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21/32)

5장

백호가 요란한 짓을 벌이긴 했으나 그 여파가 바로 나타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나 이틀이 지난 후에야 주변에서 반응이 일어날 거라 생각했으나 오산인 모양이었다.

관아 안에 있으면서도 명월은 몇이나 되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포졸들이 흘깃거리면서 보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병방은 왜 저렇게 눈치를 살피는지 모르겠다. 원래 청렴한 이들은 무슨 일이 생겨도 흔들리지 않는 법이고, 뒤가 구린 놈들이 더 난리를 치는 법이었다.

이번도 그와 마찬가지인 경우였다. 저놈들도 찔리는 구석이 있으니까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게 아니겠는가.

간자가 내부에 침투되어 있음을 모르진 않았다. 그들은 저 이병현 대감이나 화소군의 눈과 귀가 되어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했을 거다.

전에는 그런 짓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일이 진행되자 점점 무서워진 모양이었다. 그러니 저런 식으로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게 아니겠는가.

자신이 당장 뭔 짓을 할 것처럼 여겨진 걸까. 낮의 일은 부풀려진 소문이 되었을 테고, 그걸 들은 ‘찔리는 구석이 있는 자’들의 머릿속은 복잡할 터였다.

물론, 아닐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야기를 만들고 크게 부풀리는 건 저들이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르지.

거기까지 생각한 명월은 의자에서 일어나 아래로 내려갔다. 목화를 신고 계단을 내려와 너른 동헌 마당을 둘러보고 난 후, 등채를 손에 쥐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렇게 대문을 넘어가려는데 마침 바깥에서 들어오려던 포졸 둘이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헉! 사, 사또―!”

저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닌데 헛숨을 삼키며 뒷걸음질 치는 이들의 안색은 하얗게 질렸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모습인 그들을 두고 명월은 웃었다.

“열심히 일해라. 관아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함구하고. 괜히 바깥으로 말을 옮기면 재미없는 일이 생길 게야.”

“…….”

순식간에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가 창백하게 질린 포졸들은 대답도 못했다. 사시나무 떨듯이 달달달 떨어대는 걸 보자니 괜한 말을 한 건가 싶었다.

농이었으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려는 순간 포졸 둘은 깊이 고개를 조아리면서 “명심하겠습니다!”라고 외치면서 급히 명월의 앞에서 달아났다.

그래. 그것은 도망치는 거였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이들을 두고 명월은 눈을 끔벅거리다가 등채 끝으로 뒷목을 두드렸다.

……뭐, 괜찮을까. 너무 짓궂은 것 같지만, 이렇게 관아 내에 규율이 바로잡힌다면 그걸로 좋은 일이 아닐까.

일단은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바깥으로 흘러나가지만 않으면 그거로도 나름의 성과가 있는 셈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명월은 뒷짐을 지고는 재차 걸어가려 했다.

“사또.”

이번에는 또 뭔가 싶었던 명월은 귀찮아하며 뒤를 돌아봤다.

아까부터 자신의 눈치를 살피던 병방이었다. 명월은 그를 보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식으로 병방 쪽에서 먼저 말을 건넨 적이 없었던 만큼, 의외였다.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병방은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 호방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아시는 게 있으십니까.”

“아니. 난 아무것도 모르네.”

그러고 보니 오늘 낮에 호방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일하는 방향이 다르다 보니 하루에 꼭 한 번씩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오늘 관아에 나오지 않은 건가.

원래 빠지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 의외다 싶었다. 그런데 병방이 왜 굳이 이런 걸 알려 주는 건가 싶었다. 원래 이런 말을 하는 건 이방인데. 이방이 없으니 병방이 대신 하는 건가. 그렇다 쳐도 좀 이상한데.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병방은 우물쭈물 거렸다.

“늘 보이던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여쭈어 봤을 뿐입니다. 별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명월도 병방이 뭔가 의도가 있어 이런 걸 물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수상쩍게 굴 필요는 없었다. 명월은 웃는 얼굴로 답했다.

“알았네.”

그 대답에 병방은 조심스레 눈동자를 들어 명월의 얼굴을 살폈다. 한 점의 흐려짐 없이 화사한 명월의 웃는 얼굴을 본 그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린다.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에 그게 더 두려웠던 병방은 하얗게 질린 채로 고개를 꾸벅이곤 명월의 앞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병방이 사라지고 나서야 명월은 위로 끌어올렸던 입술꼬리를 내렸다.

병방, 저자는 누구의 간자였을까. 사또라 해서 관아의 모든 걸 발아래에 두고 부릴 순 없음이었다.

먼저 이곳에 자리를 틀고 있었던 육방과 포졸들에겐 각각 다른 줄이 굽이굽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사또를 모시지 않고 다른 쪽에 연결된 주인을 모시고 그들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그게 당연한 노릇이었다. 사또라 하나 2년만 있다 떠날 이를 누가 진심으로 존경하고 모시려 들겠는가. 그러느니 차라리 이 고을의 터줏대감으로 있는 자들에게 붙는 편이 훨씬 이득이지 않은가.

낮의 일이 번거롭게 생각되었으나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도 저들이 먼저 움직이니 한눈에 그 동선이 훤히 보인다. 그들의 관계가 복잡하게 꼬여 있는 만큼 풀어내는 즐거움이 있다면서 명월은 재차 걸음을 옮겼다.

* * *

대문을 열고 마당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 보이는 건 대청 한쪽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백호와 마당에 나비와 함께 쪼그리고 앉아 있는 계진이었다.

엎드린 채로 앉아선 제 앞발을 핥아 대는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는 계진은 저를 한번이라도 봐주길 바라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쓸데없이 도도한 돼지 고양이는 제 몸 단장에 열중이었다.

저런다고 호박이 수박 되는 게 아니건만.

쯧쯧, 하고 혀를 찬 명월이 안으로 들어오자 그제야 그를 발견한 계진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

“사또, 오셨어요?”

“그래. 난 신경 쓰지 말고 계속 그 돼지 고양이랑 놀아 줘라.”

명월의 말에 계진은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주저앉았다. 정말은 조금 더 나비의 털을 만지고 싶었던 거다. 아예 나비 쪽으로 고개를 숙여선 등을 쓰다듬으며 “착하다. 예쁘다.”라고 말하는 계진의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사심 없이 돼지 고양이를 귀여워하고 있었다. 계진이 저런 식으로나마 마음의 안정을 찾고 정 붙일 곳을 찾는다면 다행이겠지만, 상대가 나빴다.

돼지 고양이라니. 저놈의 정체가 뭔지도 모르는데―.

명월은 자신이 온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지그시 정면을 응시하는 백호를 내려다봤다. 그의 정수리를 빤히 바라봐도 반응이 없었다.

결국 명월의 무릎으로 그런 백호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 만약 이번에도 모르는 척하는 거라면 그땐 목을 졸라 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었는데 의외로 바로 고개를 든다.

막상 쳐다보자 괜히 건드린 건가 싶기도 했다. 명월은 모르는 척 백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조금 전까지가 백호가 무엇을 보고 있었던가 싶어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자 보이는 건 너른 마당과 한편에 돼지 고양이와 함께 쪼그리고 앉아 있는 계진이었다.

그 외에 달리 볼거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특출날 것 없는 장면이 마음으로 스며들어와 편안하게 한다.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낸 명월은 차분하니 정면을 응시하다가 눈을 감았다.

멍하니 있던 명월은 얼마 안 돼서 얼굴에 닿는 시선을 느끼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호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내내 못 본 척 다른 쪽을 주시하던 주제에 왜 이렇게 뚫어지라 보는지 모르겠다. 안 본 척하고 있을 때하고는 미묘하게 다른 의미로 신경 쓰였던 명월은 ‘뭘 봐. 고개 돌려.’라는 식으로 말하려다 말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명월도 백호를 봤다. 이렇게 보면 잘생긴 얼굴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게 보기만 해도 시원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저런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 그에 걸맞게 무게감 있게 행동하면 오죽 좋을까. 언제까지 장난스럽게 굴 생각인지를 모르겠다면서 백호를 물끄러미 보던 명월은 입을 열었다.

“뭔가 이상한 걸 꾸미는 건 아니겠지?”

혼자서 조용히 있는 게 수상쩍다. 지금은 이렇게 있어도 언제 갑자기 돌변해서 이상한 짓을 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걸 염두하고 꺼낸 말에 백호의 눈썹이 살며시 올라간다. 직후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글쎄, 라고 중얼거린다.

“독각귀의 기운은 느껴져?”

“…….”

물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꺼낸 말이었다. 그 말에 백호는 바로 입을 다물곤 눈을 내리뜬다. 은근슬쩍 시선을 회피하는 모습에서 그가 독각귀에 대해 말하길 꺼린다는 게 느껴졌다.

그토록 말하기가 껄끄러운 걸까.

아니면 그만큼 그 독각귀가 위험하다는 걸까.

독각귀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존재였다. 아직은 온전히 받아들인 건 아니었지만, 백호가 자신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 건 아닐 거다.

‘그’는 죽었고, ‘그’를 잃은 독각귀가 자신 앞에 나타났다. 그건 대체 어떤 의미인 걸까. 명월은 아래로 내린 손을 움켜쥐었다.

아까와는 또 다른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형성 된다. 명월은 백호 옆에 앉아서 한동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 * *

바깥에서 할 일이 있어 그걸 마무리 짓고 관아로 돌아온 복운은 저를 쳐다보는 포졸의 시선이 전과는 다름을 느꼈다. 다들 이쪽을 흘깃거리면서 안색을 살피듯 조심스레 쳐다보는데 왜 그러는가 싶다.

마음에 드는 종류의 시선이 아닌지라 ‘왜들 쳐다보는 거야.’라고 한마디 하고도 싶은데, 지금은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 내내 복운의 뇌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 도성에서 명월의 지인이 내려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느낌이 싸했다.

명월에겐 미안한 말이긴 하나, 그가 도성에서 어울려 다니는 무리가 있긴 했어도 그들이 일부러 이런 촌구석까지 찾아올 정도는 아니었다. 다들 그저 명월의 부친인 유일선 영감의 연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명월도 그걸 알기 때문에 사람 사귐에 있어 적당히 선을 긋는 게 있었다. 그런 명월을 찾아온 이가 누군가 싶어서 봤더니 땡중이다. 하는 행동이나 말하는 투가 이상하다 싶더니만 결국엔 큰 사고를 쳐 버렸다.

그렇게나 사람 많은 곳에서 대체 뭔 소리를 지껄인 건지 모르겠다. 거기다 그 이상 행동이라니.

어쩌면 그도 명월과 마찬가지인 걸지도 모른다. 명월처럼 보통 사람이 볼 수 없는 걸 보고, 듣는 걸지도 모르지.

당시 그 땡중이 명월을 가리켰을 때, 명월은 정말 놀란 듯 보였으나 정말은 의도된 상황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자신만 빼고 둘이서 주고받은 말이 있었던 거다. 그런데 자신에게 들키면 뭐하니까, 그런 식으로 치장한 거다. 원래 명월은 정체를 드러내길 껄끄러워 했던 게 아니던가.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런 이상 행동을 취하는 걸까.

애초에 이곳으로 오질 말았어야 했다. 여기로 오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들이 생겼을 리가 없는데―.

복운은 아래로 내린 양손을 움켜쥐었고, 그런 그의 귀로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들었나.”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되는 양 숨죽인 채로 속살거리는 걸 들은 복운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건 또 뭔가 싶어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벽 뒤에 붙어서 안쪽으로 얼굴을 내밀자 저기 끝에 서 있는 포졸 셋이 보였다.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걸 본 복운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아니. 저것들이 모여서 또 뭔 헛짓거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만약에라도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라면―.

“이번에 온 사또가 귀신을 잡는 분이라고 하더구먼.”

“이미 낮에 파다하다 말이 돌고 난 후야. 이 사람이 다들 아는 걸 이제 와서 꺼내는군.”

다들 아는 내용을 왜 새삼스럽게 꺼내느냐는 듯 바라보는 동료의 눈빛에, 포졸은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이 말은 들었나? 이병현 대감이, 당했다고 하던데.”

얼굴 옆에 손을 대고 은밀하게 꺼내는 말에 다른 포졸 둘의 안색이 굳는다.

이병현 대감이라 하면 이 반양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분이 당하다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던 포졸이 주먹을 휘두르는 흉내를 냈다.

“자네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건가. 여기서 그런 말은 하지 말게. 난 아무것도 못 들은 거네.”

다른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는 웃으면서 할 수 있어도, 이병현 대감은 그게 아니었다. 괜한 일에 휘말려서 나중에 봉변을 당하고 싶지 않았던 포졸은 양손으로 귀를 누르면서 아무것도 안 들리는 척을 해댔다.

그런 동료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하던 말은 마무리 짓고 싶었던 이는 상대의 손목을 잡아 억지로 귀에서 떨어뜨렸다.

“그러지 말고 좀 들으라니까. 대감이 구미호에게 당했다나 봐. 뒤쪽 마당에 쓰러져 계시는 걸 그 집 머슴이 발견한 것 같더라고. 그런데 대감의 얼굴과 가슴에 구미호의 손톱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다는 거야. 그래서 지금 내내 정신을 잃고 계신다는구먼.”

“그게 확실한 말인 것 맞나? 다른 건 몰라도 대감에 대해선 쓸데없는 말을 해선 자네도 좋을 게 없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아닌 말을 하겠나. 진짜니까 사람 말 좀 믿게나. 그래서 그 일을 두고, 다들 사또와 관련된 일이 아닌가―하고 말들을 해대는 거야.”

그 말에 포졸은 물론이거니와 복운도 안색을 굳혔다.

이병현 대감이 구미호에게 당했는데 왜 거기서 명월이 나온단 말인가.

가만히 있으면서 포졸 놈들이 더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있으려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았다. 슬슬 나가 봐야겠다면서 복운이 나서려는 것과 동시에 다른 포졸이 다급히 물었다.

“그건 대체 무슨 말이? 정말은 구미호가 아니라, 사또께서 하셨다는 거야? 자네 어디 가서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게. 아닌 말을 했다간 정말로 큰일 치르게 될 거야.”

“사또가 그걸 했다는 게 아니라, 이병현 대감이 사또를 성가시게 구니까 그 벌을 받은 게 아니냐―하는 소문이 돈다는 거야. 솔직히 대감이 사또께 위해를 가하려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 다들 대감이 두려우니 말을 못한 것뿐이 아닌가. 그래서 자꾸만 건드리니까 구미호가 나서서 그 대감을 할퀴어 버린 거야. 지금 대감이 누워 있는데 얼굴의 반이 망가져서 아주 흉물스럽게 변했다고 하더군.”

“자네 하는 말이 이상하군. 대감이 사또를 건드린 거랑, 구미호가 대감을 할퀸 게 무슨 상관이야? 사또는 귀신을 잡는 분이 아니시던가. 그런데 구미호를 부린다는 거야 뭐야? 그게 사람인가? 이상하잖아.”

“그래. 자네 지금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어디 가서 그런 말 더 하지 말게나. 우리들이나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지, 다른 사람이 들으면 큰일 생기게 될 거네. 특히, 사또와 관련된 말은―.”

정말 명월이 귀신을 퇴치할 수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그 전까진 조심하자는 식으로 말할 셈이었다.

그때 뒤에서 어험,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난데없는 헛기침에 놀란 포졸 둘이 움찔해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저기 벽 뒤에서 나오는 복운이 보였다. 주먹 쥔 손을 입술 근처에 댄 채로 몇 번이나 더 기침을 한 후, 복운은 고개를 들어 모여 있는 포졸을 흘겨봤다.

굳은 복운의 눈빛을 읽은 포졸들의 안색이 슬며시 굳는다.

“마, 맞다. 내가 할 일이 있었는데 깜박했구먼.”

“그러게 말이야. 나도 일이 있었지. 서둘러 가 보자고.”

“그래. 가자고. 이런 데서 잡담을 해선 안 되는 거지.”

모여서 은밀한 대화를 나눈 게 언제였느냐는 듯 급하게 자리를 뜨는 포졸을 살피는 복운의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저 망할 놈들. 그런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노려보는 복운의 얼굴은 살기등등했다. 그 매서운 시선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포졸들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빨라졌다.

그렇게 포졸들이 도망치듯 자리를 피해도 복운은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이것 봐라. 결국 이런 식으로 쓸데없는 말이 만들어지지 않은가. 정말 명월이 하지 않았고,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데 이런 식으로 벌써부터 얽혀 들어가는 거다. 그 때문에 피해를 입게 되는 건 바로 명월 본인이었다.

그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왜 일을 이 정도로 꼬이게 만드는지 모르겠다면서 몸을 돌린 복운은 한달음에 명월의 처소로 갔다.

대문을 넘어서 들어가자 대청 한쪽에 앉아 있던 계진이 일어났다.

“오셨어요?”

하지만 복운은 굳은 얼굴로 다가와 명월의 방을 바라봤다.

“안에 사또께서 계시냐.”

묻는 복운의 얼굴이 무섭게 보인다. 지금껏 저런 얼굴을 한 적이 없었던 복운이니만큼 의외일 수밖에 없었던 계진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님이랑 함께 계세요.”

“……함께 계시다고?”

조금 있으면 밤인데 왜 방에서 둘이 있는지 모르겠다. 둘 다 사내이니 별일이야 있을까 싶으면서도 그간 명월에게 지저분한 벌레들이 꼬여 왔던 걸 떠올린 복운은 손을 움켜쥐었다.

원래 아랫사람은 윗사람이 부르기 전에 나대선 안 되는 법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지만, 명월의 일이 되면 그런 걸 생각할 수 없게 되는 복운이었다.

복운은 당장 대청 위로 올라가선 명월의 방문 앞에 멈추어 섰다.

“사또. 저 복운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안에서 대답이 돌아오기 전에 복운은 손잡이를 잡곤 문을 열었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방으로 들어서면서 고개를 든 복운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방 안쪽에 앉아 있던 백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신의 허벅지에 머리를 벤 채로 누워 있는 명월의 이마에 한 손을 올린 채였다. 복운을 바라보는 시선은 가벼웠지만, 동시에 매서움이 담겨 있었다.

네놈은 무언데, 방에 함부로 들어오는 거냐. 그런 느낌이 풍기는 눈빛을 던지는 백호를 두고 복운은 아―하는 소리를 내면서 손을 마주잡았다. 그러곤 다시 명월을 내려다봤다.

이부자리 위에 똑바로 누워선 백호의 허벅지를 벤 명월은 무척 편안해 보였다. 원래 예민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 방에 들어오면 낮잠을 자다가도 눈을 뜨곤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런 명월의 이마에 올려진 백호의 손은 자연스러웠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그리 놓인 손을 보곤 마른침을 삼킨 복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또께서 주무시는 모양입니다. 제가 이부자리를 다시 봐드리―.”

“필요 없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날아오는 싸늘한 대답에 복운은 주춤거렸다.

“시끄럽게 나불대지 말고 그대로 문 닫고 나가라.”

지금 복운은 방 안에 한 발만 들이밀고 있었다. 들어오려다가 백호와 명월의 모습을 보곤 놀라서 그대로 얼어붙었던 거다.

여기서 한발만 뒤로 빼고 문을 닫으면 나가게 되는 거였다. 백호가 그걸 원하고 있음을 모르진 않으나 그대로 따를 순 없었다.

저런 상태인 명월을 두고 어찌 혼자 나갈 수 있단 말인가. 왜 명월이 저런 놈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누워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저리도 편안한 모습으로…….

머리가 복잡해서 터질 지경이었던 복운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린다. 지금 본 광경을 믿을 수 없는 양 서 있는 그를 바라보는 백호의 눈빛이 점점 더 싸늘해진다. 차가운 검은 눈동자엔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냥 무시하고 버티자 싶으면서도 그리할 수 없었던 복운은 천천히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문을 닫고 나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백호는 눈에 들어간 힘을 빼냈다. 별것도 아닌 놈이 성가시게 군다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네놈은 아랫사람 교육을 어찌 시키는 거냐.”

대체 뭘 믿고 저렇게 건방지게 구는 거냐면서 백호는 명월의 이마에 올린 손을 떨어뜨렸다. 그러곤 대신해선 그의 뺨과 턱 등을 쓰다듬고는 가슴에 한 손을 올리곤 가볍게 토닥였다.

손이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명월의 호흡이 점점 더 깊어진다. 제 허벅지에 머리를 벤 채로 깊이 잠든 명월의 평온한 얼굴을 보고 있는 동안 백호의 굳은 표정도 서서히 풀린다.

이렇게 잘 잘 거면서 괜한 고집은―.

최근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바쁘기도 했고, 신경 쓰는 것도 많았던 명월이었다. 그런 주제에 책상 앞에 앉아선 책을 읽는답시고 폼을 잡고는 느리게 고개를 돌리기에 그냥 쉬라고 했다.

누워서 자라고 하는 말에 명월은 그런 백호를 돌아보곤 미간 사이로 살짝 주름을 만들었다. ‘난 너처럼 팔자가 편하지가 않아.’ 그런 느낌으로 쳐다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잠자코 있었다. 정말은 네가 얼마나 버티나 싶었던 거다.

실제로 명월은 얼마 안 되어서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백호는 기다렸다는 양손을 뻗었다. 백호가 어깨를 잡아 뒤로 당기자 명월은 고개를 저으면서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자신이 달리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찡얼거리는, 그래. 그건 찡얼거리는 거였다. 명월 딴에는 진지했을지도 모르겠으나 백호에겐 찡얼거림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바로 눕지 않고 버티려 하던 명월이지만, 계속해서 잡아당기고 이불을 펴서 눕히자 결국에는 이런 상태가 되었다.

잠든 얼굴이 참 곱다. 평소에서 이런 얼굴을 보여 주면 오죽 좋으냐면서 백호는 계속해서 명월의 가슴을 토닥거렸다.

별거 없는 행위나, 지금의 이 차분한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백호는 명월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그를 주시했다.

* * *

본인은 똑바로 걷는다 싶겠지만, 제삼자가 지켜보기엔 그게 아니었다.

복운이 명월의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가 다시 나왔을 때부터 이상하다 싶어서 그를 주시하던 계진은, 복운이 제 방으로 가는 내내 뒤를 졸졸 따랐다. 그러다 복운이 바로 방에 들어가지 않고 마루 한쪽에 앉는 걸 보곤 멀찍이 서서 그를 쳐다봤다.

말을 걸까, 말까. 그런 생각을 담은 채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 것일까. 복운이 느리게 고개를 들어선 계진을 보곤 가볍게 웃어 보였다.

“들어가 있어라. 조금 있다가 저녁 먹어야지.”

“도울게요.”

“괜찮다. 내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 가 있어라.”

어서 그렇게 하라며 빤히 바라보는데 계속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눈치를 살피듯 눈을 굴리던 계진은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대로 달려갔다.

정말은 계진이 옆에 있었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복운은 그걸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지금은 속이 너무 시끄러워서 다른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무겁고 깊은 한숨을 내쉰 복운은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명월이 그런 식으로 누군가와 함께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경계심 없이 편안하게 있는 모습은―.

어쩌면 별거 아닌 상황일 수도 있는 일일 거다. 땡중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은 진짜 스님이라서 그에게서 편안함을 느낀 명월이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굳이 휴식을 취하는 데에 그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있을 필요가 있는 걸까. 아니, 애초에 명월이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식으로 몸을 기댄 걸 본 적이 없었던 만큼 충격이 컸다. 지금껏 명월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유일하다 생각했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복운의 얼굴이 점점 더 심각하게 변한다. 손을 들어 입을 가린 채로 눈을 내리뜨는 복운의 등 뒤로 하얀 그림자가 나타났다.

느릿하게 걸어 나온 나비는 복운의 등 뒤에 서선 그를 올려다봤다. 처음에는 졸린 눈을 한 채로 그를 바라봤으나 점점 눈을 가늘게 뜬다.

* * *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에 계진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서 고기를 뜯고 밥을 먹고, 국그릇을 든 채로 그걸 꿀꺽꿀꺽 마시는 백호를 보고는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

지금 백호를 보면 정말 잘 먹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거기다 빨리도 먹었다. 분명히 비슷하게 수저를 든 것 같은데 백호는 벌써 세 그릇째를 비워 냈다.

그렇게 한 번에 많은 양을 빠르게 먹어치운 그는 느긋하게 트림을 하면서 손으로 턱 아래를 문질렀다.

“그럭저럭 먹을 만하군.”

며칠 굶은 사람인 것처럼 실컷 먹고선 한다는 말이 저거다. 요리한 사람이 들으면 분명 화를 낼 거라며 계진은 밥그릇에 수저를 넣었다.

그런 계진의 얼굴 위로 시선이 와서 박힌다.

백호가 쳐다보는 걸 느낄 수 있었던 계진은 왜 또 그러는 건가 싶어 위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계진이 고개를 드는 것에 맞춰서 백호가 아래로 손가락질을 했다.

“사내 녀석이 그렇게 깨작거리면 안 된다고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계진은 밥그릇을 들고는 빠르게 수저질을 했다. 고기도 먹고, 김치도 먹고, 백호처럼 국그릇을 들어서 국물을 마신다.

따라한다고 해도 예전처럼 심각하게 배를 곯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잘 먹는 모습을 연출하는 계진의 행동에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밥은 그렇게 먹어야지. 다 먹고 상은 밖에 내놔라.”

입 안에 밥이 들어가 있었던 계진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계진의 모습에 피식, 하고 웃은 백호는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건넌방에서 명월이 나오다가 둘의 시선이 부딪친다.

백호는 느긋하게 손을 흔들었고, 명월은 살짝 인상 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바로 대청을 내려가선 목화를 신는 명월을 두고 백호가 한마디 건넸다.

“일하러 가는 거냐. 부지런하네.”

가볍게 말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말을 하는 상대가 백호이다 보니 곱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지금 빈정거리려고 저런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싶었던 명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백호를 올려다봤다.

빤히 쳐다봐도 백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오히려 왜 그렇게 보는 거냐면서 편안하게 팔짱을 낀 채로 있는 모습에 명월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입씨름은 하고 싶지 않았던 명월은 재빠르게 백호 앞에서 멀어졌다.

“이따 동헌으로 나가 볼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라.”

그 순간 명월은 기다렸다는 듯 뒤를 돌아봤다.

“오지 말고 그냥 여기에 있어―!”

명월의 말에도 백호는 느긋하게 손을 흔들며 웃을 따름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니 오지 말라고 한 게 쓸모가 없었던 것 같다.

영락없이 따라 나오게 생겼다면서 혀를 찬 명월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곤 대문을 넘어갔다.

그렇게 대문을 나서서 백호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되어서야 명월은 내내 참고 있었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고개를 드는 명월의 미간으로는 깊은 주름이 생겨 있었다.

아침에 무척 기분 좋게 눈을 떴다. 푹신한 깃털에 감싸인 듯한 느낌이 너무 좋고 편안해서 오랫동안 그리 있고 싶었지만, 이윽고 자신의 이불이 그 정도로 좋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편안한 건가 싶어 의아함을 품고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백호였다. 백호의 팔에 머리를 벤 채로, 그에게 안겨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게 백호라는 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저 그에게 안겨 있는데도 편안함을 느낀 게 문제가 되었다. 처음에는 아니었는데,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래선 안 되는데.”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명월은 입을 다물었고,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저 백호와 함께 있는 생활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저놈이 옆에 없을 때가 되었을 때, 그게 낯설게 느껴지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없을 거라면서 명월은 가볍게 실소를 흘렸다. 그러곤 재차 걸음을 옮기려는데, 저기 앞에서 달려오는 이방이 보였다. 여전히 얼굴에 멍이 남아 있었지만, 표정은 한결 훤했다.

그를 본 명월은 걸음을 멈추곤 뒷짐을 지었다. 명월 앞으로 온 이방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사또.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어제 내가 떠난 후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나.”

명월의 물음에 이방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없이 푹 잘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또 덕분입니다.”

만약 명월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상황이 더 복잡하게 꼬였을 거다. 어쩌면 간밤에 변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 해서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전보다 나아진 거였기에 그게 어딘가 싶었다.

재차 고마움의 인사를 하려는데 명월이 그런 이방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깨를 쓰다듬는 손길에서 말보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이방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몸에서 손을 뗀 명월은 앞장 서 걸어갔다. 자연스럽게 명월의 뒤에 따라붙어선 이방은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사또―.”

말의 억양이나 느낌이 아까와는 확연히 달랐다.

명월은 이방을 내려다봤다.

“달리 문제가 생긴 일이라도 있는 건가.”

이방이 이런 식으로 무게를 잡는 경우는 하나뿐이었다. 문제가 생긴 게 있기 때문에 저렇게 사또, 하고 운을 떼는 게 아니겠는가.

명월의 말대로였기 때문에 이방은 송구하다는 양 눈을 내리떴다.

“바로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우선 알아 두시는 게 좋을 듯싶어서―.”

“알아 두기만 해도 되는 일이라면 편하게 말하게. 들어나 두지.”

“이병현 대감에게 변고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명월은 걸음을 멈추곤 바로 뒤를 돌아봤다. 뒷짐을 지고 선 명월의 얼굴이 굳어 있는 걸 본 이방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제 밤에 뒤뜰에서 쓰러져 있는 걸 누군가 발견한 모양인데, 대감의 얼굴과 가슴에 짐승의 것으로 보이는 발톱 자국이 길게 생겼다 합니다.”

“짐승의 것이라니. 뒤뜰이라면 자택에서 그런 일을 당한 거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 상처가 특이하여 사람들 사이로 떠도는 말로는, 구미호의 소행이 아니냐 하면서―.”

“구미호? 이번에는 구미호가 나타난 거냐?”

귀물도 나타난 마당에 구미호 하나가 추가된 게 크게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긴 했다. 그렇다 해서 지금 명월이 느끼는 어이없음이 감소되는 건 아니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보라는 시선에 이방은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것뿐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전에 말씀 드렸다시피, 각 집마다 믿는 미신이 하나씩 있는 곳입니다. 짐승의 발톱 자국이 생겨 있으니 그걸 두고 구미호의 소행이 아니냐―하고 떠들어 대는 것이랍니다. 거기다 다들 쉬쉬하긴 했어도, 그간 대감의 악행에 대해서 알기 때문에 천벌을 받은 거라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천벌이 내린 거라면 벼락이 떨어져야지, 짐승의 발톱 자국이라니. 이상하지 않나.”

“……어찌할까요?”

“…….”

이방이 이런 식으로 어찌할까요, 라고 묻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고을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경우, 그걸 처리하고 알아보는 게 사또의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병현 대감 정도가 되면, 무슨 문제가 생겨도 바로 나가서 알아볼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쪽에서 먼저 연락을 취한 것도 아닌데 움직이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어쩌면 그는 체면 때문이라도 이번 일을 묻으려 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이건 변명에 불과했다. 만약 이병현 대감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런 일이 생겼으면 포졸 하나를 보내거나 직접 나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병현 대감이기 때문에 선뜻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그런 놈이 잘못되었다 해도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 식으로 치부하고 싶은 마음이 없잖아 있었던 명월은 깊이 숨을 들이쉰 후에 천천히 내뱉었다.

명월의 주름진 얼굴에서 묻어나는 고뇌를 읽은 것일까. 이방이 재차 말했다.

“이병현 대감 정도가 되면 그쪽에서 언질을 주기 전에 우리도 움직이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은 알아만 두시고 기다려 보시지요.”

“나도 똑같은 생각이었네. 일단은 기다려 보지.”

말은 이리해도 내심으론 ‘계속 연락하지 마라.’라고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없었던 명월은 재차 걸음을 뗐다.

* * *

인명부에 적힌, 수상쩍게 죽은 사람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라고는 해도 공공연히 떠들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방과 예전에 신세를 졌던 이종원이 탁자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일차적으로 이방이 알고 있거나 그 죽음에 대해서 기억하는 이들은 빼내고, 간혹 의혹이 있는 이들은 이종원에게 물어보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면 걸려드는 게 있었다.

“심장이 갑자기 멈추어서 죽은 걸로 되어 있지만, 정말은 그 죽음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이종원은 이방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곁에 서 있는 게 부담스러운지 몇 번이나 그를 흘깃거리면서 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방은 그 나름대로 명월이 의문을 제시한 이들의 죽음과 관련한 일을 알아볼 뿐이었다. 그리고 이종원의 불명확한 대답을 들은 명월은 안색을 굳힌 채로 물었다.

“사인을 따로 알아보지 않은 거냐.”

“알아보고 싶어도 전 사또께서 대충 넘어가라 하셨기에…….”

전 사또를 운운하는 순간 이방의 눈초리가 꿈틀거린다. 이윽고 그 얼굴 위로 서리는 그늘을 본 명월은 혀를 찼다.

분명 화소군 그놈의 뇌물을 받아먹고는 대충 넘어가려 들었던 거겠지. 한번 뇌물을 받고,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더는 어쩌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던 거고.

“돈 처먹은 놈들은 이래서 문제야. 일을 하려고 들지를 않잖아.”

하지만 그런 걸로 따지면 명월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서 지금은 열심히 일하는 척을 하긴 해도, 전에는 그도 건성으로 하는 편이었다.

육방들이 올린 보고문도 제대로 읽지 않고, 알아봐야 할 것들에 대해서도 다음에 한다는 식으로 넘겼던 거다. 그런 자신이 이런 복잡한 일에 이토록 매달리게 되다니.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며 명월은 재차 인명부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때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포졸이 얼굴을 집어넣었다.

“이방 나으리. 잠시 괜찮으시겠습니까.”

급한 일이 아니라면 찾지 말라 했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던 이방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방이 포졸과 함께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히는 순간 명월은 인명부 위에 손을 올렸다.

내내 이방의 눈치를 살피던 이종원이나, 이런 식으로 명월과 단둘이 남게 된 상황도 부담스러운 건 마찬가지인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불편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그이나 명월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마디 건넸다.

“그래. 이후로는 별다른 문제는 없던가.”

전에 명월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후, 들러붙어 있던 잡귀가 떨어져 나가 버린 이종원이었다. 그날 이후의 일에 대해서 묻는 거란 걸 모르진 않았던 그는 네, 하면서 대답했다.

“덕분에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 고마움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입에 발린 말은 안 해도 괜찮아. 어차피 서로에 대해선 알만큼은 알고 있으니까.”

명월의 냉랭한 반박에 이종원은 입을 다물었다. 그 말대로였기 때문에 새삼 무슨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이리로 갑자기 불려 오게 된 걸로 머리가 복잡해서 명월을 차마 똑바로 보지도 못했던 이종원은 용기를 내 고개를 들었다.

예전에 본 모습 그대로인 명월을 확인한 그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다. 조심스레 명월을 살피나 싶던 그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마을에 도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정말로 그런 분이셨습니까.”

묻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살짝 올라가는 명월의 입꼬리를 본 이종원은 지금 자신이 괜한 말을 했구나 싶어선 바로 입을 다물곤 고개를 숙였다. 명월은 그쪽으로 읽고 있던 책을 밀었다.

“그래. 이자는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말해 봐라.”

이종원은 냉큼 책을 받아서 제 앞으로 돌렸다.

10년 전에 나물을 캐러 갔다가 갑자기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져 그대로 사망한 사건이었다. 근처에 목격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정확한 사인을 알 순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재수 없게 죽었군, 하고 지나칠 만한 일인데 명월은 그런 게 없었다. 용케도 이걸 잡아냈다면서 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사고였습니다. 숲에서 발견했는데,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확인을 해 봤는데 마땅히 이상한 점은 없고, 그냥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지요. 봐선 안 될 걸 본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었습니다.”

“귀신이라도 봤나 보군.”

담담한 대꾸에 이종원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로 인해 죽은 이는 몇이나 봐 왔으나, 그걸 이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자는 처음이었다. 다들 알고는 있어도 쉬쉬하곤 했었는데.

이종원은 곱상한 명월을 흘깃거리고 몰래 보다가 재차 물었다.

“귀신을 퇴치하실 수 있다면 말입니다. 이 고을 안에 있는 것들을 전부 다 잡아들이실 겁니까.”

이방도 없고 명월 쪽에서도 먼저 귀신 운운하니 말을 꺼내기가 한결 수월해진 모양이었다. 앞으로 몸을 내민 채로 적극적으로 묻는 이종원을 두고 명월은 가볍게 웃으면서 다른 인명부 쪽으로 손을 뻗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에 있는 놈들은 위험합니다. 잘못 걸리시면 큰일 나실 겁니다.”

그 순간 명월의 손끝으로 힘이 들어간다.

이방이 걱정해 주는 거야 언제나 그런 거니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이종원은 아니었다. 친분이 거의 없는 자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정도로,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일이 위험한 것인가 싶었던 명월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자네가 지금 두려워하는 건 귀신인가, 사람인가.”

이런 식으로 오히려 질문을 받게 될 줄 몰랐던 걸까. 이종원은 당장 안색을 굳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처럼 잠자코 있나 싶던 그는 명월의 얼굴을 재차 살폈고, 변함없는 그 모습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몇 번이나 말을 할까, 말까. 그런 고민을 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간혹 사람의 탈을 쓴 귀신이 있지요. 그런 놈들이 정말로 무서운 거랍니다.”

“그런 말을 해도 괜찮나? 그 사람 탈을 쓴 귀신에게 감시 받는 입장이 아니던가.”

“왜인지 모르겠지만 감시도 없고, 이상하게 죽는 사람도 없고……. 그 모든 게 사또 덕분인 것 같아서 용기를 내 말을 꺼내 본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후 이종원은 명월을 흘깃거렸다. 그 눈동자 안쪽에는 ‘만일 무슨 일이 생긴다면,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명월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는 것으로 무시하곤 다시 인명부를 살필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종원은 꽤나 집요하게 명월의 안색을 살폈다.

인간들이란, 왜들 저렇게 매달리는지 모르겠다. 문제가 생겼다 싶으면 스스로 해결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인가. 애초에 노력만으론 어찌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위험한 일이 생기면 도와주마, 그런 식의 말을 기다리고 있음을 모르진 않았다. 그러나 명월은 이종원이 원하는 걸 그의 입에 물려주지 않았다. 그는 재차 인명부를 펼치면서 지나치는 어조로 물었다.

“자네 말이야. 이 고을 안에서, 이상한 사람을 본 적이 있나?”

“이상한 사람이라면……누구를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화소군 외에, 이상한 인간들이 없었느냐고 묻는 거야.”

“…….”

이제 와 새삼 말을 숨기는 것도 우습다.

하지만 질문이 당황스러웠던지 이종원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선 입을 다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이 말에 어떤 반응을 취해야 할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얼어붙은 채로 있는 그를 두고 명월은 대답을 기다렸다.

조금 전 몇 번이나 명월을 흘겨보던 주제에 지금은 그 시선을 피하려 한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떻게든 피하려 하지만, 명월은 집요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계속 주시하자 결국 이종원 쪽에서 먼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가, 가끔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긴 합니다만, 그러니까 그건―.”

“화소군 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이종원은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더는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여기까지 말한 마당에 더 뭘 숨기겠나 싶었던 그는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존재가 있긴 합니다만…….”

사람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존재라―.

이종원이 한 말을 고스란히 따라하며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곳에 화소군 외에 그런 자가 더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자는 대체 누굴까. 궁금함에 묻지 않을 수 없었던 명월이 입을 염과 동시에 문이 활짝 열렸다. 그것에 이종원은 물론이거니와 명월도 놀랐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타날 놈이라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금방 표정이 굳어진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백호는 껄렁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어두운 굴속에서 뭘 하는 거야. 답답하지도 않냐?”

그 순간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방이나 다른 곳에 따로 있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명월이 이종원과 중요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그걸 방해 받은 기분이 들었기에 자연스럽게 안색을 굳히는 명월이지만, 백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와 탁자 위에 놓인 인명부를 뒤적거렸다.

그건 함부로 손을 대선 안 되는 거였다. 건드리지 말고 나가 있으라 할 셈이었는데, 그때 바싹 오그라든 이종원이 보였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이종원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그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장의사인데다가 이런저런 일로 인해서 귀신이 들러붙기까지 한 놈이었다. 그런 놈이니만큼 백호의 기가 느껴진 걸지도 모른다.

낯빛이 점점 파리하게 질려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있는 걸 본 명월은 혀를 찼다. 조금 더 알아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어쩔 수 없는 건가 싶었던 그는 가볍게 턱짓을 했다.

“나가 있어라.”

명월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종원은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멀어지는 이종원을 보고 백호는 “저 한심한 놈은 대체 뭐야.”라고 중얼거리며 조금 전까지 이종원이 앉아 있던 곳에 걸터앉았다.

다리를 꼬고 앉아선 본격적으로 인명부를 넘기는 걸 본 명월은 한숨을 쉬며 그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갔다.

백호는 읽고 있던 걸 빼앗아 간 명월을 한번 보더니 다른 쪽에 있던 인명부 쪽으로 손을 뻗었다. 명월은 당장 그곳에 손을 대고 누른 채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읽어 볼 필요가 없는 것들이야.”

“그건 그렇지. 그런 걸 읽지 않아도 여기서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내가 가장 잘 아니까.”

“…….”

명월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명월은 말없이 백호를 바라봤고, 읽고 있던 인명부를 덮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는 명월을 보고 백호도 자세를 바로잡는다. 명월이 옆을 지나치려 하는 순간에 맞춰서 백호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기다려. 어딜 가려고.”

손목이 잡히자마자 그걸 뿌리친 명월은 백호를 내려다보면서 한마디 던졌다.

“따라오지 마.”

그 말을 남긴 후 밖으로 나가 버리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쳐내진 제 손을 내려다봤다. 명월이 힘주어 잡은 것도 아닌데 세게 붙잡을 수 없었다.

잡아서 앉혀놔 봤자 명월의 기분은 가라앉아서 내내 굳은 표정을 지은 채로 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죽상인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고 싶진 않았던 백호는 손을 움켜쥐었다.

인명부에 적혀 있는 수많은 이름들. 그 이름을 읽으면 바로 얼굴이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단순하게 ‘아, 그렇게 죽은 놈이 있었지.’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다.

명월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그들이 죽을 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도와주지 않은 것이냐, 그리 따져 묻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백호 입장에선 도와줄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개입되어선 안 되는 문제였다. 그걸 명월이 이해할 날이 올까. 쉽진 않을 테고, 그때마다 얼굴을 붉히겠지.

“성가시군.”

중얼거린 백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 * *

밖으로 나온 명월은 팔짱을 끼었다. 백호가 인간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니 그가 가끔씩 던지는 말에 일일이 반응하지 말자 싶으면서도 가끔씩은 이렇게 마음이 싸하게 식을 때가 더러 있었다.

인간인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부분 중에서 가장 큰 격차를 벌이는 게 바로 저런 거였다. 왜 귀물이나 귀신에게 당하는 인간을 백호가 도와주지 않느냐는 것 말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도 누군가 어려운 일이 생긴 사람이 있었을 때 그걸 매번 도와준 건 아니었다. 그때마다 나서서 도와주는 게 불가능하기도 했고 말이다.

백호는 이 땅의 수호신 같은 게 아니었다. 그는 이곳을 맡은 거라는 식으로 본인의 역할을 표현했다. 그건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나서서 처리한다는 의미는 아닐 터였다. 실제로 자신의 부탁을 받지 않았다면 끝까지 도와주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나서거나 개입하지 않고 그저 지켜만 볼 따름인가. 그가 주시자 같은 역할이라면, 지금처럼 인간들 사이에 끼어들어 뭔가를 하려는 경우는 무척 드문 상황이라 볼 수 있었다.

일단 지금 하는 일에 도움 주는 것에 고마워하고, 그 외에 더 많은 걸 바라진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명월은 눈을 내리뜬 채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알 수가 없는 일투성이라면서, 명월은 한쪽 발을 들었다. 몇 걸음 옮기기 전에 저기 앞에서 오는 이방을 발견했다. 벌써 볼일을 마치고 온 모양이었다.

빠르다면서 명월은 그리로 걸어갔고, 이방은 밖으로 나오는 명월에게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벌써 일을 다 보신 겁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훼방꾼이 나타나서 진득하니 앉아 있을 수가 없더군.”

훼방꾼이라 하는 순간 백호가 떠오른 이방은 저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곤 실수했다며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이종원 그놈이 돌아가려고 해서 한마디 했는데 제가 실수한 모양입니다.”

이방이 보기엔 이종원이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중간에 도망치는 것처럼 여겨졌던 거다. 어딜 가느냐고 묻는 말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웅얼거려서 한소리를 했는데 미안하게 되었다며 이방은 안색을 굳혔다.

“다음에 얼굴 볼 일이 있으면 미안하다 사과하면 될 게 아닌가.”

“다음이라면, 내일은 부르지 않으시는 겁니까?”

인명부에 죽은 이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선 이종원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던가.

그런 의문이 담긴 눈동자로 바라보는 이방을 두고 백호는 웃었다.

“녀석보다 그 일을 자세히 아는 자를 알게 되었으니 정 궁금하면 그자에게 물으면 된다.”

“그런 이가 있었습니까?”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은 명월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미묘하게 굳어 있는 표정을 본 이방은 더 묻지 않고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 * *

인명부를 하나하나 살피고 나서 의혹이 있는 자들의 가족이나 지인을 찾아서 그 당시의 일에 대해서 묻는 것도 일이었다.

그 일을 명월이 일일이 나서서 할 순 없었기에 따로 사람을 써야 했는데, 그것도 계획을 잘 잡아야만 했다.

일단 백호가 한 짓이 있어 자신이 귀신 잡는 사또라고 불리는 것 같긴 하지만, 그 사실만으로 명월이 하려는 일에 모두가 협조적이진 않을 거다. 개중엔 자신에게 반발하는 이도 있고, 진실을 알아도 숨기려는 자들도 분명 있을 터였다.

일을 처리하려 부린 사람이 정말은 화소군이나 다른 쪽에 붙어 있는 첩자일 수도 있는 노릇이고, 알아보려 움직이는 이들의 행동을 파악한 화소군이 뒤를 캘 수도 있음이었다.

반양은 화소군의 손바닥 안이었다. 이 반양 안에 화소군, 그가 부리는 자들이 여기저기 숨어들어 있을 거다. 포졸 중에서도 있을 거고, 육방 중 누군가도 분명 그의 사주를 받겠지. 일단은 이방은 아닐 테고, 그러면 누굴까.

누가 화소군이 심어 둔 첩자일까.

“호방인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방이 바로 고개를 든다.

밤이 되어서 이번에는 화소군이 부리는 사람에 대해 알아보던 참이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어느 정도 승산이 있지 않을까 싶어, 이방을 앞에 두고 하나하나 짚어 보고 있는데 끝이 없었다.

일단 상인과 힘깨나 쓰는 양반들, 이장들도 대부분 화소군에게 넘어가 있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거리를 지나치는 보통 사람들 중에서도 화소군이 심어 둔 첩자가 있을 거라는 말에 명월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호방이 튀어나왔다.

왜 갑자기 그에 대해서 말하는 건가 싶어 이방은 이상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안 그래도 호방이 오늘도 나오지 않아 그걸 말씀드리려 했는데, 아시고 계셨던 겁니까?”

“뭐?”

어제 호방이 나오지 않았다 들은 것 같다. 그런데 오늘도 나오지 않았던 건가. 그러고 보니 어제 오늘, 주변이 꽤 조용했다. 보통 땐 호방이 있으면 아부를 한답시고 이런저런 말을 해서 시끄러웠는데.

안 좋은 예감이라는 건 불현듯 들기 마련이고, 그건 지금과 같은 경우였다. 묘하게 등 뒤가 서늘해짐을 느끼면서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호방이 사는 곳이 어딘가.”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으십니까.”

“지금 바로 호방이 사는 곳에 가 봐야 할 것 같군.”

며칠 동안 연달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인해 이방도 안 좋은 예감이 들던 참이었다. 어쩌면 명월도 그걸 느낀 걸지도 모른다.

때마침 명월이 꺼낸 말에 이방은 포졸을 먼저 보내 보겠습니다, 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그저 외출을 하기 전에 구군복을 갈아입으시지요. 그리 말을 할 뿐이었다.

* * *

보통 선비들처럼 간소한 차림을 한다 해도 워낙에 튀는 용모를 지녔기 때문에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호방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이방과 복운도 함께했다.

요즘 반양에서 유명세를 타는 인물이라 한다면 명월이 단연 독보적이었으나, 이방도 곧잘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올해 죽어야 할 그의 딸이 멀쩡히 살아난 것도 있고, 명월의 곁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으로 보통 사람들 사이에선 대단한 인물로 통하게 된 거다.

자연스럽게 이방에게 몰리는 시선이 더 강했다. 옆을 지나치면서 쳐다보는 이들을 본 명월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어디 다니기가 불편하겠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유도 없이 돌팔매질을 당하거나 욕을 먹는 것보단 사람들의 껄끄러운 시선을 받는 게 훨씬 나았다. 바깥이 소란스럽지 않으니 딸도 점점 안정을 찾아가는 실정이었고 말이다.

명월이 근본적으로 해결 방안을 제시해 주었으니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만 남은 셈이었다. 더는 걱정하지 말라 말하려던 찰나, 저기 앞에 보이는 초가집이 보였다.

“사또, 저곳입니다.”

명월은 이방이 가리키는 곳을 살폈다.

이방은 조상들 중 한 분이 거상이었기 때문에 으리으리한 대갓집을 물려받았으나, 호방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냥 평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초가집이었다.

호방씩이나 되는 인물이 살기엔 부족한 게 아닐까 싶었던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가 곧장 그리로 걸어갔고, 이방은 복운에게 손짓했다. 어서 따라붙으라는 손짓에 복운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처음 명월이 밖으로 나간다 했을 때, 분명히 그 땡중하고 함께 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명월은 땡중이 아닌 복운을 가리키며 함께 가자, 라고 말했다.

그 중은 어디에 두고 자신더러 함께 가자는 말을 하는 건가 싶었지만, 잠자코 명월의 뒤를 쫓았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명월이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모처럼 명월과 함께 온 거였기 때문에 복운은 내심 흥분이 되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명월을 잘 보호할 거다.

다른 놈들이 허튼 짓거리를 할 수 없도록 할 거라며 눈에 힘을 준 채로 주변을 살피는 복운을 두고 명월은 초가집 바로 옆까지 접근했다.

엉성하게 자리한 대문은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이나 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비교적 튼튼한 돌담 옆에 선 채로 안쪽을 살피는데 조용했다. 평범하긴 해도 가까이서 보니 나름 튼튼하고 안쪽이 넓었다. 이 정도라면 사람 한둘이 있을 법도 한데―.

“사또. 호방은 혼자 삽니다. 그냥 집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이방의 말에 명월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봤다.

“오래전에 아내와 사별했습니다. 슬하에 자식은 없었지요. 10년 넘게 혼자 산 걸로 압니다.”

“……그랬던가.”

호방이 그토록 수다쟁이인 건 혼자 산 시간이 길었기 때문인가. 그건 아닌데. 말이 많고, 적음은 사람에 따라 다른 부분이 아니겠느냐면서 명월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호방, 안에 있나?”

일단 목소리를 내 호방을 찾아보지만 역시나 조용했다. 조금 더 자세히 안쪽을 살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을 때 복운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명월이 말리기도 전에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복운을 두고 명월이 눈을 가늘게 뜬다.

“모처럼 사또께서 챙겨 주신 게 기분 좋은 모양입니다.”

옆에 선 이방의 말에 명월은 그쪽을 흘깃 보며 입을 열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군. 내 나름대로 복운이 위험해지지 말았으면 싶어서 데리고 다니지 않는 것뿐이라네.”

“그 마음을 왜 모르겠습니까. 복운 저놈도 잘 알고 있기는 해도 사람 마음이 좋은 쪽으로만 움직이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사또께서 저를 방치한다면서 내내 우울해하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활기가 넘치니 무척 보기가 좋습니다.”

“활기가 넘치는 건 복운의 장점이지만, 동시에 단점이기도 하다네.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곳에 나서서 흠씬 두들겨 맞거든.”

“……예전에 있었던 일입니까?”

“예전에 자주 일어났던 일이지.”

명월이 어렸을 때에는 종종 있던 일이었다. 괜히 자신을 도와준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실컷 두들겨 맞고는 피를 줄줄 흘렸던 거다.

솔직히 복운이 그 정도로 신경 써서 보살펴 주지 않아도 되었다. 암만 저들이 짓궂게 군다 해도 자신은 유일선 영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손을 댈 순 없었다.

하지만 복운은 아니었다. 눈에 빤히 보일 정도로 도발하는 것에 넘어가서 늘 얻어터지는 복운이 답답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런 복잡한 마음이 들 때가 한둘이 아니었다.

고맙다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복운이 그만큼 챙겨 주고 싶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리로 신경이 쓰이게 되는 건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원래 옆에 붙어 있는 자일수록 더 소홀하게 대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더 섭섭함을 느끼기도 하니, 중간에 끼인 사또께서 여러모로 힘드시겠습니다.”

“나 같은 이를 모시는 자네들에 비해서 내 힘들 게 뭐가 있겠나.”

농으로 가볍게 던진 말에 이방은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말 그대로 농담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 당연히 힘들지 않습니다, 라고 할 줄 알았는데 괜찮다니.

복운도 아닌 이방이 저런 식으로 말하니 명월은 괜히 심각해졌다.

역시나 나 같은 놈하고 함께 다니는 건 힘들 일이로군.

입 안이 써지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면서 어색한 헛기침을 하는데 안쪽으로 들어가 구석구석을 살피고 온 복운이 나타났다.

“사또, 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 사람이 대체 어디로 가 버린 거지.”

복운의 말에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이방을 두고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느낌 탓일 수도 있겠지만, 안 좋은 예감이 든다. 며칠 동안 관아에 나타나지 않은 호방. 수다스럽던 그가 아무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사람을 좀 풀어서 호방의 행적을 조사해 보게.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바로 알아보게.”

명월만큼 안색을 굳힌 채로 있던 이방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다.

“관아로 바로 돌아가십니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으네.”

한쪽에 집중하고 싶어도 이런 식으로 재차 일이 터지는 건가 싶었기에 명월의 표정은 좋지가 않았다. 심각해진 명월을 두고 복운도 괜히 긴장이 되어선 몸에 힘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호방의 집을 둘러본 명월은 먼저 몸을 돌렸다. 대문을 넘어 밖으로 나간 명월의 걸음은 빨랐다.

벌써 저만치 앞으로 멀어지는 명월을 두고, 그걸 놓치기라도 할까봐 복운도 걸음을 서둘렀다. 종종걸음을 옮기면서 따라붙는 둘을 두고 명월은 흙바닥만 노려봤다.

호방이 대체 어디에 가 있는 걸까. 사람을 부리는 것보다 백호에게 묻는 게 더 빠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장은 백호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가 않았다. 따라오지 말라고 먼저 말을 한 것도 이쪽이기도 했고 말이다.

백호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왜 종종 그가 다름을 드러낼 때마다 기분이 언짢아지는지 모르겠다면서 명월은 안색을 굳혔다.

미간 사이로 주름이 짙게 생긴 채로 바닥만 노려보려던 순간 “어머, 사또.”라는 달콤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에게 잘 보이고 싶기 때문에 잔뜩 예쁘게 치장해서 내는 고운 목소리에 명월은 반응했다.

고개를 들자 맞은편 길가에 서 있는 몇몇 기생이 보였다. 그들 사이로 서 있는 호접화도 눈에 들어왔다.

명월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넨 건 자희였지만, 지금 명월의 눈에 들어오는 건 호접화가 먼저였다. 시선이 부딪치자 명월은 먼저 고개를 꾸벅였고, 그것에 호접화도 가벼운 눈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조용히 지나쳐가면 좋을 테지만, 호접화 그녀를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모처럼이니 인사나 나누자 싶었던 명월은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마실 나가는 중인가 보오.”

명월이 다가와 말을 건네자 기생들 사이로 웃음꽃이 핀다. 화사하게 웃는 여인들 중에는 자희도 있었다. 먼저 말을 걸었는데 명월이 곧장 이리로 왔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윽고 명월의 시선이 본인이 아닌, 호접화에게 고정되어 있는 걸 깨닫고는 금방 미소를 지워 버렸다. 안색을 굳힌 자희가 뒤로 한걸음 물러서자 명월과 호접화만 마주 서 있게 되었다.

“그러는 사또께서는 어딜 다녀오시는 길이신가 봅니다.”

“아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러 나왔네.”

“그래서 찾고자 하시는 분은 뵈셨습니까.”

“유감스럽게도 만나질 못해서 사람을 풀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볼 셈이네.”

“그러시군요.”

대답을 하는 호접화는 담담했다. 그래서일까. 전과는 다른, 미묘하게 선을 긋는 느낌이 들었다. 괜한 느낌일 수도 있겠지만, 묘하게 뭔가가 다름이 느껴진 명월은 호접화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뚫어지라 쳐다보는 시선이 이상했던 것일까. 호접화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그동안 호란에 찾아가지 못했는데…… 그래서 화가 난 건가?”

그 순간 호접화의 눈이 가늘게 휘어진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정말로 재미있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명월을 올려다봤다.

“지금 제 얼굴이 화가 난 것처럼 보이시는 겁니까.”

“묘하게 굳어 있는 것이, 무슨 일이 생긴 사람 같군.”

명월의 말에 호접화의 입가에 서려 있던 미소가 서서히 지워졌다. 이윽고 얼굴에서 웃음기가 모두 사라진 그녀는 차분한 눈빛으로 명월을 올려다봤다.

웃음도, 표정도 지워진 그녀는 마치 예쁘장한 인형 같았다. 살아 있는 사람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묘한 느낌이 드는 게 이상했다. 지금껏 호접화를 보면서 이런 느낌이 든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사또. 그거 아십니까?”

명월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뭐가 말인가.” 하고 되물었다.

“여자의 속을 너무 읽으려 드시면 안 됩니다. 그건 실례되는 행동이랍니다.”

“난 자네의 속을 읽으려고 했던 게 아니네. 그저 단순히 걱정이 되었을 뿐이야.”

안색이 좋지 않아서 한마디 덧붙인 게 실수였던가. 어쩌면 그녀는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던 걸지도. 하지만 그걸 두고 여자의 속을 읽으려 한다는 말을 듣는 건 억울했다. 절로 안색이 굳어지는 명월을 올려다보던 호접화가 재차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재미있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아, 그건 말이지…….”

“무슨 일을 하시려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성가신 일은 피해 가시는 게 답이랍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편하게 사실 게 아니겠습니까.”

그건 본인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망할 백호 때문에 그리될 수가 없었다. 입을 다물긴 해도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경직된 표정을 바라보던 호접화가 고개를 꾸벅이면서 뒤로 물러섰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여러모로 뒤숭숭한 시기이니 사또께서도 관아에 계시고 당분간은 호란을 찾지 말아 주십시오.”

이번에도 어김없이 호란을 찾지 말라는 말을 듣게 되는군. 그것도 자신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호접화가 다른 기생들과 함께 명월의 눈앞에서 멀어져 갔다. 그녀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지자 명월은 재차 이방 쪽으로 다가갔다.

평온한 얼굴인 이방이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던 명월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자네는 내가 그녀들과 가까이 지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사또께서 괜한 추문에 휘말리는 게 아닌지, 그게 걱정될 따름입니다.”

“내 자네의 마음을 왜 모르겠나. 하지만 크게 걱정할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 안심하게.”

하지만 이런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는 이런 말도 크게 위로가 되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이방의 표정이 내내 풀리지 않는 게 아니겠는가.

뒷짐을 진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이마를 스쳐 지나간다. 동시에 무얼 해야 할지가 하나씩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일단은 호방을 찾고 나서 도성에도 언질을 넣어 봐야겠군. 그곳으로 보낸 진상품이 어디쯤 도착했는지도 알아봐야겠고 말이야.”

진상품 운운하는 순간 이방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양 입을 살짝 벌렸다. 그쪽 일은 호방이 맡아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가볍게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그제야 본인의 실수를 깨닫게 된 이방은 무척 당황스러워하면서 “지금 바로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 * *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누룽지를 만들어 먹으려 하던 꼽추는 고개를 들었다.

조용히 부엌 바깥을 살피던 꼽추는 꼬챙이를 한 손에 쥔 채로 천천히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폈다.

넓은 마당 위쪽으론 아무것도 없었으나 그래도 방심할 순 없었다. 이상한 존재하고 같이 지내고 있으니만큼, 어쩔 땐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 종종 나타나곤 했다.

그땐 백호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니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이쪽에 일이 생겨도 그 백호가 바로 달려올지는 모를 일이었다. 요즘 백호는, 단내가 풀풀 풍기는 어떤 것에 푹 빠져 있었으니 말이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다. 백호와 함께 한 시간이 오래니, 뭐가 나타나도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꼽추는 신중하게 마당을 살폈다.

그러다가 입구 쪽에 세워진 험악한 얼굴을 한 장승을 확인하곤 입맛을 다셨다. 일단은 자신이 원해서 저기에 세워 두긴 했으나, 을씨년스러울 때 보기가 좀 그랬다.

나중에 백호가 오면 다른 쪽으로 옮겨 달라고 해야겠다면서 신중하게 주변을 살피던 그는 곧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곤 손을 내렸다.

백호 없이 혼자서 이곳에 있기 때문일까. 별거 아닌 일로도 긴장하게 된다면서 꼽추는 느리게 몸을 돌렸다.

다시 부엌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등 뒤가 섬뜩하다.

“…….”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그게 전부인 게 아니었다.

실수를 했다면서 안색을 굳힌 꼽추가 급히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뭔가가 그의 가슴팍을 세게 후려쳤다. 피할 수 없었던 꼽추는 옆으로 날아가 구석에 처박혔다.

볼썽사납게 엎어진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떠는 꼽추의 어깨가 빠르게 들썩인다. 엎드린 채로,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고통에 몸을 떠는 꼽추를 본 이는 고개를 들었다.

느리게 주변을 살핀 자는 검은 가면을 써서 눈을 가린 채였다. 검은 장삼에, 긴 검은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사내의 피부는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다. 마치 귀신처럼 홀연히 나타난 그는 느린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창고 쪽이었다. 하지만 그가 창고에 도착하기 전에 갑작스럽게 옆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나타났다. 검은 선처럼 보일 정도로 빠르게 다가오는 놈을 감지한 이는 재빠르게 옆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자 그를 공격하지 못한 것이 반대편으로 사뿐하게 내려앉아 고개를 든다.

섬뜩할 정도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으르릉, 거리는 그것은 거대한 검은 개였다. 눈이 붉은 그 개는 특이하게도 등 가운데가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그걸 본 검은 가면을 쓴 사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견신을 주워다가 키운 것인가.』

“주운 게 아니라 저놈이 제멋대로 와서 눌러앉은 거다.”

반대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검은 가면의 사내가 고개를 든다.

그리고 마당 아래쪽에서 가볍게 뜀박질을 하며 백호가 나타난다. 가볍게 마당 위에 내려앉은 백호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놈저놈 달려들어서 이 좁은 땅덩이에 엉덩이를 비집고 있었던 것뿐이야. 그러니 내가 온갖 잡다한 것들을 끌어들인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라. 그래선 곤란해.”

주먹으로 뒷목을 가볍게 두드린 후 백호는 손목을 느리게 돌려봤다.

몸 상태는 나쁘지 않다. 거기까지 확인에 들어간 백호는 검은 가면을 쓴 독각귀를 노려봤다.

“독각귀. 네놈, 지금 여기서 뭘 하려는 거냐. 아무리 네놈이라 할지라도 내 땅에 함부로 들어오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내 아이를 돌려받으러 왔다.』

“헛소리.”

빠르지만, 단호하게 내뱉은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맛이 간 놈이 지금 뭔 소리를 지껄이는지도 모르는 것 같군. 버리고자 두고 간 놈을 두고 돌려받겠다 운운하는 거냐. 애초에 네놈이 키우지도 않은 놈을, 뭘 돌려받아. 네놈이 지금 하는 말이 이상하지 않더냐―.”

역시나 어딘가 맛이 간 거라면서 백호는 오른손을 천천히 펼쳤다가 세게 움켜쥐었다.

그런 백호의 행동을 주시하며 독각귀가 말했다.

『내 아이다. 네놈이 상관할 바가 아니야.』

“아니. 이제는 네놈이 상관할 놈이 아니다.”

백호는 자세를 낮추는 것과 동시에 이를 악물었다.

“그 녀석은 내 거니까―!”

말이 끝나기가 백호가 앞으로 움직였다.

눈 깜박이는 사이에 독각귀 앞에 서선 팔로 놈의 목을 눌렀다. 독각귀가 그런 백호의 팔뚝을 붙잡았지만, 백호는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그를 밀어붙였다.

둘은 마당에서 떨어져 나가 아래쪽으로 빠르게 추락했다. 독각귀에게 부딪친 나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나거나 뒤로 넘어간다.

그렇게 몇 개나 되는 나무를 박살내면서 한참을 밀어붙이다가 간신히 멈추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백호는 독각귀를 내리누르는 걸 거두지 않았다.

“내 땅에서, 내가 취한 놈이다! 내 거다! 갑자기 나타나서 헛소리를 지껄여 대는 네놈에게 넘길 성싶더냐!!”

백호에게 목이 눌린 채인 독각귀가 쓰고 있는 가면 너머로 보이는 눈빛이 매섭다. 하지만 그건 백호도 만만치 않았다.

독각귀가 나타나 명월을 찾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쏟는 것 같았다. 이 녀석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잘 살고 있는 놈에게 갑자기 찾아와서 뭔 헛소리를 지껄일 셈이더냐!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당장 여기서 꺼져라! 그렇다면 옛정을 생각해서 네놈의 목숨만큼은 살려 주도록 하마!!”

발로 독각귀의 가슴팍을 누르고 한 손으로는 그의 머리통을 세게 잡아 눌렀다.

단단한 바위에 금이 갈 정도로, 엄청난 힘으로 그를 내리누르는 백호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여차하면 정말로 목을 벨 기세였다.

험악한 기세에도 독각귀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올려다보는 그를 두고 백호는 제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백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인간에게 빠져서, 아이를 인간들 사이에 두고 ‘그’만을 업고 떠나던 독각귀를 말이다.

힘이 없어서 축 늘어져 있던 인간을 업고서도 그는 만족한 얼굴이었다. 그런 식으로나마 본인이 원하는 걸 손에 넣은 게 좋았던 거다.

웬만한 일이 아니라면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던 존재가, 그런 얼굴을 할 정도라면 그 인간을 정말로 깊이 사랑했다는 거다. 그런 존재를 잃은 놈이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실제로 인간을 잃고 난 후 찾아온 놈의 눈빛은 이상했다. 그 눈빛은 지금과 같았다.

어딘가 어긋나고 불안해 보이는 눈빛. 명월을 가지고 이상한 짓을 꾸미려는 거다.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백호의 머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설마 싶으면서도 입은 그것을 내뱉었다.

“네놈 설마하니 반혼(返魂)을 쓸 생각은 아니겠지?”

그 순간 독각귀의 눈동자 안쪽으로 힘이 들어갔다.

내내 누워만 있던 독각귀가 백호를 밀어내면서 주먹을 휘두른다. 고개를 피하긴 했으나 스치듯이 맞은 백호는 인상을 썼다.

틈을 주지 않고 독각귀가 무릎으로 백호의 배를 찍어 올린다. 헛숨을 삼킨 백호가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독각귀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뒤로 뻗은 손이 앞으로 빠르게 다가온다. 그 손을 쳐내자 반대편으로도 공격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걸 모두 막아 낸 백호는 팔꿈치로 독각귀의 얼굴을 찍어 올렸다.

공격을 하기 위해서 가까이 붙어 있었던 독각귀가 백호의 팔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젖히는 순간. 백호는 앞서 잡고 있던 손목을 비틀면서 그를 반대편으로 던져 버렸다.

날아간 독각귀는 나무를 반으로 박살내더니 그 뒤로 사라졌다. 하지만 바로 똑바로 서선 백호를 노려본다.

가면에 금이 가고 있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매섭게 노려보는 독각귀를 앞에 두고 백호는 성질을 부렸다.

“다시 불려온 영혼이 제대로 될 것 같으냐! 네놈이 찾던 그놈이 아닐 게다!!”

『아무것도 모르는 네놈은 입 다물고 있어라.』

담담한 대꾸에 백호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고 긴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쓸어 올린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재차 독각귀를 봤을 때, 놈의 눈빛을 확인했다. 확실히 전과 달랐다.

예전, 그 죽은 인간을 등에 업고 있었을 때와 똑같은 눈빛이었다.

그때부터 계속 저런 상태였던가.

“몇 년 동안 안 보인다 싶더니, 굴속으로 들어가 그런 생각이나 했던 거냐! 그동안 잘 살아온 놈을 데리고 가서 반혼을 할 생각이었던 거냐!”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백호는 땅을 걷어찼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로 앞으로 커다란 구멍이 생긴다.

하지만 백호의 화는 고작 그 정도로 풀리는 게 아니었다.

“인간을 건드리고, 남자한테 아이까지 낳게 하더니 결국에는 그런 짓까지 할 셈이냐! 이 미친놈아!!”

반혼을 잘못하면 명월에게도 문제가 생긴다. 그걸 모르지 않을 놈이기에 더더욱 화가 났다.

미친 듯이 화를 내는 백호를 두고, 독각귀는 차분히 말했다.

『제멋대로 지껄여라. 네놈이 하는 말 따위는 듣지 않겠다.』

그 순간 백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백호는 앞으로 달려갔고, 지금과는 험악한 기세에 독각귀가 뒤로 몸을 피했다.

빠르게 움직여서 뒤로 물러나는 독각귀를 끝까지 쫓아간 백호는 움켜쥔 손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하늘에서 천둥이 친다. 쿠릉,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서 있는 곳 위로 벼락이 떨어졌다.

주변이 밝아졌다가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이윽고 굵직한 빗줄기가 떨어졌다.

쏴아아―하고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에 서 있는 백호는 여전히 험악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독각귀는 저만치 멀찍이 떨어져서 고개를 숙인 채로 있었다.

격렬하게 몇 번이나 부딪치는 동안에도 잘 붙어 있던 가면이 떨어져 나간 모양이다. 조각조각 난 가면이 그의 발치에 떨어지고 그 위로 붉은 핏방울이 점점이 묻어난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만 있는 독각귀를 노려보며 백호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제 머리를 잡아 뒤로 쓸어 넘기곤 으름장을 놨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내 땅에 들어오지 마라. 다음엔 네놈의 그 목을 비틀어 버릴 것이다. 명월, 그놈은 내 땅에 와 있으니, 이제 내 아래에 있는 놈이다. 네놈이 그놈을 끌고 가서 이상한 짓을 할 셈이라면, 나부터 상대해야 할 거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그 누구도 날 이길 순 없다.”

오만하다 할 수 있는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 백호는 허풍을 떠는 게 아니었다.

저런 상태인 독각귀를 명월과 만나게 할 순 없었다. 놈이 하려는 짓 정도야 눈에 빤히 보였다.

그 정도로 인간을 사랑했다면, 그 인간의 생이 자신들처럼 천년만년 이어지지 않을 거란 것도 알아야 할 게 아니겠나. 그런 각오도 없이 시작했으니 저리된 거다.

사랑하는 걸 잃고는 미쳐 버린 거다. 어리석은 놈 같으니라고―.

그때 독각귀가 중얼거렸다.

『네놈은 그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냐.』

독각귀의 턱에 맺혀 있던 피가 뚝, 하고 아래로 떨어진다.

『그 아이가 네 마음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더냐.』

백호의 눈썹이 꿈틀하고 흔들린다.

저 망할 독각귀 놈이 또 무슨 헛소리를 할 셈인가 싶었다. 이상한 말일랑은 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꺼지라 하려던 순간, 독각귀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차분한 눈동자. 가라앉은 눈빛을 읽은 백호는 갑작스레 목구멍 안쪽이 꽉, 막히는 걸 느꼈다.

명월의 꽃 같은 얼굴이 눈앞에 그려진다.

하지만 나타남과 동시에 그를 지워 버린 백호는 단호히 말했다.

“그 녀석은 내 것이다. 내 것을 건드리려 한다면,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그게 그 누구라 해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설령 독각귀가 아닌, 그 외에 다른 존재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가라앉은 백호의 눈빛과 단호한 표정을 본 독각귀는 씁쓸하게 웃었다.

『네놈도 덫에 걸린 거다.』

알 수 없는 말을 하자 백호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인상을 쓰면서 한쪽 눈썹을 올리는 것과 동시에 독각귀는 그 자리에서 지워지듯 사라졌다.

애초에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양 완전히 지워진 존재를 두고 백호는 앞으로 나섰다. 뒤를 쫓아가야 하는 걸까.

하지만 곧 그 마음을 접은 백호는 왼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이 너덜너덜해졌고 손등에도 길게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 이 정도가 될 정도로 주먹을 휘두른 게 대체 얼마만인가 싶었다.

손등의 상처가 쓰라릴수록 그의 기분은 하강 곡선을 그렸다.

주변을 살피자, 보이는 것 모든 게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이런 젠장맞을―.”

당장은 열 받아서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두르긴 했는데 그게 실수처럼 여겨졌다.

남은 저것들 처리를 전부 다 어찌해야 하는 거냐면서 얼굴을 일그러뜨린 백호는 발등으로 세게 바닥을 쳤다.

그러다가 한 번 더 독각귀가 서 있던 자리를 확인하곤 몸을 돌렸다. 가볍게 바닥을 박찬 그의 머릿속엔 덫에 걸렸다, 운운하던 소리가 맴돈다.

“쓸데없는 소리.”

그 녀석하고 자신은 그런 게 아니라면서 백호는 더 빠르게 움직여서 순식간에 제 거처에 도착했다. 마당에 들어서자 구석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서 앞발을 혀로 핥는 검은 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 놈 하나 막지 못하는 거냐. 한심한 놈.”

백호의 타박에 검은 개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독각귀를 상대하는 건 무리다. 그런 의미가 담긴 눈빛을 보내도 백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성에 차지 않는 듯 굳은 눈빛으로 바라보나 싶더니 바로 주변을 살핀다.

그간 자리를 비워 둔 것 같아서 찾아온 건데 하필이면 여기서 독각귀 그놈과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놈이 명월에게 접근하는 의도를 알아버려서 기분이 언짢다.

제 놈의 아이를 이용해서 반혼을 하려 하다니. 무자비한 놈.

원래는 그런 놈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위험을 무릅쓰고 품었던 상대를 잃은 상실감이 그만큼 큰 것일까.

생각에 잠긴 백호의 얼굴이 워낙에 진지했기에 따로 말을 붙일 수도 없었던 검은 개는 계속 앞발을 혀로 핥았다.

* * *

저녁 늦게 바깥으로 보낸 자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호방의 위치를 알아내지 못했다.

“들리는 말로는 며칠 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씩 돈을 빌렸다 합니다. 이번에 사라진 게 그 돈을 갚지 않기 위함이 아닌가 하고 떠들어 대기는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도 자네처럼 머리가 굳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여길 떠나진 않을 거야.”

딸이 잘못 될 거란 걸 알면서도 반양을 벗어나지 못했던 이방이다. 호방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진 않을 거다. 그가 어떤 연유로 주변에서 돈을 빌린 건지 알 수 없어도, 그것이 이곳을 떠날 이유가 될 순 없었다.

돈을 빌렸다는 말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정말로 돈이 궁한 거라면 창고에 손을 대면 되었다. 창고와 귀한 물품이 들어간 곳의 열쇠를 관리하는 호방이 아니던가. 그곳에 있는 것들 중 하나만이라도 빼돌려 팔면 수월하게 목돈을 얻을 수 있었다.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네.”

명월의 말에 이방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화소군이 아니면 이병현이겠지.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호방, 그 친구가 사라진 시기가 이병현 대감에게 변고가 생긴 시기와 겹칩니다. 그러니 그쪽은 생각하기 어렵고 아마도―.”

“화소군 쪽에서 손을 쓴 거라면 밝혀 내기가 어렵겠군. 벌써 죽어서 야산에 묻혔을까?”

“……그리되어 있지 않기만을 바랄 따름입니다.”

대답은 저리해도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분명히 최악의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시기가 이상하게 맞물린다. 왜 이 즈음에 호방이 처리가 되어야 했던 걸까.

전에 감옥에 있던 사내들이 저들에게 무슨 짓을 할 셈이냐면서, 간밤에 이상한 일이 있었다고 했지. 그게 호방과 관련된 일이었을까.

하지만 감옥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이병현 대감이 부리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감옥 안에 있음으로 인해서 피해를 입을 사람은 이병현인데 화소군이 왜 손을 쓴단 말인가.

뭐, 애초에 이해관계가 맞물린 자들이니 한쪽이 못할 경우 다른 쪽이 손을 쓰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지. 그런 의미로 봤을 때 지금 이병현 대감이 쓰러진 것도 화소군의 소행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명월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손을 까닥였다.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여차하면 호방의 시신이라도 찾아내야 하네.”

“지금부터 바로 포졸을 풀어서―.”

“아니. 날이 밝으면 움직이도록 하게. 물론, 그리한다 해서 놈이 눈치채지 못하진 않겠지만, 괜히 밤에 행동했다가 그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곤란하니.”

“그러면 내일 포졸과 은밀하게 움직일 자들 몇을 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주게. 이만 물러나게. 머리가 아파서 쉬어야겠군.”

“무리하지 마십시오. 다른 무엇보다 사또의 건강을 가장 먼저 챙기십시오.”

걱정이 되어서 조심스레 건네는 말에 명월은 대답하는 대신에 미소를 지었다.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 명월을 두고도 이방은 쉬이 안심이 되지 않았다.

뭔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행동하고 움직일 게 명월이었다. 한 번 더 건강을 챙기라 말하고 싶지만, 이런 말도 너무 자주 하면 잔소리가 될 터였다.

이방은 조용히 방을 나서고, 그때 대청 끝에 앉아 있던 복운이 보였다.

복운 옆으로 가서 가죽신을 신으면서 이방이 물었다.

“스님께선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 거냐.”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 전 스님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릅니다.”

명월과 나갔다 들어왔을 때 백호는 관아에 없었다. 명월도 내심으론 그가 어디에 갔는지를 궁금해하는 것 같았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

복운도 그의 부재가 궁금하지 않았기에, 이방이 왜 그걸 자신에게 묻는 건가 싶어 심드렁해진다.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복운의 행동에 이방은 혀를 찼다.

“그래도 사또의 손님인데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되겠느냐. 여기에 계시는 동안 잘 모셔야 할 게 아니냐.”

“전 그냥 손님 대접만 해 드릴 따름입니다. 거기서 뭘 더 하겠습니까.”

“어허, 그런 말이 어디에 있느냐. 그분은 보통 스님이 아니시다.”

“전 그런 거 모릅니다.”

이방이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전 그 땡중 때문에 사또께 뭔 일이 생긴다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

다른 때처럼 장난스럽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냐면서 한 소리 할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돌처럼 굳은 복운의 얼굴을 보고 이방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내일 보자.”라고 하는 말에도 복운은 대꾸 없이 다른 쪽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런 복운을 두고 이방이 밖으로 나간다.

대문이 닫혀도 복운은 미동이 없었다. 여전히 대청 끝에 앉아서 손을 움켜쥐었다가 펼치기를 반복하던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곤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방에게 괜한 화풀이를 한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명월이 지금 무리를 하는 거나, 그의 일이 복잡하게 꼬이게 된 건 이방의 일에 관련된 후부터였다.

순간적으로 이방의 안색이 굳어지는 건 그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물론, 자신도 이방 때문에 명월의 주변에 이상한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재차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을 때, 반대편에서 끼익―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계진이 얼굴을 내밀었다.

“왜 그러냐. 잠이 안 오냐?”

묻는 말에 계진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잘 시간이 아니니 잠이 오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창 뛰어 놀 시기이니 관아에만 있는 게 답답할 수도 있었다.

다음에 고아들에게 고기를 주러 갈 때는 계진도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키는데 방문이 열리고 명월이 얼굴을 내밀었다.

살짝 보이는 명월의 얼굴을 확인한 복운이 벌떡 일어난다.

“뭐,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자세를 딱 잡은 채로 말을 건네는 복운의 행동에 놀란 계진도 똑바로 서선 명월을 올려다봤다.

긴장한 어린애의 얼굴을 본 명월은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날이 더워서 그런데 목욕 준비 좀 해 줄 수 있겠느냐.”

그냥 시키면 시켰지, 이런 식으로 조심스레 묻는 건 계진도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이서 따로 뭔가를 하려 했는데 자신이 나온 것 때문에 못하게 된 건 아닌지, 그런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월의 말에 복운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준비를 해 두겠습니다. 계진아, 함께 가자.”

복운의 말에 계진은 싫어하는 내색 없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대청에서 내려왔다.

짚신을 신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잽싸게 바깥으로 달려 나가는 계진을 본 명월은 턱을 긁적였다.

괜한 걸 시킨 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낮에 어딜 다녀오기도 했고, 날이 더워서 땀을 흘렸으니 제대로 씻고 싶었다. 목욕 준비는 시켜도 마무리는 자신이 해야겠다며 명월은 대청 앞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확인하자 어둡다. 오늘따라 달이 구름에 가려져서 보이는 게 없다면서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놈은 대체 어딜 간 거야.”

당분간은 자신의 곁에서, 자신의 일을 돕는 게 아니었던가.

낮에 좀 서로가 서먹해지는 일이 있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어딘가를 갈 셈이라면 가벼운 언질이라도 했어야 했던 게 아니냐면서 혀를 찼다.

* * *

무거웠던 몸은 뜨거운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자 많이 풀렸다. 한결 개운해짐을 느끼며 명월은 몸에 흐르는 물기를 대충 닦아 내곤 하얀 도포를 몸에 걸쳤다.

그대로 밖으로 나오려다가 본인이 했던 생각이 떠올라 대충 목욕탕 안을 정리했다. 그래 봤자 평소 하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엉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엉성하다는 것도 본인은 깨닫지 못했지만 말이다.

겉보기엔 완벽하게 정리된 상태로 여겨졌던 명월은 들고 있던 바가지를 내려놓고는 허리를 바로 세웠다.

날이 덥기 때문일까. 금방 씻었는데도 몸을 조금 움직인 걸로 땀이 난다. 손부채질을 하면서 명월은 밖으로 나왔고, 앞쪽에 나란히 서 있는 복운과 계진이 보였다. 열심히 제기를 차는 계진의 모습에 명월은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면 덥지 않으냐.”

명월의 물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계진이 헛발질을 해선 제기를 떨어뜨렸다.

마치 말을 건넸기 때문에 제기가 떨어진 것만 같았던 명월은 순간적으로 당황해선 바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계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떨어진 제기를 주워들곤 명월을 올려다봤다. 머뭇거리다가 그걸 앞으로 내밀면서 묻는다.

“하실래요?”

“음? 그래 볼까. 하지만 너무 잘해서 네가 깜짝 놀랄 텐데?”

명월의 허풍에 계진의 눈이 크게 떠진다. 도대체 얼마나 잘하는 걸까. 그리 묻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계진을 두고 명월은 아차 싶었다.

정말은 제기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농으로 건넨 말을 계진이 믿는 것 같아서 괜히 눈치가 보인다. 이러다가 못하면 실망하는 게 아닐까 싶었던 명월은 복운을 흘깃 봤다.

눈빛에서 지금 명월이 느끼는 곤혹스러움이 전해진 걸까. 복운은 계진의 손에 들린 제기를 들고 갔다.

“사또께선 방금 씻고 나오신 참이다. 제기를 차면 또 땀이 나실 테니, 이건 다음에 해 달라고 하자.”

복운의 말에 계진은 실망한 기색이었으나 뭐라 하진 않았다. 명월을 흘깃 보면서 “그러면 다음에 같이 해요.”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명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음에 보여 주마. 그때까지 제기 차는 연습을 열심히 해 두려무나.”

하지만 그 전에 자신이 먼저 제기 차는 연습을 해 둬야 할 것 같았던 명월은 옆으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빠르게 그곳에서 멀어지던 명월은 뒤를 돌아봤다.

계진이 다시 제기를 차고 복운이 앞에서 그걸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안심이 된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명월은 거처로 향했다. 그리고 대청 위로 올라가려던 순간 움찔했다. 대청 가운데에 웅크린 채로 엎드려 있는 돼지 고양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

편안하게 쉬고 있는 저 모습이 왜 보기에 탐탁지 않은지 모르겠다. 아마도 가운데 자리를 잡고 누워 있기 때문일 거다. 자려면 구석진 곳으로 들어가든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것이지 왜 저렇게 당당하게 가운데에 나와 있는지―.

혀를 찬 명월은 나비 앞으로 걸어가 쪼그리고 앉았다.

손가락으로 나비의 두툼한 머리를 툭, 친다.

“네놈의 주인은 지금 어디에 가 있는 거냐.”

원래는 이런 걸 물어보려 했던 게 아니다. 그런데 왜 이런 종류의 말이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다면서 명월은 다른 손으로 제 입술을 가렸다.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나비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이 녀석은 귀찮은 양 고개를 몇 번 움직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날 건드리지 마. 그리 말하는 것 같은 행동에 명월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몇 번의 헛웃음을 흘린 후 자리에서 일어난 명월은 방으로 향했다.

저런 말 못하는 짐승을 두고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어차피 다시 돌아올 텐데 신경 써 봐야 무얼 하겠나 싶었다.

백호 정도의 녀석이라면 본인이 한 말은 지킨다. 언제가 되든지 돌아올 거라면서 명월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묘하게 어두운 실내를 확인하곤 문을 닫은 채로 더 앞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굳은 표정을 하고 있으나 긴장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던 명월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서 있는 백호를 발견하는 순간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낮 동안에 어딜 가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건지 모르겠다.

나타났으면 저렇게 서 있을 게 아니라 불을 켜 놓고 있으면 될 게 아니던가.

한마디 하려던 순간 백호가 평소와 다름이 느껴졌다. 일부러 방을 어둡게 해서는 구석진 곳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모습이 보기에 이상했다.

명월은 차분한 시선으로 백호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달싹인다.

“무슨 일 있었어?”

왜 저렇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풍기는지 알 수 없었던 명월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굳어진다. 그리고 명월이 묻기가 무섭게 백호가 움직인다.

앞으로 다가오는 백호를 본 명월은 주춤거리면서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날 뻔했지만, 이윽고 멈춰 섰다. 가만히 선 명월을 두고 백호가 코앞까지 다가온다. 그러곤 손목을 붙잡는다. 오른손이었다.

백호와의 접촉이 익숙해졌다곤 해도 아직 누군가 자신의 오른손에 손을 대는 게 싫은 명월이었다. 본능적으로 손으로 힘이 들어갔지만, 일단은 참았다. 백호가 평소와 다르니 대체 왜 이러는지 궁금했던 탓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던 걸까.

잠자코 있나 싶던 백호가 입을 열었다가 다문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나 가까운데 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안색을 굳힌 채로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백호의 귓가에 입술을 댄 채로 그가 하려는 말을 들으려 했지만,

그 전에 백호의 손이 명월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곧장 얼굴을 숙였다. 입술이 닿으려던 순간 당황한 명월은 고개를 돌렸다.

“기다려. 지금 뭘 하려는 거야―.”

갑작스럽게 지금 이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당황했던 명월은 백호를 밀쳐 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명월이 저항을 하면 할수록 그를 더 단단히 붙잡고는 집요하게 입술을 따라갔다.

결국엔 입술이 겹쳐지고는 두툼한 살을 깨물기까지 한다. 아프진 않아도 그곳에서 퍼지는 저릿한 감각에 명월의 안색이 굳는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명월이 재차 왜 이러느냐고 물으려던 찰나 백호는 아예 명월을 끌어안고는 그의 턱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자연스럽게 입술이 더 세게 눌려지고 그의 혀가 앙 다문 치열을 두드린다. 그러지 말고 입을 벌려. 혀를 내밀어. 그런 무언의 독촉이 느껴졌던 명월의 안색이 해쓱하게 질린다.

지금의 백호는 이상했다. 명월은 백호를 잡아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바위처럼 단단했다. 잡아당겨도 결국엔 그의 옷을 당기는 것뿐이었다. 명월은 벽 사이에 끼인 채로 계속해서 입술을 빼앗겼다.

이를 악물고 입술을 다문 채로 어떻게든 버텨 보려 하지만, 백호는 집요했다. 명월이 입술을 열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양 그 주변의 살을 열심히 핥고 빨아 댄다.

입을 벌려 세게 빨아들이는 것에 명월은 움찔해서는 백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대로 세게 밀쳐내려던 순간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또. 왜 불을 끄셨습니까?”

“…….”

복운이었다.

놀란 명월은 흠칫, 하고 몸을 굳히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보이는 건 선명한 눈빛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백호의 두 눈동자가 이질적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잘 보이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긴장해선 마른침을 삼켰고, 얼어붙어 있는 동안 복운의 목소리가 재차 들렸다.

“사또, 안에 계십니까?”

목욕을 하고 금방 거처로 돌아간 명월이었다. 신은 벗은 채로 있는데, 방의 불은 꺼져 있고 불러도 대답이 없으니 이상하게 느껴진 걸지도 모른다.

이대로 가다간 복운이 안으로 들어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이런 모습을 복운이 본다면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뭐라 변명을 할 수도 없을 거라면서 명월은 백호의 얼굴을 잡아 있는 힘껏 옆으로 밀어 버렸다.

내내 집요하게 달라붙어 있던 게 언제였느냐는 듯 바로 떨어진다. 백호가 떨어지고 나서야 명월은 내내 참고 있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런데 입술 부근이 젖어 있는 게 느껴졌다. 대체 얼마나 빨아댄 거냐면서 안색을 굳힌 명월은 끼익, 하는 소리에 다급히 말했다.

“피곤해서 일찍 잘 테니까, 들어오지 마라.”

지나치게 다급하게 말했던 걸까. 대청을 걸어오던 복운의 발소리는 멈추었지만, 뭔가 이상하게 느끼는 게 전해지는 것 같다.

“내 알아서 이불을 깔고 잘 테니까, 넌 계진이랑 같이 있어라.”

말을 하던 명월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경악을 담아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백호가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자신의 바지 앞섶을 급하게 벗겨서 내리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바지가 내려가고 백호가 명월의 성기를 잡고는 그 끝을 물었다. 백호의 축축한 입 안으로 들어간 성기가 강한 힘으로 빨아들여지자 명월은 급히 백호의 머리채를 움켜쥐고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낼 뻔했다. 이를 악물곤 가까스로 그걸 참은 명월의 눈은 크게 떠졌다.

백호, 이놈이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혼란스러웠던 명월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사또,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조심스러운 복운의 물음에 명월은 백호의 머리카락을 놓고는 급히 제 입을 눌렀다.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지 않도록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차 싶었다.

이런다고 해서 복운이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괜찮다고 분명히 말로 전달해야 했지만, 손을 치우는 순간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백호는 크게 입을 벌려선 명월의 성기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그의 입 안으로 전부 들어간 성기가 강하게 흡입 되는 순간 명월의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떨린다. 백호 쪽으로 엎드린 채로 명월은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구부정한 상태로 체중을 실어오는 명월이나, 백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성기를 몇 번이나 입으로 세게 빨아들였다. 그에 멈추지 않고 뒤로 넘어간 손가락이 엉덩이를 가르고 그 안으로 파고들어 간다.

주름진 곳을 더듬다가 그 안쪽으로 손가락 한 마디를 밀어 넣는 백호의 행동에 명월은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젖지 않아서 아직은 뻑뻑한 그곳을 능수능란하게 파고들어 간 손가락이 좌우로 움직인다.

얼굴이 벌겋게 익은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크게 떠진 눈동자 안쪽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당혹과 수치심. 그런 것들이 뒤범벅이 되어선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재차 복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또,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주무십니까?”

주무시냐고 물어도 정말 그리 믿지 않는 억양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었는지 복운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복운이 방으로 들어와 이런 모습을 봐선 안 되었다. 명월은 백호를 밀어내려 했고, 때마침 바깥에서 냥―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명월은 행동을 멈추었다. 계속해서 고양이 울음이 들리고 복운이 당황해선 “나비야. 왜 그러는 거냐.”라고 말했다.

그렇게 복운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선 들리지 않게 된다. 삐걱거리던 소리가 멀어지고 복운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명월은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백호는 그대로 주저앉으려던 명월을 끌어안은 채로 계속해서 입에 넣은 명월의 성기를 애무했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참지 않아도 된다 생각하는 순간 명월은 그대로 백호의 입 안에 토정했다. 길게 뿜어내지는 정액이 백호의 입 안으로 들어가, 그대로 삼켜진다.

사정을 하면 그가 떨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더 달라붙어 오는 것에 명월은 당황해선 백호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그만,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복운의 인기척은 멀어졌지만, 그렇다고 시끄럽게 굴 순 없었다.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크게 나가면 복운이나 계진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이리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일단은 이상하게 구는 백호를 떨어뜨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힘껏 그를 밀어내려는데, 그 순간 몸 안에 들어와 있던 손가락이 움직인다.

깊숙이 파고들어 와 안쪽을 꾸욱 누르자 명월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젖혔다.

“윽―!”

짤막한 신음 속에 섞인 달콤함을 본인이 모를 턱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뭘 느끼는 건가 싶었던 명월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이를 악문 명월은 더 세게 백호를 밀어내려 했고, 백호는 입을 벌리고는 내내 물고 있던 성기를 빼냈다.

백호의 입에서 뱉어내지는 본인의 성기를 보는 명월의 얼굴이 붉어진다. 명월은 급히 손을 내려 제 성기를 감추려 했고, 백호가 그런 명월의 몸을 잡아 돌렸다.

갑자기 몸이 돌려진 명월은 그대로 딱딱한 벽 쪽으로 밀어붙여졌다.

놀라서 바로 떨어지려 해도 등 가운데를 누르는 손길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등 가운데를 누르는 커다란 손. 거기서부터 느껴지는 데일 듯한 열기에 명월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입을 벌리자 그 사이로 가느다란 숨이 흘러나온다.

떨려 나오는 제 호흡을 들으면서 명월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왜 이러는 거야.”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평소와는 다른 백호의 행동 때문에 긴장이 된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서 복잡하게 엉키는 걸 느끼면서도 명월은 애써 차분해지려 노력했다.

“왜 갑자기 이러는 건데.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턱 끝까지 찬 숨을 참으면서 묻는 말에 대한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커다란 손이 엉덩이 살을 잡아 허겁지겁 벌리는 걸 느꼈을 때, 명월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잠시 기다려 보라는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두터운 성기가 주름을 꾸욱, 하고 눌렀다. 놀란 명월이 허리를 빼내려 하기도 전에 백호의 성기가 그대로 삽입되었다.

내벽을 가르곤 좁은 틈을 억지로 벌려선 내장 깊숙이까지 박혀 올라오는 감각에 명월은 입을 열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삽입에 소리를 낼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통증도 옅어지는 건 아니었다.

입술을 파르르 떨던 명월이 아랫입술을 깨물었고 동시에 백호의 손이 명월의 허리를 붙잡곤 성기를 절반 정도 빼낸 후, 재차 밀어 넣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치대듯 몸을 밀어붙이자 명월의 몸이 마구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일에도 버텨 보려고 다리에 힘을 주었으나 비틀거리며 무릎이 구부려진다.

쓰러지는 명월의 몸을 붙잡아서 뒤로 당기자 그대로 몸이 끌려 내려간다. 힘겹게 벽에 양손을 짚은 채로 있던 명월은 엎드린 자세가 되어서 재차 백호를 받아 들여야만 했다.

빠르게 허리를 놀릴 때마다 살이 부대끼는 소리가 음란하게 퍼진다. 점차 가빠지는 호흡 사이로 간간이 고통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럴 때마다 백호의 행위는 조금 더 깊고 격렬해졌다.

등 뒤에 올라탄 백호가 토해 내는 뜨거운 헐떡거림을 들으면서 명월은 엎드린 채로 제 손목을 깨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괜히 더 이상한 소리가 나올 것만 같았던 거다.

이 미친개가 기어이 일을 치는구나 싶었다. 어디서 발정을 해 와선 자신에게 그걸 푸는지 모르겠다. 떨어지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며 몸을 파르르, 떨자 귓가로 헉―하고 짧은 호흡이 닿는다.

백호는 양팔로 명월을 끌어안은 후 제 성기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쫀득거리는 내벽이 틈도 없을 만치 성기를 부드럽게 감싸 주자 재차 애달픈 호흡이 흘러나온다.

몸은 이미 용광로처럼 뜨겁지만, 그건 머릿속도 마찬가지였다. 뇌가 뭉개진 듯 온전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열에 달뜬 백호가 내뱉는 단어가 있었다.

“―명월.”

하아, 하고 한숨을 토해 내면서 불린 이름에 명월의 눈꺼풀을 비집고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린다. 기다렸다는 듯 그리로 혀를 내밀어 눈물을 핥아먹은 백호는 명월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점점 위로 올라가 명월의 귀를 물고 세게 빨아들인 후에, 그의 가슴을 제 쪽으로 세게 끌어당기듯 안고는 떨리는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재차 품고 있는 존재의 이름을 불렀다.

“명월.”

낮게 쉰 목소리로 연거푸 속삭이는 이름에 머릿속이 부옇게 흐려진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게 없었다.

눈을 감았다가 뜬 명월은 턱을 감싸는 커다란 손길을 느끼곤 고개를 숙였다. 거부를 하려는 걸 깨달은 것일까. 그러지 말라는 양 턱 아래를 살살 문지르는 손길에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짓을 해 놓고는 고작 그런 걸로 기분이 풀릴 거라 생각하는 건가.

손을 떼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그대로 고개가 돌려져 뒤에 붙어 있는 백호와 시선이 부딪친다.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에 응시 당하는 순간 명월은 재차 눈을 깜박였다.

망막에 맺혀 있던 눈물이 떨어지고 한결 깨끗해진 시야 너머로 백호가 보였을 때 명월은 눈을 내리떴다.

기다렸다는 듯 백호의 입술이 다가왔지만, 피하진 않았다.

쪼듯이 내려앉는 입술이 이윽고 잡아먹을 것처럼 격렬하게 변해도 명월은 그걸 거부하지 않았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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