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1장 (22/32)

신사또전 5권

1장

은밀한 부분이 얼얼하니 아직도 크게 확장되어 있는 것 같았다.

몸 안쪽에서 느껴지는 건 참으로 불쾌한 이물감이었다. 그렇게나 했으니까 분명 거기가 이상해졌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명월은 입을 열었고, 그 사이로 허어―하고 가느다란 숨이 흘러나왔다.

기가 막혀서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러고도 여전히 멍한 채였던 명월은 몇 번 눈을 깜박이다가 눈을 감았다. 그대로 잠들 셈이었는데 아래쪽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설마 싶었던 명월은 눈을 떠 아래를 살폈다. 그러자 어느새 제 몸 위에 엎드려 있는 개새끼가 보였다.

“…….”

긴 머리카락을 명월의 하얀 몸에 흩뿌린 채로 백호가 열심히 쇄골을 핥고 빨아댄다. 그러다가 가슴 가운데에 달린 유실을 무는 순간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절로 아, 하고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그래도 잔뜩 괴롭힘을 당해서 혀로 핥는 것만으로도 아프고 쓰라렸다. 하지 말라는 의미로 재차 신음을 흘리자 입술을 오므려 유실을 빨다가 그걸 혀로 길게 핥는다. 그러곤 얼굴이 더 아래로 내려간다.

배를 타고 내려가 배꼽에 닿은 입술이 조금 더 내려간다. 음모에 닿나 싶더니 축 늘어진 성기에도 입을 맞춘다. 쪽, 하고 은밀한 부분으로 닿는 입술에 명월의 몸으로 힘이 들어간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노골적인 백호의 행동에 명월은 손을 움켜쥐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일어나 두어 대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 아니면 아예 멍석말이를 해서 몽둥이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질근질근 두들겨 패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만 그리 먹을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손가락 하나 까닥이고 싶지가 않다면서 눈을 감은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백호의 얼굴이 점점 더 내려간다.

허벅지를 타고 내려가 무릎에 닿더니, 정강이에도 닿고 이윽고 발등에도 입술을 누른다. 설마 싶었을 때 백호의 혀가 명월의 발가락을 사악, 핥았다.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명월은 팔꿈치를 세워선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만해.”

힘없이 고개를 들지만, 눈동자는 또렷했다.

정말로 싫은 얼굴로 그만하라는 명월이지만, 백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오히려 명월을 한번 본 후에 재차 발가락에 혀를 댔다. 가운데 발가락을 길게 핥은 후에 아예 입술 사이로 낀 채로 잘근잘근 씹는다. 발가락 끝에서 올라오는 간지러운 느낌에 명월은 다리를 움츠렸다.

발에 힘을 주고 백호의 얼굴을 세게 밀어내려 했지만, 그 전에 명월의 발목을 세게 움켜쥔 백호는 입술을 떼고는 명월의 발바닥 가운데에 혀를 대고 길게 핥았다. 명월의 상식으로는 기겁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기다려. 멈춰. 지금 대체―.”

명월이 버둥거려도 백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 세게 백호를 밀쳐 내고 싶어도 하반신이 얼얼하니 제 것 같지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선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던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는 동안 더 지극정성으로 명월의 발바닥과 발가락 사이사이를 핥은 후 백호는 입을 뗐다. 그리고 다시 위로 기어 올라오는 걸 본 명월은 이를 갈았다.

그래. 조금 더 가까이 와라. 그러면 그때 네놈의 얼굴을 후려쳐 줄 테니까―.

그런 마음을 먹은 채로 노려보는데 백호는 명월의 배 부근에서 멈추곤 허리를 세웠다. 그러곤 제 성기를 한 손으로 쥔 채로, 유사 성행위를 하듯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

그걸 보는 순간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얼빠진 얼굴로 백호를 바라보면서 너, 라고 중얼거렸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가 차서 할 말이 머릿속에서 몽땅 날아가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호는 명월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열심히 제 성기를 흔들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금니를 악물곤 신음을 참나 싶더니 그대로 명월의 가슴과 목, 턱과 뺨 등으로 뭔가가 후드득 뿌려졌다.

그것이 백호의 정액이라는 걸 모를 수 없었던 명월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더는 못 참겠다.

이 변태 같은 놈. 상종 못할 개새끼 같으니라고―.

명월은 욱신거리는 하반신의 통증도 무시하고 벌떡 일어나 그대로 백호에게 주먹을 휘두를 셈이었다. 그 순간 백호가 명월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 물건을 쥐던 손으로 어딜 건드리는 건가 싶었다. 당장 손 치우지 못하겠느냐는 말을 하지 못한 건, 자신을 바라보는 백호의 진지한 눈빛 때문이었다.

뭔가를 탐색하듯 집요하게 내 얼굴을 살핀다. 그러다가 문득 백호가 지금 내내 저런 식이었다는 걸 깨달은 명월은 움켜쥔 손에 들어간 힘을 빼냈다.

손을 이불 위에 올린 명월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백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말이나 해.”

목이 쉬어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탁했다. 거기다 아프기까지 했다.

입을 다물곤 헛기침을 하는 동안에 백호가 앞으로 다가온다. 지레 놀란 명월은 뒤로 물러나 몸을 피하려 했으나, 그 전에 명월을 얼굴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긴 백호가 그의 코앞에 얼굴을 대고는 킁킁, 하고 냄새를 맡았다.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나 싶더니 이건 또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닐 텐데―.

그때 백호가 명월의 얼굴을 한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잡아 뒤로 넘긴다.

그 손길이 찐득거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놈이 뿌린 정액이 얼굴에도 튀었던 거다. 지금 그걸 뭉개서 머리에도 묻히는 건가 싶었던 명월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정말 싫은 표정을 짓는 명월에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이나 명월의 얼굴을 쓰다듬는 백호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바로 저 눈동자 때문에 명월은 적극적으로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평소와는 달라서 이상했지만, 지금 그는 뭔가를 하고 있었다. 자꾸만 몸을 건드리고 침을 묻히고 정액을 바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순간 명월의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불현듯, 백호가 이런 이상한 짓을 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독각귀와 만난 거냐.”

그 순간 제 머리를 쓰다듬던 백호의 손이 멈춘다.

대답을 하진 않아도 들은 거나 다름이 없는 행동이었다.

불 꺼진 남의 방에 서 있다가 갑자기 달려들어서 억지로 안고, 온몸을 물고 빨고, 발가락까지 핥더니 급기야 제 몸 위에다 정액까지 뿌렸다.

이 정도로 하는 건 어떤 장치를 해 두기 위함일 터였다. 만약에 생길지도 모르는 일에 대한 대비. 그건 독각귀에 대한 대비밖에 없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이유가 독각귀 때문이었던 걸까.

어디서 만난 걸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놈이 무슨 짓을 했기에 네가 이러는 거야.”

묻는 말에 백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응시하는 눈빛이 진지했다.

혼자서만 뭔가를 알고서 저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뭐라도 말을 해 줘야만 자신도 그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음이었다. 답답하게 하지 말고 속 시원히 털어 내라고 하려는 순간 백호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내내 무표정 하던 주제에 왜 저런 식으로 인상을 쓰는 건지 모르겠다.

그때 백호가 얼굴을 내밀어선 명월에게 입을 맞췄다.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 하도 대뜸 부딪쳐서 가볍게 닿기만 한 건데도 입술이 얼얼한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상황을 모면하지 말라 하려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뜨겁게 주시해 오는 백호 때문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자코 있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엄지로 명월의 아랫입술을 쓰다듬었다.

느리게 손가락이 닿았다가 떨어진다.

“만약에 그 독각귀 놈이 나타나서 같이 가자고 한다면 넌 어쩔 거냐.”

“……그자가 날 데리고 간다고 했어?”

“내가 먼저 물었다.”

그러니 물은 말에 대해서 먼저 대답이나 하라는 건가.

어림도 없다면서 명월은 백호를 노려봤다.

“만나서 무슨 말을 한 거야. 대체 뭐냐고?”

어떤 대화를 나눈 건지 알 수는 없어도 심상치 않은 일이 분명했다. 이놈이 이상하게 행동하는 건 전부 그 탓일 거라면서 명월은 백호를 노려봤다.

집요하게 안고 물고 빨고 한 건 어쩌면 체취를 묻히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뭐든지 약이 된다고 자랑을 하는 놈이 이 정도라니, 그 독각귀가 대체 무슨 말을 한 걸까.

굳은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뭔가를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러곤 긴 한숨을 내쉰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뒤로 물러나 축축하게 젖은 이부자리 위에 앉은 백호의 성기는 아직도 빳빳하게 얼굴을 든 채였다.

저런 꼴로 진지한 척을 해 봤자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혀를 찬 명월은 백호에게 이불을 던졌다.

“가려.”

백호는 얼굴로 날아오는 이불을 잡아선 그걸로 대충 하반신을 가리곤 고개를 들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쪽 눈으로 명월을 본다. 집요하게 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면서 저 혼자 심각한 척을 한다. 아무 말도 해 주지 않고선 저런 눈빛으로 쳐다봐도 아무 소용없었다.

명월은 뒤로 물러나 앉으려다가 엉덩이와 허리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잠시 움직이던 걸 멈추고 허리에 한 손을 올린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제기랄, 이대로 넘어가는 건 너무 분한데. 역시 한 방 먹여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허리를 주무르던 명월은 배와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진득한 정액의 느낌에 혀를 찼다. 질색하면서 근처에 떨어져 있던 옷가지로 그걸 닦아 낸다. 그러자 곧장 백호가 그리로 손을 뻗었다.

“닦아 내지 말고 발라라. 몸 전체에 다 발라.”

“다 바른다고 이게 몸에 흡수되는 것도 아니잖아.”

명월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고 백호를 노려봤다.

“갑자기 이상한 짓을 다 하고 네놈 혼자서 무게 잡으면 그걸로 대충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할 땐 하더라도 이유가 뭔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왜 네놈 혼자서 심각해하는 건데?!”

바로 건넌방에 계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목소리를 낮출 수가 없었다.

백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 앞에서 한숨도 쉬지 마라. 네놈은 그럴 자격이 없어.”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굴려 댄 주제에 웬 한숨인가.

그런 걸 쉴 사람은 네놈이 아니라 나다.

그런 느낌으로 이를 바득바득 가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머리를 마구 긁적여 댔다. 그러다가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곤 “악!!” 하고 괴성을 지른다. 명월은 몸을 닦던 옷가지를 그에게 집어던졌다.

“시끄러워! 소리 지르지 마! 다른 사람들에게 이 꼴을 전부 다 보여 주고 싶은 거냐!”

시끄럽다 하는 명월도 만만치 않게 큰 소리를 내는 중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굳은 눈빛으로 매섭게 노려보는 명월을 앞에 두고 백호는 계속해서 머리를 긁어 댔다. 그러곤 배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들어 명월을 노려봤다.

“네놈은 내가 모든 걸 다 알려 주기 전에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거다.”

“당연한 말은 하지도 마.”

“위험한 걸 알면서도, 혼자선 해결도 못할 거면서 결국엔 그리로 달려들 거야. 넌 정말로 무모하고 말도 안 되는 놈이다. 애초에 혼자서 처리할 수 없는 일이다 싶으면 알아서 몸이나 사릴 것이지, 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리로 뛰어들 수 있는 거냐.”

“지금 내 험담을 하는 거냐?”

그런 거냐, 이 개새끼 놈아. 그런 식으로 말하는 네놈도 나 만만치 않게 단점 투성이라는 걸 알기나 하느냐면서 이를 가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재차 고개를 푹 숙였다.

마음 같아서야 사람 답답하게 굴지 말고 속 시원하게 다 뱉어 내지 못하겠느냐면서 차 버리고 싶지만 일단은 기다려 줬다.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다음으로 백호가 입을 열었을 때, 거기서 바른 말이 나오지 않는다면 한 방 걷어차일 각오를 해야 할 거다.

명월이 하는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호는 계속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지만 결론은 내려지지 않는다.

“―막는 방법은 독각귀 그놈을 없애버리는 수밖에 없는데.”

가볍게 흘러나온 말에 명월의 어깨로 힘이 들어간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명월 쪽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백호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네놈은 그걸 원치 않겠지.”

“…….”

백호의 말에 ‘그런 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독각귀에게 어떤 애틋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어렸을 때 딱 한 번 만나 봤을 뿐이고, 그 때문에 오른손에 이상한 문양이 생겨서 지금 고생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와는 다른 느낌의 존재였다. 하지만 바로 죽인다는 생각까진 할 수 없었다.

굳이 말을 하진 않아도 내리뜬 눈동자로 모든 게 읽히기 마련이다.

명월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백호가 물었다.

“반혼(返魂)이라는 걸 알고 있나.”

반혼, 그것이 불교 용어였던가. 그대로 해석을 한다면 혼을 불러내는 일이었다. 거기까지면 충분했다. ‘그’를 잃은 독각귀가 반혼으로 그를 되돌릴 셈이던가. 그리고 그 일에 자신이 필요한 것인가.

그제야 명월은 백호가 왜 머뭇거리면서 속 시원하게 말하지 못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지금도 괜히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다.

반혼이라. 굳은 얼굴을 한 채로 대답을 못하는 명월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백호는 이미 명월이 모든 걸 이해했음을 알게 되었다.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고,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눈을 내리뜬 채로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가 동시에 흘깃거렸다.

백호가 재차 제 머리를 긁적인다. 아까부터 건드린 머리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왜 어울리지도 않게 분위기를 잡으면서 이상한 짓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걸까.

독각귀가 자신을 이용해서 반혼인지 무언지를 할 것 같으니 그걸 껄끄럽게 생각한 거다. 정신없이 자신을 건드린 것도 나름대로 손을 써 두기 위한 거겠지.

이런 식으로 치덕거릴 정도로 놈의 체취를 묻히면 어느 정도 보호 장치가 되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그걸 내내 무서운 얼굴을 하고선 했으니, 자신이 오해하지 않을 수도 없었던 거고―.

명월은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에 백호의 몸으로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가만히 있던 그가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명월은 모르는 척 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명월은 재차 신음을 흘리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배가 아팠다.

이 정도로 해대다니. 저 망할 놈.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배를 감싼 채로 있는데 무릎으로 커다란 손이 닿는다. 조심스레 다가오는 백호의 손을 느낀 명월은 그리로 시선을 던졌다.

차갑게 식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명월의 다리를 쓰다듬던 백호가 조금 더 앞으로 다가온다. 이윽고 바로 앞에 앉아선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백호지만,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

백호의 머리는 산발이라서 딱 보면 웬 거지인가 싶을 정도였다. 밝은 곳에서 봤다면 더 웃겼을 거라고 생각하며 잠자코 있는 명월을 두고 백호가 입을 열었다.

“독각귀 놈이 나타나면 일단은 피해라. 물론, 내가 네 옆에 있을 테니 직접적으로 부딪칠 일은 생기지 않을 테지만, 만약의 상황이라는 게 있다. 애초에 네놈은 너무 부산스럽고 제멋대로 구는 놈이니까.”

이건 또 뭔 말인가 싶었던 듯 명월의 표정이 바로 굳어진다.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들어서 안색을 굳히ㅌ는 명월이지만, 백호의 말은 거기서 멈춘 게 아니었다.

“원래 독각귀는 인간들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 하지만 놈은 다르다.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선 뭐라도 할 거다. 그 녀석은 네가 아들이라는 것도 생각하지 않아. 당장은 잃은 제 반쪽을 되찾으려 혈안이 된 상태야. 맛이 갔다고. 인간이든 아니든, 맛이 간 놈들만큼 성가신 존재가 없다. 그러니 만나면 피해라―.”

“…….”

거기까지 말한 백호의 얼굴은 진지했다.

다른 때라면 피하라는 말에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건데?’라는 식으로 받아쳤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백호의 눈빛과 진지한 표정 등에서 그가 지금 가볍게 말하는 게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독각귀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에 대해서 안 만큼, 명월도 무턱대고 싫다거나 할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었다. 반혼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일 거다.

자신의 오른손에 있는 문양을 통로로 사용하는 것 외에 다른 방식이지 않을까. 어쩌면 그 일 때문에 자신이 목숨을 잃거나, 그에 준하는 안 좋은 일을 경험하게 될 지도 몰랐다.

백호는 아마 조금 더 자세한 방식을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무 것도 묻고 싶지가 않았다.

‘그’가 죽었다는 걸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상기하게 될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가라앉는다.

아, 정말로 죽은 거로구나. 그리 생각하게 된다.

어렸을 적에 함께 살았던 사람. 자신의 유일한 가족으로 믿고 의지했던 존재.

자신을 버렸지만, 그래도 그에 대한 애정만큼은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

가라앉은 눈동자로 바닥을 내려다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가 그리로 손을 뻗었다.

뺨에 닿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안색을 굳히는 모습이, 당장에라도 백호의 손을 뿌리칠 것 같았으나 그리하지 않았다.

대신 명월은 제 뺨에 닿은 백호의 손을 봤고, 그리로 손을 뻗었다.

“이제 더는 내게 이상한 걸 바르지 마.”

얼굴에 튄 네놈의 정액을 그렇게 문대듯이 바르지 말란 말이다―라고 한마디 할 셈이었다.

그런데 건드린 백호의 오른쪽 손등이 이상했다.

뭔가가 좀 오돌토돌하게 올라간 것 같은 느낌인지라 이건 또 뭔가 싶었던 명월은 그곳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그러자 백호가 바로 손을 빼내려 한다.

그 전에 손을 치우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잡은 명월은 그의 손목을 잡아 아래로 끌어 내렸다.

백호의 오른쪽 손등은 살이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왜 이렇게 된 건가 싶었던 명월은 그 위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물었다.

“여긴 왜 이런 거야?”

“……다쳤다.”

다쳤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으나 물으니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답을 하긴 해도 탐탁지 않음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명월은 안색을 굳힌 채로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다른 이도 아닌 백호가 다치다니. 하지만 명월은 묻는 순간 그의 손을 이리 만든 존재를 알게 되었다.

독각귀.

“…….”

반사적으로 심각하게 변하는 명월의 얼굴을 본 백호는 재차 혀를 차면서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니 네가 신경 쓸 게 아니라 하려는데 명월이 더 세게 백호의 손목을 붙잡는다. 그가 움직일 수 없도록 하고선 그의 손등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백호는 이 손으로 본인의 머리를 긁적이곤 했었다. 하지만 그땐 눈에 안 들어왔는데―.

심각한 명월을 보곤 무안했는지 백호는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아까부터 계속 그런 상태였는데 왜 몰랐던 거냐. 너무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거 아니야?”

“그때는 안 보였어.”

부정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꾸하자 백호는 입을 다물었다.

미친개가 미친 짓을 하는구나 싶어서 노려보기만 했지, 이런 세세한 구석까지 살펴보지는 못했다.

백호의 손등을 살피는 명월의 표정은 점점 진지해졌다. 그가 다친 건 물론 걱정스러운 일이긴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크게 충격을 받은 건 그가 다치기도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도 쉽게 귀물을 처리하고 놈들을 죽이던 백호였기 때문에 강한 존재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다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도 다치거나 피를 흘릴 수 있는 존재인 거다.

명월은 백호의 손을 꼬옥 쥔 채로 중얼거렸다.

“―독각귀가 그렇게나 강한 거냐.”

“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야.”

건성으로 대답한 백호는 힘을 줘 손을 빼냈다. 그러곤 제 손등을 눈앞에 대더니 손을 움켜쥐었다 펼친다.

“이런 건 얼마 안 있으면 바로 아물게 될 거야.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라.”

거기까지 말한 백호는 설마 싶은 기분으로 명월을 흘겨봤다.

“혹시나 내가 다친 것 때문에 걱정을 하는 거냐.”

정말로 그런 거냐? 그럴 리가 없지.

그런 억양으로 물은 백호는 굳어 있는 명월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입가에 서려 있던 미소를 지워 버렸다. 어느덧 무표정이 된 백호는 명월의 얼굴을 주시했고, 그건 명월도 마찬가지였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뚫어지라 백호의 얼굴만을 본다. 뭔가를 표현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명월의 미간 사이에 잡힌 주름만 봐도 그의 속마음 정도는 쉽게 읽혔다.

그는 그저 싫어하고 있었다. 자신이 다친 것 자체를 싫다, 라고 느끼고 있는 거다.

백호는 재차 명월 쪽으로 움직였다.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명월의 눈동자가 옆으로 움직이면서 고개를 돌리려 한다.

하지만 그 전에 백호가 명월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눌려지듯 닿고, 가볍게 떨어진다. 떨어지는 순간 명월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던 백호는 재차 입술을 눌렀다.

두 번째는 조금 더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그저 입술을 누른 채로만 있다가 천천히 떨어뜨렸을 때 명월의 눈동자는 백호에게로 향해져 있었다.

잡티 하나 묻어나지 않는 동그랗고 예쁜 구슬 같은 눈동자였다. 그것이 자신을 응시하는 순간 백호는 가슴 한편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동시에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향에 백호의 한쪽 입술 꼬리가 우그러지듯 올라간다.

“……곤란한데.”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소리에 명월의 눈꼬리가 떨린다.

무엇을 두고 곤란하다 하는 건가 싶어 묻고자 하려는 순간 재차 백호의 입술이 닿았다. 이번에는 뒷머리를 한 손으로 감싼 채로 바로 입술을 벌리고 안으로 혀를 밀어 넣는다.

서로의 점막이 닿는 순간 명월의 혀끝이 파르르 떨린다. 백호의 혀가 부드럽게 명월의 혀를 감싸고, 그의 뒷머리를 붙잡은 손가락 끝으로 힘이 들어간다.

자연스럽게 깊어지는 혀의 결합을 두고 명월은 백호의 팔을 붙잡았다. 처음에는 밀어내려 했지만, 이윽고 그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만약 백호가 아까처럼 거칠기만 했다면 발로 차 버렸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혀가 얽히고 거기서 만들어지는 타액을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삼켰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면서 조금 더 깊이 혀를 밀어 넣으며 명월의 입천장과 치열, 목구멍 안쪽까지 빨아들이며 백호의 손이 명월의 가슴으로 내려온다.

끝이 거친 손가락이 긁듯이 유두를 건드리고 가슴 위에 올려진 채로 세게 움켜쥐자 명월이 깊은 숨을 내쉰다. 명월의 가슴이 오르내리는 걸 느끼면서 백호는 그대로 끌어안고 있던 몸을 이불 위에 눕혔다.

반쯤 눈을 감은 채로 백호의 입맞춤을 받고 있던 명월은 재차 이불에 눕혀지게 되자 당황해선 그의 팔을 붙잡았다.

목구멍 안쪽으로 밀고 들어와 헛구역질을 올라오게 만드는 백호의 혀를 밀어내고 기어이 입술을 뗀 명월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나 더는 안 할 거야―!”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해서 아래쪽으로 얼얼하고 아픈 감각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런 곳에 재차 네놈의 크기만 한 물건을 밀어 넣으려 한다면 더는 참지 않을 거라 하려는 순간 백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정말 그럴까?”

중얼거리는 목소리 안쪽으로 음흉스러움이 묻어난다.

동시에 유두를 잡아 살짝 비트는 순간 명월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아프지만, 동시에 저릿한 쾌감이 퍼지자 명월의 입술을 타고 달콤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제 입을 타고 흘러나간 소리에 당황한 명월이 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소리를 들은 백호는 때를 놓치지 않고 바로 명월의 다리를 벌렸다.

이미 젖어 있어서 미끈거리는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들어 온 손이 너무도 당연한 듯 그 주변을 더듬는다. 가랑이 사이를 문대고는 주름을 건드리는 순간 명월이 버둥거렸다. 아까와 달리 가슴이며 팔을 밀어냈다.

“더는 안 할 거―!”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세를 잡은 백호가 귀두를 주름에 대고 한 번에 끝까지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

몸 안쪽이 징―거리면서 울리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배가 크게 부푼 채로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하던 명월은 이윽고 젖은 숨을 토해 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명월의 팔을 잡아 제 목에 두르도록 한 백호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반쯤 빼낸 성기를 세게 안으로 박아 넣자 재차 명월의 입이 벌려진다. 그 사이로 막힌 신음이 흘러나오자 곧 이를 세워서 아프게 아랫입술을 사리문다.

두터운 성기가 밀고 들어올 때마다 내벽이 경련을 일으키며 그를 죄어든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내벽을 느끼면서 명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동시에 백호의 성기가 배 깊숙한 안쪽으로 파고들어 와 치댈 때마다 몸이 떨린다.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했던 곳에 다다르자, 호흡이 가빠지고 머릿속이 뭉개지는 것 같다.

쓰라린 통증과는 다른 쾌감의 불길이 피어오르는 걸 느끼며 명월은 붉은 입술을 터질 것처럼 깨물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백호는 그런 명월의 입술을 깨물고는 잘근잘근 씹었다. 그런 식으로 소리를 참으려 들지 말라는 듯 명월을 더 세게 끌어안고 끝까지 빼낸 성기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찰진 내벽을 벌리고 좁은 구멍에 뿌리 끝까지 제 물건을 밀어 넣고는 나직한 한숨을 토해 낸다.

깊은 만족감이 묻어나는 한숨에 내내 감고 있던 눈을 뜬 명월이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속눈썹 안쪽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백호는 그런 명월을 내려다봤다. 흔들리는 명월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명월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곤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누른다.

뜨거운 탕 속에 머리끝까지 잠겨 있는 것 같았다. 힘겹게 자신을 받아들이는 명월의 육체를 느끼면서도 멈출 수 없었던 백호는 계속해서 몸을 치댔다. 그리고 머리끝까지 열기가 올라오는 순간 열에 들떠서 웅얼거렸다.

“넌 정말로 예뻐―.”

그 말과 동시에 백호는 참지 못하고 명월을 더 세게 끌어안고 미친 것처럼 그 몸을 탐했다.

* * *

이부자리 위에 누워 있는 늙은 사내는 전신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반쯤 벌린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숨은 혼탁했고, 언제 갑자기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은 숨을 몰아쉬면서 힘겹게 누워 있는 이는 이병현 대감이었다. 그의 얼굴은 절반이 이미 검게 변색되어서 거기서부터 흘러내리는 진물로 인해 방 안은 역겨운 냄새가 가득했다.

의원도 참지 못하고 하얀 천으로 입과 코를 가리고 있는데 그 옆에 앉아 있는 화소군은 아무것도 착용하지 않고서도 태연한 모습이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이병현 대감을 내려다보는 모습에서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그림처럼 앉아만 있던 화소군은 한참 후에야 몸을 일으켰고, 그걸 본 의원이 급히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의원이 뭔가를 갈구하는 눈빛으로 바라봤으나 화소군은 뒤돌아보는 일 없이 그대로 방을 나섰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자리에 서 있던 사내들이 바로 고개를 숙인다. 하나같이 체격에 대단한 장정들이었으나, 그들은 어쩐지 화소군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피하는 이들을 두고 화소군은 그대로 대청을 내려갈 셈이었다.

그때 맞은편 쪽의 방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나왔다. 그는 조심스레 화소군의 옆으로 다가서선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

“행수 나으리. 마님께서 잠시 뵙기를 청하십니다.”

그 순간 화소군의 눈동자 안쪽으로 탐탁지 않은 기색이 서린다. 하지만 그건 나타남과 동시에 사라졌고, 이윽고 그의 입가로 느긋한 미소가 그려졌다.

“부르시면 찾아가 뵈어야겠지. 안쪽에 계신가.”

“그렇습니다. 계속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화소군은 바로 걸음을 뗐다. 느긋하게 걸어가선 맞은편의 문을 통해서 방으로 들어가자 독한 향내가 코끝을 스친다.

조금 전에 들어가 있었던 방에는 역겨운 냄새가 그득히 차 있었건만, 화소군은 오히려 이 향 냄새가 훨씬 더 비위에 안 맞았다. 표정을 굳히나 싶던 그는 이윽고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여인을 발견하곤 그리로 갔다.

다가오는 화소군을 보는 여인은 매처럼 매서운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원래부터 고운 인상은 아니었건만, 이번 일을 거치면서 생각이 많아진 것인지 전보다 훨씬 더 고약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화소군은 그런 여인의 앞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먼저 말을 건넸다.

“어쩐 일로 절 찾으신 겁니까.”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할 셈이십니까.”

부인의 말에 화소군의 입가로 느긋한 미소가 걸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이번 일에 대해서 뭔가를 알고 있고, 그에 대한 해결책도 알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저도 이번 대감께 생긴 일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습니다. 대감이 저리되셔서 당혹스러운 걸로 따지면 부인보다 제가 더할 겁니다. 덕분에 든든한 아군을 잃은 셈이니까요.”

“정말로 당신이 대감을 아군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패라고 여기셨던 게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편찮으신 대감이 너무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저런 흉물스러운 늙은이 따위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닙니다.”

단호한 말에 화소군의 입가에 서려 있던 미소가 지워진다. 미소를 지우고 차분한 얼굴로 바라보는 화소군을 두고 부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 일을 두고 다른 이들은 구미호의 소행이라고 지껄여 대지만, 전 다르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동안 지나칠 정도로 나대던 대감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던 누군가 손을 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말씀은 즉, 절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니라고 잡아떼기가 뭐한 상황이 아닙니까.”

“그 상황이라는 게 무언지 한번 들어보고 싶군요.”

의심을 받는 입장임에도 화소군은 느긋했다.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로 바라보는 그를 두고 부인은 책상 위에 올린 손을 움켜쥐었다.

“저 건넌방에 누워 있는 건 욕심으로 배가 검게 찬 늙은이입니다. 그저 욕심만 부렸다면 귀엽게 봐줄 수 있겠지만, 최근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면서 행수를 성가시게 찌르고 다니니 그게 거슬리셨던 게 아닙니까. 그래서, 손을 쓰신 게 아닙니까.”

“그런 걸로 따지면 저보단 새로 오신 사또가 더 의심스러운 인물이 아닙니까?”

새롭게 거론되는 수상쩍은 존재에 대해서 부인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전에 그 사또와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내 눈이 모든 진실을 가려내는 재주가 있는 건 아니나, 적어도 그 사또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해할 만한 이가 아니라는 건 압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건, 행수나 가능한 일이지요.”

“이것 참, 우리의 고운 사또께서 부인의 마음까지 사로잡으신 모양입니다.”

“지금 난 말장난을 하자고 행수를 불러들인 게 아닙니다. 나도 행수를 앞에 두고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이도 아닌 화소군이었다. 적어도 이 반양 땅에선 임금보단 그의 안색을 더 살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그를 불러들여서 ‘이번 일은 너 때문이지?’라고 묻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무모한 짓을 하고 있음을 모르진 않지만, 한 번 정도는 거론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말을 돌린다면, 다른 의혹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수의 소행이 아니라면, 정말로 구미호의 짓거리란 말입니까.”

거기까지 말한 후 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내내 태연한 모습으로 있던 부인이나, 그 순간 눈빛이 변했다.

눈을 내리뜬 화소군은 책상 위에 올려진 부인의 손등이 미미하게 떨리는 걸 보곤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거로군. 강한 척 밀어붙이고는 있어도 사실은 다음 순서가 본인이 되지 않을까 싶어, 그걸 염려하고 있었던 거다.

웬일로 이 여인이 자신을 부르나 싶었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거라면서 화소군은 제 품 안에서 붉은 주머니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이 부적을 품에 넣고 계십시오. 그러면 적어도 부인께는 별일이 생기지 않을 겁니다.”

그 순간 부인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슬쩍 화소군의 얼굴을 보곤 눈을 내리떠 책상에 올려진 붉은 주머니를 살피는 그녀의 얼굴에 고민의 기색이 짙다.

저걸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부인을 두고 화소군이 재차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반양 땅에서 사시는 분이 고작 이 정도 일에 벌벌 떨어서야 되겠습니까. 대감이 잘못된다면 이 집안을 책임져야 할 건 바로 부인이십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 단단히 정신 차려야 하실 게 아닙니까.”

그 순간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부인의 긴장감이 뚝 끊어졌다.

떨리는 손을 옮겨서 조심스레 붉은 주머니를 쥐는 걸 확인한 화소군은 기다렸다는 양 몸을 일으켰다.

나간다는 말도 없이 몸을 돌리는 그였으나, 부인은 그걸 두고 뭐라 하진 않았다.

내내 사람 좋은 얼굴로 부인을 대하던 화소군이나, 방을 나서는 순간 그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곧장 대청을 내려와선 비단신을 신고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검은 복면을 쓴 이들이 따라붙는다.

마치 그림자처럼 움직여서 몸의 일부처럼 여겨지는 이들이었다. 실제로도 그들은 화소군의 눈과 귀가 되어서 그가 미처 전해 듣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알려 주곤 했다.

“지금 이 일을 두고 바깥에선 뭐라고들 지껄여대더냐.”

이런 식으로 종종 묻는 건 드문 경우가 아니었다. 그때마다 망설임 없이 대답을 하던 이들이 이번엔 조용하다.

“괜찮으니 솔직하게 말해 봐라.”

가볍게 미소를 짓는 화소군이나, 그의 기분이 저 웃는 얼굴과 같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던 자들은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이병현 대감이 구미호에게 홀렸다고 합니다. 구미호의 독에 당했으니 얼마 살지 못할 거라고도 하고…… 그리고, 대감이 사또를 건드렸기 때문에 벌을 받는 거라는 소문도 새롭게 돌고 있습니다. 사또에겐 영험한 힘이 깃들어 있는데, 대감이 그를 해하려 하니 산신이 노하신 거라고…….”

“다들 그동안 살기가 지나치게 편했던 모양이로구나. 그런 헛소리들을 늘어놓는 걸 보면 말이야.”

빈정거리는 말에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빠른 걸음을 옮기던 화소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되지도 않는 소문이 돈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해 줘야겠지.”

스산함이 묻어나는 혼잣말에 사내는 조금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 * *

멀리서 날아온 나비가 나풀거리면서 곰방대 주변을 배회한다. 그러다가 곰방대 끝에 내려앉은 나비는 뜨거운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사그라졌다.

파사삭, 하고 금방 재가 되어서 흩어지는 나비를 살피던 호접화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내려놓은 그녀는 바깥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둠이 내려앉은 곳에서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니는 이도 없고, 모든 것들이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호접화, 그녀의 귀에는 시끄러운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제 귀에 한 손을 댄 채로 눈을 내리뜬 호접화는 입술을 벌렸다. 그 사이로 가느다란 숨을 토해 낸 호접화는 덜컹―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문을 열고 자희가 안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형님, 아직도 주무시지 않은 겁니까? 피부 상하십니다.”

그리 말하는 자희의 눈에는 졸음이 가득했다. 자다가 소변이 마려워 나와 봤다가 호접화의 방 불이 꺼져 있지 않은 걸 확인하곤 온 모양이었다.

하품을 하면서 눈을 비비던 자희는 재차 호접화를 바라봤다. 그리고 활짝 연 창가 앞에 고고히 앉아 있는 호접화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촛불 하나만 앞에 두고 앉아 있는 호접화가 오늘따라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녀의 미모가 대단한 만큼, 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존재가 초라하게만 여겨졌다.

역시나 괜한 말을 하러 온 모양이라며 자희는 고개를 꾸벅이곤 급히 문을 닫았다. 그렇게 자희가 나가고 난 후, 호접화는 다시 혼자 남게 되었다.

들은 말이 있기 때문일까. 호접화는 닫힌 문을 확인하고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곤 근처에 있던 보석함을 끌어 본인 앞으로 당겼다.

뚜껑을 잡아서 위로 올리자 커다란 거울이 나타난다. 그걸 잘 고정한 호접화는 가채를 머리에서 내리고 꼬아서 올렸던 머리를 풀었다.

삼단처럼 긴 머리카락이 한쪽 어깨 위로 쏟아진다. 그걸 한손으로 쓸어내리면서 눈을 내리떴다. 그러자 거울 속에 비친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였다.

흠 하나 잡을 데 없을 만치 완벽한 모습이었다.

호접화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쓰다듬고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거울 속에 비치는 모습이 바뀌었다.

그걸 바라보던 호접화는 붉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 * *

죽을 것처럼 피곤하면 꿈도 꾸지 않고 푹 잠들게 된다. 지금 명월이 그런 상태였다.

딱 죽었다가 눈을 떴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명월은 눈만 뜬 채로 있었다.

지금 백호의 몸 위에 누워 있는 상태라는 걸 알면서도 내려갈 수가 없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정말로 그냥 눈 감고 자 버릴까. 하지만 그 전에 복운이 들어올 터였다. 복운이나 다른 사람이 이런 모습을 봐선 안 되었다. 그러니 서둘러 일어나야만 했다.

그래. 일어나야 하는데―.

“……허어.”

입을 벌리자 나오는 건 탄식을 닮은 한숨이었다.

정말로 힘들어 죽겠다. 이게 다 백호 놈 때문이었다. 피곤해서 죽을 것 같은 자신과 달리 아래에 누워 있는 백호는 느긋한 모습이었다.

입을 반쯤 벌린 채로 커―하는 소리를 내면서 단잠에 빠져 있었다.

이쪽은 자도 전혀 피로가 풀리지 않았는데―.

반사적으로 명월의 움켜쥔 손으로 힘이 들어간다. 이대로 한 방 시원하게 올려붙이면 이 분노가 어느 정도 풀리지 않을까.

아니다. 한 방이라도 보다 효과가 큰 쪽으로 휘두르는 편이 나았다. 남자의 가장 큰 약점이라 한다면 딱 한 군데가 있었다.

당분간은 제멋대로 휘두를 수 없을 정도로 그 괘씸한 곳에 한 방 먹여 줄까. 그리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아직도 시들지 않은 백호의 물건이 느껴졌다.

그것은 지금 명월의 허벅지 사이에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는 뻣뻣하게 얼굴을 들며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나 했는데 왜 아직도 시들지 않은 건데. 이제는 끔찍하기만 했다.

저런 물건이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것도 싫었다. 인상을 쓴 명월은 꼼질거리면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내내 그의 몸을 끌어안고만 있던 백호의 손이 내려가선 명월의 엉덩이 볼기 한쪽을 콱, 하고 붙잡았다.

“―헉!”

살이 눌려서 아플 정도로 강하게 그러쥐는 느낌에 명월은 헛숨을 들이마셨다. 아프기도 했지만, 당황스러워서 가만히 있는 동안 그대로 명월의 몸은 옆으로 내려갔다.

명월을 이불 위에 눕힌 백호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를 끌어안았다. 명월의 몸통을 한 팔로 단단히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는 엉덩이를 쥐고, 두 다리를 이용해서 마치 넝쿨처럼 감아온다.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꽁꽁 끌어안기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명월은 잠깐만 기다려 보라 말하려 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백호가 고개를 숙인다.

명월의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묻은 백호는 킁킁거렸다. 급기야 크으으읍, 하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긴 한숨을 토해 내면서 웅얼거렸다.

“좋은 냄새-.”

“…….”

그렇게나 땀을 흘린 후에 머리에서 나는 냄새가 좋을 리가 없었다.

이 미친놈. 미친개. 너에게 있어서 점잖은 건 쓰고 다니는 호랑이 가죽뿐이야.

얼굴이 벌겋게 익어선 속으로 열심히 백호의 험담을 하던 명월이 단단한 가슴과 어깨를 밀어댔다. 하지만 밀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강하게 엉겨 붙는 백호 탓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예 체중을 실어서 위로 엎드려 오는 것에 명월은 헛숨을 삼키면서 힘겹게 말을 쥐어짜냈다.

“무거워, 무, 무겁다고 너―!”

그러니까 당장 떨어지지 못하겠느냐고 힘겹게 내뱉어도 백호는 요지부동이었다. 어쩐지 아까보다 내쉬는 호흡이 한결 깊어진 것 같았다.

정말 이 상태로 자려는 건 아니겠지. 힘겹게 얼굴을 옆으로 물린 명월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백호를 봤다.

그는 눈을 감고 입을 반쯤 벌린 채로 정말 잘 자고 있었다. 그 얼굴이 보기에 얄미웠다.

명월은 결국 힘이 빠져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무리해서 몸을 움직였기 때문일까.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면서 눈앞이 빙글빙글 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명월은 머리에 한 손을 짚은 채로 호흡을 골랐다. 이러다간 한나절 내내 움직이지도 못하게 생겼다.

가뜩이나 몸도 안 좋으니 이대로 자 버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문제는 자신을 깨우러 올 다른 사람들에 있었다.

늦게까지 일어나지 않으면 다들 걱정할 테고, 이 사람 저 사람 전부 다 찾아올 거다. 그 전에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처리해야만 했다.

가늘게 떠진 명월의 눈동자 안쪽으로 결의가 서린다.

정말로 하고 싶진 않지만, 수가 없었다.

이를 간 명월은 아래로 손을 뻗었다. 밀착된 상태여서 손을 움직이기가 힘들었지만, 느릿하게 움직여서 간신히 그곳에 닿는 데에 성공했다.

손가락 끝에 닿는 백호의 단단한 성기를 확인한 명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인 명월은 성기를 잡고는 그대로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 순간 단잠에 빠져서 행복한 얼굴로 자던 백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직후 크게 입을 벌리곤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그 전에 명월이 손으로 백호의 입을 막아 버렸다.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도록 내려 두었던 손까지 들어 백호의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고는, 아파서 뒹굴거리는 그의 몸 위로 아예 올라탔다.

* * *

무식하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정말 컸다. 어쩌면 저런 물건을 달고 다닐 수 있는 걸까.

그런 걸로 배려 없이 남의 몸을 후벼 파니까 지금 엉덩이 안쪽이 이렇게나 아픈 게 아니냐면서 명월은 인상을 쓴 채로 손을 내렸다.

아까부터 찜찜한 느낌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아서 제 허벅지 위에 손바닥을 비빈 명월은 혀를 찼다. 그러곤 뒤를 돌아봤다.

명월의 방문은 닫혀 있었고, 백호는 아예 그 안에서 나오질 않았다.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에 단단히 속이 틀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본인이 자신에게 한 일을 기억한다면 고작 이 정도 일로 토라질 순 없을 터인데.

명월은 제 손바닥 안쪽을 살피면서 그걸 다시 허벅지 위에 문질렀다.

나도 네놈의 물건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고―.

그리 생각을 하면서 몸을 일으킨 명월은 신음을 흘렸다. 으윽, 하고 가느다란 신음을 흘리면서 허리에 한 손을 올리자, 새삼 백호의 얼굴이 떠오른다.

같은 사내로서 성기를 너무 세게 움켜쥔 게 아닌가 싶으면서도 허리가 아프니까 아무려면 어떠나 싶었다.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에 비하면 놈의 통증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명월은 어기적거리면서 걸어갔다.

그렇게 대문을 나서려는데 “사또.”라는 부름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복운이 달려온다.

“어딜 가십니까?”

“아니. 오늘은 관아 안에 있을 거다.”

어제 나갔다 온 일 때문에 오늘도 어딜 나가는 게 아닐까 싶어 그런 걸 묻는 것일 터였다.

원래 몸이 성했다면 바깥에 나갈 계획이긴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은 그냥 관아 안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할 셈이었다.

명월의 대답에 복운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정말로 어딜 안 나가시는 겁니까?”라고 묻는다. 불신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얼굴에 명월은 혀를 찼다.

“속고만 살았더냐. 정말로 어디 나가지 않을 테니까 내 신경은 끄고, 오늘은 네 일이나 해라.”

그리 말한 후 명월은 대문을 넘으려 한쪽 다리를 들었다. 몸이 편치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뒤뚱거리는 걸음을 옮기게 된다.

뒤에서 그걸 물끄러미 보던 복운이 물었다.

“어제 잘 못 주무셨습니까?”

별 생각 없이 묻는 말에 움찔한 명월은 일단 대문 바깥으로 나와 서선 뒤를 돌아봤다.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허리가 좀 아프긴 하지만, 별거 아니다.”

“어떻게 주무셨기에 허리가 아프단 말입니까. 자고로 사내에게 제일 중요한 게 허리입니다.”

“조금 있으면 알아서 풀릴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정말은 다른 일이 있어서 허리가 아픈 거였지만,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는 묻지 말라며 선을 딱 그은 명월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뒤뚱거리면서 멀어지는 명월의 모습에 복운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암만 봐도 이상했다. 왜 저리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걷는단 말인가. 잠을 잘 못 잤다고 해도 저러는 건 이상했다.

복운은 어제 명월이 일찍 방에 들어간 게 이상했다는 걸 떠올렸다. 괜찮다고 말하는 목소리도 요상했지.

안 좋은 예감이 들어서 안에 들어가서 확인해 볼 셈이었는데 그때 나비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뒤를 쫓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비는 쉬이 붙잡히지 않았고, 한동안 난리를 치는 나비와 승강이를 하는 동안 힘이 다 빠진 복운도 대충 몸을 씻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명월은 어느 때처럼 알아서 옷을 다 입고 나와 있었다.

오늘은 계진하고 같이 밥을 먹겠다기에 그쪽 방에 밥상을 차렸다. 그리 말하는 명월에선 향긋한 냄새가 났다. 머리도 좀 젖어 있었던 것 같고―.

“……설마 아침에 일어나서 또 씻으신 건가.”

분명 어제 자기 전에 몸을 씻은 명월이었다. 아주 더운 날 땀을 흘리면 한 번 더 몸에 물을 끼얹을 수도 있긴 했지만―.

오늘 아침에는 명월이 일찍 일어나 있어서 목욕탕 쪽은 살피지 못했다. 원래 그곳은 사용할 때마다 살펴보지, 평상시에는 대충 넘기는 편이었다. 이제와 새삼스레 그곳을 확인하지 못한 걸 두고 안색을 굳힐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다시 한 번 안 좋은 예감이 든 복운은 급히 대청 위로 올라갔다.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명월의 방문 앞에 선 복운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생각을 하면서도 복운은 문을 열고 방 안쪽으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아무도 없는 휑한 방 안이 눈에 들어온다.

방의 주인이 자리를 비웠으니 아무도 없는 게 당연한 건데도 미심쩍음을 지울 수 없었다.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방을 둘러보다가 안으로 들어간 복운은 코를 씰룩거렸다. 킁킁거리면서 열심히 냄새를 맡다가 안쪽 장 앞에 서선 문을 활짝 열었다. 바로 복운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한다.

“왜 이불이 없지?”

장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할 이불이 몇 채나 없었다. 원래 명월의 방은 복운이 청소를 하기 때문에 이불이 한 개만 없어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자리에 없는 이불의 색과 모양도 똑똑히 기억하는 복운은 당황해선 주변을 살폈다.

설마 싶어서 장 옆을 살피지만, 그런 곳에 이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급격하게 초조해진 복운은 급히 밖으로 나갔다. 막 대청으로 나왔을 때, 반대편 문이 열리고 계진이 나왔다.

머리를 단정하게 땋아 내리고 옷도 깔끔하게 입은 계진은 복운을 보는 순간 웃었다.

“오늘 아침에 사또를 보고 이상한 점을 감지하지 못했느냐?”

가벼운 마음으로 복운에게 인사를 할 셈이었던 계진은 난데없는 물음에 입을 다물었다. 머리로 그가 물은 말을 한 번 더 상기하곤 고개를 저었다.

“평상시의 사또셨어요.”

다정다감한 사또였다.

밥을 먹는 내내 말을 걸어 주고 반찬 같은 것들도 잘 챙겨 주셨다. 앞으로도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잘 먹어서 언젠가 사또만큼 키가 클 거라고 약속까지 한 마당이었다.

그 외에 특이점은 없었기에 계진은 이상하다는 듯 복운을 올려다봤다. 영문을 몰라 하는 계진을 두고 복운은 급히 대청을 내려갔다.

어딘가로 서둘러 달려가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급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거라면 도와야만 했다.

사또 명월이 ‘일단은 복운의 일을 잘 도와주는 것만 신경 쓰도록 해라.’라고 했던 거다. 사또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계진은 복운을 따라 급히 대청에서 내려와 그 뒤를 쫓았다.

복운이 한달음에 달려간 곳은 관아에서 나오는 이불을 빨래하는 우물가였다. 관아 뒤쪽으로 커다란 빨래터가 있었는데 거기서 관아에서 나오는 빨래는 물론이거니와 마을 사람들도 종종 모여서 빨래를 하곤 했다.

모여서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던 여인들은 갑자기 나타난 복운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이쪽 우물가에 남자가 나타나는 일은 드물었지만, 복운은 예외였다.

평상시에도 명월의 이불을 빨기 위해서 여자들 사이에 껴서 묵묵히 방망이질을 했었던 거다.

처음에는 그걸 보고 망측하다 하던 여자들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오히려 빨래까지 하는 복운이 대단하다면서 그에게 호감을 품는 이들도 적잖았다. 자연스럽게 빨래터에까지 예쁘게 치장하고 나타나는 여인도 있었다.

하지만 복운은 그런 여인들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한 여인이 옆에 쌓아 두고 있는 이불을 발견하곤 당장 그리로 달려갔다.

“이건 자네가 들고 나온 건가?”

명월이 쓰는 이불이라면 색과 문양까지 세세하게 아는 복운이었다. 보는 순간 여자가 옆에 두고 있는 게 명월의 이불이라는 걸 간파했다.

복운이 갑자기 나타나 심각한 얼굴로 묻자 여인은 긴장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아, 아닙니다. 사또께서 이것 좀 빨아 달라시면서 건네주셨습니다.”

“이불을 사또께서 건네주셨다고? 직접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이불이 축축해서 여기까지 들고 오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불이 축축했다고?”

되묻는 말에 여자는 반사적으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오늘이 당번이라 다른 이들보다 먼저 일어나 눈을 비비고 하품을 하고 있는데 눈앞으로 누군가 나타났다.

안 그래도 요즘 마을 분위기가 뒤숭숭했기에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앞에 서 있는 대상을 확인했다. 바로사또 명월이었다.

소문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 서 있으니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이른 시간에 이런 곳에 어쩐 일인가 싶었다. 가슴에 한 손을 댄 채로 얼어붙어 있는 여인을 두고 명월이 이불을 내밀었다.

‘미안한데 이것 좀 깨끗하게 빨아 주게.’

그리 말하면서 까는 것과 덮는 이불 두 개를 바닥에 내려놨다.

흙 위에 놓인 이불은 푹 젖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불이 왜 이렇게 젖은 건가도 싶었지만, 이윽고 사또가 부탁한 일이니 그런 걸 물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다고 대답하곤 곧장 이리로 나와서 일찍부터 빨래를 해서 지금은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이상한 얼룩 같은 게 묻어서 그걸 지워내기가 꽤나 힘들었지만, 결국에는 깔끔하게 전부 다 세탁을 했다. 그래서 내심 뿌듯해하고 있는데 복운이 나타나 저리도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사또와 있었던 일에 대해서 거짓 없이 고대로 말을 했는데도 눈치가 보인다.

말을 듣고 나서도 복운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안색을 굳힌 채로 이불을 살피나 싶던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리고 잘 포개 둔 이불을 활짝 펼쳐서 그걸 다시 세세하게 살핀다.

펼쳐진 이불의 아래쪽에 흙이 묻는 걸 본 여자가 에그머니나-, 하고 한소리를 냈지만, 복운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동안 이불을 살피다가 그곳에 얼굴을 묻고 킁킁거리자 근처에 있던 다른 여인들의 표정이 굳어진다.

저놈이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미친 거 아니야? 이상하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복운은 마냥 진지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고는 재차 물었다.

“젖어 있던 이불에 이상한 얼룩 같은 게 묻어 있지 않았나?”

얼룩을 깔끔하게 지워 낸 건 칭찬을 들을 수 있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여자는 냉큼 대답했다.

“얼룩이 묻어 있긴 했지만, 전부 다 지워 버렸습니다.”

“그 얼룩에서 이상한 냄새는 안 났고?”

“……냄새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혹시나 이런 식으로 추행을 하는 건가 싶었던 여자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복운 딴에는 진지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믿곤 싶지만 오늘 명월의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지나치게 허리를 써서 제대로 서지 못하는 상태인 게 아니었을까. 원래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도 모른다고 하니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사또가. 우리 도련님이. 그런 짐승 같은 짓을 하실 리가 없어―.

다른 놈팡이들이 여자를 끼고 뒹굴든 구르든 그건 알 바 아니지만, 우리 사또는 그래선 안 되었다.

암, 안 되고말고.

얼굴이 해쓱하게 질린 복운은 냉큼 일어서선 한달음에 관아로 들어갔다. 그렇게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복운을 두고 한 여인이 끌끌, 하고 혀를 찬다.

“괜찮은 놈인 줄 알았더니 어딘가 맛이 간 놈이었네 그래.”

그러니 저런 식으로 헛소리만 하다가 쌩하니 사라지는 게 아니냐면서, 그 뒤로도 한참을 쑥덕거렸다.

* * *

일단 동헌에 나와서 자리에 앉는 건 좋은데, 여전히 허리가 안 좋았다. 전에도 백호하고 한 후에는 하루 내내 이런 상태였던 것 같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더 몸이 안 좋은 걸 느낄 수 있었다.

의자 위에 푹신한 걸 깔아야 하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걸 찾으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테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던 명월은 고개를 들었고, 아래쪽에 서 있던 이방과 시선이 부딪쳤다.

묘하다는 듯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이 전과 사뭇 달랐다. 그것에 명월은 모르는 척 헛기침을 하면서 손짓을 했다. 그제야 이방은 위로 올라가 명월 옆에 서선 양손으로 모은 채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호방의 일은 어떻게 되었나?”

“죄송합니다. 아직까지도 그의 행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날 명월이 시킨 일이 있었기에 지금 그가 무엇을 물을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다렸다는 듯 대답을 하긴 했으나 이방의 마음은 편치가 않았다.

벌써 며칠 째다. 이 정도 시간이면 멀쩡한 사람이 병신이 되거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음이었다.

이런 경우가 없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반양에선 암암리에 성행하는 경우였다. 옆집의 누가 사라졌는데 며칠이나 몇 달 후에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라든가 말이다.

전이라면 그렇구나―하고 가볍게 넘겼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달리 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굳은 채로 눈을 내리뜨기만 하는 이방을 두고 명월의 표정도 서서히 굳어진다.

“어쩌면 많이 늦은 걸지도 모르겠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그래도 끝까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정 찾을 수 없다면 화소군 행수에게 편지를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군.”

놀라 고개를 드는 이방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떤 편지를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그자와 길게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겠나. 호방을 내놓으라 해야지.”

“그런 편지를 보낸다 해서 순순히 호방을 내놓겠습니까.”

“살아서 돌아오면 모르겠지만, 죽어서 돌아오면 가만두지 않을 셈이네. 여기서 그런 짓을 할 만한 인간은 그자뿐이니까. 지금 내가 한 말 고대로 편지로 적어서 보낼 거네.”

“…….”

정말로 과감한 행동이었다. 지금껏 화소군에게 그런 편지를 보낸 자가 있었던가.

그렇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명월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 했을 때, 화소군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워낙에 지닌 패가 많다 보니 어떤 행동을 할 거라 딱 짚을 수도 없었다.

“지금 그자는 간을 보고 있는 중이야. 내가 어떤 식으로 나올까―하고 말이지.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지나치게 오랜 시간을 끌고 있어.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때가 되었고, 그것이 호방의 죽음이라면…….”

그때에는 정말 가만 둘 생각이 없었다.

그놈이 귀물을 이용해서 이런저런 진귀한 것들을 얻어 낸 거라면 당장 그 앞으로 달려가서 앞으로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분명히 할 셈이었다.

화소군 그놈이 반양에 많은 사람을 뿌려서 그들을 부릴 순 있어도, 자신에겐 백호가 있으니 어떻게든 승산이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명월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놈의 거기를 그렇게 꽉 쥐어 버렸으니 안 도와주려 할지도 모르겠군.”

“뭐라고 하셨습니까?”

혼잣말을 하던 명월은 입을 다물곤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양손을 앞으로 모은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뜬 이방은 의아해하는 모습이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명월은 본인이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무의식 중에 엄한 소리를 해 버렸다.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리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저 멀리서부터 소리가 들려왔다.

“사또오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명월과 이방은 안색을 굳히곤 그쪽을 쳐다봤다.

하지만 사또를 부르짖는 목소리는 무척 익숙하고 낯익은 자의 것이었다. 실제로 명월이나 이방이 잘 알고 있는 존재가 얼굴이 벌겋게 익은 채로 동헌 마당을 가로질려 질주해 왔다.

“사또! 사또! 사또오오오!!”

누가 들으면 그놈의 사또 당장 숨넘어가는 줄 알겠다. 저놈이 왜 이리도 난리인가 싶었던 명월의 얼굴은 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

그건 이방도 마찬가지라서, 호들갑인 복운의 행동거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냉큼 그쪽으로 몸을 돌려선 조용히 하라고 면박을 주려 했다. 하지만 복운은 아예 대청 위로 올라가 명월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갑자기 달려와 큰 목소리로 명월을 찾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지금 이 행동은 대체 무언가 싶었다.

복운이 미친 건가 싶었던 이방은 당황해선 복운을 보다가 명월의 안색을 살폈다. 복운을 내려다보는 명월의 얼굴에선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굳은 얼굴을 본 이방은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명월은 복운을 내려다봤다. 어디서부터 달려온 건지 얼굴은 열이 나 붉었고, 두 눈동자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별문제 없이 헤어진 놈이 왜 바로 나타나 이런 모습인가 싶었던 명월은, 솔직히 거북했다. 설마하니 헛소리를 할 셈은 아니겠지.

명월은 염려를 담아 입을 열었다.

“넌 매번 나에게 놀라움을 주는 놈이다. 그래, 이번엔 어떤 말로 날 놀라게 해 줄 셈이더냐. 제발 부탁이니까 너무 무리한 내용으로 날 황당하게 하지 마라. 내가 네놈 정신 차리게 만드는 등채를 깜박하고 방에 두고 왔다.”

네놈이 헛소리를 해도 그걸 지엄하게 꾸짖어 줄 도구가 없으니 적당한 선을 지키라는 경고였다. 그걸 모를 리가 없었던 복운의 얼굴은 더 심각하게 변했다.

“그러면 사또, 저에게 거짓 없는 진실만을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네놈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있더냐. 새삼스레 왜 이러는 거냐.”

“거짓말을 한 번도 안 하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그러지 마십시오. 언젠가 뺨에서 커다란 혹부리가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

움찔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실제로 반양에 온 이후 복운을 속이기 위해 아닌 말을 한 적이 있었던 명월은 괜한 헛기침을 했다.

“대체 어떤 여자를 품으신 겁니까.”

“쿨럭!”

민망함을 모면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하던 기침에 사레가 들릴 것 같다.

손으로 입을 막아도 계속해서 나오는 기침에 당황하는 동안 복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대체 어떤 여자가 명월에게 꼬리를 친 건가 싶었다. 이번 기회에 그 이름을 확실히 듣고야 말겠다면서 복운은 재차 입을 열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여자입니까? 설마하니 말씀을 못 하신다거나 하진 않으시겠지요? 사또께선 아무나 품으시면 안 됩니다. 혹시라도 그 여인에게 아이라도 생기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그 뒷감당을 대체 어찌하시려고―.”

“그, 그만! 그만 멈춰라!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하도 기가 막혀서 복운이 길게 말하는 동안 그걸 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점점 가관인지라 듣고 있기가 힘들었던 명월은 결국 멈추라 했다.

복운은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명월을 올려다봤다. 그는 이미 명월이 여자를 품고 있다고 확신하는 얼굴이었고, 복운이 이러니 이방도 혼란스러운 듯 둘을 번갈아 봤다. 멍하니 있다가 웅얼거렸다.

“사또? 지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방도 당황스럽겠지만, 그런 걸로 따지면 명월이 더했다.

명월은 복운을 내려다봤다.

이 충성스럽지만 말썽 많은 놈이 대체 어디서부터 오해를 한 건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최근 몇 번이나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면서 뭔가를 말하고픈 얼굴로 있었던 걸 떠올렸다. 오해한 기간이 꽤 길다는 건데―.

하지만 딱 잘라서 오해니 쓸데없는 소리를 하라 할 수도 없었다. 일단 자신이 백호와 잠자리를 함께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제야 명월은 감이 왔다. 백호가 뭔가 손을 써서 소리가 바깥에 울리지 않게 하는 것 같기는 하나, 그렇다고 완전히 숨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서 하고 난 후의 모습이라든가, 이상한 부분들을 감지한 복운이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걸 수도 있었다. 오늘 아침만 하더라도 이상한 걸음걸이를 들켜 버렸으니…….

거기까지 생각하자 명월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오른다.

정말 민망해서 죽을 것 같았다. 괜히 ‘백호, 이 망할 놈’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어금니를 사리문 명월은 일단 심호흡을 해서 속을 고르게 한 후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일단은―. 네가 뭔가를 오해하고 있다는 걸 짚고 넘어가야겠구나.”

“제가 오해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정황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사또께선 저 몰래 누군가를 방에 들이시지 않으셨습니까.”

확신하는 말투에 명월은 속으로 움찔했다.

설마하니 방 안에서 이상하게 굴러다니던 백호를 봐 버린 건가. 하지만 복운은 여인이라 했다. 그렇다는 건 백호를 보지 못했다는 것. 백호의 존재는 들키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긴장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동안 복운은 더 간절한 눈빛과 어조로 말했다.

“아무도 품으시면 안 됩니다. 아이가 생기면 큰일입니다. 제가 왜 이런 걱정을 하는지 아시잖습니까.”

그래. 복운이 왜 이러는지 싫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받아들여 줬지만, 다른 집안사람들은 그게 아니었다.

자신에게 흠이 생기면 그걸 빌미로 당장에라도 쫓아내려 들 거다.

정식으로 혼인을 한 것도 아닌데 여자를 끌어들인다는 소문이 퍼지면 이때다 싶어서 ‘피는 못 속이는 거지.’ 운운을 할 터였다. 그건 명월이 정말로 싫어하는 말이었다.

일단 마음을 차분히 한 명월은 자신의 청렴함을 증명하는 쪽에 집중하기로 했다.

“복운아, 잘 들어라. 난 정말로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 게 아니다.”

백호와 잤을 뿐이었다. 하늘에 맹세코 여자와 그걸 한 적이 없으니, 아이가 생길 일도 없었다.

“네가 뭔가를 오해한 거다. 실제로 지금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내가 여자를 방에 끌어들일 리가 없잖으냐. 내가 낮에 기방을 드나들긴 했어도, 거기서 여인의 속곳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음을, 다른 누구보다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거다. 이번 일은 네가 오해한 거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은 그쯤에서 접어라. 알았지?”

“……하지만 사또.”

“어허, 내가 그렇게 일렀는데도 아직도 헛소리를 할 셈이더냐.”

몇 번이고 말을 했는데도 들어먹지 않을 때에는 위협을 하는 수밖엔 없었다.

내가 네 주인인데, 지금 넌 내가 그만 말하라고 하는 데도 시끄럽게 굴 셈이더냐. 그런 눈빛으로 매섭게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복운은 입을 다물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명월을 보고 산 복운이었다. 이런 식으로 정색을 하면서 말하는 게 더 수상쩍었다.

분명 다른 뭔가가 있는데 그걸 숨기고자 하는 거다. 본인은 아니라 하지만, 숨겨 둔 여인이 있었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계진이 알면 어쩌려고 그런 민망한 짓을 한단 말인가. 물론 장성한 명월이 여인을 품는 게 잘못이라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방식이 잘못되었다. 여자를 방에 불러들여선 안 되는 거였다. 그렇다고 명월이 그 여자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도 안 될 일이지만―.

명월이 단호하게 구니 복운은 머릿속이 더 복잡해져서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입을 다물고 심각한 얼굴이 된 복운을 두고, 그가 당장 입을 다문 데에 안심한 명월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그런 거니까. 앞으로 그 일을 더는 언급하지 말거라. 그런 느낌으로 세게 어깨를 잡았다가 놓은 명월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이방을 보고는 움찔했다.

복운만큼은 아니라 할지라도, 뭔가 좀 의혹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이방을 두고 명월은 헛기침을 했다.

“자네는 왜 또 그런 식으로 날 보는 건가.”

“지금 복운이 이 녀석이 하는 말이…….”

“헛소리지. 혼자서 또 이상한 상상을 한 모양이야.”

딱 잘라서 말한 명월은 웃었다.

냉랭한 말에 복운이 고개를 든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의문과 염려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실상 조금 더 잡아떼고 싶었지만, 복운의 오해가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 일은 이쯤에서 그냥 덮어 버리고 싶은 게 명월의 솔직한 마음으로, 그가 더는 이 부분을 언급하지 말아 줬으면 싶었다.

그래서 복운에게 가서 일이나 하라는 말을 하려던 순간, 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렸다.

둥. 둥. 묵직하게 울리는 북소리를 들은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그건 이방이나 복운도 마찬가지였다.

북소리가 나는 쪽이라 하면 뻔했다. 그런데 왜 지금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안색을 굳힌 채로 있다가 급히 자리에 일어났다. 명월이 목화를 신고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이방과 복운이 그 뒤를 쫓는다.

억울한 일이 있을 경우엔 관아 바깥에 걸린 북을 치면 되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 있는 동안 이런 식으로 북이 울린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해결하는 게 우스울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사건이었는데, 이번도 그와 같은 경우일까. 누군가 장난으로 관아의 북을 칠 리는 없으니 북소리를 무시할 수만도 없었다.

점점 걸음이 빨라지는 명월의 뒤를 따르던 이방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또, 제가 먼저 나가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전처럼 어이없는 경우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으니 일단 자신이 나가서 확인을 해 보겠다는 거다. 그런 이방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나, 명월은 괜찮다는 짤막한 대답을 할 뿐이었다.

그렇게 내문을 빠져나갈 즈음 저 앞에서 포졸 하나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서둘러 달려오는 포졸을 본 명월과 이방이 잠시 멈추어 섰다.

한달음에 코앞으로 다가온 포졸이 양손을 앞으로 모으곤 고개를 숙이는 것에 맞춰서 이방이 물었다.

“지금 바깥이 웬 소란인 게냐.”

“그것이 말입니다.”

대답을 하는 포졸의 얼굴은 곤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그걸 보는 명월의 표정도 덩달아 굳어졌다.

외문은 코앞이니 여기에 굳이 멈추어 서서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면서 포졸을 지나쳐 갔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방은 당황해선 명월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 전에 복운이 옆을 지나쳐 간다.

명월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복운을 본 이방은 뭔가를 열심히 말하는 포졸을 조용히 시키곤 덩달아 명월을 따라갔다.

외문을 빠져나온 명월은 곧장 북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대체 누가 북을 친 거냐. 그런 생각으로 몸을 틀었던 명월은 막상 보이는 걸 확인하곤 움찔했다.

설마하니 저런 걸 보게 될 줄은 몰랐던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명월을 두고 북 앞에 모여 있던 이들이 황급히 명월에게로 달려왔다.

“사또! 제 아이 좀 확인해 주십시오! 귀신이 들러붙은 건 아니겠지요?!”

“사또, 제 아버지 좀 살펴봐 주십시오! 얼마 전부터 저희를 못 알아보시고 이상한 소리를 하십니다!”

“아이고, 사또. 제 남편의 다리 좀 고쳐 주십시오! 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앞으로 살날이 창창한데 이대로 앉은뱅이가 될 순 없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명월 앞으로 달려오는 이들은 어림잡아도 대여섯은 되었다.

북의 옆쪽,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있거나, 쪼그리고 앉아 있는 자들을 합하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거다.

기다렸다는 듯 한꺼번에 달려들자 포졸은 물론이거니와 복운도 당황해선 명월의 앞을 막아섰다.

포졸은 달려드는 이들의 앞을 막으면서 “가까이 오지 마! 떨어지게!”라고 소리쳤고, 복운은 명월의 어깨를 붙잡곤 어서 안으로 들어가라 외쳤다. 그리 말하는 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사람의 수는 적어도 절박한 이들을 밀어내기란 힘든 일이었다. 아우성을 치면서 고쳐 달라, 살려 달라는 이들을 살피던 명월의 미간으로 점점 더 짙은 주름이 잡힌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당장은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 *

얼굴과 온몸에 두드러기 같은 붉은 점이 오른 아기.

나이를 먹어서 헛소리를 늘어놓으면서 자식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늙은이.

산에 올라갔다가 언덕을 굴러서 다리가 부러진 사내. 결국에는 그 다리를 절제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며칠 동안 열이 떨어지지 않는 아들을 살려 달라 하는 노모.

그런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기저기서 사람이 모여 들여선 하나같이 ‘사또, 이것 좀 살펴봐 주십시오. 이 사람 좀 살려 주십시오.’라고 하는 실정이었다.

얼마 전 이방의 집 앞에서 백호가 쓸데없는 짓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반양 땅에 상주하고 있는 망할 귀물과 관련된 것들뿐이었다.

귀신을 때려잡는 것하고 사람의 병을 낫게 해 주는 것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는 법이었다.

“―내가 의원인 것도 아닌데 말이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명월을 두고, 옆에 선 이방 또한 심각한 얼굴이었다.

요즘 마을 안에 사또 명월에게 영험한 힘이 있어 귀신을 보고 잡는다는 말이 널리 퍼진 참이었다. 그걸 약간 착각한 이들이 집 안에서 병든 이들을 끌고 나온 거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한꺼번에 몰려드는 게 이상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속속들이 도착한 이들이 입을 모아서 명월을 찾고 북을 두드렸다.

본인들 입장에선 심각한 일이겠지만, 이쪽에서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이 결국엔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던 이방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찌해야 할까요.”

“몰려든 사람을 다시 돌아가라 한다 한들, 그 말을 듣진 않을 거다.”

앉아 있던 명월이 하는 말에 이방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포졸을 써서 쫓아내면 저들은 더 흥분하겠지. 원래 본인 일보단 아픈 가족들 일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니까.”

이번 말에도 이방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명월은 손을 들어 얼굴의 절반을 가린 채로 눈을 감았다.

명월이 보기에 지금 이건 이상한 현상이었다. 한 번에 사람이 몰려드는 것도, 다짜고짜 자신에게 고쳐 달라 하는 것도 말이다.

물론 말이라는 게 사람의 입과 입을 통해서 살이 붙고 점점 부풀려진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 소문 중에서 ‘사또 명월이 아픈 사람을 모두 고치는 명의다’, 같은 건 없을 터였다.

아닌가.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그저 단순히 아픈 가족을 위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온 이들에게 너무 매정한 게 아닐까.

명월은 손을 내리곤 고개를 들었다.

“이리로 온 자들을 쫓아낼 순 없다. 의원을 불러서 저들을 치료해 달라 해라.”

“사또. 아프면 의원을 찾아야 한다는 건 저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 자들이 이리로 몰려든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사또가 아닌 의원이 다가온다면 치료를 해 준다고 해도 그걸 거부하고, 오히려 더 예민한 반응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저들 사이를 돌면서 일일이 맥을 짚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내겐 손을 대는 것만으로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하고, 장님을 눈 뜨게 하는 그런 재주가 없네.”

“저들이라고 해서 그걸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찾아온 자들입니다. 평범한 방식으론 만족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방이 생각하기엔 저들을 그냥 돌려보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저들을 관아 안에서 치료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곳은 의원이 아니라 관아였다. 어느 기관이든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기 마련이었다. 그걸 착각해선 곤란하다는 게 이방의 생각이었다.

“다소의 시끄러움이 있다 하더라도 오늘 온 자들을 쫓아내는 게 맞습니다. 받아들이면 내일은 더 많은 이들이 몰려들게 될 것입니다. 칼에 손가락이 베여도 그게 귀신의 소행이라며 한달음에 달려올 겁니다. 여기 사람들은 그리할 만한 자들입니다.”

염려가 가득히 묻어나는 이방의 말에 명월의 표정이 굳어진다.

다른 곳에선 귀신이 이런저런 일을 했다며 말하고 다니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하지만 여긴 아니었다. 내색하지 않을 뿐이지 모두가 그걸 믿고 있었다.

저들의 곁에 있는 소중한 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귀신의 소행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하니만큼 돌려보낸다 해도 그 반응이 어떻게 되돌아올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이방은 명월의 안색을 살폈다. 일단 자신이 한 말이 있긴 했지만, 결국에 최종 결정을 내리는 건 명월이 될 테니 말이다.

긴장한 이방의 시선을 느낀 명월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엄지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그러곤 눈을 감는다.

어린 아기를 품에 안고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은 절박한 얼굴이었다.

딱 봤을 때 귀물이나 귀신의 소행은 아닌 것 같았다. 약재를 지어서 먹이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지 병세가 호전될 거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차분하게 설명을 한다 한들 저들이 그걸 제대로 들어 줄 것인가.

그때 바깥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건 또 뭔가 싶었던 명월은 고개를 들었고 이방이 나가 보겠다며 급히 객사의 문을 열었다. 명월도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탁자에 한 손을 올린 채로 일어선 명월은 허리에서부터 퍼지는 통증에 안색을 굳혔다. 일단 움직이는 걸 멈추고 가만히 있다가 주먹으로 허리 뒤를 두드려도 통증은 완화되지 않았다.

무거운 한숨을 내쉰 명월은 절뚝거리면서 밖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또 무얼까. 여기서 더 성가신 일이 생기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객사에서 나온 명월은 바로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객사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복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경황이 없어서 신경을 쓰지 못하긴 했지만, 내내 복운이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는 걸 떠올린 명월은 그냥 지나치려다가 옆으로 걸어갔다.

“이런 데서 처량맞게 뭘 하는 거냐. 바깥 상황이 뒤숭숭하니 안에 들어가 있어라. 계진이가 불안해하겠다.”

“……이런 식으로 뒤숭숭할 땐 사또 곁에 있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난 신경 쓰지 말고 계진에게나 가 있어라. 그쪽을 더 신경 써 줘라.”

평상시에는 모르겠지만, 간혹 바깥이 소란스럽거나 큰소리가 들리면 놀라곤 하는 계진이었다.

많이 나아졌어도 꾸준하게 보살펴 줄 필요가 있었다. 자신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건 복운에게 맡길 셈이었다.

다른 때라면 바로 알았다며 대답이라도 했을 법한 복운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왜 대답이 없는 건가 싶어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때 복운이 양손을 움켜쥐었다. 여전히 쪼그리고 앉은 채로 진지한 얼굴로 있던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인상을 쓴 얼굴엔 걱정과 염려가 가득했다.

“이렇게까지 소란스러워지면 주인어른의 귀에 말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

복운의 물음에 명월은 입을 다물었다.

뒷짐을 진 채로 복운을 내려다보던 명월은 이윽고 웃었다.

“어려서부터 그 집에서 늘 주변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살았지. 그건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어. 그게 얼마나 숨 막히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복운이 네가 아느냐.”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자신은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를 뿐이었다. 그로 인해서 누군가가 해를 입거나 한 적은 없었다.

물론 어렸을 적엔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아서 실수한 적이 있긴 했어도, 그게 위험하다는 걸 깨닫고 난 후에는 알아서 자제를 하곤 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죽이고 조심한다 해도, 주변 사람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자신은 여전히 이방인이고 위험한 존재였다. 조금만 튀는 행동을 하면 대번에 안색을 굳히며 ‘저 녀석은 왜 이러는 거야.’ 같은 시선을 보내온다.

매번 그런 식의 감시를 받다 보면 숨이 막힐 때가 있다. 물속에 머리를 깊숙이 밀어 넣은 채로, 숨도 못 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서서히 죽어 감을 느꼈다.

그래. 그간 자신은 죽어 가고 있었던 거다. 저들이 원하는 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결국에는 스스로가 버티지 못하고 어딘가 망가지거나 명줄이 끊어졌을 거다.

그렇다 해서 지금 이 순간 모든 걸 벗어 던지고 드러낼 셈은 아니었다. 그저 숨을 쉴 수 있을 정도로만 스스로를 드러내고 싶을 따름이었다.

오랫동안 곁에 있어 왔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다 생각했던 복운도 결국에는 저런 식으로 말하는구나.

남들처럼 아무것도 하지 말고 힘을 드러내지 말고 숨으라고 말이다.

그래야 모든 게 평화롭다는 걸까.

명월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숨이 막혀서 견딜 수가 없구나.”

“…….”

“정말로 숨이 막혀서 혼자서 멀리 떠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또.”

웅얼거린 복운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기 전에 명월은 재차 말했다.

“여기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아버님에게 솔직하게 써서 보내도 괜찮다. 네가 숨긴다고 한들, 누군가가 나에 대해서 말을 할지도 모르니, 그 전에 네가 상세하게 여기 상황과 나에 대해서 적어서 아버님께 알리도록 해라.”

말을 마친 명월은 입을 다물고 복운을 지나쳐 갔다.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명월을 보고도 복운은 그 뒤를 쫓아갈 수 없었다.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던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죄책감이 진득하니 묻어나는 모습으로 오랫동안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 * *

복운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쪽에서 있었던 일을 도성에 전달한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도 나름 많이 생각하고 고민한 후에 말을 옮길 테지만, 가끔은 그 사실이 싫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복운의 입장에서 자신이 지금 하는 일들이 위험해 보일 거다. 줄 위에 서선 곡예를 하는 것처럼 여겨지겠지.

하지만 이 땅은 그런 곳이었다. 드러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특수한 상황에서 대해 설명을 한다 해도 복운은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실상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딱, 하나뿐이었다.

백호의 얼굴을 떠올리며 명월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잘은 몰라도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을 거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생겨도 옆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왜 지금 이 순간 얼굴을 내밀지 않는 거냐면서 명월은 속으로 혀를 찼다.

곧 내문을 넘어서 외문 쪽으로 향하려는데 바로 앞에 이방이 서 있었다.

명월은 이방의 등 뒤로 가선 뭐하느냐고 물으려 했다. 그러다가 보이는 장면에 입을 다물곤, 외문 안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바깥에 몰려들어 북을 치는 사람들을 그냥 그곳에 둘 수가 없어 외문 안에 들이긴 했다. 그런데 모여 있는 몇몇 사람들 사이에 백호가 서 있었다.

승복을 입고는 있으나 언제나처럼 덥다면서 저고리를 벗어서 허리에 대충 묶은 백호는 한 팔에 어린 아기를 안아 들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아이의 이마나 코와 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고개를 숙인다. 입을 벌리고 뭐라고 속삭이자 품에 안겨서 꼼질거리던 아이가 작은 손을 위로 들었다가 내리더니 이윽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더없이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든 아이를 확인한 백호는 바로 옆에 서 있던 여인을 내려다봤다. 양손을 마주 잡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있던 여인은 백호가 건네는 아이를 받아 들었다.

“개똥아.” 하고 애달프게 아이를 부르는 여인을 두고 백호는 옆으로 건너갔다. 그러곤 늙은 노인과 함께 서 있는 사내 옆으로 갔다.

그는 손을 뻗어서 노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사내에게 몸을 의지한 채로 서 있던 노인이 천천히 눈을 뜬다.

조용히 백호를 바라보던 노인이 “산신령이시오?”라고 힘없이 중얼거리자 옆에 서 있던 아들이 다급히 물었다.

“아버님,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사내의 조급한 물음에 노인은 대답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건 앞에 서 있는 백호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백호는 노인의 머리에 손을 짚고 있었고, 얼마 안 있어 그 손을 뗐다. 바로 손을 턴 그는 혀를 차면서 아들을 노려봤다.

“이놈아. 네놈의 아비는 다 늙어서 정신이 나간 거다. 그걸 두고 귀신에 홀렸다 뭐다 하면서 찾아온 이유가 뭐냐? 정신이 성치 못한 부모 모시기가 그렇게나 싫었던 거냐?”

냉랭한 백호의 말에 아들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저희 아버지는 바로 어제만 하더라도 정신이 멀쩡하신―.”

“헛소리 하지 마라. 뭐가 어제부터야. 한 달 전부터 정신이 나간 영감이었는데. 이미 나간 정신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네놈이 잘 모시는 수밖에는 없어.”

“…….”

“앞으로는 정신 나간 부모 모시기 싫다고 숲에 끌고 가서 버리는 짓도 하지 마라. 이건 비단 네놈뿐만이 아니라, 다른 놈들에게도 하는 말이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산에 늙은 부모 좀 버리지 마. 하루 종일 자식 놈들 이름을 불러 대서 시끄럽다고 어느 분께서 난리다―.”

어느 분이라는 건 바로 백호 본인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게 자신이라고 발설할 순 없는 노릇이니 대충 얼버무리는 거였다.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도 입을 다물고 여전히 안색을 굳히는 자를 두고 백호는 혀를 찼다.

“정신이 나간 이유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을 놈이 귀신 운운하면서 이리로 데리고 오다니. 그렇게나 부모 모시기가 싫었던 거냐.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이놈아. 네놈이 아플 때에는 며칠 동안 품에 안고 한 번도 바닥에 내려놓지 않은 게 바로 네놈의 아비다―.”

거듭되는 백호의 타박에 사내의 얼굴이 점점 붉어진다. 하지만 본인도 지레 찔리는 바가 있던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런 사내를 두고 백호는 뒤로 넘어갔다. 거기에 있는 건 오른쪽 다리가 잘린 사내였다.

주저앉은 사내를 두고 여인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제 남편을 가리켰다.

“제 남편은―.”

“욕심을 부려 산을 죄 뒤집으면서 약초를 캐다가 뱀에 물린 게 아니냐. 그러게 왜 뱀 굴에 들어가서 죽기를 자초해? 그나마 뱀이 자비를 베풀어서 목숨이 아니라 다리 한쪽만 들고 간 거다. 그런 주제에 뭔 낯짝으로 여길 찾아와. 장난하냐? 반대편 다리도 잃고 싶은 게 아니라면 썩 꺼져 버려!”

백호의 호통에 여자는 바로 입을 다물었고, 사내도 뜨끔한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사내는 이미 다리를 잃은 참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아무 일도 못하고 배를 곯거나, 가족들에게 버림받을 일만 남은 셈이었다. 하나도 못 건지고 쫓겨나게 생겼다 싶었던 사내는 다급히 말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전 정말 억울합니다. 뱀 굴에 들어간 것도 제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

“예전에 그 뱀 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말해 줘야 그 입을 다물 거냐?”

심드렁하니 말한 백호는 눈을 내리떴다.

감정이 거의 담겨 있지 않은 눈동자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디찬 시선에 사내는 물론이거니와 옆에 선 여인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런 둘을 번갈아 보며 살피던 백호는 혀를 차면서 다른 쪽을 살폈다. 앞서 백호가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는 걸 보고 있었던 자들은 지레 놀라선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들에 백호의 표정이 더 험악해진다.

그는 바닥에 누워선 아픈 척을 하는 이들을 주욱 노려보며 소리쳤다.

“열이 나면 물을 마시고, 아프면 누워서 쉬어라! 귀신이 어떤 존재인지 제일 잘 아는 놈들이 뭐 하러 관아에 찾아와! 이런 식으로 꾀병을 부리면 나중에 진짜로 귀신이 나타날 거다! 해를 입고 싶지 않거든 썩 물러나라!”

백호의 호통에 누워 있던 몇몇이 놀라선 벌떡 일어났다. 개중 몇은 서둘러 외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가려 했고, 다리가 없는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굳은 표정의 그는 여자의 부축을 받고는 절뚝거리면서 물러섰다. 그렇게 서둘러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는 걸 보고 있노라니 이방에 허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처리가 확실한 분이시로군요.”

이방의 말을 들은 명월은 백호 쪽으로 걸어갔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백호가 저들에게 무슨 말을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막판에 호통치는 소리는 분명히 들었다.

저런 식으로 말하는데 여기서 버티고 있을 사람은 없을 거라면서 명월은 서둘러 흩어지는 이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인지라 그들을 유심히 살피는데 달리 수상쩍은 이들은 없었다.

백호 앞으로 걸어간 명월은 그를 올려다봤다. 팔짱을 낀 채로 있던 백호는 명월을 내려다봤다.

다른 이들을 대할 때에는 험악한 표정을 짓더니만 명월과 시선이 부딪치자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면서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간밤에 있었던 일 때문이겠지. 명월도 아직 몸이 아픈 상태였기 때문에 백호가 곱게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국엔 그의 도움을 받게 된 셈이었다.

백호가 나서지 않았다면 문제가 더 복잡하게 굴러갔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명월은 물었다.

“저들 중에서 귀물 때문에 문제가 생긴 자들은 없었던 거냐?”

“몇은 약간의 낌새가 느껴지긴 했지만, 전부 다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다. 그걸 두고 우는 소리를 내선 안 되는 거지.”

심드렁하다 할 수 있는 백호의 말에 명월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자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아기라서 그런지 다른 이들과 다르게 백호가 상당히 다정하게 대해 준 편이었다.

여인도 그걸 아는지 명월과 시선이 부딪치자 고개를 꾸벅이고는 급히 몸을 돌린다. 그대로 멀어지는 여자를 두고 명월은 중얼거렸다.

“쓸데없는 소문만 퍼진 모양이니 당분간 네가 관아 밖에 서서 이상한 자들이 오면 전부 다 쫓아내는 게 어떠냐.”

명월의 말에 백호의 눈썹이 올라간다.

지금 고작 그 정도의 일로 자신을 쓰겠다 하는 거냐면서 한마디 하려던 순간, 명월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농담이다.”

“…….”

웃는 명월의 얼굴을 본 백호의 굳은 표정이 풀린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중요한 부위를 세게 잡힌 앙금이 있었는데, 저 얼굴을 보자니 스르륵 풀린다.

왜 이렇게 쉬운 건지. 백호는 손을 들어선 제 머리를 긁적였다. “제길.” 하고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명월은 팔짱을 낀 채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곳이 정리가 되었다.

갑작스럽게 사람들이 몰려든 건 그들 사이에 도는 자신에 대한 이상한 소문 때문도 있겠지만, 그 외에도 다른 누군가 손을 쓴 게 아닐까 싶었다.

이런 식으로 번거롭게 해서 그동안 다른 수작을 부리려는 의도가 아닐까도 싶었고, 그런 짓을 할 만한 대상으로 떠오르는 건 화소군뿐이었다.

음흉한 자였다. 뭔가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니, 분명 다음에 이상한 짓을 벌이려 들 터였다.

그 전에 대비를 해야 할 것인가. 먼저 그놈을 쳐야만 하는 걸까. 그러기 위해선 증거가 필요했다. 놈을 옴짝달싹 할 수 없게끔 할 만한 수가, 말이다.

바로 그때 무언가가 명월의 얼굴 앞을 휙, 하고 지나갔다. 움찔한 명월이 놀라선 고개를 들었고, 명월 앞에 대고 손을 흔들던 백호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명월은 인상을 쓴 채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생각을 할 때마다 그걸 일일이 너에게 말해야 하는 거냐.”

“그러면 좋지. 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라서 지금 이 순간에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신경 쓰인단 말이야.”

백호의 말에 한숨을 쉰 명월은 오른쪽 발을 들었다. 그러곤 백호의 왼쪽 발등을 아프지 않게 가볍게 지르밟아 줬다.

갑작스러운 명월의 공격에 백호는 억―하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다급히 밟힌 다리를 뒤로 빼낸 그는 지금 대체 무슨 짓을 당한 건가 싶은 양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명월과 제 발을 번갈아 보던 백호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너 정말―.” 이라고 하는 순간, 명월이 몸을 돌렸다. 그대로 이방 쪽으로 걸어가자 백호가 뒤를 졸졸 따른다.

“모처럼 내가 나서서 성가신 일을 처리해 줬는데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왜 발을 밟는 거냐―.”

“네가 나한테 한 짓이 있는데 어떻게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겠냐.”

움찔한 백호는 이윽고 명월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건 다 네놈을 위해서 한 짓이지 않냐. 그런 식으로나마 내 체취를 묻혀 둬야 독각귀 놈이든 다른 잡것들이 들러붙지 않을 거 아니야―.”

“침과 땀도 약이 되는 너인데 왜 굳이 그런 방식으로 내 몸속에 토정을 하는 거냐는 말이야. 그저 단순히 뿌리기만 하는 거라면 몰라. 쓸데없을 정도로 커다란 걸로 아래를 쑤시니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하는 거냐?”

나직한 목소리로 빠르게 따져 묻는 말에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나 좋자고 하는 일이냐. 이건 전부 다―.”

“전부 다 네놈 좋자고 하는 일이잖나.”

갑자기 멈춰 선 명월이 뒤를 돌아보면서 딱 잘라 내뱉는 말에 백호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마찬가지로 입을 다문 명월은 눈에 힘을 주고 백호를 바라봤다.

몇 번이나 달라붙어서 허리를 흔들고 사정을 해대던 백호였다. 처음 몇 번은 그렇다 쳐도 세 번을 넘어가면 힘들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지금도 아래가 아팠다.

이게 다 과하게 들러붙어서 그런 거 아니냐며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팔짱을 끼곤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로 내가 정말-, 하고 웅얼거리나 싶던 백호는 앞에 서 있는 명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백호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워진다. 뒤쪽에 이방이 서 있는데 설마하니 이상한 짓을 할 셈인가 싶어 명월의 눈으로 힘이 들어간다. 안색을 굳히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그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너도 좋았잖아.”

귓가에 닿는 백호의 말에 명월의 눈으로 힘이 들어간다. 안색을 굳힌 명월은 찬찬히 눈동자를 들어선 백호를 올려다봤다.

그제야 고개를 뒤로 뗀 백호는 재차 느긋한 얼굴로 돌아갔다. 팔짱 낀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백호는 그걸 할 때 명월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힘들어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잠시일 뿐이지, 곧 목이 쉴 정도로 신음을 흘리면서 매달려 왔던 거다.

명월이 다리로 얼마나 세게 허리를 감싸던지, 거기가 끊어질 것 같았다는 말도 덧붙여야 하는 거냐면서 느긋하니 있는 동안 명월이 입이 열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할까. 백호는 기대를 담아서 명월을 주시했다.

“그래. 좋긴 했지.”

“…….”

쌈박하게 나오는 긍정에 백호의 표정이 흔들린다.

처음에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있다가 이윽고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러다 당혹스러운 듯 입을 살짝 벌리는 백호를 두고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좋긴 했어도 적당히 하란 말이야. 게다가 그런 말은 이런 데서 하지 마. 이 하반신에 절조라곤 조금도 없는 멍멍이야―!”

나직하면서도 빠르게 내뱉은 명월은 백호의 왼쪽 발등을 세게 밟았다. 아까는 가볍게 눌렀다가 뗀 거라 한다면 지금은 아니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게 괘씸한 만큼 다리로 더 힘이 들어간다. 처음에는 가만히 있던 백호가 이윽고 억―하는 신음을 흘리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는 걸 확인한 후, 명월은 쌩하니 몸을 돌렸다. 그러곤 이방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굴을 맞댄 채로 이야기를 나누나 싶더니 명월은 동헌으로 향하고, 백호는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선 끙끙거리고 있었다.

당혹스러운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던 이방은 결국 명월을 쫓아 그의 뒤를 따랐다.

동헌 마당을 가로지르던 명월은 옆으로 다가오는 이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바로 가서 반양 땅에 있는 가게 중에서 몇 개가 화소군의 것인지를 알아보게. 그리고 이병현 대감의 상태를 은밀하게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머리가 빠르게 굴러간다. 모든 게 막막하고 뭘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일단 건드리기부터 하는 게 최선일 수가 있었다.

지금 알아낼 수 있는 게 한정적일 때.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누군가에 의해서 주시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싶었을 때.

이런저런 걸 고려했을 때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이미 결정된 게 아닐까.

“호방은 더는 찾지 마라.”

흠칫하고 표정이 흔들린 이방이 명월을 바라봤다. 진심으로 그리 말하는 거냐며 묻는 눈빛을 두고 명월은 담담히 말했다.

“목숨이 붙어 있다면 알아서 돌아올 테고, 그게 아니면 죽은 거다.”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싶어서 계속 그 하나를 찾아낼 순 없었다.

예전, 계진이 있었을 때엔 분명히 살아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끝까지 포기를 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이번에 호방이 관련된 건 사람이었다. 사람은 귀신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서 여지를 남겨 두지 않았을 거다.

지금 이 순간 호방이 이미 죽어서 어느 차가운 땅 속에 묻혀 있다 해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 상황이었다.

굳은 명월의 얼굴을 본 이방은 양손을 움켜쥐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라는 말이 목구멍 바로 위까지 올라왔으나 결국 삼켜 버렸다.

* * *

반양의 안쪽, 깊숙한 숲 속에 화소군 행수의 저택이 있었다. 사방이 돌담으로 가로막힌 그곳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요새처럼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미 요새인 걸지도 모른다. 그곳은 화소군이 허락하지 않는 존재들은 출입할 수 없는 장소였던 것이다.

화소군은 그늘진 곳에 서 있었다. 뒷짐을 진 채로 서 있던 그는 고개를 들었고, 그런 그의 시야에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가 들어왔다.

깊고 그윽한 눈빛으로 새를 바라보던 그는 왼손을 위로 들었다. 화소군은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새에게서 시선 한 번 떼지 않았고, 계속해서 손을 든 채로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뭔가에 이끌리듯 새가 그의 손가락 위에 내려앉았다.

몇 번 날개를 펄럭이던 새가 얌전히 앉는 걸 보고 나서야 화소군은 손을 내렸다. 얼굴 앞에 새를 두고 그걸 유심히 살폈다.

화소군의 손가락에 내려앉은 새도 처음에는 얌전하게 있었다. 그러다가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면서 빠르게 눈을 깜박인다. 귀여운 모습에 화소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숙였다.

새는 점점 가까워지는 화소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고, 동시에 화소군이 입술을 열었다.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죽어라.”

이름을 부르듯 다정하게 속삭이는 말치고는 꽤나 험악한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새는 눈을 끔벅이며 화소군을 바라봤고, 이윽고 날개를 넓게 펼쳤다.

그대로 하늘로 날아가려 했지만, 비틀거리더니 곧 추락했다.

발치로 떨어진 새는 움찔거리면서 날개를 위로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으나 파르르 한 번 떨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숨이 끊어지는 걸 살피던 화소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발끝으로 새를 건드려 봐도 반응이 없었다. 마치 박제된 것처럼 굳어 버린 새를 확인한 화소군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탐탁지 않은 듯,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새를 바라보던 화소군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앞에 서 있는 검은 복면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쳐다봐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바로 고개를 숙이면서 반응을 취하는 사내를 두고도 화소군은 잠자코 서 있었다. 그러는 동안 사내가 화소군 앞으로 다가가 그의 귓가에 입술을 대곤 나직하게 속삭였다.

상대가 하는 말을 들은 화소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나 그 스님이라는 존재가 평범하지 않았던 거로군.”

처음 볼 때부터 뭔가 묘한 느낌이 들던 존재였다. 저 명월의 옆에 당연한 듯 붙어 있으니 평범한 인간이 아닐 것 같긴 했지만, 이토록 간단하게 일을 처리하다니.

너무 쉽게 해결해서 웃음만 나온다. 화소군은 새를 발로 차서 안쪽으로 밀어 버렸다.

“그래. 알았다. 그러면 다른 걸 시작해야겠군.”

화소군의 말을 들은 사내는 알아서 뒤로 물러섰다. 한걸음 떨어져서 선 그는 조심스레 화소군의 안색을 살폈다.

알았다고는 하나, 언제 갑자기 기분이 바뀌어서 뭐라 할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화소군의 입가엔 내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 역시나 쉽지가 않은 상대였어.”

중얼거리곤 사내의 앞을 지나쳐 갔다.

안으로 들어간 화소군은 한 손을 뒤쪽 허리에 댄 채로 느릿한 걸음을 옮겼다. 뭔가를 집중해서 생각하는 얼굴로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다. 그런 그가 향한 건 저택의 가장 깊숙하고 으슥한 곳이었다.

닫힌 문 앞에 선 그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직접 문을 열고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닫힌 문에서 손을 뗀 화소군은 아무것도 없는 방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검은 천을 치워 내더니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 벽 앞에 멈추어 서선 앞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벽에 닿는 순간, 소리 없이 벽이 밀려나고 검게 뚫린 통로가 드러났다. 그걸 본 화소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까지 온 이상 더는 물러날 수 없음이야.”

저 명월을 상대하는 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잘못 건드려선 안 된다고 본능이 말하고 있으나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순 없었다.

애초에 돌아갈 길 따위는 없는 거라며 화소군은 검은 통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손을 깨끗하게 씻은 계진은 제 양손을 얼굴 앞으로 들었다.

전에는 손톱 사이에 때도 끼고, 피부가 다 터서 엉망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다 해서 저 명월처럼 희고 깨끗한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깔끔해진 것에 만족스러워 하며 계진은 양손을 움켜쥐고 웃었다.

우물 앞에 둔 바가지를 엎어서 물을 비우고 고개를 들자 저기 앞에서 움직이는 하얀 덩어리가 보였다. 언뜻 보면 돼지 같은 저건 고양이였다.

복운이 기르는 고양이 나비의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계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비는 사람을 좋아하진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 달라붙으면 그걸 무척 성가셔 한다는 걸 알고는 있으나 보면 쫓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은 달려가서 엉덩이라도 토닥여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 계진은 나비를 쫓아서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였다.

그때 나비가 막 안쪽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서둘러 움직인 계진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었고, 푹신한 무언가에 얼굴이 부딪쳤다.

놀란 계진은 파하―하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들었고, 앞에 서 있는 사내를 확인하곤 눈을 끔벅거렸다.

백호는 멍한 얼굴인 계진을 내려다보면서 손가락으로 머리를 토닥였다.

“잠이 덜 깬 거냐. 아침부터 왜 그런 맹한 얼굴인 거냐.”

“……아니요. 나비를 봐서 뒤를 쫓아갔을 뿐인데.”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백호에게 부딪친 거였다.

순간 계진은 본인의 실수를 깨달았다.

앞에 서 있는 사내는 저 사또 명월의 손님이었다. 그런 그에게 부딪치고도 바로 사과를 하지 않은 채로 쳐다만 보고 있다니.

당황한 계진은 뒤로 한걸음 물러나 깊이 고개를 숙이려 했다. 그때 백호가 계진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잡고는 “꼬마.”라고 불렀다.

간결하지만 묘한 힘이 담겨 있는 부름에 놀란 계진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운동은 잘하고 있는 거냐.”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하고 있어요.”

스님과 그리하기로 약속했으니까 그걸 지키기 위해서라도 노력하는 중이었다. 계진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걸 확인한 백호의 미소가 한결 짙어진다.

그래, 라고 중얼거린 백호가 옆을 지나쳐 가고 계진은 뒤를 돌아봤다. 느릿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멋있다.

계진은 백호의 걸음걸이를 살피다가 그걸 따라하려 했고, 냥―하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비가 저기 담 위에 엎드려 있는 걸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나비야.”

너 언제 거기에 갔어.

계진은 황급히 나비에게로 달려갔다.

* * *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 명월은 지금 구군복이 아닌 녹빛 장삼을 입고 살짝 멋을 부린 갓을 쓰고 있었다. 갓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곱디 고왔지만, 눈빛만큼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책자를 살피다가 그리로 손을 뻗었다.

한 장 넘기자 그 위에 <남서쪽 포목점 한유량> 이라는 한자가 휘갈겨져 있었다. 그렇게 종이 하나에 가게 이름 하나, 그 가게의 주인 이름이 붙어서 적혀 있었다.

화소군과 관련된 장사치들이 많을 거라곤 예상은 했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손바닥만 하긴 해도 꽤나 두툼한 이 책자에 적혀 있는 모두가 화소군이 부리는 이들이라는 건가.

딱 봐도 반양의 모든 상인들 이름이 적혀 있을 만한 분량이었다.

하루 이틀로는 이들 모두를 알아볼 순 없었다. 따로 접근해서 화소군에게서 은밀하게 빼내 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일 테고―.

그래도 일단은 나가서 살펴보기라도 하자면서 명월은 책자를 품 안쪽에 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모처럼 외부로 나갈 마음을 먹은 명월이었다. 전에는 기방 호란에 가거나 산책의 의미로 시장을 돌거나 했을 따름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름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나가 보는 거였다.

그래서일까. 괜히 긴장이 된다면서 명월은 문을 열고 고개를 숙인 채로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개를 든 명월은 대청 가운데에 떡하니 누워 있는 백호를 발견하는 순간 눈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

마당 쪽에 복운이 냉랭한 얼굴로 백호를 노려보지만 않았다면, 당장 달려가서 옆구리를 차 주었을 거다.

여기가 네놈의 작업실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고 한마디 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명월은 백호의 옆으로 걸어가선 눈을 내리떴다.

양팔을 편하게 뻗은 백호는 눈을 딱 감고 있었다. 일자로 다물린 굳은 입매에서는 어젯밤, 방에 들이지 않고 그를 쫓아낸 데에 대한 불만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본인의 채취를 묻히고 있어야 한다 주장하는 백호였으나, 몸이 성치 않은 상태였던 명월은 그걸 거부했다.

이방과 늦은 시간까지 해야 할 일이 있기도 했기에 백호를 억지로 손님방으로 돌려보낸 거다.

그때 백호의 눈빛이 가관이었다. 이방이 없었다면 재차 전처럼 억지로 깔아 눕혔을지도 모르는 그런 눈빛이었다. 물론, 정말로 그리했다면 명월도 순순히 당하고만 있진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이건 억지로 쫓아낸 데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모습이었다. 복운만 있기에 망정이지 이방이 이걸 봤더라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만 하는 걸까.

백호가 이리 누워 있는 건데 왜 부끄러움은 자신이 느껴야 하는 거냐면서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마냥 이대로 둘 순 없다 싶어서 헛기침을 했다.

험험, 하고 들으라는 듯 내뱉는 기침에도 백호는 눈,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았다. 복운을 흘깃하고 본 명월은 기침을 하는 대신에 짧게 말했다.

“일어나라.”

지금이니까 좋게 말하는 거지, 더 버티면 이쪽도 참지만은 않을 거다.

노려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여전히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이를 악문 명월은 더는 참지 못하고 한쪽 다리를 들었다. 그대로 한 방 시원하게 걷어 차 줄 셈이었는데, 갑자기 복운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곤 백호가 누워 있는 곳 아래에 서선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시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 이런 남세스러운 모습으로 누워 있는 겁니까?! 여기가 스님의 안방이라도 되는 줄 아십니까?! 사또의 지인이라는 분이 어찌 이리도 무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스님께서 이리 행동하시면 모든 게 사또의 허물이 됨을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복운은 당장에라도 백호의 멱살을 잡아 그를 억지로 일으켜 세울 것 같은 기세였다.

험악한 표정으로 백호를 바라보는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명월은 결국 쪼그리고 앉아선 백호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그만하고 일어나라.”

“어서 일어나십시오!”

명월의 말을 따라하듯 목소리를 키우는 복운의 행동에 꾹 감겨져 있던 백호의 눈꺼풀이 파들거리고 떨린다. 그걸 본 명월은 아차 싶어서 바로 복운을 올려다봤다.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이만 가서 볼일을 봐라.”

“하지만, 사또―. 이 작자가―.”

“이만 가 보래도.”

하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은 복운이었지만, 명월의 태도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눈빛만 봐도 지금 그가 마지막 경고를 하고 있음을 모르진 않았다. 더 나서는 건 주제 넘는 짓이었다.

하지만 지금 백호가 하는 짓은 복운을 정말로 화가 나게 만들었다. 사람이 상식이 있다면 저래선 안 되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하며 움켜쥔 손에 더 힘을 준 복운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는 건가. 힘이 빠진 얼굴이 된 복운은 고개를 꾸벅이곤 명월 앞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복운이 가고 난 후, 명월은 주먹을 휘둘렀다.

때마침 백호가 눈을 떠서 명월의 손목을 움켜쥐지 않았다면 머리통을 한 대 때려 줄 수 있었을 텐데―.

백호에게 손목이 잡힌 명월은 이를 악문 채로 말했다.

“지금 대체 뭔 짓을 하는 거냐. 어서 일어나라.”

명월이 하는 말에도 백호는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그저 명월을 물끄러미 보나 싶더니 조금 전에 복운이 서 있던 곳을 살핀다. 그러곤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만약에 네가 그 녀석을 다른 곳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건방진 말을 지껄이는 턱을 박살냈을 거다.”

백호의 말에 명월은 기가 차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누가 누구 턱을 박살내겠다는 거냐.”

잘못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백호 그였다. 애초에 보란 듯이 이런 곳에 누워 있지 말았어야 할 게 아니던가. 만약, 백호가 정말로 복운에게 어떤 짓을 하려 했다면 그걸 보고만 있지 않았을 거다.

백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명월의 손을 놓은 백호는 흐트러진 머리를 긁적이면서 크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했다.

분명 어제 일찍 방으로 돌려보냈는데 왜 이렇게 앉아 입이 찢어져라 하품인지 모르겠다. 아침부터 대청에 누워 있었던 것도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명월의 얼굴 위로 의심스러운 기색이 퍼진다.

“어제 밤에 대체 무얼 했기에 그렇게나 피곤해 하는 거냐.”

“잠을 잤어도 기분이 언짢으니 푹 쉴 수가 없었던 것뿐이다.”

그러니까 어제 저를 쫓아낸 걸 탓하고 싶은 거다.

자기가 무슨 어린애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덩치는 산만 해서, 저런 말을 해 봤자 징그러울 따름이었다.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서 백호를 빤히 보던 명월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말자. 그리 생각한 명월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 것과 동시에 백호가 다시금 손목을 붙잡았다. 반사적으로 그 손을 뿌리치려 해 봤지만, 오히려 더 세게 붙잡는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명월의 손목을 세게 쥔 채로 백호는 그의 모습을 위, 아래로 살폈다. 그러곤 묘한 걸 본 듯 안색을 굳힌다.

“지금 그 꼴은 뭐냐. 그렇게 나갈 셈이냐.”

“내가 밖에 나간다고 한 적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

“내내 사또 차림만 하고 있다가 선비처럼 입어 놨는데, 그러면 밖으로 나가지, 안에서 굴러다닐 거라고 생각할 것 같으냐?”

백호의 말에 명월은 입을 다물곤 재차 잡힌 손을 흔들었다. 뿌리치려 할 셈이었는데 오히려 더 세게 붙잡는다. 아플 정도로 세게 쥐는 손아귀 힘에 자연스럽게 명월의 얼굴이 굳어진다.

품 안에 넣은 책자만큼의 사람들을 확인하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도 부족할 판인데 왜 이러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혀를 찼다.

“지금 너하고 여기서 장난칠 새가 없다. 지금 당장 이 손을 놓으―.”

“그 몰골로 밖에 나다닐 셈이냐고 묻잖아.”

“……이 모습이 뭐가 어떻다고 그러는 거야?”

나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신경을 쓴 차림새였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차림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왜 저런 식으로 말하는지 모르겠다.

그보다 백호는 남의 옷차림새를 두고 뭐라 할 입장이 못 되었다. 본인은 매번 산적처럼 입고 다니는 주제에. 지금도 승려인 척을 하고 있으면서 툭 하면 옷을 제멋대로 바꿔 입으면서 말이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냉큼 일어나서 내려가라 하려는 순간 백호가 지그시 바라봐 온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차분하게 응시해 오는 시선에 명월은 움찔했다. 평소에는 장난스럽게 행동해서 뭐가 진짜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백호였지만, 종종 이런 식으로 진지하게 굴 때가 있었다.

아니. 왜 또 저렇게 쳐다보는 건가 싶어 안색을 굳힌 채로 있는 명월을 두고 백호가 입을 열었다.

“지금 그 꼴로 밖으로 나가면 바로 알아보는 자들이 있을 거라는 말에 내 호랑이 가죽을 건다.”

“…….”

차라리 돈 같은 걸 걸었다면 명월도 지지 않고 받아쳐 줬을 터였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닌 호랑이 가죽이라니. 그건 백호에게 무척 중요한 게 아니던가.

그렇다 한들 여전히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상황이 내키지 않았던 명월은 여전히 굳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지금 이 차림새만 보면 네놈이 사또라는 걸 모두가 알아줬으면 하는 격이다. 그러니 당장 들어가서 갈아입고 와.”

안에 있는 다른 옷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것밖에 없다는 말을 하려는데 왜인지 백호의 말대로 따르는 게 싫었다.

자신이 보기에는 이런 차림새도 나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가겠다는 말을 한번 해 볼까 싶었을 때 백호가 내내 베고 누워 있던 보따리를 들어 명월에게 건넸다.

“저, 어서 가서 갈아입어라.”

명월은 백호가 건네는 걸 받아들곤 그걸 의아하다는 듯 살폈다.

그냥 백호의 베개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생각보다 묵직한 보따리를 든 채로 가만히 있는 명월이나, 백호는 그의 팔을 잡아선 뒤로 밀어댔다.

“어서 가서 갈아입고 와. 지금 이 꼴로는 절대로 안 돼.”

거듭되는 백호의 말에 명월은 엉거주춤하게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똑바로 선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어서 들어가라면서 손짓을 했다.

굳은 눈빛이라든가 진지한 그 표정 등을 볼 때, 지금 장난을 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명월은 보따리를 든 채로 본인의 차림새를 재차 확인했다. 평범한 선비인 척 꾸며서 입었는데 이게 그렇게 튀는 차림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구군복이 아닌 걸 입고 돌아다녀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자신의 생김새가 잘났기 때문이었다.

그 말이 바로 턱 아래까지 올라왔지만, 그냥 꿀꺽 삼켜 버렸다. 이런 말을 해 봤자 백호에게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없었다.

들고 있던 보따리를 만지작거리던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백호가 대체 무얼 준비하고 입으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안에 들어가서 확인은 해 보자면서 혀를 찼다.

“만약 이상한 게 있다면 널 가만두지 않을 테야.”

“지금 입고 있는 것보단 훨씬 나은 거니까, 괜한 걱정은 하지 말고 냉큼 들어가서 갈아입기나 해라.”

지금 입고 있는 게 어디가 어때서. 욱―하는 마음이 생긴 명월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한다.

하지만 곧 혀를 찬 명월은 보따리를 한 손에 든 채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분합문이 닫히는 걸 본 백호도 그 나름대로 성에 차지 않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여튼 애 먹이기는―.”

저렇게 입고 다녀서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라고 해대는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얼굴도 해사하니 예쁜 놈이 저런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도포를 입다니.

길가에 다니는 모두를 홀릴 작정이냐면서 백호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혀를 찼다.

저놈의 얼굴을 가리고 다니게 할 수도 없고, 어째야 하는 건가 싶었던 그는 다리를 주욱 뻗은 채로 인상을 썼다.

그때 냥―하는 소리가 들려서 시선을 옮기자 대청 아래쪽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하얀 고양이가 보였다.

원래 체구가 있긴 했지만, 여기에 와서 살이 찐 건지 어쩐지 몸이 두루뭉술해 보인다.

백호는 조용히 제 옆을 두드렸고, 나비는 가볍게 대청으로 올라와선 그에게 살랑살랑 걸어왔다. 그러곤 백호 옆에 육중한 제 엉덩이를 내리고 앞발을 혀로 핥는다. 그걸 본 백호는 기가 차서 중얼거렸다.

“뭐하는 거야. 지금 네가 진짜 고양이라도 되는 줄 착각이라도 하는 거냐.”

백호의 말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분합문이 활짝 열리면서 거기서 명월이 얼굴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지금 이걸 나더러 입으라는 거냐?!”

그리 물으면서 앞으로 내민 건 호피 무늬가 들어간 가죽 조끼였다.

나름 신경 써서 준비한 거였다. 그걸 가지고 뭐 저렇게 불만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한 양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명월과 달리, 백호는 평온한 모습으로 어, 하고 대답했다.

“그걸로 입어. 들키지 않는 걸로는 백배, 천배 나을 거다.”

명월이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옷이었으나, 백호는 아니었다.

본인이 건넨 옷에 대해선 아무 문제가 없다는 양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에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굳은 눈빛으로 백호를 보고 나비를 본 후에, 마지막으로 제 손에 들린 조끼를 확인했다.

“두고 보자.”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은 명월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탁, 하고 닫히는 문을 확인한 백호는 코웃음을 쳤다.

“곧 고맙습니다, 하고 절을 하게 될 거다.”

이래서 세상 물정 모르는 것들은 문제라면서 백호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선 재차 나비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여전히 앞발을 핥는 나비의 느긋한 모습을 살피던 백호의 손이 내려간다.

덥석, 하고 나비의 머리를 붙잡은 백호는 그 얼굴을 위로 들게 해서는 눈동자를 주시했다.

갑작스럽게 백호가 머리를 붙잡았지만, 나비는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태연한 모습으로 여전히 제 앞발을 핥으면서 백호를 빤히 올려다본다.

그 눈동자가 금색이었다. 고양이 특유의 묘한 매력을 풍기는 깊은 눈동자를 살피던 백호는 중얼거렸다.

“아직 발견하진 못한 거로군.”

그 순간 나비가 앞발을 내리고 재차 냥―하고 소리 내 울었다.

그것에 백호는 인상을 쓴 채로 혀를 찼다.

“장난치지 마라. 그럴 때가 아니다.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독각귀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고개를 숙인 백호는 한 단계 낮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독각귀를 찾으면 무조건 나를 불러야 한다. 어쭙잖게 덤볐다간 네놈은 그 자리에서 끝이다. 이미 꼽추도 당했단 말이야.”

입을 다문 백호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비를 바라봤다. 약간은 겁을 먹게 하려고 일부러 무섭게 구는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 백호가 그런 표정을 짓나 마나, 본인은 별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양 평온한 얼굴로 있던 나비는 크게 입을 벌렸다.

냥-.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혀를 찬 백호는 나비의 머리를 세게 움켜쥔 후에 손을 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