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20/32)

4장

잘 시간이 되어서 이불 위에 누워 있는데도 의식은 맑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허공을 바라보던 명월은 옆을 흘깃 봤다. 지금 그의 옆자리는 비어져 있었고, 그게 당연한 거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전한 느낌이 드는지. 몸이 안 좋아서 이런 느낌이 드는 건가 싶어 손으로 팔을 문질러 봐도 마찬가지였다.

잔뜩 인상을 쓴 채로 제 팔을 쓰다듬던 명월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아무도 없는 방 안을 둘러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뿐하게 방을 걸어갔다.

거의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열고 대청으로 나와서 앞을 살폈을 때, 아무도 없었다.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마당을 바라보다가 그리로 향했다. 가죽신을 신은 명월은 계속 걸어갔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딱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제 스스로도 지금 이상한 짓을 하고 있음을 모르진 않았다. 남들 보기 전에 냉큼 방으로 돌아가자 싶으면서도 걸음이 멈추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급한 대로 손님을 맞이할 용으로 만든 방이었다. 단단히 닫힌 문을 보던 명월은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곤 기침을 했다.

쿨럭, 하고 조용한 곳에 울려 퍼지는 기침이 참으로 어색했다. 스스로 듣고는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말이다. 그 순간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자다 말고 일어나서 지금 이게 대체 뭘 하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인상을 쓴 채로 정말이지, 라고 중얼거렸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자. 그리 생각하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여전히 닫힌 문을 보던 명월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손을 들어 입술 앞에 댔다. 아까보단 훨씬 더 나은 기침을 해 주마―싶어 입술을 여는 순간에 맞춰서 뒤에서 훅, 하고 따스한 입김이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너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냐.”

“쿨럭! 쿨럭! 커헉―!”

막 기침을 하려던 순간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정말로 놀랐다.

목을 붙잡고 죽자고 기침을 하던 명월은 소리가 너무도 큰 것에 놀라 양손으로 입을 막고는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언제나처럼 바지 하나만 입은 채로 서 있는 백호가 보였다.

기침을 참느라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올려다보는 명월의 모습에도 백호는 태연했다.

“왜 거기서 기침을 해 대고 있어.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니면서.”

말은 그리해도 눈은 웃고 있었다. 지금 명월이 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해서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한다. 그 순간 괜히 왔다 싶었던 명월의 눈으로 힘이 들어갔다. 당장 입에서 손을 떼고 싶지만 그러면 또 기침이 나올 것 같아서 마른침을 삼키는데 목구멍 안쪽이 따끔거린다.

몇 번이나 침을 넘기는 동안에 백호는 그를 지나쳐 안으로 향했다. 대충 접어서 신은 짚신을 벗고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에 명월의 눈이 크게 떠진다.

설마. 저렇게 혼자 돌아갈 셈이던가?

믿을 수 없기도 하고, 어이도 없었던 명월이 당황으로 굳어 있는 동안 막 방으로 들어가려던 백호가 뒤를 돌아본다.

“들어올 거냐?”

“…….”

묻는 말이 이상했다. 네가 여기에 들어올 수 있을까. 그리 묻는 듯한 시선을 봤을 때, 명월은 입을 누르고 있던 손을 내렸다.

마른기침을 몇 번 하긴 했지만, 아까처럼 크진 않았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재차 침을 삼킨 명월은 백호를 올려다봤다.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속을 읽을 수 없다. 안 들어갈 거라고 해도 ‘그래?’라면서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말 것만 같았다.

명월은 백호를 올려다봤고, 그러다가 한숨을 쉬곤 앞으로 움직였다. 가죽신을 벗은 명월은 여전히 문 앞에 서 있는 백호의 몸을 밀면서 “들어가기나 해.”라고 툴툴 거렸다. 그 말에 백호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웃었다.

웃긴 왜 웃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웃는 것도 거슬렸던 명월은 그쪽을 흘겨보면서 문을 닫았다.

바깥에선 달빛 때문에 그럭저럭 보이는 게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문을 닫았더니 갑자기 어두워진다. 앞에 서 있는 백호가 느껴지긴 했지만, 긴장됨을 느낀 명월은 애써 차분히 말했다.

“일단 불부터 붙여.”

“이거 말이냐.”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순간 명월의 얼굴 바로 옆으로 작은 불씨가 타올랐다. 화륵, 하고 피어오르는 불씨를 본 명월은 놀라 작게 숨을 삼켰다. 백호의 손바닥 안쪽에서 넘실거리는 불씨를 본 명월은 멍한 얼굴이었다.

이걸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다 말고 이내 백호가 사람이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정말 재주가 많았다. 불이라니.

그러다 얼마 전 창고에 있었을 때 갑자기 비가 내려 큰불이 모두 잡혔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런 순간에 갑자기 비가 내리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였다. 그것 또한 백호가 한 짓이었겠지.

전이라면 거부감을 느끼면서 “당장 꺼.”라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명월은 차분하니 불씨를 바라보다가 그리로 손을 올렸다. 불씨 주변에 손을 대자 따뜻했다. 따뜻하기만 하고 뜨겁진 않을 것 같아서 더 가까이 손을 대 보고 싶어진다.

실제로 그리해 볼까 망설이다가 손을 내리자 백호가 뒤로 손을 물리는 것 같았다. 그걸 따라서 집요하게 손을 대려 하자 백호가 중얼거렸다.

“위험해.”

“위험한 건가?”

그리 물으며 명월은 백호를 바라봤다.

백호의 미간으로 살포시 주름이 잡힌다. 그러고 난 후, 그는 제 손바닥 가운데에서 불타는 불씨를 확인했다.

작은 이 불씨가 순식간에 커져서 이곳 모두를 집어삼킬 수 있었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가능했다. 모든 건 백호, 그가 마음먹기에 따라 달랐다.

백호는 조용히 앞으로 손을 내밀었고, 그제야 그곳에 명월의 손길이 닿았다.

처음에는 백호의 손바닥 위에만 대고 있던 손가락을 천천히 들어선 불씨를 건드려 본다. 손가락 끝에 닿는 불씨는 전혀 뜨겁지 않았다. 아까는 분명 열기가 느껴졌던 것 같은데.

이상한 느낌에 백호를 올려다봤지만 그는 눈을 내리뜬 채로 제 손바닥 위의 불씨를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로 불씨를 보는 건지, 제 손에 닿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주시하는 건지를 모르겠다.

묘한 감각을 느끼면서 명월은 백호의 손을 움켜쥐었고, 그러자 손바닥 위에서 불타던 불씨가 갑자기 사라졌다.

“…….”

불씨가 꺼져서 주변이 어두워졌지만, 명월은 잠자코 있었다.

잡고 있는 백호의 손바닥에서 둔중하게 뛰는 박동이 느껴지는 것 같다. 둥. 둥. 둥. 느리게 뛰는 그 박동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건 대체 어디서부터 올라오는 소리인 걸까. 그런 의문을 느끼면서 명월은 중얼거렸다.

“불이 꺼졌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내용이었다. 왜 그런 걸 말한 건지 모르겠다. 스스로가 바보처럼 여겨졌던 명월은 입을 다물었고, 그에 맞춰서 백호는 별 말 없이 명월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들이 잡고 있는 두 손 위로 아까보다 훨씬 더 큰 불이 타올랐다. 화르륵, 하고 피어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던 명월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불씨 때문에 백호의 얼굴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조금 더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으로 보인다. 마주잡고 있는 손은 분명히 투박한데 왜 부드럽게 여겨지는지 모르겠다. 그런 걸 느끼는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닐까.

조금 더 세게 백호의 손을 쥐고는 명월은 다른 손을 위로 뻗어서 불씨를 건드렸다. 그걸 쓰다듬고 손가락으로 불씨 가운데를 지나쳐도 그건 흔들리거나 할 뿐, 사라지진 않았다. 뜨겁지도 않았다.

“네가 뜨겁지 않게 한 거야?”

“뭐, 그렇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목소리는 딱딱하게 들렸다. 하지만 지금 백호가 그런 목소리를 의식적으로 내는 상태라는 걸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잡고 있는 손을 타고 백호의 박동이 조금씩 빨라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정말은 모든 신경이 잡고 있는 백호의 손 쪽으로 몰린 채였다. 지금 마주 잡은 손 위에서 불타오르는 불씨는 더는 알고 싶은 게 아니었다.

잡은 손에서 퍼지는 따뜻함과 점점 빨라지는 박동, 묘한 긴장감 등을 느끼면서 명월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순간에 맞춰서 불씨가 재차 사그라진다. 점점 작아지는 불씨를 살피던 명월이 물었다.

“나도 너처럼 할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

“어째서? 독각귀의 피를 절반 정도 지니고 있잖아.”

“사람의 피가 섞였지 않나.”

불과 물과 바람을 다룬다는 독각귀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어느 정도 흉내를 내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꺼낸 말에 백호는 이상한 답을 한다. 인간의 피가 섞였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건가.

명월은 웃었다.

“언제는 반푼이 취급하면서 사람도 아니라고 하던 주제에, 꼭 이럴 때엔 사람 운운하더라.”

툭하면 말을 바꾸니 그게 우습다. 재미있다는 양 웃는 명월이지만, 백호는 그게 아니었다.

자못 심각한 얼굴이 된 그가 물었다.

“이런 힘을 지니고 싶은 거냐?”

“약한 것보다는 낫잖아? 안 그래?”

처음 출발선이 남들과 다르다면 힘을 지니고 있는 편이 나았다. 그게 지위든, 물리적인 힘이든, 영적인 것이든 상관없었다. 제 몸을 지키기 위해선 더 많은 힘이 필요로 했다. 상황에 따라서 백호처럼 비가 내리게 하고, 불을 나타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요즘엔 귀물도 몇 마리 처리했다. 전부 다 칼로 해낸 일이었다. 하지만 매번 그런 식으로 칼만 휘둘러서 놈들을 처리할 순 없는 법이었다. 백호 같은 놈이 나타나거나, 독각귀가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만약에 독각귀가 나타나면 어떻게 하지?”

“…….”

“네가 없을 때 나타나면 그땐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그는 죽었는데, 독각귀가 다시 나타난 건 이상했다. 그래도 절반 정도는 자신에게 피와 살을 준 사람이니, 뭔가 할 말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백호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때에 나타난 건 이상하다면서 절대로 만나지 말라 했던 거다.

백호가 먼저 만나 보고 말을 해 주겠다 했지만, 독각귀라는 존재가 그의 뜻대로 될지 미지수였다. 그가 없을 때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는 거고, 그땐 어찌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어렸을 때 보았던 그는 대화가 통했고, 자신을 애틋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도 그럴 거라는 장담은 할 수 없었다.

“내가 네 옆에서 떨어질 일은 없을 거다.”

혼자만의 생각을 하던 명월은 백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명월의 손을 더 단단히 쥔 채로 백호가 말했다.

“난 계속 네 옆에 있을 거니까.”

거기까지 말하고 난 후, 백호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단호함을 풍기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가 진심을 말하고 있음을 모르진 않았으나, 동시에 웃음이 나왔다.

“내가 도성으로 올라갈 때에도 옆에 있을 생각이야?”

그 순간 백호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혔다. 안색을 굳히는 걸 본 명월은 마음이 차분해졌다.

잠자리에 누워 있음에도 잠이 오지 않고 마음을 심란했던 건 바로 저 얼굴이었다.

낮에 이곳에서의 임기를 언급하며 떠난다는 말을 할 때에도 저런 식으로 표정이 달라졌던 거다. 거기서 더 길게 말하진 않았지만, 바라보는 눈빛으로도 전해지는 게 있었다.

물끄러미 백호를 바라보던 명월은 입꼬리를 올렸다. 웃으려다가 만 후,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다른 곳으로 가서도 사또 노릇을 하면서 지내게 될 거야. 그런 식으로 아등바등 살 계획이긴 한데, 그런 내 모습이 우스울까?”

일단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 하면서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을 셈이었다. 집안사람들에게 싫은 소리 듣기도 싫고, 일단 아버지나 다른 형제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일에 집중해서 최선을 다한다 한들, 흠이 잡히지 않을 수는 없었다. 혼자서 계속 지내다 보면 말이 나올 테고, 나중엔 아버님이 중매에 나설지도 몰랐다.

자신이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품고 가겠다 결정을 내린 이상, 그는 자신이 가정을 꾸리길 원할 거다. 명월은 그게 싫었다. 그게 왜 싫은지에 대해선 다른 이들에게는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아는 존재가 눈앞에 서 있었다.

“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여?”

“미련하게 보인다.”

애초에 위로를 받고 싶어서 이런 말을 꺼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미련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상하게 일그러지는 명월의 얼굴을 본 백호는 재차 말했다.

“인간으로 살고 싶다면 조금 더 약아빠지게 굴어야지. 그래야 세상 살기 편한 거다.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똑같다. 어디를 가나 처세술이 중요한 건 마찬가지야.”

“……내가 제일 못하는 거네.”

그래서 이래저래 문제가 커지고 있는 거였고 말이다. 다 알고도 눈감아 주고 모르는 척해 주는 게 필요한데, 그런 걸 못하니 미련하게 보인다 한들 어쩔 수 없기는 하겠다.

그래도 역시나 기분은 언짢았다. 인상을 쓴 채로 다른 쪽을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런 모습이 나쁘게 보이진 않는다.”

명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고개를 든 명월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안 그래도 예쁜 얼굴인데, 눈을 동그랗게 뜨니 더 예쁜 것 같다.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백호는 거듭 강조해서 말했다.

“개인적으로 사리사욕에 빠져서 추잡한 짓을 하는 놈들 보단, 너처럼 손해 볼 거 알면서도 미련하게 구는 것들이 더 좋다.”

“……하나도 좋은 말이 아니잖아.”

그런데도 웃음이 나온다.

명월은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 나쁜 짓 하고는 두 발 뻗고 잘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 짓도 하다 보면 익숙해져서 언젠가 두 발뿐만이 아니라 양팔도 만세를 부른 채로 잘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손해를 본다고 해도 나쁜 짓은 하고 싶지가 않다.

명월은 한숨을 쉬면서 손을 빼려 했고, 백호가 더 세게 그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안쪽으로 명월을 질질 끌고 간다. 내내 가만히 서 있다가 지금 이게 뭘 하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당황해선 눈을 크게 떴다.

잠시 기다려 보라 해도 통하지 않는다. 백호는 안쪽으로 가선 장을 열고 거기서 이불을 꺼냈다. 아래로 툭툭 던진 이불을 발로 똑바로 펴는 걸 본 명월이 당황해서 말했다.

“그 짓을 하러 온 게 아니야―.”

“그 짓이 뭐냐. 듣는 이 몸이 기분 나쁘시게―.”

인상을 쓴 채로 퉁명스럽게 말을 한 백호는 다 깔아 버린 이불을 안쪽으로 주욱 밀어 두고는 명월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잠깐만 기다려 보라며 명월이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고 서선 움직이려 들지 않자 혀를 차면서 아예 그 몸을 안아 들었다. 가볍게 명월을 안아 든 백호는 안쪽 이불에 앉아선 명월을 내려다봤다.

“…….”

지금 명월은 어린애처럼 백호의 품에 안긴 상태였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백호의 다리 위에 앉아선 그에게 꼬옥 끌어 안겨져 있는 상태를 깨달은 명월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지금 이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일어날 셈으로 버둥거려도 백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힘센 거 알고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과시 좀 안 했으면 좋겠다. 눌린 팔이 얼얼하니 아프지 않으냐면서 인상 쓴 채로 고개를 들자 백호가 다른 손으로 명월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잡아 뒤로 넘겨줬다.

“괜히 용쓰지 말고 잠이나 자라. 잠이 안 와서 찾아온 거 아니냐.”

그러곤 내려간 손이 등에 닿아선 가볍게 토닥거린다. 마치 어린애를 어르듯 구는 손짓이 어이가 없었던 명월은 입을 살짝 벌렸다. 멍하니 올려다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왜 그러냐면서 한쪽 눈썹을 올렸다.

“자라니까.”

“이런 상태로 잘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어떻게 이렇게 안긴 채로 잘 수가 있겠는가.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놓아 달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백호의 손이 명월의 얼굴 앞으로 다가온다.

손가락으로 명월의 턱을 툭 치더니, 엄지로 오른쪽 뺨에 난 점을 꾸욱 누르고 코앞으로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재차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코앞에서 나타난 불씨를 본 명월은 움찔했지만, 반사적으로 그리로 손을 뻗었다. 전혀 뜨겁지 않은 불씨를 양손으로 감싸자 오른쪽 손에 낀 가죽 장갑이 보인다.

항상 껴 왔기 때문에 이제는 봐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자신의 특징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순간 싫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정말 이 오른손은 통로의 역할밖에 못 되는 걸까. 통로라 함은 손바닥 안에서 문이 생긴다는 뜻일까. 궁금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백호는 여전히 자라, 라는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던 거다.

저 녀석은 때때로 이런 식으로 자신을 어린애 대하듯 할 때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놈이 몇 살인지도 모른다. 겉모습만 보더라도 자신보단 연상일 것 같기는 한데, 사람이 아니다 보니 겉모습으로 모든 걸 책정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설마하니 100살을 넘은 건 아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명월은 손바닥 안에서 노는 불씨를 바라봤다.

작고 귀엽다. 전혀 뜨겁지가 않았다. 원할 때 나타나는 불씨라. 정말 탐난다. 나도 이런 힘을 가진다면 오죽 좋을까. 그리 생각하는 동안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진다.

이런 불편한 모습으로는 잠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점점 더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맞춰서 명월의 고개가 조금씩 흔들린다.

이렇게 자 버리면 저 녀석이 얼마나 자신을 우습게 생각하겠는가. 저 이상한 놈.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단 일어나서 방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그 순간 명월의 손이 천천히 내려가고 고개가 백호의 가슴팍 쪽으로 흘러 내려간다. 그에게 얼굴을 묻은 채로 명월은 고른 숨을 내쉬었다.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든 명월을 확인한 백호는 불씨를 치워 내곤 양팔로 그 몸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렇게 명월을 포옥 안은 채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마음 한구석이 울렁거리면서 점점 단단해진다. 품에 안긴 녀석을, 영원히 이렇게 두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시간이 멈춰서 이 상태로 계속 있을 수 있다면 천 년이라도 앉아 있을 것 같았다.

“……이상한 생각을 하는군.”

자신이 한 생각이 우스워서 그리 중얼거리고 난 후 백호는 웃었지만, 그 웃음은 금방 지워졌다.

가볍게 명월을 추스르고 나선 재차 그쪽으로 시선을 던지나 싶던 백호는 고개를 숙였다.

명월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누르다가 천천히 떨어뜨렸다. 그러곤 내쉬는 한숨은 조금은 복잡하고, 다디단 향내를 풀풀 풍겼다.

* * *

아침에 눈을 뜬 건 바깥이 소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방 한소규는 이불을 걷고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대청으로 나와서 주변을 살피자 바쁘게 오가는 이들이 보였다.

이방은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손짓하면서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얼굴이 해쓱하게 질린 동이 어멈이 말했다.

“장독이 깨졌습니다.”

“장독이 왜 깨진단 말이냐.”

“아이들이 장난으로 돌을 던진 게지요.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암만 그래도 아이들이 장난으로 돌을 던질 리가 없었다. 아닌 척 둘러대고 있음을 눈치챈 이방은 솔직하게 말하라 했다.

동이 어멈은 눈치를 살피면서 이를 어쩌나 싶었다. 그러다가 결국 이방 앞으로 걸어가선 소매 안쪽에 숨겨 둔 구겨진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이방은 그걸 받아 들어 펼치고 안에 적힌 글귀를 확인했다.

<네 딸도 죽어야 한다.>

붉은 색으로 휘갈겨진 문장은 끔찍한 것이었다.

그걸 본 이방이 안색을 굳혔고, 동이 어멈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녀를 두고 이방은 종이를 찢었다.

그걸 구겨서 바닥으로 던지고 싶었으나 그랬다가 다른 이가 보기라도 하면 낭패였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품 안쪽에 넣자 반대편에서 문소리가 나면서 아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막 일어나긴 했어도 푹 잠들지 못했던 것인지, 얼굴색이 좋지 않은 아내는 “무슨 일입니까.”라고 물었다.

“별일 아니요. 괜찮으니 들어가서 더 자시오.”

뒤숭숭한 소리를 듣고 깬 것이니 다시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숨겨지지 않는 불안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아내에게 재차 괜찮다 말하려던 순간 그녀의 뒤로 한 소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직 몸을 추스르는 중이었기 때문에 안색이 좋진 않았던 딸이 얼굴을 내밀자 순간 당황한 이방은 급히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아내 옆에 서선 딸의 시야를 가린 그는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넸다.

“일찍 일어났구나. 아침부터 소란스럽긴 했지만, 괜찮으니 걱정 말고 들어가 있거라.”

걱정 말라는 말에도 딸의 굳은 눈빛은 여전했다. 입을 꾹 다문 채로 바라보는 건 이방의 얼굴에 남아 있는 상처 자국이었다.

그의 딸은 얼굴이 왜 이리된 것인지에 대해 말해 주진 않아도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양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딸을 앞에 둔 이방은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힘들게 되살아난 아이를 더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딸아이의 등에 손을 올렸다.

“정말 괜찮다. 그러니 어머니와 함께 들어가 있거라.”

그 말에 부인이 딸의 손을 잡고는 들어가자, 라고 말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번갈아 보던 딸은 서글프게 눈을 내리뜨곤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그들이 들어가고 문이 닫히고 나서야 이방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인 게 아니었다. 굳은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방은 양손을 움켜쥐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만 했다. 자신이 아니라면 그 누가 저들을 지켜 줄 수 있단 말인가. 이방은 아직도 아래쪽에 서 있는 동이 어멈에게 아침상 준비를 하라 시켰다.

* * *

닫힌 대문을 바라보는 이방 한소규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굳은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가 왜 이런 얼굴인지를 모르진 않았던 머슴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러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아무래도 큰일이 날 것 같으니, 오늘은 나가지 마시지요.”

실제로도 지금 대문 밖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있었다. 그들 손에는 계란이나 돌, 혹은 몽둥이 같은 것들도 들려 있었다.

처음에는 말로만 뭐라 했지만, 날이 지날수록 그들의 기세는 점점 험악해졌다. 기어이 어제는 돌을 던져 그것에 맞은 이방이 대문 앞에서 구르기도 하지 않았던가. 뒤에 서 있던 머슴이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더 큰일이 생겼을 것이었다.

어제 일을 떠올린 그는 굳은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이방은 마음을 먹은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대문을 열어라. 다녀올 거다.”

기어이 오늘도 관아에 나가 볼 셈인 모양이었다. 제 주인의 성격상 그게 당연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머슴은 걱정이 되어선 제 가슴을 손으로 쳤다.

말로는 그를 막을 수 없을 테고 보내 줄 수밖에 없는 걸까. 안타까운 눈으로 이방을 살피던 머슴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곤 대문에 손을 댔다.

오늘도 무사할 수 있도록. 의미가 없는 생각을 하면서 대문을 열자마자 바깥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죄인은 당장 나와라! 나와서 바닥에 엎드려라!”

“왜 네놈의 딸만 무사한 거냐! 그러면 다른 집은 어쩌라는 거냐! 네놈의 딸을 내놓아라!”

“올해는 분명 네놈의 딸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다시 살아난 거냐!”

“네놈 때문에 우리 모두가 피해를 입을 순 없다! 당장 네놈의 딸을 내놓아라!”

차마 들어 줄 수 없을 정도의 악담이었다.

대관절 저들이 뭐라고 저딴 소리를 지껄인단 말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딸이었다. 그 죄 없는 아이가 살아난 게 저들이 그토록 분노케 할 만한 일이던가.

이 고을 사람이니만큼 저들이 이만큼 분노하고 성을 내면서 언성을 높이는 진짜 이유에 대해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딸을 건드리는 것만큼은 참아 줄 수가 없었다. 양손을 움켜쥔 이방은 반쯤 열린 문을 활짝 열고는 그 앞에 모여든 이들 앞으로 나아갔다.

밖으로 나오는 이방을 본 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돌을 던지려 했다. 그 순간 이방이 소리를 쳤다.

“다들 그만두시오! 왜 아무 죄 없는 내 딸을 물고 늘어지시는 것이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아온 돌이 이방을 지나쳐 대문에 부딪쳤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날아오는 돌멩이에 놀란 머슴이 바깥으로 나와 이방의 손목을 붙잡고 그를 안으로 끌어당기려 했다.

위험하니 들어가자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방은 계속해서 돌을 던지는 이들을 노려봤다.

“내 딸은 아무 죄가 없소! 그러니 이리 모여서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썩 물러들 가시오!”

“그러면 내 딸은 죄가 있어서 죽었단 말인가!”

분노가 담긴 호통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 있었다. 바로 안색을 굳힌 이방이 고개를 돌리자 사람들 사이로 엉망인 몰골로 서 있는 사내가 보였다.

마르고 볼품없는 사내는 실핏줄이 일어선 눈을 치떠 이방을 노려보며 그에게 삿대질을 했다.

“죄가 있고 없고를 떠나, 때가 되면 하나씩 죽어야 해! 네놈의 딸이 죽지 않는다면 다른 집의 딸이 죽게 될 게 아니냐! 네놈,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네놈의 딸이 죽지 않는 걸로 모든 일이 끝난다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는 네놈의 딸이 죽기 전엔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야!”

“내 딸이 죽을 일은 없을 테니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마시오!”

사내의 되지도 않는 말을 더는 듣고 있을 수 없었던 이방은 똑같이 언성을 높였다.

분노가 담긴 그 외침에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로 술렁거림이 일어난다. 자기 딸은 죽지 않을 거라니. 저건 대체 무슨 말이야. 그런 불신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들을 두고 이방은 재차 소리쳤다.

“앞으로 수명이 다할 때까지 내 딸은 죽지 않을 거요! 그건 다른 집도 마찬가지요!! 다 죽어 가던 아이가 갑자기 살아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소! 내 딸이 살아났으니 다른 집 딸들도 그리될 수 있을 거라고는 왜 생각하지 않는 것이오!”

이방의 외침에 사람들 사이로 술렁거림이 생겨났다. 대부분이 불신을 담고 있었다.

역시나 저놈이 미친 거야. 그러니 이상한 방법을 써서 제 딸을 살린 거지. 애초에 다른 집 딸은 아무래도 좋았던 거야.

그런 식으로 속닥거리자 사내가 재차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사특한 말로 우리들을 속이려 들지 마라! 그런 식으로 빠져나갈 셈인 거지!”

“그렇게 의심스럽다면 정오가 지나서 다시 찾아오시오! 그때, 내 딸을 살려 주신 분과 만날 수 있게 해 주겠소!”

이 말을 하는 순간 이방은 목이 탔다.

이상하진 않겠지. 목소리가 떨려서 나가는 건 아니겠지. 지금 표정이 어떨까 등등.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방은 재차 외쳤다.

“그분께서 이 고을을 떠돌던 귀신을 퇴치해 주셨소이다! 그래서 내 딸이 살아난 거요! 그분이 말씀하시길, 귀신을 쫓아내 버렸으니 앞으로 매년 누군가 죽어 나가는 일은 없을 거라 하셨단 말이오!”

지금 이 말을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가 아니라면 다 죽어 가던 딸이 살아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는 사람이 태반인 곳이었다. 매년 죄 없는 소녀들이 죽어 나가도 그걸 쉬쉬하고 숨기려는 이들이었다. 사람들의 술렁거림이 조금 더 커지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담긴 불안을 읽은 이방은 되었다는 걸 느꼈다.

명월의 생각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여기서 쐐기만 박으면 되었다. 마지막 말을 하려 입을 여는 순간, 사내가 지치지 않고 따졌다.

“입 닥쳐!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마! 내 딸이 죽었어! 그렇다면 네놈의 딸도 죽어야 해!”

“내 딸이 죽고 난 후, 또 누구를 죽이려 그런 망발을 지껄이는 건가!”

저 사내의 딸이 죽은 건 정말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다. 그렇다 해서 ‘내 딸이 죽었으니, 다른 집 딸도 죽어야 한다.’라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앞으로 사람이 죽어 나가지 않게 된 거야! 그 사실만을 두고 기뻐할 순 없는 건가! 언제까지 매년 사람이 죽기를 기다리면서, 그걸로 안심을 할 텐가! 매년 내 가족, 내 딸이 죽지 않기를 바라면서 살아야 하나! 내 딸이 시작이 되긴 했으나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된 것에 대해서 기뻐할 순 없는 겐가!”

말을 하는 도중에 갑작스럽게 마음 한구석이 뜨거워진다. 치밀어 오르는 억울함과 분노, 슬픔 등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 이방의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음 편히, 정녕 그렇게 살 순 없는 거냔 말일세……! 난 이제 신물이 나네!”

서글픔이 절절이 묻어나는 외침에 돌을 던지려던 자들은 천천히 팔을 내렸다. 시끄럽게 굴면서 아우성을 치던 이들이 조용해져선 멍하니 이방을 바라봤다.

양손을 움켜쥔 이방은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어금니를 악물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이방은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분께서 정오에 와서 완벽하게 처리를 해 주기로 하셨으니, 그리들 알고 그때 찾아오게나.”

앞서 언성을 높였을 때하고는 완전히 다른 지친 모습으로 중얼거린 이방은 다시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에 서 있던 머슴은 황급히 소매로 눈을 문지르고는 안으로 따라 들어와 대문을 닫았다.

닫힌 대문 너머는 조용했다. 하지만 지금뿐이었다. 정오 때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이런 지긋지긋한 일이 반복될 거다. 별일 없이 잘 마무리되어야 할 텐데.

무거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이방은 옆에서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머슴이 찔찔 울면서 소매로 열심히 눈물을 닦아 낸다.

이방은 쓰게 웃었다.

“넌 또 왜 우는 거냐.”

“하지만 나으리의 마음고생이 절절하게 느껴져서……. 아무것도 못 도와드려서 그럽니다.”

웅얼거리던 머슴은 입을 다물곤 킁, 하고 코를 삼켰다.

표현하는 게 서투르긴 해도 마음은 느껴졌던 이방은 머슴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앞에 어린 소녀가 서 있었다. 아내와 나란히 서 있는 딸, 초롱을 본 이방의 입가로 어색한 미소가 걸린다.

“안에 들어가 있으라 했는데 왜 또 나온 것이냐.”

“아버지. 괜찮으세요?”

조심스레 묻는 말 안쪽으로 참으로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걱정이 되어선 울먹거리는 눈동자로 바라보는 딸을 바라보던 이방은 양팔로 부인과 딸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을 품에 안은 채로 이방 한소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찮다.”

지금 이 순간 이방은 사또 명월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괜찮으냐고 묻는 말에 괜찮다고 할 수 없는 그 마음이 절절하게 이해되었다.

* * *

탁자에 엎드린 채로 반짝거리는 진주를 살피는 사내의 눈동자는 반쯤 흐려져 있었다. 무의식중에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진주를 굴리던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내를 확인하곤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평소와 달리 탁자에 엎드린 채로 올려다보는 모습이 이상했던 걸까. 들어오던 사내가 멈칫하는 걸 본 화소군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진다. 고개를 든 그는 턱을 괸 채로 사내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냐. 웬만큼 재미있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성가시게 굴지 말라 말했던 것 같던데.”

“지금 마을 쪽에서 이상한 일이 생길 모양입니다.”

“그게 무어냐.”

“한소규가 제 딸을 살린 자를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겠다 한 모양입니다. 그 존재 덕분에 딸이 살아났고, 앞으로는 매년 죽어 나갈 소녀들이 없어질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합니다. 본인이 하는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와서 직접 두 눈으로 보라 했답니다.”

“호오, 이것 참―.”

중얼거리던 화소군은 입을 다물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긴 했으나 그건 웃음과는 거리가 먼 표정이었다.

인상을 쓴 채로 눈을 내리뜨나 싶던 화소군은 중얼거렸다.

“내가 본 사또는 이런 식으로 일을 치는 분이 아닌데―.”

이런 식으로 눈에 띄는 짓을 벌여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방이 그런 식으로 말했을 리가 없고. 이건 분명 음모가 있는 거였다. 대체 어떤 식으로 이 일을 무마할 것인지, 흥미가 생기는 한편, 껄끄럽기도 했다.

지금까지 상대하려는 자들은 대부분 수가 읽히거나 하려는 짓이 빤히 보였거늘, 명월은 그게 안 되었다. 애초에 지금껏 상대하던 자들과 달랐기에 비교 대상 자체가 될 수 없긴 하겠다만―.

진주를 한 손에 쥔 채로 화소군은 재차 사내에게 시선을 던졌다.

“관아에 사람을 보내 알아본 게 있더냐.”

“감옥 안에는 이 고을 출신이 아닌 포졸들이 주로 보초를 서고, 죄수들에게 먹이는 식사도 따로 준비한다 합니다. 그리고 도성에서 내려온 사또의 지인이라는 자는 아직 정체를 알아낼 수 없었으나, 겉보기로는 중이라고 합니다.”

“중이라면 정체를 알아내는 게 훨씬 더 수월할 게 아니겠느냐.”

도성에 존재하는 모든 절을 샅샅이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어찌 아직도 알아낸 게 없단 말인지. 한심하다는 화소군의 시선에 사내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승복을 입고는 있으나 진짜 승려는 아닌 것 같다고 합니다. 고기를 무척 좋아하고, 목청도 크며, 하는 행동만을 본다면 예의가 없는 불한당 같다고는 하는데…….”

“불한당 같은 이가 사또의 지인이라며 내가 가져간 진상품을 고대로 들고 나타났다는 거냐?”

싸늘한 반문에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그냥 솔직하게 그 남자에 대해서 알아낸 게 아무것도 없음에 대해서 죄송하다 사죄를 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하지만 도통 그에 대해 아는 자가 없으니 사내도 답답한 심정이었다.

그걸 간파한 화소군이기에 저리도 싸늘한 얼굴을 하는 거다. 머뭇거리던 사내는 결국 순순히 실토를 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희들 방식으로는 그자에 대해서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껏 들은 말 중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그래서 안 되는 게 아니냐.”

“……죄송합니다.”

노골적으로 실망을 드러내는 화소군을 보는 사내는 속이 쓰렸다.

고작 사람 하나를 알아내지 못해서 이런 일을 당하다니. 속이 뒤틀릴 것 같았던 사내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되었다. 이만 나가 봐라.”

곁에 있어 봤자 속 시원한 대답도 못할 거다. 그러느니 혼자서 명월의 심중을 파악하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나가 보라 한 사내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왜 저러는 건가 싶었던 화소군의 얼굴이 굳는다.

싸늘하게 식은 얼굴은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그 전에 사내는 급히 서찰을 탁자 위에 올렸다.

“이병현 대감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잘 접힌 서찰을 내려다보는 화소군의 눈빛은 싸늘했다. 몇 번 기회를 주었으나 그걸 번번이 말아먹은 돼지 새끼에게 더는 관심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한번 일을 수습해 주려고도 했으나, 돌아온 건 한심하게 변한 호방이었다. 그리고 호방의 손에는 진주가 들려 있었다.

가벼이 생각했던 일이 점점 복잡하게 꼬이는 건, 누군가가 실수를 했기 때문이었다. 당장은 그 원인 중 하나가 이병현 대감이라는 식으로, 모든 실수를 떠넘기고 싶었던 화소군은 혀를 찼다. 그리고 그는 종이를 앞으로 당겨 와 펼쳤다.

빠르게 내용을 확인한 화소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이건 대체 무언가 싶은 듯 안색을 굳힌 그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이게 무어냐.”

“편지를 전달한 자가 현재 대감의 상태가 위독하다고만 말했습니다.”

실제로 종이에 적힌 건 이병현 대감이 위독하다는 거였다. 갑자기 쓰러진 그를 낫게 하기 위해서 의원을 부르고 약도 처방해서 먹이고 있으나, 여전히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니 도움을 요청한다는 글귀였다.

하지만 편지에는 이병현 대감이 왜 이리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었다. 사내는 그걸 알고 있을 거다. 앞서 물은 질문에 대해 만족스럽게 대답하지 못했기에 다른 방식으로 그걸 무마하고 싶을 테니 말이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말해 봐라.”

“간밤에 이병현 대감이 뒤뜰을 산책하러 가는 걸 본 후에, 바로 돌아오지 않는 게 이상해서 그쪽으로 가 보니 후원의 나무 아래에 쓰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다들 쉬쉬하면서 말을 아끼고 있으나, 처음 목격한 자의 말에 의하면 오른쪽 얼굴 절반과 가슴, 온몸 곳곳에 맹수의 발톱 자국인 것처럼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맹수의 발톱 자국이라니?”

“누구는 그것이 구미호의 소행이라고 하더랍니다. 얼굴에 생긴 자국이 영락없이 구미호의 그것이라고…….”

“구미호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고 단언할 수 없었다. 여긴 반양이기 때문이었다.

사내가 하는 말을 무시하고 가벼이 넘겨 버리려 했던 화소군이나 금방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진지한 얼굴이 된 그는 눈을 내리뜬 채로 구미호라, 라고 중얼거렸고 그 모습에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결정을 내리는 건 화소군의 몫이었다. 이병현 대감 측에선 급하게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으나, 화소군이 그를 버리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찌할 것인가. 그런 의문을 담은 눈빛으로 바라보자 화소군이 중얼거렸다.

“편지는 그냥 버려라.”

이병현 대감을 버리기로 한 것인가.

사내는 화소군의 앞에 놓인 편지를 다시 들고 제 품 안쪽에 밀어 넣었다. 고개를 꾸벅인 사내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혼자 남게 된 화소군은 무표정을 한 채로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이런 순간에 이병현 대감이 당하다니. 그것도, 구미호의 소행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괴이쩍은 일로 말이다.

두 눈으로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구미호가 한 것 같다고 누군가 말을 꺼냈으면 그건 금방 소문이 되어 파다하게 퍼지게 될 거다. 그리고 여러 많은 소문들 중에 구미호도 나타난다, 라는 구절이 한 줄 더 추가될 터였다.

다른 곳에선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될 뿐인 사실이 이곳에선 사실이 되어 떠돌게 된다. 사람들은 제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걸 두려워하며 몸을 사릴 거다. 그리고 은밀히 자신에게 연락을 취해서 도움을 요청하겠지.

그런 식으로 장사를 해 왔다. 따지고 보면 이것 또한 장사에 도움이 되는 괴이한 소문이 될 수도 있겠으나,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건 화소군 그가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당한 사람이 이병현 대감이라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하필 지금 이 순간에, 그것도 사또 명월을 노리던 자가 아니었던가.

그저 단순한 우연일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화소군은 품에서 꺼낸 진주를 손바닥 위에 올리곤 그걸 내려다봤다. 차갑게 그걸 바라보던 화소군은 손을 움켜쥔 채로 중얼거렸다.

“유명월.”

제 몸에 스스로 단검을 박아 넣는 것으로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했던 사내를 떠올린 화소군은 입꼬리를 비틀려 올렸다.

솔직히, 지금까지 없던 존재였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으려 했던 게 사실이긴 했다. 하지만 결국 이리되는 모양이었다.

무시하고 모르는 척하고 싶어도 그리할 수 없게 된 거냐며 화소군은 진주를 움켜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 * *

반양엔 바깥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이 몇 가지나 있었다. 그건 그곳에 사는 토박이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매년 갑작스럽게 소녀들이 죽어 나가는 건 수많은 비밀 중 하나였고, 이제는 익숙한 일 중에 하나였다. 매년 소녀가 죽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 해가 시작하기 전, 겉으로 내색하진 않아도 내심으론 겁에 질려 덜덜 떨던 자들 귀로 어떤 여자가 죽었다, 라는 말이 돌게 되면 그때부터 안심하고 두발 뻗고 자는 거다. 그러다가도 신년이 다가오면 또 누가 죽을 건가 싶어서 다들 숨죽인 채로 수군거린다. 그런 일이 매년 있어 왔다.

그런데 이번에 죽어야 할 소녀가 되살아났고, 그 소녀의 아비인 자가 ‘지금부터 죽는 소녀들은 없을 거다.’라면서 호언장담을 했다.

그건 엄청난 일이었다. 다들 이방이 미쳐서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건만, 그러면서도 진짜인가 싶어 그의 집 앞으로 하나둘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방 한소규의 집 앞은 금세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자리가 없어서 나무에 올라타는 이들도 더러 생겨났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대문이 열리고 이방이 나오길 기다렸다.

개중엔 그가 한 말이 진짜인가 싶어 기대와 초조함으로 기다리는 자들과, 그가 헛소리를 지껄이면 당장 욕을 하고 돌을 던져 줄 마음으로 찾아온 자들이 섞여 있었다.

각자 다른 생각들을 품고 있으니 분위기는 점점 더 묘해졌다. 사람들이 작게 속삭이는 말들이 한데 뭉쳐서 술렁술렁 거린다.

한편, 대문을 사이에 두고 한소규 집에서 일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초조한 기색이었다.

이번 일은 그들도 모르는 거였다. 주인인 한소규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 이러다가 방에서 나오지 않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초조하게 방 쪽을 살피는 동안, 덜컹―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놀라 뒤를 돌아보자 방에서 나오는 이방이 보였다.

대청으로 나와 고무신을 신고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이방은 온몸에 꽂히는 식솔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개중 하나인 머슴과 동이 어멈이 바로 옆으로 달라붙었다.

“나으리,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나가지 마셔요.”

“그렇습니다. 저렇게나 사람이 많은데 그 사이에 미친놈이라도 끼어 있으면 어쩝니까. 요즘에는 겉모습만 봐서는 그게 미친놈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안에 계셨다가 사람이 좀 줄면 그때 나가십시오.”

“애초에 내가 오라고 해서 모인 이들이 아니더냐. 그런데 그들이 줄면 그때 나가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타박 아닌 타박에 그들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방이 오라고 했기에 몰려든 사람이라는 걸 왜 모르겠는가. 하도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하니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던가.

복잡한 얼굴로 손을 마주잡고 있던 동이 어멈이 안절부절못한다.

“그래도, 그것이―.”

다른 식솔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지금 이방이 밖으로 나가면 큰일 날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의 불안과 걱정을 모르진 않았다. 동시에 이렇게까지 걱정을 해 주니 그게 고마웠다. 저들이라면 자신에게 문제가 생겨도 딸과 아내를 잘 보살펴 줄 터였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짐을 느끼며 이방은 대문으로 걸어갔다.

머슴이 뒤따라오면서 몇 번이나 아이고, 라는 소리를 냈다. 잡을 수도 없고, 앞을 막을 수도 없었다.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동안 어느새 이방은 닫힌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대문을 노려보던 이방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문을 열거라.”

머슴은 저도 모르게 걸쇠에 손을 올렸다. 양손으로 그걸 꾸욱 누르는 폼이 ‘절대로 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이방이 차분한 시선을 보내오자 손이 덜덜 떨린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싶어서 몇 번이나 망설이던 머슴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크흑, 하고 굵직한 눈물을 흘린 그는 떨리는 손으로 대문을 열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리고 집 앞에 몰려든 사람들이 이방의 눈에 들어왔다.

정말 많기도 하구나. 예상을 하긴 했지만, 그걸 훌쩍 뛰어넘는 엄청난 인파에 이방은 순간적으로 압도되었다.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던 이방은 사람들 앞쪽으로 나와서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익숙한 어린애 몇을 발견했다. 고아들이었다.

아이들은 이방이 저를 쳐다보자 반색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지금 이 자리가 어떤 것이지도 모르고, 그냥 사람이 몰리니 궁금해서 따라 나온 모양이었다.

그 긴장감 없이 해맑기만 한 모습 덕분에 이방의 몸에 가득 찼던 긴장이 빠져나갔다.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끼며 이방은 대문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머슴이 따라 나온다.

왜 그러나 싶어서 옆을 보자, 바로 등 뒤에 서선 손을 마주잡고 있다. 손을 덜덜 떨면서도 애써 턱을 올리고 버티는 모습이 우습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머슴의 마음이 고마워서 이방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 앞에 선 것은 처음이었다. 이토록 많은 눈들이 자신을 주시한 적도 없었다. 엄청나다 할 수 있는 일임에도 왜 마음이 차분한 건지 모르겠다.

다음에는 조금 더 좋은 자리에서 이렇게 서 봤으면 좋겠다면서 이방은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닌 일로 너무 많은 분들을 번거롭게 해 드린 건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처음 시작을 부드럽게 하고자 가벼운 농을 던져 봤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시선이었다. 그들의 눈동자가 말했다. 지금 듣고자 하는 건 그런 말장난이 아니라고 말이다. 앞서 꺼낸 말이 있으니 그것들은 분명 저들 사이에서 제멋대로 변하고 부풀려졌을 거다.

단순한 호기심만으로 모여든 자들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들 사이에선 그동안 딸을 잃은 사람도, 죽은 이들과 관련된 자들이 대부분일 거다.

폐쇄적인 이곳에서 기이할 정도로 오랫동안 내려온 풍습 아닌 풍습은, 반양 땅에 사는 거의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족이나 알고 있던 이가 갑작스럽게 죽어 사라지는 슬픔을 맛보게 했다. 때문에 모인 자들 대부분은 자신에게 적의를 품고 있을 거다. 자신만이 딸을 잃지 않고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걸 수도 있음이었다.

이방은 양손을 움켜쥐었다. 담담해졌다 싶었으나, 막상 말을 꺼내려 하는 순간 망설여진다. 어떤 식으로 시작해야 하는 걸까.

손을 움켜쥐었다가 펼치기 반복하던 이방은 입을 열었다.

“제 딸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 말에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의 시선은 조금 더 매섭게 변했다.

그래. 네놈의 딸이 살아난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다. 요는 어찌 네놈의 딸만 살아났느냐는 거다.

저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로 이방은 재차 입을 열었다.

“원래 제 딸은 올해가 시작될 무렵부터 열이 나 오랫동안 의식을 잃은 상태로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몸이 안 좋은 거라고만 생각했지만,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엔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올해의 제물은 제 딸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고, 며칠간 산송장처럼 살아왔습니다.”

“…….”

“처음에는 믿기 힘들어서 부정하고 달리 딸을 살릴 수 있는 방도가 없을까 싶어서 안 알아본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 같은 건 없었습니다. 단순히 병 때문에 딸이 아픈 거라면 온갖 귀한 약재를 쓰면 그만이겠지만, 그런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엇인지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이 수두룩했으니까요.”

사람들 사이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일단은 들어 주자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하는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 공격을 할 셈이던가.

심장의 박동은 점점 빨라지지만, 그와는 반대로 머릿속은 맑아졌다.

“딸을 살리고 싶어서 뭐든지 하고 싶었으나,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딸을 살리는 건 불가능했고, 만약 제 딸이 살아난다면 다른 죄 없는 아이가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겁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누군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당신의 딸이 죽지 않으면 다른 집 딸이 죽게 될 게 아닌가!”

“올해 당신의 딸로 정해졌으면 당신의 딸이 죽어야 우환이 없어진단 말이야!”

날카로운 남자와 여인의 외침에 이방은 그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왜 매년 누군가 죽는 것에 대해서만 말을 하는 것이오!! 왜 꼭 누군가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을 하는 거냔 말입니다!”

“그건 이 고을의 규칙이다! 누군가 죽어야 다른 곳에 탈이 없어!”

“아직도 산신령이니 영험한 힘을 지닌 누군가 이 고을에 머물고 있다 생각하는 것이오?! 그런 케케묵은 옛날이야기를 믿는 거요?!”

그때 사람들 사이에 있던, 나이를 지긋이 먹은 노인이 앞으로 나서서 지팡이를 휘둘렀다.

“어찌 그런 불경한 말을 하는 겐가! 이 고을을 지켜 주시는 신성한 신령님을 욕되게 할 셈이던가!”

“정말로 신성한 신령이라면 산 사람을 억울하게 죽게 하진 않을 겁니다! 사람이 죽는 이유가 그런 게 아님을 알면서도 언제까지 모르는 척을 하실 겝니까! 신령이니 뭐니 그런 것들의 소행이 아니라 귀신들의 짓거리입니다!!”

이방이 내뱉은 말에 순간적으로 정적이 감돌았다. 다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선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냐는 식으로 바라본다.

이방도 자신이 이렇게까지 말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더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길 수 없었다. 그건 모두에게 독이 된다.

“귀신들이 인간들을 해하는 거란 말입니다! 언제까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실 겝니까!”

한번 말을 내뱉자 두려움이 사라진다.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사라지는 걸 느끼면서 이방은 침을 튀면서 외쳤다.

“왜 매년 죄 없는 아이들이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왜 어제는 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산속에서 죽은 모습으로 발견이 된단 말입니까! 왜 숲에서 사람이 사라지면 그걸 찾지 않는 거냔 말이요! 그들이 죽음으로 인해서 당장 내가, 우리 가족이 괜찮아져서 그러는 것이오?! 그게 언제까지 갈 것 같소?!”

이방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면서도 쉬쉬하고 눈을 감고 있으니 귀신들이 더 이곳으로 몰려드는 거요! 귀신이 사람을 잡아먹는 걸 알면서도 묵인하고 쉬쉬하는 건, 우리 고을밖에 없을 거요! 그게 제대로 된 일이란 말이요?! 우린 대체 언제까지 이리 살아야 하는 겁니까! 이건 마치, 귀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 인간이 이 땅에 사육 되는 거나 다름이 없는 일이오!!”

그 순간 돌이 날아와 이방의 머리를 맞췄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신음을 삼킨 이방이 고개를 숙이며 이마를 손으로 누르자 뒤에 서 있던 머슴이 놀라 앞으로 나섰다.

“나으리!”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 된 머슴은 앞으로 나서서 양팔을 벌려 이방의 앞을 막았다.

“말로 하시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돌 하나씩만 던져도 우리 나으리께서 돌아가시겠소! 왜 사람이 말을 안 하고 돌부터 던지는 게요! 그러다가 천벌 받을 거요!”

“천벌은 우리가 아니라 네놈들이 받아야 하지! 딸년이 살았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것이더냐! 어찌 그런 망발을 지껄여!”

돌을 던진 이의 뒤에서 머리가 산발에 앙상하게 마른 여자가 튀어나왔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이방의 얼굴을 죄다 뜯어 댈 것 같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키웠다.

“그러면 내 딸이 귀신에게 잡아 먹혔단 거냐! 내 딸이 죽어서 그나마 이 고을이 조용하고 오늘도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간다고 믿고 있었던 내가 무엇이 되느냔 말이야! 딸이 죽고 나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내 남편도, 그러면 귀신이 데리고 간 건가?!”

절규하는 여자의 눈에는 핏발이 섰다. 금방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왜소한 체격임에도 그녀의 처절한 외침은 그곳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컸다.

“어찌 내 딸이 귀신에게 먹혔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일 수 있어?! 내 딸은 신령님이 데리고 간 거야! 죽었어도 혼령은 좋은 곳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거야! 난 그렇게 믿을 거야! 내 딸은 절대로 귀신이 데리고 간 게 아니란 말이야!”

딸을 잃어야만 했던 여인의 한이 맺힌 처절한 외침을 들은 이방은 눈을 감았다.

여인의 외침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내 딸도 마찬가지네! 지금쯤 좋은 곳으로 가서 예쁜 옷 입고, 힘든 일 하나도 모른 채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야! 자네 딸이 살았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다른 집 딸의 죽음을 매도해서 되겠나!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자네 딸이 살았으니 다른 건 아무래도 좋은 거지?! 그러니 그딴 끔찍한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지금까지 죽어 간 아이들을 애도해도 부족할 판에 어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자네 딸이 이대로 건강하게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딴 못된 심보로는 자네 딸도 재차 신령님의 부르심을 받을 거야!”

“제 딸을 살리기 위해서 분명 이상한 짓을 한 게지! 그 때문에 곧 다른 죄 없는 아이가 죽게 될 거야! 그 전에 우리 저 집 사람들을 모두 죽여서 다른 집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합시다!”

“그래! 그렇게 하자!”

사람들의 흥분은 점점 커져만 갔다.

다들 내심으로는 알고, 생각은 하고 있었을 터였다. 매년 죽어 가는 아이들, 그리고 숲으로 들어가 실종이 되어 버리는 자들. 그들의 죽음이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그걸 귀신의 소행으로 치부해서는 더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이 땅이 그런 끔찍하고 무서운 곳이라면 더는 마음을 붙일 수가 없게 되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그렇게 갈 곳을 잃은 광기가 이쪽으로 쏠리게 되는 거다.

여기저기서 돌이 날아오고 개중에는 몽둥이를 꺼내드는 자들도 있었다. 바로 달려와서 정말로 죽일 기세였다.

머슴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몸을 돌려선 이방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나으리,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만약 여기서 이방이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면 그땐 억지로 안에 들여보낼 셈이었다. 여기에 있다간 정말로 죽게 생겼다면서 두 눈 가득 눈물을 담은 채로 바라보는 머슴을 두고 이방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서 피한다고 해도 갈 곳이 없었다. 대문을 걸어 잠근다 해서 저들이 집으로 들어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다 부질없는 짓이라며 이방이 고개를 젓는 것과 동시에 흥분한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면서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 순간 누군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더럽게 시끄럽군.”

여기저기서 아귀처럼 이방에게 달려들어 그를 물어뜯으려 하던 참이었다. 그때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스며들어 왔다.

지나치게 잘 들렸다. 그래서 움직이던 자들은 모두 멈출 수밖에 없었고, 그건 이방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나타난 건가. 그 순간 이방은 어깨와 목이 뻐근해지는 걸 느꼈다. 스스로를 다독여도 내심으론 긴장한 상태였던 거다. 그걸 새삼스럽게 느끼면서 이방은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사또와 스님은 어디에 있는 거야. 대체 어디에―.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너무 시끄러워서 귀가 얼얼하군.”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이방과 머슴이 동시에 몸을 돌렸다. 몰려들어 있던 마을 사람들도 그들을 좇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대문 바로 옆 담장 위에 걸터앉아 있는 승려복을 입은 자를 발견했다.

한쪽 다리를 세운 채로 느긋하게 앉아 있는 승려를 보는 순간 사람들 사이로 작은 술렁거림이 일어난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저 낯선 존재는 뭔가 싶어 일단 경계부터 하게 되는 거였다.

설마하니 그들의 은밀한 비밀이 새어 나간 건가 싶었던 자들은 긴장한 얼굴로 몽둥이나 제 손에 들려 있던 무기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호는 담 위에 편안하게 앉은 채로 심드렁하니 말했다.

“내가 아니면 된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거냐. 그래서 어떻게든 이 집안사람들을 죽이겠다는 거냐. 하지만 그걸 알아야 할 거다. 만약 이 집안을 건드리면 그땐 더더욱 무서운 일이 생기게 될 거다.”

그리 말하며 백호는 가장 앞에 나와 있던 이를 가리켰다. 하고 많은 이들 중에서 하필 자신을 가리키는 것에 당황한 사내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다른 쪽에 있던 사내가 앞으로 나서선 백호를 비난했다.

“네놈은 누구냐. 분명 이방이 데리고 온 자겠지. 애초에 저자가 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던 거야. 딸을 살리려고 별 사기꾼을 다 데리고 왔군.”

이방은 제 딸이 죽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원히 매년 소녀들이 희생당할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걸 증명해 보겠다 운운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모여들게 하더니만, 결국 한다는 짓이 이런 거다.

저런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면 사람들이 다 믿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어림도 없다면서 굳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내를 두고 백호는 아래로 훌쩍 뛰어 내려왔다.

너무도 가볍게 옆으로 내려와 서는 백호를 본 머슴이 놀라선 이방의 건너편으로 도망가듯 몸을 피했다.

“나으리, 저자는 뭡니까.”

달라붙은 머슴이 물었지만, 이방은 대답이 없었다.

백호를 보는 그의 눈동자 안쪽에 서린 건 걱정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 마음을 담아 바라보자 백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가 내려간다. 그리고 그는 긴 지팡이를 한 손에 든 채로 사람들 앞으로 걸어갔다.

막 이방에게 달려들려던 자들이었기에 거리가 좁혀 든 참이었다. 맨 앞줄에 서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저들 쪽으로 다가오는 백호를 보곤 움찔해선 뒷걸음질을 쳤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승려지만, 머리는 산발에 얼굴은 무척 준수했다. 거친 느낌이 풍기는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주춤거리며 몸을 사리는 자들을 하나하나 살피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장의 안위를 위해서 손에 피를 묻히면, 그 다음에는 더 무서운 놈들이 찾아온다?”

그걸 알고나 있는 거냐?

그런 억양의 말 속에는 무시할 수 없는 서늘함이 담겨 있었다. 되지도 않는 말은 지껄이지 말라 하고 싶으나, 결국 목구멍 안쪽에서만 빙글빙글 돌았다.

백호는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말했다.

“매년 이유도 모르고 소녀들이 죽어 가지.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네놈들은 왜 그녀들이 죽어 가는지를 알고 있어. 그건 그 시작이 네놈들이 불러들인 일이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야. 그러면 그 원인이 무얼까. 하나뿐이지.”

손가락 하나를 세우곤 보란 듯이 한 바퀴 느리게 몸을 돌린 백호는 자신에게 가장 먼저 공격적인 발언을 한 사내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 사내 뒤에 숨어 있는 이장이 보였다. 백호는 곧장 그리로 걸어갔다.

성큼성큼 빠르게 다가오는 백호를 본 사내는 급히 옆으로 물러섰고, 백호는 이장 앞에 서선 그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 척박한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네놈들의 목구멍에 기름칠을 치기 위해서 엄청나게 구리고 추잡한 귀신을 끌어들였던 거지.”

눈을 크게 뜬 채로 나직하게 속삭이는 백호와 얼굴을 마주한 마을 이장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백호는 이장의 탐욕스러운 눈동자를 응시하며 숨겨져 있었던 그 비밀을 언급했다.

“처음 그 귀신을 봤을 때 이상함을 감지했어. 위험한 게 왔구나―라는 걸 알면서도 당장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눈이 멀어서 그것이 원하는 걸 들어주기로 한 거지. 그래서 마을 외곽에서 홀로 사는 여자를 끌고 가 그 귀신 아가리에 처넣어 줬던 거다. 편하게 앉아서 인간을 잡아먹고 힘을 키우게 된 놈은 다시금 그걸 요구하게 되었고, 순식간에 마을에서 열 명의 처녀들이 사라져 갔지.”

“…….”

“처음 한둘은 무마할 수 있었지만 열씩이나 되니 더는 숨길 수도 없었던 게지. 여자를 바쳤는데도 계속해서 원하는 귀신의 탐욕스러움에 질리기 시작한 놈들은 슬슬 발을 빼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지. 네놈들이 불러들이고 키워낸 귀신은 이 땅을 떠나려 들지 않았거든―.”

나긋나긋하게 속삭이는 목소리 안쪽에 서린 질척함이 사람들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피부 위로 닭살이 오소소 올라올 정도로 소름이 돋았던 자들은 히에엑, 하는 소리를 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울음을 터트리는 여인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그런 어른들의 모습에 지레 놀라서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들 중에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백호를 보는 것들도 있었다. 백호가 암암리에 도움을 주었던 고아들이었다. 손가락질을 하면서 “어, 아저씨다.” 같은 소리를 하는 아이들을 확인한 백호는 아이들만 볼 수 있도록 작게 눈을 찡긋거리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더 멀찍이 물러선 자들을 보곤 그는 들고 있던 지팡이를 휙휙 돌렸다.

“귀신을 쫓아낼 수 없게 되자 너희들은 마을로 도망 오게 되었지. 그리고 문을 걸어 잠갔지만, 그거로는 귀신을 막기에 역부족이었지. 결국에는 귀신과 약속을 했어.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죽이지 말아 달라, 다만 일 년에 딱 한 번만 내려와 달라―라고 말이야. 멍청한 소리였지. 내려오지 말라고 하거나,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할 것이지 일 년에 딱 한 번만 내려오라니. 사람을 잡아먹어도 된다고 한 거나 다름이 없잖아. 거기서 네놈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난 거지. 귀신이 두렵고 싫기는 해도 손해는 보기 싫었던 거야.”

“…….”

“귀신이 갑자기 사라지면 비옥한 토지와 산에서 얻어 낸 온갖 귀한 약초와 삼, 버섯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한 거지. 그리고 그게 네놈들의 첫 번째 불행이었어. 그리고 다음으로는 두 번째 불행이 시작된다. 이건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테니, 어린애들은 좀 보내지 그래? 어른들이 한 짓을 듣게 된다면 아이들이 얼마나 놀라겠어? 듣고 나면 너희를 보는 눈초리부터가 달라질 텐데, 괜찮겠나?”

계속해서 돌리던 지팡이를 바로잡고는 그걸로 모여 있는 어린아이들을 하나하나 가리킨다.

그러자 굳은 얼굴로 숨죽이고 있던 자들이 아래로 손을 뻗었다. 함께 오거나 구경을 위해서 몰려든 아이들을 건드리면서 집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처음에는 두려우면서도 이 흥미진진한 상황에서 발을 빼고 싶지 않았던 아이들은 저항을 하다 험악한 어른들의 표정을 감지하고는 하나, 둘 뒤로 빠져나갔다.

충분히 아이들이 빠져나가는 걸 확인 후. 팔짱을 푼 백호는 바로 말을 이어 나갔다.

“두 번째 불행에 대해서 말해 보도록 할까. 처음에는 분명 별거 아니었던 귀신을 네놈들이 직접 아가리에 먹이를 처넣어 줌으로 해서 점점 거대한 걸로 만들다 보니 그게 여기저기 파다하게 소문이 난 거야. 그 소문을 다른 귀신도 듣고―.”

백호는 갑작스럽게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곤 양팔을 높이 들었다.

“―인간도 들었지.”

백호가 향한 곳에 서 있는 이들의 얼굴색은 파리하게 죽어 있었다.

크게 숨을 내쉬지도 못한 채로 숨죽이고 있는 그들을 향해 길게 웃음을 흘리며 백호는 위로 든 팔을 내렸다.

“이 땅은 귀신들 살기에 참 좋은 곳이야. 딱 봐도 놈들의 소행인 걸 알면서도 눈감아 주는 고마운 곳이거든. 처음에는 별 볼 일 없는 것들이 네놈들의 도움을 받아서 무럭무럭 자라났어. 그랬더니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커진 거야. 그리고 놈들은 숲으로 들어와 길을 헤매거나 멍청한 인간들을 잡아 사냥을 하게 된 거지.”

“…….”

“인간을 건드릴 순 없어도 언젠가 그리할 수 있는 거물이 되고 싶었던 것들은 숨죽인 채로 기다리고 있었지. 그것 때문에 평소 생활을 하면서 이상한 것들을 느꼈을지도 모르겠군. 갑자기 두통이 생기거나, 뭔가를 깜박 잊는다거나, 물건이 사라진다거나, 이유도 없이 화가 나고 짜증이 날 때가 있겠지. 그건 들러붙은 거야―.”

혹시 알고들 있었나.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 안쪽에 섞인 미묘한 억양에 사람들의 낯빛은 점점 더 파리하게 질려 갔다. 몇몇 이들은 제 몸을 끌어안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두려움에 질려선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덜덜 떠는 그들을 두고 백호는 허리에 한 손을 올렸다.

“그리고 세 번째 불행에 대해서 말해 볼까.”

“더 이상 지껄이지 말거라! 이 사기꾼 같은 놈!”

계속 되는 백호의 말. 그 말이 주는 묵직함과 숨이 막힐 정도의 죄책감에 사람들 대부분은 입을 벙긋도 하지 못했지만, 아닌 쪽도 있었다.

때로는 진실을 알면서도 그걸 숨기고자 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모두가 아는데도, 숨기고 감추려 필사적인 거다. 그 끝에 다다른 자는 결국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그런 식으로 우리를 현혹해서 대체 무얼 뜯어 갈 셈이더냐! 우리가 네놈의 세 치 혀에 휘둘릴 만큼 어리석어 보이더냐!!”

소리를 치는 건 얼굴이 벌겋게 익은 이장이었다. 한소리를 하고 난 후, 힘이 달리는 건지 얼굴이 벌겋게 익어선 힘겹게 숨을 헐떡거리는 모습을 본 백호는 이죽거렸다.

“다른 사람은 뭐라 해도 늙은이 네놈은 입 닥치고 있어. 이 마을에서 한자리 꿰고 있는 놈들은 이 모든 것들의 시작이나 다름없으니까. 애초에 네놈의 선조가 귀신을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이곳이 이 정도로 거지 잡탕이 되지 않았을 거야.”

싸늘하게 내뱉은 백호의 눈동자 속에서 감정이 사라진다. 검게 보이는 눈동자 안쪽으로 무언가가 생겨났다가 빠르게 사라진다.

그것은 정확히 늙은 이장의 얼굴에 달라붙어선 그의 모든 걸 꿰뚫어 보려는 듯싶었다. 그러자 이장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리면서 온몸이 덜덜 떨린다.

백호는 이장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이장 앞에 멈춰 선 채로 눈을 내리떴다.

“어디서 대거리냐. 버릇없이. 입 닥치고 있지 않으면 너 죽는다.”

“…….”

이장은 마른침을 삼켰고, 그의 가슴이 크게 위로 부풀어 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이장은 식은땀을 흘렸고,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장의 몸속에 들러붙어 있는 보잘것없는 게 보였다.

코웃음만 치면 당장 날려 버릴 수 있는 거였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 줄 필요가 어디에 있던가 싶었다.

그것들 또한 이 추잡한 늙은이가 짊어지고 평생을 가야 할 업보인 것을―.

“추잡하고 더러운 인간 같으니라고.”

이장만 들을 수 있도록 나직하게 속삭인 후, 백호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 번째 불행은 그거다!”

백호는 지팡이를 높이 들면서 소리쳤다.

“너희들끼리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를 감시하고 서로의 족쇄가 되어 버린 거지! 정말은 이곳에 뭐가 똬리를 틀고 있는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던 누구는 야반도주를 하려고 했어! 하지만 그리했다가 외부에 마을의 소문이 파다하게 나서 그 누구도 이곳으로 오지 않을 게 겁이 난 너희들은, 도망간 저들을 잡아들였지! 끌고 와 회유를 해도 그게 통하지 않으면 두들겨 팼다! 목을 매달고, 독을 먹이고, 산속으로 끌고 가서 땅에 파묻었지! 귀신이 아닌, 바로 너희 놈들이 직접 사람을 죽이게 된 거다!”

그 순간 몇몇이 소리를 지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몇은 고개를 돌리고, 몇은 귀를 막았다. 그리고 몇은 멍하니 백호를 바라봤다.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서 있는 그들을 보면서 백호는 나직이 속삭였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 하지만 아닐 수가 없잖나. 그게 사실이니까.”

모든 게 백호가 보고 들은 것들이었다. 여기에 모인 이 중에서 죄가 없는 자가 없었다. 모두가 그 일에 가담하거나 도움을 주거나 묵인을 한 자들뿐이었다.

살고자 도망치는 이들을 붙잡아 돌로 때려 죽여서 땅 속에 묻고, 싫다고 거부하는 이들을 산으로 끌고 가 나무에 묶어서 귀물의 밥이 되도록 하고, 그러다가 제 뜻과 맞지 않거나 약점이 잡히게 되면 괜한 누명을 씌워서 처리하고. 그런 식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밟고 지금껏 살아온 놈들투성이였다.

그런 놈들이 저렇게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채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봤자 동정심이 일지 않는 게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백호의 표정은 점점 차갑게 변했고 입가엔 싸늘한 조소만 남게 되었다.

“귀신으로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너희 놈들도 귀신같아진 거지. 너희가 여길 떠날 수 없는 게 아니라, 떠나지 않은 거야. 이 땅을 벗어난 순간 귀신이 아닌, 사람에게 쫓기게 될 테니까. 그게 더 무서웠던 거지. 치가 떨릴 정도로 공포스러웠던 거야.”

뒷짐을 진 백호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사람들 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백호가 다가오면 주춤거리며 물러서거나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채로 크게 숨도 내쉬지 못하는 그들을 두고 백호는 나직이 속삭였다.

“이방의 딸이 죽지 않아서 억울한가. 억울할 게 뭐가 있어. 애초에 시작은 너희들로 인한 거야. 아무것도 몰랐다는 헛소리는 지껄이지 마라. 매년 내 딸, 우리 가족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고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수두룩했을 테니까. 귀신뿐만이 아니라 사람도 들어와서 반양을 헤집고 다니는 걸 알면서도 너희는 아무 소리를 낼 수 없지. 직접 손을 써서 피를 묻힌 것들도 있을 테고, 손에 피를 묻히진 않아도 어디서 들은 말들을 퍼다 나르고 옮겼을 테니까. 남이 잘못을 하거나 실수를 하면 그로 인해 나에게 해가 가는 건 아닐까 싶어서 모두가 똑같은 마음으로 그 남을 죽이려 달려들었을 테니까. 지금처럼 말이지.”

나직하게 속삭이는 그 말이 모두의 귀에 쏙쏙 들어온다. 더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두려움에 질려 덜덜 떨기만 하는 이들을 돌아보며 백호는 딱하다는 양 끌끌, 하고 혀를 찼다.

“이게 어찌 사람 사는 곳이란 말인가. 내 눈에는 썩은 구더기 소굴이로구만.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쓴 귀신들이 여기 전부 모여 있구만 그래.”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 같은 사람 귀신들은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싫든 좋든, 그냥 이 반양 땅에서 평생 살다가 죽어 줘야 한다. 그래야 바깥에 사는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지 않겠지.”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서 정말로 귀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그들은 넋이 나간 것마냥 멍하니 서 있었고, 숨도 크게 내쉬지 못했다.

너무도 큰 충격에 앞서서, 그동안 숨겨 왔던 비밀이 까발려진 수치와 공포가 뒤범벅이 되어선 제정신이 아니었다. 개중 몇은 똑바로 서지도 못하곤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쓰러지기도 했다.

그렇게 선 채로 굳어 버린 것처럼 보이는 자들을 둘러보던 백호는 뒤를 돌아봤다.

이방은 제 대문 앞에 주저앉아서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있었다. 어깨를 떨면서 오열하는 그에게선 짙은 회한이 묻어난다. 그걸 보곤 눈을 가늘게 뜬 백호는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몰려든 자들을 두고 백호는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가 그 끝으로 바닥을 쳤다.

쿵, 하고 묵직하게 울리는 음향에 몇몇 이들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헛숨을 삼킨 채로 바라보는 눈빛에는 짙은 두려움이 감돌고 있었다. 다음으로 대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싶어 공포에 찬 시선으로 바라봤다.

“물론 이런 말만 하려고 내가 여길 찾아온 게 아니다. 만약 너희들이 계속 이런 삶을 살게 되는 거였다면 애초에 내가 이리로 오진 않았을 거야. 내가 이런 것들을 전부 알게 되지도 않았겠지.”

지금껏 백호가 말한 건 그동안 그가 직접 눈으로 보고 들은 것들이었다. 간섭하지 않고 지켜만 보는 동안, 이 웃기지도 않은 촌극에 끼어들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불씨는 붙인 자가 수습해야 하는 법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자멸하거나, 반양이 귀신 소굴이 된다 하더라도 나설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물론, 그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자신에게 덤빌 땐 또 말이 달라지겠지만―.

건드리지 않으면 나서지 않는다. 백호는 주시자였다.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럼에도 이렇듯 나서서 되지도 않은 짓거리를 하는 건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명월의 얼굴을 떠올린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하늘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넋 나간 채로 있던 사람들의 눈동자 안쪽이 반짝거렸다. 꿈도 희망도 없이, 그냥 산송장처럼 있던 자들은 반짝거리는 얼굴로 백호를 바라봤고, 울던 자는 멈추었고, 쓰러진 자는 벌떡 일어났다.

하늘, 하늘의 계시라니.

벅차오르는 얼굴로 우러러 보는 자들을 확인한 백호가 재차 말했다.

“너희 불쌍한 놈들을 구제하고자 하늘에서 계시를 받았다. 그래서 이방의 여식이 살아난 것이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칙칙하게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백호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억울하게 죽어 가는 소녀들은 없을 거다! 숲으로 들어가 실종되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그걸 위해서 내가 찾아온 것이다! 나와― 저기에 계시는 사또가 말이다!!”

“오오오오-!”

이상하게 울리는 사람들의 함성에 나무 앞에 서 있던 명월이 움찔했다. 내내 백호가 하는 말을 듣고, 그가 취하는 행동을 보면서 인상을 쓰거나, 혀를 차거나, ‘너무 심한 게 아닌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명월은 백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숨을 삼켰다.

위장을 하고 삿갓을 깊게 눌러쓰고 있었으나, 개중 몇몇이 바닥을 기어와 아래에서부터 위를 올려다보곤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손을 움켜쥔 그들은 감격에 겨운 얼굴로 외쳤다.

“저 고귀한 얼굴은 분명 사또가 맞으십니다!”

“오오, 사또시다! 이 고을에 새롭게 오신 사또야!”

“사또 나으리! 정말로 고맙습니다!!”

우르르 몰려와 무릎을 꿇고 앉아선 절을 해대는 사람들의 행동에 명월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었다. 그건 복운도 마찬가지였다.

명월의 등 뒤에서 그에게 이상한 자가 접근하진 않을지 눈에 불을 켜고 감시를 하던 복운은 반사적으로 명월의 팔을 붙잡긴 했지만, 너무 놀라서 차마 움직이진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더 많이 명월의 앞으로 몰려들었고 그에게 절을 해댔다. 사또를 부르면서 당장 울며 매달릴 것 같은 이들을 두고 명월은 크게 숨을 내쉬지도 못했다. 그러는 동안 백호가 재차 외쳤다.

“앞으로 억울하게 죽어 가는 이들은 없을 거다! 저기 계시는 사또께서 이 고을의 온갖 잡귀와 귀물을 몰아내 주실 거다! 여길 다시 사람이 사는 곳으로 만들어 주실 거다! 다들 감사하다고 인사부터 드리거라!”

그 말이 기폭제가 되어서 더 많은 이들이, 더 큰소리로 명월을 부르짖었다.

“사또 나으리!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또님 만세! 만세! 만세!”

“이곳을 구원해 주십시오! 이제 더는 이렇게는 살 수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런 곳에 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고을로 와서 이토록 환대를 받은 적이 없었다. 간혹 마주치는 이들도 입고 있는 구군복을 보곤 고개를 조아리면서 인사를 하는 정도였다.

바닥에 코가 닿을 정도로 굽실거리면서 마치 왕을 대하듯 만세를 불러대는 이들을 두고 명월은 그 자리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복운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명월의 옆에 붙어섰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사방에서 터지는 사람들의 외침 속에는 하나의 희망이 담겨 있었다. 명월, 그가 이 반양을 바꿔 주기를 바라는 희망 말이다.

어린애처럼 애걸하며 매달리는 사람들을 대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화근이라 할 수 있는 백호가 팔짱을 낀 채로 느긋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저 대책 없는 놈이―.

구체적인 말은 하지도 않고 알아서 잘할 수 있다고 했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하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로 일을 크게 만들 줄은 몰랐던 명월은 입을 반쯤 벌린 채로 얼어붙었다.

* * *

지금 사람들에게 세뇌되듯이 반복된 공포를 역으로 이용하면 된다.

백호가 한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 방식에 대해서 끝까지 말해 주지 않는 게 수상쩍어서 집요하게 캐묻자 나중에는 ‘승복도 입고 있으니, 승려처럼 성불을 시켜 주면 되는 게 아니냐.’라고 말했다.

명월은 진짜 승려도 아닌 주제에 잘도 성불을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인상을 썼다. 애초에 명월이 성불 이야기를 먼저 꺼낸 터였다. 그런데 이제 와 왜 이리도 불안한지 모르겠다. 그런 명월을 두고 백호는 느긋하게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였다.

‘걱정하지 마라.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 몸이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하고자 했으니 그대로 될 거다.’

자신만만해하는 모습이 보기에 불안했으나, 분명 백호 그 나름의 방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진짜 사람인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런 흉내를 내고 있으니 눈에 띄게 이상한 짓을 하진 않을 거다.

일말의 불안이 있더라도 지금 이방의 입장이 곤란하고 명월이 나서서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백호의 도움은 어떤 식으로든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대충 뭔가를 해 둬야 그 뒤처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사람들이 잔뜩 몰려든 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명월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방이 절규를 하듯 외쳐도 마음과 귀를 닫아 버린 그들은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하려 들지 않았다. 소귀에 경 읽기였다.

거기다 딸을 잃었던 자들이 하나둘 나서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조금 더 험악하게 변했다. 내 딸이 죽었으니 네 딸도 죽어야 한다 외치는 그들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화가 났다. 그런 식으로라면 아무것도 달라질 수 없었다.

사람들의 흥분은 점점 커져 갔고, 이방이 위험해지겠다 싶었을 때 명월은 옆을 확인했다. 같이 온 백호에게 이제 슬슬 움직이라 말하려 했는데 옆이 텅 비어 있었다.

그가 어디로 가 버린 건가 싶었던 명월이 당황해 주변을 살피는 동안 저기 아래쪽에서 백호가 나타나 초반부터 공격적으로 나갔다. 그가 하는 말들은 실상 명월도 처음 듣는 것들이었다.

그래. 그랬던 거였구나. 진실은 그리도 추악했던 거로구나.

백호의 말을 듣는 동안 명월은 그동안 그가 나서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 정도로 추악하고 더럽게 얽혀 있다면 나서지 않는 게 당연했다.

이런 진흙탕 싸움에 한쪽 발을 밀어 넣게 되면 그때부턴 자신도 그들과 똑같이 되는 것일 테니―.

백호의 말을 듣는 동안 여기는 정말 심각한 곳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런 곳에서 대체 뭘 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다짜고짜 백호가 공격을 해 왔다.

그래. 그건 공격이었다.

* * *

앞쪽 자리에 앉아 이마에 손을 댄 채로 눈을 감은 명월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혼자서 심각한 척을 하던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고, 그 소리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이방과 복운이 움찔했다.

그들은 아까부터 말없이 심각해 있는 명월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지금 명월의 심정이 어떨지를 아는 만큼 뭐라 말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그때 명월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쓰다듬었고,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이쪽을 봐 주는 건가 싶었던 복운과 이방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때 명월의 미간으로 재차 주름이 잡혔다.

“복운이 넌 잠시 나가 있거라.”

“……그리하겠습니다.”

자신을 내보내고 이방과 무슨 대화를 나눌 셈인가 싶었다.

꼭 이런 식으로 중요한 순간일 때 자신만 바깥으로 내보낸다. 그게 서운하기도 했지만, 명월의 말을 거역할 수도 없었던 복운은 느릿하게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혼자 남게 된 이방은 명월의 손짓으로 앞으로 다가갔다.

책상 앞에 가까이 붙어선 이방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사또, 괜찮으십니까.”

“자네가 나 같으면 괜찮겠나?”

묻는 말에 대답이 없다. 그도 지금 명월이 기분이 똥이라는 걸 아는 거다.

명월과 백호가 어떻게든 하겠다고 해서 그 말만 철석같이 믿고 이런 판을 마련하긴 했는데, 명월은 일이 이렇게 돌아갈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명월이 시종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자신 때문에 다시금 명월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게 아닐까 싶었던 이방은 차마 명월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무거운 공기가 그들 사이에 내려앉는다. 모든 게 제 탓인 것 같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방이나, 명월은 다른 걸 생각하고 있었다.

백호가 갑작스럽게 벌여 놓은 판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렇게 나쁘지만도 않았다. 백호의 말은 순식간에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가 보통 인간이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분명 뭔가 수작을 부린 거겠지. 그래서 그의 말과 행동과 눈빛이 모두를 사로잡은 거다.

그렇게 한 번에 이목을 끈 후에, 자신을 내세웠다. 이 고을의 문제점을 처리해 줄 사또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 순간 자신을 매달리듯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잊히질 않는다. 그들은 유일한 희망을 대하듯 자신을 바라봤다. 그건 ‘네가 뭘 알아.’라면서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과는 정말 다른 시선이었다.

쓸데없을 정도로 포장을 해 놓긴 했으나, 적어도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자신을 달리 보게 되었을 거다. 한량 신임 사또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 된 거다.

즉, 앞으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한결 수월해진다는 의미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외지인으로, 저들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면 지금은 그 테두리 사이에 끼어 있는 거였다.

믿고 의지하는 존재라면 저들도 그 테두리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줄 터였다. 다짜고짜 불을 지르거나, 자신을 적대하진 않을 거라는 거다.

저 화소군이 마을 사람들을 이용해서 수작을 부리려 해도, 자신도 그걸 막을 수 있는 힘이 생긴 거다.

보다 더 많은 패를 쓸 수 있도록, 백호가 판을 마련해 준 거였다.

어쩌면 그 녀석은―.

명월은 턱에 댄 손을 움켜쥐었다.

“나쁘지 않은 상황이야.”

중얼거림에 이방이 고개를 들어 명월을 바라봤다.

“이제야 드디어 해볼 만한 상황이 된 걸지도 모르겠네.”

입을 다문 명월은 아무도 없는 빈자리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 * *

명월이 나가 있으라 해서 바깥으로 나온 복운의 얼굴은 심각했다. 마음이 심란해도 명월을 두고 먼저 관아로 돌아갈 수 없었던 그는 아래쪽 계단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채로 발끝으로 흙을 툭툭 찼다.

조금 전에 듣고 본 것들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싶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본 적도,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서 공격성을 드러내고 비난을 하는 무시무시한 광경도 처음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나타난 백호로 인해 그들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고, 그가 엄청난 말을 토해 냈다. 그 말을 들어 보면 이곳엔 귀신이 있다는 거였다.

명월에게 생긴 일이나, 그간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면 그럴 것 같긴 했으나 막상 직접적으로 듣게 되니 마음이 심란했다.

이게 대체 어찌 돌아가는 상황일까.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복운은 아랫입술을 사려 물었고, 그때 누군가 앞으로 다가왔다. 기분이 별로였던 복운은 이건 또 뭔가 싶어서 고개를 들었다.

심드렁한 얼굴을 한 그 앞으로 다가온 건 이방 댁에서 일하는 머슴이었다. 덩치가 좋지만 순박한 얼굴을 한 청년은 호기심을 갖고 물었다.

“우리 사또께서 대단한 분이시라던데, 그게 참말이냐?”

“우리 사또라고?”

이놈이 언제 명월을 봤다고 우리 사또 운운을 하는지 모르겠다. 기분이 확 구려지는 복운이었으나, 이내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명월은 반양의 사또였고, 반양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그를 우리 사또라 부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걸 두고 “‘우리 사또’라고 하지 마라!”라고 할 순 없었다. 생각은 그리해도 마음은 불편했던 복운은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부터 대단한 분이셨다. 그걸 다른 사람들이 몰랐을 뿐이야.”

“사또께서는 등채로 귀신도 때려잡는 분이라고 하시던데. 그것도 참말이냐?”

“……뭐?”

이상하게 변하는 복운의 표정을 본 머슴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사또를 모신다는 놈이 그분에 대해선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냐?”

그리 말하고 난 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에 복운은 더럭 화가 났다.

자신만큼 명월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명월이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곁에서 그를 보살펴 왔다. 명월의 버릇 같은 것도 잘 알고 있고, 그의 비밀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걱정이 되는 거였다.

계속 숨기고 감추어야 보통 사람처럼 살 수 있을 텐데, 이번 일 때문에 명월이 귀신을 본다는 걸 모두에게 들켜 버렸지 않나.

만약 이 사실이 주인어른 귀에 들어가게 되면 큰일이었다. 그걸 알 리가 없는 놈이 저런 식으로 속 편한 말을 하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놈의 멱살을 잡고 “시끄러워!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고 할 수도 없었다. 명월을 위해 모든 걸 참아야만 했다. 때문에 억울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채로 있으려니 머슴이 계속해서 혀를 찬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 보네. 이런 바보 같은 녀석이 사또의 머슴이라니―.”

“바보라니―, 누가 바보라는 거냐―!”

다른 말은 다 참아도 바보라 하는 것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자신을 바보라고 할 수 있는 건 명월이 유일했다.

그 외에 다른 사람에게 우습게 보일 이유가 없다면서 흥분한 복운이 한소리를 하려던 순간. 머슴의 등 뒤로 지나쳐가는 승려가 보였다.

아니. 저건 승려가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승려복을 입고 있는 땡중이었다. 느긋한 모습으로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백호를 보는 순간 복운의 눈동자 안쪽으로 불똥이 튄다.

저놈 때문에 명월의 비밀이 모두에게 알려졌고, 결과적으로 그가 곤란해지게 된 거였다. 내 저놈을 그냥―.

어금니를 악문 복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백호에게 달려들었다. 복운 앞에 서 있던 머슴은 세게 밀쳐져선 크게 휘청이다가 화가 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가려면 곱게 갈 것이지 왜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을 건드리는 거냐고 한마디 하려던 순간 눈에 들어온 백호를 본 머슴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아니. 저분은―.

그리 말하고픈 얼굴로 있던 머슴도 덩달아 백호에게 달려갔다.

“거기 멈춰 보시오!”

일부러 멈출 필요도 없이, 복운이 달려오던 방향으로 가려 했던 백호는 앞을 막아서는 것 때문에 발을 멈추었다.

뒷짐을 진 채로 서 있는 백호 앞에 양팔을 뻗은 채로 선 복운은 그를 노려봤다. 이 모든 일의 화근이 그라고 생각하는 만큼 눈빛이 고울 수가 없었다. 분노가 담긴 강렬한 눈빛에도 백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이 녀석은 또 뭐야. 그리 말하는 눈빛으로 싸늘한 시선을 던지는 것에 위축됨을 느끼면서도 복운은 용기를 내 말을 꺼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벌인 것이오? 덕분에 우리 사또의 비밀을 다른 모두가 알게 되지 않았―. 억?!”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등 뒤로 다가온 머슴이 복운을 세게 밀어냈다. 백호 앞에 선 머슴은 양손을 모으곤 백호에게 굽실거렸다.

“아이고, 스님. 이번에 우리 나으리를 도와드려서 참말로 고맙습니다. 스님이 아니셨으면 큰일 당할 뻔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나으리 잘 부탁드립니다. 사또님하고 같이 우리 고을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곳에서 득실거리는 귀신 좀 잡아서 싹 다 없애 주십시오.”

옆으로 나가떨어져서 엉덩방아를 찧어야 했던 복운은 아연한 얼굴로 백호와 머슴을 번갈아 봤다. 그러다가 머슴이 하는 말을 듣곤 얼굴이 확 구겨진 그는 벌떡 일어나 머슴의 어깨를 잡아 세게 밀어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우리 사또께서 왜 이 고을의 귀신을 없앤단 말이냐! 그런 걸 어찌한단 말이냐!”

백호를 보고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있던 머슴은 복운이 어깨를 건드리자 인상을 쓰며 그를 노려봤다.

“너는 또 뭔 헛소리를 하려는 거냐. 이분께서 좀 전에 하신 말씀 못 들었냐? 이 스님하고 사또께서 우리 고을에 있는 귀신을 몽땅 몰아내 주겠다고 하지 않았냐.”

“그러니까 그걸 왜 우리 사또가 하느냔 말이다! 우린 사또는 평범한 분이시다! 귀신 같은 게 안 보이는, 아주 평범한 분이라고!”

복운의 외침에 머슴의 표정이 조금 더 이상해졌다. 그건 단순히 ‘이 바보 같은 놈이 뭔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라고 하는 식이었다.

이미 이야기가 다 되었고 손발이 맞은 상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놈이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 쳐다보듯 하는 얼굴에 복운은 말문이 막혔다.

오늘 아침만 하더라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땡중이 헛소리를 해선 순식간에 모든 게 달라졌다. 명월은 귀신을 보고 그걸 퇴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도성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당장 큰일이 생겼을 거다. 명월은 집안 호적에서 파내지고 쫓겨나게 될 터였다. 도성이 아닌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니냐, 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원래 이런 소문은 더 빨리 도는 법이었다.

가뜩이나 귀신을 보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던 명월이었다. 그가 걱정 되어서 죽을 것 같은 복운인데, 왜 이 머슴은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건가 싶었다.

아니. 이 고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상했다. 그들은 땡중이 하는 말을 모두 믿었고, 명월을 구세주처럼 바라봤다. 그가 정말로 이 고을에 있는 귀신을 몽땅 몰아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은가. 명월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그걸 감추어 왔는데. 그 눈물겨운 사투를 아는 만큼 복운은 화가 났다. 그는 일을 망쳤다고 생각되는 자를 노려봤다.

눈을 치뜨면서 백호를 노려보자 그와 시선이 부딪쳤다. 백호의 눈을 보는 순간, 복운의 일그러진 표정이 펴졌다.

“…….”

감정이라고는 실오라기만큼도 없는 서늘한 눈빛으로 복운을 바라보던 백호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고작해야 머슴 주제에 왜 이렇게 주제넘게 구는 것이냐. 그 녀석이 네놈의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있었더냐.”

그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느긋하고 설렁거리는 모습만을 봤거늘, 지금 이건 그때하고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마치 맹수 앞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복운은 덜덜 떨면서 눈을 내리뜰 수밖에 없었다. 딱할 정도로 몸을 떨어대는 복운이나, 백호는 가차 없었다.

“주인이 뭘 원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제멋대로 구는 네놈이야말로 입 닥치고 얌전히 있거라. 시끄럽게 굴지 말고.”

나와 명월이 하는 일에 네놈이 왜 끼어들어서 잡음을 만드는 것이더냐.

그리 선을 딱 긋고 있었다. 그 순간 복운의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잘 생각해 보니 자신이 주제넘게 구는 게 있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은 명월에게 있어서만은 남이 아니었다. 자신만큼 명월과 가까운 사람이 없었다. 그 믿음이 그에게 아주 조금의 용기를 줬다.

“나, 나는 사또가 걱정되어서―.”

“그 사또가 네놈 주머니에 폭 하니 들어가는 어린애라도 되는 줄 아느냐. 이제 슬슬 정신 좀 차려라.”

쯧, 하고 혀를 차면서 옆을 지나쳐 가는 백호를 붙잡을 수 없었다. 복운과 백호를 번갈아 보던 머슴도 냉큼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혼자 남게 된 복운은 양손을 움켜쥐었다.

지금 자신이 잘못하는 것일까. 그런 게 아닌데. 난 분명 명월을 위해서 이러는 건데―.

거기까지 생각한 복운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 * *

들어온다는 말도 없이 백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방은 놀라 바로 일어났다. 양손을 모은 채로 “오셨습니까.”라고 말하는 이방은 전보다 훨씬 더 태도가 공손해져 있었다.

오늘 일을 통해서 백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게 된 거였다. 그런 존재이니만큼 제대로 예의를 갖추어서 대하는 게 옳았다.

고개를 숙이면서 어려워하는 이방을 두고 백호가 명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곤 바로 앞에 털썩, 소리가 날 정도로 앉는 걸 본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화가 난 듯, 굳은 시선을 던지는 명월이지만 그 시선을 받은 백호는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다는 듯 바로 턱을 긁적이면서 중얼거렸다.

“배고픈데, 고기 같은 것 좀 없나?”

백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고프십니까? 그렇다면 바로 닭을 잡아서 올려―.”

“아니. 괜찮네. 우리는 바로 관아로 돌아갈 테니 일부러 그럴 필요 없네.”

이방의 말을 중간에 자른 명월은 백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잠깐 나가 있게나. 이 승려하고 긴히 나눌 말이 있으니까.”

명월이 말투도 그렇고 표정도 그렇고, 뭔가가 심상치 않았다. 자신이 나가고 난 후에 대판 싸우는 게 아닐까 싶어 걱정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여기에 계속 남아 있을 순 없었다.

‘싸우지 마시고 좋게 말로 정리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도 어찌 보면 주제 넘는 게 될 수도 있었다.

결국 이방은 조용히 방을 나섰고, 명월은 기다렸다는 듯 책상 위에 양손을 올리곤 백호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노려보는 눈빛이 매섭다. 당장 소리를 칠 것 같은 얼굴로 명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 치기 전에 언급이라도 해 주면 안 되는 거냐?”

“그랬다간 네가 어색하게 굴 게 아니냐. 원래 그런 건 모르는 상태에서 당해 봐야 조금 더 극적인 상황이 만들어지는 거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내가 지금 네놈 농이나 듣자고 이런 말을 꺼내는 줄 알아?”

갑자기 숨이 턱 막힌다. 명월은 답답함을 담아 책상을 두드렸다.

“다 드러내다니. 무슨 속셈이냐. 내가 너 같은 놈들을 본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다 알아서 뭐가 좋다고―.”

“네가 귀신을 보는 게 뭐가 어때서 숨겨야 한단 말이냐. 귀신이 차고 넘칠 정도로 득실거리는 곳이다. 그런 곳에 사또로 부임을 했으면 당연히 귀신을 보고, 그것들을 때려잡을 줄도 알아야지. 모여 있던 사람들이 기뻐하는 거 봤으면서 그런 소리를 할 거냐. 저들이 원하는 건 사람이 아닌 귀신 잡는 사또다. 관아 밖에 암만 북을 걸어 봐라. 사람이 와서 그걸 두들기는 일은 없을 거다.”

당연한 듯 말하는 백호지만, 그 말을 듣는 명월은 여전히 굳은 낯이었다.

저 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듣고 앉아 있어야 하는 걸까.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팔짱을 끼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보라고 말했다. 문제될 건 없어.”

“……어떻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거냐.”

“내가 도와준다.”

“…….”

“몇 번이나 입 아프게 말했어.”

그래. 몇 번이고 말하긴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주 조금씩 망설여지던 게 있었던 명월은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피하려는 명월이지만, 백호는 그런 명월 쪽으로 얼굴을 내밀고는 나직이 속삭였다.

“네놈은 평범하지 않아. 나도 이렇게 네놈 앞에 앉아 있지 않냐. 이제 앞으로는 그런 놈들만 나타나게 될 거다. 그리고 언젠가는 더 위험한 것들도 나타날 테고―.”

그 순간 떠오르는 존재는 독각귀였다. 백호도 알고, 명월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호는 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진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물곤 상 한쪽을 손가락으로 느리게 두드렸다. 그러곤 주먹을 쥔 채로 책상을 꾸욱 누르곤 “하여튼―.” 하고 운을 뗐다.

“그런 식으로 드러냈으니 그걸 두고 어설프게 공격을 받지는 않을 거다.”

어설픈 공격 운운하는 순간 떠오르는 건 화소군이었다. 그렇게나 넓게 보고 있었던 건가 싶어서 백호를 보는데, 옆으로 고개를 돌린 녀석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다.

연거푸 하품을 하던 백호는 손바닥으로 찔끔 나온 눈물을 닦아 내다가 명월을 돌아봤다.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명월이 움찔한다. 알게 모르게 시선을 피하려 하는 모습을 살피며 백호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오늘 나 어땠냐?”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냐. 아무 말도 없이 네놈 혼자서 사고를 친 격이 아니냐. 그 자리에서 네놈에게 한방 먹이지 않은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할 거다.”

“하지 그랬냐. 그건 그것 나름대로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었을 텐데―.”

“구경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안 그래도 충분할 정도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던 상황이었다. 거기서 더 튀는 행동을 취할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그런 쓸데없는 짓을―.

눈을 내리뜬 채로 있던 명월은 손을 들어선 이마에 짚었다. 암담하다. 그렇다고 마냥 이대로 있을 순 없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도와줄 거냐?”

눈동자만 들어선 묻는 명월의 목소리는 심드렁했다.

그런 명월의 물음에 백호도 똑같이 건성으로 대꾸했다.

“너 하는 거 봐서.”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잘 나가다가도 꼭 이런 식으로 어긋나는 놈이었다. 이런 놈에게 대체 무얼 기대한 거냐면서 명월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지만 그리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다.

명월은 실소를 입에 머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자. 너무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백호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자신마저 끌고 들어갔으니 일이 더 복잡해졌다. 하지만 그건 저들도 마찬가지였다. 화소군이나 이병현 대감 등, 자신을 찍어 내고 싶어서 안달 난 자들은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전전긍긍하고 있겠지.

일이 어찌 돌아가는 건가 싶어 잔뜩 날이 서선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방식으로 공격을 할지도 모를 일이고―.

그때 백호가 명월의 손목을 붙잡았다. 갑작스럽게 강하게 손목을 감싸 쥐는 손길을 느낀 명월은 고개를 숙였다.

왜 그러느냐. 묻는 눈빛을 본 백호는 명월의 손등을 꼬옥 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다 일어나는 거였기에 자연스럽게 잡힌 손목이 아래로 주욱 당겨진다. 몸이 끌려가서 넘어질 뻔했던 명월은 다리에 힘을 주곤 가까스로 버티어 섰다.

“지금 뭘 하는―.”

혼자서도 일어날 수 있으면서도 왜 괜한 사람을 잡고 늘어지는 건지 모르겠다.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자신을 넘어뜨릴 셈은 아니었겠지? 여긴 관아도 아니고 자신의 방도 아니었다. 그런 곳에서 장난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거냐고 한마디 하고 싶었으나, 바로 그때 입술로 부드러운 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명월에게서 입술을 빼앗아간 백호는 먼저 몸을 돌렸다. 느긋하게 걸어 나가다가 제 목을 긁적거리며 중얼거렸다.

“아, 배고프다.”

그렇게 백호가 먼저 나가고 난 후, 혼자 남게 된 명월은 가만히 있다가 제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그러곤 손을 움켜쥐고는 백호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방에서 나오자 근처에 서 있던 이방이 바로 그들을 바라봤다.

“벌써 돌아가시려는 겁니까. 곧 있으면 음식을 내올 텐데―.”

“괜찮네. 여기서 식사 하러 온 게 아니니까. 난 이만 관아로 돌아갈 테니 자네는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나오도록 하게.”

태연히 말하는 명월은 조금 전 방 안에서 있었던 일 같은 건 말끔히 잊은 얼굴이었다. 그 태연하고 차분해 보이는 모습에 앞을 보고 있나 싶던 백호가 그쪽으로 힐긋 시선을 던진다.

얼굴에 달라붙는 백호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나랑 뽀뽀를 한 주제에 묘하게 태연하구나. 그런 식으로 놀리는 눈빛이 느껴진다면 너무 예민한 걸까.

애써 뒷짐을 진 채로 근엄한 얼굴로 있던 명월은 얼굴에 달라붙는 백호의 집요한 시선에 결국 인상을 쓰게 되었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백호 쪽으로 한번 매서운 시선을 던진 후, 이방의 앞을 지나쳐 갔다.

한 번 더 명월을 붙잡고 식사를 하고 갈 것을 청하려 했던 이방이지만, 두 사람이 대청을 내려가 가죽신을 신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명월은 어느새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이방도 신을 신고 내려와 명월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백호가 그를 돌아본다.

“개새끼마냥 뒤꽁무니 졸졸 따라올 필요 없어. 되었으니 안에 들어가서 자네 딸하고 있으라고―.”

“아, 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백호에게 개새끼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게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으니 이상한 노릇이었다.

멍하니 서 있기만 하는 이방을 두고 백호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웃는 얼굴이 장난스럽지만, 동시에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지는 사내였다.

이상한 구석이 있긴 해도 명월의 지인이니 의심을 하지 말자 생각을 해도 알게 모르게 껄끄러운 이였는데,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던 거다. 사또 명월이 특별하니 지인으로 저런 사람이 있는 거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방은 걸음을 멈추었고, 명월은 대문 앞까지 걸어갔다. 그러다가 막 문을 열려는 머슴 앞에서 멈춰 선 채로 주변을 살폈다. 누구를 찾나 싶었던 이방은 순간적으로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복운을 찾고 있었다. 조금 전 복운이 마당 쪽에 있었던 걸 떠올린 이방이 명월을 돕기 위해서 그를 찾다가 저기 안쪽에서 느리게 걸어오는 복운이 보였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이상했다. 왜 저리도 늦장인가 싶어 이방이 한 소리 하려는데, 명월이 “뭘 하는 거냐. 달려와라.”라고 한마디 한다. 명월의 말에 그를 한번 본 복운이 종종걸음을 옮겼다.

명월은 옆에 선 복운을 내려다봤다.

“어디에 갔다가 오는 거냐. 뒷간이라도 간 거냐.”

“그렇습니다.”

대답을 하긴 하는데 어딘가 시원찮았다.

안색을 굳힌 채로 눈을 내리뜬 복운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걸 느낀 명월이 한마디 하려는데 그때 머슴이 대문을 열었다.

일단은 밖으로 나가자 싶었던 명월이 대문을 넘어갔고, 백호가 옆에 딱 붙어 섰다. 본인이 옆자리를 차지하는 게 당연하다는 양 뻔뻔한 얼굴로 다가오는 백호를 두고 명월이 그쪽에 흘깃, 하고 시선을 던진다. 정면을 보곤 있어도 자신이 쳐다보고 있음을 모르진 않을 터였다.

하여튼 넉살 좋은 놈이라니까. 가볍게 웃으며 앞으로 고개를 돌린 명월은 움찔했다. 길가에 아직도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길가에 일렬로 주르륵 서 있는 그들은 하나같이 불안과 기대를 품고 명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이 왜 저리 보는지를 모르진 않았으나, 지금은 일일이 반응할 수 없었던 명월은 뒷짐을 진 채로 걸음을 서둘렀다.

명월이 지나치자 근처에 서 있던 여인이 양손을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우리를 보호해 주십시오.”

마치 산신에게 기원을 하는 양 구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그런 게 아니다.’라고 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명월은 저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었고, 귀물을 처리한 적도 있긴 했다. 그렇다 해서 이 고을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을 처리할 만한 능력은 없었다.

백호라면 모를까, 자신은 인간이었다. 그러니 너무 부담스럽게 굴지 말아 달라 하고 싶어도, 오늘 낮에 백호가 한 짓이 있었기 때문에 입을 벙긋도 할 수 없었다.

낮의 일은 이미 파다하게 퍼져서 모르는 이들이 없을 거다. 그 말을 믿으면서 저 여인처럼 맹신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불신하는 자들도 있을 거다.

새로 온 사또 놈이 자신들을 두고 사기를 치려는 게지. 라면서 빈정거리는 목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을까.

사람 백이 있다면 그들 모두에게 맞춰서 반응할 순 없었다. 백호가 일을 치긴 했으나, 그게 꼭 불필요한 건 아니었다. 이런 곳이기 때문에, 그가 그런 행동을 취한 거다.

일부러 요란하게 군 것이 정답이 될 수도 있음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중심을 잘 잡아야만 했다.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흔들리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만 했다.

“마을에 오셨다가 돌아가시는 길인 모양입니다. 사또.”

몰려든 사람을 피해서 빠른 걸음을 옮기던 명월은 귓가에 닿는 소리에 발을 멈추곤 고개를 들었다.

이방의 집 앞에나 사람이 많이 모여들어 있지, 바깥쪽으로 나오자 상대적으로 한산해졌다. 그래도 구경꾼들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는데, 거기서 화소군이 나타났다.

반반하고 멀쩡한 화소군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명월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저도 모르게 앞으로 달려가 놈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패대기를 쳐 버릴 뻔했다. 근처에 백호가 없고, 화소군 놈의 뒤에 검은 옷을 입은 자들만 없었다면 정말 그리했을 거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가장 껄끄러운 부분을 알고 있고, 진상품과 관련해 그런 일이 있었다. 자신이라면 그런 짓을 저지른 상대 앞에 나타날 수 없을 것 같은데 저놈은 아닌 모양이었다.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신경줄이냐면서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화소군이 먼저 인사를 건넸으나 대답 없이 입을 다물고만 있자 내내 조용히 뒤따르던 복운이 옆으로 다가와 섰다.

“사또, 그냥 가시지요.”

어쩌면 지금은 화소군을 피해가야 한다고 느낀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월은 복운의 말에도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똑바로 선 채로 화소군을 바라보는 명월의 눈빛이 매섭다.

그걸 모를 화소군이 아닐 터이나 그는 느릿하게 명월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다가오자 복운은 반사적으로 명월의 소매를 잡아 살짝 끌었다.

가만히 서 계시지 말고 어서 뒤로 오라는 그 손짓을 가볍게 뿌리친 명월은 화소군의 얼굴을 주시한 채로 웃었다.

“어지간히 낯짝이 두껍군. 이런 대낮에 당당히 내 앞에 나타나는 건가.”

“제가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는데 대낮에 사또의 앞에 나타나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지금 그 말, 진심으로 하는 건가.”

“물론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입을 다문 화소군의 입술 양꼬리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그 순간 명월은 화소군의 얼굴 가운데에 주먹을 내지르는 걸 상상해 봤다. 하지만 정말로 할 순 없고 그저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다.

이 망할 놈의 자식. 그리 생각하며 어금니를 악무는 때에 맞춰서 화소군이 백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분이 그 유명한 스님이시군요.”

백호를 알아보듯 하는 말에 명월의 눈썹이 꿈틀하고 흔들린다.

화소군의 눈동자가 정확히 백호에게 꽂히는 순간 명월은 속이 술렁거리는 걸 느꼈다. 이 위험한 놈이 백호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싫었다.

“나에게 용건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할 말만 하고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게.”

꺼지라 하는 순간 화소군의 뒤에 서 있던 사내 둘이 앞으로 움직였고, 명월은 바로 그리로 매서운 시선을 던졌다.

어디서 감히 네놈들이 내게 위협을 하려는 것이더냐. 그런 의미가 담긴 눈빛이 꽤나 맵다. 기에 눌린 사내들이 주춤거리는 걸 느낀 화소군이 그들을 확인하곤 재차 명월을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저들은 이곳 사람이 아닌지라, 지나치게 충성스럽습니다. 제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걸 가장 큰일로 여기는 자들이니 저도 모르게 취한 행동이 사또를 불쾌하게 한 모양입니다. 제가 대신해서 사죄드립니다.”

“사죄를 드리기 전에 저런 시커먼 놈들은 떨어뜨리고 다니게. 누구를 위협하려고 저런 놈들을 붙이고 다니나.”

“아시면서 왜 모르는 척이십니까. 제가 겉보기엔 티가 안 날 뿐이지, 정말은 꽤나 긴장하고 있답니다.”

우스운 말이었다. 온갖 나쁜 짓을 다 저지르는 놈이 긴장할 게 뭐가 있겠는가.

비웃듯 올라가는 명월의 입매를 본 화소군은 짐짓 서운한 시선을 던졌다.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저라 해도 귀신을 다루고, 놈들을 없애실 수 있는 사또 앞에 나서는 건 크나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랍니다.”

“…….”

“사람들이 하는 말은 잘 들었습니다. 사또께서 반양에 머무는 부정한 모든 것들을 쫓아내기로 하셨다지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어려운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화소군이 하는 말 따위는 그냥 한귀로 흘러 넘기려 했는데 더는 못 참겠다. 명월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로 말했다.

“눈앞에 커다란 오물이 있는데 그걸 처리해야 앞으로 내 남은 부임 기간이 평탄할 게 아니겠나.”

“그 오물을 처리한다 해서 반양이 사또 뜻대로 되실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고을은 의외로 여기저기, 연결되지 않은 게 없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오물이 눈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걸 본인이 가장 잘 알면서도 잘도 태연하게 저런 말을 하는구나 싶었던 명월의 입꼬리가 조금 더 비틀려 올라간다. 비웃는 표정을 알고 있을 텐데도, 화소군은 모르는 척 바로 백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님. 우리 어여쁘신 사또를 잘 부탁드립니다.”

합장을 하곤 고개를 숙였다가 든 화소군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백호를 보곤 눈을 가늘게 휘었다.

“말씀이 없으신 분이로군요. 아니면 애초에 말씀을 못하시는 겁니까.”

묘하게 성질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걸 느끼지 못할 백호가 아니었다. 혹여라도 저런 유치한 자극에 백호가 넘어가서 사고를 치는 건 아닐까 싶었던 명월은 괜히 초조해졌다.

그냥 가자는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그때 백호가 재차 크게 입을 벌렸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백호는 손으로 눈을 비비며 웅얼거렸다.

“졸리다. 어서 돌아가자.”

그러곤 먼저 지나쳐 가 버리는 백호의 행동에 명월도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아직 뒤에 화소군이 서 있다는 게 느껴졌다.

바라건대 닭 쫓던 개 같은 얼굴로 있어 줬으면 싶지만, 그럴 리가 없겠지. 명월은 백호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붙이곤 나직이 말했다.

“잘했다. 저런 놈의 도발에 넘어갈 필요가 없어.”

“방금 그게 도발이었나?”

본인은 그런 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듯, 백호는 주먹으로 뒷목을 두드렸다.

“애초에 내가 저런 허접한 인간 놈하고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

심드렁한 목소리에 명월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가끔은 이렇게 기특한 짓을 할 때가 있었다. 백호가 허접한 인간 운운할 때 약간의 대리 만족을 느끼며 명월은 웃는 얼굴로 백호를 올려다봤다.

“그런 얼굴로 쳐다보지 마라. 길바닥에 쓰러뜨리고 당장 덮쳐 버릴 테다―.”

“…….”

백호를 보면서 짐짓 뿌듯해하던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진다.

무표정이 된 명월은 싸늘하게 식은 시선으로 백호를 노려봤으나,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더 크게 입을 벌리곤 하품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