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15/32)

외전 1.

쓰다듬을 때마다 분홍빛으로 물드는 피부가 탐스러웠다. 땀에 젖어 촉촉해진 피부에 손가락을 대자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 그곳에 입술을 대고 강하게 빨아들이면 몸 안쪽에서부터 떨리듯 경련을 일으키는 몸은 유혹적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숫된 몸이었다. 그 몸을 움직일 수 없도록 강하게 끌어안고 제 욕심껏 허리를 쳐 올리는 기쁨은, 그 어느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끝내 주는 감각이었다. 후각을 자극하는 달콤한 냄새와 더불어서 백호, 그를 너무도 만족스럽게 했다.

그래서 새벽 즈음에 눈을 떴을 때, 그는 바로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엉망이 되어 버린 방 가운데에 누운 채로 느긋하게 있던 그는 눈을 감고는 긴 하품을 했다. 이마에 한 손을 올린 채로 그 상태로 계속 있고 싶었으나 그리할 수 없었던 건 팔에 올려진 묵직한 무게 때문이었다.

나른함이 감도는 마당에 느껴지는 낯선 느낌에 백호는 인상을 쓴 채로 그리로 눈을 내리떴다. 이건 또 무언가. 그런 막연한 느낌으로 눈을 내려뜨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는 자가 보였다.

명월이었다.

“…….”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채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명월을 보는 순간 백호의 표정이 바로 굳는다.

그는 바로 일어나려다가 여전히 팔에 머리를 베고 있던 명월이 미간 사이로 주름을 만든 채로 가느다란 신음을 흘리자 바로 행동을 멈추었다. 명월에게 제 오른쪽 팔을 내준 채로 굳어 버렸다.

눈 한 번 깜박이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던 그는 느리게 주변을 살폈다.

그리 본다 해서 엉망이 된 내부가 원상태로 돌아가진 않는 법이었다. 그리고 간밤에 있었던 일이 하나둘 떠올랐다.

일단은 그 재수 없는 귀물을 처리했고, 직후 명월이 큰 부상을 입었고, 그러고 나서, 그리고…….

“―이런 젠장맞을 일이 다 있나.”

그래. 그때 고통스러워하는 명월을 억누르고 그를 취했던 기억이 났다.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에 걸쳐서 그 몸을 탐했기 때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얼버무릴 수도 없음이었다.

할 때에는 모르겠으나, 다 지나고 난 후에는 입을 떡하니 벌리게 된다. 멍해진 머리 한편으로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런 의문만 들 따름이었다.

미쳤지. 정말로 미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벌일 수 없잖은가. 주먹으로 세게 본인의 머리를 후려쳐도 벌어진 지금 이 상황이 수습이 된다거나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명월은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얼룩덜룩 엉망이 되어 버린 몸과 질펀하게 젖은 하체는, 그가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를 싫을 정도로 잘 알게끔 했다.

저런 몸이라니. 당장 몸을 추스르기도 힘들 거다. 아닌가. 자신의 정이 몸속에 들어갔을 터이니 일단 하루 푹 쉰다면―.

백호는 생각하던 걸 중단했다. 일단 명월에게서 떨어지자 싶었다. 그래서 다른 손으로 명월의 머리를 붙잡고는 그걸 조심스레 위로 들었다.

명월이 깨지 않도록, 그곳으로만 온 신경을 집중해서 명월의 머리를 들어 바닥에 눕히는 것에 성공한 백호는 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곤 알몸인 자신의 상태를 깨닫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지금으로선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은 그는 심각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감출 수 없는 짙은 고뇌를 드러낸 채로 있다가 일단 근처에 있던 바지를 집어 들었다. 반쯤 몸을 일으킨 채로 바지를 챙겨 입고는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멀쩡한 옷이 없었다. 명월의 옷은 전부 자신이 엉망으로 찢어버렸다는 걸 떠올린 백호는 재차 미치겠군, 라고 중얼거렸다.

어금니를 악문 채로 그리 내뱉은 그는 애꿎은 바닥만 살폈다. 그 가운데 자리에 명월이 누워 있었지만, 차마 그리론 시선을 줄 수 없었다.

그렇게 수박 겉핥기식으로 살피지 않아도 될 곳을 확인하던 백호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곤 명월의 옆으로 가 쪼그리고 앉아선 팔짱을 끼었다.

“…….”

만약 이걸 저 독각귀가 알게 된다면 자신을 가만 두진 않을 거다.

아니지. 제 자식을 부탁한 후로 코빼기도 안 보이던 녀석이다. 어쩌면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 녀석은 열외로 치고, 이 상황은 자신과 이 녀석의 문제였다.

자신도 그렇지만, 이 인간 놈이 눈을 뜨면 엄청 당황스러울 거다. 그냥 당황스럽기만 할까. 이상한 생각이라도 한다면―.

그때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던 명월이 떠올랐다.

동시에 하반신 안쪽으로 찌릿한 뭔가가 올라온다.

심란한 듯 인상을 쓴 백호는 혀를 차면서 제 하반신 쪽으로 눈을 내리떴다.

아니. 어쩌자고 화를 내던 놈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하반신이 반응하는 거란 말인가. 이게 미친 건가.

애써 그런 생각을 해 봐도, 자신의 물건이 아까부터 불끈한다는 걸 부정할 순 없었다. 일단 지쳐 기절하듯 잠든 명월의 모습이 음란해 보였고, 그에게서 나던 냄새가 한결 짙어져 있었다.

이러다간 다시금 손을 대고 말겠다면서 백호는 근처에 있던 천을 잡아서 명월의 아래를 가려 주었다. 그때 명월이 옆으로 고개를 움직이면서 바로 으음―하고 신음을 흘렸다.

신음을 흘리는 것과 동시에 괴로워 보이는 얼굴을 본 백호는 지레 찔려선 움찔하고 몸에 힘을 주었다. 안색을 굳힌 채로 눈을 내려뜨는 그와 달리 명월은 여전히 인상을 쓴 채로 신음을 흘렸고, 백호는 그런 명월의 이마에 제 손을 올렸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면서 많이 망설이는 듯싶었으나 결국 그 이마에 손을 올리곤 천천히 쓰다듬는다.

괜찮다. 그러니 그냥 푹 쉬어라.

그런 느낌으로 머리를 토닥여 주자 명월의 미간에 서린 주름이 펴진다.

당장 이런 식으로 아파하는 건 괜찮게 해 줄 수 있지만, 다른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백호는 명월의 몸을 타고 내려가 이윽고 그의 하얗고 통통한 엉덩이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찌할까 싶으면서도 일단은 확인을 하자 싶어서 그리로 손을 뻗었다.

쓸데없는 감정은 내리누르고 무시할 셈이었지만, 손가락 끝으로 힘이 들어간다. 직전에 손을 움켜쥐었다가 펼친 백호는 명월의 엉덩이 사이로 손을 넣고는 퉁퉁 부은 듯한 그곳에 손가락 끝을 댔다.

그 사이로 흘러내리는 질척한 걸 느낀 백호는 혀를 찼다.

“이것도 제대로 받아먹지 못하고―.”

가능하면 흘리지 말고 모조리 전부 다 안에 받아 들이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찔끔거리고 흘리는 건지 모르겠다면서 눈을 내리뜬 백호는, 여전히 파리한 명월의 얼굴을 보곤 표정을 굳혔다.

처음인 것 같은데 너무 심하게 한 게 아닐까.

아직도 주름진 안쪽에서 정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부 다 안에 받아 넣지 못한 건, 그만큼 이쪽이 많이 싸댔기 때문일 거다.

애써 부정하고 있었지만, 더는 그리 할 수 없었던 백호는 손을 떼곤 명월의 옆으로 가 그 얼굴을 내려다봤다. 명월을 바라보던 백호의 눈빛이 점점 진지하게 변한다.

이 녀석을 어찌하면 좋을까.

그냥 이렇게 누운 상태로만 둘 순 없을 터인데.

생각을 하는 동안 점점 더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때 명월이 재차 몸을 들썩이려 하자, 백호는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자신의 냄새를 묻혀서, 명월이 지닌 고유의 체취를 지우고 겸사겸사 그의 부상을 치료해 주었다. 나쁜 일을 한 건 아니었지만, 방법이 잘못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만약 명월이 지금 이 상태로 눈을 뜬다면 자신을 가만두지 않으려 들 거다. 그리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백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찌하는 게 최선일까.

일단은 명월의 몸을 닦아 줘야 하는 걸까. 반사적으로 찢어져 있던 천을 집어 들긴 했지만, 이걸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껏 다른 누군가를 신경 써서 닦아 내준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부려먹고 지시를 내리는 게 익숙했던 만큼 백호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도 곤혹스러웠다.

천을 한 손에 든 채로 망설이는 동안 바깥쪽에서 끼익―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상대가 귀물이나 잡귀였다면 몇 번 발길질을 하는 걸로 쫓아낼 수 있었겠지만, 이건 인간의 기척이었다.

이 녀석을 찾으러 온 건가. 어쩌면 살아 있나 싶어서 그걸 확인하러 온 걸 수도 있었다.

누군가 왔다면 자신은 이쯤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손에 들고 있던 천을 내려놓은 백호는 재차 명월의 얼굴로 시선을 던졌다. 여전히 인상을 쓴 채로 잠든 얼굴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주름 잡힌 미간에 손가락을 댄 채로 백호는 중얼거렸다.

“알아서 몸을 사려라. 나대다간 제명에 못 살 거다.”

중얼거리다가 백호는 입을 다물었다.

명월을 넝마로 만든 주제에, 자신이 할 말은 아니다 싶었다.

미간 사이로 주름을 만든 채로 허공을 바라보는 백호는 심란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이번 일은 나중에 시간을 들여서 조금 더 생각하고 반성을 해 봐야겠다면서 백호는 그곳에서 바로 사라졌다. 지워지듯 흔적이 남기지 않고 백호가 떠나고 얼마 안 있어서, 재차 신음을 흘린 명월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 *

처음 명월이 반양 땅에 들어섰을 때, 모르는 척을 하긴 했지만 정말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채고 있었다.

아, 그 녀석이 내 땅으로 들어왔군―하고 말이다.

녀석에 대해서 부탁을 받은 게 있긴 했지만, 정말로 명월이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당황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누군가가 농간을 부린 게 아닐까도 싶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손을 쓴 흔적은 없었다.

그러다 하나 의아한 구석을 알게 되었다. 명월이 이리로 오게 된 데에는 인간들 사이에서 누군가 입김을 넣었다는 걸 말이다. 조금 더 파고들어 가 봐야 알 일이겠지만, 이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으로 보낼 정도라면 저 어린것의 인간관계를 알 만했다.

어쩌면, 단순히 머리 싸움에서 밀려난 걸 수도 있었다. 명월의 지금 부친은 도성에선 꽤나 이름난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말고 백호는 머릿속에서 명월을 지워내 버렸다. 그 녀석이 이리로 오긴 했지만,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없었다. 그러니 일단은 신경 쓰지 말고 있자면서 그는 제 맡은 바 할 일을 했다.

그 일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홀로 술을 마시는 것.

그리고 질 좋은 나무로 조각을 깎는 것.

인간들 사이에서 어울리기 위한 용도로 만든 직업이 장인이기 때문에, 간간이 무엇을 만들어 달라 의뢰가 들어올 때가 있었다. 그런 것들을 만들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소소한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심심해지면 인간들 사이로 내려가 어찌 사는가 주변을 살피곤 했다.

별생각 없이 주변을 휘이 둘러보고 있으면 인간들 사이에 간간이 숨어들어 있는 잡귀가 보이곤 했다.

이 땅이 풍기는 더러운 냄새에 낚인 것들 중에서 처음 오는 것들은 초보 티를 내곤 했다.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다니고, 철없이 뛰어다니기도 했다.

겉보기 좋은 것들이 그렇게 다니면 백호도 신경 쓰지 않을 거다. 하지만 잡귀들 중 대부분은 온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짜리몽땅이나, 추물, 혹은 괴물이라 부를 수 있는 모습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놈들은 백호의 기를 감지하지 못한다. 말 그대로 너무도 하찮아서 그런 능력까지 못 되는 거였다.

그러다가 한 녀석이 이리로 달려와 발에 부딪쳤다. 비쩍 말라선 얼굴만 비정상적으로 큰 놈은 백호의 무릎길이밖에 안 되었다.

흉물스러운 게 와서 부딪친 것도 열 받는데 오히려 고개를 들곤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당장 양손을 들곤 백호에게 달려들어 그에게 역병을 심어 주려 했다. 가소롭다며 눈을 가늘게 뜬 백호는 발을 들어선 놈의 얼굴을 지그시 밟아 주었다.

켁,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납작하게 눌린 놈은 버둥거렸지만, 백호는 발끝에 힘을 주곤 사뿐히 눌러 밟았다. 그의 발 아래에 깔려서 버둥거리는 놈이 그대로 머리통이 박살 나서 오물이 주변으로 튄다. 이윽고 흙이 되어서 사라지는 순간 근처에 하나 더 있던 놈이 놀라선 백호를 돌아봤다.

다른 인간의 어깨에 앉아서 피를 빨아먹으려 했던 놈은 백호를 보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캬아악, 하고 소리를 지르는 순간 놈을 매달고 있던 인간이 힘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갑작스럽게 쓰러진 그를 두고 근처에 있던 자들이 놀라선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무슨 일이냐며 쓰러진 자를 붙잡아 흔드는 이들 사이로 잡귀가 다급히 도망쳤다.

자신이 누군지는 정확하게는 몰라도 위험을 감지하고 도망치는 거였다.

그래. 도망쳐라. 이 몸은 부딪치거나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면 도망치는 놈들까진 붙잡진 않는다.

난 그리도 자애로운 분이시니라―.

그리 생각하면서 백호는 느릿한 걸음을 옮겼다. 쓰러진 자 주변으로 몰려들어 소란스러운 이들을 두고 백호는 시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느긋하게 이런저런 구경을 하다가 배가 출출해진 그는 근처 주막에 들러 국밥을 하나 시켰다. 그걸 떠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수육에 김치를 싸 먹던 아낙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이번에 오신 사또는 정말 고우신 것 같아.”

사또, 라고 하는 순간 막 내온 음식을 먹으려던 백호가 손을 멈추었다.

귀가 밝은 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소리에 집중하는 건 아니었다. 보통은 먹을 땐 아예 귀를 막고 들리는 것들을 차단하곤 했었던 거다.

그래서 이번에도 분명 그리했는데 왜 저런 대화가 들리게 된 건지 모르겠다. 안색을 굳히는 백호였으나 그걸 알 턱이 없었던 여인들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자네들은 못 봤지? 난 이번에 바느질 일거리를 받아서 관아에 들어가게 되어서 그때 사또를 뵈었지 뭐야. 난 그렇게나 고운 사내가 있는 줄 또 처음 알았네. 어찌나 곱던지. 내 생긴 게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지.”

“자네 얼굴이 어디 가서 떨어지는 편이 아닌데, 그 정도로 곱단 말이야?”

“얼굴만 곱다뿐인가. 바느질하는 게 힘들면 천천히 해도 된다고 하는데, 다른 무식한 남자들하고는 아주 많이 다르더라고.”

“도성에서 내려오신 분이라 그런지 얼굴도 다르고 성품도 좋은 모양이네.”

“그러게 말이야. 이번에는 눈요기 제대로 해 주는 사또인 것 같더라고.”

여인들이 시시덕거리는 소리는 다른 자리에 앉아 있던 자들에게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고 국밥을 먹으면서 술잔을 기울이던 사내가 그런 여자들을 흘겨보면서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밥 먹는데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다 먹었으면 후딱 일어나. 사또니 뭐니, 그런 거에 괜히 관심 두지 말고.”

사내의 딱딱한 목소리에 여자들은 바로 입을 다물곤 그쪽을 흘겨봤다.

여자들 하는 말에 왜 간섭이냐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괜히 싸움만 일어날 거다. 입 아프게 싸워서 본전도 못 건지는 건 싫었던 여자들은 속으로만 꿍얼거리면서 고개를 숙이고 수저질을 했다.

그렇게 여자들이 입을 다물자 이번에는 남자들 쪽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래 봤자 이곳에선 죽은 듯이 있다가 떠날 텐데―.”

“그러게 말이야. 도성에서 내려온 곱상한 인물이 뭘 할 수 있겠어. 예전에 어느 사또처럼 급사 당할 일 만들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떠나는 편이 좋―.”

“쉿, 조용히 해.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나.”

급사니 뭐니 하는 흉흉한 소리는 하는 게 아니었다. 타박을 받은 사내는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다물곤 다시 수저를 놀렸다. 그렇게 쓸데없는 말을 하는 자들이 알아서 입을 다물어서 조용해지긴 했으나, 백호는 밥 먹는 데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아직 남은 국밥이나 고기가 잔뜩이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돈 주고 사 먹는 건 남길 수 없었던 백호는 고기를 국밥 안에 넣고는 김치를 잔뜩 올린 후 크게 한입 넣었다. 하지만 두어 입 먹다가 결국 수저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웬만해선 먹겠는데, 여기서 더 무리를 했다간 체하게 생겼다면서 그는 결국 주모를 불러 멀쩡하게 남은 고기를 싸 달라 했다.

고기를 망태기에 넣고 주막을 나온 백호는 주변을 휘이, 둘러봤다.

눈을 가늘게 뜬 그는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같이 살고 있는 꼽추 놈이 필요한 게 있다고 해서 그거 몇 가지를 사 들고 이만 산으로 올라가면 되는데, 발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여기가 어딘가 싶어서 멈추었을 때 백호의 눈에 들어온 건 관아였다.

관아의 외문을 지키는 포졸 두 놈이 나른한 얼굴로 있다가 크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한다.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입을 쩍쩍 벌려대는 놈을 두고 백호는 혀를 찼다.

저 한심한 인간 같으니라고. 저래서야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못 잡겠다면서 백호는 몸을 돌렸다.

쓸데없는 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었다. 독각귀와 약속을 하긴 했지만, 그건 그 어린것에게 문제가 생길 때에나 움직이면 그만인 노릇이었다. 그리고 백호는 몇 걸음 옮기지 않아서 멈춰 서야 했다.

망태기를 한쪽 어깨에 걸친 채로 그는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가늘게 뜬 모습이 꽤나 심기 불편해 보인다. 인상을 쓴 채로 있던 그는 바로 뒤를 돌아봤고, 혀를 찼다.

아, 정말 성가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백호는 재차 움직였다.

* * *

아무도 없어 한산한 동헌 마당 한쪽으로 개미가 줄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막 근처를 순찰하던 포졸 놈이 그 개미들 위를 지나치려 했고, 볼품없는 발이 개미 위로 안착하려던 순간, 앞에서 뻗어진 하얀 손이 그런 포졸의 배를 눌렀다.

반쯤 잠에 취해서 걷던 포졸이 놀라 눈을 크게 뜨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해사하니 고운 자태의 신입 사또가 그런 포졸을 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자네 길을 잘못 들었군.”

“제가 기, 길을 말입니까?”

되물으면서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지금 넓은 시장거리를 걷는 것도 아니고, 몇 년 동안 일하던 관아 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길을 잘못 들 리가 없잖은가.

이해가 되질 않아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바라보는 포졸을 두고 사또는 눈을 내리떴다.

“자네가 개미를 밟을 뻔하지 않았나.”

그제야 고개를 숙인 포졸은 바닥 위를 살폈다. 하지만 처음에는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눈을 가늘게 떴고, 줄지어 이동하는 개미 떼가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포졸의 얼굴이 더더욱 이상하게 변했다.

이게 뭐지? 지금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이해 되지 않아서 물음표만 잔뜩 띄운 얼굴로 있는 포졸의 배를 누르던 손을 치운 사또가 뒷짐을 지었다.

“개미들이 모처럼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그걸 방해하면 쓰나. 개미를 함부로 밟았다간 나중에 재수없는 일을 당할 거야.”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말하는 건데도 묘하게 껄끄러움이 느껴졌다. 그래서 점점 굳어지는 포졸의 얼굴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또는 턱짓을 하며 가 보게, 라고 했다. 그제야 포졸은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꾸벅이곤 급히 그 자리를 떴다.

멀어지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연신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뒤를 돌아본 포졸은 뒷짐을 진 채로 개미들을 내려다보는 신입 사또를 보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괴이쩍은 걸 보기라도 하는 듯 일그러진 그 얼굴에 백호도 눈을 가늘게 떴다.

백호와 포졸, 둘이 이상하다는 듯 바라봐도 신입 사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가 쳐다봐도 상관없다며 계속 개미를 살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초연해 보여서, 포졸은 서둘러 멀어졌고 백호는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담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로 그는 사또 명월을 뚫어지라 살펴봤다. 그 시간은 꽤 길었다. 그러는 사이에 동헌 마당으로 포졸 몇이 더 들어오고, 이방과 호방이라는 자가 사또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기도 했으나 그는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괜찮네, 생각 없네, 나중에 내가 따로 확인해 보겠네, 고맙네, 등등.

영혼이 담겨 있지 않아 건성으로 대꾸하는 말을 들은 이들은 지레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사또를 대하는 이들 중에선 그를 껄끄러워 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고, 개중에는 호의를 드러내는 자도 있었다.

아부를 한다거나 그의 환심을 살 만한 말을 꺼내 봐도 명월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고작해야 ‘음, 그런가.’라는 게 고작이었다.

애초에 그는 이곳에서 누군가와 새롭게 친분을 쌓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눈에 딱 보일 만큼의 벽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로는 싫은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내내 웃는 상인지라, 그걸 알아차리는 자들은 드물었다. 눈치가 빠른 편인 이방이 그걸 감지하곤 그를 귀찮게 굴지 않았다.

먼저 선을 긋고 벽을 만들어선 다른 자들이 그 안으로 들어설 수 없도록 한다. 웃는 얼굴로 산뜻하게 거절하는 그런 류의 인간이었다. 자신이 딱 질색하는 놈들.

명월을 바라보던 백호의 눈빛이 점점 굳어진다.

느낌이 안 좋은 어른이 되었군. 역시나 저놈은 신경을 끄자. 그렇게 생각하고 말 거라며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명월이 움직였다. 갑자기 쪼그리고 앉아선 무릎을 양팔로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더 아래쪽을 숙인다. 그러곤 이동하는 개미를 보곤 웃었다. 입술 꼬리가 올라가면서 눈매가 가늘게 휘어진다.

명월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짓던 웃음은 몇 번이나 봤다. 하지만 저런 건 처음이었다. 지금 저건, 가식적인 게 아니라 정말로 즐거워서 짓는 웃음이었다.

백호는 명월의 올라간 입술 꼬리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입매가 꽤 오랫동안 그의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 * *

백호가 자리를 잡고 영역을 만든 곳을 인간들은 반양이라 불렀다. 물론 반양만이 그의 영역인 건 아니었다. 반양을 중심으로 서쪽이 전부 다 그의 것이었다.

원래부터 그런 건 아니고, 잠깐 쉬자 싶어서 눌러앉은 걸로 덜미가 잡혀 버렸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어느 한 곳을 맡아서 그곳에 뿌리를 내릴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 해서 어딘가 가야 할 곳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편한 대로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산밖에 없는 곳에 하나의 인간이 들어왔다. 그 인간이 둘이 되고, 열이 되더니 곧 백이 되었다. 부락을 만들고 꽤 규모가 큰 마을이 되었다. 곧 반양이라는 이름이 붙은 고을이 되었다. 처음 인간들이 이곳을 반양이라 부르며 즐거워 할 때 백호는 코웃음을 쳤다. 남의 땅에서 별 지랄을 다 떤다 싶었던 거다.

간혹 인간을 싫어하는 부류가 있었다. 그들과는 얽히려 하지도 않고, 그들의 냄새나 모습을 보기만 해도 질색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백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과 되지도 않는 고집과 일을 밀어붙이는 추진력 등등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다.

아침에는 핏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어린애가 어느 순간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되어서 뒷마당에 앉아 있다, 간혹 자신을 보곤 ‘인간이 아니시군요.’라고 말하는 게 재미있었다.

젊었을 적에는 눈이 막혀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다 죽을 때가 되니 자신의 존재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제 목숨에 아랑곳하지 않고, 힘겹게 양손을 모으면서 ‘우리 가족들 좀 보살펴 주십시오.’라고 말하곤 했다.

나고 자라 죽을 때까지 이기적일 것만 같던 인간들이, 마지막 순간에는 결국에는 제 핏줄을 챙긴다. 그런 것도 흥미로웠다.

그렇다 해서 백호가 그들의 청을 모두 들어주는 건 아니었다. 대부분은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다가 대답도 없이 몸을 돌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그걸 오해하고는 언제나 고맙습니다, 같은 헛소리를 하는 거다.

백호는 언제나 정해진 동선대로만 움직였다. 그러다가 간혹 길을 잘못 가거나 다른 곳으로 들어설 때가 있기도 했다. 그럴 때에는 꼭 소소한 문제가 생기곤 했다.

“거절하지 말고, 그냥 들고 가더라고. 고놈들이 정말 맛난 것들이라니까―.”

그리 말하면서 여자는 눈을 반짝이면서 백호를 올려다봤다.

그에 반해 백호는 제 손에 들린 커다란 닭장과 그곳에 들어가 있는 두 마리의 폐계닭을 노려봤다. 굳어 있는 백호의 얼굴에 여자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열심히 말을 늘여놓았다.

“돈보다 더 귀한 놈들이야. 푹 고아서 소금이나 김치로 싸서 먹으면 입에서 사르륵 녹을 거라니까.”

질기기가 소 심줄보다 더 하다는 폐계닭이었다. 이 여편네가 지금 누구 앞에서 거짓말인가 싶었다. 지금 네가 얼마나 엄청난 짓을 하고 있는 지나 알고 있느냐면서 한 소리 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면서 백호는 탐탁지 않아 하며 눈을 내리떴다.

그냥 맨정신으로 만든 그릇이라면 모를까, 기분 좋게 술 한잔 걸치고 흥에 겨워 깎아 낸 놈이었다. 거기다 밥을 넣어 먹으면 보약이 되고, 물을 담아 마시면 피가 맑아진다. 그런 걸 지금 닭 두 마리하고 바꾸겠다는 거다. 당장 닭을 여자에게 던지고 싶은 마음에 백호는 무거운 닭장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 저기 뒤쪽에서 포졸 둘이 걸어오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보였다. 그냥 쳐다보고 말 셈이었지만, 그들이 하는 말 속에 “이번 사또가 말이야―.”라고 하는 게 있었다.

그 순간 자연스럽게 백호의 귀가 쫑긋하고 선다. 거리는 꽤 떨어져 있었고, 대화의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그들도 알아서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오늘도 대낮부터 기방을 가는 것 같더라고. 할 일이나 제대로 하는지 모르겠어.”

“할 게 뭐가 있겠어. 얼굴도 반반하니 심심할 때마다 동헌에 나와서 의자에 앉아 하품이나 하고 있던데―.”

“그런 식으로 2년을 여기에 있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건가? 그런 인간은 도대체 얼마나 받을까?”

“매일 기방을 가도 기둥뿌리가 안 뽑힐 만큼이겠지 뭐.”

“아이구야. 그러면 도대체 얼마나 받는다는 거야.”

포졸은 두 손을 구부리면서 셈을 해 봤지만,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예 양손을 펼치고는 잘 모르겠다면서 인상을 쓰는 동료의 모습에 포졸은 혀를 찼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게.”

타박하는 말에 셈을 하던 손을 내리고 포졸은 옆을 바라봤다.

“이번 사또도 별거 아닌 것 같더라고. 얼굴이 반반한 게 생긴 값을 한다고, 어린 게 벌써부터 여자나 밝히고 말이지.”

“그러게 말이야. 그런 식이라면 얼마 안 가서 육방들이 관아를 접수하겠어.”

“도성의 내로라하는 집안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 반양에선 그런 건 다 필요 없어―.”

포졸은 이를 드러내면서 이죽거리며 웃었다.

“이번에 온 건 별거 아닌 것 같아. 그냥 쥐 죽은 듯 얌전히 있도록 우리가 뭔가를 좀 해 봄세.”

“해 보다니. 뭘 하려고 그러는 거야?”

“딱 봐도 간이 작을 것 같잖아. 나중에 그 사또가 지나치는 대문에 뭔가를 달아 두자고.”

“에이, 그러지 말게. 그러다가 깜짝 놀라서 심장이라도 멎으면 어쩌자고―.”

“고작 그런 간으로는 여기서 사또 노릇 못한다니까. 솔직히 자네라서 하는 말이네만, 얼굴 반반하고 어린 것이 갑자기 나타나 신입 사또랍시고 있는 모습이 꼴사납지 않나. 난 그런 놈들이 싫거든.”

그리 말하며 눈을 가늘게 뜨는 포졸의 얼굴이 위험해 보였던 걸까. 동료가 혀를 찼다.

“어허, 이 친구 보게나. 일 크게 치게 생겼군.”

“그러지 말고 같이 하자고. 한번 제대로 기를 죽여 놓으면 앞으로 우리들 일하기가 편해질 게 아니겠나.”

넌지시 제의하는 말에 듣고만 있던 포졸은 귀가 솔직한 것 같았다. 대답은 하지 않아도 조금 더 찌르면 영락없이 넘어오게 생겼다.

그렇게 포졸 둘이 점점 더 멀어지는 동안에도 앞에 선 여편네는 열심히 돈보다 귀한 폐계닭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혀에 침이 마를 정도로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백호는 여전히 굳은 얼굴이다. 아무래도 안 넘어갈 것 같다면서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뒷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어쩔 수 없이 돈을 줘야겠네. 그리 생각하는데 갑자기 백호가 몸을 돌리고 성큼성큼 가 버린다. 돈 대신에 닭을 받아가는 건가 싶었던 여자는 눈을 빛냈다.

“아이고, 잘 생각했구먼. 그거 오늘 바로 들고 가서 삶아 먹어. 오래 되면 질겨서 못 먹어―.”

반색하며 양팔을 흔드는 여자였지만, 백호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거의 매일 기방을 찾아서 기생을 옆에 끼고 있고, 일은 하는 둥 마는 둥이고, 중요한 일이 생기거나 모임 같은 게 있어도 “그걸 꼭 내가 가봐야 하는 건가.”라는 식으로 말한다.

뭘 해도 협조적이지 않고 한발 뒤로 물린 채로 방관하듯 있었다. 영락없는 한량이었다.

말을 듣기만 하는 백호가 뭐하는 건가, 라고 생각할 정도인데 같은 장소에서 일을 하는 이들은 오죽하겠는가. 내심으론 저런 게 왜 이번에 이리로 온 걸까 싶을 거다.

그런 식으로 우습게 보이면 그놈에게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왜 시작부터 제대로 못하는 건가.

여긴 놈이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런 곳이 아닌데―.

내내 인상을 쓰던 백호는 얼굴에 달라붙는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꼽추가 아까 마을에서 들고 온 닭을 보고 있었다.

빤히 보더니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안 봤다는 양 다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지만, 아까부터 저런 식으로 이쪽을 힐끔거렸다는 걸 모르진 않았던 백호가 한마디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속 시원하게 해라.”

정말은 말을 못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표현할 수 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마을에서 돈 대신 얻어 온 닭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지. 그러니까 아까부터 저걸 보란 듯이 앞에다 두고 쪼그리고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는 게 아니던가.

원래라면 돈 대신에 다른 걸 받아 오는 백호가 아니었다. 그땐 그도 뭔가가 씌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왜 이런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한 걸까.

그런 의문 후에 떠오르는 얼굴이 딱 하나 있었다.

명월을 떠올린 백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놈의 닭 안 보이는 곳에 넣어 둬라!”

아래쪽에 있는 닭장에 넣어 두든가 하라면서 백호는 쌩하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밤이 되면 이상한 것들이 활동을 시작한다.

뭔가를 좀 아는 것들은 이 땅에 자리를 잡고 있는 그를 의식해서 함부로 다니지 않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은 주변 눈치 볼 것 없이 제멋대로 행동한다.

힘 좀 꽤나 쌓은 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잔챙이들이 나대는 거였다. 지금처럼 말이다.

낡은 대문 위에 뭔가를 올리는 것들이 키득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웃다가도 서로에게 “시끄러워. 그러다가 들키겠군.”라면서 타박한다. 그러면서도 이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키득거린다.

등 뒤로 추잡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 것들이었다. 놈들은 열심히 대문 위쪽에 뭔가를 쑤셔 넣고는 손을 털면서 물러섰다.

“이 정도면 되겠지.”

“그렇지. 아침에 일어나서 대문을 열자마자 바로 쏟아질 거야.”

“도성에서 내려온 그 샌님의 얼굴이 하얗게 뜨겠구먼.”

이런 짓을 벌였는데 근처에 있을 순 없었다. 원래 음모를 꾸밀 때에는 그 장소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모처럼 신경 써서 이런 장치를 만들었는데 가까운 곳에서 구경하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웠다. 그래도 꼬리가 밟히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면서 손을 턴 그들은 뿌듯하게 위를 올려다봤다.

그러다가 너무 시간이 늦어진 것 같아서 서로 시선을 주고 받으면서 몸을 돌렸다.

나쁜 일을 하고 난 후이기 때문일까. 아까부터 올라가는 입술 꼬리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면서 크흐흐, 하고 웃던 포졸은 고개를 들었다.

“암만 생각해도 웃길 것 같단 말이야. 그 사또 말이야. 너무 놀라서 쉬라도 지린다면 재미있지―.”

포졸의 말은 채 이어질 수 없었다. 고개를 들자 동료의 목이 없었다. 말 그대로, 몸통은 멀쩡하게 있는데 목이 없었다. 그런데 그 목이 없는 놈이 갑자기 빠르게 자신에게 달려들었다.

기겁한 포졸이 크게 입을 벌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악, 하고 크게 소리를 내지르는데 그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목이 없는 놈이 덤벼들었고, 기겁한 포졸은 다리에 힘이 풀려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목이 없는 귀신이 그런 포졸을 열심히 두들겨 팬다.

퍽퍽, 하고 온몸으로 떨어지는 발길질에 포졸은 버둥거리면서 필사적으로 방어를 하다가도 고개를 들면서 악을 써댔다.

한 몸은 바닥에 엎드린 채로 버둥거리고, 다른 한 놈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선 그놈을 발로 차대고 있었다. 둘 다 이상한 걸 보는 듯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두들겨 패면서 공격을 하다가 한 몸이 되어선 바닥에 뒹구는 걸 확인한 백호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곤 조금 전, 포졸 놈들이 서서 이상한 짓을 하려 했던 대문 앞으로 걸어갔다.

위로 손을 뻗어 대문에 걸쳐져 있던 주머니를 잡아 내리자, 그곳에서 뭔가가 후두둑 떨어진다.

바닥으로 떨어진 건 돼지 뼈와 사람의 머리카락, 그리고 죽은 쥐였다.

온갖 쓰레기들을 다 모아왔군.

고작 이런 걸로 그놈을 놀라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놈은 진짜를 보는 눈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가짜를 두고 두려워하거나 기겁할 리가 없었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들을 발끝으로 툭툭 친 백호는 다시 뒤를 돌아봤다. 한참 동안 서로에게 달라붙어서 주먹질을 하거나 발길질을 하던 놈들이 엉망이 된 모습으로 휘청거렸다. 이제는 힘든 건지 서로의 멱살을 잡거나 하면서 버티기에 돌입했다.

백호는 오른손을 들어서 가볍게 손가락을 부딪쳤다. 그러자 포졸들의 행동이 멈춘다. 그리고 서로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은 그들이 비틀거리면서 백호에게 다가왔다.

똑바로 선 포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코피가 흐르고 입술이 찢어진 데다 이마나 턱 등에서도 피가 철철 흘렀다.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그런 모습을 봐도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이만하고 여기에 와서 이것들을 치워라. 그리고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딴 짓은 하지 마라. 알겠느냐.”

백호의 말에 풀린 눈을 하고 있던 포졸들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허리를 굽히고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섬주섬 치우는 걸 확인한 백호는 몸을 돌렸다.

망태기를 한 손에 들고 있는 백호는 내내 인상을 쓴 채였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그런 의문을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한 건지 모르겠다. 그런다 해도 답은 내려지지 않았다.

명월이니, 뭐니 하는 놈에게 생기는 일 같은 건 자신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포졸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저런 짓을 하는 건 명월 그놈이 제대로 된 처신을 못했기 때문이었다.

왜 기생집을 드나들어. 그곳에 그 녀석이 있는데―.

백호는 탐탁지 않아 하며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러는 동안 그가 도착한 건 동헌 마당이었다. 달빛을 받아서 하얗게 빛나는 마당을 둘러보던 백호는 눈을 내리떴다.

그의 손에는 닭이 들려 있었다. 오늘 마을에서 얻어온 그 폐계닭 중 한 마리였다. 그걸 쥔 손에 힘을 주고는 잠시 고민이 되는 듯 인상을 쓰나 싶던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계단을 올라, 대청에 올라섰다. 그리고 의자 앞에 서선 닭을 들었다.

이런 짓을 한다 해서 뭐가 바뀌겠는가. 하지만 하나의 경고가 될 순 있었다.

헛짓거리 하지 말고 얌전히 좀 있어라.

혹은 이걸 보고 그 녀석을 건드리지 마라.

처음은 명월을 겨냥한 충고였고, 두 번째는 그 녀석의 주변에 있는 것들에 대한 경고였다.

이 땅에서 사는 놈들이라면 이걸 두고 저들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불길한 상상을 이끌어 낼 거다. 그것은 암암리에 명월 그놈을 함부로 여기지 못하는 장치가 되겠지. 주변에서 알아서 명월 그놈을 어려워하고 조심스럽게 대하면 자신이 할 일도 그만큼 줄어드는 거다. 이걸로 자신이 그놈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지는 거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며 백호는 닭의 목을 잡아 비틀고는 그대로 꺾어 버렸다.

투둑, 하고 쏟아지는 닭의 피를 확인한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 * *

원래는 그걸로 끝이 되었어야 했다.

닭은 경고의 의미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상하게 죽어 있는 닭을 본 명월이 알아서 몸을 사리고,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게 될 줄 알았다.

그리 된 닭을 본 관아 놈들이 ‘이상한 일이 벌어지려는 모양이다.’라고 지레 겁을 먹고 움츠러들게 있게 할 셈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백호 그가 바라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쪽으로 진행되었다.

닭의 피가 묻은 의자가 불길하다면서 그걸 새로이 만들기 위해서 나타난 명월이 뒤를 돌아보면서 눈을 크게 뛰는 순간, 백호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넓은 작업실 안을 그득히 채우는 달콤한 냄새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만큼 표정은 굳어지고 튀어나오는 말은 딱딱할 수밖에 없었다.

명월이 말을 건넬 때마다 하는 대답이라는 게 하나같이 멍청이 같았다.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 ‘왜 이렇게 말하는 거지. 지금 난 뭘 하는 거지?’ 그런 의문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명월이 닭에 대해서 물었을 때 백호는 정말로 병신 같은 대답을 했다.

시집가야겠군.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에 명월의 눈이 크게 떠진다.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는 명월을 보고 백호는 속으로 아―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아마도, 숨기고 싶었던 바람이 튀어나온 게 아니었을까.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고 난 후에, 명월이 그때 일을 두고 뭐라 할라치면 백호는 괜히 얼버무리면서 화제를 돌려야만 했다.

무서운 거 없고, 명월 앞에선 꿀릴 것도 없는 그였으나, 목이 비틀린 닭 이야기만 나오면 얼버무리게 된다. 한 20년 놀림거리를 스스로 만들어 버리고 만 백호였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투닥거리는 것도,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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