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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4/32)

4장

대낮이었지만, 명월은 편한 차림새였다. 바지에 저고리를 입은 그는 상투를 튼 채로 두툼하게 깔린 이불에 앉아 있었다. 아니. 목침 두 개를 올려서 그곳에 팔꿈치를 올리고 몸을 기댄 채로 있었다. 정말은 누워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낮부터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는 사또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뭐, 대낮부터 기방 찾는 사또라는 소문은 도는 것 같았지만―.

멍하니 있던 명월은 눈을 내리떴다. 상 앞에 거울 함이 놓여 있었다. 여인도 아니고, 상 위에 저런 걸 올려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까도 확인했지만, 짧은 시간 안에 좀 가라앉지 않았을까 싶어서 슬쩍 자세를 바로 해서 앉았다. 엉덩이랑 항문이 욱신거렸지만, 꾹 참고 바로 앉은 명월은 거울에 비치는 제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곤 당장 인상을 썼다.

“쯧―.”

혀를 차고는 거울을 잡아서 닫아 버렸다.

손을 턴 그는 오른쪽 뺨에 손을 댔다. 손가락으로 더듬자 피부가 부은 게 느껴졌다. 이만한 붓기라니.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거라면서, 인상을 쓴 채로 뺨을 더듬던 명월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아팠다. 팔뚝만 한 게 들어왔다가 나갔으니 그게 당연한 거겠지만, 얼굴에 생긴 이 자국은 어쩌란 말인가. 딱 봐도 누군가에게 물린 건데, 얼굴 보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건 뭡니까.”라고 물을 만했다

제길, 하고 혀를 찬 명월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번 일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 괴물 놈을 대신 처리해 준 것과는 별개로,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없었다. 말로는 은혜를 갚으라 했지만, 그걸 빙자해서 자신을 겁간한 것뿐이었다.

역시나 처음 느낌이 안 좋았을 때에 처리를 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놈은 상당히 힘이 센 편이었다. 처리를 하고 싶어도 쉽지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명월은 움켜쥔 손에 더욱더 힘을 줬다.

일단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날 필요가 있었다. 이후에 그놈에 대해서 알아낸 후에 제대로 잡으러 갈 터였다. 이번에도 모든 걸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정말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서 된통 당할 뻔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명월은 그 괴물을 떠올리는 순간 오싹하니 몸에 오한이 들었다.

괜히 춥구나 싶었던 명월은 손을 들어 팔을 문지르면서 고개를 숙였다. 저도 모르게 쯧, 하고 혀를 차게 된다.

자신이 해결한 건 아니었지만, 일단은 처리된 놈이었다. 그런 식으로 몸과 얼굴이 관통되었으니 아직까지 남아 있을 턱이 없었다. 그냥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자 싶어도 그리되지가 않았다.

그 순간 명월은, 이 세상에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하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지금까지 자신이 봐 온 것들은 무척 소소한 빙산의 일각이었을 지도 몰랐다. 정말로 대단한 것들은 이런 식으로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인간의 목숨을 취하곤 다시 숨어 버리는 거다.

그 백호인지, 백묘인지, 개새끼인지 알 수 없는 놈도 그렇고.

“…….”

뭘 생각해도 결국에는 그 빌어먹을 장인 놈으로 이어지는구나 싶었던 명월은 혀를 찼다. 쯧, 하고는 목침을 뒤로 밀고 그냥 자리에 누울 셈이었다. 그때 문을 열고 복운이 들어왔다. 쟁반에 하얀 그릇을 올리고 온 복운은 한달음에 명월 앞으로 가선 그걸 내밀었다.

“사또, 이것 좀 드십시오. 몸에 좋다는 귀한 약입니다.”

명월은 하얀 사기그릇에 담긴 검은 액체를 보곤 바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색만 봐선 약인지 사약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그보다, 쓴 건 쥐약이었던 명월은 질색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됐다. 난 그런 걸 안 마실 테니, 그냥 들고 나가라.”

“눈 딱 감고 한 번에 들이키십시오. 일부러 사또를 위해서 제가 약방에 가서 직접 지어 온 거란 말입니다.”

복운은 그릇을 든 채로 애원하는 시선을 던졌다.

이 모든 게 전부 명월을 위해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명월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릇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종종 봐 오던 모습이었기에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 고집 센 모습을 바라보던 복운은 눈을 굴리면서 조심스레 다른 말을 꺼냈다.

“그, 그리고 무당을 찾아가서 부적을 좀 적어 올까 하는데…….”

바로 날아오는 매서운 시선에 복운은 당장 고개를 숙였다.

“쓸데없는 소리 해서 죄송합니다.”

쩔쩔매는 복운을 보자 명월의 눈에 들어간 힘이 서서히 빠져나간다.

따지고 보면 복운, 그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걱정이 되어서 저런 말을 한다는 것 정도는, 명월도 잘 알고 있었다.

낮에 필사적으로 치마로 몸과 얼굴을 가린 명월을 보고 복운은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저 웬 놈이 명월을 두들겨 팼다고만 생각하고는 당장 억장이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어떤 개놈의 자식이 우리 사또를 이렇게 만든 겁니까?!’라고 외칠 따름이었다.

명월이 앉아 있는 방은 엉망이었다. 문짝이 날아가고,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박살이 난 데다가 바깥으로 나와 보니 벽도 한쪽이 허물어져 있었다. 엄청난 싸움이 있었다 해도 믿을 만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복운은 명월이 10살 무렵부터 곁에 있던 자였다. 어려서부터의 소문도 알고, 명월이 종종 보이던 이상한 모습을 직접 목격한 적도 있었다. 때문에 다른 이들처럼 명월을 껄끄러워하며 피할 수도 있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명월이 다른 사람과 다르고, 뭔가를 본다는 걸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이상한 일이 생기면 괜찮은 건가 싶어서, 이런저런 걸 해 주고 싶어 했다.

무당에 대해서 말을 꺼내는 것도, 그 방 안이 엉망이 된 게 명월이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과 다투었기 때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보통 싸움을 했어도 그 정도로 엉망이 될 순 없을 테니.

어느새 명월의 얼굴에선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눈을 내리뜨고 조용히 있는 모습에 괜히 눈치를 보게 된다. 역시나 쓸데없는 말을 한 건가 싶었던 복운은 안절부절못해했다.

명월은 눈동자를 들어 복운을 바라봤다.

“내가 이리로 들어오는 걸 본 자들이 있더냐.”

“아침부터 검은 가마가 들어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이들이 몰려들기에 제가 다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사또를 보진 못했지만, 알 사람들은 알겠지요.”

최대한 모습을 감추어야 했기에 복운에게 여인들이 타는 마차를 준비하라 했다. 그걸 타고 관아로 돌아와 바로 문 앞에서 내려, 복운의 부축을 받아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목욕을 한 후에, 복운에게 자상이 생긴 곳에 바를 약을 준비해 오라 했다. 그때에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복운에게 괜찮다 말하고 밖으로 보낸 명월은 혼자서 항문에 약을 발랐다.

그런 곳 안쪽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아파진다.

이마에 손을 짚은 채로 긴 한숨을 내쉬던 명월을 보다 못한 복운은 약그릇을 양손으로 들어 내밀었다.

“제가 걱정이 되어서 그럽니다. 그러니 한 모금이라도 드십시오. 이걸 다 마시면 꿀에 절인 과일 말린 것도 드리겠습니다. 사또께서 쓴 걸 못 드시는 걸 알기에, 그런 것도 좀 사 와 봤습니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걸 뭐하러 사 온 거냐.”

투덜대는 말을 해도 명월은 그릇을 받아선 안에 담긴 약을 마셨다.

엄청 썼다. 순간적으로 입 안에 머금고 있던 걸 뱉어내 버릴까도 싶었지만, 꾹 참고는 간신히 약을 마신 명월은 혀를 내밀면서 으엑―하는 소리를 냈다. 기다렸다는 듯 복운이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걸 잡아채 간 명월은 안에 든, 꿀에 절인 말린 감을 꺼내 입에 넣었다.

처음에는 아무 맛도 안 느껴졌지만, 몇 번 씹자 단맛이 난다. 그걸 두어 개 더 물고 우물거리던 명월은 복운을 흘깃 봤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고 방에만 있을 거다. 다른 이들에겐 그리 일러라. 그리고―.”

이방에 대해서 물으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방의 딸을 먹어치우려 했던 놈은 처리가 되었다. 그걸로 아팠던 그의 딸이 바로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날 것인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으니 깨어나지 않는다면 그땐,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가능하면 다시 눈을 떴으면 좋겠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명월은 한숨을 쉬었다.

“나가 봐라. 난 좀 쉬어야겠다.”

목침을 끝으로 밀어낸 후 천천히 몸을 눕혔다. 똑바로 누운 채로 배에 양손을 올린 명월은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운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 두 눈 가득 서린 걱정을 모르진 않았지만, 지금은 그를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성가시게 굴지 말고 지금 당장 나가. 그런 느낌으로 손짓을 하자 복운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생긴다.

걱정이 되어서 죽을 것 같은 그의 상태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뭐라 말하는 것도 지친다.

명월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손을 흔들었다.

“쉬십시오.”

지금은 명월을 건드려선 안 된다고 판단 내린 복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 몇 번이나 뒤를 흘깃거리던 복운이 밖으로 나가고, 명월은 그제야 몸에 들어간 힘을 뺄 수 있었다.

그래도 뜨끈한 물 속에 들어갔다 나왔더니 몸이 풀리는 것 같았다. 아픈 덴 여전히 아프지만…….

편하게 두 팔을 내리고 있던 명월은 허리를 꾹꾹 눌러봤다. 허리 뒤쪽으로도 손을 넣고는 손가락으로 건드려봤다. 아프긴 했지만, 움직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괴물에게 당했을 때 허리와 등이 다 나간 건 분명했다. 그래서 놈이 반신불수 운운을 하지 않았던가. 그게 단순히 겁을 주려는 말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몰라도 놈 덕분에 허리와 등이 다시 괜찮아졌다. 그런데 왜 몸 속은 아직도 아픈 건지 모르겠다.

“그런 게 들어왔으니까 당연한 건가.”

그건 양물이 아니라 흉기였다. 인간이 아니니까 그런 곳도 비정상적으로 큰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명월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잡힌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양 인상을 쓴 채로 있던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일단은 쉬어야만 했다. 푹 쉬고 난 후, 몸이 괜찮아지면 그 장인 놈을 찾아갈 터였다. 백호인지 뭐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이리한 것에 대한 대가는 치르게 할 셈이었다.

반드시 없애버리고 말겠다면서 명월은 양손을 움켜쥐었다.

* * *

우물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사내는 하얀 바지를 입은 채로 그 위에 물을 뿌렸다. 뼛속까지 얼얼할 만큼 찬물을 뒤집어쓰고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은 그는 두레박을 다시 우물 안에 던지고 물을 받아서 끌어올렸다. 그 물을 들어서 다시 머리에 뒤집어쓰고 난 후에 눈을 감았다.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고, 뺨을 타고 물이 흘러내린다. 물보다 체온이 훨씬 높은 상태이기에 그의 몸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입을 벌리고 토해 내는 한숨의 끝에 나른함이 감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끈적거리는 한숨을 내쉰 후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두레박을 내려놓으면서 몸을 일으킨 그는 근처 나뭇가지에 걸어 둔 옷을 들고는 위로 걸어 올라갔다. 바지만 입고 있어서 맨발인 상태였지만, 험한 산길을 올라가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빠른 속도로 마당 위까지 올라서자 가운데에 쪼그리고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조는 꼽추가 보였다.

사내가 다가온 게 느껴졌는지 움찔해서는 바로 고개를 든 그는 사내를 보곤 묘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 변화는 미비해도 느껴지는 게 있었던 그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혔다.

“뭘 쳐다보는 거냐.”

냉랭한 말에 꼽추는 꼬물거리면서 옆으로 몸을 돌렸다.

쳐다본 적 없다고 말하는 듯 구는 행동에 혀를 찬 그는 안쪽으로 가서 옷을 집어 던지고 나무 기둥에 걸린 수건으로 얼굴과 몸을 닦았다. 그리고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흔들어서 물기를 털어내고는 바닥을 박찼다.

지붕 위로 올라가서 위쪽에 앉은 그는 뒷목에 손을 대고 주물렀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피로감을 느낀다. 나른하고 늘어지는 듯한 이 감각이 참으로 낯설었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눈을 뜬 사내는 산 아래로 보이는 걸 눈에 담았다. 그러다가 손을 내리곤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났다.

전날 밤 끈질길 정도로 품었던 명월의 향이었다.

처음부터 묘하게 신경 쓰이던 냄새였다. 그 냄새에 이끌려서 하지 않아도 될 짓을 했다는 걸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왜 이리된 것인가.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도움을 받았으면 그걸 갚는 게 당연한 거지.”

하지만 은혜를 갚는 방식은 무궁무진했다. 굳이 안지 않아도 되었는데.

거기까지 생각하다 말고 그는 뒤로 벌러덩 누워 버렸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생각을 많이 했더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른하니, 기분도 좋겠다 그냥 잠이자 자자면서 그는 눈을 감았다.

* * *

어렸을 때부터 명월은 혼자였다. 친구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가 해 주는 밥을 먹고, 알아서 옷을 입고, 마당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세수를 하고 양치를 했다. 그러고는 나뭇가지를 하나 손에 든 채로 산속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살아서 움직이는 건 그와 자신이 유일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그가 손을 써 두었다. 그래서 명월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은 한정적이었고, 그 너머로 넘어가선 안 되었다.

처음에는 그 규칙을 잘 지켰지만, 혼자서 노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서 정해진 선 너머의 장소에도 가 보고 싶어졌다. 일단은 혼자 노는 게 심심했고, 선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명월은 약속을 어기고 밖으로 나갔다.

해선 안 되는 행동을 하는 거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이러다가 그에게 크게 혼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멈춰 서선 뒤를 돌아보길 반복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명월은 점점 더 바깥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사고를 친 후에 뒷수습을 하게 될 생각을 하면 염려스러웠지만, 처음으로 선 밖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주욱 가다 보면 지금껏 보지 못했던 무언가와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나무 뒤에 서 있는 희끄무레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나무 뒤에 모습을 숨긴 채로 명월을 보고 있었다. 마치 가까이 다가오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느낌 탓이었을 수도 있었다.

저것이 뭔가 싶으면서도 묘한 껄끄러움을 느꼈다. 그래도 가까이 다가가 저게 무언지 알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뛰어갔다.

명월이 다가오는 걸 알고 있는 듯, 그것은 가까이 접근할라치면 멀어졌다. 그래서 다가가면 또 멀어지고, 그런 일의 반복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것은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계속해서 뒤를 쫓아가다 보니 지쳤다. 언제부터 바깥으로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밥도 제대로 못 먹어서 배고팠다. 꾸르륵, 거리는 소리를 들은 명월은 눈을 내리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렇게 계속 가면 분명 돌아가는 게 늦어질 거고 더 혼날 거다. 약속을 어긴 시점에서 혼난다는 건 이미 정해진 상황이었지만, 그런 것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명월은 몸을 돌려서 왔던 곳을 되짚어 올라갔다.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인 것 같지만, 정말은 어떻게 돌아가면 될 지는 이미 다 봐 두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돌아가는 걸 보고 그것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뒤에서 파사삭, 하고 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무시하려 했지만, 나중에는 가느다란 울음소리를 내는 것에 명월은 결국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뭔가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그것이 나무 뒤가 아닌, 풀 사이에 선 채로 손짓을 하고 있었다.

하얀 옷을 입고 검은 머리카락이 앞으로 흘러내린 그것은, 이상한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다.

징그러웠다. 전에 잡은 사마귀보다 훨씬 더 이상하게 생긴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인상을 쓴 채로 쳐다만 보자, 그것이 뒷걸음질을 치면서 계속 손짓을 해왔다. 마치 따라오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너무 늦어서 돌아가 봐야 해.’

그에게 돌아가야만 해. 늦어지면 걱정할 거란 말이야.

그리 말하자 녀석이 웃는다. 입꼬리를 길게 올리는데, 기분이 나빴다. 문득 괜히 나왔다 싶었다. 그와 약속을 지키고 얌전히 정해진 곳 안에서 노는 거였는데.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크게 혼나진 않겠지.

가만히 선 채로 눈을 굴리던 명월은 팔을 들곤 크게 흔들었다.

‘날 부르지 마. 난 이제 갈 거야.’

그 순간 그것이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마치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높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자 명월은 기분이 나빠졌다. 안색을 굳힌 명월은 당장 양손을 들어 귀를 막으면서 시끄러우니 그만하라고 했지만, 녀석은 말은 듣지 않았다. 계속 시끄럽게 굴었고, 명월은 속이 울렁거렸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무척 기분이 나빴다. 그냥 돌아가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것이 갑자기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든 놈의 얼굴을 그때 처음으로 봤다.

눈이 붉게 충혈된 그것은 코가 없었다. 입이 뭔가에 꿰매져 있던 그것은,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크게 놀란 명월이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고, 놈은 쓰러진 명월을 덮쳐왔다. 명월은 양팔로 얼굴을 가렸고, 무언가가 재빠르게 다가와 달려들던 그것을 베어 버렸다.

시원한 공기가 뺨을 간지럽힌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양팔로 얼굴을 숨긴 명월은 그 상태로 꼼짝을 하지 않았다.

너무 무서웠다. 방금 본 게 무언지 알 순 없지만, 당분간 혼자선 못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무사히 돌아간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돌아가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지금 넘어져서 옷 상태가 엉망인데, 그에게 혼나면 어떻게 하지. 그보다 엉덩이가 얼얼하니 아팠다. 나 어디 다친 건가.

걱정하는 게 점점 다른 쪽으로 변질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주변이 잠잠했다. 아까 무섭게 덤벼들던 녀석이 코앞까지 다가왔었는데…….

암만해도 이상했던 명월은 얼굴을 가리던 팔을 슬쩍 내렸다. 그리고 팔짱 낀 채로 눈을 내리뜨고 있는 그와 시선이 부딪쳤다.

‘……나 아파.’

시선이 부딪치자마자 나오는 말에 그는 눈을 가늘게 뜰 따름이었다.

애초에 나가지 말라고 한 말을 듣지 않고 움직였다가 당한 일이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했지만, 명월은 지금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갑자기 당한 일에 놀라고, 무섭고, 아팠다. 안 그래도 서러운데 여기서 뭔가 다른 말을 들으면 더더욱 서러울 것만 같았다. 그런 마음을 담아 바라보자 그가 긴 한숨을 내쉬면서 팔을 풀었다.

‘일어나.’

일으켜 세워 주지 않는 건가. 일단은 야단을 맞지 않는 게 어딘가 싶었던 명월은 냉큼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면서 몸 상태를 확인했다. 하루 종일 숲에 들어가서 놀다 보면 안 그래도 지저분해지는데 지금은 유난히 심했다. 이런 모습이라니. 한 소리 들어도 어쩔 수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손을 털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안색을 살피는 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말간 눈으로 쳐다보는 명월을 확인한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것에 명월은 당장 자라목이 되었다.

바로 화를 내면서 뭐라 하는 게 낫지, 저런 식으로 한숨을 쉬면 괜히 더 눈치가 보인다. 자신이 정말로 잘못을 했구나 싶었던 명월은 괜히 입술을 앞으로 툭 내밀었다. 그 상태로 눈만 데굴데굴 굴려대자 그가 허리를 굽혔다. 그러곤 명월을 높이 안아 들었다.

분명 뭐라고 한 후에 안아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의외였다. 하지만 잘되었다 싶기도 했던 명월은 그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다가 지금 손도 옷도 엉망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고는 어찌해야 하나 싶었다. 그것도 그가 엉덩이를 토닥이면서 걸음을 옮기는 순간 머릿속에서 몽땅 지워져 버렸지만 말이다.

그의 널찍하고 따뜻한 품에 안긴 명월은 어깨에 턱을 올렸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있었던 장소를 확인했다.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검게 탄 뭔가가 바닥에 달라붙어 있었다.

머뭇거리던 명월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람을 봤어.’

‘그건 사람이 아니야.’

‘…….’

선 너머에 사는 존재들은 모두 사람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사람이 아니라니.

명월은 이상하다는 양 고개를 갸웃했고, 그런 명월을 조금 더 세게 끌어안은 채로 그가 말했다.

‘그건 사람이 아니라, 귀물(鬼物)이라고 하는 거야.’

‘귀물이 뭔데?’

‘귀신보다 조금 더 무서운 놈들이야. 아주 악질이지. 놈들은 인간을 해하는 존재야.’

‘그러면 조금 전에 그 녀석이 날 해하려고 했던 거야?’

어쩌진 그럴 것 같긴 했다. 그 녀석은 겉모습부터가 이상했다면서 명월은 인상을 쓰면서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역시나 선 너머는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그냥 그가 정한 곳 안에서 노는 게 제일이었다. 혼자서 놀다가도 종종 심심하고, 지루해질 때가 있었지만, 아까와 같은 녀석을 다시 만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끔찍했다면서 몸을 부르르 떨려니 그가 등을 쓰다듬었다.

‘선 밖으로 나가면 그런 놈들을 종종 보게 될 거야.’

‘왜? 선 밖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거잖아.’

‘그렇지. 하지만 저런 것들도 종종 있단다.’

‘인간들은 아까 그 이상한 놈들하고 같이 살아 가는 거야?’

‘글쎄. 어떨까.’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그답지 않게 확실하게 말을 해 주지 않는 게 이상했다. 명월은 고개를 떨어뜨리곤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원래 보통 사람은 저런 것들을 볼 수가 없어. 저런 걸 보는 너하고 내가 이상한 거야.’

‘……난 안 이상한데?’

그리고 그도 이상하지 않았다. 언제나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오늘따라 그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지금껏 이런 류의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다면서 명월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어려운 말이나, 이해하기 힘든 것들은 싫었다. 그런 거 말고 그냥 오늘 저녁 반찬이 무엇일지가 궁금했다.

토끼 고기일까. 꿩고기일까. 전에 먹었던 싱싱한 소의 간도 나쁘지 않았다. 익지 않아서 벌건 게 이상했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했던 거다. 그걸 또 먹고 싶었지만, 그건 기념일에만 먹는 거였다. 앞으로 몇 달이 더 지나야 기념일이 온다. 그래도 오늘은 꼭 소의 간을 먹고 싶었던 명월은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다리를 까닥였다.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서 물으면 그가 조금 더 말을 해 줄 것 같았다. 하지만 명월은 이미 그 징그러운 놈을 머릿속에서 말끔하게 지워 버린 참이었다. 이상하고 싫은 건 일부러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니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면 되었다. 이대로 집으로 들어가서 씻고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있으면 밥을 먹을 수 있을 거다.

마음이 느긋해졌기 때문일까. 몸도 나른해지는 걸 느끼며 명월은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대었다. 그리고 저기 나무 뒤쪽에 생기는 검은 그림자를 확인하곤 바로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분명 뭔가가 있었다. 그게 뭘까 싶어서 앞으로 얼굴을 내밀자 그의 시선이 느껴진다.

명월은 앞으로 손을 뻗었다.

‘저기에 귀물이 있어.’

아까 그 이상한 게 귀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저것도 귀물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 순간 그가 바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뒤를 확인한 그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명월은 검은 그림자가 있던 방향을 재차 가리키면서 저기, 저기야―라고 말했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그림자 같은 게 있었는데 지금은 오간 데 없었다. 이리되면 자신이 거짓말을 한 게 되지 않은가. 당혹감을 느끼며 명월은 ‘분명히 저기에 있었는데?’라고 웅얼거렸다.

‘잘못 본 모양이다.’

그의 말에 명월의 눈으로 힘이 들어간다.

잘못 본 게 아니라 분명 뭐가 있었다. 비록 지금은 사라져서 보이지 않지만―.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없으니 달리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는 동안 그가 걸음을 서둘렀다. 아까보다 훨씬 더 서두르는 게 이상했지만, 잠자코 있었다.

그날 거처로 돌아와서 바로 몸을 씻었다. 우물에서 뜬 물은 차가워서 씻는 내내 명월은 잔뜩 몸을 움츠렸다. 너무 추워서 기침이 나왔다. 다른 때라면 아궁이에서 땐 물을 섞어 주었을 텐데, 지금은 그냥 찬물을 그대로 붓고 있었다. 평소라면 명월도 큰 소리를 내면서 춥다고 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조금 이상했다. 화가 난 것마냥 표정을 굳히고 있는 게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 명월은 추워도 그냥 참았다. 그러다가 결국 밥을 먹고 잠을 잘 즈음 몸에 한기가 돌았다. 그제야 그는 본인이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안색을 굳혔다. 굳은 눈동자를 본 명월은 웃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열 같은 것도 금방 내릴 거라며 안심시켜 주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괜찮아, 라고 말하는 게 한계였다.

괜찮다고 말했는데도 그의 굳은 표정은 풀리질 않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정말로 울진 않겠지만, 걱정이 되어서 다시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닫지 못했는데 사실은 정말 상태가 안 좋았던 거다. 다시 눈을 뜬 건 다음날이었고, 그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방 한편에 준비가 된 밥을 깨끗하게 비우고 나서, 우물에서 물을 뜨고 세수를 하고 마루에 앉아서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아무 말도 없이 어딘가로 가 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편지도 남기지 않고 어딜 간 건지 모르겠다. 물론, 글을 써도 읽을 수 있는 글자는 절반밖에 안 되겠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다리를 까닥거렸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지나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다.

이렇게나 시간이 흘렀는데도 돌아오질 않았다. 기다림이라는 건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숲속에 한참 동안 머물러 있으면 그도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 명월은 미간 사이로 주름을 만든 채로 멍하니 있었다.

이대로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자신은 혼자가 되는 걸까.

그가 자신을 버리고 어딘가로 갔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그래도 모르는 거였다.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어제 선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이상한 놈과 마주쳐서 다칠 뻔한 일 때문에 화가 난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날 여기에 버리고 혼자 어딘가로 가 버린 거다.

굉장히 울적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끼며 명월은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조금 더 기다려 보자 싶으면서도 안 좋은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정말로 혼자 남게 된 거라면 저녁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걸까. 그보다 잘 때에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하는데, 평소에는 그 앞에서 불장난을 치려 하면 크게 혼나곤 했다. 아궁이 근처로는 얼씬도 못 하게 했는데, 이제부터는 혼자 해야만 하는 걸까.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걸 혼자서 해야만 했다. 방에서 자는 것도 혼자였다. 자다가 무서운 꿈을 꾸거나,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떠도 곁에 아무도 없는 거다.

아무도 없이, 나 혼자만 남게 된 거다.

‘…….’

눈을 누르는 손에 힘을 준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아니, 울고 싶은 게 아니라 이미 눈물이 나오는 상태였다. 아무도 없다지만 그걸 대놓고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명월은 고집스럽게 눈을 팔로 누르고 있었다.

이대로 해가 저물 때까지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땐 소리 내 울게 될지도 모른다 싶을 즈음,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가뜩이나 예민한 상태였던 명월은 바로 팔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저기 우물 옆에 서 있는 낯선 존재를 발견했다.

검정의 도포를 입은 사내는 검은 가면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눈이 가려져서 보이는 건 오뚝하게 선 콧날과 다물린 입술과 완고함이 느껴지는 턱뿐이었다. 이상한 사내였다. 숲에서 본 귀물인지 뭔지 하고는 다른 느낌이긴 했지만, 그렇다 해서 사람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사람은 그가 만들어 낸 이 결계 안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가 만들어 낸 공간 안에 들어와 있는 자였다. 정체가 뭔지는 알 수 없으나,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동안 그가 앞으로 다가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상대를 보고도 명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세를 똑바로 해서 앉아 있는 동안 어느덧 그는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눈을 내리뜬 채로 바라보는 상대를 두고 명월은 숨을 죽였다.

그때 사내가 손을 내려선 명월의 눈가를 닦아 내 줬다. 사내의 손가락에,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닦아 내진다.

그걸 확인한 명월은 입술을 달싹였다.

‘누구세요?’

그는 선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만 했지, 여기로 누군가 들어오면 뭘 어떻게 해야 한다고는 말한 적이 없었다.

이러고 앉아 있을 게 아니라 쫓아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면 피해서 방 안으로 들어가야 할까. 하지만 코앞까지 다가오는 걸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제와 피한다고 해 봤자 멀리까지 갈수도 없을 것 같고, 왠지 무섭지도 않고 해서 명월은 눈만 멀뚱히 뜨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눈물은 어느새 쏙 들어가 버렸다.

고개를 든 채로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가 재차 손을 내려 뺨을 쓰다듬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뺨을 건드렸다가 떨어지는 손길에 기분이 점점 이상해지는 걸 느끼며 명월은 다시 물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지금 너 혼자 있는 거냐.’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동시에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멍하니 있던 명월은, 곧 사내의 물음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봤다.

지금은 혼자 있긴 했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혼자 아니에요. 같이 사는 사람이 있어요. 금방 돌아올 거예요.’

아침부터 밤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금방 돌아올 터였다. 자신을 두고 어딜 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채로 뚫어져라 바라보자 뺨에 닿아 있던 사내의 손이 떨어졌다. 대신 그는 명월의 옆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왜 옆에 앉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인상을 쓴 채로 몸을 피하려 했다. 그때 그가 명월의 오른손을 잡았다.

그 외에 다른 사람이 건드린 적이 없었던 만큼 바로 손을 뿌리치려 했다.

‘괜찮다.’

‘……내가 안 괜찮아요.’

다른 사람이 건드리는 건 싫었다. 그러니까 손을 떼라는 의미로 바라보자 사내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또래보다 말을 잘하는구나.’

이건 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또래와 함께 어울린 적이 없었던 만큼, 비교를 한들 그걸 바로 파악할 수가 없었던 명월은 얌전히 있었다. 그러는 사이 사내는 명월의 손을 꼬옥 잡았다.

작은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손가락 하나하나 만져 보고, 이윽고 손바닥 안쪽도 확인한다. 엄지로 간질이듯 손바닥 안쪽을 꾹꾹 눌러대는 것에 명월은 어느새 얌전해져 있었다.

대체 뭘 하는 건가 싶었다. 이상했지만, 사내의 차가운 손길이 나쁘지만은 않았기에 만지는 대로 가만두었다. 그때 사내가 명월의 손을 양손으로 감싼 채로 말했다.

‘언제고 겪어야 할 일이다. 그러니 날 원망하지 말거라.’

원망이라는 단어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냥 사내를 쳐다만 봤다.

분명 처음 만나는 낯선 사람인데도 싫은 느낌이 들지 않으니 그게 이상했다. 마치 전부터 알고 지냈던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명월은 사내의 커다란 손바닥에 잡힌 본인의 손가락을 오므렸다. 작은 손가락이 손바닥을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 이상했던 걸까. 사내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본 명월은 행동을 멈추었다.

검은 가면 너머로 보이는 사내의 눈동자를 봤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예쁜 것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빛이 무척 다정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명월은 머뭇거리다 물었다.

‘아저씨랑 나랑 전에 만난 적 있어요?’

‘너하고 대화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저도 처음인 것 같은데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상하게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하자 사내가 명월의 손을 쥔 채로 위로 들었다. 그러곤 손을 살짝 벌리곤 그 틈에 입술을 대고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그 숨이 닿자 간지럽다는 생각이 들었던 명월은 움찔했다.

그런 명월의 반응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양 뚫어지라 바라보던 사내가 천천히 손을 뗐다. 명월은 바로 오른손을 본인 허리 뒤에 숨기듯이 둔 채로 재차 사내를 올려다봤다.

뭘 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건 나중에 확인해 보면 될 문제였다. 지금은 이 사내가 다음으로 무엇을 할지를 살펴보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사내는 이후로 명월에게 손대는 일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얼마간을 앉아 있던 사내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고 바로 몸을 일으켰다. 나타난 것처럼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정말 그 사내가 나타난 건가 싶기도 했다. 앉아만 있으려니 꿈을 꾼 것 같기도 한 기분이 든 명월은 눈을 꾸욱 감았다가 떴다. 다시 떠도 사내는 없었다.

하지만 명월은 조금 전에 만난 사내가 진짜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제야 허리 뒤에 숨긴 손을 앞으로 꺼내 손바닥을 살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손바닥에 그려진 이상한 문양을 보곤 저도 모르게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이게 뭘까. 왜 갑자기 이런 게 생긴 거지?

명월은 허벅지에 손바닥을 대고 세게 문질렀다. 그리고 다시 손바닥을 보는데 문양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왜 안 사라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던 명월은 당황해선 더 세게 손을 문질렀고,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문양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참을 앉아 있었기 때문일까. 엉덩이랑 허벅지가 땅기는 느낌에 비틀거리면서 우물로 걸어갔다. 우물 속으로 박을 떨어뜨리자 한참 만에 풍덩―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걸 확인하곤 박을 끌어 올리려는데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낯선 사내가 나타난 건가 싶었던 명월은 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막 마당으로 들어오는 ‘그’를 발견하곤 바로 뛰어갔다.

다시 보이면 어딜 다녀온 거냐고 따져 물으려고 했는데 말도 안 나왔다. 그냥 무작정 달려가 품에 안기려 했는데, 그때 표정을 굳힌 그가 앞으로 뻗어진 명월의 오른쪽 손목을 잡아챘다. 센 힘에 명월은 그대로 앞으로 당겨졌고, 그는 양손으로 명월의 오른 손목을 잡은 채로 손바닥 안을 노려봤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모습에 놀란 명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동안 한참 동안 손바닥 안을 살피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왔다.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굳어 있는 걸 확인한 명월은 마른침을 삼켰다.

‘……잘못했어요.’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뭘 잘못한 건지 하나도 알 수 없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그를 앞에 두곤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열흘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손을 잡고 산을 내려왔다.

이후로 그를 본 적이 없었다. 닫힌 대문 앞에 홀로 서 있는 동안 이대로 영영 헤어져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겠구나. 암묵적으로 그걸 깨달았고, 실제로도 그가 자신 앞에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이쪽 세계에 두고 싶었던 거다. 그 마음을 알 거 같으면서도 동시에 ‘나는 뭔가.’ 하는 의문이 언제나 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 보통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 있는 걸까.

그건 뭔가 좀 이상한데. 이건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되는 거다.

하얀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던 사내.

1년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와서 죄 없는 소녀들을 잡아먹던 귀물.

그래. 그것이 바로 귀물이었다. 지금껏 자신이 봐 왔던 것들은 어린애 장난일 뿐이었고, 그것들이 진짜였다. 그놈들이 진짜로 위험한 놈들인 거다.

거기까지 결론을 내린 후, 명월은 잠에서 깨어났다.

* * *

눈을 뜨고도 머리가 무거웠다. 머리 안쪽으로 퍼지는 두통을 느끼면서 명월은 신음을 흘리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당장 에구구, 하고 앓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이마에 손을 짚은 채로 명월은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선 바닥을 더듬었다. 그런데 물그릇이 만져지지 않았다.

명월은 고개를 들고는 복운을 찾았다.

“바깥에 아무도 없는 거냐. 복운아, 좀 들어와 봐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복운이 들어왔다. 바로 앞까지 와서 무릎을 꿇고 앉은 복운은 명월을 내려다봤다.

“뭐가 필요하십니까?”

“물 좀 가지고 와 봐라. 목이 탄다.”

복운은 냉큼 위쪽에 밀려나 있던 쟁반을 앞으로 당겼다. 대접을 바로 하고는 거기에 주전자에 담긴 물을 따라 건네자 명월이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 앉은 명월은 잔을 받아서 미지근한 물을 넘겼다. 빈 잔을 내리면서 소매로 젖은 입술을 닦은 명월은 여전히 인상을 쓴 채로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그러다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먹으로 뒷목을 두드리자 정수리에 닿는 시선이 느껴진다. 이건 또 뭔가 싶었던 명월은 고개를 들어 복운을 쳐다봤다.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복운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푹 자다가 일어났는데 안 괜찮을 건 또 뭐냐.”

“꼬박 하루 동안 주무셨습니다. 점심때까지 안 일어나시면 의원을 불러야 하나, 생각도 했습니다.”

명월은 목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었다.

“……하루 동안 잤다고?”

어떻게 사람이 하루 동안 잘 수 있단 말인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복운을 바라보는 명월의 눈빛은 굳은 채였다. 그것과 마주한 복운은 “사또께서 너무 피곤해하시는 데다 곤하게 주무셔서 깨울 수가 없었습니다.”라면서 뒷말을 흐렸다.

하루 내도록 잠만 잤단 말인가. 내 몸이 그렇게나 안 좋은 상태였던 걸까.

물론, 그런 짓을 해 본 적이 없긴 했지만―.

백호인지 백묘인지, 그 망할 놈하고 있었던 일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열통 터진다. 죽일 놈의 자식. 그런 생각을 하며 이를 갈려니 계속해서 시선이 느껴진다. 고개를 들자마자 명월과 시선이 부딪친 복운이 움찔해선 고개를 숙인다. 그게 신경 쓰였던 명월은 안색을 굳힌 채로 물었다.

“뭐냐?”

“아니요. 오른쪽 뺨에 나 있던 이상한 자국이 사라지신 것 같아서요.”

“이상한 자국이 뭐가 있다고―.”

거기까지 말하다가 그 망할 놈이 볼을 깨문 걸 떠올렸다.

자기 전에 거울을 봤을 때 분명 오른쪽 뺨으로 이 자국이 크게 남아 있었지. 그건 열흘은 계속 남아 있을 것 같은 자국이었다. 그리 쉽게 사라질 리가 없잖나. 이상한 소리를 한다 생각을 하면서도 명월은 일단 상 앞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몸이 아프지 않았다. 잠들기 전에, 조금만 몸을 움직일라치면 기다렸다는 듯, 몸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러댔던 걸 떠올린 명월의 얼굴에서 자연스럽게 표정이 사라진다.

닫혀 있던 거울을 열고 안쪽을 살피기만 하면 되는데 바로 손을 댈 수가 없었던 명월은 복운을 흘깃 봤다.

“옷을 갈아입고 나갈 테니 넌 나가 있어라.”

“네. 알겠습니다.”

뭔가 이상한 점이 있긴 해도 명월이 내리는 명을 듣지 않을 수 없었던 복운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운이 밖으로 나가는 것에 맞춰서 명월은 바로 거울을 꺼내 그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살피자, 점 하나만 찍혀 있는 깔끔한 뺨이 보였다. 전에 봤던 흉물스러운 이 자국은 오간 데 없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지.”

하루 동안 잔 것도 이상한데, 왜 뺨에 생겨 있던 자국이 순식간에 사라진 거지?

명월은 급히 옷고름을 풀고, 상의를 좌우로 벌려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가슴과 배꼽 주변에 생겨있던 자국 또한 말끔하게 사라진 걸 확인하곤 바로 몸을 일으켰다.

바지 위로 손을 내려선 세게 엉덩이를 주무르면서 그 부근의 살을 만지작거리다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서 바지 뒤쪽으로 손을 쑤욱 밀어 넣었다. 그런데 엉덩이까지는 건드려도 그 사이의 주름까진 손을 댈 수 없었다. 굉장히 껄끄러운 기분을 느끼면서 손을 뺀 명월은 다시 이불 위에 앉았다.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선 엉덩이에 힘을 주다가도 좌우로 움직여 봤다.

안 아팠다. 특유의 이물감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그 끔찍했던 기억은 생생한데, 몸에 남아 있던 것들이 하룻밤 사이에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냐. 조금 전에 중얼거렸던 걸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명월은 멍청한 얼굴이었다.

* * *

등채를 손에 들고, 동헌 안쪽의 의자에 앉아 있는 명월은 진지한 모습이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미간 사이로 주름을 만든 채로 시종 조용한 모습에 호방은 눈치가 보였다.

오늘따라 이방은 늦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가 있어야지 자신이 뒤로 빠져서 다른 걸 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물론 사또에게 말하고 일을 하러 가면 될 테지만, 지금은 말을 걸어선 안 될 것 같았다.

지난 며칠 간 명월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주제에 갑자기 나타나서 의자에 떡하니 앉아선 분위기를 잡으면 아랫사람들은 대체 어쩌라는 건지를 모르겠다. 왜 저러는지 알고 싶어도 분위기가 이상할 때 건드려서 괜히 피 보고 싶지 않았던 호방은, 저기 대청 아래쪽의 디딤돌에 앉아 있는 복운을 노려봤다.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자 그게 느껴진 건지 복운이 고개를 슬쩍 든다.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당장 ‘사또께서 왜 저러시는 거냐.’라는 눈빛을 던졌지만, 복운은 코웃음을 치면서 당장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어찌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있나 싶었던 호방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때 탁, 하는 소리가 울리자 호방은 화들짝 놀라며 급히 명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명월은 등채의 끝과 끝을 잡은 채로 일어서 있었다.

아까 복운을 노려보면서 그를 위협하던 걸 본 걸까. 그래서 저런 무시무시한 얼굴로 노려보는 건가 싶었던 호방은 혀로 아랫입술을 핥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사또, 그런 게 아니라…….”

“무기고에 가 보자.”

앞뒤 말을 뚝 자른 명월은 대청에서 내려와 목화를 신고는 마당을 가로질러 뒤로 빠져나갔다. 멍하니 있는 동안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저대로 명월이 다른 곳에 가든지 말든지 구경만 하고 있으면 좋겠지만, 조금 전 들은 말이 있었다.

전에는 곳간 문을 열라 하더니만, 이번에는 왜 또 무기고를 운운하는 건지. 저 신임 사또의 속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이방을 재차 원망하면서 호방은 급히 명월의 뒤를 쫓아 다리를 움직였다.

세 개의 검날이 달린 당파창이 줄지어 세워져 있고, 옆으로는 환도도 있었다. 몽둥이나 막대 같은 것들도 더러 있고, 반대편으로는 끈과 폭약도 간간이 보였다. 그 외에 깊숙한 곳 안쪽에 걸려 있는 화승총을 발견한 명월은 그 앞에 멈추어 섰다.

그저 쳐다보는 것뿐이지만, 옆에 선 호방과 병방은 긴장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평소 포졸을 훈련시키고, 무기고를 관리하고 있었던 병방은 유독 긴장이 되었다. 평소에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막상 사또가 무기고에 나타나니 왜 이렇게 땀이 나는지 모르겠다.

병방은 슬그머니 명월의 낯빛을 살폈다. 전립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곱디고왔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여인 같은 고운 느낌이라는 건 아니었다. 전에는 유약한 인상의 선비 같은 놈이 사또로 왔다면서 개탄했거늘, 이리 보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표정이 굳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외에 다른 이유 때문일까. 잘은 알 수 없지만, 미묘하게 다른 점이 있긴 하다면서 병방은 연신 마른침을 삼켜댔다. 그때 명월이 앞으로 손을 뻗어선 화승총 하나를 꺼내 들었다.

“……헉.”

저도 모르게 헛숨을 내뱉자 명월이 화승총을 든 채로 병방을 돌아본다. 싸늘한 눈빛이 뭔가, 라고 묻고 있는 걸 느낀 병방은 입술을 누르고 있던 손을 떼며 대답했다.

“보관은 잘하고 있으니 문제는 없겠지만, 함부로 다루시면 위험합니다.”

“내가 의자에 앉아 부채를 잘 흔들어서 사또가 된 줄 아냐. 문무, 양쪽의 시험을 다 통과했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건 또 그랬다. 왕의 총애를 받는 여인의 직계 정도가 아니고서야, 아무것도 못하는 인간이 사또가 될 순 없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걸 두루 할 수 있으니 저런 감투를 쓴 게 아니겠는가. 명월의 유약한 모습에 그만 착각을 하고 말았다면서 병방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병방의 말에도 명월은 입을 다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눈을 내리뜬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했다. 그때 철컥,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병방과 호방은 슬그머니 명월을 살펴봤고, 그가 능숙하게 화승총을 살펴보는 걸 확인하곤 ‘앞으로는 말조심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명월이 특출하게 뛰어난 건 모르겠지만, 그도 보통 사또와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그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안 좋은 일을 당하고 싶진 않았던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조용히 있는 동안 화승총을 주욱 살펴본 명월이 물었다.

“화력은 어느 정도인가?”

“저번에 실험을 했을 때 수박을 세 통 가량 날려 버렸습죠.”

“이런 게 몇 개나 있는 건가.”

“위급할 때에는 스무 개도 사용할 수 있지만, 가능한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요.”

혹 자신들이 모르는 어떤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까지 이쪽으로는 접근도 하지 않던 사또가 걸음을 한 게 아니겠는가. 아랫놈들에게 말해서 앞으로 여기 관리를 더 철저하게 하자면서 병방은 마른침을 삼켰다.

명월은 화승총을 원래 있던 자리에 두고는 몸을 돌렸다. 뒷짐을 진 채로 앞서 확인한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환도에도 관심을 보였다. 바로 환도 하나를 집어선 검집을 벗기고 날을 확인했다. 환도를 똑바로 세운 명월은 매끄러운 날을 확인하곤 저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이건 정말 물건이었다. 이런 게 무기고에서 잠들어 있는 건가. 당장 도성으로 들고 가면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겠다면서 명월은 중얼거렸다.

“날이 잘 들었군. 이건 뭔가.”

“아, 그건 얼마 전에 이 고을의 실력 좋은 대장장이가 보내 준 것이습죠.”

그 순간 명월의 눈가가 파들, 하고 떨렸다.

“……대장장이라고? 그 숲속에 홀로 사는 장인 놈을 두고 하는 말이냐.”

“예. 바로 그 자입니다. 어찌 아셨습니까?”

명월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몰랐던 건, 지금 병방의 시선이 환도에 꽂혀 있기 때문이었다. 명월을 대하는 건 어려웠지만, 환도는 그게 아니었다. 여기에 있는 수많은 무기들 중에서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말이 길어졌다.

“제가 나이가 많진 않아도 무기 보는 눈은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데, 그자는 제대로 난 사람입니다. 정말로 실력이 좋지요. 그래서 이번에 사또께서 오시기 전에도 특별히 부탁해서 도를 새로 맞췄습죠. 사또께서도 그걸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셔서 제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가슴에 손을 올린 병방이 환하게 웃었다. 그 얼굴에다 대고 “그 자식 이야긴 내 앞에서 꺼내지도 마.”라고 할 수가 없었던 명월은 대꾸 없이 환도를 원래 있던 자리에 두었다.

* * *

손잡이를 단단히 쥔 채로 빠르고 정확하게 세 번을 휘둘렀다. 세워진 짚이 칼날이 닿을 때마다 맥없이 잘려진다. 그렇게 정확하게 삼등분을 하고 난 후에 구부린 무릎을 세웠다. 주변으로 그가 잘라 낸 짚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나중에 불을 지필 때 사용하면 되겠지만, 흩어져 있는 것들은 치우기가 꽤나 고약스러울 거다.

명월은 들고 있던 환도를 세워 날을 확인했다. 무기고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녀석이었다.

처음 이 검을 받았을 때 기분이 좋았다. 사내로서 손에 딱 맞는 무기를 얻었는데, 그게 기쁘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그런데 이 물건도 그 빌어먹을 장인 놈의 작품이란 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뭔가 굉장히 기분이 언짢아지는 걸 느끼며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가 옆으로 베듯이 환도를 휘두른 후,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잘 들기는 하는군.”

그래. 잘 들기는 했다. 좋은 검이니 이런 짚을 베어 넘기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었다면 신이 나서 조금 더 휘둘러 봤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 검을 그놈이 만들었단 말이지. 어쩌면 그건 단순히 위장인 걸지도 모른다. 정말은 진짜 장인은 따로 있고, 그놈은 그곳에 거처를 만든 것뿐일 수도 있었다. 기녀가 장인은 꼽추 노인이라 하지 않았던가. 정말은 그쪽이 진짜일 수도 있겠고―. 그런데 그게 또 변신을 한 다른 모습이라면 어쩌지?

이렇게 속을 태울 게 아니라 이방이나 복운에게 한번 물어보면 될 테지만,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물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쪽으로 치부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암암리에 자신은 그놈이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걸 느끼고 있었던 거다. 그놈하고 엮이게 되면 괜한 이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 입 다물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놈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물이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을 끌어들여선 안 되었다. 이 문제는 자신이 혼자 알아서 해결해야만 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명월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사또, 사또! 어디에 계십니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명월은 다급한 부름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근처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복운도 뭔 일인가 싶은 얼굴로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살폈다. 그러자 이리로 달려오는 이방이 보였다.

그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는 걸 본 명월의 안색이 굳어진다. 설마, 하고 잠시 안 좋은 생각을 했지만, 이방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는 걸 확인하곤 불안을 지워냈다. 지금 이방이 드러내는 감정은 슬픔이 아닌 기쁨 쪽이었다. 그래서 명월은 이방의 딸이 정신을 차렸음을 알게 되었다.

한달음에 달려온 이방은 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선 크게 절을 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 지!”

몇 번이나 절을 하더니 이방은 고개를 들고는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외쳤다.

“제 딸이 정신을 차렸습니다! 오늘 아침에 갑자기 눈을 떠선 저와 안사람을 불렀습니다! 아버님, 하고 절 부르고, 절 알아봤단 말입니다!”

제 가슴을 치면서 그리 외친 이방은 이윽고 크게 소리 내 울었다. 그 곡소리가 컸기 때문에 근처에 있던 포졸들이 무슨 일인가 싶은 얼굴로 안쪽을 힐긋거리면서 봤다. 겉으로만 보면 사또가 이방에게 뭐라고 해서 그가 곡을 하는 모습이었다. 당황한 복운은 급히 이방에게 달려가선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거요. 당장 일어나시오!”

“아이고, 이놈아. 그래. 일어나야지. 내가 일어나서 춤도 출 수 있지!”

다른 때라면 복운이 이렇게 손을 대면 크게 화를 내야 할 사람이 지금은 그런 내색조차 없었다. 오히려 본인이 한 말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양, 벌떡 일어서선 정말로 춤을 추려 하는 것에 놀란 복운이 그걸 막았다.

“미쳤소?! 왜 이러시오?!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남들이 보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더냐! 내 딸이 정신을 차렸는데! 내 딸이 살아났는데!”

“그건 그렇게 큰소리를 내면서 자랑할 거리가 못 된다.”

명월의 차분한 목소리에 이방 한소규는 주춤했다. 복운에게 달려들 듯이 매달리던 그는 고개를 돌려 명월을 바라봤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딸을 잃은 다른 부모가 이곳 어딘가에 있다. 그걸 생각한다면 자네가 이리도 기뻐해선 안 되는 거지. 자네 딸은 고작 눈을 뜬 것뿐이야. 온전히 몸을 추스르고 건강을 되찾기 전까진 조용히 있게. 자네에게 기쁨이 되는 일이, 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을 테니까.”

내 자식은 잃었는데 왜 네 딸은 괜찮은 거냐.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분명 있을 거다. 그러지 말아야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말미암아 다른 일이 생길 수도 있음이었다.

명월의 말에 한소규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는 지금 명월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깨닫고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딸이 눈을 떠선 아버님, 하고 부르는 순간 온 세상을 손에 넣은 양 기뻤다. 그래서 그 외에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거늘, 명월이 해 준 말 덕분에 머리가 한결 맑아졌다. 한소규는 본인 머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중얼거렸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저 딸년이 눈을 뜬 게 마냥 기쁘기만 해서…….”

지금 이걸로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숨기긴 했지만, 3개월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제 딸이니, 알 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 다시 나타나면 뭐라고 하겠나. 점점 진지해지는 한소규의 얼굴을 살피던 명월이 말했다.

“당분간은 조용히 죽어 지내게. 그렇다고 너무 딸 곁에만 붙어 있지 말고, 일도 열심히 하고, 평상시와 하나 다르지 않게 행동하게.”

당분간은 그리 해야 할 듯싶었다. 마음 같아선 딸과 부인을 아예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리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단은 이 안에서 모든 걸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방은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될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딸을 살리기 위해서 다른 이를 희생시켜야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도 정말로 딸이 눈을 뜰 거라는 기대를 하진 않았다. 아내도 그도 마음을 비우고 있었는데, 이런 기적이 일어났다. 그 모든 게 명월의 힘이었다. 어느 순간 명월이 평범한 이가 아니라는 걸 느끼긴 했지만,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해 줄 줄은 몰랐다.

보통 사람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찌 이리 할 수 있었을까.

“저기, 사또께선 어떻게…….”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이면 한소규는 명월의 눈동자를 봤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한소규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그대로 삼켜 버렸다. 입을 다물고 양손을 움켜쥔 그는 고개를 숙였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시끄럽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이방 한소규는 당장 몸을 돌리곤 그 자리를 떠났다. 나타난 것처럼 서둘러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복운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왜 남의 일을 도와주십니까. 그러다가 큰일나십니다.”

복운은 이번 일에 대해서 자세히는 몰라도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명월에게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굴면 오죽 좋은가. 왜 꼭 이렇게 특이한 행동을 취해서 남들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러다간 언젠가 큰 사고가 생기고 말지.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복운은 명월을 빤히 바라봤다.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관아에만 계십시오.”

단호한 말에 명월의 한쪽 눈썹이 올라간다.

지금 네놈이 누구에게 감히 그딴 식으로 말하는 것이냐. 그리 말하고픈 듯 바라보는 매서운 시선에 당황한 복운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자, 자꾸만 이러시면 주인어른께 연락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 하는 순간 네놈은 당장 여기서 쫓겨나게 될 거다.”

명월의 경고에 복운은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도 한동안 복운을 노려보던 명월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 뒷짐을 진 채로 성큼성큼 멀어지는 모습을 본 복운이 당황해선 급히 뒤를 쫓았다.

“어, 어딜 가십니까!”

“내 마음의 안식, 꽃 중의 꽃 호접화를 보러 간다.”

아니, 바로 어제 이상한 몰골로 돌아와서 골골 걸리던 사람이 지금 기방을 간다고? 물론 어제와 달리 오늘은 상태가 좋아 보였지만, 조금 전 자신이 한 말은 전부 다 어디로 들은 건지 모르겠다.

이게 전부 다 명월을 위해서 하는 말과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걸 알아주지도 않고 제멋대로 구는 명월이 원망스러웠던 복운은 바닥을 세게 걷어찼다. 그러다가 있을 리가 없는 돌부리에 발가락이 채여서 억, 하고 신음을 흘리며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없다고?”

그리 묻는 명월의 눈동자가 구슬처럼 동그랗게 변했다.

오늘은 화사하게 연분홍의 도포를 입고, 갓끈도 반짝거리는 걸 달아서 평소보다 훨씬 더 어여쁜 명월이었다. 그런 사람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쳐다보자 기녀의 얼굴에 순식간에 발긋한 물이 든다.

“네. 여름이 오기 전에 옷을 새로 지으신다면서 외출을 나가셨습니다.”

가능한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끔 해서 대답을 한 기녀, 자희는 눈동자를 들었다. 턱에 손가락을 댄 명월은 흐음―하는 소리를 냈다. 사또는 호접화가 없는 걸 두고 굉장히 아쉬워하고 있었다. 기방에는 그녀 하나만 있는 게 아닌데. 서운하기도 하면서도 이게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그녀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사또, 괜찮으시다면 제가 모시겠습니다.”

실상 명월이 원하기만 하면 그에게 달려올 여인은 많았다. 지금도 그가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그 얼굴을 보기 위해서 호란의 기녀들이 몽땅 뒷문 쪽으로 나와 얼굴만 내민 채로 명월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걸 모르진 않는 명월이었지만, 호접화가 없으니 여기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명월은 말을 전해 준 자희가 기분 나쁘지 않을 선에게 사양을 했다.

“원래 전해 줄 것이 있어서 찾아온 거였네. 그녀가 없으면 다음에 찾아오지. 그때 자네도 함께 합세.”

손을 흔들며 명월이 몸을 돌리고, 빠르게 멀어졌다. 그걸 보고도 붙잡을 수 없었던 자희는 속이 탔다. 그를 불러보려고도 했지만, 결국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벙어리가 냉가슴 앓는 것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뭔가 싶었던 그녀는 주먹으로 가슴만 쳐댔다.

“거절도 어쩌면 저렇게 사람 마음을 설레게 하시나.”

저러니까 더더욱 포기를 할 수 없는 게 아니냐면서 자희는 명월이 사라진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 * *

이방 한소규의 딸이 살아났다.

이 고을에 머무르면서 죄 없는 소녀들을 잡아먹던 귀물이 사라졌으니,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다.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지만, 그건 자신이 한 짓이 아니었다. 그 빌어먹을 장인 놈이 말한 대로, 자신은 그에게 도움을 받았다. 별일 없이 넘어갔다면, 자신 또한 그 장인이 인간이 아닌 점을 물고 늘어지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놈은 은혜를 갚으라는 걸 빌미로 삼아 자신에게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 그리고 한 말이 가관이었다.

‘내 것이 된다면 조금 더 오래 살 수가 있다.’

그 말을 떠올린 명월은 코웃음을 쳤다. 부채를 펼치고는 세게 부채질을 하는 명월의 얼굴은 확 보일 정도로 굳어 있었다.

놈이 자신을 겁간한 것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놈이 건드리고, 혀로 등과 허리를 집요하게 핥자 통증이 많이 옅어졌던 거다. 실제로 놈이 반신불수 운운을 할 정도로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하는 동안 등 쪽의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놈이 지나치게 아래를 헤집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명월은 부채를 접고는 그걸로 턱을 툭툭, 두드렸다.

놈과 한 건 분명 꿈이 아니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고, 바로 어제 관아에 돌아올 때만 하더라도 이 몸은 그 통증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꼬박 하루를 자고 일어나자 그 통증은 사라져 있었고, 물린 뺨도 마찬가지였다. 뽀얀 오른쪽 뺨에는 작은 점 하나만 찍혀 있었다. 겉모습만 보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자신이 그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 망할 놈을 두고만 볼 수가 없었다.

놈은 귀물을 맨손으로 때려잡았다. 가슴과 머리에 구멍을 내는 것으로 처리를 했던 거다. 말이야 쉽게 하지, 정말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명월은 부채를 들고 있는 본인의 오른손을 확인했다. 검은 가죽으로 감싸진 반장갑을 확인한 그는 마음이 답답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놈들은 이 손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귀물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건 장인 놈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이 손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쓸모가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

그때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해하던 복운이 얼굴을 내밀었다.

“호접화도 없는데 그냥 관아로 들어가십시오.”

조금 더 가면 시장이 나온다. 사람들 많은 곳으로 들어가기 전에 명월을 데리고 관아로 돌아가고 싶은 게 복운의 속마음이었다. 명월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일단 말이나 꺼내 보자 싶어서 해 봤다. 그리고 명월은 반응을 보이는 듯 뒤를 흘깃 보더니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엉덩이에 뭔가 묻은 게 없는지 확인 좀 해 봐라.”

“묻은 거요? 잠깐 기다려 보십시오.”

엉덩이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이라도 이상한 게 묻어 있으면 안 되었다. 괜한 흠이 잡힐 순 없다면서 샅샅이 명월의 뒤태를 살피던 복운은 안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묻은 건커녕,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래? 그런데 왜 이렇게 멍멍이 하나가 내 궁둥이 뒤만 졸졸 따르는 건지 알 수가 없구나.”

“……자꾸 그렇게 말씀하실 겁니까.”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는 복운이었지만, 명월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 얼굴만 보면 왜 걱정을 해 줘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냥 무시하고 마는 건데. 하지만 10년 넘게 지켜봐 온 정이 있으니까 한 번에 확 끊을 수도 없었다. 이 답답한 마음을 누가 알겠느냐면서 복운은 마냥 억울하다는 듯 명월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억울해하는 복운을 두고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몸을 돌려선 부채로 복운의 어깨에 묻어 있는 나뭇잎을 털어 주며 차분하게 말했다.

“생각 좀 정리할 게 있어서 돌아다니는 거다. 그러니 시끄럽게 굴지 말고 조용히 따라와라. 원래는 네놈을 멀찍이 따돌리고 혼자 다니려 했던 걸 참고 있는 거다.”

명월의 말에 복운의 눈에 들어간 힘이 빠진다.

명월이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일단은 이런 식으로 뒤를 따라올 수 있도록 해 주는 거였다. 그러다가도 언제 마음이 수틀려서 혼자 사라져 버릴지 모를 일이었다.

일단은 뒤따라올 수 있도록 해 주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왜 자신은 고작 그런 걸 두고 이리도 고맙게 생각해야 하느냐면서 복운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알겠습니다, 라고 웅얼거렸다.

* * *

시장으로 나오자 확실히 사람들이 활기가 넘치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흥정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명월은 느긋하니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포목점 앞에 멈추었다.

호접화가 여름 옷을 맞추러 갔다 들었다. 그렇다면 이런 곳에 있지 않겠나 싶어서 괜히 안쪽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그걸 어떻게 생각한 건지 가게 안쪽에서 사내가 달려 나왔다.

“아이고 나으리. 옷감이 필요하셔서 오셨습니까?”

물으면서 사내의 눈은 명월을 위아래로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딱 봐도 좋은 옷감으로 지어진 옷을 입고, 외모도 곱상하니 보기가 좋았다. 갓에다가 반짝거리는 보석을 단 것도 범상치 않았다. 큰손님이라는 걸 간파한 이는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숙이곤 안쪽으로 양팔을 뻗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바깥에서 구경하는 것보단 안쪽에 더 좋은 것들이 많습니다.”

명월이 이곳을 기웃거린 건 옷감을 사거나 옷을 맞추기 위함이 아니었다. 혹, 호접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기웃거린 건데 그걸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냥 바로 안쪽에 호접화가 있는지에 대해 물으려다가 말았다.

벌건 대낮에 기녀를 찾는 선비라. 조금 더 지나다 보면 그 선비가 실은 사또였다는 게 파다하게 알려지게 될 터였다. 예전에 호접화가 너무 본인과 가까이 지내면 안 된다고도 말했다.

명월의 입장에선 호접화가 기녀든 뭐든 그런 건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통하는 부분이 있고 마음이 편해져서 그녀를 찾은 것뿐인데, 그걸 오해하는 이들이 지나치게 많았다.

남들이 오해를 하든지 말든지 신경 쓰고 싶진 않지만, 호접화는 어떨지 모르지.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걸 밀어붙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명월은 사내를 따라 포목점 안으로 들어갔다. 옷이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뭐가 있는지 궁금은 했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몇 벌 사 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근처에 다른 어떤 곳보다 저희 가게의 비단이 가장 곱고 질이 좋습죠. 여기서 옷감을 떼어다 옷을 지어 입은 분들은 다시 발걸음을 하십니다. 물론, 저희 가게에서도 옷을 지어 드리기도 합니다. 이왕 오신 김에 찬찬히 살펴보시고 마음에 드시는 게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말대로 걸려 있거나 쌓아 올린 비단이나 무명의 질이 좋아 보였다. 돌돌 말아져서 한편에 자리를 잡고 있는 걸 유심히 살피면서 그 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명월은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면서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쪽에는 의자와 탁자도 구비되어 있었고, 명월이 큰손님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간파한 상인은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어느새 의자에 앉게 된 명월의 앞으로 짧게 잘라서 묶여진 천 등이 놓여졌다.

“자, 구경하십시오. 차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쌍화차 한 잔만 부탁하겠네.”

“네네. 금방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편안히 구경하십시오.”

상인이 안쪽으로 잽싸게 들어가는 동안 명월은 바로 천에 손을 댔다.

기본적으로 가져다주는 걸 잘 입는 편이긴 했으나, 그래도 선호하는 색 등이 따로 있었다. 이왕 여기에 왔으니, 마음에 드는 색으로 옷을 몇 벌 지어 볼까, 하는 생각도 하면서, 명월은 유심히 천을 하나하나 살피고 재질도 확인했다. 그러다가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천을 발견하고는 그걸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묘하게 이끌리는 색이다. 거기다 촉감도 마음에 들었다. 신중하게 만지작거리는 중에 명월은 천 쪽으로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그 색이 당신하고 잘 어울릴 것 같군요.”

바로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움찔하고 어깨를 떤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뒷짐을 진 채로 서 있는 낯선 사내를 발견하곤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

윤기가 도는 검은 색 도포를 입은 사내는 허리에 두터운 붉은 띠를 감고, 이마에는 검은 띠를 둘렀다. 거기다 머리를 반으로 묶어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체격이 좋고 무척 준수하게 생긴 용모인지라, 다소 요란하다 할 수 있는 차림이 나쁘지 않기는 했으나 묘한 건 사실이었다. 개성이 강한 옷차림이지 않으냐면서 명월은 조심스레 물었다.

“……실례지만 어디서 뵌 적이 있소?”

“아니요. 초면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초면인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건넨 건가. 꽤나 변죽 좋은 사내일세.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보자 사내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구경하시는데 방해를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입고 있는 것보단, 청색이 더 잘 어울리실 것 같아 말을 한번 꺼내 봤습니다.”

그리 말한 사내는 자연스럽게 명월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선, 그가 보고 있던 천을 잡아 뒤로 몇 장이나 넘겼다. 그리고 청색에 보랏빛이 감도는 색을 겹쳐 보았다.

“이 천에다가 이 천을 덧대면 더 보기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냥 대충 보기에도 두 색이 무척 잘 어울렸다.

보통 사내가 이런 식으로 쉽게 어울리는 천을 찾아낼 수 있을까. 천을 만지거나, 찾는 손놀림에 거침이 없는 데다, 낯선 이에게 말을 건네는 것에 대한 망설임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거였다. 거기다 보통 이들과 다른 차림새를 볼 때, 눈앞에 앉아 있는 사내의 정체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장사를 하시는 분이오?”

“그렇습니다. 가끔씩은 무역도 합니다.”

“초면인지라 이렇다 저렇다 말을 드리기 어렵지만, 거상이실 것 같소만―.”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만 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 명월은 사내의 손가락에 끼어진 옥가락지와 검은 허리띠에 매달린 보석을 봤다. 그런 걸 떡하니 달고 다니는 주제에 겸손한 척을 할 셈인가 싶었다. 하지만 본인이 저리 말하니 그 앞에 대고 뭐라 할 수 없었던 명월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사내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짙어진다.

그냥 보기에도 시야가 확 트이는 듯한 시원한 미소를 짓는 사내였다. 나쁘지 않은 느낌을 풍겼으나, 원래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이들은 수상쩍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명월은 쉽사리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때 안에 들어갔던 상인이 쟁반을 들고 나오다 명월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내를 보곤 화들짝 놀라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이고, 행수님.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오신다고 언질을 하셨더라면 준비를 해 두었을 텐데―.”

“괜찮다. 갑자기 찾아온 거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손님부터 챙겨라.”

행수라 불린 사내의 말에 상인은 바로 명월에게 쌍화차를 내려놨다.

딱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잔에 진하게 우려낸 차였다. 잔에 손을 대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손님을 대하는 게 나쁘지 않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상인은 이미 맞은편 사내 쪽으로 몸을 돌려선 굽실거리기에 바빴다.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그러면 나도 이분과 같은 것으로 부탁하지.”

“지금 바로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대답을 한 상인은 아까보다 훨씬 더 서둘러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만한 포목점의 상인이 행수라 부를 정도라면, 거상이 맞았다. 의도치 않게 거물을 만나게 되었다면서 명월은 잔을 들어 쌍화차의 맛을 봤다. 첫맛은 쓰지만 뒤로 갈수록 달콤함이 느껴지고, 목구멍으로 넘어간 따뜻함이 은은하게 배 속으로 퍼져나갔다.

차 맛도 괜찮군. 입맛을 다신 명월이 만족해선 고개를 끄덕이자 그걸 본 사내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제가 이곳을 드나든 지 오래지만, 선비님과 같은 분은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그럴 겁니다. 올해 이곳으로 왔으니까요.”

“올해 초에 신임 사또께서 오셨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혹시…….”

“맞습니다.”

명월은 이미 상대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리고 장사하는 자들치고 눈치 없는 이들이 없었다. 이런 자들 앞에서 모르는 척하는 게 얼마나 의미가 없고, 어리석은 짓인지를 아는 명월은 순순히 긍정했다.

그러자 바로 사내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여기서가 아니라 제가 먼저 인사를 올리러 갔어야 했는데 말이죠.”

“장사하시는 분이 관아에 인사를 하러 올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장사하다가 못된 장난을 치신다면 또 모를까.”

“장난을 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매사 모든 일들은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니까요.”

“장사를 하면서 그리 하기가 힘들 텐데, 대단한 분이시오.”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다. 원래 장사를 하려면 상대에게 그만한 신뢰를 안겨 줘야 하는 법입니다. 차곡차곡 쌓인 신뢰가 더 큰 재물을 모아 주니까요.”

말을 함에 있어 시종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사내였다. 적당히 비위를 맞추면서도, 흥미를 느낄 만한 화제를 자연스럽게 던지는 것에서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점점 끌려가게 생겼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명월은 다시 잔을 들었다. 그때 포목점 상인이 쌍화차를 들고 나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리 말을 한 상인이 사내 앞에 쌍화차를 내려놓는 걸 확인한 명월은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 보겠네. 차 잘 마셨네.”

그리 말을 한 명월은 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위에 올려놨다. 그걸 본 상인은 놀란 얼굴로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이고, 이런 걸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차 정도는 오시는 손님들에게 모두 드리는 겁니다.”

“생각지도 않게 좋은 차를 얻어 마신 데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니 그냥 받아 두게.”

명월은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이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는 바로 몸을 돌렸다. 여기저기에 걸린 옷감을 살피면서 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양 복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볼일은 다 보셨습니까.”

그리 말하는 복운의 얼굴에는 ‘볼일을 다 봤으면 이만 관아로 돌아갑시다.’라는 의사가 떠올라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니 왜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웃는 대신에 그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명월은 갑자기 어, 하는 소리를 내면서 허공을 가리켰다.

“저게 뭐지?”

“뭐, 뭐가 말입니까?”

명월답지 않게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허공으로 손가락질을 하자 덩달아 놀란 복운이 그곳을 살폈다. 처마 끝으로 파란 하늘과 그 위를 떠다니는 하얀 구름이 보였다. 그 외에는 특이점 하나 없는 광경이었다. 명월이 대체 뭘 보고 저런 식으로 군 건가 싶었던 복운은 눈에 힘을 준 채로 더 자세히 부근을 살폈지만, 역시나 보이는 건 없었다. 한숨을 쉰 복운은 뒤를 돌아봤다.

“뭡니까.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이제는 성인이고 사또씩이나 되는 분이 장난 같은 걸 치면 안 되는 겁니다―라고 말하려던 복운은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 명월이 서 있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던 거다. 그걸 확인한 복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벙 쪄선 가만히 있던 그는 억, 하고 숨을 삼키면서 급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다 해서 사라진 명월이 다시 나타나는 게 아니었다. 머리에 양손을 올린 복운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급히 오른쪽으로 달려갔다. 크게 소리 내 부를 수도 없었던 그는 미친 듯이 주변을 살피면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걸 확인한 명월은 한숨을 쉬면서 몸을 돌렸다.

드디어 떨어뜨렸다. 딱히 복운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지나치게 간섭하고 뒤를 쫓는 건 싫게 여겨졌다. 안 그래도 혼자서 생각할 것들이 많은데 저런 식으로 따라붙으면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도 그리 할 수 없게 되잖으냐면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장을 다니면서 사람들이 어찌 생활을 하는지를 살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 보면, 별문제 없을 것 같은 이곳의 문제점이 눈에 들지 않을까.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땐, 마냥 평화롭고 조용한 곳이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음침하고 지저분한 구석이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였고 말이다.

길을 지나치는 이들, 물건을 흥정하거나 파는 이들, 그리고 대화를 나누면서 웃는 이들의 얼굴엔 그늘이란 게 없었다. 하지만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자 그 모든 것들이 수상쩍게 여겨졌다. 다들 겉모습을 저런 식으로 위장하고 속으로는 다른 생각들을 하는 게 아닐까. 부채로 코와 입술을 가린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뭔가가 빠르게 달려와 다리에 부딪쳤다. 방심한 상태로 있다가 당한 일이었기 때문에 명월은 어,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꼬질꼬질한 차림새의 어린애가 선 채로 멀뚱히 올려다보고 있는 걸 확인하곤 똑같이 내려다봐줬다.

“…….”

정말 지저분한 아이였다.

예전 도성에 있었을 때, 이런 아이들을 두고 거지라고 부르곤 했었다. 이런 마을에도 거지가 있구나 싶어서 기분이 묘했다. 그때 눈을 끔벅인 아이가 명월을 지나쳐 달려갔다. 빠르게 멀어지는 아이를 보던 명월은 부채를 접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걸까.”

그게 아니면 단순히 부딪친 걸 두고 놀란 것뿐일까.

명월은 부채로 턱을 두드리면서 몸을 돌렸다.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다른 것들도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저 단순히 부모의 관리를 못 받은 아이일 수도 있겠지만, 옷차림을 보면 아예 방치된 채로 혼자 살아가는 아이인 것 같았다. 딱 봐선 예닐곱 살은 되었을까. 저런 어린애가 혼자 살아남기엔 이 세상은 험악하고 힘든 곳이었다. 도성엔 저런 어린애가 할 만한 일이라도 있지, 여기는 그것도 아니었다.

산속에 있고 밀폐된 곳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들의 배척을 받을 수 있었다. 사람 좋은 얼굴들을 하고 있으나, 왜인지 본인들 일이 아니면 쉽사리 나서지 않는 것 같으니까―.

뭐, 그건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일까.

명월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를 돌아봤다. 어린애는 보이지 않았지만, 영 신경 쓰였다. 적어도 자신이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저런 어린애들이 없게끔 하고 싶었다. 나중에 복운에게 이곳에 거지촌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자면서 앞으로 고개를 돌리던 명월은 움찔했다. 저기 앞에서 걸어가는 사내의 뒷모습이 무척 낯익었던 거다.

“……그놈이다.”

자세히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어깨도 떡 벌어져 있었다. 털가죽 조끼를 입고는 한쪽 어깨에 뭔가를 짊어지고 가는 건 분명 그놈이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만―.

그것하고는 조금 다른 상황일까. 더군다나 지금은 무기가 될 만한 걸 들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놈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명월은 뒷모습을 유심히 살피다가 사람들 뒤로 걸어가면서 은밀하게 움직였다.

일단은 놈의 뒤를 따라가면서 어디로 가는지를 확인할 셈이었다. 이방이 말하기로는 웬만한 일이 아니라면 산에서 거의 내려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요즘은 정말 빈번하게 나타나지 않나.

거기까지 생각하자 명월은 놈의 거동이 더더욱 수상쩍게 여겨졌다. 평범한 놈이 아니었다. 그런 놈이 왜 이렇게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걸까. 그게 결코 좋지 않은 일처럼 여겨졌던 명월은 발끝에 힘을 주고 빠르게 움직였다.

방심하는 사이에 놈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일단은 저놈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디로 가는지를 확인하자면서 명월은 신중하게 뒤를 쫓았다.

* * *

길을 가다가 누군가 부르면 그 앞으로 가서는 등에 메고 있던 짐을 내려서 거기서 뭔가를 꺼냈다. 그걸 본 이가 크게 만족해하며 물건을 들고 가서 그에게 동전을 건넸다. 그걸 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놈이 걸어가고, 중간에 또 누군가 불렀다.

놈을 멈춰 세우는 건 장사를 하는 이도 있고, 길을 지나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놈은 메고 있던 짐을 내려선 거기서 뭔가를 하나, 둘 꺼냈다. 그걸 받아 든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면서 그에게 바로 돈을 지불했다. 그래서 저게 애초에 부탁 받은 물건을 건네는 것인지,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파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명월이 보기엔 이상한 광경이었다. 그보다 놈에게서 뭘 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서 물건을 산 이에게 가서 물어봐야 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놈을 따라가면서 물건을 산 이의 가게 앞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여자는 손에 거울을 들고 있었다. 그 속에 비치는 본인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즐겁게 웃고 있었던 거다.

별거 아닌 모습인데도 계속 그쪽을 보게 된다. 몇 번이나 흘깃거리면서 여자를 보던 명월은 다시 걸어갔다. 그렇게 그에게서 물건을 산 이들을 지나쳤고, 그들 손에 들린 건 전부 다 제각각이었다.

나무로 된 장신구, 거울에서부터 가락지에 팔찌, 그리고 작은 약재 주머니 같은 것도 있었다. 주머니를 양손을 든 채로 냄새를 맡다가 “오늘 저녁은 푹 잘 수 있겠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푹 잘 수 있다니. 약도 만들어서 파는 건가.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은 안쪽 자리에 서선 약초 같은 걸 끄집어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놈은 의원이 아니었다. 인간도 아니었다. 그런 놈이 주는 게 제대로 된 것일 리가 없었다. 일단은 놈에 대해서 알아보고 난 후에 일을 시작할 셈이었는데, 아무래도 실수를 한 느낌이었다. 놈이 사람들에게 이상한 걸 주기 전에 재빠르게 처리를 해야 할 것 같았던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걸음을 서둘렀다.

장을 빠져나온 놈이 향한 건, 산길이었다. 예전에 이방을 따라서 와 본 적이 있던 곳이었다. 처음 저 녀석에 대해서 모를 때, 만나겠다고 이곳을 걸었다.

놈은 다시 돌아가는 걸까. 그렇다면 굳이 뒤따를 필요가 없지 않을까. 분하지만 녀석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놈이었다. 혼자선 당해 낼 수 없고, 오히려 당할 수 있었다. 만약 그 짓을 한 번 더 당한다면 그땐 제정신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다면서 명월은 양손을 움켜쥐었다.

그냥 커다란 개에게 물린 셈 치자 싶었지만, 그리 쉽게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놈이 뭔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허리와 등은 나았고, 징그러울 정도로 몸 여기저기에 남아 있던 자국도 전부 다 사라졌다. 하지만 그걸로 당한 일마저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놈이 그 짓을 했기 때문에 몸이 나았다. 그렇게 포장할 수도 없었다. 놈이 자신을 겁간한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놈이 인간이고, 아니고를 떠나, 명월은 놈이 자신에게 한 그 짓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 절대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

오른쪽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명월의 눈이 크게 떠진다.

그야말로 화들짝 놀라며 옆으로 물러선 그는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사내와 시선이 부딪쳤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앞장서 걷던 놈이 어느새 옆으로 온 건지를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굳어지는 명월의 얼굴을 본 놈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뒤를 밟고 싶으면 은밀하게 해야 할 게 아닌가. 그런 식으로 냄새 풀풀 나게 하면 어쩌자는 거야.”

냄새 운운하는 순간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오늘 아침에도 깔끔하게 몸을 씻었고 옷도 갈아입었다. 그런데 냄새라니. 놈이 일부러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기에 신경 쓰지 않을 셈이었지만, 그리 되지가 않았다. 명월은 놈을 흘깃 거리면서 보다가 소매를 들어 킁킁, 하고 냄새를 맡아 봤다.

아무것도 안 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손바닥에도 코를 대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역시나 저놈의 수작에 넘어간 거라며 명월은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동시에 놈의 손이 빠르게 움직여선 손목을 잡아챘다.

놈이 손목을 잡아채는 순간 명월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진다.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명월의 손을 잡아당긴 놈은 움켜쥔 손을 내려다봤다. 손목을 주시하는 놈의 행동에 명월의 몸으로 힘이 들어갔다.

놈이 손목을 붙잡고, 자신의 손이 그의 얼굴 앞에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손가락을 펼치면 놈의 입술이나 코, 턱을 건드릴 수 있을 테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손목이 잡힌 것도 끔찍한데, 놈의 몸을 건드리다니. 싫었다.

당장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역시나 힘이 상당했다. 놈의 손을 뿌리치려면 엄청난 힘을 써야 할 텐데, 자연스럽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될 거다. 지금은 기 싸움 중이었다. 놈에게 안 좋은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놈은 눈을 내리뜬 채로 명월의 주먹을 내려다봤다. 불거져 나온 손등의 뼈를 내려다보다가 그곳으로 코를 댄다. 그 순간 손으로 힘이 들어갔지만, 잡힌 채였기 때문에 아주 조금 움직이다 말뿐이었다. 여유롭게 명월을 제압한 놈은 그의 손등에 코를 대고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냄새가 풀풀 나는군.”

명월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놈이 눈동자를 들어 명월을 바라봤다.

“이렇게나 심하게 나는데도 용케도 별일 없이 지내왔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 후 놈은 명월의 손을 놓았다. 그러곤 빠르게 옆을 지나쳐 가 버린다.

놈이 스쳐 지나갈 때 명월은 몸에 힘을 주긴 했지만, 금방 어깨에 들어간 힘을 뺐다. 대신 그는 조금 전 놈에게 잡힌 손을 확인했다. 왼손이었고, 아직도 손목이 저릿거렸다. 무식하게 힘만 센 놈이라면서 명월은 당장 놈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저 앞까지 멀어지는 놈을 확인한 명월은 뭔가에 이끌리듯 그리로 걸어갔다.

혼자선 따라가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런 짓을 당했는데도 이런 숲에서 뒤를 졸졸 따라가는 건 정말로 미친 짓이었다. 그럼에도 움직이는 건 놈이 하는 말, 행동 모든 것들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명월은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서둘러 움직였다. 그런데 놈은 심한 경사가 진 산길을 마치 평지처럼 걷는 놈이었다. 빠르고 가볍게, 달리는 것처럼 훌쩍훌쩍 뛰어 넘어간다. 명월도 본인이 체력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놈을 뒤쫓는 동안 점점 호흡이 가빠졌다. 그걸 조절하던 명월은 뺨을 스치는 찬바람을 느끼곤 헛숨을 삼켰다.

갑자기 멈춰선 명월은 고개를 들어 녹음이 우거진 주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

이런 젠장,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래서 고개를 들었을 때, 내내 뒤를 돌아보지 않던 놈이 이쪽으로 똑바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 시선이 무척 불쾌했다. 자연스럽게 굳어지는 명월의 표정을 확인한 놈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다시 한 번 그 짓을 하고 싶어진 건가. 그럴 만도 하지. 인간들끼리의 관계에선 얻을 수 없는 극치의 쾌감이었을 테니.”

“자신감이 대단하군. 그러니까 무식하게 큰 물건 찔러 넣고 흔들기만 하면 상대가 다 좋아할 거라고 착각하는 거겠지.”

정말은 그 일에 대해선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놈이 제멋대로 주둥이를 놀리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더럽게 못하더만―.”

분노를 담아, 하지만 최대한 태연하고 밉살스럽게 내뱉은 후 명월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말뿐이라 해도 일단 이렇게 한방 먹여 주니 속은 시원해졌다. 실제로 망할 놈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확인한 명월은 알 수 없는 승리감을 느끼면서도, 놈이 냄새 운운하는 게 신경 쓰여서 그것에 대해서 물었다.

“나한테는 아무 냄새도 안 나. 그런데 어떤 냄새가 난다는 거지?”

“먹이가 되는 쪽은 그걸 모르지. 하지만 사냥꾼들은 안다. 그게 먹음직스러운 놈일수록 더하지.”

그리 말하면서 놈이 위, 아래로 명월을 훑어봤다.

별거 아닐 수도 있을 법한 그 눈초리가 불쾌하게 여겨진 명월은 몸을 움츠렸고, 꽤 오랫동안 명월을 바라보나 싶던 놈이 앞으로 움직였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놈이 왜 갑자기 움직이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느긋하게 다가와 결국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선 놈이 물었다.

“그런데, 내가 못한다고?”

무게 잡고선 다가온다 싶더니만, 하는 말이 고작 저거다.

그러니까 아까 자신이 한 말에 자존심이 상하신 모양이었다.

재빠르게 머리 회전이 된 명월은 당장 말했다.

“넌 서툴러. 내가 여자였다면 네놈은 당장 뺨을 얻어맞았을 거다. 남자니까 참아 준 거지. 그래. 그거야.”

놈이 자신이 한 말에 굴욕감을 느낀다는 것에 일말의 쾌감을 느끼며 명월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팔짱을 낀 그는 대단히 선심 쓴다는 양 말했다.

“지나가는 개한테 물린 셈 치는 거지.”

그래. 그 정도로 생각하면 마음은 편할 것 같았다. 놈과 했을 땐 여러 감정이 뒤엉켜서 엉망진창이었지만, 지금은 멀쩡했다. 물론 육체만 그런 거지, 그 기억은 아직 명월의 뇌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렇다 해서 그것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던 명월은 놈을 노려봤다.

그러는 동안에도 놈은 명월의 얼굴에서 시선 한 번 떼지 않았다. 매섭다 할 만한 눈초리로 바라보나 싶던 놈이 앞으로 한 걸음 옮겼다. 두 걸음 옮기는 순간 놈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무척 부담이 되는 거리였다. 왜 이렇게 가까이 오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크게 숨을 내쉬지도 못한 채로 가만히 있었다.

놈은 눈을 내리떠 명월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살폈다. 애써 태연한 척을 하나, 동공이 미미하게 흔들리는 걸 확인한 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개 따위와 나를 비교하는 건가.”

그 순간 명월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넌 개만도 못한 놈이야.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함부로 아랫도리를 놀렸다간 제명에 못 살 거다.”

“그 말은 즉, 네가 날 없애 버리겠다는 걸로 들리는군.”

“왜 아니겠어. 목이나 잘 닦고 기다려라. 금방 잘라 내 줄 테니까.”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필히 그렇게 해 줄 거라며 명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살기가 넘쳐흐르다 못해서 풀풀 풍기는 명월의 싸늘한 시선에도 놈은 태연했다.

“목을 베는 건, 저급한 놈들에게만 해당 되는 일이지. 내게는 아무 소용없어.”

코웃음을 치면서 하는 말에 명월의 눈가가 파들, 하고 떨린다.

“넌 목이 잘려도 안 죽는다는 거냐?”

“알아내고 싶으면 한번 잘라 보시지.”

명월의 눈동자 안쪽에 서린 의혹이 의심으로 바뀐다.

이놈이 허풍을 떠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런 수작에 넘어가선 안 되었다. 지금 알고 싶은 건 달리 있었다. 그것도 놈이 수작을 부리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신경 쓰이는 부분이 많아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냄새라는 게 말이지. 너 말고도 다른 놈들도 맡을 수 있는 거냐?”

“왜? 다른 놈들이 꼬일까 봐 걱정이라도 되나?”

기분 나쁜 말이었다. 결국엔 이런 식으로 대화가 유도 된다. 지금은 무기도 없고 마땅히 놈에게 대항할 만한 게 없었다. 품 안에 단도가 있지만, 그런 걸로는 이놈을 이길 수 없었다. 지금은 물러서야 할 때였다.

명월은 느긋한 놈을 노려봤다. 열 받았지만, 당장 뭐라 할 수 없었던 명월은 고개를 돌리곤 빠르게 산길을 내려갔다.

“그리로 가면 다른 쪽으로 내려가게 될 거다.”

일단은 내려가면 어떻게든지 관아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아 줬으면 싶었다.

내려가는 내내 기분이 언짢았다. 저놈에게서 도망치는 형색이었다. 실제로도 그랬기 때문에 점점 더 화가 나는 걸 느끼며 명월은 결국 참지 못하고 중간에 멈춰 서선 뒤를 돌아봤다.

“다음에 보면 내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마. 다음 번엔 정말로 가만 두지 않을 테니까.”

그리 말을 하곤 빠르게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자신의 이런 행동이 저놈 보기엔 얼마나 우스울까. 별것도 아닌 놈이 괜히 있는 척을 한다고 생각하지나 않을까 싶어 속이 쓰리다.

겉으로 보기엔 인간과 다름이 없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냥 저냥 지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놈은 자신에게 이상한 짓을 한데다가, 괴상한 모습도 잔뜩 보였다. 신경을 끄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입장이었다.

부지런히 걸어가던 명월은 중간에 멈춰선 뒤를 돌아봤다. 팔짱을 낀 채로 느긋하니 서 있는 놈이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아.

술렁거리는 속을 다독이며 명월은 말했다.

“도움을 받은 부분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 외적인 부분은 아니야. 그러니까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마. 인간도 아닌 주제에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지내지 말라고. 그냥 산속에 처박혀 있어. 그래야지 네놈 명줄이 길어질 테니까.”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내 입으로 말한 적 있던가.”

또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할 셈인가 싶었던 명월의 눈동자 안쪽으로 힘이 들어간다. 불쾌함으로 굳어지는 얼굴에 아랑곳하지 않고 놈이 웃으며 말했다.

“너 같은 놈도 있는데, 나 같은 놈이 있는 게 뭐가 이상하지?”

“…….”

마음이 싸해진다.

나 같은 놈이라. 저자가 그리 말을 한다 한들, 크게 이상할 게 없었지만 기분이 상했다. 고개를 돌린 명월이 빠르게 멀어지는 걸 바라보던 놈이 재차 말했다.

“내려가다가 오른쪽으로 틀어라. 지름길이니까.”

하지만 명월은 아랑곳하지 않고 직진으로 주욱 내려갈 따름이었다.

그 모습을 본 놈은 가볍게 웃음을 흘리면서 고집은, 하고 중얼거렸다.

* * *

“아이고, 마실 다녀오십니까?”

인사를 하는 포졸의 얼굴엔 웃음이 한가득이었다. 나름의 방식으로 친근감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지만, 명월은 그 얼굴을 한번 보고 말았다.

조용히 지나치는 명월을 두고 내내 웃던 포졸은 표정을 지우곤 어깨를 으쓱였다. 어리고 곱상하게 생겨도 사또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대하기 어려운 존재로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제 갈 길을 갔다.

안쪽 처소로 돌아온 명월은 대청 끝에 앉아선 갓끈을 풀었다. 갓을 옆에 내려놓은 명월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외출은 말았어야 했던 건가. 호접화는커녕, 쓸데없는 놈만 만나서 기분만 구려졌다면서 명월은 오른쪽 발을 앞으로 뻗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복운아.”

일단은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셔야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복운이 오면 찬물을 떠 오라 할 셈인데 불러도 대답이 없다. 시장에서 헤어지긴 했지만, 이쯤이면 돌아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복운아!”

혹시나 싶어서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저기 기둥 뒤에서 복운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런데 표정이 이상하다.

“뭡니까.”

뚱한 얼굴로 묻는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불렀는데도 냉큼 앞으로 달려오지 않고 기둥 뒤에 숨어 있는 모습에 명월은 기가 차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지금 넌 뭘 하고 있는 거냐.”

“이제 저는 필요 없던 게 아니었습니까?”

여전히 뚱한 목소리에 명월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일단, 복운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모르진 않았다. 그런 그의 눈엔 지금 자신이 제멋대로 구는 게 불안한 거겠지. 그렇다 쳐도 저런 식으로 눈을 좍 찢은 채로 쳐다볼 필요는 없는 게 아닐까 싶었던 명월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러시겠지요. 분명 제가 알 수 없는 귀한 사정이 있으셨던 거겠죠. 그러다가 뭔 일 생기면 큰일 당하는 건 바로 저구요.”

바깥에 나가서 좋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복운까지 20년 같이 산 마누라처럼 바가지를 긁어대니 순간적으로 짜증이 치밀었다.

“그게 네놈의 일이잖느냐.”

딱딱한 목소리로 내뱉는 순간 복운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명월도 순간적으로 본인의 실수를 깨닫곤 바로 입을 다물었다.

서로가 당황해선 멀뚱히 쳐다만 보려니 복운이 입을 꾸욱 다문다. 얼굴이 붉어진 복운은 애써 차분히 말했다.

“지금 저 조금 화가 나려 합니다. 제가 화를 내는 게 이상한 일입니까?”

묻는 말에 명월은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정 떨어지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복운에겐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괜한 짓을 했다면서 명월은 애써 좋게 말했다.

“너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으냐. 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막말로―.”

갑자기 말이 막힌다. 이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하지만 지금 복운은 지나칠 정도로 과보호를 하고 있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진 않았기에, 명월은 심호흡을 한 후 그 말을 내뱉었다.

“나 대신에 네가 매를 맞거나, 구덩이에 빠진 나를 네가 끄집어내 줄 일은 앞으로 생기지 않을 거야.”

그리 말하는 명월은 눈을 내리떠 시선을 피한 채였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복운의 낯빛도 굳어졌다. 멀찍이 떨어진 둘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한동안 가만히 있던 복운은 머뭇거리다가 힘없이 입을 열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왜인지 모르게,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불안합니다. 어렸을 때도 위험하고 심하다 싶었던 일도 종종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불안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저기, 사또께서는 말입니다.”

우리들과는 다른 걸 보고 듣지 않으십니까. 전에는 그걸 모르는 척하고, 애써 외면도 하셨으면서 왜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지금 여기선 뭔가 일이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힘들어 하셨던 거고. 그러지 마십시오. 어렵게 보통 사람들처럼 살기로 마음을 정하셨으면, 그냥 계속 그렇게 가십시오. 그래야지, 주인어른께 인정을 받으실 게 아닙니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들을 꾸욱 삼키며 복운은 눈치를 살폈다.

어떤 식으로 말해야 명월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그런 궁리를 하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여기엔 사또로 오신 거니까 그쪽 일만 하시면 안 됩니까?”

이상한 건 하지 말고, 그냥 보통 사또가 하는 일만 하는 거다. 제발 그렇게 해 줬으면 싶은 눈으로 바라보는 복운을 두고 명월은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무릎 위에 놓인 명월의 손끝으로 힘이 들어간다. 세게 본인의 무릎을 잡았다가 놓은 명월은 긴 한숨을 토해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대답을 해도 자신이 없었다. 이미 지금 상황이라는 게, 발을 뺀다 해서 해결이 될 만한 것도 아니었고―.

묘하게 자신이 없어 뵈는 명월을 두고 복운도 속이 답답해진다. 그렇다고 더 뭐라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기 때문에 복운은 기둥에서 떨어졌다.

“쉬십시오.”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사라지는 복운을 본 명월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바닥만 내려다보던 그는 뒷머리를 거칠게 긁적이면서 제길, 하고 내뱉었다.

* * *

여기저기 안 가 본 데가 없지만, 찾고자 하는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복운은 잠시 멈춰 서선 주변 소리에 집중했다. 눈을 감은 채로 있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를 들었다. 복운아, 하고 가느다란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저기로구나. 복운은 당장 위로 기어 올라갔다. 길이 만들어진 쪽이 아닌지라 올라가면서 여기저기에 쌓여 있던 것들이 허물어져 내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한달음에 경사를 올라간 그는 풀을 헤치면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저기 멀찍이 떨어진 초가집을 한 채 발견했다.

저기인가 싶어서 당장 싸리문을 발로 차 넘어뜨리고 풀이 수북하게 자란 마당으로 들어섰다. 재빠르게 주변을 살피자 마당 구석의 닭장 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작은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맙소사, 하고 혼잣말을 한 복운은 당장 그리로 가서 닭장 입구를 막고 있는 나뭇가지들을 치워 내고 쇠창살을 열었다. 구부리고 앉아선 조심스레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명월은 쪼그리고 앉은 채로 그런 복운을 바라보기만 했다. 곱게 잘 차려입었는데 지금은 흙이나 나뭇가지가 묻어서 엉망인 몰골이었다. 전에는 괜찮다 싶더니만, 최근 들어서 이런 악질적인 괴롭힘을 당하는 빈도가 늘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결코 명월에게서 시선을 떼지 말았어야 했는데, 영악한 것들이 신분을 이용해서 심부름을 시키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에는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명월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라면서 복운은 조금 더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리로 오십시오. 집으로 돌아가야지요.’

그리 말을 하자 명월이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

그러나 구슬처럼 맑은 눈동자가 반질거린다. 설마하니 우는 건가. 그런 생각에 복운이 숨을 삼키자, 명월은 고개를 숙인 채로 밖으로 기어 나왔다. 그러곤 복운의 어깨를 꼬옥 움켜쥔다. 그걸 느끼며 복운은 명월을 세게 끌어안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품에 안긴 명월은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였다. 지금까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의연하게 대처하던 명월이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던 걸지도 모른다. 안겨 있는 명월의 몸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걸 느끼며 복운은 아, 하는 신음을 흘렸다.

괜찮습니다. 도련님.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도련님을 지켜드릴 것입니다. 도련님 덕분에 제가 살아 있는 거니, 제가 도련님을 지켜드리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암요. 그렇고 말고요.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울지 마세요. 도련님을 괴롭히는 모든 것들은 제가 혼내 주겠습니다. 그러니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복운은 눈을 떴다. 자다가 더위를 느낀 건지 이불은 옆으로 밀려나고, 옷고름도 다 풀린 채였다. 그러고도 열이 식지 않는 것 같다면서 손부채질을 한 복운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앉은 채로 멍하니 있던 그는 손을 들어선 목을 긁적였다. 뒷머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덥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굴리던 그는 이불 바깥으로 나왔다. 끙,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비틀거린 복운은 문을 활짝 열었다.

아직 여름 초입인데 왜 이렇게 더운지 모르겠다면서 손등으로 목을 닦아 낸 그는 마루를 내려왔다.

일단은 화장실을 가고 세수를 한 후에 물을 시원하게 들이킬 작정이었다. 그리고 다시 누우면 잠이 잘 오겠지. 크게 입을 벌리며 하품을 한 복운은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움―찔한 복운은 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기둥 뒤에 웅크리고 있는 하얀 걸 발견하곤 눈을 가늘게 떴다.

저게 뭘까. 복운은 조심스레 앞으로 걸어갔다. 그에 맞춰서 웅크리고 있던 그게 천천히 몸을 일으켜선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늘에서 나와 달빛 아래에 선 그것을 확인한 복운은 어,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

무거운 공기가 명월의 어깨를 짓눌렀다. 정작 이 방 안에 있는 건 자신과 아버님, 그리고 형님 한 분뿐이었지만, 눈앞에 수백의 사람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을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이 하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남은 하나였으니 말이다.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상대하기 가장 어려운 사람이라 할 만했다.

그런 그들은 명월을 앞에 두고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저들이 종종 쓰는 방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한정 없이 사람을 무릎 꿇려 놓고는 그걸 바라보는 거다. 마치 본인들이 높은 자리에 있는 인간들인 양, 눈을 내리뜬 채로 명월을 살펴보는 거다. 솔직히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더럽고 치사해도 참아야 했다. 거기다 형님 쪽은 그렇다 쳐도, 아버님은 무시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앉아 있지만, 지금 명월이 집중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아버지가 어떤 말을 할까. 그것이 신경 쓰여서 다른 건 아무래도 좋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꼭 그러면 다른 쪽에서 함부로 입방아를 찧기 마련이었다.

‘집안의 이름을 더럽히는 짓은 하지 말도록 해라.’

낮고 무게가 잡힌 목소리. 첫째 형님은 언제나 늘 저렇다. 행동뿐만이 아니라, 말투에서도 상대를 깔보는 게 노골적으로 묻어났다. 그러니 자신이 저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는 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왜 대답이 없는 것이냐.’

계속 입 다물고 있으면 할 때까지 추궁할 거다. 그게 더 가면 이래서 핏줄이 천한 것들은, 같은 운운을 할 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절반은 그쪽 핏줄이었다. 그런데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게 타당이나 한가 싶었다.

자신을 욕하는 것 자체가 바로 집안을 모욕하는 꼴이었다.

억지를 부린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지금 이 자리를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은 계속 욕을 해 봐라, 결국 네 얼굴에 침 뱉기다, 같은 생각을 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왜 대답이 없는 것이냐.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이더냐.’

그런 건데, 알아차리는 게 꽤나 늦었다.

다른 때라면 내내 눈을 내리뜬 채로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명월은 첫째 형님을 바라봤다. 옆에 앉은 아버님과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마른 인상인 그는 명월이 쳐다보는 순간 노골적으로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어찌 감히 날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냐, 그리 호통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그걸 읽을 수 있었던 명월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지 말자고 생각은 하는데, 쓸데없이 센 척을 하는 놈의 행동이 고까우니 괜히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그게 놈의 뭔가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얼굴을 확 일그러뜨린 놈이 이, 하고 앞으로 몸을 내밈과 동시에 내내 조용히 있던 아버님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이번에 부임되는 곳이 어디냐.’

그 순간 형님이 한풀 꺾인 모습으로 자세를 바로 잡았고, 그건 명월도 마찬가지였다.

‘반양입니다.’

‘그 어떤 곳보다 풍요로운 지역이다. 다만, 산 깊숙한 곳에 있어 나오고 들어가는 데에 어려움이 있지. 그런 곳일수록 내부에서 썩어 문드러진 부분이 몇 개나 있기 마련이다. 잘못된 것도 오랜 풍습이 고착되어 그릇된 줄 모르는 이들도 허다할 거다. 그들에게 있어 넌 몇 년 머무르다 떠나는 외부인이니, 제대로 처신하지 않는다면 존경을 받지 못할 거고, 오히려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때 네 권력을 남용해선 안 될 것이다. 네 신분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낮게 고개를 숙이고는 주변을 잘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네 일에만 집중하다 보면 시간은 금방 흐를 거다.’

‘좋은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그리고―.’

달리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

명월은 고개를 들어 아버님을 바라봤다.

‘어디를 가더라도 네가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를 상기하고, 가문에 누가 되는 일은 삼가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위에 있는 두 형님도 듣는 말일 터였다. 그런데 왜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가라앉는지 모르겠다. 그건 아마도 아버님의 옆에 앉아 있는 첫째 형님의 오만한 시선 때문이 아닐까.

넌 분명히 거기서도 문제를 일으켜선 금방 돌아오게 될 거다. 그리 말하고픈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여기선 큰소리를 낼 순 없었다. 설령, 큰소리를 낼 수 있다 하더라도 자신은 그러지 못할 거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입을 다물고 참기만 하겠지. 그래야만 할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명월은 입 안이 썼다.

무릎을 꿇고 앉아선 허벅지 위에 양손을 올린 채였다. 언제 어디를 가든지 자신은 이런 자세를 취해야만 했다. 다른 이들처럼 편하게 앉아 아버님을 대하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왜 그럴까. 이제 자신은 예전처럼 막 행동하지 않았다.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척을 하면서 보통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얼마나 노력하는데, 그게 저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걸까. 정말 그런 거라면 자신이 암만 노력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다.

남들 시선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나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살 순 없는 걸까.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그런데 더는 평범하게 살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건 바로 그 망할 놈 때문이었다. 그놈에 대해서 생각하기 때문일까. 갑자기 눈앞에 있던 두 사람이 사라지고, 대신 장인 놈이 나타났다. 아버님 자리에 당당히 앉아선 이죽거리는 놈을 발견한 명월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건 꿈이었다. 그런데 왜 꿈에서도 저놈을 봐야 한단 말인가.

명월은 화가 나 소리쳤다.

“이놈, 당장 꺼지지 못 해?!”

외치면서 명월은 당장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이질감에 명월은 급한 대로 눈을 떴고, 얼굴에 닿는 푹신한 이불을 볼 수 있었다. 옆으로 베개가 멀찍이 떨어져 있고, 얼굴 옆에는 손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지금 엎드린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껏 자는 도중에 이런 식으로 엎드린 상태가 된 적이 없었는데.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었던 명월은 일단은 엎드린 채로 가만히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낯선 방식으로 잔 것 때문에 몸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싶어 걱정스러웠던 거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캬, 캬, 하는 가느다란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한 감각이 퍼지는 걸 느끼며 명월은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동시에 이상한 무언가가 자신의 등 뒤에 올라타 몸을 내리 누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되었다. 일단은 무기가 될 만한 걸 찾아봐야 하는데,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베개뿐이었다.

저런 한심한 걸 휘두를 생각은 없지만, 아쉬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다. 명월은 천천히 옆으로 손을 뻗어 베개를 붙잡았다. 이제 이걸 어찌 휘두르는지가 관건이었기에 심호흡을 했다.

몇 번이나 숨을 들이마셨다가 토해 낸 명월은 속으로 숫자를 새면서 몸을 옆으로 확 돌렸다. 그러자 무언가가 등 뒤에서 흘러내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기분 나쁜 감각이 퍼지는 걸 느끼며 베개를 휘두르려 하는 것과 동시에 하얀 털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응?”

털 뭉치라니. 이건 또 뭐지? 복운이 자신이 자는 동안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바꾼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심스레 일어난 명월은 오른쪽에 흘러내려와 있는 걸 확인했다. 그건 고양이였다. 굉장히 뚱뚱하고, 덩치도 커 보이는 고양이가 벌러덩 누운 채로 입을 벌리고 캬, 캬, 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서, 다음으로는 어떤 기억이 떠올라 명월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전에 이방의 딸을 해하려 했던 귀물을 처리하려 했을 때 나타났던 바로 그 고양이였다. 그리고 명월은, 그 고양이가 눈 깜박이는 사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떠올렸다. 바로 그 망할 장인 놈으로 변신했던 거다.

이놈이 하다하다 못해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는구나 싶었던 명월은 세게 베개를 휘둘렀다. 그 순간 내내 잘 자고 있던 고양이가 번쩍 눈을 뜨더니 명월이 휘두르는 베개를 피해서 옆으로 데구르르 굴러갔다. 덩치가 있는 모습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그래서일까. 제대로 한 방 먹이지 못했다는 분노를 느끼며 명월은 베개를 든 채로 놈의 뒤를 쫓았다.

“거기 멈추지 못 해?! 내 이번에야말로 네놈을 가만 두지 않겠다!”

사람 모습으로 있을 땐 쉽사리 덤빌 수 없었지만, 저런 모습이라면 말은 달라진다. 어찌어찌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든 명월은 눈에 힘을 준 채로 고양이를 쫓아갔다. 하지만 고양이는 무척 날랬다. 휘두르는 베개를 다 피하고, 명월이 날리는 발차기도 죄다 피한다. 그러는 동안 장에 올려 둔 물건이나 책들이 베개에 맞아서 요란하게 떨어졌다.

방이 엉망이 되어 간다는 걸 염두하지 않은 채로, 명월은 미친 것처럼 베개를 휘둘러댔다. 그 현란한 실력에도 고양이는 특유의 졸린 얼굴로 명월을 주시하면서 모든 공격을 피했다.

그러다보니 열 받는 건 명월뿐이었다.

“……이 망할 놈이―!”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명월은 베개를 단단히 쥔 채로 있는 힘껏 앞으로 던졌다. 그러자 공중에 떠올라 있던 고양이가 날아온 베개를 끌어안은 채로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고양이의 등에 부딪친 분합문이 활짝 열리면서, 베개와 한 몸이 된 고양이가 대청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러곤 베개를 놓고 마당 쪽으로 달려가는 걸 본 명월이 이를 갈면서 뒤를 쫓았다.

“거기 멈추지 못 해?!”

녀석을 혼내 주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반드시 붙잡아야 했기 때문에 명월은 바로 놈의 뒤를 쫓았다. 대청 위로 뛰어나온 명월은 마당 가운데에 앉아 있는 고양이를 발견하곤 그리로 손을 뻗었다.

“너, 거기 그대로 가만히 있어! 알았냐?!”

소리를 침과 동시에 마당으로 뛰어 내려오려는데, 뒤쪽의 대문을 열고 복운이 나타났다. 뭔가를 찾는 듯 주변을 기웃거리던 복운은 마당에 앉아 앞발을 핥는 고양이를 보곤 환한 얼굴로 양팔을 벌리며 달려왔다.

“아이고, 나비야. 여기에 있었구나.”

살살 녹을 것 같은 목소리로 그리 말한 복운은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것 같은 모습으로 달려와 하얀 고양이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런 복운을 보나 싶던 고양이가 그 품으로 뛰어들자, 복운이 양팔로 끌어안고는 고개를 들었다.

고양이를 보고 헤실거리고 웃던 얼굴은, 바로 코앞에 서선 씩씩거리는 명월을 보는 순간 달라졌다. 왜 또 이러나 싶은 얼굴로 복운이 물었다.

“사또, 왜 맨발로 마당에 나와 계십니까?”

그러는 복운이야말로 그 요망한 걸 왜 끌어안고 나비라 부르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명월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앞으로 팔을 뻗었다.

“지금 당장 그 녀석을 이리로 내놔.”

명월의 태도와 모습에서 이상함을 감지했던 것일까. 안색을 굳힌 복운은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로 슬그머니 일어나 뒷걸음질을 쳤다.

“왜 그러십니까? 이건 제 고양이입니다. 나비라고 이름까지 붙였습니다.”

“나비?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그건 고양이가 아니야. 정체가 달리 있단 말이야.”

“고양이를 두고 고양이가 아니라고 하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정체니 뭐니, 그런 건 모릅니다. 이 아이는 제 고양이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복운은 더 세게 나비를 끌어안으면서 아예 대문 사이에 서 있었다. 여차 하면 바로 튈 것 같은 모습에 명월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 복운이 저 요망한 것에 홀려서 저런다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면 복운이나, 자신에게 좋을 일 하나 없을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 명월은 복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녀석의 진짜 모습은 고양이가 아니라 요물이다. 백호인지 뭔지, 그런 이름도 붙여 있단 말이야. 그것이 얼마나 몹쓸 놈인지 알기나 하느냐. 그 녀석이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를 안다면 너는 결코 그 녀석을 품에 안고 있지 않을 거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복운의 큰소리에 앞으로 걸어가던 명월이 멈춰 섰다.

이런 식으로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던 복운이었다. 그러하니만큼 명월은 지금 자신이 당한 일을 믿을 수 없어, 얼어붙었다. 그러는 동안 나비를 오른쪽 어깨에 걸친 채로 복운이 소리쳤다.

“사또께서도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니 저도 제 마음대로 하게 그냥 놔두십시오! 이 아이는 제 나비입니다! 사또께서 절 두고 여기저기 다니시는 동안, 저도 이 아이랑 같이 있으면서 잘 키워 볼 겁니다! 그러니 저한테서 이 아이를 빼앗아갈 생각일랑은 아예 하지도 마십시오!”

대문 밖으로 넘어간 복운은 그대로 달려가기 전에 명월을 노려봤다.

“호란의 호접화나 만나러 가시란 말입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복운은 나비를 안은 채로 쌩하니 달려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복운과 달리 명월은 여전히 앞으로 팔을 내민 채였다.

아침부터 이 무슨 난리인가 싶었다. 가뜩이나 머리가 무겁고 정신없어 죽겠는데, 복운이 한 행동 때문에 더더욱 정신이 사나웠다.

“……여기서 왜 호접화가 나와.”

중얼거리던 명월의 눈으로 점점 힘이 들어갔다.

저건 고양이가 아니라 요물이었다. 그 망할 백호인지, 장인인지, 뭔지 하는 놈이었다. 전에 고양이에서 커다란 덩치로 변하는 걸 이 눈으로 똑똑히 본…….

“……어?”

이상한 소리를 낸 명월은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담벼락 위로 올라가는 고양이를 붙잡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그 고양이가 앞으로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하얀 무언가가 시야를 가득 가렸다. 그래서 그때 고양이가 정말로 그놈으로 변한 것인지, 아니면 고양이 앞으로 그놈이 나타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잠깐 든 그 생각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명월은 한참 후에 재차 어, 하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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