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귀한 얼음이 동동 뜬 냉국을 보던 아진이 숟가락을 들었다. 근데 어째 밥그릇이 하나다.
“강 비서님은 안 드세요?”
“저는 아까 대충 먹었습니다.”
아진이 음……, 하고 목으로 탁음을 냈다. 무언갈 고민하던 그가 숟가락을 놓고,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통통한 장어 한 점을 집어 석주에게 내밀었다.
“나이 많은 사람 먼저…….”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상이 아무리 변했대도 한글을 쓰는 한국에서 장유유서가 사라졌을 리 없다. 특히나 제가 알던 석주는 12살이나 차이가 나서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그나마 6살 차이긴 하다만, 그것 역시 적은 차이는 아니었다.
이왕이면 제가 석주보다 나이가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래도 석주를 종으로 대하는 건 어려울 듯싶었다.
“…….”
석주가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장어를 가만히 쳐다봤다. 처음엔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다 아진을 한 번 보고, 입술을 슬쩍 말아 물었다가 떼며 장어를 받아먹었다. 아진이 단정하게 움직이는 석주의 입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맛있습니다.”
음식물을 모두 씹어 삼킨 석주가 말했다. 아진이 빙긋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딱히 의미가 있는 웃음은 아니었다. 버릇 같은 거였다. 제가 만든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맛있다니 마냥 좋았다.
석주가 그런 아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진은 그 집요한 시선을 인지하지 못하고 밥상에 얼굴을 묻었다. 수저가 바쁘게 움직였다.
밥은 맛있었다. 쌀도 비싼 쌀을 쓴 건지 밥알이 탱글탱글하고 윤기가 흘렀다. 반찬들 맛도 훌륭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릇도 좋았다. 얇고, 가볍고, 단단해 보였다. 설거지하기 좋은 그릇들이었다. 수저도 그랬다. 무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고, 중심이 잘 잡혀 있었다.
석주네 집에 있던 식기들은 좋은 편도 나쁜 편도 아니었다. 시커먼 사내들만 가득한 데다가 밥은 양푼으로 퍼먹는 이들이 즐비한지라 그런 데까지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역시 양반집은 다르구나.
아진은 감탄 어린 고갯짓을 하며 밥상을 싹 비워 냈다. 석주가 때마침 찬물을 따라 주었다. 아진이 그것을 시원하게 삼켰다. 석주는 아진이 먹은 것을 정리해 나무 쟁반째로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까딱 묵례했다.
“그럼 저는 이거 정리하고 가 보겠습니다.”
그 말에 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요? 어, 어딜요? 저 혼자 두고요?”
찬물에 붉게 언 입술이 경련했다. 아진은 와다다 말을 해 놓고 뒤늦게 후회했다. 뒷말은 하지 말걸. 혼자 두긴 개뿔. 여기가 제집이라는데 혼자 두고 말고 할 게 무어가 있나. 아진이 아랫입술을 깨무는데, 석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여기 있는 거 싫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아…….”
아진이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하긴, 그랬지. 여기서 밥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싫다고 아주 쩌렁쩌렁하게 말했었다.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손끝으로 컵을 토독토독 두드리던 아진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좀생이. 고작 그거 몇 마디 했다고 홀랑 가 버리겠다고. 이 야밤에? 나 혼자 두고? 나 여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저 에어컨이라는 걸 끌 줄 모르고, 부엌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몇 시간 전에는 쓰러지기까지 했었는데? 가겠다고? 진-짜 좀생이야.
눈앞에 있는 석주는 진짜 제가 아는 석주가 아닌 모양이다. 이전의 석주는 뒤끝일랑 없는 호탕한 사내였는데.
아진의 말간 얼굴에 심술이 차올랐다. 그러면서도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한사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아진을 지그시 보던 석주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까지 있다 갈까요? 회장님 깨실 때까지만.”
그 말에 아진이 흘끔 석주를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질 같아서는 꺼지든가 말든가, 해 버리고 싶지만 무서웠다. 석주 없이 혼자 있기가.
이곳은 아진에게 낯선 세상이고, 새로운 세상이다. 가족이 있다고 하지만 가족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제 방이라 하는데 제 방 같지도 않았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건 석주 하나였다.
과거의 석주가 눈앞에 있는 이 석주와 같은 사람인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익숙한 얼굴이지 않나.
“그럼 정리만 하고 오겠습니다. 디저트도 갖다 드릴까요?”
“디저……트요?”
“후식이요. 과일이나, 케이크나, 쿠키나.”
“좋아요.”
아진이 냉큼 긍정했다. 2023년의 사람들이 먹는 과일과 쿠키. 분명 환상적일 터였다. 석주가 금방 오겠다는 말을 재차 하고는 방을 나섰다.
아진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석주는 약속했던 대로 금세 돌아왔다. 손에 물기가 없기에 설거지는 안 했냐, 물어보니 식기 세척기가 있다고 했다.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이름으로 말미암아 무엇에 쓰는 건지 유추할 수 있었다.
식기. 세척. 기. 그릇, 씻는, 기계. 이것 보라. 이름이 한글이면 얼마나 좋은가.
석주는 ‘자몽’이라 불리는 과일에 시럽을 얹은 것과 롤케이크를 가지고 왔다. 롤케이크는 아진이 흔히 알던 딸기잼 대신 주먹만큼의 하얀 생크림을 품고 있었다. 맛은 뭐, 두말할 것 없이 천상의 맛이었다. 빵은 보드랍고, 크림은 아주 달지 않으면서도 고소하게 녹아내렸다. 자몽도 씁쓸한데 달콤한 것이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렇게 디저트까지 먹어 치운 후, 아진은 하릴없이 넋을 놓고 있었다. 언뜻 본 시계는 새벽 다섯 시에 다다라 있었다.
자야 하나, 일어나야 하나. 원래는 마당 쓸고 채소 다듬을 시간인데,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바닥에 앉아 소파에 기대어 있던 아진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석주를 흘끔거렸다.
석주는 내내 저 ‘태블릿(무엇에 쓰는 것인지 궁금해서 물어봤다. 석주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으나 아진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일을 하는 데 쓰이는 거란다.)’이라는 것만 만져 대고 있었다. 제가 쓰러져서 이틀이나 자리를 비운 탓에 처리할 일이 많단다.
소파에 뺨을 묻은 아진이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심심했다. 그렇다고 혼자 집을 둘러보거나 새로운 무언가를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다 무심코 푹 한숨을 내쉬어 버렸다. 석주가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TV라도 보시겠습니까?”
“티, 뭐……요?”
“TV요.”
석주가 턱짓으로 침대 맞은편 벽에 달려 있던 검은 판을 가리켰다. 석주의 키만큼이나 가로로 넓은 판은 어슴푸레한 조명 속에서도 반질반질하니 빛이 났다. 석주는 테이블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검고 긴 물건이었는데, 꼭 주판처럼 생겼다. 그렇다고 주판은 아니고, 버튼이 아주 많았다. 에어컨을 켰던 것과 비슷했다. 후에 알고 보니 기계를 껐다 켜는 리모컨이란다.
석주가 리모컨을 아진에게 내밀었다. 아진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고 빤히 쳐다봤다.
이게 TV인가. 이걸 보라고? 빨간 동그라미, 숫자, 더하기 빼기, 집 모양. 이게 뭔데. 장난감인가? 아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석주가 전원 버튼을 찾아 꾹 눌러 주었다. 그러자 정체를 알 수 없던 검은 판이 번쩍이며 켜졌다.
석주는 익숙한 손길로 이것저것 누르더니 유명한 OTT 앱에 들어가 아진이 좋아라 하는 영화를 틀어 주었다.
아진은 입을 헤-벌린 채 영화를 관람했다. 처음에는 영화를 본다기보다는 TV를 구경하는 것에 가까웠다.
극장인가. 미래에는 극장을 방마다 하나씩 두나. 이야, 미래는 미래구나, 생각하다 뒤늦게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에는 서양 사람들과 아주 많은 자동차가 나왔다. 멋들어지게 생긴 자동차가 도로를 쌩쌩 달린다 싶더니 별안간 철커덕철커덕 끼긱끽, 타닥탁 하더니 기계로 변신했다. 찬장에 있는 장난감들과 비슷한 생김새였다.
아진이 입을 쩍 벌렸다. 그러다 옆에 앉아 있던 석주의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며 다급하게 물었다.
“저게, 저게 진짜 저렇게 움직여요? 아까 우리가 타고 온 자동차도 저렇게 돼요? 차가 살아, 살아 있는 거예요?”
“아니요. CG, 아니, 음, 허상으로 만든 겁니다. 그래픽으로. 그래픽이 뭐냐면, 그러니까, 아. 자동차만 카메라로 찍어 놓고, 로봇은 그 위에 사람이 덧그린 겁니다.”
“아, 만화처럼?”
“네. 만화처럼요.”
어려운 질문을 매끄럽게 넘긴 석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은 물론 애인도 없는 제가 육아하는 기분을 느낄 줄 몰랐는데. 꼭 다섯 살 어린아이를 키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호기심은 많은데 무지한 다섯 살 말이다.
아진은 얼굴을 앞으로 쭉 뺀 채 영화를 관람했다. 그의 순진한 얼굴 위로 TV 화면이 내뿜는 색색의 빛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석주는 소리 없이 웃으며 잠시 그를 보다,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영화가 중반에 다다르고, 주인공 로봇들끼리 싸우기 시작하면서 아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 속은 메슥거리고, 아까 먹은 밥이 목구멍에서 출렁거리는 듯한 느낌이 났다.
“비서님.”
“예, 사장님.”
“저…… 속이 울렁거려요.”
아진이 자신의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불편함을 호소했다. 석주가 얼른 TV를 껐다. 시끄럽던 실내가 단숨에 조용해졌다. 아진이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얼굴이 새하얬다.
석주가 헛숨을 삼켰다. TV를 보다 멀미를 느끼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진이. 온종일 드러누워서 TV만 보던 이인데.
석주는 에어컨 온도를 조금 높이고 미적지근한 물을 갖다 주었다. 아진은 잠시 힘들어하더니 다행히 금세 회복했다. 그러나 석주의 만면에 스민 걱정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아진이 멋쩍게 웃었다.
“TV는 더 보기 힘들 것 같고, 어……. 책은 없나요? 책 읽을래요.”
“……책이요?”
석주가 잘못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석주가 서재랍시고 데리고 온 곳은 서재라기보다는 도서관에 가까웠다. 아진의 시선에선 지극히 그러했다. 높다란 천장, 벽에 촘촘히 붙은 책장, 빼곡한 책들까지. 아진이 입을 허- 벌린 채 서재를 구경했다.
“책이…… 왜 이렇게 많아요?”
“회장님도 그렇고 형님과 누님도 그렇고, 다들 책을 좋아하십니다.”
“…….”
그 예시에 저는 없구나. 아진은 눈치껏 제가 책을 좋아하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한아진이라는 애는 대체 뭘 하고 산 걸까. 사장이라면 모름지기 똑똑해야 하는데. 사내새끼가 귀나 뚫고 다니고. 밥벌이는 했었는지 의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