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19/32)

3장

숲 깊숙한 안쪽에 자리를 잡은 거상 화소군의 거처엔 낮과 밤이 없었다. 밤엔 주변을 밝힐 등이 훨씬 더 많이 걸린다는 것과 주변을 경계하기 위해 서 있는 무사들의 수가 더 늘어난다는 차이가 있을 따름이었다.

요 며칠 간엔 공들이는 상대가 있어서 답지 않게 주변을 한적하게 한다고 무사들을 물려 두긴 했지만, 지금은 그리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하면 되었다.

“엉망이로군.”

냉랭한 말과 동시에 탁자 앞에 앉아 있던 이의 어깨로 힘이 들어가고, 문 앞에 서 있던 검은 복면을 쓴 사내가 고개를 든다.

그의 예리한 눈동자가 안 그래도 겁을 집어먹은 사내에게 닿았다가 그 맞은편에 자리한 화소군에게 닿았다. 호랑이 가죽을 덮어 둔 커다란 의자에 앉은 화소군은 탁자에 팔꿈치를 올리곤 넌지시 물었다.

“고작 이 정도 성과분을 내게 올리는 건가. 지금 내게 장난을 하는 건가.”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게 한계였습니다. 요즘 경기가 좋지 않아서 물건도 많이 들어오지 않고, 또 그걸 사는 사람도 적어서―.”

“그건 자네가 능력이 부족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던가. 능력이 되는 자들은 변명 대신에 내가 흡족할 만한 결과를 들고 온다네. 그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죄송합니다.”

애초에 주절대면서 말을 길게 한 게 실수였던 걸지도 모른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상인이 고개를 푹 떨구는 것에 맞춰서 화소군은 탁자 가운데에 둔 책을 집어선 그 품에 던져 버렸다.

“이런 쓸데없는 건 다시 들고 돌아가게.”

사내의 품에 부딪친 책자가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아랫입술을 깨문 사내가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책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화소군에게 깊이 고개를 조아려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이미 그쪽에는 흥미가 사라진 듯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화소군의 얼굴에선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다른 열 마디 말보다 지금 저 표정이 가장 두려웠다. 자신은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그런 생각으로 인해 머릿속이 복잡해진 사내는 화소군을 바라봤다.

선처를 부탁하고 싶었으나, 그가 재차 이쪽을 바라보는 일은 없었다. 깊은 좌절감을 맛보며 어깨를 축 늘어뜨린 사내가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터덜거리면서 멀어지는 사내를 두고 화소군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나가서 차를 들고 와라.”

사내가 나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 복면을 쓴 사내가 옆쪽으로 걸어갔다. 방 한쪽에 준비된 다기에서 그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화소군은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잠을 청하는 건 아니었다. 다음으로 무얼 하면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가 갑자기 눈을 떠선 닫힌 문을 바라봤을 때, 늙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행수님. 백전춘이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라 해라.”

결과에 대해선 기대하진 않지만, 그자에겐 달리 시킨 일이 있었다. 그걸 보고하러 온 거겠지.

문이 열리고 방 안으로 들어선 호방 백전춘을 본 화소군의 눈빛이 예리하게 변했다.

탐탁지 않음이 서린 눈빛을 받은 백전춘은 움켜쥔 양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그 인사에 앞으로 몸을 내민 화소군은 탁자에 한 손을 올리곤 턱을 괴었다.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호방을 바라보는 눈빛은 매서웠다. 그러는 동안 안쪽에 들어가 있던 사내가 찻잔을 들고 나타났고, 그는 호방을 지나쳐 화소군 앞으로 갔다. 화소군 앞에 정중하게 찻잔을 내려놓은 후에 사내가 호방 쪽으로 걸어왔다.

평소 저 사내가 서 있는 자리가 문 앞이니 이리로 오는 것뿐인데도 묘하게 긴장이 된다. 사내가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는 게 그 원인 중 하나일 거다.

그저 응시해 오는 시선만으로도 고양이 앞의 쥐 같은 기분이 든 호방은 더 깊이 고개를 숙였고, 화소군이 그를 불렀다.

“거기에 가만히 서서 뭘 하는 건가. 이리 가까이 오게.”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움직이는 순간 사방에서 시선이 날아든다. 보이는 건 입구 쪽에 서 있는 사내 하나뿐이었지만, 그 외에도 더 많은 자들이 이 방 안에 숨어들어 있음을 모르진 않았다.

그들은 화소군에게 쓸데없는 짓을 하려는 자가 있거든, 당장 나타나 상대의 목을 베어 버릴 터였다. 그런 류의 위협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목 부근이 섬뜩해지면서 묘하게 차가운 기운이 흐르는 걸 느끼며 호방은 의자를 끌어 그곳에 앉았다.

고개를 숙인 호방은 쉽게 얼굴을 들지 못했고, 화소군은 말이 없었다. 그는 본인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어쩐지 호방은 더 긴장이 되어서 속이 울렁거렸다.

전에 저 잔에 담긴 차를 뒤집어쓴 적이 있었다. 얼굴에 뿌려진 차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기억하는 만큼 방심할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호방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나 호방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이른 시간이긴 했다. 하지만 일찍 왔다 해서 그가 화소군이 명한 일을 완전하게 수행한 건 아니었다.

머뭇거리던 호방은 품에 손을 넣었고, 그때 복면인이 앞으로 움직였다. 화소군이 손을 들고는 괜찮다, 라고 하지 않았으면 복면인이 빼 든 검은 진즉 호방의 목덜미에 닿았을 거다.

살기등등한 복면인의 눈치를 보면서 호방은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그걸 본 화소군의 눈썹이 가볍게 위로 올라가자 호방은 힘겹게 입꼬리를 올려 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루를 뿌리자마자 근처에 있던 자들이 모두 잠들었습니다. 정말 용한 가루였습니다.”

그 뒤를 이어서 이런저런 말을 덧붙이는 걸로 지금의 경직된 분위기를 풀 수 있을까.

그래 봤자 소용없음을 알고 있기에 호방은 바로 웃음을 지우곤 다시 긴장된 얼굴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안색을 굳힌 채로 있던 그는 재차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꺼낸 건, 화선지에 싸여진 작은 무언가였다.

“그건 뭐지?”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전해 달라고? 누가? 사또가 그리 시키시던가?”

되묻는 화소군의 목소리가 한 단계 낮아져 있었다.

네놈이 시킨 일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지금 사또에게 모든 걸 들켰단 말이더냐.

그리 묻는 듯 매섭게 변하는 눈빛에 호방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조용히 양손으로 하얀 화선지에 감싸여진 걸 가리켰다. 그러자 내내 가만히 있던 복면을 쓴 사내가 앞으로 다가와 검을 빼 들었다.

스르릉, 하고 매끄럽게 빠져나간 검이 호방의 목덜미에 닿자 그는 당장 헛숨을 삼키곤 몸에 힘을 주었다. 경직된 자세로 덜덜 떠는 호방을 노려보며 사내가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네놈이 뉘 앞에서 농간이란 말이더냐. 오래 살고 싶지 않은 것이냐.”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부탁 받은 일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부탁 받은 일이라니. 네놈이 꼬리가 밟혔다면 응당 그 자리에서 자결을 해야지, 왜 이런 쓸데없는 물건을 들고 행수님을 찾아온 거란 말이더냐. 네놈이 진정 죽고 싶은 거냐. 그걸 원하는 거라면 이 자리에서 네놈의 목을 베어 주마.”

살벌한 사내의 말과 눈빛은 진짜였다. 화소군이 그만하라고 해도 바로 검을 휘둘러서 자신의 목을 베어 버릴 것 같았으나, 그런 사내의 뒤숭숭한 협박을 받고도 호방은 잠자코 있었다.

정말로 두렵고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음에도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은 암만 봐도 이상했다.

복면인이 의아함을 드러낼 즈음 화소군이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화선지를 건드리는 순간 복면인이 그걸 만류했다.

“행수님. 기다리십시오. 이상한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만류에도 화소군은 멈추지 않았다. 화선지를 벗겨 내자 그 안에 들어가 있던 하얀 진주가 나타났다. 그 진주는 어둠 속에서 자체 발광을 하듯 은은한 빛을 흩뿌리면서 제 스스로 범상치 않은 물건임을 뽐냈다.

“…….”

그 순간만큼은 화소군도, 복면인 사내도 말이 없었다. 다만, 호방만이 겁에 질린 얼굴로 화소군의 손에 들린 물건을 바라봤다.

괴이쩍거나 이상한 게 나타난 게 아닌데도 괜히 싫었다. 그래서 크게 소리도 내지 못한 채로 잠자코 있는 그를 두고 화소군이 들고 있던 진주를 천천히 내렸다. 그 어느 때보다 굳은 얼굴이 된 화소군이 나직이 물었다.

“네가 왜 이걸 들고 나타난 것이냐. 지금 네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호방은 화소군의 손에 들린 저것의 정체가 무언지 몰랐다. 하지만 화소군은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저리도 무서운 얼굴로 닦달하는 게 아니겠는가.

호방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저, 전 그저 부탁 받은 걸 전달해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 물건을 건네라 시킨 자가 있을 거 아니냐. 사또가 보낸 것이냐.”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건―.”

그 순간 떠오르는 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던 사내의 두 눈동자였다.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존재였다. 그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던 호방은 당장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저, 그만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번에 행수께서 시킨 일은 실패했습니다. 앞으로 다른 일을 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러니 제발 그만 좀 하게 해 주십시오. 호방 노릇 안 해도 됩니다. 다른 건 바라지도 않고, 소나 키우라면 그리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만 좀 하게 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행수님, 전 당신에게 도움이라곤 털끝만큼도 안 되는 한심한 놈이란 말입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울먹거리기까지 하니, 지금 대체 뭔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호방의 얼굴은 진지했다. 제발 좀 살려 달라면서도,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한 그는 손을 싹싹 비볐다.

어느새 얼굴이 불긋하게 달아오른 그는 눈물과 콧물을 질질 흘려 대고 있었다. 꼴사나운 그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사내가 당장 호방의 팔을 붙잡았다.

행수 앞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한마디 하려는데 행수가 그리로 손을 뻗는다. 그것에 주춤한 사내는 호방에게서 손을 뗐다.

화소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호방 앞으로 걸어가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호방은 그런 화소군에게 매달리듯 바라볼 따름이었다.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떨지도 않는다. 지금 그가 공포를 느끼면서 오열을 터트리는 대상은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었다.

“지금 누굴 두려워하는 것이더냐.”

나직한 물음에 호방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입을 열었다가 다물던 그는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은 채로 오열을 터트렸다.

어린애처럼 어깨를 떨면서 흐느껴 우는 모습에 화소군은 물론이거니와 복면인 사내도 난색을 표했다.

이 미친놈이 왜 이러는 건가 싶었다. 그냥 바로 치워 버려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할 때 화소군의 손이 움직였다. 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간 호방이 옆으로 쓰러졌다.

넘어지면서도 그는 한 번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쓰러진 채로 고개만 돌려 몸을 일으키는 화소군을 올려다봤다.

“―절 두들겨 패셔도 좋습니다. 불구로 만드셔도 됩니다. 주, 죽이셔도 됩니다. 그러니 더는 아무것도 시키지 마십시오.”

“네놈을 때려 봤자 무슨 즐거움이 있겠느냐. 난 그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넌 내가 시킨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이런 물건까지 들고 왔다. 이 물건이 무엇인지 너는 알기나 하느냐.”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정신없이 고개를 젓던 호방이 몸을 일으켰다.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아선 바닥에 엎드린 그가 손을 싹싹 빌었다.

그걸 본 화소군의 입가로 뒤틀린 미소가 번졌다.

“당연히 네놈들은 모르는 것이다. 이 귀한 물건의 가치를 네놈이 알 리가 없지. 하지만 이 물건을 건넨 자는 알고 있을 거다.”

화소군은 몇 번이나 진주를 건넨 자에 대해서 물었고, 그때마다 호방은 입을 다물었다. 히끅거리면서 몇 번이나 주변을 살피는 모습은, 근처에 누군가 오진 않았을까 싶어 그걸 살피는 모양새였다.

“넌 이걸 건넨 자를 봤을 거다. 그게 누구냐.”

버릇처럼 고개를 젓기부터 하는 호방을 두고 화소군은 복면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복면인이 검집 채로 호방을 내리쳤다.

퍽퍽퍽, 하는 둔탁한 소리에 맞춰서 호방은 비명을 지르면서 버둥거렸지만, 그런다 해서 매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디를 어떻게 때리는 게 가장 고통스러운지를 아는 만큼 사내는 능수능란하게 호방을 두들겨 댔다. 그리고 그의 뒷덜미를 잡아서 무릎을 꿇렸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몇 번이고 옆으로 쓰러질 뻔한 자를 두고 화소군이 앞으로 다가왔다.

앞에 서서 멈추는 화소군을 느낀 것인가. 금세 엉망인 모습으로 상투를 튼 머리까지 죄다 흘러내린 호방은 딸꾹질을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겁에 질린 얼굴을 내려다보며 화소군은 진주를 아래로 내렸다.

“이 물건은 쉬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요력이 쌓인 귀물도 10년에 한 번 떨어뜨릴까 말까한 것이다. 이건 단순한 진주가 아니야. 혼구(魂球)라고 불리는 것이다. 인간의 혼이 담긴 구슬이라는 거다. 그런 물건을 네놈이 가지고 있다 이제 꺼낸 걸 리는 없고, 이걸 준 자가 누군지 말하기만 하면 된다. 대체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걸 말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힘없는 중얼거림을 들은 화소군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혔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정말로 짜증 난다는 감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복면인은 재차 호방의 머리를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고―하고 앓는 소리를 낸 호방이 앞으로 엎드렸고, 화소군이 턱짓을 했다.

복면인은 호방의 머리채를 잡아 그를 똑바로 일어나 앉게끔 했다. 하도 맞아서 초점이 맞지 않는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그를 두고 화소군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곤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얼 두려워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다. 이건 준 자는 보통 인물이 아닐 거야. 어쩌면―.”

잠시 뜸들인 후, 화소군은 입꼬리를 올렸다.

“인간이 아닐는지도 모르지.”

반쯤 눈을 뜬 채로 멍하니 앉아 있던 호방의 어깨가 파르르 떨린다. 직후 긴 한숨을 내쉰 호방은 힘없이 눈을 내리떴다.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운운에는 마땅한 반박도 없었다. 모든 걸 체념한 사람마냥 눈을 내리뜨기만 하는 걸 두고 화소군은 호방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깨가 잡히자 호방은 히익―하고 헛숨을 삼키며 몸을 피하려 했지만, 머리채가 잡혀 있어 움직이는 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해라. 그러면 지금까지 네놈의 실수를 모두 용서해 주겠다. 그리고 누군지 모를 그놈의 위협에서도 널 보호해 주지.”

보호를 해 주고 용서까지 해 준다라. 화소군에게 있어선 굉장히 파격적인 말이었다. 지금까지 저에게 실수를 한 자들 중에서 저런 말을 들은 이는 거의 없을 터였다.

하나의 실수를 하고 그걸 만회하려면 열 번의 성공을 거두어야만 속을 푸는 화소군이었다. 나이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리지만,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무서웠다. 옷깃 스치는 소리만 들려도 실금을 할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코앞으로 다가와 웃고 있는 화소군을 봐도 딱히 감흥이 일지 않는다. 그저 감옥 안에서 본 그 사내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을 따름이었다.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던 호방은 입술을 달싹였다.

“용서를 한다고 해서 절 죽이지 않으실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바람이 빠지는 색색, 거리는 호흡과 동시에 나오는 호방의 중얼거림에 화소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결국에는 절 죽이실 게 아닙니까.”

“…….”

결국에는 죽인다라는 말. 그 말에 화소군은 대꾸가 없었다. 표정 없는 가면을 쓴 채로 조용히 있던 화소군은 눈동자를 위로 들었고, 서 있던 복면인과 시선이 부딪쳤다.

그 순간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호방의 머리를 검집으로 내리쳤다.

억―하는 신음을 토해 낸 호방이 앞으로 고꾸라지자 대기하고 있던 복면인이 뒷덜미를 잡고는 그대로 끌고 나갔다. 복면인 사내가 그렇게 호방을 개처럼 끌고 나가는 걸 본 화소군은 진주를 한 손에 든 채로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처음 진주를 보았을 때 이게 과연 진품인가 싶어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다시 보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분명히 제대로 된 물건이었다.

이런 게 호방의 손에서 나타나다니. 그는 분명 관아 안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 물건을 건넨 건 바로 그 안에 있는 어떤 존재라는 것이었다. 사또가 이걸 건넸다면 호방이 저토록 두려움에 질릴 이유가 없었다.

인간이 어떤 걸 봐야지 저 정도의 두려움을 내비치는 지에 대해선, 화소군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진주를 바라보던 화소군은 그걸 한 손에 움켜쥐었다.

그때 문을 열고 다시 복면을 쓴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화소군의 옆으로 다가가선 조용히 말했다.

“제가 직접 가 보겠습니다.”

“아니.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거라.”

호방이 문제를 이상하게 만든 것 같은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복면인을 두고 화소군은 손에 쥐고 있는 진주를 내려다봤다.

“이만한 걸 아깝지 않게 건넬 정도라면 엄청난 거물이라는 거다. 이는 분명 더는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 경고를 하는 거다. 만약 그 경고를 무시할 때에는―.”

다른 이의 손에 이런 걸 쥐여 주는 게 아니라, 직접 찾아온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한 손에 진주를 움켜쥔 화소군은 안색을 굳혔다.

이번 일에 사또 명월이 관련이 되어 있을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화소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자리에서 일어난 명월은 바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방으로 들어가 책을 읽는 동안 복운이 들어와 아침 준비를 해 줬고, 그걸 다 먹은 후에 구군복으로 갈아입은 명월은 거울을 세워서 제 모습을 확인했다.

한 점의 흐트러짐이 없는 완벽한 모습을 확인하곤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그는 거울을 닫곤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마당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이가 보였다. 승려복을 입고 있으나, 전혀 중처럼 보이지 않는 사내는 계진과 함께 가운데에 나비를 두고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바닥에 드러누운 나비는 배에 손을 집어넣고 쓰다듬는 계진과 꼬리를 잡아 위로 죽죽 당기는 백호의 행동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앞발과 뒷발을 흔들어 댔다.

지금까지 있으면서 나비가 저 정도로 곤란해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자신이 붙잡으려 하면 요리조리 잘 피해 다녔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보통 복운이 있으면 저 정도로 나비를 괴롭히진 못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백호가 뒤를 돌아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는 백호의 행동에 반사적으로 명월의 몸으로 힘이 들어간다. 정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어 버린 명월을 두고 백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웃는 그 모습을 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던 명월은 바로 대청 끝에 앉아선 목화를 신었다. 그러자 계진이 달려왔다.

계진의 손이 떨어지자 나비는 백호 쪽으로 냥―하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선 잽싸게 구석진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는 동안 계진은 명월의 옆으로 가선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굴에 닿는 시선을 느낀 명월은 웃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났구나. 그런데 복운은 어디 다른 곳에 간 거냐?”

“아이들에게 고기를 갖다 준다고 나갔어요.”

“아, 그렇구나. 그런 게 있었지.”

고을 안에 있는, 부모가 없는 아이들에게 가끔씩 고기를 사서 보내 주기로 했다. 요즘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깜박 잊고 있었는데 복운은 용케도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여튼 보기와는 다르게 꼼꼼한 녀석이라면서 목화를 신고 몸을 일으킨 명월은 계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명월의 손길에 계진은 얼굴을 붉혔다. 좋아하는 티를 어떻게든 내지 않으려 하는 그 모습에 옆으로 다가온 백호가 계진의 이마를 손가락을 가볍게 툭 쳤다.

“여기에 서 있지만 말고, 아까 내가 말한 대로 해라.”

갑작스럽게 중간에 끼어든 백호가 알 수 없는 말을 하자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재차 백호와 시선이 부딪쳤다.

대충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짙은 검은 눈동자를 본 명월은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그러다가 뭘 이렇게 긴장하는 건가 싶었던 그는 바로 계진을 내려다봤다.

“이 땡중이 너에게 무슨 말을 한 거냐―.”

“달리기를 하고 팔 근육을 키우는 운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대답을 한 계진은 양손을 위로 들었다.

계진의 손목은 보기가 딱할 정도로 가늘었다. 뼈 밖에 없는 팔이지만, 이것도 전하고 비교해 보면 많이 나아진 거였다. 명월은 그런 아이의 손목을 잡아 주었다.

“운동을 하는 건 좋지만, 무리하진 말아라. 하다가 힘들면 쉬고, 배고프면 복운에게 말해서 밥이나 간식을 달라고 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을 하긴 해도 자신 있어 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딴에는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도 아직은 이곳 생활이 낯설 수밖에 없을 거다.

어머니 없이 어떻게든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에게도 잘하고, 복운에게도 싹싹하게 굴긴 해도 종종 보이는 어두운 면까진 감추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정도로 노력하는 게 대견해서 머리를 두어 번 더 쓰다듬어 주자 계진이 얼굴을 붉힌다. 그걸 보고만 있던 백호가 아래로 손을 뻗어선 계진의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이만 되었다. 어서 가서 달리기부터 해라. 처음엔 다섯 바퀴다.”

백호의 말에 계진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네, 라고 대답했다. 명월에겐 깊숙이 고개를 숙인 아이가 잽싸게 몸을 돌리곤 안쪽으로 뛰어 들어간다.

멀어지는 계진을 살피던 명월은 옆에 서 있는 백호가 신경 쓰였다. 뭔가 이상한 대화를 나누거나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거슬린다.

역시나 전날에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다. 그땐 왜 그랬던 걸까. 이상한 말을 해서 덕분에 이 녀석의 얼굴을 보기가 거북하지 않은가.

“잘 잤냐.”

가볍게 던져진 물음에 명월의 어깨로 힘이 들어간다.

그가 먼저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으니 이쪽도 비슷하게 맞춰서 대답해야 할 거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명월의 행동에 맞춰서 백호가 바로 손을 뻗었다. 갑작스럽게 턱을 붙잡자 놀란 명월이 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전립 아래로 보이는 명월의 눈이 유난히 동그란 게 귀엽게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취하지 않고 진지한 척 명월을 살피던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쁘진 않군.”

“……나쁘지 않은 게 아니야. 누구 때문에 허리가 아프다.”

한 번 할 때마다 원래 그렇게 무식하게 해야만 하는 거냐면서, 타박을 해 주고 싶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할 때에는 몰라도, 지금처럼 옷 다 입고 마주 서 있으면 언급하는 것 자체가 껄끄럽다.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으면 싶은 게 명월의 진짜 속마음이었지만, 백호는 그런 게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나 싶던 백호는 명월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허리가 아프신가? 그러면 내가 안마라도 해 줄까?”

“뭐하는 거야? 떨어져―.”

갑작스럽게 달라붙는 백호의 행동에 명월은 기겁을 하면서 옆으로 몸을 피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하려는 순간에 대문이 열리고 복운이 들어왔다.

한달음에 달려온 듯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고개를 든 복운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명월과 백호를 보곤 눈을 끔벅였다.

떨어져선 서로 다른 쪽을 보고 있음에도 묘하게 어설픈 느낌이 들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복운은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명월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명월은 바로 복운에게 말을 건넸다.

“고기를 가져다주고 왔다고?”

“그렇습니다. 매번 그렇게 주기로 했으니까요.”

“그동안 내가 잊고 있었는데, 네가 신경 써 주었군. 고맙다.”

“아닙니다. 원래 그런 게 제가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는 게 묘하게 훈훈한 느낌이었다. 그걸 보고만 있던 백호의 눈이 서서히 가늘게 떠진다.

그때 복운이 고개를 들었고, 묘하게 싸늘한 백호의 얼굴을 보곤 움찔했다. 눈에 띄게 굳어지는 복운의 얼굴을 본 명월은 왜 그러나 싶어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가 숨을 삼켰다. 지금 보이는 백호의 표정이라는 게 참으로 이상했다.

“넌 왜 그런 얼굴인 거냐.”

왜 복운을 그런 식으로 쳐다보는 건지 모르겠다.

눈에 들어간 힘을 안 빼느냐며 인상을 쓰는 명월을 두고 백호의 눈썹이 스윽 올라간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혹은 탐탁지 않은 듯.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버린다.

지금 저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고개를 돌리는 거냐고 한 소리 하려다가 말았다. 지금은 둘이 있는 게 아니라 복운도 앞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긴말 않고 입을 다무는 명월이지만, 그 얼굴이 굳어 있음이 복운의 눈에도 훤히 보였다.

백호와 명월의 중간에 낀 복운은 마치 가시 방석 위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던 그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가 명월의 얼굴을 흘깃 봤다. 그런데 얼굴색이 평소와 다르게 칙칙했다.

“사또.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색이 안 좋으십니까? 어디 편찮으신 거 아닙니까?”

복운의 물음에 지레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 명월은 “몸이 편찮기는―.”라면서 뒷말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 말할 셈이었지만, 얼굴에 달라붙는 복운의 눈빛이 집요했다. 암만 봐도 이상한 듯 물끄러미 바라보던 복운이 명월의 이마로 손을 뻗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마에 손을 짚어서 열을 재고 난 후, 정말 괜찮은 건지 어떤지 알아볼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복운의 손은 명월에게 닿을 수 없었다.

중간에 나타난 손이 복운의 손목을 붙잡았고, 놀란 복운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백호를 올려다봤다.

복운만큼 명월도 당혹스러웠다. 왜 그가 갑자기 복운의 손을 잡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백호의 팔을 잡았다.

“지금 뭘 하는 거냐?”

“내가 뭘 했는데?”

타박하는 말에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반문한 백호는 복운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손목이 풀려나긴 했지만, 재차 명월의 이마를 짚어 볼 수가 없게 된 복운은 손을 내리곤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팔짱을 낀 백호와 그 옆에 서 있는 명월을 번갈아 봤다.

이 이상한 분위기는 대체 무얼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공기가 둘 사이에 감도는 걸 느낄 수 있었던 복운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저는 그저 사또께 열이 있나, 없나 그게 궁금해서―.”

그러다가 왜 이런 말을 하나 싶었다. 마치 변명하는 것 같지 않은가. 다른 사람도 아닌, 명월에게 열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려던 것뿐이었다.

물론 이마에 직접적으로 손을 짚는 게 보통은 아니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종종 그런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간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걸 막은 백호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긴 하나 눈빛까지 그렇진 않았다.

“자네는 사또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던가.”

뜬금없는 물음이지만, 대답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기에 복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또께서 어렸을 때부터 모셔 왔습니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곁에서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건가. 사이가 좋았겠군. 더불어 그에 대해서도 많은 걸 알고 있겠어.”

“……그건.”

복운은 우물쭈물거리면서 뒷말을 흐렸다. 슬슬 백호가 왜 이런 걸 묻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던 거다. 입을 다물곤 안색을 굳히는 복운을 두고 명월이 혀를 찼다.

“지금 뭘 묻는 거야.”

복운이 언제부터 자신과 함께였던 게 뭐가 중요한 일이라고 여기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한마디 하고 싶어서 고개를 든 명월은 백호와 시선이 부딪쳤다.

막상 백호의 얼굴을 보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런 식으로 저놈의 눈치를 살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명월은 결국 몸을 돌렸다.

그대로 대문밖으로 나가 버린다. 그 모습에 백호가 가볍게 웃으면서 바로 뒤를 쫓는다. 그렇게 나란히 대문을 빠져나가는 둘을 보던 복운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잡힌다.

“……지금 저게 뭐지?”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 좀 이상했다. 껄끄럽고, 싫기도 한 그런 기분이 든다면서 복운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 * *

명월이 동헌 마당으로 나왔을 때, 안쪽의 보초를 교대하기 위해서 움직이던 포졸과 마주쳤다. 그들은 명월을 보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고, 다시 고개를 드나 싶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명월은 의아함에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껄렁거리며 걸어오는 백호 앞에서 합장을 하며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포졸들을 확인하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합장을 하고 난 후, 포졸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그를 지나쳐 갔다. 영락없이 승려를 만나 기분 좋아 하는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백호는 진짜 승려가 아니라 그저 승려복을 입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주제에 포졸들에게 합장을 하면서 진짜 승려인 척 받아 주는 모습에 명월의 입술이 씰룩거린다.

저놈이 정말…….

가만히 있다간 관아에 있는 모두에게 승려인 척을 하면서 사기 칠 기세였다. 놈이 처신을 잘해서 들통만 나지 않으면 된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승려도 아닌 주제에 흉내를 내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포졸들을 보내고 나서 고개를 들던 백호는 인상을 쓴 채로 바라보는 명월을 확인하곤 한쪽 눈썹을 올렸다.

왜 저렇게 날 보는 거야. 그리 말하고픈 얼굴로 설렁설렁 걸어오는 백호를 기다렸다가, 한 걸음 정도의 차이가 생겼을 때 명월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 승복은 언제 벗을 거야?”

“이걸 왜 벗어. 이렇게 편한데.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인사부터 하잖아.”

“진짜 승려도 아닌 주제에 그런 흉내를 내는 게 즐거운 거냐?”

“아무려면 어떠냐. 내가 이런 꼴로 있으니까 다들 널 불심이 깊은 사또라고 하잖아. 나쁜 소문이 도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야.”

백호가 승려도 아니면서 승려복을 입고 그런 척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껄렁거리고 다니는 놈 때문에 모든 승려가 저런 식인 건 아니냐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되는 것도 문제였다.

썩 안으로 들어가서 원래 옷으로 갈아입으라 하고 싶지만, 그러면 그것대로 또 말이 나오게 될 거다.

백호의 얼굴을 빤히 보던 명월은 혀를 차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가 의자에 앉으려 하는데 그 뒤를 백호가 졸졸 따른다.

목화신을 벗고 위로 올라가려던 명월은 뒤따라오는 백호를 돌아봤다.

“어디까지 쫓아올 셈이냐?”

“나도 기본 정도는 안다. 그 의자에 앉진 않을 테니까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라.”

“…….”

예민하게 굴지 않고 싶어도 백호가 이리도 가까운 곳에 있으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시하자 싶으면서 그리되지가 않는다.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그를 보지 않는 건 간단한 일이지만, 자꾸만 그리로 시선이 간다. 쳐다보지 않으면 가느다란 무언가가 뒤통수를 쿡쿡 찌르는 느낌이 든다.

그 감각이 마치 ‘날 봐. 날 보라고.’라고 시끄럽게 구는 것만 같다. 물론 정말로 그런 식으로 백호가 말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도 그는 대청 한쪽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원래는 동헌 내에서 저런 식으로 앉아 있어도 안 되는 거였다. 자리에 앉아도 되는 건 의자에 착석하는 사또뿐이었다. 지금 백호는 규율을 모두 어기고 제멋대로 굴고 있었다. 그에 대한 지적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말을 꺼낼 수 없다.

그저 백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던 명월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냈다.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서 동헌 마당을 내려다보는데 느낌이 전과 달랐다.

조금 더 잘 보이는 동헌의 구석구석을 살피다가도 결국에는 왼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백호에게 시선이 간다.

저렇게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면 독각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독각귀. 자신의 부친일지도 모르는 존재. ‘그’와의 사이에서 자신을 만든 존재.

백호가 말하길, ‘그’는 죽었다고 했다. 아주 오래전에.

……정말은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는 말이 많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애정으로 키워 주었다. 머리를 많이 쓰다듬어 주고 안아 주고 보살펴 주었다.

표현은 하지 않아도 그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오랫동안 그를 잊지 못했던 거다. 그래서 언젠가 다시 나타날 거라고 믿고 있었다. 다시금 나타나 내 얼굴을 한 번이라도 봐 주겠지. 그런 믿음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죽었고, 남은 건 자신과 독각귀뿐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다양한 존재의 귀신이라 불리는 것들을 봐 왔고, 귀물도 몇몇 만나 보았다.

하지만 독각귀는 아니었다. 그건 귀물이나 귀신과는 또 다른 존재였다. 특별한 만큼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백호는 그 존재를 무척 껄끄럽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가 죽었는데 이제서 나타난 게 이상하다면서 자신과 독각귀를 만나는 걸 저어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은 본인이 확인을 해 보겠다 했다. 본인이 다 알아서 한다고, 그리하는 이유는 자신이 걱정되기 때문이라고―.

그리 말하는 백호의 얼굴과 눈빛을 떠올리며 명월은 눈을 감았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상할 정도로 잔잔했다. 그의 죽음을 알게 된 후로 마음의 동요가 있었기에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지다니. 확실히 이상했다.

이건 분명 백호가 곁에 있기 때문일 터였다. 적어도 그는 자신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있어서, 자신이 슬픔을 느끼거나 좌절감을 맛볼 때 그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이해자. 그 존재가 곁에 있음이 이리도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명월은 재차 백호의 등을 바라봤다.

널찍한 등, 그걸 말없이 응시하는데 갑자기 백호가 뒤를 돌아본다.

“나 불렀냐?”

“…….”

갑자기 뒤를 돌아보나 싶더니 저를 불렀느냐고 묻는다. 부른 적이 없었던 명월은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거로도 부족하다 싶어서 아니, 라고 대답했다.

안 불렀다고 말하는 명월이지만, 백호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상하다는 양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곤 손가락을 귀 안쪽에 넣어 후비는 것에 명월은 천천히 숨을 토해 냈다.

저 녀석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쳐다보지 말아야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는 명월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백호의 존재가 신경 쓰였다. 사람의 눈이라는 건 의외로 많은 걸 비추기 때문에 고개를 돌리고 있어도 한자리 구석에 있는 백호를 느낄 수 있었다.

보지 않는데도 왜 백호가 보이고 느껴지는지 모르겠다면서 명월은 의자 팔걸이에 올린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때 대문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오는 이방이 보였다.

원래 동헌에 가장 먼저 나와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이방, 그였다. 그런 그가 다급하게 걸어오는 모습을 본 명월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런 명월을 보나 싶던 이방은 고개를 숙이곤 한달음에 달려와 죄송하다는 말부터 했다.

“제가 늦잠을 자서 시간이 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늦잠을 자서 늦게 온 거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 그가 늦은 것도 아니었다. 늘 다른 누구보다 먼저 나오던 이방이 아니던가. 그가 일찍 오고 늦게 돌아가는 시간을 전부 다 헤아리면 며칠을 그냥 쉬어도 될 정도였다.

이방의 말을 듣고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명월이 손짓한다.

“더 가까이 와 보게.”

가까이 오라는 말에 이방의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간다. 망설임이 역력한 모습에 명월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가 알아서 더 가까이 오길 말이다.

머뭇거리던 이방은 계단을 올라가 대청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러곤 더 깊이 허리를 숙인다. 그것이 마치 제 표정을 감추려는 것 같아서 명월은 말했다.

“고개를 들어 보게.”

그러자 이방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침에는 얼굴이 부어서 보기 좋은 꼴이 아닙니다.”

“그래 봤자 내 아는 사람의 얼굴이겠지. 괜찮으니 고개를 들어 보게.”

이방이 다른 때와는 달랐다. 그걸 느낄 수 있었던 명월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그건 백호도 마찬가지였다.

대청의 구석진 자리라고는 해도 다리를 좌악 벌린 채로 편안히 앉아 있던 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이방을 쳐다봤다.

앞과 옆에서, 무시할 수 없는 두 존재가 노골적으로 바라보자 이방은 등 뒤로 식은땀이 났다. 이를 어째야 하나 싶은 양 머뭇거리던 그는 결국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위로 고개를 들고는 눈을 질끈 감은 이방을 두고 명월은 바로 눈을 가늘게 떴다.

고개를 든 이방의 이마와 턱 부근엔 붉은 생채기가 생겨 있었다. 단단한 무언가에 제대로 찍힌 것 같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눈가에는 멍도 들어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바로 감을 잡은 명월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어제 저녁에 뒷간에 가려다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졌습니다.”

“호방이 계단에서 굴렀다 하면 믿겠지만, 자네는 아니네. 자네가 어디 그런 식으로 넘어질 사람인가. 넘어져도 왜 얼굴이 그렇게 다쳐. 딱 봐도 누군가 해코지를 한 모양새가 아니던가.”

호방은 평상시에도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나 싶을 정도로 넋을 빼 놓고 다니는 사람이지만, 이방은 그게 아니었다. 신중하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에도 한 번도 넘어진 적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사내였다. 그런 그가 뒷간에 가려다가 넘어졌다는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어렸을 때 이런저런 일을 겪은 바 있던 명월이 보기에 저건 넘어져서 다친 게 아니라 누군가 돌을 던지거나 했기에 생긴 상처였다.

“자네, 돌에 맞았나?”

“아닙니다.”

망설이지 않고 바로 나오는 부정의 대답에 명월은 혀를 찼다.

“돌에 맞았군. 누가 그런 짓을 한 건가.”

이방과 오랜 시간을 함께한 건 아니라 해도, 이제는 그의 눈빛이나 말투만 봐도 대충 속이 읽혔다.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그 티가 다 나니 전부 다 허튼수작이었다.

속 시원하게 말해 보라 하고 싶었으나 이방은 입을 다물었다. 입을 열면 자신이 괜한 일에 휘말릴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걸 알기에 명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 딸이 다시 건강해진 데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자들이 생겼다는 걸 알고 있네. 그 때문에 생긴 일인가.”

“그런 게 아닙니다. 그저 평소 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자들의 소행입니다.”

“그런 것뿐만이 아니라, 나와도 사이가 좋지 않은 자가 나서서 자네를 곤란하게 만드는 중인 것 같군.”

“…….”

이방은 입을 다물었고,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 명월 앞에 서 있는 게 곤혹스러운 듯 옆으로 몸을 피하는 게 여차하면 당장 자리를 피할 것 같은 기색이었다. 결국 명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방에게 걸어갔다.

다가오는 명월을 본 이방이 놀라선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친다. 피하려 하나 그걸 두고 볼 수 없었던 명월은 이방 앞에 서선 그의 턱을 붙잡았다. 그러곤 손가락에 힘을 주곤 저를 쳐다보게 한다.

맨발로 내려와 이방 앞에 서선 그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살피던 명월이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해라. 자네를 건드린 건 나를 건드린 거나 마찬가지지. 지금 자네가 말을 하지 않는다 해도 언젠가 분명 내게도 여파가 미치게 될 거야. 방심하고 있다가 당하는 것처럼 열 받는 일이 없지. 차라리 모든 걸 알고 대비를 해 두는 게 낫지 않겠는가.”

“……사또.”

중얼거리며 명월을 부른 이방이지만,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이지 알 수가 없었던 거다. 그때 명월의 등 뒤에서 아함―하고 하품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법 진지하게 서 있었던 명월과 이방은 움찔했다. 그들은 천천히 몸을 돌려 뒤를 살폈다. 그러자 팔짱을 낀 백호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 있었다.

“…….”

지금은 진지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저렇게 하품을 하고 앉아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애초에 백호가 동헌까지 따라 나올 때 그냥 방에 들어가서 얌전히 있으라고 하는 건데.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오는 걸 느낀 명월이 백호 쪽으로 몸을 돌림과 동시에, 눈물이 날 정도로 시원하게 하품을 한 백호가 입을 다물곤 중얼거렸다.

“저놈이 아니면 내가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그만큼 불안한 거지.”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되묻는 말에 백호가 고개를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저자의 딸이 죽어야 되는데, 안 죽었으니 다음엔 자기들 딸이 죽을 수도 있겠거니 싶어서 그 난리들인 거야.”

거기까지 말한 백호는 입을 다물곤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명월은 늘상 보는, 재수 없는 백호의 웃음이었지만, 이방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그의 뒤틀린 미소를 본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선 고개를 푹 숙였다.

그걸 보고 당황한 명월이 백호에게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고 한마디 하려던 순간 백호가 팔짱을 낀 채로 일어섰다.

“그런 거라면 내가 나서서 사람들의 불안을 풀어 줘야겠군.”

뒤에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지금 명월의 귀에 들어온 건 내가 나서서, 라는 것뿐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넌 아무것도 하지 마.’라는 것이었으나, 두 번째로 드는 생각은 ‘저 녀석이 나선다면 어쩌면―.’ 하는 일말의 기대였다.

백호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존재였다. 그에겐 귀물은 상대 거리가 되지 않았다. 웬만한 귀물은 한 손으로 처리를 하는 데다가, 보통은 그가 두려워서 덤비지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이토록 인간의 일에 개입해도 되는 것일까.

그런 걸로 따지자면 이번 진상품과 관련된 일이 벌어질 때부터 도움을 받지 말아야 하는 거겠지만―.

복잡한 심정이 고스란히 얼굴로 드러난 명월을 본 백호가 가볍게 웃었다.

전립 아래로 손을 뻗은 그는 명월의 뺨을 커다란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어울리지 않게 왜 이런 얼굴인 거냐.”

농을 건네듯 장난스럽게 건네는 목소리 안쪽으로 숨길 수 없는 다정함이 묻어난다. 웃는 얼굴의 백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게 고스란히 느껴진 명월은 당황해선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가 뒤에 서 있던 이방과 부딪치고 나선 헛숨을 들이켜며 뒤를 돌아봤다.

생각이 많아서 상념이 짙은 상태로 있던 이방은 돌아본 명월의 당혹스러운 얼굴을 보고는 “사또?” 하고 그를 불렀다. 그러자 명월은 바로 이방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일단은 어떻게든 내가 처리를 해 주겠네.”

“……어찌하시려고요. 그러다가 사또만 더 곤란해지시게 됩니다.”

“아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자네는 안쪽에 들어가서 쉬고 있게나.”

“늦게 왔는데 어찌 쉴 수가 있겠습니까. 전 괜찮습니다.”

“자네 얼굴을 보면 괜찮은 게 아니야. 그러니까 들어가서 쉬게. 이번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나서, 결정이 내려지면 내가 말해 주지.”

이방의 양어깨를 붙잡은 명월은 입을 다문 채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내가 말하는 대로 해.

강렬하게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이방은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사람들이 신경 쓰는 건 자신의 딸이 되살아난 것이었지만, 그 배후로 명월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걸 명월도 알고 있을 터인데 이번에도 선뜻 도와주겠다는 건가.

하지만 지금 이방이 보기에 명월이 신경 써야 할 다른 일이 몇 가지 더 있었다. 그것부터 처리해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걸 걱정해 주기엔 자신의 코도 석자였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명월 걱정을 해 주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일지도 모른다면서 눈을 내리뜬 이방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요. 하지만 이번엔 그 일을 하시기 전에 저에게도 귀띔해 주십시오.”

전처럼 그렇게 말도 없이 바로 밀어붙이지 말고 말이다.

이방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알고 있었던 명월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방은 여전히 불안이 담긴 눈으로 몇 번이나 명월을 돌아보다가 계단을 내려갔다.

무거운 걸음으로 안쪽으로 사라지는 이방을 확인한 명월은 바로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다시 대청에 앉아 있는 백호가 보였다. 다른 곳을 보면서 딴청을 피우는 모습을 본 명월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이 녀석이 정말이지―.

백호 앞으로 걸어간 명월은 발끝으로 그의 다리를 툭, 쳤다. 그제야 백호가 고개를 들어선 명월을 올려다봤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땐 함부로 날 건드리지 마라.”

“그런 게 생각대로 되는 줄 아냐.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가는 걸 어쩌라는 건데. 너야말로 그때마다 그런 식으로 기겁하면서 몸을 물릴 셈이냐.”

묘하게 딱딱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그가 손을 댔을 때, 뒤로 몸을 피한 걸 두고 기분이 나빠진 상태라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선 명월도 할 말이 있었다.

“갑자기 건드리면―.”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 건드리면 당황스럽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당연한 거였다.

물론 그런 것도 상대에 따라서 다른 법이었다. 별거 아닌 상대가 건드리면 아무렇지도 않을 거다. 아니면 기분이 나빠져서 상대의 손목을 부러뜨렸을지도 모르지.

아까 백호의 손이 닿았을 때 피한 건, 이상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손길도 그렇지만, 백호가 웃는 얼굴이 갑자기 너무…….

거기까지 생각하다 말고 명월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갑작스럽게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더니 긴 한숨을 내쉬는 명월의 행동에 백호의 눈썹이 올라간다.

이건 또 뭐야.

그런 의혹이 서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백호를 의식한 명월은 말없이 그의 옆에 앉았다. 똑같이 팔짱을 낀 채로, 백호를 쳐다봤다.

“아까 그 이야기는 뭐냐. 네가 나서야겠다니? 나서서 뭘 하겠다는 건데?”

“아아―. 그런 말을 했던가. 기억나지 않는걸?”

아까는 껴들지 말아야 할 자리에서 이상한 말을 한 주제에 지금은 또 왜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이상한 걸 보듯 바라보는 명월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호는 딴청을 피울 따름이었다. 그걸 보고만 있던 명월은 가슴이 턱, 하니 막혀 오는 걸 느꼈다.

백호의 멱살을 잡고 탈탈 털어 버릴까. 동시에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변한 데에는 분명 자신도 어느 정도 원인이 된 것 같은데, 그게 정확하게 무언지 알 수 없다. 그러다가 백호가 했던 말이 재차 떠올랐다. 기겁을 하면서 물러섰다 운운했던 것. 그 순간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설마하니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겠지? 만에 하나 그게 진짜 이유가 된 거라면―.

명월은 백호를 쳐다봤다. 팔짱 낀 백호는 무덤덤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으나 정말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속이 자신만큼 꼬여선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놈이었다. 그래서 성가시다 싶으면서도 왜 이렇게 자꾸만 신경 쓰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금 자신이 백호 옆에 앉아 있는 거나 그의 안색을 살피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어젯밤을 거치고 나서 무언가가 변했다는 것에 있었다.

저 녀석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말이다.

명월은 앞으로 고개를 돌리곤 팔짱을 풀었다. 제 허벅지에 양손을 올리곤 긴 한숨을 내쉬자 그것에 백호가 반응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닌 척해도 이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매번 그렇게 인간들 일에 개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너에 대해서 아는 건 나뿐이지만, 조금 더 지나면 네가 이상하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될 거야. 넌 인간들 사이의 규범 같은 건 하나도 모르잖아.”

승려이기 때문에 속세의 일은 잘 모릅니다―라는 식으로 꾸며 대는 것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괴팍한 신임 사또에게 이상한 손님이 찾아왔다.’ 라는 것도 초반에나 통용되는 일이었다.

백호가 계속 곁에 있고, 그가 이상한 행동을 취하게 된다면 하나둘 그의 비범함을 알아차리는 자들이 늘어날 터였다.

이번 백호가 무마해 준 사건은 분명 화소군이 주시하고 있을 거다. 그 녀석도 인간인 주제에 귀물을 이용하는, 당치도 않은 짓을 벌이고 있긴 하지만 자신도 그리하고 싶진 않았다.

백호의 도움을 받으면 편하겠지만, 매번 그런 식일 순 없었다. 분명 곤란해질 상황이 돌아오겠지만, 그 전까지만이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볼 셈이었다.

적어도 이방 일은 내가 처리해야지. 그 처음 시작은, 자신으로 인한 것이었으니 마무리도 내가 해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한 명월은 몸을 일으켰고, 백호가 그 손목을 붙잡아 뒤로 당겼다. 방심하고 있었던 명월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대청 위로 쓰러진 건 좋지만, 쓰고 있던 전립에 머리가 눌려 절로 악―하고 소리를 지르게 된다. 아파서 급히 몸을 일으킨 명월은 백호를 노려봤다.

“지금 뭘 하는 거―!”

“여기 사는 놈들을 다스리려면 남들과 다르다는 걸 드러낼 필요가 있다.”

“…….”

비틀어진 전립을 잡아 바로 한 후에 다시 백호를 바라보는 명월의 눈빛은 굳어 있었다.

그때까지도 명월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던 백호의 손가락 끝으로 서서히 힘이 들어간다.

“네가 살았던 곳하곤 다른 인간들이야. 거기선 보이고 들리는 걸 감추고 있어야 했겠지만, 여기선 아니야. 여기, 이 저주 받은 반양 땅에서는 네가 지닌 힘을 감출 필요 없이 다 드러내야만 한다. 그래서 네가 다른 자들과 다름을 증명해야 해. 그래야 놈들도 고개를 숙이고 허튼 짓거리를 하지 않을 거야.”

아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얼굴을 한 채로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명월을 두고 백호의 입술꼬리가 올라간다.

웃나 싶던 그는 명월의 손목을 놓고, 대신 그의 등에 손을 대어 그가 완전히 일어나 다시 앉을 수 있도록 했다.

다시 제대로 앉게 되었어도 명월은 여전히 조용했다.

조금 더 말해 봐라.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곳의 불행은 이 땅에 있던 자들이 불러들인 거다. 모든 게 그들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여기에 사는 놈들만큼 귀신이니, 귀물이니 하는 것에 익숙해진 인간이 없어. 보지 않아도 이곳에 무언가가 있다―다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런 식이기 때문에 매년 죄 없는 소녀들이 죽는 것에 대해서도 그들은 함구하는 것이다. 소녀들이 죽는 게 자연스러운 상황이 아니라, 귀물로 인한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들이 입을 모아 하는 소리는 늘 같았다. 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곳을 소란스럽게 하지 말고 그냥 떠나라. 라고 말한다.

명월이 지금까지 가 본 곳은 몇 되지 않았지만, 반양은 그 중에서도 특이하고 이상한 장소였다.

이 땅에 사는 이들은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인가. 저 이방도 자신을 믿고 따르면서 많이 나아졌다곤 해도 무의식 깊숙한 곳에는 다른 자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양에서 태어나 비슷한 자들과 어울려 자랐으니 그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해도―.

그래도 이상한 게 너무도 많았다.

“왜 여긴 그렇게 되어 버린 거지?”

“애초에 버려진 땅이었고, 그런 곳에 내가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지.”

더더욱 알 수 없는 말이다. 명월이 인상을 쓴 채로 “그게 뭐야.”라고 중얼거리자 백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놀란 명월이 양손으로 그런 백호의 손목을 붙잡고는 따라 일어났다.

“어딜 갈 셈이야? 뭘 하려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가만히 있으면 재미없지 않나. 한번 놀아 봐야지.”

“단순히 놀이의 일환으로 일을 치려는 거라면 그만둬.”

논다는 말 자체가 틀린 거였다. 지금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지금이니 이방이 돌을 맞는 것이지, 조금 더 지나면 그 화가 이방의 가족들에게도 미치게 될 터였다.

소녀를 위협하는 귀물은 이미 사라져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걸 모르는 마을 사람들이 이방의 딸에게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일을 장난삼아 나설 생각일랑은 하지 말라고 하려던 순간에 맞춰서 백호가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내가 다 책임져 줄 테니까.”

“…….”

“걱정하지 말고, 다 해 봐라.”

명월은 입을 벌린 채로 굳어 버렸다.

멍하다 할 수 있는 눈으로 백호를 바라보던 명월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없는 곳에선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내가 있을 땐 해도 괜찮다.”

그게 뭐야.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때 백호의 손이 올라와 명월의 한쪽 뺨을 감쌌다. 투박하고 커다란, 조금은 거친 손이 명월의 보드라운 뺨을 만지작거렸지만, 이번엔 아까처럼 피하지 않았다.

가만히 선 채로 시선을 피하지 않는 명월을 앞에 두고 백호의 표정이 느슨하게 풀린다.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하는 놈이 아니라는 건, 이제 질릴 정도로 아니까.”

나직하게 속삭인 백호의 손이 명월의 뺨을 잡고 가볍게 흔든다.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기분이 이상했던 명월은 제 뺨에 손을 댔다.

이미 백호의 손가락은 떨어졌음에도 그곳에 무언가가 닿았던 느낌이 생생했다. 그 감각이 낯설다.

낯설고, 낯설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 된다는 거냐.”

“다 해도 된다. 모르나 본데, 이 땅에서 제일 센 게 바로 나다. 너희들 말로 치면 내가 이 땅의 왕이지.”

“그런 불경한 소리를 잘도 하는군.”

반양도 주상전하의 것이었다. 그딴 헛소리를 하면 목을 쳐 줄 거라고 하고 싶었던 명월은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제 뺨에 손을 댄 채로 백호를 바라본다. 명월의 검은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고 단단했다. 그걸 본 백호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 * *

몇 년째 사람 하나 들어온 적 없던 감옥이 요 며칠 동안 북적거렸다. 그렇다고 안에 들어가 있는 자들이 심각한 범죄자인 건 아니었다. 한쪽은 방화를 저지른 자들이고, 다른 한쪽은 도성으로 올라가려는 마차를 털려 했다.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그건 중범죄가 아니다. 이런 한적한 관아에서 일하는 포졸들의 생각은 그러했다. 그러니 조용히 며칠만 있으면 여길 빠져나갈 수 있다고 달래 주는데도 감옥 안에 앉아 있는 이들은 그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으려 했다.

“자네가 이런 식으로 굴어도 될 성 싶은가? 내가 여길 나가기만 하면 가만있지 않겠네.”

아까부터 저런 말만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를 갈고 눈을 번득 뜨면서 말을 하길래 오싹해서 들어주는 척이라도 했지만, 더는 아니었다.

저 뒤로 무슨 말이 나올 줄 다 알고 있었던 포졸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면서 새끼손가락을 들어 귀를 후벼 팠다. 그러자 감옥 안에 앉아 있던 이가 무릎으로 서선 목청을 키웠다.

“내 뒤에는 대단한 분이 버티고 계시다! 지금은 이런 꼴이지만, 얼마 안 있어서 여길 빠져나가게 될 거다! 그때가 되면 너희들은 물론이거니와 그 얼굴 반반한 사또 놈도 끝장난 목숨이다! 그땐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 이 감옥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야! 나중에 가서 땅을 치고 후회하지 말고, 어서 우리를 풀어 줘라!”

똑같은 말을 하니 이제는 외울 지경이었다. 그보다 지금 힘든 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시끄러운 거였다.

손바닥만 한 감옥에서 한 놈이 난리를 치면 다른 곳에서도 아우성이었다. 그래. 우리를 어서 나오게 해 줘라. 같은 식으로 왈왈 거리는 것들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포졸은 혀를 차면서 결국 옆구리에 끼고 있던 몽둥이로 감옥을 두드렸다.

“시끄럽고, 밥이나 먹어! 전이랑 똑같은 걸 줬는데 왜 지랄이야!”

“안 먹을 거다! 어제 저녁에 너희 놈들이 준 밥을 먹고 깜박 의식을 잃었단 말이다! 분명 이상한 걸 먹이고 자백 같은 걸 받아 낼 셈이었던 거겠지! 이 비겁한 놈들!”

“밤이 돼서 저들이 자빠져서 잔 주제에 무슨 이상한 걸 먹여?! 지금 당장 쌀밥이 아니라 보리밥을 줘 버릴까 보다!”

“보리밥이든 똥밥이든, 뭐가 와도 안 먹을 거다!”

“그래! 처먹지 마라! 나도 거지들한테 주면 줬지, 너희들에겐 안 주고 만다!”

포박을 당했을 뿐이지 시간이 되면 먹을 걸 주고 물도 마시게 해 주는데 왜 이 지랄들인지 모르겠다. 물론 어제 저녁에 잠깐 졸다가 깬 적이 있긴 했지만, 놀라서 바로 주변에 있던 동료들을 깨운 포졸이었다. 그러고 나서 급히 감옥 안을 살폈고, 죄수들이 제대로 들어가 있는 걸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린 게 바로 오늘 새벽일이었다. 평소 힘든 일을 한 것도 없는데 왜 졸았던 건지 모르겠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포졸도 쓰러져 졸고 있었던 게 이상하긴 했지만, 별일 없으니 괜찮겠지.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갈 셈이었다.

그래도 내심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오늘 아침밥을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했는데 시끄럽게 군다.

그냥 먹고 조용히 있을 것이지. 할 수만 있다면 아예 감옥 안으로 들어가 저놈들의 머리를 한 대씩 때려 주고 싶었다.

보는 눈들도 없으니 정말 그렇게 해 볼까.

위험한 생각을 하면서 몽둥이를 쥔 손에 힘을 주자 안쪽에 앉아 있던 놈이 움찔한다. 그걸 본 포졸은 눈을 가늘게 떴다.

후회를 하려거든 이미 늦었다. 난 네놈을 패 줄 셈이거든.

위험하게 눈을 번득인 포졸이 감옥 문에 손을 대는 것과 동시에 “시끄럽군.”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만 듣고도 누가 찾아온 건지를 알 수 있었던 포졸은 크게 놀라선 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안쪽으로 들어오는 명월을 발견하곤 몽둥이를 양손으로 든 채로 뒤로 물러났다.

“사, 사또. 오셨습니까.”

방금 죄수를 위협한 걸 그가 봤을까. 평소에도 그런 게 아닌데, 괜한 오해를 산 게 아닌지 걱정이 된다.

몽둥이를 든 채로 안절부절못하는 포졸에게 걸어가면서 명월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이리도 당황하나. 무슨 일이 있었나?”

“일이 있긴 뭐가 있겠습니까. 저놈이 아침밥도 안 챙겨 먹고 시끄럽게 굴어서 그러지요. 바깥에 배를 곯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감옥을 차지하고 앉아서 저러는지. 얄미워서 한 대 때려 주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요.”

그냥 말을 하는 김에 다 해 버리자 싶어서 모든 걸 털어 낸 포졸은 입을 다물곤 고개를 더 숙였다.

지나치게 솔직한 포졸의 말에 명월은 가볍게 웃으면서 감옥 안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 앉아 있던 자는 명월의 눈빛을 받고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노려봤다. 건방진 눈빛에 포졸이 다시 몽둥이를 한 손에 쥔 채로 앞으로 나섰지만, 그때 명월이 손을 들었다.

“괜찮으니 자네는 이만 나가 있게나.”

명월의 말에 포졸의 안색이 굳는다.

저놈들이 이런저런 말을 해 버려서 간밤에 있었던 일도 불어 버리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제때 보고를 하지 않은 걸로 깨질 수도 있었다. 거기다 워낙에 험한 말을 쏘아내는 놈들인지라 명월에게도 똑같이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정말로 명월을 걱정하는 것인지, 단순히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 머리가 복잡해진 포졸은 머뭇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조심하십시오, 라는 말을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전부 다 밖으로 나가거라.”

하나가 아니라 전부를 다 물리는 건가. 거기서 달리 명월이 생각하는 바가 있음을 알게 된 포졸이 근처에 있는 동료에게 손짓을 했다. 포졸이 함께 모여서 밖으로 나가고 감옥 문이 닫힌다. 따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도록 신경을 쓴 거다.

눈치가 빠른 자라면서 그 얼굴을 한 번 더 머릿속으로 되뇌려니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사내가 코웃음을 친다.

“흥. 무슨 일이시유? 이런 식으로 해서 무슨 말을 하겠다고. 그래 봤자 사또는 이미 끝났수다.”

감옥 안에 들어가 앉아 있는 주제에도 지나치게 당당했다. 그러고 보면 시종 그래왔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사내의 속이 검게 타 문드러진 상태라는 걸 모르진 않았던 명월은 느긋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그런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잘못되기 전에 네놈 먼저 목이 떨어질 것이니.”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태연히 받아치자 사내의 눈썹이 올라간다.

매섭게 변하는 그 표정에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은 명월은 뒷짐을 진 채로 사내에게 천천히 걸어가 앞에 멈추어 섰다.

“네놈은 이병현 대감이 시킨 일을 두 번이나 실패했다. 그런 놈이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 내가 이병현 대감이라면 실패한 네놈들 먼저 목을 베고 나서 다시 나를 궁지에 몰아넣을 궁리를 할 거다. 네놈들을 살려 두면 나중에 어떤 곤란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순서로 따지면 그게 맞는 거지.”

“헛소리 하지 마시오. 대감은 그리하실 분이 아니…….”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반문에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동요를 드러낸다. 하지만 곧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돌리려 하는 것에 맞춰서 명월은 재차 말했다.

“내가 이병현 대감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는다. 연달아 똑같은 얼굴을 보내다니. 거기서부터 이미 네놈들을 정리할 마음을 먹고 있었던 거다. 아는지 모르겠으나, 도성으로 올라가는 진상품들은 주상께 바쳐지는 것이다. 전하께 직접 들어갈 물건을 건드리는 게 그렇게 하찮은 일일 것 같으냐. 마차를 공격했다는 것에서부터 네놈들은 물론이거니와 네놈 가족들까지 전부 다 몰살당할 일이다.”

“그런 식으로 겁을 줘 봤자 나는―!”

“겁을 주는 게 아니라 진실을 알려 주는 것이다. 내가 이번 일을 들먹이면 네놈은 물론이거니와 이병현 대감도 문제가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그 영감탱이가 정신 나간 짓을 하는 건 바로 네놈들 때문이다.”

반박하기 위해서 앞으로 몸을 내밀던 사내는 네놈들 때문이라는 말에 움찔했다.

더는 태연함을 가장할 수 없어서 입술을 파르르 떠는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명월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고작 산속에 있는 고을일 뿐이다. 그곳에 있다 보니 늙은 개구리도 저가 왕인 줄 착각하게 된 거지. 그리고 너희들은 그 개구리가 무슨 대단한 거라도 되는 줄 알고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었을 테고 말이야. 그러니 이 땅이 그동안 그토록 난잡해진 거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죽은 잡귀들이 몰려 들어서 들끓게 된 거다. 그렇게 되니, 바로 옆집에 사는 죄 없는 소녀가 죽는 일에도 둔감해진 것이지!”

마지막 말을 할 때에는 의도하지 않고도 목소리가 커졌다.

매년 죄 없는 소녀들이 죽어 나간다. 그들 중에는 분명 억울하게 죽어 가는 딸을, 누이를 살리기 위해서 뭐라도 하려는 가족들이 있었을 거다.

그럴 때에는 소녀 하나뿐이 아니라 온 가족이 죽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칙칙한 얼굴로 그리 말하던 장의사를 떠올리자 분노가 조금 더 커진다.

뒤로 한걸음 물러선 명월은 감옥 안에 앉아 있는 자들을 하나하나 노려봤다. 개중에는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쪽을 노려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매서운 명월의 눈빛과 그의 일갈이 받아들이기에 괴로웠던 것일까. 몇몇 사내들이 고개를 돌리거나 시선을 피하는 와중에도 명월과 대면한 자는 지지 않고 말했다.

“우리의 일이오. 사또는 외지인일 뿐이오. 때가 되면 떠날 자가 왜 그리도 말이 많단 말이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명월은 “아니!” 하고 소리쳤다.

“내가 떠나려거든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러는 동안 벌어지는 일에 대해선 난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단호한 목소리 안쪽에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마저 느껴졌다.

“내가 다스리는 고을 안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면 그게 사람이 한 짓이든, 귀신이 한 짓이든 가리지 않고 처리할 것이다.”

귀신이라고 정확하게 발설하는 순간, 감옥 안에 있던 모든 자들이 숨을 삼켰다. 개중에 몇은 자신은 그런 걸 듣지 않았다는 듯 양손을 들어서 귀를 틀어막았다. 몇은 손을 마주 잡은 채로 이상한 걸 중얼거리면서 외우기 시작했다.

발작적으로 거부감을 보이는 단어는 정해져 있었다. 귀신. 역시나 이들은 그 존재를 감지하고 있었던 거다. 그들이 존재함을 믿기에, 이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었던 거다.

반양이라는 땅이 지닌 특수성. 그것이 그들을 똘똘 뭉쳐지게 만들었고, 그걸 이용해서 나쁜 짓을 하려는 자들이 생겨난다. 나쁜 놈들은 득세하고, 순진하고 힘없는 자들은 그저 이용당했다.

그래. 어디를 가나 이런 식인 거지. 자신이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면 매번 이런 식이었을 터였다.

굳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사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증오에 가득찬 눈으로 명월을 노려본 그는 거칠게 내뱉었다.

“헛소리, 어찌 인간이 귀신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이요.”

“앞으로 매년 소녀들이 죽어 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오로지 적대감만 담긴 눈으로 명월을 노려보던 사내의 표정이 흔들린다. 지금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은 양, 서서히 일그러지는 그 얼굴을 놓치지 않고 명월은 말을 이어 나갔다.

“숲 속에서 사람의 해골이 발견되는 일도 없을 거다. 되지도 않는 방식으로 나라 일에 간섭하고, 사람을 해하고, 웃기지도 않는 농간을 벌이지도 못하게 할 거다. 그러니 너희들은 얌전히 이 안에 있어라. 그게 살 길이다.”

적어도 이 안에 있으면 자신이 신경 써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가거나 딴마음을 먹게 된다면 그땐 어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손이 미치지 않은 곳에서 이들이 이병현 대감이 보낸 자들에게 목숨을 잃어도 도와줄 수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전해지기 마련이었다. 지금 명월이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느껴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사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으나, 명월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서렸던 독기는 상당 부분 빠진 채였다.

어느새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고개도 숙이고 마는 자를 두고 명월은 차분히 경고했다.

“안에서 숨죽이고 얌전히 있거라. 일이 끝나서 그 망할 영감탱이가 제 주제를 알고 뒈지든 납작 엎드리든, 둘 중 하나가 되어서야 너희는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어서 네놈들의 죄를 다시 물을 것이다. 난 내가 건사한 죄인들이 내가 처벌을 내리기 전에 죽는 꼴은 볼 수 없다. 알겠느냐.”

묻는 말에 대한 대답은 없었지만, 침묵이 그걸 대신한다.

일부러 하나하나 붙잡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감옥 안에 있으면 살아도, 나가는 순간 죽을 것이다. 그 의미는 명확하게 전달되었을 테니 말이다. 할 말은 이것뿐이었기에 명월은 당장 몸을 돌려 그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때 내내 조용히 있던 한 사내가 앞으로 기어가면서 “사또!” 하고 명월을 불러 세웠다.

“오, 오늘 새벽에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몇몇은 자고 있었지만, 안 자고 있었던 자들도 동시에 의식을 잃었습니다.”

“누군가 침입을 했던 거로군. 하지만 결과적으로 너희들 중에 죽은 이들은 없다. 앞으로는 갑자기 의식을 잃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 그리고 죄 없는 포졸들을 잡지 말거라. 그들은 이곳 토박이가 아니고 관아를 돌면서 근무를 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 땅 운운하면서 알 수도 없는 소리를 해대면 미친놈 취급만 받는다.”

그 말에 명월과 긴 대화를 나누었던 사내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반양 땅에 있는 관아라면 으레 그 땅의 사람이 포졸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꼭 그런 자들만 모여드는 건 아니었다. 각 지역에서 올라온 자가 포졸이 되기도 했다.

개중엔 오랜 시간을 이곳에 있어서 아는 사람처럼 익숙한 이들도 있고, 아닌 자들도 있었다. 토박이라 해도 고을 사람을 모두 알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으레 동향인데 사또에게 붙어서 헛짓거리를 하는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동향인 포졸을 두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일부러 그런 식으로 배려를 해 주었던 거다. 같은 놈들을 붙여 두면 뭔 짓을 할지 모르니까―.

“사또―!”

명월을 부르면서 사내는 다급히 앞으로 기어갔다. 나무로 된 창살을 붙잡은 채로 그는 명월을 바라봤다.

“우리 가족은 어찌 되는 것이오.”

“죄가 없으면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을 거다.”

간단한 말이었지만, 그처럼 안심이 되는 말이 없었다. 입을 벌리고 아―하는 소리를 낸 사내가 다시금 바닥에 주저앉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명월은 감옥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서 초조하게 서 있던 포졸들이 동시에 이쪽을 바라보는 걸 확인한 명월이 안으로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그러자 포졸이 고개를 꾸벅이면서 감옥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포졸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명월은 재차 걸음을 옮겼다.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애초에 백호에게 혹사를 당해 기절하듯 잠든 상태였기에 문제가 생겨서 바깥이 소란스러웠어도 눈을 뜨진 못했을 거다. 그러면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그걸 처리한 게 대체 누구란 말인가.

딱 하나, 떠오르는 자가 있다.

“속 시원하지? 그렇게 하는 거야.”

돌아가는 길목, 벽에 팔짱을 낀 채로 벽을 등지고 서 있는 불량한 승려가 있었다. 정말로 승려가 아닌데도, 옷을 저렇게 입고 있으니 보는 순간 미간으로 힘이 들어간다.

보자마자 다짜고짜 인상을 쓰는 명월을 본 백호도 바로 웃음을 지웠다,

“뭐야? 제대로 안 풀린 거야?”

명월은 백호 앞으로 걸어가 그를 올려다봤다.

“오늘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어?”

“생쥐 한 마리가 들어왔기에 가볍게 처리해 줬지. 왜? 잡은 생쥐를 보여 줬어야 했나?”

모르는 척을 했으면 추궁하는 게 훨씬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순순히 실토를 하니 다음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표정 풀어, 라면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살짝 손을 썼을 뿐이야. 지금은 간 보는 중이라 자세하기 말하기 그러니까 나중에 성과가 나오면 그때 말해 주지.”

“대체 내가 모르는 곳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너에게 일일이 말할 만한 말이 아니었어. 그런 건 그냥 가볍게 넘겨 버리면 되는 거야. 몇 가지 정도는 그렇게 처리할 줄도 알아야지. 안 그랬다간 네 미간엔 주름 펴질 날이 없을 거다.”

백호의 지적에 명월은 당장 손을 들어선 제 미간에 손가락을 댔다.

그러고 보니 주름이 잡혀 있었다. 요즘 신경 쓰이는 일들이 많아 이런 식으로 인상을 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자신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지금 상황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쪽으로 움직이니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냐고 생각하던 명월은 조금 전 감옥 안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이 허튼소리를 하진 않았으나, 왜인지 모르게 조금 더 당당해질 수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네가 뭘 할 수 있는 거냐.’라고 할 때마다 마음 한쪽으로 앙금이 생기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뭘 할 수 있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명월은 이마에서 손을 떼곤 백호를 올려다봤다. 백호는 여전히 벽에 몸을 기댄 채로 삐딱하니 서 있었다.

지금 저 백호가 몇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을까. 독각귀의 일도 말하진 않아도 제 딴에는 열심히 뒤를 캐고 다닐 터였다. 새벽녘에 있었던 일도 곁가지로 처리하면서 말이다.

새벽녘의 일이 독각귀와 관련된 건 아닐까. 궁금하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더 사고를 확장시킬 순 없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만 집중하자. 해결해야 할 일에 대해서―.

“들었지?”

다짜고짜 던져지는 물음에 백호의 눈썹이 위로 올라간다.

“뭐가 말이냐.”

“저자들의 가족들. 보호해 줘야 할 게 아니냐.”

백호와 함께 감옥에 들어간 건 아니지만, 그가 그곳의 일을 모른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오히려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는 쪽이겠지. 그리고 명월의 물음에 백호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 보라면서 명월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마차가 떠날 때 이상한 걸 붙이는 것 같던데, 그렇게 좀 해 봐라. 그러면 굳이 사람을 붙이지 않아도 될 게 아니냐.”

그제야 명월이 무슨 의도를 품고 이런 말을 꺼내는지를 깨닫게 된 백호가 벽에서 떨어져 똑바로 섰다.

“지금 내 권속을 그런 식으로 부려 먹겠다는 거냐? 그게 간단한 것 같아도, 정말은―.”

“지금은 사람을 많이 쓸 수가 없어. 반양 토박이 포졸은 최대한 순찰로 돌리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지. 그러니 도와줘. 네가 있을 땐 뭐든 해도 된다고 했잖아.”

지금 부릴 수 있는 포졸은 다른 쪽에 써야만 했다. 감옥 안에 들어간 이들의 가족을 보호하려 모두 붙인다면 급한 일이 생겼을 때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집 앞에 포졸이 붙어 있는 건 사람들 보기에 이상하지 않은가. 무엇보다 저 이병현 대감이 어떻게 행동할지도 모를 일이고―.

명월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백호를 올려다봤다.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어디까지나 백호 쪽에서 꺼낸 말이었다. 사내라면 본인이 꺼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었다.

전에는 백호를 써먹을 생각 같은 건 해 본 적 없었는데, 이렇게 되니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힘을 빌리면 편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계속 주시해 오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혀를 찼다.

“아주 노골적으로 날 벗겨 먹으려 드는 거냐.”

싫다는 말은 하지 않는군. 그가 결국엔 이런 식으로 나올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명월이었다.

예상대로 되는구나. 그리 생각하면서 명월은 백호 앞을 지나쳐 갔다.

“차곡차곡 다 쌓아 놔라. 나중에 한 번에 갚으면 되는 게 아니냐.”

“고작 잠자리 몇 번으로 무마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 순간 명월의 걸음이 멈추고 얼굴이 불긋하게 달아오른다.

꼭 그 짓으로 무마하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다. 오해하지 말라며 명월은 뒤를 돌아봤다.

“잠자리 말고도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거 아니―.”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무는 명월의 뺨을 스치고 나비가 날아간다. 나풀거리면서 날아가는 나비가 그의 주변을 맴돌다가 하늘로 흩어진다. 은은한 색으로 가려진 나비가 명월의 뺨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따스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마치, 백호의 손길이 닿았다가 떨어졌을 때의 느낌과 흡사했다.

명월은 눈을 끔벅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높이, 더 높이 그렇게 먼 곳으로 날아가는 나비를 바라보던 명월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양팔을 앞으로 벌린 채로 눈을 감고 있는 백호를 봤다.

평온한 얼굴로 그리 있던 백호는 주변의 바람이 잦아들고 나비가 모두 사라지자 눈을 뜨고는 명월을 내려다봤다.

차분한 얼굴로 바라보는 백호는,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인데도 묘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저건 누구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상했다.

실제로 조금은 멍한 상태로 있던 명월은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었다. 새삼스레 ‘아, 이 녀석은 인간이 아니로구나. 평범한 놈이 아니었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 백호가 천천히 한 손을 든다. 그 손이 다시금 자신에게 닿는 건가.

커다란 백호의 손이 올라오는 것에 맞추어 명월의 심장이 두근, 하고 무겁게 뛴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기대감을 품은 채로 잠자코 있는데 인상을 확 쓴 백호가 손을 들어선 제 뒷목을 긁적였다. 그러다가 다른 손으로는 등짝을 벅벅 긁으면서 “으윽―.”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꿈을 꾸듯 몽롱해졌던 명월의 표정이 원 상태로 돌아갔다.

몸을 반으로 접은 채로 백호는 열심히 제 몸을 긁어 댔다. 등과 가슴, 목과 허벅지 안쪽까지 긁어 대면서 이상한 짓을 하는 걸 보는 동안 명월의 얼굴엔 싫다, 라는 감정이 떠오른다.

어느덧 인상을 쓴 명월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좋은 일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으니, 이런 짓을 하면 몸이 간지러워진다―.”

그리 말하며 더 열심히 몸을 긁어 대는데,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고아인 아이들을 보살펴 주지 않았나. 그런 짓도 한 주제에 뭘 새삼스럽게 이러는 거냐?”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이건 네놈이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냐. 차이가 엄청난 일이지.”

인상을 팍 쓴 채로 등 뒤로 손을 대고 벅벅 긁어 대는 모습이 장난 같진 않았다.

딴에는 진지하게 저러는 거겠지만, 그 모습을 보는 명월은 여전히 어이가 없었다.

이상하다며 쳐다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열심히 배나 등, 가슴과 팔 등을 긁어 대면서 오만상을 써 댔다. 그 모습을 두고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백호는 계속해서 열심히 제 몸을 긁어 댔다. 그 모습이 불편해 보여서 도와줘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아예 양손으로 등을 긁어 대는 백호를 쳐다보던 명월은 팔짱을 끼었다. 부산스럽게 구는 백호가 눈앞에 있는데 왜 머릿속이 차분해지는지 모르겠다. 하나를 처리했더니, 그 다음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명월은 백호를 빤히 바라봤다. 그때까지도 뒷목을 긁적이던 백호는 명월의 시선을 감지하고는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대신 본인 턱 아래를 긁적거리는 걸 보던 명월은 한숨을 참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면 다음으로 이방의 일을 처리하도록 할까.”

일단은 주변 사람의 문제부터 해결하자.

그런 결정을 내린 명월의 말에 백호는 “뜻대로.”라고 짤막하게 대꾸했다.

* * *

이방 한소규의 딸 이름은 한초롱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모님에 대한 공경심이 깊은 데다 주변 사람에게 친절하니 평판이 좋은 아이였다.

가정은 화목했고, 식솔들은 성실하게 맡은 바 일을 잘했다. 그렇게 계속 이어졌다면 남들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테지만, 뭐든지 좋은 일만 이어질 수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갑자기 쓰러지고 일주일이 넘도록 눈을 뜨지 않았을 때,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설마 싶어서 믿지 않으려 했다. 어떻게든 딸아이를 살려야겠다 싶어서 사방팔방으로 수소문을 했지만, 돌아오는 건 사람들의 싸늘한 반응뿐이었다.

딸의 상태가 어떤지에 대해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집안 식솔들에게도 입단속을 시켜서 바깥으로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소문이 어떻게 난 것인지, 결국에는 눈치채는 자들이 생겨났다.

올해는 네 딸이로구나. 말은 하지 않아도 바라보는 눈빛 속에서 그들의 속내가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꼼짝없이 아이를 잃게 생겼구나 싶었다. 이대로 딸을 잃게 되면 그땐 자신도 살 수 없었다. 그건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만일에라도 하나, 딸이 잘못된다면 그땐 아내와 함께 목숨을 끓을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적을 만나, 딸이 다시 살아났다.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건강 상태는 나빴지만, 몇 달 동안 눈을 감고만 있던 아이가 검고 예쁜 눈망울을 드러내며 아버지, 하고 부르던 소리를 죽을 때까지도 잊지 못할 거다. 그 기쁨과 충만함은 어디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살아난 딸을 잘 키우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딸을 되살려 준 존재, 사또 명월에게 충성하자.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딸아이가 다시 살아난 걸로 이 일이 마무리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고을 안에선 비밀이 없었다. 몇 달 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앓기만 하던 딸이 다시 일어났는데, 그게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가능한 오랫동안 감추려 했건만, 말이 어디서 새어 나간 것인지 종종 시비를 거는 자들이 생겨났다.

보이지 않도록 험담을 하거나, 이상한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하고, 오늘 아침에는 대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돌이 날아왔다. 먼저 이마와 눈두덩이를 맞고 놀라서 앞으로 넘어져 턱을 찧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들리는 외침이 이방의 속을 상하게 했다.

‘네놈의 딸이 살아나면 다른 집은 어쩌라는 거냐!’라는 외침이었다.

사람이 어찌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건가 싶었다. 한 집안에 불행이 사라지면, 응당 그걸 축하해 주고 기뻐해야 하는 게 아니던가. 하지만 그건 자신의 생각일 뿐이었다.

전이라면 자신도 저들처럼 행동했겠지. 죄가 없음을 알아도, 어느 곳의 소녀가 죽어야만 자신의 딸이 괜찮을 거라고 믿었을 테니까.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믿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도 할 수 없고, 저렇게도 할 수 없었다.

딸이 살아난 건 너무도 기쁘고 좋은 일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배신자가 된 듯한 그런 이상한 기분을 맛봐야 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 모든 것들을 참고 인내한다면 딸에겐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덧붙여서 그 딸을 살려 준 사또를 위해서도 말이다.

“더 이상 숨겨선 안 되는 걸지도 모르네.”

“…….”

숨죽인 채로 멍하니 앉아만 있던 이방은 눈을 끔벅이다가 명월의 뒤쪽을 살폈다. 뒤쪽에 의자를 두고 그곳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승려가 손에 감자를 들고 먹고 있었다.

크게 입을 벌려서 몇 입 만에 감자 한 개를 홀라당 다 먹고는 손가락에 묻은 걸 혀로 핥아먹은 그는 ‘괜찮군.’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이방이 다른 쪽을 보는 걸 깨달은 걸까. 그의 시선을 따라 뒤를 살핀 명월은 이상한 몰골로 어느새 준비된 간식, 감자를 거의 다 먹어 버린 백호를 발견하곤 바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 이상한 모습은 대체 뭐란 말인가. 얌전히 있지 못하겠느냐고 한마디 해 주려는데 그때 이방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러다 자네뿐만이 아니라 자네 딸이나 안사람, 그 집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이 위험해지게 될 거네. 저들은 아는 게 없으니 올해 안에 누군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할 거야. 자네 딸이 안 죽으면 그들 딸이 잘못될 거라고 믿겠지. 그런 의심을 품은 자들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 같은가. 이대로 두면 자네 딸은 올해가 가기 전까지 숨이 붙어 있지 못할 거네.”

그렇게까지는 아닐 거라고 말하고 싶지만, 결국엔 입을 다물고 참담한 표정을 짓는 이방이었다.

고개를 숙이곤 허벅지에 올린 손을 움켜쥐기만 하는 건, 이런 상황에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언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다. 왜 이렇게 된 건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는 고민이 시작 된다. 머리 한쪽에서 올라오는 두통을 느끼며 연거푸 한숨을 내쉬기만 하는 이방을 두고 명월이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든 해 보겠네.”

“……이미 사또께선 해 주실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지금 저기 화소군과 이병현 대감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사또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트집 잡을 거리가 있으면 당장 달려들겠지요.”

“저들이 트집 잡을 거리가 떨어지길 기다리기만 할 것 같은가. 없던 일도 억지로 만들어서 말도 안 되는 추문을 만들 터이지.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자네나 자네 딸을 해하고, 그걸 내게 뒤집어씌울 수도 있네.”

이방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들이라면 그리하고도 남았다. 그걸 명월도, 이방도 알고 있었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는 건 능사가 아니네. 뭐라도 해서 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반양 땅에서 자리를 잡아 볼 셈이네.”

“자리를 잡으시다니요?”

그냥 흘려듣기에 어폐가 있는 말이었다. 대체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 건가 싶었던 이방이 조심스러운 눈빛을 던지자 명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이 땅에서 사는 이들의 뿌리 깊은 믿음과 공포를, 이용해 볼 셈이네.”

“……설마하니 사또의 힘을 드러내실 셈이십니까.”

이방 딴에는 무척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다.

명월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써서 딸을 살려 낸 것인지 알지는 못한다. 다만, 그가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걸 느낄 따름이었다.

그에겐 특별한 힘이 있어서, 그걸 토대로 자신의 딸을 살려 내고 다른 일들을 처리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저 화소군이 가만두지 않으려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래서 갑자기 나타난 지인이라는 승려를 보고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던 거다. 응당, 사또가 알아서 하시겠지. 뭔가 뜻이 있으시겠지. 라고 말이다.

하지만 특별하다는 건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자신의 일을 재차 도와주기 위해서 명월이 힘을 쓸 셈이던가 싶었던 이방은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리하셔도 되는 겁니까. 염려가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자 명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뭘 하든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벌어질 것이네. 그러니 자네는 내일 아침 집 앞으로 사람들이나 많이 모이게 하게나.”

“내일 아침에, 집 앞으로 사람을 모이게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반양의 모든 사람을 모이게 해야 할 거네. 그들에게 자네 딸이 살아 있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 있어야 할 거라는 인식을 심어 줄 셈이니까.”

“……대체 무슨 행동을 하시려는 겁니까.”

“뭘 하든지, 지금보단 나빠지지 않을 걸세.”

듣고 보니 그랬다. 저들의 악의를 참고 견디어 내는 걸로 상황이 괜찮아진다면, 계속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저들의 악의는 점점 커져서 결과적으로 끔찍한 짓이 벌어지고 난 후에나 멈추게 될 거다. 명월이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유추해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눈을 내리뜨고만 있던 이방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선 명월을 바라봤다.

젊고 아름다운 사내였다. 겉모습만 본다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싶겠지만 그의 비범함에 대해선 다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재차 아무 상관도 없는 자신을 위해서 무리를 해 주려 한다.

이방은 양손을 마주 잡았다.

“사또.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무리를 해서라도 자네 딸을 살리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면서 왜 자꾸만 입에 발린 말을 하나.”

싸늘하게 던져지는 말에 이방의 몸으로 힘이 들어간다. 동시에 안색을 굳힌 명월이 뒤를 돌아봤지만, 백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손가락에 묻은 감자를 혀로 핥아 내며 말했다.

“딸을 살리고 네놈도 살고 싶은 게 아니냐. 그런 주제에 왜 그렇게 말이 많아. 그냥 알았다고 하고 나가기나 해라.”

백호는 보란 듯이 가운데 손가락에 혀를 대고는 길게 핥는다.

“착한 척하는 것도 보고 있노라면 지겹지. 그냥 솔직해져. 그래야 더 수월하게 끝날 게 아닌가. 내 보기에 대화는 이걸로 끝난 것 같으니, 그쪽은 나가고 사또는 나하고 같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의논하는 게 더 생산적일 것 같은데―.”

일부러 뒷말을 흐린 후 백호는 손을 내리곤 이방을 지그시 바라봤다.

백호를 앞에 두고 아니다 말할 수 없는 입장이 답답했던 이방은 양손을 움켜쥐었다. 그러다 결국 이 안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깨달은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만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호방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보내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알아보라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주게.”

지금은 백호에게 더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방에 대한 말은 한 귀로 흘려 넘기는 명월이었다.

이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그가 나가고 난 후, 명월은 기다렸다는 듯 백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이방이 얼마나 무안했겠어?”

안색을 굳힌 채로 싸늘하게 말하는 명월이지만, 백호는 태연했다.

“무안할 게 뭐가 있어. 위험을 무릅쓰고 사또가 도와주겠다는데. 조금 더 오만하고 재수 없게 말해도 알겠습니다, 하고 납작 엎드려 절을 해야지. 속내가 빤히 보이는데도 무리하지 마십시오, 고맙습니다, 라는 입에 발린 말이라니. 웃기는군.”

자리에서 일어난 백호는 명월 앞으로 걸어와선 빈 그릇을 내려놨다.

감자가 산처럼 쌓여 있던 곳에 남은 건, 감자 껍질 몇 개뿐이었다. 처음에는 나름 껍질을 벗겨서 먹다가 그것도 지겨워져서 그냥 안 벗긴 채로 입에 물고 먹어 댄 거다.

살짝 속이 어긋난 상태이기 때문일까. 원래 감자를 먹을 생각이 없었음에도 빈 접시를 보자니 괜히 짜증이 난다. 자연스럽게 인상을 쓰는 명월이지만, 백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건너편 자리에 의자를 끌고 앉아선 탁자에 양팔을 올렸다.

“이방을 도와주기로 했지. 어떤 식으로 도와줄지는 벌써 생각하고 있는 게 있겠지? 그게 뭐냐.”

아직 백호가 이방을 대하던 불량한 태도에 대한 화가 난 상태였던 명월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호는 팔짱을 낀 채로 바라볼 따름이었다.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계속 저런 상태겠거니 싶었던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굳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네가 그런 옷을 입고 왔으니까 그걸 이용해 볼 셈이다.”

“어떤 식으로?”

“성불(成佛).”

짧지만 그만큼 납득이 되는 설명이 없었다. 성불이라는 단어 안에 모든 게 포함되어서 그냥 고개만 끄덕이면 그만이었다.

“네가 반양 땅을 다니면서 온갖 잡귀들을 모두 성불시켜 준다는 걸로 할 거다. 어때? 괜찮지?”

덧붙이는 말을 하고 난 후에 명월은 웃었다.

쉽고 간단한 방법인 것처럼 굴고 있으나, 하는 입장이 된 백호는 그게 아니었다. 이건 완전히 노동력 착취였다.

이런 모습으로 명월의 옆에 붙어 있고, 도와주겠다 먼저 말을 꺼내긴 했건만 설마하니 성불을 시킬 줄은 몰랐다. 따지고 보면 귀물이니 뭐니 하는 것들과 같은 선상에 놓인 백호라 할 수 있는데, 저들을 성불 시킨다라―.

잡아 족치는 걸 성불이라 할 수 없지만, 놈들을 없애는 건 마찬가지니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어도 이건 기분의 문제였다.

어쩐지 이방을 부르기 전까지 ‘무슨 생각이라도 있는 거냐.’라고 집요하게 물어도 입을 열지 않는다 했다. 그런 깜찍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냐면서 백호는 웃었다. 하하하, 하고 안에 퍼지는 백호의 웃음을 들으면서 명월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런 식으로 돌아다니면 화소군이 나타날 테지.”

성불 운운한 건 비단 백호가 스님 흉내를 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귀물을 이용해서 그걸로 귀한 약재니 뭐니 하는 걸 얻어 낸다 잘난 척 떠들어 대던 놈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놈의 돈벌이를 방해하는 셈이니 가만히 있지 않고 나설 게 분명해. 그때 그놈도 잡을 거다.”

다른 것도 아닌 백호 정도라면 놈이 그 냄새를 맡지 못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백호이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턱에 손가락에 댄 명월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날 원망하는 거냐?”

갑작스러운 물음에 명월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그 화소군이라는 놈이 이 땅에서 인간과 귀물을 악질적으로 이용해 먹었는데도 가만히 있었던 것에 대해서, 원망하느냐고 묻고 있다.”

입을 다문 백호의 표정은 묘하게 굳어 있었다. 그걸 보고 난 후에야 명월은 백호 그가, ‘그 일’을 두고 어느 정도 마음을 쓰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백호 정도라면 화소군이 하려는 짓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그리하지 않은 걸 두고 명월은 이미 한번 뭐라 한 적이 있었고, 백호는 대답을 했다. 아직도 그 대답을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견해의 다름은 받아들이기로 한 명월이었다.

애초에 백호와는 종 자체가 다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이미 네 입으로 그건 인재라고 하지 않았더냐. 인간들의 욕망이 불러 낸 결과고, 넌 그것에 손을 쓸 필요가 없었던 것뿐이었던 거지. 실제로 내가 오기 전에는 귀물에게 당하는 인간을 알면서도 도와주지 않고 구경만 했었으니까―.”

지금은 자신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나서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라면, 지금은 그 의미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지금이기 때문에 이방이나 다른 일에도 나서 주는 게 아니겠는가. 가능한 계속 그리해 줬으면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계속 그런 식이라면 싫을 것 같긴 하다. 귀물이 나타나, 그들이 인간들을 해하려 들 때 보고만 있으면 화가 날 것 같아. 네게, 실망할 것 같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분명 귀물에게 당하는 인간은 있을 거다. 그때 그걸 알면서도 백호가 모르는 척하는 건 싫었다.

입을 다문 채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나서면 문제가 더 복잡해질 수도 있어.”

“그러면 말이라도 해 줘. 이런 일이 생겼으니 나더러 해결하라고 말이야.”

“그러다가 정말 강한 놈이 나타나서 네가 탈탈 털리면 어쩌려고?”

“그 정도로 나약하진 않다. 웬만한 놈들은 처리할 수 있어.”

“꽤나 자신만만하군.”

“시작도 하지 않고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지레 겁먹을 필요가 어디에 있겠어.”

처음에는 미처 알지 못해서 한심하게 당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귀물을 만만하게 보는 건 아니었지만, 놈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접한 게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당황하거나 우왕좌왕하지 않을 터였다. 침착하게 있으면 놈들의 약점도 눈에 들어오는 법이었다.

명월의 생각은 그랬지만, 백호는 또 다른 생각을 지닌 것 같았다.

“저 이방이 무리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어? 그러면 무리하지 마.”

“무리를 해 봤자 얼마나 오래 한다고. 고작 2년일 뿐이잖아. 그때가 되면 나도 다른 고을로 이동하게 된다.”

물론, 그사이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일이 크게 터지거나 복잡한 일이 생기게 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이고 뭐고, 사또 직에서 물러나 유배될 가능성도 농후했다.

사람 없는 곳에 유배되면 그때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있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자 괜히 씁쓸한 기분이 든다.

눈을 내리뜬 채로 쓰게 웃는 명월을 두고 백호가 묻는다.

“이곳을 떠날 셈이냐.”

“……난 사또고, 나라에서 명을 내리면 그걸 따를 수밖에 없다.”

“재미없군.”

바로 나오는 대답에 명월은 입 안이 썼다.

백호가 말한 대로, 정말 재미없는 대답이었다.

* * *

이병현 대감이 일을 함에 있어 이 정도로까지 일이 꼬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무언가를 하고자 결정을 내리면 대부분 수월하게 진행되고 해결되곤 했다. 말 한마디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사또 명월을 상대로 하는 일은 연달아 실패하고 있었다.

도성으로 올라가는 마차는 결국 건드리지도 못했고, 그 일을 시킨 자들은 붙잡혀 관아의 감옥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들은 이전에 따로 명월을 혼내 주려 호란에서 관아로 돌아가려던 그에게 보냈던 이들이기도 했다.

그땐 늦은 밤이었지만, 똑같은 이들이니 눈썰미가 좋다면 기억할 수 있음이었다. 실제로도 명월은 그들이 같은 이들임을 알고 있었다.

관아에 붙잡혀 있는 놈들이 함부로 입을 열거라곤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었다. 화근은 없애 두는 게 나았다. 그래서 처리를 하려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다.

“불가능하다니.”

일그러진 이병현 대감의 얼굴은 화가 잔뜩 난 멧돼지 같았다. 상 위에 한쪽 팔을 올리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그를 두고 사내는 안절부절못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은밀히 사람을 쓰려 해도 감옥 안으로 사람을 넣을 수가 없습니다. 먹는 음식을 관리하는 자가 따로 있는지라, 독을 탈 수도 없고―.”

“그런 머저리 같은 말이 어디에 있더냐! 못한다고 하기 전에 뭘 어떻게든 해야 할 게 아니야!”

“그, 그래서 빈틈을 노리려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는 감옥 안으로 들어가는 주먹밥에 약을 타려고 했던 자가 갑자기 장이 꼬여서 쓰러지기도 했고, 자객을 써 보려 해도 직전에 다들 문제가 생겨서 더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 관아의 감옥을 지키는 자들이 이 고을 사람이 아니다 보니―.”

“뭔 변명이 그리도 길어! 내가 듣고자 하는 말은 그런 게 아니란 말이네!”

세게 상을 두드리자 방 안으로 탕탕, 거리는 소리가 가득 찬다.

귀가 따갑기도 했지만, 화가 단단히 난 이병현 대감이 두려웠던 사내는 당장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사람을 써서 이번 일을 꼭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관아에 붙잡힌 놈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란 말이야! 그게 안 되면 아예 사또 그놈의 목을 베든가―!”

거기까지 말한 이병현 대감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 맹랑한 것 때문에 문제가 꼬이게 된 거라면, 아예 그놈을 처리하면 될 게 아니던가. 그래도 고을의 신임 사또고, 유일선 영감의 아들이라 직접적으로 손을 쓰는 게 번거로웠는데, 이렇게까지 되어 버리니 수가 없었다. 그놈을 처리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게 생겼다.

그런 애송이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면서 이병현 대감은 눈을 가늘게 떴다.

“괜한 놈을 건드릴 게 아니라, 그 사또 놈을 없애 버리는 게 답일지도…….”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던 이병현 대감은 얼굴에 닿는 시선을 느끼곤 눈을 내리떴다. 엎드려 있던 자가 경악이 담긴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말로 사또를 노릴 거냐고 묻는 의문이 두 눈 가득 떠올라 있었다. 그걸 본 이병현 대감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사사건건 내 일에 간섭을 하니 다른 수가 없지 않느냐. 평생 지껄일 수 없도록 아예 입을 다물게 해 버리는 게 답일지도 모른다.”

“하, 하지만 사또가 아니십니까. 듣자 하니 집안도 좋다고…….”

“그게 그놈 아비 이름값이지, 그 사또 놈이 노력해서 얻어 낸 게 아니지 않느냐. 세상 물정 모르고 나대면 어찌 되는지 쓴맛을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그리 한번 호되게 당해 봐야 앞으로 두 번 다시 나대지 않겠지.”

나 죽었소, 하고 납작 엎드려 있을 거다. 그러다가 진짜 죽으면 아쉬운 일이고, 살아나도 당분간은 조용히 있을 테니 자신에게 나쁠 일은 아니었다.

원래 생각하기 이전에만 고민이 많지, 한번 결정을 내리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기 나름이다. 이병현 대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해야겠다. 지금은 그놈도 머리를 써서 내가 쉽사리 움직이면 오히려 덜미가 잡히게 될 거야. 그러니 기회를 틈타 놈의 뒤를 치거나, 아예―.”

죽여서 보내 버려야지. 뒷말은 하지 않았으나, 들리는 것 같았던 사내는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이 엄청난 일이 진행되면 결국 그 모든 준비는 사내의 몫이었다. 싫다고 말해 봤자 통하지 않을 사람이니 난감했다.

다른 자도 아닌, 사또라니. 쉽사리 긴장을 풀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는 자를 두고 이병현 대감은 턱짓을 했다.

“되었으니 나가 보거라. 난 혼자 생각할 게 있다. 정해지면 다시 부르겠다.”

“……실례하겠습니다. 쉬십시오.”

분명히 생각할 게 있다 말했는데 쉬라니. 저 눈치 없는 놈 같으니라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인상을 쓴 채로 혀를 차는 대감을 두고 사내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게 된 이병현 대감은 인상을 잔뜩 쓴 채로 입술을 씰룩였다.

그래.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은 그냥 전부 다 없애 버리면 그만이었다.

사또도 없애고, 호접화 그년도 해치워 버릴 터였다. 죽기보다 더 고통스럽게 만들어 자신의 다리에 매달려서 살려 달라는 말이 나오도록 할 거다.

호접화의 반반한 얼굴이 눈물과 핏물로 범벅이 되어서 애원하는 걸 떠올리자 뱃속이 뿌듯해진다. 거기다 명월까지 합세를 하자 이병현 대감은 속이 풀리는 걸 느꼈다.

예쁘장한 것들이 알아서 자신의 비위를 맞춰 주면 좋지 않은가. 진즉 그리했다면 자신이 이런 짓까진 하지 않았을 거라며 그는 주먹으로 느리게 상을 두드렸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위험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두고 보자.”라고 중얼거렸다. 잘난 척 지껄이던 그 연놈들에게 혼쭐을 내 줄 거라면서 이병현 대감은 추악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감. 방에 계십니까.”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서 기분 좋게 있었던 이병현 대감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저기 문밖으로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있었다.

“안에 계시면 잠시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람 없다고, 들어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으나 이미 늦었다. 문이 열리고 퉁퉁한 체격에 인상이 세 보이는 여자가 들어왔다.

화려한 한복에 노리개도 치렁치렁하게 매달고는, 두 손 가득히 팔찌며 장신구를 단 여인은 그야말로 돼지 목에 진주를 건 격이었다.

딱 보는 순간 절로 인상이 써질 만큼 과하고,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인 부인을 두고 대감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하지만 그걸 금방 수습한 대감은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늦은 시간에 여기까진 웬일이요. 자고 있는 줄 알았소.”

“제가 잤으면 좋겠다 생각하셨던 거겠지요. 그래야지 기방을 가든 어디를 가든지 하실 게 아니겠습니까.”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목소리로 그리 말한 여자는 이병현 대감의 맞은편에 앉았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그곳에 팔을 올린 채로 바라보는 모습이 보기에 답답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절로 호접화가 떠오른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너무도 달랐다. 안사람을 보는 순간 ‘호접화는 죽이지 말까.’라는 생각이 든 이병현 대감은 헛기침을 했다.

“내가 기방을 찾는 건, 그곳에서 긴밀히 나눌 대화가 있기 때문이요. 실제로 나 혼자서 기방을 찾는 것도 아니지 않소.”

“당신의 돈을 보고 졸졸 따르는 속 좁은 어린 선비들과 함께 기방을 찾아서 주색에 빠져 지내신다는 말은 익히 들어 봤습니다.”

“어허, 그런 게 아니래도. 난 그곳에서 전도가 유망한 선비들을 데리고 앞으로의 장래에 대해서―.”

주절주절 말이 길어짐에 따라서 이쪽을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은 점점 매서워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부인 앞에선 기를 펼 수 없었던 이병현 대감은 바로 입을 다물곤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아까부터 계속 기침을 만들려 하니 나중에는 사레에 들려서 진짜로 크게 기침을 하게 된다. 어깨를 들썩이면서 몇 번이나 거칠게 기침을 하며 손으로 입을 막는 이병현 대감의 행동에 여자는 혀를 찼다.

“어찌 그리도 경박하십니까. 대감께서 매일 호란을 찾아 돈을 펑펑 쓰라고, 저희 아버지께서 당신께 절 부탁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이병현 대감의 안색이 변했다.

“절 잘 보살피고 아껴 주겠다 해서 저와 혼례를 치른 게 아니십니까? 그런데 왜 기방을 찾으시는 겁니까. 자꾸만 이러시면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딱딱한 안사람의 목소리 안쪽엔 경고가 담겨 있었다. 앞으로 제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그땐 가만있지 않겠다. 그걸 단박에 이해한 이병현 대감은 아내를 노려봤다.

“지금 날 협박하려고 찾아온 것이오?”

“협박이 아닙니다. 제 아버님과의 약속을 지켜 주십사 부탁드리는 것뿐입니다.”

“그게 어찌 부탁이 될 수 있단 말이요. 어떻게 들어 봐도 협박인데. 어찌 아녀자가 늦은 밤에 지아비의 방에 들어와 협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불쾌하구려―.”

그리 말한 이병현 대감은 벌떡 일어서선 아내를 내려다봤다.

화가 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된 대감이나, 그를 올려다보는 여자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안 사람의 눈동자 속에서 ‘네놈이 그래 봤자지.’라는 빈정거림이 읽힌 대감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데릴사위였다. 애초에 여자가 아닌 돈을 보고 이리로 온 거였다.

덕분에 그는 많은 재물과 높은 신분을 손에 넣었지만, 아내는 아니었다. 아내는 사내처럼 기골이 장대하고 인상이 험악했으며, 털털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말이 좋아 털털이지 데릴사위라는 걸 트집 잡아서 자신을 쥐고 흔들려 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내쫓고 싶지만, 그랬다간 자신도 이 집안에서 머물기가 곤란해지기에 몇 십 년 동안 꾹 참았던 거다.

앉아 있는 아내를 발로 걷어차고 싶은 걸 억누르며 대감은 뒷짐을 지곤 에헴, 하고 크게 기침을 했다. 나름의 위협을 한 거지만, 여자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소롭다며 비웃었다.

“앞으로 다시는 기방을 찾지 마십시오. 한 번 더 그리하신다면 내 기생 년들의 아래를 다 도려내 버릴 겁니다.”

“어허! 여인이 어찌 그런 험악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이요! 더는 함께할 수가 없구먼!”

듣고 있기가 오싹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계속 함께 있으면 더 심한 소리도 나올 판이었다. 이럴 땐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이병현 대감은 “에이.”라는 소리를 내면서 성큼성큼 걸어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대청을 가로질러가 가죽신을 신은 그는 한달음에 계단을 내려갔다.

마지막에 가선 아내 때문에 더 기분이 안 좋아졌다. 망할 여자 같으니라고. 이번에 사또를 처리할 때 저 여자도 어떻게 치워 버릴까. 사고를 가장해서 없애 버린다면, 괜찮지 않을까. 가볍게 생각해 본 건데 묘하게 구미가 당긴다.

그래. 매번 간섭하면서 시끄럽게 구는 여자를 이번 기회에 처리하고 젊고 싱싱한 걸 안사람으로 맞이하자. 아무것도 모르는 걸 데리고 와서 살다가 질리면 또 다른 것으로 바꾸면 되지.

전에는 주변 눈치를 살피느라 마음은 있어도 행동으로 취할 수 없었지만, 더는 아니었다. 이놈 저년 할 것 없이 다 정리하고 이 땅의 주인으로 군림할 거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뭐라 할 수 없게끔 할 거다. 그렇게 차곡차곡 힘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 저 화소군 놈도 자신 앞에서 굽실거릴 게 아니겠는가.

마지막 생각이 참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이병현 대감은 제 아래턱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차근차근 해 나간 후에 도성으로 진출하는 거지.”

어쩌면 한자리를 떡하니 차지해선 주상의 곁에서 일할 수도 있음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서 이 조선을 쥐고 흔드는 게 가능할지도―.

위험천만한 데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건데도 이병현 대감의 눈동자는 반짝거렸다. 정말로 기분이 좋아진 듯 표정이 한결 밝아진 그는 양손을 마주잡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이거야.”

그리고 고개를 든 그는 저기 앞으로 걸어가는 어린 하녀를 발견했다.

씻고 들어가는 것인지 얇은 저고리 하나만 입고 종종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이 날씬했다. 치맛자락을 당겨서 그런지 볼록하게 튀어나온 엉덩이가 탐스럽다. 어두워서 그런지 하얀 한복을 입고 있는 년이 꽤나 먹음직스러웠다.

이병현 대감은 주변을 둘러봤다. 보는 사람도 없고, 그 짓을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 이런저런 일을 하느라 당분간은 바빠질 텐데, 그 전에 회포를 푸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이 집에서 일하는 것이니 자신의 명을 거역하진 않을 테고―.

회심의 미소를 지은 이병현 대감은 당장 하녀를 쫓아갔다. 하녀들이 기거하는 쪽으로 가기 전에 붙잡아 와야만 했다. 일단 사랑방으로 끌고 가서 치마를 걷어 올리기만 하면 그 뒤는 일사천리일 거다.

기대감에 부푼 대감은 뒤뚱거리며 하녀를 붙잡으러 갔고, 얼마 안 있어서 발견하게 되었다.

하녀는 구석진 곳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서선 양손을 모은 채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 태가 참으로 탐스러웠다. 얼굴만 좀 반반하면 좋을 텐데―.

그리 생각하며 하녀 옆으로 걸어간 대감은 헛기침을 했다. 들으라는 듯 몇 번이나 기침을 하자 그가 온 걸 알아차린 하녀가 놀라선 손을 내리곤 몸을 움츠리는 게 보였다.

동그란 어깨로 힘이 들어가는 걸 보곤 눈을 가늘게 뜬 이병현 대감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간다. 좋아 죽겠는 걸 주체할 수 없었던 그는 웃음을 꾹 참으며 물었다.

“야심한 시간인데 여기서 뭘 하는 것이더냐.”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그리워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목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원래 목소리가 듣기 좋은 것들이 얼굴도 반반한 법이었다.

“효심이 지극한 아이로구나. 마음에 든다.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더냐.”

“저 같은 것의 이름을 아실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씀 드릴 만한 이름도 아닙니다.”

“그래도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인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않겠느냐. 말해 보거라. 내 너의 이름을 꼭 알고 싶구나.”

“그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을, 네놈에게 알려 주고 싶지가 않구나―.”

“…….”

내내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는데 마지막 순간 달라졌다.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냉랭한 말투에 놀란 이병현 대감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멍하니 있는 동안 앞에 서 있던 하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이는 하얗고 고운 얼굴을 보는 순간 이병현 대감의 눈이 크게 떠졌다.

경악을 담아서 위로 손을 든 그가 너, 너는―라고 말하는 순간에 맞춰서 하녀가 한 손을 높이 들었다. 길게 자라난 다섯 개의 손톱이 정확히 이병현 대감의 얼굴을 그어 버렸다.

크게 입을 벌린 그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다시금 휘둘러진 손톱이 가슴을 베었고, 그의 몸은 허물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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