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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뭐. 미남에다가 희멀건 피부를 보면 곱게 자란 도련님 같기도 하고. 아니, 그럼 설거지 같은 건 평생 해 본 적이 없겠구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석주는 설거지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진이 불안한 눈으로 솥을 쳐다봤다. 그러다 푹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값비싼 유리그릇도 아니고. 솥인데. 그가 아무리 괴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한들, 해진 수세미로 무쇠솥을 깨기라도 하겠나.
아진은 설거지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금세 솥을 씻은 석주가 아진의 앞에 놓인 설거짓거리를 야금야금 빼 갔다. 그럼 아진은 엉덩이를 추켜들고, 눈을 부릅뜨고, 석주가 씻은 것을 검수했다. 밥알이 묻었나, 고춧가루가 있나 하고. 근데 예상외로 멀끔했다.
힘도 좋아서 벅벅 그릇을 닦는데 묵은 때가 다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아진이 뽀득뽀득 소리가 나는 그릇을 새치름히 바라봤다.
……의외로 손이 야무진가?
아진은 여러 번 고개를 갸웃거리며 설거지를 마무리했다. 대야까지 씻어 엎어 두고, 찬물에 꽁꽁 언 손을 바지춤에 투덕투덕 닦아 낸 그가 피곤한 낯으로 석주를 올려다봤다.
“왜 오셨어요? 진짜 설거지하러 오신 거예요?”
“아니. 돈 주러.”
“…….”
아진의 낯이 대번에 차게 식었다. 그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또 듣지 않겠다는 듯 휙 뒤를 돌았다. 그리고 절뚝이는 걸음걸이로 빠르게 마당을 가로지르는데. 석주가 기다란 다리로 몇 걸음 만에 아진을 앞질러 섰다. 그의 두루마기가 밤바람에 나풀거렸다. 천이 어찌나 고운지, 꼭 나비의 날갯짓 같았다.
석주는 끝끝내 돈을 내밀었다. 저번엔 무식하게 돈다발을 내밀더니 이번엔 누리끼리한 월급봉투에 돈이 담겨 있었다. 아진이 그것을 원수처럼 노려봤다. 그러자 석주가 보드라운 목소리로 그를 타일렀다.
“몸 판 값으로 주는 거 아니다. 내가 돈으로 퉁치려고 주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안하다고 주는 거라고. 개새끼처럼 돈으로 사과하는 거라고. 그러니 받아. 모자라면 또 달라고 해.”
아진이 아랫입술을 꾹 겹쳐 물었다. 돈은 저번보다도 많아 보였다. 두툼한 게 분명 아진은 꿈도 못 꿀 큰돈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반갑지 않았다. 꽃님이 돈 주면 받으라고 했음에도 그랬다.
이 돈을 받고도…… 계속 여기 있을 수 있나? 이 돈을 쥐고 있으면서 종으로 일하면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아진이 반걸음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돈 주셔도 쓸데가 없어요.”
“왜 쓸데가 없어?”
석주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
아진은 침묵을 택했다. 바깥에 못 나가니까요. 그 말을 할 순 없었다. 저 돈이면 자그마한 집 하나 정도는 너끈히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굳이 여기서 일할 필요가 없다. 저는 자유의 몸이 되겠지.
아진은 그게 반갑지 않았다. 가족도 없는데, 혼자 살면 밥도 제가 해 먹어야 하고, 채소도 직접 사러 가야 하고, 잠도 혼자 자야 한다. 바깥에 나갈 일도 많을 것이다.
그러다 또 차가 절 밟고 갈지도 모르지. 나중에는 차가 집채만 해져서 집 전체를 깔아뭉갤지도 모른다.
머뭇거리던 아진은 마지 못해 돈을 받았다. 쓸 일은 없겠지만 돈이 나쁜 것도 아니고. 그냥 옷 사이나, 다락 틈이나, 대들보 사이에 끼워 두자 싶었다. 이걸 받아야 석주가 더는 저를 찾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아니나 다를까. 석주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제 죄의 무게가 가벼워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진이 돈 봉투를 조몰락거리며 그런 석주를 쳐다봤다.
“사장님이죠?”
“응?”
“이불이랑 약.”
“응.”
석주는 곧장 긍정했다. 그의 입가에 스민 미소를 보아 본인의 속죄 방식이 매우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아진이 작게 실소했다. 사장님은 진짜 등신인가. 종 뒤 한 번 따먹었다고 구구절절 사과도 하고 이불에 약에 돈까지 주다니.
사내 뒤를 따먹었다는 게 수치스러워 저를 토막 내 짐승들 밥으로 산에 던져 줄 수도 있거늘. 그게 훨씬 편한 일일 텐데. 번거로운 짓을 사서 한다.
아진이 그럼 사과는 끝난 거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떼는데. 석주가 또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그의 뜨거운 숨결이 아진의 이마 위로 흩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됐다.
아진은 온몸이 포승줄에 꽁꽁 묶인 듯한 압박감을 받았다. 뒤로 물러나고 싶었으나 본능적으로 느꼈다. 도망쳤다가는 호되게 혼이 날 거라는 걸.
석주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슬쩍 핥았다. 후끈한 그의 체온을 닮아 붉은 혀가 나왔다가 사라졌다.
그것을 본 아진이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제 뺨과 가슴을 핥던 그날 밤이 갑자기 확 떠오른 탓이었다. 이상하게 유두가 지끈거려서 어깨를 모았다가 폈다.
그때. 석주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사과…….”
“네?”
“사과는…… 받았어?”
“……지금 받고 있잖아요.”
“아니, 말로 하는 사과 말고.”
“지금 돈으로 사과하고 계시잖아요.”
또박또박 이어지는 말대꾸에 석주는 당황했다. 아진은 그것도 이상했다. 왜 당황하지. 여타 윗사람이었다면 대번에 뺨을 후려쳤을 텐데. 아무튼 석주는 이상한 사람이다.
석주가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결이 아진의 덥수룩한 앞머리를 헤쳤다. 아진의 맑은 군청색 눈동자가 슬쩍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석주가 그걸 집요하게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불 옆에 소쿠리가 하나 있었을 텐데.”
“…….”
아진의 속눈썹이 위로 말려 올라갔다. 오늘 아침. 바닥에 놓여 있던 소쿠리가 뒤늦게 떠올랐다. 설마 그것도 석주가 준 것일까.
기쁘기보다는 한숨이 먼저 나왔다. 이렇게 유난을 떨었으니 다른 종들이 저와 석주의 관계를 다 알았을 것이다. 분명 뒤에서 온갖 말을 하고 있겠지.
아진이 슬쩍 눈을 찡그렸다가 폈다. 가뜩이나 절름발이라 일하는 데 거슬린다고 온갖 구박은 다 받고 있는데. 앞으로의 나날이 더 험난하겠구나, 싶었다.
“자기 전에 찾아볼게요.”
“어, 그래.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아진은 늘 그랬듯, 허리를 반듯이 접어 인사했다. 인사를 대충 한다고 두들겨 맞으면서 커 온 터라 몸에 밴 것뿐이었는데. 석주는 그 인사가 영 못마땅했다. 아진이 자꾸 선을 긋는 것 같아서.
뭐, 선을 안 그을 이유는 또 무엇인가 싶지만 마음에 안 드는 건 마음에 안 드는 거였다.
아진은 석주가 차마 입을 떼기도 전에 떠나갔다.
석주는 절뚝절뚝 멀어지는 아진을 보며, 수 초 전 잠깐 봤던 그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 눈동자 위로, 그날 밤, 제 아래에 깔려 울던 아진의 모습이 겹쳐졌다.
“…….”
아랫도리가 또 눈치 없이 벌떡 일어났다.
하루하루를 바쁘게 사는 종들은 이른 저녁만 되면 곯아떨어졌다. 여기저기 코 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조용히 방에 들어온 아진은 이불부터 깔았다. 그러다 이불장에 놓인 솜이불과 눈이 마주쳤다.
“…….”
잠시 고민하던 아진은 그것을 꺼내 곱게 펼쳤다. 지금 아진에게는 돈보다 이 이불이 더 쓸모가 많았다. 따뜻하고 포근하고. 추위를 많이 타는 아진에겐 딱이었다. 여름밤이니 다른 종들이 탐내지도 않을 터였다.
그렇게 이부자리 정리를 마친 아진은 오늘 아침, 서랍 위에 올려 두었던 소쿠리를 가져왔다. 아진이 발을 겹치며 꿇어앉았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 반, 두려운 마음 반으로 소쿠리 뚜껑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말간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이게 뭐야…….”
소쿠리 안에는 동그란 사과 다섯 알이 들어 있었다.
* * *
복도에 꿇어앉은 아진은 열심히 바닥을 닦고 있었다. 오늘, 조직원들이 갑자기 일찍 집에 들어온 터라 종들 모두 정신이 없었다. 솥에 남은 밥으로 누룽지를 해다 김치와 대충 점심을 먹고 늘어져 쉬고 있는데 댕, 댕, 댕- 하고 종이 울려서 하나같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벌떡 일어나야 했다.
부엌은 저녁을 준비하느라 바빴고, 다른 종들도 각자의 일을 찾아 하고 있었다. 아진 역시 본인의 일을 하러 복도로 온 것이고.
아진은 초롱이 찢어지진 않았나, 불에 그을리진 않았나 확인하고 마루도 살폈다. 여름이라 습기도 많고, 비도 자주 와서 나무가 뒤틀렸거나 썩진 않았는지 봐야 했다. 그 후, 물기 없이 바짝 짠 걸레로 마루 결을 따라 걸레질을 했다.
한옥은 늘 살펴보고 조심해야 한다. 관심을 가져 주면 더욱 반짝반짝 빛나고, 모르쇠 하면 금세 뒤틀리고 병이 든다. 저야 평생 양옥식 건물인 도박장에서 산 터라 모르지만 양반집에서 일했던 다른 종들이 그렇게 말했다. 그럼 그런 거겠지.
번거롭긴 하지만, 도박장보다는 수월했다. 도박장에서는 누군가가 해 놓은 토사물이나, 멀쩡한 변기 두고 바닥에 싸지른 오줌과 똥, 또 누군가의 핏자국을 쓸고 닦아야 했었으니까.
아진은 꿇어앉은 무릎이 아픈 줄도 모르고 박박 바닥을 닦고 있었다.
그런 아진의 들썩거리는 엉덩이를, 마루에 딱 붙은 열 개의 하얀 발가락을, 도드라진 분홍빛 뒤꿈치를, 머리칼이 앞으로 쏠리며 드러난 가느다란 목선을 나무 기둥에 기대선 누군가가 훔쳐보고 있었다.
아진은 처음엔 그 시선을 모르다, 집에 불이 하나둘 켜지면서 그의 그림자가 제 손등을 스치고 나서야 알게 됐다. 아진은 그의 진득하고 끈적한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계속해서 마루를 닦아 갔다.
그러다 석주의 방 앞에 도착했다. 이전에는 은근슬쩍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하고, 문틈으로 얼굴을 들이밀기도 하고, 마루 옆에 놓인 석주의 재떨이를 살펴보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러질 못했다.
그의 방 주위를 서성이는 게 어쩐지 남세스럽고 부끄러웠다. 근데 오늘은 부끄러움 대신 짜증이 났다. 저 커다란 덩치로 청소하는 종을 졸졸 따라다니는 이 저택의 주인 때문이다.
아진이 걸레를 뒤집어 접으며 허공에다 물었다.
“사과는 누가 주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