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이름은 화소군. 몽골인 아버지와 조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나고 자란 땅은 청.
13세에 조선으로 넘어와 장사에 손을 댄 후부터 바로 큰 성공을 거두어서 지금은 도성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거상. 사람들이 흔히들 손에 넣어서 다루는 물건 외에, 희소성이 높고 보통 사람들은 구경도 할 수 없는 고가의 물건을 은밀하게 거래함으로 해서 생기는 차액이 상상을 초월함. 자산으로만 따지면 도성 땅을 전부 사 들일 수 있을 정도임.>
거기까지 읽은 후에 화소군의 뒷배경이 되어 주는 인물들에 대한 명단을 확인하던 명월은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라면 조선을 쥐고 흔들어도 되겠군.”
위험한 발언이었지만, 그만큼 화소군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거다.
거대한 돈이 굴러다니면 자연스럽게 그리로 권력이 몰려들게 된다.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거다. 그 관계 속에 아버지는 끼어 있지 않았으면 싶지만, 쉽지 않은 일이겠지. 오랫동안 높은 관직에 몸을 담고 있었다면 자연스럽게 청렴결백과 멀어지는 일이니.
거기까지 생각한 명월은 책 사이에 낀 종이를 반으로 접어선 품에 넣었다. 고개를 들자 책이 쌓여 있는 건너편에 서 있는 이방이 보였다.
“화소군이라는 자가 평범한 장사치는 아니라는 거냐.”
그 말에 이방은 주변을 살피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높은 관직에 있는 몇몇 분들과는 직접적으로 줄이 닿아 있을 겁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당장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돈독할까.”
“이만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건 그가 단순히 장사만 했기 때문이 아니겠지요. 줄을 대준다고는 하나 그쪽으로 많은 투자금이 갔을 겁니다. 동시에 그들의 약점 또한 쥐고 있겠지요. 화소군의 뒷덜미가 잡히거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들 또한 위험해지게 될 테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명하려 들 겁니다.”
이방의 명쾌한 설명에 명월은 감탄을 했다.
“자네 정말로 머리가 좋군.”
“뻔한 세상 돌아가는 이치입니다. 사또께서도 알고 계셔야 합니다.”
조심스러운 충고를 이해한 건지 모르겠으나 일단 명월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이방은 바로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화소군이라는 자는 친하게 지내긴 위험하나, 안면을 익히고 있으면 나쁠 게 없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시면서 친분을 유지하시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겁니다.”
“그자가 내 약점이라도 쥐면 어쩌려고?”
“그건 곤란하지요.”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떠름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바로 장사하는 놈들이었다. 눈 뜨고 있어도 코를 베어 갈 그런 놈들하고는 얽히고 싶지 않았던 명월이 책을 내려놨다.
“알아낸 사항들이 이뿐인가.”
“더 깊게 파고들 순 없었습니다. 더 알아내려 했다간 분명 덜미가 잡혔겠지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명월은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옆으로 느리게 움직이다가 책에 적힌 내용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어찌 알아내는 건가?”
“장사를 하는 이들 중에서 이쪽 바닥에 훤한 자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장사를 했으니 그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 수 있지요. 그리고 화소군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면, 이건 기본적으로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그야말로 수박 겉껍질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대단하고 위험할 수 있고, 반대로 속 빈 강정일 수도 있지요.”
“내 보기엔 이 사내는 전자일 것 같은데.”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속 빈 강정이라는 건, 개인적인 바람이 담긴 말일 뿐이었다.
처음 명월이 화소군의 이름을 꺼내서 알아봐 달라 했을 때 이방은 염려스러웠다. 그래도 명월이 시킨 일이라서 아는 사람을 통해 이런저런 정보를 캐내긴 했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알아본 것 때문에 괜히 또 문제가 발생하는 건 아닐까 싶었던 거다.
“자네 딸은 요즘 어떤가?”
다른 생각을 하던 이방은 명월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조금씩이나마 바깥으로 산책을 다니고 있습니다. 전에 챙겨 주신 약재를 달여 먹였더니 더 건강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모로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또.”
“완전히 다 건강해지면 그땐 어찌할 건가. 이 마을 안에서 계속 살 수 있겠나?”
“……그건 차차 생각해 보려 합니다.”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지. 그 전에는 바깥에 말이 나가지 않도록 하게.”
명월의 말에 이방의 굳어 있던 표정이 부드럽게 풀린다. 안 그래도 한 번쯤 의논을 하고 싶었는데 명월이 먼저 말을 꺼내니 그게 고맙다.
그렇다고 대놓고 좋은 척을 할 수는 없었던 이방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때 바깥에서 사또,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으로 좀 나와 보십시오.”
호방의 목소리였다. 평소에도 호들갑을 잘 떨긴 하지만, 이번에는 목소리가 유난히 크다. 무슨 일인가 싶었던 이방이 먼저 움직이는 걸 본 명월도 몸을 돌렸다.
* * *
관으로 들어오는 외문 앞으로 커다란 수레가 세 대가량 놓여 있고, 그곳에는 상자와 비단 등이 잔뜩 올려져 있었다. 언뜻 보기만 해도 대단한 광경이었기에 관아 앞을 지나치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호방과 이방도 마찬가지였다. 호방이 설명하지 않아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 수 있었던 이방은 마침 이리로 나오는 명월을 돌아봤다.
“사또. 바깥을 보십시오.”
이방이 그리 말하지 않아도 이미 모든 게 보였다.
명월은 이방을 지나쳐 계단 위에 서선 아래를 살폈다. 수레와 그 위에 쌓인 짐을 확인한 그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기다렸다는 듯 옆에 붙은 호방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고맙게도 화소군 행수가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호방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레를 끌고 온 사내가 명월 앞에 섰다. 양손을 모은 그는 고개를 숙이곤 지극히 예의바른 태도를 취했다.
“호방 나으리께서 말씀하신대로 저희 행수 어르신께서 사또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가 왜 내게 선물을 보낸단 말인가.”
묻는 명월의 목소리가 낮았다.
지금 명월의 기분이 별로라는 걸 감지한 이방은 안색을 굳혔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걸 모르는 사내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사또께서 오신 지 오래 되셨는데도 바로 찾아뵙지 못한 데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써 드리는 선물이니, 부담 없이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고작 한 고을의 사또일 뿐이었다. 도성의 높은 분들하고 줄이 닿아 있는 거상이 신경 쓸 만한 입장이 못 되었다. 아니면, 이 정도 챙겨 줄 테니 무슨 일이 생겨도 대충 눈을 감고 넘어가 달라는 의미인가.
말대로 그냥 새로 온 사또에게 주는 선물일 수도 있었다. 대단한 분이니까 수레 세 개 정도의 물건은 우스운 거다. 비뚤게 생각하지 말고 그리 기분 좋게 받아들여도 괜찮겠지만, 도저히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명월은 입을 다문 채로 조용히 있었고, 그걸 본 호방이 앞으로 나섰다.
“이럴 게 아니라 어서 수레를 안으로 들여야―.”
“자네는 입 다물고 조용히 있게.”
이방은 나서려는 호방을 막고 그에게 매서운 눈빛을 던졌다.
명월이 선물을 들고 온 사람을 너무 세워 두는 것 같아서 대신 나서서 해결해 주고자 했던 것뿐인데 왜 저렇게 보는 건가 싶었던 호방의 얼굴이 굳어진다. 인상을 쓰는 그였지만, 이방은 재차 고개를 저었다.
나서지 말게, 라는 경고의 의미를 모를 정도로 호방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쯤 되자 설마 싶은 기분이 든 호방은 앞에 선 명월을 바라봤다.
뒷짐을 지고 있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거절하진 않겠지.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명월이 입을 열었다.
“다 필요 없으니 가지고 가게.”
“아이고, 사또!”
명월의 말과 동시에 절로 곡소리가 나온다.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싶었던 호방이 달려 나가려 들자 양쪽에서 뻗어진 손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한쪽은 누군지 알지만 다른 쪽은 뭔가 싶어 오른쪽을 살피자 복운이 서 있었다. 눈에 힘을 주고 험악한 표정을 지은 복운은 ‘그쪽은 나서지 마쇼.’라는 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제는 이방뿐만이 아니라 이런 종놈마저도 자신을 괄시하는구나 싶었던 호방은 기가 차서 크게 입을 벌렸다. 무척 억울해하는 그였으나, 그러는 동안에도 명월의 말은 계속되었다.
“난 이 고을 사람들을 보살피고, 범죄 행위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러 왔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대놓고 뇌물을 받아먹을 정도로 신경줄이 굵지 않으니 다시 가지고 가게. 선물 대신에 행수의 마음만 받도록 하겠네.”
사내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걸 끌고 오면 다들 맨발로 뛰어나와 받아먹기에 급급했지 이런 식으로 문전박대를 당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명월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닐까 싶었으나 단호한 얼굴을 보자니 그도 아니었다.
사내는 명월 뒤에 서 있는 호방을 봤지만, 그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양손을 움켜쥔 사내가 재차 말을 꺼냈다.
“여기까지 힘들게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어찌 보내려 하십니까. 제 행수 나으리의 얼굴을 보셔서라도 받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고작 이 정도 물건을 받는다 한들, 사또의 청렴함에 누가 되진 않을 것입니다.”
“뒷돈을 받아먹으면 한 번 더 신경 쓰고 돌아보게 되는 게 사람 마음이라네. 나도 보통 사람이니, 수레 3개나 되는 물건을 받아먹으면 앞으로 자네 행수 얼굴을 볼 때마다 굽실거려야 할 게 아닌가.”
명월의 말에 사내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라고 반박할 수 없었던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해댔고, 쯧쯧―하고 혀를 찬 명월이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명월을 본 사내가 당황해선 앞으로 손을 뻗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허, 어딜 들어오려는 거요!”
앞으로 나서 사내를 막은 복운은 눈에 힘을 주고 외쳤다.
“그런 물건 없어도 우리 사또께선 배곯을 일 없으니 당장 물러나시오!”
이 종놈은 또 뭔가 싶었던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복운은 한 번 더 매서운 눈빛을 던지곤 명월을 따라 냉큼 그 뒤를 쫓아갔다.
* * *
화소군의 집에서 돌아온 게 바로 어제였다. 그런데 다음날 저런 선물을 보내다니. 과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직 그 사내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선물을 보내면 자신이 받지 않을 거란 걸 알고는 있을 거다. 빤히 선물이 되돌아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보낸 저의를 알 수가 없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점점 걸음이 빨라지는 명월을 간신히 뒤쫓아 온 호방은 헐떡거리며 말했다.
“사또, 그러시면 어찌 하십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화소군 행수의 선물인데―.”
명월은 고개를 돌려 심드렁한 시선을 던졌다.
“그리도 탐이 나면 자네가 대신 받든가. 대신, 그날 이후로 자네는 옷을 벗어야 할 거네.”
엄지를 세워선 본인 목을 긋는 흉내를 낸 명월이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곤 더 빨리 걸어가자 호방은 거기서 멈추었다.
말을 너무 무섭게 한다면서 멍하니 바라보는 호방의 옆으로 이방과 복운이 지나쳐간다. 그들이 명월을 쫓아서 서둘러 걸어가는 걸 본 호방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명월은 처소로 와선 바로 대청에 앉았다. 고개를 들자 바로 앞에 이방과 복운이 서 있었다. 양손을 마주 잡은 채로 나란히 서 있는 그 모습이 우습다. 왜 저러고 있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피식, 거리면서 웃었다.
“둘 다 지금 뭘 하는 건가. 나한테 재롱이라도 피워 볼 셈인가?”
“사또께서 원하시면 물구나무서기도 할 수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 복운은 소매를 걷어붙였다. 명월이 하라고 하기도 전에 당장 물구나무를 설 것 같은 모습에 이방이 당황해선 옷을 붙잡았다.
“자네, 뭘 하려는 건가.”
만약 복운이 물구나무를 서면 자신도 그걸 해야 하는 건가 싶었던 이방의 얼굴색이 굳는다. 하지만 복운은 왜 붙잡는 거냐는 듯 인상을 쓰며 그를 보다가 손을 뿌리쳤다. 그러곤 다시 명월을 봤고,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걸 보곤 주춤했다.
편안한 모습으로 저리 웃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내내 명월의 기분이 언짢은 것 같아서 그게 신경 쓰였는데 저리 웃고 있으니 보기가 좋다.
그때 갑자기 명월의 등 뒤로 하얀 뭔가가 달려와 그를 덮쳤다.
“억?!”
“사또!”
방심하고 있었던 명월은 묵직한 게 등에 매달리자 바로 몸을 숙이면서 신음을 흘렸고, 복운과 이방이 달려왔다.
명월의 등에 달라붙어 그의 어깨에 양손을 올리고 있는 건 하얀 고양이였다. 당황해서 달려온 복운은 막상 그걸 확인하곤 움찔했지만, 이방은 아니었다.
그는 언성을 높였다.
“이 망할 고양이가 지금 누구에게 해를 가하려 하는 것이더냐!”
이방의 외침에 고개를 숙인 채로 있던 명월은 뒤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푹신한 게 잡힌다. 망설일 것 없이 손에 힘을 주자 그게 앞으로 당겨진다. 갑자기 달려들어서 끈질기게 굴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간단하게 떨어져서 당황스러웠다. 일단 무거운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명월은 허벅지 위에 벌러덩 누운 채로 양손을 가슴에 올리고 있는 고양이를 내려다봤다.
졸린 듯 눈을 반쯤 뜨고 있는 고양이는 거대했다. 그래서 무거웠나.
“이 녀석이…….”
왜 갑자기 달려든 건지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왜 뒤에서 튀어나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혹 자신이 돌아오는 걸 기다리고 있다가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닐까 싶었던 명월의 손으로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간다.
무겁긴 더럽게 무거워서 벌써부터 허벅지가 아파지는 걸 느끼며 명월은 당장 고양이를 던져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복운이 냉큼 나섰다.
“사또, 죄송합니다. 제가 나중에 잘 교육을 시킬 테니―. 어?”
고양이는 복운이 붙잡으려 하자 당장 명월의 허벅지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곤 팔짝팔짝 뛰어서 대문 밖으로 넘어가 버리자 명월은 허탈한 듯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냈다.
“저 녀석은 대체 정체가 뭐야?”
가능한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왜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온 힘을 다해서 달려들다니. 순간적이긴 했지만, 부딪친 곳이 꽤나 아프다면서 명월은 오른쪽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다가 문득, 묘하게 그 부근이 시원하다는 걸 느꼈다. 딱히 안 좋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왜 근육이 풀리는 느낌이 드는 건가 싶어서 눈을 내리뜨자 복운이 안절부절못한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가 안 좋으신 겁니까?”
“애초에 자네가 그 고양이 간수를 잘 했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게 아닌가.”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이방이 한소리 했다.
말을 하면서도 복운에게 눈을 흘기는 걸 잊지 않았다. 이 모든 게 전부 그 탓이라는 양 밉게 눈을 흘기니 복운도 살짝 울컥한다. 왜 저리 보는 건가 싶으면서도 일단은 명월의 상태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던 그는 허리를 굽혀 명월의 안색을 살폈다.
전립을 쓰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아 아예 쪼그리고 앉으려는데 갑자기 명월이 일어섰다. 움찔한 복운이 뒤로 물러나자 명월은 어깨를 붙잡고는 느리게 오른팔을 돌려보았다. 그렇게 몇 번 해 보던 그는 한숨을 쉬면서 복운을 쳐다봤다.
눈에 보일 정도로 움찔하는 복운의 모습에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잘못은 고양이가 했는데 네가 왜 매번 죄 지은 얼굴인 거냐.”
“일단은 나비의 주인이 저이고, 놈이 버릇없는 짓을 하는 게 제 탓인 것 같아서―.”
“그래 봤자 짐승이다. 버릇이라는 게 뭔지도 모를 거다.”
명월의 말에 복운은 입을 다물었다. 면구스러운 양 뒷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에 한숨을 쉰 명월이 이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보다, 이곳에 거지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나?”
“거지라니요? 어떤 거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전에 숲에서 어린 거지를 만났다. 급한 대로 데리고 와서 밥을 먹이고 보냈는데 그날 이후로 찾아오지 않는 게 이상하군.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명월의 말에 복운은 당장 앞으로 고개를 길게 뺐다.
“얼마 전에 물에 빠졌다가 나온 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냥 제가 나가서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물에 빠졌어도 별일 없이 무사히 돌아오지 않았더냐. 그리고 지금은 한곳에만 있으면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다. 이럴 땐 무조건 밖으로 나가서 여기저기 다니는 게 제일이다.”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면 생각이 막히지만,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떠오르는 게 있었다. 다니면서 저번에 내린 비 때문에 피해를 입은 곳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해 볼 셈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명월이었지만, 복운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굳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게 느껴졌음에도 명월은 이방을 쳐다봤다. 이곳 지리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바로 그였다. 그가 하는 말에 따라서 다음 갈 곳이 정해지는 거였다.
“죄송합니다만 사또, 이 마을에는 거지가 없습니다.”
“거지가 없다니?”
그러면 전에 자신이 만난 건 거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이상한 말을 들은 양 굳어지는 명월의 얼굴에 이방은 바로 말했다.
“거지는 없고, 생활이 어려워지거나 갑자기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모아서 함께 지내도록 하는 곳은 있습니다.”
“……그곳에서 지내는 아이들이 배를 곯거나 하나?”
“그럴 리가 없지요. 관아에서 매달 돈을 보내 아이들이 먹을 음식과 입을 옷, 그 외에도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줍니다. 그건 전에 정리된 책자를 올려 드렸는데―.”
그런 게 있었던가. 이방이 헛말을 할 리가 없으니, 지금 하는 말이 참일 거다. 그런가. 고아들을 모아서 키우는 곳이 달리 있었던가. 하지만 전에 만난 그 아이는 영락없이 거지 꼴이었는데―.
혹, 그럴싸하게 꾸며 놓고는 아이들을 엉망으로 데리고 있는 게 아닐까. 이방이나 다른 사람들이 찾아갈 때에만 좀 그럴싸하게 주변을 꾸며 두는 걸지도 모른다. 좋은 일을 하는 장소이니 쓸데없는 의심을 하지 않는 편이 낫겠지만,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던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지금 바로 그곳으로 가지.”
“지금 바로 말입니까?”
의혹이 있을 때 바로 찾아가야 뒤탈이 없는 법이었다.
되묻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명월은 복운을 쳐다봤다.
“난 지금부터 그리로 갈 건데, 넌 어찌할 거냐.”
“저도 당연히 따라야지요.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거머리처럼 사또 옆에 붙어서 지낼 거라니까요.”
눈을 부라리며 하는 말이 영 그렇다. 마음에 차는 말이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혀를 차게 되는 명월이었으나, 복운은 떳떳했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눈을 본 명월은 한숨을 쉬면서 이방을 봤다.
“혹, 자네 오늘 일이 바쁜 게 아닌가.”
“아닙니다. 하지만 관아하곤 멀리 떨어져 있으니 말을 타고 이동하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그래. 그렇게 하지. 그리고 그쪽엔 내가 간다는 언질은 넣어 두지 말게.”
원래 감사라는 건 불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법이니.
명월의 말에 이방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명월이 앞장서고, 그 뒤로 복운과 이방이 따른다. 졸졸졸 거리면서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넘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조금 전까지 그들이 있던 대청 아래쪽에서 나비가 나왔다.
특유의 졸린 눈을 한 채로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살피던 나비는 고개를 숙이곤 크게 입을 벌렸다. 그러자 그 입 밖으로 검은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바닥에 부딪친 그것은 당장 다른 곳으로 날아가려 했으나, 그 전에 나비의 앞발이 잽싸게 움직여선 그걸 후려쳤다. 그러자 마당으로 튀어나간 게 파르르, 몸을 떤다. 나비는 그리로 몸을 날려 앞발로 밟고 잘근잘근 눌렀다.
그렇게 얼마나 했을까.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덩어리가 사라졌다. 역한 냄새와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확인한 나비가 고개를 숙이곤 코를 씰룩거렸다. 그리고 바로 고개를 돌리더니 켈록 거리면서 기침을 한다.
괜히 냄새를 맡았다면서 인상을 쓰면서 몸을 떤 나비는 다시 대청 위로 기어 올라갔다.
조금 전까지 명월이 앉아 있던 곳에 자리를 잡은 나비는 앞발을 혀로 핥으면서, 활짝 열린 대문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하염없이 대문을 바라보다가 크게 하품을 하고는 앞으로 다소곳이 모은 앞발 위로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눈을 감은 나비는 색색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잠들었다.
* * *
말을 끌고 밖으로 나왔을 때에도 수레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사람들 지나치는 길목 가운데에 당당히 있기는 조금 그랬던지 한쪽으로 물러서 있다가 명월이 나타나자 간청하듯 올려다봤지만, 그는 본 체도 하지 않았다. 명월은 복운이 잡고 있는 말에 올라타선 이방이 말에 오르는 걸 확인했다.
주변 눈치를 보는 것 같더니 기어이 이방 뒤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는 복운의 행동에 실소를 흘린 그는 말의 옆구리를 찼다. 처음에는 명월이 앞서 나갔지만, 금방 이방이 앞서고, 그들은 길가를 지나치는 사람들을 피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말을 몰면서도 지금 명월이 살피는 건 마을 내부의 모습이었다. 혹여라도 피해가 컸다면 그에 대한 대비책도 필요했던 거다. 하지만 며칠 사이에 정리를 싹 한 건지 거리는 깔끔했다. 다니는 사람들이 인사를 하는 걸 지나치면서 명월은 말의 속도를 서서히 높였다.
잠시 후 그들은 마을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낡지만 깔끔한 어떤 가옥에 도착했다. 돌계단이 있는 문 아래쪽으로 어린애 몇이 모여서 쪼그리고 앉아 놀고 있었다.
명월이 먼저 발견하긴 했지만, 아이들도 달려오는 말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그리로 손을 뻗었다. 그걸 따라 다른 아이들도 고개를 들면서 손가락질을 하는 걸 본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명월은 말의 속도를 늦추고는 가볍게 내려왔다. 이방의 말도 멈추고 거기서 복운이 내리자 명월은 고삐를 그쪽으로 넘기곤 아이들에게 걸어갔다.
다가오는 명월을 본 아이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을 확인한 그는 일단 뒷짐을 지었다. 아이들은 바닥에 그림을 그리면서 놀고 있었다.
바닥에 대충 놓여 있는 나무 막대와 돌을 확인하고 난 후, 옷이나 아이들 얼굴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 썩 좋은 옷차림은 아니었지만 엉성한 것도 아니었다. 없는 살림에 나름 신경 써서 잘 입혀 왔다는 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래서일까. 괜한 걱정이 사그라드는 걸 느끼며 명월이 물었다.
“너희들은 여기서 사는 거냐?”
“네. 우리는 여기서 살아요. 그런데 사또세요?”
그건 보면 아는 거였다. 지금도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건 분명 입고 있는 옷 때문일 거다.
굉장한 걸 보는 것처럼 명월을 올려다보던 아이들 중에서 가장 큰 애가 물었다.
“남자예요? 여자예요?”
순수한 호기심만으로 묻는 말에 명월은 차분히 대꾸했다.
“딱 보면 알잖느냐? 사내다.”
“딱 보면 남장한 여자 같아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명월의 웃음이 흔들린다.
물론 곱상한 얼굴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남장한 여자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어린애들이라 보는 눈들이 없는 거겠거니 싶었던 명월은 화를 내기보단 차분하게 반응하려 했고, 그때 뒤에서 다가온 이방이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서 엄마를 불러오너라.”
그제야 이방을 발견한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진다. 오셨어요, 라고 인사하나 싶더니 당장 계단을 뛰어올라간다.
어린애들이 올라가기엔 힘들 것 같은 계단이었지만, 용케도 엎드려선 기어 올라가는 걸 보고 있노라니 대문을 열자마자 아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엄마!” 하고 씩씩하게 외친다.
그걸 들은 명월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자 이방이 설명해 주었다.
“여기서 지내는 아이들은 보살피는 여자를 자연스럽게 엄마라고 부릅니다.”
“그건 좋군.”
친어미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렇게 부르는 동안 정이 쌓이는 게 아니겠는가.
딱 거기까지 말하고 만 명월은 뒷짐을 진 채로 계단을 올라갔다.
* * *
이가 빠진 낮은 상에 올려진 건 시루떡 몇 개와 막걸리 병이었다. 그 앞에 사발이 놓여 있긴 했지만, 아직 술을 따르지 않았던 명월은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나이가 꽤 있는 여인은 희끗한 머리를 단정하게 쪽 지고는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다. 성품이 좋아 보이는 그녀는 아까부터 명월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내내 눈을 내리뜬 채로 있었다.
실상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앉기도 힘들 거다. 얼굴을 보자마자 기함하듯 놀란 그녀는 당황해선 ‘오실 줄 모르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는데―.’라고 말하고는 마당에서 자유롭게 놀거나 마루에 누워서 자고 있는 아이들을 토닥이며 방으로 보내려 했다.
급할수록 그 사람의 성품이 나오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여인은 아이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하나하나 살뜰하게 챙겨 주었다. 때문에 명월은 자신이 괜한 생각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이방 한소규가 나서서 여인을 차분하게 해 주었다. 그냥 지나치는 길에 얼굴만 보러 온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에도 여인의 굳은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당장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그녀는 급한 대로 음식을 준비했고, 그게 바로 시루떡과 막걸리 한 병이었다.
아마도 이것도 여기선 귀한 것일 터였다. 그러니 아이들이 마당에 쪼르륵 선 채로 시루떡을 호시탐탐 살피는 게 아니겠는가. 처음에는 명월을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여인도 아이들이 방에 들어가지 않고 마당에 나와 있으니 그리로 손짓했다. 서 있지만 말고 안에 들어가 있으라는 거였다. 그럼에도 꼼짝도 하지 않은 한 아이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시루떡이다! 팥고물 묻은 거!”
“우리는 그냥 아무것도 없는 가래떡이나 먹는데!”
“한입만 먹어 봤으면 좋겠다!”
기다렸다는 양 한마디씩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여인의 얼굴이 붉어진다.
결국 참다 못한 그녀는 일어나 아이들에게 가려 했고, 그때 명월이 나섰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게.”
명월의 말에 여인은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원래는 멀찍이 떨어져 서 있는 복운이나 이방처럼 저곳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명월이 앞으로 와서 앉으라 해서 지금 이곳에 있는 건데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어디 가서 사또와 얼굴을 마주하고 앉았다 말해도 다들 믿어 주지 않을 거라면서 여인은 손을 들어선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런 여인의 긴장한 상태를 알 거 같았던 명월은 아이들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로 와라.”
갑작스러운 부름에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부르나 싶으면서 동시에 엄마의 눈치가 보였다. 사또 앞에선 함부로 행동해선 안 된다며, 지금도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면서 가까이 오지 말라 했지만 시루떡이 너무도 탐났다. 한입만 먹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에 앞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한 아이가 움직이자 다른 아이들도 우르르 몰려왔고, 그걸 본 여인은 고개를 떨구었다. 명월은 가장 먼저 앞으로 다가온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이가 몇이냐.”
“8살이요.”
“이름은 뭐고?”
“강재식이요.”
“그래. 네가 여기서 가장 나이가 많은 것 같은데, 첫째냐?”
“아니요, 제일 큰 형님들은 공부하러 가셨어요.”
여기서 더 큰 아이들은 공부를 하는 건가. 다음에 자리에 앉아서 이방이 올린 책들을 일일이 확인해 봐야겠군. 물으면 이방이 전부 다 대답을 해 주겠지만, 매번 그런 식이면 그에게 미안했다.
아이의 머리를 한 번 더 토닥인 명월은 시루떡을 반으로 갈라서 아이에게 한덩이를 내밀었다. 그 순간 눈이 크게 떠진 아이가 명월과 엄마의 눈치를 살피다 그걸 냉큼 받아 들었다. 한 아이가 떡을 받아 가자 다른 아이들도 기다렸다는 양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도요!”
“저도요!”
“그래, 기다려 봐라.”
그리 말한 명월은 세 장의 시루떡을 모두 반으로 갈라서 여섯 아이들에게 나눠 주었다. 가장 작은 아이도 시루떡 한 덩이를 받아 들곤 좋아서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받자마자 떡을 뜯어 먹는 아이들의 모습에 여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이고, 사또. 그건 사또 드시라고 내 온 건데―.”
“난 방금 뭘 먹고 와서 괜찮네. 떡은 나보다 아이들이 더 좋아하는 것 같으니, 아이들이 먹는 게 낫겠지.”
그리 말을 나누는 동안에 아이들은 떡을 들고 건물 뒤로 돌아갔다. 조금 전에는 다른 곳에 가라 해도 꼼짝도 하지 않더니만 지금은 순식간에 사리지고 만다. 여인은 민망해하며 말했다.
“충분히 먹인다고 생각을 하는데도 한창 자라는 나이라 그런지 뒤돌아서면 배가 고프다고 합니다. 추한 모습을 보인 것 같아서 송구합니다.”
“다 이해하니 민망해할 필요 없네. 아이들이 많은데 혼자서 힘들겠군.”
“아닙니다. 큰 아이들이 도와주기도 하고, 종종 도움을 주러 오시는 분들도 계시죠. 그런 감사한 분들도 계시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지요. 거기다 사또께서도 도와주시고 말입니다.”
도와준 건 자신이 아니라, 관아에서 그 전부터 해 오던 일이었다.
원래 이런 곳은 신경 쓰지 않으면 그걸로 끝인 장소였다. 하지만 이방이 계속 신경 썼기 때문에 적은 돈이나마 이리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조금 더 신경 써야겠군. 혼자 반성을 하는 명월을 바라보던 여인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저희가 먼저 찾아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어린애들이 이렇게나 많으니 쉽게 움직일 수 없었겠지. 그걸 모르지 않으니 신경 쓸 거 없네. 그런데 여기에 있는 어린애들은 여섯이 다인가?”
“큰 아이가 셋이고, 어린애가 여섯이지요. 전부 아홉뿐입니다.”
“저 아이들 외에 다른 아이는 없다고?”
“그렇습니다. 달리 찾으시는 아이가 있으신가요?”
자꾸만 물어보는 건 달리 찾는 아이가 있기 때문일 거다. 여인의 추측은 들어맞는 거였지만, 앞서 이곳에 있는 건 아홉의 아이들뿐이라는 걸 들었다. 마당에 모여 있던 아이들 중에선 명월이 찾고자 하는 아이가 없었으나 혹시 모르는 일인지라 물어봤다.
“이만한 키에 얼굴이 귀엽게 생겼지만, 옷이 지저분하고―.”
이 다음의 말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망설이다가 눈 딱 감고 말했다.
“보살핌을 잘 받지 못한 것 같은 아이였는데…….”
“이 고을에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라 하면 저희 집 아이들뿐이지요. 제가 암만 노력을 한다 해도 친부모가 아니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가 아이를 대하거나, 아이들이 그녀를 따르는 것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역시나 자신이 괜한 곳을 찾아온 것 같아 무거운 한숨을 쉰 명월은 마당을 내다봤다. 최대한 깔끔하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려 노력은 한 것 같은데, 그래도 부족한 구석이 눈에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있던 명월은 복운을 불렀다. 기다렸다는 듯 달려오는 복운에게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나가서 고기 좀 사와라. 애들 좀 먹여야겠다.”
복운은 잠자코 돈주머니를 받았지만, 여인은 아니었다.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듯 그녀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또.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관아에서는 충분히 도움을 주십니다.”
“그건 관아의 도움이지 내 도움이 아니지 않은가. 일주일에 한두 번은 고기를 보낼 테니 아끼지 말고 아이들하고 같이 먹게나.”
말과 동시에 명월은 몸을 일으켰다.
“일부러 차려 준 건데 한 잔도 못 마셔서 미안하군. 이건 다음에 와서 마시겠네.”
명월의 말에도 여인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한 얼굴이었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굳은 채로 있는 동안 복운은 이미 밖으로 나가고 있었고, 이방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선 고개만 끄덕였다. 그냥 사또가 말하는 대로 따르라는 거였다.
여인은 눈물 맺힌 눈으로 명월을 바라봤다.
“일부러 찾아와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네. 자네 같이 좋은 사람을 내 괜히 오해한 것 같으네.”
혹시나 싶어서 찾아왔는데 역시나였다. 애초에 못 믿고 찾아온 부분에 대해선 이쪽이 더 미안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라면서 명월은 주변을 둘러봤다. 뒤쪽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이들하고 이야기 좀 나누고 돌아갈 테니 난 신경 쓰지 말고 자네 일이나 보게.”
이번엔 여인의 대답을 듣지 않고 바로 걸음을 옮겼다.
뒷짐을 진 채로 바로 뒤로 넘어가는 명월을 바라보던 여자는 앞으로 다가온 이방을 바라봤다. 명월이 한 말이 있긴 했지만, 어찌하면 좋을까 싶어서 바라보는 여인을 두고 이방은 웃었다.
“그 정도는 해 주실 수 있는 분이니 마음 쓰지 말고 고기가 오면 넉넉하게 해서 애들에게 먹이게.”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좋아하겠지만, 죄송해서…….”
중얼거린 여인은 뺨에 손을 올렸다. 근심 가득한 얼굴에 이방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곤 명월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시루떡은 어느새 다 먹은 건지 아이들은 뒷마당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명월이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양 그 앞으로 달려온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싸듯 서기만 할 뿐, 말도 못 붙이고 그저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들에 명월의 미소가 짙어진다.
명월은 뒷짐을 진 채로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왜 나를 그렇게 쳐다들 보는 거냐.”
“정말 사또세요?”
“그래. 내가 이번에 여기 새로 온 사또다.”
“혹시 우리 엄마 괴롭히러 온 건 아니죠?”
“…….”
뜨끔하게 하는 말이었다.
애초에 여기에 있는 사람이 아이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찾아온 거였기에 아이들이 하는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냥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한 아이가 말을 꺼낸 아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그러실 만한 분이 아니야. 예쁘잖아. 예쁜 사람들은 착하다고. 초롱이 누나를 봐. 얼마나 좋으냐.”
“초롱이 누나 말은 꺼내지 마. 보고 싶어지잖아.”
“그냥 말이나 해 본 거잖아. 말을 하는 것도 안 되냐?”
아이들은 저들끼리 투닥거렸다. 초롱이라는 낭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구나 싶었던 명월은 그만하라고 말하려 입을 열었고, 그때 한 아이가 뒤를 쳐다봤다.
“초롱이 누나 아빠다!”
그 소리에 명월은 바로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그곳에 서 있는 건 이방이었다.
그제야 명월은 모든 걸 깨닫게 되었다. 여인이 말한, 도와주는 고마운 사람들 중에는 이방의 딸도 있었던 거다. 건강하고 아무 문제가 없을 때에는 종종 이곳을 찾아 아이들을 보살폈으나, 그런 일이 생긴 후부터 찾아올 수 없었던 거다.
지금은 조금씩 건강해지고 있었으나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언제가 되어야지 아이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 확언하기 어려운 상태다. 아이들이 괜히 이방에게 달려가서 이런저런 말을 꺼내면 그의 속만 탈 거다. 그래서 명월은 자연스럽게 다른 말을 꺼냈다.
“너희들 혹시 바깥에서 또래 친구들하고도 어울려 놀기도 하고 그러냐.”
“해가 지기 전까진 바깥에서 놀아도 되니까, 친구들하고 같이 놀아요.”
가장 큰 아이가 대답을 하자 명월은 바로 그쪽으로 시선을 뒀다.
“여기에 있는 동생들 말고도 달리 노는 친구가 있단 말이지?”
“그럼요. 제가 친구가 얼마나 많은데요.”
친구가 많다는 말을 꺼내는 아이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러면 그 친구들 중에서 지저분한 아이는 없는 것이냐. 그러니까, 옷도 지저분하고 머리도 제대로 빗지 않아서 아주 많이 꾀죄죄하게 다니는 아이인데 말이야.”
“우리들도 놀다 보면 해가 저물 즈음에는 엉망이 되는데―.”
“놀다가 지저분해진 거 말고 말이다.”
“으으음.”
입을 다문 아이들은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인상을 쓰며 진지한 척을 하지만,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아이들 중에서 어린애들은 흘러나오는 코를 손으로 닦아 내곤 그대로 명월의 군복을 만지작거렸다.
선명하고 시원해 보이는 파란색이 마음에 든 건지 아예 양손으로 쓰다듬기도 했지만, 명월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가장 어린애와 시선이 부딪쳤다. 고개를 든 아이는 눈을 가늘게 접으면서 바로 헤헤―하고 웃었고, 그걸 본 명월의 입꼬리도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그때 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장에서 이상한 아이를 본 적이 있었어.”
그 말에 명월은 바로 말을 꺼낸 아이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다른 아이가 “맞다.” 라고 중얼거리며 물었다.
“우리가 거지라고 놀린 아이 말이야?”
“아, 맞다. 그런 일이 있었지.”
한 아이가 말을 꺼내자 여기저기서 맞아, 나도 봤어, 같은 대답이 들려왔다.
그 아이가 명월이 찾는 아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명월은 당장 그리로 고개를 내밀면서 관심을 보였다.
“얼마 전에 본 거냐?”
“오늘 아침에 봤어요.”
오늘 아침이라는 말에 명월은 주춤했다. 지금이 점심을 조금 지난 때였다. 아침에 봤다면 지금쯤이면 없을지도 모르지만, 명월은 재차 물었다.
“시장에 있었던 거냐? 어디쯤인지 기억나는 거냐?”
“이상한 냄새가 나는 약재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멍청하게 있었어요. 짚이 쌓인 곳 옆에 그러고 있어서 처음엔 사람인지도 모르고 있다가 깜짝 놀랐어요.”
정말 지저분했으니 아이가 착각을 했어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제야 그 아이를 찾게 되는 구나 싶었던 명월은 당장 뒤를 돌아봤다.
“이방. 지금 바로 가서 그 아이가 아직 그 자리에 있는지를 살펴보게.”
“네. 알겠습니다.”
내내 명월과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를 듣고만 있었던 이방은 바로 움직였다 이방이 급하게 사라지는 걸 보고 있노라니 아래에 서 있던 아이가 옷을 잡아당긴다.
“그 아이는 왜 찾아요? 그 아이도 이리로 오게 되나요?”
보통 부모가 있거나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는 아이라면 그런 모습으로 시장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 있진 않을 터였다. 거기서 어렴풋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파악한 아이가 묻는 말에 명월은 재차 아이들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바깥에서 혼자 생활을 하면서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면, 그 아이도 여기로 와서 엄마와 함께 있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저희들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애 눈이 좀 무서웠어요.”
중얼거린 아이는 손가락 두 개로 본인 눈을 가리키면서 “죽은 생선 눈이랑 똑같았어.” 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의 의미를 명월도 알 것 같았다. 처음 그 아이를 봤을 때 들짐승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작고, 마르고, 지저분하고,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거다.
그때 밥을 먹이고 그냥 보낸 게 내내 후회가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복운을 붙여서 집까지 바래다주는 거였는데―.
여전히 손가락 두 개로 눈을 가리키면서 장난을 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명월은 허리를 세웠다.
“어? 아저씨다?”
아저씨라는 말에 명월은 재차 뒤를 돌아봤다.
별 생각 없이 복운이 벌써 온 건가 싶었던 명월은, 막상 보이는 상대를 확인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망태기 같은 걸 한쪽 어깨에 짊어지고 서 있는 건 바로 백호였다.
백호를 보는 순간 본인의 두 눈을 의심한 명월이었다. 지금 헛것을 보는 게 아닌가 싶어서 눈을 꾸욱 감았다가 떠도 백호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놈의 입술꼬리가 기분 나쁘게 비틀려 올라가는 걸 본 명월은 얼굴을 붉히며 당장 그리로 손가락질을 했다.
“너, 너너너 왜 여기에 있는 거냐?!”
“내, 내내내가 여기에 있는 게 뭐가 이상한 거냐?”
너무 놀라서 저도 모르게 더듬는 걸 고스란히 따라하는 것에 명월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걸 들은 다른 아이들도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놈은 위험했다. 아이들에게 접근하는 걸 막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가장 어린애가 양팔을 벌리며 아저씨, 라면서 달려간다.
명월은 놀라선 급히 아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는 높이 들어올렸다.
“저런 것한테 가면 위험하―.”
위험하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아이들이 우르르 백호 앞에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평온한 얼굴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그동안 건강하게 잘 있었던 거냐.”
가장 큰 아이가 백호의 다리를 끌어안으면서 물었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셨어요? 애들이 다 보고 싶어 했어요.”
“이런저런 할 일이 있었다. 난 너희들하고 달리 바쁜 사람이니까.”
마지막에 바쁜 사람 운운하면서 명월을 흘깃하고 쳐다본 백호는 아래로 팔을 뻗었다. 가만히 서 있는 어린애를 안아 드는 걸 본 명월이 움찔했지만, 정작 그의 품에 안긴 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한 아이가 안기자 사방에서 나도요, 라면서 손을 높이 든다. 엄마하고는 다른, 키가 큰 남자였다. 안기면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재미있었다. 때문에 서로 안아 달라고 아우성인 아이들을 두고 백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 팔은 하나뿐인데 어떻게 너희들을 전부 다 안을 수 있겠냐. 뭐하면 저기 서서 구경하고 있는 사또께 안아 달라고 해 봐라.”
백호의 말에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명월을 올려다봤다.
빤히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에 움찔한 명월은 일단 들고 있던 아이를 고쳐 안으면서 마른침을 삼켰고, 동시에 한 아이가 중얼거렸다.
“허약해 보여서 안기면 안 될 것 같아요.”
한 아이의 말에 명월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아연실색해진 명월을 두고 아이들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곱상하게 생겨서 힘도 없을 것 같아.”
“괜히 안아 달라고 했다가 넘어지면 어떻게 해. 전부 다 다칠 거 아니야.”
“괜히 다른 사람 핑계대지 말고 번갈아 가면서 안아 줘요.”
그리 말한 아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양 위로 높이 손을 뻗자 사내는 혀를 차면서 옆으로 몸을 돌렸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지 말고 좀 떨어져 봐라. 너희가 매달려 있으면 가지고 온 걸 나눠 줄 수가 없잖아.”
사내의 그 말에 아이들의 눈동자가 빛났다.
이번에도 좋은 걸 들고 온 모양이라며 급히 뒤로 물러선 아이들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올려다보는 걸 확인한 백호가 혀를 찼다.
“그렇게 물욕을 가지면 안 된다. 그러다 언젠가 크게 손해 볼 날이 있을 거야.”
나름 충고를 한답시고 꺼낸 말에 여섯 살짜리 아이가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됐고, 선물이나 주세요.”
너무도 당당하게 선물을 요구하는 것에 백호는 기가 차 한숨을 쉬었다.
“어린애들은 당해 낼 수가 없다니까.”
혀를 찬 그는 안아 들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고는 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망태기를 내려선 그걸 풀어헤치는 모습에 움찔한 명월이 당장 그리로 달려갔다.
“기다려! 아이들에게 뭘 주려는 거야?!”
이상한 물건을 주는 거라면 가만 두지 않을 거라며 한마디 하려는데,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버둥거렸다. 내려 달라면서 몸부림을 치자 계속 들고 있을 수가 없었던 명월은 아이를 내려놔야만 했고, 그 아이는 백호의 등에 매달려선 그가 꺼내는 걸 구경했다.
백호는 아까부터 이쪽을 보지도 않았고,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명월이 무슨 짓을 해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양 그들은 열리는 망태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오는 건 나무로 조각된 새와 토끼, 호랑이와 거북이 같은 것들이었다.
보는 순간 명월조차도 감탄하게 만들 만한 섬세한 세공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저런 거라면 보통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작품을 보는 조예가 깊은 양반들도 탐을 낼 거라며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무로 조각된 것들이 나오자마자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백호는 아이들에게 그걸 하나씩 나눠 주었다.
“잘 보관해야 한다.”
크게 고개를 끄덕인 아이들은 그것들을 받아 들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호랑이를 받은 아이가 토끼를 받은 아이에게 “어흥.” 하는 소리를 내면서 달려들자 주변에 있던 다른 아이들도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사방으로 흩어지는 아이들을 살피던 명월은 얼굴 쪽으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헛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놈이 코앞에 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당혹스러워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데 갑자기 손목이 잡히고, 백호가 고개를 숙여 왔다. 가까이 다가오는 얼굴에 놀란 명월은 반사적으로 잡히지 않은 쪽의 손을 들어 입술을 막고 인상을 썼다.
“뭘 하려는 거냐!”
“아무것도 안할 건데?”
“…….”
놀리듯 가볍게 나오는 대꾸에 명월은 입을 막은 채로 굳어 버렸다.
전립을 쓰고 있어서 아주 가까이 접근하진 못했지만, 오해를 할 만한 거리만큼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있던 백호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오묘함이 풍기는 미소를 지으면서 이죽거린다.
“뭐야? 내가 뭔가 이상한 짓이라도 할 줄 알았어?”
설마하니 그런 걸 기대한 거야?
그런 억양의 말에 명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운 명월은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백호는 고개를 뒤로 물리는 것으로 그걸 가볍게 피했다. 하지만 명월의 공격은 한 방으로 끝나지 않았다.
양손을 휘두르면서 백호를 한 대 때려 보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폴짝폴짝 가볍게 뛰면서 명월의 모든 공격을 피한 그는 느긋하게 말했다.
“느리군. 그렇게 느려서야 내 옷깃 하나 스치지 못할 거야.”
“네 이놈―!”
저런 놈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지 못하다니.
그 사실 자체가 너무 억울하고 열 받았던 명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본격적으로 공격을 하려던 순간 갑자기 옷이 주욱, 당겨졌다. 놀란 명월은 고개를 숙였고, 그곳에는 코를 찔찔 흘리면서 올려다보는 아이가 서 있었다.
“둘이 지금 뭐하는 건데요?”
아이의 물음에 아차 싶었다. 지금 주변에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어 아무 말도 못하는 동안 백호가 태연하게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망태를 집어 들었다.
“사또가 너무 다혈질이구나. 반가우면 반갑다고 솔직하게 말로 하면 될 텐데, 다짜고짜 주먹부터 휘두르고 말이야. 저래서야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지. 너희들은 나중에 커서 저리되지 마라.”
백호의 말을 이해한 건지 어떤지 아이들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네―라고 대답했다. 그런 아이들의 반응에 명월은 이를 악물었다.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라 하고 싶지만, 아이들 앞에서 험악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백호는 망태기를 들고 그대로 걸어갔다. 갑자기 나타나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릴 셈인가.
굳이 쫓아갈 필요가 없었다. 이미 놈에 대해선 신경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지 않았던가.
하지만 저놈이 갑자기 나타난 게 거슬렸다. 그러곤 아이들에게 나무 조각을 준 것도 마음에 걸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밝은 얼굴로 들고 있는 걸 흔들며 놀고 있었는데, 저게 갑자기 이상하게 변해서 아이들에게 해를 가할지도 몰랐다.
정말 그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어떻게든 막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던 명월은 망설이다가 결국 백호를 뒤따라 걸어갔다.
그러자 명월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아이가 손을 펼치면서 중얼거렸다.
“어? 사또 간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아이들이 놀다가 말고 일어서선 크게 손을 흔들었다.
“사또, 다음에 또 오세요.”
“다음에 올 때 맛있는 거 좀 가지고 오세요.”
아이들의 말에 명월은 건성으로 손을 흔들곤 서둘러 움직였다.
그리고 담을 끼고 오른쪽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명월의 목을 붙잡았다.
“……헉?!”
놀라서 소리를 내는 동안 뒷덜미가 잡혀서 그대로 안쪽으로 끌어당겨졌다. 흙벽에 밀쳐진 명월은 앞에 서 있는 백호를 보곤 숨을 삼켰다.
놈에게 속았다.
반사적으로 드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몸으로 힘이 들어간다.
그냥 돌아가는 것처럼 굴더니, 실은 그게 아니라 자신이 뒤쫓아 오길 기다렸던 거다. 그런 놈의 수작에 너무 쉽게 넘어간 것 같아 분했던 명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때 뒷목을 붙잡고 있던 놈의 손가락으로 힘이 들어간다. 손가락을 세워선 목을 스윽, 만지는 것에 소름이 돋았던 명월은 재차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가만히 있어. 소란스럽게 굴면 여기서 바로 바지 내리고 박아 버린다?”
“…….”
순간적으로 명월은 제 귀가 이상해진 건가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벌건 대낮에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을 리가 없잖은가.
귀가 썩을 정도로 추잡한 말을 했으면서도 놈은 태연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내려다보는 놈을 확인한 명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 수치도 모르는 놈이―.”
“수치? 그게 뭔데? 먹는 건가?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난 한다면 정말로 하는 놈이니까. 아니면 뭐야? 전에 나하고 한 일을 잊지 못해서 다시 한 번 해 보고 싶어진 건 아니겠지?”
그리 말하면서 일부러 하반신을 붙여 온다. 배꼽 부근으로 눌려지는 놈의 하반신에 명월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뭐 하는 짓이야. 당장 떨어져―.”
마음 같아선 당장 백호를 밀쳐 내고 놈에게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지만, 소란스럽게 굴면 뒤에서 놀던 아이들이 달려 나올 것 같았다.
아, 그리고 보니 앞 쪽에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가 부근에 있으면 도와달라고 해 볼까. 아니다. 괜히 불렀다가 앞에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놈이 뭔 짓을 할지도 모르는 거고―. 하지만 아이들을 대할 때의 모습을 보면 놈은 여길 찾아온 게 처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불길했다.
아이들을 자주 찾아온 것도, 아이들에게 동물의 모양의 조각을 준 것도 수상쩍었다. 무엇보다 아직도 하반신을 붙인 채로 가까이 붙어서 있는 게, 말도 못할 정도로 싫었다.
명월은 백호를 노려봤다. 조금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유들거리는 표정을 본 명월은 살벌하게 이를 갈았다.
“전에 내가 한 말을 어디로 들은 거냐.”
“난 네 앞에 나타난 게 아니다. 네가 내 앞에 나타난 거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일 거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게 아니지. 여기 있는 아이들은 내가 보살피고 있으니까.”
“……네가 보살핀다고?”
“그래. 가만히 두면 죽어 갈 것들을 하나, 둘 모아서 데리고 있어 준 거지.”
명월의 얼굴로 불신이 떠오른다.
이방에게 듣기로 이곳은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맡아서 키우는 장소라 했다. 그런데 이놈이 그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는 말인가. 헛소리였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흥미를 끌려는 수작이겠지. 이번에는 넘어가지 않는다면서 명월은 냉랭하게 말했다.
“인간들 일에는 개입하지 않는 게 아니었나?”
“개입한 게 아니야. 난 그저 지금 당장 죽어야 할 녀석들이 조금 더 살게 해 준 것뿐이지.”
연거푸 하는 말이 듣기 싫었다.
난 네가 하는 말 같은 건 믿지 않아.
그런 의미를 담아 노려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웃으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가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명월은 자신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동시에 그것에 굴욕감을 느낀다.
술렁거리는 마음을 다잡은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준 건 대체 뭐야?”
“뭐긴 뭐야. 선물이지. 여기에 있는 놈들은 가지고 놀 게 없어서 언제나 늘 심심해해. 그래서 이 몸이 배려를 해 주신 거지. 저런 거라도 가지고 놀라고 말이야.”
그리고는 어깨에 걸친 망태기를 가볍게 흔든다. 그걸 보고 난 후, 다시 백호의 얼굴을 보는 동안 명월의 표정은 더욱더 굳어졌다.
명월은 등채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놈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간다. ‘그런 걸로 날 어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라고 말하는 시선에 명월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일단은 놈이 언제부터 이곳에 걸음을 했는지를 알아내야만 했다.
“이리저리 빠져나가지 말고 확실하게 말해. 언제부터 여길 왔었던 거냐.”
“네가 오기 전부터 내가 찾던 장소다. 그런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야. 그러면 넌 그 모든 곳들을 돌면서 앞으로 다시는 내가 그곳을 찾지 못하도록 할 셈이냐? 네가, 그리할 수 있더냐. 어차피 넌 2년 후에 여길 떠날 텐데.”
백호에게 다가가려 했던 명월은 주춤했다.
자연스럽게 굳어지는 그 얼굴을 확인한 백호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처음 마음 정한 대로, 대충 있다가 2년 후에 돌아가면 된다. 그러니―.”
백호가 다시 앞으로 다가와 간격이 좁혀졌다.
“이상한 것 좀 묻히고 다니지 마라. 싫은 냄새가 풀풀 나니까.”
놈의 얼굴이 재차 가까이 다가온다. 하지만 이번엔 아까처럼 손을 들어 입을 막지 않았다. 그런 멍청한 모습을 보이는 건 한 번으로도 족했다.
저놈도 그런 식으로 굴면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싶어서 장난을 치려는 거겠지. 더는 놈의 농간에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던 찰나 놈의 고개가 살짝 숙여졌다.
전립 아래로 고개를 들이민 백호는 명월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쪼옥, 하고 입술이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감촉에 명월의 눈가가 파들, 하고 떨린다.
가만히 있던 명월이 천천히 숨을 삼키자 백호가 이죽거렸다.
“아까도 이 짓 하려고 얼굴을 내민 거였어.”
“…….”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얼굴에 비위가 상한다.
그제야 본인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를 알게 된 명월이 등채를 빼내면서 있는 힘껏 휘둘렀다.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그런 명월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백호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말했다.
“이상한 거다 싶으면 무시해 버려라. 그래야 제명에 산다.”
그러기 전에 저놈의 명줄을 끊어 버리고 말겠다며 명월은 뒤따라 움직였다.
몇 번 바닥을 박차는 것으로 명월과의 거리를 넓힌 백호가 대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다. 대문이 온전히 닫히기 전에 명월은 그걸 활짝 열고는 밖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던 복운은 갑자기 열리는 대문과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명월을 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깜짝이야!”
정말 놀랐던 복운은 들고 있던 고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명월이 돈을 줘서 모처럼 좋은 고기를 큼지막하게 사왔는데 그걸 떨어뜨리면 큰일이었다. 두툼한 고기를 잘 엮은 줄을 양손으로 들어 바깥쪽으로 내민 복운은 명월의 굳어 있는 얼굴을 보곤 의아해 물었다.
“왜 그런 얼굴이십니까?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여길 내려가는 사내를 보지 못한 거냐?”
“사내요? 아니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대답을 하면서 복운은 명월의 안색을 살폈다.
명월의 눈에 힘이 들어가 있는 걸 본 복운은 금방 걱정스러운 내색을 취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그것 보십시오. 몸이 다 낫지도 않으셨는데 돌아다니시니까 결국 탈이 나서―.”
“그런 거 아니니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라.”
복운의 말을 자르고 내뱉는 말이 쓸데없이 냉랭했다. 순간적으로 본인의 실수를 깨달은 명월은 아차 싶어서 그를 올려다봤다.
“미안하다. 너에게 이렇게 굴 일이 아닌데…….”
“아닙니다. 그렇게라도 하셔서 사또 마음이 편해지신다면 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정말이라는 양 웃고 있는 복운이지만, 그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던 명월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재차 아래를 살폈다. 계단 아래쪽과 그 부근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나타나 사람 속만 뒤집고 가는군.
놈이 하는 말이나 행동, 모든 것들이 신경 쓰였다. 왜 하필 지금 이 순간 나타난 건가 싶기도 했던 명월은 잡고 있던 문을 놓았다.
“일단 고기를 주고 와라. 이만 관아로 돌아가자꾸나.”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복운이 냉큼 안으로 들어왔고, 대문이 닫혔다. 그때까지도 대문 옆에 선 채로 가만히 있는 명월을 힐긋거리고 보던 복운은 사 온 고기를 들었다.
“이것 보십시오. 제일 좋은 걸로 사 왔습니다. 먹음직스럽지요?”
“그래, 잘했다.”
잘했다고 말은 해도 쳐다도 보지 않는다.
오랫동안 곁에 있었기에 얼굴만 봐도 지금 명월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던 복운은 지레 걱정이 되었다. 묻는다 해서 대답을 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찌해야 하나 싶어서 흘깃거리는데 명월이 앞으로 고개를 돌린다.
“일단 고기 정리를 해라.”
“고기 정리를 말입니까? 제가요?”
“일 하는 사람이 하나뿐이지 않느냐. 네가 힘이 세니 도와주면 좋지 않으냐.”
“아니. 뭐,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지요.”
중얼거린 복운은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마침 안쪽에서 나오던 여자를 보곤 그리로 다가갔다.
복운의 손에 들린 고기를 보고 놀란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이게 다 뭡니까?”
“사또께서 아이들과 자네 좀 먹으라고 사 주신 거요.”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나 많이―.”
“며칠에 한 번씩은 사서 넣을 테니까 아끼지 말고 전부 다 드십쇼. 그보다 부엌은 어디입니까?”
갑자기 부엌을 찾는 것에 여자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걱정 말고 알려 달라 하려던 복운은 여자가 나온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선 “여기네.” 라고 하는 복운을 본 여자가 당황해서 뒤를 따르려 했다.
그때 명월이 그녀를 불렀다.
또 무슨 일인가 싶었던 여인이 뒤를 돌아봤다. 명월은 별다른 말없이 가볍게 손짓을 했다. 이리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무시할 수 없었던 여인은 급히 그 앞으로 걸어가선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사또, 비싼 고기를 왜 저리도 많이 사셨습니까.”
“한창 크는 아이들이니 오죽 많이 먹겠나. 복운이 저놈이 말한 대로 자주 고기를 사서 보낼 테니 아끼지 말고 넉넉하게 먹이게. 자네도 좀 먹고.”
“정말 고맙습니다. 사또 덕분에 오늘 아이들을 배불리 잘 먹일 수 있겠습니다.”
“미리 신경 썼어야 했는데 그리 못해 줘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 전부터 관아에서 나오는 돈으로 지금 이곳이 꾸준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명월이 직접적으로 명령을 내린 건 아니었지만, 관아의 사또이니 여인이 보기에는 모든 게 그의 은혜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차마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내내 눈을 내리뜬 채로 시선을 피하는 여인을 내려다보던 명월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보니 웬 사내가 아이들에게 목각 인형을 주고 가던데―.”
“아, 그분 말입니까?”
그분? 여인이 칭하는 호칭에 명월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한다.
하지만 그걸 미처 확인하지 못한 여자는 양손을 마주잡은 채로 웃었다.
“종종 찾아오셔서 아이들과 놀아 주기도 하십니다. 저도 아이들에게 왔다 가셨다는 말만 들었지, 지금까지 얼굴을 뵌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오신 모양입니다. 여러모로 아이들을 신경 써 주시는 아주 고마운 분인지라, 한 번 정도는 꼭 식사 대접을 하고 싶었는데 말이지요.”
말을 하는 여인에게서 그놈에 대한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익숙한 듯 그를 대하던 아이들은 한 점의 그늘도 없었다. 그런 놈이라 해도 아이들에겐 괜찮은 존재로 비춰지는 것인가.
가슴이 답답해진 명월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뒷짐을 지었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는 명월의 모습에 여인은 의아한 눈빛을 보내다가 고개를 꾸벅이곤 복운이 들어간 부엌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 * *
깊은 산속이라 그런지 아직 해가 질 무렵도 아닌데 어두 칙칙하니 기분이 나빴다. 바람 때문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라도 나면 포졸은 놀라서 움찔거리면서 몸에 힘을 줬다. 그런 모습에 같이 움직이는 다른 포졸이 뚱한 얼굴로 물었다.
“자네는 아까부터 왜 그렇게 겁을 내나. 무서울 게 뭐가 있다고?”
“내가 지금 무서워서 이러는 게 아니라, 어두워서 앞이 잘 안 보이니 이러는 거 아니야.”
“아직 해가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어두울 게 뭐가 있어.”
“요즘 내가 눈이 침침해서 그러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왜 그렇게 차갑게 말해서 사람 주눅 들게 만드나.”
“자네가 움찔거리면서 빨리 안 가니까 그러지. 저기 좀 보게. 우리가 찾던 게 드디어 나타났구먼.”
움찔거린다는 식으로 말할 때 화가 나서 한마디 하려 했지만, 앞으로 팔을 뻗는 통에 그리로 시선이 옮겨 간다. 눈이 침침하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눈을 가늘게 떠서야 간신히 언덕 위쪽에 있는 낡은 초가집이 보였다. 그런데 저건 멀리서 봐도…….
“폐가잖아?”
싸리문 너머로도 길게 자란 풀이나 넝쿨이 확연하게 보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지, 등도 안 걸려 있고 을씨년스러운 게 딱 버려진 집이었다. 저런 곳에선 사람이 살라고 해도 못 들어갈 거라며 포졸은 혀를 찼다.
“괜히 왔구먼. 사람이 살지도 않는 곳인데 가 봤자 무얼 하겠나.”
“하지만 집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게 보고 오라 했으니 가 봐야지.”
중얼거린 포졸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겁도 없이 폐가 쪽으로 올라가는 동료의 행동에 포졸이 혀를 찼다.
정말은 따라가고 싶지 않았지만, 여기서 저걸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하여튼 정말로 사람 성가시게 군다면서 한숨을 쉰 포졸은 동료를 따라 가파른 언덕을 기어 올라갔다.
경사도 심하고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데다가, 풀이 무성해서 잘못 발을 디디면 미끄러지기도 몇 번이었다. 그렇게 끙끙거리면서 간신히 위로 올라간 포졸은 어느새 싸리문을 열고 마당에 서 있는 동료를 보곤 한마디 했다.
“이거 보게나. 폐가잖아. 이런 데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
가까이 와서 보니 더 난리였다. 마당은 풀이 잔뜩 나 있고, 마루는 가운데가 구멍이 뚫려 있는데다가 문짝도 반쯤 떨어져 대롱거리면서 매달려 있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방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이라는 거다. 포졸은 한숨을 쉬면서 경직된 어깨를 주물렀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으니 이만 내려가자고.”
“아직 모르는 거니까 거기서 기다리게.”
그리 말한 포졸이 가죽신을 벗고 위로 올라갔다.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을 텐데 그냥 신고 들어가지 그걸 왜 벗는 건지 모르겠다. 저렇게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닐 텐데.
하여튼 곰 같은 사내라면서 혀를 찬 포졸이 뒤따라 움직였다.
마루로 올라가서 안쪽을 살핀 포졸은 반쯤 열린 문을 열고 안을 살폈다.
정리가 되지 않아서 지저분한 방 안쪽으로 이불이 깔려 있고,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얼굴을 집어 넣고 좌우를 살핀 그는 문을 닫고 반대편으로 넘어가서 마찬가지로 방을 살폈다. 그러는 동안 마당에 팔짱을 낀 채로 서 있던 포졸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왼쪽에 붙어 있는 나무문으로 걸어갔다.
부엌인 것 같았다. 가볍게 안이나 살펴보자며 문에 손을 대자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검은 뭔가가 튀어나왔다.
“흐엑?!”
소리를 지르며 뒤로 벌러덩 넘어간 포졸은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지금 뭐가 튀어나온 건가 싶었던 그는 몸을 돌려선 엎드린 채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풀 사이로 엎드리고 있는 커다란 쥐가 보였다.
포졸은 기가 차 입을 크게 벌렸다. 동시에 방을 살피던 동료가 달려나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동료의 외침에 포졸은 엎드린 채로 앞을 가리켰다.
“부, 부엌에서 고양이만 한 쥐가 튀어나왔어!”
그 말을 들은 동료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는 걸 본 포졸은 억울한 얼굴로 바닥을 내리쳤다.
“정말이라니까! 저기, 저기에―!”
있는 힘껏 앞으로 팔을 뻗으며 그쪽을 확인한 포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길게 자라난 풀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포졸은 “이럴 리가 없는데.” 라고 중얼거리면서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어안이 벙벙해져선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에 한숨을 쉰 동료가 마루에서 내려와 신을 신었다.
“됐네. 그만하고 가자고.”
“지금 자네, 내가 일부러 이러는 것 같은가?”
분명히 부엌에서 쥐가 튀어나왔고, 그거 때문에 놀라서 뒤로 넘어간 거였다. 여기서 나가고 싶어서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 심드렁한 얼굴을 확인한 포졸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게 아니라, 난 정말로―.”
“그래. 자네가 하는 말을 믿네. 그러니까 이만하고 돌아가자고.”
성가시다는 양 대충 나오는 대꾸에 포졸은 입을 다물었다.
끌어당기는 대로 일어선 포졸은 잡힌 팔을 뿌리치곤 앞으로 먼저 걸어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포졸의 모습에 동료가 혀를 찼다.
“지금 자네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라니까. 자네가 하는 말을 정말로 믿으니까, 이리로 와 보게.”
애써 달래는 말을 해 봐도 포졸은 멈추지 않았다. 뒤도 안 돌아보고 혼자서 저만치 앞서 나가는 모습에 재차 혀를 찬 동료가 빠르게 그 뒤를 쫓았다.
멀어지는 포졸 둘이 나누는 대화가 들리지 않게 될 즈음, 어느새 초가집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캄캄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곳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들린다.
부엌의 문을 열고 나오는 건 어린 아이였다. 눈을 크게 뜬 채로 주변을 살피던 아이는 급히 마당으로 나와서 바깥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아이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차마 방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마당 가운데에 선 채로 양손을 마주잡았다.
“……어, 엄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부른 후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눈을 내리뜬 채로 바닥을 응시하는 아이는 겁에 잔뜩 잘린 채였다. 허락만 된다면 지금 당장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걸 간신히 참고 있었기에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떨렸다.
크게 숨을 내쉬지도 못한 채로 얼어붙어 있으려니 조용한 방 안에서 묘한 인기척이 들렸다. 스륵, 스르륵, 하며 옷깃이 스치는 소리를 들은 아이는 마주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벌어진 아이의 입술을 타고 떨리는 호흡이 내뱉어진다. 넋이 나간 것마냥 멍하니 있는 동안 그것이 문 건너편에 서 있음이 느껴졌다.
아니. 저건 그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엄마.”
입술을 달싹이자 그 사이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본인이 내뱉은 말임에도 낯선 느낌이 든 아이는 그 단어를 재차 중얼거렸다.
“엄마.”
그 순간 두려움이 사라졌다.
저 문 너머에 있는 건 자신의 엄마였다.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다. 일단은 엄마가 시키는 걸 따르면 되었다. 엄마가 무엇을 원했더라. 뭘 가지고 오라고 했지.
아, 그래. 맞아. 동충하초. 그 이상한 걸 가지고 오라고 했지. 천 개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전에 가져온 그거는 개수가 안 맞았다. 그러면 지금부터 노력해서 숫자를 맞춰야지.
아이는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지금 바로 나갔다 올게요. 엄마가 원하는 걸 가지고 올게요.”
그 순간 문이 덜컹, 하고 흔들렸다.
가까스로 차분한 척을 했지만, 그 순간 히엑―하고 두려움에 질린 소리를 낸 아이는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문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그것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것이 문을 잡고 흔들고 있었다. 무섭다. 두렵다.
아니. 아니지. 저건 그러니까, 엄마야. 엄마가 맞아.
그런데 왜 이렇게 무섭지.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이는 싸리문을 열고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지금 바로 나가서 가지고 올 거예요!”
소리를 치는 아이는 울고 있었다. 크게 입을 벌리고 울면서 미친 듯이 달려가던 아이가 발목을 삐끗해선 그대로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계속해서 굴러가는 동안 돌과 나뭇가지가 아이의 몸을 마구 긁어댔다. 그렇게 아래까지 굴러간 아이는 단단한 돌에 머리를 부딪치고는 헛숨을 삼켰다.
엎드린 채로 있던 아이의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헐떡거리던 아이는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거친 숨을 헐떡거리면서 아이는 어떻게든 움직이려 했다. 바지락 거리면서 풀을 잡았다가 놓는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아이의 눈동자 안쪽으로 파고들어온다. 비릿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걸 느끼면서 아이는 기침을 했다. 엎드린 채로 기침을 하려니 고통스럽다. 입을 벌리자 그 사이로 침이 흘러나오는데 그걸 삼킬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인 아이는 끄응, 하면서 재차 일어나려 했다. 그리고 그때 앞에서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
일어나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아이는 행동을 멈추었다.
지금 앞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된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다. 멍하니 있던 아이는 찬 기운이 점점 가까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사이로 들리는 끄륵, 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들으며 아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도, 동충하초. 그거, 그거 가지고 올 거예요.”
움직이지 않는 혀를 어떻게든 굴려서 말을 만들었다.
“하루만 더 기다려 보세요. 내, 내가 어떻게든―.”
어떻게든 꼭 그걸 가져다 줄 거다.
『그런 것보단 네가 더 맛있을 것 같구나.』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아이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넋이 나간 사람마냥 멍하니 있는 동안 그것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기회를 주었지만, 그걸 붙잡지 못했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뒷덜미에 닿는 차가운 기운. 그 순간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목구멍을 타고 색색거리는 마른 호흡만 토해져 나왔다. 너무도 무서워서 더는 움직일 수 없었던 아이는 눈을 질끈 감고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 엄마.”
언제나 늘 자신을 기다려 주던 엄마를 떠올려 봤다. 그런데 생각나는 게 없었다. 엄마의 얼굴이 검게 덧칠해져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 막연한 두려움에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이는 마지막 힘을 모아서 소리를 질렀다.
“엄마아아!”
“거기 누가 있는 거냐?!”
간절함을 담은 외침에 대답이 돌아왔다.
헛숨을 삼킨 아이는 당장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머리맡에 있던 존재가 사라지는 걸 느끼면서 아이는 크게 입을 벌렸다.
목구멍을 타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아이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서 힘겹게 소리를 냈다. 울부짖음이었다.
* * *
앞으로 두 번 다시 그 장인에게 찾아가지 말라는 말을 한다면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그놈은 자신보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면서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보이는 모습이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모습. 다른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면서 차차 그 영역을 넓혀 갔던 거다. 그건 이 고을에 내려온 지 두 달이 채 안 되는 자신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런 말을 꺼내봤자 다들 듣지 않을 수 있고.
그러니 근본적인 문젯거리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 해서 바로 놈을 찾아간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놈과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봤자 속만 터질 뿐이었다. 또 어떤 이상한 짓을 당할지도 모르고―.
애초에 놈을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불쑥 튀어나오니 수가 없었다. 놈은 마치 ‘내가 이렇게 구는데도 모르는 척 외면할 수 있겠냐.’라는 식으로 굴고 있었다.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게 꼴 뵈기 싫었다.
바로 놈을 덮칠 수 없는 거라면 의혹이 있는 구석부터 해결하는 게 맞는 거였다. 명월은 눈에 힘을 준 채로 한곳을 응시했다.
지금 명월은 방문을 조금 열고는 손에 줄을 쥐고 있었다. 그 줄은 대청 구석에 있는 함정과 연결되어 있었다. 무거운 바구니를 뒤집어서 그걸 막대기로 고정해 놓았고, 아래쪽에는 염분이 빠진 말린 생선이 놓여 있었다. 잘은 몰라도 고양이들이 저걸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상한 고양이의 입맛이 다른 평범한 것들과 비슷하진 않을 터, 이 함정에 걸려들지 않을 수도 있음이었다. 그런 걸 고려해 볼 때, 지금 굉장히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도 싶었으나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계속 바쁘게 몸을 움직이게 되는 것 같다. 쉬고 싶고, 가만히 있고 싶어도 그리할 수 없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던 거다.
이렇게 조금만 더 있다가 안 되면 치워야지.
그런 생각으로 명월은 줄을 더 세게 쥐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하얀 무언가가 나타났다. 복운은 털이라고 하지만, 명월이 보기엔 살이 분명한 거구의 고양이가 대청 위를 살펴보면서 살랑살랑 걸어왔다. 어찌나 몸이 큰지 걷는 걸음이 무거워 보인다. 그걸 확인한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자, 어서 저 생선을 먹으러 안에 들어가라.
그때 고양이가 고개를 들어 명월을 쳐다봤다.
“…….”
거기에 명월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양,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바라보는 고양이를 두고 명월은 숨을 삼켰다.
눈을 반쯤 뜬 채로 있던 고양이는 통통한 입을 다물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느낌 탓인지 모르겠지만 하아, 하고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른 명월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줄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저 망할 고양이가 지금 나한테 한숨을 쉰 거야, 뭐야.
다른 것도 아니고 고양이가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괜히 더 분하고 화가 나는 것 같았던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내내 얌전히 있던 고양이가 방향을 틀어선 바구니 쪽으로 걸어갔다. 말린 생선 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킁킁, 거리는 걸 본 명월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들어가는 건가?
그리고 그때 고양이가 느리게 안쪽으로 들어가 생선을 입에 물었고, 이때다 싶었던 명월은 줄을 당겼다. 바구니를 지탱하던 막대가 사라지고 그대로 고양이 몸 위로 쓰러진다.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나름 돼지 고양이 몸에 맞는 바구니를 공수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맞지 않았다. 통통한 엉덩이까지는 덮을 수 없어서 그냥 몸 앞쪽만 바구니 안쪽에 들어가 있는 형태였다.
그 모습에 왜 얼굴이 달아오르는지 모르겠다. 왜 자신이 이런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야 하느냐면서 명월은 냉큼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가 고양이의 뒷다리를 잡아 당겼다.
“윽, 무거워.”
복운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 최대한 신속하고 조용하게 움직이려 했는데 이 망할 고양이가 무거워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잡은 뒷다리를 놓치지 않은 명월은 혹시라도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 바깥을 살피면서 방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명월에게 다리가 잡힌 채로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가 된 나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건 방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나비를 방 가운데에 내려놓고는 문고리를 걸어 버린 명월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놓은 상태 그대로 엎드려선 생선을 물고 뜯고 있는 나비를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대체 뭘 하는 거야.”
미끼로 쓰기 위해서 말린 생선을 두긴 했지만, 막상 그걸 먹는 걸 보자니 기분이 나빠진 명월은 당장 앞으로 이동했다. 그러곤 고양이가 앞발로 붙잡고 열심히 뜯어 대는 생선을 빼앗으려 손을 뻗는 순간 내내 졸린 눈을 하고 있던 고양이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하악―.
당장 달려들 것 같은 모습에 움찔한 명월은 손을 치우고 뒤로 몸을 물렸다. 비틀거리다가 엉덩방아를 찧는 명월을 두고 고양이는 계속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언제 하악질을 했느냐는 듯 눈을 반쯤 감고는 다시 생선 뜯는 일에 열중하는 고양이를 보고 명월은 마른침을 삼켰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해서인지 당황스러웠다. 그렇다고 이놈이 속 편하게 있게 할 순 없었다. 명월은 왼쪽 허리에 채워진 등채 위에 한 손을 올린 채로 물었다.
“네놈의 정체가 무어냐.”
나비는 크게 입을 벌려선 생선을 찹찹찹, 하고 먹어 치웠다.
엄청 맛있게 잘 먹는 그 모습에 명월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너, 백호가 맞지?”
이번에는 생선을 문 채로 고개를 빠르게 젓는다. 잘 먹고 싶은데 질겨서 제대로 뜯기지 않는 게 싫은지 인상을 쓰는 얼굴이 무척 진지했다. 그 모습에 혀를 찬 명월은 손바닥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얼얼해진다.
“고양이인 척하지 말고 네놈의 정체를 드러내란 말이다!”
목소리에 힘을 주곤 엄하게 한마디 해 보지만, 돌아오는 건 관심 없다는 시선뿐이었다. 이를 세워서 생선을 뜯는 간간히 고개를 푹 숙이는 나비의 행동에 명월은 기가 차 헛숨을 내쉬었다.
지금 하는 걸 보면 영락없는 고양이였다. 역시나 자신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다. 이 녀석은 분명 보통 놈이 아니었다. 이런 겉모습에 속아선 안 되었다. 여전히 바닥에 한 손을 짚은 채로 명월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백호.”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러웠다.
온화하기까지 한 울림에 생선을 물어뜯던 나비의 귀가 위로 쫑긋 선다. 그러곤 바로 고개를 드는 것에 맞춰서 명월은 재차 입을 열었다.
“너는 분명히…….”
하지만 그 말은 채 이어질 수 없었다. 바깥이 소란스럽나 싶더니 곧 “사또!” 라는 부름이 들렸던 거다. 놀란 명월이 고개를 들자 나비도 생선을 문 채로 방구석으로 달려갔다. 안쪽으로 쪼르르 달려가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앉는 걸 본 명월은 다시 사또, 하고 부르는 소리에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토록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분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 서 있던 포졸 하나가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수색을 나갔던 이들이 돌아왔습니다. 그, 그런데 다친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다친 아이라니.”
포졸의 말을 따라서 중얼거리던 명월의 눈동자가 빛난다.
설마 싶었던 그는 급히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 * *
명월의 명을 받고 시장으로 나간 이방은 어린애를 발견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알려 준 곳으로 가 봐도 그곳은 텅 비어져 있었다. 맞은편에 있던 약재상에게 건너편 길가에 앉아 있던 아이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도 돌아오는 건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설령 그런 말을 들었다 한들 그냥은 돌아갈 수 없었던 이방은 근처를 돌면서 아이를 찾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부터 시장 한편에 자리를 잡고 곡식을 팔던 노인에게 이상한 말을 듣게 되었다.
종종 시장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산나물을 팔던 여인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더라는 말, 말이다. 여인에겐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고, 종종 둘이 나란히 앉아서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산나물을 팔곤 했더라는 거다. 그렇게 몇 번 보이자 노인이 궁금하기도 해서 말을 건네면 여인은 고개를 돌리거나 피하곤 했는데, 암만 봐도 벙어리 같다고 했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어린 것이 앙칼지게 노려보곤 했는데 그때부터 정이 떨어져서 보여도 말을 건네지 않게 되었다 한다. 제 입에 풀칠하면서 살기에도 힘들었기 때문에 남 신경 쓸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종종 그들 모자가 눈에 들어왔고 그들은 해가 저물면 짐을 챙겨서 마을 반대편으로 내려갔는데, 그게 산 쪽이었다는 식으로 말을 마무리 지었다.
이방이 한 말을 들은 명월은 그 모자가 자신이 찾던 인물인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이방에게 포졸을 풀어서 산으로 들어가 보라 했고, 아이를 발견하긴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급한 대로 명월의 처소 건넛방에 아이를 눕히고 의원을 불렀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부른 사람이 사또였기 때문에 한달음에 온 의원은 한참 동안 아이를 치료했다.
딱 보기에도 부상의 정도가 심했다. 아이가 치료를 받는 동안 내내 한구석에 앉아 있던 명월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마당에 서 있는 포졸 둘과 이방, 복운이 보였다. 그들을 확인한 명월이 대청 끝으로 가서 뒷짐을 지고 섰다.
“어떻게 된 거냐.”
당장은 다친 아이만이 눈에 들어와서 상황 설명을 듣지 못했다.
이제야 묻는 것에 포졸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계륭 계곡으로 넘어가는, 뒤쪽에 있는 언덕 사이에서 초가집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모든 방을 살펴봤지만, 사람이 없고 또 오랫동안 산 흔적이 없어서 그대로 내려오려 했습니다. 시간이 늦었고 주변이 어두워서 서둘러야겠다 싶어 계속 내려가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다시 돌아가 봤습니다. 그때 멀리서 이 아이가 초가집에서 달려 나와 언덕에서 미끄러지는 걸 보고 다급히 뛰어갔습니다. 그때 아이가 겁에 질려서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아서 급한 대로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이가 겁에 질려 한참을 울어서 데리고 오는 게 힘들었습니다.”
“계속 울면서 버둥거려서 간신히 들고서 내려온 겁니다. 물론 산을 다 내려오기 전에 지친 아이가 의식을 잃었지만…….”
“초가집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명월의 물음에 처음 대답을 했던 포졸이 입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실은 숨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애가 혼자서 있다가 저희 같은 포졸이 나타나니 지레 겁을 먹은 게 아닐는지요.”
“그래도 그렇지. 숨어 있는 어린애를 찾지 못했던 거냐.”
애초에 거기서 아이를 발견했다면 저런 식으로 다칠 일도 없었을 게 아닌가.
그런 타박이 담긴 말에 다른 포졸이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부엌 쪽을 살펴보려 했는데 커다란 쥐가 튀어나와서 놀라 자빠졌습니다. 그것 때문에 분위기가 뒤숭숭해져서 저 친구가 잘 살피다가 그냥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저 친구는 잘했는데, 제가 겁이 많아서……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말에 명월은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포졸들은 둘 다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침울한 포졸들을 두고 이방과 복운도 입을 다문 채로 명월의 안색을 살폈다. 여전히 뒷짐을 진 채로 있던 명월이 재차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아이가 초가집에서 달려 나온 걸까.”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소리에 포졸이 고개를 들었다.
“너희들을 피해서 숨어 있었는데, 왜 갑자기 뛰어나온 거냔 말이다.”
“그것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멀고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는데, 마치 뭔가에서 도망을 치는 듯 다급해 보였습니다. 소리를 치는 것도 이상했고…….”
“맞습니다. 마치 죽기 직전에 내지르는 그런 비명 같았습죠.”
연달아 하는 말을 들은 명월의 표정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쉽사리 풀릴 것 같지 않은 그 얼굴에 눈치를 살피던 포졸들은 다시 입을 다물곤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수고들 많았다. 늦은 시간이었는데 용케도 아이를 데리고 왔군. 힘들었을 텐데, 이렇게까지 해 줘서 고맙다.”
“아이고, 아닙니다. 저희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리 말씀을 하십니까.”
“아니다. 나 때문에 고생을 한 건데 미안하게 되었군. 복운아, 가서 이들 밥 좀 잘 챙겨 줘라.”
아이 때문에 늦은 시간 동안 제대로 밥을 못 먹긴 했기에 포졸들은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내내 가만히 있던 복운이 앞으로 나서선 저를 따라오라 말했고, 포졸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대문을 나가는 걸 본 명월은 눈을 감았다.
“죄송합니다.”
아래에서 들리는 사과의 말에 명월은 눈을 뜨곤 이방을 내려다봤다.
“조금 더 서둘렀어야 했는데, 포졸을 보내긴 했어도 정말로 그런 곳에 사람이 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시장에서 들은 말을 토대로 포졸을 산속으로 보낸 건 이방이었지만, 그걸 최종적으로 지시 내린 건 명월이었다. 물론 조금 더 많은 수의 포졸을 보내고 서둘러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이번 일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고로 아이가 다친 것이었으니 그걸 두고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할 순 없었다. 하나하나 짚고 올라가자면 가장 큰 잘못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명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 하지 말게. 애초에 모든 잘못은 내게 있었어. 밥만 먹이고 보내선 안 되었던 거야.”
“그건 누구나 다 그랬을 겁니다. 사또의 탓이 아닙니다.”
“자네의 탓도 아니지. 그러니 이만 들어가서 쉬게. 여기엔 내가 있겠네.”
명월의 말에도 이방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명월은 그런 그를 지그시 바라봤고, 이방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일단은 들어가 보겠습니다. 안에 들어가 있는 자는 이 고을에서 가장 실력 좋은 의원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모든 걸 맡기십시오.”
“안 그래도 그리할 셈이네. 난 사람을 낫게 할 만한 재주는 없으니까.”
명월의 말에 이방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방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냥 자리를 뜨는 게 마음에 걸렸던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이방이 완전히 몸을 돌리고 멀어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명월은 내내 참고 있던 한숨을 토해 냈다.
천천히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선 턱을 괸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자신이 조금 더 서둘렀어야 했던 걸까. 아니면 이 고을에 오자마자 좋은 사또 노릇을 하면서 모든 것들에 신경을 썼어야 했던 걸까.
아니. 그런다 하더라도 저 아이를 바로 만나긴 어려웠을 터였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저들 모자는 사람들 몰래 산속에 숨어 지내고 있었으니―.
아이는 저렇게 다쳤는데, 어미는 어찌 되었을까.
초가집에 숨어서 홀로 있었던 아이. 그러다가 갑자기 도망치듯 뛰어나와 언덕을 굴러서 크게 다쳤다. 왜 그랬을까. 정말 단순한 사고인 걸까.
그게 아니라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걸까.”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던 명월은 그릉, 하는 소리에 눈썹을 올렸다.
천천히 눈을 내리뜨자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고양이가 보였다. 방에서 마른 생선을 다 먹어치우고 온 건지 녀석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제 앞발을 핥아대고 있었다. 눈을 감고 앉아선 빨간 혀를 내밀고 있는 모습에 명월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이 녀석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명월은 앉은 채로 고양이 쪽으로 다리를 뻗어선, 그 몸을 발로 주욱 밀어 버렸다. 편안하게 앉아 있었던 나비는 멀찍이 밀린 채로 명월을 올려다봤다.
특유의 졸린 눈을 한 채로 ‘뭐냐. 네놈이 지금 날 민 거냐.’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에 명월이 코웃음을 쳤다.
“뭐.”
짤막하게 묻는 말에 나비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난 너의 지금 모습을 믿지 않아. 그러니까 수작 부리지 말고 알아서 사라져.”
어쩌면 평범한 고양이일수도 있지. 평생 동안 저 모습으로 계속 있을 수도 있음이었다. 하지만 일말의 불안과 의심이 고양이의 존재 자체를 껄끄럽게 여겨지도록 했다. 그런 거라면 아예 근처에 얼쩡거리지 말고 사라져 주는 편이 나았다.
명월은 조금 더 다리를 뻗어선 나비를 밀어내려 했고, 그것에 가만히 있던 나비가 앞발로 명월의 발을 툭툭 건드렸다. 그 손길이 우스웠던 명월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별생각 없이 웃던 명월은 문득 지금 뭘 하는 건가 싶어 바로 입가에 서려 있던 미소를 지웠다. 대신 나비를 더 멀찍이 밀어내려는데 문이 열리고 의원이 얼굴을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바깥을 살피던 의원은 명월을 보고 말했다.
“사또, 치료를 끝냈습니다.”
그 말에 명월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명월은 대청 한편에 앉아 있는 나비를 노려봤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경고의 눈빛을 던져도 녀석은 특유의 졸린 눈으로 바라볼 따름이다. 그러다 크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하는 것에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곤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붕대가 감겨 있었다. 이마 쪽은 붕대로 감아 놔도 피가 배어 나왔고,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미간을 구기며 신음을 흘렸다.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을 거다. 그걸 알기 때문에 누워 있는 아이를 보는 명월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뼈가 부러지거나 한 곳은 없는데 타박상이 심하고, 몸도 많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피가 바로 멎지 않아서 지혈초를 발라 두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보단 탕약을 마시는 편이 낫겠지요. 제가 다시 집으로 가서 좋은 약재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걸 푹 고아서 마시면 천천히 회복이 될 겁니다.”
겉보기엔 부상이 심한 것 같았는데 뼈가 부러진 곳은 없다는 건가.
안심을 한 명월은 의원의 어깨를 토닥였다.
“갑자기 불려 와서 놀랐을 텐데 수고가 많았네.”
“사또께서 부르시는 건데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당장 달려와야지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살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자네만 믿겠네. 가마를 준비해 줄테니, 그걸 타고 갔다 오게나.”
“배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굽실거린 의원이 밖으로 나가고 아이를 살피던 명월은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막 밖으로 나갈 때 대문을 넘어오는 복운이 보였다. 마침 좋을 때 왔다면서 의원에게 가마를 준비해 주라고 말한 명월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아이의 옆에 앉았다.
붕대를 감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픈 모습으로 누워 있기 때문인지 전보다 훨씬 더 마른 것 같은 인상이었다. 간간이 신음을 흘리는 걸 들으며 명월은 아이의 이마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명월의 손바닥에서 퍼지는 따스함이 느껴진 것일까. 아이의 미간에 생긴 주름이 펴지는 걸 본 명월은 고개를 숙였다.
“너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리 물은 명월의 안색은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한참동안 아이를 바라보던 명월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아이의 이마를 토닥였다.
정말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아이였다. 만약 그리했다면 아이는 그 산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 갔을 거다. 아이가 그런 식으로 죽지 않고 지금 이곳에 와서 치료를 받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처음 아이를 보고 나서 내내 마음에 걸렸던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
‘쓸데없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마.’
문득 떠오르는 건 재수 없는 그놈이 한 말이었다.
왜 꼭 이럴 때 그놈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거냐면서 명월은 혀를 차면서 눈을 감았다.
* * *
손대면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칼날이 나무에 닿고, 아주 얇게 껍질이 벗겨진다. 그렇게 몇 번이나 껍질이 벗겨지는 동안에 투박한 나무는 점점 어떤 것의 형태를 띄어가게 되었다. 빠르지만 정교하게 손을 놀리는 사내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무념무상의 상태로 제 할 일을 하던 사내는 행동을 멈추곤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없는 작업실은 넓고 황량하고 어두웠다. 위쪽에 뚫린 창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달빛을 살피던 그는 눈을 가늘게 떴고, 잠시 후 끼익―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사내는 몸을 일으켰다.
들고 있던 칼과 나무 조각을 작업대 위에 둔 그는 흔들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너른 마당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보이는 건 없으나 느껴지는 건 있었다. 때문에 성가셨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도 되겠지만, 그리할 수 없는 미묘한 감각을 느끼며 안색을 굳힌 채로 있으려니 바람결에 냄새가 묻어난다.
다디단 꽃향기. 그 냄새에 자극을 받은 혀 가운데로 침이 고인다.
그걸 느끼면서도 모르는 척 백호는 다시 문을 닫으려다가 멈추었다.
문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그의 손으로 점점 힘이 들어간다.
아주 짧은 순간의 망설임. 그것이 낯설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던 만큼 왜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 것인가 싶었다. 신경 쓰지 말고 평소 하던 대로 행동하면 되었다. 설령 자신이 신경을 쓴다 해도 당장 뭔가 변하는 것도 아니고…….
그 순간 자신을 노려보던 앙칼진 눈동자가 떠올랐다.
계집애처럼 생긴 놈이 그리 노려봐 봤자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우스울 따름이라며 실제로 비웃는 표정을 지은 백호는 문을 닫았다.
그렇게 문이 영영 닫힌 채로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자기 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크게 문이 열리고 백호가 걸어 나왔다.
“제기랄, 더럽게 성가시게 구는군―.”
혀를 차면서 마당으로 걸어 나간 백호는 위로 손을 뻗었다. 공중에서 나타난 호랑이 가죽을 잡아서 머리에 뒤집어쓰고는 마당 끝으로 가선 박차 올랐다. 그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그대로 사라졌다.
* * *
늦은 시간이 되어서 모두가 잠드는 와중에도 관아의 안쪽에는 불빛이 환했다. 명월의 처소 앞에서 탕약을 끓이고 있기 때문에 이상한 냄새가 마당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근처 디딤돌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복운은 아까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간혹 고개가 푹 숙여지면 놀라서 눈을 뜬 그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다가 품에 안고 있는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다. 얌전히 있어라. 라고 말을 한 그는 다시 눈을 감았고 코를 골았다.
복운이 정신없이 잠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나비는 몸에 힘을 뺀 채로 얌전히 있었다. 특유의 졸린 표정을 한 채로 정면을 응시하던 나비의 축 처져 있던 귀가 꿈틀하고 움직인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게 나타났다. 그것은 가볍게 담을 밟고 넘어와선 마당으로 내려앉았다.
하얀 옷을 입고, 하얀 호랑이 가죽을 머리부터 뒤집어쓰고 있는 건 백호였다.
일단 마당에 멈춰선 그는 복운의 품에 안겨 있는 나비를 확인하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탕약을 끓이느라 분주한 자 앞을 지나쳐선 신을 신은 채로 대청 위로 올라갔다.
왼쪽으로 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선 그는 굽힌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방 가운데에 누워 있는 아이와 그 옆 쪽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앉아 있는 명월을 발견했다.
팔짱을 낀 명월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리가 무거웠는지 전립을 벗고 있는 그의 뺨을 타고 머리카락이 몇 올이 흘러내려와 있었다. 그런 모습이기 때문일까.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것 같아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앞서 충고를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우환거리를 곁에 두고 있었다. 저런 걸 방 안에 떡하니 들이니 언제고 재차 일이 터지게 될 터였다. 앞서 자신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게 어떤 일인지를 알 텐데도, 왜 계속해서 무모한 짓인가 싶었던 그는 탐탁지 않아 하며 혀를 찼다.
그러곤 붕대를 감고 있는 어린 아이를 내려다봤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색색거리는 가느다란 숨을 토해 내는 모습을 바라보던 백호는 그리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손을 뻗어선 아이의 손목이 맥을 짚은 그는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손을 뗐다.
턱을 문지르면서 아이를 내려다보던 그는 재차 명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처럼 충고를 해 주는데도 그걸 제대로 못 알아먹는 놈은 어떤 식으로 다스려야 하는 걸까. 속 편하게 잘 시간 같은 건 없다고 한마디 해 주어야 하는 걸까. 그게 아니면 지금 이 시간부터 이놈에 대해선 신경을 딱 끊고 살아야 하는 걸까. 앞으로는 신경도 쓰지 말고―.
잠든 명월의 얼굴을 본 백호는 생각을 멈추었다.
“…….”
피곤한 듯 입을 반쯤 벌린 채로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그 모습이 추하지가 않았다. 깔끔하고 해사한 얼굴이다. 인간들 중에서 이만한 얼굴을 지닌 자는 무척 드물었다.
아니. 인간이라 부를 수 없으니, 애초에 해당 사항이 없는 건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명월을 바라보던 백호는 위로 손을 들었다.
명월의 입술에 엄지를 대고, 가볍게 문지르면서 손가락을 펼쳐 뺨을 감싼다. 손바닥에 달라붙는 매끈한 피부의 감촉을 느끼며 백호는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명월에게 가벼이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순간 단 냄새가 재차 난다. 전보다 훨씬 더 강렬해진 향긋한 냄새에 백호는 인상을 썼다. 화가 난 건 아니지만, 화가 난 사람마냥 안색을 굳힌 그는 명월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백호는 대청 끝에 서선 양손을 움켜쥐었다.
텅 빈 허공을 노려보는 그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그렇게 하염없이 서 있기만 하던 그는, 얼굴에 닿는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숙였다. 복운에게 안겨 있던 나비가 뒤로 고개를 길게 뺀 채로 쳐다본다. 특유의 게슴츠레한 눈이 기분 나쁘게 여겨진 백호가 혀를 찼다.
“뭘 쳐다보는 거냐. 넌 네 할 일이나 해라.”
그 순간 나비가 입을 벌리고 야옹―하고 울었다. 그러자 복운이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린다.
“나비야, 괜찮으니까 자.”
그런 복운에게 보란 듯이 몸을 비비면서 눈을 가늘게 뜨는 걸 본 백호는 대청을 내려왔다. 빠르게 나비의 곁을 지나쳐 가면서 중얼거린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군.”
그 말과 동시에 사라져 버리는 백호를 두고, 나비는 재차 야옹―하고 소리 내 울었다.
* * *
곳간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명월은 바로 산삼이 있는 곳 앞에 서서 한 뿌리를 집어 들었다. 명월의 뒤를 따라 들어온 호방은 명월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말을 더듬었다.
“사, 사또. 그건 왜 집어 드십니까?”
묻는 말에 대해 대답하지 않고 들고 있는 산삼을 유심히 살핀다. 그걸 위, 아래로 살피던 명월은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돌렸다. 호방은 당장 양팔을 벌려 그런 명월의 앞을 막아섰다.
“사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건 이번 하순에 도성으로 올라가야 할 진상품 중에 하나입니다. 무척 어렵게 구한 거라 딱 보기 좋게 짝을 맞춰 두었는데 어찌 그걸 들고 가시려 하십니까. 혹시라도 산삼이 드시고 싶은 거라면 제가 다른 걸 구해서 올릴 테니―.”
“지금 당장 구해서 줄 수 있나?”
“사, 산삼이 산속에 널려서 피는 개꽃도 아니고 지금 당장은 구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뎁쇼.”
“그러면 난 이걸 들고 가겠네.”
통보식으로 말한 후 명월은 호방의 어깨를 잡아 뒤로 밀어내고 그를 지나쳐 갔다. 보기보다 손힘이 센 명월이니 그 앞에 버티고 서 있을 수 없었던 호방은 아이쿠, 하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리다가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명월은 이미 밖으로 나가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고작 저런 어린애를 위해서 진상품을 건드리다니.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면서 호방은 멍하니 있다가 급히 뒤를 쫓았다. 명월의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벌써 저만큼 앞에 가 있었다. 호방은 급한 대로 명월의 옆에 붙어 섰다.
“그 산삼은 보통 물건이 아닙니다. 도성으로 올라가야 할 겁니다. 하순에 보내려고 명단 정리를 다 해 놨고 도성에 올려두기도 했는데 한 뿌리가 비면 어찌한답니까. 아무리 사또라 해도 진상품에 손을 대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나중에 하나 더 구해서 넣으면 되잖은가.”
“숲에만 들어간다고 해서 산삼을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답답한 소리 한다는 양 한소리 하는 호방을 두고 명월이 고개를 숙였다. 당장 뭐라 하는 건 아니지만 바라보는 눈빛이 꽤나 매섭다.
깨갱한 호방은 입을 다물긴 했지만, 눈빛을 물리진 않았다. 그건 그냥 원래 있던 자리에 두시지요. 그리 말하고픈 듯한 얼굴을 본 명월은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다. 내가 다 책임지겠다.”
그리 말한 명월이 앞장서 가자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본인이 책임지겠다 하니 그 얼굴 앞에 대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호방은 복잡한 얼굴로 명월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 * *
부상을 입은 채로 숲에서 발견한 아이는 지극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인근에서 가장 용하다는 의원이 붙어서 치료를 하고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탕약도 먹이고, 거기다가 산삼도 갈아서 먹였다. 그러자 처음으로 아이가 반응을 보였다. 물론 눈을 뜨지 않는 상태에서 기침을 하는 것뿐이었지만, 그게 어딘가 싶었다.
이대로 있다간 이틀 안에 정신을 차리겠다는 의원의 말에 명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를 하는 동안 옆에 붙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귀한 산삼을 갈아서 먹이기도 했다. 보통 사이라면 그렇게까지 챙겨 주지 못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의원은 명월과 아이의 얼굴을 비교해 봤다. 혹시나 그런 게 아닐까 싶었지만, 생김새가 너무 달랐다. 혈연관계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챙겨 줄 수가 없을 텐데.
이상하다는 양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밖으로 나온 의원은 탕약을 끓이는 자의 옆으로 가 섰다. 뒷짐을 지고 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의원이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탕약을 끓이는 동안 방 안에서 이상한 소리 못 들었더냐.”
“뭐가 말입니까?”
“그러니까 저 아이에게 사또께서 뭐라고 하시는지…….”
그때 어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들자 뒷짐을 진 이방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뭐라 하는 건 아니었지만, 내내 얼굴을 주시하며 다가오는 이방이 부담스러웠던 의원은 눈을 내리뜨며 시선을 피했다. 그런 의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옆으로 다가선 이방이 물었다.
“차도는 좀 있던가.”
“아, 그것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틀 안에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요.”
“그래. 이틀 안에 저 아이가 꼭 눈을 뜨도록 해 주게. 그리고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입을 다문 이방이 의원의 얼굴을 노려봤다. 매서운 시선에 헛기침을 한 의원은 열심히 탕약을 끓이던 이의 엉덩이를 발로 차면서 “그게 뭐냐.” 라면서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사내가 들고 있던 부채를 들고 가선 본인이 직접 흔드는 걸 확인한 이방은 안쪽으로 향했다. 이방이 가죽신을 벗고 방으로 들어서는 걸 본 의원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문을 닫고 방에 들어선 이방은 바깥쪽에 집중했다. 혹여라도 쓸데없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었으나 조용했다. 그걸 확인한 후 이방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나.”
방에 들어오자마자 인상을 쓰며 바깥을 살피니 그게 이상해 보였다.
명월의 물음에 이방은 아이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대답했다.
“의원이 쓸데없는 말을 해대는 것 같아서 경고를 해 주었습니다.”
“왜? 이 아이가 내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떠들던가.”
“……눈치채셨습니까?”
“내가 왜 이런 아이를 보살피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식으로 굴던데 뭐. 그리고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인 것 같군.”
명월의 말에 이방은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내색하지 않을 뿐이지 그도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던 거다.
딸의 일도 있으니 명월이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걸 알기는 해도, 일면식도 없는 아이를 이토록 챙길 줄은 몰랐던 거다. 데리고 오긴 했어도 아이를 보살피는 건 자신의 몫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이의 곁을 지키는 건 이방이 아니라 명월이었다.
“내가 이 아이를 보살피는 게 이상한가.”
“……솔직히 그렇습니다. 사또께서 아이를 위해서 곳간에서 산삼 한 뿌리를 들고 가셨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났더군요. 다른 이들이 들으면 의아해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왜? 이런 아이를 위해선 산삼을 사용하면 안 되는 건가?”
“왜 안 되겠습니까. 하지만 곳간 안에 보관되어 있던 건 진상품이었습니다.”
“도성에 계신 주상 전하께 올려질지도 모르는 진상품에 손을 댄 게 문제가 되는 거로군. 앞으로는 내 조심하도록 하지.”
그리 말한 명월은 입꼬리를 올렸다. 말은 저리해도 필요하면 재차 한 뿌리 더 사용할지도 모른다. 명월이라면 그리하고도 남을 거라면서 이방은 한숨을 쉬었다.
“산삼이 필요하신 거라면 제가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됐네. 자네 살림도 풍족하지 않은데 무슨 재주로 산삼을 준비해. 귀한 걸 한 뿌리 먹였으니 이제 되었네. 정말로 다시는 곳간에 들어가지 않을 거야. 호방인지 뭔지 하는 이가 집요하게 달라붙어서 잔소리를 하는 걸 듣고 싶지가 않거든.”
명월의 농에 이방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진다.
그러다가 말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던 이방이 입을 열었다.
“원래 곳간은 지금껏 호방이 관리를 해 왔고, 다른 사또들께선 딱히 관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곳간에 신경 쓰지 않아도 다른 쪽에서 들어오는 물건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 사또께서 몇 번이나 곳간을 들락날락하는 걸 두고 말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건 내가 원해서 들락날락한 게 아니지 않은가. 애초에 계기를 마련해 준 건 바로 자네였다네.”
아픈 딸을 살리기 위해서 곳간에 들어가서 어느 물건을 빼돌리려 했던 이방이었다. 애초에 이방이 곳간에 들어가 물건을 뒤지지 않았다면 명월이 그곳에 관심을 보이는 일은 없을 거다.
가볍게 웃자고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이방은 면목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웃자고 꺼낸 말이니, 그냥 웃게.”
명월은 웃을 수 있겠지만, 이방은 그게 아니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잘못했구나 싶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실제로 고개를 숙이고는 차마 쳐다보지 못하는 모습에 명월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눈을 내리떴다.
전보다 한결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든 아이를 확인한 명월이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이 아이에게 관심을 두냐면, 내 어릴 적 일이 떠올라서 그러네.”
이방은 고개를 들어 명월을 바라봤다.
이방이 듣기로 명월은 지체 높은 양반댁 자제였다. 그런 그가 왜 저런 지저분한 꼬마를 보고 어렸을 때의 일을 떠올린단 말인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명월이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어릴 적에는 아무도 없는 깊은 숲에서 살았지. 거긴 정말 사람 하나 없던 곳이었다네. 거기서 나랑 다른 이, 그렇게 둘이서 살았지. 그때에는 그리 사는 게 고생스러운 것도 모르고 그냥 하루하루가 즐거웠지.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하지만 막상 거길 벗어나 보니 그게 아니었단 말이지. 사람 사는 건 참 어렵고 힘든 일이더군. 친구도 못 사귀겠고,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것도 힘들고, 그냥 물 위에 뜬 기름마냥 한동안 방황할 수밖에 없었지.”
이런 말을 다른 누군가에게 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특이하다는 걸 알리고 싶지도 않았고,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약하다는 걸 드러내는 것만 같아 그게 싫었던 거다. 정말 나약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런 걸 숨기고 원래 잘난 사람이라는 센 척을 하고 싶은 게 있기도 하고…….
그나마 자신은 운이 좋았던 거다. 보통 다수의 아이들은 센 척을 하고 싶어도 환경이 뒷받침 되지 않아서 이런 힘든 상황에 빠지게 되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모르면 모를까. 괴롭힘을 당하거나, 힘든 상황에 처한 아이에 대해서 알게 되면 저도 모르게 간섭을 하게 되었다.
“괴롭힘도 많이 받아 봐서 이런 어린애들이 보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네. 내가 대단히 능력 좋은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나마 도와주고 싶은 것뿐이라네. 어린 생명 하나 살리는 데 산삼 한 뿌리가 뭐 그리도 중하겠나. 내 생각은 그렇다네.”
명월은 고개를 돌려 이방을 바라보며 웃었다.
“하지만 자네가 일부러 찾아와서 걱정을 하니 내 앞으로는 조심하겠네.”
지금까지 명월이 무얼 하려고 하면 매번 그걸 반대하는 말이나 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걸 두고 명월이 언짢게 여기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래도 웃으면서 말해 주는 것에 많은 위안을 느끼며 이방은 다른 말을 꺼냈다.
“포졸을 풀어서 다시 그 폐가에 보내 봤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사람 사는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이 아이 혼자서 그곳에서 살았던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대답을 들은 명월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전에 아이에게 밥을 먹였을 때, 아이는 꽤나 서둘렀다. 그건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가기보단,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서두르는 느낌이었다. 그때 자신이 느꼈던 게 잘못된 것이었던 걸까.
뭔가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 드는 걸 느끼며 명월은 중얼거렸다.
“일단 아이가 눈을 뜨고 나면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군.”
그 말에 이방은 입을 다물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 * *
방에 조금 머물던 이방이 돌아가고, 혼자서 다시 자리를 지키던 명월은 몸이 뻐근해짐을 느끼곤 밖으로 나왔다. 대청 가운데에 서선 양팔을 들거나 고개를 돌리면서 굳은 몸을 풀어주려는데 어색한 헛기침소리가 들린다. 이건 또 뭔가 싶었다. 그리고 대청 앞에 어색하게 서 있는 복운을 발견했다.
“사또.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괜찮으시다면 방에 들어가서 쉬십시오.”
피곤한 건 복운도 마찬가지였다. 내내 방에서 나오지 않는 명월이 신경 쓰였던 그는, 멀리 떨어지지도 않고 근처를 배회하면서 명월이 쉬기를 바라고 있었다.
지금도 가능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어색한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려다보기만 하려니 복운이 대청 위로 양손을 올렸다.
“제가 이곳에 있겠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건넛방으로 들어가서 좀 누워 있으라는 거다. 안 졸고 아이가 일어날 때까지 옆에 제대로 붙어 있을 수 있다는 양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는데 대청 아래쪽에서 갑자기 하얀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하얀 고양이를 본 복운이 놀라선 황급히 나비를 잡고 “왜 여기에 왔어?” 라면서 몸을 돌리려던 순간 명월이 입을 열었다.
“복운아.”
왜 이럴 때 이름을 부르는지 모르겠다. 움찔한 복운은 나비를 든 채로 조심스레 뒤를 돌아봤다.
“왜, 왜 그러십니까?”
“잠깐만 가만히 있어 봐라.”
왜 가만히 있으라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명월이 꺼낸 말이니 듣지 않을 수 없었던 복운은 잠자코 있었고, 명월은 쪼그리고 앉았다.
복운이 나비를 들고 있어서 눈높이에서 볼 수가 있었던 명월은 중얼거렸다.
“뚱뚱하군.”
그 말과 동시에 명월이 오른손을 뻗었다. 검은 장갑을 끼고 있는 쪽이었다. 왜 그러나 싶어 명월이 나비에게 손을 뻗는 순간 긴장한 복운이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었다. 그러는 동안 명월의 손이 나비의 얼굴 앞에 닿았고, 다음 순간 머리를 쓰다듬었다.
설마하니 때리려는 건가 싶었던 복운은 명월이 그저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기만 하자 그게 의외라는 양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가락으로 나비의 뺨을 툭툭 친 명월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나비가 졸린 눈을 들어 명월을 올려다봤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명월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살 좀 빠지게 운동 좀 시켜라.”
그 말을 남긴 명월이 향한 건 본인의 방 쪽이었다.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사라지는 걸 본 복운은 눈을 끔벅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난 이정도가 딱 좋은데…….”
들고 있던 나비를 빤히 보던 복운은 당장 짚신을 벗었다. 대청에 올라가서 아이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입구 쪽에 나비를 내려놓은 그는 신중한 얼굴로 말했다.
“난 방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 나비 넌 여기에 얌전히 있어야 한다. 다른 곳에 가면 안 된다. 아빠 말, 잘 들어야 한다. 알았지?”
어느새 아빠가 되어 버린 복운은 진지한 얼굴이었지만, 나비는 여전히 속을 읽을 수 없는 특유의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만 있는 모습이 귀엽기만 했던 복운은 커다란 손으로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냉큼 방으로 들어갔다.
복운과 명월이 들어가자 대청 위에 홀로 남게 된 나비는 가만히 있었다. 눈을 반쯤 뜬 채로 있는 나비를 두고, 마당 한편에 자리를 잡고 탕약을 끓이던 이가 뒤를 돌아봤다. 나비를 빤히 보던 그는 “더럽게 못생겼네.” 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못생겼네, 운운하는 순간 나비의 눈동자 안쪽으로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이내 크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한 나비는 다소곳이 모은 앞발에 턱을 올리곤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