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4화 (24/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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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정적에 아진은 뒤늦게 아차, 했다. 괜한 말을 꺼냈다. 제가 도박장에서 죽은 이들과 크게 연이 있던 것도 아니고. 얼굴만 겨우 아는 사이일 뿐인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

태회파의 습격으로 죽은 도박장 직원들은 중호파거나 금 사장이 개인으로 고용한 깡패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더러웠고 도박장에서 일하던 창녀들은 물론 직원들까지 괴롭히고 희롱했었다.

아진도 다리 병신이 벼룩을 옮긴다며 홀딱 벗은 채로 두들겨 맞은 적도 있었고, 눈에만 띄면 불려 가서 쥐어박혔고, 손님 시중을 들다가 거치적거린다고 맥주병으로 광대를 후려 맞은 적도 있었다.

명진에게 목이 썰려 죽은 직원 역시 성질이 고약했다. 아진을 심심찮게 괴롭히기도 했고. 그래도 잘 죽었다, 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진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가 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의사, 의사 불러올까요? 너무 늦게 치료하면 덧나요.”

그가 소파를 잡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석주가 그의 허리를 쥐어 소파에 앉게 했다. 그리고 그 소파 아래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석주가 아진을 올려다보고, 아진이 그를 내려다보게 됐다. 아진이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석주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게 된통 혼이 날 것 같았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맞을지도 몰랐다.

아진이 꼴깍 마른침을 삼키는데. 석주가 예상 밖의 말을 했다.

“우리는 마약을 한국에 안 팔아.”

“……예?”

“약을 국내에 안 판다고.”

“어……. 그럼 외국에만 파는 거예요?”

“응. 근데 가끔 한국 사람들한테 주기도 해. 국회 의원이나 높은 공무원이나 혹은…… 우리와 경쟁하는 조직 인간들에게.”

“…….”

“중호파는 알지? 서울에서 제일 큰 조직이잖아.”

“네, 알아요.”

아진이 고개를 주억였다. 모를 리 없었다. 도박장에 주기적으로 와서 낄낄거리며 자리를 잡고 있다 금 사장에게서 돈을 받아 갔으니까. 올 때마다 질 낮은 행패를 부려서 누나들을 죄 숨겨 놓기도 했다.

“중호파는 우리 태회파가 서울 상경을 목표로 잡았을 때부터 가장 신경 쓰이는 조직이었어. 어쨌거나 사업을 늘리려면 서울로 올라와야 하는데, 웬만한 터는 전부 중호파가 잡고 있으니까. 그래서 적당한 지점을 찾아야 했지.”

“…….”

“그게 도박장이야. 중호파의 영역에 있지만 중호파가 직접 운영하진 않고, 서울 가운데에 있고, 주변에 도로도 많지.”

“…….”

“그렇다고 우리가 핫바지들처럼 냅다 쳐들어갈 순 없었어. 그건 말 그대로 깡패잖아. 요즘 깡패들은 쳐들어가서 영업장 부수고 이제 우리가 여기 접수한다, 이런 유치한 말 안 하거든. 협박해서 돈을 주고 땅문서를 받지.”

“저, 저희 사장님도 협박한 거예요?”

잔잔하던 석주의 낯에 균열이 생겼다. 그가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아진을 올려다봤다. 검은 눈동자에서 파란 한기가 뿜어지는 것 같았다.

“‘저희 사장님’? 아진이 네 사장은 이제 난데.”

“아, 금, 금 사장님이요.”

아진이 얼른 말을 고쳤다. 그에 석주의 표정이 한결 유순해졌다. 아진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석주의 곁에 놓인 총을 흘끔 보기도 했다.

“아니. 협박 안 했어.”

석주가 느리게 고개를 내저었다.

“대신 마약을 갖다 줬지. 내가 직접 가서 준 건 아니고. 약을 한다기에 애들 시켜서 슬쩍 흘려보냈어.”

“…….”

“근데 우리 마약이…… 농도도 짙고 맛도 아주 좋거든. 몇 번 받아먹던 금 사장이 이래저래 수소문하더니 알아서 우리한테까지 찾아오더라고. 그땐 심각한 중독 상태였어. 사리 분간도 제대로 안 될 정도로.”

“맞아요. 우리, 아니, 금 사장님 뽕 좋아했어요.”

금 사장은 어느 날부터 출근도 잘 안 하더니 가끔 올 때마다 거지꼴이었다. 분명 몸에 걸친 건 비싼 것인데 얼굴은 피죽도 못 얻어먹은 비렁뱅이였다. 오죽하면 직원들끼리 사장이 죽을병에 걸린 게 아니냐고 숙덕거리기까지 했을까.

“금 사장이 돈을 줄 테니 약을 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요?”

“근데 말했다시피 우리는 한국에 마약을 안 팔아. 돈을 얼마를 줘도 안 팔아.”

“왜요? 많이 팔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순진한 말에 석주가 설핏 웃음을 흘렸다. 그가 소파 아래로 떨어진 아진의 말랑한 종아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미 지역별로 마약을 파는 조직이 있으니까. 우리는 늦게 시작한 편이고, 그런 만큼 상도는 지켜야지. 그래야 위험도, 장애물도 줄어드는 거야.”

“…….”

“그래도 달라고 울고불고 떼를 쓰기에 도박장을 넘기라고 했지. 그럼 약을 주겠다고.”

“그걸, 그걸 줬어요? 등신같이?”

“그래. 줬어. 등신같이. 지장을 열 손가락 아주 꼭꼭 찍었고, 땅문서도 받았어. 그 대가로 금 사장은 앞으로 십 년은 빨 수 있는 마약을 받아 갔고.”

“…….”

“근데 이 새끼가 도박장을 줄 생각을 안 하더라고. 먹고 뒤질 약이 곳간에 있겠다, 배때기가 부른 거지. 맨날 정리가 덜 됐다. 시일이 이르다. 손님에게 말을 해야 한다. 중호파에게도 허락을 구해야 한다. 나불나불. 나불나불. 어찌나 입을 놀리던지.”

“…….”

“그래도 괜찮아. 그건 예상했던 거거든. 하지만 그런다고 미룰 수 있는 게 아니었어. 그 땅은 명백히 태회파 것이 됐고, 불법 점거는 금 사장이 하고 있던 거니까.”

“그래서…….”

“그래서 죽였고, 뭣 모르고 달려들던 놈들도 죽였어. 뭐, 명진이가 직원을 죽인 건 예상에 없던 거지만 그걸로 종들이 겁을 먹었고, 어디 가서 섣불리 입을 나불거리지 않는다면 그걸로 됐어.”

석주는 금 사장을 포함한 수십의 사람이 죽어 나간 것에 일말의 죄책감도, 후회도 없는 듯했다. 아진은 그런 석주에게 몹시 큰 거리감을 느꼈다. 요 며칠 밤을 함께 보내고, 그의 따뜻한 품에 안겨 자고, 쓸데없는 수다를 떨기도 했는데. 같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제가 석주를 다른 방향으로 오해하고 있었구나 싶기도 했다. 그저 멋진 사내라서, 제가 가지지 못한 수컷의 요소를 한가득 쥐고 있는 이라서 동경해 온 건데. 석주는 제가 상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아진이 저도 모르게 상반신을 뒤로 물리는데. 석주의 안광이 번뜩였다. 그의 커다란 손이 아진의 다리를 뱀처럼 감쌌다. 그 부드러우면서도 사나운 힘에 아진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석주는 아진을 움켜쥔 손과 달리 퍽 온순한 표정으로 그의 무릎에 뺨을 묻었다. 마치 주인의 애정 어린 손길을 바라는 개처럼.

“아진아. 나는 개새끼야.”

“……예?”

“개새끼지만 내 사람들에게는 안 그래. 태회파는 내 가족이고, 이 집에서 일하는 종들도 이제는 내 사람들이야.”

“…….”

“그 직원을 왜 죽였냐고 물은 이유가 나를 원망하기 위해서라면 할 말 없지만, 내가 너를 해할까 겁이 나서 그랬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

“물론 첫 단추를 좆같이 끼웠지만, 그런 일은 다시 없을 거다.”

“…….”

“나는 내 사람들에게 돈도 많이 줄 거고, 아프다 하면 쉬게 할 거고, 바라는 게 있다면 들어줄 거고, 누군가 그들을 못살게 군다면 선뜻 나서서 복수해 줄 거다.”

“…….”

“그들이 태초에 금 사장의 사람이었대도 내가 그들의 집과 일터를 빼앗고 여기로 데리고 왔으니 책임을 져야지.”

아진의 목울대가 소리 없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석주가 밤바다처럼 검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눈동자 위로 얇게 펴진 물기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아름답지만, 동시에 무서운 눈동자였다.

아진은 그 눈동자에 갇힌 듯한 압박감을 받았다. 어깨가 움츠러들었고, 숨이 엉켰다. 정말 물속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석주가 저를 제 사람이라 칭하고 있었으니까. 도박장에서 죽은 이들과 제가 다르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평생 처음이었다. 이렇게 특별한 취급을 받는 건. 내 사람이라 칭해지는 건. 비록 석주의 문장에는 ‘종’으로 표현되긴 했으나 어쨌든. 어디에 소속되고 보호를 받는 것 자체가 처음이라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아진은 갓난쟁이 때 부모와 헤어져 여기저기 굴러다닌 어중이떠중이라 더 그랬다.

뒤로 밀려 있던 아진의 상체가 석주 쪽으로 기울었다. 그 변화를 눈치챈 석주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멀리서 보면 남자답다 못해 사나워 보이기까지 하는 석주의 눈은 가까이서 보면 예뻤다. 아니, 아름다웠다. 그 눈이 코앞에서 휘어지니 아진은 뭣도 모르고 따라 웃게 됐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무릎에 꾹 입술을 눌렀다 떼며 읊조렸다.

“다만, 나를 배신하는 건 안 돼.”

“저 배신 안 해요. 제가 뭐라고…….”

“그래, 그거면 됐- 아진아. 너 발이 왜 이래?”

말을 이어 가던 석주가 헛숨을 삼켰다. 새빨갛게 익은 아진의 발등을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그가 아진의 발목을 쥐고 냅다 들어 올렸다. 그 손길에 아진이 발라당 뒤로 넘어갔다. 앞머리가 함께 팔랑거리며 까뒤집혔다.

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파 등받이에 엎어진 터라 아프진 않았지만 놀랐다. 그가 소파를 짚고 꾸물꾸물 일어나 석주의 손에 잡힌 자신의 발을 내려다봤다. 발등이 전보다 붉었다. 그제야 따끔따끔한 통각이 느껴졌다.

“뜨거운 물에 뎄어요.”

“약은? 발랐어?”

“아뇨. 괜찮아요. 며칠 있으면 물집 좀 잡히다 말 거예요.”

아진이 심드렁히 대답했다. 그 무감한 어투에 석주의 한쪽 눈썹이 비죽 모나게 올라갔다.

아진이 발목을 뒤틀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윗사람에게 손도 아니고 발이 잡혀 있는 건 영 불편한지라.

근데 석주가 발을 죽 당겼다. 거센 힘에 아진의 몸 전체가 아래로 딸려 갔다. 아진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 상상을 하며 눈을 질끈 감는데. 그대로 미끄러져서는 석주의 품에 안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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