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55화 (155/261)

155화

“…….”

아진은 어찌나 놀랐는지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제가 잘못 봤나, 꿈인가, 하기엔 순철의 가슴을 물들이고 있는 피가, 단상에 얕은 웅덩이를 만든 피가, 단상 다리를 타고 흐르는 피가 너무 생생했다. 물보다 걸쭉하고 탁한 붉은색인 것이 너무나 피였다.

“수, 순철이 형님. 형님.”

아진이 재차 순철을 흔들었다. 그러나 게슴츠레하게 떠진 순철의 눈동자는 움직임이 없었다. 인형 눈알처럼 단단하고 무감했다. 손에 닿는 피부도 이상했다. 그의 가슴에 칼이 꽂혀 있음을 몰랐을 땐 별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매우 차갑고 딱딱하게 느껴졌다.

죽었구나. 진짜 죽었어.

뒤늦게 기겁한 아진이 단상 아래로 떨어졌다. 구겨 신고 있던 운동화 한 짝이 멀리 날아갔다. 그의 팔에 챈 미숫가루가 덩달아 추락했다. 유리잔은 챙그랑- 하고 가냘프게 깨졌다.

아진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러잖아도 희멀건 안색이 푸르스름할 정도로 창백하게 질렸다. 어쩔 줄 모르고 턱만 경련하던 그가 불편한 다리를 추슬러 일어났다.

석주에게 전화를, 전화를…….

다급히 현관으로 향하는데, 뒤통수 너머로 뚜벅뚜벅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진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얼굴에 황갈색의 거친 모직이 덧씌워졌다. 보자기 같은 걸 엎은 게 아닌가 싶었다.

“누구야! 누구야! 놔! 으아아악, 놔!”

아진이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했다. 팔을 뒤로 보내 보자기를 움켜쥔 이의 몸을 마구 때렸다. 그러자 괴한이 보자기의 양쪽 끝을 잡고 위로 휙 들어 올렸다. 거친 면포가 질기게 늘어나며 아진의 눈과 코, 입을 틀어막았다. 힘이 어찌나 좋은지, 보자기에 얼굴만 걸린 아진의 발끝이 허공에 붕 떠올랐을 정도였다. 마치 얼굴로 그네를 타는 듯한 모양새였다.

“커헉…….”

기도를 옥죄는 면포에 아진이 뻐끔뻐끔 입을 움직였다. 그 꼴이 마치 모래로 만들어진 인간 같았다.

아진은 무서웠다. 정말 사무치게 무서웠다. 그러나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까딱하면 죽는다. 가슴에 칼이 박힌 순철처럼 죽어 버릴 것이다.

그가 주먹으로 퍽퍽 괴한을 내리치는데.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뻑- 콧잔등 위로 주먹이 날아왔다. 꼭 쇠공에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힘 좋은 일격이었다. 가히 석주의 힘과 비등비등했다.

“윽…….”

아진은 그대로 까무러쳤다. 얼굴을 감싼 보자기가 그의 코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 * *

사장실에 앉은 석주는 벽 한쪽에 걸린 달력을 철천지원수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검지가 툭툭툭 옅은 짜증을 담아 책상을 두드렸다.

“금요일…….”

아직도 금요일이다. 아직도. 무슨 시간이 이리도 안 가는 건지. 고작 나흘일 뿐인데 꼭 10년처럼 길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월요일, 그와 통화했을 때 내일 만나자, 하고 냅다 질러 버릴걸.

아니, 그건 너무 성급한가. 아진이 부담스러워했을 수도 있겠다. 그럼 거절당했겠지. 역시 주말이 낫다. 아니, 그래도 너무 먼데. 금요일에 만나자고 할걸. 그럼 오늘 그와 만났을 텐데. 아, 모르겠다. 그저 아진을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석주가 의자를 반 바퀴 돌려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았다. 그리고 담배를 찾아 물고, 허공을 응시했다.

식사는 뭐가 좋을까. 밖에서 먹고 싶은데. 아진과 바깥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니까. 근사한 곳에 데리고 가고 싶었다. 근데 또 서양 음식을 사 주기엔 입에 맞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그 밖에도 이것저것 사 주고 싶은데 준다고 받으려나. 아니면 또 순철에게 몰래 들려 보낼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아진이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편안해야 다음에 또 만날 생각을 하지. 이 만남이 단발로 끝나면 안 됐다.

석주가 담배 연기를 뭉게뭉게 뿜어내며 평화로운 고민을 거듭하는데. 누군가가 묻지도 않고 벌컥 문을 열었다. 석주가 가는 눈으로 입구를 쳐다봤다. 똥 마려운 표정의 명진이 서 있었다.

“형님.”

“뭐.”

“이게 왔는데.”

“뭔데.”

성큼성큼 다가온 명진이 책상 위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신문지 뭉치였다. 신문지가 돌돌 말린 게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흔히 고기를 사면 이렇게 주는데, 그런 거라 치기엔 너무 작았다. 석주의 주먹만 한 덩어리였다.

“바깥에서 담배 태우고 들어오는 길에 아 하나가 이걸 주고 갔습니다. 형님 전해 주라고. 근데…… 이게 쫌…….”

신문지 뭉치는 헐겁게 말려 있었다. 명진이 이미 내용물을 열어 봐서 그런 듯했다.

석주는 심드렁한 얼굴로 신문지를 헤쳤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내일 있을 아진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가 꽉 차 있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내용물을 보는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신문지 안에는 손가락이 들어 있었다. 중지나 약지 정도로 추정되는 손가락이. 험하게 잘랐는지 절단면이 울룩불룩했다.

“…….”

석주의 낯에서 대번에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그대로 죽어 버린 듯, 버석하니 굳어서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실로 숨이 턱 막혔다.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귓구멍은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먹먹해졌다. 입술 사이에 물려 있던 담배가 볼품없이 아래로 낙하했다.

설핏 인상을 쓴 명진이 이런저런 추론을 했다.

“누구 손가락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아들은 다 멀쩡해가. 집에 전화해 봤는데 집에도 별일 없다 카고요. 생긴 것만 보면 아 손 같기도 하고, 남자 손가락 같긴 한데 너무 하얗고…….”

그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이렇게 혼자 덩그러니 떨어져 있으면 안 되는, 이런 잔인한 일에 하등 어울리지 않는 예쁜 손가락. 제가 사랑해 마지않던…… 아진의 손가락.

벌떡 일어난 석주가 다급하게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그 표정이 전에 없이 창백했다. 꼭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명진은 1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그를 봐 왔으나 저런 얼굴은 몇 번 보지 못했다. 아니, 딱 한 번 봤다. 석주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썩은 나무처럼 비쩍 말라서 아사한 아버지의 시체를 봤을 때. 그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분노와 절망과 공포가 마구잡이로 뒤섞인 표정 말이다.

“……형님?”

“…….”

“……설마, 아, 아진이, 아진이 손입니까?”

명진의 얼굴도 파랗게 질렸다.

석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뚜르르, 뚜르르, 하고 이어지는 신호음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제발, 받아. 제발. 아진아, 제발. 받아 줘. 제발.

항상 강직했던 그의 뺨이 파르르 경련했다. 굳은 시선은 잘린 손가락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먹물이라도 머금은 듯 탁해진 입술이 맥없이 벌어졌다.

제발, 제발…….

석주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아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석주는 다시 다이얼을 돌리려다, 쾅!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본능적으로 안 것이다. 아진이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걸.

“이런 씨발…….”

석주가 전화기를 옆으로 밀어 치웠다. 묵직한 철제 전화기가 철그렁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뒤꿈치를 들썩이며 불안함을 표출하던 명진이 더듬더듬 볼품없는 말로 그를 안심시키려 했다.

“수, 순철이가 있지 않습니까. 가가 아들 중에 총질 제일 잘해가 아진이 곁에 붙여 둔 거 아입니까. 뭐 일이 생겼으면 총을 쐈을 낀데, 그럼 이웃들이 경찰에 신고했을 꺼고, 그카면 우리 귀에 안 들어올 리가 없다 아입니까.”

그러나 석주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먹먹한 귓구멍이 세상을 차단했다. 석주가 책상 서랍에서 총을 챙기며 물었다.

“이거 준 애는? 다른 말은 없었어?”

“어, 아, 예. 사탕 쭙쭙 빨면서 와가 걍 언 아저씨가 주라 했다 카고는 폴짝폴짝 뛰어갔습니다. 얼굴이 묘하게 익숙하다 싶었는데, 덕재가 쩌 사거리에 있는 쌀집 아들이라 카더라고요.”

“…….”

“근데 가가 뭘 알겠습니까.”

석주의 눈동자가 좌우로 바삐 움직였다. 아무 말 없이 덜렁 아진의 손가락만 보냈을 리 없다. 바라는 게 있으니까, 원하는 게 있으니까-까지 생각하는데. 아진의 손가락을 싸고 있던 신문지가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그 신문에 실린 기사가.

[二月十一日 현성일보]

[잔칫집에 피바람!-조폭의 勢力다툼]

그 언젠가 석주가 기헌의 사촌 결혼식에 폭탄을 선물했던 다음 날 난 기사였다.

기헌이구나.

혹시나 했는데. 정말 이 일을 만든 장본인이 기헌인 모양이었다.

어쩐지 께름칙하더라니. 살아 있었구나, 씨발 새끼.

총을 챙긴 석주가 사장실을 뛰쳐나갔다. 명진이 빽 소리를 질렀다.

“형님! 어디 가십니까!”

그러나 석주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명진이 석주를 따라나섰다.

석주의 차가 아진의 집 대문에 닿을 듯 말 듯 하게 멈춰 섰다. 바퀴가 헛돌며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거칠게 문을 연 석주가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곧장 대문을 밀어젖혔다. 집 대문은 열려 있었다. 이미 예상하고 왔음에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당은 고요하게 엉망이었다. 월요일에 왔던 때와는 전혀 달랐다. 마구잡이로 짓밟힌 텃밭. 흙바닥 위로 고인 피. 난잡하게 뒤섞인 발자국. 깨진 유리컵. 뒤집힌 아진의 낡은 운동화 한 짝. 단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순철의 시체.

석주가 터벅터벅 순철에게로 다가갔다.

“…….”

그는 아무런 말 없이 가슴에 칼이 꽂힌 순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 있는 걸 보아 기습인 것 같았다. 옆구리에 있는 총은 반만 빠진 채였다.

석주가 천천히 손을 뻗어 순철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러면서 그와 함께 눈을 감았다가, 느리게 눈꺼풀을 올렸다. 그 후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과 달리 집 안은 깨끗했다. 아진이 청소해 둔 그대로였다. 괴한의 발자국도 없었고, 흐트러지거나 깨진 것도 없었다. 석주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 안을 훑어보았다. 역시나, 아진은 없었다.

그가 다시 집 밖으로 나왔을 때. 어느새 따라온 명진과 조직원들이 순철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순철아……. 아이고…….”

순철의 머리를 껴안은 명진이 한탄했다. 조직원 몇몇은 눈물을 찍어 냈다. 석주는 초점이 반쯤 엇나간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습격. 공격. 피. 죽음. 상실. 슬픔. 분노. 하나같이 석주에겐 익숙한 것들이다.

근데 오랜만이라 그런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뇌가 반쯤 밖으로 빠진 것처럼 멍했다.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직 살려야 할 이가 남아 있는데, 너무…… 너무…… 무서웠다.

그래. 석주는 지금 무서워하고 있었다. 이건 분노도 슬픔도 아니었다. 공포였다. 그래서 낯선 것이다.

아진이 어떻게 될까 봐. 아진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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