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18/32)

2장

엉망인 모습으로 돌아온 명월은 씻고 옷부터 갈아입어야 했다. 다른 이들 앞에선 괜찮은 척을 했어도 복운 앞에 서자마자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내곤 한결 편안한 모습을 취했다.

피곤해 보이는 그를 두고 다짜고짜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라고 물을 수 없었던 복운은 그냥 목욕 준비부터 했다.

여전히 눈치가 빠르다는 명월의 칭찬을 듣고도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명월이 안에 들어가 목욕을 하는 중에도 문밖에 쪼그리고 앉은 채로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게 아니던가.

눈을 내리떠 흙 위를 살피는 복운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때 그 앞으로 나비가 나타났다.

토실토실한 고양이가 앞에 서선 크게 입을 벌리며 냥, 하고 울면서 무릎 위로 올라오려 한다. 다른 때라면 당장 나비를 들어서 무릎 위에 앉혔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나비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다른 곳으로 가 있어라.”

복운의 말에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는 나비의 눈이 평소보다 훨씬 커진 것 같았다.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나에게 어찌 이럴 수 있는 거냐. 그런 충격 받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복운은 오른쪽을 살폈다. 거기에 계진이 서 있었다.

복운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나비를 가리켰고, 계진이 한달음에 달려와선 나비의 꼬리를 덥석 붙잡았다. 갑자기 꼬리가 잡힌 나비는 바로 컁―하는 소리를 냈고, 복운이 손으로 나비의 입을 막았다.

“쉿, 조용히 해야지.”

그러곤 재차 엉덩이를 토닥였다. 어서 가 봐라. 어서. 그런 무언의 재촉을 받은 나비가 냥―하고 울면서 계진에게 잡힌 채로 질질 끌려간다.

그걸 보고 나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복운은 재차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일찍 일어나서 도성으로 보낼 진상품 정리를 끝낸 명월은 대청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구군복을 다 갖춰 입었으니 다시 잠들 것 같지 않았기에 아침 준비를 하려 했다.

그때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명월이 복운의 어깨를 붙잡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봐 왔다.

그는 ‘복운이 네가 내 대신에 해야 할 일이 있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장난도 치고 사람 골리기도 잘 하던 명월이긴 했으나, 그땐 진심이었다.

복운은 지금 당장 명월이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발생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전에도 그렇지만 요즘은 분위기가 더 뒤숭숭해서 저도 모르게 ‘위험한 일을 하시려는 건 아니지요?’라고 물었고, 명월은 대답 대신에 웃었다.

입꼬리를 올리면서 특유의 웃음을 짓는 명월을 두고 복운은 괜히 마음이 불안했다. 하지만 명월이 해야 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고, 꼭 해야만 하는 거라면 그 앞을 막을 순 없었다.

내키진 않아도 어쩔 수 없기에 복운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명월은 이방과 다른 자들 모르게 몇몇의 포졸만 데리고 밖으로 나갔고, 오후 늦게 돌아왔다.

명월이 무사히 돌아와서 마음은 편하지만, 엉망인 그를 보니 억장이 무너진다. 바깥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고, 붙잡아 온 자들은 또 무언가 싶었다. 저렇게 사람들만 잡아들이다간 감옥이 터지게 생겼다.

늘 비어 있던 감옥이 그득 차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냥 예전처럼 텅텅 빈 상태로 별일이 없으면 좋을 텐데. 그러면 이리도 마음이 답답하지도 않을 텐데.

그때 등 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나무 문이 등을 찌르자 놀란 복운이 급히 몸을 일으키면서 뒤를 돌아봤다.

막 씻고 나와서 그런지 머리도 다 풀고, 얼굴도 평소보다 뽀얗게 된 명월이 문 건너편에 서 있는 복운을 보곤 눈을 깜박였다.

“여기서 뭘 하는 거냐. 네가 집을 지키는 충견이라도 되는 거냐.”

“사또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로 본다면 충견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엉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말에 명월은 웃었다. 이번 일 때문에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전이라면 대번에 ‘사또, 너무하십니다. 어찌 사람인 저와 개를 비교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했을 터인데.

명월은 머리에 올린 천을 내려선 어깨에 걸쳤다. 팔짱을 낀 채로 복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름을 불렀다.

“복운아.”

움찔한 복운의 눈이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커진다. 이런 식으로 부른 적이 없어서 더 놀란 양 마른침을 삼키기까지 하는 모습에 명월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고맙다. 덕분에 이번 일을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사또.”

이런 식으로 칭찬을 듣는 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반양에 와서는 뭔가를 하려는 명월을 막기만 해서 투닥거리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말이다.

명월에게 칭찬을 들으면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지면서 뿌듯함이 가득히 찬다.

그런데 어쩐지 기분은 좋지만, 동시에 머릿속으론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원래 이런 식으로 말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이번 일 자체가 이상했다. 그 이방에게까지 말없이 움직이는 건, 정말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움직이신 건, 이 안에 첩자가 있기 때문입니까.”

고민해 봤자 해결되는 일은 없기 때문에 그냥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복운이 그런 식으로 물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지 명월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지워진다.

가만히 복운을 살피던 명월은 아니, 라고 답했다.

“뭐 좋은 일이라고 요란하게 군단 말이냐. 나와 몇몇만 다녀오면 금방 해결될 문제였다. 그래서일 뿐, 관아 안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대답을 들어도 마음의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 지금 명월은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정말 고민되는 일이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 주면 좋을 텐데. 아직 그 정도로까지 자신은 의지를 할 만한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괜히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렇다고 자신까지 한마디 더 보태서 명월의 속을 시끄럽게 할 순 없었다. 결국 복운이 선택한 건,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점심은 좀 드셨습니까. 식사 준비를 할까요?”

“아니. 방에서 혼자 생각할 게 있으니 넌 신경 쓰지 말고 계진을 데리고 뒷마당에 좀 나가 있거라. 어린애인데 좀 뛰어놀기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하겠습니다.”

단순히 같이 놀라는 의미로 계진을 뒷마당에 데리고 가라는 건 아닐 터였다.

오늘 계진은 자신의 방에서 재워야 하는 걸까나. 명월을 가만히 바라보던 복운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전 사또를 믿습니다.”

“그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더냐.”

하지만 이쪽에선 나름 생각을 많이 한 후에 꺼낸 말이었다. 그걸 명월이 한 귀로 흘려 넘기지 말았으면 싶지만, 여기까지였다.

복운은 목까지 차오른 한숨을 참았다.

“뒷정리는 나중에 와서 하겠습니다.”

그리 말하고는 느리게 몸을 돌리고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멀어졌다.

복운이 자리를 뜨자 명월은 머리에 올린 수건으로 머리를 조금 더 닦아 내곤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고 고개를 들자 구름이 많다. 어둑한 하늘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곤 제 거처로 돌아갔다.

대청에 올라섬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계진이 얼굴을 내밀었다. 조심스레 바라보는 얼굴을 확인한 명월은 웃었다.

“오늘은 정말 고마웠다. 덕분에 일 처리가 수월했다.”

설마하니 고맙다는 말까지 듣게 될 줄은 몰랐던지 계진의 얼굴이 발그랗게 물든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아닙니다, 라고 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짓던 명월은 바깥쪽을 가리켰다.

“보아하니 복운이 널 찾는 것 같던데 그리로 가 보는 게 어떻겠느냐.”

계진은 눈을 끔벅였다. 조금 전에 복운을 봤을 때 별다른 말이 없었는데 자신을 찾는다니.

이상했지만, 명월이 아닌 말을 할 리가 없었다.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 계진이 밖으로 나와선 짚신을 신었다.

한달음에 복운의 방 쪽으로 달려가는 계진을 확인한 명월은 대청을 지나쳐 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쪽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는 백호를 발견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물론 백호와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대화가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선 안 되는 게 아니던가.

맨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멋대로 창고에 들어와 나무 의자에 앉았다고 뭐라 했으면서―.

명월의 매서운 눈빛에도 아랑곳 않고 백호는 책상 앞에 놓인 책을 구경하듯 살폈다. 건성으로 종이를 넘기면서 눈을 내리뜨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명월은 백호 앞에 멈춰 서선 눈을 내리떠 백호를 노려봤다.

정수리에 꽂히는 강렬한 시선에도 백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한참을 뒤적이던 책을 덮고 옆으로 치워 버린 그는 보란 듯이 크게 입을 벌리며 하품을 했다.

“정말 지루하군. 이런 걸 왜 읽는 거야.”

“너에게 지루할지 몰라도 내겐 중요한 일이다.”

명월의 대답을 들은 백호가 그제야 고개를 든다.

위를 올려다보는 백호의 눈동자나 표정은 차분했다. 하지만 저런 얼굴을 하고 있다 해서 방심해선 안 되었다. 분명히 자신이 묻고자 하는 걸 교묘하게 피해 나갈 거다. 명월은 백호의 앞에 앉아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독각귀가 왜 내 앞에 나타난 거냐.”

“네가 잘못 본 거다.”

“내가 잘못 본 거라면 왜 네놈은 미친 것마냥 그 뒤를 쫓았던 거냐. 정말 나타났기 때문에 뒤를 쫓았던 게 아니야? 그래서 날 나무에 올려 두고 내려오지 말라 신신당부를 한 게 아니냔 말이야. 본인이 한 짓이 있으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그렇구나.’라며 고개라도 끄덕일 줄 알았던 거냐?”

“뭐 그리 말이 많아.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네가 잘못 본 거라고―.”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해. 그건 내 일이었어. 그 독각귀는 날 찾아온 거고, 네가 방해를 한 거란 말이야.”

“…….”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서늘하게 내뱉는 순간에 맞춰서 내내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돌리던 백호가 반응을 보였다.

응시해 오는 백호의 눈동자는 굳어 있었다. 아까는 작위적으로 모르는 척을 했다면 지금은 아니었다.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감정을 드러내는 그를 앞에 두고도 명월은 물러서지 않았다.

“네가 방해만 하지 않았다면 난 독각귀 그를 만났을 테고, 어떤 식으로든지 대화를 나누었을 거라고 생각해. 네가 방해를 했기 때문에 그리할 수 없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단 말이야.”

“그래서 지금 날 원망하는 거냐. 내 보기엔 고마워해야 할 상황인 것 같은데.”

이제야 독각귀를 잘못 본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운운을 집어치우기로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고마움 운운하는 것에는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실제로 어이가 없어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명월은 고개를 저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넌 내 일을 방해한 거야. 고마워할 리가 없잖아.”

“아니. 넌 나에게 고마워해야 해.”

“지금까지 몇몇 일들은 정말로 네 도움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이번 건 아니야.”

“그 어떤 일보다 숲에서 독각귀와 네가 만나지 않게 해 준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할 거다.”

끝까지 똑같은 말이었다. 그것도 명월이 이해할 수 없는 말들. 이건 뭐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인지라, 명월의 언성이 높아졌다.

“독각귀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 해 주러 왔을 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집어치워! 네놈을 낳아 준 그 인간이 아직도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방 안에 쩌렁쩌렁 울리는 호통에 명월의 몸으로 힘이 들어간다. 정말 놀란 양 눈을 크게 뜨는 명월의 얼굴이 유난히 희게 질린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힘줄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게 변하는 걸 본 백호는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다. 쓸데없는 말을 했다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백호는 명월을 지나쳐 나가려 했고, 명월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잡힌 왼손을 내려다보는 백호의 눈빛이 사납게 변한다. 노골적으로 성가셔 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그는 명월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백호가 손을 치우려 할수록 더 단단히 그의 손목을 붙잡으며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지금 그건, 대체 무슨 말이야.”

“…….”

대답을 하는 대신에 백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 무언가를 물었을 때 백호가 취하는 방응은 대게 정해져 있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거나, 솔직하게 대답해 주거나, 그도 아니라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면서 이쪽의 반응을 살피거나. 대개가 그런 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입술을 깨물면서 곤혹스러워 했던 적은 없었다. 자신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일부러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아닐 터였다. 그는 지금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곤란해하고 있었다.

그제야 명월은 백호 그가, 자신에게 가장 큰 비밀을 숨겨 두었던 거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가, 나를 낳아 준 그분이……죽었다는 거야?”

“…….”

여전히 무겁게 입을 다물고만 있던 백호가 가볍게 손을 흔든다. 명월의 손을 뿌리치려 해도 그리할 수 없던 건, 명월이 손에 더 힘을 주고 잡아왔기 때문이었다. 아예 백호 쪽으로 몸을 돌린 명월은 그를 올려다봤다.

제발 그런 게 아니라고 해 줘.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내내 고개를 피한 채였다. 다른 쪽을 살피던 백호의 악문 이로 조금 더 힘이 들어간다. 붙잡고 있는 명월의 손으로 힘이 들어간다.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 손을 뿌리치고 이 불편한 자리를 피할 수도 있을 거다.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명월은 그런 식으로 그를 순순히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아예 똑바로 서서 백호의 양어깨를 붙잡은 명월은 그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백호.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줘.”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하는 백호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명월은 더더욱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쪽을 보라며 어깨를 더 세게 부여잡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입을 벌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군.”

반대편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올린 그는 옆으로 눈동자를 옮겼다.

여전히 파리하게 질려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의 명월이 보였다. 그 흔들리는 모습을 두고 백호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독각귀는 한 번 내뱉은 말을 어떻게든 지킨다. 그런 족속이고, 그래야만 하지.”

드디어 백호가 입을 열었다. 그가 하는 말을 토씨 하나 흘리지 않기 위해서 명월은 그 얼굴을 집중해서 바라봤다.

“그 녀석이 날 찾아와서 너에 대한 말을 꺼냈을 땐 가볍게 넘겼다. 그놈이 한 말은 내가 네 뒤만 쫄쫄 따라붙으면서 심부름꾼 노릇하라는 게 아니었으니까. 언젠가 네가 내 영역 안에 들어서면 그땐 도와주면 된다고만 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냥 듣고 잊었지. 인간이 사는 땅은 좁지만, 그 사이에서 인연이 생기기란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 독각귀 놈이 부탁한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날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아직은 명월이 듣고자 하는 말의 내용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다리다 보면 나올 터였다. 그 기다림이 생각보다 무척 길고, 답답하게만 여겨져서 당장 그를 붙잡고 채근하고 싶은 걸 참으면서 명월은 이를 악물었다.

“처음 그놈을 보고, 두 번째로 본 건 어떤 인간을 등에 업고 있었을 때였다. 힘이 다해서,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왜 산송장을 업고 있는 거냐고 물었을 때 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너에 대한 말을 했을 뿐이다. 그게 앞에 내가 말한 부분이었고, 그리고 세 번째로 놈이 나타난 건…….”

백호는 뒷말을 흐렸다.

지금 이 말을 해도 되는 걸까.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잠시 고민을 하는 동안, 낌새를 눈치챈 명월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죽었을 때인가.”

“……뭐.”

그런 거지.

중얼거린 후 백호는 입을 다물었다.

명월이 바로 앞에 서 있고, 시선은 그에게 고정되어 있지만,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복잡하고도 이상한 기분이 듦을 느끼면서 백호는 재차 그런 거야, 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세 번째로 나타났던 독각귀를 떠올렸다.

재미 하나도 없는 딱딱한 놈이었다. 할 말만 하고, 그 외에 사사로운 대화를 나눈 적도 없던 놈이었다.

그런 놈이 다른 이들에게 말할 수 없는 존재를 만들어선 결국엔 반푼이까지 낳았다 했을 땐 ‘제법이로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험 부담을 안고서도 선택하고 품에 가두었던 존재를 잃은 놈이 다시 찾아왔을 때, 당연하게도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검은 가면을 쓰고 있어서 전체적인 얼굴을 살필 수 있었던 건 아니나 눈빛이 죽어 있었다. 무엇을 바라보고 담고 있는지를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그때 든 생각은 딱 하나뿐이었다.

이 녀석, 위험하군.

―라는 것 말이다.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말해 주지 않아도 그 눈빛과 태도만으로도 모든 걸 짐작할 수 있었던 백호는 입을 다물곤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백호를 지그시 바라보던 독각귀가 사라졌고,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나타난 거다. 암만 생각해 봐도 이상하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분명 무언가가 있는 거다. 그리고 그 무언가에 만약에라도 앞에 서 있는 이 녀석이 관련된 거라면―.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명월이 손을 놓고 몸을 돌린다. 이번에는 백호가 그런 명월을 붙잡아 세웠다.

“지금 어딜 가려는 거냐?”

명월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몸을 돌려세운 백호는 재차 말했다.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아. 내가 알아서 하겠다.”

어떻게 할지에 대해선 백호도 나름 생각을 해 놨다. 일단은 그 독각귀 놈이 어딘가에 숨어 있는지를 알아내고 찾아내는 게 우선이었다.

“우선 내가 먼저 만나 보고 나서 이야기를 해 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늘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나는 뭘 할 수가 있는 건데.”

기다렸다는 듯 날아오는 반문에 백호는 입을 다물었다.

명월의 성격상 가만히 있으라 말한다고 해서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진 않을 거란 걸 알고 있기는 했다. 따라서 이런 반응을 취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긴 했지만, 지금 백호가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때로는 가만히 있는 게 좋을 때도 있는 법이야. 이 모든 게 전부―.”

갑작스럽게 말이 목구멍 바로 위에서 턱하니 막힌다.

말을 하다 말고 머뭇거리는 모습이 이상해 보였던 걸까.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주시하는 명월을 보면서 백호는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그러니까―.”

지금 이 말을 해야 하는 걸까. 한다고 해서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지만 굉장히 망설여진다.

그러는 동안에도 힘이 들어가는 명월의 팔을 느끼면서 백호는 혀를 찼다.

어설픈 말로는 지금의 명월을 멈춰 세울 수 없었다. 다른 존재도 아니고 저 독각귀가 나타난 거다. 명월 입장에선 당장 찾아서 만나 보고 싶겠지.

하지만 백호가 본 독각귀는 정말 이상했다.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명월로서는 안 만나는 편이 나았다.

독각귀가 인간의 부성애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 그 녀석을 만나게 된 명월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건, 절대로 싫었다.

그 마음을 담아서 솔직하게 말했다.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니까 좀 들어. 넌 그렇게 할 필요가 있어.”

빠르게 내뱉는 말을 명월이 제대로 들었는지 알 바 아니었다. 내내 망설였던 걸 내뱉고 나니 그 뒤는 한결 수월해진다.

백호는 열린 주머니처럼 많은 말을 쏟아 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하란 말이야. 다 네놈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 네가 이렇게 나선다고 해 봤자 뭐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야. 오히려 문제만 더 복잡해지는 격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열심히 말한 건 좋았지만, 마무리를 어떤 식으로 지어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쪽을 주시하는 명월을 확인한 백호의 턱으로 힘이 들어간다.

백호는 명월의 양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걸 꼬옥 붙잡았다.

“이번 일은 내가 도와준 거고, 그에 대한 보답의 차원으로 넌 아무것도 하지 마라.”

언제나처럼 결국엔 이런 식으로 가게 되는구나 싶었다. 도와주면 도와주는 거지 왜 꼭 보답 운운을 하냐면서 명월이 싫어한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명월을 묶어 둘 만한 구실이 필요했다. 손에 잡힌 가느다랗지만 단단한 어깨를 더 힘주어 잡으며 백호는 명월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인간들 사이에 있는 일은 네놈이 해결하면 되고, 그쪽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그걸로 타협을 보는 거다. 알겠냐.”

입을 다문 후, 명월의 안색을 살폈다.

아까처럼 당장 움직일 것 같진 않아도 표정은 굳어 있었다. 저런 얼굴을 한 채로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저러다가 갑자기 돌발 행동을 취하는 게 아닐까 싶었던 백호는 내내 감추려 들었던 일부분을 드러냈다.

“내가 보기에 그 녀석은 어딘가 이상했다. 그런 놈이 너와 마주쳐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러니까 일단은 내가 만나 보고 어떤 용무인지를 알아볼 셈이다. 이건 네 문제이면서 동시에 내 문제기도 하다.”

그래, 그거다. 우연히 뱉은 말 중에서 괜찮은 변명 거리를 발견한 백호는 이거다 싶어서 잽싸게 말을 이었다.

“여긴 내 구역이지. 전에 몇 번 드나든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해 주었더니 놈이 규칙을 어기고 제멋대로 굴고 있는 거야. 난 그걸 그냥 넘길 수 없다. 매번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그래. 그러니까 이건 내 문제이니, 내가 우선 처리하고 나서 그 다음에 너에게 넘기겠어. 그러면 되겠지. 알겠냐.”

이게 최선이었다. 이 최선의 해결 방안에 대해서 명월은 대답을 하기만 하면 되었다. 싫다는 대답은 들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단은 어떻게든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어야 성이 찰 것 같았던 백호는 명월의 얼굴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날카로웠던 눈매에서 힘이 빠졌지만, 그래도 고집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런데 전과 사뭇 다르게 가라앉은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바닥만 하염없이 바라본다.

모처럼 생각해서 충고를 했을 때 바락바락 대드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기운 없이 축 처져 있는 것도 그리 썩 보기 좋진 않았다.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끼며 백호는 물었다.

“……왜 그런 얼굴이냐.”

“내가 뭘.”

대꾸하는 목소리를 들은 백호의 표정이 굳는다.

“목소리는 왜 또 그렇게 퉁명스러워. 지금 이 모든 게 전부 다―.”

명월을 위해서 자신이 애쓰는 일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성가시게 구는지 모르겠다.

아니. 가장 성가신 일은 바로 자신이었다.

명월에게 매번 일이 생길 때마다 이런 식으로 전부 뒤치다꺼리를 해 줄 셈인가. 이놈은 자신이 뭔가를 말한다고 해서 그에 순순히 따르는 놈도 아니었다.

가끔 말을 섞다 보면 속도 터지고 답답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 정도로까지 해 주면 ‘고맙습니다.’ 하고 납작 엎드려야만 했다.

하지만 백호는 알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자신뿐이라는 걸.

결국 명월은 그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거나 반응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 헛된 바람일 뿐이었다. 그런 것에 아직까지도 연연하는 건 정말 병신 같은 짓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자꾸만 명월 곁에 달라붙어서 알짱거리게 된다.

명월 성격에 그런 자신을 두고 성가셔 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

하지만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그가, 죽었다고?”

그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모르진 않기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다만, 굳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백호를 두고 명월의 입꼬리가 힘없이 올라간다.

“그래. 역시나 죽은 거로군.”

중얼거린 명월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먼 곳을 응시하듯 명월의 눈동자가 가볍게 풀린다. 붉은 입술을 꾸욱 다무나 싶던 명월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역시나 그랬던 거였어.”

허무한 느낌이 풍기는 중얼거림을 내뱉고 난 후, 명월은 입을 다물고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실제로는 시간이 얼마 안 흐른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백호는 왜인지 불안하고 초조한 느낌이 들었다. 뭐라도, 어떻게든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해 주고 있었지만, 그 방법이 틀린 게 아닐까.

해 주면서도 머리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왜 굳이 자신이 이렇게까지 해 줘야 하는 것인가.’라는 거였다.

그런 생각들이 계속해서 휘몰아치지만 결과적으론 언제나 명월을 제 앞에 두게 된다.

그 때문에 이래저래 부딪치는 일이 생겨서 성가신데도 곁에 있는 걸 포기할 수가 없다.

그런 자신의 상태가 우습다는 걸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기분. 그 알 수 없는 감정은 지금 이 순간에도 들었다.

명월을 바라보기만 하던 백호가 앞으로 움직였다.

머리가 복잡해진 상태였기에 차라리 그것들을 다 정리하자 싶었다. 그래서 머릿속을 말끔하게 정리해 버린 백호는 그냥 명월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백호의 행동에도 명월은 잠자코 있었다. 무언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든 것 같았다.

그런 그를 가만둘 수 없었던 백호는 고개를 숙여 명월의 귀에 입술을 댔다. 그러곤 점점이 내려간 입술이 앞으로 옮겨져 입술에 닿았을 때, 명월의 눈썹이 꿈틀하고 흔들렸다.

앞으로 고개를 돌린 명월은 뭘 하는 거야, 라고 물었다.

“뭐가.”

묻는 말에 대해서 돌아오는 대꾸는 딱딱했다.

이런 식으로 말해선 좋을 게 없을 텐데―.

생각을 하면서도 멈출 수 없다.

백호는 그냥 명월의 어깨를 붙잡고는 그에게 입술을 눌렀다.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고, 그 순간 풋내가 났다.

명월에게서 나는 건 달콤하고 맛있는 냄새였다. 그런데 이 풋내는 대체 무언가 싶었다. 어디서 나는 건가 싶어서 입술을 뗐을 때, 명월의 눈동자가 이쪽을 주시한다.

흔들림이 없는 눈동자로 물끄러미 응시해 오는 두 개의 검은 눈동자를 확인한 백호의 뱃속이 편안해졌다.

그래. 이렇게 돼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재차 입을 맞추려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명월이 고개를 돌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피하지 않았고, 결국 다시 입술이 닿았다.

처음에는 입술만 누르고 있다가 그것이 점점 열기를 띠워 간다.

입술을 벌리고 혀를 내밀어서 명월의 다물린 입술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반응 없이 있던 명월이 입을 벌리자 기다렸다는 듯 그 안쪽으로 파고들어 간다.

명월의 입 안을 훑고 혀를 감아서 빨아들이고 입술로 비벼댔다. 그렇게, 느리지만 꽤나 집요하게 오랫동안 입맞춤을 했다. 마지막에 쪼옥,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을 때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명월의 눈동자를 본 백호는 입 안에 고인 타액을 삼켰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백호의 두 손이 올라와 명월의 얼굴을 감싼다. 아직 젖어 있는 머리카락을 그의 뺨에서 떼어 내고는 명월의 얼굴을 양손으로 조심스레 어루만지면서 엄지로 아직 젖어 있는 입술을 눌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명월의 입술이 달싹인다.

“나는 언젠가 그와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꼭 만나고 싶었지.”

“―왜 그랬던 거냐.”

“나 혼자만 있으니까.”

명월의 눈동자 안쪽으로 자조가 서린다.

어린애도 아니면서―. 그런 식으로 자신의 나약함을 비웃은 후,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쓸쓸한 말이 흘러나온다.

“나 혼자선 너무 쓸쓸하니까. 난 혼자 되는 거 싫어.”

가능한 담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끝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런 게 싫었던 명월은 입을 다물었고, 백호는 명월을 끌어안았다. 단단한 가슴팍에 안겨진 명월은 안색을 굳혔다.

숨이 막히고 답답하다. 처음에는 불편해서 백호를 밀어내려고도 했으나, 결국에 명월의 두 손이 어색하게 백호의 허리춤에 닿는다. 그의 양 허리에 손을 댄 채로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혼자서 있을 때와, 다른 누군가에게 안겨 있을 때 보이는 풍경은 이렇게까지 다르게 보이는 거로구나.

“혼자서 평생 이렇게 사는 건 싫어. 넌 그걸 몰라. 이해할 수 없어.”

평범하게 살고 싶지만, 그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건 어렸을 적에 함께 살았던 그였다.

그는 자신과 같은 존재였다. 지금 이런 자신의 고민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 거다. 그런 그와 다시 만나고 싶다 생각하는 한편, 왜 이런 곳에 자신을 혼자 두고 가 버린 건지에 대한 원망으로 마음이 뒤죽박죽인 상태였다.

보고 싶으면서도 원망스럽다.

원망을 하면서도 늘 마음 한구석으로 그리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마음을 기대고 편안히 있을 장소가 한 군데 정도는 있는, 그런 감각을 느껴 보고 싶었다. 어렸을 적의 일은 지금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빛바래져 있었으니―.

“난 그냥 사람으로 살고 싶어. 그뿐이야.”

백호의 등을 양손으로 붙잡은 채로, 명월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고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게 내 최선이야. 보통 사람은 그렇게 부딪치면서 문제 해결을 하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해. 물론, 내가 영리하지 못하게 구는 걸지도 모르지. 약삭빠르게 굴면서 뒷돈도 챙기고, 이병현 대감 같은 자에게 아부도 떨고, 화소군하고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걸지도 모르지.”

“…….”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야. 안 되겠다 싶어서 이미 마음을 정했으면 더는 어찌할 수 없어. 그게 하찮은 고집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이 기분을 누가 알겠어.”

자신은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 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냥 그들처럼 굴면 되는 거였다.

봐서 힘들 것 같은 일이면 피하고, 할 수 있는 일은 밀어붙이고. 손을 잡아서 괜찮을 것 같은 자들과 인맥을 쌓고, 친분을 과시하고, 뒤로 들어오는 것들은 받아들이고.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더라도 그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때에는 속이 없는 사람처럼 웃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쭉 하다 보면 보다 안정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다. 그땐 정말로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가 되어서 부러울 거 하나 없는 삶을 살겠지.

하지만 그때가 되어도 자신은 여전히 이상한 게 보이고, 다를 것이며, 집안에선 인정받지 못할 거다.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으니 혼담이 오가도 결국에는 깨질 것이고, 계속 혼자 있는 걸 두고 이상한 소문이 떠돌 터였다.

그런 자들에게 자신과 같은 아이를 낳는 게 두려워서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할 순 없었다.

남들과 같아지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싶어도, 결국에는 제자리였다.

자신은 근본적으로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그들처럼 되려고 해도 어떻게든 자신의 입장을 상기시켜 주는 일들이 생겨난다. 그러면서 조금씩 비뚤어지게 되는 모양이었다.

뭔가에 쫓기듯, 그렇게 헐레벌떡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언젠가 주춤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지금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느냐는 그런 느낌.

속이 복잡하고 뒤엉킨다. 무언가가 타는 듯 역한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속이 탄다. 목이 마르다.

언제나, 늘 불안하고 초조했다.

왜 자신은 이렇게나 여유 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인가.

“이렇게라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날 사람으로 봐주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 불안을 누가 알겠어.”

그 누구도 모르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감정이었다. 그런 걸 혼자서만 끌어안고 있고 싶지가 않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런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다.

백호가 천천히 떨어져선 명월을 내려다봤다. 제 품에 안겨 있는 명월이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살짝 낯선지 눈을 가늘게 뜨는 그를 두고 명월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바로 백호가 고개를 숙여선 명월의 오른쪽 뺨에 입술을 눌렀다. 가만히 입술을 대고만 있다가 이를 세워 작은 점을 깨문다.

그리고 바로 명월의 어깨를 타고 내려간 손이 그의 팔을 쓰다듬다가 등에 닿는다. 날씬한 등과 허리, 엉덩이까지 쓰다듬는 동안 점점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안고 싶다. 거추장스러운 걸 모두 벗어 내고 보다 원초적인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백호는 명월의 옷고름에 손을 대고 그걸 풀어냈다. 옷을 벗겨 내는 손길에도 명월은 거부하지 않았다. 급하게 제 옷을 벗기는 백호를 보다가 손을 들어선 그의 옷에 손을 댔다.

명월의 손이 옷에 닿을 때 백호는 주춤하긴 했지만, 그걸 마다하진 않았다.

어느 순간 서로가 서로의 옷을 벗기는 데에 열중하게 되었다. 옷가지들이 하나둘 벗겨지고 명월의 바지도 내린 후, 백호는 그대로 명월을 안아 들고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장에서 이불을 꺼내서 그걸 바닥에 대충 깔고는 그 위에 명월을 눕힌다. 자리에 누운 명월을 내려다보는 백호의 표정은 굳어 있었으나, 그게 다른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아는 명월은 마음이 편안했다.

차분한 명월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던 백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명월에게 입을 맞추고 난 후, 그 몸을 끌어안고 하얀 뺨에 제 뺨을 갖다 댄다. 두어 번 비비는 게 마치 구애를 하는 몸짓처럼 여겨졌다.

백호의 넓은 품에 안긴 명월은 팔을 들어 그의 등에 올렸다. 그렇게 손을 올린 채로만 있던 명월은 나직한 한숨을 토해 내며 속삭였다.

“너랑 있으면 따뜻해.”

“…….”

단순히 맨살이 맞닿는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열기를 따뜻하다고 표현하는 걸지도 모른다.

다른 의미가 포함된 것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명월의 손에 닿은 몸이 훨씬 더 뜨거워진다.

등에만 올려져 있던 명월의 팔이 올라가선 백호의 목을 끌어안는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한 명월의 손짓을 느끼며 백호는 하얀 목덜미에 코를 묻은 채로 중얼거렸다.

“너에게 냄새가 난다.”

그 순간 백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있던 명월이 주춤한다.

조금 전에 씻고 온 사람에게 냄새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던 명월은 백호의 목에 두르고 있던 팔을 빼내곤 그를 올려다봤다. 바라보는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혀 있다.

너 방금 한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인데.

바라보는 눈빛이 굳어 있는 걸 본 백호는 주름진 명월의 미간을 엄지로 눌렀다. 가볍게 몇 번 꾹꾹 눌러 주자 펴지는 주름을 확인한 그는 재차 입을 열었다.

“꽃처럼 아주 단내가 난다.”

“……꽃 냄새라고?”

“꽃처럼 단내가 난다고만 했지, 꽃 냄새라고 한 적은 없다.”

그게 그거잖아. 생각은 해도 딱히 뭐라 하진 않았다. 한번 반박하는 말을 꺼내면 투닥거릴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둘 다 말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꼬옥 끌어안기만 하는 건데도 맞닿은 부분이 서서히 뜨거워진다. 서로의 심장 박동이 느껴지고, 그것으로 인해 얼굴이 달아오른다.

기분이 좋았다.

지금까지와는 미묘하게 다른 감각이었다. 그래서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었다.

“난 원래 아무에게나 이러지 않는다.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

“내가 하는 말이 때로는 반감이 들기도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널 걱정하기 때문에 하는 소리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조심스럽게 내뱉는 말에 명월은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말없이 조용히 있던 명월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백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물론, 이렇게만 있어도 나쁘진 않았다.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가 푹 잠들면 기분 좋을 것 같았지만, 결국 먼저 움직이는 건 백호였다.

명월의 뺨에 입술을 댄 채로 진하게 누르다가 고개를 떼고는 아래로 내려간다. 턱을 깨물고 목을 빨아들인 후, 쇄골에 제 흔적을 남기듯이 깨물었다. 유두를 스쳐 지나가 배꼽에도 입을 맞추고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백호가 벌어진 다리 사이로 들어가 입을 벌리고 성기를 물었을 때, 명월은 그의 머리카락을 붙잡은 채로 눈을 감았다.

아직은 낯선 행위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지금 이러는 게 나쁘지도 않았다.

몸 한곳에 붙은 불씨가 점점 강해진다. 명월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백호를 받아들였고, 이윽고 그의 단단한 물건이 몸을 쪼개듯이 밀고 들어왔을 때에도 그를 밀어내지 않고 제 쪽으로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가볍게 이어지던 추삽질이 점점 강한 몸짓으로 변해 가는 동안 명월의 입을 타고 깊고 뜨거운 호흡이 토해 내졌다.

그때 내내 단단히 다물려져 있던 꽃봉오리가 톡, 하면서 벌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게 어디에서부터 들리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던 둘은, 서로를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 * *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술잔이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한창 즐기면서 흥겨운 시간을 보내던 모두가 놀라선 큰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길게 연결된 상의 가장 위쪽에 자리하고 앉아 있던 이병현 대감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채였고, 그 옆에 앉아 있는 호접화의 얼굴 절반이 젖어 있었다.

근처에 앉아 있던 자희가 놀라서 몸을 일으키면서 형님, 하고 그녀를 불렀으나 호접화는 가만히 있으라며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차분한 호접화의 손짓에 자희는 다시 자리에 앉았으나 불안한 얼굴은 여전했다. 그건 다른 기생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오늘 이곳을 찾았던 이병현 대감의 고약한 얼굴을 떠올렸다. 원래 오기 전부터 기분이 언짢은 상태였던 그였다.

설마하니 호접화에게 그 화풀이를 하려는 게 아닐까 싶었던 한 기생이 대감과 함께 온 선비의 팔을 잡았다.

어찌 좀 해 보라는 시선을 던지자 선비는 헛기침을 할 뿐, 기녀의 시선을 가벼이 묵살해 버렸다.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사내들이 그 모양이었다. 이제야 무슨 일이 터져도 호접화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깨닫게 된 기녀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이게 대체 어찌 돌아가는 일인가 싶었던 그녀들은 불안함에 서로 시선을 교환했고, 호접화는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술을 닦아 냈다.

몇 번 얼굴을 눌렀다가 손수건을 때낸 호접화는 이병현 대감을 바라봤다.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이병현 대감의 입가가 파르르, 떨린다. 화가 단단히 난 못난 얼굴을 보고도 호접화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물었다.

“잔이 비셨습니다. 술을 다시 따라드릴까요.”

조금 전 호접화가 따른 술은 지금 그녀의 얼굴에 끼얹어졌다. 그걸 빤히 알면서도 재차 술을 따라드릴까 묻는 배짱에 대감은 한 손을 들었다.

“이년이―!”

“대감, 참으십시오!”

자희가 몸을 날려서 호접화 앞으로 갔다.

이미 나서지 말라는 눈빛을 받았으나 이런 상황에서 손 놓고 구경만 할 수 없었던 그녀는 바닥에 양손을 댄 채로 대감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노여움을 푸십시오. 제 형님께서 큰 잘못을 하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년이 잘못한 게 없다고?! 지금 네년이 뚫린 입이라고 감히 내 앞에서 그따위 말을 지껄이는 것이더냐!”

“하지만, 제 형님께서는 정말로 아무 잘못도―!”

“그만 해라.”

몇 번을 생각해 봐도 호접화가 잘못한 건 없었다. 지금 이 일은 어디까지나 이병현 대감의 노여움으로 인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화가 난 상태로 찾아와 괜한 사람 트집을 잡고 못살게 굴려는 거다.

차라리 다른 기녀나 자신을 잡고 늘어졌다면 꾹 참았겠지만, 호접화는 아니었다. 그 누구라도 그녀에게 함부로 대할 순 없음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앞으로 나섰던 자희는 그만하라는 호접화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은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너 때문에 대감께서 더 속이 상하시겠구나.”

“……하지만, 형님. 저는 그저.”

“말이 길구나. 그만하고 나가 있거라. 너 때문에 자리의 흥이 식었다.”

거기까지 말한 호접화는 상 앞에 앉아 있는 다른 기생들 모두를 쳐다봤다.

“너희도 다 마찬가지다. 다들 나가 있거라.”

갑작스럽게 전부 다 밖으로 물리려는 호접화의 행동에 기생들은 당황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가 싶어 호접화를 바라봤을 때, 돌아오는 건 매서운 눈빛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이나 반문일랑은 하지 말고 그냥 하는 말에 따르라는 식이었다.

그녀가 저렇게 나온다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머뭇거리던 기생들이 하나둘 일어나 밖으로 나갈 때에도 자희는 가만히 있었다.

이런 곳에 혼자 남아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나마 모두가 남아 있어야 괜찮을 게 아닌가 싶었던 그녀는 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동안 호접화는 눈을 내리떠 자희를 살폈다.

넌 움직이지 않고 지금 무얼 하는 거냐.

그리 말하는 눈빛을 본 자희는 손을 움켜쥐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사또께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해야―.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쓸데없는 생각일랑은 하지 말고 가만히 있거라.”

막 몸을 일으키려던 자희는 호접화의 말에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속이 읽힌 기분이 들어 오싹해진 자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리던 그녀는 완전히 일어나선 몸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자희가 나가고 난 후, 방 안에 남은 건 호접화와 이병현 대감, 그리고 그를 따라온 몇몇 선비들뿐이었다.

호접화가 기생을 전부 내보낸 게 의외다 싶었을까. 아까보다 풀린 얼굴이 된 이병현 대감이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녀를 노려봤다.

“무슨 수작이더냐. 이런 짓을 한다고 내 화가 풀릴 것 같으냐.”

“애초에 갈 곳 없는 대감의 화를 제가 무엇으로 풀어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불쌍한 아이들에게 괜한 불똥이 튈까 걱정스러워 내보낸 겁니다. 저 아이들이 여기서 술을 따르고 웃음을 팔긴 해도, 보잘것없는 사내들의 화풀이 대상이 될 정도로 하찮지가 않습니다.”

“…….”

이병현 대감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린다.

싫은 소리를 해도 웃고, 모욕을 당해도 미간 한번 찌푸리지 않고 그걸 다 받아들이던 그녀였다.

그런 호접화가 날린 독설에 대감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술잔을 던지면서 행패를 부리던 모습은 어디로 간 건가 싶을 정도였다.

그때 근처에 있던 선비가 상을 내리치며 언성을 높였다.

“네년! 지금 대감께 이 무슨 말버릇이더냐!”

“뚫린 입이니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말조차 못한다면 제가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호접화는 중간에 끼어든 선비를 노려봤다.

“지금 이건 저와 대감의 일입니다. 그러니 시끄럽게 굴지 말고 조용히 술이나 드십시오. 안 그렇습니까. 대감.”

노골적일 정도로 서늘한 시선을 던지자 끼어든 선비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쪽에 있던 자들이 혀를 차면서 “저년이 미친 건가―.” 하는 소리를 내도 호접화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저 이병현 대감을 바라보는 호접화의 한쪽 입꼬리는 올라간 채였다.

그 느긋하게 웃는 모습에서 내내 마음 쓰이는 새파랗게 젊은 사또가 겹쳐지는 걸 느끼며 이병현 대감은 이를 갈았다.

“내가 오냐오냐 했다고 네년이 뭐라도 되는 줄 아느냐. 넌 한낱 기생일 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네년의 목을 비튼다 한들, 내게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 그렇군―설마하니 네년이 그 곱상한 사또를 믿고 이러는 것이더냐.”

“대감. 그 어여쁘신 사또께서 뜻대로 되지 않으시는 게 그토록 분하십니까. 그래서 이런 식으로나마 고운 사또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싶으신 겁니까.”

“…….”

“정말 그걸 원하신 거라면 잘못 짚어도 한참을 잘못 짚으셨습니다. 모름지기 사내의 마음이라는 건 말과 속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지금이야 제가 어여쁘다 품고 계셔도, 본인에게 피해가 간다 싶으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습니다. 자고로 입에 머금고 있을 땐 달다며 즐거워해도 뱉을 때는 쓰다면서 인상을 찌푸리기 마련이 아닙니까. 지금, 대감처럼 말입니다.”

그때 재차 다른 선비가 끼어들려 했으나, 호접화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사내분들 하시는 일을 여인이, 하물며 기생인 제가 무얼 알겠습니까. 그러니 사또와 안 좋은 일이 있으셨다면 그쪽으로 직접 가서 푸십시오. 이런 식으로 힘없고 불쌍한 여인을 괴롭힌다 한들 대감의 속이 얼마나 풀리시겠습니까. 설령 지금 제 목을 잡아 비튼다 하셔도, 얼마 안 가 또 화가 나신다면 그땐 어쩌시렵니까. 이 호란의 모든 기생 년들의 목을 하나하나 다 분지르실 겁니까.”

내내 치미는 화를 가까스로 참고 있었던 이병현 대감은 기다렸다는 양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못할 것도 없지. 여기선 내가 못할 게 없다.”

“그러다가 저희들이 귀신이 되어 대감 앞에 나타나면 어쩌시렵니까.”

“…….”

그 순간 이병현 대감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다른 선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무슨 흉흉한 말을 하는 거냐는 듯 경악을 담아 바라보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호접화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속삭였다.

“지금 제가 대감께 해를 당해 죽게 된다면 그 원통함이 너무도 깊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죽어서도 대감을 잊지 못해 찾아가면, 그땐 어쩌시렵니까.”

입을 다문 호접화는 그윽한 시선을 보내 왔다.

다른 곳이었다면, 귀신 운운하는 순간 바로 크게 웃으면서 헛소리를 한다며 가볍게 넘겼을 테지만, 여기선 아니었다.

이곳은 반양이었다.

호접화의 말에서 칼날이 목에 닿아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 이병현 대감이 몸을 파르르 떨면서 그녀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이, 이, 이년이 지금―!”

“호접화! 네년이 미친 게 아니더냐! 어디서 그런 망발을 지껄이는 것이더냐!”

“제 말이 망발인지 아닌지는 해 보시면 알 것입니다.”

여기저기 아우성을 치려던 자들은 호접화가 한마디 하자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상 앞에 앉아 있는 이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러자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자들은 알아서 고개를 돌리며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런 선비들의 태도에 가벼운 실소를 흘리면서 호접화는 이병현 대감을 바라봤다. 어느새 입가에 서린 미소를 지운 호접화는 차갑게 내뱉었다.

“구차하게 이런저런 모욕을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 번에 끝내 보십시오. 기쁘게 죽어 매일 밤 대감을 찾아 뵐 것입니다. 귀신이 되어 나타날 땐 지금처럼 어여쁘지 않은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내치지 말고 예쁘다, 귀애해 주십시오. 대감.”

“이 잡것이, 지금 누구에게 위협을 하려는 것이야! 오냐! 내 오늘 네년을 죽여 주마!”

호접화가 한 말에 몸을 떨면서도 이병현 대감은 그냥은 물러서지 않았다.

명월에게는 어쩔 수 없이 등을 돌려야 했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고작해야 기생 년이었다. 이런 하찮은 것이 자신을 위협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대감은 벌떡 일어나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칼집을 잡아 구석으로 던진 후 이병현 대감이 크게 팔을 휘두르자 선비들이 놀라선 벌떡 일어났다. 여기저기서 대감을 부르는 사이, 단도는 정확히 호접화의 왼쪽 뺨을 긋고 지나갔다.

“……헉!”

누군가 마른 숨을 토해 내고 난 후, 방 안으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지금 본 걸 믿을 수 없었다.

정말로 대감이 호접화의 얼굴을 단도로 그은 것인가. 지금 이 순간 반양 제일의 미인이 사라진 거나 진배없었기 때문에 선비들은 기겁한 상태로 멍하니 전방을 주시했다.

그리고 감정적으로 단도를 꺼내 휘둘렀던 이병현 대감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 손에 들린, 피가 묻은 단도와 왼쪽 뺨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피하지도 않고,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 호접화를 앞에 둔 대감의 늙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건방지게 굴던 호접화에게 본때를 보여서 흥분이 되면서도, 알 수 없는 찜찜함을 느끼며 이병현 대감은 애써 목소리를 높였다.

“자, 엎드려 빌거라! 두 손이 발이 되도록 빌란 말이다!!”

당혹감을 느끼는 만큼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호통을 치듯 외치는 이병현 대감의 모습에 호접화의 입꼬리가 재차 올라갔다.

“술을 얼마 드신 것도 아니시면서 왜 실수를 하십니까. 뺨이 베인 걸로는 죽지 않습니다. 목을 노리셔야지요.”

“…….”

왼쪽 뺨에서 피를 흘리면서 웃는 호접화의 모습은 괴기스러웠다.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대감은 바닥에 주저앉아선 단도를 놓쳤고, 근처에 앉아 있던 선비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이쯤 되자 일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느끼게 된 그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한 선비가 용기를 내 몸을 일으켜 대감에게 말을 꺼냈다.

“대, 대감 돌아갑시다. 저년이 예쁘다, 예쁘다 해 주니 정신이 나간 모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런 년은 대감께서 상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나중에 제가 본때를 보이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서둘러 말을 덧붙여도 이병현 대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혼이 나간 것마냥 주저앉아만 있는 모습에 선비들이 그에게 다가갔다. 일어나시지요―라고 말하면서 이병현 대감을 챙긴 그들은 호접화 옆으로 지나쳐갔다.

그녀 옆을 지나칠 땐 숨소리도 크게 낼 수 없었다. 장사 밑천이라 할 수 있는 얼굴이 저 모양이 되었는데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미동도 없는 그녀를 두고 누군가 “독한 것.”라고 중얼거렸으나, 그 말에도 호접화는 잠자코 있었다.

이병현 대감을 챙긴 선비들은 급히 방 밖으로 나섰다.

“이년들이 무슨 구경거리라도 났느냐! 썩 물러나거라!!”

“저리 비켜라! 대감께서 돌아가실 테니 가마나 준비하도록 해라!”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기생들은 선비의 호통에 고개를 숙일 뿐 물러서지 않았다. 개중에는 매서운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는 기생도 더러 있었다.

조금 전 호접화의 일을 본 선비들은 매서운 기생들의 시선에 움찔해선 알아서 입을 다물곤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렇게 그들이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자희가 안으로 들어왔다. 호접화가 괜찮은 것인지를 확인하려 들어온 그녀는 하얀 손수건으로 왼쪽 뺨을 누르고 있는 호접화를 보곤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피, 피가―!”

“별거 아니니 소란 떨지 말거라.”

차분한 호접화의 말에 자희는 고개를 저었다.

“피가 이렇게 나는데 어찌 소란을 떨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 돼지 같은 영감. 언젠가 제가 저 영감탱이의 목을 졸라 버릴 겁니다. 어찌 감히 형님께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호접화가 들고 있는 손수건은 이미 붉은 물이 다 들어서 원래부터 그 색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자희는 급히 제 손수건을 꺼내 호접화의 옆으로 갔다. 왼쪽 뺨을 누른 채로 있는 호접화의 손목을 잡고는 “좀 봐요.”라고 말하곤 기어이 그녀의 손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드러난 호접화의 뺨에 붉은 피 얼룩이 져 있긴 하지만, 아무런 상처도 없음을 확인하곤 놀라 눈을 끔벅였다.

“…….”

이만한 피가 흐를 정도라면 분명 얼굴 쪽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거라면 어떻게 호접화를 위로해야 하는 건가 싶어 오만가지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하던 참이었는데, 막상 이리도 깔끔한 뺨을 보자니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진다.

“다치지 않았다. 이건 내 피가 아니다.”

멍하니 있는 자희의 손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들고 간 호접화는 그걸로 뺨을 닦아 냈다. 피에 절은 손수건은 어느새 상 아래에 놓여 있었다.

물을 적셔서 깔끔하게 뺨을 닦아 낸 후, 호접화는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마 방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밖에 서 있기만 하는 기생들을 확인한 그녀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한다.

“다들 험한 일을 당해서 많이 놀랐을 거다. 오늘은 더 이상 손님을 받지 말고 마무리를 하자꾸나. 일찍 들어가서 쉬도록 해라.”

호접화의 말에 머뭇거리던 기생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개중엔 고맙다 인사를 하거나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인사를 하나하나 받으면서 호접화는 여전히 멍청한 얼굴로 앉아 있는 자희를 돌아봤다.

“너도 이만 들어가 봐라.”

그 말에 눈을 끔벅인 자희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형님이 여기에 계신데 어찌 저 혼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난 잠시 혼자서 생각할 게 있다. 그러니 혼자 있게 해 주렴.”

호접화가 저리 말하는데 그 앞에다 대고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망설여지면서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자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접화가 염려되는지 몇 번이나 그녀를 돌아보던 자희는 열린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조용히 문이 닫히고, 호접화는 홀로 방 안에 남게 되었다.

자희가 건넨 손수건을 상 한쪽에 올려 둔 그녀는 멀쩡한 잔을 제 앞에 놓고는 술을 가득 따랐다. 술이 찰랑이는 잔을 들고 입술 앞에 대어 한 모금 맛을 본다.

그러곤 깨끗하게 잔을 비운 후 눈을 내리뜬 호접화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굳은 표정으로 있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닫혀 있는 문 앞에 서 있는 사내를 확인하곤 눈을 가늘게 휘었다.

“문이 열려 있기는 하지만, 오늘은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습니다.”

미소 지은 채로 건네는 말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내, 화소군 또한 웃음으로 답했다.

“나도 들어서 알고 있네. 하지만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도 처량해 보이니 모르는 척 넘어갈 수가 없군.”

그리 말한 화소군이 발을 뗀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를 좇아 눈을 움직이기는 해도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는 호접화 앞으로, 화소군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화소군은 호접화의 얼굴을 살피다가 눈을 내리떴다. 바닥엔 아직 치우지 못한 핏방울이 두어 개 남아 있었다.

“다친 건가?”

“늙은 손님께서 헛손질을 해서 제 살을 베시더군요. 그래서 묻은 것뿐입니다.”

“자네가 고생이 많군. 원래는 그런 일을 당할 필요가 없는 사람인데.”

안타까워하며 혀를 차는 화소군의 모습에 호접화는 눈을 내리뜨며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속삭였다.

“원초혜, 라는 이름의 소저를 아는가.”

눈을 내리뜬 호접화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눈동자도 떨리지 않았고, 동요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상에 한쪽 팔꿈치를 올린 화소군은 느긋한 모습이었다. 그것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호접화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제 이름입니다.”

그녀의 대답이 의외였던 듯, 화소군은 바로 한쪽 눈썹을 올렸다.

“바로 인정할 줄은 몰랐네.”

“제 이름이니 인정하고 안 하고가 어디에 있습니까. 태어날 때 붙여진 이름은 죽는 순간까지 꼬리표처럼 남는 것을요.”

“그래. 그렇지. 하지만 놀랐네. 이름이 정말 귀여워서 말이야. 호접화인 그대를 초혜라고 부르기에는 망설여진단 말이야.”

“그러면 부르지 마십시오. 아무나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이름입니다.”

웃음 띤 얼굴로 나긋나긋하게 말하지만, 그 속에 담긴 기운은 차디찼다. 하지만 화소군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척을 하면서 다른 말을 꺼냈다.

“알아보다가 재미있는 사실도 알게 되었네. 자네 집안에서는 자네가 죽은 줄 알고 무덤도 만들어 줬다던데? 거기다 그 소저가 죽은 지 스무 해가 다 되어 가는 사람이라서 말이지―.”

“이름만 같은 사람인 모양입니다.”

넌지시 속을 떠보려는 말을 해도 차분하게 돌려낸다.

반박 아닌 반박을 한 후,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머금는 호접화를 바라보던 화소군이 품에서 검은 주머니를 꺼내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이걸 한번 만져 보겠나?”

이건 또 무언가 싶었던지 호접화는 눈을 내리뜨기만 할 뿐, 주머니엔 손을 대려고도 하지 않았다.

“한 번만 만져 보게.”

거듭되는 청에 호접화는 망설임 없이 주머니를 집어 들곤 매듭을 풀어, 안에 들어가 있는 걸 살폈다.

호접화가 주머니 안에서 붉은 종이를 꺼내 접혀 있던 걸 펼쳤다. 그건 부적이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재미있는 문양이로군요.”

부적을 다시 반으로 접은 후, 그걸 주머니에 넣고는 정성들여서 매듭을 짓고, 그걸 화소군 앞으로 내밀었다.

“구경 잘했습니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주머니를 만지고 있다가 거기서 손을 떼는 것까지 확인한 화소군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만만치 않은 여자야.”

감탄 섞인 중얼거림에 호접화는 무릎을 세워선 그곳에 팔을 올렸다.

“어려서부터 산전수전을 다 겪었답니다. 그런 제 마음을 얻고자 하신다면, 행수께서도 속을 드러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은 존재하질 않으니, 유감스럽게도 자네에게 줄 것도 없다네. 미안하게 되었네.”

“애초에 행수의 마음을 얻고자 이런 말을 꺼낸 건 아니니, 염려치 마십시오.”

“그러면 자네가 원하는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어여쁘신 우리 사또시던가?”

“그러는 행수께서는 사또를 어찌하고 싶으신 겁니까.”

“어찌하기는.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뿐이라네.”

“아주 예쁘고 번듯하고 불쌍한 분이십니다. 일부러 괴롭히지 마십시오.”

호접화의 지적에 화소군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내가 언제 괴롭혔다고 이러는가. 난 그런 적 없네.”

“관아에 보냈던 선물을 모조리 빼앗으셨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났습니다. 그리하시면 우리 사또의 평판이 어찌 되겠습니까. 반양의 상권을 틀어잡으신 분이 그리하시다니. 사또를 생각하는 민심이 어떻겠습니까.”

“애초에 대낮부터 자네를 찾는다는 걸로 평판이 좋지 않던 분이네. 나와의 일도 한때의 소문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뿐, 금방 사그라질 거네. 하지만 아까 이병현 대감은 그게 아니지―.”

옆으로 시선을 돌린 화소군은 모르는 체 중얼거렸다.

“언젠가 크게 일을 쳐서 사또를 정말 곤란하게 해 드릴 것 같지 않은가.”

“글쎄요. 제 보기엔 그만한 일을 칠 정도의 그릇은 못 되시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뒤에서 부추기지 않는 한은 말이지요.”

“…….”

마지막 말에 화소군의 눈동자가 호접화 쪽으로 움직인다.

동그랗고 검은 눈동자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말간 구슬 같은 눈동자에 주시되어도 호접화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고, 그 모습에 화소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간다.

“자네, 전보다 한 꺼풀 벗은 것 같군.”

“연모의 마음을 품은 여자는 독설에 능해진답니다.”

“연모라니. 지금 자네가 사또를 마음에 품고 있다 실토하는 건가. 그렇게 순순히 말해 줘도 되는 건가?”

“달콤하고 맛이 좋으니 일단은 마음에 품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을 두고 보다가 아니다 싶을 땐 뱉어야겠지요. 사또가 좋긴 하지만, 일단은 저도 살아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짐짓 놀라운 척을 하며 속을 떠보려던 화소군이나, 역시 호접화는 만만치 않았다.

시종일관 같은 모습이니 마치 판으로 찍어 낸 그림 같기도 했다.

더없이 아름다운 여자이지만, 때때로 향이 나지 않는 관상용 꽃 같기도 한 그녀를 보던 화소군이 앞으로 몸을 내밀곤 은밀히 속삭였다.

“만약에 말이네. 내가 사또께 손을 뻗는다면 자네는 어찌할 것인가.”

“제가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전 힘이 없습니다. 그저 지켜만 보겠지요.”

호접화의 대답이 성에 차지 않은 듯, 인상을 쓰던 화소군은 “뭐, 되었네.”라고 중얼거리곤 몸을 일으켰다.

“대화, 즐거웠네. 다음에 또 봅세.”

뒷짐을 진 화소군은 한 번도 되돌아보는 일 없이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순간에 맞춰서 호접화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손을 뻗기 전에, 호랑이에게 물려 온몸이 너덜너덜해지게 될 터인데…….”

하지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을 거다.

호접화는 앞에 놓인 빈 잔을 바라보다가 오른손을 들었다. 조금 전 화소군이 건넨 걸 만지던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여 보다가 몸을 일으킨 그녀는 방을 나섰다.

좁은 복도를 지나쳐 바깥으로 나오자 저기, 대청 끝자락 기둥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인이 보였다. 한눈에 보고도 그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던 호접화는 바로 그리로 갔다.

자희는 다가와서 옆에 서는 호접화를 보곤 가볍게 웃다가 말았다. 바로 표정을 지우고는 힘없이 눈을 내리뜨는 자희를 두고, 호접화가 물었다.

“여기서 무얼 하느냐.”

“들어가려다가 바람이 시원해서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었다. 이런 날은 바깥에 있을 게 아니라 방 안에 얌전히 앉아 있는 게 상책이었다.

자희는 허벅지에 올린 손을 들었다 놓았다. 몇 번이나 머뭇거리던 그녀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다음에 그런 일이 생기면 피하십시오. 만약 형님께 무슨 일이 생기거나 잘못되시기라도 한다면 그땐 전 대체 누구를 의지해야 한단 말입니까……. 제가 지금 사또를 연모하긴 하지만, 그래도 형님이 더 중요합니다. 사또보단 형님이, 그러니까―.”

말을 하다 말고 자희는 기분이 울적해졌다.

횡설수설 이상한 말을 했구나 싶어 입을 다물자 자희의 어깨 위로 호접화의 손이 내려앉는다. 가볍게 쓰다듬는 손길에 자희가 고개를 들자 호접화가 물었다.

“사또를 마음에 품고 있었던 거냐.”

“……어리석은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태어나 자라는 동안 그처럼 아름다운 사내는 처음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기생인 저희들을 편하게 대해 주신 유일한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 사람이다 보니 좋아하게 되었다. 동시에 저런 남자가 되어야 호접화를 행복하게 해 줄 것 같았다.

그저 손에 닿을 수 없는 높은 존재를 바라보듯 명월을 속에만 품고 있었다. 몇 번 속없이 그런 속내를 드러내긴 했어도 명월은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농으로나마 주고받으면서 지내고 싶은 게 자희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사또를 품고 있던 그 마음은 이만 정리하도록 해라.”

“…….”

역시나 그런 것이로구나.

자희는 떨면서 양손으로 입술을 눌렀다.

“하긴 사또는 형님의 사람이시니 제가 넘보는 게 말도 안 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분은 이미 임자가 있는 분이시다. 그건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지.”

호접화의 말에 정말 놀란 자희는 눈을 크게 뜬 채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임자 있는 존재를 욕심내선 좋을 게 없단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그 마음, 정리하도록 해라.”

“……형님. 힘들 것 같습니다.”

기생이 된 이후로 사내를 진심으로 마음에 품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명월은 그런 노력이 부질없도록 만드는 존재였다.

손에 넣을 수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바라보던 이를 정리하라니.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힘든 일이었다.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은 자희가 흐느껴 우는 동안, 호접화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 * *

검은 가면을 눌러쓴 독각귀가 나타나 제 아이를 부탁한다 말했을 때, 백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원래 이곳에 터를 잡을 생각은 없었으나 저 독각귀하고 얽히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발이 묶여 버리게 된 상태였다.

딱히 그것에 대한 불만은 없어도 마음속으로는 ‘저놈 때문에 여기에 눌어붙게 생겼다.’라고 생각하는 게 있었기에 그를 곱게 볼 수 없었다.

그리 썩 좋지 않은 백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독각귀가 재차 말했다.

‘부탁한다. 이 말을 할 존재가 너 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런 거라면 애초에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백호는 옆으로 눈동자를 옮겼다. 독각귀의 등에 업혀 있는 건 잠이 든 사내였다.

몸집이 작은 사내는 푹 숙인 얼굴을 독각귀의 어깨에 의지하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저런 몰골이라니. 금방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뭐하러 저런 성가신 걸 등에 업고 다닌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혀를 차는 순간 독각귀의 눈으로 힘이 들어간다.

혀를 찬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고 많은 상대 중에서 왜 하필 인간인가. 인간과 이어져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자연스럽게 표정이 굳어지는 백호였으나, 독각귀는 재차 부탁하겠네―라는 말을 남기고 그대로 사라졌다.

그렇게 독각귀가 사라지고 난 후, 백호는 그의 말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애초에 놈이 말하기 전에 어떤 단서를 붙였던 거다.

이쪽이 먼저 찾아가 아이를 보살펴 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만약 아이가 자신의 영역을 찾아와 준다면 그때 부탁하겠노라고.

좁은 땅덩이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존재를 우연으로 만나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독각귀의 아이를 다시 만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설령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다 쳐도 몇 번 살펴보고 말 셈이었다.

그렇게 잊고선 자신의 영역 안에서의 삶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독각귀가 찾아왔다.

전과 다름이 없는 모습이지만, 눈빛은 달랐다. 검게 죽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백호는 그 인간의 죽음을 깨달았다.

독각귀와 안면이 있기는 하나 친우는 아니었다. 상대에게 깊은 절망과 슬픔을 안겨 준 일을 가지고 위로해 주거나 달랠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술 한 잔 정도는 제공해 줄 수 있었다. 예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백호는 안으로 들어오라 했다.

거추장스러운 듯 손짓을 하곤 먼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뒤따르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놈이 뭐하는 건가 싶었던 백호는 인상을 쓴 채로 뒤를 돌아봤다.

여전히 서 있기만 하는 독각귀는 마치 장승같았다. 저승문을 지키는 아귀 장승 말이다.

백호는 재차 독각귀 쪽으로 몸을 틀었다. 놈이 별 생각 없이 자신을 찾아온 건 아닐 거다. 할 말이 있거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던 걸지도 모르지.

그 순간 떠오르는 건 저 녀석이 한 말이었다.

아이를 부탁하겠네.

내내 잊고 있었던 그걸 떠올린 백호가 아―하고 입을 벌리는 것과 동시에 독각귀가 사라졌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다는 양, 텅 비어진 자리를 확인한 백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기분 나쁘게 왜 갑자기 나타나고 바로 사라지는 거야.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하란 말이야.

끌끌, 하고 혀를 찬 백호는 안으로 들어가 하얀 호랑이 가죽을 챙겨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얼른 해치우자 싶었다.

저 독각귀 놈이 괜히 찾아온 건 아니고, 분명 아이 때문에 온 것일 터였다. 본인을 대신 해서 아이가 잘 살고 있는지를 확인해 주었으면 싶은 거겠지.

원래 약속은 아이가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 그때 보살펴 주면 되는 거였다. 자신이 영역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가라는 법은 없었다.

굳이 찾아가지 않고 자리에 버티고 있는다 한들 뭐라 할 사람은 없겠지만, 괜히 마음에 걸렸다. 하여튼 성가시게 하는 놈이라며 백호는 한달음에 아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 축을 담당해서 그곳에서 사는 인간들을 보살피고 있으나 그들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준다거나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기만 하면 되는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자신을 본 그 구역에 있던 자들은 이를 드러내며 덤벼들기 일쑤였다.

저들이 보기에 자신의 존재는 특이하고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과 똑같지 않은 건 적이고, 그건 전부 다 공격 대상이 될 따름이었다. 그래서 덤비는 이들을 두고 백호는 ‘이러저러해서 이곳을 찾게 되었다.’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덤비면 해치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딴에는 최선을 다해서 덤비는 놈들이건만, 백호가 보기엔 우스웠다.

가볍게 코웃음을 친 백호는 몇 번 손짓을 하는 것만으로 덤비는 놈들을 전부 쓰러뜨렸다. 혹은 죽였다.

개중에는 근처에서 영물로 통하는 것들도 더러 있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하나가 사라지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다른 하나가 탄생하기 마련이었다.

덤벼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구분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몸부터 움직이는 놈들은 없어져도 된다면서 백호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도성 부근에 다다랐을 때, 하나의 문제가 발생 했다. 그 아이의 이름을 듣지 못했던 거다.

가장 기본적인 실수를 한 것에 백호는 당장 제 머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성가신 일은 싫으니까 아이를 찾아가 잘 지내고 있는지만 확인하고 바로 돌아갈 셈이었다. 그런데 이리되면 그 계획이 틀어진다.

독각귀가 이럴 때 다시 나타날 리는 없고, 냄새를 맡아 봐야 하는 걸까. 정말 성가시다면서 혀를 찬 백호는 팔짱을 낀 채로 너른 바위 위에 주저앉았다. 팔짱을 낀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눈을 감고 예전 독각귀의 등에 업혀 있던 인간의 냄새를 떠올려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기억이 나는 건 하얗게 질린 얼굴뿐이었다.

분명 오래 살지 못할 냄새였다. 그걸 독각귀도 알고 있었을 거다.

인간은 그들과 달리 건강하지도 못하고, 영원을 살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그놈은 인간을 선택한 것일까. 갑자기 인간이 눈에 들어왔던 걸까.

그 녀석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해도, 누군가를 마음에 품어서 자신의 평판을 지저분하게 만들 만한 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하는 동안 바스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늦은 시간에 숲 속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산짐승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리로 달려오는 이 느낌은 인간의 것이었다.

늦은 시간에 이런 곳까지 들어오는 인간이 있었단 말인가. 의외다 싶었던 백호가 눈을 떠 아래를 살펴봤다. 근처 바위 아래에 한 아이가 쪼그리고 앉았다.

잔뜩 몸을 웅크린 채로 무릎을 끌어안는 아이는 얼굴이 희고 뺨이 통통했다. 눈썹은 반달마냥 시원하게 휘어졌고, 큰 눈에 긴 쌍꺼풀을 지니고 있었다.

오뚝하고 귀여운 코에 앙 다문 붉은 입술을 지닌 아이는 심통 난 얼굴이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정면을 노려보나 싶더니 뒤를 돌아보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그게 좋은 말처럼 들리진 않았다.

망할 놈들, 재수 없기는, 나중에 두고 보자―대충 그런 식의 말인 것 같았다.

불만 가득한 그 얼굴이 어디선가 본 적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낯설지가 않았다.

지금 이곳에 온 건 거의 처음이라 할 수 있는데 왜 저 아이를 보고 낯익은 느낌이 드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면서 눈을 가늘게 뜨는 백호의 귀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위쪽에서 들리는 건 어린애의 음성이었다. 원래 어린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던 백호의 얼굴이 바로 일그러진다. 그가 자리를 피하려 하는 순간 아이들의 목소리가 재차 들렸다.

“명월이 이 자식은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거야?”

그 순간 백호 아래쪽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아이가 더 세게 제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러는 동안 위에서는 이런저런 말들이 들려왔다.

“―그 녀석은 이상한 놈이란 말이야.”

“혼자 하늘을 올려다보기에 뭘 하는 거냐고 했더니, 저기 있는 새가 예쁘지 않느냐고 묻는 거야. 근데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어.”

“갑자기 호수 쪽으로 내려가기에 왜 그러냐고 했더니 누가 부른다고 하잖아. 아무도 없는 곳인데.”

수군거리는 목소리 안쪽에 서려 있는 건 호기심과 두려움이었다. 명월이라는 아이가 저들과 다르기 때문에 배척하는 거였다.

그제야 백호는 자신이 찾고자 하는 아이가 명월이라는 이름을 지녔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는 아까와는 다른 눈으로 명월을 보게 되었다. 여전히 경직되어 있는 명월의 얼굴에서 그동안의 고생이 읽혀졌다.

그래. 독각귀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평범하게 살기는 힘들었을 터였다. 그래도 인간들 사이에서 살게 되는 이상, 튀지 않게 잘 자랐으면 싶었던 게 독각귀의 마음이었을 텐데 그리되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 어리기 때문일 거다. 어른이 되면 처세술이 생길 터였다. 그때부터는 저 어린것도 알아서 보여도 안 보이는 척, 들려도 안 들리는 척을 하게 될 거다.

위쪽에 몰려 있는 아이들이 명월을 찾으려 하는 동안에도 명월은 같은 자세로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있으면 아이들이 알아서 자리를 피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거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닐 테니까.

실제로 아이들이 물러나고 난 후, 명월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엉망이 된 옷과 머리를 손으로 두어 번 두드리는 것으로 정리한 아이가 위로 올라간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백호가 뒤를 쫓았다.

적당한 간격을 벌린 채로 아이를 쫓아갔다. 그리고 아이가 다리를 건너서 뜀박질을 하는 걸 보곤 멈추어 섰다.

어리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충이 많은 것 같긴 하지만, 이건 저 아이가 인간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하나의 관문이었다.

고작 이런 것에 좌절하고 무릎을 꿇는다면 앞으로는 무엇을 해도 안 될 거다. 그 독각귀의 피를 이어받았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직접 보기 전에는 성가시다고만 생각했거늘 지금은 묘하게 눈에 밟힌다. 아이가 사라진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백호는 몸을 돌렸다. 발걸음이 무거운 것 같지만, 느낌 탓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다시 제 영역으로 돌아온 백호는 평소와 같은 생활을 시작했다.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내려가긴 해도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어떤 힘을 발현하지 않았다. 그가 그 땅에서 해야 할 일은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그 안에서 어떤 사건 사고가 생긴다 한들 백호는 손을 쓰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귀물 놈들이 영역을 더럽힌 거라면 모르겠지만, 그것들은 인간들이 먼저 불러낸 거였다. 우매한 인간이 당장의 재물에 눈이 멀어서 위험한 것들을 불러들인 거다.

인간들에 의해서 벌어진 일은 손을 쓰지 않는다.

그렇게 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호는 계속 조용히 있었다. 물론, 덤비는 놈들의 경우에는 가볍게 손을 봐주긴 했지만서도―.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어느 날 갑자기 코끝을 스치는 향긋한 냄새를 맡게 된 백호는 종종 뒤를 돌아봤다.

일이 있어서 인간들이 사는 곳에 내려가 있을 때나, 숲 속에 혼자 있을 때에도 뒤를 돌아보곤 했다. 갑작스럽게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게 주변에 어떤 게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던 거다.

가만히 있다가도 갑자기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고는 하는 백호의 행동에 호접화나, 꼽추, 그리고 돼지 고양이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곤 했다. 그러나 백호는 인상을 쓰는 것으로 ‘날 쳐다보지 마.’라는 의사를 표현했다.

나중에는 제 몸에서 이런 좋은 냄새가 나는 건가 싶어서 옷을 끌어서 그곳에 코를 대 보기도 했지만 아니었다. 이상하다면서 고개를 갸웃하던 백호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깥에 나가서 이런저런 일을 하고 다시 돌아왔을 때, 인간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건 대체 무언가. 웬 놈들이 겁도 없이 감히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건가.

생각은 그리해도 진짜 인간이 찾아오면 손을 대진 않았다. 그저 싫은 내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따름이었다.

그리고 창고 안으로 들어선 백호는 뒷짐을 진 채로, 호랑이 가죽 앞에 서 있는 이를 발견했다.

알록달록한 구군복을 입은 날씬한 체형을 지닌 사내였다. 그자를 보는 순간 백호는 작게 숨을 삼켰다.

그러다가 그런 자신의 반응이 낯설고 이상하게 여겨져서 바로 미간 사이로 주름을 만든다.

마음에 들지 않아 굳은 얼굴을 하는 동안 앞에 서 있던 인간이 느리게 몸을 돌렸다.

천천히 몸을 돌리던 자는 백호를 보고는 움찔했다. 정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채로 바라보는 사내를 확인한 백호의 미간으로 재차 주름이 잡힌다.

저놈이 왜 이곳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백호는 여전히 뚱한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은 얼굴로 백호는 명월을 바라봤다. 백호는 우선 몸을 돌려 탁자가 있는 안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더 짙어지는 향을 느끼면서 백호는 뒷목이 빳빳해졌다.

묘한 긴장이 전신을 스쳐 지나간다. 이 감각은 대체 무얼까. 알 수 없는 느낌에 의아함을 품을 새도 없이 명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일하는 자인가.’

그 순간 이런,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덫에 걸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백호는 명월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퉁명스럽게 굴었던 것 같다. 그건 지금 생각해도 정말로 어리석고도 멍청한 짓이었다.

명월이 돌아가고 난 후, 백호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가 이곳에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은 장인으로서 이런저런 것들을 만들고 있었다.

이번엔 특별히 관아에 놓을 의자를 주문 받았다.

문제는, 그 의자를 주문 받게 된 이유에 있었다.

간혹 속이 시끄럽거나 생각할 게 있으면 지붕으로 올라가 앉는 백호였다.

지금은 뭔가 고민이 되는 건 아니라도 생각할 게 있어서 그 위에 걸터앉아 있는데 얼굴로 묘한 시선이 닿는다.

그걸 느끼고 있어도 처음엔 무시할 요량으로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계속 모르는 척을 할 수 없었던 백호의 미간으로 점점 더 주름이 잡힌다.

결국 그는 참다 못해서 눈을 내리떴다. 그곳에 보이는 건 꼽추였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그의 손에 들린 닭을 발견한 백호의 미간으로 주름이 생긴다.

‘뭐―.’

꼽추가 닭을 들고 있기는 하나 그걸 가지고 먼저 뭐라 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백호 쪽에서 먼저 예민하게 굴고 만다.

퉁명스러운 어조로 뭐, 라고 묻는 순간 꼽추가 말없이 닭을 위로 스윽 들었다. 그 무언의 행동에 움찔하게 된 백호는 허벅지 위에 올린 손을 움켜쥐었다.

‘지금 뭘 하는 거냐. 왜 그런 걸 내밀고 있는 거야?’

그런 걸 내밀고 있으면 자신이 어떤 반응을 취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서 백숙이나 해 오라고 하려는데 꼽추 노인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원래 저런 눈매라는 걸 알고는 있는데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너 계속 그 모양으로 나올 거냐.’ 그리 말하고픈 얼굴로 있는 것에 결국 백호가 쪽에서 먼저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곤 모르는 체하는 모습에 꼽추는 그제야 시선을 뗐다. 닭을 든 채로 안쪽으로 들어가는 꼽추와 동시에 백호는 혀를 찼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할 것 없이 쓸데없이―.

하지만 여기서 가장 쓸데없는 짓을 한 건 바로 자신이었다.

코끝을 스치던 달콤한 향. 처음 그 냄새를 맡았을 때 ‘이건 뭐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저 단순히 모르는 척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어젯밤 백호는 뭔가에 쓰인 듯 움직였다. 뒤쪽, 멀찍한 곳에 떨어져 있는 닭장에서 닭 하나를 꺼내서 관아로 들어갔던 거다. 그곳에 닭의 피를 뿌리고 닭을 올려 두고 그냥 돌아오면 되었을 것을, 놈의 방을 찾아갔다.

똑바로 자세로 잠든 녀석, 명월의 머리맡에 백호는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곳에 서 있는 동안 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 어린애가 이렇게 자랐구나. 그런 생각과 동시에 다른 느낌이 전해졌다.

그게 무언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고 있는다 해서 마음 깊숙한 곳에 새겨진 것들마저 지워지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영역 안에 나타나면 그때는 보호를 해 주겠다고 독각귀와 약속했다.

하지만 어쩌면 자신은, 그런 것 말고도 다른 이유 때문이라도 명월을 지켜 줘야만 했던 걸지도 모른다.

* * *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맞춰서 백호는 눈을 떴다. 보이는 건 어둠이었지만, 거기서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품에 안겨 있는 명월이 있었다.

팔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잠이 든 명월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다가 뺨에 손을 대곤 그 주변을 더듬다가 눈가를 어루만졌다.

눈 아래쪽이 발긋하게 물이 들어 있었다. 지나치게 울린 모양이었다. 일부러 그럴 셈은 아니었지만…….

가볍게 생각하고 말 셈이었는데 왜 쑥스러운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헛기침을 한 백호는 재차 명월의 등에 팔을 내리곤 그 몸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품에 안은 채로 등을 토닥이다가 그의 정수리 쪽으로 고개를 숙인다. 명월의 머리 부분에 코를 대고 있다가 냄새를 맡았다.

분명 땀 냄새와 비슷한 게 나야 할 텐데, 지금도 향긋한 냄새가 난다. 꽃처럼 말이다. 그런 냄새가 난다고 느끼는 자신이 이상한 건 아닐 터였다.

조금 더 집중해서 냄새를 맡나 싶던 백호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명월에게 밀착하려 했다.

이번은 전하고 느낌이 달랐다. 행위 자체는 비슷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조금 더 느껴졌다고 할까나.

단단하게 이어져 있는 끈끈한 느낌이 들면서, 육체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정신적으로도 얽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것 또한 자신만 느낀 게 아닐 테지만, 아침이 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명월 이 녀석은 서투르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모든 것들이 잠들고 조용해진 곳. 들리는 건 명월의 호흡과 심장이 뛰는 소리였다.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낀다. 이 정도로 안심이 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편안해진 백호는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유명월.”

입에 착착 달라붙는 이름이었다.

“명월.”

이름은 대체 누가 지은 걸까. 얼굴이 이런데 이름까지 그 모양이니 어렸을 때 참으로 고생이 많았을 거다. 실제로도 그랬지.

예전 어린 명월을 봤을 때의 기억을 더듬던 백호는 혀를 찼다.

그때 위에서 명월에 대해서 주절거리던 놈들을 가볍게 손봐주는 거였는데 그러지 못한 게 새삼스레 후회가 된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백호는 입맛이 써진다.

이런 생각까지 하다니. 자신이 이상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애초에 이런 감정이 생기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었을 텐데―.

하지만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것들은 자신이 어찌한다고 해서 변하거나 바뀌는 게 아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리되기로 정해졌던 걸지도 모르지. 그렇기 때문에 독각귀를 만나게 되어서…….

그 순간 백호의 눈동자 안쪽으로 힘이 들어갔다.

“…….”

잠시 명월에게 혼이 팔려서 깜박하고 있던 거였다.

그래. 독각귀. 그놈이 남아 있었다. 그 녀석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건 아닐 거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지금 이 순간 나타난 건 암만 생각해 봐도 이상했다.

더군다나 자신을 바라보거나 대하던 때의 그 눈빛이나 태도가 영 거슬렸다.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괜한 생각이었으면 좋겠지만, 만약 아닌 거라면―.

거기까지 생각하던 백호의 코끝이 씰룩거린다.

여전히 명월을 품에 안은 채로 있던 그는 고개를 들고는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이윽고 안색을 굳힌 그는 혀를 찼다.

“웬 잡놈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 나타나서 이 좋은 시간을 방해하는 건지 모르겠다. 스스로는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생각하겠지만, 백호의 귀에는 무척 크게 들렸다.

정말은 명월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으나 이런 소리가 들리는데도 마냥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상태의 명월을 확인한 백호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가만히 있으면 저놈들이 더 성가시게 굴 거다. 원래 문제가 생기기 전에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게 방법이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백호는 명월의 베개 노릇을 해 주던 팔을 조심스레 빼내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명월이 신음을 흘리면서 조금 움직인다.

이불 바깥으로 나온 백호는 그런 움직임에 놀라서 쪼그리고 앉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몸을 움직이려다가 아팠는지 인상을 쓴 명월이 재차 원래의 자세로 돌아왔다. 호흡이 점점 깊어지는 걸 확인한 백호는 아래로 손을 뻗었다.

이불을 잡아선 위로 들어 명월의 어깨에 덮어 주는 것에 성공한 백호는 뒤로 손을 뻗어서 그곳에 널브러져 있던 바지를 집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에 제 다리를 꿰어 넣는 동안에도 백호의 눈은 명월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 * *

감옥 입구에 짧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자는 잔뜩 몸을 웅크린 채로 덜덜 떨고 있었다.

일을 하는 동안에도 수십 번씩 하는 생각은 ‘이래도 정말 괜찮은 걸까.’ 하는 것뿐이었다.

만약에라도 이번 일이 잘못된다면 어쩌나 싶었던 이는 미친 듯이 쿵덕거리고 뛰는 제 심장에 한 손을 올린 채로 뒤를 살폈다.

보이는 건 그 자리에 고꾸라져 졸고 있는 포졸 둘이었다. 감옥을 지키는 그들은 물론이거니와 안쪽에 있던 이들까지 모두가 그런 식으로 쓰러져 졸고 있었다.

지금 이게 가능했던 건 전부 제 손에 들린 붉은 주머니에 들어 있던 가루 덕분이었다. 그런 효과가 있다는 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정말 대단했다.

쓰러진 저들이 죽은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른침을 삼킨 사내는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감옥 안에 들어가 있는 사내들도 모두 쓰러져서 자고 있을 거다. 그 누구도 이 가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미리 해독제를 먹은 자신만이 멀쩡했다.

일이 이렇게 길게 지속될 줄은 몰랐다. 그냥 한 번만 하면 그걸로 마무리 지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일이 자꾸만 꼬였다.

역시나 이번에 새로 부임한 사또는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면서 그는 쓰러진 포졸의 옆구리를 더듬었다. 손가락 끝에 걸리는 열쇠를 빼내선 그걸 가슴 앞에 댄 채로 주변을 살폈다.

깨어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이러다간 언젠가 자신이 먼저 심장이 멈춰 서 죽게 생겼다면서 그는 느리게 일어나서 가장 앞에 있던 감옥 앞에 섰다.

보이는 건 잠들어 있는 사내였다. 그런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전부를 그가 처리해야만 했다.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킨 그는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든 이를 처리하는 건 어린애 손목을 비트는 것보다 수월한 일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해야만 했다. 자신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고 그가 생각하게 되면 낭패였다. 그가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말고도 얼마든지 있었다.

사내는 덜덜 떨리는 손을 앞으로 뻗어선 쓰러진 자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레 맥을 짚어 본 후에 심호흡을 한 그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날이 꽤나 예리하다.

본인 손에 들린 단검이 왜 이리도 무시무시하게 여겨지는지.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던져 버리고 싶을 따름이지만, 정말 그리할 수 없었다.

눈 감았다가 뜨면 끝날 일이었다. 그러니 더는 시간을 끌지 말자면서 이를 악문 사내는 급히 한쪽 손을 높이 들었다. 그때 바로 옆에서 신음이 들렸다.

“……지금 대체 무얼 하는 게요.”

가느다란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사내는 들고 있던 단검을 떨어뜨리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말 놀란 듯 눈을 부릅뜬 사내는 오른쪽 감옥 안을 살폈다. 그곳에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린 한 사내가 보였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아도 가까스로 정신의 끈을 부여잡고 있던 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요. 지금…… 우리를 죽이겠다는 거요.”

“이, 이, 이놈이 왜 아직도―.”

“다들 똑같은, 입장인데 왜 우리를…….”

중얼거리는 사내가 기침을 하자 그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린다. 이러다가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다른 사람이 알게 생겼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저놈을 먼저 처리하자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감옥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곤 기겁을 하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처음 보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늘 새벽에도 마주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던 사내는 벌벌 떨다가 단검을 떨어뜨렸다.

“아, 아니. 그게 말입니다. 저는, 그러니까―.”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 횡설수설을 하면서 사내는 계속 뒤로 물러났다. 필사적으로 피해 보려 하지만, 그래 봤자 아주 조금만 움직여질 뿐이었다.

결국 더는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던 이는 주저앉은 채로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면서 검은 그림자를 올려다봤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다가오는 걸 보면서도 사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허리를 숙여선 바닥에 떨어져 있던 단검을 집어 들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아직 주머니 속의 가루가 남아 있었다. 그걸 전부 다 사용하면 저 괴물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사내는 급히 품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허튼 짓 하면 그땐 네놈의 목을 뽑아서 아이들이 공놀이하는 곳에다가 던져 주마.”

“……히익!”

목을 뽑다니. 공놀이를 하는 곳에다가 던져 주다니.

듣기만 해도 끔찍한 소리였다. 사내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소리를 쳤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도 시키는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시키는 일이라면 사람도 죽이는 것이더냐.”

차분하게 물으면서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부족해서 몸까지 숙여 오자 사내는 소리를 지르며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었다.

얼굴을 묻은 손바닥 안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가랑이 사이가 뜨끈한 걸 보니 오줌도 지린 것 같았다. 꼴사나운 모습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내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두려웠다.

“호방. 백전춘.”

“…….”

나직한 부름에 맞춰서 사내, 호방은 떠는 걸 멈추었다.

어찌 자신의 이름을 아는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 나타난 자가 자신을 알고 있는 자인 건가.

손을 내려서 상대의 얼굴을 확인해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으면서도 너무 두려워서 그리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로 큰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는데 사내가 재차 물었다.

“네놈에게 이 짓을 시킨 건 화소군일 테고. 그렇지 않은가?”

“……아닙니다.”

아니라 말하려는데 목구멍 안쪽이 꽉 졸려서 목소리가 이상하게 흘러나왔다.

호방은 울고 싶어졌다. 대체 누구기에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인가.

호방은 덜덜 떨면서 재차 아닙니다, 라고 중얼거렸으나 그건 거의 우는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런 자신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호방은 아랫입술을 깨물었고 꺽꺽, 거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울지 마라. 네놈의 우는 소리가 참으로 듣기 거슬리는군. 입을 꿰매 버리기 전에 소리를 죽이거라.”

지금 이 사내라면 정말로 입을 꿰매고도 남았다. 호방은 필사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소리를 죽이려 했고, 그러는 동안 사내, 백호가 재차 물었다.

“이자들을 다 죽이고 난 후에는, 그 다음으로는 무얼 하라고 하더냐.”

“아, 아닙니다.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전 아는 게 없습니다.”

“네놈이 무슨 말을 해도 내가 가만히 있는다면 화소군 그놈의 귀에 들어갈 리는 없으니 안심하고 솔직하게 말해 봐라.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거짓을 말한다면 네놈은 정말로 죽게 될 거다.”

“…….”

“귀물에 홀려서 죽은 것들은 원한이 깊어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라도 될 수 있겠지만, 내게 죽임을 당하면 그대로 소멸이다. 환생도 없다. 영원한 죽음을 원한다면 어디 계속 날 지루하게 해 보거라.”

구천을 떠도는 것보다야 그냥 소멸되는 게 더 좋은 게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던 호방은 숨을 삼켰다.

사람은 지나친 공포를 느끼게 되면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지는 모양이었다. 그건 아마도 뭘 어떻게 해도 결국에는 죽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일 거다.

이자에게 모든 걸 발설한 후, 그가 입을 무겁게 한다 해도 그걸 모를 화소군이 아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화소군의 귀에 이 사실이 들어가게 될 테고, 자신은 파리 목숨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면 여기서 죽는다. 뭘 해도 죽는다면, 그런 거라면―.

“여기에 있는 자들을 죽이면 실수를 한 걸 용서해 주겠다 하셨습니다.”

“여기에 있는 자들을 죽이는 걸로 화소군의 용서를 받는다면, 사또에겐 어떤 식으로 사죄를 할 셈이었더냐. 감옥 안에 모두가 죽어 나간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옆에 있을 셈이었더냐.”

“……그렇습니다.”

포기를 하자 의외로 말이 쉽게 흘러나온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사람을 죽이고 그걸 모르는 척할 셈이었다니.

전부터 사람을 죽여 본 것도 아니고,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까지 되어 버린 걸까. 대체 언제부터 자신은 이런 괴물이 되었던 걸까.

생각을 해 봐도 잘 모르겠다. 머리가 멍해진다. 눈을 반쯤 뜬 채로 가만히 있으려니 앞이 조용했다.

혹시 솔직하게 모든 걸 말해 줘서 돌아간 게 아닐까. 그런 기대를 품고 손을 내렸을 때 호방은 바로 후회했다. 보이는 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두 개의 눈동자였다.

분명히 검은 눈동자인데도 왜 이렇게 잘 보이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마치 깊은 숲 속에서 위험한 맹수와 마주친 듯한 느낌이라면서 호방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몸을 덜덜 떨었다.

“화소군이라는 놈이 관아에 끼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 거냐.”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너 같은 놈이 이 관아 안에 얼마나 있느냐는 거다.”

자신과 같은 입장의 사람을 전부 다 골라낼 셈이던가.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호방은 고개를 저었다.

“돈과 사람만 쓰면 얼마든지 매수할 수 있을 겁니다. 이 땅에서 행수의 말을 따르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고 싶지 않아도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습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어느 날 갑자기 죽게 될 테니까요―.”

“그렇다면 네놈도 그런 식으로 매수가 된 것이더냐.”

“처, 처음에는 돈 몇 푼에 행수의 말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약점이 잡히게 되어서, 그때부터는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겁니다. 저도 사또를 배신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하지만 사또와 달리 전 이 땅에서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해야만 하는 제 마음도 무척 괴롭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내가 왜 네놈의 처지를 이해해야 하는 거냐. 네놈이 지금 하려는 짓만 봐도 열 받아 죽겠는데.”

그리 말을 함과 동시에 백호는 단검을 호방의 다리 사이에 내리꽂았다. 고간 바로 앞에 꽂히는 단검과 동시에 호방은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던 그는 넘어감과 동시에 다시 일어나선 히이익,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눈을 크게 뜬 채로 제 다리 사이를 확인했다.

아까는 소변을 찔끔 지린 것뿐이었지만, 이번에는 한강이 될 정도로 싸 버렸다. 가랑이가 축축하다 못해서 찜찜한 느낌에 호방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상태가 되어선 백호를 바라봤다.

“왜, 왜 이러십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네놈이 왜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네놈 살자고 다른 사람을 죽이려 했던 네놈이다. 이래서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거라는 말이 있는 거지.”

백호는 눈을 내리떴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호방은 더는 크게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는 생각에 아주 조금 용감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두려운 존재였다. 인간이 아니었다.

그제야 호방은 지금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큰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하는 호방의 얼굴은 하얗게 질린 채였다.

사람을 죽이려 한 주제에 이제 와서 저런 모습이라니. 지금 보여 주는 호방의 모든 모습이 우습기만 했던 백호는 혀를 찼다. 그러다가 다시 단검에 손을 뻗었다.

“정말 성가시군.”

원래는 이런 식으로 뭔가를 해선 안 되는 거지만―.

백호가 단검을 빼드는 것과 동시에 호방은 재차 소리를 지르면서 양팔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백호가 손을 뻗어선 그런 호방의 팔을 비틀어 잡아 위로 올리자 그의 비명이 더 커졌다.

“돼지 멱따는 소리 닥치지 않으면 네놈의 팔을 뽑아 버리겠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호방이 바로 입을 다물곤 조용해진다. 두려움에 가득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 녀석을 확인한 백호는 말을 꺼냈다.

“잘 들어라―.”

* * *

시끄러운 놈을 상대했더니 기분이 언짢아진 백호는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고 다시 명월의 거처 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거처의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하얀 고양이를 확인한 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간다.

그는 그쪽으로 걸어가선 대청 가운데에 걸터앉았다. 백호의 시선이 느껴질 법도 한데 나비는 앞으로 모은 제 양손 위에 턱을 올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자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백호는 발끝으로 고양이의 토실한 엉덩이를 툭―쳤다.

그 순간 고양이가 대번에 눈을 뜨고는 미간으로 짙은 주름을 만든다. 인상을 팍 쓴 고양이는 마치 ‘한 번만 더 건드려 봐라.’라고 말하는 얼굴이었다.

지금 위험한 짓을 하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호는 계속해서 고양이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벌떡 일어난 고양이가 뒷발로 백호의 다리를 퍽, 하고 쳤다.

그래 봤자 짧고 투실투실한 다리였다. 말랑한 발바닥으로 쳐 봤자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반격을 하는 것 자체가 거슬렸던 백호는 대번에 제 눈썹을 올렸다.

“어럽쇼? 이놈 하는 짓 좀 보게나―.”

다른 이도 아니고 자신에게 이런 짓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이라면서 백호는 아래로 손을 뻗어선 고양이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그러자 이 고양이가 반항할 셈인지, 더 열심히 앞발과 뒷발을 움직여 댄다.

특유의 졸린 눈과 심드렁한 얼굴을 한 채로 열심히 퍼덕거리는 고양이를 두고 백호는 웃었다.

“네놈도 여기서 지내는 동안 인간들한테 꽤나 물이 들었구나.”

그 순간 열심히 퍼덕대던 나비가 행동을 멈추었다. 백호가 하는 말을 생각하는 것일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녀석이 크게 입을 벌리곤 냥―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 고양이를 바라보던 백호가 말했다.

“이곳에 있는 게 편하다면 계속 있어도 된다. 하지만 정체를 들키진 마라. 들키는 순간 네놈을 귀여워하던 인간들이 손에 칼과 밧줄을 들고 네놈을 붙잡으려 들 거다. 그리고 그땐 난 도와주지 않을 거다. 알고 있겠지?”

원래 모든 일의 선택은 본인이 결정하는 거였다. 그 선택으로 인한 결과까지 일일이 책임지지 않는다. 선택에 따른 결과는, 그걸 정한 이의 몫이었다. 고양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자신이 하는 짓을 본다면 이런 말을 자신만만하게 할 수 없는 입장이긴 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명월을 도왔던가. 그 뒤치다꺼리까지 전부 다 해 주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누군가에게 잘난 척 설교를 해선 안 되는 게 아닐까. 잠시 드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하지만 복잡한 건 지금부터 시작일지도 모른다.

백호는 나비를 단단히 붙잡고는 그에게 진지한 눈빛을 보냈다.

“네 동료들을 풀어서 이 땅에 독각귀가 보이면 바로 알려 달라 해라.”

그 순간 나비의 눈동자 안쪽이 빛난다. 독각귀인가. 바로 반응을 보이는 나비지만, 그 순간 괜한 말을 했다 싶었던 백호다.

일단 겉모습은 고양이인 이것들이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괜히 덤볐다가 오히려 호되게 당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정보 수집력은 이 녀석들이 최고인데―.

고민이 되어선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으음, 하는 소리를 내는 백호를 두고 나비가 입을 벌린다. 냥, 하고 우는 소리가 마치 비웃는 것처럼 들렸던 백호의 눈썹이 꿈틀한다.

나비를 바라보던 백호는 “건방진 놈.” 하고 중얼거리면서 바로 나비를 놓아 줬다.

날쌔게 공중제비를 돈 나비가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당장 건물 뒤쪽으로 달려간다. 원래 자던 곳으로 가는 것일 터였다. 나비가 사라진 방향을 살피던 백호는 턱에 손가락을 댄 채로 정면을 응시했다.

원래 인간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 땅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그 인간들이 끌어들인 것이다.

제 스스로 죽을 무덤을 파고들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인간들의 욕심은 추악하고 끝을 모른다. 그로 인해서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모든 것들이 빤히 보였다.

그래서 얽히기 싫었던 거다. 애초에 그들과 자신은 입장이 다르니, 손을 대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원래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리하지 않았다.

전처럼은 있을 수 없었다. 그건 지금 방 안에서 잠들어 있는 이 때문이었다.

물론,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이니 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명월에게 물릴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런 결정을 내리도록 한 녀석이 대단하다 싶었다.

백호는 눈을 감고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냄새. 그것에 굳어 있던 백호의 표정이 느슨하게 풀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