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12/32)

2장

명월과 복운이 마당으로 내려왔을 때에도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가마꾼들이 내려오는 명월을 보는데 표정이 하나같이 밝다. 그 얼굴을 보자니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그대로 방치된 상태였던 모양이었다.

보통 이런 식으로 손님이 찾아오고 식솔들이 남게 되면 소소하게 챙겨 주는 게 인정이었다. 하지만 화소군은 그들을 그냥 방치하도록 했다.

자고로 아래에 있는 자들을 대하는 걸 보면, 그 윗사람을 어찌 생각하는가가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처음부터 그놈은 자신을 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명월은 뒷짐을 진 채로 어둠에 잠긴 저택을 노려봤다.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유난히 을씨년스럽다. 기분 나쁜 장소라면서 눈을 가늘게 뜬 명월은 미련 없이 가마에 올라탔다. 명월이 가마에 앉는 걸 확인한 복운이 다급히 손짓을 했다.

“서둘러 돌아가자. 더는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다.”

정말은 욕도 좀 하고 침도 뱉고 싶었지만, 명월이 알면 싫어할 게 분명했기에 꾹 참고 있는 거였다. 가마를 든 자들에게 단단히 붙들라는 말을 한 복운은 먼저 앞으로 움직여선 대문을 열었다.

가마꾼들이 대문을 나와 몇 개 안 되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들은 어두운 산길로 종종걸음을 옮겼다.

서두르는 건지 가마가 꽤나 흔들린다. 그곳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명월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능한 마음을 차분히 한 상태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그리되지가 않았다.

화소군이 눈앞에 없고, 그의 저택을 빠져나왔음에도 심장의 박동은 여전했다. 쿵쿵쿵, 하고 뛰는 심장을 느끼면서 명월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러다가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눈을 감았다.

아직도 몸을 베고 들어가던 단검의 느낌이 생생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렬하게 남아 있는 건, 아픔 후에 퍼지던 뜨거움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일 테지만, 단검을 빼낸 후에 자신의 몸은 자연적으로 치유가 되었다. 벌어진 살이 아물고 그곳으로 다시 무언가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릴 적 종종 다치던 때에도 보통 이들보다 상처 아무는 속도가 빠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단검에 찔렸는데 바로 아물다니. 이게 전부 다 백호 덕분인가. 그와 잠자리를 가졌기 때문에, 그자의 것을 몸에 받아들였기 때문인가.

물론, 그럴 의도로 관계를 먼저 유도하긴 했지만 막상 이런 일이 생기게 되자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화소군과 그런 일이 생겼을 때 백호는 그 자리에 와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서 있기만 했지만, 놈이 그곳에 있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고 무척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왜 거기에 나타난 건가. 자신에게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으니 나타난 건가. 그런 식으로 얼굴을 내밀 거라면 사람을 이토록 답답하게 하지 말고 알아서 말을 해 주면 좋잖은가.

자신이 신경 쓰이면, 속 시원히 말을 하란 말이야.

“…….”

마지막 생각을 한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아니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자. 그놈이 자신을 신경 쓰는 건 분명 누군가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겠지. 그건 아마도 자신의 부모 중 한 사람일 테고―.

그때 가마가 덜컹―하고 크게 흔들렸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명월은 갑작스러운 흔들림에 놀라선 급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는 당장 옆에 있던 창문을 열어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왜 갑자기 멈춰 선 거냐.”

묻는 말에 대답을 하는 자들이 아무도 없었다. 그저 “저건 뭐야. 어디서 불이 난 건가.”라는 중얼거림이 들렸다. 불이라는 단어에 안색을 굳힌 명월은 당장 복운을 불렀다.

“복운아. 무슨 일이냐?”

명월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복운이 급히 아래로 허리를 숙였다.

“사또, 마을에서 불이 난 모양입니다. 꽤나 큰 불입니다.”

“큰 불이라니. 대체 어디서 났기에…….”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문 건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명월은 가마를 두드렸다.

“가마를 내려라! 내려가겠다!”

“사또, 그냥 안에 계십시오. 일단은 관아로 들어가시는 편이―.”

“어서 가마를 내리래도!”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시끄럽게 굴 거면 그냥 알아서 내리는 방법도 있었다.

명월은 앞의 문을 발로 찼고, 그것에 놀란 복운이 “어서 가마를 내리게!”라고 말했다.

가마가 내려감과 동시에 명월은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허리를 세우자마자 보이는 건 언덕 저기 아래쪽, 마을 한쪽에서 크게 오르는 불이었다.

건물 몇 채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본 명월은 놀라 입을 벌렸다. 그 뒤에 서 있는 가마꾼들도 저기가 어딘가 싶어서 술렁거렸고, 그러는 동안 복운이 명월의 옆으로 가 섰다.

“불이 나긴 했지만, 사람들이 바로 끌 겁니다. 이방도 계시니까 지금쯤 포졸을 풀었을 겁니다.”

“해골을 두었던 곳이다.”

명월의 말에 복운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처음에는 불이 났다고만 생각했던 그는 곧 저곳이 명월이 말한 대로 해골의 머리를 둔 장소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왜 하필이면 그런 곳에 불이 났단 말인가. 그때 바로 아래로 내려가려는 명월을 본 복운은 놀라선 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기다리십시오! 사또! 이런 일엔 직접 나서시는 게 아닙니다!”

입 다물고 있으면 명월이 팔을 뿌리치고 혼자 가 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뒤를 돌아보는 명월의 얼굴이 저토록 굳어 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복운은 명월의 팔을 놓을 수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닌 해골을 둔 장소라니. 불길하지 않은가.

“관아에서 포졸이 나가 불을 끄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가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지금 불이 난 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벌어진 일인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음모가 느껴진다고 하면 지나치게 앞서가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복운은 간절한 눈빛으로 명월을 바라봤지만, 그 눈빛이 명월의 마음을 돌리진 못했다.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 한다.”

그리 말한 명월은 있는 힘을 다해서 복운의 손을 뿌리쳤다. 단단히 잡고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명월의 손힘을 당해 낼 수 없었던 복운은 크게 휘청거리면서 옆으로 물러섰다. 급히 고개를 들었을 땐 어느새 명월이 산길 아래로 혼자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복운도 급히 뒤를 따랐다. 그걸 보고만 있던 가마꾼들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가마를 두고 둘의 뒤를 쫓았다.

* * *

지금 당장 드는 생각은 화소군이 한 게 아니냐는 거였다. 일이 뒤틀렸으니 놈은 놈의 방식대로 행동할 거고, 이게 그 첫 번째가 되는 거다. 이미 죽은 이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나 해골은 증거가 될 수 있었다. 그게 저를 곤란하게 할 것 같으니 아예 증거를 인멸해 버릴 셈인 거다.

꽤나 손이 빠른 놈이었다. 그래서 오한이 들었다.

자신과 달리 놈은 이곳에 오랫동안 있었고, 이런저런 사건에 깊게 개입이 되어 있었다. 놈이 반양에서 부리는 위세는 보통을 넘을 거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방식을 사용할 수 있고, 여기저기에 그놈의 사람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그런 교활한 놈을 과연 자신이 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 생각을 하게 되자 마음이 무거웠지만, 반대로 다리는 더 빠르게 움직였다. 까닥 잘못하면 넘어져서 크게 다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명월은 풀을 헤치고 산길을 내려갔다. 당장 저곳으로 가서 해골 하나라도 무사히 건져 내자는 생각뿐이었다.

뛰어 내려가는 속도가 지나치게 붙었던 걸까. 명월은 발을 삐끗했고, 준비할 새도 없이 앞으로 넘어졌다. 빠르게 다가오는 바닥을 본 명월이 당황해서 팔을 뻗는 것과 동시에 옆에서 나타난 건장한 손이 그의 몸을 잡아서 옆으로 끌어 당겼다.

단단한 가슴팍에 안겨진 명월은 숨을 삼키긴 했지만, 그걸 뿌리치진 않았다. 몸을 휘어 감는 듬직한 팔이 누구의 것인지 바로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백호의 품에 안긴 채로 명월은 눈동자만 위로 들었다.

호랑이 얼굴 아래로 보이는 백호의 얼굴 위로 짙은 음영이 서려 있었으나, 지금 그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지 모르진 않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서 거친 호흡을 몰아쉬던 명월은 입술을 달싹였다.

“떨어져.”

“고맙다는 말이 먼저가 아니던가.”

말을 듣기도 전에 백호가 저런 말을 할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별로 언짢지도 않고, 싫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눈을 내리뜬 명월은 제 몸을 끌어안고 있는 백호의 손을 확인하곤 그걸 토닥였다. 백마디 말보다 가벼운 두드림에서 전해진 바가 훨씬 더 많았던지 바로 백호의 안색이 굳는다.

굳은 눈빛을 느끼면서 명월은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처음엔 명월의 팔을 강하게 붙잡나 싶던 백호는 이윽고 그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비틀거리면서 떨어진 명월은 똑바로 서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백호를 바라보던 명월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여전히 숨은 차고 몸은 힘들지만, 백호의 얼굴을 봐서 그런지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긴 한숨을 내쉬고 난 후 명월은 몸을 돌렸다. 그런 그를 백호는 붙잡지 않았다.

조금 전 넘어질 뻔한 일이 있었기에 이번엔 서두르지 않았다. 하지만 다리는 여전히 바쁘게 움직였고, 명월은 점점 더 마을 쪽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고약한 냄새에 명월은 안색을 굳히곤, 앞을 막는 나뭇가지를 팔로 밀어내 바깥으로 몸을 내밀었다.

아래로 뛰어내려 허리를 펴자 바로 앞쪽으로 낡은 초가집이 나타났다. 산길에서 내려와 드디어 마을로 접어든 거다. 그래서일까. 불에 타는 냄새가 훨씬 더 강하게 나고,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우성을 치듯이 외치는 소리가 하나로 뭉쳐서 들려온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들리지 않았다. 명월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다시 움직이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위쪽,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백호를 발견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인 그는 말없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집요할 정도로 따라붙기는 하지만 앞을 막는다거나 성가시게 굴지 않는다. 그저 지켜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행동하는 데에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은 그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일부러 나타나 앞을 막는 것만 아니라면 저런 식으로 이쪽을 주시하는 게 크게 불편할 것도 없고―.

거기까지 생각한 명월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린 명월이 서둘러 움직이는 걸 확인한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백호의 눈에 저 멀리, 점점 더 거세지는 불길이 들어왔다. 불길은 점점 더 커져서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모든 걸 태우고 무로 돌리는 붉은 꽃.

개인적으로 불을 보는 건 좋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는 아니라며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 * *

빠른 걸음을 옮기는 동안 명월은 속이 울렁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타는 냄새 때문에 이렇게 역한 기분이 드는 건 아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점점 더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끼면서 그는 아래로 내린 양손을 움켜쥐었다.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걸음을 서두르는 그의 눈앞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포졸들이 보였다. 그들을 발견한 명월의 눈이 크게 떠진다.

명월은 서둘러 그리로 달려갔다.

“여봐라!”

명월의 부름에 막 앞을 지나치던 포졸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달려오는 명월을 발견하고 바로 어, 하고 눈을 크게 뜨며 아는 척을 해 왔다. 그런 포졸 앞으로 다가선 명월은 그들을 이끌고 이동 중이었던 병방을 확인하곤 곧장 그리로 갔다.

“어찌 된 일인가.”

해골을 넣어 둔 창고가 타고 있다는 걸 알기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병방은 다가오는 명월을 보고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사또. 잠시 자리를 비우신다 들었는데 어찌 이곳에 계시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지금 명월의 몰골이 이상했다. 전립은커녕, 상투도 제대로 틀고 있지 않았다. 왜 이런 모습인 건가 싶어 저도 모르게 위아래로 훑어보려는데 명월이 재차 물었다.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더냐.”

명월의 거듭되는 물음에 병방도 금방 진지한 얼굴로 돌아가 말했다.

“갑작스럽게 창고에 불이 붙어서 포졸들을 이끌고 가는 중입니다.”

“이끌고만 가면 어쩌자는 건가. 당장 흩어져서 근처 우물에서 물을 떠야지.”

그리 말하면서 포졸들의 손을 확인하는데 하나같이 빈손들이었다.

이런 답답한 일이 있나. 화재가 난 걸 알렸을 때, 그 자리에 이방이 없었던 건가 싶었던 명월은 다급히 말했다.

“다들 흩어져서 바가지나 물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걸 찾도록 해라. 없으면 그걸 파는 곳으로 가서 일단 빼서 사용해라. 나중에 내가 처리할 터이니. 다들 가만히 서 있지만 말고 어서 흩어져라! 움직여라!”

명월의 재촉에 가만히 서 있던 포졸들이 그제야 움직였다.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이들 사이로 저기 앞쪽으로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몇 보였다.

꽤나 큰 화재가 일어난 것이니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보러 나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리 구경만 하고 있어선 안 되었다.

그들에게 물을 떠오라는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일단 현장 쪽에도 사람이 몰려들어 있는 것 같으니 포졸을 써서도 수가 안 나면 모든 사람들을 깨워서 밖으로 데리고 나와야만 했다. 지금은 날씨가 건조해서 불길이 커지면 손쓸 수도 없을 정도로 사방으로 퍼지게 될 거다.

“포졸들은 이것만 데리고 나온 건가.”

명월의 물음에 병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태 파악을 하기 위해서 제가 우선 나왔습니다.”

“사태를 파악할 게 뭐 있어. 다시 관아로 가서 다 데리고 오게. 아주 많은 포졸들이 필요할 거야. 그들에겐 관아에 있는 모든 바가지와 물통을 들고 오게끔 해. 서두르게. 어서―!”

명월의 재촉에 병방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이렇게 가만히 서 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바로 몸을 돌렸다. 있는 힘을 다해서 달려가는 병방을 확인한 명월은 다시 움직였다.

최대한 빨리 불을 잡아야만 했다. 창고 안에 있는 해골을 잃을 순 없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다른 곳으로 불이 붙지 않아야 했다.

명월은 이 모든 일이 화소군의 소행일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정말로 대담하고 무자비한 놈이었다. 어찌 사람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리하면 얼마나 많은 자들이 피해를 입는데. 설마하니 그런 걸 신경도 쓰지 않는 건 아니겠지. 정말 그렇다면 그놈은 최악이었다. 만약 이 일로 인해서 누군가 다치거나 죽게 된다면 그땐 바로 그놈의 목을 베어 버릴 거다.

다수를 위해서 사람 하나 처리하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이런 일을 벌이는 놈을 죽이는 게 뭐 대수라고 자신은 망설였단 말인가.

화소군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토해 낼수록 속이 시끄러워진다. 전과는 다르게 분노 조절이 되지 않는 걸 느낄 수 있었던 명월은 양손을 움켜쥐었다. 오른손에 느껴지는 가죽의 질감을 느끼며 눈에 힘을 주었다.

일단은 당장의 일부터 처리하자. 화소군 그놈은 나중 문제라면서 명월은 길목으로 빠져나왔고, 그 순간 뜨거운 열기가 그에게 밀려들어 왔다.

“…….”

얼굴 전체를 덮듯이 느껴지는 열기에 명월은 놀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는 손을 들어서 얼굴을 가렸다.

지금 상태로는 암만 물을 뿌려도 화재를 진압하기 어려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하던 중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활활 잘 타는군. 암 그래야지.”

“이대로 흔적도 안 남고 몽땅 다 타 버렸으면 좋겠군.”

“그래야 우리들의 근심도 사라지겠지. 이렇게 보니 더 불을 낼 필요도 없을 것 같군.”

나직하게 주고받는 말들이 명월의 귀로 들어왔다. 그 순간 화가 치밀었던 명월은 바로 손을 내렸다. 화소군이 이곳에 불을 내라고 보낸 이들이 대담하게도 아직도 남아 있는 건가 싶어서, 놈들의 얼굴을 보고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것들인지를 알아보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불이 난 곳 앞쪽에 서 있는 열명 남짓의 사내들을 확인하곤 바로 안색이 굳어지는 명월이었다.

그들은 화소군이 부리는 이들처럼 검은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평범한 양민들로 보이는 그들 손에는 불을 끄기 위한 바가지가 아닌 횃불이 들려 있었다. 뜨거울 텐데도 그 앞에 서선 타는 건물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도 저들이 한 것이란 말인가.

믿을 수 없었던 만큼 명월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멍하니 그들 쪽을 보고 있는데 이상한 낌새를 느낀 누군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명월을 발견한 한 사내가 움찔해선 옆에 서 있던 자의 어깨를 세게 두드렸다. 그러자 왜 그러냐고 물은 자도 뒤를 돌아봤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용모를 지닌 사내가 뒤를 돌아봤고, 명월과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그도 다른 자처럼 놀라선 움찔하는 게 보였다. 하나가 반응을 보이자 다른 쪽에 있던 자들도 줄줄줄 명월을 돌아본다.

처음 명월을 본 이들은 당혹감을 드러냈고, 몇은 반감이 담긴 눈빛을 던졌다. 매섭게 노려보는 그들의 눈빛에 명월은 입을 열었다.

“지금 이곳에 불을 낸 게 자네들인가.”

가라앉은 명월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무척 잘 들렸다.

사내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시선 교환만 할 뿐, 바로 대답하진 못했다. 그러다가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가 이곳에 불을 냈소!”

하나가 나서면 그 뒤는 한결 수월해진다. 때문에 눈치를 살피던 이들도 하나, 둘 앞으로 나섰다.

“우리가 불을 냈소! 이건 전부 다 사또의 탓이오! 외지인인 당신이 이곳에서 이상한 짓을 하는 걸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소!”

“그렇소! 왜 조용한 이곳에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고, 죽은 듯이 2년만 지내다가 썩 물러나시오!”

“지금은 이곳의 사또라 해도 2년이 지나면 여길 떠나게 될 터인데, 왜 이렇게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니는 것이오! 그리하고 떠나면 남겨진 우리들은 어쩌라고! 괜히 죽은 자들을 저리 둬서 욕보이지 말고, 편하게 잠들게 하시오!”

창고 안에 들어가 있던 건 억울한 죽임을 당한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억울함을 달래고, 정말 왜 죽은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창고에 잠시 둔 것뿐이었다.

그들을 욕보일 마음은 결코 없었고, 그걸 저들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저런 식으로 분란을 일으킨다거나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지 말라 하는 게 아니겠는가.

거칠게 내뱉어지는 말을 듣기만 할 뿐, 미동 없이 가만히 서 있는 명월을 두고 한 사내가 횃불을 던졌다. 날아간 횃불은 명월의 발 옆으로 떨어졌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활활 타들어 가는 불길로 인해 보이는 명월의 얼굴색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묘하게 껄끄러운 모습에 사내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한 사내가 재차 앞으로 나섰다. 그는 명월을 노려보고는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이곳에서 아무것도 해선 안 되오. 그러니 그냥 조용히 있다가 떠나시오. 무슨 일이 터지게 되면 당신은 떠나면 그만이겠지만, 우리는 그게 아닙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긴 우리의 고향이고,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할 땅이지요. 여기서 생기는 모든 일들을 감당해야 할 건 결국 우리라는 거요.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편하게 지내다가 때가 되면 조용히 떠나시오. 그게 당신이 이 고을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오.”

말을 하는 건 사내 하나뿐이었지만, 근처에 서 있는 모두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저 말에 대해서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다.

그들을 하나하나 살피는 동안에도 시선을 피하거나 돌리는 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그들의 안하무인격인 태도에 명월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사특한 짓을 알고도 너희들은 묵인하고 있는 거다. 그게 얼마나 큰 죄인지 알면서도 이러는 것이더냐.”

“알아도 어쩔 수 없소. 우리는 여길 떠나서 살 수 없단 말이오. 떠날 자유가 있는 사또하고 우리는 애초부터 다른 입장이란 말이오.”

“그것이 지금 너희들의 되지도 않는 짓거리를 정당화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물론입니다.”

단호하게 말한 사내는 양팔을 들었다.

“이곳에 사는 모두가 우리의 행동을 이해할 것이오. 그러니 물러나시오. 지금 이건 경고일 뿐이지만, 다음번에도 사또께서 과한 일을 벌이려 하신다면 우리는 당신을 막을 것이오.”

“네놈들을 전부 다 가둬 놓을 것이다. 너희가 저지른 짓에 대한 죄를 받게 할 것이다. 그런 너희들이 나를 어찌 막을 것이더냐.”

“사또의 행동을 막으려 드는 게 우리뿐이라고 생각하지 마시오. 반양에 사는 모두가 사또의 행동을 반대하고 막을 것이오. 사또께선 아무것도 못 할 것이고, 결국 좌절감을 맛보게 될 것이오. 곱게 자란 분께서 좌절의 쓰디쓴 맛을 보고 싶으신 게 아니라면 이쯤에서 멈추시지요. 더는, 도를 넘어선 짓을 하지 마시오. 이건 우리가 사또께 보이는 아주 큰 호의요. 이 충고를 받아들이시는 게 사또께도 좋을 겁니다.”

“…….”

입을 다문 명월은 사내를 노려봤고, 사내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평범해 보이지만 실상은 만만치 않은 사내였다. 저런 사내가 선두에 서 있다면 상대하기가 어려울 거다. 자신의 앞에서 선언한 대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때마다 그것에 반대를 하고 막으려 들 게 분명했다.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 될 테지. 하지만 그렇다 해서 자신이 하려는 모든 일들을 멈출 순 없었다. 이미 하고자 결정을 내리고 마음을 먹었으니,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저들은 외지인인 자신이 되지도 않는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이 일에는 이미 명월도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이 고을에서 일어난 알 수 없는 모든 일들이 명월 모르게 진행이 되었다면 모르는 척 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이 일은 저들보다 자신이 더 깊은 연루가 된 걸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며 명월은 앞으로 걸어갔다.

명월이 움직이자 모여 있던 사내들이 주춤거렸다. 설마하니 저런 말을 듣고도 움직일 줄은 몰랐던 듯 그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어찌할 것인가. 그러던 중 한 사내가 말없이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다른 사내들이 명월에게 달려들었다. 처음에는 명월이 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 둘 생각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어깨를 붙잡는 자의 손목을 잡아 그대로 반대편으로 넘겨 버렸다. 너무도 가볍게 넘어간 사내가 바닥에 추락하기도 전에 명월의 손은 다른 쪽에 있던 자에게 향하고 있었다. 명월은 제 반격에 당황한 건지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다른 사내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엎어치기를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연거푸 당하자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누군가 외쳤다.

“때려 눕혀!”

어림도 없는 일이라며 명월은 주먹을 휘두르는 자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그걸 피하는 자에게 재차 주먹을 휘두르고 반대편으로 들어오는 남자에게도 발을 날렸다.

정확하고 빠른 발차기를 미처 피하지 못한 사내가 한 방 맞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으억!”

명월은 보기보다 강했다. 그의 몸놀림은 날래고 주먹은 매서웠다. 발차기도 시원시원하게 올라갔다. 그들이 제대로 훈련을 받은 명월을 당해 낼 순 없었다.

예상치 못한 명월의 실력에 사내는 당황해선 다른 쪽에 있던 사내들을 바라봤다.

“뭘 해도 좋으니까! 그를 막아라!”

외치는 목소리에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명월의 실력을 맛본 자들은 다급히 일어나선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총 다섯이 덤벼들었지만, 명월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피하면서 주먹을 날리거나, 붙잡는 손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그때 갑자기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 놀란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불타는 창고가 무너지는 게 아닌가 싶어 그쪽을 살피는 건데, 그 틈을 타 사내 하나가 명월을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붙잡았다!”

그 순간 숨이 턱 끝까지 찬 복운이 나타났다. 헐떡거리며 나타난 그는 명월을 붙잡고 있는 이들을 보곤 당장 눈에 쌍심지를 키웠다.

“사또! 이놈들 우리 사또께 무슨 짓이더냐!”

복운은 괴성을 지르면서 명월을 붙잡는 이들에게 달려들었다. 명월의 팔을 잡고 있던 자의 허리를 붙잡아 올리곤 마구 흔든 후에 오른쪽으로 던져 버렸다.

날아간 사내가 데구르르 굴러가면서 아이고, 하고 앓는 소리를 내자 반대편에 있던 사내가 복운에게 몸을 날렸다.

복운의 배를 머리로 세게 박았지만, 복운은 헛숨을 삼킬 뿐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살기등등한 눈으로 허리를 잡고 늘어지는 사내를 보던 복운이 주먹으로 그의 등과 허리를 내리쳤다. 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억, 하고 신음을 흘리면서 떨어지자 그의 멱살도 잡아서 왼쪽으로 멀찍이 던져 버렸다.

일단 급한 대로 두 놈을 처리한 복운은 다급히 명월을 찾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앞에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디로 가 버린 건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는데 불이 타는 곳 오른쪽으로 바가지를 들고 있는 포졸이 나타났다. 그 뒤로도 물통을 든 포졸이 나타나긴 했는데, 그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거센 불길을 보곤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누군가 그들 앞으로 달려와선 그 손에서 물통을 빼앗듯이 들고 가, 제 머리 위에 물을 뿌렸다.

다른 포졸이 가지고 있던 바가지까지 가져가, 제 몸에 시원하게 물을 뿌린 명월은 바로 몸을 돌렸다.

찾고자 했던 명월을 발견했지만, 보면서 복운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어, 어, 하는 사이에 명월은 거센 불길이 이는 곳으로 뛰어들어 갔다.

“……도련님!”

명월이 불 속으로 사라지듯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복운은 비명을 지르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양 타오르는 불길이 그의 앞을 막아서는 것과 동시에 쓰러져 있던 사내가 달려들어 와 옆구리를 세게 밀쳐냈다. 방심 상태로 있었던 복운은 그대로 사내와 함께 옆으로 나자빠졌다.

몸 위에 올라타는 놈의 팔을 잡아선 옆으로 꺾어 버리면서 무릎으로 놈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헛숨을 삼키며 비틀거리는 놈을 가볍게 제압해서 던지듯 떨궈 버린 복운은 다시 일어서선 불 속으로 뛰어들어 가려 했다.

그러자 하나둘 도착한 포졸 중 몇이 복운을 붙잡았다.

“기다려! 어딜 가려는 거야! 저런 곳으로 들어가면 자넨 죽어!”

“이것 놔! 저 안에 우리 도련님이 들어가셨단 말이야!”

명월이 활활 타들어 가는 불 속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정말 놀랐기에 그를 사또가 아닌 도련님으로 부르는 복운이었다. 때문에 알아듣지 못한 자들이 더 세게 자신을 끌어당기는 걸 느끼면서도 복운은 다리에 힘을 주고 어떻게든 버티려 했다.

그러는 동안 물을 떠 온 포졸들이 속속 도착하고 그들은 창고에 물을 뿌렸다. 하지만 활활 타들어 가는 불이 고작 그 정도의 양의 물에 꺼질 리가 없었다.

물을 뿌려도 티가 나지 않는 것에 허탈한 얼굴을 하고 있던 자들 사이로 복운은 더 열심히 앞으로 손을 뻗으면서 명월을 부르짖었다.

* * *

불에 타는 창고를 보고 이건 쉽게 끌 수 없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된 명월이 선택한 건 안에 있는 해골 중 하나만이라도 들고 오자는 거였다.

이대로 그들을 헛되게 보낼 수 없었다. 억울하게 죽은 자들은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그걸 아는 자들이 바깥에서 일부러 불을 내 증거를 모조리 없애 버리려 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젖은 소매로 입과 코를 누른 명월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오는 건 어떻게 할 수 있었어도, 안에서 움직이는 건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사방에서 타들어 가는 불길은 뜨거운 손길로 명월을 스치거나 그를 위협했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것들이 육중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져 그의 앞을 막아서기도 했다. 몇 번이나 위험한 고비를 넘기면서 명월은 더 안으로 들어갔다.

전에 이방과 왔을 때에는 이렇게 넓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건가 싶었다. 연기가 심하게 나 눈이 따끔거려서 눈을 가늘게 떠도 보이는 게 없다. 보이는 건 붉게 넘실거리는 불길이고, 뜨거운 열기만이 느껴졌다.

문득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더럭 두려워졌다. 아예 손바닥으로 코와 입술을 누른 명월은 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일단은 침착하자며 스스로를 다독여도 쉽지가 않았다.

보이는 건 없고 점점 더 혼란스러워질 따름이다. 차라리 여길 빠져나가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몸을 돌렸을 때 나무로 된 기둥이 옆으로 쓰러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무너진 기둥 때문에 더 강한 불길이 오르자 명월은 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목을 타고 올라오는 기침을 참지 못하고 허리를 굽힌 채로 몇 번이나 기침을 했다. 그러는 동안 코와 입 안으로 들어오는 매캐한 연기 때문에 더더욱 괴로웠다.

정신없이 기침을 하던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불길 사이로 보이는 하얀 해골을 발견했다.

저기에 있구나. 해골을 보는 순간 명월은 다시 움직였다. 일단은 저거 하나라도 들고 밖으로 나가자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곁에서 큰불이 넘실거리는 걸 보지 못했다.

커다란 불길은 명월의 등을 덮쳤고, 결국 그의 옷자락 끝에 불이 붙었다. 그걸 모르고 일단 해골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앉은 명월은 그걸 집어 들기 위해서 양손을 내렸다.

그때 다시금 쿵, 하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머리 위로 뜨거운 게 떨어졌다. 놀란 명월은 고개를 들었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 붙은 나무 기둥을 발견했다.

“…….”

이번 건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걸 보고만 있는 동안 명월의 하얀 얼굴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것은 한 손을 들어선 위로 떨어지는 커다란 나무를 잡아 옆으로 던져 버렸다.

날아간 나무가 근처에 있던 것들을 무너뜨리면서 바깥으로 쏟아진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것들을 팔과 손으로 쳐내는 이는 백호였다.

백호를 보는 순간 명월의 얼굴에 안도감이 서렸다. 하지만 그것도 갑자기 몸을 굽혀서 옷자락을 붙잡는 백호의 행동으로 인해서 사라졌다. 겉옷을 잡아서 벗기듯 당기는 것에 당황한 명월이 뭘 하는 거냐고 물으려 했다. 하지만 안색을 굳힌 백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명월의 옷을 찢듯이 당겼다.

백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때 또 기침이 나오려 해서 명월은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로 연거푸 몇 번이나 기침을 했다.

백호는 명월의 겉옷을 벗겨 옆으로 던져 버렸고, 그제야 명월은 자신의 옷에 불이 붙어서 반쯤 타들어간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그랬던 거였어.

기침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던 명월은 눈을 내리떴다.

그리고 백호의 오른발 아래에 깔려 있는, 반으로 부서진 해골을 확인하곤 안색을 굳혔다. 기침도 멈췄다. 손으로 입을 막은 명월이 굳은 눈으로 뭔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백호가 그걸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제 발 아래에 부서진 해골을 본 백호가 그걸 발끝으로 툭 쳤다.

옆으로 데굴거리면서 굴러가는 해골을 따라 고개를 돌리려 하는 명월의 턱을 커다란 손이 붙잡는다. 그 손이 명월의 고개를 앞으로 돌렸고, 보이는 건 화가 난 듯 잔뜩 굳어 있는 백호의 얼굴이었다.

“저건 죽은 것이고, 넌 아직 살아 있다.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따지듯 묻는 동안 턱을 붙잡은 손으로 더 힘이 들어갔다. 턱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에 인상을 쓰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계속해서 채근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 저놈들이 귀물인 것도 아니야. 설령 귀신이 되어 떠돈다 해도 놈들은 살아 있던 때의 기억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저승으로 가지 못한 놈들은 악귀일 따름이란 말이다. 해결하고 싶다면 저런 걸 처리할 게 아니라, 산 자들을 상대해야 할 게 아니냐. 인간이라면서, 왜 자꾸만 이쪽을 건드리려 드는 거냐.”

“…….”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봐라. 잘난 척 지껄여 대던 놈이 왜 말이 없어?”

이를 악문 채로 나직하게 내뱉는 백호의 얼굴은 살기등등했다. 하지만 매섭게 노려보는 눈빛과 살벌한 분위기는 명월을 두렵게 하지 못했다.

그는 화가 잔뜩 나 있었지만, 그걸 알고도 명월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저 백호를 바라보기만 하던 명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알려 주지 않았어.”

그 순간 백호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너도 알면서도 말해 주지 않았지 않나. 그런 주제에 뭘 잘난 척 지껄여 대는 거냐. 내게 훈수를 놓고 싶은 거라면 모든 걸 알려 줬어야지.”

여전히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백호지만, 그 순간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짐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고 날 혼자 두는 걸로 모든 걸 끝냈다고 생각해선 안 되는 거였어.”

이건 백호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건 그에게 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혈육이라고 믿고 있는 그 남자. 그는 자신이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으로 살기를 원해서 혼자서 사라진 거겠지만, 그래선 안 되었다. 자신이 진짜로 인간으로 살기 위해선 모든 걸 알아야만 했다.

왜 내 손에 이런 게 있는 건지. 왜 이상한 게 보이는 건지.

그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었다면 이 정도로까지 일이 틀어지진 않았을 터였다.

그가 자신을 위해서 무얼 한 건지는 몰라도, 그 마음 만큼은 느껴졌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지만 결과는 이렇다. 자신이 진짜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는 만큼, 벼랑 사이에 연결이 된 줄 하나만을 의지해서 그 위에 선 채로 공중에서 묘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 척박한 상황에서 벼랑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반대편까지 도달하는 건 어렵고, 힘들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엄청난 일을 해낼 만큼 자신은 대단한 놈이 아니었다.

그런 자신에게 왜 이리도 바라는 게 많단 말인가.

이제는 지치고 힘들다. 뭔가를 하고 싶은데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으니, 모든 일들에 대한 자괴감이 든다.

난 대체 뭐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눈을 내리뜬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왼쪽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연기로 검게 얼룩진 뺨에 흐르는 눈물을 본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화가 난 듯, 그게 아니면 곤혹스러운 것처럼 안색을 굳히고 있던 백호는 손을 들어 턱에 맺혀 있는 명월의 눈물을 닦아 냈다.

손가락 끝에 맺힌 동그란 눈물이 마치 구슬처럼 예쁘게 반짝거린다. 그 사이로 일렁거리는 불길을 본 백호는 재차 명월의 얼굴을 봤다.

지치고 힘든 일을 겪어서 머리도 얼굴도 엉망이었다. 체념해선 기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날이 밝으면 다시 바뀔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잠시 쉬어가기는 해도 넘어지거나 멈추지 않는 놈이었다. 자신이 뭐라고 해도 결국에는 제가 원하는 걸 해내겠지.

결코 부러지지 않는 강한 영혼을 지닌 존재였다.

이런 존재는 흔치 않았다.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다.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향과 명월의 일렁거리는 깨끗하고 검은 눈동자를 본 백호는 고개를 숙였다. 뭔가에 이끌리듯 혀를 내밀어선 명월의 뺨을 핥아 내고, 그의 눈가에 입술을 대곤 가볍게 빨아들였다. 여전히 눈을 뜨고 있던 명월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선 백호를 올려다봤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던 명월은 손을 들었다. 그 손이 백호의 턱에 닿나 싶더니 이윽고 주먹으로 그의 뺨을 옆으로 살짝 밀어낸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 뭔 짓을 하는 거야.”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전처럼 한 방 세게 후려쳐 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가볍게 밀어내는 것만으로도 지금 명월의 마음은 전해졌기에 백호는 일단 떨어졌다.

그는 명월의 작은 얼굴을 내려다봤다. 피곤해서 죽은 것 같은 모습이고, 머리카락은 다 풀어져서 엉망이었다. 옷도 흐트러져 있고, 설상가상 깨끗한 피부는 여기저기 검댕이 묻어 있었다. 이런 엉망진창인 모습이라니―.

그런데 왜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이 뒤숭숭한지 모르겠다.

가슴 안쪽으로 무언가가 살살 긁어 대는 듯한 묘한 감각이 퍼진다.

그게 무언지 모르겠지만, 입은 그보다 훨씬 더 솔직했다.

“어쩔 수가 없군. 내가 졌다.”

무엇을 두고 졌다고 말하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이미 입 밖을 통해서 흘러나간 말이었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긴 한숨을 쉰 백호는 명월의 머리를 잡아 제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됐다. 눈 좀 붙이고 있어라. 여기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뭘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할 수 없으면서 괜히 잘난 척은 하지 말라 하려던 찰나 머리 위에서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르릉, 하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굉음과 동시에 차가운 뭔가가 명월의 정수리로 떨어진다.

비가 내린다. 밤이어서 하늘이 맑은지 어떤지도 알 수 없었는데 원래 비가 오기로 되어 있었던가. 아니면 이 녀석이 재주를 부리는 건가.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입을 열었다. 그 사이로 무겁고 긴 숨이 흘러나온다. 동시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 명월은 백호의 품에 안긴 채로 눈을 감아 버렸다.

어쩐지, 그의 품이 무척 편안하게 느껴졌다.

* * *

하늘에서 쏟아지는 거센 빗줄기가 반양의 모든 것들을 가리었다. 빗물은 순식간에 불을 꺼 버렸고,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은 비를 피해서 흩어졌다.

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가 쥐죽은 듯 숨을 삼켰고, 사방이 고요해졌다. 들리는 건 오로지 비가 내리는 소리뿐이었다.

그 소리는 사람의 기척을 지우고, 숲 안쪽에 도사리고 있던 것들의 흔적을 없애 버렸다. 모처럼의 안식이었다. 적어도 이번 비가 내리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다. 쉬려면 지금뿐이었다. 그런데 깊은 잠을 들지 못한 명월은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천장을 확인하고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 쪽으로는 아무도 없었지만, 반대편은 그게 아니었다. 안쪽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앉아 있는 건 백호였다.

예의 그 하얀 호랑이 가죽을 머리에 쓴 채로, 그는 팔짱까지 끼고 있었다. 자세만 보면 화가 단단히 난 사람 같지만, 정말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백호는 차분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 말도 없었다. 그래서 명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널 도와준 거다. 너는 네 은혜를 입은 거다.”

“…….”

“……그런 말은 안 하는 건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 후 명월은 입을 다물었다.

도와주고 나서 언제나 생색을 내던 백호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덕분에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을 때에도 고맙다는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그런 경험을 떠올리고 묻는 말에도 백호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도 이번 일은 생각하기에 기가 찬 거겠지.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는 머릿속으로 ‘이놈이 날 믿고 그런 위험한 곳에도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게 아닌가.’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몰랐다.

실제로도 그랬다. 만약 혼자였다면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을 터였다. 포졸이 들고 온 물을 뒤집어쓴 후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건, 백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곁에서 도와준다. 그에게 그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고, 그걸 알려 주지는 않았지만, 아무려면 어떠나 싶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였다.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명월은 손을 뻗어선 백호의 다리 위에 올렸다. 그의 발목을 꼬옥 움켜쥐고는 중얼거렸다.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그 순간 백호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잡힌다. 고맙다 말하긴 했지만, 그게 그의 마음에 들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안색을 굳힌 채로 노려보던 백호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복운이 들어왔다.

칙칙한 얼굴을 하고 있던 복운은 명월이 눈을 뜨고 있는 걸 보고는 들고 있던 쟁반을 놓칠 뻔했다. 가까스로 그걸 붙잡고 똑바로 선 복운은, 눈을 크게 뜬 채였다.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보던 복운이 천천히 다가오는 걸 본 명월은 잡고 있던 백호의 다리를 놓고는 대신 배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는 복운을 바라봤다.

막 눈을 뜬 명월의 얼굴이 하얗다. 원래 피부가 뽀얀 편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게 그의 몸이 좋지 않은 것 때문으로 여겨진 복운은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입을 열려다가 다문 복운은 들고 온 걸 옆에 내려놓고는 움켜쥔 양손을 제 허벅지 위에 올렸다.

고개를 숙이는 복운은 심각한 모습이었다. 화가 난 것처럼 잔뜩 인상을 쓴 채로 하염없이 바닥만 노려보던 그의 앙다문 입술이 떨렸다. 설마―싶었을 때에는 그의 다물린 입술을 타고 울음이 흘러나왔다. 흐윽―하는 소리와 함께 복운은 눈을 질끈 감으며 굵직한 눈물을 떨구었다.

갑작스럽게 흘러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던 그는 손바닥으로 눈을 닦아 내면서 더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갑자기 들어와서 우는 복운이 이상하게 보이진 않았다. 그가 왜 저러는지를 알고 있었던 명월은 조용히 그를 바라봤고, 복운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 또. 우리 여길 떠납시다―.”

손바닥으로 눈을 비비면서 눈물을 모두 닦아 낸 복운은 명월을 내려다봤다.

“여기 있으면 매번 이런 일들만 생겨서, 언젠가 사또께서…….”

언젠가는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더럭 들었다. 해선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연달아 생기는 일 때문에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전에도 살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반양에 오고 나서부터 모든 일들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복운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명월을 내려다봤다.

지금 당장 짐을 싸 들고 반양을 뜨자는 대답을 듣고 싶은 거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할 순 없었다.

“미안하게 됐다. 하지만―.”

앞으로는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런 식의 말을 벌써 몇 번이나 한 건지 모른다. 이쯤 되면 복운도 더 이상 그 말을 신뢰하지 않을 거다. 자신이 백호가 반복적으로 하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것처럼, 그건 복운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말을 해야만 했다.

조용히 복운을 바라보던 명월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머뭇거림 후에 흘러나오는 대답이란 게 고작 이런 거였다. 일그러지는 복운의 얼굴을 보면서 명월은 뒷말을 이었다.

“아직은 이곳을 떠날 수 없다.”

“……이곳에 계속 계시다 보면 언젠가 정말로 큰일이 생길 겁니다.”

“어떻게든 될 거다. 매번 그런 식이었지 않나. 언제나 늘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곤 했지. 이번 일도 마찬가지다.”

명월은 손을 뻗어선 복운의 무릎을 가볍게 토닥였다.

“이번엔 내가 무모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정말 미안하다.”

연거푸 미안하다 하는 말에 복운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복운이 걱정을 하거나 싫은 소리를 하면 명월은 불쾌해하면서 ‘내가 알아서 할 거다.’라고 대꾸하곤 했다.

지금처럼 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웬만해선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복운도 더는 이 부분에 대해선 말을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자신이 명월을 끌고 반양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긴 한숨을 내쉰 복운은 들고 온 쟁반을 명월 쪽으로 살짝 밀었다.

“약을 좀 지어 왔습니다. 일어나셔서 드십시오.”

약이라고 하는 순간 바로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원래 쓴 약을 싫어하는 명월이었다. 보통 때라면 싫은 내색을 취하며 쓸데없는 걸 준비해 왔다, 안 먹을 거다, 거기에 두고 나가라, 나중에 내키면 마시겠다, 등등의 말을 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명월은 일어나 앉았고, 복운이 옆에서 부축해 주려 했지만, 되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쟁반에 올려진 그릇을 들고는 쓰디쓴 약을 한 번에 들이켰다.

복운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시원하게 약을 마시는 모습은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명월이 빈 그릇을 내려놓고 손으로 입술 주변을 닦는 걸 보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입을 닦던 손을 내린 명월은 복운을 바라봤고, 여전히 피곤해 보이는 모습에 복운은 고개를 숙이곤 쟁반을 들고 일어섰다.

“전 나가 보겠습니다. 쉬십시오.”

“그래. 신경 써 줘서 고맙다.”

“……그게 제 일이 아닙니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한 후에 복운은 몸을 돌렸다.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뒤를 돌아본다면 그땐 웃는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건가 싶었지만, 복운은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복운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명월은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냈다.

묘하게 힘이 빠진다. 명월은 잠자코 닫힌 문을 살피다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여전히 백호가 양반다리를 하고 팔짱을 낀 채로 앉아 있었다.

그가 저런 모습으로 내리 있는 동안에도 복운은 그리론 시선을 두지 않았다. 자신 외엔 다른 이들에겐 보이지 않는 거다. 놈은 인간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음에도 이런 일이 하나, 둘 생길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그때 백호가 차분한 목소리로 “왜 그리 보는 거냐.”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에게 모든 걸 말해 주는 쪽으로 마음을 정한 거냐.”

명월의 물음에 백호의 표정이 재차 굳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들은 것처럼 안색을 굳히는 그였으나 명월은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상대가 인간이든 아니든, 사내라면 내뱉은 말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었다.

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라며 차분한 시선으로 응시하는 명월을 두고 백호가 팔짱을 풀었다. 그러곤 주변을 둘러보나 싶더니 마지막으로 명월의 얼굴로 시선을 고정했다.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그럴 만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게 아니냐.”

“맨정신으로 제대로 말해야 할 거다. 중간에 거짓말을 하거나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그러니 지금 이 상태로 바로 말을 시작해라.”

고압적인 명월의 태도에 백호의 눈썹이 올라간다. 갑자기 이런 식으로 구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역정을 내며 몸을 일으킬 수도 있었지만, 명월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되었다면서 일어서려 한다면 다리를 붙잡아서 다시 앉힐 것이고, 화제를 돌리려 한다면 얼굴을 붙잡고 자신을 보게 해서 바른 말이 나오게 할 터였다.

명월은 바로 오른손에 끼고 있는 가죽 장갑을 벗어선 그걸 백호 쪽으로 내밀었다. 활짝 펴진 손바닥이 백호의 눈앞으로 다가온다. 그걸 본 백호는 한쪽 눈썹을 올릴 뿐, 말이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던 명월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어디로 들어갈 수 있는 통행증이냐.”

“귀문(鬼門)으로 가는 통행증이다.”

바로 나오는 대답에 명월의 어깨로 힘이 들어간다.

귀문이,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의미가 맞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백호 얼굴 앞으로 뻗어진 제 손을 바라봤다.

갑자기 손바닥이 간지럽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면서 손을 움켜쥐었다가 펼친 명월은 재차 물었다.

“이 손바닥을 통해서 귀신들이 드나든다는 것이냐.”

“그런 짓이 정말로 벌어진다면 네놈의 손이 멀쩡할 수 있겠느냐.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멍청한 소리 운운하는 순간 명월의 표정이 굳었다.

“그렇다면 알아들을 수 있게 제대로 설명을 해라. 멍청하다 뭐라 지껄이지 말고.”

지지 않고 따지듯 묻는 명월을 두고 백호의 표정이 점점 굳어진다. 인상을 쓰나 싶던 그는 이윽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재차 팔짱을 끼었다. “그러니까―.” 하고 입을 열다가 다시 다문 그의 얼굴이 조금 더 험악하게 변한다.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투로 있던 그는 으음, 하고 신음을 흘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독각귀라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나?”

“알고 있다.”

인간과 가장 흡사한 외관을 지닌 존재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것들을 봐 온 명월이나, 독각귀를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때문에 이런 식으로 듣게 될 줄은 몰랐던 명월은 절로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원래 그놈들은 인간들이 사는 땅으로는 잘 내려오지 않아. 귀문 안쪽에 살면서 조용히 지내다가 귀물들이 도를 넘어선다 싶으면 간간이 밖으로 나와서 정리를 하는 식이지. 기본적으로 놈들은 나보다 훨씬 더 인간들에 관심이 없는 놈들이지. 머리는 더럽게 딱딱하고 고지식해서 저들끼리 정한 틀에 맞춰서만 살아가는 답답한 놈들이야.”

“…….”

“그런 놈들 중에서도 간혹 별난 종자가 튀어나오기 마련이지. 그런 놈들은 인간들에게 관심이 많고 그들의 생활에 호기심이 많아. 그런 식으로 몇몇 이들과 접촉을 한 일로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 거리가 인간들 사이에 퍼지기도 하고 말이지. 그러는 중 대표적인 일이 이런 거지. 인간과 사랑에 빠져서, 아이가 생기게 되는 거―.”

“내게 독각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거냐.”

백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명월이 치고 들어온다.

성급하다 할 수 있으나 또 그만큼 명월이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반증이기에 백호는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누구냐.”

“너도 전에 만난 적이 있을 거다.”

그 순간 떠오르는 건, 검은 가면을 쓴 사내였다.

어렸을 때 그가 나타나 묘한 말을 남겼다. 자신을 대함에 있어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드는 존재였다.

그는 분명히 자신을 알고 있었지만, 명월은 그자를 몰랐다. 하지만 그는 잊히지 않는 존재였다. 이상할 정도로 머릿속에 박혀 있었던 그 존재의 정체가 설마하니…….

믿을 수 없는 진실에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그자가 내 아버지라는 거냐.”

“그래.”

“그러면 나와 살던 그는―.”

“그가 널 낳았겠지.”

“……!”

짧은 순간 명월의 머릿속이 갑자기 꼬여 버렸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살았던 그는 사내였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생각했고, 그 믿음이 흐트러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그가 자신을 낳았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실이었기에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담담히 말했다.

“독각귀들은 사내의 몸에 아이의 방을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래서 네가 태어난 거지.”

백호는 입을 다물었고, 명월은 오랫동안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지금 그가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 일부러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닐까 싶었으나, 아니었다. 지금 그는 온전한 진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그런 게 느껴졌던 명월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갑작스럽게 목이 탄다. 알 수 없는 갈증을 느끼며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손을 들어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제야 간신히 자신에 대한 말을 들을 수 있게 되었는데 여기서 막혀 있을 순 없었다.

그래서 명월은 지금 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은 지워 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리고 그것에 대해서 물었다.

“나를 만든 그 독각귀하고 넌 어떤 사이인 거냐.”

“별로 좋은 사이는 아니다. 이 몸이 유일하게 도움을 받은 놈이었지. 그래서 이런 성가신 일에 얽히게 된 거고 말이야.”

거기까지 말하고 난 후 백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명월처럼 머리에 손을 올리곤 세게 긁적거리던 그는 혀를 차면서 투덜댔다.

“정말 성가시다니까.”

불만이 가득 묻어나는 불평을 들으면서 명월은 눈을 내리떴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힘든 사실에 대해선 일단 넘어가자 싶지만 그리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낳은 존재가 달리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곁에 있었던 그란 말인가.

사내인 그가, 자신을 낳은 존재라고? 그렇다면 그는 아버지가 아니라―.

명월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날 낳았단 말인가. 사내가 날 낳았다고…….”

“네놈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상식은 전부 다 인간들이 만들어 낸 거다.”

명월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툭 치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은 병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본 백호는 혀를 찼다.

“그런 건 네놈하고 맞지 않아. 그러니 다 지워내 버려라. 네놈은 인간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듣는다. 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란 없어. 실제로 넌 독각귀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다. 난 그걸 반푼이라고 부르지만, 다른 쪽에선 또 다르게 부르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용어 설명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말해 주기로 한 이상, 짧고 간결하게 끝낼 요량으로 백호는 말을 이어 나갔다.

“독각귀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해서 전부 다 네놈처럼 되는 건 아니야. 일부는 정말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도 하고, 일부는 인간의 형태로도 남지 못해서 숨어 지내는 경우가 있지. 그리고 아주 드물게 몇은 귀문 안으로 들어가 살지만, 독각귀로 인정받지 못해. 네가 인간들 사이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것처럼 그놈들도 거기서 겉돌게 되는 인생이지. 피곤하긴 피차일반일 거다. 그런 식으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하나씩 다른 점을 지니고 있고, 너처럼 문을 손에 쥐고 태어나는 건 무척 드물지. 드문 건 좋은 게 아니야. 어떤 식으로든지 이런저런 성가신 일이 생기게 되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봐.”

“전처럼 되지도 않은 귀물들이 달라붙어서 네 손을 이용해 억지로 귀문으로 들어가려는 거지. 그 안쪽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으면 조금 더 강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들 착각하는 거야. 그런 놈들이 아예 없었던 게 아니라서, 놈들이 하려는 짓거리가 얼마나 허황되고 힘든 일인지를 깨닫게 해 줄 수가 없지. 친절하게 설명하려 해도 귀담아 듣지 않기도 하고 말이지.”

백호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래 봤자 벽이 있어 더 고개를 물리지 못한 그는 목을 뻣뻣하게 세운 채로 눈만 내리떠 명월을 바라봤다.

“귀물 중에서도 네 손에 반응하는 놈이 있고, 아닌 쪽도 있었지.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놈들도 더러 있었을 테고. 그건 전적으로 그놈들이 지닌 힘의 크고 작음에 따라서 달라지는 반응이야.”

“…….”

“힘이 있는 놈들은 귀문에 들어가서 한자리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닌 놈들은 오히려 귀문으로 들어가게 되면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거지. 정말 허접한 것들은 문양만 봐도 기가 질려서 개처럼 덜덜 떨 테고 말이야. 그런 놈들만 있으면 신경 쓸 게 없지만, 아닌 놈들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거다. 괜한 일에 개입하지 말라는 건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야.”

“단순히 그 이유 때문에 이 문양이 좋지 않은 거라고 하는 거냐.”

질문을 받은 백호의 눈썹이 위로 올라간다.

그 미묘한 반응을 놓치지 않으려 그 얼굴을 주시한 채로 명월은 물었다.

“다른 게 또 있을 거 아니야.”

“있지. 반푼이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튀지만, 그건 독각귀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야. 개중에는 정말 특수하게 강한 힘을 지닌 놈들이 나타나기도 했지. 존재 자체가 인정받을 수 없는 게 힘까지 세면 어떨 것 같으냐.”

“견제를 받겠지.”

“그렇지. 그래서 오지랖 넓은 몇몇 독각귀들 중에는 너 같은 놈들만 노려서 사냥하려는 잡것들이 더러 있어. 물론 함부로 그런 짓을 해선 안 되는 거기 때문에 알아서들 주의하지만, 개중에는 유난히 튀는 놈들이 있기 마련이지. 너 같은 놈이 독각귀들 사이에서도 있단 말이야.”

은근슬쩍 걸고 넘어지면서 빈정거리는 말에도 명월은 반응이 없었다.

차분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그를 자극하는 말을 던졌다.

“귀물은 아무것도 아니야. 독각귀가 얼마나 독한 놈들인지 알기나 하냐? 그놈들은 불과 물을 다스리고 바람을 움직이지. 눈을 깜박이는 것만으로도 네놈의 작은 머리통이 날아갈 거다.”

“할 수 있다면 해 보라고 해. 내게 해를 가하려 한다면, 나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진 않을 테니까.”

“…….”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한 명월은 입을 다물었다.

허세를 부리는 걸로도 여겨질 수 있는 답변이었지만, 굳은 얼굴을 한 명월에게서 진심이 느껴졌다. 지금 단순히 농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녀석,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그는 재차 속을 떠보듯 물었다.

“정말로 그들이 두렵지 않은 거냐.”

“두렵지 않아. 네가 있으니까.”

“……뭐라고?”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기 때문에 백호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처음에는 어이없어 하다가 잠시 멍하니 있나 싶더니, 곧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잡힌다.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는 명월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지금 대체 뭔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내가 죽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부탁을 받았을 테니까.”

차분한 대꾸에 백호의 입가가 씰룩인다. 여전히 화가 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로 노려보는 그를 두고 명월은 입을 다물었다. 응시하는 명월의 눈동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눈빛에 투영되는 제 얼굴을 본 백호는 조금 더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부탁을 받았어도 내가 곤란해지는 일은 사양이다. 아니다 싶으면 발을 뺄 거야. 그게 당연한 거 아니냐.”

“그럼 네놈은 독각귀보다 한 수 아래라는 거로군.”

그 순간 다른 의미로 백호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독각귀 놈들은 내 상대가 될 수 없어.”

“그런 거라면 내 곁에서 끝까지 날 지켜야지.”

하는 말과 다르게 명월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 깔린 미묘한 억양에서 달리 느껴지는 게 있었던 백호는 숨죽인 채로 명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꺼지라고, 사라지라고,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도 네놈은 계속 곁에 붙어 있었잖아.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면 되겠네.”

“…….”

입을 다문 명월은 어딘가 초월한 얼굴이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지그시 바라보는 명월을 앞에 두고 백호도 그와 비슷한 얼굴로 있었다.

그러던 그는 손을 들어 호랑이 머리 안쪽으로 손을 넣어선 머리를 긁적였다. 검은색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다시 손을 내린 백호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잡힌다.

응시하는 눈동자 안쪽에 서리는 기묘한 일렁거림을 읽어 낸 명월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 순간 앞으로 뻗어진 백호의 손이 명월의 멱살을 붙잡았다.

명월은 그대로 끌려갔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양손을 바닥에 디딘 명월은 백호의 코앞까지 끌어당겨졌다. 코가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고,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죽고 싶으냐.”

백호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나직한 으르렁거림을 들은 명월은 아니, 라고 대답했다.

“난 끝까지 살 거야.”

“…….”

질문과는 맞지 않는 대답이었지만, 지금 명월이 밝힌 의사는 전해졌다.

살 거라는 그 말에 담긴 여러 의미를 느낄 수 있었던 백호는 더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을 내밀자 백호가 쓰고 있는 호랑이 머리가 명월의 머리와 이마를 눌렀다. 딱딱한 게 피부를 눌러서 아픔이 느껴졌지만, 명월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래. 그 망할 독각귀 놈에게 도움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네놈을 보살펴 주고 있지만 그뿐이다. 네놈이 자꾸만 선을 넘는다면 나도 더는 어찌해 줄 수가 없어. 도움을 받은 건, 내 목숨을 걸 만큼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적당히 보살펴 주는 거라면 날 건드리지도 않았겠지. 너 같은 놈이 아무에게나 그 크기만 한 물건을 쑤셔 대진 않을 거다. 그런데 넌 벌써 나와 두 번이나 했어.”

“그건―.”

백호는 말을 하려다 말고 바로 입을 다문다.

두 번째는 명월이 먼저 유혹을 한 거지만, 첫 번째는……스스로도 왜 그랬던가 싶었던 일이었다.

그때부터 뭔가가 잘못되었던 거다. 그건 실수였으니 언급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 건가 싶지만, 백호는 입을 다물었다.

입을 꾸욱 다문 채로 다른 쪽을 바라보는 백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초조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명월은 입을 열었고, 그 사이로 흘러나온 숨이 백호에게 닿았다. 그 숨결에 섞인 달콤함에 이끌리듯 백호는 다시 명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서로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말자. 그래. 난 네놈하고 하는 게 나쁘진 않았어. 처음이라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확언을 하긴 어렵지만, 행위 자체는 아프긴 해도 기분 좋았지. 네 덕분에 칼에 찔려도 바로 나을 수 있었고, 죽지 않고 지금까지 이 질긴 명줄이 붙어 있단 말이야. 그걸 위해서 네놈이 내 몸 안에 그 뜨거운 걸 부었다곤 생각하지 않아. 전에 네놈의 피나 타액도 그런 효과가 있다고 했지. 넌, 날 안지 않아도 그에 준하는 효과를 낼 수 있었어. 그런데도 날 안은 건―.”

명월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든다. 조용하게 속삭이는 말을 계속 듣고 싶었다. 하지만 백호는 그걸 끊어 내곤 단호히 말했다.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네놈은 하찮은 인간이야.”

백호는 잡고 있던 명월의 옷자락을 놓으면서 그 몸을 세게 밀어냈다.

뒤로 밀려난 명월은 맨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백호를 바라봤다.

당겨지고 밀쳐지는 동안 앞섶은 벌어져서 하얀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옷 사이로 스며 들어오는 한기를 느끼며 명월은 몸을 움츠렸고, 백호는 잠시 그런 명월의 가슴팍에 시선을 줬다가 바로 눈동자를 돌렸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이걸로 다 된 거다.”

백호는 눈을 내리떠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명월을 노려봤다.

“난 벌써 네놈을 몇 번이나 살려 줬다. 그런데도 네놈은 그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고 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이고 있지. 더군다나 문제를 점점 더 키우고 말이야. 너하고 있으면 성가신 일에 얽히게 된다. 그런 성가신 일은 더는 사양이다.”

“…….”

“난 앞으로 지금껏 내가 해 왔던 대로만 살아갈 거다. 그러니 너도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여기저기 쑤시면서 잘 해 보란 말이다. 그렇게 하면 분명 네놈은 올해가 가기 전에 죽게 될 거다. 그것에 내 전 재산을 걸지―.”

주절주절 말이 길어진다. 지금은 이런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백호는 쯧, 하고 혀를 차고는 명월을 지나쳐 가 버리려 했다. 그때 위로 올라온 손이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명월의 손이 닿는 순간 기묘한 소름이 전신으로 퍼진다. 이를 악문 백호는 명월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 전에 명월이 세게 움켜쥐었다.

“닭의 목을 비틀어서 피를 뿌린 건 너지?”

백호의 바지를 잡은 명월의 손등으로 힘줄이 오른다. 그런 식으로 붙잡는다 해도 결국엔 옷이었다. 백호가 잡힌 옷을 뜯어내 버리고 떠나면 더는 그를 붙잡을 수 없을 거다.

그래도 상관없다.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얼굴. 동그랗고 옆으로 긴 눈동자와 그 사이에 박혀 있는 빛나는 눈동자. 그 속에 비치는 제 모습을 확인한 백호는 짧은 순간 머릿속이 뭉개지는 걸 느꼈다.

무언가에 사로잡혀서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하는 백호를 두고 명월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시집을 가야 하는 거냐.”

“…….”

명월이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않을 셈이었다. 놈이 하는 말은 다 잡소리였다.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차분한 눈길로 올려다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무언가가 제 심장 안쪽으로 파고들어가 비틀고 긁어 파내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명월을 발로 차 버리고 그걸로 모든 걸 훌훌 털어 내 버리자.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그 자리에 속박되어 버린 양,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백호의 얼굴이 서서히 험악하게 변한다.

이를 드러내면서 살벌하게 어금니를 갈던 그의 목을 타고 나직한 울림이 흘러나왔다.

“……이 요물 같은 놈.”

그 순간 명월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벌려진 입술을 타고 실소가 흘러나온다.

“탐이 나 욕심 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놈들은 몇이나 되었지. 난 그놈들이 원하는 게 무언지 알면서도 주지 않았어. 기분 더러웠으니까.”

잡고 있던 옷을 놓은 명월은 다리에 힘을 주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똑바로 일어선 명월은 백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다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백호의 손목에 명월의 손가락이 닿고, 그 순간 그곳의 근육이 뭉쳐지는 게 느껴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손바닥을 펼쳐서 백호의 손목을 꼬옥 붙잡고는 그걸 제 쪽으로 끌어당긴 명월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말라는 말은 취소하지. 앞으로는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라.”

백호의 미간에 서린 주름이 더 짙어지는 것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명월은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절대로 떨어지지 말고 곁에 있어.”

명월은 입을 다물었고, 방 안으로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응시해 오는 명월은, 사람이 변한 것 같았다.

아니.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다. 이 눈빛과 태도. 두 번째로 그를 품었을 때에도 이런 식으로 다가왔다.

노골적으로 유혹하고자 다가오는 그에게선 거부할 수 없는 짙은 색향이 풀풀 풍겨졌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독하게 달콤한 내음이 백호의 코끝을 찌른다. 그 향에 질식사할 것만 같았다. 단내가 머릿속으로 침투해 사고를 흐려지게 한다.

명월을 뿌리치고 그를 무시하고 방에서 나가자고 결심했건만 지금은 한 발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건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무슨 생각인 거냐.”

묻는 말에 명월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명월은 백호 앞으로 조금 더 접근했다.

“몇 번이나 죽었다가 살아나니 사람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을 수가 있나.”

나직하게 속삭이는 말은 백호의 귀 바로 아래에서 울렸다. 그 속삭임을 들으면서 백호는 눈을 내리떴다.

명월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당장 끌어안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백호는 명월을 끌어안았고, 한 손으로 그의 턱을 잡아 위로 올렸다. 명월의 얼굴과 그의 입술을 확인하자 더는 망설일 게 없었다.

바로 입술을 겹쳐 오는 백호의 행동에 명월은 눈을 감으면서 그의 등 뒤로 팔을 올리곤 세게 끌어당겼다.

* * *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그냥 혼자서 혼란스러운 상태로 계속 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자기 이놈 저놈이 나타나더니 주변을 어지럽히고 알 수 없는 소리나 지껄여 댔다.

자신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엔 신경도 안 쓰고 그냥 제 할 말만을 지껄여 댄다. 그것들을 토대로 정리하고 받아들이는 건 온전히 자신이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아버지라 믿고 있었던 존재가 정말은 자신을 낳아 준 이고, 친부는 독각귀라고 한다. 인간과 독각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모두가 특별한 힘을 지니고 태어나는 건 아니라 하는데 자신은 왜 이렇게 된 건가 싶었다.

재수 없게도 힘이 있는 쪽으로 태어나게 되었고 자신의 오른손에 있는 문양은 귀문으로 연결이 되는 문이라고 한다.

대부분은 그 문양을 기피하는 것 같지만, 개중에 저가 잘났다는 착각에 빠진 놈들은 이 문을 통해서 귀문으로 들어가길 원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오른손이 필요한 거다.

문제는 놈들이 문을 통과하려 할 때, 자신의 오른손은 어떻게 되느냐는 거다. 문이라는 건 지나쳐야 하는 건데 그 망할 귀물들이 자신의 손바닥 안쪽으로 드나드는 걸까. 아니면 손목만 뚝 잘라서 저들 좋을 대로 사용해 먹는 건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 다 기분은 더러울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오른손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걸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갈 때 이 손을 감추었던 걸까. 감추기만 하는 것으로 자신이 인간들 사이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버리는 것으로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머리끝까지 저릿한 감각이 타고 올라왔다. 엎드린 상태로 있던 명월은 뱃속을 그득히 채우고도 부족해선 목 끝까지 뚫고 나올 것 같은, 제 몸에 박힌 성기를 느끼곤 입을 다물었다. 참아 보려 하지만, 앙다문 입술 안쪽으로 목 졸린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 신음을 들은 걸까. 등 뒤에 달라붙어 있던 놈이 아래로 고개를 숙여선 명월의 귀를 깨물었다.

“여유롭군. 이러는 동안에도 다른 생각을 하고 말이지.”

가쁜 호흡을 애써 감추며 빈정거리는 말에 명월은 눈을 깜박였다.

얼굴을 타고 흘러나온 땀이 이불 위로 떨어진다. 마른침을 삼킨 명월은 재차 어금니를 악물곤 이불을 양손으로 세게 움켜쥐었다.

연결이 되어 있는 곳으로 느리게 성기가 출입하는 게 느껴졌다. 마치 일부러 그러는 양 명월의 내벽을 가르고 끝까지 파고든 성기를 돌리면서 백호는 명월의 귀를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곤 그 안쪽으로 혀를 밀어 넣자 질척한 느낌에 명월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전에 그걸로 네놈은 당분간 괜찮은 상태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거냐. 그저 단순히 남자에게 뒤가 뚫리고 싶었던 거냐. 그런 거라면 굳이 내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던 거 아니냐. 응?”

물으면서 재차 성기를 깊이 밀어 넣는다. 밀착이 된 엉덩이에 제 사타구니를 더 밀어붙이자 명월의 등이 파르르, 떨린다. 틈도 없을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는데도 부족하다는 양 밀어붙이자 그게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백호는 손을 내려선 명월의 가슴을 건드렸다. 손가락이 유두에 닿는 순간 명월이 마른 숨을 내뱉는다. 어깨를 움츠리면서 피하려는 미약한 움직임에 백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먼저 유혹한 주제에 종종 이런 식으로 몸을 사리려는 반응이라니.

요구해서 해 주는 건데 오히려 자신이 억지로 탐하는 것 같아서 언짢은 기분이 들었던 백호는 다시 명월의 귀를 깨물었다. 피하려는 명월의 몸을 뒤에서부터 끌어안고는 양손으로 명월의 가슴을 쥐고 주물렀다. 그러곤 손가락으로 유두를 잡아 세게 비틀자 재차 명월이 막힌 신음을 토해 냈다.

여긴 숲속도 아니고, 아무도 없는 작업실도 아니었다. 그래서 명월은 유난히 소리를 참으려 들었다. 처음에는 얼마나 참나 싶어서 거칠게 몰아붙였지만, 그러는 내내 명월은 이를 악문 채로 필사적으로 소리를 억눌렀다. 거기서 더 세게 하지 못한 건 명월이 소리를 참다가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살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그걸 보곤 움찔한 백호는 적당한 삽입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재차 생각한다. 왜 자신이 이렇게나 이놈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건가, 하고 말이다.

눈을 내리뜨자 엎드린 채로 있는 명월이 보인다.

얼굴을 보고 싶어. 문득 든 생각에 백호는 명월의 어깨를 잡아선 그를 똑바로 눕혔다. 아래가 연결된 채로 몸이 돌려지자, 명월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마른 숨을 토해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똑바로 누운 명월의 위에 올라탄 백호는 반쯤 빠져나온 제 성기를 재차 끝까지 밀어 넣었다.

“아―.”

질퍽하게 젖은 내벽을 가르며 끝까지 성기가 박히는 순간 명월의 입술을 타고 헐떡거림이 흘러나온다. 흐느끼듯 가늘게 떨리는 소리가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백호는 녹진하게 풀어진 그곳에 제 성기를 뿌리 끝까지 밀어 넣은 채로 허리를 돌렸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성기를 끊어 낼 것처럼 물어 주던 내벽의 살이 젖은 소리를 내면서 난잡하게 군다. 거침없이 예민한 살을 찔러 주자 명월은 참지 못하고 허리를 떨면서 몇 번이나 달아오른 신음을 토해 냈다.

“몇 번이나 했더니 뒤가 아주 젖어서 난리로군.”

동시에 찰싹, 하고 엉덩이로 매서운 손길이 떨어진다.

움찔하고 주름이 죄어들면서 그 안쪽으로 재차 찌걱, 하고 젖은 소리가 울린다. 동시에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백호를 노려봤다.

이런 방식으로 저에게 굴욕감을 안겨주는 백호를 노려봤지만, 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너무 좁잖아. 난 아직 한참이나 더 남았어.”

그러곤 더 세게 허리를 놀렸다.

툭툭, 가볍게 추어올리는 것 같지만 양물의 크기가 워낙에 거대하다 보니 그가 움직일 때마다 명월의 엉덩이가 움찔거리면서 떨린다.

파고들 때마다 헛숨을 삼키면서 허리를 들썩이는, 불긋하게 물이 든 명월의 얼굴이 어여뻤다.

몇 번이나 한 덕분에 아래가 흐물거리긴 했지만, 모욕적인 말을 할 정도로 풀어진 건 아니었다. 아직도 제 성기를 꽉꽉 물어줄 만큼 죄임이 좋았다.

턱 끝까지 찬 숨을 가볍게 토해 내며 백호는 재차 명월의 안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성기가 부드러운 살에 틈도 없을 만큼 감싸이는 감각에, 백호는 눈을 내려뜨며 나직한 한숨을 토해 냈다.

기가 막히게 좋았다. 그래서 이 녀석하고 하는 동안에는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물론, 정말로 정신줄을 놓고 게걸스럽게 이 몸을 탐하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백호는 제 아래에서 흔들리며 필사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무는 명월을 내려다봤다.

꽤나 힘겨워 보였다.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게 하고 싶다는 가학적인 욕구가 얼굴을 든다. 이대로 엎드리게 한 채로 뒤로 쑤셔 넣으면 더는 소리를 참을 수도 없을 터였다.

아직도 명월은 방 바깥으로 정사의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참으려 하면 할수록, 일부러 더 짓궂게 굴고 싶다는 걸 모르는 건가 싶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명월의 고운 얼굴을 살피던 백호는 뒤로 허리를 빼내곤 강하게 성기를 박아 넣었다.

“……!!”

그 순간 명월의 눈이 크게 떠지면서 허리가 휘었다. 참지 못하고 명월의 성기가 묽은 정액을 힘겹게 토해 낸다.

명월의 일그러진 얼굴을 확인함과 동시에 백호는 그의 턱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사정했군.”

내뱉는 뜨거운 숨이 닿을 정도로 밀착된 상태로 속삭이자, 사정의 여운에 몸을 떨던 명월이 바로 눈을 치떴다.

눈물에 촉촉이 젖어 들긴 했지만 아직 이성을 잃은 상태가 아니었던 명월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곤 천천히 입술을 벌리자 백호의 시선이 그리로 옮겨 갔다.

내내 필사적으로 깨물고 있었기 때문일까. 유난히 붉어 보이는 입술이 탐스럽다. 이대로 고개를 숙여서 세게 빨아들이고 싶다 생각하는 순간, 명월이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남자하고 하는 건 네가 처음이지만, 원래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거냐.”

명월의 입술에 집중하던 백호의 한쪽 눈썹이 서서히 위로 올라간다.

“그냥 입 닥치고 하기만 하면 안 되는 거냐. 네놈 때문에 정신 사납다.”

중간에 헐떡거리지 않고 끝까지 말한 후 명월은 백호를 노려봤다. 막 사정을 하고 난 후라 색기를 풀풀 풍기면서 노려봐 봤자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았다.

명월의 말이 기분 나빴던 백호는 끝까지 박혀 있던 제 성기를 갑자기 추어올렸다.

들썩하고 몸이 흔들린 명월이 짧은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뒤틀자 일부러 위로 체중을 실었다. 그러곤 명월의 허리에 한 팔을 감으면서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내가 입 다물고 있으면 열심히 머리를 굴리면서 생각을 정리하려고?”

이 작은 머리통으로 어디부터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상한 놈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자신은 이 녀석을 품고 있는지, 그것도 모를 일이었다.

한바탕 하고 난 후라 그제야 머리가 차갑게 식는 걸지도 모르지. 그런 것도 이상하다면서 백호는 혀를 찼다.

“이 짓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건, 네놈밖에 없을 거다.”

“다른 놈 물건이 더 좋았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보단 더 낫지 않나?”

“…….”

심드렁하게 중얼거리는 말투는 닳고 닳은 창부가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서 흐트러진 모습이라 그것이 색스럽게 보이다가도 묘할 정도로 청결한 느낌이 드는 명월이었다. 그런 얼굴로 저런 말을 태연히 하니 순간적으로 백호는 말문이 막혔다.

모든 시작은 본인이 먼저 했다는 걸 망각한 듯,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보는 그를 두고 명월은 다리를 들었다.

백호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익숙한 척을 하려 해도 알게 모르게 서투른 몸짓이지만, 동시에 그런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명월은 백호의 어깨에 양손을 올리곤 그를 올려다봤다.

“―움직여.”

입으로만 나불대지 말고.

입을 다문 명월은 눈빛으로 그리 말했다.

* * *

몸이 마구 흔들리는 동안 명월의 눈빛이 번쩍거리면서 빛이 났다. 몸 안쪽의 예민한 곳을 찔러 대는 성급하고도 거친 몸놀림에 몸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퍼지는 강렬한 감각에 몸이 떨린다. 계속해서 찔러 대는 거친 몸짓에 명월은 백호의 등에 손톱을 세워 세게 박으면서 헐떡거렸다.

어느새 다리는 풀어져선 활짝 열려 있었다. 몽둥이처럼 두꺼운 게 안쪽을 퍽퍽 치대자 명월의 몸이 들썩거린다. 힘겹게 벌려진 허벅지가 경련을 일으켰다. 몇 번이고 해서 익숙해질 만도 하지만, 그래도 힘겨웠다.

무지막지한 힘으로 밀고 들어오자 허리가 파르르 떨리고 입을 타고 막힌 신음이 터져 나온다. 어떻게든 큰소리가 나지 않도록 참아 보지만, 그런 노력을 비웃듯이 바로 백호가 고개를 숙여선 아플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끝까지 빼낸 성기를 한 번에 깊이 박아 넣는 순간 명월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전립선 안쪽을 자극하는 성기가 주는 묵직한 쾌감에 허우적거리던 명월은 필사적으로 백호에게 매달렸다.

이 세상에 그밖에 없다는 양, 절박하리만치 안겨 오는 명월을 두고 외면할 수 없었던 백호도 양팔을 벌렸다.

틈도 없을 만큼 명월을 세게 끌어안은 채로 백호는 몇 번이고 탐욕스럽게 아래에 깔린 하얗고 예쁜 몸을 탐했다.

* * *

바깥으로 손을 내밀자 그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가늘어져 있었다.

비를 맞아서 금방 축축해진 손을 움켜쥔 호접화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고개를 들었다.

검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곰방대를 들어 끝에 입술을 문다. 그러곤 깊이 연기를 빨아들이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자희가 들어왔다.

“형님. 춥지 않으세요? 화로를 준비해 왔습니다.”

그리 말하며 호접화 옆에 앉은 자희는 화로를 그들 사이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쇠막대로 화로 안쪽을 건드리자 금방 벌겋게 달구어진 숯이 모습을 드러낸다. 벌겋게 변해 있는 걸 확인한 자희는 웃었다.

“여기다가 고구마나 감자를 넣어서 먹으면 맛있겠네요.”

가볍게 꺼내 본 말인데 정말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원래 이런 데다 넣어서 해 먹는 게 제일 맛있는 법인데 말이다.

정말로 고구마를 가져와야 하나.

입맛을 다시며 그런 생각을 하던 자희는 얼굴에 닿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곰방대를 물고 앉아 있는 호접화를 본 자희는 감탄한 얼굴이 되었다.

“……형님은 어쩜 그리도 고우세요.”

얼굴을 붉히면서 하는 말에 호접화의 눈이 가늘게 휘어진다.

“내가 곱더냐.”

“그럼요. 형님 같은 분이시라면 사내뿐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정신을 못 차릴 겁니다.”

경국지색이라 불릴 만한 미모였다. 실제로 그녀가 이런 좁은 반양이 아닌 도성으로 나갔다면 평생을 떵떵거리고 살 수 있었을 거다.

물론 보통 여인이 아니고 기녀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풍파를 겪을 수도 있겠지만,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여기서도 사는 게 힘들긴 마찬가지이니, 보다 좋은 쪽을 찾아가서 편하게 다리 뻗고 지냈으면 싶은 게 자희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막대로 화로 안의 숯을 건드리면서 자희가 중얼거렸다.

“형님은 여기에서 생활하시는 게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이상한 걸 묻는 건 아니고, 형님은 언제든지 여길 떠나실 수도 있지 않으십니까. 실제로 예전에 바깥에서 들어오신 분이 함께 떠나자고 말을 꺼낸 적도 있었고……. 그때 같이 나가시는 편이 더 나으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남겨진 저희들은 무척 쓸쓸하겠지만요.”

자신들이 쓸쓸하다고 해서 호접화를 붙잡고 떠나지 못하도록 하는 건 안 될 말이었다.

그녀가 오고 나서부터 이곳 호란의 명성이 높아진 거였다. 전에는 건달보다 못한 짓을 했던 사람들도 많이 사라졌고, 양반이나 돈 많은 이들이 출입하게 됨에 따라서 기녀들의 삶도 한결 나아졌다.

호접화가 길을 열어 주었으니 그걸 유지하고 지켜 내는 건 남은 이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고작 그 정도 일도 못해서야 호접화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자희는 눈에 힘을 주고는 호접화를 바라봤다.

“형님. 이번에는 꼭 사또를 잡으십시오.”

“그 무슨 뜬금없는 말이더냐.”

“뜬금없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만한 사내가 어디에 있습니까. 도성에선 지체 높은 가문의 아들인데다 거들먹거리지 않고, 저희 같은 것들도 잘 챙겨 주지 않으십니까. 첩으로밖에 못 들어가겠지만, 그렇다고 야박하게 구실 분이 아닙니다. 분명 평생 형님을 아끼고 귀애해 주시겠지요. 그런 괜찮은 사내가 나타났는데 보고만 있을 순 없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자희는 절박한 얼굴이었다. 제 일이 아닌데도 필사적인 그 얼굴을 바라보던 호접화는 재차 곰방대 끝에 입을 대고는 깊이 연기를 빨아들였다. 입을 떼자 그 사이로 가느다란 연기가 뱉어진다.

손으로 입을 막고 연신 기침을 하던 자희는 호접화가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넘어갈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도 진지했다.

어떻게든 사또와 그녀를 연결해 줘야 할 것 같은 사명감을 느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웃고 있는 호접화와 눈이 마주쳤다.

사람을 홀리는 특유의 미소를 머금은 채로 바라보는 호접화를 본 자희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그러다가 그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님은 제 앞가림을 알아서 잘하시는 분이시지요. 제가 주제도 모르고 너무 앞서 나간 모양입니다.”

중간에 자신이 암만 난리를 친다 해도 호접화와 사또 명월의 마음이 맞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는 노릇이었다. 괜한 말을 해서 호접화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했다면서 안색을 굳히는 자희를 두고 호접화는 재차 웃었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게 전부 다 저를 걱정하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기인한다는 걸 알기에 그녀가 얄밉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넌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냐.”

호접화의 물음에 자희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는 동안 한 번도 저런 걸 물은 적이 없던 호접화였다. 그런데 지금은 무슨 바람이 불어 이리 묻는 건가 싶었던 자희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온화한 미소를 담은 채로 응시하는 호접화를 보고 자희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집안에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도중에 설상가상으로 어린 동생이 죽고, 어머니도 그 충격으로 앓아눕다가 덧없이 가시게 되었지요. 저와 아버지, 그렇게 단둘이 남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매일 술을 드셨습니다.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할 유일한 사내가 모든 것에서 손을 놓아 버리니 삶은 비참해질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결국 제가 이리로 오게 된 겁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배를 곯지 않고 따뜻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울 수 있게 되었으니 전 만족합니다.”

최대한 감정을 죽인 채로 자희는 담담하게 말했다. 평소 명랑하고 밝은 성격이었기에 이리도 차분하게 굴면 그게 더 안되어 보인다는 걸 모르는 그녀였다.

그렇게 제 말을 꺼내고 난 후 자희는 고개를 들곤 활짝 웃었다.

“널 살리기 위해서 네 아비가 이리로 넣은 것이더냐.”

“……딸을 팔아먹었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욕을 많이 드시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전 살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지요. 아버지는 그리될 걸 알고 절 이곳으로 보낸 걸 겁니다. 본인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으니, 저라도 살기를 바란 거지요.”

이미 오래전의 일인지라 이야기를 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꾹 참으면서 자희는 애써 웃어 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혼자 집 안에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어두운 밤에 홀로 앉아 있으면 문밖으로 검은 그림자가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서 아버지냐, 하고 물으면 대답 없이 사라지곤 했지요.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너무 무서워져서 아버지에게도 말을 꺼냈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무섭도록 굳은 얼굴이 잊히질 않습니다. 아마 그때 아버지는 절 기적에 이름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하신 걸지도 모릅니다.”

“…….”

“형님은 바깥에서 들어오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여긴 약간 흉흉한 소문이 도는 곳이랍니다. 그러니까, 바깥사람들에겐 미신이 되겠지만 여기 사람들은 중 몇은 그걸 정말로 믿어서 집안에 여자 하나만 살아남으면 그걸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뒷말을 흐리던 자희는 이내 뒷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정말로 제물이 된 사람을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냥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몇몇 늙은이들이 저를 보고 산속으로 버려야 한다고 하는 말을 들었을 뿐이지요. 그때에도 제 아비는 불처럼 화를 냈습니다만…….”

자희는 웃었다.

애써 과거를 회상해 보지만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계속 떠올리자니 마음이 너무나 아프다.

긴 한숨을 내쉰 자희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는 자희를 두고 호접화는 곰방대를 나무 받침 위에 올리고 손을 뻗었다. 그러곤 자희의 뺨에 손을 대고는 가볍게 토닥였다.

얼굴에 닿는 호접화의 손은 찼다. 너무도 차서 그녀의 손이 닿는 순간 자희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조심스레 눈동자를 들어 올려다보는 자희를 두고 호접화는 웃으며 손을 떨어뜨렸다. 처음 손에 닿았을 때에는 차다고만 느꼈는데 떨어지고 나니 아쉽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형님. 오늘따라 손이 차십니다.”

“이런 날이기 때문에 그런 모양이다.”

그리 말하곤 재차 곰방대를 입에 무는 호접화를 두고 자희가 손을 뻗었다.

“그만 피우십시오. 독한 걸 왜 그리도 피십니까. 건강에 좋지 않으십니다.”

팔을 잡아 내리려 하자 호접화가 고개를 돌렸다. 정면으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본 자희는 재차 감탄이 나왔다.

늘 보는 얼굴인데도 왜 볼 때마다 이렇게 놀라운지 모르겠다.

때로는 그녀가 자신과 같은 사람인지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 그만큼 완벽한 호접화를 바라보던 자희는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평소에도 궁금했지만, 쉽사리 꺼낼 수 없었던 질문을 조심스레 입에 담았다.

“그런데 형님은 어찌하다 이리로 오시게 되셨습니까. 원래는……지체 높은 가문의 여식이 아니셨습니까?”

“아직도 내가 양반이었다는 말이 떠도는 것이더냐.”

“형님께서 아무 말씀도 안 해 주시니 궁금해서 몇 번 말을 하는 아이들이 있긴 해도 알아서 조심하고 있습니다. 호란에서 형님에 대한 말을 함부로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요.”

호접화는 이미 호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녀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혹여라도 그녀에 대해서 이상한 말을 하는 자들이 있으면 그들을 전부 관리하던 자희였다.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것에 대해선 걱정하지 말라는 양 바라보는 자희를 두고 호접화가 입을 열었다.

“옛날이야기를 들려줄까.”

“웬일이세요. 그런 거 하시는 분이 아니시잖아요. 들려주세요.”

모두에게 친절하지만 알게 모르게 벽이 존재하는 호접화였다. 그런 그녀가 먼저 이런 식으로 말해 주는 건 무척 드문 일이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그녀와의 친분을 두텁게 할 수도 있겠거니 싶었던 자희는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였다.

어린애 같은 얼굴로 바라보는 자희를 두고 호접화는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에 꽃처럼 어여쁘고 예쁜 소녀가 있었지. 그 소녀는 몸이 약했지만, 돌아가신 부모님들 덕분에 평생 동안 먹고살 만한 재산이 있었단다. 그리고 그 재산에 눈독을 들이는 사내가 여럿이었다. 그들은 소녀의 주변을 맴돌면서 환심을 사려 했지만, 소녀는 이미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 버린 상태였단다. 하지만 그런 소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존재가 있었는데 바로 소녀의 집안에서 일하는 소년이었다.”

“…….”

“그들은 어려서부터 함께였고,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었지. 처음에는 친구였지만, 나중에는 가족처럼 서로를 의지하게 되었고, 그 감정이 애틋하게 변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단다. 그들은 늘 함께였고, 서로에 대해 비밀이 없었지.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둘이서만 있다면 뭐든지 잘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단다.”

“…….”

“그러던 어느 날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게 되었단다. 소녀의 먼 친척이라는 자가 나타나 집안의 주인 행세를 하게 되었던 거지. 그자는 자신이 그 집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굴면서 재산을 처분하려 했고, 소녀는 그걸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단다. 소년은 도우려 했다가 흠씬 두들겨 맞았지. 그러다가 둘은 따로 떨어지게 되었고, 소녀는 억지로 시집을 가게 되었단다.”

이야기에 몰입된 자희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세상에, 라며 안타까워 했다.

“소년이 아닌 다른 사람과 혼인하게 되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소녀는 힘겹게 소년에게 연락을 취했단다. 그리고 그들은 소녀가 혼인을 하기 위해서 먼 길을 떠나는 때에 만나서 함께 도망치기로 했단다. 그리고 그날이 되었고……어찌 되었을 것 같으냐.”

시종 차분하게 이어지는 이야기에 자희는 푹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묻는 말에 대해서도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눈을 끔벅거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둘은 만나서 행복해졌을까. 그게 아니면 실패했을까. 다시 만나서 둘이 함께 도망쳤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런 식으로 마무리가 지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왜인지 잘 안 되었을 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자희는 멍하니 호접화를 올려다봤다.

안색을 굳힌 채로 바라보는 자희를 두고 호접화의 붉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비 오는 날 일부러 화로를 준비해 줘서 고맙구나.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쉬세요. 형님.”

호접화의 이야기는 온전히 끝난 게 아니었지만, 그녀는 지금 나가라 말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 앞에서 조금 더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말을 할 순 없었던 자희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하기 전에 뒤를 돌아봤을 때 호접화는 재차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몸에 안 좋은 것이니 그만 피라고 하고 싶지만, 그리 말하는 것도 전부 다 잔소리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런 걸로 그녀를 성가시게 굴고 싶진 않았던 자희는 일찍 주무시라고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마지막까지 걱정스러워서 한마디 해 주는 자희를 두고 호접화는 웃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곰방대를 뗀 후에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입술을 오므렸다. 꽃잎처럼 오므려진 입술을 타고 긴 연기가 토해져 나온다.

입을 다문 그녀는 조금 전 했던 말을 떠올렸다.

소년과 소녀는 다시 만나려 했지만, 만날 수 없었다.

소년은 절벽 아래로 던져졌고, 소녀는 신부 옷을 입은 채로 가마에 앉아서 사방에서 꽂히는 칼을 맞았다.

알 수 없는 곳에 가마를 둔 이들은 모두 도망쳤고, 소녀는 칼이 뚫고 지나간 제 몸을 타고 흐르는 피를 느끼면서 속으로 결심했다.

어떻게든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고.

나와 그를 이리 만든 모두를 죽여 없애 주겠다고.

자신이 당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과 아픔을 느끼게 해 주겠노라고―.

그리 마음을 먹었기에 아직도 이런 모습으로 살아남아 있는 거였다.

천천히 눈을 뜬 호접화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검은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던 그녀는 재차 하얀 연기를 뱉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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