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처마 끝에 맺혀 있던 빗물이 간혹 뭉쳐서 떨어질 때에는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그에 명월의 눈이 떠졌다.
반쯤 눈을 뜬 채로 멍하니 있던 명월은 온몸에서 올라오는 욱신거리는 통증에 눈을 감고는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보이는 백호의 얼굴을 확인하곤 주춤했다.
명월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린 그는 팔베개를 해 준 것도 부족해서 다른 팔로는 명월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기까지 했다.
백호의 품에 완전히 안긴 상태가 된 명월은 그의 단단한 팔 근육을 느끼면서 조금 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백호의 얼굴이 훨씬 더 잘 보였다.
완전히 지쳐 곯아떨어진 것마냥 입을 벌린 채로 색색 거리는 걸 보다가 그의 턱을 만져 봤다. 조금 더 올라가서 입술을 건드리자 입맛을 다시면서 인상을 쓴다.
자는 중에 누가 건드리는 건가 싶은 듯 더 세게 명월을 끌어안고 다리를 들어선 꼬기까지 한다. 이래서야 옴짝달싹을 못할 판이었다.
지금껏 다른 누구와 이런 식으로 얽힌 채로 잠에서 깨어난 적이 거의 없었기에 낯설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그걸 하고 난 후였기 때문에 몸이 나른하니 무거우면서 아프기도 했다. 방바닥이 뜨끈해서 조금 더 자도 괜찮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누군가 들어와 이런 모습을 보면 낭패라는 생각이 든 명월은 다시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 순간 백호가 더 세게 명월을 끌어안았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으로 끌어안는 것에 명월은 멈칫했다.
재차 백호의 얼굴을 봤을 때, 명월은 눈에 들어간 힘을 뺐다. 그러곤 앞으로 고개를 숙여선 백호의 가슴팍에 제 얼굴을 묻었다.
눈을 감자 살 냄새가 진득하게 난다.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사내의 살 냄새는 생각보다 짙고 농후한 맛이 있었다. 낯설지만 나쁘진 않았다. 이 녀석과 몸을 섞는 일이 반복되면서 점점 더 그 행위에 익숙해지는 것도 같았다.
특히 하면 할수록 좋아진다.
처음보단 두 번째가, 두 번째보다는 세 번째가 더 좋은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느끼는 게 과연 올바른 일일까. 그런 의문이 들자 명월은 눈을 뜨곤 잠자코 있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봐. 일어나.”
백호는 감이 좋은 자였다.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내면 알아서 눈을 뜰 거라고 생각했건만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저 고른 숨을 내쉬기만 하는 것에 명월이 재차 “이봐.” 하고 불렀고, 그 순간 백호가 고개를 숙여 왔다.
명월의 머리에 얼굴을 묻고는 킁킁, 거리다가 입을 크게 벌려선 머리를 깨물듯이 군다. 그것에 명월은 인상을 쓰면서 뒤로 고개를 피하듯 물렸고 백호는 아예 양팔과 다리로 명월을 꽁꽁 끌어안아 그가 움직일 수 없도록 했다.
지금 하는 짓만을 보면 정말 자는 건가도 싶었던 명월은 인상을 쓴 채로 그를 바라봤다. 한참을 보다가 백호의 팔을 세게 때렸다.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흠칫거리면서 몸을 떤 백호는 인상을 쓰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바로 명월과 시선이 부딪쳤지만,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여기가 어디고 왜 명월이 제 품에 안겨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양 가만히 있던 그는 명월이 한숨을 쉬는 순간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곧 아침이야. 그러니까 이만 떨어져.”
“……하아.”
무거운 한숨을 내쉰 후 백호는 제 양손이 명월이 움직일 수 없도록 꼭꼭 끌어안고 있는 걸 확인하곤 쯧, 하고 혀를 차면서 바로 일어났다. 본인이 원한 건 아니지만, 백호의 팔을 베고 있었던 명월은 갑자기 사라지는 그의 팔에 고개를 위로 들었다.
일단 이불 위에 앉은 백호는 가만히 있다가 오른쪽 팔로 손을 옮겼다. 그러곤 그곳을 주무르는데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잡힌다. 아픈 모양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계속 자신이 베고 있었다면 아프긴 정말 아플 거라며 명월도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바로 무언가가 배 안쪽에 머물러 있다가 바깥으로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기분 더러운 감각에 절로 안색이 굳어진다. 인상을 쓴 채로 눈을 내리뜨는 명월을 두고 백호가 혀를 찼다.
“왜 그렇게 인상을 쓰는 거냐.”
아침부터 보기 안 좋으니 인상을 펴라, 같은 식으로 말하고 싶었던 거겠지만, 백호는 바로 입을 다물곤 제 목에 손을 댔다. 목 안쪽이 칼칼하고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린다. 왜 이러나 싶었던 그는 두어 번 헛기침을 했고 명월은 근처에 떨어져 있던 옷을 주워 들었다. 그러곤 묵묵히 제 옷을 챙겨 입는 모습을 살피던 백호는 혀를 차면서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명월처럼 옷을 챙겨 입으려다가 팔이나 등이 따끔거리는 걸 느끼곤 왜 그러나 싶어 뒤로 손을 뻗었다.
손으로 어깨를 만지자 쓰라리다. 상처가 생긴 건가. 왜 생겼지. 차근차근 생각하다가 어제 명월이 매달리다가 손톱으로 어깨나 등을 몇 번이고 긁어 댔다는 걸 떠올렸다.
“…….”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간밤의 살색의 향연들이 눈앞을 덮쳐 온다.
백호는 바로 눈을 감고는 짧게 고개를 털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러다 재차 뒤를 돌아봤을 때 명월은 어느새 바지를 챙겨 입고는 저고리를 걸치고 있었다.
뒷모습만 보이니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뜨겁게 매달리던 녀석이 지금은 그런 적이 없다는 양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저런 게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처음 했을 땐 먼저 자리를 떴으니 알지 못하고, 두 번째 했을 때에도 이쪽을 보려 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백호는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지금 명월이 이쪽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건 단순히 부끄럽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그럴 정도로 귀염성이 있는 놈 같지는 않은데―.
거기까지 생각하던 백호의 손이 앞으로 움직인다. 명월의 팔을 붙잡고는 뒤로 끌어당기는 순간 명월의 몸도 옆으로 돌아갔다. 뒤를 돌아보는 명월의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 안에 섞인 당혹을 읽은 백호는 그 순간 묘한 설렘을 느꼈다. 그래서 그대로 명월을 붙잡아서 다시 이불 위로 쓰러뜨렸다.
이불 위에 눕혀진 명월은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채로 있다가, 안색을 굳히며 바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백호는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어깨를 잡아 세게 눌렀다. 백호 때문에 움직일 수 없게 된 명월은 그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화가 나 경직된 얼굴을 하고 있는 명월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백호는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하고 무얼 하고 싶은 거냐.”
그 순간 명월의 입술로 조금 더 힘이 들어간다. 입을 꾸욱 다문 채로 시선을 피하는 걸 보곤 백호는 가느다란 턱을 세게 붙잡았다.
“입 다물고 있지 말고 분명하게 말해 봐라. 어서.”
“다 끝난 후에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우습지 않은 짓은 하지 마.”
고개를 돌려서 백호의 손을 치워 낸 명월은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이불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그 전에 등 뒤로 달라붙은 백호의 손이 명월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너무도 당연한 듯 성기 쪽으로 손을 대려 하자 당황한 명월은 팔꿈치로 백호를 밀어냈다.
“그만두지 못해?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그래 봤자 보이는 건 너밖에 없지.”
빈정거리는 말에 명월의 표정이 확 굳어진다. 싫어하는 그 표정을 보고 나서야 백호의 표정이 느슨해진다.
“네가 인상을 쓰면 왜인지 더 짓궂은 짓을 하고 싶어진다.”
덩달아 기분도 좋아진 백호는 명월을 이불 위로 쓰러뜨렸다. 당장 그 몸 위에 올라타선 눈을 내리뜬 백호는 올려다보기만 하는 명월을 보곤 어느새 조용히 있게 되었다.
입을 다물고 명월을 내려다보던 백호의 미간으로 주름이 하나둘 잡히더니 이윽고 제길, 하고 중얼거린 그가 고개를 숙였다. 백호의 입술이 닿는 순간 파르르 떨리던 명월의 입술이 열린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로 백호는 세게 입술을 눌렀다.
명월의 입술을 쪼옥, 소리가 날 정도로 빨아들이고는 입을 벌려선 제 혀로 명월의 혀를 핥았다. 벌어진 사이로 파고들어가 조금 더 진하게 맛을 보려는데 그 순간 명월이 이를 악물곤 입술도 다물려 했다. 이제 와서 피하려 하는 게 가소롭다.
그냥 얼굴만 보는 거면 모르겠지만, 입술이 닿은 마당에 백호도 그냥 물러설 순 없었다. 그래서 재차 명월의 입술과 다물린 치열을 핥으면서 열라는 독촉 아닌 독촉을 했다. 그러자 명월이 손을 들어선 백호의 팔을 붙잡곤 고개를 돌리려 한다.
상관없다는 양 가만히 있던 백호는 명월의 뺨에도 입을 맞추었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뺨은 무척 부드러웠다. 간밤에 땀과 눈물로 흠뻑 절어 있어서 불쾌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입술만 누르는 건 뭔가 아쉽다. 그래서 백호는 혀를 내밀어 명월의 뺨을 핥아 댔다. 처음에는 얌전히 있던 명월도 계속해서 뺨과 턱을 핥아 대는 백호의 행동에 더 세게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만하라고 하잖아.”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긴 뭘 가만히 있으라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자신이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몇 번이나 하는 동안 명월의 몸에 대해서라면 대충은 알고 있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아직 그의 뺨을 진하게 맛보지 못했고, 그건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손가락이나 발가락, 그 외에 다리나 팔 등 모든 곳에 입을 대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단순히 혀로 핥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제맛을 볼 수 없었다.
그러면 어째야 하는 걸까. 깨물어 볼까. 세게 깨물어서 피가 배어 나오면 그 맛을 느긋하게 봐 볼까. 장난스럽게 한 생각이지만, 그 순간 배 안쪽이 뜨끈해진다.
정말로 그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백호는 눈을 내리떠선 명월의 얼굴을 주시했다. 차분해 보이는 것 같으나 정말은 위험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본 명월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진다. 이놈이 대체 왜 이러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만하고 떨어져.”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굳어 있었다. 백호의 눈빛과 태도를 보고 심상치 않음을 느끼긴 했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정말은 무서운 주제에 내색하지 않는다. 센 척을 하는 거라곤 해도, 이게 현명한 거였다. 만약 두려워하는 기색이 읽혔더라면 백호는 정말로 멈추지 않았을 거다.
그는 아래에 누워 있는 명월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폈다. 흐트러져서 이불에 펼쳐진 검은 머리카락과 하얀 얼굴. 검은 눈동자와 높은 콧날, 붉은 입술. 오른쪽 뺨 가운데에 찍힌 점이나 동그란 모양의 귀여운 귀. 그 아래에 있는 가슴과 날씬한 배, 그리고 쭉 뻗어진 팔과 다리도 알고 있었다.
예쁜 놈이었다. 지금은 목석처럼 딱딱한 모습으로 있지만, 다리를 벌리고 그 안으로 파고들려 하면 금방 태도가 변한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재차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참기로 했다. 참아야만 했다. 애가 닳아서 먼저 달려드는 그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욕구를 억누르는 자신이 이상하게 여겨졌지만, 그건 명월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이 녀석이 이상한 모습을 보였으니 자신도 그걸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결코 자신만의 문제가 아닐 거라며 백호는 천천히 명월에게서 떨어졌다.
그러나 다리 사이에 달린 자신의 성기는 반쯤 일어서 있었다. 그렇게나 했는데도 왜 아직도 이런 상태인지 모르겠다.
이상한 놈. 주인 망신시키지 말고 그냥 쭈그러들어 있으라면서 손으로 두드리고 싶지만,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등 뒤에서 명월이 부스럭거리면서 옷을 챙겨 입는 소리가 들렸다.
얌전하게 앉아서 다시 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정리하겠지. 그래 봤자 엉망이니까 일단은 몸을 씻어야 할 텐데―.
거기까지 생각하다 말고 백호는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예상대로 다소곳이 앉아서 한 손으로 머리를 모아서 한쪽 어깨로 쓸어내리는 명월을 보곤 멈칫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으자 하얀 목덜미가 환하게 보인다. 그 목 아래쪽에 생긴 이 자국을 본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잘난 듯이 떡하니 눈에 띄는 곳에 만들어 놨다. 하는 도중에는 머리에 열이 몰려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긴 했지만, 저런 곳에 흔적을 남기다니.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짓을 한 건가 싶어서 괜히 심각해진다.
자국을 보던 백호는 명월이 고개를 돌리려 하자 바로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쳐다본 적 없다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백호를 두고 명월이 말했다.
“너도 이만 돌아가라.”
그 순간 백호의 어깨로 힘이 들어간다. 그러곤 재차 뒤로 돌아간 백호의 눈매는 매섭게 변해 있었다.
“뻑치고 나니 모든 용무는 다 끝났단 말이냐. 너 정말로 고작 그런 용도로 날 이용한 거냐. 너 죽고 싶은 거냐―.”
이런 취급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하고 나서 마음이 변해서 발로 차거나 밀쳐 내거나 쫓아내는 건 전부 다 백호가 하던 일이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일 다 끝났으니 넌 이만 돌아가, 같은 소리를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이 저런 말을 듣다니. 이게 제대로 돌아가는 상황인가 싶어 혼란스럽기도 하고 말도 안 된다 여겨지는 백호였다. 짐짓 심각한 척 안색을 굳힌 채로 바라보는 백호를 두고 명월은 손을 들어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네가 아직도 여기에 있으면 내가 신경 쓰인다. 그러니 돌아가라. 가는 길에 네놈이 두고 간 그 고양이도 데리고 가고.”
“…….”
고양이를 운운하는 순간 백호의 눈썹이 꿈틀하고 흔들린다. 그냥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어야 했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바로 표정 수습에 들어간 백호는 모르는 척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 모습을 보자니 고양이는 여기다 두고 백호, 제 놈도 슬쩍 자리를 피할 모양새다. 지금까지 있는 동안 그 돼지 고양이가 이상한 짓을 했던 건 아니지만, 복운하고 지나치게 사이가 좋은 건 마음에 걸렸다.
지금은 나비라고 불러도 곁에 있어 주지, 언젠가 때가 되면 사라질 놈이었다. 그런 고양이 때문에 복운이 상처 받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러니 이번에 백호가 떠난다 하면 꼭 그편으로 보내 버릴 거다.
“너하고 한 거는―.”
이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입 다물고 조용히 있다가 녀석을 보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을 하면서도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냥 하고 싶었기 때문이야.”
고민하다가 나온 말이긴 했지만, 바로 후회가 고개를 든다. 왜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걸까.
“……뭐라고?”
한참 만에 들리는 백호의 반문에 명월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나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왕 하기로 한 거 마무리는 제대로 지어야 했다.
“할 때마다 일일이 이유를 붙일 필요가 어디에 있나. 그냥 너랑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명월은 입을 벌린 채로 있다가 이윽고 긴 한숨과 동시에 그 말을 흘려보냈다.
“혼자선 자고 싶지 않았다.”
“…….”
지금 백호가 어떤 표정을 한 채로 이쪽을 보고 있는 건지 알 순 없었다. 하지만 일부러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백호하고 하고 난 후 잠시 눈을 붙이긴 했지만, 오래 쉬진 못했다. 몸이 안 좋으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해도 통하지 않을 거다.
복운은 울면서 문 좀 열어 달라고 난리를 치겠지. 그 전에 옷차림이라도 제대로 하자면서 명월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한 쓸데없는 말 때문에 백호가 갑자기 손목을 잡아당겨서 다시금 이불 위로 눕히지는 않겠지. 만약에라도 정말 그런 짓을 하려 든다면 그때에는 주먹으로 턱을 날려 버릴 생각을 하고 있던 명월이지만, 백호는 가만히 있었다. 그래서 명월은 바로 방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문을 닫고 난 후 고개를 들자 빗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내리더니 아직도 그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명월은 마당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움찔했다. 대청 구석에 앉아 있는 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불편하게 몸을 웅크린 채로 앉아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건 복운이었다. 그가 왜 저기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대청 끝이라고 해도 저기에 있었으면 방 안에서 나는 소리가 다 들렸을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방금 와서 앉아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날이 밝으면 바로 기침했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던 거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인지라 명월은 살금살금 걸어가 복운의 옆에 서선 그를 내려다봤다.
머리를 벽에 기댄 복운은 입을 반쯤 벌린 모습으로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안도의 기색을 내비치던 명월이나, 동시에 복운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는 나비를 발견했다. 육중한 몸을 복운에게 의지한 나비는 편안하게 엎드려 있었다.
눈을 감고 있던 나비는 저에게 닿는 시선이 느껴진 건지 고개를 들고는 명월을 올려다봤다. 빤히 보던 나비가 입을 벌리고 야옹, 하는 소리를 내며 울었고 명월은 당장 손가락 하나를 들어 제 입술 앞에 댔다. 쉬―하고 조용히 내는 소리에 나비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잘못했다간 복운이 깰 수도 있었다. 지금 이런 모습을 보면 이상한 소리를 할 게 분명하니 일단은 자는 채로 있도록 하는 게 나았다. 다시 한번 더 나비에게 시끄러운 소리 내지 말라는 눈빛을 보내고 난 후, 명월은 대청에서 내려왔다.
재빠르게 움직이고 싶어도 몸 상태가 안 좋으니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몇 걸음 가지 못해서 바로 신음을 흘리며 허리 위쪽으로 손을 올리는 명월을 보던 나비가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 그러곤 복운의 허벅지 위에서 내려와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명월의 방 앞까지 걸어갔다.
앞발을 들어선 문을 두어 번 눌렀다가 떼자, 바로 문이 열리고 나비는 그 사이로 육중한 몸을 밀어 넣었다. 일단은 방 안에 들어가는 것에 성공한 나비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아직도 이불 한쪽에 앉아 있는 백호에게 다가갔다.
나체로 앉아 있는 그는 이불로 간신히 하반신만 가린 상태였다. 팔짱을 끼고 사뭇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저런 모습으로 사색이라니.
솔직히 좀 꼴사나운 모습인지라 나비는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근처에 멈춰 서선 그를 빤히 바라봤다.
묘한 시선이 감지된 걸지도 모른다.
백호는 고양이 쪽으로 시선을 던지곤 한쪽 눈썹을 올렸다.
“뭐냐.”
야옹―.
딱딱하게 묻는 소리에 나비는 바로 입을 벌리고 귀여운 소리를 냈다.
네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해서 그걸 나한테 화풀이하면 안 되지.
그런 억양으로 울고 난 후, 나비는 입을 다물곤 백호를 빤히 바라봤다. 그 동그랗고 맑은 눈망울을 본 백호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제길, 내가 지금 대체 뭘 하는 거야.”
중얼거린 백호는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다시금 이불 위에 눕자 축축하다.
이런저런 것들이 전부 다 묻어 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렇다면 찜찜하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데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여기서 조금 전까지 명월하고 뒹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백호는 눈을 감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제 가슴에 한 손을 올린 백호는 자신이 품었던 하얀 몸을 떠올렸다.
어디를 어떻게 건드려도 무척 잘 느끼는 몸이었다. 간혹 경련을 일으키면서 아래를 조일 때에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행위로 인해서 몸이 타들어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아지경에 빠져선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일에만 집중했다. 명월하고 할 때에는 언제나 그렇게 되는 것 같았다.
‘너랑 하고 싶었을 뿐이다.’
“……제기랄.”
중얼거린 백호는 팔을 들어 제 이마에 올렸다.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해도 명월의 뺨에는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그런 말을 하려는 게 부끄러운 거다. 명월이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아도 그의 몸이 다른 이들과의 접촉에 익숙하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사내는커녕 여자도 모르는 순결한 몸이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성급하게 굴었다.
“…….”
마지막 생각을 한 백호는 이마에 올린 팔을 내리곤 인상을 썼다.
가만 보자.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 부정을 한다고 해서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만 했다. 처음 명월을 품에 안으려 했을 때, 본인이 성급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저런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결국 그 모든 게 핑계였다.
그래. 핑계였지. 정말은 자신도 명월을 건드리고, 만지고, 안고 싶었을 뿐이었다. 지금껏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왜 이러는 건가 싶어 혼란스러워서 그냥 “넌 내 도움을 받았으니 대가를 치러라.”라는 식으로 굴었던 거다.
그런 유치한 짓거리를 해 왔다. 하지만 그게 명월에게 통하다 보니까 계속 그리되는 것뿐이었다. 처음부터 먹히질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아니. 아니야. 이런 식으로 자신이 한 짓을 남에게 전가하는 것처럼 최악인 게 없었다. 백호는 다시 일어나선 팔짱을 끼었다.
심각한 얼굴로 정면을 노려보던 백호는 이를 악물었다. 화가 단단히 난 사람처럼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그가 도출해 낸 결론은 하나였다.
유명월. 그 녀석에게 홀린 거다. 그래서 그놈이 이토록 신경 쓰이는 거지.
“……속았어.”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백호는 벌떡 일어나 양손을 움켜쥐었다.
“제길, 그 독각귀 놈에게 속은 거야―!”
분통을 터트리는 백호는 심각한 모습이었지만, 그를 올려다보는 나비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혼자서 생각하고, 지껄이고, 그러곤 화를 낸다. 백호는 쓸데없이 복잡하고 시끄러운 존재라며, 나비는 제 앞발을 들어 그곳을 혀로 핥았다.
* * *
이불 정리를 하기 위해서 방으로 들어선 복운은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안쪽에 이불이 널브러져 있는 걸 제외하면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오늘 명월은 아침도 방에서 먹지 않고 다른 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바로 동헌으로 나갔다. 전에는 없었던 행동이었기 때문에 왜 그러나 싶었던 복운은 이상이 없는 방 상태를 확인하곤 고개를 갸웃하면서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냥 단순히 방에 가고 싶지 않았던 것뿐일까. 그래도 옷까지 다른 곳에서 혼자 갈아입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전날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마음이 복잡해서 그런가. 그리 생각을 하던 복운은 문득 이불이 축축하다는 걸 느꼈다.
땀하고는 다른 느낌의 축축함이었다. 거기다 암만 더운 날이라 해도 명월이 거의 땀을 흘리지 않는다는 걸 떠올린 복운은 이건 대체 무언가 싶어 그리로 고개를 숙였다. 바로 느껴지는 건 묘한 밤꽃 냄새였다.
“……음?”
이 냄새가 왜 명월의 이불에서 나는 건가. 이해가 되질 않았던 복운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한다. 그러다가 오늘따라 명월이 방에 바로 가지 않으려 했다는 걸 떠올린 복운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설마하니,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이상한 생각을 훌훌 털어 내기 위해서 열심히 고개를 턴 복운은 이불을 돌돌 말아 그걸 끌어안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돌리곤 씩씩하게 걸어가면서 복운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사또는 함부로 몸을 굴릴 만한 분이 아니야. 더군다나 그런 일이 있었는데 방에 여자를 들여서 그걸 할 리가 없잖아. 지금까지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던 분인데―.”
하지만 이곳으로 와선 호접화인지 뭔지 하는 기녀에게 푹 빠진 양, 몇 번이고 호란에 걸음을 했었지.
늘 명월 쪽에서 호란을 찾았지만, 어제는 여러 일이 있어서 마음이 복잡해선 자신 몰래 호접화를 이리로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어찌어찌하기는 했는데, 낮에 눈을 뜨니 이건 뭔가 아니다 싶어서 호접화는 바로 보내고, 급히 방을 나선 거다.
오늘 아침에도 명월은 스스로 물을 길어서 목욕을 하고 옷을 입지 않았던가. 복운이 찾아갔을 때 명월은 상투를 틀어 전립까지 눌러쓰고 있었다. 지금껏 명월이 저렇게 부지런을 떨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대체 무얼 보고 있는 건가 싶어 벙찐 복운이었다. 그런 그에게 명월이 밥을 준비해 오라고 해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일을 나선 참이었다.
그냥 자신의 착각이었으면 좋겠지만, 아닐 수도 있음이었다. 금이야 옥이야 지켜 온 명월이 이런 촌구석의 기녀에게 빠져서 첫정을 홀라당 줘 버렸다면―.
그건 지금까지 있었던 일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라면서 복운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 *
동헌으로 나와 대청 안쪽의 의자에 앉아 있는 명월은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으니 졸고 있는 건가 싶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명월은 혼자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이번 문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그걸 어찌 처리할 것인지를 궁리하는 거다. 하지만 이번 일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거다. 그걸 알기에 이방도 내내 무겁게 입을 다문 채로 있었다.
지금 관아 안의 분위기는 칙칙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전날 비가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산에서 발굴한 해골을 모아 둔 창고의 화재라 할 수 있었다. 그때 기적적으로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화재의 피해는 훨씬 더 커졌을 테고, 많은 사상자가 났을 거다. 하지만 비 덕분에 불은 눈 깜짝할 사이에 꺼졌고, 화재를 낸 것으로 보이는 사내들도 모두 붙잡아 감옥에 넣을 수 있었다. 남은 일은 왜 불을 낸 것인지에 대해서 듣는 것뿐이지만…….
안색을 굳힌 이방은 눈을 내리떴고, 그때 얼굴에 시선이 닿았다. 바라보는 눈빛을 읽은 이방은 고개를 들어선 명월을 바라봤다.
흔들림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명월의 얼굴을 똑바로 보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느껴진 이방은 가만히 있었다.
고개를 돌리거나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마주 응시해 오는 이방을 보던 명월은 웃으면서 그에게 손짓했다. 이방은 가죽신을 벗고는 대청 위로 올라가 명월 앞까지 걸어갔다. 양손을 모은 채로 고개를 숙이는 이방을 보던 명월이 물었다.
“어제는 어찌 된 일인가.”
“……집안에 일이 생겨서 그리로 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갑자기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부랴부랴 관아로 도착했더니 호방이 포졸들을 보냈으니 괜찮다 하더군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달려갔더니, 비가 내렸습니다. 그리고 도착했을 땐 포졸들이 이미 범인을 붙잡은 채였고 복운이 사또를 업고 창고 밖으로 나왔지요.”
이방의 설명을 들은 명월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자신을 거기서 업고 나온 건 복운이었군. 백호가 함께 있긴 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복운이 자신을 옮기는 동안 그걸 지켜보고만 있었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던 명월은 머리를 긁적였다. 잡생각은 여기까지였다. 지금은 백호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얌전히 감옥 안에 있던가.”
“아직까진 문제를 일으키진 않고 있습니다.”
“창고는 분명 몽땅 타 버렸을 거야. 안에서 달리 건진 것도 없겠지?”
“그렇습니다. 제가 급한 대로 들어가 봤지만, 멀쩡하게 남은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겠지. 그걸 노리고 그런 짓을 한 것일 테니까.”
자조 섞인 중얼거림을 들은 이방은 재차 입을 다물었다.
일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정리되는지에 대해선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선 이방이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차분하게 있나 싶던 명월은 입을 열었다.
“지금 내가 바위에 계란을 치는 건가.”
“……사또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무얼 하고 싶어 하시는지도 압니다. 하지만 위험한 일입니다.”
“내가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나.”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선 안 될 것입니다.”
단호히 말한 이방은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지금 말은 안 들은 것으로 할 테니, 더는 언급하지 말라는 듯이 진지하게 바라보는 그를 외면하고 명월은 조금 더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팔걸이 끝을 세게 잡았다가 놓기를 반복하던 명월은 재차 이방 한소규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집안에 어떤 일이 있었나. 괜찮으니 솔직하게 말하게.”
짧은 순간 이방의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정쩡하게 숨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앞서 한 말이 있었고, 명월은 눈치가 빠른 사내였다.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하느니 그냥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는 게 현명했다.
양손을 앞으로 마주 잡은 이방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딸이 아직도 살아 있는 걸 두고 이상하다며 따지러 온 자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올해는 제 딸이 죽었어야 하는데, 시름시름 앓던 아이가 왜 갑자기 건강해진 거냐면서 해코지를 하려는 자들이 있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집으로 달려가고 말았습니다. 도착했을 땐 그들은 사라진 후였지만, 부인이나 딸이 무척이나 불안해해서 곁에 있어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응이 늦었고, 사또께서 위험해지셨음에도 도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든 게 제 탓입니다.”
깊이 고개를 조아리는 이방의 행동에 명월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방의 딸이 무사한 걸 가지고 꼬투리 잡기로 한 건가. 이렇게 딱딱 맞춰서 건드릴 정도라면 그 화소군이라는 놈도 꽤나 준비가 철저했다.
“아니. 자네 탓이 아니네.”
“하지만―.”
“자네 탓이 아니야.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다른 존재가 있고, 그놈이 이 일의 주범이다.”
만만치 않을뿐더러 무서운 놈이었다. 자신이 그 망할 놈의 집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한꺼번에 일을 진행한단 말인가. 손이 빠르고 머리도 잘 굴러가는 놈이었다. 덧붙여 아래에 두고 부리는 놈들도 많았다. 그러니 말 한마디에 사방에서 알아서 움직여 주는 게 아니겠는가.
움켜쥔 손으로 의자 끝을 지그시 누르는 명월은 심각해 보였다. 안 그래도 고뇌가 짙은 그이니 건드리고 싶진 않아도,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방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화소군은 도성의 관료들과도 연줄이 이어져 있습니다. 오랜 시간 거상으로 이름을 날리는 동안 이런저런 뒷돈도 많이 넣었을 테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들과도 알고 지내겠지요. 그들을 이용해서 사또를 압박하려 들 겁니다. 물론 사또는 그런 것에 굴하지 않으실 분이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느새 무표정이 된 명월을 두고, 이방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사또. 도성에 가족이 있지 않으십니까. 거기다 사또는 아직 젊고 능력이 있으십니다. 여기서 모든 걸 다 소진하셔 봤자 좋을 게 없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다 해서 더럽고 혐오스럽다고 비난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입니다. 저희 같은 보잘것없는 존재는 그 커다란 세상의 흐름을 변하게 할 수 없습니다. 사또나 저나, 사라져 봤자 그 빈자리를 두고 아쉬워할 이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쩌면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이 사라졌다며 더 좋아할지도 모르지요. 빈자리 또한 금방 채워질 테고요.”
사람 둘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게 얼마나 가겠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공석이 채워지고 나면 사라진 자들은 모두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남아 있는 자들끼리 똘똘 뭉쳐서 새롭게 앞을 보고 나아갈 터였다.
이방이 말한 대로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그게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당장 문제가 생기지 않고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니 그를 두고 문제를 삼지 않는 거다. 대놓고 건드리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일이 더 복잡해질 거란 걸 알기 때문이다.
이방이 한마디 더 해 주려던 찰나 등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또, 잠시 밖으로 나와 보십시오!”
동헌 마당으로 들어서는 포졸을 본 이방의 얼굴에 확 굳어졌다.
“무슨 일이더냐. 사또 앞에서 왜 이리도 호들갑인 게야.”
“그, 그것이―. 일단 밖으로 나와서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외문을 지키는 포졸이라는 놈이 저 무슨 한심한 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르겠다. 직접 나와서 확인을 하라니. 명월이 나서기 전에 확실하게 상황 파악을 해서 보고를 올려야 할 게 아닌가.
화가 난 이방이 한 소리 하려던 찰나 뭔가가 빠르게 그 눈앞을 지나쳐 갔다. 명월이 대청에서 내려오는 걸 본 이방이 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사또, 어찌 된 일인지 제가 자세히 살펴본 후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가 뭐 있나. 같이 가서 확인하는 편이 빠르겠군.”
짤막하게 말한 명월은 이방을 두고 먼저 동헌 마당을 가로질러 나갔다.
* * *
외문 바깥에 세워진 건 짐수레였다. 전에도 저런 수레가 앞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었던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땐 수레 위에 짐이 잔뜩 쌓여 있었다. 지금 수레는 텅 비어 있었고, 그 수레 앞에 서 있는 자들은 전보다 숫자가 많았다.
하나같이 힘깨나 쓸 것 같은 사내들은 양손을 앞으로 모은 채로 다소곳이 서 있었고,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포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면서 지금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에 대한 의문을 주고받았다. 그러는 동안 명월이 나타났다.
거침없이 걸어 나온 명월은 포졸들 앞에 서선 바깥 상황을 살폈다. 빈 수레와 그 앞에 서 있는 건장한 여러 사내들. 그리고 그들 가장 앞에 서 있는 이는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명월은 그자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래. 이번에는 자네 주인이 뭘 하고자 이리도 많은 자들을 보낸 거란 말인가.”
명월이 입을 열자 사내는 그 앞으로 나아가 두 걸음 앞에서 멈추어 섰다.
“실은 저희 행수께서 사정이 여의치가 않으셔서 관아에 진상한 품목 중 일부를 돌려받기를 원하십니다.”
명월의 눈썹이 위로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이방이 “이 건방진―.” 하고 중얼거리며 앞으로 나서려 했다. 명월은 조용히 그쪽으로 팔을 뻗었고, 제지를 받은 이방은 명월을 바라봤다.
명월의 옆얼굴은 차분했다. 지금은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님을 파악한 이방은 뒤로 물러섰지만, 여전히 그의 눈빛이나 표정은 매서웠다. 하지만 이방이 노려보나 마나 사내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명월의 얼굴로 시선을 고정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만들어진 미소를 짓는 게 꽤 능숙하다. 과연 그 주인에 부하인 거냐면서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 행수가 관아에 올린 물품은 모두 이번에 도성으로 진상될 것들이네. 그것들을 지금 돌려받겠다고 찾아온 건가. 지금 내가 이해한 게 맞는 건가.”
“그렇습니다.”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을 확인받고자 묻는 말에 돌아오는 건 너무도 담담한 긍정이었다. 그 대꾸에 이방은 기가 차 크게 입을 벌렸고, 사내는 고개를 들어 명월을 올려다봤다.
“예전부터 관아와 그곳에 계신 사또에 대한 친분과 우애를 증명하고자 매년 무리해서 선물을 드리셨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관아에 넣은 귀한 물품 중 일부는 지금 당장 다른 곳에 써야 할 것 같으시다면서 지금 사또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그 물건을 돌려받아 오라 저희를 보내셨습니다.”
그리 말한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예전 관아와 그곳에 있던 사또는 화소군 그놈의 똥구멍을 샅샅이 핥아 주었으니 그에 대한 보답으로 물건 몇 개를 던져 주었지만, 지금의 넌 아니니 받은 걸 모두 내놓으라는 거였다.
앞서 화소군이 보낸 것들이 모두 도성으로 보낼 명단에 올라가 있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이런 짓을 꾸미는 건, 자신을 물 먹일 의도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떠나기 전에 자신의 등 뒤에 대고 저는 상대하기 어려운 상대라 크게 외치더니 그 말이 이런 의미를 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귀물이니, 뭐니, 그런 것들을 이용하지 않아도 자신을 곤란하게 할 수 있음을 알리고 싶었던 거냐.
겉보기엔 예의 바른 척을 하며 고개를 조아리는 사내를 앞에 두고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래로 내린 손을 움켜쥐는 명월의 등 뒤로 호방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안쪽에 있었기 때문에 말을 전달받는 게 늦을 수밖에 없었던 그는 외문 밖, 길가에 주르륵 서 있는 수레를 보고는 당황했다.
“이게 어쩐 일입니까. 자네는 왜 이러고 있어. 저 사람들은 뭐고, 짐수레는 또 무언가.”
호방의 물음에 사내는 그쪽으로 고개를 조아리며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행수께서 선물로 보낸 물건을 돌려받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선물로 보낸 물건이라면……그건 전부 다 도성으로 올라가야 할 것들인데?”
앞서 명월에게 설명을 한 참이었기에 사내는 입을 다물곤 차분한 시선을 던졌다. 많은 말은 하지 않아도, 바라보는 눈빛에서 모든 게 전해지기 마련이었다.
멍하니 있던 호방은 설마 싶은 양 눈을 가늘게 뜨면서 되물었다.
“그걸 다 가지고 가겠다는 건가.”
“물론 사또께서 허락하신다면 말입니다.”
호방은 크게 입을 벌렸다. 이미 준 물건을 돌려받겠다 하는 것도 우스운데, 그것들은 전부 도성으로 진상이 될 것들이었다. 장부로 정리해 목록에 올렸으니, 그것들 중 하나만 빠져도 크게 경을 칠 거다.
날이 좋은 때를 잡아서 도성으로 올려 보낼 일만 남겨두고 있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인지 모르겠다. 말만 전하러 온 게 아니라면 이렇게 빈 수레에다가 사내들까지 함께 올 필요도 없을 터였다.
덕분에 무슨 일인가 싶어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고 있었다. 이러다가 온 고을 사람들이 몰려들게 생겼다면서 호방은 사내 앞으로 걸어 내려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자네. 여기서 그런 말을 하면 어쩌자는 건가.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차근차근 말을 해 보세. 자네 행수가 왜 그런 말을 하나―.”
“길게 말을 섞을 필요는 없다.”
딱 자르는 차가운 말투에 헛숨을 삼킨 호방은 뒤를 돌아봤다.
뒷짐을 진 명월은 눈을 내리떠, 화소군의 말을 전하러 온 자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작정하고 찾아온 것 같으니, 원하는 대로 해 줘야지. 그깟 물건이야 돌려주면 그만이다.”
지금 도성으로 올라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들은 그깟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들 중 하나라도 사라지면 큰일이 생길 거다. 명월이 이번 일에 대한 심각성을 잘 모르고 있다고 여긴 호방은 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사또. 그깟 물건이 아닙니다. 창고 안에 있는 물건의 절반이 전부 화소군 행수가 선물로 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이 도성의 특산물이 아닌, 일개 개인이 주는 선물을 정리해서 그걸 도성에 진상하려 했단 말인가.”
차분하나, 그 아래에 깔린 큰 분노를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호방이 눈치가 없진 않았다. 놀라선 입을 다물고는 눈을 크게 뜨는 호방을 매섭게 노려보며 명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지금 그는 정말로 불쾌하고 화가 난 상태였다. 그건 갑작스럽게 이런 일을 당한 게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일이 생긴 후에 마땅히 대처를 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그를 더더욱 분노케 했다.
지금 화소군은 반양 안에서 자신이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노골적으로 알려 주고 있었다.
제깟 놈이 마음만 먹으면 사또 같은 건 손가락 하나로 처리할 수 있다는 거다. 산 사람을 이용하고, 죽이고, 귀물까지 이용하는 놈이니 눈에 뵈는 게 무엇이겠는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며 명월은 침착하게 말했다.
“진작 알지 못한 내 잘못도 크니 자네하고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를 나눠야겠군. 그 전에 창고 문을 열고 저들이 돌려받으러 온 모든 것들을 돌려주게.”
호방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려 갔다. 관아의 살림을 도맡는다 할 수 있는 그는 지금 사또의 명을 순순히 따를 수 없었다. 뒤이어 올 파장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머뭇거리다가 하지만, 하고 단서를 붙이려는 순간 재차 명월의 싸늘한 시선이 날아왔다.
“화가의 물건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관아 밖으로 내보내게.”
화소군 행수를 화가라 칭하자 사내의 표정이 바로 굳어진다. 안색을 굳힌 채로 고개를 든 사내는, 명월과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바로 헛숨을 삼켰다.
겉보기엔 여인처럼 곱상하니 아름다운 사또이지만, 그 눈동자 안쪽엔 불길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지금 느끼는 분노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명월은 꽤나 무서웠다.
재차 고개를 숙인 사내는 어색한 헛기침을 하면서 옆에 서 있던 호방에게 말했다.
“안내를 해 주시지요.”
그러자 중간에 끼인 호방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사내와 명월을 번갈아 봤다.
벌써 도성에 물품 내역을 올린 참이었다. 거기서 물건 하나, 개수 하나 틀려도 크게 경을 친다. 그땐 명월의 목이 성치 못할 수도 있음이었다. 물건을 돌려 달라 한다 해서 돌려주면 그만인 일이 아니었던 거다.
답답한 마음에 당장 명월을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명월은 이미 몸을 돌려 관아 안으로 들어간 참이었다. 그 완고한 뒷모습에 멍하니 있던 호방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면서 아이고,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 * *
빠른 걸음을 옮기는 명월을 뒤를 따르면서 이방은 몇 번이나 사또, 하고 그를 불렀다. 하지만 명월은 멈추지 않았고, 한달음에 동헌 마당을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갔다. 그대로 목화 신을 벗고 대청 위로 올라가려나 싶었던 명월이 갑자기 몸을 돌려 뒤따라오던 이방을 내려다봤다.
그를 쫓아 계단을 올라가려 했던 이방은 명월의 매서운 시선에 움찔해선 뒷걸음질을 쳤다. 계단 아래에 내려선 이방은 양손을 마주잡은 채로 명월을 올려다봤다.
“……이런 식으로 사또를 압박하려는 거란 걸 모르진 않습니다만, 심각한 일입니다. 진상품이 달라지면 조사를 받게 됩니다. 사또께 안 좋은 일이 생기실 겁니다.”
“그래 봤자 파면되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죄 없는 사또께서 왜 파면이 되셔야 한단 말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자네가 일러 주는 대로 세상에 어울리지 못하고, 권력에 빌붙어 아부를 하지 못하니 충분히 파면될 거리지. 남들과 같을 수 없다는 것. 그게 바로 내 가장 큰 허물이네.”
“……사또. 그건 아닙니다.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명월이 어떤 참담함을 맛보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지금처럼 자신의 부족한 말주변이 원망스러울 때가 없다면서 이방은 안타까움을 담아 명월을 올려다봤다.
“내가 이곳에 대해서 모든 걸 알았어도, 이번과 같은 일은 피할 수 없었을 거네. 그건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놈은 작정하고 날 몰아붙일 생각이고, 이번 일은 내가 물러설 수밖에 없네. 놈이 준 물건은 나도 원치 않으니까.”
지금 당장 도성으로 올려 보내야 할 진상품이 비게 된 것이니 분명 가벼운 문제는 아니었다.
감정적으로 대응했다고 생각은 해도, 화소군 그놈이 제 물건을 돌려 달라 하는데 싫다면서 온 자들을 쫓아낼 수도 없었다. 거절했다면 그놈은 분명 제 안방에서 자신을 비웃었을 거다. ‘거봐라. 넌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야.’라면서 말이다.
이번 일을 결정한 것으로 인해 자신뿐만 아니라 관아에 있는 모두가 위험해지게 된 것이었지만, 당장은 화소군 그놈에게 비굴해지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건 앞으로 오게 될 많은 일들 중에서도 일부분이었다. 그런데 벌써부터 밀리고 싶진 않았던 명월은 어금니를 악문 채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보다 훨씬 더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 명월을 두고 이방은 양손을 움켜쥐었다. 지금 최선을 다해서 명월을 위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서둘러야 할 게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창고의 빈자리를 채우는 게 최선이었다.
“없어진 물건은 똑같은 것으로 다시 구하셔야 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지금부터 준비한다고 해서 얼마나 모을 수 있겠는가. 그 동충하초인지 뭔지는 화소군 그놈만이 조선으로 들일 수 있다고 들었다.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초 치고 싶지 않았던 명월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다가 안 될 것 같으면 손을 떼게. 그리고 나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네.”
“아니요. 이건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저는―.”
“자네는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할 사람이고, 난 언제든지 여길 떠날 수 있다네.”
작은 것 같지만, 실제론 엄청난 차이였다. 그리고 그건 전에도 이방이 직접 거론한 적 있던 내용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도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무는 거다.
안색을 굳히는 이방을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번에 저들이 건드린 건 자신뿐이 아니었다.
살아난 이방의 딸도 걸고넘어지려 하는 거다. 암만 자신을 위하려 해도, 그 역시 가족이 걸린 문제에는 어쩔 수 없었다. 모든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가족이라―.
거기까지 생각한 명월은 마음을 정리했다.
“만약 자네 가족을 걸고 협박한다면 그냥 그것에 따르게.”
“사또,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젓는 이방의 반응은 익히 짐작하던 것이었기에 명월은 더 단호히 말했다.
“자네 가족을 먼저 챙겨야 하네. 그걸로 자네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한다 해도 난 아무렇지도 않을 거네. 왜냐하면 내 자네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그러니 죄책감 같은 거 가지지 말고, 머리 좋은 여우처럼 알아서 처신을 잘하게나.”
자신의 아래에 있으면서 아둔한 곰처럼 굴 필요는 없었다. 그에겐 보살펴야 할 식솔이 있지 않은가.
명월은 입을 다물었지만, 그가 왜 이런 말을 꺼낸 것인지 이유를 모르진 않았던 이방은 복잡한 속내를 드러내듯 눈을 굴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고민하던 그는 주변을 살피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재차 입을 열었다.
“사또. 일이 생기기 전에 이곳을 떠나십시오. 도망친다고 해서 지는 게 아닙니다. 여기선 사또께서 이길 방도가 없습니다. 모든 게 한쪽에 치우쳐져 있으니 정정당당한 경쟁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도망친다 해도 해결해야 할 일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번에 저 망할 화소군 놈이 가지고 간 물건을 제대로 채워 넣지 못한다면 도성에서부터 불호령이 떨어질 거다.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일을 했던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아버님에게도 듣기 싫은 말이 들어가게 되겠지.
안 그래도 모난 돌인데, 자신 때문에 싫은 소리를 듣게 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문제를 제대로 수습하지 않고 돌아가면 당장 자신의 목을 치려 들지도 모를 터였다. 특히 혈기왕성한 두 형님들은 말이다.
명월은 실소를 흘리며 몸을 돌렸다. 대청 위로 올라가 의자 앞에 서선 그걸 내려다봤다.
이곳으로 와서 새롭게 만든 자신의 의자였다. 이곳에 처음 앉은 사람은 자신이고,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였다.
천천히 몸을 돌린 명월은 의자에 앉아선 팔걸이에 양손을 올렸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동헌 마당이 오늘따라 유난히 넓고 쓸쓸하게 느껴진다. 개미 한 마리 없고, 서 있는 건 이방 하나뿐이었다. 그게 지금 이 반양에서 자신의 위치인 건가 싶었던 명월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진다. 실소라 부를 수 있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명월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망할 놈이 만들긴 했지만, 좋은 의자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어깨에 들어간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면서 명월은 중얼거렸다.
“지금 내 모습이 어때 보이나.”
“좋아 보이십니다.”
좋아 보인다 말을 해도 이방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일 거다. 하지만 지금 이건 약과였다. 앞으로 더 거창한 것들이 들이닥치겠지. 그런 걸 생각하면 고작 이런 걸 두고 징징거릴 순 없었다.
“아직은 괜찮네. 다 가져가서 이겼다고 자축하라고 하게. 난 다른 방식으로 뒤를 치면 그만이니까.”
지금 당장은 그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뿐이지. 조금만 생각하면 될 거다. 놈이 여기서 오래 해 먹었다고 해도 분명 틈이 있을 거다. 고작 이 정도로 무너져서야 사람 면목이 서질 않는다.
차라리 어젯밤 거기서 놈의 목을 베었어야 했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후회하고 싶진 않았다. 그건 그놈하고 똑같아지는 거니까.
그리 생각하면서 눈을 내리뜨는 명월은 누가 보더라도 알 정도로 화가 난 얼굴이었다. 반양에 와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던 이방은 아무 말도 못하고 손을 움켜쥐었다.
* * *
오후가 되자 비가 그치고 날이 갰다. 이불을 말리기에 딱 좋을 만큼 화창한 날씨에 복운은 명월의 이불을 들고 뒤뜰로 나와서 전부 줄에 걸었다. 명월이 사용하는 이불을 다 걸고 난 후, 그 앞에 선 복운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이불은 티 한 점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세탁이 되었지만, 복운은 신중하게 이불을 위아래로 살폈다. 그러다가 팔짱을 낀 그의 입술을 타고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갑자기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선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복운도 성적으로 경험이 풍부하진 않았다. 예전부터 얼굴이 반반하고 몸이 좋다는 말을 듣다 보니 간혹 과부들에게 유혹을 받곤 했다.
물론 그런 제의가 있어도 바로 반응한 적은 없었다. 함부로 아랫도리를 놀렸다가 이상한 여자에게 걸리면 곤란했기에 많이 참아도 가끔은 견디기 힘들 때가 더러 있었다. 그땐 여자를 품었고, 이번에 명월의 방에서 느낀 건 바로 그 체취였다. 정사를 하고 난 후의 냄새가 물씬 났다.
명월이 어린애가 아니니 그런 식으로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건 이상할 게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명월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지아비가 되어서 가정을 꾸리게 될 거다. 생각은 그리하고 있었으나 막상 이런 일을 겪게 되자 무척 당황스러웠다. 실상은 이런 일을 두고 이 정도로 당혹감을 느끼는 스스로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는 왜 이리도 혼란스러워 하는 걸까. 그 원인이 대체 무얼까. 덕분에 아침부터 심란해서 빨래나 하고 앉아 있었다. 지금 명월이 점심밥을 제대로 챙겨 먹었는지 어떤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명월의 얼굴을 보기가 뭐했다. 얼굴을 보면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았다. 물론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거지만―.
명월의 사생활이었다. 이래저래 복잡하게 꼬이는 일들이 많으니 여자를 품어서 그간 쌓인 피로를 풀려 한 걸지도 모르지. 이내 명월이 그런 식으로 화를 푸는 것도 뭔가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면서 복운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안쪽에서 두런두런 대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끝나는 거 아니야?”
이불을 걸고 있는 데다가 나무 막대가 길게 세워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복운은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누군가 싶었지만, 지금은 저런 걸 일일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그를 고민하게 만드는 존재는 달리 있었던 거다.
다시 명월에 대해서 집중하자 싶었을 때, 바깥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조금 더 또렷하게 들려왔다.
“원래 처음 봤을 때부터 미덥지가 않았어. 얼굴도 곱상하고, 기방만 출입하고 말이지. 하라는 일은 제대로 하지도 않고 놀러만 다니니까 결국 이런 꼴인 게 아닌가. 내 장담하건대 올해가 가기 전에 쫓겨나게 될 거네.”
“무슨 올해야. 보자니 행수가 물건을 다 빼 가던데. 이번에 도성으로 시일에 맞춰서 진상해야 할 것들이 없으니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게지. 위에서 어찌 된 거냐고 물으면 대답할 거리도 없을 테고, 그대로 뒤집히는 거지.”
“도성에서 사람이 나와서 감사를 할까?”
“당연히 하지. 창고 문을 열었을 때 아무것도 없으면 그 첫째 책임을 사또가 물 게 아닌가. 그러면 그걸로 끝나는 거야. 아직 도성에 도착한 게 아니라 해도, 품목을 적은 서신을 올렸으니 그게 제때 도착하지 않으면 전하께 가야 할 진상품을 중간에 빼돌린 걸로 사또가 대신 처벌을 받게 되는 거지. 내 알기론 진상품을 중간에 빼돌리면 손목이 나간다고 들었는데―.”
“손목은 무슨. 이번 일을 보니 손목이 아니라 목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에이, 목이 날아가진 않겠지. 듣자 하니 사또가 도성에서도 꽤나 유명한 세도가의 아들이라는데―.”
그쯤 되자 복운의 얼굴이 확 일그러진다. 저 망할 놈들이 감히 모시는 사또에 대해서 멋대로 떠들어 대고 있다. 모시는 분에 대해선 그 어떤 것이라도 입 밖으로 내선 안 되는 거였다. 그런 기본도 모르는 놈들이 어찌 관아에 있을 수 있느냐면서 복운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실은 나 말이야. 그걸로 이상한 말을 들었네.”
“이상한 말이라니. 무슨 이상한 말?”
“그 뭐냐. 사또가, 그 집안 친아들이 아니라 업둥이라는 소문을…….”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복운은 이불을 옆으로 치우며 벌떡 일어났다.
“지금 뭐라고 지껄여 대는 거냐!”
이런 데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건지 식겁한 얼굴로 돌아보는 포졸들을 노려보며 복운은 양손을 움켜쥐었다.
“네놈들이 지금 뚫린 입이라고 되는 대로 지껄이면 되는 줄 아는 게로구나!”
어디서 감히 우리 사또를 험담한단 말인가. 반쯤 죽여 놓을 거라며 복운은 포졸들 쪽으로 몸을 날렸다.
* * *
도성으로 물건을 보내는 일만 남아 있었다 보니 창고는 어수선하고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 앞을 채우고 있던 물건들 중 대부분이 사라져서인지 지금 창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남아 있는 건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받은 건 동충하초뿐이라고만 들어서 거기서 몇 가지 더 들고 가겠거니 싶었는데 아니었다. 막상 눈으로 빈 것들을 확인하자니 엄청났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창고 문 앞에 선 명월은 뒷짐을 진 채였다. 뒷모습만 보이니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저 상태로 있게끔 할 수 없었던 호방은 슬그머니 다가갔다.
“……어찌할까요?”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호방이 먼저 나서서 ‘제가 해결하겠습니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해결한다고 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처럼 심각한 때가 달리 없었다. 화소군의 일꾼들이 짐을 챙겨서 떠났으니, 이제부터는 이쪽이 움직여야만 했다. 포졸을 전부 다 푸는 한이 있더라도 없어진 물건을 채울 필요가 있었다.
명월이 뭔가 말을 해 준다면 다음 행동을 하기가 한결 수월할 텐데 그는 여전히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렇게 답답할 데가 없었다. 왜 말이 없는 건가 싶어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기만 하던 호방은 용기를 내 먼저 말을 꺼냈다.
“없는 물건들을 정리했습니다. 한번 읽어 보시지요.”
정리를 했다고 해 봤자 줄을 그은 게 다였다. 장부에 적혀 있는 목록 중 절반이 넘게 줄이 쳐져 있었다. 이걸 보면 명월의 속이 뒤집어지겠지만, 어쩌겠는가.
호방은 장부를 양손에 든 채로 명월을 살폈고, 명월은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입구에 버티고 서서 심각하게 있는다 해서 뭔가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다. 호방은 답답해지려는 속을 추슬렀다.
“아는 사람을 최대한 동원해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기…….”
이 말을 해도 되는 건가, 어떤가 싶어서 몇 번이나 머뭇거리던 호방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사또께서도 아시는 분들을 통해서 손을 좀 쓰시는 게 어떨까요? 그, 도성에 계셨으니까 거기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명월의 손이 움직여선 호방이 들고 있던 장부를 가져갔다. 그러곤 그걸 건성으로 뒤척이더니 중얼거렸다.
“많이 빠졌군.”
드디어 반응을 보이는 건가 싶었던 호방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장부를 닫은 명월은 그걸 돌돌 말아서 한 손에 쥔 채로 창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생각을 정리해 봐야겠다. 자네도 잠깐 가서 쉬고 있게.”
이런 일이 터졌는데 어떻게 쉴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 목구멍 바로 위까지 올라온다. 그걸 필사적으로 억누르면서 호방은 창고 안쪽으로 들어가 주변을 둘러보는 명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내색하진 않아도 그도 속이 말이 아닐 터였다. 자신들 앞에서 그런 내색을 취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흘깃거리면서 명월을 보던 호방은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호방이 멀어지는 기척이 느껴지고 나서야 명월은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낼 수 있었다. 손에 들린 장부를 한번 보고 나서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건 텅텅 빈자리뿐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물건이 그득 차 있던 곳이었는데.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니 눈 뜨고 코가 베인 격이었다.
나쁜 일도 해 봐야 안다고, 화소군 그놈 참 대단했다. 어쩌면 이리도 사람 기분을 더럽게 할 수 있는 건지. 덕분에 지금 이 순간에도 ‘당장 그놈에게 달려가 목을 베어 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게 아니던가.
명월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높지 않은 창고의 나무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대로 가면 문제가 생기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물건이 기한 안에 도성에 도착하지 않는 즉시 어떤 일인가 싶어 조사를 나올 테고, 아버지의 귀에도 들어갈 거다.
아버지는 체면을 중시하는 분이니 가만히 계신다 해도 다른 두 형님들은 그게 아니었다. 버선발로 달려와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면서 따지려 들 게 분명했다. 예전부터 자신을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 난 작자들이니―.
“……성가시군.”
이것저것 할 것 없이 귀찮고, 싫은 일투성이였다.
이번에는 화소군 그놈이 자신을 제대로 건드렸기에 호락호락 당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귀찮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지금 자신이 여기서 대체 무얼 하는 건가 싶은 의문도 들고…….
명월은 상상했다. 창고에서 빼낸 물건을 제 앞마당에 늘어놓고 ‘사또 놈. 지금 꽤나 곤혹스러워하고 있겠지.’ 라면서 비웃고 있을 화소군을 말이다. 그 순간 명월의 눈으로 힘이 들어간다.
놈이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이런 짓을 한다는 것 자체가 괘씸했다. 그래. 이상한 술수를 부리지 않아도, 이런 식으로 행동을 취함으로 자신을 곤경에 빠트릴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겠지.
하지만 순순히 당할 순 없었다. 지금 이 문제를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면서 명월은 이를 악문 채로 고개를 숙였다. 그때 저 뒤에서 “사또!” 하는 외침이 들렸다.
저 목소리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실컷 들은 목소리였다. 보나 마나 이번 일 때문에 저러는 거겠지.
명월은 뒤돌아보지 않고 똑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그러자 복운이 알아서 창고 안으로 들어와 명월의 옆에 섰다.
어디서부터 뛰어온 건지 시근거리면서 호흡을 고르는 소리가 꽤 크다. 뜨거운 콧김이 뺨에 닿는 것 같다면서 명월은 느리게 고개를 돌려 복운을 쳐다봤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있는 복운을 확인한 명월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왜 그런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일은 제가 아니라 사또께 있지 않으십니까. 이게 대체 뭔 일입니까?”
일부러 묻지 않아도 지금 보이는 것만으로도 어찌 된 상황인지 충분히 파악이 가능했다.
얼굴이 벌겋게 익은 복운은 양손을 움켜쥐었다.
“그 망할 장사꾼 놈! 어찌 관아에 넘긴 물건을 다시 가져갈 수 있단 말입니까?!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런 법도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네 말대로 다른 곳에선 어림도 없는 일이지. 받아 처먹은 사또가 그걸 고대로 토해 내주는 일도 지금껏 없었던 일이었을 테고 말이야. 하지만 여긴 반양이다. 반양에서는 반양의 법을 따라야 하는 법이지.”
그 어떤 곳과도 다른 방식으로 굴러가는 곳이었다. 그에 대한 빈정거림을 가미해 하는 말에 복운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곳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면, 물건을 되돌려받고 싶다고 한 놈은 곤장을 맞아서 엉덩이가 터졌을 터였다.
내놓으라 한다 해서 돌려주는 것도 우스웠다. 물건을 받으러 온 화소군 놈도 어이가 없지만, 그렇다고 그걸 고대로 돌려준 명월도 충분히 괴짜였다.
왜 이렇게 본인에게 불리하고 안 좋은 쪽으로 일을 진행시키는지 모르겠다. 물론, 명월이 이런 상황이 되길 바란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복운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어찌하실 겁니까.”
“생각 중이다. 조금 더 생각하다 보면 좋은 생각이 날 것도 같구나.”
거짓말이었다. 좋은 생각은커녕, 지금 당장 무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은데.
그런 그를 붙잡아 주는 건 복운처럼 ‘어찌할 겁니까.’라고 묻는 이들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도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을 받으면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그래. 이렇게 멍하게 있으면 안 되겠지, 라는 상태가 된다. 일단은 없는 품목을 확인하고 그걸 다시 모아야겠지. 이건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닐 거다. 삼일 안에 구할 수 없는 것도 수두룩하겠지. 그래도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창고에서 나가려던 명월의 눈에 복운의 옷차림새가 들어왔다.
“왜 이렇게 옷이 흐트러진 거냐.”
별생각 없이 물으면서 복운의 가슴 쪽으로 손을 뻗는데, 화들짝 놀란 그가 뒷걸음질을 쳤다. 도망치듯 뒤로 물러서는 복운의 행동에 명월은 앞으로 손을 뻗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제야 복운은 본인이 무슨 행동을 한 건가를 깨달았는지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거렸다.
“빠, 빨래를 너무 열심히 한 모양입니다.”
그리 말하는 복운의 소매나 바짓단에는 흙도 묻어 있었다. 고작 빨래를 하는 것뿐인데 저런 곳에 흙이 묻어 있는 것도 이상했다. 뭔가 싶었던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고, 의혹이 가득 찬 시선에 복운은 허둥지둥 밖으로 먼저 나갔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명월을 바라봤다.
어서 나오라는 눈빛에 명월도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명월을 확인한 복운은 앞섶을 바로 정리하면서 발등으로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포졸 놈들을 흠씬 두들겨 패 준 건 좋았지만, 그대로 바로 와서 옷이 흐트러진 모양이었다.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 복운은 바깥에 서선 장부를 열어 보는 명월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냥 평소대로 대하자 싶으면서도 명월의 안색을 살피고 그를 위, 아래로 확인하게 되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딱 봐서는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언제나의 명월이었다.
하지만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그때 명월이 짧게 한숨을 내쉰다. 명월이 저런 식으로 한숨을 쉬는 건 처음 보는 거였기 때문에 덩달아 안색을 굳힌 복운이 그 옆으로 다가갔다. 그런 복운을 흘깃 보는 명월이지만, 장부를 닫거나 그가 보지 못하도록 하진 않았다.
장부에 적힌 이런저런 것들은 복운이 당장 봐선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전문 용어로 적힌 것도 있고, 숫자 같은 것도 암호로 작성되어 있었다. 이건 어떻게 읽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복운이 알 수 있는 건, 줄이 그어진 것들이 지금 없는 것들이라는 거다.
말로만 들어선 감이 잡히질 않았는데 막상 눈으로 보자 심각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바닥 전부에 줄이 처진 부분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것들을 전부 다 어디서 구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걱정스러워 하는 복운을 두고 명월은 위로 눈동자를 들었다.
굳어 있던 눈동자 안쪽으로 웃음이 걸리고 명월은 돌돌 만 장부로 복운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퉁, 하는 소리와 함께 아얏―하는 소리를 낸 복운은 양손으로 제 이마를 눌렀다.
“내 걱정할 필요 없이 네 앞가림이나 잘해라. 난 유명월이다. 고작 이런 일로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다.”
장부를 한 손에 든 채로 바라보는 명월의 얼굴은 밝았다. 그 웃는 얼굴을 보고 나서야 복운도 안심이 되어선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동시에 반대편 어깨를 빙글빙글 돌린 명월이 “자, 지금부터 시작할까.”라면서 앞장서 걸어갔다. 그런 명월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복운도 냉큼 뒤를 쫓았다.
안 좋은 일이 있어도 명월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다른 누구보다 정신력 하나는 단단한 그였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진작 주저앉아서 바닥을 쳤겠지만, 명월은 아니었다.
그래. 믿자. 그리 생각하면서 복운은 이불과 관련한 건 똘똘 뭉쳐서 저 멀리로 날려 버렸다. 지금 상황에서 ‘사또, 혹시 여자가 있으십니까.’라고 묻는 것처럼 멍청한 짓은 없었다.
자신이 뭔가를 착각한 거겠지.
그리 생각하면서 복운은 명월의 뒤를 졸졸 따랐다.
* * *
우물에서 길은 물을 들어선 그대로 뒤집어쓰자, 근육질의 등에서 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그만큼 물은 차갑고, 사내의 단단한 몸은 뜨거운 상태였다. 실제로 물은 얼음장처럼 찼다.
보통 이들이라면 물을 끼얹는 순간 심장 마비가 올 정도로 찬물이었지만, 백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이나 물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는 입을 벌리고 긴 숨을 토해 낸 그는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바지 한 장만 입고 있었지만, 그것도 젖어서 안 입느니만 못했다. 젖은 천은 백호의 다리 근육과 사타구니의 은밀한 부위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래 봤자 아무도 없는 숲속이었으니, 다 벗고 있어도 상관없긴 했다.
손으로 뒷머리를 마구 털어 대던 그는 우물을 내려다봤다. 뼛속의 피가 얼어버릴 정도로 찬물을 몇 번이나 끼얹었는데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혀를 찬 백호는 바로 몸을 돌리곤 위로 올라갔다. 맨발로 거침없이 산길을 올라선 너른 마당에 도착했다. 그 앞으로 낡은 초가집 하나와 뒤쪽에 있는 작업실이 보였다. 두 장소를 번갈아 보던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선 바닥을 박차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러곤 바로 그곳에 벌러덩 누웠다.
날이 좋았기 때문에 기와는 열을 받아서 적당히 뜨끈뜨끈해진 상태였다. 평소 그곳에서 몸을 지지면서 술 한잔하는 걸 가장 좋아하는 백호였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잠시만 이렇게 있자 싶으면서도 그의 눈앞과 머릿속에 어른거리는 건 다른 거였다.
붉은 입술이 터질 것처럼 깨문 채로 신음을 삼키다가도 몸이 흔들리면 간헐적으로 떨리는 신음을 토해 낸다. 밀어내다가도 달라붙어서 요부처럼 허리를 흔들어 대던 명월이 떠오르자 머리가 더 복잡해진다.
더는 생각하지 말자 싶으면서도 쉽지가 않았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더 떠오를 것 같아서 그냥 되는 대로 두자 싶어서 몸에 들어간 힘을 빼낸 채로 있는데, 망상은 노골적으로 수위를 높여 갔다.
급기야 엎드린 채로 그가 토해 낸 정액을 질질 흘리는 모습이 떠오름에 따라, 백호는 벌떡 일어나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악문 입술을 타고 막힌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러다가 손으로 머리를 마구 긁어 대던 백호는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어 댔다. 그리고 멈췄을 때, 그의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다.
사자처럼 머리가 사방으로 뻗친 채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으니 정말로 미친놈 같다.
얼굴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가지가 피부를 찔러서 간지럽다. 입바람을 불어 그걸 뒤로 넘긴 백호는 시선을 느끼곤 눈을 내리떴다. 그러자 작은 바구니를 든 채로 서 있는 꼽추 노인이 보였다.
‘저 미친놈이 왜 또 저러나.’ 그런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걸 확인한 백호의 인상이 노골적으로 험악해진다. 하지만 그런 건 익숙한 일이라는 듯 꼽추 노인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빤히 바라봤다.
말없이 주욱 올려다보는 노인을 두고 혀를 찬 백호는 지붕 반대편으로 뛰어 내려가 그대로 작업실로 들어갔다.
넓은 공간은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전에도 그런 식이었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게 하나도 없음에도 왜인지 답답하게 느껴진다. 안으로 들어온 백호는 나무 탁자 위에 멈춰 서선 그 위에 한 손을 올렸다.
분명, 이곳에서도 명월을 안았다.
되지도 않는 서투른 유혹에 넘어가서 그대로 그를 품에 안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나 계속해서―.
그 녀석의 작은 머리로 생각하는 게 무언지 눈에 훤히 보임에도 속아 주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굳이 그 녀석을 안지 않아도 되었는데 왜 건드렸던 걸까. 그런 식으로 놈에게 휘둘려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이내 백호는 쓰게 웃었다.
“이 내가 휘둘린다고……?”
무의식 중에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말이다.
처음에는 비틀린 미소를 짓던 백호지만,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진다. 이윽고 완전히 무표정이 된 그는 탁자에 걸터앉아선 근처에 굴러다니는 나무토막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 책상에 꽂혀 있던 단검을 빼 들곤 그걸로 나무토막의 겉면에 댔다.
머릿속의 잡념을 지우고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을 때 조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막상 나무에 칼을 대긴 해도 다음의 실행을 옮기는 게 머뭇거려진다. 지금 자신은 무얼 망설이는 건가. 나무토막을 내려다보는 백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진다.
생각은 많아질수록 독이 된다. 지금은 생각 같은 걸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저 평소의 자신처럼 행동하면 된다면서 백호는 억지로 나무에 날을 박아 넣고 조각을 하려 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나무 살을 벗겨 내지 못하자 그걸 집어던졌다. 세게 날아간 나무토막이 벽에 부딪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굴러간다.
왜 모든 일들은 저질러 놓고서 후회하게 되는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나무토막이 마치 자신이라도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기만 했다.
안색을 굳힌 백호는 고개를 돌렸다. 단검을 세워서 세게 탁자에 박아 넣은 후 팔짱을 끼었다.
초조하다. 이 초조함이라는 감정은 처음 느껴 보는 것이기 때문에, 유난히 더 진정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이 대체 무얼 하는 건가. 다른 이들이 보면 코웃음을 칠 만큼 멍청한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은,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면서 백호의 미간으로 조금 더 짙은 주름이 잡힌다.
그때 하얀 손이 내려와 백호가 집어던진 걸 주워 들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백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인, 호접화는 굴러다니는 나무토막을 살피다가 그가 흠집을 낸 부분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세 군데에 난 흔적을 더듬던 그녀는 웃었다.
“엉망이로군요.”
나무토막을 한 손에 든 채로 천천히 흔드는 게 ‘네가 눈이 있으면 봐라. 어떻게 이 꼴로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거냐.’ 라며 빈정거리는 것 같다.
지금은 속이 시끄러웠기에 호접화의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리는 백호였다.
“요즘 아주 제멋대로 구는군.”
“그렇지요. 어느 분께서 다른 쪽에 푹 빠져 있으니, 그 틈을 타서 제멋대로 굴고 있지요. 앞으로도 그럴 셈입니다.”
넌지시 드러내는 속내에 백호의 눈썹이 위로 올라간다.
매섭게 변하는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호접화는 들고 있던 나무토막을 아래로 던졌다.
“슬슬 시작해 보려 합니다. 괜찮으시겠지요.”
“안 그래도 복잡한 상황이다. 그러니 괜히 너까지 합세해서 문제를 크게 만들지 마라.”
“복잡할 때 시작해야지 더 눈에 안 띄는 법이랍니다. 앞으로 여기저기서 난리가 날 텐데, 누가 제 일을 신경 쓰겠습니까.”
백호는 입을 다물었다. 미간 사이로 잡힌 주름의 개수만큼 지금 그의 속이 편치 않다는 것일 터였다. 그게 자신 때문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던 호접화는 제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말했다.
“어여쁘신 사또가 그리도 신경 쓰이신다면 그냥 곁에 있어 주시지요.”
“헛소리.”
단칼에 잘라 내듯 내뱉는 말에 호접화의 미소가 짙어졌다.
“전 헛소리를 하진 않습니다. 아시잖습니까.”
백호는 바로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듯한 그 모습이 어린애 같기만 했다. 전에는 공과 사의 구분이 확실한 사내대장부였는데, 지금은 제 마음 하나 갈피를 잡지 못해서 흔들리고 있었다. 모두의 눈에 다 보이는 걸 본인만 모르고 있다.
그런 백호의 모습은 처음인지라 나름 보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놀리는 말을 했다간 백호가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 있었기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화소군 행수가 일을 쳐서 지금 사또께서 꽤나 곤란한 상황이라 합니다. 가서 도움을 주신다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요. 뭐든지 도움을 받으면 마음이 움직이기 마련. 사또께서도 당신을 다르게 보실지도 모릅니다.”
“그만해라. 거기서 한마디라도 더 한다면 너하고 연결된 줄을 끊어 버리겠다.”
“말씀은 그리하셔도 정말 그렇게 하지 않으실 거라는 걸 압니다.”
백호는 매서운 눈길로 호접화를 노려봤다.
“내 마음을 모두 아는 것처럼 굴지 마라. 그 누구도 내 속을 읽을 수 없어.”
“조금 읽힌다 한들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세상은 혼자 나서 혼자 사는 거라고들 하지만, 그 긴 삶 속에서 하나 정도 애틋한 인연을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호접화는 옆으로 몸을 돌렸다.
“사내들은 전부 다 어린애 같지요. 그래서 나중에 꼭 후회를 하더이다. 당신은 그러지 마세요.”
옆으로 올라간 백호의 눈빛이 점점 험악해진다. 그쯤 해 두라는 충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호접화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사또께선 언제나 늘 저를 보시면서도 당신의 흔적을 찾으시는 것 같더군요. 절 몇 번 보시곤 바로 형제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제 모습을 통해서 당신을 본 거겠지요. 제가 형제가 없다 말씀을 드렸어도, 계속 절 통해 당신을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에 드신 걸지도 모르지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 같으면, 잘해 보시라 이겁니다. 제가 당신보다 하찮은 존재이긴 하나 그런 경험은 훨씬 더 풍부하니 한 수 읊어 드리는 겁니다. 흘려듣지 마시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일이 계기기 되었든지 그 상대가 내 반쪽이다 싶으면 붙잡고 놓지 말란 말입니다.”
“…….”
“이런저런 거 다 제쳐 놓고서 둘이서 좋으면 그걸로 되는 게 아닙니까. 전 소중한 이를 잃어 오장육부가 끊어지는 절절한 고통을 맛 봐서 그만큼 잘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당신은 인간이 아니니 한 번 정도 실패를 한다 해도 그것이 흠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후회가 남지 않도록 잘해 보세요.”
문가에 서 있는 호접화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백호는 그녀의 본성을 알고 있었다. 일부러 이곳에 와서 길게 말을 하는 게 이상했다.
“너답지 않게 구는군.”
“저도 은혜에 보답해야 할 게 아닙니까.”
“지금 이렇게 나불대면서 잘난 듯 지껄이는 게 내게 보답하는 일이라고 주장할 셈이더냐.”
“아니요. 제가 은혜를 보답할 사람은 달리 있답니다. 당신께 보답을 하려면 이것 가지곤 부족하지요.”
눈을 가늘게 뜬 호접화는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일단은 우리 어여쁘신 사또께 먼저 보답을 해 드리고자 합니다.”
* * *ㅅㅁㅇ ㄹ
과메기, 대봉감, 돌미역, 산삼을 비롯한 각종 귀한 약재와 버섯 등등. 가볍게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억, 소리가 날 정도다. 모든 게 제대로 갖춰져 있을 때에는 그냥 대충 보고 넘겼는데 이제 보니 연결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산속에 있는 고장에서 왜 생선이 진상 품목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건가 싶었다. 거기다 대봉감이라니. 지금이 감이 나던 시기였던가. 이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노릇이었다.
안색을 굳힌 채로 고개를 드는 명월을 본 이방은 고개를 숙였다.
“저희도 그자가 넣어 주지 않았다면 그런 것들을 진상 품목에 넣지 않았을 겁니다.”
“과메기도 그렇고, 대봉감도 그렇고, 오래 보관하면 상하는 게 아닌가.”
“그자가 준비해 온 건 특별해서 한 달 정도 창고에 넣어 놔도 괜찮더이다.”
“……한 달 동안 창고에 넣어 두었는데 괜찮은 음식이 있을 리가 없잖은가.”
저장 음식도 아닌데 애초에 별문제가 없었던 게 이상했던 거다. 화소군 놈이니 분명 이상한 수작을 부려서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만들었던 거겠지만.
그것에 대해서 이상함을 감지하고 먼저 손을 써야 했던 건 이방이나 호방이 아닌, 자신이었다. 그동안 다른 쪽에 집중하고 있어서 준비가 다 된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게 실수였다.
꼭 지나고 난 후에 이런단 말이지. 단순히 그놈이 자신이 신경을 못 쓴 구석을 교묘하게 파고든 걸 수도 있겠지만―.
굳어 있는 명월의 얼굴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이방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각지에 수소문을 해서 구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모아 보겠습니다.”
“생선은 바다에 있을 테고, 대봉감은 여름 초입인 지금 얻을 수 없다. 수소문을 한다 해도 날짜를 맞추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고 구한 것들이 우리가 바라던 만큼 특상품일지 장담할 수 없다. 이상한 물건을 보내는 건, 차라리 안 보내느니만 못하다.”
“그렇다고 빈 수레를 올릴 순 없잖습니까. 사또께서 큰일을 당하실 겁니다.”
“그냥 파면 당하는 걸로 끝내 준다면 좋겠지만―.”
분위기가 너무 처지는 것 같아서 가볍게 농담 삼아 던져 본 말에 이방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는 양 바라보는 이방을 두고 명월은 장부를 덮었다.
지금으로선 가장 만만한 게 버섯과 산삼이었다. 이건 약재상에 가서 구할 수도 있겠지만, 저 망할 화소군 놈이 미리 손을 써 두었을 것 같다.
차라리 도성에서 물건을 구해 볼까. 진상품을 올리는 날에 맞춰서 각지에서 물건이 올라올 테니, 거기서 여분이 남는 게 있으면 그걸 사 들이는 식으로 물건을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때 화소군 놈이 잘난 척하듯 지껄여 대던 말이 떠올랐다.
‘간혹 아주 특별한 것들을 산속에서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건 일반적인 방법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들이지요. 인간계에선 날 수가 없는 귀한 식물과 돌, 그리고 물. 그 모든 것들이 고가의 것으로 거래가 될 수 있지요. 그로 말미암아 아주 귀한 손님들과 많은 줄이 닿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선 사또의 어머니도 계셨지요’
“……사람 속 뒤집는 법을 아는 놈이란 말이야.”
혼잣말로 끝낼 셈이었지만, 이방도 들은 모양이다.
고개를 들어선 이쪽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굳어 있는 걸 본 명월은 애써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네. 오늘은 이걸로 끝내고 자네는 이만 돌아가 보게나. 너무 늦어지면 집에서 걱정할 거네.”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습니다.”
“밤이 되어서 피곤하군. 이런 상태론 암만 머리를 쥐어짜 내도 좋은 생각이 나지 않을 거야. 일단은 쉬고 날이 밝을 때 다시 궁리를 해 보도록 하지. 그편이 나을 것 같은데, 어떤가?”
이방은 명월의 안색을 살폈다. 웃고 있어도 정말은 피곤할 거다.
이렇게 문제를 붙잡고 있는 게 능사는 아니겠구나 싶었던 이방은 고개를 숙였다.
“내일 아침 일찍 찾아뵙겠습니다.”
그렇게 이방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명월은 손을 들어선 얼굴을 감싸곤 바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약한 모습은 다른 이들에겐 보일 수 없었다. 꼴사나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다면서 안색을 굳힌 채로 있던 명월은 재차 장부를 뒤척였다.
조금 더 생각해 보다가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으면 도성으로 올라가 봐야겠다. 친한 건 아니라 해도 아는 이들이 몇몇 있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 물건을 모으다 보면 말이 새어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주상 전하께 진상할 품목을 당일 도성을 뒤져서 구할 수 있느냐고 따진다면 할 말이 없었다.
어느 장사치에게 물건을 받았는데 그놈이 직전에 돌려 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변명거리도 못 되었다. 그런 구차한 말을 하느니 차라리 입 다물고 있는 편이 낫지.
명월은 전립을 벗고선 바로 누워 버렸다. 책상 아래쪽으로 한쪽 다리를 넣은 채로 누운 그는 배에 한 손을 올리곤 천장을 올려다봤다.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어 뒤쪽 벽을 확인하는데 아무도 없었다.
아침에 그렇게 급하게 방을 나가고 난 후에도 놈이 남아 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놈의 얼굴을 보기는 민망하니까 알아서 돌아가 줬으면 싶긴 했지만, 막상 놈이 없으니까 기분이 묘했다.
아니다. 기분이 이상할 게 뭐가 있는가. 고개를 저은 명월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장부를 보다가 앞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자리를 살피다가 눈을 가늘게 뜬 명월은 머리를 긁적였다.
“잠이나 자야겠군.”
지금은 너무 잡생각이 많아서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 일단 푹 쉬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런 생각으로 명월은 복운을 불렀고, 얼마 안 있어서 복운이 문을 열고 그 사이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잘 거다. 채비 좀 해라.”
“네. 알겠습니다.”
바로 대답한 복운은 방으로 들어왔다. 복운이 이불을 까는 동안 명월은 옷을 갈아입으려 했다. 그런데 묘한 시선이 느껴진다.
명월은 기습적으로 뒤를 돌아봤고, 이불을 깔면서 그를 힐긋거리던 복운은 시선이 부딪치자 놀라선 움찔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복운을 두고 명월은 혀를 찼다.
“너 오늘따라 왜 그렇게 날 몰래 훔쳐보는 거냐.”
“후, 훔쳐본 적 없습니다. 그저 이불을 깔아드리고 난 후 옷 벗는 걸 도와드려야 하나 싶어서―.”
“옷 벗을 때 내가 언제 네놈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더냐. 이상한 말을 하는군.”
“…….”
명월의 말에 틀림이 없었다. 지금까지 옷을 입는 걸 제외하고 벗는 걸 도운 적이 없었다. 명월이 구군복을 다 벗고 난 후 그걸 정리해 주면 모를까.
입을 다물고 눈을 굴리는 복운은 암만 봐도 이상했다. 전에도 힐긋거리면서 보긴 했지만, 이번엔 그때와 느낌이 사뭇 달랐다.
“이번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잖으냐. 어떻게든 해결할 방책이 있을 터이니―.”
“정말로 그런 거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명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재빠르게 말한 복운은 열심히 이불을 깔고 베개와 덮는 이불을 준비했다. 벌떡 일어난 그는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깊이 조아리고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면 편히 주무십시오.”
벌써부터 편히 잘 게 뭐가 있겠는가. 여전히 복운이 이상하다는 양 바라보는 명월이었으나, 복운은 냅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붙잡기도 전에 나가 버리는 복운의 행동에 명월은 멍하니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저놈은 대체 왜 저러는 거야.”
가뜩이나 신경 쓸 게 많은데 저놈까지 왜 저러나 싶었던 명월은 혀를 찼다.
* * *
마당 앞에 놓인 수레에는 각종 함과 커다란 상자가 차곡차곡 올려져 있었다. 오늘 낮에 관아에서 가지고 온 것들이었다. 실수는 없을 거라고 자신하지만 긴장이 되는 건, 조금 있으면 행수가 이리로 오기 때문일 거다.
어디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를 한 번 더 확인해서 행수가 물을 때 바로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사람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급히 뒤를 돌아보자 화소군이 검은 옷을 입은 사내 둘과 함께 이리로 오고 있었다.
연배로 따지자면 아들보다 어린 화소군이나, 그는 무시무시한 인간이었다. 그 앞에선 어떠한 실수도 범해선 안 되었다. 자연스럽게 몸으로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며 사내는 다가오는 화소군을 향해서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행수님. 낮에 분부하신 일을 처리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들고 나왔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후 사내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뒷짐을 진 화소군은 눈을 내리뜨곤 수레에 쌓인 것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묻질 않았는데 먼저 대답을 한다면 오히려 건방지게 여겨질 수도 있음이었다. 그냥 입 다물고 조용히 있자면서 눈을 내리깔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쪽에선 별다른 말이 없던가.”
놀란 사내는 바로 고개를 들고는 대답을 했다.
“안 된다면서 돌려주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지만, 사또가 오자 의외로 일이 쉽게 풀렸습니다. 언짢아하시는 것 같았지만 덧붙이는 말 없이 모두 들고 가라고 허락하셨습니다.”
“허락을 했다라…… 그냥 들고 가라고만 하던가.”
“……화가의 물건은 하나도 빠짐없이 관아 밖으로 꺼내라 하시긴 하셨습니다.”
행수를 두고 화가라고 칭하면서 그를 아랫사람 대하듯 굴긴 했다. 이 말은 전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았나 싶었지만, 사내가 생각하기에 화소군을 두고 화가 운운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반양에 새로 부임한 지 고작 몇 달밖에 안 되는 사또가 콧대만 높지 않으냐면서 사내는 말을 덧붙였다.
“저희가 온 걸 보고 무척 언짢아하긴 했지만 어쩌겠습니까. 행수께서 인심 써서 보낸 물건을 돌려받겠다는데요. 거기서 안 된다면서 거절하면 되레 웃음거리가 될 것 같으니 억지로 체면치레한다고 무리하는 것 같았습니다. 곧 도성에 물건을 올려야 할 텐데, 창고가 텅텅 비게 되었으니 지금쯤 똥줄이 타서 잠도 안 올 겁니다.”
화소군을 대신해서 그 곱상하니 어여쁜 사또에게 한 방 먹인 기분이었다.
화소군도 그걸 바라는 걸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당장은 체면을 살피느라 가져가라고 했지만, 그걸 왜 가져가라고 했나 싶어서 땅을 치고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꼴좋지요. 여기서 행수님의 눈 밖에 나면 어찌 되는지 잘 알고 있어야…….”
“시끄럽다.”
지적을 받은 사내는 당장 입을 다물었다.
딴에는 화소군의 비위를 맞춰 주기 위해서 열심히 말을 한 건데 그게 듣기에 거슬린 모양이었다.
싸늘하게 식은 화소군의 얼굴을 본 사내는 실수했다 싶어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화소군 뒤에 서 있던 검은 복장의 사내가 이만 물러서라며 눈치를 줬다.
칭찬을 받을 걸 기대하고 있었는데 한 소리를 듣게 된 사내는 조심스레 물러섰다. 사내가 서둘러 자리를 뜨는 순간 화소군은 수레 앞으로 걸어갔다.
잘도 순순히 내주었다. 도성으로 진상품을 올리는 게 걸려서라도 안 줄 만도 한데―. 다른 자들이야 물건을 빼앗았으니 이제 잘못했다면서 빌러 올 것을 기다리면 되겠지만, 그는 그리하지 않을 거다.
앉은 자리에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궁리하겠지. 분명 반격을 해 올 테고, 그건 지금까지 상대하던 자들과는 다른 방식일 거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니까.
화소군은 옆으로 손을 뻗었다.
“불을 가져와라.”
그 말에 사내가 옆으로 움직여 마당을 밝히던 횃불을 하나 뽑아서 들고 왔다. 사내가 건네는 횃불을 받아 든 화소군은 그걸 수레 위에 던졌다.
처음에는 상자 위에서 가만히 있던 불이 점점 커진다. 수레 위에 쌓여 있는 것들은 도성에 올라갈 만큼 귀한 것들이었으나, 그걸 태우려 하는 화소군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고 그건 뒤에 서 있던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씩 강해지는 불길을 살피던 화소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과연 사또가 어떤 방식으로 대응해 올 것인가. 수를 읽을 수 없으니 그만큼 위험하다는 의미로 틈을 주지 말고 바로 숨통을 죄이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조금 더 놀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화소군은 중얼거렸다.
“며칠 말미를 줘 볼까.”
그리해서 명월이 얼마나 자신을 즐겁게 해 줄지를 고대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봤자 그가 이 반양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만―.
화소군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 * *
유난히 구름이 많은 밤이었다. 어두운 구름이 달빛마저 가리어서 환한 빛을 몽땅 다 막아 버린다.
평상시와는 다른 밤이었다. 그건 아마도 자신의 마음이 복잡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거다. 마음을 차분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술렁거리는 건, 반갑지 않은 방문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달칵, 하는 소리에 백호는 옆으로 눈동자를 옮겼다. 보이는 건 술병을 내려놓는 꼽추 노인이었다. 평소 술을 마시는 걸 두고 뭐라 하진 않아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던 그가 술을 챙겨 주는 게 의외일 수밖에 없었던 백호의 눈썹이 위로 살짝 올라간다.
묻고 싶은 얼굴로 바라보는 백호를 두고, 꼽추는 그를 흘깃 보고는 몸을 돌렸다. 자리에 남은 건 술병과 잔이었다. 지금 이걸 마시라고 준 건가.
“고맙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딱딱한 인사에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꼽추가 뒤를 돌아본다. 차분한 얼굴로 쳐다보나 싶던 꼽추가 고개를 꾸벅이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그가 나가고 나서 백호는 술병을 들고는 매듭을 풀었다. 주둥이에 코를 대고 향을 맡자 달콤하면서 독한 게 톡 쏜다. 안색을 굳히나 싶던 백호는 그것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 넘겼다.
꿀꺽, 하고 술을 마시자 목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뜨거워진다. 정말 독한 술이다.
오랜 시간 곁에서 자신을 지켜봐 왔기 때문에 지금 심란한 상태라는 걸 느끼곤 일부러 이런 준비를 해 주는 걸 거다. 저 꼽추가 신경 써서 이런 일을 할 정도라면 지금 자신의 모습이 보기에 정말 이상하다는 건데―.
백호는 다시 술을 마셨다. 목을 타고 식도로 넘어간 술이 배 안쪽에 자리를 잡고는 그곳을 뜨겁게 만든다. 하지만 백호는 몸이 이보다 훨씬 더 뜨거워지는 때를 알고 있었다.
유명월. 그 꽃처럼 진한 향을 풍기는 놈을 안을 때마다, 훨씬 더 뜨거워진다.
자신의 모든 것들이 다른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데에 대해선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왜 자신은 몇 번이나 그놈을 안았던 걸까.
애초에 처음 시작이 이상했던 거다.
처음부터 손을 댈 생각은 없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리되었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지 한동안 정말 심란했던 거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은 흐르고 있지만 심란한 상황은 정리되지 않고 점점 더 복잡해지는 것 같다. 백호는 안색을 굳힌 채로 술병에 입술을 대고 한 번에 들이켰다.
꿀꺽, 꿀꺽, 하면서 술을 한 번에 비우고 난 후 입을 벌렸다.
“크―.”
정말 독하고 쓴 술이었다. 일부러 이런 걸 줘서 그냥 재워 버릴 셈이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암만 독한 걸 마셔도 취할 것 같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입술 주변을 닦아냈다.
이윽고 그의 입술을 타고 헛웃음이 흐른다.
“어쩌면 속아 넘어간 걸지도 모르겠군.”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백호는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복잡함이 내재된 눈동자 안쪽으론 일말의 결론이 내려진 듯싶었다. 술병을 내려놓은 백호는 허벅지 부근에 올린 제 손을 움켜쥐었다.
바람이 분다. 구석구석으로 퍼지는 바람은 반양 전체를 아울렀다.
그리고 그 반양의 끝자락에서 한 존재가 홀연히 나타났다.
검은 가면을 쓴 사내는 그림자처럼 한곳에 버티고 서 있다가 재차 바람이 불었을 때,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