침내 더운 정욕을 인의 몸속에 가득 품어내었다.
온 몸이 땀에 절어 쌕쌕거리는 힘겨운 숨만 겨우 내쉬며 무너져버린 인의 뒤에서 그를 껴안은 자세 그대로
사내는 옆으로 몸을 뉘여 아직 몸속에 머무르고 있던 자신을 빼내지 않은 채 그렇게 천천히 사정의 여운을 즐기며 숨을 골랐다.
“흐윽... 흑...하아..욱...”
어깨를 떨며 소리죽여 오열하는 가느다란 어깨를 잠시 심란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내. 정말이지 얼마나 정신을 놓고 푹 빠졌던지...
만지면 솜털같이 보송보송하던 여린 살들이 울긋불긋 새겨진 굵은 손자국들로 온통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쩝.. 오늘은 내가 좀 심했던가. 내심 후회하며 한 번 더 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꾹 누르며 천천히 몸을 빼내는 사내였다.
“우욱.. 밉습니다. 당신이 정말...흑흑.. 세상에서 제일 밉습니다.”
“..인...나는...”
“대체 어디까지 절... 흐어엉... ”
참고 참았던 서러움을 가득담은 눈물을 한바가지 쏟아내며
그렇게 인은 처음으로 사내에 대해 가슴속에만 품고 있었던 원망의 말을 주체하지 못하고 쏟아내었다.
깊게 절망하며 오열하는 어린 서생을 잠시 난감함에 그저 바라보기만 하던 사내는 이윽고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인을
간단히 제압하여 말 등에 매어두었던 얇은 모포를 꺼내어 둘둘 말아 안은 채 옷매무새를 바로하고 다시 말 위로 올랐다.
돌아오는 길 내내 사내가 덮어준 모포 속에서 한껏 웅크린 채 수치스러움과 치욕감에 벌벌 떨며 인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계속하여 꺼이꺼이 울어댔고, 평소 같았으면 무언가 행동이나 말로 서투르게나마 달래주던 사내는
오늘따라 돌이 되어 버린 듯 쩍 하고 굳은 채 그저 묵묵히 목적지만을 향해 말을 몰기만 할 뿐이었다.
“돌아가세요.. 제발..이제 그만 가주세요..”
사내의 품에 안겨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후, 방에 뉘여지자마자
인은 사내에게 등을 보인 채 둥글게 몸을 말며 최대한 그에게서 멀어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만을 내뱉었다.
잠시 입을 달싹여 뭔가 말을 꺼내려던 사내는 차가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냉정하게 고개를 돌려버리는 인의 옆모습을 보고는 망설이다가 몸을 돌려 그대로 나가버렸다.
- 탁 - 방문이 닫히자마자 인은 후두둑 눈물을 흩뿌리며 오열하다가 그대로 까무라치듯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휴우~ 하...아..”
“실례인줄 알지만, 혹 무슨 깊은 고민이라도 있으신지요.”
잠시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자괴감에 빠져있던 인은 누군가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기척을 느끼고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서 방긋 웃으며 자신과 체격이 거의 비슷한 미색의 도령이 한손에 부채를 든 채 호기심 가득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순간 ‘나에게?’ 라며 의아함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그 자리에는 도령과 자신밖에 없음을 깨닫고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요? 것 참 다행입니다.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말동무나 했으면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붙임성 있는 말투와 호감 가는 인상 때문이었을까. 유독 낮을 많이 가리는 인은 괜히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고 도령에게 선뜻 옆자리를 내주었다.
“...아아. 정말입니까. 부럽기만 하군요.”
“하핫 뭘요. 대신 저는 집안에서 아주 내 논 자식입니다. 그저 형님한분만이 근근이 원조를 해주고 계시는 덕에 이렇듯 유랑하며 지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다시 돌아가시는 건가요. [안서현]에 볼 일이 있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는 인에게 장난스럽게 눈을 굴리며 도령이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어들었다.
“그게.. 우연찮게도 이제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하핫.
아무래도 한양으로 다시 올라가야 할 듯싶은데. 참, 나으리는 한양에서 머무르실 곳은 있답니까.”
“아직 정해 놓은 곳이 없습니다. 기실 이번이 초행길인지라 걱정이 좀 되기는 하는군요.”
“그렇다면 이것 잘 되었군요.”
또 한번 부채를 치며 도령이 정말로 잘 되었다는 표정으로 인에게 자신의 집에 머물러 줄 것을 권하는 게 아닌가.
초면에 그런 폐는 끼칠 수 없다며 한사코 거절하는 인이었지만,
사람 좋아 보이는 소탈한 웃음을 지으며 간절한 눈빛으로 권하는 데야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하여 그럼 잠시만 신세를 지기로 하고 조금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도령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도령의 이름은 문우현.
변변치 않은 가문이라며 극구 밝히기를 사양하고 있지만 한갓 시골서생인 인이 보기에도 명문가의 자제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나이도 엇비슷하여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금새 친해져 이내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그렇게 우현과 어울리며 어느덧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새 한양에 당도할 수 있었다.
“누추하다 생각마시고 머물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누추하다니. 이게 과연 누추한 집이란 말인가.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집에 당도해보니 대문부터 으리으리하여 저절로 꿀꺽하고 침이 넘어가는 인이다.
몇 겹으로 둘러싸인 소문(小門)을 지나자마자 보이는 것은 정성을 다해 꾸며놓은 연못과 정자,
야트막한 구름다리를 건너면 내관 깊숙이 들어선 안채와 외관에 위치한 사랑채로 향하는 촘촘한 돌담길이 쫙 펼쳐져 있다.
“일찌기 부모님을 여의고 지금은 형님께서 가솔들을 이끌고 계십니다.
원래는 안채에 홀로 머무르시는데 요즘은 자리에 안 계신지라 비어있는 상태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은 황망히 우현을 따라 정신없이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감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식사는 입에 맞으신지요.”
“너무 귀한 대접을 받아 이것 참 어찌해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오. 오히려 모자란 저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스승과도 같은 분을 만났으니 제가 더 감사할 일이지요.
부디 오래 머무르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정말 깍듯하니 예의도 바르기도 하지.
불쑥 머리에 떠오른 야만인 같은 사내와 비교하다가 소스라칠 듯 놀란 인은
이내 후다닥 사내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리고 마저 저녁식사를 마치고 도령과 헤어져 방으로 돌아왔다.
온 몸의 진이 다 빠져버릴 정도로 완전히 녹초가 된 여행이었다.
노심초사 쫒아 오지나 않을까. 행여나 들켰다가는 정말로 온 마을 어르신들이 보는 앞에서 욕을 보이는 건 아닐까.
전전긍긍하며 안절부절 하지 못했던 지난 며칠간의 일이 주마등처럼 인의 머리를 스쳐갔다.
‘아니야. 이젠 벗어났어. 더 이상은 생각하지 말자. 이젠 그 정체불명의 사내와의 인연은 없는 거야.’
굳게 다짐하며 인은 모처럼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근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인은 우현의 형님이 쓰셨다던 서재에서 마음껏 진귀한 서책들과 고대사를 읽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형님 이야기를 할 때면 우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아마도 무척 존경하고 있는 것이리라.
인 역시 서재에서 그분이 모아놓은 책들을 보면서 그의 학문이 깊고도 진중함을 알 수 있었다.
우현의 대접이 극진해서인지 아니면 시간이 약이었는지, 이제는 인도 점차로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홀로 바람을 쐬고 있을 때면 혹시나 어디선가 불쑥 사내가 나타나 다짜고짜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여
불안에 떨기도 했었지만, 따스한 우현의 관심과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면서 점점 예전의 모습으로 회복해가고 있었다.
“헉헉.. 인..인 어디 있어요?”
“여기에요 우현. 무슨 일이길래, 그리 급해요?”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우현은 소리 난 쪽으로 홱 몸을 돌리며 크게 소리쳤다.
“오셨어요.. 드디어!! 형님이 오셨어요.”
방방 뛰며 좋아라 기뻐하는 우현을 보며 탐독하던 책을 조용히 덮고 일어난 인은 따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느새 우현과는 많이 친해져서 말을 놓고 있었다.
“어서 가 봐요. 우리. 형님이 인을 보시면 필경 기뻐하실 거에요.”
갸우뚱하며 인은 우현이 잡아끄는 대로 끌려가며 어설프게 물었다.
“형님은 아직 제가 누군지도 잘 모르시잖아요. 먼 길 다녀오셨다면서 피곤하실 텐데 우선 여독이라도 풀어야 하지 않겠어요?
만나 뵙고 감사를 드리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지만, 갑자기 낮선 사람을 불쑥 소개하면 좀 당황하실 것 같은데요.
우뚝. 갑자기 멈춰선 우현 덕에 덩달아 끌려가던 인도 어정쩡하게 걸음을 멈추었다.
"어랏...음...어쩐다.."
갑자기 얼굴에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에 휩싸인 우현을 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만 보고 서있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제가 우선 형님께 말씀드리고 이삼일 이내로 자리를 한번 마련 할께요. 그래도 되겠지요?”
그럼요. 인은 무슨 심각한 일인 냥, 우현이 호들갑을 떠는 것이 묘하게 이상했지만 너무 기뻐서 정신이 없으려니 하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형님을 뵈러간다며 사라지는 우현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인은 호기심에
자신도 멀리서나마 한번 그토록 존경한다는 형님을 살짝 얼굴만 볼까 하고 가만히 뒤를 따랐다.
“.... 별 일은 없으셨는가.”
“네. 대감께서는 무탈하셨는지요. 조금 야윈 듯 보이는....”
“형님!!!! 큰형님!!! ”
등을 보이며 집사와 조용조용 대화를 나누던 무현은 이내 들려오는 활기찬 목소리에 빙긋 웃음을 지으며
사랑하는 동생이 뛰어오는 쪽으로 시선을 들었다.
듬직한 몸에 훤칠한 키.
깔끔한 호남형의 부드러운 인상이 돋보이는 무현은 현재 한양의 명문 규수가에서 서로 연을 맺기를 원하는 신랑감 일 순위였다.
차분해 보이는 몸놀림은 그 나이에 걸맞지 않은 여유로움을 가져다주었고 무엇보다도 매 순간 보여주는 재빠른 판단과 행동력은
어려서부터 세자와 어울려 학문을 하며 키워온 돈독한 우정과 더불어 그를 세자의 오른팔로 있게 만든 결정적 요인 중 하나였다.
“어이쿠. 기운이 펄펄한 걸 보니 또 하라는 글공부는 팽개쳐두고 놀러 다니기만 했나 보구나. 그래 이 형이 부탁했던 일은 어찌 되었더냐.”
“당연히 잘 처리했지요. 뭐 사실.. 제가 손을 쓸 시간도 없이 굴러들어왔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형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슥슥 정말 아끼는 마음이 듬뿍 담겨진 손으로 잘했다는 듯 어깨를 토닥여주자 뿌듯한 웃음을 지으며
우현이 그의 허리춤에 매달리는 광경을 담 너머 멀리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인의 입가에도 잔잔한 웃음이 걸렸다.
비록 뒷모습밖에 보지 못하였지만 멀리서나마 그에게 감사의 목례를 올리며 인은
생각보다 무현이 젊고 무척 남성답다는 것에 살짝 놀라며 두 형제의 재회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살며시 물러났다.
생각 외로 낮고 굵은 그의 목소리가 어딘지 낮 익다는 생각을 잠시 하며.
“그래. 상황은 좀 어떠하던가.”
“전하께서 염려하셨던 대로 사태가 심각하였사옵니다.
중앙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간파한 일부 악덕한 관리들이 대놓고 뇌물을 요구하며 선량한 선비들의 향학심을 꺾어놓고 있었사옵니다.”
“흠.. 안 그래도 이번 윤 대감의 보고를 토대로 내 폐하께 진정을 올릴 생각이었소. 그대의 노고가 크오.
고위 관직에 있는 그대를 이토록 험한 일에 내보내면서 미안한 마음뿐이었는데, 정말 수고하셨소. 내 이 공은 잊지 않으리다.”
미처 여독을 풀기도 전에 세자를 알현하여 그간의 정황을 상세히 보고 드린 후,
상을 들여 오랜만에 친우의 관계로 돌아가 술을 한잔 기울이며 무현은 문득 세자에게 간곡한 청을 하나 올렸다.
“글쎄 무엇이든 말해보시게나.”
“당분간... 휴가를 받았으면 합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휴가라.. 그새 어디서 마음에 드는 규수라도 발견한 겐가. 그렇다면야 기꺼이 휴가를 내 드려야지. 하핫.”
별다른 이유도 묻지 않고 흔쾌히 청을 들어 주마 약속하며 술잔을 들어 올리는 세자와 마주앉아 잔을 기울이며
무현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야릇한 흥분을 느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루 이틀, 웬일인지 조급한 마음으로 무현이라는 분과의 만남을 기다렸건만...
사흘 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힘없이 찾아온 우현은 형님이 많이 아프시다 하였다.
워낙 건강체인지라 어릴 때 홍역을 치르지 않았다던데,
다 커서야 아이들이 앓는 돌림병을 앓는다며 입을 삐죽이는 우현을 달래놓고 인은 속으로 내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하나 적절히 치료해주지 않으면 뒷탈이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인은 예전에 서재에서 의학서를 보았던 것을 떠올리며 서둘러 서재로 발길을 재촉했다.
-드르륵- 어스름한 한줄기 빛이 비추어 그나마 컴컴한 서재를 밝혀주고 있었다.
인은 기억을 더듬어 서적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그늘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으로 발길을 옮기다가 덜컥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누구? 게 우현이냐.”
약간 쉰 듯, 지독히도 낮은 음성에 인의 몸이 반사적으로 경계하며 움츠러들었다.
“아닙니다. 누군가 계신 줄 몰랐습니다. 저는 잠시 유 우현 도련님의 객으로 사랑채에 머무르고 있는 서생 한 인이라 하옵니다.”
황망히 고개를 숙이며 인은 당황함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혹시 이분이 형님 되신다는 무현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넌지시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감히 여쭤 보건데, 작은 도련님의 형님 되신다는 대감마님이 아니신지요.
그동안 자리에 안계시다는 이유로 감히 허락도 얻지 않고 이곳을 드나들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아..뭐 괜찮소.. .그럼 이만.”
놀라서 말문이 막힌 듯 서둘러 몸을 돌려 나가려는 그를 보자 인은 다급히 한발을 내딛으며 무현을 불렀다. 그러나...
“그만! 다가오지 마시오.”
싸늘하게 내뱉는 말에 상처를 받아 그 자리에 움찔 얼어붙자 이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가 허둥지둥 말을 꺼냈다.
“아니.. 내말은. 험.. 미안하오. 지금 몸이 좀 안 좋아 혹여나 우현의 소중한 손님께 누가 될까봐 그러오.
남에게 옮길 수도 있다 하여 내 몸이 좀 낫거든 청하려 하였으나 오늘 이렇게 인연이 닿아 뵙는구려.
콜록... 아무튼 다른 뜻은 없소이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소.”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던 무현은 이내 열이 확 올라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들고 최대한 인에게 멀리 떨어져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후다닥 방으로 돌아와 장지문을 걸어 잠그고 잠시 귀를 기울여 인의 기척을 살피던 무현은
긴장으로 등허리가 축축해져 옴을 느끼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싸안고 이부자리위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것 참, 힘들어서 못해먹겠군. 하필 이런 때 홍역이 뭐란 말인가.
애꿎은 약사발만 발로 차내면서 그렇게 무현은 그 밤이 다 세도록 성질만 부리다가 결국 진이 빠져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한편, 인은 너무 어두워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으나 다급히 소리치는 무현의 말투가 어딘지 모르게 귀에 익다 여겨
잠시 곰곰이 떠올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는 찾던 서적을 발견하고선 품에 꼭 안고 방으로 돌아갔다.
무현님을 만났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점점 이곳이 좋아질 것 같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며.
“와 드디어 형님을 만나게 되는군요. 사실 형님이 그동안 인을...합!!”
“응? 뭐라구요? 뒷말을 잘 못 들었어요 우현.”
“아하하. 아니에요. 참 그나저나 며칠 전에 서재에서 형님을 만나셨다면서요. 어땠어요?”
부담스럽게 고개를 쑥 들이밀며 반짝반짝 눈망울을 굴리며 뭔가 살피듯 묻는 우현에게 인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다시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그게.. 너무 어두워서 얼굴은 뵙지도 못했는걸요. 겨우 목소리만 들었는데 많이 아프신 것 같았어요. ”
“우와~ 아무렇지 않았어요? 음.. 이건 다행인가..아니..더 심각한 건가..우움..”
아까부터 자꾸 말을 하다말고 중얼중얼 거리는 우현을 피식 웃으며 바라본 인은
엉뚱한 도령이 이번엔 무슨 궁리를 그리 골똘히 하나 재미있어 하면서 안채로 올라섰다.
“어..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요?”
“설마요.. 형님께 두고두고 앙갚음을... 아니.. 저는 잠깐 약속이 있어서요.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방문을 여는 등 뒤로 “인, 잘하세요! 우리 형님은 정말 정말 멋진 분이십니다!” 라며
고함을 지르는 우현에게 작게 웃으며 그러마하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후훗, 정말 재밌는 분이라니까.
조용히 찻물을 우려내는 시종의 움직임을 바라보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인은
살포시 눈을 들어 눈앞에 둘러쳐진 거대한 발을 바라보았다.
“초면에 이런 실례가 따로 없구려.
내 마땅히 얼굴을 보여 손님을 맞이해야 할 것이나, 아직 병세가 다 낫지 않아서 이렇게 한 것임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오.”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대감의 병세가 나아지길 기다릴 것을 그랬나봅니다..”
시중이 따라주는 차를 받아 가볍게 들어 올린 후 고소한 향내를 음미하며 한입 마시며 인이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입 안 가득 확 퍼지는 싱그러운 내음에 머리가 맑아진 인은 조용히 감았던 두 눈을 뜨며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달고 있었다.
그런 그를 잠시 넋 나간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발 뒤의 사내.
무현은 이내 후다닥 정신을 차리고 짐짓 헛기침을 하며 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며 분위기를 점차 화기애애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아. 이리도 정중하고 박식한 사람이 어디 또 있으랴. 근 한 시간 가까이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면서 인은 연신 속으로 감탄해 마지않을 수 없었다.
정치 경제.. 심지어 인이 푹 빠져있는 역사까지 무현의 끝도 없이 이어지는 해박한 지식에 인은 경외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나중에는 서로 조금씩 흥분하여 역사서의 존재가치에 대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토론을 벌이기까지 하였다.
인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유쾌한 시간이었다.
“하핫.. 정말 놀랍소. 왜 여지껏 한양에 올라오지 않고 초야에 묻혀계셨던 것이오.”
“과찬이십니다. 소인이야말로 오늘 크나큰 깨달음을 대감을 통해 얻었습니다.”
“고맙소.. 흠..쿨럭..쿨럭. 후우.. 매일 이렇게 방안에만 누워있는 것이 얼마나 고역인지 모르겠소.
바깥에는 저렇게 오색 꽃들이 화려하게 만개했는데 말이오.”
“조금만 참으시면 금방 일어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글쎄올시다. 아... 말이 나온 김에 내 초면에 염치불구하고 부탁하나 드려도 되겠소?”
궁금함에 고개를 든 인이 무엇이냐고 묻기도 전에 다시금 발 너머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처럼 하루에 한 두 시간만 이 불쌍한 병자를 만나러 와주지 않겠소?
책을 읽어도 혼자는 심심하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으니 점점 더 병이 깊어가는 듯싶소.”
떼쓰는 아이처럼 인에게 졸라대는 무현을 흐릿하게나마 바라보며 인은 살짝 고개를 돌려 그만 풋 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흠... 비웃어도 할 수 없구려. 오늘처럼 즐거웠던 적은 근자에 처음이니. 서생이 뭐라 하신들 아랫것들을 시켜서라도 모셔와야겠소.”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현 도련님의 말만 듣고 상당히 엄하신 분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이런 면도 있으셨나 해서요.
그렇게 하지요 그럼. 내일도 오늘 이 시간에 들르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쉬세요. 병이 도질까 두려워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쉬워하며 좀 더 잡아두려는 무현을 애써 뿌리치며 인은 자꾸만 입가에 웃음이 걸리는 것을 참으며 방에서 물러났다.
첫 인상과는 달리 이야기를 나눌수록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투와 가슴을 울리는 웃음소리에
저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인은 괜히 얼굴이 붉어져,
민망함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혹시라도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들킬까 하여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다. 내일 있을 만남을 기대하며.
그렇게 근 일주일을 인은 무현의 곁에서 수발을 들며 한가로이 지냈다.
점심을 들고 난 후, 몸이 약간 노곤하다 싶을 때면 어김없이 귀찮을 정도로 인을 부르는 무현 때문에 처음에는 난감하기만 하였던 인은,
그동안 그의 서재에서 찾아낸 이런저런 서책들을 가져가 발을 사이에 두고 조용조용히 읽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보내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리는 무현이 잠이 들 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붙들려 있기도 하며,
그렇게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무현을 향한 소중한 감정을 하나하나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던가. 인은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닫아버린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엔 그저 무현과 함께 있을 때면, 버릇처럼 아무 때나 불쑥 떠오르곤 하던 복면사내와의 끔찍했던 기억 따위는
신기하게도 냉큼 사라져버린다는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인가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러 해 동안 누군가의 다정한 관심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였던 인에게 거침없고 듬직한 무현의 말과 행동은
너무나 고마운 것이어서, 자신을 소중히 대해주는 그를 볼 때마다 인은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감돌며 소리내어 웃을 수 있게 되었다.
한 겨울의 두터운 얼음벽처럼 꽁꽁 얼어버렸던 마음이 천천히 녹아가며 그렇게나 평온하게도 그들의 봄날은 지나가고 있었다.
초저녁 까마귀가 어지러이 울어대던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지, 인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부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온 몸을 쏴하게 훑고 지나가는 불쾌감이 견딜 수 없을 만치 싫었다. 아직 모두가 잠들어 있을 깊은 시각인데, 무엇 때문에 이리 심란해 한단 말인가.
내일이면 드디어 무현을 직접 마주볼 수 있게 된다는 설레임에 저녁도 뜨는 둥 마는 둥
놀아달라며 매달리는 우현을 겨우 떼어놓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인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길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인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의복을 챙겨 입었다. 잠시 바람이라도 쐬면 나아지겠지.
“하지만... 내일이면 다 밝혀질 일입니다.”
“....,”
“어찌 그리 결단을 내리지 못하십니까!! 이럴 거면 애초에..“
처음으로 우현의 화난 모습을 본 것 같았다.
잠시 연못가로 나가볼까 하고 슬슬 발걸음을 옮기던 인은 순간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반갑게 우현의 이름을 부르며 나아가려다가 이내 덜컥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며 우현은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었다.
정자의 기둥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그 누구를 향해 우현은
‘그러 길래 어찌 그리 하셨냐’ ‘정말 실망했습니다.’라는 등등의 말을 퍼부으며 질책을 멈추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항상 활발하던 우현이 오늘따라 왜 저리 화를 내는 거지.
상대방을 확인하고픈 호기심에 인은 가만히 몸을 기울여 그 누군가가 기대어 있는 쪽을 향해 눈을 굴렸다.
‘어랏, 무현님이잖아. 그런데 왜 두 분이...헉.. 허억!!! 저...저 사람은!!!!!!!!’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갑자기 기둥 뒤에서 어둠에 가려져 있던 한 남자가 뚜벅뚜벅 달빛 아래로 걸어 나오는 것을 보며
인은 최근 들어 더욱 상냥해진 무현님을 떠올리며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끼며 서둘러 두 형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달빛에 완연히 드러난 무현의 얼굴. 처음으로 대하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는커녕 싸늘한 냉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항상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무현의 얼굴을 상상하며 이런 저런 모습을 그려보았던 인은
너무나도 생경한 그의 표정에서 그토록 지우려고 애썼던, 떠올리는 것조차 손발이 벌벌 떨리며 경기를 일으키게 만드는
사내를 읽어내고는 온 몸의 피가 싹 말라가는 느낌을 받으며 경악에 찬 신음을 울렸다.
“누구?”
“게 누구냐!”
벼락같이 호통 치며 성큼 한달음에 인이 있는 곳까지 다가온 남자.
평소 무현이 즐겨 입던 옷에 단정한 머리하며 남자답다고 느꼈던 익숙한 체격은 정녕, 사내였다.
무현이 바로,,,자신을 더럽히고 욕보이며 결국에는 떠밀리듯 도망치게 만들어 타지로 내몰았던 그 추악한 욕망에 들끓던 그자였단 말인가.
“인!! 이 시간에 왜 여기에 .. 설마..그대..”
“아..아니죠. 무현님. 너무 어두워 제가 사람을 잘 못 본 것이겠지요. 아무래도 아직 꿈에서 덜 깬 것 같습니다. 그런 거겠죠?”
“인 잠시만요. 부족한 형님대신 제가 다 설명 드릴게요. 그러니.. ”
“우현, 들어가거라. 아무래도 우리 둘이 미처 맺지 못한 얘기가 있는 듯싶구나.”
난감한 듯 인과 무현을 한 번씩 쳐다보던 우현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인을 쳐다보자
순간 가슴이 아리는 통증에 인은 저도 모르게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털썩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목소리가...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이제껏 인이 상상해오던 부드럽고 달콤한 그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귓가에 익숙한, 그리고 절대 잊지 못할 냉정하고 싸늘한 사내의 음성이었던 것이다.
“인!!”
“괜찮소?”
동시에 터져 나오는 다급한 목소리와 이내 거침없이 뻗어져 나온 무현의 손길.
“만지지 마세요!!”
인 자신도 스스로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앙칼진 소리가 피를 토하듯 절규하며 울려 퍼지자,
그대로 굳어버린 무현과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우현이 어지러이 눈에 들어왔다.
“하..하핫.. 하아...하아.. 후후후훗..우욱...”
인이 미친 듯 웃으며 거세게 고개를 내젓다가 이내 오열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좀 하세요 형님. 이대로 또 어긋나실 겁니까!!”
안타깝게 발만 동동 구르며 우현이 부추겨보지만 정신 나간 표정의 무현은 전혀 미동 없이 그저 알 수없는 시선으로 인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래. 어쩐지 처음부터 쉽다 했지요. 갑자기 우현님을 만나고..
낯설고 머나먼 이곳에서 쉬이 머무를 곳을 얻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생각했습니다.
이대로라면 고향을 떠나 이곳에서 정착하여도 괜찮을 것이라 스스로 위안도 했었습니다. 하하핫.. 생각할수록 우습군요.
제 죽을 곳인지도 모르고 스스로 불 짐을 지고 뛰어들었으니,,, 그동안 즐거우셨겠습니다. 대감 나.으.리!“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말투만은 단호하고 차분하게, 인이 화를 내고 있다.
언제나 사내 앞에서는 슬피 울거나 멍하니 포기한 얼굴을 하여 속상한 마음에 일부러 더욱 더 괴롭히고 나면,
괴로워 가녀린 인의 모습에 또 가슴이 아릿하게 아파오곤 했는데, 그럴 때조차도 인은 절대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언제나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며 원망도 미움도 모두 자기 것이라 버릇처럼 말하곤 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리도 흉흉한 눈빛을 한 채 가슴깊이 원망과 분노를 드러내면서 사내의 심장을 얼려가고 있을 줄이야.
사과의 말이라도.. 하다못해 변명이라도 늘어놔야 하겠건만,
무현은 근 사 오개월간 살을 섞고 보내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인의 너무나도 달라진 모습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대체.. 대체 당신은 누구시랍니까!! 왜 이제 와서.. 이런 모습으로 제 앞에 다시 나타나신 겁니까.
그냥 평생 아픈 척 하면서, 아니 차라리 얼굴에 흉이라도 하나 만들고서
제가 알아보지 못하도록 다정했던 무현님의 모습으로 그렇게 절 보시지요. 왜? 왜요!!!”
온 몸을 휘감은 분노를 억누르며 고요하던 인이 벼락처럼 내려친 호통에 맞춰
휘이익~ 두 어 차례 강한 바람이 불더니 곧이어 잔가지들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빗방울을 튀기기 시작했다.
소낙비가 내리는 것인지 어느새 빗방울이 굵어지건만. 그 누구하나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고 있는 인.
그런 인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는 무현은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슬픔이 눈가로 흐르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꽉 움켜쥔 손을 풀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아니요. 정녕 이런 식으로 그대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야. 인.”
“물러나세요. 이젠 싫습니다! 당신이 밉다 말하였던 적도 있었습니다. 너무도 밉고 미워서 참으로 죽이고 싶었던 적도 많았습니다.
끝까지 숨기시지요. 이렇게 감당 못하실 거면 그냥 계속 복면 사내인 채로 절 유린하면서 즐기시지 그러셨습니까!!”
빗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는 인의 목소리는 이제 악에 받친 고함소리가 되어버렸다.
후두둑 사정없이 쏟아지는 비를 온전히 다 맞고 선 채, 인은 양 팔을 뻗어 거칠게 휘두르며 무현에게 달려들었다.
“왜,, 이제 와서.. 이토록 다정한 모습으로 다가오신 겁니까. 반갑게 당신을 맞이하던 제가 참으로 볼만하셨겠습니다.
예전에 당신을 볼 때면 더러운 제 자신을 탓하며 끝없이 절망하며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던 미천한 저를 희롱하는 기분이 어떠셨는지요. ”
“후회..하고 있소. 진심으로...”
사내의 가슴팍을 미친 듯이 두드리던 인의 손이 순간 거짓말처럼 멈췄다.
덩달아 고스란히 인의 매운 주먹을 받아내며 힘없이 흔들리던 사내의 두 어깨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싶더니,
이내 사내는 양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마주 선 인의 작은 주먹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정말이오.. 인.”
부들거리며 멍한 눈을 들어 사내를, 아니 무현을 바라보던 인. 한숨과도 같은 말을 내뱉으며 두 눈 가득 원망을 한가득 담아 무현에게 보냈다.
“하.. 후회..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니겠지요.
그 말의 뜻이 무언지나 아시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모를 것입니다. 정녕 당신은 몰라요!!”
자기도 모르게 사내에게 모진 매질을 하며 싸늘한 말을 내뱉은 인은
이내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고 조금 힘에 부쳐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진즉 말하려 했소. 내 그동안 그대를 어떻게 여겼는지. 그대를 다시 만나면 얘기 해주려 하였소.
홀로 도망치듯 이리 먼 길 떠난 걸 알고 난 후 얼마나 괴로움에 치를 떨었는지,
정녕 소중히 여겼어야 할 것을 놓쳐버린 후 상심하듯 보낸 나날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말이오.
그대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너무나 고운 미소를 보내는 모습에 잠시만.. 잠시만 더,,
나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그대의 따스한 마음을 느끼고 싶어 속이는 것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소.
다 설명하리다. 빗나간 애정이라 그 정도로 밖에 표현하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했던 어리석었던 내 맘을 모두 다 고백하겠소.
그러니.. 그러니 제발 조금만 진정해주오. 시간을 줘요....인!”
너무나도 간절한 그의 말에 천성이 유약한 인은 마음을 독하게 다잡으며 야멸차게 그를 뿌리쳤다.
“이만.. 가게 해주세요. 저를... 이제는 보내주실 때입니다. 평생을 두고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그저 죽은 듯이.. 거슬림 없이 그리 살 테니,,, 대감마님께 비하면 하릴없이 하찮은 사람입니다.
저 하나쯤 없어진다 하여도 부족함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제발.”
무현은 울고 싶었다.
애절하게 옷깃을 잡고 평소라면 절대 다섯 걸음 안으로는 들어오지도 않던 사람이
정말 사정하듯 바짝 붙어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자비를 구하는 모습에 왈칵 감정이 머리꼭대기까지 치솟아
수백 수 만개의 혈관을 타고 돌며 분출되지 못한 채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보낼 수 없다. 아니, 가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인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 단 한 순간도 떠올리지 않고, 가슴 졸이지 않았던 시간이 없었다.
“보내지 않소. 그리 할 수는 없어. 인.”
“....?!!!”
동공이 크게 확장되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인의 눈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어..어째서...당신은...!!”
외마디 소리를 끝으로 절망적으로 인의 고개가 무너지듯 숙여지며 ‘앗’ 하는 짧은 비명을 끝으로
애써 지탱해오던 몸이 무현의 품안에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놀란 고함소리와 함께 우현이 달려오는 모습과
울부짖으며 무현이 자신의 몸을 와락 끌어안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며 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놓고 만 것이다.
가혹한 시련.
단지 좀도둑질의 대가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린 서생이 감당해 내기에 너무나 큰 시련을 안겨준 무현을 끝없이 원망하며
스르륵 인의 차가운 눈이 감겨드는 모습에 거의 정신이 나가버린 무현은 그대로 인을 들쳐 안고 후원을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