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생의 난(亂) 2편(完) (4/4)

 서생의 난(亂) 2편(完) (서생일기 외전 2) 

온 몸을 엄습하는 추위.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리는 몸을 간신히 부여잡고 인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들어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후우. 가만히 내쉰 한숨 속에는 따뜻하고 훈훈한 온기가 드리워져 있었다. 

너울거리는 호롱불이 밝은 주황색으로 방안을 비추는 가운데 자신은 더운 열이 나는 폭신하고 널찍한 이부자리 한 가운데에 누워있는 것이다.

좀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머리가 멍해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메슥거리는 어지럼 속에 온 몸이 물에 푹 담갔다 건저올린 듯 한없이 가라앉아, 

고작 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후들거리는 팔로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정도였다. 그러나,

“앗... 이게 무슨..”

온기가 걷히자마자 뽀얀 속살을 파고드는 한기에 인은 진저리를 치며 다시금 이불속으로 몸을 묻었다. 

심장이 벌렁벌렁 주체할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옷이.. 내 옷은 다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슬슬 다리 쪽에서부터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부드러운 비단 이불에 쓸리는 맨 몸이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까닭에 

인은 불안감을 느끼고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그대의 옷이 너무 젖어 있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소. 아무 일도 없었으니 너무 불안해하지 마오.”

바스락거리는 작은 소음을 깨고 들려온 중저음의 나직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인의 고개가 어두침침한 방 한 구석으로 홱 돌아갔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정갈한 옷차림의 무현.. 아니 사내가 정좌를 한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때, 자신에게 그리도 고운 미소를 보내주었던 인의 태도가 확연히 틀려진 것을 느끼며 무현은 다시 [안서현]의 시골 서생의 모습으로 돌아가 

불안에 떨며 조금이라도 더 자신에게서 벗어나고자 바르작거리는 인의 소소한 몸짓에 상처를 받은 채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축 늘어진 인을 무작정 들쳐 업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젖은 옷을 벗기려 인의 몸에 손을 댄 순간, 

분명 정신을 놓고 있던 와중이었음에도 다급하게 울음을 터트리며 온 몸을 비틀어대는 인을 진정시키며 

무현은 떨리는 자신의 손을 잘라버리고 싶을 만큼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은 그저 껍데기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무심한 마음에 그저 조금 수척해진 것에만 가끔 신경을 쓰는 척 했을 뿐, 속으로는 온갖 고뇌와 괴로움에 시달리며 

무의식중에도 자신을 건드리는 손길에 격앙된 반응을 보이는 인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였음을 이제야 비로소 깨닫고 있는 무현이었다.

“이 이상 다가가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우선 좀 눕는 게 좋겠소.”

양 손바닥을 펴 천천히 들어 올린 무현의 간곡한 청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은 분노로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일갈하였다.

“떠나게 해주세요. 이 이상 농락당하는 것은 싫습니다. 

제 어디가 그리도 마음에 드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대감마님께서는 법도를 지키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그저 그리 여기겠습니다. 

젊고 혈기 왕성한 분이니... 잠깐.. 실수하여... 어긋난 길로 눈을 돌리신 거라 생각하겠습니다. 

저는 이 방을 나서면 대감에 대한 일은 깨끗이 잊을 것입니다. 필시 그리하겠습니다. 

어디에서도 발설하지 않고 평생 없었던 일인 듯 기척도 내지 않고 그리...숨어 지내겠습니다.”

“...깨끗이 잊겠다...라.”

문득 무현이 입가에 조소를 띄며 흉흉한 눈빛을 하고 인을 뚫어버릴 듯이 강하게 응시하며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그 모습에 저절로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킨 인은 좀 전 까지만해도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던 그의 움직임과 말투가 

갑자기 사납게 으르렁거리듯 변하자 두 주먹으로 이불을 꼭 움켜쥔 채로 은연중에 몸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대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군. 그래 어디로 숨어들 작정이오. 

저 멀리 험난한 산속으로나 들어가 도적들의 노리개가 되고 싶은 거요. 거렁뱅이 소굴에서 거친 사내놈들에게 물어뜯기고 싶으신 거요. 

아니지. 혹여 지체 높으신 나같이 혈.기.왕.성.한. 다른 양반님들의 음흉한 꾐에 빠져 평생 눈물을 쏟으며 그렇게 살고 싶으신 게요? ”

“어찌 그리 모욕적인 말씀만 골라서 하시는 겁니까! 전 그저.. 그저 조용히 은신하며 평생 뉘우치고 살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저...이 모든 일을 죄 많은 제 탓이라 여기며, 그렇게 속죄하면서요.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괴로움에 울부짖으며 찡그린 두 눈 사이로 한줄기 눈물이 또르륵 굴러 떨어졌다. 인은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끊임없이 자신을 한낮 여린 여인네 취급하며 빈정거리는 그의 말투에 숨이 턱턱 막히는 이 상황이 너무도 싫었고, 

그토록 자신에게 이유 없이 집착하는 사내의 행동도 몸서리칠 만큼 싫었다.

“아니, 속죄는 필요 없겠소. 인. 그대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평생 이곳에서 괴로워하며 지내시오. 그리하는 게 낫겠소. 내 충분히 도와드리리다.”

“뭐..뭐라구요? 정녕 당신이란 사람은...앗..”

갑자기 벌떡 일어나 거침없이 인이 떨고 있는 곳으로 다가온 무현은 온 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에 정신이 나가버릴 지경이었다. 

감히!! 감히 자신을 잊겠다 말하였단 말이지. 고 조막만한 입으로 겁도 없이 그런 소릴 지껄여대?  

인이 정신을 차리면 조목조목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다정스레 달래보겠다던 처음의 생각은 어느새 날아가 버리고 

오직 눈앞의 가녀린 서생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복면사내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버린 무현은 이제야 사태를 깨닫고 

비명을 울리며 한 움큼 이불을 끌어안은 채 몸을 돌려 기어가려는 인의 발목을 잡고 사정없이 아래로 끌어당겼다.

“놔!! 이것 놔!! 아..아악 천벌을 받을...흐윽”

발악하며 꽉 힘을 줘 그러모은 이불이 허무하게도 사내의 매서운 손길에 단박에 빠져나가버리고 

그대로 온 몸에 체중을 실어 내리누르는 익숙하면서도 끔찍한 느낌에 인은 가슴이 짜부라드는 느낌을 받으며 

‘헉’하고 숨을 들이키며 뒤로 넘어가 부드러운 이불속에 파묻혔다.

마..말도 안됀다. 이런.. 이런 일. 믿을 수 없어!!

초점을 잃은 두 눈이 허공을 배회하며 혼란에 빠진 인은 사내가 허겁지겁 자신의 온 몸을 혀로 쓸어가며 

다시금 붉은 화인을 남기는 통에 힘없이 흔들리는 몸을 가눌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온 몸의 피가 싹 빠져나가는 느낌에 그대로 굳어있었다.

“으..흑...”

정말 화가 난 듯, 전혀 반응 없는 인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뜻으로 거칠게 이를 세워 유두를 꽉 깨무는 무현의 몸짓에 

인의 허리를 크게 요동치며 급기야 입이 열리며 아픔에 겨운 신음성이 울렸다. 

그제야 좀 성이 찬 듯 무현은 근 한 달 반 이상 취하지 못했던 솜털 같은 인의 몸에 마음껏 자신을 묻으며 욕정을 발산하며 울부짖었다. 

“아악!! 그..그만 두... 흑...흐윽...”

“절대 날 잊을 수는 없소. 인. 내가 용서치 않아!!”

폭풍같이 몰아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거칠게 인을 유린하는 무현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온갖 신음과 고통에 겨운 비명소리가 난무한 은밀한 방안을 감싼 두툼한 장지문 너머 

바깥은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빗소리가 어지러이 뭉쳤다 흩어지길 반복하였다. 

그리고 밤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끈적한 방안의 정사는 서서히 날이 밝으면서 

온 밤을 꼬박 걸쳐 내린 비로 나뭇잎에 고여 있던 물방울이 ‘또옥. 똑’ 하고 기둥아래 초석을 두드릴 때쯤에야 끝이 났다.

- 끼이익 -

살짝 열린 손바닥만한 쪽문으로 들어온 시린 빛 때문에 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풀어헤쳐진 긴 머리가 어깨까지 늘어져 밝은 빛에 익숙하지 않은 눈을 살포시 가린 채로 

인은 부풀은 눈두덩이를 살짝 누르며 다시 고개를 돌려 조그만 틈 새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만치 널부러진 채 엉망으로 흩어진 이부자리 위 무현이 쓰러져 깊은 잠에 빠져 내뱉는 안정적인 숨소리를 등 뒤로 하고 

인은 어느새 말끔히 개어버린 하늘위로 자유로이 휘저으며 날아다니는 새들을 열심히 눈으로 쫒았다.

가만히 손을 내밀어 조금이라도 그네들과 닿고 싶은 마음에 천천히 움직이던 인은 멈칫 그 자리에 굳은 채 자신의 가녀린 팔을 내려다보았다.

한 눈에 봐도 확연히 드러나는 자줏빛 손자국. 

자신의 손목에 아로새겨진 굵직한 사내의 손 마디가 그대로 느껴지는 듯 하여 인은 저도 모르게 두려움에 몸을 떨며 어깨를 움츠렸다.

눈물이라도 나와 주었으면 좋으련만, 밤새 다 쏟아낸 건지 아니면 너무 허탈해서 울음도 나오지 않는 건지... 

생각 외로 차분히 가라앉은 몸과 마음에 인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고 담담한 자신에게 놀라고 있었다.

아픔에 겨워 제발 그만해달라고 애원하면서 저도 모르게 무현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던 것 같다. 

자신을 향해 인자하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방에 들것을 청했던 다정했던 그는 

지금 날 유린하고 있는 사내가 아닐 거라는 헛된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끝끝내 인은 바보처럼 소리 내어 울다 지쳐 탈진해 버린 것이다.

‘어쩌면 처음 그곳을 떠나 올 때부터 결국 이리될 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크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필경 언젠가는 사내가 나를 찾아낼 거라는 두려움을 가슴깊이 숨기고 있었던 거야. 

그래. 너 역시도 벗어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 하려 했던 거야. 바보 같은 인!!’

- 우당탕..탕 -

“헉.. 으윽... ”

깊은 사색에 잠겨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인은 갑작스럽게 무현의 팔이 뻗어와 자신의 발목을 잡고 그대로 끌어내리는 통에 

엎드려 두 팔로 기대고 있던 몸이 와르르 무너지며 단단한 방바닥으로 무너져 그대로 온 몸이 질질 끌린 채 아래로 잡아채졌다.

“하..하아.. 학”

순간 심장이 터질 듯 놀란 인은 방바닥에 쏠려 쓰라린 온 몸의 아픔도 모른 채 그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사내가 어느 틈에 잽싸게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는 것도 저지하지 못하였다.

“뭘 그리 놀래는 거지. 저 밖에 좋은 볼거리를 내가 방해 한 건가? 나보다 더 나은 사내라도 본 것이오?”

흥 하고 비아냥거리며 거침없이 인의 여린 어깨에 입술을 묻는 무현의 움직임에 인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역시나...사내가 맞았다. 

꽉 감은 두 눈 사이로 뱀 같은 혀가 적나라하게 부드러운 살점을 깨물었다 놨다 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내의 분탕질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인은 아무런 말도..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입술만 꽉 앙다문 채 떨리는 숨만 내뱉을 뿐.

힐끔 그런 인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던 무현. 

뒷목이 찌르르 울리도록 머리를 한 움큼 잡아당기며 이내 심술궂게 인의 쇄골 뼈 근처 푹 파인 우물을 한입가득 세차게 빨아올리며 이를 박아 넣었다.

“으윽...아..악”

아픔에 몸서리치며 인이 비로소 발버둥을 치자 그제서야 입가를 말아 올리며 소리 없는 웃음을 짓던 무현은 

전혀 미안하지 않은 낯으로 시큰둥하게 사과했다.

“아픈가? 내 고의는 아니었네만..”

“하아...읍..”

그대로 입술이 봉해진 인은 숨이 턱 하니 막혀 두 눈을 질끈 감고 무현의 밑에 깔린 채 버둥거렸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무엇하나 변하지 않았다. 사내와 나.. 둘 다 역시.

씩씩거리며 덧에 걸려 발버둥치는 어린 토끼를 보는 냥 제 손바닥 안에서 마음대로 놀아보라는 식으로 진을 빼놓다가 

종내는 허무하리만치 간단히 제압하며 이른 아침부터 몸을 겹쳐오는 무현을 질린 듯 바라보다가 결국 포기한 인이 고개를 떨구는 찰나,

“대감마님. 잠시 나와 보십시오. 큰일입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

갑작스런 방해에 심기가 불편해진 무현이 숨기는 기색도 없이 불쾌한 목소리로 꾸짖으려는 데 더욱 다급한 목소리로 집사가 무현을 재촉한다.

“작은 도련님이 열이 펄펄 납니다. 아무래도 한번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뭐라고?”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순간적으로 무현과 인의 눈이 마주치고 잠시 눈빛을 주고받던 두 사람.

이내 급하게 몸을 일으킨 무현은 인상을 찡그리며 휘리릭 도포를 둘러 입고 서둘러 방을 나섰고 그런 그의 등 뒤로 느리게 몸을 일으켜 

대충 널부러진 무현의 옷가지로 벗은 몸을 가리며 등을 보인 채, 인은 우현의 병세를 걱정하며 허둥지둥 헝클어진 몸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래 의원은? ”

“벌써 당도하여 진맥 중이옵니다. 아무래도 대감께서 앓던 돌림병이 아닌가 싶습니다.”

타다닥 잰 걸음으로 바삐 우현의 처소에 다다른 무현은 성급히 방문을 열고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자리에 누워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우현의 곁에 앉았다.

“좀 어떠한가? ”

“흠.. 하인들 중 홍역을 앓지 않았던 이는 모두 물리셔야 합니다. 

너무 심려하실 것은 없사오나 혹여 밤사이 고열이 들끓을 수 있으니 간호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염려 마시게나. 이 주변을 격리시키고 내가 직접 병세를 지키겠네.”

소중한 아우의 자뭇 심각한 병세에 걱정으로 양 미간을 찌푸리며 우현은 턱을 슬슬 쓰다듬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도 그리 녹녹치 않은데 하물며 우현에게 탈이 생기다니.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딱 이로구나. 

저도 모르게 심란한 한숨이 쏟아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곧 쾌차하실 것입니다.”

“내 자네만 믿소. 잘 부탁하오.”

의원을 독려해주고서는 무현은 힘없는 걸음으로 안채로 돌아갔다. 

지금쯤이면 대충 아랫것들에게 상황을 들었을 사람인데, 안절부절 지친 몸을 이끌고 뛰쳐나올 테니 당장 그 먼저 달래서 진정시켜야 할 판이었다.

“좀.. 어떻습니까. 많이 않 좋다 하던데요?”

저도 모르게 무현의 앞으로 당겨 앉으며 인이 다급하게 눈망울을 굴렸다.

내심 동생처럼 아끼고 있던 터라 아프다는 그 말에 덜컥 가슴이 철렁했던 인이었다.

“아무래도 홍역을 앓는 모양이오. 나 때문인 것 같은데.. 아직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는군.”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자괴감에 고개를 떨구는 무현을 바라보며 인은 가슴 한켠이 아릿함을 느끼며 슬며시 뒤로 물러나려 하였다. 

그러나 천천히 손을 뻗어 인의 허리를 약하게 부여잡는 무현의 손길에 주춤하면서도 왠지 그의 모습이 가여워 차마 밀어낼 수가 없었다. 

무현 역시 예상외로 인이 매섭게 뿌리치지 않음에 용기를 얻은 듯 잠시 망설이다 결심한 듯, 품으로 다정하게 인을 끌어당겨 폭 감싸 안았다. 

귓가에 가느다랗게 들려오는 인의 숨결은 너무나도 포근하고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지라 

무현은 내내 지치고 피곤했던 몸을 오롯이 기대어 잠시간의 편안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제가.. 우현님을 돌봐드리고 싶습니다.”

슬쩍 어깨에 기댔던 고개를 들어 정면에서 인을 바라보는 무현의 눈빛은 여전히 깊게 잠겨 전혀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인은 그동안 우현과 쌓았던 정 때문이라도 

꼭 그의 곁에서 간호를 해주고 싶은 마음에 용기를 내어 무현에게 청해보았다.

그러나,

“아니 되오. 그대까지 위험할 수가 있어. 게다가..지금만으로도 충분히 지쳐 보여. 더 이상은 안되오.”

무겁게 고개를 저으며 뜻을 분명히 하자 인은 애가 닳아 저도 모르게 무현의 손을 살짝 잡더니만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발요. 전 이미 그 병을 어렸을 적에 치렀습니다.. 그러니 할 수 있어요. 제가 돌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음...”

연신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치는 무현의 손을 꼭 움켜쥔 채 간곡한 말로 거듭 설득시킨 인은 

드디어 마지못한 듯 무현의 허락을 받아내고선 조식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허겁지겁 우현의 처소로 달려갔다.

그런 인의 모습에 무현은 사랑하는 동생을 향한 질투심이 타오르는 것을 느끼고 어쩔 수 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정말 나조차도 이해를 못하겠구나. 이런 내 맘을.

“하악.. 콜록 콜록.. 헉헉..”

“조금만.. 조금만 버텨주세요. 우현. 제발 조금만..”

우현의 곁에 달라붙어 열꽃이 핀 손을 강하게 부여잡으며 인이 속삭이고 있었다.

연 사흘 동안 우현은 고열에 들떠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고, 밤낮으로 하인들이 돌아가며 간호를 했다지만 

대부분은 매일 밤을 꼬박세우며 한시도 우현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인의 정성어린 간호에 그나마 많이 나아진 우현이었다.

집안의 그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들 인의 이러한 행동에 탄복하였고 

집사는 아예 인을 둘째 도련님 모시듯 하며 무현의 가솔들을 대하듯이 깍듯하게 예의를 차린 지 오래였다.

“그래도 잠시 눈을 붙이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러다가 도련님마저 몸이 상하시면 어쩌시려구요.”

“조금만요. 아직은 괜찮습니다.”

“아이구. 이러시면 대감마님께 저희가 경을 칩니다. 저희를 봐서라도 오늘은 이만 들어가 쉬세요.”

조금이라도 몸을 뉘이라며 거듭 권유하는 이들을 고집스럽게 물리고, 인은 요지부동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급기야 인의 안위를 걱정한 집사의 보고를 받은 무현이 한숨을 쉬며 직접 인을 데려가려고 들이닥치기에 이르렀으나.

“쉿... 발소리를 죽이세요. 이제 막 잠이 드셨습니다.”

한바탕 호통을 쳐서라도 끌고 가려 했던 무현은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앞을 막아서며 

한손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인의 매서운 눈초리에 눌려 그대로 슬금슬금 멋쩍게 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엉거주춤 앉았다. 

인의 태도가 요즘만 같다면 무현은 감히 기가 눌려 인을 어떻게 해볼 염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최근 들어 종종 생각하곤 하였다. 

손도 안 씻고 환자를 보러왔다며 한마디 호통으로 멋쩍게 만들지를 않나, 

형님이 되가지고 동생에게 몹쓸 병이나 옮긴다는 둥 핀잔을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치 집안 단속하며 서방님께 잔소리하는 안방마님처럼 말이다.

가끔씩 무현은 자신을 향해 못마땅한 듯 종알거리며 앞서 걸어가는 인의 단아한 자태를 훔쳐보며 

슬몃 이런 생각이 떠올라 쿡쿡거리며 웃음 짓곤 하였다. 

물론,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뒤돌아선 인의 꾸중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동생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생각보다 우현의 일이 어느 정도 자신과 인의 거리를 덜어준 것만 같아 

무현은 요즘 같아서는 내심 이대로 조금만 녀석이 더 아파줬으면 하고 바라기도 하는 것이다. 

참으로 속내를 알 수 없는 형님이 아닐 수 없다.

“많이 피곤해 보여. 오늘밤은 내가 있을 터이니 그만 들어가 눈이라도 좀 붙이는 게 어떻겠소.”

“하루 이틀이면 우현님의 병세가 좋아지실 듯 합니다. 그러니 그동안만이라도 있게 해주세요. 열이 내리고 나면 그때 쉬어도 될 것입니다.”

“후우..정녕 그대가 이렇게 고집쟁이일 줄은 몰랐구려. 내 가끔 그대를 보며 새초롬한 샌님같다 생각하였으나 아무래도 정정해야 할 듯 싶군.”

샌님이라는 말에 살짝 눈꼬리가 올라가는 모습에 무현은 또 한번 즐거운 웃음을 터트리며 껄껄 웃었다. 

인이 계속 머무르겠다 길래 그럼 자신도 병이 다 나았으니 같이 간호하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인을 살짝 무시하고 한 이틀 열심히 우현을 돌보았었지. 

덕분에 조금은 자신을 신뢰하는 마음이 생겼는지 처음보다 눈의 띄게 달라진 자신을 대하는 인의 태도에 나날이 즐거워지고 있는 무현이었다.

비록 아직은 허물없이 웃어주거나 예전처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그런 날도 오겠지 라고 내심 기대하며 무현은 피곤한지 살짝 눈가를 비비며 기지개를 켜는 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흠칫.. 조금 마른 듯한 어깨를 살포시 주무르는 손길에 화들짝 놀랬던 인은 

이내 그 손길이 그저 단순히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담긴 것임을 알고 애써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벌써 그의 손길이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급격히 두근거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뛰기 시작하는 심장이 거슬렸지만 

설마 아픈 동생이 있는데 무슨 짓을 벌일까 하여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자 어깨에 힘을 빼고.. 그렇지. 팔을 이쪽으로 주시오.”

가만히 속삭이며 인도하는 몸짓에 인은 어설프게 팔을 들어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내밀었다. 

마주앉아 별다른 이야기 없이 그저 묵묵히 잡은 팔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며 주무르기에 여념이 없는 무현의 이마를 바라보며 

문득 인은 처음으로 가깝게 대하는 그의 얼굴을 아무런 방해 없이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똑한 콧날에 살짝 아래로 내리뜬 눈엔 짙은 속눈썹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자답게 쭉 뻗은 이마와 반듯한 턱 선이 자칫 날카롭게 보일 그의 이미지를 강하게 다잡아 주고 있어 

정말 자신에게 한 일만 아니었다면 참으로 좋은 인연으로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무현을 가만히 바라보며 인은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뜻 모를 그 한숨에 번쩍 고개를 든 무현과 정면으로 눈길이 마주친 인. 

‘아차’ 싶어 얼른 고개를 푹 숙여보지만 이미 당황함에 붉게 물든 양 볼은 그에게 잡혀있는 손 때문에 가릴 수가 없었다. 

단순히 우현의 병세를 걱정한 것이라 여긴 무현은 그런 그의 턱을 살포시 들어 올린 채 눈을 맞추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을 달래주었다.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저 녀석은 곧 일어날 겁니다. 

이렇듯 성심을 다해 간호를 하는 그대를 봐서라도 곧 훌훌 털고 자리보전 할 것이니 심려치 마오.”

“..흠.. 네..”

민망함에 얼른 헛기침 한번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인이었다.

뜻하지 않은 우현의 병으로 인해 모처럼 예전의 무현으로 돌아간 사내의 다정다감한 모습을 새롭게 느낀 인. 

모처럼만에 처음으로 둘의 사이엔 미움 없는 훈훈한 마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어..어랏. 두 분이 이 시간에 어인일로...”

자리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채 완전히 쉰 목소리로 말을 꺼내던 우현은 이내 곧 웃음 지으며 조심스레 말을 거두었다. 

문을 뚫고 들어올 듯 환한 빛 사이로 사이좋게 나란히 벽에 등을 기댄 채, 무현과 인이 잠들어 있었다. 

듬직한 무현의 팔에 온전히 안기어 널따란 가슴팍에 거의 고개를 파묻은 채 정신없이 잠에 취해버린 인과 

그런 인을 최대한 배려하며 불편하지 않게 기댈 곳을 마련해준 미련한 형님이 

바로 눈앞에서 곯아떨어진 채 가뿐한 몸을 일으키는 우현을 맞이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아팠는지라 간간이 끊어지는 기억속에서도 이마를 매만져주며 귓가에 안심시키는 말을 속삭여 주었던 인을 기억해내고선 

우현은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하면서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으려 후들거리는 다리를 조심스럽게 움직여 방문을 나섰다.

- 스르륵. 탁. -

“으음..?”

꿈결인 듯 조그맣게 들려오는 소리에 문득 몸을 움츠리며 정신을 차린 무현은 

자신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기분 좋은 체중에 잠시 미소 짓다가 재빨리 눈을 돌려 우현이 누웠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눈치는 빠른 녀석. 역시 하나밖에 없는 내 아우로구나. 우현이 애써 자리를 피해준 것을 용케 눈치 챈 무현이었다.

어젯밤 급격히 좋아진 우현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던 인의 모습을 떠올리고선, 

이내 자신에게 기대어 잠들어 있는 인을 깨우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움직여 무현은 인을 품에 안은 채 일어났다.

“어이쿠. 대가..ㅁ..”

“쉿.. 조용히 하거라.”

누군가를 안고 나오는 주인을 보고 놀라 달려오던 집사는 

이내 손사래를 치며 입단속을 시키며 물러나라 고갯짓을 하는 무현을 보고 알았다는 듯이 주변의 하인들을 물리며 길을 내주었다.

그대로 아무에게서도 방해받지 않고 무사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무현은 

이내 보드라운 침상에 인을 눕혀놓고는 작은 소동에도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아이 같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쓸어보다가 

‘에라 모르겠다.’하고 옆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설마 같이 간호까지 한 사이인데 옆에서 잠 좀 잤다고 쥐어 패지는 안겠지.

- 끼룩.. 끼루룩. -

“으음.. ”

조용하던 방안에 울리는 어스름한 소리. 아마도 저녁놀을 따라 이동하는 철새의 무리인 듯 싶었다. 

아직까지 잠에 취해 있던 인은 어렴풋이 들려오는 새 울음소리에 이불속으로 숨고만 싶은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아.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음.. 너무 피곤해서 그런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그저 따뜻한 지금 이 온기에 온 몸을 내맡기고만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머릿속을 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번쩍 눈을 떴다.

“우현님! 어..어라.”

방이.. 바뀌었다. 어제저녁엔 분명 우현의 방에 있었는데, 이..이곳은.

벌떡 몸을 일으키자 이내 후두둑 떨어지는 누군가의 팔을 느끼며 뻣뻣해진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자 

언제부터였는지 자신을 등 뒤에서 감싼 자세로 쌕쌕거리며 잠에 빠져버린 무현이 그곳에 있었다. 

영문을 모르고 인이 갈팡질팔하는 사이 여전히 일어날 생각이 없는 무현이 무의식중에 자꾸만 자신을 잡아끄는 바람에 

인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는 데에만 십 여분의 시간을 써야만 했다.

조심조심 방문을 열자 시원한 오뉴월의 바람이 얼굴을 감싸는 느낌에 인은 가슴이 탁 트여 저도 모르게 긴 숨을 들이키며 눈을 감았다 떴다. 

아무래도 오늘 종일 이렇게 잠들어 있었던 모양으로 슬슬 우현의 상태를 걱정하며 

인은 살짝 고개를 돌려 무현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 후원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우현 도련님!”

- 탁탁.탁...- 멀리서 들어도 ‘그’임을 알아볼 수 있는 다급한 발자국 소리에 우현은 정자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헉..헉.. 왜.. 벌써...”

“아이고. 진정하세요. 그냥 걸어오셔도 될 것을 뭐가 그리 급하시다구요.”

“하아.. 그러게요. 몸은 다 나았어요? 이젠 안 아파요?”

가장 걱정되는 우현의 병세를 물어보며 인은 며칠 전보다 조금 야위어진 그의 몸 여기저기를 어루만졌다. 

간지럽다며 히죽거리는 우현을 보며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모습에 감동한 듯 인은 아무 말 없이 우현을 끌어당겨 안았다.

“어랏.. 이거 참. 그렇게 걱정하셨어요? 이렇게 극진하게 대접받을 주 알았다면 좀 더 꾀병을 부려볼 것을 그랬나. 하핫..”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조그만 목소리로 가슴을 쓸어내리듯 애절하게 속삭이는 인을 향해 달콤한 웃음을 지으며 우현을 가까스로 인의 팔을 풀어내었다.

“아.. 마음 같아서는 으스러지게 껴안아드리고 싶은데, 행여라도 형님이 칼 들고 쫒아 오실까봐 더럭 겁부터 납니다. 이거.”

샐죽하니 눈을 흘기는 인을 보며 다시금 함박웃음 지은 우현은 자리를 내어 인을 옆에 앉게 하였다.

넘실거리는 노을이 화원의 잔잔한 수면을 다 집어삼켜 온 천지가 불에 붙은 듯 일렁이는 가운데 

나란히 앉은 두 사람 모두 별다른 말없이 그저 늦은 오후의 고요함을 즐기고 있었다.

“절 원망하지 않으십니까?”

대뜸 물어오는 우현의 말에 이내 그 뜻을 눈치 챈 인이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첫 눈에 보고 알았답니다. ‘아 형님이 말씀하셨던 그분이로구나.’ 형님 말씀과 하나도 틀리지 않았어요. 

저보고 도와 달라 하셨습니다. 항상 남부러울 것 없이 꿋꿋하셨던 형님께서 간곡히 청하시더군요. 소중하다 여기는 사람이 생겼다고. 

형님은 그런 쪽으로는 너무 서툴거든요. 잘 아시다시피. 아마 무작정 쳐들어 가셨을 거에요. 안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후훗.”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번지는 모양새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인은 대답 없이 그저 가만히 우현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너무 놀랐습니다. 

분명 형님 말씀대로라면 그 곳에 계시면 아니 될 분이었는데, 제가 도착한 바로 그 순간, 

허둥대며 배에 올라 출발을 재촉하시는 당신을 보니 내릴 수가 없더군요. 

바로 이분인데. 형님이 잠시 저에게 같이 있어주라며 신신당부하셨던 그 분이 눈앞에 있는데 말이지요. 

그대로 놓쳐버리면 두고두고 원망을 들을 것 같았습니다. 하하 사실, 형님께서 화를 내시며 저를 잡아다 집에 앉혀 놓으실까봐 더럭 겁도 났지요. ”

익살스러운 우현의 말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린 인을 보며 용기를 낸 듯 우현이 다시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호기심에 그렇게 다가가고, 그 다음엔 당신의 인자한 성품에 한발 더 다가가고 싶었답니다. 

형님이라고 한분 계시지만, 어렸을 적부터 그분은 저에겐 동경과 존경의 대상이었죠. 

어린 나이로 집안의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가야 했던 분이기에, 언제나 두려움 없이 꺾이지 않는 모습만을 모두에게 보여줘야 했으니까요. 

주변의 무거운 기대도, 짓누르는 압박감도 모두 홀로 견뎌 오신 분입니다. 

그런 형님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 당신은 상냥한 둘째 형님처럼 여겨졌답니다. 

어찌하여 큰 형님이 당신을 소중하다 하셨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어요.”

“우현님.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분은.. 무현님은..”

“분하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억울하실 겁니다. 영문도 모르고 덥석 덜미를 잡혀 같은 사내에게 욕을 보였다고 생각하실 테니까요.”

역시, 우현도 모든 것을 알고 있구나. 

대강 그러려니 해서 체념하고 있었건만 막상 그의 입을 통해 직접 이런 말을 듣게 되자 새삼 부끄러워진 인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대단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언제나 올바르고 이성적으로만 행동하시던 형님을 그렇게까지 흔들어놓으셨잖아요. 

처음으로 형님이 마음 놓고 쉬고 싶어 하는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신 분이잖아요. 

형님께서는 절대 이런 말 못하실 테니까 대신 모자란 동생이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청합니다. 

제발 떠나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형님은 진정으로 당신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빗나간 애정이라 너무하다 내치지 마시고 그저 표현이 서툰 사내로구나 하고 이해해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어느새 자리에서 내려와 털썩 무릎을 꿇은 우현의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라 인도 따라 마루로 내려앉았다. 

“일어나세요. 우현님. 이게 대체...!!”

“부탁드려요 인. 형님을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살짝 귀뜸이라도 해드렸어야 하는 것을.. 

혹여나 일이 잘못 될까 두려워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속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제가 대신 사과드릴 테니 제발 우리 형님을 눈감아 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속수무책으로 버티고 앉은 우현을 달래다 지쳐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으며 인은 떨리는 두 손을 맞잡았다. 

우현 앞에서는 ‘그분을 미워한다. 그러니 도망가고 싶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였다.

뭐라 말해야 할까. 그분을 용서한다고... 버리고 떠나지 않겠다고....?그런 말,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무거운 주춧돌이 그저 한없이 가슴을 내리누르는 아픔을 끌어안고 인은 요즘 들어 자주 그러듯 답답한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말할 수 없이 머리가 빙빙 돌고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며 그저 지옥 같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모..모르겠습니다.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분의 생각도, 행동도...제가 뭘 어찌 해아 할지도 이젠 모르겠어요. 우욱..”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애써 참으며 양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은 채 그렇게 어깨를 움츠려 떨며 오열하는 인을 바라보며 

우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걸 느꼈다. 

“떠나지만 말아주세요. 형님께서 다시 한번 함부로 대하신다면 그땐 제가 나서서라도 막아드릴 테니.. 

무서워 마시고 제발 머물러 주세요. 우선, 그것만이라도 들어주세요. 인”

끝내 오열하며 우현의 품으로 무너져 내리는 인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달래던 우현은 문득 고개를 들어 언제부터였는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검은 인영을 향해 똑바로 시선을 들어 쳐다보았다. 

조심스럽게 다가오려 한 발을 떼는 무현을 향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고개만 가로젓는 우현의 거부의 몸짓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이 무현은 발길을 돌렸다. 

그럼에도 자꾸만 인의 그림자가 아른거려 망설이며 뒤를 돌아보는 무현이었다.

어둑어둑 날이 저무는 후원의 밤은 그렇게 찾아오고 있었다.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형님께서 어찌..!!”

얇은 문을 큰 호통소리로 뚫어버릴 듯 격양된 목소리로 우현이 눈앞의 근심에 쌓인 한 남자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고요히 명상하듯 두 눈을 내리깐 채, 묵묵히 듣기만 하던 무현은 아우의 간섭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에 따끔히 일침을 놓았다.

“그만! 그 이상은 넘어오지 말거라.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야.”

“알아서 하시겠다고요? 그럼 또 다짜고짜 쳐들어가 그렇게 몸과 마음을 헤집어 놓으시겠단 말씀이시군요. 

저 가여운 사람을 평생... 저리도 숨 막혀 죽을 때까지 꽁꽁 묶어놓고 그리 사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우현아.”

- 탁 - 

짐짓 성이 난 듯, 무현은 바로 앞의 책상을 거칠게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러나 굳게 맘을 먹고 온 것인지 우현은 꿈쩍도 하질 않는다.

“우현아. 안다. 이 못난 형이 잘못하고 있음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안단 말이다. 그러나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을... 어쩌란 말이냐. 

도무지 뭘 어찌해야 할지, 이번만큼 사람 대하기가 어렵고 내 원하는 것 얻기가 이토록 힘들기는 처음이다.”

회한의 한숨을 쏟으며 고백하듯 힘없이 풀어낸 무현의 속마음을 듣던 우현의 낮도 좋을 리 없었다. 그러나 더는 미룰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주저하며 멈칫거리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어 조금 전 인이 부탁했던 날벼락 같은 소리를 전하였다.

“본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기거할 만한 곳을 마련해주세요. 하인도 두엇 보내주시고요. 

머무르실 분은 한분이니 나머지는 적당히 알아서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인이... 이곳을 떠나고 싶어해요. ”

“뭐라고?!!”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려는 무현을 간신히 뜯어말려 다시 자리에 앉혀놓고 우현은 조근조근 형님을 달래기 시작했다.

“들어보세요. 지금 그 얼굴로 달려가신다면 인은 ‘고양이 앞에 쥐’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잊으셨습니까. 

종내 궁지에 몰린 쥐가 어찌하는지. 인이 견디지 못하고 형님을 떠나 도망쳤던 것을 잊지 마시란 말씀입니다. 

하늘아래 모자랄 것 없는 형님이 아니십니까. 어찌 그리도 미련을 떠시는 겝니까? 

조이기도 하셨으면 가끔은 풀어줘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그분을 헤아려 주세요. 

형님이 괴롭다 생각하시는 것만큼이나 지금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을 그 사람을요. 누군가를 은애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형님. ”

입을 꾹 다물고 치밀어 오르는 분을 이기지 못해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달아오르는 무현을 

잠시 원망석인 눈으로 바라보던 우현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께서 마음에 두고 계셨던 분이 사내라는 그 사실로 형님을 비난하는 마음을 가져본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렵게 얻으신 분이지 않습니까. 온전히 제 사람으로 만드실 마음이 진심이시라면 지금은 보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번에는 정말로 형님을 미워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용히 읍하며 방문을 닫고 사라지는 우현의 뒷모습을 쫒으며 무현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들었다. 

여러모로 여인을 다루는 일에는 자신보다 능숙했던 아우였다. 

비록 자신이 처한 상황이 남녀 간의 정분을 논하는 일은 아니라하나 조목조목 따져가며 답답한 듯이 우현이 지적했던 것들은 꽤나 설득력이 있었다.

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하얗게 밤을 지새우는 무현의 근심석인 그림자가 춤추듯 너울거리는 가운데,

당장이라도 떠날 채비를 꾸리며 모처럼 신이 난 듯 부산하게 짐을 꾸리던 인은 우현에게 부탁했던 일이 잘 마무리되길 

빌고 또 빌며 유독 자신에게 집착을 보이는 무현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 있었다. 

문밖에서 그런 모습을 조심스럽게 훔쳐보던 우현은 희미한 미소를 남기고 조용히 등을 돌렸다.

동상이몽이라 하였던가. 어찌 같은 지붕아래 두 사람이 저리도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단 말이더냐. 

앞날이 캄캄하다 못해 거의 가망이 없어 뵈는 불쌍한 형님의 가슴앓이에 

오랜만에 자신이 조언자가 된 것 같아 불안하면서도 내심 고소해 하는 우현이었다.

“아이구, 도련님. 꼭 이리 가셔야겠습니까?”

“그동안 폐가 많았네. 잘 계시게나.”

“형님은 안 찾아뵙고 가시는 건가요?”

연신 섭섭한 듯 잡고 싶어하는 집사를 겨우 달래 떼어놓고 잠시 동행하겠다는 우현과 함께 문을 나서려는데 우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뭐 나중에요. 다음에 뵈면요.”

어색하게 웃으며 인은 말끝을 흐렸다. 

비록 자신에게 몹쓸 짓을 했다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제껏 무현의 집에 얹혀살다시피 하면서 신세진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덕분에 서역의 진귀한 고서와 문물에 흠뻑 빠져 탐독하면서 맘껏 지식에 취해 살 수 있었고, 

매 끼니마다 대접받은 음식들은 궁중에서나 먹어볼법한 맛깔스런 것들이었다.

그러나 혹여 떠나겠다고 인사말이나 건네려다 되려 덜미가 잡혀 이대로 갇혀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에 

겁 많은 서생은 인의도 모르는 소인배처럼 행동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나마 우현을 통해서라도 언젠가는 감사를 전해야겠다 라고 맘먹고 어서 가자며 짐꾼을 재촉하며 서둘러 길을 나서는 인이었다.

그런 그의 등 뒤를 바라보던 우현은 이내 마당 어딘가에서 몰래 자신들을 곁눈으로 배웅하고 있을 형님을 떠올리며 

아무도 모르게 입가에 작은 웃음을 지었다. 필경 자신이 따라가는 것조차 마음에 안 들어하실 분이었다. 

보지 않아도 뒤통수를 찔러오는 시선에 우현은 괜시리 머리를 긁적이며 모른 척 인의 뒤를 따랐다. 

형님. 아직 고생을 덜 하셨습니다. 기대하세요.

“음. 집이 너무 커서 큰일이네요. 짐도 얼마 없고 무엇보다 제가 꾸려갈 수나 있을 런지.”

“걱정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손으로 이마를 긁적이며 고민에 빠진 인을 보며 빙그레 웃은 우현은 냉큼 달려와 

척 하니 인의 어깨에 제 팔을 올려놓고선 같이 고민하는 척 익살스런 연기를 펼쳤다.

“풋. 진짜 우현님은 이럴 때 보면 양반 댁 자제분 같지 않다니까요.”

“격식을 차리려니 안하던 짓이라 자꾸만 입이며 손에 쥐가 나서 도저히 안 되겠어요. 종종 놀러올 테니 앞으로 식객으로 잘 부탁드립니다요.”

내시목소리를 흉내 내며 한쪽 눈을 찡긋 하고 귀여운 표정을 짓는 우현을 바라보는 인의 얼굴에 모처럼 함박웃음이 피었다. 

하루 종일 수선스럽게 이리저리 움직였던 것이 피곤했는지 일찍 저녁을 들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인을 조심스럽게 자리에 눕히고 연시 걱정이 되어 돌아가지도 못하고 엉덩이만 들썩이길 한참.

문득 방 문 밖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빼꼼히 문을 열던 우현은 

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가늘게 눈웃음치며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서있는 무현을 맞았다.

“흠.. 어찌 이 시각까지 여기 있는 게냐”

맘에 들지 않는 다는 듯 나무라는 투로 꼬치꼬치 캐묻는 무현을 짐짓 모른 체하며 우현은 마냥 즐거운 듯 연신 손 사레를 치며 웃기만 한다.

“쿡쿡.. 역시 형님이십니다. 그새를 못 참으시고 한걸음에 달려오신 건 또 뭐랍니까? 

아무래도 큰맘먹고 아우가 전해드린 충고는 멀리 귀향 보내신 듯합니다.”

차마 큰 소리로 웃지는 못하고 행여 웃음소리가 새나갈 새라 손으로 입을 꾹 막은 우현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무현은 바로 눈을 돌려 푹 한숨 단잠에 빠진 인을 담았다.

하루 못 봤을 뿐인데 전보다 곱고 화사해진 것이 뽀얀 볼에 드리워진 긴 속눈썹 그림자마저 미치도록 예뻐 보이는 것에 무현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겨우 자신의 집에서 나왔을 뿐인데 이리도 기뻐할 줄이야. 

자꾸만 입 안이 쓴지 마른침만 삼키며 무현은 시선은 고정한 채 입술만 움직여 우현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네 말은 못 믿겠구나. 네 눈에는 지금 이게 효과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느냐? 

이러다가 아예 나는 터럭만치도 못한 존재가 되 버리는 것 아니겠느냐.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하였는데, 나는 도통 모르겠구나. 모르겠어.”

“형님. 언제는 마음이라도 얻으셨던 적이 있으셨나요. 조급해 마시고 기다리세요. 그게 약입니다.”

“길어야 삼주일이다. 그 안에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시엔 납치를 해서라도 대려 갈 것이야!”

뭐라 항의하려는 얄미운 입을 막고선 그만 가보라며 억지로 우현을 밀어낸 무현은 냉큼 방안으로 들어와 이부라지 옆에 자리하였다. 

때마침 인이 잠꼬대를 하는 지 입맛을 다시며 입술을 훔치며 촉촉한 혀가 낼름 사라지는 걸 보며 달려들고 싶은 것을, 

참으로 개탄스러운 마음으로 두 주먹 불끈 쥐고 겨우 참아낸 무현은 머뭇거리며 손을 뻗어 통통한 볼 살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무현은 시간이 멎어버린 듯 다급히 숨을 들이키며 굳어버리고 말았다.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간지러워서 그러는지 연신 볼을 부비는 손길을 따라 움직이던 작은 고갯짓이 

어느 순간 멈춘다 싶더니 후우~‘ 하는 한숨소리와 함께 절대 떠질 것 같지 않았던 까맣고 동그란 눈이 파르르 떨리며 살짝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들켰다!!!!’

급하게 숨을 들이키며 하루 동안의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갈 까봐 옷장 뒤로 숨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무현은 

다음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다는 말을 절절히 실감할 수 있었다.

“우웅...”

어린 아기가 옹알이 하듯 웅얼웅얼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초점 없는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더니 

갑자기 온 방안이 환해지도록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나른한 미소를 짓고선 

거짓말처럼 눈을 감고 다시 깊은 잠을 청하는 인의 모습은... 정녕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가슴이 벅차올라 그저 입만 뻥긋 벌린 채로 헤벌죽하게 웃으며 앉아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아쉬운 발걸음을 떼어 방을 나선 것은 새벽 세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비록 제정신은 아닐지언정, 불과 하루 만에 정말로 우현이 말했던 것처럼 효과가 나타나는 것만 같아 

무현은 흥에 겨워 콧노래를 부르며 발걸음도 가볍게 자택으로 돌아갔다.

인은 배가 고팠다. 

힐끔 살펴보니 아직 진중한 새벽인지라 쌀쌀한 날씨 탓에 밖으로 나가기도 귀찮은데 

자꾸만 조금 전 꿈속에서 보았던 뜨끈한 찐빵이 떠올라 인은 허무하게 입맛만 다실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보드랍고 푹신푹신 하던지 연신 동그란 호빵을 양 손에 꼭 쥐고 부비적 대며 좋아라 했던 기억에 괜시리 부끄러워진 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나이에 호빵하나 들고 그리 좋아하는 꿈을 꾸다니. 

나중에는 하도 조물락 거렸더니 빵이 길게 늘어나고 윗부분에 고물이 까맣게 묻어서 마치 사람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누구였더라. 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알듯 말듯 가물가물한 기억에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을 떠올리려 애쓰다가 결국 포기한 인은 

날이 밝자마자 주먹만큼 찐빵을 사먹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소식이 없지 않느냐!! 소식이. 이리 답답한데도 찾아가지 말라 할 것이냐?!!”

방문을 열자마자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우현은 흠칫 놀라 귀를 틀어막으며 살그머니 들어섰다. 

인이 거처를 옮긴지 어언 보름을 넘어갈 무렵. 기다리다 지친 무현이 드디어 폭발하여 아침 댓바람부터 우현을 들볶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생각보다 형님을 더 많이 무서워하는 듯싶은데요. 삼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제가 얘기를 꺼내려고만 하면 벌써 얼굴이 사색이 되는데, 아이구. 어제는 같이 식사나 하자고 했더니 죽어도 싫다며 고개만 저....”

- 콰당 -

괜시리 헛바람만 들이켜며 우현이 면목 없는 듯 기침을 하자 무현은 화를 참지 못하고 뒤집어버린 책상을 한쪽으로 밀쳐놓고 씩씩거리기 시작하였다.

우현 역시 그런 형님을 말릴 수도 없어 그저 속으로만 인을 내심 원망하며 묵묵히 형님의 반응만 지켜볼 뿐이었다. 

집을 옮기고부터 일주일 동안은 일절 형님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주로 접어들면서 한 두 마디 지나가는 말로 형님의 근황을 전하며 슬슬 인을 떠보기 시작하였는데 

생각 외로 끄덕이며 귀 귀울여 듣는 담담한 그의 태도에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던 우현이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형님께서 주신 기한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여느 때와는  달리 무현의 일과를 묻는 인의 의외의 질문에 얼씨구 좋아라 했더니만 한다는 말이 

‘그럼 이것을 전해주시겠어요? 보내주신 책은 잘 보았으나 아직은 제가 직접 전해드릴 수 없을 것 같아서...’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인이 자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그랬지 그동안 매일 새벽마다 형님이 부지런히 드나들면서 잠자는 얼굴을 뵈었는데도 아직이라니요.’ 

답답한 마음에 귀뜸으로 전해주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느라 진땀을 빼며 우현은 불같이 화를 낼 무현을 떠올리며 앞이 캄캄해졌다. 

그길로 인을 붙잡고 늘어져 그럼 셋이서 같이 만나면 되지 않겠느냐며 식사라도 하자 청하였건만, 

‘앞으로는 그분과 함께 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중간에서 입장이 난처하신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나 더 이상 저와 그분을 엮으려 애쓰지 마세요.’ 

되려 한소리 듣고 아무런 소득 없이 발길을 돌렸었지. 

“안되겠다. 내가 직접 나서야 겠어.”

“형님!”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온 우현은 다급히 만류를 해보지만 이미 무현은 저만치 쿵쿵거리며 걸어가는 중. 그저 망연자실할 따름이었다.

“이보시오. 집사 이리 가까이 와보시오. 지금 당장 인이 머무는 처소를 다녀오셔야겠소. 

가서 혹 형님이 들렀는지 살펴보고 오시게나. 어서 서두르시게.”

영문 모르고 어리둥절한 집사를 채근하여 딸려 보낸 후 방안을 어지러이 서성이던 우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켜준다 하였는데, 이리 방에만 있어서야 되겠느냐. 속으로 연신 갈팡질팡하던 우현은 이내 마음을 정하고선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헉..헉 도련님! 막내 도련님~!!”

“그래 어찌되었느냐? 휴우..후.”

다급히 길을 가던 중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집사에게 대강 들어보니 무현은 곧장 궁으로 들어갔다 하였다. 궁. 궁이라?

이대로 인에게 들러 넌지시 얘기라도 해줘야 하나 어쩌나 고민하다가 돌아서며 혹시 몰라 집사를 시켜 형님 주위에 사람을 하나 붙이도록 명하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형님께서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세자에게 공손히 절하고 조심스럽게 물러난 무현은 일찌감치 집에 돌아와 소란스럽게 달라붙는 우현을 떼어놓고선 

홀로 술을 청하며 거듭 속으로 다짐하였다. 

“큰일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

“오늘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인을 이리 데리고 오도록 하여라.”

“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왜요.”

아침 댓바람부터 쳐들어와 사정없이 온 몸을 흔들어대며 정신 못 차리게 해놓고선 대뜸 한다는 소리가... 밤늦게 인을 데려오라니.

“아직은 싫다 하였단 말입니다. 대체 무슨 수로 대려온답니까?!!”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흔들며 다시금 힘없이 부드러운 요위로 몸을 뉘이는 순간, 

무뚝뚝하게 들려온 형님의 경고석인 목소리에 우현은 두 눈이 퍼뜩 떠짐을 느끼며 부리나케 몸을 일으켰으나... 

이미 휙 몸을 돌려 저만치 걸어가고 계신 형님인지라... 그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해야 할 거다. 그리 못한다면 내일부터는 장안의 싱싱하고 아리따운 꽃 대신 후원의 할미꽃을 돌보게 될 것이야! ”

무현은 바빴다. 

우현을 재촉해놓고서는 집사를 불러 오전 내내 사랑채 여기저기를 돌며 쑥덕거리더니 

정오가 돼서야 고개를 꾸벅 숙이며 급히 뭔가를 지시하며 떠나는 집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마지막 수를 둔 것이다. 이후에는 우현의 청이고 뭐고 내 맘대로 밀어붙일 것이다.

-찌르릉.. 찌르르르 -

근근이 방안을 비추는 작은 불빛을 길잡이 삼아 조심조심 내딛는 발걸음에는 걱정이 실려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앞선 하인의 뒤를 열심히 따르며 인은 이리저리 머리를 돌려가며 생각해봤지만 영 답답하기만 하였다. 

‘열이 다시 오른다니. 분명 다 나았을 것인데... 어찌된 일일꼬?’

그렇다. 우현이 오전 내내 방안을 굴러다니며 살기위해 필사적으로 짜내고 짜낸 임시방편은 바로 [병이 도졌다] 였다.

무슨 지시를 받았는지 우현이 도망가지 못하게 방문을 지키며 어서 인을 데려올 궁리나 짜내라며 재촉하는 집사의 성화에 잠도 못자고 시달렸건만, 

무심한 집사는 냉큼 우현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길로 쏜살같이 인부를 시켜 

무현이 지시한 시각에 그 말이 인에게 전해지도록 수를 쓰느라 자신은 본체만체 하더라 이 말이다. 

우현으로서는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한편. 

인 역시 밤늦게 불쑥 찾아온 낮선 이의 방문에 깜짝 놀랐지만, 

이내 하인의 얼굴이 낮이 익고 무엇보다 우현이 아프다는 말에 허둥지둥 옷을 차려입기 무섭게 그를 따라나선 것이다.

“우현님의 방은 이쪽이 아닙니까?”

“예. 나으리. 허나 오늘은 특별히 의원이 지시하여 안채로 옮기도록 하셨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유가 뭐냐고 연신 물었지만 잘 모르겠다며 묵묵히 인을 이끄는 그의 뒤를 따라 

어느덧 익숙한 후원을 지나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점점 눈앞에 웅장한 건물이 다가올수록 인은 불안이 현실로 다가옴을 느꼈다. 혹 저번보다 심각한 것은 아닌지. 

언제나 무현이 머물던 곳. 그 방에 훤하게 불이 켜있었던 것이다. 조금 이상한 점이라면...

안절부절 못하고 댓돌 아래를 서성이는 집사와 마당에 죽 늘어서 시퍼런 횃불을 밝히고 시립해있는 무사들이랄까. 

방안의 상황이 뭔가 급한 것이라 지레짐작한 인은 그때부터 거의 종종걸음으로 달리다시피하여 넓은 마당으로 들어섰다.

- 탕 탕!! -

“정녕 고하는 말에 거짓이 없으렸다?!!”

막 집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청으로 오르려던 인은 순간적으로 방안에서 들려온 낮선 이의 엄한 호통소리에 저도 모르게 그대로 멈춰버렸다.

“어찌 아무 말도 없는 것이냐. 네놈이 지금 나를 능멸하려는 것이더냐!!”

벼락같은 노호성에 일순 잠잠해진 방안. 또 다른 누군가의 낮선 목소리가 조근조근 무현을 달래며 대답을 채근하였다.

“집사.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도 모르게 소곤거리며 겨우 입을 떼자 집사가 말하기도 황공하다는 듯 조용히 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 세자저하께서 들어계신다고요?”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인은 부들거리며 떨리는 손목을 부여잡았다.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아 엉망으로 뒤죽박죽 엉켜버려 지금 이 상황이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그리도 걱정하였던 우현의 병은 잠시 기억에서 지워져버릴 정도였다.

“네 이놈!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내 결단코 이 자리에서 죄 많은 네놈의 목을 쳐 네놈이 져버린 양반의 기강을 다시 세울 것이야! 바른대로 하지 못할까.”

“마마. 소인 그저 하릴없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감히 청컨대 어서 빨리 이놈의 목을 베어 만천하에 모범을 보이소서.”

떨리는 무현의 목소리에는 결코 겁먹은 나약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단지 깊은 후회만이 담겨있을 뿐이었다. 

대체 그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야심한 시각에 그를 벌하려 하시는 것일까. 목을 베라니!! 당치도 않을 말이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인지 알아보...”

집사를 향해 다급하게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술상이 뒤집어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듣기만 해도 오싹한 ‘챙’하는 이질적인 금속성이 들려와 인은 두려움에 온 몸이 빳빳이 굳어버렸다.

“전하 아니 되십니다. 어찌 직접 처결하시어 피를 보려하시는 것입니까. 제가 당장 끌어내겠습니다!!”

어느 순간 불쑥 끼어든 굵고 낮선 목소리가 다급히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갑자기 눈앞에 밝은 빛이 한가득 쏟아져 들어온다 싶더니 이내 한바탕 소란과 함께 

같이 방안에 있던 건장한 무인이 서슴없이 무현을 댓돌 아래로 끌어내 무릎을 꿇렸다.

집사의 재빠른 손에 이끌려 급히 주춧돌 옆으로 몸을 피한 인은 너울거리는 불빛을 뒤로하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순간, 

어두워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위엄 있는 자태와 값비싸 보이는 옷을 걸친 모습을 보고선 

직감적으로 저분이 세자저하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동안 빼돌린 서책과 진귀한 물품들은 다 어찌하였느냐. 

네놈이 훔쳐낸 그것들이 궁중에서 얼마나 귀하게 여겨온 것들인지 모르지는 않겠지. 그 행방을 어서 말하지 못할까?”

서책?!!! 순간적으로 들려온 단어에 화들짝 고개를 들던 인의 두 눈에 괴로운 듯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모든 것을 체념한고 조용히 처분을 기다리는 무현의 모습이 들어왔다.

[정녕 그 책을 구하셨단 말씀이십니까?]

[흠... 서역에서도 꽤 어렵다 들었소. 뭐 어찌어찌하여 구하긴 했소만...]

귓가에 예전에 나눴던 무현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인은 설마 설마 하는 마음에 몸을 떨었다. 

아닐 거라고 필사적으로 속으로 외치고 있었지만, 모든 정황을 살펴 보건데 

전하께서 찾으시는 것들은 바로 무현이 자신에게 건네준 그 모든 고서와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물건들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그것들이 설마 궁에서 훔쳐 낸 것이란 말인가!

어디선가 어렵게 구해온 것들이라며 건네면서 항상 내 눈치를 살피던 사내였지만 가끔씩 설레임에 들뜬 내 모습에 무척 기뻐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언제나 자신을 울리는 사람이었지만, 어쩔 때는 인이 좋아할만한 책을 방 안에 산더미처럼 들려놓고선 

자신이 어리둥절 하는 모습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곤 했던 사람이었다. 

그 땐 사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에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무현이 그런 엄청난 죄를 저지르면서 무엇 때문에 그 책들을 훔친 것이란 말인가. 

그저 자신을 웃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저지른 짓을 만회하기 위해서?

- 휘익.. 퍽! -

긴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또다시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에 인은 온 몸이 관통당한 것 같은 충격에 사로잡힌 채 

소용돌이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세자가 내리꽂은 칼이 정확히 무현의 팔을 스치고 꿇어앉은 자리 옆을 아슬아슬하게 비켜 깊이 박혔던 것이다.

투툭.. 하고 옷깃이 터지면서 이내 주르륵 피가 맺혀 팔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에 인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긴 채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이제야... 내 정녕 이제야 알겠구나. 저 사내가 무언지. 대체 무어라고 저 사내가...미련한 인! 바보 같은 인!!

“칼을 들어라.”

고요히 울려 퍼지는 세자의 엄숙한 목소리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내 그토록 너는 신임했거늘, 감히 세자의 총애를 등에 업고 무슨 짓을 벌여도 용서가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내 오늘 경종을 울릴 것이야. 아무 이유 없이 나라의 보물을 훔쳐낸 죄를 안다면 어서 그 칼을 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거라!”

청천벼락 같은 말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무현이 조용히 일어나 세자를 향해 공손히 절을 올렸다. 

인은 눈앞이 캄캄해져 옴을 느끼며 눈에 띄지 않는 한쪽 구석에서 그저 멍하니 무현이 주저 없이 칼을 뽑아드는 것을 보았다. 

분명 죽으려 하고 있었다. 

무현은 거침없이 칼을 휙 돌려 그 날카로운 끝을 정확히 왼쪽 심장위에 겨누며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줘 깊숙이 찌르려 하였다.

“안돼!!!”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목소리였다. 

만류하는 집사의 팔을 정신없이 뿌리치며 인은 절대 떨어질 것 같지 않았던 두 다리가 절로 내달아지며 

단걸음에 달려 나가 덥석 칼날을 잡고 무현에게서 칼을 빼앗아 들었다.

짐짓 놀란 듯 세자의 시선이 내리꽂히더니 한순간 고개 짓에 곁에 시립한 무인이 칼을 뽑아 들며 성큼 한발 나섰다.

“감히 무슨 짓이냐! 이름을 밝혀라. 전하의 큰 뜻을 함부로 방해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

“아니 됩니다. 무현님. 어찌 없는 죄를 스스로 덮어씌워 자결하려 하십니까. 어서 말씀드리세요. 

전하께 올바로 고해주세요. 저 때문이지 않습니까? 이 모든 일이 전부 저 때문에...흐윽... 흑”

원망스럽게도 철철 흐르는 눈물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인은 속으로 ‘바보 같은..’ 이라고 외치며 

차라리 두 눈을 감은 채 무작정 무현의 팔에 매달려 애원하기 시작하였다. 

혹시라도 자신보다 힘이 센 무현이 칼을 빼앗아 금방이라도 자결할까봐 절대 놓지 않겠다는 일념 하에 

정신없이 잡아챈 탓에 왼손이 따끔거리며 쓰려왔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말씀하세요. 무현님. 전하께 사실을 말하세요. 어서요!! 무현님.”

“그대와는 상관없는 일인 것을. 그만 나를 욕되게 하지 말고 돌아가시오. ”

싸늘하게 내뱉으며 칼을 뺏으려 손을 뻗어오는 그를 피해 아까보다 더욱 꽉 칼을 움켜쥔 채 인은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하여 

자신을 가로막고 서있는 거대한 무인의 발아래 엎드렸다.

“아..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인은 저 멀리 [안서현]에서 올라온 서생 한 인이라 하옵니다.

소인이.. 감..히 저하의 명을 어기고 방해를 놓았으니 이는 죽어 마땅한 일이오나 한...가지 억울한 저분의... 

누명을 벗기고자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부디.. 부디 조금만 시간을 주시옵소서.“

너무나 떨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고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인은 조금 전 망설임 없이 칼을 들어 올리던 무현의 모습에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려 연신 고개를 저으며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이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래 할 말이라는 것이 무엇이더냐. 단지 저놈을 감싸주기 위함이라면 둘 다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꼿꼿한 자세로 서릿발같이 호통 치는 세자를 감히 쳐다볼 생각도 못하고 인은 그저 발끝만 쳐다보며 굵은 눈물을 떨구었다.

“제가... 탐을 내었습니다. 출처가 불분명한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제가 부탁하였습니다. 

제가 시킨... 일이옵니다. 전하.”

하나하나 그동안 무현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인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세자에게 아뢰었다. 

갑자기 뛰어들어 울부짖으며 무현을 감싸는 인을 바라보며 무현은 가슴속에 한 가닥 희망의 불씨를 보았지만 

이내 처절하게 울며 괴로워하는 정인의 모습을 보자, 이 모든 사건을 자신이 꾸민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켠이 찡해 옴을 느꼈다.

“비록 보잘 것 없사오나... 제 목숨을 내놓는 것으로... 부디 용서를.”

말을 마치자마자 벼락처럼 칼을 들어 내려치려는 인의 몸짓에 움찔한 무현이 재빠르게 다가와 

다급히 부상을 입지 않은 한 팔로 인을 세게 밀쳐내었다. 

덕분에 중심이 흔들려 그대로 칼을 부여잡고 쓰러져버린 인을 향해 반사적으로 손을 뻗던 무현은 

이내 멈칫하며 그를 외면한 채 마음을 독하게 먹자 다짐하고 세자를 향해 흔들림 없는 시선을 들고 마지막 수를 던졌다. 

“한낮 유약한 서생의 말은 귀담아 듣지 마시옵소서. 제가 고해올린 대로 소인이 그 책을 빼돌려 부당한 이득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제 개인적인 일에 감히 나랏물건에 손을 대고 전하를 희롱하였습니다. 

게다가 그 죄에 더하여...저는...감히 저 어린 서생을 욕보였으며...”

“무현!! 제발 그만하세요. 더 이상은...”

자신에게 저지른 일까지 고해 올리며 절대 빠져나갈 수 없게끔 말로써 죄를 더하는 짓을 저지르고 있는 무현을 말리며 

경악한 인이 소리 질렀다. 

그런 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절절한 눈빛으로 훓어 내린 무현은 그에게만 보이도록 환하지만, 위태로이 꺼져가는 미소를 띄웠다.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면서 한마디 한마디가 소중한 추억인 듯 떠올리며 그렇게 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은애했던 사람입니다. 

미련하게도, 정 주기가 무서워 오히려 저를 미워하도록 만들어놓고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귀한 책들로 그 마음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저 저를 보고 한번 웃어주길... 그 고운 미소 한번 보길 그토록 갈망하였습니다. 비록 씻을 수 없는 죄의 길로 이어졌지만, 부디 전하. 

한때 온전히 전하를 향해 충의를 다졌던 신하된 자로서 마지막 부탁말씀 올리나이다. 이 사람만은... 그저 고이 가게 해주십시오.”

진심을 담아 떨리는 목소리를 가누며 간절하게 빌며 애원하는 무현의 말에 

인은 그 언젠가 우현이 후원의 뜰에서 무릎을 꿇은 채 형님에 대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꽉 그러물었다.

나를 사랑한다 하였었지. 내가.. 그의 보금자리라고... 그래서 떠나보낼 수 없는 것이라 말하였다. 

왜.. 대체 왜 나에게 그런 마음을 품은 거냐고 인은 매번 무현을 볼 때마다 묻고 싶었다. 

겁이 나서... 그의 입을 통해 듣게 될 대답이 너무 무서워서 망설이다 포기한 적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허나 지금처럼 오로지 두 눈 가득 인을 담고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끝까지 당당하게 자신을 사모하고 있다 

라고 서슴없이 밝히는 이 남자에게... 과연 내가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있을까. 아니. 내가 진정 원하는 답은 무언데? 무엇인데...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쉼 없는 갈증처럼 무현의 속내를 알 수 없어 인은 그저 애가 타기만 했다.

“그대에게는... 언제부터인가 항상 용서 해 달라는 말만 하더군 나란 사람은.  그런 내 자신이 정말이지 끔찍이도 싫었다오. 

이제는 그러지 말자 혼자 다짐했건만, 오늘 또 이렇게 못난 꼴을 보이게 되었구려. 이제 되었소. 

내가 이제껏 알던 당신은 역시 지금 이 모습보다는 고고한 서생 ‘인’의 모습이 어울려. 

날 위해 변명을 해주어 고맙소. 딱 그만큼이 당신이 내게 다가올 수 있는 거리란 것을...잘 알고 있소.

모든 것을 체념 한 것일까. 눈부시게 웃음 지으며 무현은 가만히 손을 뻗어 무사의 칼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온 몸의 피가 솟구칠 것 같은 일각을 다투는 긴장된 그 순간,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며 서릿발 같은 인의 원망석인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당신이란 사람... 진정으로 미련하십니다. 그리 자신없어 하시면서 왜 절 이지경까지 끌고오신 건가요. 

항상 용서를 구하셨다고요? 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니 기억해 낼 수 조차 없었지요. 

당신이 갚아주셨지 않습니까. 저에게... 저질렀던 일들 모두... 

이곳에서 베풀어주신 그 마음으로 다 갚으신 것을 혼자만 모르고 계셨답니까? 그저 그렇게 지워지고 새로운 기억들로 채워질 뿐. 

어느샌가 눈 녹듯 당신에 대한 나쁜 기억들이 모두 지워지고 새로이 무현님의 다정함만이 가슴속에 남았습니다. 

아직도 제가 당신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여기신답니까? 아직도 제가 못나고 여린 한갓 시골서생쯤으로 보이는지요!  ”

타는 듯 이글거리는 눈빛을 오로지 자신에게 고정한 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무현이 오랜만에 참으로 든든하다 여기며, 

떨려오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그저 부들거리는 두려움과 긴장으로 온 몸을 떨며 중간중간 끊어질 듯 위태로운 목소리를 쥐어짠 인은 

철저하게 잔인했던 그의 마지막 잔상을 한숨 깊이 들이마셔 꿀꺽 가슴 구석진 곳으로 쑤셔놓고 마지막으로 힘겨운 고백을 털어놓았다.

“지난 며칠 동안 당신이 곁을 지켜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젠 매일 밤 당신이 몰래 오셔서 제 잠자리를 지켜주시는,,, 

일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행여 깰세라 조심조심 이마를 만져주시던 손길은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저 같은 하찮은 사람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시고... 힘들어... 해서도 아니 되시며...흐흑...흑...”

언제부터였는지. 

설움이 복받친 듯 띄엄띄엄 끊어지는 말속에 울먹임이 섞이는가 싶더니 차마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하는 인.

숙연한 가운데 둘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헤치고 무현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기 시작하였다.

“인.. 제발. 우선 그 손 좀 놓고 말해요. 피가.. 피가 멈추지 않고 있소. 인!! 내말 들리오?”

“으윽.. 무현님. 그냥 제가 죽게 놔두세요. 아니...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 

당신을 용서한다 하였지만,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제가 진저리치도록... 싫고.. 또 싫어서...너무나도...괴롭습니다. 흑흑...”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인은 칼을 움켜쥔 채 검붉은 피가 하릴없이 흘러내려 얇은 바지를 적시는 것도 모르고 

그저 엉엉 울기만 하였다. 

“하.. 정말 그대는... 정말이지. 대체 당신을 어찌하면 좋겠소.”

감정이 북받쳐 올라 떨리는 목소리를 숨길 생각도 없이 무현은 자신의 품으로 오열하며 쓰러지는 인을 받쳐 안고 

복잡한 심경이 담긴 시선을 들어 오늘 이 연극을 위해 몸소 희생해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궁에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무현은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을 이 위기에서 구해줄 사람은 세자전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자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사실을 말해야만 했다. 

자신이... 마음에 둔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백해야만 했던 것이다. 여인이 아니라 남자였다고... 

자신의 군주가 허락하지 않는 한 오히려 밝히는 것이 더 손해일 수도 있을 큰 도박 같은 일이었다.

때문에 무현은 세자를 알현하기 직전, 자신의 친한 벗인 ‘정운’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실 정운이야말로 친히 중국까지 건너가 귀한 서책을 찾아 구해주었던 숨은 지지자이기도 한 까닭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직 자신을 이해해주고 근심걱정을 받아주었던 소중한 친우이기에 

그와 함께라면 용기 내어 이번 일을 꾸며 볼 수 있음직 하였다.

처음엔 자신의 입궁을 반가이 맞이한 세자는 이내 주변을 모두 물리고 심각한 고민 속으로 빠져들었다. 

시간이 꽤 흘러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말 없이 탁자 위만 바라보고 있던 세자전하가 문득 고개를 들어 말을 꺼낼 때쯤엔 

무현은 온 몸의 피가 바짝 말라서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피 말리는 공포를 절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한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드디어 말문을 여신 세자저하는 엄한 표정으로 무현에게 딱 한 가지만 물으셨다. 

“그 ‘인’이라는 서생이 널 거부했을 경우, 네 목숨을 걸 수 있겠느냐. 

내 그땐 세자를 농락한 죄를 물어 스스로 자결하도록 할 것이니. 잘 생각하여 대답 하거라.”

지금 이렇게... 

자신을 용서한다 하면서도 미워하나 미워하지 않기에 너무 힘이 들다 말하며 정신없이 눈물을 쏟고 있는 가녀린 어깨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무현은 그때 전하의 질문에 단한치의 주저하는 마음 없이 ‘당연히 그렇다’  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이제 됐소. 처음으로 당신의 맘을 알았소. 그 마음이 날 좋아할 수 없다고 말해도 원망하지 않으리다. 

내 목숨이 그리 소중하다고 말해주었으니. 나에게 와 달라 하지도 않겠소. 

내 욕심이 하늘을 찔러 천신이 노한다 할지라도 꾹 참을 수 있을 테니 염려 말아요. 

내 목 대신 살아 움직이는 심장을 걸고 전하께 충성을 맹세할 것이니...

당신 말대로 헛되이 버리지 않을 것이니 더 이상은 날 위해 터럭만큼의 걱정도 쓰지 마오.”

목소리만으로 인을 진정시키려는 듯 한없이 다정한 예전의 무현님으로 돌아와 그토록 그리웠던 목소리에도 

인은 그저 바들거리며 꽉 잡은 손을 절대 풀지 않았다.

“쉬.. 이제 되었소. 그만 그 칼을 버려요. 손의 상처가 점점 심해지고 있소.”

행여 인이 놀래서 손을 더 꽉 움켜쥘까봐 조심조심 그의 손목을 잡고 손가락을 하나씩 풀어내던 무현은 

이내 머리위에서 들리는 근엄한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렸다.

“여봐라. 붕대와 약을 가져오너라. 그리고 너희 둘은 방으로 들거라.”

냉정하게 홱 돌아 들어가 버린 세자의 등 뒤로 소란스러운 하인들이 부산하게 허둥대는 가운데 

무현에게 이끌려 비틀거리며 일어난 인은 불안한 눈초리로 무현의 옷깃을 잡았다.

“무사하신 건가요? 전하께서 벌하지 않으시겠대요? 무현님... 앗..아윽”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이끄는 무현에게 온통 신경을 쏟던 중, 

집사가 허둥지둥 달려와 우선 대강이라도 손의 상처를 싸매는 통에 인은 찌릿한 아픔을 느끼고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곧이어 무현의 두툼한 손이 자신의 손등을 감싸고 지혈하듯 압박하며 눌러와 

놀란 가슴을 잠시나마 진정시킨 인은 여전히 작게 흐느끼며 무현에게 이끌려 방으로 들었다.

“고개를 드시오. 그대에 대한 이야기는 내 전부 들었소.”

좀 전과는 너무도 딴판인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놀란 인은 순간 예의도 잊고 멍하니 눈앞의 전하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통쾌히 웃음을 터트리는 전하의 맑은 울림에 다시 ‘핫’ 하고 정신이 들어 황망히 고개를 숙이고만 인이었다.

“과연 듣던 대로군. 좀 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싶으나 내 아쉽게도 그만 궁으로 들어가 봐야 하오. 때문에 시시비비를 빨리 가리는 것이 좋을 것 같군.”

“누를 끼쳐 송구하옵니다.”

존경하는 목소리로 무현이 읍을 하자 세자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두 사람을 채근해 몸을 일으키게 하였다. 

“감히 이 나를 분란의 한가운데에 세우다니. 웬만한 공으로는 용서가 안 될 듯싶구려. 곧 그대의 눈부신 공적을 기대해보지. 무현.”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으로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인에게 이윽고 달래는 목소리로 세자가 운을 떼었다. 

“그동안 고충이 많았겠지. 내 부족한 신하가 워낙에 속정이 없는 사람인지라... 그대의 마음고생이 심했을 걸로 아오. 

다 이해하고 마냥 두 사람을 위해 애써주고 싶으나, 내 세자의 신분으로서 그대들에 대한 입장은 참으로 난감하오. 

당장 그대를 하옥시키고 무현을 귀양이라도 보내야하겠지. 매정하다 여길지 모르겠으나 만인의 앞에 선 내 위치가 그러하오. 

허나, 가장 친한 친우의 입장에서 보자면... 여기 있는 정운이나 나 또한 그와 함께 유년시절부터 함께 해 왔지만, 

언제나 곧고 강직하고 정직하리만큼 자신의 본분에만 충실한 모습만이 그가 가진 전부라 생각했었소. 

그런 그가 스스로 죄를 뒤집어쓰면서까지 보호하려고 했던 사람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기쁘오. 

비로소... 무현이 사람같이 느껴져서... 누군가를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서... 

그래서 너무도 당신이 고맙고... 감사하오.” 

덥석 손을 뻗어 인의 다친 손이 상하지 않게 살짝 그러쥐고 감사를 표하는 세자의 행동에 인은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얼어버렸다. 

“어찌해야 합니까? 저는..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중얼거리듯 허공을 맴도는 인의 한숨석인 말에 세자는 빙긋 웃으며 다시 자리하였다.

“당분간 무현을 보기는 힘들 것이오. 내게 진 빚이 너무 많아 조금씩 갚기도 모자랄 판이니. 

그동안 그대는 편안히 몸을 추스르도록 하오. 내 가까운 시일에 그대를 궁으로 부를 것이야. 

듣자하니... 춘추에 관한 학문이 상당히 깊다 하던데. (*춘추 : 역사) 뭐 둘이 합심하여 오래오래 신세를 갚아나가는 것도 나름 괜찮겠군 그래. 하하핫.”

한 손을 들어 근엄히 수염을 쓸어내리며 호탕하게 웃던 세자는 그 뒤로도 인을 붙잡고 조용히 몇 마디 이르고선, 

당황해 하는 인의 모습에 다시금 웃음을 터트리다가 이윽고 정운을 데리고 궁으로 돌아갔다.

“........”

긴 침묵. 참으로 어색하였다. 또다시 그와 단 둘이 남겨진 밤. 

정신없는 와중에도 자꾸만 떠오르는 짐승 같았던 그의 지난 날 이 방에서의 모습에 인은 자기도 모르게 움츠려드는 어깨를 피려고 애써 노력하였다.

“상처... 많이 아프오?”

두근. 

깊게 울리는 목소리에 이미 예전에 고장난 듯 팔딱거리는 심장이 견딜 수 없이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막상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자꾸만 눈맞춰 웃어주던 다정했던 무현님이 떠올라 인은 그저 울상인 채로 어찌할 바를 몰라 

하염없이 그의 옷깃만 부여잡고 붕대를 감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은 채 진즉에 미쳐버린 심장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이런.. 많이 아픈 모양이군. 안되겠소. 지금이라도 의원을..”

“아닙니다.”

급히 그를 제지하며 번쩍 고개를 들어 인은 연신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따뜻한 손이 뻗어와 그런 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넘겨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애타는 마음은 어서 빨리 말을 하라고 재촉하건만, 인은 그저 하릴없이 한마디 한마디 가슴속에 고이 접어 묻으며 그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할 말이 무척 많았는데. 다시 한 번 그와 단 둘이 이렇게 마주하게 되는 날에는 정말 모든 궁금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다 물어보자 그리 다짐했는데.  

앞뒤 정황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온통 의문투성이인 그에 대한 감정만으로도 머리가 터질듯하고 너무나 피곤하였다. 

이대로... 바로 어제 이 사람이 자신이 잠든 방에 몰래 찾아와 그랬던 것처럼, 장난치듯 자신의 얼굴로... 

머리카락으로 미끄럼 타며 간질여 단잠을 방해했던 것처럼... 그저 그가 하자는 대로 내버려두고 자신은 모른 체 하고 잠든 척.. 그리하고만 싶었다. 

그런 인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인지, 무현은 아무 말 없이 인의 몸을 뉘여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안아 다독이며 재우기 시작하였다.

“쉬어도 된다오. 이 밤은 내 그대의 안식을 위해 온전히 꼬박 세워 지켜줄 것이니. 잠시 긴장을 풀고 잠들어도 되오.”

“무현님..”

“쉬이.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있는 법이오. 그러니 지금은 잠시 아껴둡시다.”

[아직은 그대의 마음이... 나와 같지 않음을 알기에. 차마 그 입으로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구려. 

조금만 더 욕심을 부려 그저 이렇게라도 그대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리려는 내 어리석은 마음을... 이번만은 제발 눈치 채지 말아주오. 부디.. 그대여]

짙게 드리워진 무현의 그림자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인은 

그렇게 처음으로 무현의 품안에서 아이처럼 새근거리며 잠들 수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한바탕 꿈인 듯 허무하게 사라질 마음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발 평생 기억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신께 빌고 간절히 빌며... 

잠 든 인도, 대견스럽게 그를 바라보는 무현도 행여 움직이면 사라질 새라 

조심스럽게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가운데 꺼질듯 위태로우면서도 절대 꺼지지 않고 심지가 바짝 마를 때까지 

온 생명을 쏟아 부어 활활 타오르는 등잔의 화염만이 두 사람을 다정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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