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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69화 (169/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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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집에 적응해 가는데. 이제 에어컨도 혼자 켜고 끌 줄 알고, 얼음 기계도 쓸 줄 아는데. 새로운 과제가 생겼다.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당연 두려움이었다.

“……출근? 사장님으로? 회사에?”

“응. 그냥 가서 앉아만 있어. 원래도 일은 강 비서가 다 했었으니까. 혹시 미팅 들어가서도 그 뭐냐, 핸드폰 게임, 너 하는 거 있잖아. 그거나 해. 어차피 욕은 전부터 먹고 있었어. 좀 더 먹는다고 뭐 큰일 나겠어? 괜찮아.”

“게임…….”

아진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게임이 뭔지는 알았다. 70년 전 도박장에서도 한 게임만, 한 판만, 뭐 그런 말을 썼었기 때문에. 근데 회사에서 그런 걸 해도 되나. 화투패 돌리고, 판돈 걸고?

아진이 볼을 긁적였다. 그때 얼굴이 낯익은 부엌 직원(석주가 사람에게 종이라 부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언질해 주었다. 대신 직원이라는 말을 쓰라고 했다.)이 텅 빈 아진의 컵에 자몽과 오렌지를 함께 간 주스를 따라 주었다.

아진이 그것을 멍하니 보며 선화의 시선을 피하는데. 선화가 검지로 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원래 루틴대로 움직여야 뭐든 기억이 날 거 아니야. 치료다, 생각하고 다녀 봐.”

회사에서 게임을 하고, 치료랍시고 다니고, 정작 일은 석주가 다 하고. 몇 번 눈을 깜빡이던 아진이 물었다.

“그럼 나는 바지사장이야?”

그 물음을 끝으로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선화가 깔깔거리며 방정맞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이들도 그랬다. 주스를 채우던 직원부터 석주까지 모두가 웃었다. 아진만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뭐가 웃기지. 바지사장이 웃긴가.

그가 눈썹을 긁적이는데. 선화가 사랑스럽다는 듯 아진을 쳐다봤다.

“맞아. 바지사장. 네가 그걸 인지는 하고 있었구나? 기특하네.”

아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제가 아무리 무식하다지만, 진짜 기특해하는 건지 아니면 놀리는 건지 판가름할 줄은 알았다. 아진이 아랫입술을 삐죽거리는데. 선화가 그를 달래듯 말했다.

“아진아. 바지사장, 그거 그렇게 나쁜 거 아니다? 일은 안 하고 사장님 호칭은 듣고 돈은 돈대로 벌잖니.”

“응…….”

“그리고 너는 일 안 하는 게 도와주는 거야. 그냥 석주가 시키는 대로 해.”

“응.”

아진은 삐진 티를 내면서도 꼬박꼬박 긍정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바지사장으로서 석주가 시키는 것만 하기.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진이 옆자리에 앉은 석주를 슬쩍 바라봤다. 그 시선을 느낀 석주가 아진을 쳐다봤다. 그의 입가에 ‘바지사장’으로부터 말미암은 웃음의 여파가 아직 묻어 있었다. 그것을 본 아진이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복숭아를 찍어 입 안에 욱여넣었다.

* * *

반질반질한 구두를 신고 걷는 아진의 걸음걸이가 영 어정쩡했다. 두 발로 걷는 것도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는데 구두까지 신었더니 다리가 삐그덕삐그덕 난리였다.

오늘은 아진의 첫 출근 날이었다. 아침부터 정장을 차려입고, 넥타이를 하느라 애를 먹었다. 석주의 도움 없이 꾸역꾸역 혼자 해 보려다 결국 그의 도움을 받았다.

어차피 바지사장인데 뭐가 그리 긴장이 되는지. 아침에 선화가 손수 갈아 준 건강 주스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석주가 운전하는 차는 높다란 빌딩 앞에 멈춰 섰다. 깨끗하고 반짝이고 고개를 쳐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빌딩 앞. 그때는 조금 설렜다. 드디어 한옥이 아닌 미래의 건물에 들어가 보나 싶어서.

근데 막상 들어오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안녕하세요.”

“사장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사장님.”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인사가 공격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저보고 하는 인사인 줄도 몰랐다. 그러다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인지하고 나서야 그 인사에 꾸벅꾸벅 묵례하며 화답했다.

‘원래 직원들에게 친절하고 살가운 사장님은 아니셨습니다.’

석주의 조언을 떠올리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곁에 서 있는 석주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괜찮은 연기인 듯했다.

길고 끝없는 로비를 가로질러 드디어 엘리베이터에 탄 아진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임원 전용이라는 엘리베이터에는 석주와 아진 둘뿐이었다. 벽에 기대선 아진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근데 어째 귀가 먹먹했다.

엘리베이터는 병원에서 온갖 검사실을 전전하며 시도 때도 없이 탔다. 그래서 적응했는데, 귀가 먹먹한 건 처음이었다. 매우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모양이었다.

아진은 그 낯선 감각을 참으며 곧게 서 있는 석주를 곁눈질했다.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입고 목에 사원증이라는 것을 건 석주는 전생의 석주와 묘하게 달랐다. 넙데데한 등짝이나 두툼하게 붙은 근육은 여전한데, 분위기가 달랐다.

아니, 근데 저 덩치와 저 몸으로 왜 깡패가 아니라 비서를 하고 있지. 예나 지금이나 깡패였으면 아주 크게 한탕 했을 것 같은데. 혹 미래에는 깡패라는 직업이 사라졌나.

아진이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콧잔등을 찡긋거리는데.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석주가 비켜서며 앞으로 손짓했다.

“앞에 보이는 큰 문이 사장실입니다. 곧장 걸어가셔서 문 열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같이 안, 안 가요?”

아진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석주가 낮은 음성으로 이유를 설명했다.

“같이 가는데. 제가 사장님을 앞질러 갈 순 없으니까요. 비서들이 봅니다.”

“아…….”

제가 석주의 윗사람이라는 걸 자꾸 잊는다. 고개를 끄덕인 아진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뚜벅뚜벅. 구둣발 특유의 발소리가 맑게 울렸다.

문으로 향하는 길목에 앉아 있던 직원들이 아진을 발견하고는 바로 섰다. 그리고 일제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아, 예. 안녕하세요.”

아진은 무심코 그들과 같이 꾸벅 허리를 숙이다 석주가 손목을 움켜쥐는 것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파드득 어깨를 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듯 쫄래쫄래 바쁜 걸음으로 사장실로 들어갔다. 석주가 코로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도망치듯 들어온 사장실은 넓고, 깨끗하고, 단정했다. 장난감이 많던 본가의 방과는 전혀 다른 생김새였다. 일하는 곳이라 단정하게 꾸며 놓았다기보다는, 그냥 아진이 이곳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는 것 같았다.

[사장 한아진]

크리스털 명패가 책상에 떡하니 올려져 있었다. 아진이 그것을 흘끔거리며 손가락을 매만지는데. 석주가 익숙하게 이것저것을 정리했다.

“여기 앉으세요.”

석주가 책상 앞의 의자를 빼 주었다. 아진이 그곳에 가 어색하게 엉덩이를 붙였다. 석주는 미리 챙겨 온 여러 가지 도서를 책상 서랍에 넣어 주었다. 아진이 읽던 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저한테 전화하는 법 기억하시죠?”

석주가 블라인드를 올리며 물었다. 아진이 재킷 안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출근 준비를 하며 급하게 핸드폰 쓰는 법을 배웠다. 이건 또 무슨 기계인가, 싶었는데. 신기하게도 손가락이 알아서 움직였다. 이를테면 뒤로 가기라든가, 홈으로 이동하는 거라든가, 그냥 생각하기도 전에 손가락은 이미 해당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따로 기억해야 하는 건 숫자 5였다. 수화기 모양 아이콘에 들어가서 5번을 길게 누를 것. 그럼 석주에게 전화가 간다고 했다. 다른 것도 배웠다. 1번은 선화. 2번은 형. 3번은 누나. 4번은 이모였다.

아진이 핸드폰을 조심히 책상에 내려놓는데. 석주가 큰 보폭으로 문으로 향했다. 그에 놀란 아진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어디, 어디 가세요?”

“제 자리로 갑니다.”

그 말에 아진의 만면이 온통 구겨졌다.

“비서님 자리가 바깥에 있어요?”

“예. 멀지 않습니다. 나가서 바로 왼쪽 파트에-”

“사전에 비서는 수시로 곁에 있으면서 일을 돕는 거라고 적혀 있었는데. 왜, 왜 바깥에 있어요? 제 옆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진이 와다다 말을 쐈다. 설마 회사에서 석주와 떨어지게 될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이 넓고 낯선 공간에 혼자 있어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절대로 출근하지 않겠다고 버텼을 것이다.

“…….”

석주가 파랗게 질린 아진을 지그시 바라봤다. 잠시 그의 의중을 가늠하다, 슬쩍 물었다.

“……업무를 여기서 볼까요?”

아진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나 힘차게 끄덕이는지. 아침에 석주가 손수 드라이해 준 머리칼이 덩달아 팔랑거렸다. 속으로 꾹 웃음을 삼킨 석주가 턱을 까딱였다.

“그럼 필요한 것들만 챙겨 오겠습니다.”

“…….”

아진의 낯에 다시 그늘이 졌다. 석주가 그를 달래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5분 이내로 옵니다.”

그 말에 아진이 또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고는 선화가 골라 준 손목시계를 빤히 쳐다봤다. 정말 5분을 잴 생각인 듯했다. 괜히 다급해진 석주가 걸음을 빨리했다.

석주는 사장실의 소파 테이블에 전을 펼쳤다. 노트북에 태블릿에 핸드폰은 물론 각종 서류에 펜과 포스트잇까지. 짐이 가득했다.

반면 아진은 뒤늦게 배가 고파 석주가 사다 준 딸기 우유를 쭙쭙 빨며 책을 읽고 있었다. 남학생 둘과 여학생 하나가 마법 학교에 입학해서 마법을 배우고 악인을 처치하는 이야기였는데, 잠도 안 자고 읽을 만큼 재미있었다. 시리즈도 매우 길고 많아서 한동안은 이것만 볼 듯했다. 번역 소설이라 국어사전에서도 찾을 수 없는 단어가 많았는데 그런 건 대충 넘겼다.

그렇게 오전이 지나가는 동안, 많은 이가 사장실을 들락날락했다. 모두 석주의 손님이었다.

“강 비서님, 잠깐만.”

“비서님, 여쭤볼 게 있어서요.”

“강 비서님?”

“강 비서님, 사장님 결재는 어떻게…….”

“강 비서님-.”

아진은 처음엔 노크 소리에 움찔움찔 어깨를 떨었으나 나중엔 심드렁하게 책장을 넘겼다. 바지사장이 적성에 맞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따금 석주가 서류를 내밀며 서명하라고 하면, 또박또박 이름을 써 주었다. 곱씹을수록 마음에 드는 ‘한’씨 성은 더욱 힘주어 적었다.

그럼 석주가 푹 한숨을 내쉬며 초등학생이 위조한 것처럼 보이니 휘갈겨 써야 한다고 했다. 아진은 부루퉁한 얼굴로 ‘한아진’을 대충 흘겨 썼다. 그제야 통과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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