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방 안으로 들어간 명월은 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오른손을 펼쳤다.
만질 때 어떤 반응인가 싶어서 건드려 본건데 의외로 부드러웠다. 껄끄러워서 더 가까이 접근하지 않으려 했던 게 있기는 한데, 일단은 고양이였다. 머리를 만지고 부드러운 털이 닿았을 때 그걸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자신도 참 이상하다면서 명월은 손을 움켜쥐었다가 펼쳤다.
‘이건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줘선 안 된다.’
그리 말하면서 붕대를 감아주던 이가 떠오른다.
그 표정이 다른 때에 본적 없을 정도로 굳어 있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두려워하는 것도 같았다. 언제나 늘 대차던 사내가 대체 무얼 두려워했던 걸까. 알 수 없다.
본인의 오른쪽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손바닥을 살피던 명월은 가죽에 손을 댔다. 이런 식으로 벗는 건 참 오랜만이라 싶으면서도 천천히 장갑을 빼냈다.
장갑을 벗자 시원한 건 있었다. 손을 움켜쥔 채로 상을 누르고 있던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다. 그리 생각을 하면서 손을 펼치고 천천히 돌렸다. 눈을 내리뜨곤 손바닥 안쪽을 살피자 검은 문양이 보였다.
꽃 같기도 하고, 단순한 문양 같기도 한 그림이다. 그걸 본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숨기려 하기만 했기에 자세히 본 적이 없어도 모양은 기억하고 있었다. 암암리에 이 문양에 대해서 알아보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중간에 멈춰야만 했다.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이었다.
검은 가면을 쓴 남자가 나타났고, 이후로 문양이 생겼다. 직후 그는 이 문양을 감추었고, 바로 살던 곳에서 나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자신을 혼자 두고 떠나 버렸다. 그가 자신의 곁을 떠난 건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일 터였다. 자신을 버리고 간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보통 사람들처럼 살기를 원했던 게 아니었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명월은 손을 움켜쥐었다.
불현듯 뼈가 시릴 정도의 쓸쓸함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이대로 난 영원히 혼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마음 한구석이 싸해진다.
일단은 인정을 받고 싶어서 이런 자리에 앉아 있는 거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다시 숲으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어도 그리할 수 없게 만드는 일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는데다가―.
‘네놈, 그거냐?’
빈정거리듯 묻는 백호의 뻔뻔한 얼굴을 떠올린 명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놈!”
날카롭게 내뱉으면서 세게 상을 후려친 명월은 방 한쪽을 노려봤다. 눈앞에 백호가 있다면 당장 그놈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저 좋을 대로 지껄였겠다. 다음에 보게 된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명월은 머리가 차게 식었다.
아니. 앞으로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말라고 말한 건 자신이었다. 그놈하고는 쉽사리 잊을 수 없을 만한 일이 있긴 했지만, 그걸로 놈이 말한 빚을 청산한 거라면 된 게 아닐까.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엮일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복운이 데리고 있는 저 돼지 고양이도 그렇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명월은 사또, 하는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이방의 목소리였다.
“뭔가.”
낮에 들렀다가 간 것 같은데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혹 자신이 이 안에만 있는 동안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었던 명월은 급히 장갑을 끼웠다. 그러자 문을 열고 이방이 들어와 무릎을 꿇고 앉아 조심스레 말했다.
“사또. 화소군 행수가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며 서찰을 보내 오셨습니다.”
그리 말하며 이방은 품에서 잘 접힌 붉은 한지를 꺼내 내밀었다.
명월은 앞으로 손을 뻗어 그 한지를 살폈다.
촉감이 좋은 고급 한지였다. 이런 걸 편지를 쓰는데 사용하는 건가. 돈이 많기는 한 모양이라며 바로 서신을 펼쳐 안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
안에 적힌 글귀는 길지 않았다. 짧은 글을 한 번에 읽어 내린 후 붉은 종이를 내려놓자 이방이 빤히 바라본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궁금한 거겠지.
“호란에서 한잔하자는 군.”
“호란에서 말입니까?”
“내가 호란을 좋아하는 건 이미 파다하게 소문난 모양이로군.”
그 말에 이방은 딱히 뭐라 해 줄 말이 없었다. 실상 명월이 반양에 온 이후로 대낮에도 호란의 호접화를 찾은 건 대부분이 아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소문이 은밀하게 떠돈다 할지라도 본인이 자처한 일이니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이 초대를 승낙해야 하는 건가.”
“사또께서 내키시면 가시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요.”
“자네는 내가 이자와 친분을 맺었으면 싶은 게 아니었나?”
“제가 할 수 있는 건 조언일 뿐입니다.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리시는 건 사또시지요.”
“화소군과 친분을 만드는 게 내게 이득일 것 같나?”
“모르고 지내시는 것보단 많은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자는 사또께서 하시는 것과는 또 다른 일을 하는 사내이니까요.”
“그러다가 그가 잘못을 저지르면 내가 눈을 감아 줘야 하나?”
내내 차분하게 대답을 하던 이방이 지금은 입을 다물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제대로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있던 이방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정도로 일처리가 어설픈 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서운 거야. 그런 자들과는 친분을 만들어선 안 되네. 그렇다고 적이 될 수도 없고. 이것 참 난감하군.”
이병현 대감처럼 노골적으로 돌아선 것 같은 자들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지만, 화소군은 아니었다. 도통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자였다.
저번에 선물을 보낸 것만 해도 그랬다. 다른 사람들 보고 소문내라는 식으로 수레에 선물을 담아 보내왔지. 과거에 급제하거나 큰 경사가 있을 땐 그런 선물이 줄지어 들어오니 몇 가지 골라서 받을 순 있어도, 한 사람이 떡하니 보낸 물건은 받을 수 없었다. 애초에 뇌물 같은 걸 받을 마음도 없지만, 그게 거상의 뒷거래를 트기 위한 방식이라면 적당이 맞장구를 쳐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방식이 이상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자신과 뭘 하고 싶은 걸까.
거기까지 생각한 명월은 붉은 종이 위에 손을 올렸다.
그자가 자신을 신경 쓰는 것 같기는 한데…….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가마를 준비하게.”
다른 때 호란을 갈 때 명월은 말을 타고 가거나 걸어서 그곳을 찾았다. 다른 사람들이 봐도 상관치 않는다는 양 당당하게 굴었던 그가 지금 가마를 준비하라는 말에 이방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네, 라고 대답했다.
* * *
커다란 가마가 호란 뒷마당에 들어서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움직여선 가마의 앞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거기서 사내가 내렸다.
청의 장삼을 걸친 사내는 한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펼쳐서 얼굴을 가렸지만, 그리한다 해서 특유의 준수함이 숨겨지는 건 아니었다. 누군지 알아보는 자들도 있겠지만, 다들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고 꼬마 기생만이 곁으로 다가왔다.
“나으리. 절 따라오시지요.”
그 말에 명월은 가마를 넘어가 앞으로 걸어갔다.
돌 계단을 올라서 신을 벗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동안 꼬마 기생이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그를 안내했다. 꾸물꾸물하게 이어진 곳을 지나쳐 넓은 문 앞에 도착한 꼬마 기생은 옆으로 물러섰다. 제 할 일은 거기까지라는 듯 양손을 모은 채로 다소곳하게 서 있는 걸 본 명월이 부채를 접었다.
눈을 내리뜨고 바라보자 꼬마 기생이 위를 흘깃 본다. 시선이 부딪치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웃음이 나온다. 묘한 분위기인지라 조심하기는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끝까지 모르는 척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도 문이 열리는 순간 사라졌지만 말이다.
문을 열기 위해서 양옆에 서 있는 것도 명월이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다소곳하게 있는 모습이 평소와 사뭇 달랐다. 명월은 그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면 안쪽에 차려진 거창한 상차림과 오른쪽에 앉아 있는 화소군, 왼쪽에 있는 호접화를 발견했다. 선남선녀였다. 그래서일까.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든 명월은 그들 앞으로 다가가며 먼저 웃어 보였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게 되었소.”
“아닙니다. 저도 막 왔습니다.”
화소군의 말을 들은 명월은 눈을 내리떴다. 호접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녀 앞을 지나친 명월은 의도치 않게 자신이 상석에 앉게 되는 상황에 한쪽 눈썹을 올렸다. 정말 이렇게 앉아도 되는 건가 싶어 화소군을 내려다보자 그가 웃으면서 아래쪽으로 손을 뻗었다.
“앉으시지요.”
“그럼, 실례하겠소.”
애초에 자신이 상석에 앉기를 바라고 이런 식으로 자리 선정을 한 거겠지.
명월은 자리를 잡고 앉아선 허리를 세웠다. 그러자 호접화도 자리에 앉으면서 그를 바라봐 온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이네. 그래서 따뜻한 밥과 국부터 먹고 싶군.”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기방에 와서 밥을 달라 하는 건 자신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은 해도 속이 출출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빈속에 술이 들어가면 더 빨리 취하겠지.
“술만 마시는 자리는 아니지 않소. 밥부터 먹고 시작합시다.”
“그러시지요. 저도 점심을 가볍게 먹어서 속이 출출하던 참이었습니다.”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긴 해도 실상 속내를 간파했을 거다.
젊은 놈이 늙은 너구리처럼 굴고 앉았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인가 싶었던 명월은 물이 담긴 잔을 들었다. 그곳에 입술을 대고 마시려는데 문이 열리고 기녀가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움직인 그녀는 명월과 화소군 앞으로 공기밥과 국 등을 준비해 주었다. 상 위에 놓인 건 술안주였지만 먹기에 따라선 밥반찬도 될 수 있을 법한 것들이었다.
기녀들이 물러나자 명월은 바로 젓가락을 들었다. 먼저 속이 출출하다 말을 꺼낸 게 있었기 때문에 크게 밥을 떠 입에 넣었다. 우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인 명월을 보며 화소군도 수저를 들었다.
“여기저기를 다녀봤지만 호란처럼 음식 맛이 깔끔한 곳은 드물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거기다가 여기엔 반양 제일의 미녀가 있지.”
명월의 말에 묵묵히 그 앞으로 전 등을 밀어주던 호접화가 눈동자를 든다. 대답 없이 눈꼬리를 가늘게 휘며 웃는 얼굴이 기가 막혔다. 잠시 빠져서 그녀의 미모를 감상하는 동안, 화소군이 지나치듯 말했다.
“반양 제일의 미녀에 미남자께서 나란히 앉아 계시니 제 눈이 호강을 합니다.”
그건 자신과 호접화를 두고 하는 말일까.
그냥 한귀로 듣고 넘겨도 될 말이었지만, 명월은 바로 맞장구를 쳤다.
“나도 자리에 앉기 전에 그런 생각을 했는데. 선남 선녀가 앉아서 보기가 좋구나, 하고 말이오.”
“이것 참, 의도치 않게 칭찬을 듣게 됩니다.”
“나도 마찬가지요. 입에 발린 말이라 해도 들으니 기분이 좋군.”
“이런, 입에 발린 말이 아닙니다. 전 그런 식으로 아첨하는 사람이 아니랍니다.”
화소군의 말에 명월은 웃으면서 재차 밥을 떠 입에 넣었다.
딱히 마음이 편한 상대가 아니기 때문에 그를 상대하는 일은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입 안에 음식이 있으면 말을 덜 걸겠지. 그런 생각으로 국도 떠 먹고, 호접화가 권하는 갈비찜도 입에 넣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정말로 먹는 일에만 집중하게 되어 밥이 절반 가량 사라져 있었다.
난 먹은 기억이 없는데 밥이 전부 다 어디로 가 버린 건가 싶어 공기를 보다가 고개를 드는 것에 맞춰서 화소군이 재차 말을 건넸다.
“사또께선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지금껏 조선 각지를 돌아다녔지만, 사또처럼 아름다운 사내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말에 명월은 입 안에 있던 걸 삼키고 물을 마셨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기에 자신의 얼굴이 어찌 생겼는지에 대해선 그보단 명월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아름다운 거고, 아니면 계집애 같은 거다. 이 얼굴 때문에 어려서부터 성가신 일을 많이 겪어야만 했던 명월은 웃음 띤 얼굴로 화소군을 바라봤다.
“그런 말은 호접화를 앞에 두고서 할 게 못 되는 것 같소. 이곳 제일의 미는 내가 아니라, 그녀이니까.”
내 얼굴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마라. 그런 속내가 전해졌으면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늘 명월의 마음을 헤아려 주던 호접화가, 이번에는 매정하게도 화소군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아닙니다. 저도 처음 사또를 뵙고는 세상에 이런 사내도 있구나 싶어 감탄했답니다.”
양 옆에 앉은 사람들이 한마다씩 던지는 말에 명월은 혀를 찼다.
“어허, 자네까지 왜 이러나. 부끄러워서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군.”
“약주를 한잔 따를까요?”
“아니. 일단 밥부터 먹고 나서 시작하고 싶군.”
적당히 배가 찬 것 같기는 하지만, 남은 게 있으니 버리기에 아까웠다. 그래서 다시 수저질을 하는 명월을 두고 화소군이 맞은편에 앉은 호접화에게 눈길을 던졌다.
“흥이 떨어지는 것 같군. 악기를 연주해 봐라.”
“그리하지요. 자희야.”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자희가 들어왔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기녀의 팔에 들린 거문고를 본 명월은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밥 먹는데 음악이라. 별론데. 생각은 그리해도 입은 열지 않았다. 일단은 화소군이라는 사내가 어찌 행동을 하고 말을 하는지, 조금 더 알아보고 싶었던 거다.
느리게 턱을 움직이는 동안 자희가 자리를 잡고 앉아 거문고를 받았다. 자세를 바로 잡은 그녀의 손이 거문고의 줄에 닿고, 가볍게 튕기면서 바로 연주가 시작됐다.
자희는 웃음이 많고 엉뚱한 구석이 있는 여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그녀의 성품이 묻어나오는 밝고 경쾌한 음률이었다. 어색한 사람과 있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긴장하고 있었던 명월은 그게 풀리는 걸 느끼며 마지막 남은 밥을 떠 입에 넣었다.
그렇게 한 곡조가 다 끝나기도 전에 화소군이 입을 열었다.
“듣기는 좋지만, 자네 실력만큼은 아니로군.”
그 말에 호접화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호접화가 일어서자 자희는 바로 손을 멈추고 옆으로 물러났다. 거문고를 든 채로 밖으로 향하는 자희 대신에 호접화가 그 자리에 앉고, 다른 기녀가 거문고 하나를 조심스레 들고 들어왔다.
유난히 신경 써서 조심스럽게 거문고를 호접화에게 건넨 기녀는 바로 밖으로 나가지 않고 뒤쪽으로 가서 앉았다.
그러는 동안 호접화는 양손을 마주 잡고는 가볍게 주무르더니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 기다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줄에 닿는 순간, 공기의 미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처음엔 느낌 탓이겠거니 싶었지만, 아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줄에 닿기 전부터, 음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별다른 기교 없이 줄 위에서 움직이는 순간 명월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토해 냈다.
짧은 음만으로도, 호접화와 자희의 실력 차이를 알아 버렸다.
눈을 내리뜬 채로 섬세하고도 조심스럽게 줄을 타는 호접화의 모습에 빨려 들어간다. 본래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걸 알고 있긴 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어찌 사람이 이렇게나 거문고를 잘 탈 수 있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거문고 음을 처음 듣는 모양이십니다.”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말에 명월의 눈썹이 살짝 꿈틀한다.
하지만 금방 그 내색을 지운 명월은 화소군을 바라봤다.
“일단은 그렇소만……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군.”
“그녀의 실력은 조선 최고일 겁니다. 저만한 여인이 이런 곳에 발이 묶여 있는 게 안타까울 뿐이지요.”
이런 곳이라. 그리 말을 해도 어쩔 수 없는 장소이긴 했다.
여인으로서 원해서 기방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을 테니.
“안타까운 여인이 그녀뿐이겠소.”
중얼거리는 동안 갑자기 속이 씁쓸해지면서 술이나 한잔 마시고 싶어졌다. 그 마음을 달래려 호접화에게 시선을 줬다. 하지만 계속 그녀를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아까부터, 아니 밥을 먹을 때부터 집요하리만치 바라보는 화소군 때문이었다.
아까 한 대답이 이상했던 걸까. 그렇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없었던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명월은 화소군을 흘깃 봤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요.”
그 순간 화소군의 눈매가 조금 더 가늘게 휘어졌다.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상당히 생각이 열린 분이십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저렇게 말하면 이쪽에서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명월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난 편협한 인간이요. 생각이 열려 있다니 당치도 않지.”
“다른 대감이나 양반들에 비하면 굉장히 사고가 넓고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사또 같은 분들이 많아야 세상 사는 게 재미있을 텐데 말이지요.”
자신 같은 사람이 많아야 세상 사는 게 재미있다라.
진짜 나를 모르기에 저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거였다.
정말은 별생각 없이 말하는 걸 수도 있겠으나,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하는 말과 행동 모든 것에 계산이 깔려 있을 것 같은 의혹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하는 말만을 듣고 있어선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명월은 먼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장사하느라 세상을 많이 다녀 보셨겠소. 어디가 가장 마음에 드셨소?”
“조선 팔도 멋진 곳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이 반양은 으뜸이지요.”
“왜? 그녀 때문이요?”
‘호접화 그녀 때문이요’, 라고 묻는 말에 화소군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니요. 그런 것 말고도, 이곳은 묘한 기운이 흘러서 간간히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벌어지곤 하지요.”
그 순간 명월의 입가에 서려 있던 미소가 아주 조금 지워졌다.
별거 아닌 투로 말하는 것 같으나, 그 말을 듣는 명월은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자신을 대상으로 두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만, 지레 찔리는 반응을 취하게 되는 것도 언짢다. 자연스레 표정이 굳어지는 명월이었으나 화소군은 모르는 척 굴었다.
“더 드시지 않고요.”
“아니요. 더는 생각이 없소. 이 정도가 딱 적당한 것 같군.”
“그러면 밥상을 물리도록 하지요.”
화소군이 손짓을 하자 문가에 앉아 있던 기녀가 누군가를 불렀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온 기녀가 명월과 화소군 앞에 놓인 밥과 국그릇을 챙겨 갔다. 앞쪽으로 새롭게 술잔과 다른 음식이 놓이는 걸 바라보던 명월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거문고를 연주하는 호접화는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저 상태로 마냥 두기가 좀 그랬다.
“음악은 그만 들어도 되니, 그녀를 옆에 오도록 하는 게 어떻겠소?”
“아니요. 원래 음주는 가무와 함께여야 흥이 돋기 마련이랍니다. 거기다 오늘은 사또를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게 있답니다.”
화소군은 뒤로 손을 뻗어선 하얀 술병을 들고 와 상 위에 올렸다.
티 없이 깔끔한 하얀 자기가 명월이 보기에도 대단해 보였다.
“훌륭하군.”
“안의 내용물은 훨씬 더 훌륭하지요.”
딱 보니 술병이었다. 조선 팔도와 바다 건너 중화와도 거래를 트는 거상이니 분명 대단히 좋은 술일 터였다.
화소군이 초대한 자리라 해도 명월은 빈손이었다. 그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술이라곤 해도 화소군이 물건을 먼저 꺼내자 그게 조금 신경 쓰였던 명월이 지나치듯 물었다.
“이런 식으로 갑작스러운 선물을 하는 걸 즐기시오?”
“그렇습니다. 대개 보통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선물을 받을 경우 크게 기뻐하고 감동을 하는데 사또는 아니시로군요. 이번에도 제가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라고 말하는 건 수레 건도 실수라고 생각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불쾌해했던 걸 전달받아 듣고는 이런 반응인 걸지도 모르지.
명월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대낮에 요란하게 수레를 끌고 와 선물이다, 받아라―하면 내가 고맙다며 엎드려 절이라도 하실 줄 알았나 보오?”
“엎드려 절까지는 아니라 해도 대게 보통 사람들은 수레를 안으로 들입니다.”
화소군이 아닌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 말대로 보통 사람들은 공짜를 마다하진 않는다. 거기다 화소군 같은 거물과의 친분을 쌓게 되는 일이라면 버선발로 뛰어나와 선물을 몽땅 받아들이겠지. 자신도 그들과 다른 행동을 취함으로 인해 유난 떤다는 인식을 심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단순히 그 선물이라는 것들을 받는 게 싫을 따름이었다.
게다가 물건 자체는 문제 될 게 없다. 문제 되는 건 그걸 보낸 사람에 있었다.
화소군이 주는 선물이라. 생각 없이 선물을 받았다가 나중에 눈 뜨고도 코를 베어 갈 것 같으니, 다음에도 분명 거절할 거다. 그런 건 말하지 않는다 해도 전해지기 마련인지라 명월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했다.
“난 재물은 입에 풀칠할 정도로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오. 그러니 뇌물은 됐소. 굳이 이런 식으로 신경 쓰지 않아도, 행수께서 절차에 맞춰 제대로 일처리를 한다면 나와 부딪칠 일은 없을 거요.”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본래 일처리 하나는 제대로 하는 걸로 평판이 높았습니다.”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하지만 수레 일을 겪고 보니, 내가 그쪽에게 우습게 보인 건가 싶어 기분이 그리 썩 유쾌하지 않았소.”
“사또를 우습게 보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오해를 푸십시오.”
“사람 사귐은 술 한잔으로 결정이 나기도 하다만, 오해라는 건 한 번 쌓이면 풀기 어려운 것이니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걸 털어내겠다 말하긴 어렵겠구려.”
입을 다문 명월의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었다.
그건 미소 띤 얼굴로 있는 것하고는 미묘하게 다른 거절법이었다. 화소군은 모르는 척 병 윗부분의 매듭을 풀었다.
“술 한 잔 정도 따르는 건 허락하시겠지요.”
“물론이오. 그 정도로 속 좁은 인간은 아니라오.”
명월은 본인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내밀었다. 화소군이 병을 기울여 술을 따른다. 마치 물처럼 맑고 투명한 색이었다. 이게 정말로 술인가 싶어 그걸 물끄러미 보다가 입술을 대고 한모금 마신 명월의 눈이 조금 커졌다.
술을 남김없이 모두 비운 명월은 빈 잔을 내려다봤다.
지금 내가 대체 무얼 마신 건가 싶은 얼굴로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화소군이 묻는다.
“어떠십니까?”
묻기 전부터 화소군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이 훌륭한 술은 반드시 마음에 들어 할 거다. 그리 말하고픈 눈동자로 바라보는 것에 명월은 입 안에 담겨 있던 술을 넘기곤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
빈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정말 훌륭했다.
잔은 이미 깨끗하게 비워졌으나 미련이 남은 사람마냥 잔 바닥을 내려다보던 명월이 고개를 들었다.
“설마하니 이것도 동충하초인가, 뭔가가 들어간 건 아니겠지?”
그 말에 화소군이 소리 내 웃었다. 정말 우스운 말을 들은 것마냥 크게 입을 벌리고 웃은 그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술까지 담을 수 있을 정도로 흔한 게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건 제철에 나는 약재와 꽃을 섞어서 담은 술입니다. 만들기가 어렵고, 완성되는 것도 몇 개가 안 되어서 무척 고가로 거래가 되는 물품입니다. 실제로 그 술은 주상 전하께서도 쉽게 드실 수 없는 겁니다.”
“그것 참 대단하군.”
중얼거린 명월은 저도 모르게 잔 안에 혀를 댈 뻔했다. 귀한 술이니까 바닥까지 싹싹 핥아 먹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화소군이 재차 병을 들었다. 그리로 술잔을 반사적으로 내밀게 된다.
너무 속 보이는 반응인가 싶지만,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한잔으로는 맛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이런 건 적어도 두 잔은 마셔야 하는 법이었다.
재차 잔에 술이 차고, 그걸 확인한 명월이 손을 내렸다.
“나만 마시는 것도 미안하군. 한 잔 받으시게.”
“고맙습니다.”
잔을 내려놓은 명월은 화소군의 손에서 병을 들고 갔다. 그러자 화소군이 무릎을 꿇고 앉아선 양손으로 잔을 내민다. 바로 자세를 바꾸는 것에 명월은 당혹스런 얼굴이 되었다.
“편하게 앉아도 되는데―.”
“사또 앞에서 어찌 편하게 앉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나이 차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니고 격식을 갖춘 자리도 아니었다. 가볍게 굴어도 된다지만, 막상 화소군이 너무 편하게 굴면 그건 그것대로 마음에 들지 않을 거다. 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면서 잔에 술을 따른 후에 병을 내려놨다.
손끝에 닿는 병의 감촉이 매끈하다. 좋은 병에 담겨 있기에 술맛이 훌륭한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화소군이 물었다.
“―만약 개인적으로 선물을 챙겨드린다면, 그것도 거절하실 겁니까.”
참 끈질긴 사내였다. 왜 이렇게 퍼 주고 싶어서 안달인지.
속으로 혀를 차던 명월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아닌 척 몇 가지 골라도 무방하지 않겠소. 유명한 거상이 준비한 거라면 고가의 것이 많을 텐데, 나중에 팔아서 용돈벌이가 될 것 같기도 하고―.”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하는 말에 화소군이 소리 내 웃는다.
“제가 드리는 물건은 시간이 쌓일수록 점점 더 값비싸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팔아서 용돈벌이로 사용하시는 겁니까?”
“어차피 내게로 온 것이니, 내가 잘 사용해야 행수의 선물을 제대로 받았다고 볼 수 있지 않겠소. 오래 묵으면 비싸진다고 뒀다가 내가 죽기라도 하면 그건 똥 되는 거지.”
“나중에 후손들이 잘 사용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으십니까.”
“……후손이라.”
중얼거리던 명월은 웃었다.
“생길 리가 없지.”
혼잣말 하듯 나온 말에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 사내 앞에서 괜한 말을 했다면서 명월은 바로 잔을 기울였다.
작은 잔은 얼굴을 전부 가려 주진 못하지만, 순간적인 표정 변화는 감추어 준다. 화소군도 따라서 잔을 비우는 걸 본 명월은 다시 병을 집었다.
“한 잔 더 드시오.”
재차 화소군의 잔을 채우자, 이번엔 그가 병을 가지고 가 술을 따랐다.
병이 작은 것치고는 술이 꽤 담기는 모양이라며 명월은 잔을 들었다. 이번에는 잔에 입술을 대고 목을 축이듯 아주 조금만 마셨다. 입 안으로 시원하게 퍼지는 맛이 일품이다. 혼자서, 혹은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을 때 이런 걸 마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운 대로 참아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명월은 잔을 든 채로 고개를 돌렸다. 화소군은 아까부터 계속 명월을 보고 있었다. 몰래 훔쳐보는 거라면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피하기라도 하려만 그는 그런 게 없었다.
그의 얼굴엔 언제나 늘 똑같은 표정이 있었다. 뭔가 굉장히 흥미로워하는 느낌을 풍기는 그런 얼굴. 대체 자신의 무얼 보고 저런 표정인 건가 싶었던 명월이 물었다.
“왜 그러시오? 내 생김새가 그렇게나 이상한가?”
“아닙니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적당히 열이 올라서 참으로 고우시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난 사내이네. 외모에 대한 칭찬이 너무 과한 것 같군.”
“아름다운 걸 보고 호감을 느끼는 게 상대가 꼭 여자이기 때문인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보통 사내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을 하지.”
“전 세상의 온갖 것들을 보고 만지는 사람입니다. 여자니 남자니, 그런 건 상관없는 일이랍니다.”
그냥 기분 더러우니까 쳐다보지 마. 직설적으로 말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이번 한 번만 더 참자면서 명월은 입꼬리를 비틀려 올렸다.
“재미있는 사람이로군.”
“사또만 할까요.”
묘한 빈정거림이 전해지는 건 비단 느낌 탓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오늘은 가볍게 앉아 있다가 갈 예정이었다. 오늘만큼은 예정대로 할 거라며 명월은 느리게 술을 마셨다.
“호접화. 자네 춤도 춰 보지 않겠나?”
그 말에 명월의 눈썹이 살짝 올라간다.
뭔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던 명월과 다르게, 거문고에서 손을 뗀 호접화를 바라보는 화소군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거문고를 타던 사람에게 춤을 추라 시키는 게 별로 이상할 거 없다는 듯 구는 화소군이나, 명월은 그렇지 않았다.
“거문고 소리도 충분히 듣기 좋은데 왜…….”
“거문고도 좋지만, 그녀의 춤 솜씨 또한 알아주지요. 한 번 보십시오. 눈을 감을 때마다 생각이 나실 겁니다.”
그리 말한 화소군이 웃는다. 덩달아 호접화가 거문고를 치우고 몸을 일으키는 걸 본 명월은 입을 다물었다.
자희가 다시 들어와서 거문고를 받아 방 한쪽에 앉고, 줄을 튕기는 것에 맞춰서 호접화가 움직였다. 뭔가를 달리 더 준비한다거나 망설이는 것도 없었다. 방 안을 채우는 음에 맞춰서 호접화가 그 위를 노니는 듯 움직였다. 가볍게 손을 살랑거리듯 움직이면서 간혹 이쪽으로 시선을 던질 때마다 명월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바로 저런 모습이겠지요. 정말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화소군이 첨언을 하지 않아도 명월도 눈과 귀가 있기 때문에 지금 호접화의 자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 수 있었다.
아름답긴 정말 아름다웠다. 그녀에게 실례가 될지도 모르는 생각이겠지만, 이런 곳에서 기생으로 있기엔 정말 아까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저 아름다운 모습에서 미묘하게 누군가가 겹쳐진다.
호접화의 기다랗고 깊은 눈매와 무심한 눈빛. 저것에 약간의 거침이 더해지는 순간 그 재수 없는 사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아 버리고 마는 명월의 행동에 옆에 앉아 있던 화소군이 이상을 감지했는지 바로 물어온다.
“왜 그러십니까?”
그 말에 다시 눈을 뜬 명월은 물이 담긴 잔을 들었다.
“아름답기는 한데, 저 모습을 보자니 누군가 떠오르는군.”
“누가 말입니까?”
“그런 게 있소.”
말하고 싶지 않고, 생각은 더더욱이나 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대하기 껄끄럽다곤 해도 모처럼 좋은 술을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인데 왜 자꾸만 그놈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저처럼 아름다운 호접화를 보고 백호가 겹쳐지다니. 어불성설.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면서 명월은 남은 술잔을 비웠다.
한 잔을 다 마시고 나서 상에 한쪽 팔을 올리고 호접화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재차 술이 채워진다.
술맛은 좋고, 독하지도 않았다. 마시라고 한다면 몇 병이고 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가 화소군이었다.
저번에 수레에 대한 사과를 하기 위해서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건 아닐 거다. 단순히 술 자랑을 하려고 사람을 부른 것도 아닐 테고. 호접화의 거문고와 춤 솜씨를 보여 주려 하는 것도 아닐 거다. 그러면 왜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걸까. 왜 자신을 부른 걸까.
알 수가 없으니 속이 타는 것 같다면서 명월은 재차 잔을 비웠다.
“천천히 드십시오.”
천천히 마시고 싶은데 잔이 빌 때마다 그걸 채우는 게 바로 그였다. 그런 주제에 저런 말이라니.
우습다 여겨진 명월이 그 쪽으로 시선을 둔다.
“술을 빨리 비우게 해서 날 취하게 하려 했던 게 아닌가.”
“그런 의도는 없었습니다. 본래 대화라는 건 깨끗한 정신에서 나누어야 즐거운 게 아니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하지만 술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선 화소군의 얼굴을 똑바로 보는 것도 껄끄러웠다. 알 텐데도 느물거리게 말은 잘 한다면서 명월은 떡을 집어 입에 넣었다.
아무 생각 없이 먹었는데 꿀떡이었다. 어렸을 땐 참 좋아했던 건데 어느 날 부터인가 먹지 않게 되었지.
왜 그랬더라―.
문득 생각이 나려던 순간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전에 도총관 유일선 영감을 뵌 적이 있었습니다.”
명월의 눈썹이 위로 올라간다. 바로 반응을 보이진 않고 굳은 듯 가만히 있다가 눈동자만 옆으로 옮겨서 그를 바라봤다.
“원래는 다른 분을 뵙기 위해 찾아간 자리였는데 그곳에 계셨습니다. 군계일학이 따로 없더군요. 그 어떤 분들보다 잘나고 의연하신 모습이셨습니다. 때문에 말을 섞기가 꽤나 힘들었습니다. 그분을 떠올리니 지금 사또의 모습이 이해가 됩니다.”
“……뭐가 말이오.”
“의연하고 차분하고 사람 다루시는 게 능수능란하시지요.”
화소군의 입꼬리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만만치 않은 분이라는 걸, 이제야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가 보이는 미소는 지금껏 보던 것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미묘하게 신경을 거슬리는 무언가를 느낀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나와 싸우고 싶은 거요?”
“아닙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는 주제에 아니라고 할 셈인가. 우습지도 않다면서 명월은 손가락으로 상 위를 두드렸다.
“내게 호감이 있어 친분을 쌓으려 이러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싫은 사람을 일부러 초대하지는 않을 테고, 그렇다면―.”
속셈이 대체 무얼까. 자신을 통해서 그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라는 게 있을까. 애초에 장사꾼이라는 건 본인에게 떨어지는 게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족속이었다. 그의 의중은 알 수 없으나 좋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닐 거다.
“무얼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통해선 아무것도 얻어 낼 수 없을 거요.”
그런 게 아닙니다, 라고 할 줄 알았는데 입을 다물고 있다.
속을 읽을 수 없는 잔잔한 눈빛을 한 채로 바라보는 걸 두고 명월의 눈썹이 살며시 올라갔다.
그래.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건가.
명월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먼저 일어나 보겠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실수한 게 있다면 사과 드리겠습니다.”
“사과하지 마시오. 지금 내가 술에 취해서 실수를 하는 것뿐이니, 사과를 해야 할 건 그쪽이 아니라 바로 나요.”
술을 많이 마셔서 더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 더 큰 실수를 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말라는 느낌으로 웃은 명월은 화소군이 더 붙잡기 전에 빠른 걸음을 옮겼다.
명월이 일어나는 순간 거문고 소리는 멈추었다. 춤을 추던 호접화도 가만히 서 있는 걸 확인한 명월은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아름다운 춤과 듣기 좋은 소리였네. 다음엔 단둘이 있을 때 오붓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해 주시게.”
“사또시라면 언제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시간을 비워 두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명월은 웃었다. 그러곤 열린 문을 빠져나와 왔던 길을 되짚어서 밖으로 나갔다. 대청을 내려와 가죽신을 신으려 할 때, 근처에 서 있던 새끼 기생이 달려와 그걸 돕는다. 처음에는 괜찮다 하려 했으나 쪼그리고 앉은 채로 신을 신겨 주려는 모습에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명월에게 가죽신을 다 신겨 준 새끼 기생이 허리를 세우곤 그를 올려다봤다.
“고맙다.”
“아닙니다. 이게 제가 할 일인 걸요.”
새끼 기생은 웃었다. 그걸 보던 명월은 소매 안쪽에 손을 넣어선 약과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그걸 본 새끼 기생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뺄 살이 어디에 있다고 굶고 그러냐. 그러지 마라. 나중에 다른 언니들처럼 키가 안 크게 된다. 여자는 모름지기 키가 커야 하는 법이다.”
예전에 기녀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언뜻 살을 뺀다고 들었던 말을 두고 하는 말에 새끼 기생은 얼굴을 붉혔다.
“고,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밝은 날이었다면 얼굴이 발갛게 된 걸 걸 들켰을 거라며 새끼 기생은 약과를 소중하게 양손으로 꼬옥 쥐었다.
그걸 확인한 명월은 돌계단을 내려가 뒤쪽에 준비가 되어 있던 가마에 올라탔다.
“관아로 돌아가자.”
문이 닫히기 전에 한 말에 바깥에 있던 사내가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명월은 몸에 들어간 힘을 빼내곤 등을 기대었다.
화소군. 어떤 사내인지 알아보고 싶어서 찾아왔는데 예상대로 였다. 기분만 더럽고 남는 건 하나도 없다면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가능한 앞으로 부딪치지 말았으면 싶지만, 그리 되진 않겠지. 분명 다른 곳에서 재차 마주치게 될 거라면서 명월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 * *
흔들리는 가마 속에 앉아 있던 명월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진다. 역시나 너무 마신 모양이었다. 마시기 좋은 술이라 해서 그게 약한 건 아닐 텐데, 무리를 했다면서 눈을 감았다가 뜬 명월은 뒤로 등을 기대었다.
몸이 나른해진다. 이대로 눈을 감아 버리면 정신줄 놓고 푹 자 버릴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그리하면 기분 좋을 것 같아서 멍하니 있던 명월은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버렸다. 그러자 의식이 점점 가라앉는다. 깊고 깊게,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늪 속에 파묻힌 것처럼―.
그러면서도 의식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분명 자고 있는 중인데도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소리와 기척이 느껴진다.
지금 가마가 향하는 건 관아가 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 벌레의 울음소리, 그에 맞춰서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구나. 관아는 산과는 반대 방향일 텐데―.
그 순간 바로 눈을 뜬 명월은 언제 잠을 잤느냐는 듯 똑바로 앉아 있는 채였다. 좁은 가마 속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던 그는 가마의 움직임이 멈췄다는 걸 느끼곤 앞으로 손을 뻗었다.
가볍게 밀자 밀려지는 문을 느끼면서 앞으로 이동했다. 반쯤 열려진 문 사이로 보이는 바깥은 어두웠다. 하지만 바람결에 맡아지는 숲 냄새가 지금 장소가 어딘지를 깨닫게 했다.
“바깥에 아무도 없는 거냐.”
묻는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실은 묻기 전부터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가마를 여기까지 옮긴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다들 어디로 가 버린 건가 싶었던 명월은 집중해서 주변을 살폈다. 만약 지금이 위험한 상황이라면 가마 안에 앉아만 있는 걸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명월은 문을 크게 열고 밖으로 나가선 똑바로 일어섰다.
밖에 나오자마자 몸을 스치는 찬 기운에 피부가 떨린다. 당장 사방을 확인한 후 명월은 입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거냐.”
그리 묻는 순간 숲 안쪽에서부터 하얀 안개 같은 게 깔리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무언가가 나타나기 전에 벌어지는 농간처럼 점점 차오르는 연기를 본 명월의 안색이 굳는다.
“웬 놈의 장난이냐. 당장 나와라.”
명월은 품에 손을 넣어선 짧은 단검을 꺼내들었다.
그걸 쥔 채로 재차 주변을 살피는 눈빛이 매섭다.
다른 이들이 지금 어디에 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호락호락 당할 마음은 없었다. 정체가 무언지 알 수는 없어도, 이리 구는 것에 대해선 후회하게 해 주겠다면서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는 명월의 등 뒤로 검은 무언가가 내려온다. 거꾸로 매달린 채로 있던 그것은 명월 쪽으로 손을 뻗으면서 속삭였다.
‘고작 그런 걸로 싸울 수 있겠느냐.’
귓가에 닿는 기분 나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단검을 쥔 손에 더 힘을 준 명월은 뒤를 돌아보면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날카로운 비명이 귓가에 닿으면서 머리 한쪽이 지끈거렸다.
그 순간 명월은 꿈에서 깨어났다.
눈을 크게 뜬 명월은 지금 온몸이 흥건하게 젖은 상태라는 걸 깨닫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고 재차 침을 삼키려다가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 옆으로 몸을 돌리자 머리가 지끈거린다.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낸 명월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선 이불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좋지 않았지만, 지금 이곳이 자신의 처소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의 그 모든 것들이 꿈이었단 말인가. 꿈치고는 지나치게 생생했는데. 정말로 있었던 일이었던 것 같은데―.
얼굴을 문지른 명월은 바닥을 더듬었다. 근처에 있던 주전자를 들어선 잔에 물을 따르고 그걸 마시는데 미지근했다. 그래도 아쉬운 대로 물 두 잔을 연거푸 비운 명월은 입을 벌리곤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살짝 예민해진 상태였던 명월은 어깨에 한 손을 올린 채로 문을 노려봤다.
“뭐냐.”
“사또. 접니다.”
복운의 목소리를 확인한 명월의 눈에 들어간 힘이 빠진다.
“안에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다시 눕고 싶었지만, 복운에게 따로 물을 게 있었던 명월은 들어오라 했다. 그 말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복운은 바로 앞까지 와선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손에 쟁반이 들려 있는데 하얀 잔 안에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그건 뭐냐?”
“시원한 꿀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시자마자 드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안 그래도 물 두 잔을 마시고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은 참이었다.
이런 걸로는 참 눈치가 빠른 놈이라면서 명월은 냉큼 잔을 받아선 꿀물을 마셨다. 한 번에 쉬지 않고 끝까지 다 비운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다. 잘 마셨다.”
꿀이 들어서 그런지 입에 촥촥 달라붙는 것 같다면서 입맛을 다신 명월은 주먹으로 뒷목을 두드렸다. 그걸 본 복운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그러게 왜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드시는 겁니까.”
투덜대는 말에 명월은 목에 손을 댄 채로 물었다.
“어제 내가 어떻게 돌아온 거냐.”
“가마 문을 열고 안을 살피자 코까지 골면서 주무시고 계시더이다. 그래서 제가 업어서 방까지 옮겨 드렸는데,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자는 사람이 그 일을 어떻게 다 기억할 수 있겠냐. 당연히 기억나지 않지.”
너무도 태연한 대꾸에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명월을 멍하니 바라보던 복운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금방 돌아오셔서 좋긴 했지만, 술을 그렇게 드시고 올지 몰랐습니다. 험한 세상입니다. 술에 곯아떨어져 계시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단 말입니다.”
“무사히 돌아왔으니 그걸로 된 게 아니냐. 그보다, 간밤에 별일 없었느냐.”
“별일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아직도 눈을 뜨지 않았고―.”
그 말에 목을 주무르던 명월이 행동을 멈췄다.
“아직도 눈을 뜨지 않은 거냐.”
“오늘까지 기다려 보라 했으니, 오늘 안에는 정신을 차리겠지요.”
말은 그리해도 자신감은 없는 얼굴이었다.
복운이 의원인 것도 아니고, 그가 곁에 있는다 해서 아픈 아이가 금방 낫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를 붙잡고 뭐라 하는 건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명월은 손을 내리곤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심란한 얼굴로 있던 명월은 일단 가볍게 몸을 씻을 준비를 해 달라 했다.
* * *
좋은 술이긴 했지만, 이동 중에 갑자기 잠이 들 줄은 몰랐다. 분명 자리에서 일어나 호접화에게 말을 건네고, 새끼 기생에게 약과를 줄 때만해도 괜찮았다. 그런데 가마에 올라타는 순간 의식을 잃었다.
정말은 좋은 술이 아니라 어느 순간 갑자기 의식을 잃게 만드는 술이 아니었을까. 그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던 화소군이라는 놈에게 당한 걸까. 그곳에 머무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었다면 거기서 의식을 잃었을 테고, 무슨 일이 생겼을 지도 모른다. 이쯤 되자 물에 빠졌을 때 꼬박 하루를 잤던 것도 의심스러워진다.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실상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에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명월이었으나, 아이의 맥을 짚는 의원에겐 다르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불편한 듯 몇 번이나 명월의 얼굴을 살피던 의원이 아이의 손목을 내리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맥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위험한 고비는 넘긴 것 같습니다.”
그제야 명월의 눈동자가 의원을 내려다본다.
“위험한 고비를 넘겼으니, 이제 괜찮아진 건가.”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게 사또께서 준비하신 귀한 산삼 덕분이 아닐는지요.”
“자네가 불철주야 매달렸기에 호전이 된 거겠지. 수고했네. 아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끝까지 잘 부탁하겠네.”
“물론입죠.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의원은 이불 위에 올려 둔 것들을 챙겨들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나간 후 명월은 팔짱을 풀고 아이를 내려다봤다.
괜찮아졌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아이의 안색이 많이 나아진 것 같았다. 이러다가 오늘 중으로 정신을 차리면 좋을 텐데.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아이의 눈썹이 꿈틀거리면서 흔들렸다.
아주 미미한 반응이었지만 명월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정신을 차리려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당장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얼굴을 일그러뜨린 아이가 신음을 흘렸다.
“……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원이 함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당황한 명월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원을 부르려던 찰나 아이의 다물린 입술을 비집고 어머니, 라는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머니, 죄, 죄송해요. 꼭 가지고 올 테니까…….”
어머니라니. 몇 번이나 아이가 있던 곳에 가 봤지만, 아무도 없었다는 말을 들었던 명월이었다. 혹, 아이가 안 좋은 꿈을 꾸는 게 아닐까 싶어서 깨우기 위해서 손을 뻗자 아이가 울먹거린다.
“꼭, 가져다 드릴 테니까, 그러니까……살려 주세요.”
잠꼬대 치고는 이상한 게 아닐까 싶었던 명월의 안색이 굳는다.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바라보는 동안 재차 살려 달라 말하던 아이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반쯤 눈을 뜬 채로 주변을 살피던 아이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걸 확인한 명월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냐?”
아이가 며칠 만에 눈을 뜨는 건지 모르겠다. 아직은 몸이 온전히 나은 상태가 아니니 무리하지 말고 누워 있으라 말하려던 순간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상을 감지한 명월이 뭘 할 새도 없이 아이는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귀청을 두드리는 날카로운 아이의 비명에 놀란 명월은 저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동시에 놀란 복운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으아악! 아아아악!”
복운이 들어와 묻는 동안에도 아이의 비명은 계속 되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마냥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에 놀란 복운은 문지방을 온전히 넘어서지 못한 채로 주춤거렸고, 명월은 당황해서 급히 아이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진정해라! 우린 너를 해치려는 게 아니야!”
언덕에서 굴러서 많이 다친 것 때문에 놀라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고 일단은 아이를 진정시킬 셈이었다. 하지만 명월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아이는 더 크게 소리를 치면서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어깨를 잡은 손길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온전히 움직일 수 있는 건 입뿐이었다. 그것도 기력이 딸리는지 점점 비명이 잦아든다.
몇 번 더 신경질적인 비명을 내지르던 아이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떨리는 눈으로 명월과 복운, 그 너머에 서 있는 다른 이들을 바라봤다. 그걸 본 명월이 급히 고개를 들었다.
“복운이 너, 나가 있어라.”
“하, 하지만 사또.”
“잔말 말고 다들 문 닫고 나가!”
명월의 매서운 외침에 움찔한 복운이 급히 문을 닫았고, 명월은 고개를 숙였다. 복운을 향해서 소리를 친 것뿐인데 그게 본인에게 향한 것이라 생각 되었는지 아이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있다. 숨기지 못하는 공포를 드러내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명월은 애써 차분히 말했다.
“겁먹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 우린 초면이 아니란다. 전에도 봤었지?”
묻는 말에 대해서 아이는 대답 없이 그저 몸을 떨었다. 공포에 질린 얼굴은 금세 파리하게 질렸고, 호흡도 가빠진다. 이대로 두다간 정말 큰일 날 것 같았던 명월은 아이의 뺨에 한 손을 대고는 고개를 저었다.
“난 이 고을의 사또다. 널 지켜 줄 수 있어. 그러니 마음을 편안히 해라. 여긴 널 해하려는 장소가 아니야. 널 지켜 주고 보호해 줄 거다.”
한 손을 들어 본인 가슴을 누른 채로 명월은 웃어 보였다.
“날 기억하지? 건넛방이긴 했지만, 같이 밥도 먹었잖아.”
물론 그때 밥을 먹은 건 아이뿐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이가 자신을 아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 명월의 노력이 효과를 본 걸까. 흐릿한 눈동자로 바라보던 아이가 입술을 달싹였다.
“……어머니는.”
묻는 것과 동시에 눈동자가 초점이 풀려서 흔들린다. 금방이라도 의식이 끊어질 것 같은 모습인데도 아이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어머니는……어디에.”
그리 물으면서 입을 다문 아이가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에 명월은 뭔가를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아이가 천천히 눈을 감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잡고 있는 어깨는 뭉친 채였다. 눈을 감은 아이의 미간에 서린 선명한 주름을 확인한 명월은 입을 벌리곤 긴 한숨을 내쉬었고, 천천히 손을 뗐다.
자리에 앉아 있는데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다. 실제로 굳은 얼굴을 한 채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재차 한숨을 쉰 명월은 입을 다물곤 굳은 표정을 지었다.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열고 나오자 대청에 앉아 있던 복운이 바로 일어섰다.
“아이는 지금 어떻게……?”
“다시 의식을 잃고 잠들었다.”
그 말에 복운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내리뜨는 복운은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로서도 조금 전에 본 아이의 모습이 충격적이었던 거다. 왜 그런 식으로 소리를 질렀던 걸까. 듣기가 끔찍할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였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고 오해를 할 만했다.
양손을 마주잡은 채로 잠자코 있으려니 막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방이 보였다. 그 뒤를 의원이 따르고 있는 걸 보아하니 조금 전 소동 때문에 불려온 모양이었다. 앞으로 다가온 이방이 고개를 든다. 무슨 일인가 싶어 굳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를 두고 명월이 입을 열었다.
“다시 숲으로 들어가 아이가 살던 집을 수색해 봐라. 그곳에 저 아이의 어미가 있는지 없는지, 확실히 해야 할 거다.”
앞서 포졸들을 보내서 그곳을 샅샅이 살피게 했다. 그래서 사람은커녕, 누군가 살던 흔적 또한 발견할 수 없었다고 말했는데도 한 번 더 가 봐야 하는 건가 싶었던 이방의 표정이 굳는다. 다시 보낸다 한들 결과는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던 이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이방이 다시 밖으로 나가고, 홀로 남아 있게 된 의원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사또,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안색이 좋을 리가 없었다.
대꾸 없이 뒷짐을 진 채로 서 있기만 하는 명월을 두고 의원이 재차 말했다.
“몸보신에 좋은 약재가 있습니다. 지금 바로 달여서 올릴까요?”
“난 괜찮으니 방으로 들어가서 아이의 맥이나 다시 짚어 보게. 그 난동을 부렸으니, 걱정이 되는군.”
“지금 바로 들어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의원이 굽실거리는 걸 확인한 명월은 무거운 한숨을 쉬면서 몸을 돌려 제 방 쪽으로 걸어갔다. 분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그는 안쪽으로 가서 자리에 앉아 바로 몸을 숙였다.
낮은 상에 엎드리듯 누우려 했지만 전립 때문에 불편하다. 몇 번이고 고개를 돌리면서 편안한 상태를 만들어 보려 해도 쓸모가 없었다. 결국 다시 고개를 들어선 전립을 벗어서 바닥에 내려놓은 명월은 바닥에 누었다. 목침에 머리를 벤 채로 오른쪽 다리를 세우고 거기에 왼쪽 다리를 올렸다.
다 밝은 대낮에 방 안에서 뒹굴거리다니. 팔자가 늘어졌구나.
자조 섞인 생각을 하면서 명월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지금 마땅히 할 일이 없으니 이런 식으로 뒹굴거린다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팔을 들어 이마에 올린 명월은 눈을 감았다.
지금의 난 대체 무얼 하는 걸까. 이곳으로 부임된 이후로 뭔가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이 외면하지 못하고 모든 일들에 끼어들고 있는 걸까.
하지만 애초에 느껴지는 게 없다면 이런 식으로 개입이 될 일도 없는 게 아닐까. 그놈은 쓸데없는 간섭은 하지 말라 했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끌려 들어가고 있어.”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명월은 팔을 떼선 위로 손을 뻗었다.
오른손의 검은 장갑을 바라보던 명월은 손을 움켜쥐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전에 장의사 이종원도 그렇고, 죄 없는 소녀들을 잡아 먹던 그 귀물도 그렇고, 이 손에 그려진 문양에 반응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이걸 보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대단한 걸 발견한 양 희열을 드러냈다. 거기까지 생각한 명월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어렸을 때, 이상한 것들이 다가오거나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그게 싫어서 손을 휘두르거나 막대로 쫓아내려 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걸 하는 것보단 오른손을 앞으로 뻗는 게 놈들을 쫓아내는데 훨씬 더 수월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것들은 오른손을 앞으로 뻗기만 하면 놀라서 다급히 자리를 피하려 했던 거다.
잔챙이들은 오른손을 두려워하고, 급이 있는 것들은 아니란 건가.
그래서였던 걸까. 백호라는 놈이 오른손을 보고도 태연히 다시 장갑을 끼워 준 이유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군.”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명월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생긴다.
머리 복잡한 건 싫었다. 될 수만 있다면 어려운 생각일랑은 하지 않고 그냥 편하게 살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면 머리만 아파질 따름이었다. 그냥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면서 편하게 나이를 먹어 가고 싶을 뿐인데 왜 이렇게 주변에서 자신을 가만 두지 않는 것인지―.
사람은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다.
사람이 아닌 것들이 자신을 건드리는 것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명월은 손을 들어 이마에 올렸다. 눈을 내리뜬 채로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명월은 둥―하는 소리를 듣고는 움찔했다. 바로 고개를 든 명월은 주변 소리에 집중했다. 뚜렷하게는 아니더라도 둥둥둥―하는 소리가 들렸다. 관아 바깥쪽에 걸린 북소리였다. 이곳으로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울리지 않던 북소리가 지금 들렸다.
명월은 급히 전립을 집어든 채로 몸을 일으켰다. 대충 전립을 머리에 쓴 그는 분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벌컥―하고 열리는 문에 놀란 복운이 대청 한쪽에 앉아 있다가 움찔해선 고개를 들었다.
“사, 사또. 왜 그러십니까?”
“북소리가 들리잖느냐.”
타박하려는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날이 선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그리고 명월의 말에 복운은 멍하니 있다가 “북소리요?” 라고 되물었다.
들리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양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기만 하는 모습에 혀를 찬 명월이 목화를 신고 급히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빠르게 멀어지는 명월의 모습에 놀란 복운이 급히 뒤를 쫓았다.
* * *
동헌 마당에 서 있는 건 두 사내였다.
원래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지기 사이였던 그들은 간밤에 거하게 술을 마셨고, 취중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거래가 오갔던 모양이었다.
이가가 먼저 본인에게 귀한 물건이 있는데 그걸 바다 너머 요 나라에 팔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 떠벌렸고, 그걸 들은 박가가 ‘내게 배를 모는 사촌이 있으니 그자에게 부탁해서 물건을 팔아 달라 하면 되네.’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너무도 귀한 물건이라 다른 사람 손에 넘기기가 꺼려진다 하던 이가도 계속되는 박가의 말에 귀가 팔랑거리게 되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 할지라도 집 안에만 두고 있으면 그게 언제 재물이 될 수 있겠느냐는 말에 반쯤 넘어가게 된 이가는 결국 그걸 박가에게 넘겼고, 박가는 고맙다면서 일정량의 거래금을 주었다.
하지만 물건을 건넨 이가는 돈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거래금을 넘긴 박가는 물건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돈을 줬는데 왜 내게 물건이 없는 것이냐. 물건을 넘겼는데 내게 왜 돈이 없는 것이냐. 그런 걸로 갑론을박을 하다가 결국 이리로 오게 되어서 북을 두드렸던 거다. 그들은 동헌 마당으로 올 때까지도 서로를 도둑놈 취급하면서 돈과 물건을 내놓으라 소리를 질러대다 점점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건 동헌에 자리하고 있는 포졸과 이방, 그리고 위쪽에 앉아 있는 사또 때문이었다. 이리로 와서 시끄럽게 구는 건 그들뿐이었다.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다는 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일이 이상해서 한달음에 서로에게 달려와서 길 한복판에 서서 난리를 치듯 싸우다가 홧김에 관아로 온 거였다. 서로가 승강이를 벌이다가 사또에게 말하겠다, 말해 봐라 북이나 칠 수 있겠냐, 두고 봐라 칠 수 있다, 라는 식으로 진행된 대화가 결국엔 이렇게까지 되었다.
당장 화가 났을 땐 눈에 뵈는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한꺼풀 벗고 나니 마음이 무겁다. 괜히 주변 눈치를 보게 되는 것 같아서 눈만 굴려대고 있는데 명월이 손가락을 들어서 의자 팔걸이를 두드렸다.
거기서 다른 행동을 취하지도 않았건만, 사내들은 약속이라도 한 양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니까 돈도, 물건도 없다?”
명월의 물음에 한 이가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분명 이놈에게 물건을 넘겼는데 돈이 없지 뭡니까?!”
“헛소리하지 마! 나야말로 물건이 없다고! 이 도둑놈아!”
지지 않고 반박하는 건 좋지만 도둑놈이라 하는 말에 이가는 욱한 얼굴로 박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내가 왜 도둑이냐! 도둑은 물건만 가로채 간 네놈이 아니더냐!”
“받은 물건이 없는데 내가 왜 도둑이냐! 애초에 네놈이 사기를 쳤던 게 아니냐!”
“사기를 치다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야!”
“둘 다 입 다물어라! 여기가 어디라고 큰소리더냐!”
이방의 호통에 이가와 박가는 당장 입을 다물었다.
이방은 그런 둘을 매섭게 노려봤다.
“여기가 네놈들 집 앞마당인 줄 아느냐! 관아고, 사또가 앞에 계신다! 계속 그렇게 추태를 부린다면 네놈들은 옥에 갇히게 될 거다!”
옥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두 사내는 급히 무릎을 꿇고 앉아선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억울합니다! 물건도 잃고 돈도 못 받았습니다!”
“저야말로 억울합니다. 받은 물건이 없는데, 이놈이 생사람을 잡지 않겠습니까!”
무릎만 꿇고 앉으면 뭐하나. 끝까지 본인이 억울하다면서 징징대는 모습에 명월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던 명월은 심란한 얼굴로 먼 산을 바라봤고, 그걸 본 이방이 앞으로 나섰다.
이런 건 하찮은 일이었다. 둘 중 하나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니 윽박을 지르거나 매질을 해서 바른 말이 나오게 하면 되었다. 그래서 이방이 입을 열려던 찰나 명월이 물었다.
“네놈이 박가라고 했더냐.”
당장 고개를 든 박가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박가입니다.”
명월이 박가를 먼저 부르자 불안해진 건지 이가의 안색이 굳는다. 나서고 싶어도 명월이 찾은 게 자신이 아니니 입을 다문 채로 초조하게 눈알을 굴려댔다.
“물건은 없고, 돈은 있더냐?”
“돈이요? 당연히 없지요. 제가 그날 송아지를 팔아서 돈이 꽤 있었는데, 한 푼도 안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억울하다는 게 아닙니까. 전 돈도, 물건도 잃은 겁니다! 이게 전부 다 이 도둑놈의 소행인 거지요!”
기다렸다는 듯 이가를 가리키는 박가의 행동에 이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다. 더는 안 되겠다 싶었던 이가가 고개를 들어 명월을 바라봤다.
“사또, 저놈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지 마십시오. 저놈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아닙니다! 하늘의 맹세코 전 진실만을 말했습니다! 여기서 거짓말을 한 거라면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질 겁니다!”
양팔을 벌리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박가는 아래턱에 힘을 주었다. 정말로 본인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주장하는 모습에 이가도 하늘로 손을 뻗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전 벼락 맞아 죽을 놈입니다!”
“따라하지 마라, 이놈아!”
“내가 언제 따라했다는 거냐! 이 망할 놈아!”
둘이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무고함을 주장하다가도 재차 서로를 노려보면서 으르렁거린다. 분위기를 흩트리는 그 모습에 이방이 재차 어허, 하면서 엄한 소리를 냈다.
놀란 그들은 급히 고개를 숙이곤 조용해졌고, 그걸 본 명월이 혀를 찼다.
“개판이로구먼.”
개판이라고 하는 건 너무한 일이 아닌가 싶지만, 그걸 명월에게 당당하게 주장할 수 없었던 둘은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포졸이 데리고 온 여인 셋을 확인한 명월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포졸을 따라 동헌 마당으로 들어선 여인들은 불안한 얼굴이었다. 어디서 죄지은 거 없이 착실하게 살아왔다고는 하나 이런 곳에 끌려오게 되자 괜히 눈치가 보인다. 그리고 동헌 마당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사내 둘을 보곤 두 여인이 동시에 “여보.” 라고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걸까. 놀라선 뒤를 돌아본 두 사내는 등 뒤로 걸어오는 여자를 발견하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화들짝 놀랐다.
“자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건가?”
“여편네가 왜 이런 델 찾아와? 집구석에나 있을 것이지―.”
거의 동시에 나오는 말에 여인들의 안색이 굳는다.
그녀들도 오고 싶어서 지금 이곳에 와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그녀들의 오해와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해서 명월이 말했다.
“내가 불렀다. 그리고 자네들이 어제 술을 마신 주막의 주모도 불렀지.”
처음에는 마누라밖에 안 보였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주모도 있었다. 여자가 셋인데 주모에다가 마누라가 서 있으니 보기가 영 그랬다. 주막에 가서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고 술만 마시고 바로 나온 건데도 이렇다.
알 수 없는 어색함을 느끼며 사내들이 앞으로 고개를 돌리자, 뒤에 서 있는 여자들 사이의 분위기도 영 껄끄러워졌다.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에 사내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서로 시선을 피한다. 그걸 본 명월은 우선 이가의 아내에게 물었다.
“자네의 남편이 집에서 애지중지하는 물건이 있던가.”
명월의 물음에 여인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 새로 온 사또가 그렇게 젊고 외모가 출중하다더니 정말 그랬다. 얼굴을 보는 것뿐인데도 심장이 쿵덕거리면서 뛴다면서 얼굴이 발그랗게 물이 든 여인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있기는 한데, 그게 쓸데가 없는 거라서……."
수줍게 하는 말에 이가가 황당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쓸데가 없는 거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값어치가 올라가는―!”
“값어치가 올라가긴 뭐가 올라가요?! 흙만 떨어지고 냄새 나고! 결국엔 어제 당신이 술에 취해서 끌어안고 헛짓거리하다가 떨어뜨려서 산산조각이 나 버렸잖아요!”
아내의 앙칼진 외침에 이가는 입을 벌린 채로 얼어붙었다. 굳어 버린 그를 두고 박가는 옳다구나 싶어서 그에게 삿대질을 했다.
“그렇군! 네놈이 실수로 물건을 망가뜨려 놓고는 내 핑계를 댄 거였구나!”
“아니, 아니야! 이 여편네가 지금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기억에 없는 말을 듣게 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박가를 보다가 아내를 돌아본 이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가의 아내는 딱하다는 양 혀를 찼다.
“산에서 별 이상한 돌덩이를 들고 와선 그게 금이니 뭐니 헛소리나 해대더니. 정작 부서져도 안에서 나오는 건 구더기 몇 개뿐이었잖아요. 그런 걸 몇 년 동안 머리맡에 두고 잤다고 생각하니까 소름이 돋아서 내가 못 살겠어!”
그간 쌓인 게 많았는지 몸을 부르르 떠는 이가의 아내는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였다. 자연스럽게 이가의 당혹감은 커져갔고, 박가는 이거다 싶은 듯 고개를 돌렸다.
“이것 보십시오! 이놈이 내게 사기를 친 거라니까요!”
귀한 물건은커녕 똥 덩어리였던 모양이다. 저가 망가뜨려 놓고는 남의 돈까지 빼앗아간 거니 그 얼마나 괘씸한 노릇이란 말인가. 저런 놈은 바로 처벌해 주라는 말을 하려는데 명월은 박가가 아닌, 그의 아내를 바라봤다.
“그래. 자네의 남편이 어제 송아지를 팔아서 큰돈을 벌었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인가?”
명월의 물음에 움찔한 박가는 입을 다물고 조심스레 뒤를 돌아봤다. 눈치가 보이는 듯 안색이 칙칙하게 변한 박가를 두고 그의 아내는 혀를 찼다.
“송아지를 팔았어도 그 돈이 남아나 있겠습니까? 주머니에 돈이 생기자마자 노름판으로 달려가서 다 날려 먹었는데. 제가 가서 뒤집어엎으니까 그대로 줄행랑이라 어디로 간 건지 몰랐는데, 친구 만나서 술 처먹고 이런 사고를 칠 줄은 몰랐습니다.”
아내의 말에 박가는 손으로 눈을 덮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 양 박가의 아내는 살벌하게 이를 갈았다.
“이 화상아, 살아서 뭐하냐. 차라리 그냥 죽어라.”
송아지를 판 돈이라면 적지 않은 금액이었을 거다. 그걸 노름판에서 다 날렸다면 진심으로 두들겨 패 주고 싶을 터였다. 때문에 분한 듯 이를 박박 가는 박가의 아내를 보는 이가의 아내는 연민에 가득 차 있었다. 서로 말썽 많은 남편을 둬서 고생이 말도 못했다.
이렇게 박가의 사정을 알게 된 이가는 대번에 표정이 밝아졌다.
“이놈! 애초에 돈도 없으면서 나한테 다 뒤집어씌울 생각이었던 거로군!”
갑자기 기가 산 이가의 말에 박가는 당황해선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야! 돈은 분명히 있었어!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술을 산다고 한 게 아닌가. 그래서 주막에 간 거잖아! 그건 기억난다고 한 주제에 왜 이제 와서 그런 식으로 말을 해?!”
“술에 취해서 내가 냈을 수도 있는 거잖아!”
“웃기지 마. 내가 내고 자네에게도 물건을 사겠다며 돈을 준 거라고!”
“나한테 물건이 없는데 어떻게 자네에게 판단 말인가?! 내 마누라가 한 말 못 들었어?! 내가 술 취해서 떨어뜨렸다고 하잖아!”
“오호라, 이제 와서 실토를 하는 건가?!”
“실토를 할 게 뭐가 있어! 그건 내가 아니라 자네가 해야 할 게 아닌가!”
목청이 점점 커진다 싶더니 약속이라도 한 양 서로에게 달려든다. 멱살을 잡고는 죽네 사네 시끄럽게 굴던 그들은 한참동안 바닥을 뒹굴다가 묘한 낌새를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본인들을 빼고 모두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음을 깨닫곤 그대로 얼어붙었다.
시장 저잣거리도 아니고 여긴 관아의 동헌 마당이었다. 그런 곳에서 이 무슨 추태인가 싶었던 그들의 안색이 해쓱하게 질린다.
그런 그들에게 이방이 눈을 부라렸다.
“당장 일어나라.”
목소리가 크진 않아도 엄한 그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사내들은 급히 일어나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들 뒤에 서 있던 부인들은 눈 뜨고 보기가 힘든 양 안색을 구긴 채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모두의 외면을 받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죄인마냥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명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주모, 어제 저들이 어땠는지 사실대로 말해 보게.”
명월의 물음에 주모는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전날 늦게까지 남아서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그러다가 가볍게 다투었고 그대로 나가려 하는 걸 제가 붙잡아 주머니를 털어서 술값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다시 주막 밖으로 나가 삿대질을 하면서 싸우더니 서로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헤어졌습니다.”
주모의 말에 이가와 박가는 둘 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라면서 우물쭈물거리는 그들 얼굴로 혼란스러움이 가득하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낀 모양이었다.
“저들이 같은 방향으로 간 게 아니고, 서로 각자 집으로 돌아간 건가.”
“방향을 보면 그렇지요. 지금 보니 둘 다 술에 취해서 꿈을 꾼 모양입니다.”
냉랭한 주모의 말에 부인들이 긴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돌렸다.
너무도 한심한 상황인지라 할 수만 있다면 저기에 있는 건 남편이 아니라 남이라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완전히 차갑게 식은 얼굴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부인들의 반응도 그렇고, 모든 게 당황스러웠던 이가와 박가는 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아닙니다. 사또. 분명히 제가 이 친구 집으로 갔습니다. 그, 그렇지 않나?”
박가의 말에 이가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희 집으로 온 것 같기는 한데,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생각이 나지 않는 것뿐입니다. 거기서 바로 헤어지다니.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까와는 말이 달라졌다. 주모가 하는 말대로 되면 애초에 둘은 물건도, 돈 거래도 없이 그저 술에 취해서 헛짓거리를 한 것밖에 되지 않는 거였으니 말이다.
차라리 물건이 사라지고, 돈을 빼앗긴 편이 나았다. 이런 식으로 이도 저도 아니게 되는 것만큼 허탈하고 부끄러운 일이 없었다.
지금 이곳이 관아가 아니라 시장이었으면 사람들 비웃음을 받는 것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여긴 동헌 마당이었고, 눈앞에는 사또가 있었다. 대청 아래쪽에 서 있는 이방과 호방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다른 포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인간을 보듯 냉랭한 시선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걸 느끼며 그들은 눈을 내리떴다.
무거운 침묵이 형성되었다. 초반부터 요란하게 굴더니 결국엔 이리 되는 건가 싶었던 이방은 명월을 바라봤다.
“저런 한심한 인간들은 태형에 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 태형이라니.”
너무 놀란 이가는 딸꾹질을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박가는 두 손을 모으고 싹싹 빌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또. 술 때문에 실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겁니다. 하늘에 두고 맹세합니다.”
“저, 저도 하늘에 두고 맹세하겠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한 번 더 있으면 그땐 제가 사람이 아니라 갭니다!”
“아까도 하늘을 두고 뭐라 하지 않았던가.”
박가와 이가가 동시에 손을 비비다가 멈칫했다.
어느새 다리를 꼰 채로 있던 명월은 그들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날벼락을 맞아도 좋다 하지 않았던가.”
조금 전에 그렇게 떠들어대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상황이 이리 된 마당에 그 생각을 계속 밀어붙일 순 없었다. 어디까지나 실수였음을 알리기 위해서 박가가 입을 여는 것에 맞춰서 명월이 말했다.
“관아란 술 취한 놈들의 헛소리를 들어 주는 장소가 아니다. 지금 네놈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귀한 시간을 허비했는지 아느냐. 실수로 넘길 수 없는 일이다. 각 곤장 열 대씩 맞고, 하루 동안 감옥에 들어가 있거라. 그 동안에는 물도, 음식도 그 무엇도 입에 댈 수 없을 것이다. 끌고 가라!”
마지막 말을 하면서 손을 옆으로 휘두르자 기다렸다는 듯 포졸들이 박가와 이가를 끌고 갔다. 팔이 잡힌 그들은 다급하게 사또를 부르짖었지만, 명월은 그들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사내 둘이 포졸에게 끌려 나간 후 그들의 부인과 주모도 자리를 떠났다. 남편이 저리된 것이 신경 쓰이는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던 여인들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자리를 뜨자 명월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래로 내려가려는데 기다렸다는 듯 호방이 앞으로 나섰다.
“사또께선 마음도 좋으십니다. 어찌 그리도 관대한 처분을 내리시는지―.”
“멀쩡한 사내라도 곤장 열 대는 아픈 법이지. 술주정의 대가로 값싼 처분은 아니네.”
거기까지 말한 명월은 호방을 흘겨봤다. 쓸데없는 말을 한 것에 대한 비난이 담긴 시선이었고, 그걸 모를 호방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실수를 했나 싶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호방을 두고 명월은 몸을 돌렸다.
동헌 마당을 지나쳐 안쪽으로 이동하는 그의 뒤를 이방이 따랐다.
“포졸을 다시 숲으로 보냈습니다. 이번엔 다섯을 보냈으니 조금 더 자세히 주변을 탐색할 수 있을 겁니다.”
내내 걷는 속도를 유지하며 명월은 말했다.
“성가신 일을 시켜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어차피 놀고 있는 놈들을 부리는 게 아닙니까.”
이곳 반양은 사건 사고가 많지 않은 곳이었다. 포졸이 있다 하나 그들이 매번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종종 지루한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그들을 부리는 데 있어 미안하거나 안 될 건 없었다. 똑같은 일의 반복이라 해도 그 명령을 내리는 게 사또라면 따라야 하는 법이었다.
“어제 화소군하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궁금하지 않나?”
“사또께서 저보다 현명하시니 알아서 잘 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정말로 현명한 사람은 술에 취해서 의식을 잃은 채로 돌아오진 않겠지.”
자조 섞인 말에 이방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법이지요.”
이방의 대답에 명월의 입가로 웃음이 걸린다.
딸을 구해 준 일 때문인지, 이방은 언제나 늘 호의적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와 같은 실수를 했다면 당장 눈을 부라리면서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을 사내가 이런 식으로 부드럽게 구니 명월도 마음이 느슨해진다.
“기분 나쁜 사내더군. 그자도 날 그리 생각할 거다. 지금까지는 적당히 공생 관계를 유지하려 들겠지만, 수틀리면 가장 무서운 적이 될 수도 있겠더군.”
거기까지 말한 명월은 뒤를 돌아봤다. 괜한 말을 한 것일까. 이방의 표정이 굳어 있는 걸 본 명월은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그의 팔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난 이 고을의 사또고 그는 장사꾼이니까. 딱히 부딪칠 일은 없을 거네.”
그리 말한 명월은 다시 걸음을 서둘렀다.
* * *
숲으로 보낸 포졸은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이번엔 이방이 아니라 명월 앞에서 보고 살핀 것들에 대해서 알려 주었다.
폐가는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오래 된 것 같았으며 그곳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주변을 샅샅이 뒤졌으나 사람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했다. 그리고 시장이나 오래 산 노인들, 그리고 소문에 밝은 이들을 붙잡고도 물었으나 숲에서 사는 모자들에 대해선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했다.
예전에 아이의 어머니를 본 적이 있기는 해도 오래 전 일이라, 죽었을 거라고 떠들어 댄다고도 덧붙였다. 그들의 말을 모두 들은 명월은 잠자코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숲에 포졸을 보낸 게 벌써 몇 번인지 모른다. 그때마다 같은 대답을 들었다. 이제 더는 안 되는 걸지도 모른다. 아마도 아이는 오랫동안 혼자 시간을 보내는 동안 외로움에 지친 걸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지금은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일단은 회복하고 난 후 푹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거다. 지금 당장은 무슨 말을 해도 아이의 귀에 들리진 않겠지.
사람 얼굴을 보며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지르던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서 지워지질 않았던 명월은 포졸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난 후 상에 올려 둔 책을 살폈다. 근 3년 동안 반양에서 벌어진 소소한 일들을 기록한 일지였다. 이걸 살피면서 이곳에 대해서 공부나 하자 싶었다.
원래는 더 빨리 읽어 봤어야 했지만,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전부 변명이 될 뿐이겠지만―.
무거운 한숨을 내쉰 명월은 종이를 넘기고는 위에 적힌 것들을 진지하게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로 책을 읽는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집중하는 것도 오랜만이라면서 세 번째 책자를 덮는 순간 문밖으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명월은 책에 한 손을 올린 채로 고개를 들었다. 매서운 눈으로 문 쪽을 살피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사또, 저 복운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는 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명월의 어깨에 들어간 힘이 빠진다.
최근 들어서 쓸데없이 긴장하는 일이 늘었다면서 들어오라 말했다. 그 말에 문을 열고 들어온 복운은 명월이 지금 책을 읽고 있음을 보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공부하십니까?”
“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공부를 하겠느냐. 이건 이 고을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일지다.”
“공부를 함에 있어 나이가 무슨 상관 입니까. 죽을 때까지도 하는 게 공부라고 하지 않습니까.”
지지 않고 받아치는 말에 명월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면 너야말로 공부 좀 해 보지 그러냐.”
“책만 펼치면 잠이 쏟아진다는 걸 아시면서 그런 말씀이십니까.”
명월이 공부를 하라는 식으로 맞받아치자 당황한 복운은 바닥에 쟁반을 내려놨다. 하얀 사발에 담긴 검은 액체를 보는 순간 명월의 안색이 굳는다.
“그건 뭐냐?”
“실력 좋은 의원이 내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있어야지요. 사또께서 몸이 허하신 것 같아서 한 잔 얻어 왔습니다.”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냐.”
그 순간 복운은 진정 서운해했다.
“모처럼 생각해서 준비한 건데 그리 말씀하시기입니까?”
“내가 언제 탕약을 마시겠다고 한 적이 있더냐.”
원래부터 약이나 쓴 건 딱 질색인 명월이었다. 거기다 복운이 말하는 것처럼 몸이 허한 것도 아니었다. 뭐하려 저런 쓸데없는 걸 준비한 건지 모르겠다.
혀를 찬 명월은 복운이 들고 온 탕약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았다. 모처럼 신경 써서 준비한 사람이 보기에 서운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무시를 하는 모습에, 복운은 칙칙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안 드실 겁니까?”
“난 필요 없으니 너나 마셔라.”
“이 귀한 걸 어찌 제가 마신단 말입니까?”
“귀한 거니깐 너에게 양보하겠다는 게 아니냐. 나 때문에 네가 그간 고생이 많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나 대신에 너나 많이 마시고 건강해지거라.”
마시기 싫어서 빠져나가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정말 저렇게 하고 싶은 건가 싶었던 복운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여간 해선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모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일 좀 제대로 해 보려는데 왜 방해인지 모르겠다. 딱 집중해서 좋은 상태였으니 더는 방해 말고 나가라 하면 또 서운해할 거다.
최근 들어 복운을 서운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나름 신경 쓰고 있긴 한데, 이런 식으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복운이 앞에 앉아 있는 것도 신경 쓰였던 명월은 결국 책에서 손을 뗐다.
“모름지기 사람은 탕약 같은 것에 의지를 해선 안 되는 법이다. 몸이 안 좋다 싶으면 가볍게 움직여서 그걸 풀어 주는 게 훨씬 나은 방법이지.”
“그러면 좀 움직여 보십시오. 요즘 계속 방에만 계시는 거 압니까?”
전에는 왜 이렇게 바깥으로만 다니는 거냐고 뭐라 하던 놈이, 이제는 방에만 있는 걸 가지고 뭐라 한다.
혀를 찬 명월은 몸을 일으켰다.
“알았다. 나가서 움직이면 될 거 아니냐.”
그리 말한 명월은 복운을 지나쳐갔다.
갑자기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는 명월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저건 또 언제 챙긴 거냐면서 복운은 다급히 명월의 뒤를 쫓았다.
방을 나서자 가죽신을 신는 명월이 보인다. 바로 몸을 일으키는 명월을 본 복운이 앞으로 손을 뻗었다.
“기다리십시오. 어딜 가시려고요?”
그 말에 마당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약을 끓이던 사내가 뒤를 돌아본다. 뭘 보는 건가 싶었던 복운은 인상을 쓰며 사내를 바라봤고 그러는 동안 명월은 성큼성큼 멀어져갔다.
딱 보니 뒤쪽 공터로 가서 검을 휘두를 모양이었다. 그런 거면 거기로 간다 말 좀 해 주면 좋을 게 아닌가. 하여튼 사람이 매정한 구석이 있다면서 복운은 이제는 보이지 않는 명월이 나간 대문 쪽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 * *
밤의 산은 위험하다. 모두가 아는 일이었기 때문에 해가 저물면 산속에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 곳에 남아 있는 건 산짐승이나 날벌레, 그 외에 묘한 것들뿐이었다. 그리고 그 묘한 것이 풀을 가르면서 걸어 다니고 있었다.
하얀 치마 저고리가 팔에 휩쓸린다. 쪽 진 머리를 타고 흘러나온 머리카락이 목과 어깨에 흘러내려 와 있었다. 지친 듯 흐느적거리는 걸음을 옮기던 여인은 간혹 멈춰 서서는 주변을 둘러봤다. 마치 무언가를 찾듯이 말이다.
그러다가 풀을 옆으로 걷어 내고 아래를 보다가 고개를 든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 크게 떠진 그 눈빛에 주시당한 순간 아이는 눈을 떴다.
“…….”
크게 눈을 뜬 아이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린 채였다. 아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도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어머니가 자신을 찾고 있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서 혼자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아이는 이불을 걷고 바깥으로 기어 나왔다. 힘겹게 문 쪽으로 가선 고리에 손을 대곤 가볍게 밀었다.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힘없이 문이 열리고 찬바람이 뺨을 스친다.
대청 위로 나온 아이는 주변을 살폈다. 여기가 어딘지 알 수는 없으나 어디로 가면 되는지는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기어서 대청을 빠져나온 아이는 맨발로 내려왔다. 흙 위를 종종 걸음을 옮기면서 마치 무언가에 홀린 양 그대로 대문을 빠져나갔다.
* * *
칼 끝에 닿은 달빛이 부서진다. 유난히 달이 하얗고 동그란 밤이었다. 그래서일까. 허공을 벨 때마다 궤적이 남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재미가 있었다. 물론 재미만으로 이런 짓을 했다간 크게 다칠 수도 있었지만, 아무도 없는 시간에 혼자서 단련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방에서 나온 건 비단 복운 때문만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볍게 몸을 움직였으면 싶을 때 복운이 들어온 거였다. 그냥 좋게 말하고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탕약이 문제였다.
“난 쓴 건 싫다.”
눈에 힘을 주고 작게 중얼거린 명월은 강하게 허공을 베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세게 검을 휘두른 후에 손가락에 힘을 준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멋쩍다. 쓴 약이 먹기 싫어서 투정 부리면서 칼부림을 하고 있는 것 같잖은가. 어린애라도 이런 식으로 굴진 않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이내 아무렴 어떠나 싶었던 명월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좋은 검이라 그런지 허공이라 할지라도 베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이걸 만든 게 그놈이라는 데에 있었다.
생각을 하지 말자 싶으면서도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명월은 뒤로 뺀 다리를 앞으로 모으고 검을 똑바로 세워서 얼굴 앞에 댔다. 인상을 쓴 채로 검을 살피던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자신이 사또로 부임하기 전에 완성이 된 물건이었다. 애초에 그놈이 자신이라는 걸 알고 준비한 건 아니었다. 그저 새로 오는 사또가 사용하라고 만든 거겠지. 의자도 마찬가지였다.
실력 좋은 장인이라는 식으로 정체를 감추고 있으니, 관아 안에 그놈이 만들거나 손을 댄 물건이 훨씬 더 많이 존재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검 하나 가지고 놈을 떠올리면서 인상 쓸 필요가 없었다. 한 가지를 알아내면 그 뒤로 줄줄 더 나오게 될 테니―.
이건 그놈이 아니라 검이었다. 내가 들고 있으니 내 검이지. 그렇게만 생각하고 말자면서 명월은 검을 검집 안에 집어넣고는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였더니 몸에 열이 나면서 더워지는 것 같다.
오늘따라 공기가 유난히 훈훈하다면서 명월은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는 크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했다.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난 후의 나른함이 온몸을 감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뜨끈한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딱인데.
생각만 해도 좋았다. 일단 복운에게 목욕 준비를 하라고 하면―.
그러다가 나올 때 복운에게 툴툴댄 걸 떠올린 명월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 식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으니 지금쯤 입술이 앞으로 몇 자는 나와 있을 거다. 그런 녀석에게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 하는 건 너무한 일일까.
아니다 싶으면서도 역시나 그놈은 자신의 마누라인 모양이었다. 쌀쌀맞게 대하면 다음에 어김없이 후회하게 되니. 잘해 줬어야 했는데, 라고 생각하는 걸 보면 말이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도 이어지는 인연은 그 녀석일지도 모르지.
거기까지 생각하던 명월의 안색이 굳는다.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인연이 복운이라니. 그건 좀 싫었다. 그 녀석 말고 다른 인연은 없는 걸까. 자신이 죽을 때까지 계속 길게 유지가 될 수 있는, 그런 인연이 말이다.
꽤나 중요한 생각임에도 꼭 이런 식으로 방심 상태일 때 떠오르게 된다. 가볍게 생각만 하다 넘기자 싶으면서도 어느새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그 생각 하나에 골몰하게 된다.
과연 자신에겐 짝이라는 게 존재할까.
이런 내 곁에도 누군가 있어 줄 것인가.
“…….”
가만히 있던 명월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기울어진다. 그러다 무거운 한숨을 토해 낸 명월은 이마를 쓸어 올리면서 몸을 돌리다가 움찔했다. 잠시 자리에 앉아 있자 싶었던 곳에 하얀 돼지 고양이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털이 하얗기 때문일까.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또렷하게 보인다. 특유의 졸린 눈을 한 채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놈을 두고 명월은 검집에 손을 올렸다.
“뭐냐.”
날카롭게 물으면서도 명월의 눈동자는 주변을 살폈다. 어딘가에 복운이 몸을 숨기고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샅샅이 살펴도 복운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망할 돼지 고양이가 홀로 빠져나온 거라는 건데―.
이전에 유인으로 저 고양이를 붙잡기도 했지만, 지금은 코앞에 있는 녀석을 보고도 건드리고 싶지가 않았다. 한 시진 가까이 검을 휘둘러서 기분은 좋아도 몸은 피곤했던 거다. 이런 상태론 저 무거운 녀석을 들 수도 없을 거라면서 명월은 검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곤 그쪽으로 걸어갔다.
다가가면 놈이 눈치껏 알아서 피해 줬으면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내내 눈에 힘을 준 채였다. 하지만 고양이는 꼿꼿한 자세로 앉아선 미동이 없었다. 오히려 다가오는 명월을 똑바로 바라보기까지 한다. 그 맹랑한 모습에 명월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어라. 이놈 봐라.
명월은 결국 고양이가 앉아 있던 곳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올라 앉은 곳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고 있어도 시선이 똑같다.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피하지 않고 특유의 졸린 눈을 하고는 바라보는 녀석이 묘하게 괘씸하게 여겨진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요물이 지금 자신과 뭘 하고 싶은 건가 싶었던 명월은 손을 들었다.
손날을 세운 채로 천천히 고양이 앞으로 내렸다. 그 손이 점점 가까워져서 검은 코 끝에 닿아도 녀석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쯤 되자 이 녀석이 지금 자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던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의혹을 담아 바라보는 명월은, 혀를 차면서 고양이의 귀를 잡아 흔들었다.
“이러다가 수틀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릴 테니까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마라.”
바로 손을 뗀 명월은 몸을 일으켰다.
나름 목소리에 힘을 주고 협박이라는 걸 해 봤지만, 고양이는 역시나 움직임이 없었다. 오히려 명월이 건드린 귀를 앞발로 쓰다듬더니 혀로 입술 주변을 핥는다. 그렇게 몇 번이나 제 머리를 앞발로 쓰다듬기만 하는 모습에 명월은 팔짱을 낀 채로 놈을 관찰했다.
이게 진짜 고양이일까. 아니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요물일까.
암만 봐도 후자인 것 같은데―.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돼지 고양이를 내려라보던 명월은 입술을 달싹였다.
“백호.”
그 순간 머리를 쓰다듬던 고양이의 앞발이 움찔하고 흔들렸다.
아주 짧은 순간에 보인 반응이지만, 명월은 분명히 봤다.
이 녀석 봐라. 그런 느낌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명월을 두고 고양이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다. 가까이 다가서거나 무슨 말을 해도 꼼짝도 하지 않던 놈이 백호라 운운하는 순간 움직인다. 명월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여선 고양이의 꼬리를 잡아챘다.
“어딜 도망치려고!”
역시나 이 녀석은 평범한 고양이가 아니었던 거다. 이대로 거꾸로 매달아서 탈탈 털어 봐야지. 그러면 알아서 제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까.
명월에게 꼬리가 잡히는 순간 바로 그 자리에 엎드려선 앞발을 주욱 뻗고 버티기에 들어간 고양이를 본 명월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사또!”
이상한 짓 하지 말라 하려던 순간 다급한 외침이 들린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누군가 자신을 부를 때 그게 위급한 상황인지, 아닌지 정도는 간파할 수 있었다. 이번 건 진짜였다.
명월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고양이는 이때라는 양 앞으로 튀어나갔다. 나비가 다른 곳으로 달아났지만, 명월은 그쪽엔 이미 신경을 끈 참이었다. 대신에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로 달려오는 복운을 보자마자 뭔가를 깨달았다.
“사또! 큰일입니다! 방에서 자고 있던 아이가―!”
복운의 말을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었다.
명월은 복운은 지나쳐 달려갔다. 말을 듣지도 않고 뛰어가는 명월을 본 복운도 급히 방향을 틀었다. 서둘러 멀어지는 두 사람을 확인한 나비는 그제야 도망치던 걸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반쯤 감긴 눈으로 그쪽을 바라보다가 입을 벌리곤 야옹, 하고 울었다.
* * *
어둡던 산속으로 독각귀 불처럼 발간 것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독각귀 불인 건 아니었다. 인간들이 손에 횃불을 든 채로 숲에 들어왔다. 한곳에 몰려 있던 횃불이 점점 퍼져나가는 걸 확인한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작업장 지붕에 앉은 그는 한 손에 호리병을 들고 있었다.
모처럼 달이 밝아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한잔 기울이려던 참에 방해를 받은 격이었다. 그는 혀를 차면서 호리병에 입술을 댔다. 병을 기울여서 안에 담긴 액체를 넘긴 그는 입을 떼고는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손가락으로 젖은 입술을 닦아 낸 그는 아래를 확인했다.
뒷간을 가는 건지 절뚝거리면서 걸어가는 꼽추가 보였다.
“뒤숭숭한 밤이니 오늘은 문단속 제대로 해라.”
그 말에 꼽추가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본다. 대답 없이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인 꼽추는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그걸 확인한 백호는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달빛이 밝을 때 호롱초에 맺힌 방울방울을 모아서 만든 술이었다. 세상 제일가는 별미였지만, 그것에 취할 새가 없구나. 호리병의 뚜껑을 닫고는 그걸 지붕 가운데에 내려놓고는 뛰어 내려갔다.
가볍게 착지한 백호는 느린 걸음을 옮겼다. 앞쪽까지 걸어간 그는 눈을 내리뜬 채로 아래 상황을 살폈다. 간간히 누군가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리석은 짓이다. 이런 날 밤 누군가를 찾아 산으로 들어오다니.
“저러다가 잡아 먹히고 말지.”
중얼거린 백호는 입을 다물었다.
숲으로 들어오는 인간들 틈으로 달콤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이런 냄새를 풍기는 놈이라면 하나밖에 없기에 그의 기분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그렇게나 충고를 해 주었는데도 정신 못 차리고 들어온 건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문제가 그 녀석에게만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르지. 거기까지 생각한 백호는 팔짱을 풀고는 뒤를 돌아봤다. 마침 일을 보고 들어오던 꼽추가 문단속을 하는 걸 본 그는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늘은 정말 문단속을 잘해야 할 거야.”
지나치듯 하는 말에 꼽추는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 * *
풀을 걷으면서 주변을 수색하는 포졸들은 진지했다. 찾아야 하는 건 아이였고, 숨어 버리면 쉽사리 모습이 보이지 않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산속을 뒤진다 해도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든 아이를 찾고야 말겠다며 그들은 구석구석을 찾으면서 움직였다. 그런 그들 사이엔 명월도 있었다.
구군복을 차려입고는 환도까지 착용한 명월의 옆엔 이방과 복운이 붙어 서 있었다. 일단은 명월을 살피는 일에 집중하나 싶으면서도 주변 탐색하는 걸 늦추지 않았다. 신경 써서 살피면서 점점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이지만 명월은 아니었다. 주변을 한번 훑어보면서 앞으로 죽죽 나아간다.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속도가 빨랐다. 저렇게 앞장서 가 버리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보호를 해 줄 수가 없었다.
당황한 복운이 급히 명월의 뒤를 따랐다. 횃불을 내밀어서 명월의 앞을 비추어 줬지만, 그는 그런 건 신경 쓰지도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걸로 비추지 않아도 걷는데 아무 문제없다는 양 흔들림 없는 걸음을 옮긴다. 거침없이 나아가는 모습에 복운이 걱정이 되어 한마디 했다.
“사또 천천히 가십시오. 위험합니다.”
하는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몇 번을 말해도 마찬가지일 거다.
방 안에 아이가 없다는 걸 발견한 건 바로 복운이었다. 마당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서 약을 달이던 이가 닭마냥 고개를 꾸벅이면서 자는 걸 보고는 그를 두들겨 깨우곤 별생각 없이 방문을 열었다.
아이가 어떤 상태로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문을 열었던 복운은 이불 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곤 그대로 얼어붙었다.
처음에는 보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내 눈이 잘못된 거로구나 싶어서 눈을 꼬옥 감았다가 떴지만 보이는 건 변하지 않았다. 정말로 아이가 없었다. 그 엄청난 일을 깨달은 복운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진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던 복운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명월이었고, 한달음에 그에게 달려갔다.
자신의 다급한 모습에서 뭔가를 감지한 건지 명월도 곧장 아이의 방으로 달려왔다. 신을 신은 채로 방에 들어서선 그곳을 둘러본 명월이 다시 밖으로 나와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는, 약을 달이던 사내의 멱살을 잡았다.
아이가 어디로 간 거냐고 윽박지르는 말에 사색이 된 사내는 아무것도 모른다며, 죽을 죄를 지었다며 그 자리에 납죽 엎드렸다. 아이가 사라진 마당에 죽을 죄 운운을 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던 명월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지금까지 몇 번 보지 못한, 명월이 진짜로 화가 난 얼굴이었다. 그걸 보고 아무 소리도 못하는 동안 명월이 사람을 불러들였다. 이방, 병방을 불러선 포졸들을 소집시켰다. 당장 그들을 이끌고 지금 산으로 들어와 아이를 찾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고, 아이가 이 숲 속에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명월은 돌아간 거야, 라고 말하곤 곧장 이리로 들어왔다. 분명 아이가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주변을 살피는 그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아이를 찾는 모습만 본다면 뭔가에 홀린 것 같기도 했다. 저렇게 서두르다가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싶었던 복운이 재차 말을 꺼냈다.
“사또, 천천히 가십시오. 그러다 넘어지시겠습니다.”
그 순간 발을 멈춘 명월이 바로 뒤를 돌아봤다.
지금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해서 화가 난 건가.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건데. 그런 느낌으로 입을 다무는 복운을 두고 명월의 눈동자가 옆으로 움직였다.
“이방. 이리로 와 보게.”
그 말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이를 찾던 이방이 냉큼 달려왔다.
“그 아이의 집이 어디쯤에 있는지 알고 있나?”
“아이가 집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그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 일단 그 아이의 집이 어딘지에 대해서나 말하게.”
이런 데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여러 말 하게 하지 말라는 양 굳은 시선을 보내오는 명월을 앞에 두고 이방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뒤를 돌아보더니 누군가를 발견하고 급히 손짓을 한다. 그러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포졸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손에 횃불을 들고 있어도 어두운 숲길이었기 때문에 넘어질 뻔하기도 했던 그는 급히 자세를 바로 잡고는 냉큼 이방 옆에 똑바로 섰다.
“어찌 부르십니까?”
“그 아이의 집이 어딘지 알면 앞장서라.”
“그 아이의 집이라면…….”
지금 찾는 아이의 집 말인가.
앞서 사또의 명이라면서 몇 번이나 그 집에 가 본 적이 있던 포졸이었다. 풀 한 포기, 벌레 하나라도 놓치지 말고 꼼꼼하게 살펴보라는 말에 실제로도 그리했기 때문에 어두워서 주변이 잘 보이지 않더라도 방향 정도는 쉽게 잡을 수 없었다.
오른쪽으로 손을 뻗으면서 이쪽으로 가면 됩니다, 라고 말하는 포졸을 두고 이방이 다른 사람 몇을 더 불렀다.
그들이 급히 횃불을 들고 모이는 걸 확인한 이방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너희들은 뒤를 따르면서 사또를 보호해라. 동시에 아이가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해 봐야 할 거다.”
그 말에 포졸들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반응을 확인한 후, 이방은 명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자리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어디로 간 건가 싶어 당황해서 주변을 살피자 포졸을 따라서 어느새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그 옆에 복운이 붙어 서 있는 걸 확인한 이방도 급히 그리로 달려갔다.
* * *
앞장서서 안내를 하는 포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가 사라졌다 하니 찾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좀 흐르고 나니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움직여야 할 만한 일인가 싶었다. 대감 댁 자제도 아니고, 중요한 인물도 아닌 그저 숲 속에서 혼자 살던 어린애일 따름이었다.
다른 이들 말마따라 그 아이가 실은 사또의 숨겨진 자식인 걸까. 말을 꺼내면 큰일 날 생각을 하면서 포졸은 뒤를 돌아봤다. 그러다가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걸어오는 명월을 확인하곤 마른침을 삼켰다.
곱상하게 생긴 것에 반해서 꽤나 잘 따라온다면서 포졸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지런히 걷기는 하는데 왜인지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밤이라서 그런가. 그때 주변 공기가 축축해지는 걸 느끼면서 포졸은 코를 씰룩거렸다. 안개가 끼는 건가.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포졸은 앞으로 횃불을 내밀었다.
불빛이 비춰지는 쪽으로 걸어가는 포졸을 따라 걸으면서도 명월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아이의 몸은 온전히 나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 몰래 관아 밖으로 나갈 수 있단 말인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옆을 따르던 이방이 묻는 말에 명월은 담담히 대꾸했다.
“뭐가 말인가.”
“서두르시는 모습이 이상해서 그럽니다. 혹시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시는 게 아니신지요.”
“그런 거 없네. 그저 아이를 빨리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야.”
이방은 딸 때문에 묘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딸을 구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말하진 않았어도 달리 느껴지는 게 있기 마련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평생 가야 경험할 수 없는 그런 기묘한 일이 ‘실제로 벌어질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는 쪽일지도 몰랐다.
그에게 지금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대충 느끼는 것하고 직접 경험하고 본 것의 차이는 크기 마련이었다. 말을 한다 해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
그때 명월은 뺨에 닿는 찬 기운을 느꼈다. 바람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차가운 무언가가 뺨을 스친다.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면서 주변을 살피던 명월은 이건 뭐지, 라고 중얼거렸다. 비가 내리는 건가 싶었으나 앞장서 걷던 포졸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한다. 그걸 보고 나서야 지금 숲으로 안개가 서리는 걸 알게 된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갑자기 안개가 끼는 걸까. 명월은 이방을 돌아보면서 조심하라는 말을 하려 했다. 그리고 돌아본 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
급히 뒤를 살피자 복운이나 다른 포졸도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고개를 돌려도 마찬가지였다. 앞장서 걷던 포졸은 보이지 않았고 그걸 깨달은 명월은 검집에 손을 올리곤 재빠르게 한바퀴 몸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 눈에 띄게 안개가 짙어지고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명월은 다른 손으로 입을 막은 채로 계속 주변을 살폈다. 복운이나 이방을 부르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쓸모없는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게 어찌된 조화인지 알 수는 없으나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 수 있었던 명월의 안색이 굳어진다. 인간이 이런 짓을 할 수는 없겠지. 인간이 아닌 것이 수작을 부리는 거다.
그 순간 떠오르는 건 백호의 얼굴이었으나 바로 지워 버렸다. 놈이라면 직접 나서지, 이런 식의 음습한 짓을 하진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뭔가. 이런 짓을 하는 놈은 대체―.
그때 파삭, 하고 풀이 스치는 소리에 명월은 급히 뒤를 돌아봤다.
안개 때문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저기 앞쪽의 풀이 흔들린다. 명월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혀를 찼다.
사람 바보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저런 식으로 굴면 자신이 달려갈 거라 생각하는 건가. 우습게 보지 말라면서 명월은 소리를 쳤다.
“누구냐! 네 모습을 드러내라!”
물론 이런 식으로 위협을 한다 해서 놈이 나타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여차하면 휘두를 생각으로 검집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매서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 동안 재차 뒤에서 파사삭, 하고 풀이 흔들리는 음향이 들려왔다. 하지만 저게 유인하기 위함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저런 식으로 사람을 유혹하려 하다니. 직접 가서 확인하는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거라며 명월은 눈에 힘을 주었다.
그때 저기 멀리서 엄마,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명월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린다.
이것 또한 알 수 없는 뭔가가 수작을 부리는 걸까. 하지만 다음 번에 들리는 엄마, 라는 소리는 보다 선명했다. 주변의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명월은 찬찬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보이는 건, 안내 너머에서 움직이는 작은 그림자였다.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자마자 명월의 눈이 크게 떠진다.
“잠깐, 기다려―.”
드디어 찾았다. 동시에 저게 진짜 아이인가 싶기도 했지만, 명월의 두 다리는 어느새 아이를 쫓고 있었다.
어린애가 깊은 숲 속에 있는 폐가에서 홀로 있다 하는 순간 의심스럽긴 했다. 하지만 설마하니 싶어서 애써 외면하고 있었건만, 아니었던 거다. 아이는 귀물에 홀려 있었다. 그러니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귀물에 홀려서 괜찮았던 인간이 없었다. 아이가 피해를 입거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명월은 걸음을 서둘렀다. 물론 주변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고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어도 저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배제할 순 없었다. 끌려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명월의 시선은 아이의 뒷모습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거리는 좁혀지지 않고 점점 멀어진다.
아이의 걸음이 빠른 건 아니고, 단순히 귀물이 농간을 부리는 거다. 그걸 느낄 수 있었던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더 서둘러서 움직이는 동안 안개가 짙어지면서 갑자기 아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참다 못한 명월은 검을 빼들면서 허공에 휘둘렀다.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이냐!!”
호통 치듯 외치면서 명월은 바로 뒤를 돌아봤다.
검을 휘두르면서 좌우를 살폈다.
“비겁하게 어린애를 이용하지 말고 네놈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라! 내가 상대해 주겠다!”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외침에도 사방이 잠잠했다. 하지만 이러는 동안에도 얼굴에 닿는 시선이 느껴졌다. 놈은 모습을 감춘 채로 지금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를 전부 보고 있었다. 그리고 비웃겠지. 이런 짓을 하는 자신을 보고 기회를 틈타 뒤를 치려 할 거다.
쉽게 당할 생각은 없지만, 아이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일단은 아이부터 구해야 할 텐데―.
하지만 정말로 아이가 이곳에 있을까.
그때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어미를 찾던 아이가 떠올랐다.
명월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이는 분명 이리로 왔다. 상대가 귀물이든 뭐든, 그것이 어미 흉내를 냈다면 필시 이곳으로 돌아왔을 터였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어미를 찾겠지.
요망한 그놈들은 인간의 여린 구석을 파고들어 그걸 이용한다. 그 얼마나 사특하고 잔인한 것들이란 말인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놈들이라며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그 존재가 나타난다면 당장 검을 휘둘러 목을 벨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리하고 싶었다. 아무 죄 없는 어린 아이의 마음을 농락하는 것들은 죽어 마땅하다. 그때 바로 뒤에서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소리였다. 그쪽으로 눈동자를 옮긴 명월은 뒤를 돌아보면서 검을 휘둘렀다.
“그런 둔한 몸놀림으로 대체 무얼 잡겠다는 거냐.”
빈정거리는 말투에 놀란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근처에 서 있던 커다란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사내를 발견했다. 하얀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건, 백호였다.
저놈이 왜 여기에 있는 건가 싶으면서도, 짚이는 바가 있었던 명월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설마하니 이번 일이 네놈의 짓거리인 건―.”
“날 모욕하지 마라. 난 이런 조잡한 짓은 벌이지 않는다.”
정말 기분이 나빴던 듯 바로 나오는 반박에 명월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네놈의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닌데, 그 말을 어찌 믿겠느냐.”
“믿지 않든 말든 상관은 없다. 내가 하는 말은 진실이고, 그걸 듣지 않으면 네놈은 필시 손해를 보게 될 거다. 어쩌면 그 반반한 목이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지.”
“헛소리. 난 그리 쉽게 당하지 않을 거다.”
“장담하지 마라. 전에도 그런 식으로 날뛰었다가 결국 내 도움을 받지 않았더냐.”
그 말에서 이번 놈이 전의 그것과 비슷한 귀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당시 달려들었던 놈의 강력함과 끔찍한 외관을 떠올리자 목이 탄다. 마른침을 삼키면서 안색을 굳히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에도 그리 될 것 같군. 이번엔 어떤 식으로 보답을 받을까. 네놈은 내가 서투르다 했는데 이번엔 그게 아니라는 걸 한번 증명해 볼까.”
“더러운 소리 지껄이지 마라!”
저런 식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명월은 성을 내며 한소리 했다. 손을 뻗으면 잡히는 거리에 있는 거라면 당장 멱살을 잡아서 목을 졸랐을 거라며 매섭게 노려보는 명월이었지만, 나무 둔턱에 걸터앉아 있는 백호는 느긋했다.
백호의 주변에만 안개가 없었다. 숲의 전체를 감싸듯이 존재하는 안개였지만, 차마 백호를 건드릴 수 없는 듯 그 주변을 배회하고 있음을 명월만이 모르고 있었다.
한 손에 검을 쥔 채로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고 서 있지만 그게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불안을 담고 있었다. 백호 눈에는 그리 비치는데, 명월은 아닌 듯 내내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볼 따름이다.
그걸 본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난 네놈이 원하는 게 무언지 알고 있다. 그걸 모르고 부정하는 건 네놈뿐이다. 조금만 솔직하게 굴면 귀여워해 줄 텐데,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버틸 거냐. 힘들고 지치지 않느냐.”
명월의 눈빛이 조금 더 매서워진다. 이쪽이 하는 말을 헛소리 정도로 치부하고 마는 그 태도에 백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도와달라고, 한마디만 하면 된다.”
“네놈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 이건 내 일이다.”
내뱉듯이 말한 명월은 검을 집어넣었다.
“내가 건드려서 생긴 일이니, 해결 또한 내가 하겠다.”
짧은 순간 여기서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몸을 돌리곤 그대로 달려가 버리는 명월을 본 백호는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편한 자세를 잡고 앉나 싶던 그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고집은, 지 아비하고 똑같군.”
안 좋은 건 닮지 않는 편이 나을 텐데. 혼자서 해결을 하긴 뭘 한단 말인가. 저러다가 아픈 꼴을 당해 봐야 정신 차리니.
이렇게 자신이 나타나 준 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정말 모르는 건가. 저런 놈을 위해서 자신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