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또전 3권
1장
호접화의 손목을 한 선비가 붙잡고 있고, 근처로 몇몇 사내들이 더 서 있었다. 하나같이 통이 넉넉한 두루마기를 입은 채였고 나이는 있어 보였다.
내리쬐는 달빛과, 기방에서 일하는 사내들이 들고 서 있는 등을 통해서 그 사이로 낯이 익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비가 호접화를 억지로 끌고 가려는 걸 지켜보면서 흐뭇해하는 자는 대감 이병현이었다.
호접화는 버티려 했고, 그 뒤에 선 자희와 몇몇 기생들은 울상인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막아 보고 싶어도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게 수월치 않았던 거다. 그렇다고 저들에게 호접화가 끌려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기에 입으로라도 말리는 거다. 그게 그녀들의 최선이었다.
호접화라 해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호란의 최고 기생이었지만, 저들 눈에는 그렇고 그런 기생들과 다르게 보이지 않을 터였다. 저들이 내키는 대로 끌고 들어가 원하는 만큼 즐기고 싶은 거겠지.
평소에는 기방의 규칙에 맞추어서 잘 놀아 주는 것 같아도, 꼭 이런 식으로 더러운 모습을 보이는 거다. 그것이 제 살을 깎아 먹는 거라고 생각지도 못하고―.
호접화는 아까부터 계속 제 팔을 잡아당기는 선비를 바라봤다.
처음에는 흥에 겨워서 호접화를 끌고 가려 했던 선비도, 쉽게 움직이지 않는 그녀를 두고 서서히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연약한 여인으로 보이는 그녀이나, 어쩐지 단단한 바위를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이를 어째야 하나 싶어 시종일관 굳은 채로 있는 그를 두고 호접화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병현과 그 주변에 모인 대감들을 살피던 그녀가 내내 무겁게 다물려 있던 입을 열었다.
“오늘은 선약이 있어 대감을 모실 수 없다 분명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미 앞서 들은 말이었기 때문에 몇몇 대감들은 코웃음을 쳤다.
“기생 년 주제에 선약이 다 뭔 말이더냐. 헛소리하지 말고 순순히 이리로 오너라. 여기에 계신 이병현 대감의 속을 언짢게 할 셈이더냐. 지금 우리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네년은 물론이거니와 이곳에 있는 모든 기생 년들의 옷을 벗겨서 길바닥에 앉혀 둘 것이다! 수치스러운 꼴을 당하기 싫거든 순순히 따르거라!”
험악한 저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저들은 한다면 하는 이들이었다. 개중 몇은 정말로 호접화의 옷을 벗겨 내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눈에 힘을 주고 노려봐 왔다.
놀란 자희가 호접화의 뒤로 다가가선 “형님.” 하고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호접화는 잠시 그리로 시선을 주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아무리 이곳이 기방이고 저희가 기생이라 하나, 그 속에서도 나으리들께서 지키셔야 할 법도라는 게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걸 잘 지켜 주신 분들이 오늘은 왜 이러십니까. 제가 일이 없어 이러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달리 모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을 모시고 난 후, 일찍 자리가 정리되면 그때 대감들을 찾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네년이 미친 게 아니더냐! 어찌 우리가 다음이 될 수 있단 말이냐! 지금 당장 따라와도 부족할 판에, 계속해서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더 이상 네년의 말을 듣고 싶지도 않다! 여봐라! 당장 저년을 끌어내서 옷을 벗겨라!”
그 외침에 내내 구경을 하던 사내들이 앞으로 나섰다.
쉽게 만날 수 없는 호접화였다. 그녀의 옷을 벗기고 속살을 볼 수 있는 건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려운 것이었다. 이 상황이 흥분이 되기도 하고 기대도 되었던 이들은 뭔가에 홀린 듯 앞으로 움직였고, 자희가 울먹거리며 호접화의 뒤로 달려갔다.
그리고 돌아가는 추이를 살피던 명월도 더는 참을 수 없어 앞으로 나섰다.
호접화의 손목을 잡고 있던 이가 그녀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호색한의 얼굴로 있던 그의 더러운 손이 호접화의 옷고름을 풀어내려 할 때에 맞춰 달려온 명월이 사내의 가슴 가운데를 세게 걷어찼다.
“커헉―!!”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가 멀찍이 날아갔다.
부웅 떠서 뒤로 나자빠지고도 부족해서 데굴데굴 굴러가는 사내의 모습에 호접화에게 달려들던 사내들이 놀라 멈췄고, 자희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호접화의 앞을 막아선 명월을 보곤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본 자희는 울먹거리면서도 웃는 얼굴로 사또, 하고 중얼거렸다.
자희가 내뱉은 말을 들은 걸지도 모른다. 사내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면서 명월을 보다가 마지막으로 이병현 대감을 돌아봤다. 내내 우월감에 젖어 있던 대감의 얼굴이 딱딱하게 변해 있었다.
굳어 버린 대감의 얼굴에 아랑곳하지 않고 명월은 뒤를 돌아봤다.
차분한 호접화가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왜 나서신 겁니까.’라는 타박을 담고 있었다.
문제가 복잡하게 꼬여 있어도 그녀가 알아서 해결하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월은 저들의 더러운 근성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엔 저들이 원하는 대로 굴 터였고, 명월은 그걸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가만히 계시오. 입술을 달싹이는 것으로 그런 생각을 전달한 명월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이병현과 그 무리를 하나하나 살폈다.
명월이 누군지를 알게 된 이들은 그의 시선이 얼굴에 닿으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 반응에 명월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여기에 있는 호접화는 나와 술잔을 기울이던 중이었소. 아직 우리의 자리가 파한 게 아닌데, 왜 억지로 그녀를 끌고 가려는 거요.”
명월의 물음에 그에게 배를 얻어맞은 사내가 신음을 흘렸다. 배를 양손으로 누른 채로 뼈가 부러진 것 같다고 끙끙대는 사내를 보던 한 선비가 앞으로 나섰다.
“자리가 있는 기녀가 바람을 맞으며 걷고 있으니 그게 이상해서 데리고 가려 했던 것뿐이오. 애초에 기생 년 간수를 잘 했어야 할 게 아니오.”
명월이 누군지 알면서도, 주어는 언급하지 않고 되지도 않는 말로 타박하려는 것에 명월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이곳은 기방이오. 그 안에서 그녀들은 자유롭게 다닐 수 있소. 그곳에서 조심해야 하는 건 그녀들과 자리를 함께해야 할 사내들이 아니오? 약조된 기녀들과 자리를 함께하고 술잔을 기울이면 그만인 것을, 왜 이 안에서 돌아다니는 사람을 두고 타박이란 말이오. 기녀가 가장 안전해야 할 기방 안에서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려 하다니. 대감들께선 밖으로 나가시면 눈에 보이는 아무나 끌고 가서 큰소리를 치실 분들이오.”
“어찌 그런 식으로 말한단 말이오. 암만 그래도 말이 너무 심한 게―.”
“제가 심한 게 아니라, 그대들이 우습지도 않은 짓을 하신 게 아닙니까.”
기분이 언짢기 때문일까. 이방이 들으면 기겁할 만한 태도로 명월은 앞에 선 불한당 같은 이들은 주욱 훑어봤다.
어디 가서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던지 돌처럼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자들을 노려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기녀를 끼고 예뻐할 때에는 간도 쓸개도 다 내주실 것처럼 굴더니, 제 뜻대로 되지 않으려 하니 핍박이란 말이오? 어찌 사람이 그리할 수 있단 말이요. 기방이 그대들의 더러운 본성을 드러내는 장소인 줄 아시오? 그녀들의 도움을 받아 즐겁게 술잔을 기울였으면 그걸로 끝내고 집으로 돌아들 가시오!”
마지막은 거의 호통처럼 터져 나왔다. 그것에 몇몇이 화가 난 듯 앞으로 움직이려 들었지만, 그 전에 한 대감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오간 후, 명월을 바라본 그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기녀를 사서 술을 마시는 건 마찬가지인 입장인데, 너무 함부로 말씀하시는 것 같소.”
“이보다 더 심하게 말할 수도 있고, 행동도 할 수 있소. 그런데 참는 겁니다.”
저들이 지체 높은 집안의 대감과 선비들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기방에 기어들어 와서까지 권세를 부리려 하니 그게 우스운 거다. 그런 식의 행동이 본인들의 격을 떨어뜨린다는 걸 정말로 모르는 건가 싶었던 명월의 표정은 내내 굳어 있었다.
명월과 여섯 남짓한 사내들의 기묘한 대치가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이병현 대감은 내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이런 일에 본인은 나서지 않겠다는 양 굴고 있는 모습이 우습다. 따지고 보면 저자 때문에 모든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일 텐데―.
명월은 이병현 대감을 지그시 바라봤고, 그 시선에 드디어 이병현 대감이 입을 열었다.
“이 고을 안에서 우리를 적으로 만들어 사또께 좋을 게 뭡니까. 뭐든지 적당한 게 좋은 법입니다. 그곳에 있는 이방이 알려 주지 않더이까.”
차분한 목소리 안쪽으로 분노가 담겨 있었다.
‘네놈이 이리 행동하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 말에 명월은 한쪽 입술 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잘 알려 주더군요. 그래서 대감들이 아닌 다른 사람과 친분을 쌓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명월은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호접화를 내려다봤다.
“호접화, 화소군 행수에게 전언을 보냈나.”
화소군 행수의 이름을 거론하는 순간 앞에 모여 있던 자들 사이로 작은 술렁거림이 일어났다. 이전에 이방이 말하길, 대감과 척을 지려거든 화소군과 친분을 돈독히 하는 편이 좋다는 식으로 말했다.
역시나 그게 답이었던가.
화소군은 평범한 장사치가 아니고, 크든 작든 저들에게도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저들에게 충분한 압력을 줄 수 있었다.
호접화는 명월이 어떤 의도로 지금 이 순간 화소군의 이름을 언급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가려던 참이었으나 길이 막혀서 지체되고 있었사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네. 자네가 의도한 바가 아니고, 사람이 막는 길을 어찌하겠나. 지금이라도 천천히 다녀오게. 막힌 길은 뚫린 것 같으니 말이야.”
그리 말하며 명월은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팔을 드는 순간 그 앞에 서 있던 이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자리를 피하는 이들을 확인한 후, 명월은 재차 호접화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괜찮다. 그런 눈빛을 읽은 호접화는 명월의 뒤로 나와서 걸음을 옮겼다.
호접화가 다시금 저 무뢰배들에게 다가서는 걸 본 자희는 긴장된 얼굴로 그쪽을 살폈다. 하지만 그녀가 걱정하는 일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명월이 버티고 서 있고, 화소군까지 언급된 마당에 그녀를 다시금 붙잡을 수 있을 만한 자들은 없었다.
호접화가 사라질 때까지 한자리에 선 채로 어색한 헛기침이나 해대는 자들을 보자니 역겨워서 속이 뒤틀린다. 사내라고 불리는 것들이 어찌 이런 짓을 벌이는지 모르겠다. 일단 상황이 정리가 되었으니 이만해도 되겠지만, 막을 새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을 들어 보셨소?”
냉랭하다 싶은 투로 던지는 말에 사내들이 주춤거렸고 이병현 대감도 바로 고개를 들었다.
욕심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대감의 일그러진 얼굴을 본 명월 또한 만만치 않게 굳은 얼굴이었다.
“우물 속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높겠지만, 그뿐입니다. 우물 밖으로 나와야 진정한 세상이 보이는 법이지요. 지금 대감들께선 이 좁은 땅덩이를 호령하고 계시나, 그곳을 나오신다면 무엇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잘난 척하는 것도 반양 안에서일 뿐이었다. 도성으로만 나가도 있는 자들 앞에선 납작 엎드려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 자들이었다.
그런 권세가 백 년을 가겠는가, 천 년을 이어질 수 있겠는가. 사람이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하는 법이었다.
끝났다 싶었더니 재차 이어지는 명월의 조롱에 결국 참다 못한 한 선비가 앞으로 나섰다.
“지나치게 건방지군―!!”
“술을 드시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그걸로 끝내고 돌아들 가십시오. 늦은 시간, 안방에서 기다릴 부인들 생각도 하셔야지요. 그래야 부인들께서 대감들의 늦은 귀가를 다른 사람 탓으로 돌려 괜한 불똥이 튀지 않을 게 아닙니까.”
더는 말을 해 주고 싶지도 않았다. 제 딴엔 다 그들을 생각해서 말하는 건데, 저들 얼굴을 보자니 제대로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았다. 분명 모여서 자신을 안주 삼아 험한 욕설을 토해 내겠지.
더는 저들 앞에 서서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던 명월은 미련 없이 몸을 돌리고 빠른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멀어지는 명월을 두고 자희와 기방에 고용된 사내가 급히 뒤를 따랐다.
그렇게 명월이 멀어져서 보이지 않게 되자, 에잇―하고 한소리씩 내던 이들이 이병현 대감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대감.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가만히 계실 겁니까? 어찌 저리도 건방질 수 있단 말입니까. 전 그렇다 쳐도 대감께 한 행동을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르고 손이 떨려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 전의 그 반반한 얼굴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 제깟 놈이 뭐라고 감히 그런 식으로 말한단 말인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간다면 사람 체면이 서지 않을 거다. 양손을 움켜쥔 채로 파르르, 몸을 떠는 자들을 두고 이병현은 입술을 뒤틀었다.
내내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었으나 실상 이들 중에서 가장 분노를 느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다. 생김새가 어여뻐서 귀엽게 봐주려 했더니 도를 넘어섰다.
사또라 해 봤자 기껏해야 애송이었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이번 기회에 똑똑히 알려 주겠다며 이병현 대감은 눈을 가늘게 떴다.
“우물 안 개구리가 누구인지, 이번에 확실하게 알려 주겠어.”
* * *
붉은 종이 위쪽으로 황금 줄이 정성스럽게 꼬여 있었다. 편지를 전한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치면, 화가 난 게 풀릴 정도로 격식을 제대로 갖춘 것이었다. 문제는 기다릴 만큼 기다린 후에 받은 거라는 데에 있었다.
화소군에게 연락을 하러 간 호접화의 손에 들려 온 편지를 앞에 두고 명월은 제 턱을 쓰다듬었다. 고개를 들자 옆에 앉아 있던 호접화가 눈으로 편지를 가리켰다.
“때마침 행수의 사람이 와서 전해 주고 갔습니다. 갑작스럽게 일이 생겨서 자리를 비울 수 없게 되었다 하시더군요.”
“사람 일이야 언제든 갑자기 생길 수 있는 노릇이지. 분명 오늘 오지 못한 데에 대한 미안함을 적었을 거야. 그리고 다음에 따로 자리를 마련한다 할 것이야.”
조금 더 본인에게 유리한 장소를 선정해서 말이다.
정말로 급한 일이 있어 그걸 먼저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뭔가 낌새를 눈치채고 발을 빼려 할 수도 있었다. 장사꾼들은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눈치를 지니고 있으니. 또 그런 게 있기에 그 사람이 지금의 지위에 오른 게 아니겠는가. 단순한 운과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 있기 마련이었다.
명월은 붉은 종이를 들어선 그걸 품에 넣었다.
“읽지 않으시는 겁니까.”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를 아는데 굳이 읽을 필요가 어디에 있나. 이만 들어가 보겠네.”
원래 목적은 화소군과 만나서 궁금한 것 몇 가지를 묻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오지 않으니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명월은 가만히 앉아만 있는 호접화를 보곤 불현듯 드는 생각에 걱정이 되어 물었다.
“내가 돌아가면 다시금 귀찮게 구는 이들이 달라붙는 게 아닌가.”
“그땐 특별한 상황이었습니다. 보통은 제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또께서도 다음에 그와 같은 일이 생긴다면 나서지 마십시오.”
나서지 말라는 말에 명월의 미간으로 가벼운 주름이 잡힌다.
그걸 눈으로 봐서 알면서도 호접화는 말을 이어 나갔다.
“당장 도움을 받아서 좋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일을 통해서 사또와 제 적이 생긴 겁니다. 그들은 더 집요하고 성가시게 굴지도 모릅니다. 보기에 따라서 그들이 나서는 게 별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뽑기 힘든 가시가 될 수도 있사오니 앞으로는 신중하게 행동하십시오.”
그리 말한 호접화는 입을 다물곤 차분하게 명월을 응시했다.
묘한 매력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여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명월은 대꾸 없이 입을 다물고만 있었고, 그런 그의 모습에 호접화는 이윽고 먼저 눈동자를 내려뜨는 것으로 시선을 피했다.
“제가 너무 무례하게 군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다 내 생각을 해서 말한 게 아닌가. 괜찮네. 게다가 그대의 말을 듣자니 내가 경솔했던 것도 같군. 하지만―.”
덧붙이는 말에 호접화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기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이라 한 방 걷어차고 싶었어. 겸사겸사 그리할 수 있어서 속은 시원했지.”
“……정말 못 말리시겠습니다.”
호접화의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미소를 짓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명월은 몸을 일으켰다. 가죽신을 신고 누각을 내려가려 하자 호접화가 뒤를 쫓는다. 명월은 그녀를 돌아보면서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배웅할 새라 걸음을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 * *
구군복을 입지 않을 때에는 정문으로 왔다 갔다 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매번 뒷문으로만 다니던 게 버릇이 되어서 지금도 그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구조가 복잡해서 길을 찾는 게 어려웠는데 이제는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었다. 그만큼 자신이 기방을 자주 찾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이러니 이번에 새로 부임한 사또가 기녀들의 치마폭에 푹 감싸여 산다는 소문이 떠도는 게 아니겠는가.
치마폭에 감싸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들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한 게 사실이었다. 그녀들은 단순히 술시중을 드는 것뿐만이 아니라, 유려한 화술로 사람의 마음을 다독여 주는 게 있었다. 호접화는 그중 으뜸이었다.
재능이 많은 여인이었다. 기녀로 살기엔 참 아까웠다. 그리 생각하는 건 비단 자신뿐만이 아닐 터였다. 기방을 찾는 여러 사내들 중에서 호접화를 대하는 게 자신과 같은 이들은 몇 안 되겠지. 대부분은 이병현 대감 같을 거다. 참 더럽고 힘든 일을 한다면서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목적은 화소군을 만나는 거였으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서 그런지 마음이 무거웠다. 이런저런 일이 많았는데 해결을 본답시고 바쁘게 다녀서 그런지 피곤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마를 타고 오는 건데.
그리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뒷문에 다 도착한 명월은 대문을 넘어섰다.
그러자 호접화가 한발 빨리 말을 전한 건지, 사내가 말의 고삐를 붙잡고 있다가 명월에게 깊이 허리를 굽혔다.
“나오십니까.”
고개를 끄덕인 명월은 고삐를 넘겨 받아선 말 위에 올라탔다. 투레질을 하는 말의 목을 토닥이며 그는 사내를 내려다봤다.
“수고하게. 다음에 또 보세.”
“날이 많이 어둡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사내의 인사를 받고 난 후 명월은 말의 옆구리를 세게 쳤다. 명월을 태운 말은 앞으로 힘껏 달려 나갔다.
* * *
예전에는 혼자 걸어서 관아로 돌아가려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길을 잃고 난 후에는 그때를 조심하고자 가마나 말을 타거나, 달리 동행을 붙이곤 했다.
이번에 화소군을 만나러 간다 했을 때에도 이방은 복운을 데리고 가라 했지만, 괜찮다 했다. 그들은 진심으로 걱정을 해 주었으나 명월은 정말 괜찮았다.
당장 문제가 되는 귀물을 처리했으니 달리 무슨 문제가 생길까 싶었던 거다. 거기다 길을 잘 기억하는 말을 타고 있으니 관아로 돌아가는 건 금방이었다.
알아서 길을 찾아가는 말의 등 뒤에 앉아서 명월은 화소군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가 이번에 자리를 피한 이유가 정말로 무얼까. 오지 못할 이유가 있다 했지만, 변명으로 여겨졌다. 그런 사내라면 설령 문제가 생기더라도 해결하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분명 뭔가가 있는 거다. 요는 그자가 무슨 생각을 해도 상관은 없지만, 자신이 그것에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거였다.
고삐를 단단히 쥔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믿을 만한 게 하나도 없군―.
혀를 찬 명월은 낮은 물길 가운데에 나 있는 다리를 건너려 했다. 다리의 길이는 얼마 안 되고, 폭도 좁았다. 하지만 말 두 마리가 달릴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별생각 없이 다리로 올라선 명월은 저기 앞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검은 그림자들을 발견하곤 인상을 썼다.
뭐냐. 무시하고 그냥 달릴 셈이었지만, 검은 그림자는 앞을 막아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저들이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명월이 말을 멈추었다.
명월은 있는 힘껏 고삐를 당겼다. 갑작스러운 일에 말이 투레질을 하면서 고개를 저어댄다. 크게 들썩이는 말 위에 앉은 채로 명월은 다른 손으로 말의 목을 쓰다듬었다. 흥분한 말을 진정시키던 명월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도 그림자가 서 있었다.
앞과 뒤를 모두 막은 건가. 재미없게 되었군.
명월은 진정을 해선 똑바로 서 있는 말 위에 앉은 채로 다시금 앞을 살폈다.
서 있는 건 전부 셋가량이었고 촌스럽게 코와 입을 가리는 검은 천을 두르고 있었다. 명월은 탐탁지 않아 쯧, 하고 혀를 찼다.
“이병현 대감이더냐.”
가볍게 넘겨짚는 말에 사내들은 반응이 없었다. 대답하지 않는 걸로 들통이 나지 않는 게 아니었다. 묻는 순간, 지금과 다르게 주변 공기가 묘하게 경직되는 걸 느낄 수 있었던 명월은 딱하다는 양 재차 혀를 찼다.
“그리도 숨기는 게 서툴러서야 뭘 어찌하겠다는 거냐. 네놈들이 여기서 대감의 뜻을 이룬다 해도 뒷감당하기는 힘들 것 같구나. 난 눈이 좋아서, 한 번 본 건 절대로 잊지 않는다. 그게 눈뿐이라 할지라도 말이지.”
그리 말한 명월은 달빛이 환하게 비추는 곳에 서 있는 사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거리도 멀고, 달빛이 비춘다 해서 대낮처럼 밝은 것도 아니었다. 뚫어지라 본다 해서 정말로 단박에 사내들의 눈과 특이점을 기억할 순 없겠지만, 명월이 한 말이 있었기에 그들은 몽둥이를 본인 얼굴 앞에 휘두르며 외쳤다.
“저놈을 말에서 끌어내려라!”
끌어내려서 두들겨 줄 셈이던가. 그게 아니라면 더 안 좋은 계략을 꾸미는 것인가.
설마하니 사람을 죽이려 들겠나 싶으면서도 불안한 느낌이 든 명월은 고삐를 당겼고, 말은 달려드는 사내들 쪽으로 앞발을 세게 휘둘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한 공격이었던지 몇 번 몸을 피하다가 재차 달려들어선 명월의 다리를 붙잡으려 들었다.
이를 악문 명월은 말의 고삐를 세게 당기면서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갑작스레 달려드는 사내들 때문에 놀란 건지 투레질을 하면서 제자리에서 돌던 말은 이윽고 날카롭게 소리 내 울면서 앞발을 높이 들었다.
놀란 사내 둘이 물러섰지만, 동시에 뒤에서 접근한 이들이 손을 뻗어 명월의 옷을 붙잡았다. 뒤로 몸이 당겨지는 느낌에 명월은 혀를 찼다.
때를 봐서 이놈을 뿌리치고 앞으로 달려갈 셈이었지만, 아무래도 무리인 듯싶었다. 버티고 앉아 있으면 이대로 끌려 내려가 더더욱 위험해질 수 있었다.
명월은 주변을 둘러싼 놈들을 살피다가 말의 옆구리를 세게 걷어찼다. 그러자 말이 사내들을 밀어내고 앞으로 달려나가려 했다.
“놓치면 안 된다! 붙잡아라!”
“말의 다리를 두들겨 패라! 분질러!”
사내들의 외침에 명월은 재차 말의 옆구리를 발로 차면서 오른쪽으로 몸을 내렸다. 아래로 내려선 명월은 아예 바닥을 구르면서 몸을 일으켰다.
달려드는 놈을 피하면서 부채를 꺼내서 놈에게 휘둘렀다. 부채가 약하긴 해도 이런 식으로 휘두르면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부채를 휘두르면서 명월은 빈틈이 보이는 자의 옆구리를 차거나 세게 밀어냈다.
다리 위가 아니라면 도망칠 곳도 많았을 텐데, 그렇지가 않으니 곤란했다. 사내들 몇을 후려쳐서 물러서게 해도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둘이 쓰러져도 셋이 달려드니 명월은 피하면서 놈들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가볍게 팔과 등, 가슴 등을 한 대씩 얻어맞아야 했던 명월은 헛숨을 삼키면서도 비명을 지르거나 하지 않았다. 고작 이런 놈들을 상대하면서 소리를 내는 건 수치스럽게 여겨진 탓이다.
그때 옆에 서 있던 놈이 세게 몽둥이를 휘둘렀고, 그걸 피하려 했던 명월의 소맷자락을 사내가 붙잡았다. 떨궈 내려 해도 사내는 놓지 않았고, 명월은 그대로 뒤로 당겨졌다.
사내가 팔을 붙잡아서 등 뒤에 딱 달라붙어 움직일 수 없도록 하자, 앞에 서 있던 사내가 몽둥이를 양손으로 붙잡으며 외쳤다.
“단단히 붙잡아라!”
설마하니 저대로 내리칠 셈은 아니겠지?
몽둥이라 해도 있는 힘껏 맞으면 골로 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설마 싶지만, 지금까지 공격하는 행동을 보면 놈들에게 적당이라는 건 없었다. 분명 있는 힘을 다해서 덤벼들 거라며 명월은 고개를 푹 숙이는 반동 그대로 뒤로 젖혔다. 명월의 뒤통수에 달라붙어 있던 놈의 얼굴이 세게 충돌했다.
“으악!”
소리를 지르는 놈의 팔을 오히려 앞으로 당겨서 다리 아래로 밀어 버렸다. 그리고 달려들다 말고 주춤하는 놈의 배를 걷어차면서 옆에 서 있던 놈에게도 주먹을 휘둘렀다.
날래고 재빠른 몸놀림을 보이는 명월이지만, 덤비는 숫자가 많으니 두어 대 맞기도 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덤벼들었다.
멱살을 잡은 놈을 세게 흔들면서 그대로 이마를 앞으로 내밀었다. 뻐억―하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코가 주저앉은 놈이 으악―하고 비명을 지른다.
제대로 들어간 공격이었던 만큼 명월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잠시 눈앞으로 별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본 명월은 비틀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고 섰다. 빠르게 고개를 저으면서 고개를 들자 이쪽보다 훨씬 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놈들이 몇 보였다.
놈들도 위에서 명령을 내린 게 있으니 그걸 따라야 하는 입장이라는 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쉽사리 굴복하지 않을 테고, 그런 자신을 상대하는 건 저들에게도 성가신 일이 될 거다.
그냥 이쯤에서 적당히 타협을 보고 물러서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해 주려는데 아직까지 버티고 서 있던 놈이 품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는 게 보였다. 설마 싶었던 명월은 사내의 손에 들려 있는 단도를 발견하곤 어이가 없어 물었다.
“지금 뭘 빼 드는 거냐.”
“왜? 이걸 보고 나니 이제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든 거냐.”
사내는 단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프지 않게 가볍게 손만 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제발 좀 살려 달라는 말이 나오게 해 주마.”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인 놈은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명월을 매섭게 노려봤다. 정말로 칼질을 해서라도 자신을 굴복시키고 말겠다는 투였다.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나. 주인이라는 놈도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아래쪽에 있는 것들도 전부 다 맛이 간 모양이라며 명월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 정신 나간 놈이 날 죽이라고 했던 거냐.”
“늦은 시간에 기방을 드나드는 놈이 사또라며 거드름을 피우는 꼴이라니. 우습지도 않다. 이 고을엔 너 같은 사또는 필요치 않다. 문제 일으키지 말고 그냥 여기서 조용히 사라져라!”
그리 외친 사내가 달려드는 순간 명월도 어금니를 악물었다.
몽둥이 정도는 눈을 감아 줄 수도 있었지만, 단검은 아니었다. 미친놈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이놈들을 전부 다 붙잡아서 밧줄로 꽁꽁 묶은 후에 이병현 놈의 문 앞에 던져 줄 거라며 명월이 치고 나가는 순간이었다. 그의 눈앞으로 하얀 그림자가 홀연히 나타났다.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지만, 당황한 명월은 그만 발을 삐끗해서 비틀거렸다. 그러는 동안 갑작스럽게 나타난 백호는 단검을 휘두르려 하는 이의 손목을 붙잡고 얼굴을 후려쳤다.
한 대 맞은 사내는 명월 때와 다르게 의식을 잃은 듯 비틀거렸다. 그런 놈의 어깨를 잡아서 다리 아래로 떨궈 버린 백호가 고개를 돌렸다.
하얀 호랑이 얼굴 아래로 보이는 백호의 표정은 살기등등했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굳은 얼굴이 된 그는 멍하니 있는 명월을 빠르게 지나쳐 갔다. 스윽, 하고 스쳐 지나가는 백호를 확인한 명월은 헛숨을 삼키며 뒤를 돌아봤고, 백호는 남아 있던 사내들을 처리했다. 말 그대로, 처리였다.
그가 주먹을 휘두르고 발차기를 날릴 때마다 사내들은 속절없이 날아갔다. 마치 부대 자루라도 되는 양 휙휙 시원하게 날아가서 다리 아래로 떨어진다.
여기저기서 풍덩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사내가 뒷걸음질을 치다가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 것에 맞춰서 명월이 손을 뻗었다.
“그만둬!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이건 자신의 일이었다. 그가 끼어들 필요는 없었다.
그러는 동안 백호가 사내 하나의 머리통을 붙잡아 다리 끝으로 질질 끌고 가는 걸 본 명월이 다급히 그리로 달려가 팔에 매달렸다.
“그만두라고 하잖나!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어!”
“네가 처리할 수 있다고?”
되묻는 목소리가 차갑다.
순간적으로 오한이 들었지만, 그런 내색을 애써 감춘 명월은 고개를 들어 백호를 올려다봤다.
“그래.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었다. 네가 나서서 문제가 더 복잡해지게 된 거야. 네놈을 본 이들이 뭐라고 하겠……!”
명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호는 코웃음을 치며 머리통을 잡고 있던 사내를 던져 버렸다. 으악, 하는 비명과 동시에 풍덩―소리가 나자 명월은 얼어 버렸다.
백호는 제 손을 털면서 느긋하게 말했다.
“덩치 좋은 놈이 지나치는 길에 도와줬다고 하겠지.”
“…….”
지금 그게 말이라고 하는 건가. 입을 다문 명월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진다. 그걸 보고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은 백호는 옆을 지나쳐 갔다.
그냥 사라져도 화가 날 텐데 심지어 어깨를 툭 치고 간다. 그것에 명월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고, 당장 뒤를 돌아봤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 백호가 점점 멀어진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와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자신도 있는 힘을 다해서 손을 휘두르긴 했지만, 백호가 건드린 이들은 더 걱정이 된다. 뼈가 부러지거나 어딘가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명월은 다리 끝으로 가서 아래를 살폈다. 물은 깊지 않아서 몇몇 사내들이 일어나서 걷는 걸 확인한 명월은 재차 혀를 차곤 주변을 살폈다.
배를 감싼 채로 신음을 흘리는 이들만 보이지, 말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이러면 걸어서 돌아가야 하지 않나.
아니다.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가늘게 뜨자 백호가 아직 있었다. 하지만 점점 걸음이 빨라진다. 명월은 달려서 그 뒤를 따라붙었다.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었어. 네놈이 도와주지 않아도 되었단 말이다.”
나름 진지하게 말을 하는 건데 그는 반응조차 없었다. 마치 이쪽에서 무슨 말을 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식이었다. 그것에 명월은 이를 갈면서 내뱉었다.
“그런 식으로 나에게 빚을 만들어서 갚게 할 셈이냐.”
그 순간 백호가 멈추어 섰다.
내내 반응이 없다가 갑자기 멈춰 서는 것에 명월은 당황해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백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선 뒤를 돌아봤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싸늘한 분위기는 느껴졌다. 목 안쪽이 타들어가는 걸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기 죽어 있을 필요가 어디에 있나 싶어서 재차 입을 열었다.
“네놈이 문제를 일으킨 거다. 보통 사람들 일에 끼어들면 안 되는 게 아니냐.”
귀물과 있었을 땐 몰라도, 저들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백호 그가 손을 대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비단 그것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왜 지금 이 순간 그가 나타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명월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를 입에 담았다.
“설마하니 내 뒤를 쫓고 있는 것이냐.”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지나치게 시기를 잘 맞춰서 나타났다. 그건 어딘가에서 잠복하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구나. 이 녀석은 지금까지 숨어 있다가 일이 생길 때에 맞춰서 튀어나왔던 거야.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었던 건데 왜 그걸 이제야 깨닫게 된 건지 모르겠다. 본인의 아둔함을 탓하면서도, 명월의 얼굴은 화가 나 잔뜩 굳어졌다.
“왜 내 뒤를 쫓는 거냐.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줄 것도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뒤따라 다니지 마라. 너하고 함께 있으면―.”
거의 일방적으로 내뱉듯이 말을 하던 명월이 입을 다문다. 굳은 얼굴을 한 채로 눈을 내리뜨는 명월을 본 백호는 몸을 돌려 그 앞에 똑바로 서선 다음 말을 채근했다.
“나와 함께 있으면 뭐? 더 말을 해 봐라.”
네놈하고 함께 있으면 이상해진다.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들도 점점 더 커지잖아. 그런 말을 하려 했지만, 근본적으로 문제가 생기게 된 계기는 자신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그 순간마다 백호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자신은 더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터였다. 순간적으로 그걸 깨달았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던 거지만, 잠자코만 있을 수 없었던 명월은 재차 입을 열었다.
“난 인간이다. 인간으로서 살 거야.”
“그런 놈이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거냐. 내 몇 번이나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모든 걸 알고 정리를 해야지만 그때 가서 내가 정말로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거다.”
고개를 든 명월은 백호를 노려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미 내 주변에선 일이 생기고 있고, 네놈도 계속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그런데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지금은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뭐가 뭔지 제대로 알 수는 없었지만, 시작되는 건 분명히 있었다. 그것이 자신을 건드리지 않고 지나쳐 갈 것인가. 그건 그렇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었다. 자신은 모르지만, 눈앞에 서 있는 이 정체 모를 사내는 알고 있는 일이 말이다.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라. 내게 알려 달란 말이다. 네놈이 이런 식으로 숨긴다고 해서 그게 해결될 것 같으냐. 결국에 나는 모든 걸 알아낼 거다. 그때 가선 넌 또 이렇게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할 거냐. 너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마라.”
명월은 손가락을 들어 백호의 가슴 가운데를 꾸욱, 눌렀다.
“네가 내게 한 말. 그대로 돌려주지.”
“…….”
백호가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신경 쓰는지 모르겠지만, 상황이 이러하니만큼 도움을 받았다 해서 그걸 고맙게만 생각할 수 없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차라리 자신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않는 편이 나았다.
더는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았기에 명월은 그에게 굳은 시선을 보냈다. 오랫동안 백호를 노려봐 주고 난 후, 그의 가슴에 대고 있던 손을 떼고 그 옆을 지나쳐 가려 했다.
“유명월.”
차분하게 이름이 불리는 순간 명월은 더 움직일 수 없었다.
고작 이름을 불린 것뿐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이 사내에겐 처음이었다. 아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름이 불린 건 진짜 오랜만일지도―.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눈을 내리뜬 채로, 여전히 싸늘한 표정을 하고 있는 백호가 말했다.
“나중에 후회하는 건 너다.”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것으로 인한 후회라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난 분노하겠지. 분노보단 후회를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어찌 된 것이 백호와 부딪치고 그와 언쟁을 하는 동안 오히려 점점 더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명월을 탐탁지 않게 내려다보던 백호가 갑자기 혀를 찬다. 그러더니 뭔가를 말하려 하는 순간 명월도 눈에 힘을 줬다.
됐어. 난 이미 마음을 정했어. 그러니 시끄럽게 굴지 말고 입 닥치고 있어.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이 감정이 그에게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고대로 전해지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백호와의 눈싸움에서 이겨야만 했다.
유치하게 왜 눈싸움이냐 싶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거라도 지지 않겠다면서 시종 진지한 명월이지만,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백호의 표정은 점점 오묘하게 변해 간다. 화난 것처럼 미간 사이로 주름을 만들다가도 그걸 펴고, 이윽고 혀를 차기도 하면서도 명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명월은 백호의 눈동자가 검기만 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검은 테두리 안쪽으로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저게 무얼까.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눈동자 색도 조금은 다른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명월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이 시려서 저도 모르게 감게 된 거였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백호의 얼굴이 크게 보였다. 지나치게 눈에 힘을 주고 있었더니 이상한 게 보이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더 당황스러운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입술에 말캉한 무언가가 눌려지는 느낌과 동시에 백호가 쓰고 있던 호랑이의 주둥이 부분이 명월의 갓을 꾸욱 눌렀던 거다.
“…….”
이상하고, 불편했다.
부지불식간에 당한 일이기 때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넋 나간 사람처럼 있으려니 백호의 얼굴이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가만히 있던 명월의 눈동자가 천천히 크게 떠진다.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한 건가 싶은 듯 벙쪄서 올려다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아차 싶은 얼굴이 되었다.
내내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방금 그건 정말 병신 같은 짓이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런 게 아니라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명월이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하는 호쾌한 소리가 달이 환하게 찬 하늘 위로 뿌려졌다.
* * *
조용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선 사내는 양손을 모으곤 고개를 숙였다.
“행수님. 연락을 보냈습니다.”
“사또의 손에 내 편지가 들어간 걸 확인했더냐.”
“그 자리에서 바로 읽어 보진 않으시고 품에 넣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바로 읽어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대로 품속으로 들어간 건가. 그래도 버린 게 아니니 언젠가 읽을 거라면서 화소군은 제 턱을 쓰다듬고는 눈동자를 들었다.
그가 앉아 있는 맞은편 탁자에 한 사내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었다. 잔뜩 겁을 먹은 사내는 어깨를 움츠린 채로 덜덜 떨고 있다.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을 떠는 사내를 확인한 화소군은 손을 내려 탁자에 올려진 찻잔을 한 손으로 감쌌다.
“왜 그리도 몸을 떠는가. 여기가 추운가.”
조근조근 한 물음에 사내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춥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만 떨게. 쥐새끼처럼 달달 떨고 있으니, 재수가 없어서 자네를 보기가 싫어지는군.”
웃는 얼굴로 독설을 내뱉자 사내는 헛숨을 삼켰다.
지금은 차분한 모습을 가장하고 있으나 저것이 어떻게 변할지는 그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웃는 얼굴로 목을 베어 갈 사람이고, 뒤통수를 치고도 가볍게 손을 터는 것으로 일을 끝낼 만한 이였다. 그가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한 걸 몇이나 봐 오지 않았던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이어지는 물음에 사내는 재차 고개를 저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거짓말하지 말게. 자네는 혼자만의 생각에 집중할 때 그런 식으로 정신없이 눈을 굴리지. 그리도 속을 쉽게 읽히는 주제에 내게 거짓말을 할 셈인가.”
안 될 일이라며 느리게 고개를 저은 화소군은 팔짱을 끼곤 팔꿈치를 탁자 끝에 살짝 기대었다. 앞으로 몸을 내민 그는 눈을 지그시 떴고,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사내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화소군이 물었다.
“이상한 자가 들어오면 내게 먼저 말하라 하지 않았던가.”
“이상한 자가 들어오면 먼저 말씀을 드렸습니다.”
언제나 늘 그래왔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화소군의 말을 고대로 따라 읊었다. 그 순간 화소군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고, 그는 잔을 집어선 그대로 사내에게 뿌렸다.
“흐억! 뜨거워!!”
오랫동안 찻잔에 담겨 있었을 물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눈을 내리뜨고 있기에 만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눈 안쪽이 전부 다 익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색이 되어선 다급히 눈을 문지르는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화소군이 물었다.
“사또가 나타났는데,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냐.”
거짓말 운운을 하는 순간 방 안쪽에 서 있던 검은 복면을 한 사내가 검집에 손을 올린다. 철컹, 하고 울리는 살벌한 음향에 눈을 비비던 손을 내린 사내가 다급히 말했다.
“처음에는 여자를 밝히는 괴짜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계속 그런 상태로 있었고요. 그런데 그게―.”
말을 어떤 식으로 이어 나가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여기서 말 한 번 잘못했다간 정말 곤란한 일을 겪게 될 것만 같았던 사내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제 턱을 손으로 닦아 내면서 고개를 들었다.
“사실 제 눈에는 아직도 괴짜로만 보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너희같은 평범한 인간들 눈에는 그 사또의 비범함이 보이지 않겠지.”
한심하다는 듯 말해도 마땅히 대꾸할 거리가 없었다. 사내는 화소군이 왜 자신을 부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입장상 화소군 편을 들기도 뭐하고, 사또의 욕을 하면서 그를 비방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지금은 이 자리에 끌려 온 것만 해도 긴장이 되어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잔뜩 긴장해서는 급기야 얼굴이 파리하게 질리는 사내를 앞에 두고 화소군은 탁자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을 들어선 탁자를 두드렸다.
“그 비범한 사또가 이 고을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은가.”
지나치듯 묻는 말에 사내는 재차 고개를 들었다. 인자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화소군을 앞에 두고 사내는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말을 쥐어짜냈다.
“특이한 분이십니다. 감도 좋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발을 빼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진행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리고 넌 이제는 발을 뺄 수도 없어.”
단정적으로 내뱉는 말에 사내는 숨을 삼켰다.
동시에 화소군의 손이 탁자에서 떨어졌다.
“발을 빼는 순간이 바로 죽는 날이라는 걸, 네놈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다.”
내리뜬 사내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이제는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을 떨어 대는 사내를 냉정하게 바라보던 화소군은 하―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양손을 올린 채로 몸을 내밀었다.
“네게 겁을 주려고 부른 게 아니다. 그저 앞으로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할 것인지를 의논하기 위해서 자리를 마련한 것뿐이야. 그 젊고 아름다운 사또는 점점 더 이 고을에 깊이 파고들려 하고 있지. 그래서 모든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면, 그땐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하게 될 거다. 이 고을의 덕을 본 자들도 문제가 터지면 안면몰수하고 이 땅을 버리려 들 거야.”
긴장되고 두려운 상황이지만, 지금 화소군이 하는 말들은 이상할 정도로 귀에 쏙쏙 들어왔다.
어느새 숨 죽인 채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 사내의 눈동자가 다른 의미로 어둡고 깊게 가라앉는다.
“버림을 받은 개가 어떤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는 자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네. 그렇지 않나?”
사내는 마른침을 삼켰다. 고을과 사또. 차근차근 생각을 하던 사내는 이내 ‘이대로 있어선 안 된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반양은 지금 이 상태로도 충분했다. 외부인이 들어와서 문제를 일으키는 걸 더는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한 사람으로 인해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근본이 되는 뿌리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그들은 이 땅에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면 그만이지만, 자신들은 그게 아니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천년만년을 살아가야만 했다. 이제 와 질서를 어지럽힐 순 없었다. 여전히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으나 그걸 억누르며 사내는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는 겁니까.”
“숲속에 있던 해골을 발견했다지?”
입단속을 시켰지만, 화소군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게 이상할 일도 아니었기에 서투르게 숨기지도 않으며 사내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알려지면 자네나 마을 사람들이나 좋을 게 하나도 없어.”
이번에도 역시 크게 고개를 끄덕인 사내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뭔가 낌새를 알아챈 것 같기는 합니다. 그래서 그와 관련이 된 일을 함구하고 그 누구도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고 못을 박아 두셔서, 그러니까―.”
“그렇다 해서 사또가 제멋대로 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그가 제멋대로 굴면 굴수록 반양은 위험해지게 될 것이야.”
반양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순간 사내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굳어지는 눈빛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화소군이 천천히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내가 사또를 처리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저 그가 더는 쑤시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자는 거야. 그는 이곳에 잠시 동안만 머물러 있는 객일 뿐이야. 아는 것 하나도 없으면서 분란을 일으키려 하지. 자네와 다른 이들이 지금까지 유지를 해 온 이 땅을 더럽히려는 거네.”
딱 귀에 쏙쏙 들어올 만한 차분한 목소리로 연이어 선동하는 말에 사내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진다.
“그저 사또가 하지 못하도록 막기만 하자는 거야.”
“……알겠습니다.”
대답하고 나서 사내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입 밖으로 내뱉은 말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만 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화소군이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게 된 사내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제 두려움을 떨쳐내기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 * *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선 복운은 안쪽을 흘깃 봤다. 그러자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읽는 명월이 보였다. 전립을 쓰진 않았으나, 구군복을 차려입고 앉아 있는 모습이 늠름했다.
전에는 저렇게 방에 가만히 앉아서 여기 일만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저리 있어도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면서 복운은 명월의 앞으로 걸어가선 들고 온 걸 내밀었다.
“사또, 탕약을 들고 왔습니다.”
“탕약을 준비하라 한 적이 없다.”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하는 말에 복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나 이번에 여러 일이 있어서 사또의 기운이 많이 허해진 게 아닌가 싶어서 준비했습니다. 특별히 말해서 쓰지 않게 준비를 했으니 드셔 보십시오.”
“내가 쓰기 때문에 탕약을 마다하는 게 아니다.”
고개를 들면서 반박하듯 말하는 명월을 앞에 두고 복운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쓴 거 싫어하지 않으십니까.’ 그리 묻는 눈빛을 앞에 둔 명월은 헛기침을 했다.
지금까지 복운과 함께한 세월이 오래였던지라 그는 명월의 세세한 모든 걸 알고 있었다. 탕약이 쓰기 때문에 싫어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복운 앞에서 괜한 말을 한 것 같았던 명월은 턱으로 책상 아래쪽 바닥을 가리켰다.
“그냥 거기에 두고 가라. 나중에 마실 거다.”
“탕약은 식기 전에 마시는 게 제일입니다.”
“알겠으니까, 이만하고 나가라. 집중할 수가 없구나.”
이번에는 또 뭘 하기에 집중을 한다, 안 한다 말하는지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야 명월이 읽고 있는 책 안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고 싶지만, 꾹 참은 복운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탕약을 잘 챙겨 마시라 하고 싶지만, 그땐 더 큰 소리가 돌아오겠지. 참자면서 복운이 방을 나서기가 무섭게 명월은 책을 덮었다.
지금 그가 읽고 있는 건 인명부였다. 반양에서 나고 자라 죽은 이들이 세세하게 적혀 있는 것들을 살피면서 확인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하루만에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가 누군지를 알아야 바로 대조를 할 수 있고, 정말로 이대로 죽은 건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이방을 옆에 두고 일일이 물을 수도 없고―.
다른 일과 관련해선 바른 말을 하는 이방이지만, 묘하게 고을과 관련된 내용이 되면 입이 무거워진다.
자신을 불신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단순히 이곳에서 오래 살아왔기 때문에 이곳의 규칙이 몸에 배 있었다. 함구하고 숨겨야 할 것들에 대해선, 아직 모든 걸 발설하기가 어려운 거다.
눈을 가늘게 뜬 명월은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이를 세워서 엄지를 깨물다가 입을 벌리곤 다시 눈을 내리떴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해 볼까 싶지만, 그러면 시간을 너무 잡아먹는다.
지금도 창고 안에는 해골이 방치된 상태로 있었다. 왜 그리되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어서 방치한 것이지만, 그 기간이 오래 되어선 안 되었다. 제대로 장례를 치러 주는 게 사람의 도리였다.
입을 벌린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엄지로 제 아랫입술을 꾹꾹 눌렀다.
입술은 부드럽고 말랑거렸다. 어느덧 손가락으로 입술을 더듬던 명월은 어제 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괴한을 만나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때 그걸 도와준 건 백호였다. 엄청난 힘으로 그들을 처리한 백호에게 한바탕하고 난 후, 잔뜩 심각해져 있었는데 놈이 갑자기 입을 맞추었다.
“……미친놈.”
그래. 지금은 미친놈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자고 갑자기 그런 짓을 한 건가. 그 방식으로 도움을 준 것에 대한 보답을 받아 간 건가. 아닌데. 하고 나서 떨어진 놈도 짐짓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턱을 그렇게 세게 후려 맞았는데도 가만히 있던 게 아니겠는가.
명월은 책상 위에 놓인 제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검은 가죽을 쓰고 있는 부분을 빤히 보다가 손을 펼쳤다가 움켜쥐었다.
일단은 그 덕분에 상황이 더 심각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너무 저돌적으로 행동했던 게 아닐까.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선 고맙다고 해야 했는데.
……아니다. 그놈이 이상한 짓을 했으니 고맙다 할 필요가 없어.
하지만 너무 다그친 것 같아서 조금 그런데.
마음이 점점 무거워진 명월은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달리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왜 자신은 이런 식으로 그놈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그놈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거다.
물론 몇 번이나 도움을 받고, 그 대가로 놈과 몸을 섞긴 했지만…….
“…….”
다시금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처음은 놈의 강압에 의해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두 번째는 자신이 선택한 일이었다. 나름 생각해서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무모한 행동이었다.
되돌아보면 왜 그런 짓을 했나 싶기도 했다. 생각이 짧았다. 단순히 그리 생각하고 넘어갈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안기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지.
다른 이의 품의 따뜻함을 느껴보고 싶었던 걸지도.
“……우습군.”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명월은 속이 타는 걸 느꼈다. 답답하고 뭔가가 얹힌 듯 언짢다. 그래서 복운이 두고 간 탕약을 들어선 한입 마셨다. 그 순간 그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잡힌다.
분명히 쓴맛을 줄였다 했으면서 이건 대체 무언가 싶었다. 역한 기운에 속에서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느끼면서 명월은 오만인상을 쓰고는 힘겹게 탕약을 넘겼다. 그러곤 쟁반 위에 그릇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환한 빛이 눈을 찌른다. 대청 끝으로 나와서 선 명월은 고개를 들어선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정말 날이 좋았다.
이토록 날이 좋은데 나쁜 일은 왜 생기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저 하늘처럼 조용하고 차분하게 하루하루가 지나갈 순 없는 것인가.
무표정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명월은 눈을 감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아이가 보였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아이는 명월과 시선이 부딪치자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명월은 미소를 지으며 턱짓을 했다.
“이리 가까이 와 봐라.”
평온한 미소를 머금은 명월은 무척 아름다웠다. 똑바로 보는 게 죄를 지는 것 같았기에 머뭇거리던 아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다가와 선 아이를 확인한 명월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선 아이를 바라봤다.
다정한 눈빛인데도 알 수 없는 부담을 느낀 아이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날이 좋구나. 괜찮으면 마당에서 햇볕 좀 쐬고 그래라.”
그 말에 아이가 마당 쪽을 살피는 듯하다가, 다시 눈을 내리뜬다. 대답 없는 아이를 두고 명월은 재차 말했다.
“하나씩 차근차근 네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 게 최선이다.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네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야. 그건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다.”
아이를 다시 데리고 왔을 때에는 재차 밖으로 나가면 어쩌나 싶었지만, 함께 있는 동안 자세히 살피니 그런 걱정은 덜어도 될 것 같았다. 아이도 서서히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듯, 괜히 여길 나간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때 아이가 입을 열었다.
“전 앞으로 혼자예요.”
명월은 아이의 말에 안색을 굳혔다.
“사또께선 혼자이신 적이 없으니까 그 두려움을 모르세요.”
“아니. 알고 있단다.”
단호하게 느껴지는 대답에 움찔한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두렵고 껄끄러운 것투성이인 아이를 두고 명월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혼자라는 것에 대해서 나만큼 많이 아는 사람은 또 없을 거다.”
아이의 머리를 토닥인 명월은 이름을 듣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 어찌 그 중요한 이름을 묻지 않았을까. 큰 실수를 했다면서 아이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그런데 내가 아직도 네 이름을 모르는구나.”
이름을 묻자 아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계진입니다.”
“성이 무어냐.”
“박 씨입니다.”
“박계진이로군. 좋은 이름이다.”
“계집이라고 놀림을 받던 이름인걸요.”
아이, 계진의 말에 명월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어려서부터 얼굴이 이 모양이라 계집애 같다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들어 왔지.”
어려서부터 고질적으로 있었던 괴롭힘이었다. 성장을 한 후에도 그런 이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개중에는 자신을 정말 껄끄러워하는 자들도 있고, 아닌 쪽도 있었다.
외모가 이러니 호감을 느끼면서도 제 감정을 숨기려고 더 짓궂게 굴던 이들이 더러 있었다. 그래 봤자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일이었다.
계진은 몇 번이나 명월의 얼굴을 봤다가 고개를 숙이길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계진의 뺨이 발갛게 물든다. 양손을 마주잡은 계진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또께선 정말 예쁘게 생기셨습니다. 그래서 마음도 좋으신 것 같아요. 저 같은 녀석을 곁에 두시다니요. 제 아버지는 어머니가 병에 걸린 걸 알고는 그냥 버리셨는데…….”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문 계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물든다. 일단 말을 하긴 하는데 그게 힘겨운 거다.
계진의 입을 통해서 힘든 일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었던 명월은 아이의 팔을 토닥였다.
“되었으니 이만 들어가서 쉬어라. 서 있는 게 힘들어 보이는구나.”
실제로도 그랬기 때문에 계진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이대로 명월의 앞에서 몸을 돌려도 괜찮은 건가 싶어 몇 번이나 망설였다. 곧 몸을 돌린 계진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걸 확인한 명월은 허리를 세웠다. 닫힌 문을 바라보던 명월은 한숨을 쉬며 대청 끝에 앉아선 목화신을 신었다.
날이 밝았고, 모두가 왕성하게 활동하는 한낮이었다. 저녁 때 약속이 잡혀 있긴 했지만, 그 전에 관아 내부를 도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그때 이방이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느린 걸음을 옮기던 그는 신을 신는 명월을 보곤 바로 그 앞으로 걸어왔다.
“어딜 가시렵니까?”
“아니네. 이따 저녁에 화소군과의 약속이 잡혀 있으니 관아나 가볍게 돌아 볼까 하네.”
그러는 동안 목화신을 다 신은 명월은 옆에 서 있는 이방을 올려다봤다.
“그쪽 일에 대해선 진전이 좀 있나?”
창고에 둔 해골과 관련해서 묻는 말이었다. 이방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예민한 사안이라 그런지 알아내기가 힘이 듭니다.”
이 고을 사람인 이방은 아무래도 명월보다 정보 수집력이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명월이 따로 알아보는 동시에 그에게도 조사를 해 봐라 말을 했건만 뜻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깊게 파고들어 가는 걸 그가 저어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괜한 사람을 오해하고 의심하고 싶지 않았던 명월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 저녁에는 혼자 가시는 겁니까?”
“늦은 시간이고, 화소군이 있는 곳으로 직접 가는 것이니 복운이나 데리고 갈 생각이네.”
“사람을 조금 더 데리고 가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포졸을 끌고 갈 순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편하게 날 초대한 투로 편지를 보냈으니 나도 그걸 맞춰줘야 하지 않겠나. 안 그런가?”
“그렇긴 합니다만…….”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뒤를 흐리는 이방의 모습에 명월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간밤에 습격을 받은 것에 대해선 이방은 모르고 있었다. 만약 그걸 그가 알게 된다면 관아는 발칵 뒤집어지게 될 거다. 오늘 저녁에 화소군에게 가는 것도 막으려 들겠지.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입을 다물고 있는 거였다.
사람을 보내서 흉기를 휘두르게 시킨 놈들이 괘씸했다. 다치지 않고 잘 넘어갔으니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화소군 일이 마무리되면 그 망할 대감에게 한 방 먹이고야 말겠다면서 명월은 허리띠를 손으로 더듬었다.
“해가 질 때까진 여기서 느긋하게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자네는 가서 일 보게.”
“필요한 것이나 시키실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부르십시오.”
그 말에 명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길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거로도 충분했다.
이방이 대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걸 확인한 명월은 마당 가운데로 나와선 고개를 들고는 눈을 감았다.
어제 밤의 일은 사내들의 습격을 받은 것보다 백호 놈이 자신에게 이상한 일을 한 게 더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놈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한 걸까. 덕분에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고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다가 화소군이 전달한 편지를 떠올렸다.
품에서 꺼낸 편지에 적힌 내용은 의외로 간략한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일이 생겨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는 걸 시작으로 정말 죄송하다면서 미안한 마음을 길게 열거했다. 그러더니 하루가 지난 오늘 저녁에 본인이 정성스럽게 자리를 마련할 터이니 거기서 얼굴을 마주하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되어 있었다.
애초에 명월이 화소군과 만나길 원했던 건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에게 묻고 들어야 할 답이 있었다. 확실한 답만 들을 수 있다면 그곳이 기방이든 어디든 상관없었다.
생각은 그렇게 해도 장소가 옮겨진 게 껄끄럽게 여겨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이번에 이쪽에서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댈 순 없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 날이 밝자마자 화소군에게 찾아가겠다는 답을 보낸 상태였다.
한 번 자리를 피하고 편지까지 보낸 마당에, 다시금 일이 생겨서 자신을 피하는 상황은 생기지 않겠지.
“사또, 전립도 안 쓰시고 무얼 하십니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명월은 감은 눈을 뜨고 뒤를 돌아봤다.
이번에는 또 어딜 갈 셈인가 싶었는지, 잔뜩 안색을 굳힌 채로 바라보는 복운을 두고 명월은 건성으로 턱짓을 했다.
“깜빡 잊었다. 안에 들어가서 들고 나와라.”
혹시나 전립을 가지러 오는 사이에 명월이 다른 곳으로 새는 건 아닌가 싶었던 복운은 대청에 올라서면서 몇 번이나 명월을 흘깃거리며 봤다. 그리고 다급히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나 싶던 복운은 재빠르게 나왔고, 그의 손에는 각각 전립과 빈 그릇이 올려진 나무 쟁반이 들려져 있었다.
“탕약을 다 드셨네요. 안 드시고 나오신 줄 알았습니다.”
그리 말하는 복운의 얼굴은 밝았다. 명월이 탕약을 마시지 않고 그냥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복운의 그 말에 명월은 새삼스럽게 탕약의 쓴맛이 기억나 버렸다. 넌 그게 쓴맛을 줄인 거라고 생각하냐고 한마디 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명월은 복운이 건네는 전립을 받아들였다.
묵직한 그걸 머리에 쓰는 동안 넌지시 말을 꺼냈다.
“이따 저녁에 갈 곳이 있다. 같이 가겠느냐.”
“물론입니다. 사또께서 말씀하시는 건데 당연히 함께 가야지요.”
요리조리 눈을 피해서 나다니던 명월이 오랜만에 함께 가겠냐고 묻는 말이었다. 거절을 할 리가 없었던 복운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반응에 명월은 몸을 돌렸다.
“이따 해가 떨어질 즈음에 채비를 하면 된다.”
뒷짐을 지고 대문을 빠져나오는 자신의 뒤를 따라붙는 기색은 없었다. 먼저 저녁에 함께 어딘가를 가자는 말을 꺼냈기 때문에 일부러 따라오지 않는 거다. 분명히 지금도 기분 좋게 있을 거다.
녀석의 오지랖이 넓긴 해도 그게 나쁜 마음에서 기인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생각해서 그리 행동하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때때로 받아들이기가 힘들 때가 있었다.
속박당하고 감시당하는 건 싫었다. 분명 오랫동안 그런 시선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겠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으면 좋겠건만―.
명월은 발끝으로 돌을 찼다. 채여서 멀찍이 날아가 버리는 돌을 확인한 명월은 눈을 가늘게 뜨다가 그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재차 돌을 찼다.
머릿속을 비우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돌을 차면서 점점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도착한 건 커다란 창고가 있는 쪽이었다.
전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던 그곳이 활짝 열려 있었고, 바깥쪽으로 상자가 몇 개 나와 있었다. 그 상자 앞에 선 호방이 장부를 들고 하나하나 확인하는 걸 본 명월은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바빠 보이는군.”
장부의 내용을 확인하면서 가느다란 붓으로 표시를 하던 호방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듯 움찔하고 몸을 떨면서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명월을 본 호방은 들고 있던 장부를 내리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사또, 오셨습니까.”
명월은 호방 앞에 서선 근처에 놓인 몇 개의 상자를 확인했다.
신경 쓰지 못하는 동안 수도로 진상품을 올려야 할 시기가 되었다. 요즘은 날 가는 게 정말 빠르다면서 명월은 호방을 내려다봤다.
“준비된 물건에 차질은 없는가.”
“없습니다. 이대로 준비해서 수도로 올리기만 하면 됩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호방은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느낌 탓인지 모르겠지만, 시선을 피하는 것 같았기에 왜 그러나 싶어 유심히 살피는데 안색이 굳어 있다.
“안색이 별로 안 좋군. 무슨 일이라도 있나?”
“낮에 먹은 음식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아까부터 살살 배가 아파서…….”
“날도 더우니 몸이 안 좋으면 쉬면서 하게. 그러다가 쓰러지면 손해가 아닌가.”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정말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기에 아파 보이지만,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거기다 대고 더 뭐라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명월은 “계속 수고하게.”라고 말하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가 놓았다.
명월이 뒷짐을 진 채로 멀어지는 걸 살피던 호방은 안색을 굳힌 채로 손을 들어 제 이마에 묻어 나온 땀을 닦아 냈다.
* * *
초반에는 사적인 대화를 나누어야 할지도 모른다. 사전에 깔아 두는 게 있어야 정말 알고 싶은 걸 물었을 때에도 부작용이 생기지 않을 터였다. 아니. 그건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능수능란한 장사꾼 화소군은 본인이 대답하기 곤란하다 싶은 게 있으면 적당히 말을 돌리거나 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 어쩌면 진짜 같은 거짓말을 들려줄 지도 모르지. 그런 것들을 가려내는 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물론, 시작도 하기 전부터 이리도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어쩌면 솔직하게 모든 걸 실토할지도 모르지. 그런 희망적인 생각을 해 보자 싶으면서도 마음이 무거운 건 그렇게 쉽게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일 거다.
흔들리던 가마가 멈추고 아래로 내려가는 걸 느낀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앞쪽의 문이 열리고 복운이 고개를 숙여 왔다. 근처에 횃불이 있었던 걸까. 그것 때문에 그의 얼굴에 묘한 음영이 져서 얼굴이 웃기게 되었다. 그걸 본 명월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그가 웃는 걸 본 복운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도착했습니다. 사또.”
그리곤 안쪽으로 손을 뻗자 명월은 치우라며 고개를 저었다.
은밀하게 왔다 가야 했기 때문에 사방에 막힌 가마에 타긴 하지만, 불편한 건 여전했다.
두 다리를 앞으로 조금 내밀어서 바닥을 딛고, 힘을 줘서 앞으로 몸을 당긴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명월은 똑바로 서선 고개를 좌우로 움직여봤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건 단단하게 닫힌 대문이었다.
전에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전보다 위압감이 드는 것 같다면서 명월은 닫힌 대문을 보다가 가마 근처에 서 있는 사내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기다리도록 해라.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예상대로 진행이 된다면 정말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닫힌 문밖에서, 이런 숲속 한가운데에 서 있는 건 곤혹일 거다. 화소군이 괜찮다고 한다면 저들도 대문 안으로 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명월은 걸음을 옮겼다.
대문 앞으로 가서 문을 두드려야 사람이 나오는 건가 싶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양 문이 열리고, 그 너머로 중후하게 생긴 노인이 나타나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말씀만 하셨으면 저희 쪽에서 타고 오실 것들을 준비했을 텐데요.”
“괜찮네. 이 저택의 주인은 그런 걸 신경 쓰실 만큼 한가한 분도 아니지 않나.”
“하지만 사또와 관련된 일이라면 말은 달라지지요.”
그리 말한 자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이곳을 자주 찾았던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일까. 상대의 친절한 모습도 그것이 진실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뭔가 속이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건 너무한 일일까.
그런 속내를 감추며 명월은 뒤를 가리켰다.
“저기에 있는 자들을 잠시 안쪽에 들여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분들께 가볍게 음식을 제공해드리겠습니다.”
“그래 주면 좋지.”
명월은 가마 근처에 서 있는 사내들을 살폈다. 주고받은 대화를 들은 그들은 손을 마주잡고는 바로 고개를 깊이 숙여 왔다. 세심한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는 듯싶지만, 명월 입장에선 그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래도 가마꾼들을 챙겼으니 한결 마음 편하게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면서 명월은 대문을 넘어서려 했고, 복운이 뒤를 따라붙었다. 그러자 노인이 조용히 옆으로 움직여선 복운 앞을 막아섰다. 팔을 뻗어서 앞을 막는 것에 복운은 걷다 말고 멈출 수밖에 없었고, 그걸 본 명월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는 나와 함께 온 자네. 막지 않아도 되네.”
명월의 말에 노인은 여전히 복운의 앞을 막은 채로 답했다.
“행수께서 초대하신 건 사또 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런 곳을 나 혼자서 올 순 없는 노릇 아니던가. 그는 내 심복이니 앞을 막지 말게. 그가 못 들어오면 나도 안 들어가겠네. 그게 자네가 원하는 일이던가?”
차분하게 말하지만 말 안쪽에 섞인 의미는 간단했다.
복운이 못 들어가면 나도 안 들어간다.
어린애라도 알아먹을 만한 간단한 화법에 노인은 팔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결국 물러서는 노인을 두고 명월은 대문 안으로 들어갔고, 복운은 보란 듯이 명월의 등 뒤로 바싹 붙었다. 노인이 탐탁지 않은 시선을 던지는 것 같았지만, 복운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만약 사또가 뭐라 하지 않았으면 이쪽에서 한바탕 난동을 부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감히 자신과 사또를 떨어뜨리려 하다니. 말도 안 된다면서 거센 콧김을 내뿜던 복운은 뒤를 돌아보는 명월을 확인하곤 바로 어깨를 움츠렸다.
명월은 앞장서 걸어가는 노인을 확인하곤 가볍게 손짓했다. 그걸 본 복운이 곁으로 다가오자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떨어지지 말고 근처에 붙어 있어라. 그리고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알려야 할 거다.”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른 때라면 저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 명월이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는 걸 깨닫게 된 복운의 표정은 절로 굳어졌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점점 더 안쪽으로 안내가 되었다. 그리고 지붕이 있는 긴 복도를 지나치게 되었을 때 양옆으로 걸린 등을 본 명월이 한마디 했다.
“예쁜 등이로군.”
“특별히 장식을 하신 걸로 압니다.”
어쩐지 인위적인 냄새가 난다 싶더니, 급하게 장식한 모양이었다.
생각은 그리해도 명월은 겉으로 다른 표정을 지었다.
“내가 여인도 아닌데 왜 이런 걸 장식한단 말인가. 자네 행수는 참 이상한 사람일세.”
“단순히 호감 가는 분에겐 조금 더 정성을 들일 뿐이지요.”
나름 화소군을 두둔해 주고 싶은 모양이지만, 지금 노인이 하는 말도 어딘가 좀 이상했다. 단순히 호감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이런 화사한 등을 건단 말인가. 딱히 공감할 수 없다는 양 느슨한 시선을 던지는 명월을 두고 노인이 재차 말을 이었다.
“잘 보이고 싶고, 친분을 두텁게 하려는 행수님 나름의 노력으로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앞으로 계속 걸어가면서 차분하게 하는 말에 명월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앞을 보고 제대로 걷게. 그러다 넘어지겠군.” 하고 말했다.
명월의 그 말에 노인은 웃으면서 신경 써 줘서 고맙다는 대답을 했다. 일부러 신경 써 준 건 아니고, 딱 봐도 나이가 있는 것 같은데 뒤를 돌아보면서 걷다가 넘어지면 큰일이 나겠구나 싶었다.
무슨 말을 해도 다 좋게 받아들이기로 약속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나쁘진 않지만 화소군도 이런 식으로 답답하게 나오면 안 될 터인데.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복도 중간에 서 있는 사내를 발견했다.
뒷짐을 지고 서 있는 건 화소군이었다.
역시나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전해지는 분위기가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느긋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화소군은 기방이나 다른 곳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자기 집 안이기 때문이 저러는 거겠지. 자신이라도 관아에서 화소군을 만나는 거라면 이렇게나 긴장이 되진 않을 터였다.
내색하지 않아도 긴장이 되어서 어깨가 뭉치는 명월이었다. 가볍게 어깨를 들었다가 내리면서 명월은 멈춰 선 노인을 지나쳐 화소군 앞으로 걸어갔다.
두어 걸음 떨어진 앞까지 다가오는 명월을 본 화소군은 고개를 숙였다.
“어제는 제가 일이 있어 발길을 하지 못했습니다. 기다리시게 한 데다 편지만 보내는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사과의 의미로 이런 소소한 재주를 부려 봤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기둥에 걸린 등에 관련해선 노인과만 대화를 나누었는데 어떻게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 사람 볼 줄 아는 자이니, 자신이 이 등을 보고도 기뻐하지 않을 거란 걸 아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런 걸 알면 준비하지 않는 편이 나을 테지만―.
명월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마음도 들 것도, 안 들 것도 없소. 사람 일이라는 게 언제나 늘 뜻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소.”
“사또께서 이해를 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정중하게 대답하고 난 후 고개를 든 화소군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고, 그건 명월도 마찬가지였다.
준수한 용무의 두 사내가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웃음을 주고받는 동안, 그 사이에 서 있던 노인이 안쪽의 문을 가리켰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화소군 뒤에 있는 문 안쪽으로 들어가면 되는 모양이었다.
명월은 일단 주변을 살폈다. 긴 복도에는 수상쩍은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아도 언제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곳에 복운 혼자만 두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같이 온 제 가신은 바깥에 세워 두겠소. 그래도 괜찮겠소?”
명월의 말에 화소군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괜찮으시다면 간단한 술상이라도 차려 드리지요.”
“그는 술을 마시지 않을 테니, 크게 신경 쓰지 마시오.”
멀쩡하게 두 눈 뜨고 있어도 코를 베어 갈지도 모를 곳이었다. 그런 데서 주는 술을 마실 리가 없었다. 더 확실하게 안 마시겠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웃는 얼굴을 가장한 채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화소군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별말 없이 안쪽으로 손을 뻗는 것에 명월은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둘이 들어가고 난 후 소리 없이 움직인 문이 맞물리듯 닫혔다.
* * *
안쪽에 준비된 탁자 위에는 이미 음식이 차려진 상태였다. 그 주변으로 예쁜 등과 초가 은은하게 주변을 밝혔다.
분위기가 좋기는 했지만, 사내 둘이 대면하는 자리에 어울리는 상황은 아니었다. 뭔가 좀 거부감이 느껴진 명월은 멈춰 선 채로 있다가 화소군이 재차 안쪽을 가리키자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화소군은 먼저 오른쪽으로 돌아가 명월이 앉을 의자를 빼 주었다.
“앉으십시오.”
“고맙긴 한데 일부러 신경 써 주지 않아도 되오.”
화소군이 호의를 표현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한마디 던진 것에 화소군은 다시 한번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은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해선 별 타격을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왕 꺼내 준 의자이니 앉지 않을 수 없었다. 명월은 그곳에 가서 엉덩이를 대고 앉아 의자를 앞으로 끌어당겼고, 그러는 동안 화소군이 맞은편으로 넘어가 자리에 앉았다.
“준비한 건 얼마 되지 않지만, 입에 맞으셨으면 합니다.”
말은 저리해도 탁자 위에 차려진 음식들은 꽤나 화려했다. 술병도 보이고, 찻잔도 있었다.
널찍한 탁자 위에 자리한 음식들은 딱 봐도 둘이 먹을 만한 양이 아니었다. 그걸 두고 정말 먹을 게 없다거나, 맛있는 게 많이 보이는군―둘 중의 어떤 대답을 해 줘야 하는 건가 싶었다.
입을 다문 채로 조용히 있는 명월을 두고 화소군이 물었다.
“자리가 불편하십니까? 장소를 옮길까요?”
“일부러 장소를 옮기면 더 불편할 테니, 그냥 여기에 있어도 괜찮소.”
바닥에 앉는 게 보통이긴 했지만, 의자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게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선 불편한 대화를 나누게 될지도 모르게 생겼는데 차라리 잘되었다며 명월은 눈을 내리떠 음식을 하나하나 살폈다.
겉보기에 화려하다 싶었는데 딱 보니 이쪽 음식은 아니었다. 뭔가 특색이 느껴지는 음식들이 많다면서 명월은 “색다르군.” 하고 중얼거렸다.
“어떤 음식을 준비하는 게 좋을까 싶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사또께선 조선의 산해진미를 충분히 즐기셨을 것 같아서, 제 고향 음식들 중 몇 가지를 준비했습니다. 이쪽 입맛에 맞도록 간을 새로 했으니 처음 드시는 거라 해도 괜찮을 겁니다.”
그리 말한 화소군이 손으로 음식들을 가리켰다.
“드시지요.”
속 편하게 뭔가를 먹자고 여길 찾은 건 아니지만 권하는데 손을 놓고 있는 것도 예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명월은 젓가락을 들어선 앞쪽에 놓인 생선의 가운데를 눌렀다.
부드럽게 눌리나 싶더니 두툼한 하얀 살점이 드러난다. 명월은 그걸 조금 들어서 맛을 봤다.
“담백하니 맛이 좋군.”
“다행입니다. 많이 드십시오.”
명월은 생선의 살점을 하나 더 뜯어서 입에 넣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담백하고 적당하게 칼칼한 게 입맛을 사로잡았다.
생선답지 않게 육질이 살아 있는 듯 탱탱했다. 이건 대체 어떤 생선인가 싶어, 생선 머리를 유심히 살피려니 화소군이 탁자 한편에 올려진 술병을 집어 들었다.
“이 음식하고 어울리는 건 바로 이 술이지요. 한번 드셔 보시겠습니까?”
“아니. 괜찮소.”
너무 빠르게 거절한 건가 싶었던 명월은 말을 덧붙였다.
“전에도 그쪽에서 준비한 술이 너무 맛이 좋아서 채신없이 먹다가 졸면서 관아에 돌아갔지 뭔가. 다시금 그런 실수를 하고 싶지 않으니, 오늘은 참겠네.”
“술에 많이 취하시면 여기서 주무시고 가시면 될 게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아직 그렇게까진 그쪽에 신세를 지고 싶지 않군. 아직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지 않나.”
적당히 긋는 선을 감지할 것인가. 아예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닌지 화소군은 들고 있던 술병을 내려놓으면서 옆에 있던 주전자를 집었다.
“그러면 차와 함께 드시지요. 몽골의 초야에서 얻어 낸 아주 귀한 찻잎입니다. 이것과 함께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살이 찌지 않지요. 그래서 수도의 지체 높은 부인들께 아주 인기가 높습니다.”
그리 말하며 화소군은 잔에 차를 따랐다. 앞서 술을 거절했기에 이 정도는 마셔 줘야 할 것 같았던 명월은 차가 담긴 잔을 들고 가볍게 맛을 봤다.
보통 차와 별반 다르지 않은 텁텁한 맛이 혀끝을 스친다. 가볍게 맛을 보는 수준으로 차를 마신 후 그걸 내려놓은 명월은 입맛을 다셨다.
도성의 부인들이 찾을 정도라면 고가일 텐데, 전날 호접화가 준비해 준 차와 별반 다름이 느껴지지 않았다.
“……진한 풀맛이 느껴지는군.”
다른 차와 달리 조금 더 비싸다 하니 맛의 진한 정도로 차이를 구분 짓는 게 아닐까 싶어 꺼낸 말에 화소군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진다.
“입맛에 맞진 않으신 모양입니다.”
“차에 대해선 조예가 깊지 않네. 그냥 좀 좋은 거라고 하니 맛을 본 것뿐이지.”
“그러면 다른 음식도 드셔 보시지요. 하나같이 조선에선 쉽게 구할 수 없는 음식 재료와, 향신료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을 제 입으로 하는 건 부끄럽지만, 손님을 맞이하면서 이 정도로 정성을 들인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이번엔 제가 먼저 실수를 해서 그걸 만회하는 자리긴 하지만요.”
어제 약속을 했음에도 그걸 지키지 못한 게 어지간히 마음 쓰이는 듯 몇 번이나 언급한다. 하지만 그렇게 재차 말을 하면 할수록 가볍게 넘어가려는 인상이 들었던 명월은 달리 대꾸하지 않고 음식들로 시선을 던졌다.
보기 좋은 게 먹기도 좋다고, 먹지 않아도 맛이 좋을 것 같기는 했다. 음식을 준비한 사람의 정성이 있으니 젓가락질을 해 볼까 싶었으나 내키지 않았다.
애초에 화소군하고 시시덕거리기나 하려고 여길 찾은 것도 아니었고…….
명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들었다.
“장사를 하면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귀한 것들을 많이 수집하는 모양이네.”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이들과 똑같은 물품으로는 장사를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이 가지지 못한 걸 지니고, 조금 더 특별해야지 사람들이 저를 찾는 겁니다. 그래야 저도 많은 재물을 모을 수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솔직하게 다 실토하는 건가.”
“아무렴 어떻습니까. 사또께서도 익히 아시는 부분이 아닙니까.”
명월은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사람과 조금 더 다르고 특별한 게 있어야지 뭔가를 해도 많은 이득을 남기기 마련이지.”
“그리고 그게 장사의 기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독과점을 찬성합니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이었고, 명월이 그리 썩 좋아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일단은 화소군의 표정을 확인해서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말을 하는 건지를 알아보려 했지만, 역시나 알 수가 없었다. 이토록 속이 읽히지 않는 사내라니.
이쯤 되니 살짝 짜증이 난 명월은 입을 열었다.
“독과점은 다른 선량한 상인들에게 피해를 입히네.”
“독과점이라는 건 선의의 경쟁을 통해 승리한 자가 손에 거머쥐는 포상 같은 것입니다. 경쟁에서 진 자들은 뭐라 말을 해선 안 되는 겁니다. 포상을 받고자 한다면 그만큼 절박하게 열심히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절실하게 바라고, 노력하고, 분석하는 자에게만 그에 걸맞은 보상이 돌아오는 법입니다.”
“…….”
장사꾼 입장에선 틀리지 않는 말이겠지만, 명월 입장에선 무조건 맞장구를 칠 수 없었다.
화소군은 경쟁을 통해서 얻었다 하는 포상 때문에 다른 상인들이 피해를 보고 손해를 봤다 싶으면, 고을의 사또인 그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화소군에게나 명월에게나 예민할 수밖에 없는 화제였다. 이와 관련해서 파고들어 간다면 오늘 날이 새도록 대화를 나눈다 해도 부족할 거다. 하지만 명월은 대화의 방향을 살짝 돌려봤다.
“그래. 그런 식으로 자네는 얼마나 많은 귀한 걸 독점하고 있나.”
“……글쎄요. 얼마나 될까요.”
먼저 말을 꺼내긴 했지만, 구체적인 언급은 피하고 싶은 듯 뒷말을 흐린다.
“관아에 있는 물건들 중에서 자네가 진상한 것도 적잖더군. 대부분은 나도 알고 있던 것이나, 특별한 것 한 두 가지가 보이더군. 예를 들어 동충하초라든가―.”
동충하초에 대해서 말을 꺼낼 때 화소군이 과연 어떤 반응을 취할지 살펴봤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 참 재미없는 반응이라 명월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다음 말을 꺼냈다.
“그 귀한 물건을 자네가 보냈다 들었네. 덕분에 이번 진상품을 올릴 때 내 체면이 서게 되었어.”
“고작 그 정도의 일이 사또께 도움이 되었다면 제 크나큰 기쁨이 될 겁니다.”
“아무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들었네. 아주 특별하고 귀한 약재라던데, 자네에겐 별거 아니었던 모양이로군.”
“제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오랫동안 이 일을 해 와서 아는 사람이 많지요. 그들 덕분에 조금은 수월하게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자네가 개인적으로 더 가지고 있나?”
물론이라며 화소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 잔뜩 공을 들이는 상대에 대한 배려를 한답시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개인적으로 필요하신 거라면 말씀하십시오. 사또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더 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청을 해도 그리도 쉽게 귀한 걸 내주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 장사꾼입니다. 이득이 없는 일에는 나서지 않습니다. 그건 다른 누구보다 사또께서 훨씬 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면 왜 그 아이에겐 동충하초를 준 건가.”
“아이가 원했기에 선물로 준 겁니다. 그게 문제가 된 겁니까.”
“…….”
기억나지 않는 척을 하거나 시치미를 떼면, 이후로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하는 건지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화소군은 그런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저를 바라보는 차분한 눈빛에, 명월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시험에 든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역시나 만만치 않은 자라면서 명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가 되었네. 그것도 아주 큰 문제가 말이야.”
“이런, 그렇습니까. 일부러 문제를 일으킬 의도는 없었는데 저 때문에 사또께서 피해를 보신 모양입니다.”
“나에게 직접적으로 피해가 오지는 않았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그 아이는 죽을 뻔했어.”
화소군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로 미간 사이로 주름을 만들었다. 지금 하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인상을 쓴 채로 오랫동안 굳은 안색을 유지하던 그는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탁자에 팔꿈치를 댄 화소군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명월을 응시했다.
“하지만 제가 그걸 주지 않았으면 그 아이는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 명월의 눈가가 파들, 하고 떨렸다.
평범하지 않다 싶었지만, 이리도 빠르게 정체를 드러내려 할 셈인가.
아니다. 지금은 실토를 하는 것 같아도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를 일이었다.
명월은 신중하게 화소군의 눈동자를 살폈다. 겉으로 보이는 눈동자에서 별다른 것은 감지되지 않았다. 그간 만나고 대화를 나눌 때의 화소군은 이상한 점이 없었다. 그런 걸 보면 그가 인간이 아니진 않을 거다.
그는 분명 인간이었다. 하지만 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다름이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자신 같은 존재도 있으니까.
명월은 오른손을 움켜쥐면서 물었다.
“자네, 정체가 뭔가.”
“그러는 사또께선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예민하게 찔러 오는 질문에 대해서도 명월은 반응하지 않고 재차 물었다.
“내게 뭘 바라나. 나하고 무얼 하고 싶은 건가.”
“사또께서 저와 함께하시길 원합니다.”
“무얼 함께하자는 거지? 설마…… 잡귀라도 부려 보시겠다?”
이건 두 번째로 명월이 던지는 공격이었다. 과연 이 말에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싶어 그 얼굴을 유심히 살피자 거침없이 받아치던 화소군이 입을 다물었다.
여전한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명월을 바라보던 그는 입을 벌리더니 하아―하고 한숨을 토해 냈다.
어디서 한숨을 쉬는지 모르겠다. 지금 한숨을 쉬어야 할 건 그쪽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건가 싶었던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가면을 쓴 듯 무표정이 되어 버린 명월을 두고, 화소군이 입을 열었다.
“사람은 사람들하고만 어울려야 하는 법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것들과 어찌 어울려 지낼 수 있단 말입니까.”
“다른 것이라니. 구체적으로 말해 보시겠나?”
“앞서 사또께서 먼저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잡귀, 라고 말입니다.”
그건 그저 화소군을 떠보기 위해 꺼낸 말에 불과했다. 그걸 꼬투리 삼을 셈이던가.
하지만 호락호락 당하진 않을 거라며 명월은 잠자코 있었고, 화소군은 양손을 탁자 위에 올렸다. 손가락을 들어서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던 그는 가벼운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 다른 이들이 모르는 어떤 게 느껴집니다. 그걸 통해서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처음 사또를 뵈었을 때, 당신에게서 저와 비슷한 냄새가 나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사또의 눈에 어떤 것들이 보이십니까.”
비슷한 냄새라. 어찌 비슷할 수 있단 말인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면서 명월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속이 검게 물든 능구렁이 한 마리가 내 눈앞에 앉아 있군.”
“그것밖에 안 보이십니까?”
능구렁이라 한 것에 대해 기분 나빠 하는 내색은 없고, 편안한 모습으로 그 외에 다른 게 안 보이느냐고 묻는다. 어지간히 뻔뻔한 놈이었다. 어쩌면 그런 쪽으로 머리가 굵을 만큼 굵어진 놈일지도 모르지.
잡귀니, 귀물이니 같은 건 더는 말을 꺼내선 안 되었다. 그래서 명월은 전부터 궁금하게 여겼던 것에 대해서 물었다.
“자네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곳 말고도 다른 곳에도 거점을 두고 있지요.”
“자네가 거상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니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해 줄 필요가 없네. 지금 내가 듣고자 하는 게 무언지 알 거 아닌가.”
화소군이 아무 생각 없이 동충하초, 그 귀한 걸 아이에게 줬을 리 없었다. 애초에 아이가 그걸 찾고 있다는 걸 어찌 알고 주었단 말인가. 거기서부터 화소군이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있기에 그런 행동을 취했다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자신이 묻고자 하는 게 무언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저런 얼굴이라면, 이쪽에서 조금 더 패를 드러내는 수밖엔 없었다.
“그 어린 것을 죽이고자 일부러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네. 자네가 그 정도로 악인이라고 생각지 않아.”
“벌레 하나 못 죽일 것 같은 얼굴을 한 옆집 사람이 알고보니 살인자였다, 라는 건 언제나 있을 법한 일이었습니다.”
“자네가 그 살인자라는 건가. 아니면 사람 죽이는 일에는 직접 나서지 않는다 말하고 싶은 건가.”
미끼를 사용해서 아이를 귀물에게 넘기고, 그로 인해 어떤 이득을 취하려 했던 건 아닐까. 이자가, 과연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신중해지자 싶으면서도 의심스러운 눈빛이 완전히 감추어지진 않았다.
가늘게 떠지는 명월의 눈빛을 확인한 화소군은 탁자에 팔꿈치를 갖다 댔다. 자연스럽게 거리가 가까워지고 화소군의 얼굴이 훨씬 잘 보이게 되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진중하게 바라보는 화소군을 앞에 두고 명월은 숨을 죽인 채로 조용히 있었다.
뭐라도 좋으니 말을 해라. 말을 해 봐.
그런 눈빛으로 바라볼 때 화소군의 눈동자가 옆으로 슬쩍 옮겨진다.
“이 고을에 인간이 아닌 존재가 있다고, 그게 어렴풋이 느껴질 따름입니다.”
“거짓말하지 말게.”
고작 그런 낌새를 느낀 것으로 아이의 손에 동충하초를 쥐여 줬을 리가 없잖은가. 망설임 없이 나오는 반박에 화소군은 쓴웃음을 지었다.
“누구 앞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나저나 정말 단호하시군요.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단언하실 만한 물증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있지. 자네는 일부러 그 아이에게 동충하초를 주었고, 그것 때문에 그 아이가 죽을 뻔했다는 걸 말이야. 그리고 그 아이를 다시 발견한 숲 안쪽에서 이상한 걸 찾아냈네. 왜인지 그것들이 자네하고 영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지 않는군.”
해골에 대해서 화소군이 이미 알고 있을 거라는 걸 염두에 두고 꺼낸 말이었다. 실제로 지금 화소군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가면을 쓴 듯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에 명월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정말 상대하기 어려운 자였다. 그렇다 해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지금부터 집요하게 파고들어 가 볼 생각이라네. 그러다보면 암만 완벽하게 감추었다 하더라도 꼬리가 밟히지 않겠는가.”
“꼬리가 밟힌 채로 있으면 애송이지요. 저 같으면 꼬리가 밟히는 순간 그걸 끊어 버릴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꼬리를 밟은 자의 발목을, 잘라 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발목을 잘라 내겠다 운운하는 순간 명월의 눈썹이 위로 사악 올라간다.
감추어지지 않는 불쾌함이 그 얼굴 위로 떠오르는 순간에 맞춰서 화소군은 깍지 낀 손에 제 턱을 괸 채로 명월을 똑바로 바라봐 왔다.
“처음, 사또를 보는 순간 저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편하고 친근한 척 군다. 웃고 있는 화소군의 얼굴에 한 방 먹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명월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자네와 내가 같다고? 이상한 말을 하는군.”
“그런 식으로 말을 돌릴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차피 대화만 길어질 뿐입니다. 전 사또의 고운 얼굴을 뵙는 것만으로도 눈이 호강하는 것 같아 즐겁지만, 사또께선 그렇지 않으실 게 아닙니까.”
그러니 은근슬쩍 발을 빼지 말고, 지금 나누는 대화의 핵심에 집중하라는 거다. 지금 명월이 하는 말에 대해선 은근슬쩍 빠져나가는 주제에, 저런 식으로 말하다니.
이대로 있다간 완전히 말려들어 가게 생겼다면서 명월은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탁자 아래로 내린 손을 움켜쥔 채로 명월은 머릿속을 차분히 하려 했다. 속으로 심호흡을 하고 난 후, 명월은 일부러 꾸민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자네가 나와 같다고 여기는 이유에 대해서 말해 보게.”
아주 조금 화소군의 눈이 크게 떠진다. 거기서부터 짚고 넘어가시는 겁니까. 그리 묻는 눈빛에 명월의 미소가 한결 짙어진다.
“먼저 패를 보여야, 나도 꺼낼지 말지 고민할 게 아니겠나.”
그리고 놈의 말을 듣고 나서 이쪽이 어떤 식으로 나오면 될지를 궁리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싸늘하다 할 수 있는 눈빛으로 응시하는 명월을 두고 화소군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명월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제가 나이가 많진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만한 거상이 될 수 있었던 건 혼자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지요. 보통이 넘는 인연과 연줄이 필요하답니다. 그리고 전 그걸 이 반양에서 모두 얻었습니다. 이곳은 다른 어떤 고을하고도 다릅니다. 다른 뭔가, 특별한 게 있지요. 그걸 사또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은근슬쩍 같이 엮어 들어가려 하지만 명월은 반응하지 않았다.
차분한 명월을 두고 화소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비유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각 지역마다 고유의 특산물이 있기 마련이고, 그게 있어야 그곳이 특별해지는 겁니다. 전 반양을 그런 종류의 장소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철저하게 이용하게 된 거지요. 그냥 제가 얻을 걸 얻고, 나머지 것들은 이 땅이 돌려주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삶을 풍족하게 해 주었지요.”
“그 모든 것들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인해 얻어진 것들이 아닌가. 그걸 알면서도 그리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건가.”
“그들은 어차피 죽을 팔자였습니다.”
명월의 눈썹이 꿈틀, 하고 흔들린다.
“―팔자라고?”
“그렇습니다. 그건 제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이닌데, 작정하고 하려는 짓을 제가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 팔자. 되지도 않는 단어를 섞어서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가슴속 안쪽이 부글부글 끓는 걸 느끼면서도 명월은 애써 차분히 말했다.
“알고 있었다면, 막을 수 있었을 거네.”
“아니요. 불가능합니다. 그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눈앞에 있는 이득만 좇으니 하지도 않고 불가능한 일이라 포기부터 하는 게 아니던가.”
칼끝처럼 날카롭게 파고들어 오는 명월의 말에 화소군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는 게, 조금 싫게 느껴지는군요.”
“자네가 하는 짓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기나 하나?”
“위험한 일이라―.”
명월이 던진 질문을 중얼거린 화소군은 눈을 내리떴다. 그 표정이 지금까지와 달리 진중해 보였다. 하지만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정말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를 놈이었다.
그때 화소군이 사또, 하고 명월을 부르며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이 세상의 모두가 동등해질 수 없는 법입니다. 뭔가를 얻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면 잃는 자들도 있고, 장수하는 이가 있다면 단명하는 자들도 있기 마련이지요.”
“…….”
“그리고 우리 평범한 인간들은 그걸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또께선 제가 모르는 것들을 더 보고, 들으실 수 있는 듯싶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것과 관련한 가르침을 사사해 주신다면 제가 일하는 데 있어 조금 더 능률이 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화소군은 본인은 보이는 게 없고 그저 느껴질 뿐이라 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놈이 어떤 걸 얼마큼 알고 있는지에 따라서 주고받는 말들이 더 많아질 수 있을 테지만, 지금 놈은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아까부터 은근슬쩍 속을 건드린다.
넌 분명 무언가가 보이는 거다.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힘이 있을 거야. 그게 무언지 솔직하게 말해 봐라. 다 실토해―.
실제로는 화소군이 하지 않은 말이지만, 말의 억양에서 느껴졌다.
저런 식으로 뒤를 캐면 자신이 보따리를 전부 풀 거로 생각한 건가.
“자네, 미친 건가. 지금 내가 자네에게 가르침이나 사사하려 이곳을 찾은 거라고 생각하나.”
“아니시겠지요. 사또께선 지금 이 반양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그걸 따져 묻고자 절 찾으신 걸 겁니다. 그리고 제 대답은 하나뿐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곳이 원래 그런 땅입니다.”
원래 그런 곳이니, 어쩔 수 없다. 말은 화소군이 하지만 떠오르는 건 체념한 얼굴의 이방이었다. 이 고을 사람인 이방이 저리 말해도 답답했던 걸, 화소군이 지껄이니 속이 뒤틀린다.
자연스럽게 명월의 태도는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하지만 이런 말을 하고 생각을 하는 건 저뿐이 아닙니다. 반양에 사는 이들은 이 땅에 저들만이 아닌 다른 것들이 끼어서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말을 꺼내지 않고 저들끼리 쉬쉬하면서 살아가는 데엔 그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나고 자라 오랫동안 살아온 이들만의 규칙과 질서가 있는 거고, 전 그 선 안에서 제가 취하고자 하는 걸 얻을 뿐입니다. 그걸 두고 저들은 뭐라 하지 않습니다. 전 그들이 기피하지 않을 만한 선 안에서만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또께선 그게 아니십니다.”
화소군의 손이 탁자 위로 내려온다. 탁자에 기다란 손가락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순간, 거슬리는 말이 흘러나왔다.
“지금 선을 넘으며 도가 지나친 행동을 하시는 건 바로 사또십니다.”
처음에는 무표정으로 있던 명월이나 이윽고 그게 무너진다.
이놈이 뚫린 입이라도 되지도 않는 소리를 제멋대로 지껄이는구나 싶었다.
“지금 내가 온전한 사고를 하는 자와 대화를 나누는 건지 알 수가 없군.”
“그럴 겁니다. 애초에 사또와 저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생각해 줄 필요가 없는 입장입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는 지배를 하는 입장이니까요.”
본인 턱 끝에 손가락을 댄 채로 화소군은 입꼬리를 비틀려 올렸다.
“지배자가 아래에 있는 자들을 일일이 배려하고 생각해 줄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번거로운 짓은 말고, 편하게 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다 싶었는지 차분하게 말하는 화소군이나, 그를 바라보는 명월의 눈빛은 여전히 차게 식어 있었다.
결국 재차 말하는 건 화소군 쪽이었다.
“그런 이야기는 되었고, 전 사또께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니 사또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자네에게 해 줄 말은 아무것도 없네.”
“왜 이러십니까. 묻는 말에 대해선 제대로 대답했다 생각하는데, 어찌 그러십니까. 제가 대답을 했으니 이번엔 사또 차례가 아니십니까.”
“자네가 늘어놓은 헛소리는 내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야.”
“그렇다면 어떤 대답을 듣길 원하셨던 겁니까? 그 꼬마를 이용해서 이곳 어딘가에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를 끌어낼 셈이었다. 그 존재를 이용해서 달리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전부 다 내가 했다. 내가 잘못했다. 그런 대답이라도 했어야 했을까요? 그런데 그게 아니랍니다.”
화소군은 느리지만,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오기 전부터 이곳은 그런 상태였단 말입니다. 그리고 전 그런 상태였던 곳에서 약간의 이득을 취하는 것뿐입니다. 그게 뭐가 나쁘단 말입니까? 전 이곳에 사는 이들처럼 똑같이 행동할 따름입니다. 똑같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하고 제 할 일을 할 따름입니다. 그런 곳에서 잘못된 행동을 하는 건 제가 아닌 사또십니다. 사또가 잘못된 길을 가고 계시는 겁니다.”
화소군이 하는 말에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다. 그냥 무시하려 했지만, 동시에 언짢은 기분이 드는 건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모습을 숨긴 고슴도치가 조금씩 제 날카로운 가시를 드러내서 그걸로 쿡쿡 찔러 대는 느낌이다. 그러다가 완전히 가시를 내세우듯, 화소군이 재차 말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
“…….”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사또께서 가장 잘 아실 겁니다. 이제 보니 사또는 순탄치 않은 삶을 사신 것 같습니다. 그건 사또의 특별함 때문일 테지만, 그 성격 또한 하나의 원인이 되겠군요.”
내도록 가만히 있던 명월은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금방 지워졌다.
세 치 혀로 사람을 휘두르는 데엔 이미 도가 튼 놈이었다. 이런 놈이 지껄이는 말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가 없었다. 그걸 아는데도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지 모르겠다면서, 명월은 제 오른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지금 내가 이상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 고을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군요. 여자를 밝혀서 낮부터 기방을 찾는 사또는 괜찮지만, 예로부터 내려져 오는 은밀한 일에 관심을 두고 그걸 파고드는 사또는,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은 화소군은 팔걸이에 제 팔을 올렸다. 오만하다 할 정도로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곳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으시잖습니까. 얼마간 있다가 떠나면 그만인 곳입니다. 그러니 그냥 바람이 부는 대로 보고만 계십시오. 바람의 방향을 달리하려 손을 뻗으신다면 다치는 건 바로 사또십니다. 이는 모두 사또가 염려되어 드리는 말이니, 곡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저런 태도와 눈빛을 한 채로 곡해하지 말아 달라 한들, 그게 곧이곧대로 들리겠는가.
명월은 웃었다. 가볍게 웃을 셈이었으나, 기가 찬 한숨으로 바뀐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로 긴 한숨을 내쉰 후, 입가에 서려 있던 미소가 지워진다.
한결 정리가 되어서 차분한 얼굴이 된 명월의 눈동자 안쪽이 싸늘하게 식고, 동시에 명월은 화소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놈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는군. 그것 하나는 잘 알겠다.”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가만히 계시다가 이곳을 떠나시는 게 사또를 위한 일이라는 걸 계속 말씀드리는데도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그러다 결국 엇나가시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네놈이 걱정하지 않아도 내 일은 알아서 할 수 있다. 그러니 입 닥쳐라.”
“죄송합니다만, 그리할 수 없습니다.”
부정적인 대답에 명월의 눈썹이 올라간다.
굳어 있는 명월의 얼굴을 보는 화소군의 눈동자 안쪽으로 묘한 일렁거림이 생겨난다. 감출 수 없는 뜨거움을 드러내며 화소군은 나직이 속삭였다.
“전 사또께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지금껏 본 그 누구와도 다르고 특별한 사또가 아니십니까. 그런 당신께, 조금은 욕심을 부려 보는 건 해선 안 되는 일일까요?”
지금까지 들은 말 중에서 가장 어이가 없었다. 지금 저놈이 제정신으로 이리 말을 하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헛웃음을 흘렸다. 몇 번이나 마른 숨을 토해 내듯 웃나 싶던 명월은 바로 몸을 뒤로 물렸다.
당장 이곳을 떠날 셈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눈앞이 핑글―하고 돌았다.
명월은 의자에 앉은 채로 탁자에 양손을 올렸다. 빠르게 눈을 끔벅이면서 재차 일어나려 했을 즈음, 이것이 단순히 몸 상태가 원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안색을 굳힌 명월이 고개를 듦과 동시에 화소군이 말했다.
“너무 급하게 움직이지 마십시오. 더 어지러워지실 겁니다.”
뭔가를 아는 억양의 말과 태도에 명월은 이를 악물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또가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당신을 제 사람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 순간 역한 무언가가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걸 느낀다. 당장 먹은 걸 하나도 남김없이 게워 내고 싶은 걸 참으면서 명월은 입술을 씰룩였다.
“이런 짓을 해서, 어떻게 날 네 사람으로 만들 셈이더냐.”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쪽으로 선택하여 고르려 합니다.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선 많이 고민하고 생각을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느긋한 어조로 말한 화소군이 몸을 일으키면서 다가오는 걸 본 명월은 악문 이 사이로 거칠게 내뱉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손을 대지 않고 어찌 옮길 수 있단 말입니까. 전 그런 재주는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명월의 옆으로 온 화소군이 탁자에 손을 올렸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의자에 앉아 탁자를 붙잡은 걸로 간신히 몸의 중심을 유지하고 있었던 명월은 접근하는 화소군을 노려봤다.
베일 듯한 날카로운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 더 고개를 숙인 화소군은 명월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직후 그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사또께선 여인으로 태어나는 편이 더 나을 뻔했습니다.”
지금 몸이 움직일 수 있는 상태였다면 당장 화소군의 멱살을 잡아 흔들면서 헛소리를 하는 놈을 응징했을 거다. 하지만 머리가 어지럽고,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실제로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건만, 그걸 간신히 버티고 있는 명월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리곤 화소군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간혹, 이상한 게 보이는 자들이 있다 합니다. 사또는 그런 부류의 사람인 겁니까. 차라리 사또가 아닌 무당이나 신 내림을 받은 무녀와 비슷한 존재가 되는 게 나을 뻔하셨습니다. 아, 그리되었으면 이렇게 사또와 만나 뵙지 못하게 되었을 테니 안 되겠군요.”
은근슬쩍 명월을 뒤에서부터 끌어안으며 화소군은 그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이 고을의 사또로 부임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재차 명월의 몸으로 힘이 들어간다. 한 번에 힘을 주고 일어서려 했지만, 결국 다시 의자에 주저앉게 된 명월의 입을 타고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온다.
헉―하고 거칠게 숨을 토해 내자 화소군이 혀를 찬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당신께 해를 가하려는 게 아닙니다.”
여전히 화소군의 손이 어깨에 닿아 있었다. 닿은 곳에서부터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듯한 불쾌한 느낌이 퍼진다. 소름이 돋아서 견딜 수가 없다.
이런 상태로 능욕을 당할 순 없었다. 놈이 원하는 대로는, 절대로 할 수 없다면서 명월은 심호흡을 골랐다. 최대한 정신을 집중한 그는 탁자에 양손을 올리곤 다리에 힘을 줘 그대로 일어났다.
똑바로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고, 화소군의 손이 떨어져 나간다. 그걸 놓치지 않고 몸을 돌린 명월은 화소군에게 한 방 먹일 참이었다. 하지만 더는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탁자에 기대고 서선 그 끝을 양손으로 붙잡고 나서야 간신히 일어선 채로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일어선 명월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고 다리는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 쓰러져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모습에 화소군이 혀를 차면서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것 보십시오. 그러다가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자, 제 손을 잡으십시오.”
명월은 내밀어진 화소군을 손을 노려보기만 할 뿐, 그걸 붙잡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애써 분노를 참으면서 시퍼런 안광을 빛내는 명월이지만, 화소군은 안타까움을 가장하면서 조금 더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절 믿으십시오. 이상한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전에 사또께서 물에 빠지셔서 꼬박 하루를 주무셨을 때에도 사또의 몸에 손 하나 대지 않았습니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사또께선 모르실 겁니다.”
미친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헛소리를 하는구나.
놈이 하는 말은 이젠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곳을 떠나려면 몸이 뜻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했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명월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보이는 건 화소군인데, 왜 지금 이 순간 백호 그놈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이런 순간에도 그자가 나타나 자신을 구해 줄 거라 생각하는 걸까.
멍청한 유명월.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지금까지 그 어떤 힘든 일이 있었어도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해결해 왔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이 개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며 명월은 재차 눈을 치떴다.
“네놈은 반양에서 무엇을 얻고자 함이더냐.”
그때 화소군의 얼굴로 감탄이 스쳐 지나갔다. 이쯤 되면 의식을 잃고 쓰러져야 할 명월이 아직도 버티고 서 있는 게 놀라운 거다.
제 몸의 안위를 걱정해도 부족할 판에 끝까지 저런 걸 묻는 건가 싶기도 했던 화소군은, 여전히 감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입을 타고 지금까지 들은 바 없던 내용이 흘러나왔다.
“간혹 아주 특별한 것들을 산속에서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건 일반적인 방법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들이지요. 인간계에선 날 수가 없는 귀한 식물과 돌, 그리고 물. 그 모든 것들이 아주 영험한 약재가 됩니다. 당연히 고가의 것으로 거래가 될 수 있지요. 그로 말미암아 아주 귀한 손님들과 많은 줄이 닿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선 사또의 어머니도 계셨지요.”
입을 다문 화소군은 명월의 표정을 살폈다. 어머니를 운운했으니 그것에 어떤 반응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기이할 정도로 평온했다.
그걸 본 화소군은 입꼬리를 올렸다.
“사또께서는 유일선 대감의 아드님이라 하나 전혀 닮지 않으셨군요. 업둥이라 들었는데 정말 그러신 모양입니다. 또 듣기론 유일선 대감의 아우께서 이상한 병증이 있다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병증인지는 알 수 없으나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지요? 사또께서 바로 그 아우님의 아드님이라고―.”
“입 닥쳐라.”
매서운 일갈에 화소군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함부로 지껄이지 마.”
거기까지 말한 후 명월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힘겹게 버티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면서 참기 힘들 만큼의 토기가 올라왔다.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속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후, 힘겹게 내뱉었다.
“난 네놈 뜻대로 되지 않을 거다. 나는―.”
그 누구의 뜻대로도 움직이지 않는다. 난 나였다. 유명월, 계집애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고, 얼굴이 곱상하고, 남들이 볼 수 없는 걸 보지만, 그뿐이었다. 남들과 다르다 해서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할 이유가 없었다.
동시에 자신이 다르지 않았으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앞에 서 있는 화소군의 모습이 하나로 보였다가 둘로 나뉜다. 그 모습을 보자니 저기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강렬한 분노가 피어오른다.
정말로 밉다. 너무 미워서 저놈을 당장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이 격렬한 감정이 어디서부터 생겨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장 저놈을 어찌하지 않으면 자신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막연한 감정마저 들었다.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간신히 다리에 힘을 준 채로 버티고 선 명월을 바라보던 화소군은 눈을 가늘게 뜨며 감탄을 했다.
“금방이라도 사그라지는 불꽃처럼, 아름답군요.”
이제는 화소군이 지껄이는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들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명월은 그냥 귀를 막아 버리고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했다. 불안하게 탁자에 몸을 기댄 채로 빠르게 눈을 깜박거리는 명월을 두고, 화소군이 다가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는 존재라는 건 정말로 아름답지요. 제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건 바로 그런 겁니다. 하지만 물건들 중에선 없지요. 그런데 지금 제 눈앞에 그토록 원하던 게 있군요.”
위로 든 화소군의 손이 뺨에 닿는 순간 명월은 고개를 돌렸다.
“날 만지지 마―!”
쓰고 있던 전립이 아래로 떨어진다. 잠시 그리로 시선을 던지는 순간 화소군의 양손이 명월의 뺨을 조심스레 감쌌다. 얼굴에 닿는 손이 지나치게 차갑다.
“사또. 제 사람이 되십시오. 나와 함께 이 땅의 주인이 됩시다.”
“…….”
일그러진 명월의 얼굴을 본 화소군은 웃었다. 명월이 이런 어이없다는 식으로 반응을 취할 거란 걸 어느 정도 예상한 모양이었다.
그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명월 쪽으로 몸을 가까이 붙였다. 놀란 명월이 피하지도 못하는 동안 화소군은 그대로 명월을 끌어안았다.
화소군과 몸이 닿는 순간 명월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화소군은 명월을 끌어안는 데 멈추지 않고 그의 등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돌려선 하얀 뺨에 입을 맞췄다. 거부감에 명월이 이를 악문 채로 고개를 돌리려 하자, 몸을 떨어뜨리더니 기어이 명월의 턱을 잡아 앞으로 돌리곤 입을 맞추었다.
화소군의 입술이 닿는 순간 명월의 눈이 크게 떠진다. 그 매서운 눈빛에 화소군도 잠시 본인이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은 듯 가볍게 눈동자를 떨었으나 금방 평정을 찾았다.
“사또께서 지나치게 매력적이셔서 저도 모르게 이상한 행동을 취하게 되는군요.”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을 붙잡고 억지로 추행한 건 화소군 쪽이었다. 기가 차서 일그러진 명월의 얼굴을 보고도 화소군은 태연한 척을 했고 재차 몸을 끌어안으려 했다.
처음에는 머뭇거림이 느껴졌으나 두 번째는 아니었다. 조금 더 과감하게 몸을 끌어안으려 하는 화소군의 오른쪽 옆구리 안쪽으로 딱딱한 게 느껴졌다. 단검이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 무기가 있었다.
그걸 깨닫게 되는 순간, 명월은 어디서 난 건지 알 수 없는 괴력으로 있는 힘껏 화소군을 밀쳐 내곤 그의 품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당황한 화소군이 앞으로 손을 뻗는 것보단 명월이 단검을 뽑아 드는 게 훨씬 더 빨랐다.
명월이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할 때에는 그를 쉽게 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검집에서 뽑힌 단검을 들고 있는 명월을 본 화소군은 진정하라는 듯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걸로 뭘 어쩌시려는 겁니까.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시면서, 위험하니 돌려주십시오.”
뻗어진 손을 돌려서 손바닥을 위로 한다. 필사적으로 단검을 쥔 채로 거친 호흡을 몰아쉬는 명월의 눈동자가 점점 더 흐릿해진다.
상황을 봐서 그에게서 억지로 단검을 빼앗을 생각을 하면서 화소군은 앞으로 한걸음 내디뎠다.
“어서 제게―.”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
단호히 내뱉는 명월의 목소리엔 힘이 담겨 있었다. 아까보다 훨씬 더 정확한 발음이었다. 이 정도로 빨리 약효가 가실 줄은 몰랐기에 화소군의 얼굴로 낭패감이 서린다. 그는 앞으로 한걸음을 옮겼고, 명월은 재차 소리쳤다.
“다가오지 마!”
호통을 치는 소리에 맞춰서 문밖에서 “사또?” 라는 복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낭패다 싶었던지 화소군이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명월은 단검을 앞으로 뻗었다.
“역겨우니까, 다가오지 말란 말이다.”
매섭게 눈을 치뜬 채로 단검을 쥐고 있는 명월에게 재차 시선을 던진 화소군의 턱으로 힘이 들어간다.
이곳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보는 초조한 얼굴이었다. 그로서는 상황이 이렇게 돌아갈 줄은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었다. 제 손바닥 안에서 자신을 쥐락펴락하다가 여차하면 이 단검으로 어찌하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손에 무기를 들고 있기 때문일까.
점점 머릿속이 맑아지는 걸 느끼며 명월은 물었다.
“여차하면 이걸로 날 찌를 셈이었던 거냐.”
“제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날 속이려 들지 마라. 난 네놈들에 대해선 아주 잘 알고 있다.”
웃는 얼굴로 등 뒤에 검을 박아 넣을 놈들이었다. 진실만을 말하는 것 같아도 그게 전부 거짓이 될 수도 있었다.
뱃속이 시커먼 놈이었다. 저런 놈이 이런 땅에 와 있으니 더러운 문제들만 생기는 거라면서 명월은 이를 갈았다.
단검을 쥔 명월의 손으로 힘이 들어가는 걸 본 화소군이 물었다.
“절 죽이실 겁니까.”
그리 묻는 화소군의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 지금 명월이 저를 죽일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외려 그 눈빛을 읽자 망설여졌다.
놈을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누군가 귓가에 입술을 대고 달콤하게 속삭인다. 저런 놈은 살려 두면 너만 피곤해지게 되는 거야. 그러니 모든 일들이 깔끔하게 처리될 수 있도록 그냥 이 자리에서 없애 버려. 그래야 후환이 생기지 않을 거야. 지금 놈을 살려 두면 죽는 건 저놈이 아니라, 네가 될 거야.
그 순간 명월의 눈빛에 힘이 들어간다.
자신은 언젠가 저런 놈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걸까.
불현듯 드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약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잠시 의식이 멀어졌다가 크게 확장되는 걸 느끼면서 명월은 빠르게 눈을 끔벅였다.
이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보통 사람과 같을 수 없었다. 애초에 그들과 어울려 지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와는 이어질 수도 없고, 아이를 만들 생각은 더더욱이나 없었다. 자신과 같은 존재가 태어나, 그 아이가 똑같은 경험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토가 나올 만큼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힘겹고, 역겨우면서도, 고된 삶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은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만약 이런 데서 저런 놈들 손에 죽임을 당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자신은 그런 개죽음을 당하려고 그 노력을 했던 게 아니었다. 아직 알아야 할 게 많았고, 하고 싶은 일도 있었다. 죽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난 죽고 싶지 않아.
지금 본인이 죽음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명월은 단검을 쥔 제 손을 내려다봤다. 그 순간 눈동자 안쪽으로 예리한 광채가 떠올랐다가 빠르게 사라진다.
직후, 명월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제 가슴 안쪽으로 단검을 박아 넣었다. 헉, 하고 누군가 마른 숨을 내뱉는 게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검은 명월의 가슴 가운데에 박혔다. 옷을 가르고 피부에 닿은 날카로운 검날이 더 깊게 들어온다. 살을 가르고, 조금 더 안쪽으로 박혀 온다. 시리도록 차가운 게 몸 안쪽으로 파고드는 감각이 참 낯설었다.
“…….”
몸 안쪽으로 답답함이 퍼진다. 피가 뭉쳐서 목구멍 안쪽에 모여서 올라왔다가 내려가는 걸 반복하는 게 느껴진다. 꽤나 끔찍한 감각에, 명월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느긋하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있던 놈이 망연자실해선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단검으로 제 스스로 가슴에 찔러 넣었으니. 저 사또 놈은 진짜 미친 게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명월이 보기에 미친 건 화소군이었지만, 그런 놈이 자신을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싶으니 기분이 묘해진다.
명월은 단검이 박힌 제 가슴을 확인했다.
급소는 피했으니 심각한 부상을 입는 건 아니겠지만, 이상했다. 제정신을 차리기 위함이라 하나 이런 식으로 제 몸에 단검을 박아 넣는 일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니. 이리 되어서야 몇 번이나 자신을 살려 준 백호, 그놈의 얼굴을 볼 면목이 서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놈이 생각나다니―.
쓰게 웃은 명월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손잡이를 더 단단히 쥐고는 몸 안에 박혀 있던 걸 천천히 빼냈다. 예리한 칼날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더 예리한 통증을 선사한다.
이를 악물고 그걸 참으면서 기어이 단검을 뽑아내고, 그대로 바닥으로 던졌다. 찰캉,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뒹구는 단검을 보고 난 후 명월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눌렀다.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쏟아졌지만 두렵진 않았다. 자신은 여기서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죽지 않는다. 지금 이건 단순히 이상해진 몸 상태를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하나의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이런 미친 짓을 하고 나니 한결 머릿속이 맑아지는 걸 느낄 수 있었던 명월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앞에 선 화소군이 어떤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을지 쉽게 짐작이 간다. 동시에 과거의 일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그건 어렸을 적부터 자신을 바라보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질적인 시선들이었다. 그들은 기이한 무언가를 보듯 명월을 바라봤다. 오랜 시간 동안 그 시선들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정말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뜬 명월은 화소군을 똑바로 바라봤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완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있는 화소군을 앞에 두고 명월은 입을 열었다.
“난 널 여기서 죽이지 않을 거다. 널 죽인다면 결국 너와 같은 놈이 될 테니까.”
“……미쳤습니까.”
물음에 명월은 웃음이 나왔다. 다른 놈도 아닌 저놈에게서 미쳤느냐는 말을 듣게 되다니. 하지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명월은 탁자에서 떨어져 똑바로 섰다. 두 다리로 설 수 있게 된 걸 확인한 후, 재차 고개를 들어 화소군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목이나 닦고 기다려라. 나는 내 방식대로 네놈의 목을 옭아맬 것이다. 그래서 네놈이 한 모든 악행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밝혀내고야 말 테다.”
“당신은 여기서 아무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명월이 눈앞에서 한 짓은 여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화소군의 입은 자유분방하게 움직였다.
“당신에게 어떤 특별한 힘이 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여기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겁니다. 여기에 사는 자들은 사또의 도움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유지된 삶을 엉망으로 만들려는 사또를 원망할 겁니다.”
이런 놈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쓸데없는 헛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이었다. 자신은 이 고을의 사또였다. 부임하게 된 이상, 문제점이 있을 경우 그걸 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망을 한다 한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의외의 대답을 들은 화소군의 얼굴 위로 딱하게 여기는 표정이 떠올랐다.
“여기서 벌어지는 일은 사또 혼자선 감당하실 수 없을 겁니다.”
“왜? 네놈이 방해라도 할 것이더냐.”
“사또께서 제 사람이 되지 않으신다면 적이 될 텐데, 당연히 방해를 해야겠지요. 그러니 이 자리에서 절 처리하시는 편이 더 나으실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후 화소군의 눈동자가 명월의 가슴팍 쪽으로 옮겨 갔다.
피는 어느새 멈춰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단검으로 제 가슴을 찌르고도 이토록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없었다. 약의 효과가 지나치게 빠르게 사라진 것도 이상했다.
재차 눈동자를 든 화소군은 입술을 달싹였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하나씩 알게 된 겁니다. 그건 앞으로 사또나 제가 하는 일에 막대한 지장을 끼칠 겁니다. 성가신 일은 생기기 전에 처리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앞서 분명히 말했다. 난 너와는 다른 방식으로 네놈을 처리할 거다.”
“다른 방식을 찾으시기 전에 제가 먼저 사또를 칠지도 모릅니다.”
단호한 말에도 명월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제 가슴에 단검을 박아 넣은 것으로 머릿속이 완전히 말끔해져서일까. 한결 차가운 눈으로 화소군을 보게 되니 그가 취하는 행동이나 모습들이 이상했다.
“같은 편이 아니라면 적입니다. 전 사또가 아닌지라 적을 두고만 보지 않습니다. 사또께서도 마찬가지이실 겁니다. 제가 사또의 비밀을 알게 된 게 거슬리고 초조하실 겁니다. 이대로 돌아가신다면 분명 땅을 치고 후회하시겠지요. 화근을 남기지 않는 편이 사또께도 좋으실 겁니다. 처음 한 번이 어려울 뿐이지 두 번이 되면 생각보다 쉽습니다.”
지금 당장 단검을 집어 들어 제 심장을 찌르라 말하는 것 같다.
화소군의 반질거리는 눈동자를 보았을 때, 명월은 마음이 조금 더 확고해졌다.
이 자리에서 화소군을 죽이진 않을 거다.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꼴이라니. 자네, 역시나 이상하군.”
“이대로 돌아가시는 사또가 더 이상하신 겁니다.”
“이상할 게 뭐가 있나. 난 그저 자네가 두렵지 않을 뿐이라네.”
스스로 듣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실제로도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화소군을 바라봤다.
“지금 당장 자네를 죽일 필요를 느끼지 않을 만큼, 자네가 두렵지 않아.”
그제야 화소군이 입을 다문다. 저를 죽이라며 종용할 때 짓던 표정은 오간 데 없어졌지만, 그래도 방심할 수 없는 자였다.
그 말대로 여기서 그냥 떠나는 건 실수가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화소군을 죽이는 게 답은 아니었다.
화소군이 위협적이지 않은 건 아니나, 그처럼 처리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저자의 도발에 넘어가 단검을 주워 드는 순간 저놈과 같은 게 되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런 건 싫었다.
일단은 이 고을의 사또로서, 절차를 밟아 제대로 일 처리를 할 거라며 전립을 주워 들고 문 쪽으로 몸을 돌린 명월은 주춤했다. 문가에 서 있는, 하얀 호랑이 털을 뒤집어쓴 백호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왜 여기까지 찾아온 건지 모르겠다. 반사적으로 한마디 하려던 명월은 등 뒤에 서 있는 화소군을 의식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 화소군이 이대로 명월을 보낼 수 없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앞으로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겁니다. 이는 협박이나 경고가 아닌, 충고입니다. 정확하게 현실을 직시하시라는 충고 말입니다.”
지금 화소군의 눈에는 백호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명월은 앞에 서 있는 백호가 신경 쓰여서 죽겠는데 말이다.
그래서 지금 화소군이 하는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네놈이나 기다리고 있어라.”
도망칠 구석이 없을 정도로 준비를 해 놓은 뒤 붙잡으러 올 거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리하고 말겠다면서 매서운 시선을 던지는 명월을 두고 화소군은 웃었다.
“과연―, 어떻게 처리를 하실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빈정거리는 말에 명월은 안색을 굳힌 채로 발을 뗐다.
뒤에 서 있는 놈을 상대하느라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앞에는 백호가 버티고 서 있었다. 명월은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지금 여기서 백호가 한마디 거들면 못 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명월은 그를 지나쳐 갔다. 옆을 지나치는 동안에도 백호는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았다.
그래. 그래야만 했다. 지금 건드렸다면 난리를 쳤을 지도 모른다. 분명 그게 느껴졌으니 그도 손을 대지 않는 것일 거라며 명월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바깥으로 나오자 그제야 바람이 느껴진다.
뒤로 손을 뻗어서 완전히 문을 닫은 명월은 다른 쪽 손에 들린 전립을 보곤 안색을 굳혔다. 멀쩡했지만, 갑자기 불쾌해져서 그냥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느끼곤 그걸 쓸어 넘겼다. 그리고 앞섶을 여민 후 심호흡을 했다.
몇 번이나 숨을 고르고 난 후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한결 정리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마음의 정리를 한 것과는 별개로 가슴 앞에 남은 피 얼룩은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이걸 보면 분명 복운이 시끄럽게 굴 거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 서 있던 복운과 시선이 부딪쳤다. 양손을 마주 잡은 채인 복운은 무척이나 조심스레 “사또.” 하고 명월을 불렀다. 그러곤 느릿하게 다가와 명월의 모습을 위아래로 살피고는 가슴팍을 확인했다.
어두웠지만 피 얼룩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코끝을 스치는 피 냄새에 복운의 안색이 대번에 굳어진다.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별일 아니었다. 그러니 시끄럽게 굴지 마라.”
명월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재차 괜찮다, 라고 중얼거렸다.
그래. 이건 별거 아닌 일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 화소군 놈을 어떻게 처리하면 될지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되었다. 만만치 않은 놈이니 상대하는 데 꽤나 머리를 굴려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아주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생각을 쥐어짜 내야 할 거라며 심호흡을 한 후, 명월은 몸을 돌렸다. 그 뒤를 졸졸 따르는 복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왜 이렇게 되신 겁니까.”
묻는 말에도 명월은 대답이 없었다. 명월을 안에 보내고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싶어서 귀를 기울여도 별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중간에 날카로운 울림이 느껴지는 것 같아 명월을 불러 봤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나오더니 이런 모습이다.
지금 명월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전립은 없고 상투를 튼 머리는 반쯤 풀린 채였다. 거기다 손으로 누르고 있는 구군복의 가슴팍은 흐트러져 있고, 피 얼룩이 묻어 있었다. 명월이 부상을 입은 거라면 이렇게 걷진 못할 거다.
그렇다면 명월의 몸에는 별문제가 없다는 건데―.
아랫입술을 깨물고 심각한 얼굴이 된 복운은 당장 몸을 돌려 명월이 들어가 있었던 방으로 뛰어들려 했고, 명월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것 놓으십시오! 그놈을 제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감히 명월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뭔 짓을 한 건지 구체적으로 알 순 없지만, 명월이 저런 얼굴을 할 정도라면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멱살을 붙잡고 탈탈 털어서 바른 말이 나오게 할 거라며, 얼굴이 벌겋게 익은 채로 성을 내는 복운을 두고 명월은 혀를 찼다.
“관둬라. 네놈이 무얼 할 수 있단 말이냐. 오히려 문제를 크게 만들 거다.”
자신이 화소군을 상대하는 것과 복운이 그를 건드리는 건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복운이 해를 입게 할 순 없었다.
화가 단단히 난 복운을 두고 명월은 재차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다. 그러니 문제 일으키지 말고 이만 여기서 나가자.”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딱 봐도 괜찮지 않은 명월이었지만, 이번에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대답을 하는 것도 성가시다는 양 안색을 굳히는 명월을 두고 복운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곤 뒤로 물러서면서 왼쪽으로 손을 들었다.
“먼저 가십시오. 뒤를 따르겠습니다.”
그 정도는 하게 해 달라는 억양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그 정도도 하지 못하게 한다면 복운도 마음이 많이 안 좋을 걸 알기에 명월은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느리게 걸어가는 명월을 확인한 후, 복운도 뒤를 따랐다.
느린 걸음을 옮기는 복운의 얼굴은 한눈에 봐도 알 정도로 굳어 있었다. 잠자코 걸음을 옮기면서도 앞에 서 있는 명월을 몇 번이나 흘깃거리면서 본다. 그러다가 양손을 움켜쥔 그는 화소군의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히 그놈하고 뭔 일이 있는 거였다. 다음에 그놈을 만나게 되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분해서 이를 갈던 복운은 치미는 화를 내리누르며 입을 열었다.
“나가시기 전에 머리를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이번 건 복운의 말을 들어서 나쁠 게 없는 거였다.
명월은 머리로 제 손을 뻗었다. 어딘가가 얽힌 것인지 상투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는 게 보였지만, 복운은 돕지 않았다. 지금 명월은 예민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괜히 건드리면 그의 기분만 더 안 좋아질 거라는 걸 아는 거였다.
어떻게 보면 표정이나 행동 등에서 명월의 상태를 알 만큼, 그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런 게 전부가 아니었다.
어렸을 땐 명월의 얼굴만 보고도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명월을 봐도 그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무얼 계획하는지도 말이다. 복운은 가슴 안쪽으로 묵직한 돌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사또. 고민이 있으면 말씀을 하십시오. 전 당신께 도움이 안 되는 놈입니까.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입 안에서 굴리면서 복운은 양손을 움켜쥐었다.
그러는 동안 명월은 상투를 대충 풀어서 머리를 길게 풀어 내렸다. 바람이 불어서 명월의 긴 머리를 흩트린다. 제대로 정리를 하지 않고 그냥 푼 채로 두는 것에 복운은 망설이다가 품 안쪽에서 끈 하나를 꺼내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사또, 이거…….”
명월은 조심스럽게 내밀어지는 끈을 보곤 그리로 손을 뻗었다. 이건 어떻게 가지고 있었던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말을 하려다가 만 그는 뒤로 손을 뻗어서 머리를 묶었고, 복운은 그런 명월의 손목에 걸려 있던 상투 부분을 챙겼다.
“거치적거릴 테니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명월이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말하고 난 후, 그걸 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머리를 묶고 나서 손을 내린 명월은 옆에 붙어서 걷는 복운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안내를 하던 늙은이는 오간 데 없었다.
일이 틀어졌다고 방치인 건가.
쓰게 웃은 명월은 복운아, 하고 입을 열었다. 복운은 바로 명월 쪽으로 몸을 돌리곤 네, 라고 대답했다.
“앞으로 복잡한 일들이 생길 것 같구나.”
“……일이 잘 풀리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뭔가 문제가 생겨서 그걸 처리하기 위해서 화소군을 만나는 걸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명월이 이리 말하는 걸 보니 그게 뜻대로 진행되지 않을 모양이었다. 명월의 근심이 클 걸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던 복운은 안색을 굳혔고, 명월은 중얼거렸다.
“전처럼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
“무슨 일인지 말씀을 해 주신다면 저도 한번 궁리를 해 보겠습니다.”
이건 나름 용기를 내서 꺼내 본 말이었다. 이리 말을 한다 해도 명월이 순순히 입을 열진 않을 터였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서 마음의 정리가 된 상태라면 모를까. 실제로 지금 명월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희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복운을 바라보던 그는 손을 들어선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도 네가 곁에 있어서 많이 힘이 된다.”
“힘이 되다니요. 전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걸요.”
“언제나 늘 변치 않는 모습으로 내 곁에 있잖으냐.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뒷말을 흐린 명월은 입을 다물곤, 대신 복운의 어깨를 더 힘주어 잡았다. 복운을 지그시 바라보고는 손을 떼곤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차 걸음을 서두르는 명월을 두고 복운은 눈을 내리떴다.
변치 않는 모습으로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런 거 말고 조금 더 확실하게 명월의 힘이 되고 싶은 게 복운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일이 터졌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얼마 되지 않는 일에서도 최선을 다 하는 게 자신이 맡은 일이라면서 복운은 양손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