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신세현에 대한 첫인상은 호구 새끼였다. 어렸을 때부터 남부러울 것 없이 곱게 자라 머릿속이 꽃밭인 호구 새끼.
신세현은 언뜻 차가운 인상으로 비칠 법한 얼굴을 가졌음에도 참 유순히 웃어 쉬이 호감을 얻었다. 함부로 대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타고났음에도 몸에 밴 친절로 금방 여러 사람과 어울릴 수도 있었다. 나랑 다른 세계의 사람. 그래, 한구석에 찌그러져 음침하게 술만 홀짝이는 나와는 정반대의 사람이다.
지금껏 만났던 저 자식과 같은 타입의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나는 이번에도 가끔 열등감이나 곱씹으며 너를 싫어하게 될 테고, 너는 내 존재조차 모른 채 계속 빛나며 살아갈 것이다. 진저리 쳐질 만큼 불공평하게 일그러진 세상이라고 한바탕 욕이나 하며 각자 다른 세상을 살아가겠지.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신세현은 개강 총회에서 우연히 만나 얼떨떨하게 말을 한 번 섞은 뒤부터 나를 찾았다. 꼭 막 태어난 새끼 오리가 처음 본 사람을 어미로 착각해 졸졸졸 따라다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볼 때마다 달라붙어 대며 처음엔 밥을 사 달라고 치대더니 내 주머니 사정을 언뜻 짐작한 이후부턴 밥을 같이 먹자며 끌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나야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마침 매 끼니를 라면으로만 때우고 있었는데 사 주면 나야 좋지.
신세현은 내게 과외 알바도 소개해 주었다. 어렸을 때 친하게 지냈던 동생인데 점점 성적이 떨어지고 있어 과외 선생님을 구한다고 했다. 나야 반색하며 덥석 고맙다 했다. 거리도 적당하고 시급도 센 편이라 고민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처럼 신세현은 무한한 호의를 아무렇지도 않게 베풀곤 했다. 먹을거리를 사다 주고, 공짜 영화에, 공짜 공연에, 모자나 가방 선물까지. 가끔 이게 나한테 왜 이러나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었지만 이유야 어떻든 좋은 게 좋은 거지 싶었다.
또한 신세현이 이렇게 숨 쉬듯 호의를 베풀며 은근히 치대는 것은 이상한 우월감을 자극시키기도 했다. 동기든 선배든 그와 친해지고 싶어서, 약속 한 번 잡으려고 말을 건네기 일쑤인데 나와의 선약을 우선해 거부하는 게 꽤 짜릿한 기분이었다.
개중엔 저게 어떻게 신세현이랑 친해졌지, 하며 깔보는 시선도 있었지만 그조차도 기분 좋은 시기심으로 느껴져 어깨가 으쓱거렸다. 이를테면 값비싼 액세서리를 걸친 것처럼, 신세현의 존재와 나를 향한 호감은 나를 빛내는 것 같았다.
그 호감의 이유를 알게 된 건 어느 날,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목에서였다.
“선배, 이미 알고 계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신세현이 고백을 했다.
“저 선배 좋아해요.”
그는 답지 않게 우물쭈물 뜸을 들이다 발그레한 볼을 내보이며 입술을 축였다.
“선배만 괜찮다면…. 저랑 사귀실래요?”
긴장이 서린 눈이었지만 입매는 대답을 들은 것처럼 기분 좋게 올라가 있었다.
당혹스럽기야 했지만 사실 고민이랄 것은 없었다.
소위 개꿀 알바라 하는 과외를 주선해 준 것도, 적응을 잘 못 하고 있던 날 신경 쓰며 학부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도 신세현이었다. 참 많은 걸 해 줬다. 그 손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은 그래서였을까.
조금씩 단맛을 보던 참에 마침내 내밀어진 커다란 사탕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애초에 단맛이란 걸 몰랐다면 거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길들여져 있던 시점이었다. 그 긴장 어린 시선이 우스울 만큼 난 선택권이 없었다.
너도 알고 있잖아. 왜 모른 척해. 그 당시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신세현을 우습게 여겼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눈에 서려 있던 건 긴장이 아니라 희열이었을지도 모른다.
***
신세현과 애인이 된 후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선물의 스케일이 더 커졌다는 것과 연락의 빈도가 늘어났다는 점, 그가 노골적인 스킨십을 시도해 온다는 점 정도가 있을까.
신세현은 종종 내 어깨에 팔을 올려 은근히 껴안거나 실수인 양 손을 스치고, 장난처럼 머리칼을 쓰다듬어 올 때가 많았다. 그런데 고백 이후 그 행동은 점점 더 대담해져 갔다. 이젠 목덜미를 아무렇지 않게 만져 오기도 했고 얼굴을 매만져 왔다. 지금처럼.
“야, 왜 그래.”
어색한 웃음을 띠며 손을 슬쩍 밀쳤다. 가볍게 밀려난 손은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와 머리를 한 번 쓸곤 멀어졌다.
“너무 예뻐서요. 선배 진짜 너무 귀엽고 예뻐요. 어떻게 얼굴이 이러지?”
“아, 그…. 너 그런 소리 좀….”
“왜요. 많이 들었을 거 아니에요.”
“아니야. 나 그런 칭찬 진짜 어색해.”
“아. 진짜요? 그럴 리 없을 텐데. 신기하다.”
신세현은 기분 좋게 눈을 휘었다. 잘게 접히는 눈매가 요요하게 휘어졌다.
신세현은 좋았다. 그래, 객관적으로 정말 좋은 애인이었다. 내게 헌신적이었고 늘 다정했으며 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잘난 놈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그가 남자라는 것만 제외하면 참 좋았을 것이다.
왜 신세현은 남자인 거지? 여자였으면 내게 온 행운을 감사하며 잘 사귀었을 것이다. 하지만 왜 하필 저 새끼는 남자로 태어나서….
솔직히 신세현과의 스킨십은 거북했다. 혐오까진 아니더라도 불쾌함과 이질적인 느낌은 들었다. 이를테면 정해진 순리를 거스르는 기분. 정상적인 궤도에서 벗어나 비정상적인 이상한 곳으로 향하는 것 같은 불안감이 종종 들기도 했다. 이건 뭔가 아닌데, 이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물론 신세현은 아니었다.
「은성아ㅠㅠ 나 진짜ㅠㅠㅠㅠ 너무 미안해ㅠㅠㅜ」
「갑자기 집안에 일이 너무 많이 생긴다ㅠㅠㅠㅠ 대신 발표는 꼭 할겡..ㅠ」
선우에 대한 첫인상은 솔직히 안 좋았다. 선우는 조별 과제 무임승차 1일 뿐이었다. 뻔하디뻔한 변명을 하며 조별 모임은 모두 불참, 의견도 안 내, 자료 조사도 안 해. 습관적이고 성의 없는 사과만 반복하며 학점은 학점대로 받아 챙기려 하는 짜증 나는 새끼였다.
그러나 의외로 그는 발표를 잘했고, 조별 과제가 끝난 후엔 조원 모두에게 기프티콘을 돌렸으며 직접 만나 밥을 사 사과도 했다. 들어 보니 그의 사정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투병 중이신데 상태가 급속히 나빠지셔서 곁을 비울 수 없었다며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다. 그런 사정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선우는 그래도 최소한의 책임을 다했다. 조별 과제가 끝난 후 그의 재수 없던 첫인상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그래서일까, 선우에게 절로 관심이 갔다. 겹치는 수업도 있고, 의외로 대화가 잘 통했으며 취향도 꽤 잘 맞았다. 신세현과 있을 땐 불안한 불쾌감이 감돌았는데 선우와 있으면 정상적인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와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면 이상한 건 신세현뿐이고 나는 정상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내 손을 다 덮는 커다란 신세현의 손이 아닌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자그마한 손. 내가 고개 들어 올려다봐야 하는 큰 키가 아닌 귀엽게 나를 올려다보는 작은 체구. 불쾌하게 달라붙는 음습함이 아닌 설렘으로 다가오는 따듯한 온기. 걸을 때마다 살랑거리는 긴 머리와 잘 어울리는 원피스. 모든 게 사랑스러운 김선우. 그를 사랑하게 된 건 내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우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조금 이르게 우린 사귀었고 신세현은 아무것도 몰랐다. 동기와의 비밀 연애, 후배와의 비밀 연애는 접점이 없었다. 내겐 다행인 일이었다.
솔직히 이게 바람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애초에 남자 새끼끼리 사귀는 게 이상했던 일 아닌가. 신세현은 그저 ATM기일 뿐이다. 그래, 말하자면 알바 같은 걸까. 대충 기분 좀 맞춰 주고 필요한 걸 챙기는 서비스업 같은 거. 그러니까 이건 바람이 아니었다. 난 선우를 사랑해서 선우와 사귀는 거고, 신세현은 비즈니스적으로 어쩔 수 없이 보는 사이니까. 그래, 그런 거지.
하지만 무릇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는 거라고 했던가.
선우와 처음으로 모텔에 가기로 한 전날, 신세현이 지갑 안의 콘돔과 핸드폰 예약 기록을 발견했다. 변명을 할까 잠시 고민을 했지만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신세현은 한동안 지랄 발광을 하더니 헤어지자는 내 말에 얌전해졌다.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한 눈에 배신감이 깃들고, 증오가 깃들고. 투명한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 갔다.
죄책감은 없었다. 애초에 나랑 진짜 사귄다고 생각했던 저 새끼가 이상한 거 아닌가. 그 상황은 그저 당황스럽고 불편하기만 했다. 그냥 당장 벗어나고 싶은 상황. 소름 끼치는 정적이 살갗을 찔러 오고 어색함만이 감돌았다. 결국 먼저 나온 건 나였다. 신세현은 붙잡지 않았다. 무언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부터였다.
「우리 헤어지자.」
갑작스러운 문자 하나. 생각 없는 장난인 줄 알았다. 조금 화나긴 했지만 이 정도야 연애 초의 달달한 질투 유발 사건으로 넘어갈 만했다. 그러나 선우는 바로 전화를 걸어도 받질 않았다. 강의에도 나오지 않았으며 그 문자 하나만을 남기고 잠적했다.
기숙사를 나가고 학교를 휴학하고. 갑작스럽게 사라진 애인을 찾을 방법이 무엇도 없었다. 선우의 지인들마저 그의 거처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채 당황할 새도 없이 이상한 일들이 줄줄이 터져 갔다.
“세현이 형한테 팽 당했다면서요?”
“…뭐?”
장난스럽긴 해도 늘 내게 공손했던 과외 학생의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껄렁해 보이긴 했어도 의외로 자세는 발라 내심 애정이 갔던 학생이었다. 문을 열었을 때부터 어쩐지 분위기가 달라 보인다 했더니, 질 낮은 양아치 같은 언사에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돈 번답시고 여긴 기어들어 왔네. 존나 뻔뻔하다. 낯짝 두꺼운 거 봐.”
“…너, 너 선생님한테 그게 무슨 말,”
“풉, 선생이래. 와, 누가 선생이에요? 좆도 아닌 게.”
머릿속이 새하얗게 휘발되었다. 문득 이게 앞으로 내게 닥칠 불행의 시작일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가늘게 떨리는 손을 등 뒤로 숨겼다. 도망치듯 방을 나왔다.
정신을 차려 보니 담벼락에 기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손이 차가워진 게 느껴졌다. 심장이 쿵쿵 기분 나쁘게 뛰었다. 앞으로 어쩌지. 어떻게….
아니, 애초에 신세현과의 일은 어떻게 아는 거지. 그냥 주선자와 사이가 나빠졌다는 정도로 갑자기 이딴 식으로 태도 전환을 한다고? 씨발, 신세현 이 개새끼가 헛소리로 모함한 거 아닌가? 그 새끼 그렇게 저열하겐 안 봤는데 진짜….
끝났으면 끝난 거로 알 것이지. 자기가 차였다는 사실에 분이 나서 별 개소리들을 끌어다 날 모함한 게 틀림없다. 이상한 헛소문을 퍼뜨렸을 것이다. 걔도 나보다 신세현이랑 더 오래 알고 지냈으니 그 새끼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겠지. 아, 씨발. 설마 동기들한테도 이상하게 말한 건 아니겠지.
신세현과의 이별은 신세현 혼자 했던 지랄에 비해선 꽤 담백했던지라 그 뒷일에 대해선 별 걱정이 없었다. 나름대로의 아쉬움은 남았지만 이미 받아 챙긴 게 있는 상태라 그리 큰 미련까진 없었다. 그러니 이런 개 같은 상황은 당연히 생각도 못 했다.
띠- 띠리리 띠- 띠-.
멍한 와중에 경쾌히 울리는 핸드폰을 보았다.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천천히 손을 들어 받았다.
[아, 선생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우리 애가 갑자기 과외 선생님을 바꿔 달래서….]
아.
[왜 그러냐고 했더니 선생님한테 물어보라고 해서요. 혹시 호정이랑 싸우셨어요? 애가 뭘 잘못해서 혼내셨나?]
이 공사 구분 못 하는 팔랑귀 고딩 새끼가….
[저야 선생님이 좋긴 한데 아무래도 애 의견이 중요하잖아요. 이번 달 과외 비는 입금해 드릴 테니까 이제 그만 나오셔도 돼요. 애가 단단히 화가 나서….]
울렁거린다. 귓가의 목소리는 웅웅거리기만 하고 온몸의 피가 전부 아래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선생님? 선생님? 여보세요?]
전화를 끊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담벼락에 기대 주르륵 쭈그린 탓에 은성의 옷자락이 말려 올라갔다.
인생이 갑작스럽게 변해 갔다. 지금껏 당연히 내 것이라고 생각해 온 것들이 나를 쉬이도 떠났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신세현 덕분에 쉽게 얻은 것들이니 그가 사라지자 덩달아 쉽게 사라진 건. 그래, 어찌 보면 너무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들은 이제 내 것이었다. 신세현이 주긴 했지만 이제 내 거였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러지?
과외 잘린 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잠시 멘탈이 나갔지만 곧 회복했다. 그래, 내가 너무 과하게 생각했지. 겨우 알바 하나 잘린 것뿐이다. 물론 그 알바로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좀 멍했지만, 알바야 다시 구하면 될 일이다. 아, 그런데 그게 진짜 꿀이었는데. 그만한 시급은 찾기 힘들다고. 아, 씨발 신세현 개씨발 새끼.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신세현과 그리 오래 사귀지도 않았는데 의외로 신세현에게 의존하고 있던 것들이 많았다. 또한 그에게서 받았던 것들도, 내 것이라 생각한 것들도 생각보다 많았다. 그리고 그로 인한 여파가 지금 몰려들고 있었고.
신세현이 주선한 알바, 신세현이 소개한 여러 인맥, 신세현이 내줬던 등록금, 신세현이 보여 준 공짜 영화와 공연, 신세현이 사 준 밥. 신세현 신세현 신세현 신세현. 씨발, 빌어먹을 신세현.
무언가 아쉬운 게 생길 때마다 마치 그 모든 걸 해결해 줄 사람이 그인 양 계속 신세현이 생각났다. 그래, 확실히 편했지. 하지만 이제 신세현과는 끝났다.
“아.”
의미 없는 감탄사 같은 게 문득 터졌다.
설마 신세현이 아쉬워지게 될 줄이야. 아니야, 신세현은 날 엄청 좋아했다. 곧 연락 오지 않을까.
솔직히 선우가 잠적하지만 않았다면 신세현 따윈 잊고 힘든 일이 있어도 잘 이겨 내며 선우와 잘 연애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우는 힘든 날 버려두고 혼자 잠수를 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하긴 조별 과제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겨우 과제도 그렇게 쉽게 내팽개치는 책임감 없는 성격이었는데 연인이라고 다를 게 있을까. 씨발, 나는 억울하게 버려진 것이다. 내가 너무 불쌍하다. 어쩌다 그런 쓰레기를 만나서 이렇게 됐을까. 애초에 김선우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신세현이랑도 짜증 나지만 잘 참으며 지냈을 것이다. 그렇게 졸업까지만 버텼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신세현이라면 분명 꿀 빠는 대외 활동이나 취업과 관련해서도 좋은 정보로 도움이 됐을 것이다. 내가 너무 짧게 생각했어. 길게 봤어야 했는데. 아, 그래. 이건 다 김선우 때문이다.
***
신세현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그렇게 죽고 못 살 것처럼 굴더니 이렇게 잠잠할 수가 있나. 날이 갈수록 초조해져 갔다. 신세현과 있으면 잘도 아는 척했던 동기들이 이제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대놓고 쳐다봐 오더니 저들끼리 수군댈 때도 많았다. 분명 신세현이 나에 대한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을 것이다.
아주 가끔 신세현과 마주칠 때도 있긴 했지만 신세현은 투명 인간처럼 날 못 본 척하며 지나쳤다. 솔직히 이건 꽤 충격이었다. 분명 붙잡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 마지못해 잡혀 줘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 미련도 없는 것처럼 구는 의연한 표정에 살짝 아득해졌다.
이제 슬슬 그나마 아껴 두었던 돈도 떨어져 가고 있었다. 신세현한테 받았던 지갑이나 가방 같은 선물들을 중고로 팔면 돈이야 메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그건 단기적인 임시방편일 뿐이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신세현은 인생에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이대로 멀어지면 안 된다. 내가 생각이 너무 짧았다. 진짜. 이제 와서 뼈저리게 후회해도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다. 그 사실이 너무 분하고 왠지 억울했다.
아, 혹시 신세현은 내가 사과하기를 기다리는 건가. 일단 신세현 입장에선 내가 바람피운 거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그래, 아무리 호구 새끼여도 자존심이 있기는 하겠지. 그럼 고개 좀 숙이고 들어가 볼까. 맞아. 길게 생각하자.
지금 숙이는 건 짜증 나지만 한 번 숙이는 걸로 앞으로의 인생이 좀 편해진다면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바로 휴대폰을 들었다. 아직 연락처에 저장되어 있는 신세현의 이름을 손끝으로 덧그리다 결국 눌렀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씨발!”
휴대폰을 잡은 손을 바들바들 떨다 크게 숨을 쉬곤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래, 지 딴에 자존심 많이 상했을 수도 있었겠지. 아니, 그런데 씨발 지가 뭐라고 내 전화를 씹어. 사람이 살면서 실수도 할 수 있는 거지. 존나 빽빽하게 짜증 나는 새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기껏 먼저 전화해 줬는데 씹는다고? 아니, 아니지. 지금 운동을 한다거나 샤워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 무슨 일을 하고 있어서 못 받은 거겠지. 신세현이 내 전화를 씹을 리 없으니까. 나중에 부재중 기록을 보면 놀라서 곧장 전화하고 못 받아서 미안하다며 궁금하지도 않은 사정을 늘어놓으며 싹싹 빌 것이다. 그래. 조금만 기다리자. 어차피 신세현은 나한테 질 수밖에 없어.
“이 씨발! 신세현 이 개 같은!”
전화가 오지 않은 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 이 새끼, 내가 잘못 건 거라고 생각해서 못 하고 있는 거 아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다시 전화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고 휴대폰은 지금껏 잠잠했다. 불길한 느낌이 든다. 신세현이 무슨 개연도 없이 날 좋아했던 것처럼 뒤끝 없이 끝난 걸지도 모른다. 빨리 끓어 빨리 식는 것처럼.
띠- 띠디디 띠- 띠-.
“어?!”
급하게 휴대폰 화면을 본 순간 김이 확 빠졌다.
「엄마」
“네.”
가라앉은 목소리는 물에 젖은 종이처럼 눅눅했다.
“…엄마?”
[거, 윤성화 씨 아드님 되시지요-?]
기분 나쁘게 늘어트리는 목소리가 어딘지 불쾌했다. 다시 화면을 확인하고 대답했다.
“…네. 맞는데요.”
촉이 가늘게 섰다. 무언가 불길했던 과외 마지막 날의 느낌처럼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란 미묘한 예감이 느릿하게 울린다.
[하이고. 지금 싸게 싸게 열로 와 줘야 쓰겄는디.]
“왜, 무슨 일인데요?”
[그건 와서 들으시고 일단 오랄 때 오는 게…. 은성아! 허이, 깜짝어.]
기분 나쁜 남자의 목소리 사이에 엄마의 다급한 외침이 끼었다. 아. 무슨 일 있구나. 씨발 또 무슨 일인데. 아, 제발 엄마.
[은성아, 내가 미안해! 내, 어이구 아주 꼴값을…. 암튼 오는 걸로 알고 기다릴 건께 싸게 오십쇼- 은!]
엄마의 음절을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겼다.
잠시 멍했다. 또 뭐에 손댄 걸까. 씨발. 개 같은 사이비에서 나오고 이제 좀 사람답게 사나 싶었더니 이번엔 또 뭐야. 무슨 짓을 했길래 조폭 같은 새끼가 나한테 전화를 하는 건데. 아, 진짜. 제발. 안 그래도 심란한데 왜 이딴 좆같은 일이 또 터지는 거냐고.
숨이 트이나 싶으면 막히고, 살 만한가 싶으면 또 하수구에 풍덩. 이딴 좆같은 반복이 지겨워 신물이 올라왔다. 핏줄 같은 게 뭐라고 기어코 잡고 있는 나도 참 나다. 진짜 그딴 게 뭐라고 내가….
입으로 욕을 연신 중얼거리면서도 운동화를 구겨 신고 뛰쳐나갔다.
***
“그니까, 우리 아드님께서 갚아 주시면 되는 건데. 어뗘요? 괜찮지? 거, 들으니까 학교도 좋더만. 요샌 부잣집 과외? 뭐, 그런 거도 한다든데. 그런 거 하면 막 몇천씩 번다 하지 않나? 그, 스타 강사? 그런 거 딱! 해 갖꼬.”
“그려. 우리가 얼마나 관대한데. 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떡! 빌려주고, 지금도 봐! 갚을 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이렇게 기다려 주잖어. 긍께 이번 달 내로는 꼬옥 갚읍시다? 예?”
머리가 아득해진다. 씨발. 진짜 어떻게 이딴 좆같은 일만 벌이고 다니지? 생각이 있으면 이딴 식으론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분하고 억울하고 이 상황이 미치도록 답답해서 눈가가 화끈거렸다.
“그럼 가 볼 텡께 뭐 이상한 수작은 부리지 말고 자-알 갚읍시다? 어? 우리도 돈만 제때 내면 된께. 또 얼굴 보지 맙시다?”
“거, 스타 강사 뽜이팅! 계좌 번호 잊어버리면 그 번호 등록해 준 거로 연락허고!”
썰물처럼 소란이 빠져나가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성화는 주저앉은 채로 안절부절못하며 은성의 눈치를 살폈다. 씹어 너덜너덜한 손톱으로 괜스레 다리만 긁었다.
“…엄마.”
“어? 어, 은성아. 엄마가, 그…. 아니, 윤 씨가 한 달에 천을 벌었다는 거야? 그래서 조금 넣어 봤는데 이게 진짜…. 엄마가 30 넣어서 200도 벌었다? 근데 이게 갑자기….”
“엄마! 제발 좀!”
은성은 곰팡이가 핀 벽지, 찌든 때가 검게 달라붙은 창틀, 여기저기 해진 채 널브러져 있는 이불 등에 시선을 두며 초라한 집 안을 빙 둘러봤다. 잠시 다른 곳에 있었다고 낯설게 콧속을 파고드는 쿰쿰한 냄새를 맡으며 가난이 덕지덕지 붙은 자그만 공간을 바라봤다.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허망함과 이젠 다 쉬어 버린 원망, 가슴을 아무리 쳐도 해소되지 않는 만성적인 답답함이 위로 위로 쌓여 갔다. 진짜 돌아 버릴 것 같다. 개같이 아끼고 개처럼 일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한 달 동안 6천을 마련하라고. 차라리 뒤지라고 해. 씨발….
“은성아. 그래도 괜찮겠지? 우리 은성이 요새 좋은 과외 자리 얻었다고 했잖아? 응? 그거 몇 달 치 가불 받고, 여기저기서 빌려 보면 되지 않아? 좋은 학교니까 좋은 인맥도 많을 거 아냐. 응? 우리 은성이, 엄마가, 엄마가 진짜 미안해….”
“하…. 흐, 윽….”
녹슨 경첩에서 날 법한 소리가 목을 긁으며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원래 내 인생에 답이라곤 없었지만 이건 정말 뭐 어떻게 타개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고작해야 한강 물 엔딩이 최선이었다. 이젠 화도 나지 않는다. 그저 미치도록 답답할 뿐이다.
마감 처리도 제대로 안 돼 여기저기 볼록한 장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나오는 대로 그저 흘려보내며 고개를 숙였다.
“은성아, 엄마가 진짜 미안….”
“으윽….”
이미 예전부터 얽히고 뭉친 감정이 삼켜도 삼켜도 목을 찢고 나올 듯이 커져만 갔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지. 그냥 닥치고 계세요, 제발….
“은성아. 은성이가 친구 알려 주면 어, 엄마가 대신 전화해서 돈 좀 꿔 달라 할까? 응?”
친구는커녕 알고 지내는 동기조차 없다. 그나마 있긴 했는데 이젠 없지. 없다고 씨발. 아무것도 없어. 있다 해도 그걸 빌려주겠어? 엄마 친구가 그런 상황이었으면 엄만 빌려주겠어?
“알바, 알바는? 엄마도 뭐라도 할 거니까 그거랑 합쳐서…. 돈이 안 되면 다음 달까지 갚을 테니 좀 봐달라고 하자. 설마 죽이진 않을 거 아냐. 응?”
알바도 잘렸어. 설령 계속하고 있었어도 그걸론 턱도 없어. 죽이진 않을 거라니 그건 또 무슨 자신감이야. 엄마, 우린 장기 털릴 준비나 하고 있어야 돼. 그러니 제발 닥치면 안 돼? 제발, 엄마. 내가 진짜 죽을 것 같아서 그래.
머리가 지끈거린다. 눈도 빠질 듯이 아파 온다. 손발이 차갑고 가슴께만 묵직하다. 토할 것 같아. 역한 감각이 훅 올라왔다.
“아.”
그런데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아, 하하….”
멍청하게 벌어진 입가에선 헛웃음이 흘렀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하나 있었다. 그것 외엔 방법이 없는, 무이한 구원일 것이다. 와, 구원이라니 단어 선택 한 번 진짜 좆같다.
홀린 듯 휴대폰을 들었지만 여전히 연결은 되지 않았다. 멍하니 끊어진 휴대폰을 들고 있다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은성아!”
놀란 부름이 뒤따라왔지만 무작정 달렸다. 버스 정류장에서 숨을 고르고 버스를 타고, 눈에 익은 거리를 스쳤다. 내린 후엔 다시 달렸다. 숨이 목 끝까지 차 빠르게 뛰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헉헉거리는 가쁜 숨소리가 귀에 걸렸지만 내 것 같지 않았다. 감각이 먹먹했다.
도착한 곳은 평생 들어가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오피스텔 앞이다. 괜히 사람을 기죽게 만드는 분위기가 차갑게 풍겼다. 밑창이 닳은 신발을 내려다보게 만들고 해진 소매를 감추게 만드는, 가난이 잘못이 되는 것 같은 고풍스러움은 여전했다.
숨을 여러 번 들이쉬어도 계속 가쁘게 심장이 뛰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환하게 켜진 로비의 불빛이 따갑게 닿아 오는 것 같다. 어지러운 정신으로도 습관처럼 움직였다. 기어코 신세현의 펜트하우스에 도착했다. 내가 여기까지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희망이 밝아졌다. 신세현이 보안 장치를 바꾸지 않았다는 거니까. 얼굴이 익은 관리인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연스레 인사할 뿐 날 막지 않았다. 그러니까….
“…선배?”
놀란 신세현이 보였다. 신세현의 얼굴을 보자 지금껏 계속 묵직하게 엉켜 있던 덩어리가 서럽게 허물어졌다. 벅찬 서러움이 쏟아져 말도 하지 못하며 울음만 꺽꺽 뱉었다. 그래도 신세현이 뭐라고 내심 안도가 스몄다. 곧 신세현이 위로해 주겠지. 안절부절못하며 안아 주고, 무슨 일인지 묻고 쩔쩔매며 걱정하겠지. 자기가 다 알아서 해 주겠다고 달래 주겠지.
“와…. 지금 뭐 해요?”
뭐?
한없이 쏟아지던 눈물이 뚝 그쳤다. 눈을 깜빡였다. 신세현이 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차가운 목소리가 가슴에 꽂혔다. 비웃는 듯한, 조롱에 가까운 물음이 낯설었다. 너무 낯설었다.
“무슨….”
“지금 뭐 하냐니까?”
“뭐….”
“선배가 설마 여기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선배 동거인으로 등록해 둔 거 진작 바꿀 걸 그랬어요. 귀찮아서 내버려 뒀더니 제집 드나들듯 들어왔네요? 미루지 말고 말해 둘 걸 그랬어. 잘도 들여보냈네.”
“세…. 세현아. 내가, 내가 좀 심했지?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진작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용기가 안 나서…….”
“그래요? 괜찮아요, 선배. 어차피 끝난 일인데 뭘. 알았으니까 빨리 나갈래요? 솔직히 기분이 좀 더러워서.”
이게 신세현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게 신세현이야? 어떻게? 신세현이 나한테 이런 식으로 대한다고? 나한테?
“세…. 세현아….”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은성이 멍하니 서 있자 세현이 은성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억센 손길에 몸이 연신 넘어질 듯 휘청거리며 끌려갔다. 엘리베이터 유리에 비친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눈물로 얼룩진 몰골이 신세현의 멀끔한 얼굴과 비교되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얼얼했다. 아주 차가운 얼음을 입 안에 욱여넣어 와그작 씹어 대는 것 같기도 했다. 신세현의 말간 웃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살짝 예민해 보이는 무표정도 아니었다. 그 얼굴엔 명백한 귀찮음이 담겨 있었다. 날 쓰레기봉투처럼 쥐고 버리러 가고 있었다.
제법 쌀쌀해진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어떻게 나왔더라. 신세현이 날 끌었고 경비원에게 뭐라 말했는데 몸이 밀쳐지듯 나와 얼떨떨하게 여기에 섰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저게 그 신세현이라고? 지겹도록 몸을 치대고,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쉽게 웃음을 흘리던 그 신세현이라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세계가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유일무이한 동아줄 같은 건 애초에 내려지지도 않은 것이었다. 길은 없었다. 절벽이었다. 깊게 파고드는 상실감과 추락감을 느끼며 몸을 말았다. 받아들이기엔 지나친 일이었다.
***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심장이 죄였다.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의 심정이 이럴까, 싶었다. 그렇지만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아니, 아닌가. 주제도 모르고 신세현을 버린 게 잘못이었나.
그 후 다시 학교에서 마주친 신세현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사람들 틈에서 중심처럼 걸었다. 날 투명 인간 취급하듯 스쳐 지나가는 것도 여전했다.
어영부영 보름이 지났다. 엄마는 전화를 하며 한탄했다. 너무 무섭다, 집에 찾아와서 얼마나 모았는지 물어본다, 가불은 못 받았냐, 친구한테 돈은 못 꿨냐 등 닦달하듯 질문을 하면서도 정작 답은 듣지 않고 한풀이를 하듯 탄식만 뱉어 내다 끊곤 했다.
하루 종일 신세현 생각만 했다. 그 마음을 다시 어떻게 돌릴지, 뭐라고 말할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을 생각했다. 상상 속의 신세현은 나에게 아주 다정했으며 날 끌어안으며 자신이 다 해결해 준다 하였다. 그러나 가끔 상상 속의 신세현조차 날 경멸하듯 바라보며 밀쳐 내고 조롱할 때가 있었다.
내 초조함과 불안감에도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르고 결국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불안은 극에 달했다. 엄마의 전화도 그런 심정을 대변하듯 하루에도 몇 번씩 시끄럽게 울렸다. 극도로 피폐해졌다. 미칠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도 손끝이 떨렸고 마음이 진정이 안 됐다. 잠이라도 들면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깨어나곤 했다.
이번 일은 저번의 다른 일들과는 달랐다. 인생을 살면서 아무리 힘들었어도 저런 깡패들은 처음 보았다. 답이 없었고 길이 없었다. 유일하게 비벼 볼 만한 곳은 역시 신세현뿐이었다. 그래서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세현아!”
캠퍼스에서 걸어 나오는 신세현을 보고 황급히 아는 척을 하며 그의 앞으로 뛰어갔다. 신세현은 모르는 척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팔을 절박하게 붙잡았다.
“세현아, 잠깐만. 나, 나 좀 봐.”
“…왜요?”
앵앵대며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에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를 잡아끌었다.
신세현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던 무리가 날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봐 왔지만 그딴 건 아무 상관없었다.
“할 말이 있어. 조금만 시간 좀 내줘.”
“선배 진짜 신기하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변하지?”
“조금만….”
신세현은 고개를 까닥이며 고민하는 표정으로 날 훑어보다 주위에 시선을 돌렸다. 그 익숙한 웃음을 걸치며 오늘 점심은 빠지겠다고 말했다. 안도감에 탄식이 터져 나올 뻔했다. 동기들은 어색하게 은성과 세현을 바라보다 그들 사이의 미묘한 기류에 인사말을 던지며 멀어졌다. 은성이 세현을 끌었다.
리모델링 공지만 띄워 놓고 방치해 둔 후미진 건물 안. 1층 화장실로 들어간 은성이 세현의 손을 놓았다. 세현이 불쾌하게 인상을 구기며 주변을 둘러보다 용건을 말하라는 듯 은성을 빤히 쳐다봤다.
입 안이 바싹 말라 오는 느낌에 혀로 입 안을 훑고 말을 시작했다.
“세현아, 내가 진짜 미안했어. 내가….”
“그딴 말이나 하려고 부른 거예요?”
“아니, 그…. 내가, 우리 부모님이…. 아니, 집에 일이 좀 생겼는데….”
양손을 공손히 모아 손가락을 얽으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래서 돈이 좀 필요한데 내가 아는 사람이 너밖엔 없어서…. 빌려주면 내가 최대한 빨리 갚을게.”
“선배가 무슨 수로?”
“…응?”
“선배 과외도 잘렸잖아요. 알바도 못 구하는 것 같던데 언제 갚게요? 아, 그래. 일단 얼마가 필요한지부터 말해 봐요.”
“유, 육천 정도….”
“빌려줄 순 있어요. 빌려줄 수야 있지. 그런데 못 갚을 거잖아.”
“아니야, 진짜 갚을게. 물론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긴 한데.”
“그런데 그것도 그건데 선배 진짜 뻔뻔하다. 어떻게 나한테 돈을 빌릴 생각을 하지? 선배 바람난 주제에 나보고 헤어지자면서요. 선배 지금 어떤지 알아요? 얼굴에 철판 깐 수준을 넘어 그날 일 자체를 잊은 것 같아요.”
심장이 아프게 조여들고 머리가 새하얗게 비워져 갔다.
“미안….”
“너무 뻔하다.”
“그, 내가….”
“선배. 그딴 흔한 말 말고 뭐라고 설득해야 내가 갚아 줄지 잘 생각해 보고 전화하세요. 그때도 지금처럼 뻔한 말이나 지껄이면 정말 다시 기회 없어요.”
신세현은 구걸이라도 하라는 투로 툭 뱉곤 그대로 돌아 나갔다. 잡을 순 없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 약속된 날이 오고야 말았다. 엄마에게선 아침부터 전화가 끊이지 않고 걸려 오고 있었다. 사실 일주일 전부터 재촉하듯 울리고 있었다. 길게 찍힌 부재중 전화를보며 이대로 연을 끊을까, 생각도 많이 했다. 나 혼자 벌어먹고 살기도 힘든데 엄마가 벌인 일까지 해결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갈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니 어렸을 때부터 엄마한테 핏줄 어쩌고 하며 세뇌당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왜 놓을 수 없지. 장담컨대 그게 누구든 나한테 피해를 주면 바로 손절 할 것이다. 매정하게 밀쳐 낼 수 있다. 그러지 못하는 게 오히려 호구 새끼지.
그런데 오직 한 사람, 엄마에게만은 그럴 수 없었다. 왜 그런 건지 나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의 좋았던 기억 때문인지. 진작 바래 닳아져 이젠 별 추억으로도 남지 않았는데. 아플 정도로 증오하고 있으면서도.
가까워질수록 불온한 소란이 커져 갔다. 호통 소리, 욕설, 그 와중에 엄마의 새된 비명 소리가 가장 크게 들려왔다.
“어! 아드님 오셨네!”
“이야, 멋지게 떠억 등장하는 거 봐라. 돈은 챙겨 오셨나? 수표로 가져오셨어?”
“아유, 난 또 돈 떼먹고 뻐팅기는 줄 알고 괜히 부랴부랴 챙겨왔잖어!”
“통화 한 통만 할게요.”
“엉? 통화?”
남자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곧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휴대폰을 들었다. 외면하고 피하다 결국 이 지경까지 와서야 전화할 용기가 생겼다. 심호흡을 하고 익숙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 음이 길게 이어졌다. 구경하듯 빙 둘러싼 남자들의 눈치에 초조해져 다리가 덜덜 떨려 올 때 신세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세, 세현아.”
[선배?]
짜증 섞인 작은 한숨 소리가 귀에 걸렸다. 전화가 끊기기 전에 얼른 말을 이었다.
“세현아. 나, 나 할 말 있어. 전에 그랬잖아. 기회 준다며….”
[아- 그래? 지금 어딘데요?]
“여기…. 내가 문자로 주소 보내 줄게. 오면 말해 줘. 내가, 마중 나갈게.”
[끊을 테니까 바로 보내요.]
“응응….”
전화가 끊기자 얼른 손가락으로 문자를 눌렀다. 남자가 감시하듯 옆에서 지켜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돈을 가져올 사람이라고 짤막하게 대답한 뒤 포로로 잡힌 것처럼 남자들의 따끔한 시선을 견디어 냈다. 얼마 뒤 신세현한테 전화가 왔다.
“저, 잠깐 나가서 데리고 올게요.”
“저거 헛수작 아닐랑까?”
“내랑 같이 가지 뭐.”
“아니요, 말할 게 있어서…. 진짜 바로 올 거예요. 정말…. 헛생각 품었으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어요.”
남자가 침음을 내며 턱을 쓸었다.
“아따, 딱 봐도 수상쩍은디….”
“고럼 10분 안에 안 돌아오면 여기 소중한 어머님이 다칠지도 몰라요? 1분마다 손가락 하나씩 사라질 거여.”
“으, 은성아….”
겁에 질린 엄마의 음성이 아프게 박혔다.
“괜찮아요. 진짜 금방 올 거예요.”
전화를 받으며 대문 밖으로 나갔다. 조금 내려가자 신세현이 우뚝 서 있는 게 보였다. 조각 천을 기운 양 서로 어울리지 않는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좁은 골목 위의 신세현은 비현실적이었다. 나의 구질구질한 현실이 그에겐 영화 속의 낭만처럼 느껴졌다. 다른 곳을 살피던 고개가 나에게 향하고 특유의 시원하게 트인 눈매가 웃는 듯 짜증을 내는 듯 살짝 휘었다. 홀린 듯 그에게 다가갔다.
신세현. 종일 네 생각뿐이었어. 정말이야.
그에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여러 말들이 입 안에서 굴러다녔다. 신세현을 설득할 만한 말, 신세현이 내 빚을 갚아 줄 만한 말.
신세현은 나에게 떨어지면 안 됐다. 그러니까, 내가 신세현한테 떨어져선 안 됐다. 그를 밀쳐 내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 받아 본 무한할 것 같은 애정에 잠깐 정신이 나갔나 보지. 과하게 취해서 시야가 흐렸었다. 신세현의 사랑은 포장되지도 않고 다듬어지지도 않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었다. 마냥 순수했기에 더욱 독했다. 아니, 그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나. 신세현은 애초에….
아.
-선배, 저는 그런 말이 좋아요.
-뭔데.
-네가 나의 세계라는 말 있잖아요. 나의 우주, 나의 세상. 뭐 이런 거.
뜬금없는 말에 인상을 구겼다. 과연 허구한 날 로맨스 영화나 보는 놈다웠다.
-그게 뭐.
-그런 게 좋더라고요. 자기 세계면 아무리 싫어도 떨어질 수 없잖아요. 싫고 질려도 뭐 어떡해. 떨어지면 죽으니까 붙어 있어야지. 그런 거 좀 낭만적인 거 같아요.
세상 낭만 다 죽었나. 끔찍하기만 한데. 그런 거잖아. 속 뒤집어져도 실실 웃어넘겨야 하는 사회생활이나 좆같아도 맞춰 살아야 되는 사회 같은 거. 신세현 저건 가끔 좀 이상한 것 같아. 하긴 그러니까 나한테 그렇게 치대는 거겠지. 하여간 미친 새끼.
신세현이 뭘 원하는지 알겠다.
-선배는 제 세계예요. 그러니까….
뒷말을 천진난만하게 덧붙이며 활짝 웃었다.
-선배 세계도 저로 하세요.
신세현에게 떨어지면 죽는 것처럼 그를 꽉 껴안았다. 마주 안아 오는 손길은 없었지만 매달리듯 그에게 가까이 붙었다.
“나 너 없으면 죽어.”
내 세계에게 빌었다.
“제발 날 다시 좋아해 줘….”
신세현이 팔을 뻗었다.
“선배.”
익숙하던 세계에서 박탈당한 채 낯선 우주를 부유하는데 세계의 중력이 날 끌어당겼다. 속박 같은 손길이 지금은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해 줄게요.”
그 한마디에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 안도감이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대신 선배는 나 없으면 진짜 죽어야 돼.”
그 소름 끼치는 말조차 지금은 다정한 위로 같았다.
***
한 달간의 고민은 허무하리만치 빠르게 해결되었다. 내 30일의 고민이 신세현의 3분으로. 싱거운 빚 상환을 마치고 엄마가 신세현에 대해 채 물어보기도 전에 그에게 끌려갔다. 차에 타고 집에 도착한 뒤 곧장 침대에 눕혀졌다. 당연하게도 거부할 순 없었다.
“세현아, 아, 아프….”
“오늘 선배는 좀 아파도 되잖아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눈가를 구경거리인 양 쳐다본 신세현이 설핏 웃으며 손가락을 빼냈다. 젤을 쏟아붓듯 발랐는데도 화끈거리며 아파 왔다. 애무라기보단 화풀이 같았다.
무엇도 들어가 보지 않은 좁은 구멍에 처음부터 손가락 세 개가 푹 박혀 왔다. 젤이 윤활제 역할을 한 덕분에 박혀 들긴 했지만 생경한 고통에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애처롭게 신세현을 바라보며 시트를 쥐어뜯듯 부여잡곤 간신히 숨을 들이마셨다.
도로 빠져나가는 손가락과 함께 구멍 안에서 녹은 젤도 딸려 나와 후드득 떨어져 시트를 적셔 갔다.
“정액 뭉친 것 같다. 아직 넣지도 않았는데.”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아 흩어졌다.
“젤 안 써도 됐겠다. 알아서 젖는데요?”
선배 진짜 아픈 거 맞긴 해? 조롱하듯 중얼거린 세현이 픽 웃었다. 곧장 조여지는 구멍을 대충 지분거린 세현이 성기를 가져다 댔다. 구멍은 젤만 묻어 반들거릴 뿐 풀리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은성을 뒤집어 놓고 엉덩이만 볼록 올라오게 들었다. 허리가 휘어지는 곡선이 야스러웠다.
“흑!”
성기가 입구에 닿아 비벼지자 은성이 세현의 손에 잡힌 허리를 떼려 바르작거렸다. 그 몸짓을 보는 세현의 눈이 가늘게 접히고 그대로 푹 좁은 내벽에 밀고 들어갔다.
“끄… 아으… 악…!”
처음 느껴 보는 압박감과 고통에 은성이 헐떡헐떡 끊기는 듯한 숨을 애써 이으며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눈에선 생리적 눈물이 자연스레 투두둑 떨어졌다.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신세현은 여전히 배려 없이 그 흉흉한 걸 욱여넣는 중이었다. 툭, 기어코 여린 입구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뿌리 끝까지 쾅! 박혀 들었다.
벌어진 입에선 비명도 나오지 못하고 고인 침만 뚝뚝 떨어져 갔다. 침과 눈물이 섞여 연회색 시트의 색이 짙어지고 구겨져 갔다.
“아…. 미친. 선배 등 휜 거…. 허리 라인이, 씨발, 어떻게 이렇게 야하지?”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귓가에 속살거리는 목소리도 외딴 라디오 소리처럼 한 귀로 흘러 나갔다. 너무 아파. 씨발 존나 아파. 씨발.
“으, 끅, 흐….”
더듬더듬 목에 반쯤 걸린 소리가 나오고 고통에 막혔던 신음이 흐느끼듯 흘렀다.
“아파, 아프…. 흑, 아파….”
“선배. 난 선배가 아파하는 게 왜 이렇게 기분 좋지?”
쯔즉, 살을 끌며 내벽을 가득 채운 기둥이 빠져나가고.
“흑, 아파….”
“아…. 진짜 엄청 조여 대네. 아다인 거 광고해?”
다시 쾅 박혀 왔다.
“…! 아, 흐…!”
그 뒤론 몸을 휩쓸어 가듯 거친 움직임이 반복됐다. 그저 아프기만 했다. 정신없이 흔들리고,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깊이 박아 오고, 배 속 내장이 짓뭉개지는 것 같고. 볼록 나온 배를 보곤 엉엉 울며 잘못을 빌었던 것 같다.
위기감이 들면 인생을 되돌아보는 것처럼. 바람피워서 미안해, 연락 씹어서 미안해, 성의 없게 대답해서 미안해 등. 신세현은 아마 즐겼던 것 같다. 정신없이 내가 다 잘못했다고 엉엉 비는 걸 들으며 중간중간 욕을 짓씹고 허리 짓을 더 빠르게 가했으니까.
정액이 퍼져 나가는 게 얼마나 좆같은지 처음으로 느껴 보고 이제 끝인가 싶어 몸에 힘을 빼며 늘어졌다. 탈진한 듯 기운이 없었고 아래가 너무 아렸다. 칼에 베인 듯 쓰라리고 뜨거웠다. 그러나 신세현은 성기를 잠시 뺐다가 다시 박아 왔다. 결국 정신을 잃었다.
다시 의식을 차렸을 땐 모든 게 끝나 있었고 말라붙어 굳은 정액이 느껴졌다. 어기적어기적 기듯 걸어 욕실까지 겨우 갔다.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정액을 빼며 울고, 샤워를 하며 서러워서 울고, 자고 있는 신세현을 두고 집을 나서며 짜증 나서 또 울었다. 평소엔 고려 대상에도 들지 않았던 택시를 탔다.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기절하듯 쓰러져 하루 내리 잠만 잤다. 눈을 뜨니 신세현이 있었다.
그 후 하루하루가 서서히 부서지는 것 같았다. 애초에 신세현을 만났던 것 자체가 균열의 시작이었다. 아냐, 아닌가. 안 만났으면 지금쯤 엄마랑 사이좋게 장기 털렸을 텐데. 아니야. 그래도 이런 건….
“선배, 집중 안 해요?”
“윽!”
첫날엔 분명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신세현이 다짜고짜 얼굴을 들이밀었던 집에서의 관계도 너무 쓰리고 아팠다. 그런데 그런 아린 고통 속에서 이상한 부분이 짓눌러지기 시작했다. 그 지점부터 뻐근한 감각이 뭉근히 피어오르고 온몸이 저절로 떨리며 묘한 감각을 좇기 시작했다. 신세현은 성감대를 찾았다며 해맑게 웃었다. 그 미소를 시작으로 신세현과의 관계가 다른 의미로도 곤혹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흐…!”
“쳐 대는 대로 느끼면서 집중도 안 하고.”
“하, 하으, 윽!”
커다란 손이 다가오는 걸 넋 놓고 바라봤다. 손이 꺼덕거리는 성기를 손등으로 툭 치곤 배를 따라 선을 그리듯 스르륵 올라갔다. 숨을 쉬느라 연신 부풀었다 가라앉는 가슴을 쓰다듬다 쇄골을 훑듯이 지나고 돌연 목을 졸랐다.
“컥!”
“숨 쉬고 싶으면 빨리 가게 만들어 봐요. 사정할 때까지 안 뗄 거니까 떡 치다 죽기 싫으면 허리나 잘 돌려 봐.”
“끅, 으….”
생존 본능 때문에 저절로 허리가 돌아갔다. 허리를 띄워 접합부에 찰싹 달라붙곤 둥글게 원을 그리듯 허리를 움직였다. 안을 꽉 채운 성기가 내벽 전체에 고스란히 비벼졌다. 숨이 막혀 어지러운 머리에 쾌감만이 계속 때리듯 울렸다.
“아. 허리 진짜 작살나게 돌려 대네.”
힘에 부쳐 바르르 떨려 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신세현은 한다면 했다. 내가 눈이 돌아가 죽든 말든 기어코 사정할 때까지 목을 놓지 않을 것이다. 신세현의 성기만으로도 이미 가득 차서 더 조이고 말고 할 게 없는데도 구멍에 애타게 힘을 주며 제발 빨리 싸고 나가길 빌었다.
숨이 막혀 정신이 멀어질수록 허리 짓은 더 빨라졌고 구멍은 더욱 꽉 죄였다. 동시에 소름 끼치는 쾌락이 몸을 잠식했다. 머리 뒤를 찡하게 울리며 뒷목을 뻐근하게 훑고 내려와 다리 사이의 한 지점에 낙뢰처럼 콱 박히는 쾌락. 숨을 쉴 수 없다. 신세현의 손 때문인지, 한없이 고취되는 황홀감 때문인지.
“윽!”
이를 아득 무는 소리가 들리고 정액이 퍼져 나가는 특유의 소름 끼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제야 들었던 허리를 툭 떨어트렸다. 몸이 늘어졌다. 온 근육을 수축시켰던 몸의 긴장이 풀리고 역시 탁 풀린 구멍에서 정액이 주르륵 흐르며 퍼져 갔다.
“허으으….”
“선배 구멍 진짜 별미다. 엄청 쫀득했던 거 알아요? 그 흐물거리던 게 맘먹고 꽉 조이니까 좆은 쫀쫀하게 무는데 안은 또 풀릴 대로 풀려서 부드럽고.”
사정을 한 신세현은 조금 관대해져 있었다. 힘없이 숨만 색색 쉬는데 얼굴 위로 늘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려 땀을 닦아 주었다. 그렇게 뭉근거리며 허리를 느리게 비비다 주르륵 빼낸 후 몸을 돌렸다.
아. 그럼 그렇지. 관대한 신세현이라니.
“아까처럼 쫀득하게 조여 봐.”
푹. 몸이 쪼개지는 것 같은 압박감이 젖은 구멍에 다시 박혀 들었다.
***
“선배. 학교 자퇴하는 거 어때요?”
“…뭐라고?”
이 미친 새끼가 지금 뭐라 한 거지?
“그게 낫겠다. 이왕 자퇴하는 거 집도 여기로 옮겨요.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거 귀찮잖아.”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난 학교 계속 다닐 거야. 갑자기 어떻게 자퇴를 해. 그리고 집도…. 그냥 거기서 살게. 너희 집이랑 많이 먼 것도 아니잖아…. 응?”
신세현의 기분에 거슬리지 않게 최대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슬쩍 눈치를 보는데 신세현은 특유의 그 좆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표정한 눈매가 사납게 찢겨 있고 삐뚜름한 미소만 한쪽 보조개에 걸려 있는 미묘한 표정. 신경에 거슬릴 때 짓는 예의 그 표정이었다.
“선배 학교 다니기 싫어질 텐데?”
왜 싫어지는데, 씨발 놈아.
“아니야. 나 학교 좋아. 진짜 열심히 해서 들어왔어. 나 3년 동안 죽어라 공부해서 들어온 학교야. 그런 말 하지 마….”
“그래요?”
신세현은 관심 없단 투로 대충 대답하곤 소파에 늘어진 몸을 들어 옮겼다.
아. 씨발. 또.
“알았어요. 그럼 됐고 섹스나 해요.”
방긋거리는 얼굴을 한 대라도 치고 싶었다.
“학, 하윽!”
강하게 쳐올리는 허리 짓에 목이 뒤로 잔뜩 젖혀지고 목울대가 울렁이는 순간 은성의 성기에서 물이 팍 튀었다. 허옇지도 꿀렁이지도 않는 맑은 물이 쪼르르 허공으로 튀는 와중에도 세현의 허리 짓은 멈추지 않았다. 잠시 윽, 하는 신음을 낸 세현이 은성을 가두듯 침대 헤드를 꽉 잡곤 꽝꽝 찧듯이 허리 짓에 박차를 가했다.
“흐으윽! 아, 아! 잠, 흐윽!”
은성은 앞이 팍 터지며 가는 와중에 뒤로도 마른 절정이 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처음 느껴 보는 버겁고도 생경한 감각에 무력하게 신음하기만 했다.
안으로 푹 박혀 오는 성기가 끈적이게 달라붙는 액을 쯔그극 훑었다. 안쪽 살을 뻑! 치며 깡그리 뭉개더니 빠져나가곤 다시 세게 때리듯 살점에 박혀 들어온다. 쪼르르 나오던 물은 세현의 허리가 한 번 쳐올릴 때마다 쪼륵, 쫄 새더니 마지막으로 찍 곡선을 그리곤 멈췄다.
그러나 몸을 휩쓰는 탈력감과 희락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세현의 성기가 성감대를 온통 짓누르며 강제적인 쾌락을 때려 박았다. 끊기지 않는 성감에 숨이 막힌다.
“윽! 세, 세현, 아! 흐!”
형광같이 쨍한 색들이 네온사인처럼 빛나고 잡힐 듯 쥐어지지 않는 이상한 감각이 구멍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성기가 퍽퍽 박혀 올 때마다 이제 정말 닿을 것 같은데 얕은 허리 짓으로 애태우다 쑥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아슬아슬하게 스치곤 빠져나가는 허망감에 몸이 달았다. 조급함을 반영하듯 은성의 허리가 절로 달달 떨렸다. 박힐 때마다 나오는 신음에 애타는 애원이 서렸다.
“아으! 세현, 세현아, 흑! 나, 나 좀, 나, 흐아!”
시야가 희게 물들어 가는 걸 느끼며 은성은 어떻게 좀 해 달라는 듯 세현에게 몸을 붙이며 끌어당겼다. 달달 떨리는 다리를 세현의 허리에 감아 당기며 엉덩이를 들어 붙였다. 위에서 흉흉하게 내려다보는 세현의 목을 끌어안아 당기며 꽉 잡힌 허리를 바르작거렸다.
세현은 자신을 끄는 작은 힘에 잡고 있던 침대 헤드를 놓고 끌려가 주었다. 그 조그만 몸이 자신에게로 파고드는 걸 기꺼이 여기며 꼬물거리는 몸을 끌어안았다. 겨우 몇십 센티 더 가까워졌다고 쾌감이 더욱 짙어졌다.
“흐으윽!”
아, 너무…. 이게 무슨 감각인지 모르겠다. 들이쉬는 폐부가 풍선처럼 크게 부풀어 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허리께에 뻐근히 뭉쳐 있던 것들이 세현의 허리 짓 한 번에 연달아 팡팡 터져 나갔다.
경련을 일으키는 내벽이 품은 성기를 꾹 조이며 진동했다. 따듯한 액이 주르륵 나와 점막을 적셨다. 세현은 자신의 정액을 머금어 질척거리는 구멍에 느릿하게 성기를 넣었다 빼며 사정 후의 나른함을 마음껏 즐겼다. 쿨쩍쿨쩍 축축한 마찰 음이 울렸다.
“하…. 선배.”
세현의 눈은 희미하게 남은 여운을 더듬듯 흐려져 있었다. 또는 열락에 취해 김이 서리듯 뿌예진 것일 수도 있었다.
“선배는 분수도 예쁘게 싸더라. 이거 보여요? 선배가 싸지른 건데.”
“흐으, 흐….”
세현이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복근이 알맞게 자리 잡은 탄탄한 배 위로 맑은 물 같은 게 주륵 흐르고 있었다. 세현이 그 물을 손으로 훔쳐 은성의 입에 쑤셔 넣었다. 은성이 갑작스레 입 안으로 들어온 손을 저도 모르게 깨물었다. 세현이 눈을 찌푸리자 더 좆같은 일을 당할까 흠칫 놀란 은성이 곧바로 손을 빨았다. 긴 손가락이 목젖을 건드리려 해 캑캑거리면서도 필사적이었다.
“끕, 끄….”
“어때? 정액 맛이랑은 달라?”
“흐, 모르… 후으… 모르, 모르겠어….”
“너무 적어서 그런가? 내가 컵에 받아 줄까요?”
세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타액이 잔뜩 묻은 손을 빼내고 휴지에 닦듯 가슴에 덕지덕지 묻혔다.
“아니, 아니야. 달라. 달라.”
“아, 그래? 어떤데요. 내가 싸 주는 정액이 더 좋아, 네가 싸지른 분수가 더 좋아?”
“흐, 제발 그, 그런 거 물어보지 마아…. 흐으….”
이 개좆같은 씨발 놈아.
“응? 아, 선배 결정 잘 못 하는구나.”
세현이 이해한다는 듯 얼핏 보면 관대한 미소를 걸쳤다.
“둘 다 좋아서 그래요? 그럼 둘 다 먹여 줘?”
“아니, 네 거…. 네 거가 더, 흑, 더….”
“더 뭐?”
“더 좋아….”
“내 거 뭐가요?”
“저, 정액, 흑….”
입에 기분 나쁜 오물이 들이차는 것 같다.
“문장으로 다시 말해 봐. 중간중간 답답하게 끊지 말고. 계속 그렇게 내숭 떨면서 나 애태우면 내가 나쁘게 굴 수도 있잖아요.”
여기서 더 나쁠 수도 없을 만큼 신세현은 이미 충분히 개좆같은 나쁜 새끼였다.
아직 나가지 않은 성기가 뭉근하게 내벽 안을 쓸었다. 크게 원을 그리며 젖은 살들이 마찰하자 은성의 허리도 절로 움직임을 따라가듯 원을 그렸다. 세현이 픽 웃었다.
“흐아, 으, 네, 네 정액이 더, 좋아. 흐….”
“그래. 앞으로도 많이 싸 줄게요. 위에도 아래도.”
무식하게 목구멍까지 틀어박혔던 그 기억이 떠올랐다. 같은 짓을 또 당할 것 같다는 예감에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니, 이미 짓물러 있던 눈가였다.
“흐으으….”
인생이 너무 개 같아서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좋아? 쑥스럽다. 선배 너무 귀여워요.”
“흐윽, 흐….”
씨발.
“아…. 선배 안 너무 좋다…. 뜨끈하고 말랑거리고 부드럽고 축축해. 계속 넣고 있고 싶어요. 이거 본떠서 끼고 다닐까.”
방금 사정했으면서 또다시 점점 부푸는 성기가 느껴졌다. 머릿속에서 앵앵거리는 위기감에 세현의 어깨를 밀어냈다.
“이, 이제 빼 줘….”
“응? 무슨 소리야. 또 섰는데. 알면서 이러지? 여우야, 완전.”
세현은 퍽 기분 좋은 투로 은성의 날개 뼈를 쓸며 중얼거렸다.
“음…. 선배 아까 했던 거 다시 한번 해 볼래요?”
“흐, 안, 안 돼.”
“왜? 할 수 있어요. 내가 도와줄게.”
“아니…! 아…!”
“진짜 좋았어…. 손에 쥐여지지도 않을 것같이 흐물흐물 풀어져 있더니만 그 물렁거리는 걸로 꽉 물어서 놔주질 않고.”
손가락이 은성의 치골을 덧그렸다.
“박을 때마다 살은 더 녹아서 아주 엉기고 달라붙고 난리가 났는데 그 와중에도 선배는 느낀다고 엉엉 울면서 조이고. 허리는 또 흔드는 걸 넘어서 아주 탈탈 털어 대고. 내가 선배 여기까지 넣어줬는데.”
세현의 손가락이 은성의 배를 쓸어 올리다 가슴 아랫부분의 명치 부근에서 멈췄다.
“더 깊게 박아 달라고 다리 감고 치댔잖아요.”
배에서 떨어진 손가락이 퉁퉁 부어오른 유두를 한 번 튕기듯 툭 치곤 손가락 사이에 끼워 잡아 올렸다.
“흐아!”
불쑥 허리가 들리고 성기 모양대로 부푼 배가 더욱 도드라졌다. 세현이 장난에 성공한 아이처럼 작게 키득거리며 허리를 쳐올렸다. 붕 뜬 허리가 더욱 휘더니 옆으로 풀썩 꺾이며 무너졌다.
“공간이나 더 만들고 깊게 박아 달라고 해야지.”
허리를 한 번 더 깊숙이 쳐올리자 퍽! 맞부딪히는 살 소리가 울렸다.
“여기까지밖에 안 들어가면서 뭘 더 해 달래.”
“악! 흐으….”
“하여간 선배는 보면, 그릇은 작은 주제에 욕심은 많더라.”
“흐어엉….”
“아, 그런 표정 하면 또 마음 약해지잖아. 선배가 그러면 난 또 달래 줄 수밖에 없단 말이에요.”
세현이 바람에 휩쓸리는 낙엽처럼 박는 대로 흔들거리는 은성의 두 뺨에 손바닥을 대고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괜찮아. 선배는 욕심 많아도 돼요. 부족하면 내가 다 채워 줄게.”
닦아도 닦아도 다시 흘러 길을 내는 눈물을 보며 세현이 눈을 휘었다.
“선배 좁은 구멍도 내가 길 내 줄게요.”
“아니, 흑!”
세현이 은성의 골반을 단단히 붙잡고 아래로 훅 끌어 내렸다. 가볍게 딸려 간 몸을 단번에 꿰뚫는 것을 시작으로 물 튀기는 추삽질이 다시 이어졌다.
***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할까, 가 벌써 수차례나 반복되었다. 울컥거리는 구멍에 다시 정액이 퍼졌다. 이젠 더 머금지도 못해 거품이 일며 밖으로 새어 나갔다. 세현은 엉덩이 살을 가르듯 벌리고 꿈틀거리며 정액을 울컥울컥 뱉어 내는 구멍을 보았다. 속살이 몽땅 짓이겨지고 부어 새빨갰다.
아. 이딴 꼴로 엎어져서 색색거리니 내가 못 참지.
울음이 덕지덕지 붙은 채 고단하게 잠든 몸을 보았다. 그러게 왜 바람을 피웠을까. 진짜 내가 모를 줄 알았나. 평소엔 똑 부러지는 것 같았는데 왜 이렇게 멍청하지?
사실 선배가 먼저 말했다면 용서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화가 나도 상대를 족쳤으면 족쳤지. 선배에게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땐 스스로를 기이하게 여기면서도 선배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선배가 아파하는 꼴을 못 봤고 어떻게든 좋아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저를 호구로 여기는 은성을 알면서도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늘 제가 먼저 찾고 먼저 연락하고 실실 웃으며 비위를 맞추면서도 그만둘 수 없었다. 어쩔 땐 이런 내 모습이 너무 비참하고, 날 초라하게 만드는 은성에게 너무 화가 나 한 번 난잡하게 뒹굴고 끊어 내려 했다.
하지만 막상 그 얼굴을 보면 매 순간마다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딛고 있던 바닥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기묘한 부유감. 감히 제가 어찌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만 몰랐다면 계속 그랬을 것이다.
초반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모습, 들뜬 감정, 꼭 쥔 휴대폰과 짜증이 스민 초조함 등. 마지막 확신은 역시 그가 무방비하게 둔 휴대폰의 예약 알림과 지갑에서 떨어진 콘돔 때문이었다.
어쩌면 알면서도 스스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며 알고 싶지 않아 했던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결국 눈앞까지 결정적인 증거가 들이밀어졌고 선배에 대한 애틋함이 증오로 바뀐 건 순식간이었다.
거의 숭배하듯 선배를 좋아하며 자제하고 인내했는데 돌아온 건 이따위 변절이었다.
도은성 그 씨발 새끼는 마지막까지 사과는커녕 귀찮은 것을 떨쳐 내듯 헤어지자는 말만 남기곤 떠나갔다. 그 걸레 새끼. 제가 그렇게 사랑한다고 귀애하고 보듬어도 순결 서약이라도 한 양 밀어내더니 만난 지 몇 주 되지도 않은 것한텐 그렇게 쉽게 몸을 내준다고?
살면서 그렇게 감정이 격해진 건 처음이었다.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죽이고 싶었다. 아무 데나 끌고 가서 좁은 구멍을 찢어 놓고, 헐도록 박고, 토할 만큼 싸지른 다음 몸을 찢어 죽일 작정이었다. 아니지. 팔다리를 부러뜨려 오나홀로 쓰는 것도 좋을 듯했다.
당길 때마다 박아 넣고, 밥 대신 정액만 먹이고, 심심해지면 아무거나 구멍에 욱여넣으며 힘들어하는 꼴을 즐기는 것도 꽤나 좋은 생각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하려 했다. 하지만 한순간 끌어내리는 건 너무 쉬웠다. 선배 같은 거지새끼 인생 하나 족치는 게 얼마나 지루한 일일지. 그가 직접 애원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 고통에 굴복한 애원 말고. 제 선택을 처절히 후회하며 매달리는 꼴을 봐야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약간 돌아갔다. 뻔뻔하게 바람피운 주제에 의외로 멘탈은 약한 건지 예상보다 빠르게 무너졌지만 그 우는 모습과 덜덜 떠는 모습이 만족스럽긴 했다. 선배는 사지 멀쩡히 잘 붙어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되는데. 내가 얼마나 많이 봐준 건지. 짜증 나지만 어째. 세상에서 떨어지면 결국 죽는 건 내가 될 테니 잘 다듬어 가며 붙어 있을 수밖에.
“선배.”
“…신세현?”
산뜻 미소 지은 세현이 손을 흔들며 눈을 휘더니 은성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너…. 이 수업 안 듣잖아.”
“도강하려고요.”
“아….”
어쩐지 불길했다. 눈이 잔뜩 휘어져 웃음을 뚝뚝 흘리는 것 같지만 미세하게 입가가 굳어 있었다. 불쾌감 또는 기대로. 뭐든 나한텐 좋은 일이 아닐 거란 건 분명했다. 그리고 나쁜 예감은 늘 틀리지 않듯 신세현은 기어코 미친 짓을 시도하려 했다.
수업이 끝나고 썰물처럼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학생들의 틈바구니에서 신세현은 가만히 내 팔을 잡고 앉았다. 벗어나려 할수록 은근히 가해지는 악력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또 뭘 하려고.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아도 신세현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 두드리며 콧노래만 흥얼거렸다. 그리고 마지막 학생까지 빠져나간 후, 그가 천천히 다가가 앞문을 잠갔다. 문의 불투명한 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인영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선배. 저기 엎드려요.”
“…뭐?”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선배가 학교 좋대서 일부러 기다렸잖아. 빨리 엎드려요.”
도강이라며, 씨발 놈아.
“세현아, 여기 학교잖아. 응?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아….”
“왜. 선배가 학교 좋다면서요? 그래서 해 준다니까?”
“아니….”
“빨리 엎드려 봐. 여기 1시간 후에 수업 있는데 빨리 안 박히면 누가 올 거 아니에요. 선배 슬슬 다른 좆도 물고 싶어?”
“이거는…. 이건 진짜 아니야.”
낭패다. 처음엔 신세현이 또 질 낮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일부러 곤란하게 만들고 대안을 제시해 마치 내 선택인 듯 교묘하게 말하는 그 짜증 나는 장난. 하지만 신세현은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이 강의실에서 박으려 하고 있다. 누가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는 강의실에서. 심지어 다음 수업 일정도 잡혀 있는데.
“세현아, 집에 가서 하자. 응? 내가, 내가 잘할게….”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그 팔을 잡아끌었다. 지금도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데 여기서 하는 건 진짜 아니다. 절대 안 된다.
“선배는 참…. 좋게 말을 하면 못 알아 처먹어.”
세현이 고개를 절레 젓고 자신의 팔을 끄는 은성의 손목을 낚아챘다.
쾅!
순식간에 책상에 상체가 처박히고 뒷목이 억센 손길에 잡혀 꾹 눌러졌다.
“윽!”
바지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놀란 마음에 이리저리 발버둥 쳐 봐도 이미 몸은 단단히 고정된 채였다.
“기어코 말을 안 들어서 더 나쁘게 만들지.”
바지가 툭 발목까지 떨어지고 이어 속옷도 벗겨져 무릎께에 걸쳐졌다. 세현이 손에 쥔 작은 상자에서 콘돔 하나를 꺼내 입으로 물고 찢었다. 성기에 끼워 넣고 그대로 은성의 한쪽 다리를 잡아 책상 위에 접어 올리고 벌어진 구멍에 성기를 밀어 넣었다. 단단히 닫힌 구멍이었지만 콘돔에 발린 윤활제와 억지로 밀어 넣는 힘에 좁디좁은 구멍으로 큰 성기가 욱여넣어졌다.
“끄, 윽…!”
“하…. 얌전히 말 들었으면, 윽, 구멍도 풀어 줬을 거 아냐.”
“흐, 아파…. 아, 아…!”
“선배, 강의실에서 섹스 한다고 소문내기 싫으면 알아서 입단속 하세요.”
퍽!
“흐, 끕!”
세현에게 잡히지 않은 한 손으로 입을 꾹 막으며 높게 터져 나가려는 신음을 삼켰다. 세현은 다리가 훌쩍 들릴 정도로 거칠게 박아 왔다. 까치발로 바닥을 디딘 다리는 부들거렸다. 은성은 아예 상체에 힘을 싣고 다리의 힘을 풀었다.
세현이 한 번 허리 짓을 할 때마다 몸이 치켜 올라가며 책상이 덜컹거렸다.
“아, 책상 덜컹거리는 거 존나 야하다.”
“으! 흡! 읍!”
너무 아프다. 막은 손바닥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사정없이 뭉개지는 속살에선 액이 찔끔찔끔 나왔다. 무자비한 성기가 아무데나 다 박으며 살을 찧어 놓았다. 동그란 밀가루 반죽을 주먹으로 쾅쾅! 쳐 대는 것 같았다. 뻑뻑했던 구멍이 서서히 많이 치댄 반죽처럼 물렁해져 갔다. 기둥을 따라 살이 쫀득하게 늘어났다. 물기 없던 구멍에 부드러운 맛이 스미기 시작했다.
세현이 점차 끈덕지게 살을 오물거리는 구멍을 느끼며 엎어진 상체를 잡아 세웠다. 뒤로 잡아 꾹 눌렀던 한쪽 팔을 잡아끄니 휘청거리는 상체가 서서히 세워졌다.
“으아, 윽!”
“선밴 신음도 잘 못 참네.”
허리가 젖혀지자 얇은 뱃가죽이 성기의 윤곽대로 볼록 튀어나왔다. 은성의 고개가 푹 숙여지더니 쾅! 쑤셔지는 구멍에 앓으며 뒤로 팍 젖혀졌다.
“선배 때문에 우리 섹스 하는 거 다 들키겠어요.”
“흐으, 흑, 윽…!”
“아주… 좋다고 정신 놓고 헤벌레 하네.”
처절하게 흔들리는 은성을 헤벌레 하다고 왜곡하여 빈정거린 세현이 잡았던 팔을 놓고 콘돔 상자를 찾았다. 덜컹덜컹 흔들린 책상 때문에 바로 옆에 두었던 게 떨어질락 말락 모서리까지 밀려나 있었다. 상자를 뒤집자 여러 개의 콘돔 봉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콘돔을 한 움큼 손에 쥔 세현이 그대로 은성의 입에 처넣었다.
“으브, 윽!”
“이거라도 물고 있어요.”
“커윽! 헉, 욱!”
입에 콘돔 봉지를 쑤셔 넣고 손바닥으로 막아 뱉어 낼 수 없었다. 네모난 봉지들이 이리저리 구겨지며 입 안에 맴돌았다. 모서리가 여린 입 안을 할퀴고 이에 씹혔다. 울렁거리는 목울대로 넘어갈까, 침도 못 삼키며 몸이 덜컹 흔들릴 때마다 입 안의 콘돔들을 짓씹었다. 자의는 아니었다. 거친 트럭 뒤에 앉은 듯 덜커덩거리는 몸이 저절로 이를 다물게 했다. 뭐라도 쑤셔 들면 그대로 다물리는 구멍처럼.
“우붑, 우윽…!”
멀미하듯 울렁이는 몸이 뒤로 꺾여 들 때마다 구멍이 조여드는 게 느껴졌다. 성기가 단번에 꿰뚫으며 들이찰 때마다 내장이 더 깊은 곳으로 쑥 밀려드는 것 같았다. 너무 아프다. 하지만 고통에 쾌락이 섞여 든 것도 사실이었다. 부어오른 구멍은 살을 스치는 성기 때문에 화끈거리며 쓰라렸기에 이대로 계속 박혀 흐물흐물 풀리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특히나 이상한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다리 사이가 못 견딜 만큼 뜨거워서 미칠 것 같다. 질리지도 않고 박혀 오는 게 불덩이 같았다. 아니, 내 속이 불덩인가.
홱홱 시야가 돌아가고 하얗게 아찔거리고 연신 반전되면서 따가운 불씨가 탁탁 튀겼다. 곤두선 감각이 한곳으로 몰렸다. 칼로 저미는 듯한 예리한 쾌감이 살을 구석구석 할퀴어 갔다. 뭉툭하게 퉁 울리더니 금세 날카롭게 변해 이곳저곳에 다 쑤셔 들었다.
“아, 콘돔 터졌다. 그래도 괜찮죠?”
위에서 들리는 세현의 말도 웅웅거리는 귓가는 웅얼거림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우웁, 욱!”
입 속엔 여전히 여기저기 씹힌 콘돔 봉지가 나뒹구는 중이었다. 아프고 따가운 감각에 눈물만 펑펑 쏟으며 흔들리는데 돌연 머리에 둔탁한 충격이 퍼지며 까마득, 암전됐다. 사람을 때리기라도 한 듯 뻑! 짧게 울린 소리에 저가 맞은 줄 알았다.
위에서 상체를 누르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뜨거운 속에 정액이 더 뜨겁게 퍼져 나가 주르륵 흐르고 고이는 길이 선명히 느껴졌다. 그제서야 줄곧 입을 막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가고 입 안 가득했던 콘돔도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컥! 우웩, 윽….”
콘돔들은 타액에 절어 희미한 실선이 거미줄처럼 엉켜 있었다. 뚜욱. 길게 떨어진 선을 마지막으로 입이 다물렸다. 입꼬리가 지친 듯 축 처졌다. 얼굴도 울적하게 어둑어둑했다.
“선배. 저 이제 수업 가 봐야 돼서.”
지쳐 축 처진 은성과 달리 세현은 일상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선배가 흘린 건 잘 닦고 나와요. 그럼 저녁에 뵐게요.”
상쾌한 듯 시원한 눈매가 사르르 접히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장난치듯 은성의 볼을 툭 친 세현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가벼운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탁, 마지막으로 들렸다.
허망하게 선 은성은 천천히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발목에 걸쳐진 바지와 속옷, 다리 사이 점점이 흩어져 묻은 액, 그 옆에 버려져 있는 터진 콘돔, 언제 쌌는지도 알 수 없는 정액이 흩뿌려진 책상, 보이진 않지만 느껴지는 난잡해진 구멍.
고여 있던 눈물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후드득 떨어졌다. 비참한 와중에도 누가 들어오지 않을까 마음이 조급해졌다. 공포에 짓눌린 채 휴지를 꺼내고 대충 닦은 엉덩이 위로 얼른 속옷과 바지를 올렸다. 책상도 닦고, 바닥도 꼼꼼히 닦고, 터진 콘돔은 휴지로 집어 들어 다른 휴지를 여러 번 덧대 뭉친 후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얼른 집에 가서 자고 싶다.
***
“이거 넣어 봐요.”
신세현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한 걸 요구했다.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던 선을 제멋대로 넘어 들며 더 지나치고 더 과해졌다. 그게 신세현의 변덕스러운 심술 때문인지 본래의 성정에서 기인한 취향 때문인지 알 수 없기에 더욱 조마조마했다.
“선배 느낄 때마다 구멍 벌어지던데 속옷은 입혀 줘야 되나. 길 가다가 갑자기 떨어지면 어떡해요. 많이 곤란하겠다.”
“세현아, 이러지 마.”
“뭐가?”
“제발 이런 것 좀 시키지 마….”
“이게 싫으면 정액 넣어 줄까요? 근데 선배한테 박고 나면 구멍 존나 흐물거려서 다물지도 못할 텐데…. 뚝뚝 흘리면서 걸어 볼래? 헨X과 그X텔이겠네. 길거리에 떨어진 정액 따라가면 선배가 있고. 그럼 마지막엔 선배 따먹는 건가? 우리 나중에 해 볼래요?”
끔찍한 말에 눈을 감았다. 신세현은 정도를 모른다.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도대체 왜.
“빨리 선택해요. 정액 머금고 싶으면 지금 여기서 한 판 뜨고, 아니면 얌전히 이거나 잘 물고 있어.”
텅 빈 화장실의 마지막 칸 안. 조용한 공간 탓에 신세현의 낮은 목소리가 더욱 소름 끼치게 파고들었다. 집에 가려는데 다짜고짜 끌고 들어가선 선택을 종용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신세현 손에 들린 로터를 잡았다. 무겁게 처지는 손으로 엉덩이를 벌렸다.
“넣는 모습도 보여 줘야죠.”
씨발.
천천히 뒤돌고 엉덩이 사이로 로터를 꾹 집어넣었다. 등 뒤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작아서 그런지 수월하게 들어가고 벌린 구멍이 금방 다물렸다. 좁게 닫힌 엉덩이 사이론 줄 하나만 삐죽 나왔다.
“아.”
세현이 기껍게 입꼬리를 당겼다.
“그럼 이제 집에 갈까요?”
종아리쯤 오는 긴 코트가 은성의 나체를 감쌌다. 코트 깃이 움직일 때마다 휑한 하체로 쌀쌀한 바람이 들어왔다.
바지와 속옷은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입술을 사리물며 장난감 취급하는 신세현을 노려보았다.
“알았어요. 가면 박아 줄 거니까 표정 풀어. 누굴 잡아먹으려고 아주.”
어깨에 자연스레 팔이 감기고 끌어안기듯이 신세현에게 딱 붙은 채 화장실에서 나왔다. 복도를 지나고 캠퍼스를 걸어 나올 때만 해도 그리 불편하진 않았다. 이상한 이물감이 계속해서 느껴지긴 했지만 미미한 감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윽!”
움찔 어깨가 떨리며 다리가 멈칫했다. 신세현을 쳐다보자 그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눈이 마주치자 눈을 가늘게 휜 그가 입을 벙긋거렸다.
‘좋아?’
그 말에 홱 고개를 돌려 앞을 봤다. 그러나 계속 걸을 수 없었다. 엉덩이 안에서 덜덜거리는 진동에 무릎이 후들거리고 계속 안쪽으로 굽혀 들려 했다. 가늘게 나온 한숨은 약한 신음 같았다.
“왜 안 가요?”
손바닥에 땀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아래쪽의 쾌감이 단숨에 머리끝까지 치고 오르고 숨이 가빠졌다. 아무리 주먹을 꽉 쥐고 다리를 꾹 붙여 봐도 다리 사이에 푹 박혀 달달달 몸체를 떠는 것은 내벽을 마구 짓이기며 쾌락을 전했다.
“빨리 가자니까?”
일상적인 어조엔 장난기가 스며 있었다. 안은 어깨를 앞으로 훅 끌자 다리가 벌어져 딛고 있던 발을 떼었다.
“흣…!”
작은 보폭으로 발이 벌어진 순간, 은성은 하마터면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온몸의 장기가 아래로 훅 끌어당겨지는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바이킹을 탈 때나 느꼈었던 그 이상한 부유감과 하강감이 가슴을 철렁이게 했다. 차마 더 걸을 수가 없었다.
아래에서 시작된 진동은 멈출 기미 없이 지속되었다. 금방이라도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엉덩이 사이에 파묻힌 작은 진동 소리가 당장이라도 새어 나갈 것 같았다.
“이리로 와 봐요.”
“자, 잠…. 흐, 잠깐만! 아흐….”
신세현이 강제로 어깨를 당기자 은성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다리를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로터가 슬쩍 다른 쪽으로 비집고 들어 새롭게 쾌락을 뭉쳐 갔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어깨를 안은 단단한 팔이 없었다면 진작 넘어졌을 것이다. 연신 간질거리는 조그만 것 때문에 아랫배가 당겼다. 점점 일어서는 성기가 느껴져 손톱을 세워 손바닥을 눌렀지만 머릿속은 이미 쾌락으로 엉켜 가는 중이었다.
“흡….”
숨을 참아 봐도 소용없었다. 젖꼭지가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지며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구멍에 뭐라도 쑤셔 넣고 싶을 정도로 간질간질 속살이 떨렸다. 움찔움찔 허리가 떨릴 때마다 아래에서 묵직하게 달랑이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아, 씨발.
“윽!”
어느새 골목 안으로 끌고 들어온 신세현이 몸을 밀쳐 손바닥으로 벽을 짚게 했다. 곧장 얇은 코트 자락이 허리 위로 올라가고 하체가 드러났다. 살짝 벌어진 다리 사이로 짧은 줄이 가늘게 흐늘거렸다.
줄을 잡아당기자 속살을 비집고 돌아다니던 동그란 것이 딸려 나오며 뒤집어쓴 액까지 함께 주르륵 나왔다. 원래는 옅은 분홍색이었던 것이 허연 점액을 뒤집어써 얼룩덜룩했다. 불편한 이물질을 뱉어 낸 엉덩이가 잔뜩 굳어 있던 근육을 이완시키며 긴장을 풀었다. 그런데 곧장 손가락 두 개가 푹 쑤셔 들어 빈 구멍을 다시 메웠다.
“허, 흑!”
뒤에 선 신세현의 다리가 은성의 다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오른발을 쓱 밀었다. 오른쪽 다리가 옆으로 밀려나면서 자연스레 다리가 더 벌어졌다. 세현이 수월하게 손가락을 세워 구멍을 제멋대로 드나들었다. 계속 고취되던 쾌감이 한 겹 더 씌워지고 허리가 절로 흔들렸다. 신세현의 웃음이 바람결처럼 귀에 닿고 흔들리는 손가락을 타고도 전해졌다.
“흐윽!”
수치심에 입술을 깨물면서도 허리를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내벽이 좌르륵 긁어지는 기묘한 움직임에 성감이 극대화되었다. 손가락은 능숙하게 속을 뒤집어 놓았다. 구멍 안을 속속들이 잘 안다는 듯이 긁는 곳마다 벅찬 쾌감을 선사했고 가장 느끼는 지점에 푹 박혀 들어 허리가 배배 꼬였다.
슬슬 돌리며 박고, 갈고리처럼 휘어들고, 꾹 눌러 잘게 비비고. 손가락이 절로 곱아들며 거친 담벼락을 드득 긁어내렸다. 담을 짚은 손바닥에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그러자 장난치듯 속에 박힌 손가락 역시 안쪽을 세게 때리듯 박곤 곧장 굽어 들더니 그대로 점막을 긁으며 빠져나왔다. 내벽에서 잔뜩 새어 나온 액들을 몽땅 끄집어내는 듯했다.
“헉, 허윽….”
손가락이 능수능란하게 움직여 댈 때부터 머리가 텅 빈 것같이 정신이 날아갔는데 어느새 앞을 보니 벽에 희묽은 정액이 흩뿌려져 있는 게 보였다. 손가락이 나오자 은성은 겨우 뜨인 눈으로 멍하니 제 흔적을 응시했다. 믿기지 않았다. 벽에 묻은 묽은 정액은 서서히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와. 겨우 손가락 두 개로 간 거야? 선배도 참 선배다.”
어깨에 턱을 올린 신세현이 배를 쓸며 조롱하듯 중얼거렸다. 끈적한 점성이 묻은 손가락이 허리께에 즉- 달라붙었다.
“다리 더 벌려 봐요.”
부시럭거리는 소리 뒤로 바지 버클이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몽롱하게 잠겨 가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안 돼. 여기선 싫어….”
“네가 뭐라고 장소를 가려.”
“누가, 누가 오면 어떡해.”
“뭘 어떡해요. 같이 하면 되지.”
“싫어. 진짜 싫어. 안에 들어가서 하자. 응? 이제 곧 집이잖아.”
“선밴 맨날 싫다면서 느낄 건 다 느끼고 흘릴 건 다 흘리더라.”
긴 손가락이 회음부를 따라 스륵 미끄러지듯 올라갔다. 그 손길에 저절로 허리가 바르르 떨리고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제발…. 진짜 싫어. 여긴….”
집 앞 골목이다. 원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지만 그래도 종종 사람들이 지나곤 했다. 심지어 지금은 환한 낮이었다. 누가 오기라도 하면….
“내가 선배 사정 다 생각해 줘야 돼요? 그러게 진작에 내 말 들었어야지. 내 집으로 들어오랬잖아요. 그럼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어린아이가 떼쓰듯 삐친 목소리였지만 그마저도 낮게 깔리자 위협적이었다. 신세현은 유치한 화풀이 중이었다. 강의실에서의 관계도, 지금 이것도 신세현한테는 그저 한순간의 토라짐에 불과했다. 나한텐 심장이 바닥까지 내려앉는 두려움이 신세현한테는 기분 풀이 유희라는 거였다. 몸이 차게 식어 갔다. 그런데 그 아래로.
“하, 윽…!”
그새 또 성기가 엉덩이를 가르며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양손에 가득 차는 옹골진 엉덩이 살을 벌려 뿌리 끝까지 뻑! 박아 넣었다.
“흑!”
몸이 힘없이 앞으로 밀리고 손바닥이 더듬더듬 벽을 짚었다. 신세현은 여전히 무자비했다.
“학, 하윽…. 하으….”
다리 사이로 정액과 같이 나온 정체 모를 액체가 줄줄 흘러내렸다.
“와, 난리 났네.”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흐, 세현, 세혀나, 세, 세현아, 나, 나 못 하겠어…. 진짜, 제발….”
이제 다리는 후들거리는 수준을 넘어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위태롭게 파들거렸다. 이미 몇 번이나 쓰러지려 한 것을 세현이 계속 허리를 잡아 추켜올려 지금까지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아주 홍수잖아.”
구둣발이 바닥에 흥건한 점액을 지익 끌었다. 발이 향하는 대로 물 자국이 번졌다. 아스팔트의 색상이 더욱 진해졌다.
“흐, 흐윽….”
“뭘 잘했다고 이렇게 한 웅덩이 싸질러 놨어요? 비린내가 여기까지 올라오네. 선배 밖에서 하는 게 취향 아니야? 막 짜릿하고 흥분되기라도 해요?”
“아냐, 아냐…. 허윽, 진짜 아니야.”
“뭐가 아니야. 홍수를 만들어 놓고 아니라 하면 누가 믿어요? 아주 질질 쌌는데. 선배 구멍 죄다 문드러졌겠다.”
“나 이제…. 나 집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고.”
“흐으…. 제발…. 세현아 제발…. 제발 좀…!”
흐느낌이 격해져 엉엉 우는 수준까지 갔다. 텅 빈 속이 정액으로 가득 찬 것 같다. 역한 울렁임에 죽을 것 같다. 혹여 누가 듣기라도 할까 소리 죽여 목구멍을 긁는 듯한 신음이 쇳소리처럼 새는 것도 너무 아팠다. 목이 칼칼하게 아렸다. 몇 번이나 마찰한 구멍도 마찬가지였고, 힘겹게 딛고 선 다리도.
아니, 그냥 몸 전체가 너무 지쳤다. 몇 번이나 절정을 맞는 희락을 느끼면서도 누가 보고 있는 거 아닐까, 혹시 사진이나 영상이라도 찍히면 어쩌지, 아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등 복잡한 고민들이 머릿속에 엉켜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정신줄을 겨우 붙잡았더니 또 한다고. 신세현 이 개씨발 새끼를 당장 죽이고 싶다.
“선배. 앞으로 함부로 울지 마요. 선배 우는 거 보면 마음 약해지는 것도 맞는데.”
뒤에서 뻗어 온 느릿한 손이 얼굴선을 더듬거리며 덧그리듯 매만졌다. 그보다 더 느릿한 목소리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게 또 꼴리기도 하거든.”
부드럽던 손이 다시 허리를 쥐어 잡았다.
“그래도 선배가 많이 힘들어하니까 나도 속상하다. 이게 뭐예요.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막 태어난 새끼마냥 벌벌 떨고. 일부러 나 마음 약해지라고 이러는 거지.”
속상하다기엔 지나치게 즐거움이 깃든 목소리였다.
“내가 좀 봐줄게요.”
신세현이 골목 한구석에 위치한 제설함으로 다가갔다. 손쉽게 그 위에 걸터앉고선 손짓했다.
“선배, 여기 올라와서 앉아요. 살살 해 줄게요.”
“시, 싫어….”
차마 그리로 가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래 봤자 정액이 묻은 벽밖에 없는 것을 멍청하게도 계속 뒤로 몸을 물렸다.
“아. 선배 귀엽긴 한데 빨리 앉아서 열심히 엉덩이나 비벼요. 쓰레기 더미에서 다리 벌리기 싫으면.”
“흐….”
“하긴 저기서 쓰레기처럼 나뒹구는 선배 잡아다 범하는 것도 좋을 것 같긴 해요. 다리는 활짝 벌어져 있는데 안에서 정액 쏟아 내고 있는 모습으로. 좀 축축하긴 해도 그 상태로 박으면 또 얼마나 기분 좋겠어. 잔뜩 풀려 있을 거 아냐. 박을 때마다 찰박거리고.”
“흑….”
“약간 버려진 창부 느낌으로요. 내가 또 그런 컨셉에 환장하거든.”
질질 울면서도 발을 뗐다. 정액을 가득 머금은 배에선 서러움이 들끓고, 조금 걷기만 해도 다리 사이에서 떨어지는 정액에 슬픔이 가득 고여 갔다. 씨발.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 결혼도 안 했으면서 그깟 바람 한 번 핀 게 뭐 대수라고. 따지고 보면 뭐 한 것도 없는데 그런 것도 바람이라고 하나? 너무 억울했다. 진짜 너무 억울하다.
“끝까지 넣어 봐.”
“모, 못 해…. 흐, 못 해….”
세계가 조각조각 부서져 내리는 것 같다. 나름대로 쌓아 올린 것들이 다 무너지고 잔해마저 스러져 흩날리는 것 같다. 황폐하고 다 허물어진 황량한 터. 이런 것도 세계라고 부를 수 있나.
“선배는 내가 저기 엎어 놓고 못 박을 것 같아요? 많이 봐주고 있는데도 왜 계속 뻗대? 아스팔트에 무릎 갈리고 싶어?”
“흐으으, 아니야, 그게 아니라….”
“더 말 안 해요. 알아서 넣어 봐.”
은성은 바들거리는 손으로 세현의 어깨를 잡았다. 끅끅거리면서도 조심조심 한쪽 무릎을 꿇고 세현의 성기를 잡았다. 한 손으로 다 잡히지 않는 흉흉한 것에 구멍을 맞추면서도 눈물이 주룩주룩 연신 떨어졌다. 젖은 회음부에 귀두가 툭 닿았다가 구멍 안으로 찬찬히 삼켜졌다.
“흐으윽….”
세현이 허리를 감싸고 경직된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전보다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가 달래듯 나왔다.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죠? 다 풀려서 괜찮잖아.”
“흡, 으으윽….”
무게감 때문에 기둥이 쑤우욱 들어가고 엉덩이에 고환이 닿았다. 내장 끝에 닿은 것 같은 압박감에 어깨만 그러잡으며 색색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쓸어 주며 답지 않게 조금 기다려 준 세현은 많이 배려해 줬다 생각하며 허리를 위로 올려쳤다. 아직 적응 못 한 은성이 파드득 놀랐다. 은성의 허리가 튕기듯 들렸다 바로 푹 내려앉았다.
“아으읍…!”
“선배 가만히 즐기지, 말고 골반 좀 돌려 봐요.”
“허으, 하으윽! 으응!”
철썩철썩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찰박찰박 물소리가 비슷하게 들렸다. 아니, 그게 그거였다. 어지러운 머리는 괜히 소리를 구분하는 것을 그만뒀다. 머릿속이 흐물흐물 휘저어지는 것 같다. 너무 느껴 이젠 감각이 없을 정도였다.
더는 안 될 것 같은데도 조급한 쾌락은 퍽퍽 허리를 쳤다. 속살을 뭉뚱그리고 다시 돌이킬 수 없게 온통 질척이도록 휘저었다. 점막이든 뭐든 죄다 내려앉은 것 같다. 구멍 안은 죄다 허물어졌다. 힘없이 허물어져 내려 성기를 덮었다.
세현은 축 처진 몸을 더 재촉하지 않고 그냥 골반을 잡아 직접 올려쳐 대며 즐겼다. 자신에게 무너진 몸은 쳐 대는 대로 바들바들 느끼면서도 움직임 없이 가슴팍에 기대 늘어졌다. 그런 주제에 또 구멍은 야물야물 잘도 꿈틀거려 댔다.
뻑!
기어코 깊은 곳까지 비집고 들어간 세현이 푹 박혀 고이길 바라며 사정했다. 그러고도 잠시 나른하게 허리를 돌리다 쑤욱 성기를 빼내고 무릎 위에 앉혔다. 바지 자락이 정액으로 젖어 들어 갔으나 그닥 신경 쓰이진 않았다. 제게 기댄 몸을 보듬고 쓸어 주며 후희를 즐겼다.
***
이건 아니다.
언제 옮겨졌는지 모를 이불 위에서 눈을 뜬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이딴 식으로 살 순 없었다. 엄마 빚은 해결됐고 신세현 곁에 붙어 있으면 이래저래 떨어질 콩고물이 많긴 하나 그건 예전의 신세현일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의 신세현은 오히려 해롭다.
이러다 정말 학교도 자퇴하고 집도 옮겨 허구한 날 다리 벌리고 정액이나 받으며 신세현의 정액받이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 또한 잠깐의 흥미가 다 떨어지면 버려질 게 뻔한데 쓰다 버려진 걸레가 어디로 갈까.
학교도 자퇴하고, 집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고, 돈도 없고, 가진 거라곤 쥐뿔도 없으니 더러운 사창가에서 몇 푼 받으며 구멍이나 대 주며 살겠지. 그러다 구멍마저 헤지면 또 버려지려나.
그럼 정말 끝장일까. 과장된 망상에 가까웠으나 은성에겐 너무도 현실성 있는 예상으로 느껴졌다. 예언자에게 들은 미래처럼 반드시 그렇게 될 것 같았다. 그러니 신세현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한때는 신세현이 실실거리는 호구인 줄 알았지만 이젠 그보다 훨씬 사악하고 악의적이며 좆같은 놈이란 걸 안다. 괜히 벗어나려 했다가 전에 갚은 돈을 달라고 하면 어쩌지. 안 그래도 망한 인생 더 망치려 들면 어쩌지. 학교 때문에 다른 어디로 도망칠 수도 없는데.
점점 초조해져 괜히 손톱을 물어뜯었다. 아무래도 답이 없었다. 그래도 계속 이딴 식으로 살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 해야….
신세현 앞에서 자해 쇼라도 벌여 볼까. 하지만 과연 신세현이 그딴 걸 신경이나 쓸까. 신세현이라면 내가 손목을 그어 피를 흘리든 말든 저가 꼴리면 박아 넣어 혼자 즐길 새끼였다. 목이 매달려 흔들리든 말든 저만 꼴리면 허리를 올려 박을 쓰레기 새끼. 도덕심이라곤 없는 소시오패스 새끼.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개쓰레기 새끼가 신세현이다.
솔직히 애초에 나도 신세현이 좀 쎄 했던 것 같다. 맞아. 그래서 내가 괜히 선우한테 끌렸던 거지. 난 처음부터 신세현이 얼마나 나쁜 새끼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한테 좋아한다고 붙으니까 어쩔 수 없이 받아 준 거였고. 선우를 사랑하기 시작해서 헤어지려 했는데 타이밍이 안 맞아 괜히 바람피운 거로 오해받아 지금 이딴 수모를 겪는 것이었다.
이 개 같은 새끼. 좋아하지도 않는데 불쌍해서 어느 정도 맞춰 줬던 걸 사귄다고 여겨서. 맞아. 애초에 난 신세현이랑 사귄 적이 없었어. 그런데 자기 혼자 착각한 거지. 그러고선 괜히 나한테 바람났다고 뒤집어씌우고 건덕지 잡았다고 날 이렇게 막 대하는 것이다. 와, 신세현…. 이 소름 끼치는 정신병자 새끼….
내가 너무 불쌍하다. 난 어쩌다 저런 거한테 걸려서 이렇게 된 걸까. 시린 연민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오독오독 손톱이 다 씹혀 울퉁불퉁해졌다. 끄트머리를 잘근잘근 씹으며 머리를 굴리는데 문득 너무 좋은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차라리 기억을 잃은 척이라도 할까.
너무 드라마틱한 거 아닌가 싶은데 오히려 이런 뻔하고 극적인 게 더 먹힐 때가 있지 않나. 생각하고 나니 너무 좋은 것 같았다. 그래. 사고라도 당한 것처럼 꾸며서 아무것도 기억 안 난다고 하면 아무리 신세현이라도 뭘 할 수 있겠어. 씨발, 내가 기억이 없다는데 지가 어쩔 거야. 기억 없다는 애 데리고 강간이라도 할 거야, 뭐야.
물론 신세현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지만 조금의 희망이 움텄다. 신세현은 본래 나에겐 누구보다도 다정했으니까. 내가 기억을 잃은 걸 알면 어쩌면 그때처럼, 그때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이제 슬슬 흥미도 떨어질 때가 된 것 같고. 어쩌면 귀찮은 걸 떠안고 싶지 않아 할지도 모르지. 괜찮은 것 같다. 그래. 그렇게 해서 신세현과 완전히 남이 되는 거다.
바닥에 가라앉은 찻잎처럼 울적했던 가슴에 돌연 희망과 기쁨, 설렘이 가득 찼다. 갑자기 기분이 너무 좋아졌다. 까맣게 막막했던 길에 구름이 다 지나고 햇빛이 들이차는 것 같았다. 그래. 이게 맞아. 너무 좋은 생각이야.
오랜만에 은성은 아주 편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앞날이 밝았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좆같았던 신세현은 나쁜 기억으로 남아 서서히 지워질 것이다. 맞아. 그럴 거야. 그러겠지. 입가에 절로 호선이 그려졌다. 모든 게 다 잘될 거라는 예감이 기분 좋게 스몄다.
완벽했던 계획은 막상 실행하려니 걸리는 점이 너무 많았다. 잘못하면 어린애 눈속임도 뭣도 아닌 이상한 뻘짓으로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들었다. 우선 대충 큰 틀을 잡아 두긴 했지만 이게 정말 괜찮을까.
하지만 하늘이 도와주기라도 하듯 예상치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신세현이 건너편 길에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진짜 질린다 생각하며 발걸음을 애써 옮기는데 돌연 높은 비명 소리가 공간을 찢듯이 울려 깜짝 놀랐다. 뭔 일이라도 났나 싶어 앞을 보는데 신세현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뭐라고 소리치는 것 같은데 쨍한 경적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신세현은 약이라도 한 것처럼 실실거려도 무서울 때가 있었는데 저렇게 대놓고 인상을 쓰니 괜히 뭐 잘못했나 싶어 가슴이 떨렸다. 그러다 둔중한 충격이 일더니 몸이 붕 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지도 못하고 멍하니 바닥에 널브러졌다. 소리가 뭉쳐 웅웅거렸다. 어지러운 정신 속에서 토막토막 잘린 언어가 하나의 단어를 만들어 냈다. 교통사고. 몸 어딘가 부러진 것처럼 고통이 뜨겁게 퍼져 가는 부위가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등뼈가 으스러진 것같이 아려 왔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은성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날뛰었다. 씨발, 이거다. 차에 치였는데도 걱정은커녕 하늘이 내린 기회에 대한 감사함이 훨씬 컸다. 마침 신세현도 봤다. 이건 완벽하게도 우연히 일어난 사고였고, 교통사고라면 딱 기억 상실과 연관되고, 어색함 없는 적절한 개연성이었다.
씨발, 이거다. 좋아. 이거야. 이거로 가자. 난 이제 기억을 잃은 거다. 어찌 보면 뻔한 클리셰지만 이만큼 잘 먹히는 소재가 또 없지.
바들바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견딜 수 없어 차라리 축 내렸다. 어렵진 않았다. 아무리 기분이 날아갈 듯 좋다고 해도 몸의 고통을 무시할 순 없었으니. 웅성거리는 소리가 흐리게 울렸다. 신세현의 얼굴이 보이나 싶다가도 뿌연 시야 때문에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뭐라 말하는 것 같은데도 여러 소리에 뒤섞여 분간이 안 갔다.
아, 진짜 존나 아프긴 하네. 개아파, 씨발…. 어째 점점 커지는 것 같은 육체의 고통에 삼켜지듯 의식은 잠겨 갔다. 붕 뜨는 느낌과 함께 까무룩 의식이 꺼졌다.
“선배.”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신세현의 얼굴이었다.
“몸은 어때요?”
대답은 하지 않았다. 몽롱하고 나른하다. 졸리기도 하고.
“선배는 진짜 운도 지지리 없지. 어떻게 거기서 차에 치여요. 아, 아니지. 운전을 좆같이 한 그 새끼 탓이긴 해요.”
신세현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던 주제에 막상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의아하게 얼굴을 응시했다. 반쯤 뜬 눈을 잠시 빤히 보다가 선배? 하고 불러왔다.
“…….”
“선배 지금 말 못 해요? 의사 불러 줘?”
“그….”
막상 하려니까 입이 말라 온다. 쪽팔림과 긴장 때문인지 슬슬 정신도 돌아왔다.
“누구세요….”
말은 굉장히 어색하게 나왔다. 하지만 그 어색함 때문에 오히려 더 실제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신세현은 잠시 무표정으로 시선을 맞추다가 천장을 한 번 쳐다보곤 헛웃음을 뱉었다.
“선배.”
“누구….”
“선배 이름 뭐예요?”
“도, 은성…?”
“나는요?”
“잘 모르겠, 는데요….”
이런 식의 연기는 상상보다 더 곤욕스러웠다. 신세현은 무표정으로 일별하곤 의사를 호출했다. 슬쩍 표정을 살폈는데 의미 모를 무표정만 무감하게 떠 있었다. 잘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환자분도 아마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은데, 그래도 곧 돌아올 겁니다.”
길고 지루하고 뻔한 의사의 진단이 끝나고 나서도 신세현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으면서도 별생각 없어 보이기도 했다. 도대체가 속을 알 수 없었다. 그에 따라 괜히 초조해 가는 건 나였다. 손톱만 손가락으로 긁으며 어색함과 불안을 잠재웠다.
진단실을 나오며 신세현을 흘끔 봤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신기하게도 몸엔 별 이상이 없었다. 어디 뼈가 부러지지도 않았고 단순한 타박상이 다였다. 그래서 검사를 마친 뒤 타박상에 바를 약만 타서 퇴원하기만 하면 됐다.
…그냥 가면 되나? 신세현이 옆에 붙어 있어서.
“선배 집은 기억나요?”
“어? 음…. 그, 자취… 했었나? 솔직히 지금 머리가 좀 아파서.”
“머리 아파? 약은 먹었어요?”
“응. 먹었어.”
당연하게도 버렸다. 뭐가 든지도 모르는 정신과 약을 어떻게 먹어. 괜히 먹었다가 정말로 기억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단 우리 집에 데려다줄게요.”
“어? 왜?”
“네?”
“내가 왜 너희 집에 가는데? 우리 친한 사이였어?”
신세현은 멀뚱히 나를 응시하다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많이 친했죠. 무슨 일 있으면 발 벗고 도와줄 만큼 엄청 친했어요. 그래서 기억 못 한다 했을 때 엄청 섭섭했는데.”
저딴 헛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지껄이는 신세현을 보자 더더욱 이번 기회에 반드시 벗어나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아…. 그, 렇구나…. 내가 미안. 진짜로 기억이 안 나서.”
“괜찮아요. 그 병신 같은 운전사 탓인걸.”
“어,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 상황에서 집 주소가 기억나는 게 그리 이상하진 않겠지? 계속 살아온 주소니까. 그러니 기억났다고 하고….
“그럼 집에 가요.”
“어, 근데 나는 그 지금 좀, 이제 나가려니까 집 주소가 떠오르네? 하하, 그, 생존 본능 같은 건가 봐. 막… 술 취해도 집엔 잘 돌아가는 것처럼…. 아무튼 그래서 나는 먼저 가 볼게. 오늘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 기억나면 바로 연락할게.”
“선배는 진짜….”
신세현은 인상을 찌푸리듯 눈을 가늘게 뜨다 이내 풋, 감추어지지 않고 비집고 나온 경멸처럼 작게 웃었다.
“뇌가 단순한가 봐.”
“어?”
“칭찬이에요.”
어떻게 들어도 멍청하단 뜻이었다. 갑자기 악담을 들은 기분은 극히 저조해졌지만.
“아, 하하….”
할 수 있는 거라곤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는 것밖에 없었다.
***
근 일주일 동안 신세현과 섹스를 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좋은 예감이 부풀어 갔다. 학교생활도 차차 기존 루틴을 되찾아 가는 중이었고, 신세현은 나와 굳이 거리를 좁히려 들지 않았다. 이렇게 서서히 멀어져 가면 이제 정말 끝이겠구나 싶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다. 이따금 열등감을 곱씹으며 돈을 많이 뜯어내지 못했던 걸 후회하겠지만 괜한 욕심으로 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 진짜…. 내 뇌는 어떻게 된 건지 막상 떨어지려 하자 또 신세현의 배경이 아쉬워졌다. 그냥 딱 날 좋아하는 후배 새끼에서 끝나면 좋았을 텐데. 저 새끼가 평생 짝사랑만 이어 가는 소심한 찌질이였다면 마음 놓고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 다 좋은 거 아닌가. 난 원하는 걸 얻고 저 새끼도 주변 사람 정도로 나름 만족하며 살았겠지. 하지만 저건 일반 상식을 뛰어넘는 자식이었다. 이미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정신. 조금 살아났다고 헛생각으로 빠지지 말고 완전히 정리하는 게 옳다.
“선배 시간표는 기억나요?”
“어? 아…. 조금 헷갈렸는데 앱에 저장되어 있더라고….”
같이 캠퍼스를 걷던 신세현이 강의실로 향하는 날 보며 문득 물었다.
“그래요? 선배 시험 범위 같은 건요? 공부한 내용은 기억나요?”
“그…. 처음엔 잘 몰랐는데 차차 돌아오는 것 같기도 해.”
“와.”
신세현이 짧은 감탄을 내뱉으며 눈웃음을 쳤다.
“선배는 천잰가 봐요. 난 기억도 못 했으면서 자기 알아야 할 건 다 아네? 대단하다.”
“아…. 그….”
“장난인 거 알죠? 나만 기억 못 한 거 서운해서 그랬어요.”
작게 투덜거리는 입이 삐죽 나오고 장난스럽게 미간을 찌푸린 신세현이 고개를 돌렸다. 이해하죠? 살포시 웃으며 구하는 양해는 강요에 가까웠다.
“알지….”
신세현과의 관계는 전반적으론 별 탈 없이 흘러가곤 했지만 가끔 취조하듯 물어볼 때는 약간의 불길함이 느껴졌다. 늘 장난인 것처럼 가볍게 지나갔지만 신세현은 전과 같은 안정적인 생활에 돌연 돌을 던져 파동을 일게 했다.
그러나 곧 잊기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세현이 내가 저를 속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난 진작 어딘가로 끌려가 처맞았거나 강간당했겠지. 저 더러운 성질머리를 굳이 죽이며 지금처럼 장단 맞춰 줄 새끼가 아니었다. 게다가 불쾌감 어린 표정도 아니었고 나조차도 착각할 만큼 예전과 같았다. 신세현이 나와 사귄다고 망상하기 전, 그때처럼 다정하고 유순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밤이면 편히 잠이 드는 나날이 일상이 되어 갔다. 망가졌던 것들이 되돌아오는 기분은 살아 있다는 생동감을 여실히 느끼게 했다. 그래, 이게 내 일상이지. 지난 끔찍한 기억들은 한 움큼 뜯겨져 나간 것처럼 평화로웠다.
내가 아니라 신세현 새끼가 기억을 잃기라도 한 듯 그는 호구 같았던 후배,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말 초반의 신세현처럼 과한 연락은 없었고, 같이 뭘 하자고 치대지도 않았다. 얼굴만 아는 사이의 적당한 거리감과 어색한 예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딱 원하던 바였다.
가끔 만나기야 하고, 마주치는 빈도는 여전했지만 그래도 느낌상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신세현도 이쯤 됐으니 뭐라 정의할 수 없었던 관계와 지난 과거를 자연스레 청산하려는 거겠지. 다행이었다.
가끔 억울하고 화가 나긴 해도 빼앗겼다 다시 찾은 평화는 쉬이 일상에 순응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묻어가면 편하잖아. 지금 좋잖아. 계속 이러길 바라잖아. 작은 속삭임이 어쩔 땐 위로처럼, 어쩔 땐 유혹처럼 들려왔다.
굳이 뭘 하려 하지 마. 괜한 복수심이나 화 같은 건 잊어. 그냥 이대로 쭉 지내. 그럼 다 잘될 거야. 과거는 잊힐 거고 일상이 계속될 거야. 가는 줄처럼 이어지고 있는 신세현과의 관계도 자연스레 끊기겠지. 이제 문제 될 게 없어. 전처럼 열심히 살면 돼. 알바 구하고, 공부하고, 차근차근 바삐 미래를 준비해야지.
엄마도 요새는 조용하시잖아. 저번에 호된 일 겪으셨으니 이번에야말로 정신 차리고 살겠다고 다짐하셨을 거야. 마트 일도 열심히 하고 계신다잖아. 다 괜찮아. 모든 게 좋아. 전부 옳은 길로 가고 있어.
은성은 경직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어 보았다.
이게 맞아. 이대로 잘 가면 돼.
마음속에 품고 있는 문장을 습관처럼 되풀이하며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모든 게 순조로웠다. 정리도 마쳤고 그대로 멀어지기만 하면 될 일이었는데.
새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신세현은 자연스레 집 앞에 찾아왔다. 교통사고 후 신세현이 이곳에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몸뚱이는 현관문을 나서려는 팔을 붙잡고 안으로 들어섰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놀랄 새도 없이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겨 내며 뒷목을 잡고 입을 맞추는 행동에 몸이 굳었다.
꿈인가, 멍하니 있다 혀가 얽혀 오자 그제야 파득 놀라며 몸을 뿌리쳤다. 한 달 전의 여느 날 같은 파렴치한 행동에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가능성 하나가 떠올랐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는데.
“갑자기 무슨 짓이야!”
“뭐가? 새삼 왜 이래요. 우리 일상이었잖아. 며칠 쉬었다고 그새 잊었어?”
다문 입술 아래로 이가 꽉 깨물렸다. 피가 배어 나올 것처럼 까득 소리가 나며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 난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인지…….”
“아. 그 컨셉 진짜 오래간다.”
세현이 머리를 쓸었다. 대충 머리를 쓸어 올리는 손은 미미한 짜증을 담고 있었다.
“선배. 기억 상실인 척을 하고 싶었으면 차라리 아예 모지리가 된 것처럼 굴지 그랬어요. 그럼 나도 속았을지 모르는데. 그런데 선배는 무슨 선택적 기억 상실도 아니고…. 난 애굔 줄 알았잖아.”
물에 잠긴 것처럼 신세현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귀엽긴 했어요. 원맨쇼 구경하는 느낌도 들고, 선배 혼자 착각하는 게 재밌기도 했고.”
“왜…. 무슨….”
“어디까지 하나 계속 지켜보려니까 슬슬 아래가 근질거리잖아요. 선배랑 하루가 멀다 하고 떡 쳤었는데 뚝 끊기니까 버틸 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많이 참았죠? 한 달 정도는 버텼네.”
나도 참 장하다니까, 전과 같다고 느꼈던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기묘하게 울렸다. 이게 원래 신세현의 목소리였나? 아니, 전엔…. 아니야. 원래 그랬나? 아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언제부터? 언제부터 알았던 거지? 아니야. 몰랐잖아. 모르잖아. 떠보려는 거야. 응. 맞아. 그런 거야. 너는 모르잖아. 몰라야 되잖아. 그래야 되는데.
망연한 시선이 신세현에게 닿자 까마득 시야가 어둑해져 갔다. 신세현이 흐려졌다. 얼룩졌다. 눈에 어른거리는 또렷하지 않은 상이, 형체만 남은 것이 검게 잠겨 갔다가 다시 흐리멍덩하게 떠올랐다.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어지러이 꼬여 갔다. 그렸던 미래, 믿었던 확신, 그토록 분명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물거품 되어 발밑으로 빠져나갔다. 보이지 않는 곳에 묻어 두었던 불분명한 의문이 발치를 타고 슬그머니 기어 올라왔다. 진짜 몰랐어? 이대로 끝인 줄 알았다고? 머리가 안 돌아가? 멍하니 벌린 입가론 격한 운동이라도 한 듯 쌕- 거친 숨이 나갔다. 굳었던 머리가 삐걱거린다.
“이렇게 갑자기…? 아니야. 몰랐잖아…. 다, 다 좋았어. 너도, 너도 묻고 있었잖아. 이대로 묻으려고, 이대로 끝내려고 했잖아…. 응? 그랬었어. 그랬잖아. 이건 아니야. 그치? 아니야. 아니라니까! 아니라고! 씨발, 몰랐었잖아! 그래야 되잖아!”
덜덜 손을 떨며 멍하니 고개를 젓는 은성의 입에서 혼잣말하듯 조용한 속삭임이 작게 새어 나갔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중얼 의미 모를 말들을 내뱉다가 얼굴을 갑자기 팍 치켜올리더니 세현에게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댔다. 억울해 죽겠다는 듯 핏대 선 목으로 고함을 치며 제 머리를 쥐어뜯는 은성의 눈에선 분을 못 이긴 눈물이 주룩주룩 나왔다.
슬슬 괜찮아지나 싶었다가 한순간 나락에 처박힌 격노가 뱃속에서 들끓었다. 온갖 더러운 감정이 엉키고 꼬여 갔다. 이제야 겨우 묻어 두나 싶었던 부정적인 것들이 모조리 튀어나와 다시 속에 그득그득 쌓여 갔다. 더럽고 질척한 것들, 짜증 나고 끈질긴 것들, 내 것이 아니어야 할 것들. 그 모든 것들이 다시.
“아니잖아! 넌, 넌 몰랐잖아! 몰라야 되잖아! 씨발, 씨발!”
나오는 대로 소리를 지르고 나니 갑자기 숨이 턱 막히며 두려움이 파고들었다. 신세현의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침묵, 불친절한 세상과 엄마의 비명 소리, 어색하게 피하는 시선과 깡패들의 경박스런 말투. 소리 없이 몸을 얼려 가는 추위처럼 으슬으슬 한기가 들며 형용할 수 없는 불안이 몸을 잠식해 갔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은성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세현은 아무 말 없이 관찰하듯 은성을 지켜봤다. 관조하는 고요한 눈길은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려는 듯한 여상함을, 갑자기 왜 저러나 하는 당혹감을, 미쳐 가는 정신을 바라보며 피어나는 희열을,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사랑하는 광기를, 어쩌면 온전히 저에게 허물어지기를 바라는 기대감을 담고 있었다. 각기 다른 색채들이 뒤범벅되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다채로운 결들이 작은 눈동자 안에서 빛났다.
은성은 고개를 떨구더니 공포에 잠겨 눈물만 뚝뚝 내보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몸이 휘청거렸다. 간신히 버티고 선 몸은 툭 치면 쓰러질 듯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세현이 입 안으로 쓴지 단지 모르겠는 기분을 곱씹었다. 가여우면서도 기껍고, 한없이 사랑스러워지다가도 저 멍청한 걸 어떻게 할까, 악의 어린 충동이 불쑥 끼어들었다. 무너져라. 무너지지 마라. 정반대의 욕구가 동시에 머릿속을 시끄럽게 울렸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지? 처음부터? 눈치챘으면서도 갖고 놀았나? 재밌었어? 안심하는 모습이 얼마나 한심했을까. 얼마나 재밌었을까. 재밌었겠지. 그래서 그렇게 실실 처웃었었나. 아니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도대체, 씨발 어떻게….
은성은 멍하니 같은 말만 반복했다.
“너무 억울해하지 마요. 원래 인생에 불행이 좀 있어야 행복할 수도 있고 그런 거예요.”
세현의 손이 자연스레 은성의 바지춤으로 갔다. 벽에 가둬진 은성의 몸이 홱 돌아가고 바지가 속옷과 함께 잡혀 훅 내려갔다. 목덜미에 가는 머리칼이 간지럽게 닿고 셔츠가 말려 올라갔다.
더듬거리는 손이 가슴팍을 향해 올라갔다.
“어, 어떠, 어떻게…. 흑, 으으윽….”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좆같았던 날이 또 시작된다고? 난 어떻게 해? 난 어떻게 돼? 나 어떡해. 나 어쩌지? 응? 나 어떡해?
“보면 선배는 그런 거 엄청 좋아하더라. 진부하고 뻔한 거.”
손에 잡히지 않는 아득한 절망이 마땅한 내 것인 양 똬리를 틀고 깊숙이 자리 잡았다. 아찔한 추락감이 머리를 뒤흔드는 것 같기도 하고, 고요히 침잠하며 서서히 숨통을 조여 가는 것 같기도 하다. 모르겠어. 아무것도 안 보여. 아무것도 안 들려. 내가 너무 한심하다. 신세현이 너무 무섭다.
“…읏!”
한 손이 다물린 구멍을 비집고 들어갔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어지러이 섞여 갔다. 그 사이로 희미한 쾌감이 비집고 들어와 원래 있었던 양 여기저기 헤집으며 돌아다녔다.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문득 다시 분노가 고개를 들었다.
“씨발, 네가 어떻게!”
“선배 진짜 멍청하다. 그걸 누가 몰라. 기억 상실이라면서 나만 빼고 다 알고. 별, 진짜…. 애초에 속일 생각이 없었던 것 같던데. 내가 다 놀랐어요. 유치원생이 연극해도 그보단 잘해.”
“흑! 이, 씨발, 아니야! 아니야!”
“사고 당하니까 이때다 싶었어? 그래도 그렇지. 너무 허술했잖아.”
“아니, 흣! 왜, 씨발 왜….”
말을 묵살하듯 손가락이 깊이 파고들어 갔다. 이 와중에도 느껴지는 성감에 허리가 뒤틀리는 몸을 찢고 싶었다. 분명 아팠는데. 너무 아파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는데 언제부터 느꼈던 거지.
“왜…. 흑, 나한테 왜 그래….”
“그러게. 그래도 너무 싫어하진 마요. 바람피우면서도 뻔뻔한 선배 보면서 나는 또 얼마나 속이 상했겠어.”
계속 손가락을 돌려 대는 신세현 때문에 정신이 흐물흐물 녹아 갔다. 그 격했던 감정들도 겨우 쾌락 한 점에 휘둘리는 꼴이라니. 자조 섞인 감상도 이내 흩어졌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서며 벽에 이마를 기댔다. 목이 살짝 깨물리고 혀가 핥듯 축축하게 지나갔다.
쪼옥 소리와 함께 길게 빨린 목덜미가 벌레에 물린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흔적 위로 한껏 호선을 그린 입술을 비비며 점막이 촉촉이 달라붙은 손가락을 빼냈다. 손목까지 타고 내려온 액이 줄줄 흘렀다.
“내 입장도 생각해 줘요. 선배 좋아하는 게 얼마나 좆같았는데.”
“이거는…. 이건 아니잖아….”
느끼긴 또 잘 느껴서 신음하며 바들바들 떨더니만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쾌감에 푹 젖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은성을 보며 세현이 혀를 찼다. 살짝 휜 허리를 보며 자위하듯 성기를 쓸며 조금 관대한 마음을 먹어 보았다. 1분 정도는 들어 줄까, 하고.
“이건…. 이거어…. 윽, 너 이상해애, 흑, 흐윽…. 비정상이야. 바람은, 또…. 흐, 언제까지, 흑, 우려먹으려고오….”
약간이나마 지녔던 관대함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은성의 허리를 받친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은성은 한껏 풀린 채로 비틀거리며 뒤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취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이건 아니야, 개새끼야…. 세상 누가 씹, 이딴, 이따안…. 너…. 너 더러워. 이러면 안 돼. 너 때문에 나까지 씨발…. 이럼 안 돼! 안 된다고!”
자조하듯 흐느끼던 목소리는 점점 격해져 종국엔 소리까지 지르며 뒤로 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곧장 양팔이 뒤로 잡히고 허리가 더욱 꺾여 들었다. 세현은 보기 좋게 휘어진 곡선을 보며 딱 알맞게 부어오른 구멍을 보았다. 손가락으로 헤집어 두었더니 한껏 풀린 채 꼬무락거리며 느린 점성의 액이 허벅지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은성이 개소리를 내뱉은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들을 때마다 기분이 나빠지기야 했어도 이젠 그냥저냥 무시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어차피 박아 주면 또 좋다고 흔들거릴 텐데.
“선배는 이렇게 질질 흘려 대면서 그런 소리가 나와요? 나였으면 쪽팔려서라도 그딴 소리 못 하겠다.”
“씨발…. 흡, 씨이발….”
“하여간 선밴 정도가 없어. 윗구멍엔 걸레 물고, 아랫구멍은, 그냥 그 자체로 걸레고.”
“닥쳐! 씨발, 걸레 새끼야!”
“왜 나보고 그래. 난 선배가 처음이었어. 근데 선배는 딱 봐도 아랫도리 존나 놀리고 다녔을 게 뻔한데. 나랑 사귈 때도 바람피웠잖아.”
“이건…. 이건 세상의 순리를 거스르는 거야.”
풉.
“아, 이건 진짜….”
뜬금없는 말에 웃음이 터졌다. 그 말이 진지함을 담고 있어서 더더욱.
“선배, 세상에 이유 없는 건 없어요. 여길 쑤시면 왜 그렇게 기분이 좋겠어?”
많이 배려했다. 술주정 같은 개소리를 꾹 참고 잘 들어 준 스스로가 뿌듯했다. 줄곧 기대하고 있던 선물을 풀듯 뺨이 달아올랐다. 곧장 박아 들어 허리를 올려치며 쥐고 있던 손목을 뒤로 훅 당겼다. 성기가 배를 뚫고 튀어나올 듯, 앞으로 쏠린 뱃가죽이 볼록 솟아오르며 등허리가 밟고 누른 듯 확 꺾였다. 한껏 젖혀진 목에서 끓는 듯한 신음이 울렸다. 크게 뜨인 눈동자는 갈 길을 잃고 으, 앓으며 이리저리 방황했다.
“하윽!”
“여기로 씹질 하라고 기분 좋아지게 만들어 둔 거지.”
그러니까 이렇게 만들어진 순리대로 잘 느끼기나 하세요.
“흐악! 아! 아으!”
누르는 지점마다 성감대라도 되는 것인지 박는 족족 달뜬 신음이 터졌다.
“아! 흐아…! 흑! 흥!”
몸이 로봇이라도 된 것처럼 덜그럭거렸다. 버티지 못한 몸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찬 바닥 위로 무릎이 꿇렸다. 뒤에서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벽 쪽으로 사정없이 짓눌려졌다. 벽에 닿은 볼이 문질러지며 아프게 쓸렸다. 유두도 딱딱한 벽에 마찰되어 짓물러지고, 뒤에서부터 뻑! 뻑! 박혀 오는 힘에 발딱 선 성기도 벽에 거칠게 비벼 뭉개졌다.
누런 벽지가 희멀겋게 젖어 갔다. 분명 아팠다. 너무 쓰라리고 아팠다. 그러나 그 사이사이 모래알처럼 작은 입자를 가진 쾌락이 쏟아졌다. 구석구석 스며들고 고통을 쾌감으로 꽉꽉 채웠다.
“하윽! 아악! 학! 으아…! 아응!”
몸이 쿵! 크게 울릴 때마다 뒷목이 뻐근하게 굳어 갔다. 빠르게 치고 드는 감각에 팔다리가 저릿했다. 억센 손아귀에서 풀려난 손가락이 벽을 긁고 발가락이 아플 만큼 곱아들었다. 딱 붙은 가슴과 벽 사이로 두터운 손 하나가 끼어들었다. 잔뜩 쓸려 부어오른 유두가 손가락에 잡히고 터뜨릴 듯 강한 힘에 속수무책으로 뭉개졌다. 흔들리던 시야가 갈려 나갔다.
“하하! 와, 선배! 지금 젖꼭지 꼬집어 주니까 구멍 벌렁거린 거 알아요? 박히는 것만 좋아하는 몸으로 어떻게 박을 생각을 했어요? 응?”
그래서 내가 치워 줬잖아. 선배는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악! 제, 제발…. 하흐, 제발…. 학!”
“뭐를? 보내 달라고?”
“헉! 흐아, 아닉! 흑! 너, 너무 갔, 이제, 흡! 안, 흐, 응!”
“아. 어쩐지 구멍이 막 꿈틀거리더라. 그때마다 가고 있었구나?”
“응! 윽, 흐으으! 제발! 아…!”
질퍽!
신발 밑창이 진흙에 푹 담기고 끈적하게 얽히는 소리가 났다. 어느 한 지점을 누르자 울컥 액이 터져 나왔다. 앞뒤로 질질 싸는 꼴에 기가 찼다. 이런 몸으로 싫어, 아니야 하며 뻗댔다고.
작은 힘에 깔려 바르작거리며 자지러지게 느껴 대는 모습이 싸 보이고, 걸레 같고, 천박하고, 문란하고, 무엇보다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한창 박던 성기를 확 빼내고 몸을 돌렸다. 이번엔 또 얼마나 야해 빠진 얼굴로 울고 있는지 봐야 했다. 은성은 계속 벽에 쓸려 한쪽 볼이 빨갛게 물든 채로 엉엉 울며 얼굴을 죄다 구기고 있었다. 살짝 시선을 내리자 가슴팍은 온통 붉고, 작은 유두는 잔뜩 부푼 채였다.
아래는…. 예상처럼 난잡했다. 정액이 너저분하게 배를 뒤덮었고, 좆이 달리긴 했다고 허리를 들썩일 때마다 같이 끄덕거렸다. 물 것 없이 벌름거리던 구멍에 다시 성기를 꽂아 줬다. 귀두에 맺힌 정액을 엄지로 대충 비벼 주자 또 좋다고 구멍을 꿈틀거렸다.
다시 흔들리던 몸이 힘에 부친 듯 온전히 저에게로 쏟아졌다. 금방이라도 끊길 듯한 여린 음성이 힘겹게 이어 나가는 신음을 들으며 세현은 웃음 지었다.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담긴 희열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뒷목까지 저릿하게 올라온 충족감을 마음 깊이 느끼며 이 순간 자신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자만했다. 오만에 빠진 손이 덜덜 떠는 몸을 끌어안았다.
억세게 죄이는 손길에도 은성은 반항하지 않으며 온전히 무너져 내려 설움을 쏟아 냈다. 그래, 내 품 안에서. 무너진 잔해들을 오롯이 나에게로 쏟아 내며.
은성은 울었고, 세현은 웃었다. 함께 몸을 섞으면서도 상반된 세계를 품은 둘은 각자 감정의 극단에 한껏 취해 있었다.
싸 달라고 조르듯 오물거리는 구멍에 사정하며 곧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은 은성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초점도 맞추지 못하며 흔들리는 눈은 내버려 두고 멍하니 벌린 입가에 혀를 넣었다. 입 안을 한껏 휘젓고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물컹한 혀가 닿고 타액이 넘어갔다.
아.
“예쁘다.”
세현이 희락에 빠진 몸을 감싸 안아 달큼하게 속살거렸다. 정사가 끝났음에도 심하게 떨리는 몸은 신음인지 한숨인지 옅은 숨을 내쉬곤 무겁게 잠겨 들었다. 세계가 꺼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허탈했다.
신세현이 무슨 헛짓거리를 해 놓은 건지 자취방에서 쫓겨났다. 느닷없는 집주인의 통보에 몇 안 되는 짐만 끌어안은 채 길거리로 내몰렸다. 얼마 알지도 못하는 법을 들며 따져 봤지만 도리어 집주인은 잘 말했다는 듯 뭐라 뭐라 쏘아 댔다. 대충 법적으로 문제 될 건 없고 내가 나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간 그리 나쁘게 지냈던 것 같진 않았는데 참 더럽게 끝났다.
그러고 보니 요샌 내가 알던 모든 관계가 다 일방적인 단절의 형태로 끝이 났다. 대학 동기나 과외나 선우나 뭐 그런 것들.
청승맞게 서 있는 앞으로 반질반질한 구두코가 쓱 끼어들었다. 안 봐도 뻔했다. 싱글거리는 신세현이었다. 신세현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데려가듯 은성을 자신의 집에 앉혀 놓았다.
자퇴를 강요하던 강압적인 관계에서 울며불며 빌어 겨우 휴학으로 합의 봤다. 문득 내가 왜 자퇴 말고 휴학하면 안 되냐고 싹싹 빌어야 했던 건지 의문이 생겼지만 연달아 이어진 말에 그냥 입을 닫았다.
“그러고 보니 선배 어머니께선 참 긍정적이신 것 같아. 또 여러 가지에 손대시더라고요. 도전 정신은 본받고 싶더라.”
태연하게 흘러나온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허리께를 매만지던 손이 굳은 몸을 느끼자 가볍게 웃으며 입을 맞췄다.
“그래도 괜찮잖아. 내가 있는데. 선배 어머님은 제가 잘 챙겨 드릴게요. 선밴 걱정하지 마요.”
미래가 저당 잡힌 기분이었다.
다음 날 걸려 온 엄마의 통화에 확실히 깨달았다. 신세현은 협박거리 하나 참 잘 골랐다.
***
“…또 굶었어요? 선배, 지금 고집부리는 애만도 못한 거 알지?”
은성이 웅크려 앉아 있는 소파 옆으로 세현이 털썩 주저앉았다. 식사가 차려진 식탁을 일별한 세현이 시끄럽게 주절거리는 TV 속 예능을 잠깐 보다 은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름 시위한답시고 굶는 꼴이 좀 우습다.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억 상실인 척 깜찍하게 나다니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 참 귀엽긴 했지. 가만히 기다려 줬더니 다 끝난 줄 알았는지 혼자 빨빨거리며 쏘다니고. 그러다가도 가끔 힐끔거리는 게…. 저건 진짜 저 조그만 머리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걸까, 싶었다.
처음 사고가 났을 때야 꽤 놀랐었다. 하지만 병원에서 일어나자마자 내뱉은 개소리는 놀랍다기보단 기가 찼다. 본인도 어이없단 건 아는지 어색한 목소리고. 처음엔 그저 잠에 취한 헛소리였나 싶었는데, 약까지 타 오고선 쓰레기통에 처박는 꼴을 보고 있자니 아, 진심이구나 했었지.
그 멍청한 정성이 갸륵해서 기다려 주긴 했다. 저가 먼저 이실직고하면 조금 봐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정말 끝까지 기억 상실 컨셉을 밀고 갈 작정 같아 적당히 끝냈다. 그런데도 많이 봐줬지.
자퇴는 그렇게 안 된다고, 안 된다고 애원해서 그냥 밀어붙일까, 하다가 결국은 휴학으로 타협했다. 물론 선배가 다시 학교에 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좀 편하겠지. 이 얼마나 배려심 많은 애인인지. 선배한텐 너무 약해서 문제였다. 좀 심하게 대하려 해도 얼굴만 보면 또 이 예쁜 걸 어떻게 하나 해서.
하지만.
“별로 배 안 고파. 안 먹어도 상관없잖아.”
선배가 먼저 삐딱하게 나오면 도저히 좋게 좋게 갈 수가 없었다. 온갖 배려를 베풀었음에도 기어코 바람을 피웠던 것처럼 온전히 좋기만 한 건 선배에게 해로웠다. 그래서 앞으로도 좋아야 할 우리의 관계를 위해 이따금 선배의 정신머리를 잡아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 선배는 밥 안 먹어도 힘이 넘치나 봐.”
아. 또다. 신세현의 안 좋은 버릇. 불길한 징조. 특유의 삐딱한 표정과 사나운 어조. 무언가 신경에 거슬린 것이다. 최대한 유순하게 말했는데도 저 지랄이다.
“그럼 엎드려요. 힘 남아돌면 섹스나 한 번 더 하자.”
“아냐. 아니, 그냥…. 먹을게.”
“정액이나 오물오물 잘 받아먹어요.”
세현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굳어 있는 은성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눈매는 여전히 평온한데 입매만 그린 듯이 올라가는 표정은 기괴했다.
“뭐 해? 엎드리라고.”
신물 나는 관계가 끝나고 은성은 천장을 보며 멍하니 숨만 내쉬었다. 차차 진정되어 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리를 조금 움찔거렸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머금고 있던 정액이 왈칵 빠져나왔다. 이 기묘한 관계는 씨발, 언제쯤 끝이 날까.
시간은 금이다. 내겐 특히나 그랬다. 조금도 허투루 써선 안 되었다. 이미 뒤처진 출발점, 여기서 더 뒤처지면 정말 끝이라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와 버리면 신세현에게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는 초조함에 불안해할 나날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다 정말 버려지는 날이 오면, 그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초라한 상태라면.
물어뜯던 손톱이 입에서 빠져나가고 손이 오므라들며 커다란 손안에 쥐어졌다. 가슴팍으로 다가온 손이 혹사당한 유두를 스치려다 그저 토닥였다.
“애먼 손톱 뜯지 말고 자요.”
“…세현아.”
“응?”
“내가 네 세계랬지.”
“무슨 말인가 했네. 그건 용케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럼 네가 나 떠나면 너 죽는 거 맞지. 내가 너 떠나면 나 좆 되는 것처럼.”
신세현은 가만가만 몸을 매만지며 쓸어내리다 돌연 입을 맞췄다. 그저 가볍게 입술만 부딪히고 떨어져 나온 신세현은 옛날처럼 말갛게 웃었다.
“왜 갑자기 예쁜 말 해요?”
배시시 웃음 짓는 얼굴과 상기된 듯 산뜻한 목소리가 옛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이젠 아무 소용도 없어진 낡은 기억을 곱씹다 눈을 감았다.
저런 말 따윈 믿을 바 못 되었다. 겨우 저딴 거에 안심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릿속이 꽃밭은 아니니까. 하지만 난 널 죽일 거야, 세현아. 내가 망하더라도 혼자 망하진 않을 거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만은 끌고 가. 씨발 새끼야. 집에 불을 지르든, 칼로 난도질하든, 너만은.
문득 웃음이 나왔다. 결국은 신세현의 바람대로 이루어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세계인 신세현의 이상. 네가 살아야 내가 살고, 내가 죽으면 네가 죽고, 서로를 구속하는 이기적인 중력이 기반이 되는 기이한 세계. 어느 날, 신세현의 한때처럼 은성이 웃었다. 세계. 끔찍하게 느껴지는 울림을 곱씹으며 눈을 떴다. 눈앞에서 세계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