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그것은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어딘가 잘못된 건 없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이런 상태였다. 온몸이 무거워서 손가락 하나 까닥일 힘도 없었던 그것은 허어, 허어, 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주변을 살폈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게 생겼다. 그 누구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대로 죽게 되겠거니 싶은 생각이 들자 더럭 겁이 난다. 무섭고, 두렵다.
이런 식으로 어이없이 죽고 싶지 않았던 그것은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몸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걸지도 모르지. 그래서 이런 상태인 거라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몸에 힘을 줘 봤다.
부들부들 떨면서 한조각 남은 힘을 끌어 모아서 일어나려는 순간, 머리 위로 그늘이 진다. 이건 또 뭔가 싶었던 그것은 너무 놀라서 움직이던 걸 멈추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하얀 손이 그걸 조심스레 들어서 위로 올렸다.
몸이 올라가는 느낌에 그것은 잔뜩 겁을 먹었다.
도대체 뭐냐. 날 건드리지 마라. 난 원래 있던 곳에 그냥 두라고.
하고 싶은 말은 있어도 말이 나오지 않는다. 혼란스러워서 가만히 있는 동안 하얀 손이 나뭇가지 근처에 걸려 있던 새집에 그것을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그러곤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것 아래로 얼굴을 내민다.
“다음부터는 조심해라. 집에서 떨어지지 말고.”
보이는 건 박꽃처럼 새하얀 얼굴이다. 별빛을 박아 놓은 것처럼 검고 또렷한 눈망울과 높은 콧대와 붉은 입술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올라가는 입술 꼬리에 맞춰서 오른쪽 뺨 가운데에 찍힌 점이 도드라진다. 곱다고밖에 볼 수 없는 사내는 머리를 하나로 대충 묶고는 청빛 도포를 입고 있었다. 분위기가 수수하고 묘한 것이 인간 같지는 않고, 신선인 것 같았다.
그 아름다운 이가 멀어지려는 순간 그것은 정신이 들었다.
저분은 분명 신선이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을 가엽게 여겨서 나타나 도움을 주신 거다. 기연(機緣)을 만났는데 이대로 헤어질 순 없었다.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으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에게 가려는데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그가 몸을 돌리고 멀어진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안타깝다.
그것은 열심히 바지락거렸다. 저 아름다운 사람을 쫓아가기 위해서 굳어 버린 것 같은 몸과 팔과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려 용을 썼다.
* * *
나무 사이를 통과하면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고 참 맑다. 뺨을 스치는 청명한 향을 느끼면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쉰 후 고개를 든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눈을 찌른다.
아름다운 곳이다. 자신을 아는 이들이 없고, 시끄럽게 구는 것들도 없었다. 온전히 숲을 기운을 만끽하면서 지낼 수 있어 더욱더 만족스러웠다.
이런 상태가 계속 유지되었으면 좋겠다면서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던 명월은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향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난 산길 사이에 피어 있는 색색의 꽃들을 발견했다. 바로 그리로 가서 쪼그리고 앉자 달콤한 냄새가 더 강하게 난다. 원래 꽃을 보고 아름답군, 하고 짤막한 감상을 하는 걸로 지나치곤 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명월은 바로 꽃 앞으로 가선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앞에 있는 하얀 꽃이 소박한 모양새만큼 향이 깔끔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찾아온 만큼, 지금은 이렇게 꽃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면서 명월은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재차 깊이 숨을 들이마시려던 찰나, 머리 위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검은 한복을 입은 사내다. 산발인 머리를 대충 풀어 내린 그는 이마에도 검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뭔가 음침하다 싶지만,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는 사내의 용모는 준수했다.
사내, 백호가 한 손에 꽃잎을 쥔 채로 손가락을 살살 움직이자 그곳에서 떨어진 꽃잎들이 명월의 얼굴로 나풀거리며 떨어진다.
한쪽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떨어지는 꽃잎을 살피던 명월이 입술을 달싹였다.
“꽃은 관상만 하면 되는 거야. 그걸 왜 꺾는 건데.”
아깝잖아, 라는 타박이 담긴 말에 백호는 손을 내렸다.
“그냥 기분 좀 내고 싶어서 그런 건데, 모르는 척 가만히 있으면 안 되나?”
명월 성격에 “우와, 멋져.”같은 말을 할 리가 없으니 그냥 입 다물고 조용히 떨어지는 꽃잎을 감상해 주면 어디 덧나는 건가 싶었다.
억울해서 툴툴대는 백호를 두고 명월은 웃었다. 미묘하게 올라간 입술 꼬리가 마치 비웃는 것 같다. 그것에 모처럼 기분 내려다가 괜히 잡치게 된 백호는 팔짱을 끼며 몸을 돌렸다.
모르는 척 몸을 돌려버리는 모습에 명월은 헛웃음이 나왔다.
나잇살 처먹고 지금 저게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삐친 걸까. 일부러 물어보는 것도 귀찮다.
옆에 선 백호가 팔짱을 끼고 토라져 있든 말든 명월은 조금 더 꽃구경을 하고 싶었다. 너무 예쁘고 탐스러워서 한참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사람 손이 타지 않는 곳에는 이런 꽃도 피는구나. 그리 생각을 하던 명월의 눈에 반쯤 꺾어져 있는 꽃이 들어왔다. 끝에 달린 꽃은 싱싱한데 줄기가 꺾여 있었다.
그걸 확인한 명월은 그리로 손을 뻗어선 조심스레 꽃을 꺾었다. 그걸 한 손에 든 채로 일어나 백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자 백호가 인상을 쓴 채로 뒤를 돌아본다.
“뭐냐―.”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마디 하려던 백호의 오른쪽 얼굴 옆으로 명월의 손이 다가온다.
명월의 손이 가까워지자 움찔한 백호지만, 고개를 돌린다거나 피하진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백호의 오른쪽 귀와 머리카락 사이로 하얀 꽃이 꽂힌다.
떨어지지 않도록 잘 고정한 후 명월은 손을 떨어뜨리곤 백호를 유심히 살폈다.
거울이 없으니 지금 제 꼴이 어떤지 알 수 없는 백호는 이건 뭔가 싶어서 눈이 꽃 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래도 보이지 않아서 답답한 건지 그리로 손을 뻗는다.
“건드리지 마.”
명월의 말에 들려던 손을 멈춘 백호가 눈을 내리떴다.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명월이 웃었다.
“그냥 그러고 있어. 잘 어울리네. 예쁘다.”
“……뭐라고?”
지금 들은 말이 대체 무언가 싶어서 혼란스러워진 모양이다.
꽃 근처에 손을 들기는 했으나 그러고 있으라는 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백호를 보던 명월의 입술꼬리가 가볍게 올라간다.
모처럼 휴식을 위해서 찾아왔기 때문일까. 마음이 느긋하니 한없이 편안해진 명월은 해사하게 웃었다.
“정말 예쁘다.”
“…….”
말에는 독특한 억양이 담겨 있기에, 상대가 거짓말로 이러는지 진심인지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지금 명월이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던 백호는 손을 내렸다.
대신 명월의 턱을 잡아서 위로 들고는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기 직전 갑자기 명월이 어, 하는 소리를 내면서 허공을 가리켰다.
“저기 뭔가가 있다!”
갑작스러운 명월의 외침에 놀란 백호는 급히 고개를 들었다. 일부러 손을 써서 이상한 것들이 침입할 수 없도록 했는데 대체 뭔가 싶었다. 하지만 쳐다본 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나뭇가지를 파사삭, 하고 흔드는 걸 본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고 그러는 동안 명월은 그 앞에서 빠져나왔다. 잽싸게 옆으로 가서 산길을 올라가는 명월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속은 걸 깨달은 백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너 지금―!”
본인이 당한 일이 기가 막혀서 한 소리 해 주려는데 명월이 뒤를 돌아본다. 반 묶음한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가 자연스럽게 등 뒤로 내려앉는다. 동시에 가늘게 휘어지는 시원한 눈매를 본 백호는 입을 다물었다.
유치한 짓으로 자신을 속이려 한 것은 괘씸하건만, 명월이 저런 식으로 쳐다보면 뭐라 할 수가 없어진다. 한심할 정도로 명월에게 약한 자신을 느끼면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피곤하니 조용한 곳으로 가서 쉬고 싶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를 데리고 이곳으로 오지 않았던가. 거기서 이미 모든 상황은 종료된 셈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된 거냐면서 혀를 찬 백호는 성큼성큼 올라갔다. 명월의 옆으로 간 백호는 당당하게 어깨에 팔을 둘렀다.
묵직한 백호의 팔이 어깨에 올려지는 순간 윽, 하고 짧은 신음을 흘린 명월은 곧 무겁다고 했지만, 백호는 더 세게 어깨를 끌어당겼다.
머리에 꽃을 단 채로 팔에 힘을 주는 백호의 행동은 심술을 부린다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당히 너그러운 상태였던 명월은 거기서 더 뭐라 하지 않고 그냥 가볍게 웃고 넘겼다.
* * *
대서(大暑)가 갓 지나 한창 더울 때였다.
마음도 이상하게 뒤숭숭해서 뭘 해도 손에 잡히지 않아 붕 뜬 상태로 있으려니 백호가 왜 그러는 거냐고 물어왔다.
명월은 아무것도 아니라 하면서도 내내 맹한 얼굴이었고, 그걸 두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백호가 재차 물었다. 그제야 명월은 지치는 것 같다면서 쉬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그 말에 ‘고작 그 이유로 내내 처진 상태로 있었던 거냐.’ 라면서 인상을 쓰는 백호였지만, 이튿날 이런저런 준비를 다 해선 짐 하나 들고 명월 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가자.
길게 말할 것도 없었다. 막 일어나서 멍한 상태였던 명월은 백호에게 그대로 끌려 나왔다. 인간들은 물론이거니와 어떤 존재들도 찾지 못하는 깊은 산속에 오게 되었다.
이리로 오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백호의 손에 이끌려서 걷기만 했으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그냥 깊은 산속에 아늑한 초가집 한 채가 있어서 그곳에서 쉬면 될 뿐이었다.
이 알 수 없는 곳은 또 어찌 알고 있는 건가 싶었다. 생각은 해도 입으로 담지 않았다. 입 다물고 손 놓고 가만히 있으면 백호가 알아서 따뜻한 물을 준비하고, 밥도 가지고 오고, 이부자리도 펴 주었다. 그리고 목욕이나 기타 다른 것들까지 모두 알아서 챙겨 주었다.
본인은 툴툴대면서도 결국엔 모든 걸 다 챙겨 준다. 그걸 알기 때문에 명월은 내내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고 뒹굴거리면 그만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해가 저물 즈음, 아름다운 노을이 하늘 가득에 깔린다.
이런 깊은 숲속에서 저런 예쁜 노을을 보게 되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이상도 해서 마루에 누워서 멍하니 하늘 구경만 하고 있는데 백호가 옆으로 와서 앉았다.
“먹어라.”
뚱―하니 건네는 말에 명월은 눈만 옆으로 움직였다. 배 불러서 터질 것 같은데 뭘 또 준비해 온 건가 싶어서 필요 없다는 말을 하려 했는데 놓여 있는 건 빙수였다.
이것도 백호가 처음 만들어 줘서 알게 된 거였다. 얼음을 잘 갈아서 그 위에 달게 찐 팥과 작은 떡, 하얀 물과 이것저것을 넣어서 맛있게 만든 거다.
처음엔 너무 차서 한입 먹고 말았는데, 내내 그 맛이 입 안에 감돌아서 결국 다시 만들어 달라 했다. 이후로는 겨울엔 찐 고구마를 찾는다면 여름엔 단연 팥빙수가 필수 요소였다.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일어난 명월은 바로 수저를 들고는 빙수를 떠먹었다. 입 안에 빙수를 아주 조금 머금은 채로 오물거리면서 먹는 명월을 보던 백호가 가만히 있다가 묻는다.
“어떠냐?”
“맛있어.”
일말의 망설임 없이 맛있다 하자 백호의 표정이 느슨해진다.
“특별히 준비한 거니까 많이 먹어라.”
아닌 척 굴어도 정말은 맛있다 하는 것에 기분 좋아지는 게 빤히 보인다. 그런 게 귀엽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당장 ‘저놈이 뭐가 귀엽습니까!’ 라면서 기함하겠지만, 명월의 눈에는 그랬다.
은근히 귀엽고 꼼꼼한 구석이 많았다. 그리고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아랫도리가 불끈하는 놈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열심히 빙수를 먹다가 중간 정도 먹을 즈음, 떡을 옆으로 살살 치워 내고 팥 한 개만 수저 끝에 올려서 그걸 이로 살짝 떼어 내 먹었다.
입술 앞쪽으로 콩을 두고 오물거리면서 어정쩡하게 먹는데 얼굴에 닿는 시선이 느껴졌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든 명월은 백호와 시선이 부딪쳤다.
백호 특유의 진지한 눈빛을 확인한 명월은 눈을 끔벅였다.
아니. 왜 또 저렇게 보는 건데.
그런 기분이 들어서 가만히 있는 동안 백호가 앞에 놓여 있던 빙수를 잡고는 옆으로 스윽, 밀어낸다. 그걸 왜 치우는 거냐고 묻진 않고 그저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백호가 앞으로 다가와선 명월의 뺨을 한 손을 올리곤 고개를 가까이 붙여왔다.
바로 닿는 입술은 따뜻했다. 왜 이렇게 따뜻한 거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명월의 입 안에 혀를 밀어 넣고 가볍게 핥던 백호가 바로 입술을 떼곤 중얼거렸다.
“차가워.”
내내 빙수를 먹었으니 그게 당연한 거였다. 차가운 게 싫으면 조금 더 기다려 보라는 말을 하려는데 백호가 기습적으로 얼굴을 내밀어선 쪽, 소리가 날 정도로 입을 맞췄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몇 번에 걸쳐서 쪽쪽거리던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턱과 목, 그리고 옷고름을 풀어내선 급하게 앞섶을 벌리곤 가슴에 매달려 온다.
해가 지긴 했지만, 지금 바깥에 나와 있었다. 왜 갑자기 발정해서 이러는 거냐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지금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건 신음뿐이었다.
방이 아닌 바깥에 나와서 이상한 소리를 내는 데에 거부감이 있었던 명월은 입술을 누른 채로 나직한 헐떡거림을 토해 냈다. 그러는 동안 백호는 입을 벌리곤 명월의 탐스러운 가슴에 달린 젖꼭지를 크게 베어 물었다. 입술을 오므려 유두를 세게 빨아들이곤 혀와 이로 희롱하자 명월은 나직한 헐떡거림을 토해 내면서 그의 머리를 양팔로 끌어안았다.
* * *
머리부터 발끝까지 섬세하게 애무한 후에 백호는 명월의 몸을 가르고 들어왔다. 멈추지 않고 끝까지 거근을 밀어 넣은 후 자리를 잡은 그는 뜨거운 한숨을 쉬었고, 그를 품은 명월은 배 안쪽이 묵직해지는 느낌에 떨리는 신음을 흘렸다.
눈을 감은 채로 헐떡거리는 명월을 내려다보던 백호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에 젖은 속눈썹 위에 입을 맞추고 그 뺨과 근처에도 계속 입술을 눌렀다. 그러곤 양팔로 조심스레 명월을 끌어안은 후에 움직였다.
뜨거운 물건이 몸의 중심에 닿는다. 당연한 듯 자리를 잡은 물건이 끝까지 밀어 넣어질 때면 묘하게 배 안쪽이 무거웠다.
거기서부터 퍼지는 간지러우면서 아픈 느낌에 명월은 계속해서 신음을 토해 내면서 정신없이 백호를 찾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명월의 팔을 잡아 제 목에 두르게 한 백호는 부지런히 허리를 놀렸다.
성기를 놀릴 때마다 찰진 내벽이 예민한 살을 감싸 온다. 놓치지 않겠다는 양 계속해서 따라붙는 감각에 몸이 뜨거워지고 뼈가 녹는 것 같다. 독한 술통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 같다. 다른 생각은 할 수 없고, 오로지 명월만 느낄 뿐이었다.
찰지고 습한 구멍은 그가 찔러대는 대로 자유자재로 길이 생겨났다. 어디를 건드려도 길이 나 있고, 그를 환영한다. 마치 끝없는 굴 속을 탐험하는 것 같았다.
도취된 백호는 온 힘을 다해서 명월을 밀어붙였고, 그때마다 명월의 몸이 흔들리면서 그 입을 타고 안타까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짧게 끊어지는 신음이 감미로운 음악과 같다. 아파서 울면서도 결국에는 느끼던 명월이 허리를 휘면서 그만해 달라고 하면 백호는 고개를 숙여선 가슴을 크게 베어 물었다.
희롱당해서 퉁퉁 부은 유두를 혀로 길게 핥아 주자 명월의 몸이 떨린다. 그 떨림이 성기를 물어 주는 내벽에까지 닿았다. 거기가 끊어질 것 같은 느낌에 백호는 이를 악물곤 나직한 신음을 토해 냈다.
그러다 더 흥분해선 명월을 밀어붙이고, 또 밀어붙였다. 급기야 밀려난 명월의 머리가 벽에 부딪쳐 쿵쿵거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백호가 명월을 잡아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명월을 놓아준 것은 아니었다. 명월의 몸을 안아 올린 그는 대신 바닥에 누웠다. 그리고 힘없이 비틀거리는 명월의 팔을 잡고는 제 몸에 태운 채로 부지런히 허리를 놀렸다.
단단한 말의 안장 위에 앉혀진 느낌에 명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자고 힘겹게 내뱉어도 명월이 달아날 수 없도록 단단한 장치가 되어 있는 말의 안장은 제 하고 싶은 대로 허리를 놀릴 뿐이었다.
백호의 하반신에 엉덩이가 완전히 밀착된 명월은 흔들면 흔드는 대로 울음을 터트렸다.
* * *
닫힌 창호지 문이 바깥의 햇볕을 받아서 환하게 변할 즈음에 맞춰서 명월의 눈이 떠졌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명월은 입을 벌렸고, 그 사이로 한참 만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허어, 하고 배 깊숙한 곳에서부터 토해 내지는 기가 막혀 하는 한숨을 들은 명월은 지금 자신이 백호의 몸 위에 올려져 있는 상태라는 걸 깨닫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꼬옥 끌어안은 채로 눈을 감고 잘 자는 백호를 발견했다.
“…….”
몸이 아파서 여기저기가 욱신거리는 자신과 다르게 백호는 편안한 뵈는 얼굴이었다.
……왜 저 얼굴이 얄밉게 느껴지는 걸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명월의 손으로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간다. 그냥 시원하게 한 방 때리면 속이 시원하겠다 싶어 정말 그리할 셈인데, 으음―하고 신음을 흘린 백호가 입맛을 다신다. 그러곤 양팔로 더 세게 명월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뭔 소리를 내는 건가 싶어 궁금해진 명월은 말을 듣기 위해서 그의 입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숨에 섞여서 명월, 하는 단어가 들렸다.
“…….”
자신의 이름이었다. 그 긴긴밤 동안 놓아주지 않고 남의 몸을 제 하고 싶은 대로 했던 주제에 왜 이제 와서 저런 식으로 이름을 부르는 건지 모르겠다.
저러면 자신이 화를 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안일한 생각을 한다면서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고, 그러는 동안에도 백호는 입맛을 다셨다.
더 세게 몸을 끌어안는 백호의 성기는 이미 반쯤 선 채였다. 그게 배꼽 아래쪽을 쿡쿡 찔러대는 느낌이 불편했다.
백호는 이런 식으로 자신을 제 몸 위에 올리고 자는 걸 좋아했다. 본인은 똑바로 누운 채로 자니 편하겠지만, 몸 위에 올려진 쪽은 그게 아니었다.
이 상태로 자면 얼마나 불편한지에 대해서 아는 건 자신뿐이었다. 너무 제멋대로 굴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도 닿은 피부에서 퍼지는 따스함에 모든 것들이 눈 녹듯 사라진다. 처음에는 이 상태로 눈을 뜨면 기함하거나 불편해서 바로 인상부터 썼는데, 지금은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익숙해진다라. 그건 별거 아닌 것 같으면서 꽤 무서운 일이었다.
눈을 반쯤 뜬 채로 있던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백호의 단단한 팔뚝 쪽에 각각 손을 올린 채로 눈을 감았다.
여전히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리고 그를 받아들인 쪽은 얼얼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익숙해졌다. 이틀에 한번씩 이런 느낌이 없으면 뭔가 좀 아쉬울 정도로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명월은 슬금슬금 올라온 손이 엉덩이 볼기 한쪽을 꼬옥 쥐었다가 놓고는 손바닥으로 슬슬 문지르는 느낌에 눈을 떴다.
처음에는 백호가 잠결에 이상한 짓을 하는 건가도 싶었지만 아니었다. 손이 움직이는 느낌이 이상하다 싶어서 다시 고개를 들자 백호가 눈을 반쯤 뜨고 있었다.
“일어난 거냐.”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너무도 태연히 저리하는 말에 명월은 입을 꾸욱 다물었다.
잘 자기는 했지만, 지금 남의 엉덩이를 제 것이라도 되는 양 멋대로 주무르는 백호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려고 한다. 당장 그 망할 손을 치우지 못하겠느냐고 한소리 하려는 순간에 맞춰서 명월의 등을 끌어안은 백호가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 위에서 내려와서 이불 위로 조심스레 내려놓아진 명월은 고개를 들고는 이마와 뺨 등에 입을 맞추는 백호의 행동에 인상을 썼다.
“더우니까 달라붙지 마.”
그 말이 괘씸하게 여겨진 걸까. 분명히 달라붙지 말라고 한 것 같은데 더 세게 몸을 끌어안는다.
완전히 백호에게 밀착된 상태가 된 명월은 얼굴이 눌리자 인상을 쓰면서 불편해했다.
명월의 뒷머리를 감싼 백호는 그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백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게 되자 쿵쿵, 하고 뛰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 들으면서 명월의 눈에 들어간 힘이 서서히 빠진다.
일정하게 울리는 심장 뛰는 소리. 거기서부터 올라오는 따스한 체온. 그것이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나른해지면서 편안해짐을 느끼며 눈을 끔벅거린 명월은 나직한 한숨을 토해 내곤 백호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그러자 백호가 양팔로 명월을 소중한 듯 끌어당기고는 그 정수리에 얼굴을 묻었다.
틈이 없을 정도로 서로를 끌어안고 그렇게 눈을 감았다.
이미 대낮이었지만, 조금 더 누워 있어도 괜찮았다. 여기에 있는 건 그들뿐이라 이렇게 늦장을 부린다 한들 그걸 두고 뭐라 할 이들은 없었다.
쉬고 싶으면 쉬는 거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면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이곳을 찾은 거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다른 몇몇 사람들 얼굴이 떠올랐지만, 이윽고 다 지워 버렸다.
명월은 백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면서 재차 잠에 빠져들려 했다. 그때 배 안쪽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신의 게 아니었다. 명월은 고개를 들었고 기다렸다는 듯 재차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이건 자신의 배에서 나는 거였다.
처음엔 백호가, 두 번째는 자신이 낸 소리다.
고개를 드는 명월과 동시에 백호도 고개를 숙였다. 시선이 부딪친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풉, 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입을 꾸욱 다물면서 웃음을 참은 명월이 먼저 백호를 밀어냈다.
“아무래도 일어나야겠어.”
이대로 있고 싶어도 계속해서 뱃속에서 꼬륵거리는 소리가 난다면 웃겨서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슬슬 일어나서 몸을 씻고, 밥 먹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백호도 순순히 팔을 벌렸고, 일어나 이불 위에 앉은 명월은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길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등 뒤에서 찰랑거린다. 크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하던 백호는 그런 명월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한 손에 쥔 채로 조물거리면서 만지다가 고개를 들곤 그곳에 얼굴을 묻는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그는 중얼거렸다.
“좋은 냄새가 난다.”
그 말에 명월은 머리에 올린 손을 내렸다.
백호가 좋은 냄새 운운할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백호가 맡는 그 냄새가 명월에겐 맡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은 저 녀석이 땀 냄새를 오인하는 게 아닐까 싶었으나, 아니겠지. 어찌 땀 냄새를 좋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짓을 할 땐 땀조차도 샅샅이 핥으면서 엄청난 집착을 드러내는 놈이니 가능할 것 같진 한데―.
거기까지 생각하는 동안 점점 더 산으로 가는 듯하여 생각하길 중단한 명월은 눈을 내리떴다.
“배고프다.”
배에 한 손을 올리고 그리 말을 한 명월은 당당했다.
내가 배고프니까 얼른 일어나서 밥 좀 해 와라. 딱 그렇게 말하는 투였다.
누워서 명월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장난치듯 손가락을 놀리던 백호의 표정이 딱 굳는다.
명색이 ‘백호’인 자신이 밥 달라면 당장 그걸 차려 줘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걸로 자신을 부려먹을 생각일랑은 하지 말라고 한마디 하고 싶지만, 눈을 내리뜬 채인 명월은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당연한 걸 요구하는 편안함이 있었다.
……저 얼굴을 앞에 두고 뭐라 할 수 있을까.
결국엔 그 모든 일들은 자신이 자초한 것이었다. 그렇게 버릇을 들여 놓은 자신이 잘못한 거라면서 혀를 찬 백호는 꼼질거리면서 일어났다. 고개를 마구 흔들어서 머리를 대충 정리한 후, 명월을 흘깃 본다.
알몸으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예뻐 보인다. 눈에 콩깍지가 제대로 쓰이다 못해서 착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은 모양이라며 백호는 명월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를 화악 끌어당겼다. 명월을 세게 안고 그 이마에 입을 맞추곤 바로 일어나 발로 차 문을 열었다.
알몸으로 당당하게 나가면서 허리 뒤를 긁적인 백호가 “날 한번 더럽게 좋네.”라고 꿍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명월은 웃었다. 그러곤 조금 전까지 백호가 누워 있던 곳 위로 손을 내리자 아직 따끈했다.
주변을 더듬던 명월은 바로 그 위로 엎드리듯 누워선 이불을 몸 위에 덮었다.
“뭐야? 왜 다시 눕는 건데? 나와서 씻어―.”
백호의 바가지 긁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양 명월은 꾸물거리면서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그걸 보고 더 뭐라 할 수 없었던 백호는 쯧쯧, 하고 혀를 찼다.
* * *
꾸물거리면서도 일단은 씻고, 옷도 갈아입고, 방 청소도 했다. 백호에게 밥까지 하라고 시켰는데 너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미안하다 싶었던 거다.
느리긴 해도 방 청소를 다 하고, 엉망이 된 이불을 마루 바깥으로 내놓자 그걸 본 백호가 한마디 했다.
“그냥 둬.”
이불 빨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잠시 고민하고 있었던 명월은 그 말에 냉큼 이불에서 손을 뗐다. 그저 마루 끝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선 고개를 뒤로 젖히곤 내리쬐는 햇볕을 만끽했다.
젖은 머리를 푼 채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본 백호가 손짓을 했다.
“이리로 와. 국물 맛 좀 봐라.”
“이따가 갈게.”
지금은 조금 더 햇볕을 쬐고 싶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갈 테니까, 라는 말은 일부러 덧붙이지 않았지만 의사는 충분히 전달되었을 거라고 믿는다.
실제로 백호는 거기서 뭔 말을 하지 않고 순순히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 안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명월은 눈을 떴다.
너무 그에게 모든 걸 맡기는 게 아닐까. 이런 식으로 의존하는 건 좋지 않은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알아서 하자고 생각을 하면서도 누군가가 시중들어 주는 게 너무 편하고 좋으니 아무것도 안 하게 된다.
잠시 생각을 하던 명월은 꼬물대면서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일단은 곁에 있으면서 도와주는 척이라도 해야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일어서던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동그랗고 아담한 마당, 그 너머로는 나무로 만들어진 낮은 담이 있었고 그 뒤는 전부 숲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뭔가가 움직이는 걸 본 것 같았다.
일어선 채로 명월은 숲의 건너편을 살폈지만, 이상한 건 없었다. 느낌 탓인가. 그리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인 명월은 몸을 돌렸다. 느릿하게 부엌 쪽으로 가서 안쪽을 살폈다. 그러자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부채질을 하는 백호가 보였다.
바지만 입고, 머리는 대충 묶은 그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화가 난 건 아니고, 그저 눈이 매워서 저러는 것일 터였다.
별거 아닌 모습인데 왜 저게 귀엽게 여겨지는지 모르겠다. 보기만 하는 건데도 웃음이 나는 걸 참으려 명월은 손으로 제 입술을 눌렀다.
그걸 느낀 것일까. 백호가 고개를 들어선 명월은 보곤 바로 부채를 내려놨다.
별말 없이 검은 솥 옆에 둔 찌그러진 다른 솥의 뚜껑을 열자 그득히 담겨져 있는 뽀얀 국물이 보였다. 우족을 진득하니 우린 거였다.
그곳에 수저를 넣고 휙휙 젖고는 국물을 조금 떠서 그대로 명월 앞으로 걸어갔다.
“먹어 봐.”
명월은 백호가 들고 있는 수저를 보다가 뒤로 손을 올려서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잡고 고개를 숙였다. 후후, 하고 국물에 바람을 불고는 입을 벌려 국물 맛을 보려던 순간, 갑자기 백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간다.
그는 명월의 어깨를 잡아선 옆으로 밀어 버리곤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그러곤 있는 힘을 다해서 수저를 휘둘렀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수저에 부딪혀선 그대로 마당 저편으로 날아가서 처박혔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로, 명월은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백호가 밀어서 옆으로 물러서 있던 명월은 뒤를 돌아봤다. 그러는 사이에 마당으로 내려온 백호가 그것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허리를 굽힌 그가 다시 일어났을 때, 그 손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잡혀 있었다. 털이 채 나지 않은 작디 작은 생명체. 그걸 본 명월은 아―하는 소리를 냈다.
“그 아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명월의 말에 백호의 눈썹이 위로 올라간다.
“뭐야? 이걸 알고 있는 거냐?”
“어제 산책을 하다가 떨어져 있기에 다시 새집에 올려줬어.”
“왜 그런 짓을 한 거냐.”
백호의 말에 명월은 되려 어이없다는 식으로 그를 쳐다봤다.
“날지도 못하는 아기 새가 떨어져서 힘들어하고 있는데 당연히 도와줘야지. 그걸 모른 척 지나쳐?”
“이건 평범한 새가 아니다. 가만히 두면 알아서 자라서 신수가 되었을 거다.”
“……신, 뭐라고?”
처음 듣는 단어가 낯설다.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눈을 내리떠 손바닥 위에서 발발 떠는 걸 살펴봤다.
지금은 툭 치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나약해 보이지만, 이게 이놈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다. 이상한 게 꼬이지 말라고 특별히 신경 써서 주변을 살폈는데 이런 게 있었을 줄이야.
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동안에도 그것은 명월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몸을 떨면서 어떻게든 명월에게 다가가려는 모습이 보기에 가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놈이 명월에게 접근하게 두고 볼 수 없었던 백호는 당장 몸을 돌렸다. 싸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그는 눈을 내리떠 아기 새를 노려봤다.
“저놈은 내 것이다. 감히 이 몸의 것에 탐을 내다니. 다 자라기 전에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여기서 썩 꺼져라.”
나직하게 경고를 한 후, 백호는 아기 새를 들고 있던 손을 뒤로 빼선 있는 힘껏 앞으로 던졌다.
“뭘 하는 거야!”
설마 싶었던 명월은 다급히 달려갔다. 하지만 더 멀리 뛰어가진 못하고 바로 손목이 잡혔다. 그걸 뿌리치려는 명월을 더 단단히 잡은 백호는 단호히 말했다.
“저것들은 죽여도 죽지 않아.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이니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명월은 그 아기 새가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냥 짐승이 아니라, 그쪽이었던 모양이다.
왜 그런 것들은 하나같이 겉보기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걸까. 그 전에 자신이 알아차렸어야 했던 걸까. 하지만 겉모습이 연약한 아기 새였기 때문에 달리 의심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게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는 명월은 묘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백호는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와. 밥이나 먹게.”
백호가 끌어당기면서 부엌으로 향하는데도 명월은 내내 뒤를 돌아봤다. 던져진 아기 새가 여간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명월이 신경 쓰였던 백호는 명월의 어깨에 팔을 두르곤 그를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너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설마하니 좀 전의 그게 약해 보인다고 불쌍하다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다시 주워 올 생각일랑은 하지도 마. 알았어?”
입을 다문 백호의 눈으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자신이 다른 존재에 눈길을 주고 그쪽을 신경 쓰는 게 싫은 거다. 그런 거면 솔직하게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왜 이렇게 유치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하긴 그게 한두 해 일도 아니었다. 새삼 뭐라 해 봤자 자신의 입만 아플 일이었기 때문에 명월은 한숨을 쉬면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백호는 그런 명월의 한숨이 거슬렸다. 자신이 곁에 있는데 왜 한숨을 쉰단 말인가. 더 세게 명월의 어깨를 끌어안은 백호는 따지듯 물었다.
“그 반응은 뭐야?”
“알았어. 신경 안 쓰면 될 거 아니야. 여긴 그저 너하고 쉬려고 온 거니까, 다른 거에 눈길 안 주면 되는 거잖아.”
언쟁을 벌이다 보면 끝이 없었다.
처음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최근의 백호가 하는 잔소리는 복운이 저리 가라였다. 복운이 사이에 끼어들지 못할 정도라 하면 할 말은 다 한 셈이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명월의 모든 걸 간섭하고 관리하려 한다. 주변에 없는 것 같아도 언제나 늘 뒤에 달라붙어서 뒤통수를 보고 있음을 모르진 않았다. 그런 게 숨이 막혀서 한마디 하면 당장 안색을 굳히곤 아주 오랫동안 삐친 상태가 이어진다.
본인은 아니라면서 태연한 척을 하지만, 백호 아래에 있는 자들은 ‘완전히 삐쳐서 난리도 아니니 우리를 봐서라도 저 짐승 속 좀 풀어 주시오.’라고 명월에게 열심히 수신호를 보내곤 했다.
그런 백호였다. 애초에 이곳에 온 목적이 휴식이니 만큼, 그것에 충실하고 싶었던 명월은 순순히 두 손을 들면서 한발 물러서 양보했고 백호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뜬 채였다.
지금 명월이 진심으로 이리 말하는 건지, 아니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대충 둘러대는 말인지 알아보려는 듯 한참 동안 내려다본다.
얼굴 가죽에 구멍 뚫릴 것 같다. 작작하라며 한소리 하려던 순간 백호가 바로 고개를 숙여선 입을 맞추었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지고 백호는 명월의 손을 깍지 끼어선 질질 끌고 갔다.
“밥이나 먹자. 밥이 정말 맛있게 되었어. 먹어 보면 놀랄 거다.”
전까지만 해도 찬바람 쌩쌩 날리는 얼굴을 했던 주제에 지금은 또 이렇게 변한다. 꼬리가 있으면 흔들 기세다.
묘하게 기분 좋아 보이는 백호를 물끄러미 보던 명월은 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선 백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뒤를 돌아보는 백호의 표정은 오묘하게 변해 있었다.
지금 대체 뭘 한 거야. 그리 묻고픈 눈빛으로 바라보는 백호를 두고 명월은 웃으며 “밥이나 먹자.”라고 말했다.
* * *
다른 사람들 시선 같은 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날이 좋으니 그냥 마루에 앉아서 큰 그릇에 비빈 밥을 먹고 국을 떠서 먹었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밥을 먹어 치우고 난 후, 백호가 뒷정리를 하고 있으면 명월은 다시 마루에 누웠다. 수저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눕기부터 하는 명월의 모습에 백호가 한소리 했다.
“너 지금 뭘 하는 거냐.”
딱딱하게 들리는 소리에 명월은 감고 있던 한쪽 눈만 떠선 그를 쳐다봤다.
빈 그릇을 들고 서 있는 백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 얼굴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백호였어도 기가 찼을 거라면서 명월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난 지금 쉬러 온 거잖아.”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이렇게 편하게 누워 있어도 괜찮은 거잖아.
요는 그런 식이었다.
“…….”
명월이 하는 말이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던 백호는 한소리 하려다가 말았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채로 올려다보는 명월은 귀여웠다.
깡패가 달리 있는 게 아니다. 제 얼굴 반반한 거 하나 믿고 저리 웃는 놈이 바로 깡패였다.
저런 식으로 은근슬쩍 자신을 부려먹을 속셈이라는 걸 모르진 않으니 단호하게 나갈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밥은 자신이 준비했으니 그 뒷정리는 명월이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생각만 할 뿐이고, 정말로 명월에게 설거지를 하라 할 순 없었다.
백호는 혀를 차고는 마당 한쪽에 있는 우물로 걸어갔다. 소매를 걷고는 쪼그리고 앉는 걸 확인한 명월은 다시 눈을 감았다.
“이거 다 하는 동안에는 자지 마라. 너 자고 있으면 큰일 당할 거다.”
백호가 말하는 큰일이라고 해 봤자 그거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 시선 의식할 필요가 없는 곳이니, 홀라당 다 벗기고 다시 그걸 하겠다는 뜻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저런 식으로 어금니 악물고 음산하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한 손을 들어 제 이마에 올린 명월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너하고 하는 거 싫진 않아.”
오히려 좋아하는 편에 속했다. 아는 주제에 그런 걸로 협박하지 말라면서 명월은 한숨을 내쉬었다.
식기가 달그락거리다가 음향이 뚝 끊긴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배는 부르고 햇볕은 따뜻하다. 이렇게 누워 있으니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이구나 싶었던 명월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서서히 낮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는 동안 얼어붙은 채로 정지 상태로 있던 백호가 미친 듯이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설거지를 하고 그걸 엎은 채로 둔 그는 당장 명월에게 달려갔다.
잘도 그런 깜찍한 말을 했겠다. 가만 두면 사내 체면이 안 선다. 그래. 내가 어떻게 요리를 해 줄까.
의욕이 충만해선 당장 명월 옆으로 달려와 마루에 한쪽 무릎을 올린 백호는 허리를 숙였다.
젖은 손으로 명월을 건드리려다 말고 제 가슴팍에 손을 닦고는 고개를 숙여서 명월을 불렀다.
“유명월.”
이름을 부르는 건 명월이 좋아하는 몇 가지 것들 중에서 하나였다. 그것도 자신이 불러야 효과가 크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부르면 인상을 쓰며 쳐다보다가 왜, 라면서 퉁명스럽게 대꾸를 해도 언제나 늘 뺨에는 홍조가 서려 있었다.
이번에도 눈을 뜨곤 자신을 올려다보면서 뚱한 얼굴로 왜 그러냐는 말을 해 주지 않을까 싶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이마에 올리고 있던 손이 옆으로 스르륵 내려간다. 마루 위로 손이 떨어지고 명월의 잠든 얼굴이 보였다.
그동안 잘 쉬고, 먹고, 잤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피부가 묘하게 뽀얀 것이 예뻐 보인다.
예전에 한창 좋을 땐 예쁘게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인 지금에도 왜 이 녀석이 이렇게나 예쁘게 보이는 건가 싶었던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이놈이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닐까. 그래서 제 눈에 이상한 게 씌어서 시간이 지나도 예쁘게만 보이는 거다.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스스로가 생각하면서도 말도 안 된다 싶었다.
한숨을 쉰 백호는 명월 쪽으로 손을 뻗었다. 누워 있는 그 몸을 조심스레 안아 올려서 품에 안고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는다.
눈을 감은 채로 잘 자던 명월의 미간에 주름이 생기면서 으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백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잘 자는 모습을 보자니 괜히 심장이 뛴다.
잠든 명월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하염없이 그 얼굴을 바라보던 백호가 고개를 숙인다. 명월의 이마나 코, 그리고 턱 등에도 입을 맞추면서 그 몸을 꼬옥 끌어안는다. 틈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강하게 명월을 안은 채로 백호는 눈을 감았다.
따뜻하고 좋은 냄새가 난다. 이렇게 있으면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전에는 느껴 보지 못했던 그런 감각을 느끼면서 백호는 더 세게 명월을 끌어안았다.
* * *
언제부터 백호(白虎)라고 불리게 된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장 최초의 기억은 그거였다. 문(門)을 지키고 서서 그 사이로 이상한 것들이 오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문은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어선 안 되는 장소였다.
들어가고 싶어도 거부당하면 혼이 소멸되거나 육신이 산산조각이 나게 된다. 문을 드나들 수 있는 건 선택된 일부의 존재들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곳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문을 지키고 앉아서 그곳을 통과하는 자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보통 장소가 아니었기에 그곳에 나타나는 자들은 한정적이었다. 백 년에 한, 두 번씩 무언가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오롯이 혼자였다. 그렇다 해서 그 긴 시간이 고통스럽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는 애초에 감정 자체가 없었다. 그저 혼자서 존재할 뿐이었다.
문에 나타나는 자들은 등선(登仙)하는 자들이 아니면 대부분은 도전하는 자들이었다. 그도 아니라면 그곳을 더럽히려는 것들이 간간이 나타나 그에게 도전장을 내밀기도 했다. 그때서야 그는 움직였다.
백 년에 한 번, 혹은 천 년에 한 번씩 움직일 때가 있었으나 긴 시간을 서 있었던 것답지 않게 그는 빠르고, 강했다.
도전장을 내민 이들은 단발마의 비명을 토해 내며 공중에서 사라졌다. 그러고 나면 그는 재차 혼자였다. 그리고 어느 날 하얀 호랑이가 나타났다.
몸짓이 크고, 눈동자에 힘이 담긴 놈이었다. 오랫동안 문을 지키고 서 있으면 등선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별하는 눈을 지니게 된다.
호랑이는 강했으나 아직은 부족했다. 자신을 이기고 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그걸 놈도 알고 있을 테지만, 다른 우매한 것들처럼 도전을 한다면 받아들여 줄 의향이 있기는 했다. 지금까지 맥이 없을 정도로 쉽게 끝나던 싸움과 달리 이번 녀석은 꽤 긴 시간이 소요될 것만 같았다. 그런 깨달음과 동시에 묘한 설렘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저놈이 덤벼들면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선을 떼지 않으려니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면서 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정확히 열 걸음 떨어진 곳에 선 놈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곳에 다소곳이 선 채로 그를 바라봤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털을 지닌 놈은, 금안을 지니고 있었다. 짐승이었으나 덕을 쌓은 놈들은 그 눈빛에서 지혜가 묻어나기 마련이었다.
처음 생각한 대로 평범한 짐승은 아니었다. 지금은 가만히 서선 아무것도 안 할 것처럼 굴지만, 자신을 방심하게 만들고는 갑자기 기습을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덤비는 놈들이 있었던 만큼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는 바라보는 백호를 두고 두 다리에 더 힘을 주었다. 만일, 호랑이가 덤빈다면 긴 고통 없이놈을 죽여 주마, 그런 생각을 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거꾸로 뒤집은 모래시계에 담긴 모래가 하강하는 만큼의 시간이 흘러간다. 그 시간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가 기다림에 지쳐서 방심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건장한 몸을 지니고 있었던 놈의 배가 홀쭉해지고, 힘이 담겨 있던 눈동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처음 나타났을 때의 건장했던 모습은 오간 데 없이 여위고 약해진 놈이 어느 순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튿날 엎드렸고, 조금 더 시간이 흘렀을 때 놈은 더는 숨을 쉬지 않았다.
죽음과도 같은 적막이 감도는 사이에, 하얀 호랑이는 어느새 숨이 끊어져 있었다.
호랑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나서 그를 바라보다가 그렇게 조용히 숨을 거두었던 거다. 그것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이곳을 찾는 부류는 명확했다. 그러나 저 하얀 호랑이는 그 어떤 쪽도 아니었다.
왜 저런 모습으로 죽어 있는 것인가.
문을 앞에 두고 왜 도전하지 않는 것인가.
애초에 저놈의 목적은 대체 무엇이었던 걸까.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판단을 내렸던 그에게 엄청난 혼란이 밀려들어 왔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죽은 호랑이를 바라보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그리고 도전자가 나타났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그건 단순히 껍데기였다.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녀석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에 맞춰서 그는 다시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제야 자신이 무얼 하던 중이었던지를 상기하게 되었다. 하얀 호랑이가 죽은 것과는 별개로 자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계속 이어 나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더는 저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면서 다가오던 놈이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살점과 뼈가 모두 삭아서 사라지고, 대신 하얀 가죽만 남긴 호랑이를 보더니 그리로 관심을 보인다. 지저분한 손을 아래로 뻗는 걸 보는 순간, 그의 다리가 움직였다.
앞으로 한걸음을 내딛는 순간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두 걸음을 옮겼을 때 조용하던 주변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세 번째로 걸음을 옮겼을 때, 도전자의 몸에서 나는 시체 썩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네 번째로 걸음을 옮겼을 때,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사명감이 사라졌다.
한곳에 오랫동안 서 있을 뿐이지 거기서 움직이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왜 이리도 낯선 감각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건가 싶었던 그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고, 달려드는 도전자의 목을 날려 버렸다.
뜯어져서 날아가는 목을 두고, 몸통으로 재차 팔을 휘둘렀다. 허리가 두 동강이 나는 것에 맞춰서 도전자는 검은 재가 되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속으로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절규가 이윽고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그는 자세를 바로잡고는 눈을 내리떴다.
보이는 건 하얀 호랑이 가죽이었다.
이 녀석은 여기서 왜 저런 모습으로 있는 걸까. 왜 이리로 와서 자신을 하염없이 바라봤던 걸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거일수도 있었다.
놈은 죽을 자리를 찾아온 거다. 그리고 그게 문 앞이 되는 거고―.
문을 통과하는 게 목표였지만, 좌절되는 이들은 많았다. 등선하는 건 손에 꼽을 몇뿐이었고, 그 외에 나머지는 모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 하얀 호랑이도 정말 원했던 건 등선이었으나,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차라리 그 문 앞에서 죽고자 했던 거다. 그만큼 문을 간절하게 원하던 모양이었다.
코앞에 있는 문을 두고도 그곳을 통과하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한다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언제나 문을 등 뒤에 두고 있으면서도 하지 않았던 생각이 들면서, 다음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긴 시간 동안 등지고 서 있던 것과 대면하기 위해서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눈이 부시는 환한 빛이 그에게 쏟아졌다. 처음에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피하려 했으나, 빛은 거세졌다. 빛은 자신을 비추는 게 아니라 밀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깨닫게 되었다.
문지기였던 자신이 문을 바라보는 순간에, 도전자가 되었음을 말이다.
의문을 가지지 않고 문을 지키고 있을 땐 문지기가 될 수 있었으나, 의문을 품고 돌아보는 순간 그 자격을 상실하게 된 거였다.
깨달음과 동시에 전신으로 퍼지는 강렬한 상실감에 그는 크게 입을 벌렸다. 단말마와도 같은 날카로운 외침은 조금 전, 그가 처리했던 도전자가 내뱉던 비명과 흡사했다.
문을 직시했기 때문에 밀쳐졌고, 더는 문지기가 될 수 없었다. 최초의 기억이 문지기였기 때문에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내쳐지게 되었다.
문지기 외에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만큼, 온몸을 통과하는 강렬한 고통을 느끼게 되었을 땐 그대로 무(無)가 되어서 소멸하게 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숲이었다. 몇 천 년 동안 질리도록 봐 왔던 숲 한 가운데에 주저앉아 있었고, 그런 그의 곁에는 가죽만 남은 하얀 호랑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이놈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이놈이 나타난 것 때문에 모든 일이 벌어지게 된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그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가죽만 남은 하얀 호랑이를 내려다봤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아무것도 없고, 변화가 없었던 전과는 아주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는 동안 그의 몸에도 하얀 눈송이가 떨어졌다.
차가운 것이 정수리에 내려앉는 순간 그는 이곳이 전혀 다른 장소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곳은 인간계였다.
가장 낮은 땅으로 떨어진 거다.
의문을 품고, 문을 바라본 것이 그토록 큰 죄였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들어 하얀 눈송이를 토해 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부옇게 보이는 하늘조차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렇게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가 움직였다. 일어선 그의 손에는 하얀 호랑이 가죽이 들려 있었다. 한 손에 호랑이 가죽을 든 채로 그는 정처 없이 걸어갔다.
정확하게 어딜 가자고 정해 둔 건 없었다. 그저 발길 가는 대로 움직일 따름이었다. 하염없이 걷다가 길이 끊어지고 바다가 나오면 몸을 돌리고, 다시 산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인간계 아래에는 각각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은 침입자라 할 수 있는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해하려 했다.
추방되었다고는 하나 문지기였던 그다. 그들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고, 앞을 막던 자들이 사라지면 그는 다시 걸음을 뗐다.
정확하게 어디를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한 건 없었다. 그저 발길이 가는 대로 움직인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지 그의 손에는 꼭 하얀 호랑이 가죽이 들려 있었다.
간혹 걷다가도 손에 잡고 있는 게 거슬려서 눈을 내려뜨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끌고 다녔음에도 지저분해지지 않는 하얀 털가죽을 보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게 잘 있구나. 그런 생각만 하고 본능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 계절을 지나쳐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만 하면서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계속 걷다 보니 갈증도 생기고 다리도 아팠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너른 산 능선에 서 있었다. 겨울이라 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 번져 있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입을 벌리자 하얀 입김이 흘러나온다.
춥구나. 그리 생각하면서 그는 하얀 호랑이 가죽을 들어서 그걸 뒤집어썼다. 그러곤 눈이 쌓인 그곳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사락거리면서 눈이 그의 몸 위에도 쌓인다. 이대로 있으면 눈으로 뒤덮여서 자신의 모습 또한 지워지게 될 거다. 자연 앞에선 자신 또한 이리로 보잘것없는 존재인 것을 말이다.
눈을 가늘게 떴다.
보이고, 들리는 것, 느껴지는 그 모든 것들을 담고 기억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옆에 누군가 서 있음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풍기지 않는 존재였다. 있는 듯 없는 듯 서 있던 자가 무언가를 내밀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하얀 손에 들려 있는 건 검은색 호리병이었다. 이건 대체 무언가 싶어 조금 더 고개를 들자 검은 가면으로 눈을 가린 이가 보였다.
“술이 필요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군.”
“……독각귀인가.”
중얼거리자 상대의 입술 꼬리가 올라간다. 그는 들고 있던 호리병을 눈이 쌓인 곳 위에 올려 두고는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자네가 이곳에 있겠다면 난 돌아가겠네.”
상대의 말도 듣기만 할 뿐, 대답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입을 다물곤 있어선 안 될 것 같은 상황이다.
그냥 돌아가겠다니. 자연스럽게 이 땅을 자신에게 떠넘기려 하는 게 아니던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그 무엇도 맡기지 마라.”
“하지만 자네가 이곳에 있겠다면 나는 떠나야 하네. 자네와 내가 한 곳에 있으면 안 되는 게 아니던가.”
하나는 독각귀, 또 하나는……
문득 지금의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가 알 수 없어졌다. 전에는 문지기였으나, 지금은 다 죽은 하얀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의 나는 대체 무얼까. 뭐라고 부르면 되는 존재인 걸까.
갑작스럽게 말문이 막힌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와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다.
백호는 눈 위에 올려진 호리병을 확인하곤 그걸 집어 들었다.
“술값만큼만 이곳에 머무르도록 하지.”
“죽을 때까지 있어야 할 거네. 그 술은 귀한 것이니까.”
독각귀의 말에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술병을 열어서 그 안에 담긴 걸 한모금 마시는 순간 바로 웃음이 사라졌다.
세상에 이런 게 있었단 말인가. 새삼스럽다며 호리병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자 독각귀는 오간 데 없었다. 그렇게 독각귀는 사라져 버렸지만, 그는 떠날 수 없었다.
여전히 눈이 내리는 곳에 앉은 그는 한 손에 술이 담긴 호리병을 든 채로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하얀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 백호라고 불리었다.
* * *
눈을 뜬 백호는 가만히 있다가 느리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차분하게 주변을 살피고, 지금 이곳이 어디고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떠올린 후 눈을 내리떴다.
그 품에 안겨 있는 건 명월이었고 그는 사랑을 나눈 후, 여운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
명월이 반쯤 입을 벌린 채로 색색거리면서 깊은 호흡을 토해 내는 걸 들으면서 백호는 고개를 숙였다. 명월의 허리에 손을 대곤 제 쪽으로 끌어당기자 바로 인상을 쓴 명월이 신음을 흘리며 백호를 밀어낸다.
잠에 취한 손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럼에도 백호는 팔에 힘을 풀고, 명월이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두었다. 그러자 명월은 백호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누웠다.
그의 듬직한 팔에 머리를 기대고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이윽고 새근거리는 고른 숨을 토해 낸다.
떨어지진 않고 그저 등을 돌린 것뿐이었다. 그런데 왜 그게 이렇게나 서운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인상을 쓴 채로 명월을 바라보던 백호는 등 뒤로 완전히 밀착했다. 반쯤 발기된 제 성기를 명월의 엉덩이 골 사이에 밀어 넣자 그곳이 움찔하고 떨린다.
아랑곳하지 않고 아래로 손을 내려선 명월의 허벅지를 잡아 그 아래쪽까지 깊이 성기를 끼워 넣고는 그제야 만족한 한숨을 내쉬었다.
명월의 보들보들한 허벅지에 성기를 넣고 있으니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몸을 돌린 걸 이쯤에서 용서해 줄까. 그리 생각하며 재차 명월을 끌어안으려는데 결 좋은 머리카락이 코끝을 스친다.
좋은 냄새가 풀풀 났다.
“…….”
다시 잘 생각이었지만, 건드리고 싶어진다. 잘 자는 도중에 건드리는 걸 가장 싫어하는 명월이지만 조금 만지는 건데 뭐 어떠나 싶기도 했던 백호는 슬그머니 아래로 손을 내렸다. 그러곤 명월의 말랑거리는 성기를 한 손으로 쥐고는 살살 주물렀다.
말랑거리면서 부드러운 샅이 자극을 받자 점점 딱딱해진다. 나쁘지 않은 물건이었지만,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만 놀려지니 그게 좀 안타깝기도 했다. 물론 명월이 이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휘두른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고 지금은 이 순간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래서 백호는 명월의 단단해지는 성기를 한 손으로 쥔 채로 계속 주물렀고, 여전히 팔베개를 해 주던 팔을 내려선 명월의 가슴도 주물렀다.
처음에는 곤히 자던 명월도 본인 몸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을 감지하고는 인상을 쓰면서 신음을 토했다.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면서 어깨를 움찔하면서도 들척이진 않는다. 그래서 백호의 손놀림은 점점 대담해질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단단해져서 휘어진 성기를 위, 아래로 흩으면서 동시에 유두를 손가락 두 개로 잡아서 비틀 듯이 애무했다.
명월의 귀와 턱, 뺨 등에 정신없이 입을 맞추면서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묻고 깊이 숨을 들이마신다. 그 순간 폐까지 밀려오는 달콤한 향에 눈앞이 아찔해진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깊은 만족감을 느끼면서 열심히 명월을 물고 빨면서 백호는 허리를 흔들었다.
하얀 허벅지에 묻은 제 성기가 점점 흉악해진다. 단단해진 성기가 빠르게 움직이자 명월의 허벅지가 움찔거리고 엉덩이로도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명월을 뒤에서부터 세게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백호는 나직한 으르렁거림을 토해 냈다.
“……명월.”
악문 이 사이로 이름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명월은 눈을 떴다.
눈을 뜨고도 잠시 동안 본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가 없어 멍하니 있던 명월은 몇 번이나 눈을 끔벅거렸다.
그에 맞춰서 백호가 더 세게 성기를 쥐었고, 목덜미에 입술을 누른 채로 세게 빨아들였다. 저릿거리면서 퍼지는 쾌감에 명월은 고개를 젖히며 짤막한 신음을 토해 냈다.
“아―.”
탄식을 닮은 신음이 흘러나오는 것과 동시에 명월의 성기가 백호의 손바닥 안에 묽은 정을 토해 냈다.
간밤에 실컷 괴롭힘을 당했기에 이 정도가 나오는 것도 용한 일이었다. 그렇게 자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사정을 한 명월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목 끝까지 찬 숨을 헐떡거리면서 눈을 굴리던 명월은 유두를 잡아 비트는 백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만, 뭘 하는 거야―?”
이곳에 와서 매일 밤 그 짓을 하고 있었다. 자기 전에도 분명 실컷 해댄 주제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전에도 말했지만, 자는 동안에는 건드리지 말라고 하려던 순간 백호는 참지 못하고 명월의 뒤에서 떨어져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어깨를 잡아서 이불 위로 누르는 손아귀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도 확인되는 백호의 번득이는 눈을 본 명월은 위기감을 감지하곤 이를 악물곤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라는 말은 허겁지겁 다리를 벌리고 안으로 파고드는 뜨거운 온기에 지워졌다.
“아윽―!”
고개를 젖힌 명월이 어떻게든 다리를 오므리고 피하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하고자 하는 의욕에 가득 차 있었던 백호는 밀어내는 명월의 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결국 제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삽입에 놀라 수축되는 내벽을 가르면서, 욕심껏 허리를 놀렸다.
젖어서 찌그덕 대는 속을 열심히 파고들면서 동시에 헉헉헉, 하고 토해 내는 거친 숨소리가 방 안을 그득히 채웠다. 그 사이로 명월이 “이 미친놈아! 떨어져!” 같은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 * *
쉬고 싶다고 말한 건 단순히 몸이 피로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날이 더웠고, 집중도 안 되고, 무료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도 있었기 때문에 며칠 동안 자리를 비워도 되겠거니 싶어서 슬쩍 말을 흘린 거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낸 진짜 이유는 달리 있었다.
명월은 날씨를 타는 편이 아니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그럭저럭 잘 버티고 금방 적응도 했다. 하지만 백호는 아니었다.
더우면 덥고, 추우면 춥다고, 비가 내리면 비 내린다고 찡얼거리는 거다. 지금까진 그런 식으로 말해도 뭐라 하지 않는 이들 사이에 있었으니 본인이 날씨를 잘 타고 찡얼거림도 심하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거다.
명월은 백호와 함께 있게 되면서 대번에 알아차렸다. 아, 이놈은 덥거나 추운 걸 못 견디는구나―라고 말이다.
그래서 더위가 정점을 찍기 전에 먼저 어딘가로 들어가서 시원하게 보내고 오자는 말을 꺼낸 거다. 비단 자신만을 위해서 제의한 게 아니었다. 그런 마음도 모르고 저놈은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들고 있었다.
바깥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게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너무 심한 것 같다. 어제는 하다가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면서 명월은 제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무거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 소리를 못 들을 백호가 아니었다. 지금 모르는 척 우물가에 앉아서 빨래하는 척을 하고 있지만, 명월 눈엔 다 보였다.
결국 명월이 거부해도 멈추지 않고 안에서 두 번이나 더 사정을 한 백호였다. 그러다가 날이 밝기도 했고, 참다못한 명월이 매달려서 어깨에 이 자국이 생길 정도로 세게 물어서야 떨어졌다.
쾌감에 겨워서 물거나 할퀴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른, 정말 아프게 깨물어서 놈도 놀란 모양이었다. 사정의 여운에 젖어서 달콤한 한숨을 내쉬다 말고 허겁지겁 명월에게서 떨어진 백호는 제 왼쪽 어깨에 생긴 이 자국을 보곤 아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명월도 할 말이 있었다.
어금니를 악문 채로 당장 떨어져―라고 말하고 나서야 간신히 물러선 백호는 깨물린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내내 인상을 썼다.
본인이 먼저 한 건 기억도 못하고 그저 물린 게 억울한 모양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았던 명월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들곤 그대로 백호를 뻥, 차 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내 이런 식이었다.
노골적으로 냉랭한 기운이 흐르는 건 아니었다. 백호는 투덜대면서도 아침을 챙겨 줬고, 명월도 욱신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간신히 일어나서 옷을 제대로 챙겨 입고 밥도 먹었다.
뒷정리는 당연히 백호가 했다. 그러고 나서 각각 다른 곳에 있는 동안 백호는 일부러 그런다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명월의 눈앞을 알짱거렸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게 어깨가 아프군.”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싶었던 명월은 눈만 위로 들었다.
그러자 제 왼쪽 어깨를 주무르면서 백호가 다가온다. 단둘이 있다고 옷은 잘 챙겨 입지도 않고, 바지만 입고 있었던 백호는 손바닥으로 이 자국이 선명하게 난 제 왼쪽 어깨를 두드렸다.
“왜 이렇게 어깨가 욱신거리면서 쑤시는지 모르겠군―.”
그러니까 지금 명월이 문 어깨가 아프다고 지금 이러는 거였다.
그 순간 명월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건 헛웃음이었다. 지금 들은 게 말인지, 트림인지 모르겠다면서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주먹으로 얻어터지고 싶지 않으면 그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라. 그런 눈빛으로 주시하자 헛소리를 하던 백호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왼쪽 어깨는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말을 꺼내지 않으면 명월과 대화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용기를 내 본 건데 돌아오는 반응이 영 싸늘하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대번에 돌아갈 거야, 라고 할 판이었다.
모처럼 명월과 단둘이 쉬러 온 건데 금방 돌아갈 순 없었다. 그러면 이쯤에서 명월의 기분을 달래 줘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를 모르겠다.
복잡한 얼굴로 눈을 굴리던 백호는 일단 명월의 옆으로 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러자 무척 어색해진다.
명월은 지금 푹신한 이불을 몇 겹이나 접어서 그곳에 앉아 있었다. 허리와 그곳이 안 좋기 때문이겠지.
“……좀 주물러 줄까?”
제 물건이 얼마나 튼실한지를 아는 만큼, 명월이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기에 이런 말도 먼저 꺼내는 거다. 그리고 그 말에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했다.
옆으로 눈동자를 옮겨선 백호를 보나 싶던 명월이 갑자기 마루 아래로 발을 내렸다. 가죽신을 신고는 일어나는 걸 본 백호가 당장 그리로 손을 뻗었다.
“어딜 가려고.”
돌아갈 셈이던가?
다급히 손목을 붙잡는 백호를 두고 명월은 고개를 숙였다.
“산책하고 올 거야.”
“몸도 안 좋은데 무슨 산책이냐.”
“내 몸이 안 좋은 건 용케도 아는 모양이다?”
“…….”
빈정거리는 말에 백호는 당장 입을 다물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하지 않고 넘어가는 건 사내라 할 수 없었다. 같은 남자로서 이해를 해 줄 수 없는 거냐는 말을 꺼내는 순간 당장 주먹으로 후려 맞겠지. 때문에 백호는 바로 입을 다물곤 대신 손목을 더 힘주어 잡았다.
손목 안쪽으로 퍼지는 욱신거림에 명월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잡힌다. 한눈에 보일 정도로 인상을 쓰면서 노려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움찔해선 슬그머니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 틈을 타 백호의 손을 완전히 뿌리친 명월은 앞으로 고개를 돌리곤 마당을 걸어 나갔다. 싸리문을 열고 아예 밖으로 나가 버리는 걸 본 백호는 몸을 일으켰다.
저런 몸 상태로 어디까지 갈 셈인지 모르겠다. 무리하지 않는 편이 나을 텐데. 영 신경 쓰여서 계속 쳐다보게 된다. 그러는 동안 명월은 숲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명월은 여전히 뚱한 얼굴이었다. 백호하고의 관계가 싫은 건 아니었지만, 힘들 정도로 하고 싶진 않았다.
관계라는 건 서로가 교감할 수 있을 정도로 하고 적당히 즐기는 편이 좋았다. 그러다가 서로 흥분해서 좀 거칠게 하는 건 나쁘지 않겠지만, 새벽에 있었던 일은 거의 반 강제적인 거였다.
그놈은 왜 갑자기 자다가 발정인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백호(白虎)가 아니라 백견(白犬)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던가.
저놈에게 점잖은 부분은 뒤집어쓰고 있는 호랑이 가죽뿐이었다. 어쩔 땐 정말로 백호보다는 그 가죽이 훨씬 더 멋있어 보일 때가 있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 일주일 내내 다른 곳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던 명월은 풉,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백호가 한 일 때문에 살짝 언짢은 구석이 있었는데, 그에 대해서 생각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마음이 풀린다.
팔짱을 낀 명월은 멈춰 서선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나뭇잎과 그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살피던 명월은 눈을 감고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간혹,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지금도 자신 혼자 이렇게 나온 걸 두고 혼자서 전전긍긍하고 있겠지. 어쩌면 어딘가에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녀석이라면 그리 하고도 남음이 있었기에 명월은 이만 돌아가자 싶어서 몸을 돌렸고 그에 맞춰서 오른쪽에서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뒤를 쫓아온 건가. 어떻게 돼먹은 녀석이냐며 명월은 웃는 얼굴로 그쪽을 살폈다.
그 일 때문에 오전 내내 갈구었으니 이제 슬슬 풀어 주자 싶었다. 그렇게 고개를 돌린 명월은 서 있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곤 바로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
이곳은 분명 백호의 영역이었다. 그런 곳에 그가 허락하지 않은 존재가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저것은 대체 무언가 싶었다.
안색을 굳힌 채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그것이 가늘게 흔들린다. 입을 벌리자 그 사이로 가느다란 숨이 흘러나온다. 하아, 하고 긴 한숨을 내쉬나 싶던 그것이 천천히 앞으로 손을 뻗는다. 동시에 크게 흔들리면서 괴성을 지르며 명월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아아―.
귀를 두드리는 괴성은 지금껏 들어 본 적 없던 거였다. 귀 안쪽이 욱신거릴 정도의 엄청난 괴성에 놀란 명월은 한 손으로 귀를 누른 채로 달려오는 걸 노려봤다.
다리에 힘을 주고 반대편 손을 움켜쥐고 그대로 휘두를 자세를 취했건만, 유감스럽게도 명월이 힘자랑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때마침 나타난 백호가 명월에게 달려오던 그것의 목을 잡고 그대로 비틀어 버렸기 때문이다.
목이 꺾어진 놈은 팔을 휘두르면서 날카로운 괴성을 질렀고, 백호는 안색을 굳히고는 급히 손을 떨어뜨렸다. 입고 나온 백호의 옷이 검게 타들어 가는 걸 본 명월이 놀라 그리로 손을 뻗었다.
“조심해―!”
명월이 조심하라는 순간 백호의 눈동자 안쪽으로 빛이 번득인다. 그리고 백호는 뒤를 돌아보는 놈의 배 가운데를 걷어찼다. 하지만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하게 변한 놈은 타격을 전혀 입지 않은 듯 백호 쪽으로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그를 집어삼켰다.
“백호!!”
눈앞에서 검은 그림자에 둘러싸이는 백호를 본 명월의 눈이 크게 떠진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을 정도로 크게 놀란 명월은 당장 백호에게 달려가려 했고, 그 순간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은 것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난 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인 백호였다.
정말 싫은 것처럼 인상을 쓴 백호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면서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런 그의 옷 여기저기는 검게 타 있었고, 이상한 연기가 몸에서부터 피어오르기도 했다.
명월은 당장 백호에게 달려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뭐야? 괜찮은 거야?”
“물러서 있어.”
백호를 붙잡고 그가 정말로 괜찮은 건지 샅샅이 살펴보려는데 백호는 오히려 뒤로 손을 뻗어선 명월을 밀쳐낸다.
왜 그러는지 이유는 금방 알게 되었다. 그것이 아직 온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 덩치는 현저히 줄어들긴 했지만,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그것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걸 본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처음에는 무언가 싶었는데 지금 작아진 형태를 보자니 알 것 같았다. 아기 새였다.
저게 대체 어찌 된 거야. 속으로 중얼거리는 동안 백호는 명월을 두고 앞으로 걸어갔다.
혼자 가 버리면 어떻게 하나 싶었다. 저런 이상한 것에는 접근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위험하다고 한마디 해 주려는데 백호는 점점 더 앞으로 다가가 그것 앞에서 멈추어 섰다. 처음에는 거대한 모습으로 변해서 백호를 위협하기도 하던 녀석이 지금은 움찔거리면서 몸을 떤다.
이제야 힘의 차이를 깨닫게 된 것인지 주춤거리면서 뒤로 물러서려는 걸 확인한 백호가 한쪽 발을 들었다. 천천히 발을 들더니 그대로 있는 힘껏 놈의 옆에 내려놓는다. 쿵,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발을 내리자마자 그것이 크악―하는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엎드렸다.
“네놈은 절대로 날 이기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것 또한 빼앗을 수 없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라. 그렇지 않으면 호된 꼴을 당하게 될 것이다.”
두 번이나 용서를 해 주었다. 이건 자신답지 않은 짓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지에 대해선 제대로 인지하고 알아서 기어야 할 거라며 백호는 눈에 힘을 주고는 놈을 노려봤다.
“지금 당장 여기서 꺼져라! 다음에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그땐 그 보잘것없는 목을 비틀어 주마!”
단순한 경고가 아님을 알기에 그것은 바로 몸을 돌리곤 하늘로 날아갔다. 백호에게 당한 타격이 컸는지, 똑바로 날아가지 못하고 중간에 몇 번이나 비틀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몸의 중심을 잡는다.
그렇게 힘겹게 멀어지는 놈을 노려보던 백호는 어깨에 들어간 힘을 서서히 빼냈다. 긴 한숨을 내쉬나 싶던 백호가 바로 뒤를 돌아본다.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는 백호의 흉흉한 모습에 명월은 움찔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명월을 보자마자 백호는 당장 그에게 걸어갔다.
거침없이 다가오는 백호를 본 명월은 당황해선 위로 양손을 뻗었다.
“저기, 잠깐만 기다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호의 손이 올라가 명월의 한쪽 뺨을 감싼다.
놀란 명월이 인상을 쓰는 것과 동시에 백호가 물었다.
“괜찮은 거냐?”
“…….”
저 이상하게 변한 아기 새와 얽히게 된 건 명월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기고 나니 백호에게 ‘너 때문이지 않느냐.’같은 타박을 듣게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걱정을 해 준다.
괜찮은 거냐고 묻는 말에 명월의 어깨에 들어간 힘이 서서히 풀린다. 고개를 든 명월은 백호를 보다가 검게 타 버려서 여기저기 구멍이 생긴 옷을 확인하곤 중얼거렸다.
“……너야말로 괜찮은 거냐?”
“물론이지. 저런 놈들이 날 어찌할 수 없다.”
옷이 이렇게 된 것도 방심했기 때문이지, 정말은 저런 놈이 자신을 건드릴 수 없는 거였다면서 백호는 팔을 들어선 제 몰골을 확인했다.
이곳에 들어와서 옷은 제대로 챙겨 입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멀쩡한 걸 한 벌 버리게 되니 마음이 좋진 않았다.
혀를 차면서 눈을 내리뜨자 명월이 심각하게 어느 한 부위를 살핀다. 왜 그러나 싶어 눈을 내려뜨자 활짝 벌어진 가슴팍 안쪽으로 불긋하게 물이 든 부위가 있었다.
멀쩡한 피부에 저런 얼룩이 생긴 건 조금 전의 일 때문일 거다. 하지만 살이 갈라져서 피가 흐른 것도 아니고, 살짝 멍이 든 것뿐이었다.
백호는 대수롭지 않은 양 그리로 손을 올렸다.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
덤덤하게 말하는 백호지만, 명월의 표정은 풀리지 않는다. 여전히 심각한 얼굴을 본 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혀로 좀 핥아 주지 그래?”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싫어하는 명월이니 이번에도 분명 눈을 흘기면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라고 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백호를 흘깃 보나 싶던 명월이 갑자기 고개를 숙여선 가슴에 붉은 혀를 대는 걸 본 백호는 움찔했다. 순간적으로 정말 당황해서 뭘 하려는 거냐면서 명월을 밀어낼 뻔한 걸 가까스로 참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는 동안 혀를 내밀어서 백호의 오른쪽 가슴 위쪽에 혀를 대곤 그걸 핥은 명월이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에는 입술을 오므려서 그곳에 대고 강하게 빨아들였다.
얼얼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세게 빨아들인 후에야 떨어진 명월이 백호를 올려다본다. 가만히 주시하다가 뭔가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는지 어깨를 으쓱이면서 몸을 돌린다. 그리고 향하는 건 오두막 쪽이었다.
백호는 명월이 빨아들인 쪽을 확인했다. 조금 전과는 다른 불긋한 얼룩이 생겨 있었다. 아직 촉촉함이 남아 있는 그곳에 손가락을 두고 더듬던 백호의 입술 꼬리가 천천히 올라간다.
백호는 달려가 명월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세게 끌어당겨도 명월은 뭐라 하지 않았다. 편안한 얼굴로 앞을 보고 있음을 확인한 백호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조금 전에 건방지게 굴었던 놈을 떠올렸다.
여기저기 자신의 흔적을 묻혀 두었기 때문에 웬만한 녀석들은 이곳을 출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에 원래 알을 두고 있어서 부화한 놈들마저 쫓아낼 순 없었다.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건 그런 놈들 중 하나로, 제대로 되었다면 신수가 되었겠지.
하지만 그 어린 것이 탐해선 안 될 것에 눈도장을 찍어서 결국 이런 사달이 벌어진 거다. 원래 이런 일은 극히 드물게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무엇보다 인간에게 홀려서 저런 식으로 변형이 되는 경우는 전무하다 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저놈을 저리 정신없게 만든 명월이 대단한 거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면 명월은 분명 ‘뭔 소리야.’라고 할 게 분명했다.
본인만 모를 뿐이지, 참 위험한 녀석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이렇게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 게 아니겠는가.
백호는 재차 명월을 내려다봤다. 평온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는 얼굴이 참으로 어여쁘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 한편이 설레면서 아랫도리가 불끈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새벽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재차 달라붙을 순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오두막에 도착하는 순간 이 몸을 쓰러뜨리고 정신없이 탐하고 싶지만, 그리했다간 열흘 내리 말 한 번 섞지 않을 수도 있었다.
새벽에 참았다면 지금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노릇이라며 백호는 안타까움에 입맛을 다셨다.
* * *
원래 예정되었던 나흘 간의 휴식을 마무리 짓고 명월은 옷을 갈아입었다.
언제나 늘 편하게 바지 하나에 저고리를 입고 머리도 풀거나 하나로 묶은 채로 있었는데 지금은 상투를 제대로 틀고 구군복을 갖춰 입었다. 마지막으로 전립을 쓴 후에 거울을 살핀 명월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마루 끝에 앉아 있는 사내가 보였다. 편한 옷차림에 털 조끼를 입고, 머리는 대충 묶어서 꽁지처럼 올린 사내의 듬직한 뒷모습을 보는 명월의 눈이 가늘게 휘어진다.
반사적으로 올라가려는 입술 꼬리를 내린 명월은 백호의 뒤에 멈춰 서선 발끝으로 그의 엉덩이를 툭 쳤다. 그제야 백호가 고개를 든다. 그런데 보자마자 표정이 이상하게 변한다.
눈을 가늘게 뜬 백호는 구군복을 차려입은 명월을 위, 아래로 살피면서 입맛을 다셨다.
“다음에는 너 사또 차림을 한 상태로 질펀하게 한번―.”
“걷어 채이고 싶은 거냐.”
명월의 목을 타고 흘러나오는 싸늘한 중얼거림에 백호는 바로 입을 다물긴 했지만, 위아래로 살펴보는 눈빛은 여전했다.
징그럽게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면서 한숨을 쉰 명월은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리를 숙이곤 목화를 신는 명월을 보던 백호가 그쪽으로 몸을 기대온다.
몸을 구부린 채로 신을 신던 명월은 등을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백호의 행동에 대번에 정색을 했다.
“너 무거워―.”
“이 정도는 참아 봐라.”
나는 자는 동안에도 널 몸 위에 올려서 재워 줄 때도 있는데 고작 이런 것도 못 참는 거냐. 백호가 속으로 구시렁거리는 순간 명월은 이를 악물곤 당장 벌떡 일어났다.
몸을 기대고 있던 백호는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바로 세우곤 여차, 하는 소리를 냈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내려다보는 명월과 다르게 백호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었다. 그 장난스러운 얼굴을 보자니 뭐라 할 수가 없다. 나오는 건 한숨뿐이고, ‘이놈이 그렇지 뭐.’라고 생각하면서 명월은 먼저 몸을 돌렸다.
간다는 말도 없이 가 버리는 명월이지만, 백호는 그걸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 명월이 잘 먹었던 나물 몇 가지를 뜯어서 넣은 보따리를 한 손에 든 채로 명월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싸리문을 넘을 때에는 냉큼 명월의 옆에 서선 그 얼굴을 살폈다.
첫날 이곳에 오자마자 구군복을 다 벗고 편하게 뒹굴거리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지금은 눈빛도 또렷하고 표정도 분명했다.
쉬는 날과 아닌 날의 구분이 확실했다. 그래도 아직 이곳을 온전히 빠져나간 게 아니니 눈에 들어간 힘 좀 빼면 좋을 텐데 말이다.
계속해서 얼굴을 살피는 시선이 느껴진 건가. 내내 정면을 응시하던 명월이 옆을 흘깃 본다. 백호와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왜, 하고 묻는 말에 백호는 명월의 어깨에 팔을 두르면서 물었다.
“여기, 다음에 언제 올까.”
“날이 춥다면서 이불 꽁꽁 둘러싼 누구의 코에 콧물이 나기 시작하면 와야겠지.”
“……그런 꼴사나운 놈은 대체 누구야.”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투덜대는 말에 명월의 입술 꼬리가 올라간다.
백호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걷던 명월이 한참 후에 말했다.
“옷 구겨지니까 팔 내려라.”
백호가 너무하다고 뭐라뭐라 했지만, 명월은 그 모든 말들을 한귀로 흘러 넘겼다.
그저 내 사또복 구겨지게 하지 마라, 라고 한마디 더 던졌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