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72화 (172/261)

172

여름과 어울리지 않게 니트를 걸친 석주가 물과 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시선은 오롯이 아진을 향해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그를 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진은 잠시 잠깐 멈칫했다가 거리낌 없이 그에게 달려갔다. 석주는 잠자코 기다렸다. 그리고 아진이 가까워졌을 때, 두 걸음 다가와 수건을 내밀었다.

“회장님께서 여기 계신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하아, 하아……. 그래요?”

“근데 평소보다 늦으셔서 혹시나 하고.”

“제가 애도 아니고……. 혼자 갈 수, 있는데. 하아……, 핸드폰도 있고.”

아진이 운동복의 바지 주머니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석주가 내미는 수건을 받아 얼굴을 북북 영 조심스럽지 못하게 문질렀다. 석주가 수건 끄트머리로 아진의 목덜미와 관자놀이를 닦아 주었다.

“그래도 걱정이 돼서요. 아무래도 요즘…… 많이 힘들어하시니까.”

“……그러긴 했죠.”

머리칼까지 탈탈 턴 아진이 수건을 내렸다. 석주가 그것을 가져가고, 뚜껑을 딴 물을 들려 주었다. 아진이 그것을 꿀꺽꿀꺽 시원하게 삼켰다. 물은 차갑고 청량했다.

아진은 단숨에 물을 반이나 비워 냈다. 그리고 물병 주둥이에서 입술을 뗐을 때. 석주가 물었다.

“더 계실 겁니까?”

“아뇨. 가야죠.”

아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석주가 끄덕거리며 그의 옆에 붙어 섰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발을 맞추며 집으로 향했다. 아진은 달리기의 여파로 한동안 가쁜 숨을 골랐다. 석주가 잠깐 앉아서 쉬어 가겠냐 물었지만 거절했다.

조금 더 걸으니 호흡도 완전히 안정이 됐다. 아진이 얼마 남지 않은 물을 모두 비워 냈다. 석주가 당연하게 빈 물병을 받아 갔다. 그리고 한 손으로 콰드득 구기더니 뚜껑을 꽉 닫았다. 핏줄이 도드라지게 솟은 석주의 손등을 보던 아진이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형.”

“……예, 사장님.”

갑작스러운 형 호칭에 놀란 석주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진이 그의 팔뚝을 툭 장난스레 쳤다.

“미안해요.”

“뭐가…….”

“내가 아파서, 그러니까 머리가 고장 나서 형이 대신 고생하고 있잖아요.”

“아닙니다.”

“아니긴. 바쁜 게 눈에 보이는데. 저녁에도 회사 갔다가 왔잖아요. 그걸 뭐라고 하더라. 아까 엄마가 말씀해 주셨는데……. 아, 어, 야근. 야근했잖아요.”

“……괜찮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야근이 아니어서요.”

석주가 옅게 미소 지었다. 남이 들으면 미친 거 아니냐고 눈을 뒤집겠으나 아진은 그냥 그런가 보다, 일을 참 좋아하는구나, 했다.

아진이 선이 뚜렷한 그의 옆얼굴을 응시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요.”

“네.”

“제가 앞으로 잘할게요.”

“…….”

“도움은 못 되겠지만, 방해는 안 하도록 노력할게요.”

석주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저녁때까지만 해도 우울해하던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게 희한하다는 표정이었다. 어째서 몇 시간 만에 철이 들었냐는 표정 같기도 했다. 아진이 그를 보며 빙긋 눈을 휘며 웃었다.

“차근차근 적응할 거예요.”

차근차근 잊을 것이다.

아팠던 기억, 슬펐던 기억 전부.

“다 돌아올 거예요.”

다 사라질 것이다.

흔적도 없는 손목의 흉터처럼, 가슴에 박혔으나 존재하지 않는 총알처럼, 불완전했던 다리처럼 다 사라질 것이다.

“나는 괜찮아질 거예요.”

끝내 나는 완전한 의미의 환생에 다다를 것이다.

당신 없이도 괜찮은 나로.

혼자서도 괜찮은 나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