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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에어컨을 하나만 켜 두었습니다.”
석주가 눈썹을 올리며 침대 협탁에 있던 통을 하나 들었다. 연필꽂이가 줄줄이 연결된 듯한 생김새의 통이었는데, 그곳엔 리모컨이 6개나 들어 있었다.
석주는 매우 익숙한 손길로, 리모컨을 하나씩 들어 빨간색 버튼을 꾹꾹 눌렀다. 그럴 때마다 방 여기저기에서 띠리링- 소리와 함께 빛이 들어왔다.
가장 먼저 켜진 기계는 아진의 키만큼이나 커다랬고, 방 양쪽 끝에 붙어 있었다. 다음으로 켜진 건 천장에 붙은 것이었다. 길쭉한 날개가 펼쳐졌다. 그 밖에 또 다른 것이 켜졌는데 어디 붙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곧 겨울의 산 공기처럼 싸하고 차가운 바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진이 요술이라도 목도한 어린아이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깐 멍하니 있던 그가 냉기가 쏟아지는 기계를 손끝으로 슬쩍 가리켰다.
“저게…… 뭐예요?”
“에어컨이요.”
“에어……. 미제예요?”
“…….”
석주가 눈을 세 번 빠르게 깜빡였다. 그러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국산입니다.”
“아…….”
아진이 턱을 주억였다. 국산이구나……, 생각하다가 여기가 한국이 맞긴 한가 싶어졌다. 제가 있는 세상의 이름을 정확히 몰라서. 한글을 쓰긴 하는데 또 모르지. 여기 세상은 한국이 전 세계를 지배해서 모두가 한국어를 쓰는 걸지도.
아진이 이불을 꼬집었다 놓으며 하릴없는 추론을 하는데. 석주의 손이 다가왔다.
그는 손 전체로 아진의 앞머리를 크게 쓸어 넘겨 주었다. 그리고 손등으로 열에 달뜬 뺨을 문질렀다. 그로 모자라 느슨한 옷깃 사이로 손을 쑥 집어넣어 땀으로 번들거리는 승모근 밑부터 목덜미까지 손바닥으로 길게 쓸어 갔다. 그 손길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아진은 잠시 굳어 있다가, 수 초 후 기겁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턱을 안으로 움츠리며 상체를 뒤로 뺐다. 들고 있던 물잔이 사납게 출렁거렸다.
석주가 만졌던 피부가 비늘이라도 돋은 것처럼 낯설어졌다. 피부를 누르고 쓰다듬고 뭉툭하게 할퀴어지는 듯한 느낌이 그의 손이 떨어지고 나서도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당황하는 아진에 석주 역시 놀란 듯했다.
“아, 땀이…… 나서.”
아진이 눈을 더 크게 부릅떴다. 아니, 왜, 왜 내 땀을, 당신이, 왜, 막, 그렇게…….
아진이 석주가 흩트린 머리칼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내렸다. 그러다 흠칫 굳었다. 신기하게도, 지글지글하던 머리통이 한결 식었다. 석주의 차가운 손바닥 때문인 것 같았다.
……차가운 손바닥?
석주가 차가워?
석주가?
아진이 재차 석주를 쳐다보는데. 그가 별안간 뺨이라도 얻어맞은 듯한 얼굴로 사과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어투는 예의 바르지만, 여태 별말 없다가 갑자기 왜 싫어하냐는 듯한 낌새가 은근히 섞여 있었다. 평소엔 이런 접촉을 자연스레 한 모양이었다. 그의 입장에선 아진이 갑자기 유난이라도 떠는 것처럼 느껴지리라.
“어……머니는요?”
아진이 석주의 손길이 남은 볼을 벅벅 문지르며 물었다. 주제를 돌려 보려는 거였다.
“자정까지 여기 계시다가 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석주가 리모컨 통을 제자리에 가져다 두며 대꾸했다.
“…….”
“…….”
그러곤 정적이었다. 탁한 어둠 사이로 언뜻언뜻 눈이 마주쳤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아진의 눈동자가 시계로 향했다.
[3:08]
침대 끄트머리에 올려진 전자시계가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아진이 그 시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라고요?”
“5월 12일 금요일입니다. 3시간 전에는 11일이었고요.”
“연도는요?”
“2023년입니다.”
아진이 헛숨을 담뿍 들이마셨다. 2023년.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숫자였다.
2000년이라고? 그럼 제가 있던 그때에서 대체 몇 년이나 떨어져 온 것인가. 1951에서 2000년, 거기서 또 23년……. 네 자리 셈은 너무 어려웠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죄 꼽아도 계산이 안 됐다.
“나라는…….”
“한국이고, 서울입니다. 따로 살고 계시는 집도 서울이고, 소유하신 회사도 서울에 있습니다. 아, 서울은 한국의 수도입니다.”
“그건, 그건 저도 알아요.”
누굴 바보로 아나……. 아진이 새치름히 석주를 흘겼다. 석주 딴에는 에어컨조차 모르는 아진에게 친절히 설명해 준 것인데 뭔가가 살짝 어긋났다.
석주가 볼 안쪽 살을 지그시 씹는데. 물잔을 협탁에 내려놓은 아진이 조심스레 석주를 불렀다.
“강…… 비서님.”
“예, 사장님.”
“제가…… 사장이에요?”
“네. 그렇죠.”
“무슨 회사요?”
상당히 걱정스러운 질문이었다. 에어컨이 뭐냐고 묻는 것만큼이나 놀라웠다. 하긴, 선화도 몰라봤었지. 석주가 소리 없이 혀를 끌었다. 그러고는 소파에 걸쳐 두었던 자신의 재킷을 들고 왔다. 그곳에서 검은색 명함 케이스가 나왔다. 아진의 명함이 든 케이스였다. 비서가 모시는 사람의 명함을 들고 다니는 건 흔한 일이었다.
“사장님 명함입니다.”
석주가 명함 하나를 빼 아진에게 내밀었다. 아진이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았다. 석주가 침대 옆 스탠드를 켜 주었다. 빳빳한 종이에 새겨진 글자가 온전히 드러났다.
[STUDIO HS/ 스튜디오 현성
사장 한아진
A: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142 현성 미디어
T: 010-727-0001
E: [email protected]]
아진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무슨 명함에 꼬부랑글씨가 이렇게 많나. 세상이 어찌 되려고 외래어를 이렇게……. 아진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명함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사장 한아진] 그 문장이 낯선데, 그렇다고 나쁘진 않았다.
아진이 눈빛으로 명함을 뚫을 듯 보는데, 석주가 느지막이 입을 뗐다.
“스튜디오 HS인데, 예전 이름은 현성 미디어입니다. 현성 일보 내부에 있다가 17년 전에 떨어져 나온 회사고요, 드라마, 영화를 제작하고 투자하는 게 주된 업무입니다. 요즘은 OTT 플랫폼과의 협업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
아진은 석주의 말을 반도 못 알아들었다. 그래도 대충 가늠하기로서니 극장에 걸리는 영화를 만드는 곳인 듯했다.
아진이 다시 명함을 바라봤다. 현성. 그 이름이 묘하게 익숙했다.
“현성…….”
아진은 현성이라는 이름을 몇 번 반복해서 읊조렸다. 그러다 번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제가 석주의 방에 갇혀 있을 때, 그가 제게 주었던 연고에 적혀 있던 그 이름이었다.
[玄星 화학공업사 <연고>]
검을 현. 별 성. 두툼한 글씨로 쓰여 있던 이름이 떠올랐다. 또, 석주가 보던 신문의 이름도 현성 일보였다. 혼자 살게 된 집 근처에 있던 극장 이름도 현성 극장이었다. 그때부터 있던 회사구나. 근데 제가 거기에 사장으로 있다고?
“현성…… 제약…….”
아진의 웅얼거림에 석주의 눈썹이 반갑게 위로 올라갔다.
“어, 기억이 나십니까?”
“…….”
“현성 제약은 회장님 부친께서 정리하셨습니다. 조심해야 할 것도 많고, 신경 써야 할 것도 많고, 법이 촘촘한 한국에서는 신약 개발이 어려워서요.”
“…….”
아진의 눈매가 아래로 처졌다. 석주의 말은 어려웠다. 그에 석주가 한 뼘쯤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어머님은 현성 그룹 회장님으로 계십니다. 형님은 현성 일보 사장님, 누님은 포털 사이트 H의 대표로 계시고요.”
“형, 형이요? 누나요? 저한테 가족이 또 있어
요?”
아진의 만면에 재차 놀라움이 퍼졌다. 석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두 분 계십니다. 형님 성함은 ‘한정진’이시고 사장님과 나이 터울이 8살 납니다. 누님 성함은 ‘한미진’으로 6살 차이가 납니다. 두 분 다 지금 한국에 안 계십니다. 사장님 상태 듣고 곧장 오시려 했지만 회장님이 만류하셨답니다.”
아진이 명함 모서리로 손가락 끝을 쿡쿡 찍었다. 정진, 미진, 아진. ‘진’ 자를 돌림으로 쓰는구나. 낯선 이름들이었지만 신기하게도 가족이라니 가족이구나 싶어졌다.
“제가…… 형님이랑, 누님이랑 친한……가요?”
“예. 우애가 좋으십니다.”
석주가 큰 고민 없이 긍정했다. 아진이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명도 없던 가족이 갑자기 셋이나 생겼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이들인데 괜히 마음이 충만해졌다. 근데 뭐 하나가 빠진 것 같은데……. 잠깐 고민하던 아진은 금세 답을 찾았다.
“근데 아버지는요?”
“회장님께서 결혼을 안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결혼을 안 하셨다고요?”
“예.”
“어…… 그렇구나…….”
결혼을 안 했는데 자식이 셋이나……. 이 세상에서는 그런 것도 되나. 하긴, 2023년이라는데. 안 될 건 또 뭔가. 서늘한 산바람이 나오는 기계도 있는 세상인데.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쉬웠다.
아진이 이불을 들치고 석주에게 붙어 앉았다. 새로운 세상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젖혀 두고 나니 궁금한 게 많아졌다. 알아야 할 것도 많았고.
석주가 반들거리는 아진의 군청색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아진이 그와 눈을 맞추며 종알종알 물었다.
“저는 몇 살인데요?”
“27살이십니다.”
“27살이요? 그럼 저 장가갔어요?”
“장…… 장가요? 결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안 갔어요?”
“예. 결혼하기엔 이른 나이시죠.”
석주가 얼떨떨한 낯으로 말했다. 아진이 으음, 하고 목으로 신음했다. 27이면 이른 나이는 아닌데. 여기는 또 다른가. 명함을 조물거리던 아진이 슬쩍 석주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음을 연기하며 물었다.
“그럼…… 강…… 비서님은요? 장가갔어요?”
“아니요. 안 갔습니다.”
석주가 명확하게 대답했다. 퍽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강 비서님은 몇 살인데요?”
“……33살입니다.”
“늦으셨네요.”
그때도, 이번에도. 어느 세상이든 간에 석주는 결혼에 딱히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진은 어째서인지 그것에 옅은 안도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