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14/32)

4장

아침밥을 먹고 난 후, 특별히 준비된 숭늉을 마시는 명월은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냥 다른 때처럼 농을 건네거나 반찬이 뭐가 이상하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에 맞춰서 뭐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지금은 그리할 수도 없었다. 완전히 꿀 먹은 벙어리였다.

입을 다문 채로 조심스레 상 위를 정리하던 복운은 몇 번이나 명월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는 내내 눈을 내리뜬 채로 숭늉을 다 마신 명월은 그걸 상 위에 내려놨다.

“입맛에 맞으십니까? 조금 더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 괜찮다. 곧 동헌에 나가 볼 거다.”

동헌에 나가서 의자에 앉아 있는다 한들 딱히 좋은 방안을 강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안색도 나쁘고 하니 쉬라고 하고 싶어도 그리할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이 명월에게 있어선 가장 큰 위기 상황인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무 도움을 줄 수 없는 입장이 답답하고 싫기도 했던 복운은 안색을 굳힌 채로 눈을 내리뜨곤 서둘러 상 주변을 정리했다. 한 번에 모든 걸 정리하고 난 후, 복운은 상을 들고 일어났다.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건네는 말에 대해선 대꾸 없이 명월은 옆으로 치워 둔 상을 본인 앞으로 끌어당겨선 거울을 열었다. 그곳으로 얼굴을 댄 채로 안쪽에 비치는 본인 모습을 확인한다.

손을 들어선 턱을 쓰다듬는 걸 확인한 복운은 느리게 몸을 돌리곤 방을 빠져나왔다. 대청 끝에 상을 내려놓고 짚신을 구겨 신는 복운은 인상 쓴 얼굴이었다.

어쩌면 좋을까. 누군가 우리 사또를 도와줄 순 없는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서찰을 보낼 때 이번 일과 관련된 문장을 하나 더 넣을 것을―.

아니다. 그런 짓을 했다면 분명 ‘뭘 했기에 일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무능하군.’ 같은 식으로 나올지도 몰랐다. 다른 건 몰라도 명월이 평가절하를 당하는 건 싫었다.

지금까지 순탄치만은 않은 길을 걸어온 명월이었다. 가장 최악이라 생각되었던 순간도 특유의 재치로 위기를 모면하지 않았던가. 이번도 마찬가지일 거라며 복운은 상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씩씩하게 걸어갔다.

그렇게 복운이 사라지고 난 후, 맞은편 문이 열리고 아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여전히 이마와 손목 등에 붕대를 감고 있는 계진은 큰 눈을 굴리면서 대청 밖으로 한 발을 내밀었다. 문을 닫고 그 앞에 서긴 했지만 더 어딘가로 움직일 수 없는 듯 눈만 데굴데굴 굴린다. 그때 명월의 방문이 열리고 그가 나왔다.

전립이 걸리지 않도록 고개를 숙인 채로 문지방을 넘은 명월은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나와 있는 계진을 발견한 그의 입가로 온화한 미소가 걸린다.

“일어난 거냐. 아침은 맛있게 잘 먹었고?”

다정다감한 명월의 물음에 계진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뒤로 손을 뻗어선 문의 손잡이를 잡는다. 여차하면 다시 문을 열고 안으로 숨어들 것 같은 모습을 본 명월의 입가로 재차 미소가 그려진다. 그래, 라고 중얼거린 명월은 몸을 돌려선 대청 끝으로 갔다.

그곳에 앉은 명월이 목화 신을 신는 걸 본 계진은 당장 그리로 달려갔다. 맨발로 내려간 계진이 무릎을 꿇고 앉아선 신는 걸 도우려 하는 순간, 놀란 명월이 바로 발을 뒤로 물렸다.

“되었다. 지금 대체 뭘 하는 거냐.”

갑자기 달려온 것도 놀랄 일인데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건 혼자서도 신을 수 있다 말하려는데 계진이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사또의 종놈으로 여기서 일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종놈이라고?”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는 것도 놀라운데 종놈이라니. 지금 계진이 본인이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나 알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굳은 명월의 얼굴을 보고 나서 애가 탄 건지 계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또의 종놈이 되어서 이것저것 다 할게요. 할 수 있어요. 전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요.”

“얼마나 많은 거냐? 열 살 정도 된 거냐.”

“……그, 그렇습니다.”

명월이 콕 집어서 정확하게 나이를 맞추자 당황스러웠다. 낭패다 싶으면서도 그런 내색을 애써 숨긴 계진은 집중해서 명월을 바라봤다.

지금 자신이 꺼낸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어떻게든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계진을 바라보는 명월의 얼굴은 어느덧 평온한 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가만히 아이를 주시하던 명월이 고개를 숙이곤 다시 목화 신을 신었다. 다시 도와주고 싶었던 계진은 앞서 명월이 발을 물렸던 걸 떠올리곤 대나무처럼 뻣뻣하게 서 있기만 했다. 그러는 동안 맞은편 발에도 제대로 목화를 신은 명월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선 계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불안하고 초조한 거냐?”

“……아닙니다. 그저 도움을 받은 게 있으니 그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보답이라. 10살 먹은 어린애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아니라곤 해도 지금 계진이 불안하고 초조한 상태라는 걸 왜 모르겠는가.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아직 어머니나 귀물과 관련된 일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일 거다.

그런 것과 별개로 지금 이 세상에 혼자 남겨져 있다는 두려움이 아이로 하여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끔 한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서 이렇게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명월은 계진 쪽으로 허리를 굽혔다.

“몸은 다 나은 거냐. 이제는 아프지 않은 거냐?”

계진이 기다렸다는 양 고개를 들었다.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이제는 뭐든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명월 앞에서 뭐라도 할 수 있었다. 일단 시켜 보라고 하려던 순간 명월이 계진아, 하고 이름을 불렀다.

다정한 부름에 계진은 입을 다물곤 눈을 크게 떴다.

“네가 여기서 오랫동안 머문다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그러니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일단은 아픈 곳이 다 낫고, 괜찮아지면 그때부터 뭘 하면 좋을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내가 이런 말을 했다 해도 네 마음이 초조한 상태라면 복운을 따라다니도록 해라. 그는 여러 가지 일이 많아서 바쁜 사람이니 네가 같이 다닌다면 필시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리고 복운이라면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서 아이를 잘 다독여 줄 거라고 믿는다. 도성에 있었을 때에도 어린 아이가 종으로 들어오면 그 관리를 하기도 했었고, 성품도 좋으니 분명 잘 대해 줄 거다. 눈치껏 힘든 일도 시키지 않고, 그러면서 이런저런 배려를 해 주겠지. 그러기 위해선 일단은 계진의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차분하게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계진을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고개를 숙인 계진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가 곁에 있으면 도움이 안 되는 거지요?”

“전혀 그렇지 않다. 네가 여기에 있어 준다면 정말로 많은 도움이 될 거다. 그건 복운도 마찬가지겠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운이 나타났다. 상 정리를 대충 하고 나온 복운은 명월과 함께 있는 계진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인가 싶었던 그는 명월의 눈빛을 읽는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바로 계진 옆으로 걸어갔다.

“밥은 다 먹은 거냐? 그렇다면 상을 들고 나와야지.”

갑작스럽게 나타나 말을 꺼내는 복운을 두고 계진을 고개를 들었다.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는 계진을 보고 복운은 허리에 양손을 올렸다.

“정리까지는 아니라 해도 일단 여기 앞까지는 들고 나와야 내가 정리를 하든 말든 할 게 아니냐. 그 정도는 기본이다. 그리고 오늘 내가 할 일이 많으니까 같이 다니도록 하자. 계속 여기에만 있어서 관아가 얼마나 넓은 곳인지도 모르지? 내가 오늘은 너랑 같이 다니면서 어디에 뭐가 있고, 어떤 포졸들이 있는지 하나하나 전부 다 설명해 주마. 어떠냐? 좋으냐?”

복운의 긴말에 어벙한 상태로 있던 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좋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복운이 묻는 말에 대답 없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일 터였다. 그걸 모르진 않았던 복운은 재차 물었다.

“그러면 일단 상이나 들고 와라. 들 수 있겠지?”

물론 상 정도는 들 수 있었기에 계진은 급히 평상으로 올라갔다.

아이가 발바닥을 손으로 털어 내곤 급히 방으로 쏙 들어가는 걸 확인 후 명월이 복운을 돌아봤다.

“데리고 다니면서 잘 보살펴 줘라.”

“물론이지요. 아이에 대해선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가뜩이나 달리 신경 쓸 것도 많은 명월일 텐데. 이 정도 일쯤은 해결해 줄 수 있다면서 복운은 양손으로 마주잡은 채로 웃어 보였다.

마음이 무거운 명월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서 딴에는 노력하는 거였다. 명월은 그런 복운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는 몸을 돌렸다.

명월이 마당을 가로질러서 대문을 넘어가는 걸 본 복운의 입가에 서려 있던 미소가 바로 지워진다. 진지한 얼굴이 된 복운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고, 그때 계진이 상을 들고 나왔다. 그걸 보자 복운은 냉큼 그리로 팔을 뻗으면서 이리로 줘라, 라고 말했다.

* * *

불가능한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 구할 수 없는 건 구할 수 없는 거라고, 딱 결론을 내리고 다른 방안을 강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다음 방안이라는 건 파면밖에 없었다. 파면이 되면 모든 걸 잃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사또가 된 덕분에 좀 사람답게 자신을 대해 주던 집안사람들이 한순간에 안면몰수하고는 등을 돌릴 거다. 전과 다르게 본가에 들어가 살 수도 없을 테지.

그나마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형님들은 냉담해질 테고, 어머니는 자신을 쳐다도 보지 않겠지. 그리고 아버지는…….

완고한 부친을 떠올린 명월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름 심각한 생각을 하는 중인데 왜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면서 헛기침을 하던 명월은 재차 머리를 굴려 봤다. 그러다가 파면을 당하면,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이 생기겠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먹고살 돈이 없었다. 문제를 일으키는 순간 집안에선 쫓겨날 텐데, 이후로 뭘 해서 벌어먹어야 한단 말인가. 사또가 된 지 오랜 것도 아니고, 남들처럼 뒷돈을 받아먹은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적당히 쓸 만큼 쓰면서 산다지만, 파면이 되는 순간 모든 게 몰수가 될 테니 당장 이튿날 뭘 해 먹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될 거다.

손재주 몇 가지는 가지고 있으니 계속 배를 곯진 않겠지만, 자신을 뭐처럼 졸졸 따르는 복운은 어쩌고 계진은 어찌할 것인가. 그리고 이 반양은 어찌할 거란 말인가.

이런저런 문제가 많은 곳이었다. 자신이 떠나고 나면 늘 그래 왔듯 똑같은 일이 반복될 거다.

귀물이 횡행하고,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저 화소군이 날뛰겠지.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닌가.”

목을 타고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묘하게 차갑다. 그건 비단 느낌 탓만이 아니었다.

명월은 걸음을 멈추곤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감고 얼굴은 하늘을 향한 채로 있던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지. 왜 이렇게 약해진 건지. 처음 이방 일을 도왔을 때부터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멈추지 않고 달렸던 자신이었다. 이왕 시작하게 된 거 끝까지 밀고 나가는 수밖엔 없었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은 명월은 고개를 저었고 다시 앞을 보고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 저 앞에 서 있는 이방을 발견한 명월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좋은 아침이네.”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명월이지만, 정말 그의 속이 편치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이방이었다.

“간밤에 날이 흐려서 걱정이 많았는데 아침이 되니 햇볕이 좋아져서 다행입니다.”

“그런가. 어쩐지 어제 잘 때 내내 머리가 아프더라 했어.”

머리가 아픈 건 다른 이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둘 다 언급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사또인 명월이 처리할 일들은 앞으로 조금 더 남아 있었다.

“감옥에 가둔 사내들은 어찌할까요.”

“아, 그러고 보니 그들도 있었지.”

진상품에 대해서만 생각하느라 그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 그들이 있었지. 어떤 식으로든지 처리를 해야 할 이들이 아니던가. 문제는 남들 보기엔 창고를 하나 불태운 건데 그걸 두고 어찌 처벌을 내려야 하느냐는 거다. 진짜 죄목을 따지고 들어가면 일이 굉장히 커지게 될 텐데.

잠깐 동안 파면이 됨으로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닐까 싶었으나, 그게 아니라는 걸 재차 상기하게 된다. 자신이 이 자리에서 물러난다 하더라도, 이번 일은 쉽게 끝나지 않을 거다. 그래서 더 문제인 거라며 명월은 일단 그 사내들에게 가 보자 말을 꺼냈다.

* * *

안쪽 감옥에 앉아 있는 사내는 전부 다섯이었다. 묶여 있어서 거동이 불편할 뿐이지 그 외엔 밥도 꼬박꼬박 넣어 주고 험한 짓을 하는 게 아니니 감옥 안에 있는 게 크게 힘들진 않을 거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생각일 뿐으로, 지금 감옥 안에 들어가 있는 자들 심정은 어떨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 나타나자마자 죽일 것처럼 노려보는 눈빛만으로도 저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곁가지들은 상대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명월은 그들을 다 지나치고 가장 안쪽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가서 멈추어 섰다. 가운데 자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사내는 나타난 명월을 보고도 주눅 든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듯 응시하는 것에 참다못한 이방이 앞으로 나섰다.

“사또께 그 무슨 방자한 눈빛이냐. 당장 고개를 숙여라.”

이방의 말에 사내는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그를 흘겨봤다.

“딸년이 살았다고 기세가 올랐군.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다. 이곳에 나고 자란 이들은 여기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어. 네놈의 딸도 지금은 숨이 붙어 있지만, 올해를 못 가서 끊어질 거다. 그러니 그때까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있거라.”

사내의 말에 이방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지금 이 자리에 명월이 없었다면 당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사내에게 뭔 짓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등 뒤에 서 있는 이방의 험악한 기운이 느껴졌던 명월은 그를 돌아보며 됐네, 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여긴 내가 혼자서 해 볼 테니 자네는 나가 있게.”

사내의 말에 이를 악문 채로 분을 삭이던 이방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오만방자한 자입니다. 저런 놈을 일부러 사또께서 대면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곤장을 맞으면 제정신이 돌아올 겁니다.”

“본인이 하는 일이 옳고 우리가 다 틀리다 생각하는 자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저들 귀에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은 모두 헛소리일 거네.”

명월의 말에 이방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명월을 혼자 두는 건 걱정스러웠지만, 어차피 사내는 밖으로 나갈 수 없고 포박된 상태였다. 저런 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긴 할 테지만―.

생각을 하던 이방은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부르십시오.”라고 말하곤 고개를 꾸벅이며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이방이 몸이 돌리는 순간에 맞춰서 바로 사내가 빈정거렸다.

“대단한 심복이오. 그 고운 얼굴로 사내까지 후리고 다니는 모양이시오.”

모욕감을 느낄 만한 조롱에도 명월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미처 자리를 뜨지 못한 이방이 그 말을 듣고선 대번에 험악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가 평온한 얼굴을 한 명월을 보곤 이를 악물었다.

매서운 눈으로 노려본 이방이 나가고 난 후에도, 사내의 빈정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저 이방을 홀리다니. 정말 대단한 능력이시오. 사또께선 아래 입을 아주 잘 쓰시는 모양이외다.”

“그러는 네놈은 위에 주둥이만 터져 있구나. 그러다 안 좋은 꼴을 당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거냐.”

이방이 감옥을 나서자마자 차분하게 하는 말에 사내는 바로 코웃음을 쳤다.

“애송이 사또 주제에 뭘 할 수 있다고. 당신은 이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소.”

“네놈들을 부리던 화소군 놈은 뭐든지 할 수 있고?”

“거기서 왜 그자의 이름이 나온단 말인가. 상관없는 자의 말을 꺼내서 내게서 어떤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다 쓸데없는 짓이오. 그 장사치나, 당신이나 둘 다 이 고을에는 필요 없는 자들이오. 그러니 괜한 문제 일으키지 말고 이쯤에서 물러나시오. 이번에 창고에 불을 붙인 건 어디까지나 경고의 의미이고, 거기서도 물러서지 않는다면 정말 호된 꼴을 당하게 될 것이오.”

거기까지 말한 사내는 명월에게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화소군에 대해 물었을 때, 사내는 동요가 없었다. 분명 그의 사주를 받아서 움직인 거라고 생각했는데 방금 모습을 보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정말 그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지금 이자를 보면 창고에 불을 붙인 건, 오로지 그들의 판단으로 내린 결정인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애초에 창고에 해골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알게 된 이들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되기까지엔 분명 정보를 일러 주거나, 선봉을 하던 자가 있었을 거다. 이들은 그런 식으로 휘말려 들어간 거고. 하지만 이자들은 그걸 인정치 않을 거다.

그저 저들 보기에 자신이 이상한 짓을 하고 고을에 해가 될 것 같으니, 이런 식으로 행동을 하고 그게 옳다고 굳건하게 믿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고 멍청한 유형이었다.

본인이 이용당하고 있음에도 그걸 모르고 저렇게 당당한 꼴이라니―.

명월은 천천히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앉아 있는 사내를 바라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명월이 왜 갑자기 쪼그리고 앉는지는 모르겠으나, 신경 쓰지 않겠다는 양 사내 또한 안색을 굳힌 채로 명월을 노려봤다. 그 매서운 눈빛에도 명월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러다 물었다.

“네놈의 가족들 중에서 죽은 자가 있더냐.”

“…….”

입을 다문 사내는 대번에 정색을 했다. 어찌 그런 재수 없는 말을 할 수 있냐면서 노려보는 사내의 얼굴을 본 명월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아직은 없겠구나. 하지만 내 장담하건대. 다음에 죽을 자는 네놈의 가족들 중에서 나올 거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모든 게 돌고 도는 법이지. 그곳에서 네놈의 가족이라고 무사할 성싶더냐. 지금은 네놈의 가족이 해를 입지 않았으니 그리도 낯짝을 뻔뻔하게 들고 있는 거지. 만약, 가족들 중 하나가 문제가 생기게 된다면, 넌 가장 먼저 나서서 난리를 칠 놈이다.”

사내의 말을 중간에 자른 명월은 나직한 목소리로 조근조근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억양에 묘한 기류가 섞여 있어서 작은 소리였음에도 사내에겐 무척 잘 들렸다. 오한이 드는 걸 느끼면서도 사내는 여전히 경직된 얼굴로 목소리를 키웠다.

“이곳은 신성한 기운으로 감싸인 곳이오! 죽은 것들은 모두가 그 신성함을 흩트리는 것들이었소! 이 땅의 뜻을 거스르는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화를 당하게 될 거고, 그건 이방의 딸년도 마찬가지요! 지금은 괜찮아도 우리가 아닌 사또를 도운 것으로 인해 제대로 화를 입게 될 것이오! 그때 가서 후회하겠지! 사또도 마찬가지요! 이 신성한 땅을 어지럽히려 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저주를 받아,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죽게 될 것이오! 그 전에 여기서 썩 물러나시오!”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를 들은 명월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서 핏―하고 웃고 말았다.

“여기가 신성한 땅이라고?”

“그렇소! 여긴 신령님의 보호를 받는 신성한 땅이오! 여기는―!”

“사람이 뒈져 나는 것도, 그 신령님의 보호 덕분인 거냐.”

조금 전 본인이 명월을 두고 입에 담지 못할 조롱을 한 건 기억도 나지 않는 모양인지, 사내는 충격 받은 얼굴로 크게 입을 벌렸다.

“어찌 그런 불경한 말을―.”

덜덜 떨면서 입을 다무는 사내를 두고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곤 네놈 좋을 것만을 받아들이고 있구나. 지금 네놈이 하는 짓이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겠지만, 언젠가 반드시 되돌려받게 될 거다. 다음에 네놈의 가족들 중 하나에 문제가 생긴다면 난 절대로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사내처럼 똑같이 굴지 않을 셈이었지만, 사람이다 보니 감정적으로 나가게 된다. 저 화소군의 꼭두각시가 되어서 움직이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놈이 어디서 저런 식으로 지껄이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얼굴을 일그러뜨리거나 목소리를 높인 적 없는 명월이지만, 그런 그와 얼굴을 마주한 사내는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명월이 참 대하기 어렵고 힘들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사내는 애써 말을 쥐어짜 냈다.

“사또께서 뭘 할 수 있다고, 도움을 준다 만다 하시오―.”

지금 여기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었다. 그걸 모르는 놈들이야 자신이 그저 한량 사또로 보이겠지만―.

귀가 막힌 놈에게 뭔 말을 하겠나 싶었던 명월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내 눈에는 네놈들이 보이지 않는 게 보이고, 들을 수 없는 게 들린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

자신을 따라서 고개를 드는 사내를 내려다본 명월은 뒷짐을 지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추잡하고 더러운 게 바로 등 뒤에서 칼날을 들이밀고 있는데도, 이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네놈들은 먹히기 위해서 키워지는 도살장의 소나 돼지일 뿐이다. 그래. 그렇게 계속 있거라. 그러다가 그냥 뒈지거라.”

하늘에 두고 장담하건대, 저놈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절대로 도와주지 않을 거다.

자신은 신선이 아니었다. 당한 일이 있는데 그걸 잊고 팔푼이처럼 ‘모두를 도와주겠다.’라고 할 순 없었다. 당한 건 고스란히 되돌려줄 터였다.

아침에는 마음이 뒤숭숭해져서 잠시 약해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놈도, 화소군 그놈에게도 한 방씩 먹여 주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것 같았다.

오랫동안 사내를 내려다보던 명월이 몸을 돌린다. 느릿하게 멀어지는 명월을 두고 사내는 마른침을 삼켰다.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던 사내의 얼굴이 붉어진다. 명월이 잘난 척 말할 때 아무 대꾸를 못 했다. 그 무슨 추태인 건가 싶었던 사내는 다급히 외쳤다.

“어디서 감히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천벌을 받으실 거요! 사또께선 이 땅을 빠져나가는 순간 벼락을 맞으실 거요! 내 장담할 테니, 어디 두고 봅시다!”

뒤가 왜 이렇게 시끄러운지 모르겠다. 개가 짖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손가락을 세워 귀를 후벼 파면서 명월은 감옥을 빠져나왔다.

포졸이 왔다 갔다 하고 있고, 그 앞쪽엔 이방이 있었다. 초조한 얼굴로 왔던 이방은 생각보다 일찍 나오는 명월을 보고 바로 그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을 리가 있겠나. 근래 들어서 제일 기분이 언짢군.”

괜찮다는 빈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저럴까 싶어서 이해가 되었던 이방은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숙이는 이방의 모습에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한 건가 싶었던 명월은 허리에 한 손을 올렸다.

일단은 괜한 타박을 한 것에 대한 사과를 해야겠지. 그래서 이방에게 고개를 돌리면서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저 앞에서 달려오는 호방이 보였다.

“사, 사또!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헐레벌떡 달려오는 호방을 보자마자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싸하게 가라앉는다. 그걸 느끼는 건 비단 명월뿐만이 아닌 듯, 이방의 표정도 좋지가 않았다. 명월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손님이 찾아왔다는 말만 들으면 소름이 끼치는데, 내 반응이 이상한 건가.”

“요 며칠 많은 일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호방이 호들갑을 떨면 떨수록 이방 또한 불길한 기분이 드는 걸 어찌할 수 없었기에 그의 안색도 눈에 보일 정도로 굳은 채였다. 그러는 동안 둘 앞으로 달려온 호방은 바깥을 가리키며 다급히 말했다.

“바깥으로 나가 보십시오. 소, 손님이 오셨습니다.”

설마하니 화소군 그놈이 찾아온 건 아니겠지. 그 외에도 몇몇 보고 싶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병현 대감이라든가.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기방에서 돌아오는 길에 습격을 했던 놈들에 대해서도 처리를 해야 하는데 화소군 덕분에 깜박하고 있었다. 그건 따로 시간을 내서라도 해결을 봐야지.

왜인지 점점 더 그냥은 당하고 앉아 있기가 싫었던 명월은 어서 밖으로 나가 보라며 호들갑을 떠는 호방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그래. 대체 누가 찾아왔기에 이 난리인가.”

“도성에서 내려오셨다고 하는데, 일단 사또께서 본인 얼굴을 보면 잘 아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도성에서 내려왔다고?”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벌써 아버지 귀에 들어간 건가 하는 거였다. 그래서 어찌 된 상황인지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 사람을 보낸 거라면―.

아니면 본인이 직접 내려오신 걸지도 몰랐다. 그런 행동을 하실 만한 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불현듯 드는 불길한 예감에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던 명월은 급히 움직였다.

서두르는 명월의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감지한 이방도 서둘러 뒤를 따랐다.

* * *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외문 밖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은 전무했다. 그런 곳에 한 사내가 팔짱을 낀 채로 서 있었다. 그 뒤로는 커다란 수레가 놓여 있고, 그곳엔 상자가 차곡차곡 쌓여 사내 키 높이만큼 올려져 있었다.

이제는 수레만 봐도 신물이 넘어온다 할 만큼 질리는 구석이 있었던 명월은 반사적으로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인상을 쓴 채로 수레를 보다가 눈을 내리떠선 그 앞에 서 있는 사내를 재차 확인했다.

그는 송낙을 쓰고 승복을 입고 있었다. 그제야 상대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와서 반사적으로 저도 모르게 승려인가, 라고 생각하던 명월은 이윽고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상대에게서 풍기는 느낌은 익히 아는 이의 것이었다. 송낙을 써서 코 아래까지 얼굴을 가리고 있다 해도 말이다.

저놈이 지금 대체 뭔 생각으로…….

거기까지 생각한 명월은 주변을 살폈고, 마침 뒤따르던 이방과 시선이 부딪쳤다.

“승려와도 아시는 사이셨습니까?”

그럴 턱이 있겠나. 아니라고 한마디 하고 싶지만, 저놈이 이리 나오는 이유나 들어 보자 싶었던 명월은 주변을 살폈다. 포졸은 물론이거니와 호방까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승복을 입은 자와 자신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썩 꺼지라고 하고 싶은 걸 꾹 참은 채로 명월은 앞으로 걸어갔다. 이방이 따라 움직이려 하는 걸 고개를 젓는 것으로 제지한 명월은 일단 승복을 입은 자 앞까지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서서 위를 흘깃 보자, 코 위까지는 보였다. 그 이목구비를 확인하는 순간 명월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네놈이 지금 제정신인 거냐.”

“입 한번 거칠군.”

혀 차면서 타박하는 소리에 명월은 입술을 씰룩였다.

백호. 그가 갑자기 승려복을 입고 이렇듯 갑작스럽게 나타났는데 말이 곱게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고운 말을 듣길 원한다면 조금은 상식적인 행동을 취해야 할 게 아니던가.

명월은 뒤에 서선 이쪽을 구경하듯 바라보는 이들을 의식하며 재차 백호에게 말을 건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길 찾아온 거냐. 그리고 이것들은 죄다 뭐야?”

명월은 백호의 뒤에 있는 수레를 눈으로 가리켰다. 만에 하나라도 백호가 이상한 짓을 하기 위해서 저런 걸 끌고 나타난 거라면 문제 일으키지 말고 썩 물러나라는 말을 할 셈이었건만 그때, 백호가 턱짓을 했다.

“뭔지 궁금하면 확인해 봐라.”

“네놈이 가지고 온 거면 이상한 것일 게 뻔하지. 굳이 확인할 필요가 어디에 있다고―.”

“살펴보지 않으면 후회할 거다.”

“…….”

입을 다문 명월은 백호를 노려봤다.

아침부터 감옥 안에서 당한 일 때문에 무척 불쾌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제는 백호까지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나 심란하게 한다. 대체 무슨 생각인가. 그리 생각하면서 명월은 일단 백호를 지나쳐 수레에 가득히 실린 상자를 올려다봤다.

차곡차곡 쌓인 상자가 많기도 했다. 무거울 텐데 이걸 백호 이놈이 혼자 끌고 온 걸까.

상자를 열었는데 이상한 게 들어 있으면 어쩌나 싶었다. 일부러 열어서 확인할 필요 없이 이 녀석을 쫓아내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백호를 흘깃거리던 명월은 수레 뒤쪽에 쌓인 것들 중에서 위쪽에 있던 걸 들어 올렸다. 크기가 있다 보니 꽤나 묵직했다. 그걸 수레 뒤쪽의 좁은 공간에 올리곤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 곱게 담겨져 있는 탐스러운 버섯을 확인하곤 그대로 굳어 버렸다.

멍하니 버섯을 보다가 뚜껑을 닫고는 그걸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두었다. 그러곤 옆에 있던 상자를 들고 내려와서 뚜껑을 열어 보자 그곳에 담겨 있는 건 산삼 다섯 뿌리였다. 뚜껑을 여는 순간 코끝을 찌르는 상쾌한 향에 명월은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

설마, 그럴 리가 없었다. 지금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전부 이 상자에 담겨 있는 거라면―.

명월은 산삼이 들어가 있던 상자의 뚜껑을 닫고 당장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뒷짐을 진 채로 서 있는 백호를 봤다. 여전히 승복을 입은 채로 그 자리에 고대로 서 있었다.

그가 저런 말도 안 되는 옷을 입고 이런 것들을 끌고 나타난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산삼이 들어가 있는 상자를 닫은 후 그걸 원래 자리에 둔 명월은 재차 백호 앞으로 걸어갔다.

“너 솔직히 말해. 이것들이 전부 다―.”

어디서 난 거냐고 물으려던 찰나 얼굴에 닿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아차 싶었던 명월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호방과 이방, 포졸들 모두가 자신과 승려와의 관계를 궁금해하는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싶어 의아하게 생각하는 건 저들이 더할 터였다. 그런 그들 앞에서 백호를 잡고 늘어질 순 없었다. 인상을 쓴 채로 있던 명월은 백호의 손목을 덥석 붙잡곤 그를 질질 끌고 갔다. 의외로 쉽게 끌려오는 백호를 데리고 관아로 들어가려다 말고 명월은 뒤를 돌아봤다.

“다른 이들이 보기 전에 수레를 끌고 들어와라. 어서―.”

“아, 네. 그리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포졸들이 수레를 챙기기 위해서 나가는 동안에도 이방은 명월이 붙잡고 들어가는 저 승려는 대체 무언가, 그런 의문이 담긴 눈으로 그들을 주시했다.

* * *

사람이 거의 출입하지 않은 객사에 들어선 명월은 문을 닫고는 바깥소리에 집중했다. 이리로 오는 내내 마주치는 이들에게 객사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말해 두었기 때문인지 조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명월은 당장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여전히 송낙을 쓰고 있는 백호가 서 있었다.

인간도 아닌 주제에 승복이 가당키나 한가.

표정을 일그러뜨린 명월은 당장 백호의 송낙을 벗기려 했고, 그것에 백호는 어허―하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러곤 쓰고 있는 송낙의 끝을 잡은 채로 혀를 찼다.

“명색이 사또라는 자가 승려에게 너무 무례한 거 아니오?”

“승려는 무슨. 왜 그런 어울리지도 않는 복장인 거야? 진짜 승려를 모독이라도 할 셈이냐?”

“이상한가? 딴에는 잘 어울린다 생각하고 선택한 차림새인데 말이야.”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후, 백호는 쓰고 있던 송낙을 벗었다. 그러자 나름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를 한 백호의 얼굴이 드러났다.

되지도 않는 차림새로 꾸몄다 해도 상대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던 명월은 드러난 백호의 얼굴을 보고는 바로 안색을 굳혔다. 화가 단단히 난 듯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송낙으로 부채질을 했다.

“덥군. 나가서 시원한 물이라도 한잔 떠 와 봐.”

마치 아랫사람 부리듯 말한 백호는 거침없이 안쪽으로 들어가선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곳에 편하게 앉은 후에 다리를 꼬기까지 한 후, 여전히 송낙으로 부채질을 하던 그는 서 있는 명월을 흘겨봤다.

왜 가만히 서 있는 거냐며 타박하듯 던지는 시선에 명월의 표정이 더 굳어진다.

매서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호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뭐?’ 라고 되묻는 시선을 던져 온다. 양손을 움켜쥔 명월은 백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멈춰 섰다. 눈을 내리뜬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냐. 안 그래도 복잡한 상황이니 네놈이 일부러 추가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그래. 딱 봐도 복잡한 사정인 것 같아서 도와주러 온 거다.”

되지도 않는 승복 입고 와서 사람 복장 뒤집히게 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백호가 기거하는 곳으로 떠나라 할 셈이었다. 그런데 도와주러 온 거라는 말에 명월은 말문이 막혔다. 지금 말을 듣긴 했어도 그걸 믿을 수 없기에 반응은 한참 후에 흘러나왔다.

“……뭐라고?”

되묻는 명월의 얼굴이 구겨지는 걸 본 백호는 송낙을 옆 탁자에 올려뒀다.

“이상한 놈팡이가 진상품을 전부 다 가져갔다 들었다. 그래서 대충 비슷한 걸 추려서 들고 와 준 거다. 그런 물건들이 한꺼번에 떡하니 나타난 것도 이상하겠다 싶어서, 일부러 도성에서 내려온 아는 사람 둔갑을 해서 이런 꼴사나운 차림인 거다. 그런데 네놈은 아직도 그렇게 서 있는 거냐. 이쯤 되면 고맙습니다―하고 절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

길게 이어지는 백호의 말을 듣고는 있지만, 그게 제대로 접수되지 않는 명월이었다. 오른쪽으로 들어온 말이 왼쪽 귀로 빠져나간다.

한참 동안 백호를 내려다보던 명월은 중얼거렸다.

“뭐라고?”

당장은 사태가 파악되지 않는 것 같은 명월을 두고 백호는 한숨을 쉬었다. 손가락으로 제 이마를 긁었다.

“이렇게 이해가 느려서야. 네놈에게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왔다는 말이다.”

“……어째서?”

명월의 반문에 백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이쯤 되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법했다. 그런데 왜 이놈은 아까부터 답답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평소에도 곰 같은 짓을 종종 했었던 것 같다. 본인은 잘 숨긴다 싶어도,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빤히 보인다고나 할까.

이런저런 허점이 많은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답답할 줄은 몰랐다. 여기서 더 무슨 설명을 해야 하는 건가 싶었던 백호는 인상을 쓴 채로 고개를 들었다.

이 답답한 놈아. 그러니까 내가 들고 온 물건을 고대로 도성으로 올려 보내면 된다고―.

그렇게 한마디 하고 싫은 소리 잔뜩 해 줄 셈이었던 백호는, 멍한 명월의 얼굴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미간으로 몇 개나 되는 주름이 생긴 명월은 언뜻 보면 화가 난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게 진실이 아니고, 정말은 혼란스러워하는 상태라는 게 느껴졌다.

명월은 정말로 지금 이 상황이, 백호가 이렇게 해 주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래서 재차 묻게 되는 거다.

“네가 왜 그렇게까지 해 주는 건데?”

지금 명월은 진심으로 의아했기 때문에 이리 묻는 거였다. 백호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해 주고 “네놈은 내게 은혜를 입은 거다.” 운운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전에 있던 은혜나 도움이 명월이 원치 않은 쪽이라면 이번 건 아니었다.

이번 일은, 지금까지 그 어떤 경우와도 달랐다. 바닥이 보이지 않은 깊은 강 속에 머리끝까지 푸욱 들어간 채로 혼자서 열심히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 누군가 갑자기 손목을 잡아선 위로 주욱 끌어올려 준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서 지금 명월은 그간 자신이 얼마나 답답해했던 지를 깨닫게 되었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이상하고, 묘하면서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밀려들어 왔다.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눈빛으로 응시해 오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입을 다물었다. 입술을 달싹이려다 말고 꾸욱 다물곤 마른침을 삼키는 것에 맞춰서 명월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뭔가 달리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냐?”

이건 또 무슨 신소리인가.

잠자코 있던 백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불쾌함으로 굳어지는 백호였으나, 그런 그를 바라보는 명월은 급격하게 의심을 드러냈다.

“갑작스럽게 이런 짓을 하는 건 분명 노리는 게 있어서이기 때문일 게 아니야. 뭐야? 뭘 원하는 건데?”

“……나 정말 미치겠네.”

답답함을 참지 못한 백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모처럼 성가실 정도로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서 힘들게 모아온 거였다. 기껏 준비를 해 왔는데 명월의 반응이 기대한 것에 한참이나 미치지 못했다.

애초에 명월이 고맙다면서 순순히 웃는 얼굴로 물건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대놓고 의심부터 하니 백호도 그리 썩 유쾌하지가 않았다.

“속고만 살았냐. 그냥 가지고 왔으니까 받으면 될 거 아니야.”

“너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저런 걸 들고 왔다고 고맙습니다, 라고 하면서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저러다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없어질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다. 그러니까 그냥 받아.”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애초에 넌 인간도 아니고―!”

목소리가 커지려 하는 순간 명월은 당장 제 입을 한 손으로 막고는 뒤를 돌아봤다. 바깥이 잠잠하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앞을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성가시다는 양 쯧쯧, 하고 혀를 찼다.

“나도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하는 자가 아니다. 그런 내가 저런 걸 들고 왔으면 고맙습니다, 하고 끝내. 알겠냐?”

괜히 부지런히 굴었다면서 후회하게 만들지 말고 말이다.

팔짱을 끼는 백호를 앞에 둔 명월의 표정은 점점 오묘한 것으로 바뀐다.

이 녀석의 의중이 대체 무얼까.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의혹을 담아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도 백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백호의 행동이 갑작스럽긴 하지만, 그에 비례해서 놀라움도 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궁리를 하던 참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도움의 손길이 내밀어지다니. 그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백호라니. 처음에는 마냥 당혹스럽고 껄끄러웠던 감정이 차차 정리 되는 걸 느끼면서 명월은 물었다.

“이번 일은 어떻게 알게 된 거냐.”

“여기저기서 쑥덕거리는데 어찌 모를 수 있겠냐.”

“벌써 이번 일이 소문이 되어서 떠도는 건가.”

“좁은 곳이다. 그런 일이 생기면 소문이 나는 건 반나절도 안 걸리지.”

대낮에 떡하니 수레를 끌고 나타나 관아에 들어간 물건을 싣고 돌아갔다. 그것만 보더라도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두가 알 일이었다.

사또가 줄을 잘못 서서 끈 떨어진 인형이 되었다고 수군거리는 게 대부분이었으나, 구체적으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명월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들어도 기분 나쁠 일이었으니 말이다.

물건을 보내야 할 날은 코앞인데, 진상품이 몽땅 사라졌다. 지금 명월의 상태는 누가 보더라도 심각했다. 그런 만큼 시끄럽게 굴지 말고 그냥 받으면 오죽 좋은가.

명월이 뻣뻣하게 굴면 굴수록 괜히 들고 왔나 싶었다. 실제로 점점 안색을 굳히는 백호를 두고 잠자코 있던 명월이 물었다.

“저것들은 전부 다 어디서 난 거냐?”

“알아서 구하는 법이 있다.”

“그러니까 어디냐고.”

연거푸 묻는 말에 백호의 눈썹이 위로 확 올라간다.

힘이 들어간 눈과 다물린 입매에서 지금 백호가 불쾌해한다는 걸 감지한 명월은 목까지 찬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이상한 물건을 올려서 더 낭패를 볼 수 있으니, 어디서 들고 온 건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백호는 명월의 말이 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물건을 얻으려고 동분서주해야 하는 인간들과 자신은 달랐다. 그냥 필요하다 싶으면 여기저기서 얻어 낼 구석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걸 일일이 확인해 보겠다는 거다. 저런 생각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면서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넌 그렇게 못 믿어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는 거냐.”

다른 이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말은 그냥 믿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런 억양으로 묻는 말에 명월은 담담히 대꾸했다.

“어려서부터 누군가를 믿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런다. 지금 상황에선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난 안 믿어.”

저렇게까지 말하면 더 뭐라 할 수가 없다. 어려서부터 특이한 점이 있었으니 삶이 얼마나 팍팍했겠는가. 마음을 줄 만한 상대도 없었을 거다. 이런 상황에서 도와주겠다면서 내민 손도 ‘어떤 속셈이 있는 걸까.’라고 의심부터 하게 될 정도로 말이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는 걸 알면서도 귀엽지 않게 여겨진다.

하나도 안 귀엽군.

속으로 중얼거린 백호는 혀를 찼다. 끌끌, 거리는 혀 차는 소리에 명월의 안색이 더 굳어진다. 지금 자신의 상태를 한심하게 여기는 것 같으니 그런 식으로 혀를 차지 말라 하고 싶었지만, 괜한 자격지심인 것 같아서 말았다.

고개를 돌린 명월의 얼굴은 한결 안정되어 있었다. 백호의 등장이 갑작스럽고, 그가 가지고 온 물건들도 놀랍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는 점점 실감이 나고 있었다.

저 귀한 물건들이 다시 생겼다. 물론 진상품에 적합한 것인지 확인하는 절차가 남아 있긴 했지만, 다른 이도 아닌 백호가 준비한 것이니만큼 질은 확실할 거다. 대충 숫자가 맞다 싶으면 다 준비해서 올려야겠지. 동시에 의문점이 하나 들었다.

명월은 백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가 놈이 그런 짓을 하는데도 왜 말리지 않은 거냐.”

그 순간 백호의 눈동자 안쪽으로 작은 의문이 서렸다. 당장엔 그게 누군지 알 수 없어 하던 백호지만, 이윽고 아아―하는 소리를 냈다.

“너라면 막는 게 가능했을 거다. 왜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 걸 방치하고만 있었던 거냐.”

백호가 마음만 먹는다면 귀물은 물론이거니와 화소군이 하는 짓도 모두 막을 수 있었을 거다. 그로 말미암아 피해를 보고 목숨을 잃는 자들을 도와주는 것도 가능했겠지.

그런데 백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대체 무언가. 그저 ‘장인’이라는 그럴싸한 허울을 뒤집어쓰곤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것뿐이던가.

잘 보면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고, 지닌 능력도 많은 것 같은데 왜 그걸 발현하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 기이한 반양 땅에서 그가 맡은 직책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담담히 말했다.

“결국엔 그 모든 것들이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재(人災)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개입할 순 없는 노릇이야.”

“그게 어떻게 인재라는 거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어떤 목적을 가지고 화소군 놈이 계진을 귀물에게 유인했던 거다. 화소군과 귀물 때문에 계진은 죽을 뻔했다. 그건 인재라 할 수 없었다.

헛소리를 할 거라면 차라리 입 다물고 조용히 있으라 하려던 찰나 백호가 말했다.

“네놈이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더냐. 한 두어 달은 되었더냐. 그러는 동안 네놈은 이곳에 대해 모든 걸 다 알아낸 것이더냐. 그래서 이토록 오만방자하고, 건방지게 된 거냐.”

백호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말이 지나치게 차가웠다. 지금까지 들어 본 적 없는 억양과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방금 자신이 한 말 중에 무엇이 그를 건드린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굳은 백호의 얼굴을 보는 게 낯설어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는 명월을 본 백호의 미간으로 점점 주름이 잡힌다. 화가 난 듯 인상을 쓴 그는 혀를 차면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괜한 말을 한 건가 싶어, 일말의 후회가 묻어나는 얼굴로 있던 그는 팔짱을 낀 채로 명월을 내려다봤다.

“하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난 아무 때나 나서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나서는 때는 딱 한 순간뿐이다.”

“……그게 언젠데.”

앞선 백호가 보인 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묻는 목소리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 백호가 입꼬리를 길게 올리며 웃었다.

“돌림병이 돌아서 이 고을의 모든 이들이 죽는 날이지.”

“…….”

처음에는 가만히 있던 명월의 눈이 서서히 크게 떠진다.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지만, 그래도 충격이 상당한 듯 얼어붙은 명월을 두고 백호는 웃음을 바로 지워 버렸다.

괜한 말을 한 건가. 후회라는 감정이 들었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내뱉어진 말이었다. 그걸 철회할 생각도 없고, 또 그게 거짓인 것도 아니었다.

백호는 팔짱을 낀 채로 명월 앞으로 얼굴을 숙이며 “잘 들어.”라고 말했다.

“난 이곳의 수호신 나부랭이 같은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나에게 뭔가를 바라지 마. 네놈 일이 아니라면 난 나서지도 않아. 알겠냐. 이 건방진 놈아.”

그 순간 명월이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

지금 명월이 당혹스러워하는 건 자신이 얼굴을 가까이 붙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들은 말이 경악스러웠기 때문일까.

쉽사리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화제였기 때문에 이런 모습인 게 아니겠는가. 어쩌면 두려워할지도 모르지. 건방진 명월이 고작 그런 말에 자신을 두려워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왜인지 입맛이 쓰다.

괜히 온 건가. 그런 기분이 든 백호는 허리를 세우고 그대로 명월을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 했다. 지금은 명월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가 않아서 떠나려던 그를 붙잡는 건 명월의 손이었다.

오른쪽 손목을 단단히 붙잡는 명월의 가죽을 낀 손을 확인한 백호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그때 그 말이 들려왔다.

“고마워.”

처음에 백호는 가만히 있었다. 뭔가 말을 듣긴 했지만, 그게 진짜인가 싶어 의문이 들었던 거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헛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곤 바로 고개를 돌렸다.

백호가 떠나지 못하도록 그의 오른손을 더 세게 움켜쥔 채로, 명월은 그를 바라봤다.

“정말 고마워.”

거기까지 말한 후 명월은 입을 다물었다. 새하얀 얼굴이 굳어 있는 건 화가 났기 때문이 아닐 거다.

명월이 진심으로 자신에게 고마워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던 백호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한다. 지금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인상을 팍 쓴 채로 있던 그는 하―하고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이 무슨…….”

고맙습니다, 라고 말해 보라고 하고 나서야 간신히 들은 말이었다. 그런 건 진짜 감사 인사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것이 명월의 최선이라는 걸 알기에 백호의 기분은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 괜히 온 건가 싶었는데 지금은 오길 잘했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명월이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에도 도와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거니 싶었다. 가만히 있으려 해도 왜인지 모르게 점점 더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러다가 정신 차리자 싶어서 눈에 힘을 주었을 때, 손목을 단단히 쥐고 있던 명월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이건 또 뭔가 싶었던 백호는 놀라 고개를 숙였다.

명월이 쪼그리고 앉은 채로 있었다. 무릎 위에 양손을 올리곤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을 본 백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그는 당장 명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지금 뭘 하는 거냐. 똑바로 일어나라.”

“―지금 나도 내가 뭘 하는 건지를 모르겠어.”

중얼거린 명월은 더 고개를 숙이곤 입을 벌렸다. 그 사이로 긴 한숨이 토해져 나온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진 명월은 재차 웅얼거렸다.

“애초에 난 인간들 사이에 섞여서 살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

어렸을 때에는 괴롭힘을 당하는 것으로 넘어갈 수 있었으나, 어른이 된 지금은 본인의 기준에선 아니다 싶은 걸 밀어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른 자들에겐 공감대가 형성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자신은 보고 들은 바가 있어서 옳은 일이라 생각되는 쪽으로 행동을 옮긴 것뿐인데, 그걸 모르는 자들이 보기에 지금 자신은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 튀니 그게 더 문제가 되는 거다. 만약 백호가 이렇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고립된 상태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자 기분이 무척 더러워진다.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백호의 얼굴이 굳어 있다. 그곳에서 걱정스러움도 읽힌다. 화가 난 것 같아도 정말은 아니었다. 이제는 그런 것들이 하나둘 보이는 것 같다면서 명월은 입을 열었다.

“……전에 네가 말했던 이야기 말인데. 나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가 지금―.”

“사또. 안에 계십니까.”

문밖에서 들리는 복운의 목소리에 명월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손님이 오셨다 들어서 차를 준비해 왔습니다. 문 좀 열어 주십시오.”

그리고 닫힌 문이 덜컹, 거리면서 흔들린다. 백호와 있는 걸 다른 자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문을 걸어 잠근 거다. 그게 이상했던지 몇 번이나 문을 열려 하는 것에 명월이 몸을 일으켰다.

“기다려라.”

안에서 명월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복운은 문을 열려던 걸 멈추었다.

똑바로 일어선 명월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잠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 걸 확인한 백호도 바로 드러난 감정을 수습했다.

“도성에서 아는 사람이 내려온 것 정도로 해라. 당분간은 일처리를 도와주겠다. 하지만 그것뿐이야. 지금 당장 튄 불똥은 꺼트려 주겠지만, 네놈이 알아서 조절해야 할 거다. 더는 문제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여길 떠나라. 그게 네놈이 인간들 사이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거다.”

명월의 입술을 타고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반양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면, 이런 꼴은 안 당할 거라는 거냐.”

“―그럴 거다.”

그럴 거라는 건 어차피 가정의 의미였다. 확실한 건 그도 잘 알지 못하는 거다. 그런 주제에 잘난 척 말하다니. 어불성설이었다. 자연스럽게 불신을 드러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재차 말했다.

“애초에 여긴 터가 안 좋았어. 나도 그 망할 놈에게 속아서 여기에 발이 묶인 거다.”

망할 놈이라는 건 누구 두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궁금해서 물어봐도 대답을 해 줄 것 같지 않아서 명월은 문을 걸어 막고 있던 고리를 치워 냈다.

문이 열리자 쟁반을 들고 서 있는 복운이 보였다. 우선 명월의 얼굴을 보곤 안도한 복운은 안으로 들어와선 백호도 살폈다.

복운의 눈이 백호를 보는 순간 명월은 살짝 긴장했다. 백호가 평범한 인간인 복운의 눈엔 어떻게 비칠지 염려스러웠던 거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백호를 빤히 바라보던 복운은 근처의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곤 자세를 바로 했다.

“도성에서 사또의 친구분이 오셨다고 들었는데 전 처음 뵈는 분이십니다.”

명월이 특이했기 때문에 어울리는 벗이라고 해 봤자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친분이 있다 하는 자들도, 뭔가 껄끄럽다 싶으면 바로 모르는 척을 하곤 했었던 거다.

그런 명월의 지인이 왔다는 말을 듣고 누군가 싶어서 바로 찾아오긴 했는데, 막상 만나 본 자는 낯선 모습이었다. 얼굴을 보면 아닌데 옷차림을 보자니 승려인 것 같고…….

연신 이상하다는 듯 자신과 백호를 번갈아 보는 복운을 두고 명월은 “차를 내려놨으면 이만 나가 봐라.” 라고 말했다. 그 말에 명월의 안색을 살피던 복운은 고개를 꾸벅이면서 밖으로 나갔다.

탁자 앞으로 걸어간 백호는 찻잔을 들어선 한 모금 마셨다.

“언제나 보모가 따라다녀서 좋겠군.”

“보모뿐만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덩치 좋은 개도 뒤를 졸졸 따르지.”

백호의 뺨이 크게 부푼다. 저도 모르게 입 안에 있던 걸 뿜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그걸 참고는 힘겹게 차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억지로 넘기려니 목젖 안쪽이 얼얼하니 아프다. 제 목에 한 손을 댄 채로 인상을 쓴 백호는 명월을 내려다봤다.

“지금 나더러 개라고 한 거냐?”

대답을 하지 않아도 눈빛과 표정으로 의미는 전달되기 마련이었다.

자신은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해서 백호라 불리는 것뿐이었다.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백호라는 호칭은 그냥 넘긴다 쳐도 개는 아니었다.

개라니. 자신의 위엄에 걸맞지 않는 호칭이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맙다는 말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런 식으로 나오는 거냐.”

“고마운 것하고 별개로 내 입담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명월의 대꾸에 백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까는 갑자기 주저앉아서 침울해하더니 그사이에 기분 전환이 된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빨리빨리도 변하는 놈이라면서 백호는 끌끌, 혀를 찼다.

그러다가도 명월의 날씬한 배 쪽으로 시선이 간다. 눈을 내리뜬 채로 명월의 이모저모를 살피던 백호는 다시 차를 마셨다.

개라고 한 게 거슬렸는지 백호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하고 있으면 언제나 이랬다. 그가 이번에 정말 큰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것들과 별개로 백호가 곁에 있으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었다.

일단은 그를 돌려보내야 했다.

“물건 정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만 돌아가 봐라.”

“싫다. 당분간 여기에 있을 거다.”

백호가 나가고 나면 다음으로 어떤 일부터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당분간 여기에 있을 거라니. 지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던 명월이 안색을 굳힌 채로 뒤를 돌아보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백호는 짤막하게 말했다.

“가만히 두면 저 혼자서 여기저기 사고만 치고 다녀서 일 수습하는 것도 성가시니 아예 옆에 붙어 있을 거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겠다 싶으면 나중에 처리할 것 없이 바로 그 순간 정리할 거라며 백호는 웃었다. 그가 웃는 것에 반해 명월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백호는 명월의 몫으로 나온 잔도 들면서 중얼거렸다.

“차 맛이 나쁘지 않군.”

* * *

6월로 접어드는 날이라 산천이 푸르고 꽃향기가 가득했다. 어디를 나가도 좋은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날이 좋으면 밖으로 나가 꽃구경을 하고 싶은 게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일 거다.

거기서 재물이 좀 있다 싶으면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자리를 잡고, 먹음직스럽게 음식을 차리고, 옆에 여자를 끼고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가능했다. 그리고 반양에서 꽤나 위세를 날리는 이병현 대감이 지금 그리하고 있었다.

드넓은 저택 안쪽에 작은 연못을 만들고 그 옆에 전각을 세웠다. 전각 위에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의 산해진미를 차려 놓고 대면하고 있는 건 화소군 행수였다. 들고 있던 술잔을 시원하게 비워 낸 이병현 대감은 호탕하게 웃었다.

“모처럼 행수와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술잔을 기울이니 기분이 아주 좋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도 맛있고, 술맛도 좋군요.”

“마음에 드시오? 언제든지 술이 당길 때가 되면 연락을 주시오. 행수의 부름이라면 내 만사 제쳐 놓고 달려갈 거외다.”

“평소에도 바쁘신 대감이 아니십니까. 그런 분을 술이 마시고 싶다고 뵐 수 없는 거겠지요.”

예의바른 태도로 조근거리며 비위를 맞추어 주는 화소군 행수의 태도가 나쁘지 않았다. 허황된 마음이 채워지는 것 같았던 이병현 대감의 입가로 의기양양한 웃음이 걸렸고 그는 옆에 앉은 여인에게 술을 따르게 시켰다.

입술이 유난히 붉고 눈매가 야하게 올라간 여인은 대감의 잔에 술을 따랐고, 대감은 그 미색에 마음이 홀렸다.

여인을 흘깃거리면서 보는 대감의 모습을 바로 앞에서 봐서 알고 있으면서도 화소군은 모르는 척 물었다.

“여인은 마음에 드십니까? 호란의 기녀들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 하셔서 급한 대로 준비했는데 말입니다.”

그 순간 대감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인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아니고, 지금 화소군이 내뱉은 말 중에서 걸리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리면서 헛기침을 하며 ‘나 기분이 나빠졌다.’ 라는 티를 드러내는 이병현 대감을 대신해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이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호란의 기녀들은 이제는 안 되겠더이다. 이번에 새로 온 사또에게 찰싹 붙어서 대감을 괄시하지 뭡니까. 더 이상 대감께서는 그곳에 걸음하지 않으실 겁니다. 언젠가 날을 잡아 크게 경을 칠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사내의 말에 이병현 대감의 헛기침이 더 커진다. 흠흠, 하고 들으라는 듯 소리를 내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화소군은 모르는 척 물었다.

“전에는 호란의 호접화를 입에 담으시면서 그토록 예뻐하시더니 왜 그러십니까. 불쌍한 아이들이 아닙니까. 잘못을 저질러도 예쁘게 봐주시고 그냥 넘어가십시오.”

화소군의 말이 사내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더는 예쁘게 봐줄 상태가 아닙니다. 얼마 전에는 대감께서 부르셨는데도 사또 옆에 찰싹 달라붙어선 지금은 바쁘다면서 콧방귀도 안 뀌더이다. 그냥 옆에 앉아서 술 한 잔만 따르고 가라고 해도 어찌나 콧대를 세우던지. 누가 보면 대갓집 아녀자인 줄 알겠더이다. 아무 사내라도 꺾을 수 있는 길가의 흔한 들꽃 주제에 말이지요―.”

얼마 전 있었던 일은 명월이 화소군을 만나기 위해서 기방을 찾았던 때였다.

당시의 일을 상당히 축약하고 뒤틀어서 저들 마음대로 말을 바뀌었으면서도 사내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걸 듣는 화소군 또한 모든 걸 알면서 모르는 척 혀를 찼다.

“호접화 그녀가 잘못을 하긴 한 모양입니다. 웬만한 일이 아니라면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는 이병현 대감이신데 말이지요.”

사내가 실컷 험담을 하는 동안 그거라는 듯 알게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대던 이병현 대감은 화소군의 말에 입꼬리를 사악 올렸다.

본인이 한 짓은 뒤로 넘기고라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이런 식으로 추켜세워 주는 걸 좋아하는 대감이었다.

명월과의 일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그는 그날 저녁 사람을 풀어서 혼쭐을 내주려 했다. 하지만 결국엔 그것마저도 실패해서 너무도 언짢아 죽을 것 같았는데 알아서들 옆에서 속을 긁어 주니 답답함이 어느 정도 풀리는 것 같다.

그래서 이병현은 겸사겸사 벼르고 있던 그 말을 입에 담았다.

“얼마 전의 일에 대해서 내 들었소.”

“어떤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우리 사이에 왜 모르는 척을 하시오. 이미 알 만한 사람은 파다하게 다 알고 있는 걸―.”

일부러 뒷말을 끌면서 웃은 이병현 대감의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그제야 떠올랐다는 양 화소군은 아―하는 소리를 내면서 옆으로 손을 내렸다. 그러자 앉아 있던 여인이 화소군의 빈 잔에 술을 채운다.

“관아에 넣어 둔 물건을 돌려받은 일 말입니까. 안 그래도 그것과 관련해서 아닌 말들이 떠돌아 속상하던 참이었습니다. 그저 개인적으로 급히 쓸 데가 있어서 몇 가지 물건을 돌려받은 것뿐인데, 그걸 두고 저와 사또의 사이가 틀어진 것마냥 떠들어 대는 자들이 있더군요.”

그 말에 이병현 대감과 사내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대낮에 화소군 행수가 보낸 이들이 수레를 끌고 관아 앞으로 가서 창고의 물건을 빼 들고 온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파다하게 소문난 상황이었다.

그걸 두고 이제 사또는 끈 떨어진 연이 되었다면서 고소하게 생각하고 있었거늘, 지금 화소군의 말만 들어보면 ‘단순한 오해’일지도 모르는 상황이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단순한 오해라 할지라도 화소군의 행동 덕분에 명월이 낭패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지금 당장 진상품을 올려야 하는데 그것들이 사라졌으니 오죽 애가 타겠는가. 지금쯤 똥줄이 다 탔을 거다.

만일 부족한 물건을 충당하기 위해서 자신을 찾아오면 사또의 곱상한 얼굴이 죽사발이 될 정도로 엉망으로 만들어 줄 거라며 내심 벼르던 대감이었다. 거기다 손 빠르게 화소군을 데리고 와서 술잔을 기울이면서 사또 명월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의논하려 했는데, 저런 말이라니…….

유심히 화소군을 살피던 이병현 대감은 옆으로 손짓을 했다. 그러자 사내가 고개를 숙이곤 뒤로 물러났고, 화소군도 낌새를 알아차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들도 물러난 후, 누각에 남은 건 이병현 대감과 화소군뿐이었다.

단둘이 남았다 하더라도 바로 본론을 꺼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손을 들어 제 턱수염을 쓰다듬던 대감이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지금 행수와 사또의 관계가 어찌 되시오?”

“대감이 보시기에 어떨 것 같습니까?”

“얼마 전에는 친분이 있다고 여겨졌으나 지금은 아니오. 암만 당장 쓸 일이 있다 하더라도 준 물건을 되돌려받는 건 행수답지 않은 일이오. 더군다나 그게 진상품인 이상에는 더더욱 말이지. 이건 어떻게 봐도 행수께서 저 사또를 쫓아내기 위해 깔아 둔 포석으로 여겨질 만한 행동이오.”

“뭐, 그렇게 보이셨다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겠군요.”

넌지시 던지는 긍정에 이병현 대감의 눈이 예리하게 빛난다.

그러면 그렇지. 원래 나쁜 일을 하기 위해 손발이 부딪칠 때 소리가 더 크게 나는 법이었다. 아예 상에 팔꿈치를 올리고 부채를 펼쳐서 얼굴의 반을 가린 대감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보기에 이번 사또는 행수께 도움이 되어 줄 것 같지가 않습니다.”

검고 물렁한 속내가 빤히 보인다.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화소군은 물었다.

“그러면 어찌 처리를 해야 할까요?”

“아니다 싶으면 뿌리를 뽑아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얼마 되지도 않는 햇병아리가 시끄럽게 구는 걸 보고만 있어야 되겠습니까. 알아서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굽히고 들어와도 부족할 판에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니, 깔끔하게 없애 버립시다.”

“없애 버리다니. 위험한 발언을 하십니다.”

“이번에 내가 당한 일을 행수께서 몰라서 그러십니다. 어차피 이곳은 폐쇄적이고 우리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될 만한 것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깟 사또 목 하나 처리하는 건, 어린애 손목을 비트는 것보다 간단한 일입니다. 내 이번에 아주 본때를 보여 주고, 호접화 그년도 손을 봐줄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의 진정한 주인이 누군지를 알려 줄 겁니다.”

“반양의 진정한 주인이, 이병현 대감이라―이겁니까?”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교활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가늘게 뜨는 대감이나, 화소군은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다.

“이번 사또는 유일선 영감의 아들입니다. 함부로 건드렸다간 낭패 보실 겁니다.”

“도총관이 좌찬성을 이길 수 있겠소?”

“김을용 좌찬성 영감을 잘 아시는 모양이십니다.”

“언뜻 알고 있지요. 모른다 해도 선물을 잔뜩 실어서 올려 보내면, 내 이름 석 자는 기억할 게 아니오. 거기다 행수가 도움을 준다면 얼굴도 기억하려 하실지도 모르지.”

재물을 마다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설령 본인이 고사한다 하더라도 다른 쪽으로 얼마든지 찔러 넣어 줄 수 있었다.

그런 게 특기였던 만큼 자신만만했던 이병현 대감은 열심히 주절거렸다.

“내 알아보니 사또가 도총관의 친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이 돌더군. 업둥이라는 거야. 거기다 어려서부터 괴짜로 악명이 높았더군. 그러니 망둥이처럼 낄 때, 안 낄 때 모르고 제멋대로 구는 게 아니오. 이번에 우리가 그 사또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줍시다.”

“―없애 버린다 하셨으면서 이제는 버릇만 고쳐 주는 겁니까?”

“상황 봐서 아니다 싶으면 없애는 거고, 잘 구슬려서 우리 사람이 될 것 같으면 살려도 주는 거고. 뭐 그런 거 아니겠소. 사람이 너무 딱딱하게 굴면 손해를 보기 마련이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이병현 대감의 말에 화소군은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웃음이 나쁘지 않다. 그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는 게 아닌가 싶었던 대감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잘 생각해 보시오. 저 사또가 버티고 있어선 행수 일에도 막대한 지장이 올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정리를 해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건 저도 생각하고 있던 바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무얼 망설이는 겝니까. 우리 둘이서 이 반양을 다스려야죠.”

“그렇군요.”

화소군은 앞으로 손을 뻗어선 재차 술잔을 집어 들었다.

이제 화소군이 한마디 대답만 해 준다면 바로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는 이병현 대감이었다.

화소군의 입술이 움직이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데, 말소리는 앞이 아니라 옆에서 들려왔다.

“대감. 잠시 괜찮으십니까?”

전각 바로 옆에 서 있는 사내를 본 대감은 혀를 찼다.

“지금 내가 행수와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어딜 끼어드는 것이더냐.”

“그런데 보통 일이 아닌지라 대감께서도 들으셔야 할 것 같아서―.”

뒷말을 흐리면서 사내가 화소군을 흘깃 본다.

딱 봐도 다급함이 묻어나는 모습에 화소군이 술잔을 내려놨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괜찮다면 말해 보게. 대감. 전 신경 쓰지 마시고 들으십시오.”

화소군의 중재에 대감은 못 이기는 척 사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딱딱한 목소리로 뭐냐, 라고 묻자 사내가 바로 말을 꺼낸다.

“오늘 아침 일찍부터 관아로 한 승려가 찾아왔다 합니다. 신입 사또의 지인이라고 하는 그자가 끌고 온 수레에는 온갖 귀한 물건들이 잔뜩 올려져 있었다 합니다. 지금 관아에서는 그걸 도성으로 올려 보낼 준비에 한창이랍니다.”

말을 마친 후, 사내는 입을 다물고 상 앞에 앉아 있는 화소군과 이병현 대감의 반응을 기다렸다.

당장 불호령이 떨어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당장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던 이병현 대감은 얼떨떨해선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 도성에 올려 보낼 진상품을 준비하고 있다는 거냐. 하지만 앞서 있던 것들은 여기에 계신 행수가 분명히 모든 것들을 다…….”

“이번 사또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으신 분인가 봅니다.”

이병현 대감은 화소군을 바라봤다.

술잔 위를 손가락으로 쓰다듬던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번에 제가 한다고 했는데 되질 않는군요. 이를 어째야 하나…….”

“그러면 내가 다시 해 보겠소.”

기다렸다는 듯 이병현 대감은 앞으로 몸을 내밀며 제 가슴을 두드렸다.

“사람 사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내 알려 줄 것이오.”

“혼자서 하실 수 있겠습니까? 도와드릴까요?”

“아니오. 내 아직 그 정도 처리할 능력은 있소.”

지금 이병현 대감은 화소군이 조금 전까지 명월을 처리하는 건에 대해서 소극적인 투로 나갔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어디에 있겠느냐고 물으면서 만류를 했으면서 마지막 순간 도움을 주겠다 운운하는 것에 대한 속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명월의 일이 잘 풀리게 되었다 하니 그게 배가 아파서 초조해진 거다. 명월이 제 날짜에 진상품을 올리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를 보내 버릴 수 있었는데, 일이 해결되면 앞으로 더 오랜 시간 그 얼굴을 봐야만 했다. 그를 처리하기 위해서 더 골치 아파지겠지.

진상품이 다시 없어지면 이번에야말로 알짤 없이 뒤집어쓰게 될 거라면서 이병현 대감은 사내를 가까이 오게 해선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닥거렸다.

그 모습을 살피던 화소군이 몸을 일으켰다.

“바쁘신 것 같으니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다음에 또 봅시다. 내 이번 일 처리만 잘되면 바로 행수를 부르겠소.”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인사를 한 화소군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전각을 빠져나왔다. 뒤로 죄 없는 사내를 달달 볶는, 듣기 싫은 대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그쪽을 살피던 화소군은 걸음을 서둘렀다.

한달음에 대감의 집을 빠져나온 화소군은 저를 기다리고 있던 검은 복장을 입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어찌 된 일이더냐.”

“오전에 웬 승려가 상자를 잔뜩 실은 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합니다. 그리고 그곳엔 진상품으로 할 만한 것들이 대부분 채워져 있었다 합니다.”

“지금 시기엔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그걸 어디서 구해 채워 넣는단 말이더냐.”

“―다시 알아봐 올까요?”

대답을 하긴 하지만, 그 승려가 어떤 방법으로 수레를 끌고 온지에 대해서 알아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행수가 원하면 하는 수밖에는 없었기에 사내는 집중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화소군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저 멍청한 돼지가 뭔가를 하려는 것 같으니 그 후에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일단은 구경만 하면 될 거다.”

바로는 움직이지 않는 것인가.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던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뒷짐을 진 화소군은 사내를 지나쳐 걸어갔고, 명월을 떠올렸다.

이번 일을 통해서 그가 한 방에 떨어져 나갈 거라곤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도움을 주는 지인이 있었단 말인가. 거기다가 승려라. 어울리지 않는 묘한 조합이지 않은가.

저 사또가 알고 지낼 만한 자라면 보통 사람은 아닐 거다. 정체 모를 승려가 묘하게 거슬리긴 했지만, 하루 정도 여지를 두자면서 화소군은 빠른 걸음으로 이병현 대감의 저택을 빠져나왔다.

* * *

방 안에서 식사를 하라 준비를 했건만 덥다고 말한 승려는 대청 밖으로 나왔다.

송낙은 어디로 간 건지 머리는 덥수룩해진 채였고, 덥다면서 포의를 벗어서 허리에 대충 대롱대롱 매달곤 소매를 어깨까지 올리고 있었다.

그는 큼지막한 총각무를 한입 베어 물고는 하얀 쌀밥을 떠 입에 넣었다. 보통 사람은 한 끼로 충분할 양을 딱 수저질 네 번 만에 끝낸 승려는 입맛을 다시면서 네 번째 그릇에 손을 뻗었다.

처음 밥을 한 공기 더 달라 했을 때는 부엌에서 새 밥공기를 퍼 온 복운이었지만, 세 번째부터는 낌새를 눈치채고 아예 밥이 수북이 담겨 있는 통을 들고 왔다. 그게 잘한 짓인 것 같았다.

백호는 수저에 묻은 밥알을 이로 떼어서 먹으면서 빈 밥공기를 내밀었다.

“한 공기 더―.”

맞은편에 앉은 계진은 아직 한 공기를 채 비우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는 벌써 다섯 공기째였다.

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넉넉하게 있었기 때문에 복운은 뭐라 하지 않고 바로 밥을 크게 퍼서 빈 공기에 꾹꾹 눌러 주었다.

바로 밥공기를 들고는 크게 밥을 떠먹던 백호가 눈을 내리뜨자 계진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그러곤 수저로 밥을 크게 떠 입에 넣었다.

급하게 먹다가 탈이 난 걸까. 급히 옆으로 고개를 돌려 손으로 입을 막고는 콜록거린다. 그걸 본 복운이 놀라선 괜찮으냐면서 물을 건넸고, 잔을 받아서 물을 마시는 계진을 본 백호는 한쪽에 있던 고기 편육을 입에 그득히 넣었다.

“사내놈이 뭘 그렇게 깨작거리면서 먹는 거냐. 팍팍 먹어야 나중에 나처럼 커진다.”

복운이 건넨 물을 마신 후 하아―하고 한숨을 쉰 계진이 고개를 들었다.

백호는 안쪽에 있던 푹 삶은 닭의 다리를 뜯어선 야성적으로 그걸 베어 물었다.

몇 입 안 되어서 뼈밖에 안 남은 닭다리를 본 계진의 입이 벌려진다. 누군가와 함께 밥 먹은 적이 얼마 안 되긴 했지만, 백호처럼 잘 먹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대단하다면서 벙찐 얼굴로 바라보는 계진을 두고 백호는 김치를 길게 찢어선 그걸 밥에 올리고 재차 입 안에 밥을 밀어 넣었다. 뺨이 터질 만큼 빵빵하게 부풀지만, 몇 번 턱을 움직이는 사이에 그것도 사라진다.

엄지에 묻은 밥알을 혀로 핥아 내서 먹은 그는 바닥을 드러낸 공기를 확인하곤 혀를 찼다.

“밥공기가 뭐 이렇게 작아.”

절대로 작은 밥공기가 아니었다. 그런 걸로 다섯 공기나 비웠으면서 뭐가 부족해서 저런 말을 하는 건가 싶었던 복운은 질린 얼굴이 되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백호는 숭늉을 들이키고는 꺼억―하고 트림을 했다.

“모처럼 잘 먹었군.”

그러곤 손가락으로 앞니를 긁어 대는 것에 복운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재차 백호가 먹은 양을 살피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승려 주제에 왜 이렇게 고기를 잘 먹어. 파계승인 거 아니야?

명월의 지인이라 본인 소개를 했지만, 복운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 때문에 의심스러운 게 한둘이 아니었다. 명월이 손님에게 무례하게 굴지 말라 하지만 않았다면 진즉 이런저런 것들을 꼬치꼬치 캐물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도 입만 열지 않았을 뿐이지 집요할 정도로 백호의 얼굴을 살피는 복운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부른 배를 두드리던 백호는 눈을 내리떴다.

계진은 깨작거리면서 밥을 먹고 있었다. 얼굴은 귀염상이지만, 몸은 형편없이 말랐다. 그러니 또래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거다. 자세를 바로 한 백호는 닭다리를 하나 더 뜯어서 그걸 계진에게 내밀었다.

백호의 눈치를 보면서 열심히 밥을 먹던 계진은 놀라 딸꾹질을 했다.

“들고 뜯어.”

“……고맙습니다.”

그냥 상 위에 있는 걸 들어서 주는 것뿐인데도 고맙다고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마른침을 삼킨 계진은 양손으로 받은 닭다리를 보다가 그곳에 조심스레 입을 댔다. 그렇게 닭다리를 뜯는 걸 보고 나서야 백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여기 사또는 점심도 안 드시고 어딜 가신 건가?”

내내 밥 먹을 땐 챙기지도 않더니만 이제야 궁금해진 모양이다.

복운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스님께서 가지고 오신 물건들을 정리하고 계십니다.”

“그런 건 아랫사람들에게 맡기면 되는 거 아닌가? 물건 정리도 사또가 일일이 맡아서 하시나?”

“내일 바로 도성으로 올려야 하기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이시는 모양입니다.”

“좋게 말하면 꼼꼼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새가슴인 거로군―.”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거의 들리지 않을 만한 소리였다. 하지만 복운은 분명히 들었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백호가 끙,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어슬렁거리면서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 모습에 다급히 말했다.

“함부로 다니시면 안 됩니다.”

여긴 관아 안이었다. 사또와 아는 사이라 해도 정체가 불명확한 그가 여기저기 다니게 할 순 없었다. 그래서 한마디 한 건데 바로 백호가 뒤를 돌아본다.

심드렁한 눈빛을 받은 복운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전부 생각을 해서 해 준 말인데, 괜한 소리를 했다 싶었다.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양 입을 다물곤 고개를 숙이는 걸 본 백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러곤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곤 그대로 대문을 빠져나갔다.

“―멋있다.”

대문 나가는 걸 붙잡아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래에서 이상한 말이 들린다.

이건 대체 뭔가 싶었던 복운은 눈을 내리떴고, 계진이 닭다리를 한 손에 든 채로 복운을 올려다봤다.

“되게 멋진 스님이세요.”

알게 모르게 기가 죽어서 시무룩한 상태로 있던 계진이 지금처럼 눈을 반짝인 적이 없었다.

백호 앞에선 조용해서 기가 죽은 게 아닌가 싶었는데 괜한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보단 방금 저게 진짜 중일 거라고 생각해선 곤란했다.

저건 어떻게 봐도―.

“파계승이잖아.”

원래 파락호보다 저런 파계승이 훨씬 더 위험한 법이었다.

저런 이상한 놈이 대체 어디서 나타나 명월 옆에 들러붙은 거냐면서, 복운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 * *

텅 비어졌던 창고가 다시 그득히 찼다. 백호가 들고 온 것들은 원래 있던 제자리를 찾은 듯 빈틈없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피던 명월은 뒷짐을 지었다. 창고 한편에 서 있는 명월을 두고 포졸들이 왔다 갔다 했다.

이미 상자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를 확인했고, 남은 건 자리에 잘 두었다가 내일 날이 밝자마자 마차에 싣고 도성으로 보내는 일뿐이었다.

올해는 진상은커녕 도성에서 불호령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급하게 움직이는 이들 사이로 호방이 있었다. 그는 가만히 서 있는 명월의 옆으로 가 지금까지 정리한 장부를 내밀었다.

“사또. 이걸 받으십시오.”

조심스러운 말에 명월은 바로 그리로 손을 뻗었다. 장부를 받아 안에 적힌 내용을 살피는 명월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제대로 정리를 잘했다고는 하나 명월의 눈이 예리하게 장부를 살피는 동안 호방은 크게 숨을 내쉬지도 못했다. 잠자코 있는 동안 장부를 덮은 명월이 물었다.

“필요한 것들은 전부 다 있는 것인가.”

“앞서 도성에 올린 장부와 완전히 맞는 건 아니지만, 훨씬 더 좋은 물건으로 교체된 것이니 뭐라 하진 않을 겁니다.”

실제로 도성에 보통의 버섯 말린 걸 올린다고 보고를 해 두었다면, 지금 있는 건 백년목이라 불리는 아주 귀한 버섯이었다. 최근엔 거의 나지 않는다 해서 궁 안쪽의 깊숙한 곳에 몇 뿌리만 있다는 백년목이 무려 열 개나 준비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귀하고 값비싼 약재가 몇 개나 되었다. 이 정도라면 목록과 맞지 않는다 한들, 그걸 탓하지 않을 거다.

호방은 장부를 하나하나 넘기는 명월을 보곤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사또. 축하드립니다. 도성에서도 불호령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들이 무사히 도성에 도착하기 전까진 안심할 수 없는 노릇이니 끝까지 방심하지 말게.”

“물론이지요. 제가 단단히 확인할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을 마십시오.”

“창고 문을 단단히 걸어 두고 포졸 몇을 세우면 될 거네. 자네는 이만 들어가서 쉬고, 내일 일찍 나오게.”

이것들을 수레에 싣고 마지막 확인을 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게 남아 있으니 일찍 들어가 쉬라는 말이었다.

명월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고 있었던 호방은 재차 고개를 조아리면서 고맙습니다, 라고 했다. 그런 호방에게 장부를 건넨 명월은 재차 뒷짐을 졌다. 호방은 조용히 명월의 곁에서 물러났다. 그때 포졸 하나가 안쪽에 있던 상자를 잘못 건드린 건지 “아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색을 굳힌 명월이 당장 그쪽을 쳐다보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포졸이 굽실거렸다.

“죄송합니다. 조, 조심하겠습니다.”

그리 말하는 포졸은 바깥으로 조금 빠져나온 상자를 조심스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제야 명월은 창고 안에서 움직이는 포졸의 움직임이 불편해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남은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 자신이 창고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게 불편하게 여겨지는 걸지도 몰랐다.

저들이 편하게 일을 하기 위해선 자신이 여기서 나가 줘야 한다는 걸 깨달은 명월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막 안으로 들어오는 포졸을 내려다보고 말했다.

“수고하게.”

포졸은 황송하다는 양 굽실거렸고, 명월은 창고 밖으로 나와 뒤를 돌아봤다. 튼튼한 창고와 근처에 보초를 서 있는 포졸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 건 저 화소군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백호가 어디선가 구해 온 물건들로 빈자리를 충당했으니, 남은 일은 저걸 무사히 도성으로 올려 보내는 것뿐이었다. 마차를 이용해서 천천히 이동할 테니, 열흘 넘게 걸릴 거다. 그사이에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

다른 때라면 적당한 수준의 포졸을 붙였겠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평상시대로 하면 분명 방해를 받아 일정에 차질이 생길 듯싶다. 그렇다면 이번엔 더 많은 포졸들을 붙여야 할지도 모르는데―.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하던 명월은 앞에 서 있던 것과 부딪쳤다. 윽, 하고 신음을 흘린 명월은 황망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런 곳에 뭐가 서 있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게 백호라는 걸 확인하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 대체―.”

왜 이런 곳에 서 있는 거냐고 물으려던 찰나 저기 끝자락에서 걸어오는 포졸이 보였다.

명월은 백호의 손목을 붙잡곤 그대로 질질 끌고 갔다.

* * *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얌전히 지내라고 했지만, 말귀를 못 알아먹고 제멋대로 구는 백호를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는 동안에는 옆에 있으면서 이것저것 살펴봐 주겠다―그런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한 백호는 정말로 떠나지 않고 옆에 붙어 있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완력을 써서라도 그를 쫓아냈을 테지만, 지금은 그리할 수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번 일에 그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고, 그것도 은혜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보답을 해야만 했다.

명월은 거기서 생각을 중단했다.

백호 덕분에 위기 상황은 넘겼지만, 그걸로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었다. 앞으론 더 중요한 마무리 작업이 남아 있었다.

일단 진상품들을 무사히 도성에 올려 보내고 난 후에 백호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려하도록 하자, 그리 생각하고 멀찍이 떨어져 있을 셈이었다. 그게 실수였던 거다.

자신이 멀찍이 떨어뜨린다 해도 백호가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그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리는 게 아니던가. 거기다 다닐 거면 조심해서 움직일 것이지, 덩치는 쓸데없이 좋고 거기다 눈에 띄는 승복을 입고 있었다. 진짜 승려도 아니면서―.

으슥한 곳으로 백호를 끌고 온 명월은 당장 몸을 돌려 그를 올려다봤다. 승복을 제대로 입지 않고 위에 걸치는 포의도 벗어서 허리에 대충 감고 있는 모습에 명월이 당장 그리로 손을 뻗었다.

“승복을 왜 이렇게 입은 거야? 이런 식으로 할 거면 차라리 옷을 갈아입어.”

“갈아입을 옷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거기다 이게 뭐가 어때서 그러는 거냐. 보기에 나쁘지 않잖나.”

제대로 챙겨 입지 않아도 남들 보기에 승복 같다는 느낌만 풍기면 되는 거였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간섭하지 말라며 혀로 이 안쪽을 누르면서 쓰읍, 거리는 백호의 행동에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정말―.”

“됐고, 이거나 먹어라.”

백호의 말과 동시에 내밀어진 건 닭다리였다. 통통하게 살이 잘 오른 닭다리가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명월은 숨을 삼켰다. 눈을 가운데로 모은 채로 닭다리를 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점심도 거르고 그렇게 다니니 배고파서 괜히 더 예민해지는 거 아니냐. 끼니가 되면 밥을 먹어야지. 난 안 먹어도 산다지만, 넌 아니잖나.”

“…….”

뜬금없이 나타나 뭔 수작질인가 싶더니만, 웃는 얼굴로 닭다리를 내밀다니.

―더 수상쩍었다.

받을 생각 없이 그저 물끄러미 응시만 해 오는 명월을 두고 백호가 닭다리를 흔들었다.

“별일 생기지 않으니 적당히 해라. 내가 가지고 온 것들은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

솔직히 그 부분이 가장 신경 쓰이고 걱정되었다. 그래서 지금 백호가 한 말에 안심이 된다. 다른 이도 아니고, 하필이면 왜 저놈이 하는 말에 난 안심하고 앉은 거냐면서 혀를 찬 명월은 고개를 돌렸다.

“……됐어. 지금은 생각 없어.”

명월은 고개를 돌리면서 닭다리를 피하려 했지만, 백호는 집요했다. 그러지 말라는 양 더 앞으로 닭다리를 내민다. 지금 명월이 이걸 붙잡지 않으면 계속 손에 쥔 채로 내밀 기세였다.

실제로 백호가 내미는 닭다리가 명월의 턱과 입술을 툭툭 건드렸다. 그걸 피하려고 인상을 쓰면서 고개를 돌려봐도 말짱 도루묵이었다. 집요하기만 한 백호의 행동에 결국 명월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생긴다.

“너 진짜―.”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닭다리가 명월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제야 닭다리에서 손을 뗀 백호가 손등으로 명월의 뺨을 툭, 쳤다.

“그거 먹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그러냐. 들고 온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그냥 먹어라.”

자신이 배가 고플 것 같으니 일부러 신경 써서 들고 온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골리기 위해서 취하는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명월은 여전히 인상을 쓴 채였고, 이를 세워서 닭다리를 깨물었다.

식긴 했지만, 특유의 맛이 입 안으로 퍼지는 순간에 맞춰서 배 안쪽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움찔한 명월은 당황해선 한 손을 본인 배에 올렸다.

바로 앞에 서 있어서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백호는 뭐라 하는 일 없이 옆으로 한걸음 물러나선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러다가 그대로 주저앉는다.

아무것도 없는 흙 위에 그런 식으로 주저앉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명월은 이미 살을 한입 베어 문 채였다. 닭다리를 손에 쥔 채로 오물거리고 살을 씹던 명월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백호 옆으로 가 등을 기대고 서서 다시 닭을 뜯어먹었다.

턱을 움직이면서 닭을 뜯어 먹는 동안 백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닭다리를 입에 넣어 주려고 찾아온 건 아닐 테고―.

어쩌면 정말로 그걸 위해서 자신을 찾아온 걸지도 모르지.

명월은 눈을 내리떠선 백호를 바라봤다. 세운 무릎에 한쪽 팔을 올린 백호는 정면을 응시한 채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모습이었다.

자신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걸 듣게 되었을 때, 바로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한 걸까. 앞서 백호는 웬만한 일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한 바 있었다.

그런데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 준 건 단순히 부탁 받은 일이 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걱정되었던 걸까.

그 순간 갑자기 속이 답답해진다. 너무 열심히 닭을 뜯어 먹었나 싶어서 입에 물고 있던 걸 삼킨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확인하고 난 후, 명월은 지나치듯 물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어?”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이런 걸 물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명월은 담담함을 가장하며 재차 물었다.

“지금, 건강하게 잘 살아 계신가.”

“그건 나도 모른다.”

바로 나오는 대답에 명월은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지금 백호가 정말 모르기에 저런 말인 건지,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명월의 속내를 빤히 알고 있던 백호기에,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독각귀와 함께 있을 테니, 건강한지 아닌지는 그놈만 알 일이지.”

“―독각귀는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는 건데?”

“독각귀를 만나고 싶은 거냐?”

되묻는 말에 망설임이 생겨난다. 이런 말은 해선 안 되는 건가―싶을 정도로 순간적으로 경직되는 백호의 표정이 보기에 이상하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명월은 말했다.

“만나면 안 될 이유는 없잖아.”

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로 명월을 바라보던 백호는 고개를 저었다.

“함부로 여기저기 나타나는 놈은 아니다. 더럽게 폐쇄적인 놈들이니까. 그리고 독각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금구(禁句) 같은 거야. 네 생각을 한다면 앞으로 영영 눈앞에 나타나려 들지 않겠지. 그래서 나한테 널 부탁한 게 아니겠나.”

“……그 정도 걱정을 해 주는 인정머리는 있는 거로군.”

자신에게서 그를 빼앗아 가고, 대신 백호를 붙여 준 건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무거운 한숨을 내쉰 명월은 재차 닭다리에 이를 세웠다. 살점을 깨무는 것에 맞춰서 백호는 제 턱을 긁적인다.

대화는 이걸로 끝이었다. 굳이 말을 꺼내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명월이 영 신경 쓰인다. 가슴 가운데에 박힌 가시마냥 껄끄럽고 불편하다.

태연한 얼굴을 한 명월이나, 속은 그렇지 않음을 알기에 백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흘려보냈다.

“네가 태어나는 걸 싫어하진 않았다.”

그냥 한귀로 흘려 넘기면 될 말인 것 같았다. 제 턱을 쓰다듬으면서 백호는 중얼거렸다.

“난 그렇게 느꼈다.”

뜬금없는 말이라 할 수 있음에도 명월은 잠자코 있었다. 가만히 있던 턱을 느리게 움직인 후, 아까보다 훨씬 더 크게 살점을 뜯어 먹었다.

* * *

해가 지고 늦은 밤이 되었을 때, 복운은 명월의 방으로 들어가 이부자리를 정리해 주었다.

베개와 덮을 이불까지 가지런히 잘 놓은 후에 명월을 흘깃거리고 보는데, 그는 아까부터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집중한 얼굴로 독서를 하는 모습은 대체 얼마 만에 보는지 모르겠다. 반길 만한 일이었지만, 복운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또. 시간이 늦었습니다. 이만 주무시지요.”

“여기에 있는 것만 다 살펴보고 난 후에 자겠다.”

그리 말하는 명월의 오른쪽에는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세 권 더 남아 있었다. 저걸 다 읽으면서 정말 시간이 늦어질 것 같은데.

너무 늦게 자면 피부에 좋지 않고, 몸도 상하게 된다. 지금 읽는 것만 정리 되면 주무시라 말하고 싶었던 복운은 어느새 입을 다물곤 진지하게 명월의 얼굴을 쳐다봤다.

집요함이 느껴지는 그 시선은 모르는 척할 수 없는 종류였다. 결국 명월은 고개를 들어선 복운을 쳐다봤다.

왜 그러는 거냐.

그런 의미가 느껴지는 눈빛에 복운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쳐다보는 데 달리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때 영 엉뚱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또. 혹시 마음에 두신 분이라도 계십니까?”

“……뭐라고?”

대답은 일그러지는 명월의 얼굴만으로도 충분했다. 지금 자신이 진짜 엉뚱한 소리를 했구나 싶었던 복운은 벌떡 일어서선 깊이 고개를 숙인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이상한 소리를 했습니다. 쉬십시오.”

그 말을 하고 난 후 복운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했다.

“넘어지겠다. 천천히 나가라.”

뒤에서 들리는 말도 한귀로 흘려들었다. 한달음에 방 밖으로 나와 대청 가운데에 선 복운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하나 차근하게 가서 얼마 전 이불에 남았던 흔적에 대해 물어볼 셈이었는데 말이 헛나갔다.

이리 되어서야 명월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곤 더 굳건하게 입을 다물 수 있었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여자를 만나게 된다면. 그러다가 실수라도 해서 아이가 생긴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복운의 얼굴이 더없이 심각해졌다. 이대로 다시 방에 들어가서 처음부터 심각하게 물어볼까. 하지만 그런 주제로 이야기를 하려면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괜히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되기라도 한다면―.

거기까지 생각하는 복운의 얼굴이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진다. 오만상을 쓴 채로 서 있던 그는 대청 앞으로 스윽, 하고 나타나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곤 헛숨을 삼켰다.

“누, 누구―.”

길고 큰 검은 그림자의 등장에 놀란 복운은 반사적으로 양손을 움켜쥐었다. 웬 놈인가 싶어서 여차하면 덤벼들 자세를 취하고 어렴풋이 얼굴을 확인했다.

스님이었다. 바지만 입고 상반신을 벗은 그는 젖은 머리를 한 손으로 털어 내면서 대청 위로 올라섰다. 그러곤 눈동자만 위로 흘깃 들어서 쳐다보는데, 저도 모르게 헛숨을 삼키며 뒷걸음질을 친 복운은 이건 아니다 싶어서 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씻고 오시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제가 드린 옷은―.”

“아, 어차피 씻을 건데 그 위에 옷을 입을 필요가 뭐가 있나.”

그래서 지금 그런 몰골이란 말인가. 여자가 없는 곳이라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여자가 지금 저 모습을 봤다면……당장 얼굴이 벌겋게 익어선 그대로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내의 몸은 어둠 속에서도 확인될 정도로 훌륭했다. 괜히 제 몸을 흘깃거리면서 내려다보던 복운은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득 왜 저자가 이리로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달리 잠잘 곳을 준비해 주었는데.

거기까지 생각하는 순간 복운 옆을 스윽 지나쳐 간 백호가 명월의 방문에 손을 댔다. 동시에 크게 눈이 떠진 복운은 다급히 백호의 손목을 붙잡았다.

“지금 어딜 들어가시려는 겁니까?”

“뭐가?”

돌아오는 대답은 빠르고, 지나치게 차가웠다.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너무도 찬 음성에 놀란 복운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백호를 올려다봤다.

왜일까. 지금은 명월의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으로 주변이 환한 것뿐인데, 왜 이리도 백호의 눈동자만 더 잘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 눈동자가 사람이 아닌 위험한 맹수를 앞에 두고 있는 듯해서 목이 탄다.

긴장으로 마른침을 몇 번이나 삼킨 복운은 움찔거리면서 백호의 손목에서 손을 뗐다. 그런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던 백호는 문을 열었고, 그것에 복운이 재차 앞으로 손을 뻗었다.

“기다리십시오. 여, 여기는―.”

“무슨 일이냐.”

안에서 명월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복운이 안을 보자, 굳은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명월이 보였다.

“사또. 스님께서 달리 묵으실 방이 있는데도 이곳으로 오셔서―.”

정말 곤란합니다. 사또가 스님께 손님방으로 가라 말씀 좀 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싶어도 백호에게서 위압감을 느끼고 있었던 복운은 채 말을 끝내지 못했다.

가운데에 껴서 눈치만 살살 보는 복운을 두고, 명월은 백호를 올려다봤다.

문 뒤에 떡하니 버티고 선 놈은 하의만 입고 있었다. 명월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괜찮으니 넌 이만 가 봐라. 그는 나와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다.”

“그, 그러십니까? 그런 게 있었다면 진작 말씀을 해 주시지―.”

그랬다면 일부러 앞을 막지도 않았을 거고, 이런 불편한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아쉬운 말을 하려 했던 복운은 재차 백호를 살피면서 뒤로 한걸음 물러났고, 백호는 방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들어가기가 무섭게 바로 문이 닫히고, 복운은 방 밖에 덜렁 남겨지게 되었다.

홀로 서 있는 게 왜 이렇게 초라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멍하니 있던 복운은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계진이 평상 위로 올라오는 게 보였다.

“씻고 오는 거냐?”

평상 끝에 앉아서 물기가 묻은 발을 닦은 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자고, 내일 보자.”

복운은 평상을 내려왔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명월의 닫힌 방문을 확인하게 된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복운의 얼굴은 어느새 굳어 있었다.

* * *

방 안으로 들어선 백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명월의 앞으로 가선 맨바닥에 주저앉았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그는 깍지 낀 손을 위로 뻗으면서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고만 있던 명월이 한 소리 한다.

“옷이라도 챙겨 입지, 지금 그게 뭔 꼴이야? 여기가 산속인 줄 알아?”

산속에서 꼽추 노인하고 같이 있을 땐 다 벗고 있어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여기선 아니었다. 그런 몰골로 있으면 다른 사람들 보기에 이상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면서 안색을 굳히는 명월이지만 백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을 내리떠선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걸 살피다가 책 한 권을 들고 가 그걸 열어 봤다.

왜 남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는 건가 싶으면서도, 저 백호를 상대로 그런 말이 통하지 않을 것임에 생각이 미친 명월은 그냥 신경을 끄자 싶어서 바로 눈을 내리떴다.

“왜 이런 걸 읽는 거냐.”

……그저 조용히 책을 읽게 해 주지 않는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서 속으로 혀를 찬 명월은 처음에는 대꾸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책장을 넘기면서 백호가 재차 물어왔다.

“이런 걸 읽는다 해서 이 땅에 대해 알 수 있을 것 같으냐. 여기에 적힌 대로 사람들이 움직이지도 않을 거고, 무엇보다 그들은 이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다.”

책에 적힌 건 최근 3년 동안에 반양에서 벌어진 일들과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세가에 대한 정리본 같은 거였다.

화소군이나 이병현 대감과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먼저 손을 써 두자 싶어서 이방에게 말을 해서 얻어낸, 나름 귀한 정보책이었다.

그런데 백호 눈에는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겨진 모양이었다. 그러니 사람 신경 거슬리게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저 짓을 하는 거지.

그냥 무시하자. 그리 생각하면서 명월은 펼쳐진 종이 위에 시선을 던졌지만, 백호는 건들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런 걸 백번 읽어 봤자 아무 쓸모가 없어. 왜 귀한 시간을 허비하려는 거냐? 잠이나 자라.”

결국, 참다못한 명월은 책에서 시선을 떼곤 백호를 노려봤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나 들어가서 자라.”

이런 데 앉아서 뭔가를 하려는 사람 괜히 방해하지 말고.

명월이 노려보자 백호는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봐선 가렵지도 않다면서 백호는 벌떡 일어났다. 잠깐 나타나서 사람 성가시게 굴더니만 이제야 나가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속으로 잘되었다, 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생각도 길게 가지 않았다. 나가는 건가 싶었던 백호가 뒤쪽으로 넘어가선 복운이 깔아 둔 이불에 누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올 때만 해도 설마 싶었던 명월은 깨끗한 이불 위에 벌러덩 누워 버리는 백호의 행동에 크게 입을 벌렸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명월은 책을 덮고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 어디에 눕는 거야? 네가 잘 방은 따로 마련해 줬잖아.”

큰소리를 내면 다 들릴 것 같아서 이를 악문 채로 나직하게 내뱉는 말에 백호는 성가시다는 듯 새끼손가락으로 귀 안쪽을 후벼 팠다.

“그런 작은 방에서 어떻게 자란 말이야. 난 여기가 좋다.”

“네놈이 여기서 자면 난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넓은데 그게 무슨 말이야. 이불이 깔린 곳에 머리만 기대고 자면 되는 거잖아.”

나란히 누우면 둘은 누울 수 있는 이불이긴 했다. 하지만 애초에 그 이불은 백호를 위해서 준비된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혼자서 쾌적하게 자기 위해서 깔아 둔 것인데, 백호가 무슨 권리로 저런 말을 지껄이는지 모르겠다.

낮 동안에는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밤에는 푹 잘 수 있기 때문에, 지금부터가 명월에겐 무척 중요한 순간이었다. 적어도 숙면을 취해야 이튿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제대로 반응할 게 아니겠는가.

명월은 어금니를 악물곤 나직하게 말했다.

“이렇게 할 거면 당장 돌아가.”

“싫은데?”

싫은데―라고 말하는 입을 손바닥으로 세게 후려쳐 주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손을 대면 더 엇나갈 수도 있기에 명월은 이불을 잡아서 그대로 당겼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백호가 장정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무거울 리가 없을 텐데―.

암만 바닥에 깔린 이불을 당겨도 꿈쩍도 하지 않으니 다른 걸 건드리는 수밖엔 없었다. 그래서 백호의 다리 아래쪽에 깔린 이불을 빼앗아 가려는데, 기다렸다는 듯 그걸 위로 끌어올린 백호가 그대로 돌돌 말아 다리와 팔을 이용해서 꼬옥 끌어안았다.

이미 당당하게 베개에 머리까지 벤 상태로 보란 듯이 눈을 감는다. 이불을 빼앗기 위해서 용을 쓰느라 얼굴이 벌겋게 익은 채로 명월은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진짜―!”

“자꾸만 시끄럽게 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난 여기서 잘 거고, 네놈이 못 자게 한다면 지붕 위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편하게 자라고 신경 써서 방도 하나 준비해 주었는데 왜 지붕으로 올라간단 말인가. 하는 말이 점점 더 가관이지 않으냐면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명월이지만, 백호는 태연했다.

“걱정하지 마라. 오랜만에 인간들 사이에 있어서 피곤해 죽겠으니까. 너한테 괜히 손대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

“누가 이상한 생각을 했다는 거야?”

“정말 생각한 적 없어? 내가 이번에 도움을 준 걸 운운하면서 재차 네놈의 몸에 손을 대는 건 아닌지 그게 걱정되는 게 아니야―.”

동시에 백호는 한쪽 눈을 떠선 명월을 올려다봤다.

“그런 걸 기대하기 때문에 괜히 시끄럽게 구는 게 아니냔 말이지.”

“……!!”

어금니를 악문 명월의 한쪽 다리가 높이 올라간다.

이대로 백호를 차고, 밟고, 깔아뭉개고 싶었지만 그리할 수 없었다. 애초에 호락호락 당할 놈이 아니기도 했고, 너무 시끄럽게 굴면 복운이 다시 찾아올지도 몰랐다.

도성에 있었을 때에도 자신의 친분 관계를 훤히 꿰고 있던 복운이었다. 지금 지인 운운하면서 나타난 백호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틈만 나면 안색을 살피려 드는 걸 모르진 않았다.

여기서 시끄럽게 굴었다간 괜히 성가신 일만 생기기 십상이었다. 그런 건 사양하고 싶었던 명월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참자, 참아―그리 생각하면서 백호를 내려다봤다.

이불을 돌돌 말아서 품에 끌어안은 채로 백호는 떡하니 눈을 감고 있었다. 느긋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얄밉다. 지금 자신을 이기고 이불을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이놈이 이번에 재차 큰 도움을 줘서 내심 그걸 정말 고맙다고 생각하는 명월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행동하니, 눈물 날 정도로 고맙다가도 맨몸으로 당장 쫓아내 버리고 싶었다. 이불로 멍석말이를 해서 관아 밖으로 던져 버렸으면 딱 좋겠다 싶다면서 명월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화가 단단히 난 얼굴로 노려보고 있는데도 백호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런 일을 가지고 쓸데없는 흥분을 한 게 아닐까 싶었다.

애초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무덤덤하게 굴었다면 저놈도 일절만 하고 돌아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 흥분하니까 그게 재미있어서 일부러 더 이러는 걸지도 몰랐다.

이놈은 놀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깊은 숲속에 있다 보니 허파에 이상한 바람이 잔뜩 들어서 심심해졌던 거지. 그래. 그런 거라면 지금부터 네놈이 무슨 짓을 해도 반응하지 않을 거라며 명월은 재차 바닥에 앉아 옆으로 조금 비틀어져 있던 책상을 잡아 앞으로 당겼다. 그러곤 책을 펼치는 것과 동시에 눈을 뜬 백호가 발가락을 세워선 명월의 등 가운데를 쿡, 찔렀다.

“윽?!”

전혀 예상치 못한 짓이었기 때문에 명월은 기겁을 하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팔에 머리를 괸 채로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백호가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불을 죽부인 삼아 잘 것 같더니만 지금은 옆으로 누워선 재차 발가락 끝으로 명월을 건드리려 한다.

처음에는 몰라서 당했지만, 두 번째도 그리할 순 없었다. 오만인상을 쓴 명월은 옆으로 물러난 채로 백호를 노려봤다.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너 지금 나랑 한번 싸워 보자는 거냐?”

명월의 말에 우습다는 양 백호가 대꾸했다.

“이 야심한 시간에 내가 왜 너랑 싸우냐. 그런 쓸데없는 건 읽지 말고 잠이나 자라. 내일 아침 일찍 창고에 있는 저것들을 도성으로 올려 보내야 하는 거 아니냐. 늦게 자면 시간에 맞춰 못 일어날 거다. 아니면 뭐야? 밤을 지새울 셈이냐.”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니까 넌 쓸데없는 데 관심 가지지 말고 얌전히 자기나 해라. 이런 식으로 건드릴 셈이라면 당장 여기서 나가―.”

성가시게 굴지 말라는 쪽으로 몰고 가면 이 녀석을 방 밖으로 쫓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백호는 여전히 머리를 괸 채로 명월을 빤히 응시했다. 여기서 한 번 더 속 뒤집는 말을 하면 어떤 식으로든지 행동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니 망설여진다.

왜일까. 여긴 자신의 방이고 백호는 불청객이니 그를 쫓아내는 게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거늘 왜 이런 식으로 망설이게 되는지 모르겠다.

명월은 백호를 내려다봤다. 아까와 달리 지금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다. 저런 모습으로 있는 녀석을 붙들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냥 신경을 끄고 말자면서 명월은 다시 책상 앞으로 몸을 돌리고 앉았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종이를 넘기는 명월이지만, 지금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무슨 말을 하면 당장 반응이 올 것 같은 모습이다.

명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백호가 입을 열었다.

“사또 일 하는 게 좋은 거냐?”

그 순간 명월의 어깨로 힘이 들어간다. 잠시 동안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걸 말하는 건가 싶어서 생각을 하는 듯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굳어 있는 명월의 얼굴을 본 백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꽤나 열심이구나 싶어서 말이야.”

정말은 백호가 도움을 주기 위해서 찾아온 게 아니라, 자신의 속을 뒤집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지금은 놈이 무슨 말을 해도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정말 마지막이라는 느낌으로 명월은 눈에 힘을 준 채로 경고를 날렸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얌전히 자기나 해라. 지금부터 쓸데없는 짓을 하면 그땐 이불째로 쫓아낼 거다.”

“뭐, 나를 들 수 있다면 그리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말이지.”

여전한 느긋한 백호가 얄미웠다.

주먹을 휘둘러볼까? 하지만 놈은 만만치가 않아서 금방 피할 거다. 더군다나 이불 위에 누워 있으니 갑자기 뭔 짓을 할지도 모르고……아니. 여긴 내 방인데 왜 이렇게 불편한 기분이 드는 걸까.

밖으로 나가 버릴까도 싶었지만, 그러면 정말로 백호에게 지는 게 아닐까 싶어서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여긴 자신의 방이었다. 누군가 나가야 한다면 그건 자신이 아니라 백호가 되어야만 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었다. 한 번 더 건드리면 그땐 가만두지 않을 거라며 앞으로 고개를 돌린 명월은 종이를 하나하나 넘겼다.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책을 붙잡고 있는 거였다. 이방은 중요한 거라고 했지만, 백호가 앞서 말했듯이 명월도 별 볼 일 없는 것 정도로 느끼고 있었다. 그저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게 아까워서 이런 걸 붙잡고 있는 것뿐이었다.

조금 전에는 그럭저럭 눈에 들어왔던 글귀들이 지금은 잘 읽히질 않는다. 등 뒤에 있는 백호 때문이었다. 지금 저 녀석이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건지 무척 신경 쓰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집요할 정도로 등 뒤에 달라붙는 시선이 느껴졌다. 백호의 눈빛이 제 옷을 한 겹, 두 겹 벗겨 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자신이 알몸이 되어선 백호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피부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면서 명월은 종이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역시 아무래도 안 되겠어. 저놈을 방에서 쫓아내야지.

마음을 먹은 명월은 뒤를 돌아봤다.

“너 지금 바로―.”

밖으로 나가라는 말을 하려던 명월은 입을 다물었다. 아까는 옆으로 누운 채로 건방진 시선을 보내 오던 백호가 지금은 똑바로 누워 있었던 거다. 여전히 한 팔로 돌돌 만 이불을 끌어안은 백호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저 모습만으로는 정말 잔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한번 건드리고 이쪽이 예민하게 나오니 잠깐 쉬었다가 재차 찔러대려는 건 아니겠지. 백호의 모든 행동이 의심스러웠던 명월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를 쳐다봤다. 매서운 시선에도 백호는 미동이 없었다. 조용한 방 안에서 백호가 토해 내는 호흡 소리만 들렸다.

“…….”

지금 정말로 자는 건가. 의심스러워서 눈을 가늘게 뜨던 명월의 굳은 표정이 서서히 풀린다. 조용한 방 안으로 백호가 내쉬는 호흡이 일정하게 울려 퍼진다. 이 호흡까지 꾸민 거라면 정말 대단한 거였다.

명월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백호를 내려다봤다.

백호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건드릴 때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던 명월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한결 차분한 상태로 그를 바라보다가 그쪽으로 손을 뻗었으나 곧 중간에서 멈추었다.

건드려서 뭘 하자고. 괜히 그랬다가 자는 놈을 깨우면 더 성가시겠지.

말자면서 손을 움켜쥔 명월은 재차 책 읽는 일에 집중했다.

* * *

늦은 밤이 되자 어디선가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 외에 더위를 잊은 벌레들이 풀 밖으로 나와서 목청껏 소리를 높였다. 그걸 들으면서 백호는 천천히 눈을 떴다.

보이는 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명월이다. 지그시 명월을 바라보던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기어갔다.

책상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명월을 바라보자 책상에 팔꿈치를 올리고, 손에 턱을 괸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색색거리면서 고른 숨을 토해 내는 명월의 고개가 옆으로 숙여지는 것에 맞춰서 백호가 그리로 손을 뻗었다. 명월이 턱을 잡아서 더 움직이지 않게 한 후에, 펼쳐진 책을 내려다봤다.

“결국 끝까지 읽지도 못할 거면서―.”

읽다가 졸아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지루한 내용이 적혀 있긴 했다. 결국엔 이리될 일을 왜 사서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백호는 명월을 바라봤다.

“…….”

감긴 눈가에 맺힌 속눈썹이 길고 풍성하다. 입술이 반쯤 벌어져선 방심한 상태로 있는 모습이 보기에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보기 좋은 얼굴과는 별개로 지금 이 자세는 불편해 보였다.

백호는 발로 책상을 밀어내곤 명월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그대로 옆으로 몸을 돌려선 명월을 이부자리 위에 올렸다.

막 이불 위에 몸이 닿는 순간 명월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설마 지금 눈을 뜨는 건가.

잠시 멈춘 상태로 있게 된 백호는 숨죽인 채로 명월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재차 고른 숨을 토해 내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조심스레 팔을 떨어뜨렸다.

명월이 편하게 자리에 누울 수 있게끔 한 후에 바로 그 옆에 달라붙어서 누웠다.

이불을 들어서 덮어 주려는데, 갑자기 명월이 백호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 품으로 파고들어선 등 뒤로 팔을 두르고 꼬옥 끌어안는다.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두어 번 젓더니 재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

이불을 든 채로 가만히 있던 백호는 재차 명월의 얼굴을 살폈다. 입이 아까보다 조금 더 벌어져 있었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거다.

요 며칠 신경 쓸 일이 많았으니 이런 무방비 상태로 잠들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게 처음부터 고집 부리지 말고 일찍 잤으면 좋지 않은가. 딱 봐도 무리를 하는 것 같아서 조금 일찍 들어와서 누워 있었던 건데,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정말 둔한 놈이었다.

본인이 취한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는 인정치 않으며 백호는 명월에게 이불을 덮어 주곤 그의 등에 팔을 두르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있으니 맞닿은 부분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방 안을 은은하게 채우고 있던 달콤한 냄새가 한결 짙어진다.

백호는 명월의 정수리 쪽으로 고개를 숙이곤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상투를 틀고 있어서 뭔가 좀 불편하다. 그냥 풀어 버릴까도 싶었지만, 그랬다간 내일 아침 명월이 눈을 뜨자마자 난리를 칠 게 분명했다.

하여튼 손이 많이 가는 놈이다.

만약에 다른 놈이었다면 처음 보는 순간 뻥, 걷어 차 버렸을 거다. 그래. 걷어차서는 두 번 다시 쳐다도 보지 않았을 거다.

백호는 명월을 제 품 안에 가두듯이 더 세게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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