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23/32)

2장

누렇게 뜬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두툼한 허리띠를 착용한 후, 그 위로는 호피 무늬의 조끼를 입었다. 이마에는 굵고 검은 띠를 두르고, 머리는 상투를 틀지 않고 자연스럽게 풀어 내렸다. 그런데 길이가 꽤 되어서 꽁지머리로 한 번 묶어야만 했다.

거기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망태기를 한쪽 어깨에 걸치고 양 손바닥은 엉성하게 찢은 천으로 돌돌 감았다.

옷으로만 보면 백호가 평소에 입던 것과 별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건 난생처음 입어 보는 명월은 기분이 좋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표정이 굳어진 채였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경직된 명월을 두고 백호는 그 앞에 서 있었다.

턱에 손가락 하나를 댄 채로 진지하게 명월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는 흐음―하는 소리를 냈다.

“뭔가 느낌이 좀 다른데?”

내가 입을 때 하고는 느낌이 많이 다른데? 명월의 몸에 맞추기 위해서 작은 걸 준비해서 그런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백호는 명월이 입고 있는 옷의 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꼼꼼하게 바지와 저고리를 바로 잡아 주고 명월의 손바닥을 감고 있는 천의 자투리 부분도 안쪽으로 잘 밀어 넣는다. 그러고는 조끼의 허리띠를 바로 매서 헐렁하게 남는 부분이 없도록 하고, 명월이 오른쪽에 걸치고 있던 망태기를 안쪽으로 당겼다.

“이렇게 몸에 붙도록 잘 들어라.”

딴에는 옷이 잘 어울리는지를 살피는 백호였으나, 명월은 여전히 뚱한 얼굴이었다.

왜 지금 자신이 이런 걸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불만이 숨겨지지 않고 드러난다. 뚱해져서는 쉽사리 풀리지 않는 명월의 얼굴에 결국 백호는 그쪽으로 시선을 줄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하나로 묶고, 이마에는 검은 띠를 두른 명월이었다. 보통 심마니들이 하는 차림인데도 느낌이 달랐다. 왜 그럴까. 피부가 하얗기 때문일까.

진지하게 명월을 살피던 백호는 바로 그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명월의 머리카락을 잡아서 몇 올을 귀 옆으로 흘러내리게 했다.

기껏 머리를 하나로 잘 묶었던 명월은 그걸 엉망으로 만드는 백호의 행동에 질색을 하며 고개를 옆으로 피했다.

“뭐 하는 거야. 왜 머리를 엉망으로 만드는 건데?”

“이런 차림새를 한 주제에 지나치게 말끔한 얼굴이잖아. 이런 식으로나마 얼굴을 좀 가려야지.”

백호는 명월이 피하든지 말든지 꿋꿋하게 제 할 일을 할 따름이었다.

계속해서 머리카락을 잡아서 옆으로 흘러내리게 한다. 반듯하게 잘 묶인 머리는 금방 엉망이 되었고, 참다못한 명월이 재차 한마디 했다.

“이건 완전히 너랑 똑같은 차림새잖아―!”

“그래. 그러니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거란 말이야. 어디를 가나 사람은 마찬가지라서 저보다 못한 차림새를 입은 자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지.”

심드렁하게 나오는 백호의 말에 명월은 움찔했다.

잠잠해진 명월을 두고 너무 엉망이 된 머리를 바로잡아 주면서 백호는 말을 이었다.

“아까처럼 좋은 차림새로 다니면 사람들이 대접은 해 주겠지만, 정체를 들키는 건 금방이겠지. 뭔가를 알아내고 싶어서 바깥으로 나가는 건데, 겉모습 때문에 금방 정체가 탄로 나서 원하는 걸 아무것도 얻어 내지 못한다면 그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겠냐. 이렇게―.”

백호는 명월에게서 손을 떼곤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어디를 가서도 볼 수 있는 심마니라면 만취해서 길바닥에 누워 있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다.”

그리 말한 백호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야 좀 괜찮아진 건지 만족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백호를 두고 명월은 눈을 내리떴다.

지금 신고 있는 버선도 다른 것으로 갈아 신은 것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백호가 준 걸로 갈아입었다.

입는 동안에는 기분이 좋지 않았고, 다 입고 나서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렇군. 내가 평소에 입던 꼴로 나간다면 금방 정체가 탄로 난다는 건가.

딴에는 얼굴을 감추고 은밀하게만 움직이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신의 생각이 안일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싶었던 명월의 얼굴에서 자연스럽게 표정이 사라진다.

백호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일단 나가 봐야 알 일이었지만, 지금 이것도 그에게 도움을 받은 상항이었다.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겠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모처럼 신경 써서 입은 옷을 두고 백호가 빈정거렸기 때문이겠지. 지금까지 어디 가서 옷 못 입는다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건만―.

상당히 자존심이 상한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과연 제대로 된 일일까. 백호와 다니다보니 덩달아서 유치해지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너무 유치한 짓은 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다독인 후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명월은 백호를 올려다보곤 ‘모처럼 좋은 생각을 했다. 이 옷은 잘 입을게.’ 정도로만 말해 주려 했다. 그런데 턱에 손가락을 댄 백호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이었다.

왜 또 저런 얼굴로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그가 입으라는 대로 입었고, 뭔가 이상한 점도 없는 것 같은데―.

본인의 상태를 확인하곤 다시 고개를 들어 왜 그런 식으로 보는 거냐고 물으려던 찰나 백호의 손가락이 얼굴에 닿는다. 그러곤 오른쪽 뺨을 만지작거리는데 그게 간지러워도 명월은 참고 있었다.

백호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짓는 데에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던 거다.

그러는 동안에도 백호는 명월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분명히 자신이 즐겨 입던 옷을 챙겨서 입혔다. 이렇게 입혀 놓으면 다른 심마니들과 비슷한 분위기가 풍겨야 옳은데, 명월은 그런 게 없었다. 이런 옷을 입혀도,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어도 여전히―.

“예쁘잖아.”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던 백호가 고개를 숙였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둘의 입술이 닿는다.

“…….”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백호의 입술에 명월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내내 심각한 척 이쪽을 보던 백호였기에 또 무슨 말을 할 셈인가 싶어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왜 갑자기 뽀뽀를 하는 거지. 그런 의문을 담아 바라보는 동안 백호는 입을 꾸욱 다물었다.

여전히 진지한 얼굴이지만, 눈빛이 이상했다. 뭔가가 불끈하고 치밀어 오르는 양, 뜨겁게 변하는 백호의 눈빛을 읽은 명월은 소스라치게 놀라선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기다려! 멈춰!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갑자기 어깨가 잡혀서 앞으로 끌어당겨진 명월의 입술을 백호가 덮는다. 흡입하듯 강하게 빨아들이자 명월은 다급히 백호의 팔을 잡아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자 아예 명월의 몸을 끌어당기면서 고개의 각도를 달리한다.

입술을 앙다문 채로 버티는 명월이었지만, 백호는 그러지 말라는 양 혀로 다물어진 입술을 핥는다. 정성들여 입술을 핥곤 강하게 빨아들이면서 쪽쪽거린다.

명월은 아예 백호의 넓은 등짝과 팔을 두드려댔다. 퍽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때려도 백호는 떨어지려 들지 않았다.

정 안 되면 걷어차야겠다면서 몇 번 다리 드는 걸 시도하는 와중에 바깥에서 이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또, 아직 안에 계십니까.”

누군가 나타나자 백호의 팔로 자연스럽게 힘이 빠져나간다. 느슨해진 틈을 타 명월은 있는 힘껏 백호를 밀어냈다.

그러자 내내 닿아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명월은 손바닥으로 입술을 훔쳐 냈다. 질척하게 젖은 무언가가 손바닥에 묻어나는 순간 명월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진다.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지만, 지금 바깥에서 기다리는 이방이 있었다.

분하고 억울하고 화도 났던 명월은 열심히 손바닥으로 입술을 훔쳐 내면서 백호를 노려봤다.

망할 놈의 개자식. 그런 의미를 담아 노려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옆으로 시선을 돌린 채로 어깨를 으쓱인다.

미안하다거나 잘못했다고 말하는 얼굴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네. 그리 말하는 듯한 얼굴을 보는 순간 명월의 주먹으로 힘이 들어간다.

그때 재차 이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또, 안에 계십니까.”

대답을 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매섭게 백호를 노려본 명월은 그의 옆을 지나칠 때 세게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어 올렸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헛숨을 삼킨 백호가 양팔로 배를 감싸며 허리를 반으로 접는다.

세게 휘두르긴 했지만, 백호가 저 정도로 굴 정도로 아프진 않을 터였다. 어디서 엄살을 부리는지 모르겠다면서 혀를 찬 명월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마당 앞에 서 있던 이방은 불안한 얼굴로 있다가 나오는 명월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생처음 보는 낯선 무언가를 대하듯, 놀라운 얼굴로 바라보는 이방을 보는 순간 명월은 아차 싶었다.

지금 백호가 주는 옷을 입어서 이상할 터인데―.

그 순간 이방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변장을 잘하셨습니다.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고개를 숙이고 다니신다면 아무도 사또이신 걸 모를 겁니다.”

“……그런가?”

대답을 하는 명월의 목소리는 떨떠름했다.

굳은 시선을 보내오는 명월을 두고 이방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상시처럼 다니시면 바로 들통이 나실 게 분명하기 때문에 걱정을 했는데, 알아서 변장을 잘하셨습니다.”

환한 얼굴로 웃는 이방을 보는 순간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그 말은 즉, 예전처럼 선비 차림으로 다니면 모두에게 들통 났을 거라는 건가. 그래서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옷을 입고 있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린다 하는 거고.

내심 이방의 반응이 좋지 않으면 벗고 원래의 것으로 갈아입을 생각이었던 명월은 속이 탐탁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명월이나, 이방은 안심한 얼굴로 웃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을 걱정하기 때문에 저런 식의 반응을 보이는 거라는 걸 알기에 명월도 뭐라 할 수 없었다.

모든 걸 다 포기한 명월은 대청 앞으로 걸어가 그 끝에 앉았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목화 쪽으로 손이 가려는데 바로 옆으로 짚신 한 짝이 떨어진다.

발 옆으로 떨어져 굴러다니는 짚신을 보고 움찔한 명월과 이방이 고개를 들자, 어느새 나온 백호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런 꼴로 좋은 신을 신어서 뭘 하려고. 짚신이 딱이다.”

그리 말하는 백호는 어느새 원래의 옷차림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짧은 순간 승복을 벗고 산적 같은 저런 차림새로 갈아입었을 리는 만무했다.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순식간에 옷차림을 달리할 수 있는 건가. 재주가 신통하다면서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인상 쓴 채로 올려다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턱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어서 그거 신어. 라는 의미였다.

생각해 보면 이런 차림새로 목화를 신는 게 우습게 보이겠지. 하지만 백호의 뜻대로 다 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그랬다.

머뭇거리던 명월은 곧 한숨을 쉬면서 짚신 쪽으로 손을 옮겼다. 그렇게 명월이 짚신을 신는 걸 물끄러미 보고만 있던 이방이 고개를 들어 백호를 올려다봤다.

“스님께서 사또와 함께 움직이시는 겁니까?”

“그래.”

“그럴 리가 있나―.”

묻는 말에 대한 대답은 동시에 나왔다.

긍정하는 건 백호, 고개를 들면서 정색하며 부정하는 건 명월이었다.

극명하게 다른 둘의 반응에 이방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명월과 백호를 번갈아보던 이방은 이윽고 양손을 마주 잡았다.

“화소군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이럴 땐 저렇게 하라는 식으로 행동 지침이라는 걸 여기저기에 뿌리지 않았겠습니까. 가능한 바깥에서 저들이 뭘 하는지 살펴보시는 정도로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

“저들도 이런 옷을 입은 사또를 보고 바로 알아보진 못하겠지만, 그만큼 사또가 아닐 거라 생각하고 함부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고, 만약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바로 관아로 연락을 주십시오.”

분명히 백호와는 함께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말했는데 그걸 자연스럽게 넘겨 버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를 모르겠다면서 안색을 굳힌 명월은 짚신을 마저 신었다.

여기서 재차 ‘백호하고는 함께 다니지 않을 거다.’라는 말을 하면 이쪽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그냥 백호는 없는 것처럼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서둘렀다. 그런데 짚신이라는 게 형태가 바로 잡힌 게 아닌지라 생각보다 신기가 어려웠다.

양손으로 어찌어찌해서 짚신을 신는 것에 성공하고 몸을 일으킨 명월의 안색이 굳는다. 반사적으로 눈을 내리뜨는 걸 본 이방이 조심스레 물었다.

“발이 불편하십니까?”

확실히 목화나 가죽신하고는 다른 느낌이었다. 딱딱하고 세게 발바닥을 죄여서 살이 눌리는 느낌이 이상했다.

하지만 은밀하게 움직이려는 마당에 짚신 하나를 두고 투정을 부릴 순 없었다. 때문에 아니라면서 고개를 저은 명월은 마당 쪽으로 내려왔다.

“나가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려는 건 아니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네. 한번 둘러보면서 저들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만 볼 셈이야. 그리고 최근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고 싶고 말이지. 늦게 돌아오는 건 아니니 염려 말게.”

그리 말하는 명월은 똑 부러지는 얼굴이었다. 그것만 보면 안심하고 모든 걸 명월에게 맡길 수 있을 것 같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그리 쉽게 풀리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생기려는 사건은 막을 수 없는 법이었다. 물론,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 편이 좋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이방은 명월 옆에 서 있는 백호를 올려다봤다.

“사또 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직접 해결하려 하지 마시고 관아로 연락을 주십시오.”

“둘이서 행동할 건데 일이 생길 때 어찌 관아로 바로 연락을 줄 수 있겠나.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게.”

백호의 심드렁한 말에 이방은 입을 다물었다. 듣고 보니 그렇다. 말로만 걱정을 하고 구체적으로 어찌하면 될 지에 대한 대비책에 대해선 일러 주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민망했다.

그때 명월이 입을 열었다.

“이 녀석하고는 같이 다니지 않을 거라니까―!”

“…….”

그 말에 이방이 고개를 들어 명월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바깥은 위험합니다. 그런데 어찌 혼자 다니실 셈이십니까. 같이 다니는 게 신경 쓰인다 하더라도 함께 움직이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괜한 고집은 부리지 마십시오.

물론 이방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건 아니었지만, 바라보는 눈빛에서 그런 생각들이 읽혔다.

오늘 자신이 할 일들이 그렇게나 위험한 건 아니었다. 지나친 걱정은 하지 말라 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명월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히 손을 들고는 다녀오겠다는 표시를 한 후에 바로 몸을 돌렸다.

뒷문으로 조용히 빠져나갈 셈인지 뒷마당 쪽으로 가 버리는 명월을 두고 이방은 백호를 올려다봤다.

어서 쫓아가 보십시오. 그런 의미가 담긴 시선을 읽은 백호는 피식, 하고 웃었다.

설렁거리는 걸음으로 명월을 쫓아가는 백호를 본 이방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냈다.

* * *ㅅ ㅁㅇㄹ

뒷문 쪽으로 걸어가면서도 명월의 머릿속은 바깥에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무 가게나 갈 순 없었다. 화소군이 지닌 가게의 수는 많지만, 그 중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은 분명히 있을 터였다.

일반적으로 장사가 잘되고 규모가 큰 쪽이 입김이 세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겠지만 반대일 수도 있음이었다. 의외로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곳이 중요한 쪽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화소군이 그 수많은 가게를 신경 쓰기나 할까. 놈이 신경 쓰는 건 사람을 홀리는 귀물이 뿌리는 부가적인 요소들이 아닐까.

그때 놈은 귀물이 나타나는 장소엔 쉽게 얻을 수 없는 귀한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다 했다. 놈이 집중하는 건 그쪽이고, 사람들이 장사를 해서 벌어들이는 것들은 소소한 용돈 정도로 여기는 게 아닐까.

“사또, 어디를 가십니까?”

집중해서 생각을 하던 명월은 얼빠진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뒤쪽으로 넘어가는 문 앞에 서 있는 복운과 계진을 발견했다. 뭔가를 만들 셈이었는지, 작은 나무통을 들고 서 있는 복운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건 계진도 마찬가지였다.

입술에 손가락을 댄 채로 명월을 올려다보는 계진의 눈동자에 서린 낯섦을 읽은 명월은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이상하지?”

하지만 변장을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을 설명하려는데 복운이 바로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설마하니 지금 이 모습으로 바깥에 나가실 생각이십니까? 바깥에서 대체 무얼 하시려고요?”

“잠시 마을을 돌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만 구경하고 올 셈이다.”

“지금 바깥이 얼마나 뒤숭숭한지 아시면서 이러십니까? 기다려 보십시오. 저도 바로 준비를 하고 나올 테니―.”

“나 혼자 다녀올 테니, 넌 그냥 관아 안에 있도록 해라.”

들고 있던 걸 계진에게 건네려던 복운은 주춤거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든 복운의 얼굴에 서린 진한 실망을 읽은 명월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결코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가벼운 산책 같은 거다. 그러니―.”

“사또께선 늘 그렇게 말씀을 하시지만, 매번 사고가 생기지 않습니까.”

가라앉은 복운의 말에 명월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말이 어디에 있느냐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이 묘했다.

지금은 그저 복운이 저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구나 싶었다.

명월이 주춤한 게 느껴진 걸까. 지금이 기회라는 양 복운이 옆으로 움직였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저도 바로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올 테니…….”

“그럴 필요 없어. 사또는 나와 함께 나갔다 올 테니까.”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인상을 쓴 채로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 서 있는 백호가 보였다.

설렁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온 백호는 명월의 옆에 서선 너무도 당당하게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사또는 나와 함께 다니실 거다. 그러니 굳이 너까지 따라올 필요는 없어.”

“…….”

갑자기 나타난 백호의 행동과 말에 복운의 표정이 굳어진다. 다른 사람이라면 ‘웃기지 마쇼!’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백호는 그게 아니었다.

복운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해선 명월의 얼굴을 살폈다. 저자가 하는 말이 참입니까. 묻는 시선에 명월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냥 바깥에 나가서 알아볼 게 있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왜 나가려는 길목마다 성가시게 하는 이들이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더는 누군가에게 미주알고주알 알려 주고 싶지가 않았던 명월은 혀를 차면서 백호의 팔을 옆으로 치워 냈다.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가 버리는 모습에 백호가 바로 뒤를 따르면서 넉살 좋게 말했다.

“같이 갑시다. 사또.”

* * *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그와 관련된 소문 같은 것들도 많이 퍼졌을 거다. 그럴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행동이나 움직임이 위축되기 마련이었다.

여기서도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의외로 평상시와 같았다. 오히려 전보다 훨씬 더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왜 그러나 싶어서 일단은 탐색의 의미로 조용히 걸음을 옮기려는데 안쪽에서 큰 소리가 들린다.

여기가 내 자리다, 아니다. 내가 먼저 왔다. 그런 식으로 소란스러운 걸 들으며 명월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실랑이가 붙은 이들을 자세히 살피다가 곧 오늘이 큰 장이 열리는 날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보통 땐 각자 맡은 자리가 있으니 그곳에 짐을 풀면 되겠지만, 오늘은 큰 장이 열리는 것이니만큼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좋은 자리를 맡으려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커지는 거다.

처음에는 한 곳에서만 들리던 큰소리가 다른 쪽에서도 들린다. 몸싸움도 심상치 않게 벌어지는 것 같았다.

보다 장사를 잘하기 위해서 자리싸움을 하는 거였다. 하지만 몸싸움이 있다 해서 거기서 일이 더 커지진 않았다. 적당히 중재를 하거나 목소리가 작은 쪽이 알아서 다른 쪽으로 피해 주었다.

그렇게 정리가 되면 그쪽은 조용해지는 거다. 느껴지는 삶의 치열함에 기가 눌린다.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던 명월은 팔을 툭, 치는 느낌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대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오던 여인이 인상을 팍 쓴 채로 명월을 노려봤다.

“아니. 이 사람이 가뜩이나 길이 좁아서 죽겠는데 왜 여기에 서 있고 난리야.”

매서운 눈빛과 험악한 말투에 놀란 명월은 주춤거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쪽에 서 있던 사내와 부딪쳤다. 짐을 내리고 팔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던 사내는 누가 인상을 쓰며 돌아봤다.

“뭐여? 지금 시비 걸려는 거야?”

저를 건드리는 게 자리를 빼앗기 위함이라 생각한 건지 표정이 말도 못 붙일 만큼 서늘했다.

당황한 명월은 그런 게 아니라 말하려 했지만, 그때 커다란 수레를 밀고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물건이 그득히 쌓인 수레를 앞세워서 빠르게 움직이던 사내는 명월을 보곤 “비켜!”라고 한마디 했다.

가만히 서 있다가 여기저기서 치이는 입장이 되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다른 때에는 혼자 서 있어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 북적거려도 그쪽에서 알아서 이쪽을 피해 가곤 했는데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싶었다.

멍하니 있다가 주춤거리면서 물러선 명월을 두고 사내가 혀를 찼다.

“모자란 놈 같으니라고.”

“…….”

태어나 난생처음 듣게 된 말에 명월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모자란 놈이라니. 지금 저게 자신을 두고 한 말인가. 진짜로?

어안이 벙벙해져 있으면서도 본능적으로 길목에 서 있으면 위험하다는 걸 감지한 명월은 알아서 구석으로 가서 경직된 채로 서 있었다.

입을 다문 채로 뻣뻣하게 서선 주변을 살피는 명월의 안색은 좋지가 않았다. 난생처음 당한 일과 들은 말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왜 이렇게 된 건가. 변화를 준 거라곤 옷차림밖에 없었다. 전에는 길을 다니면 모두가 자신을 보면서 감탄을 하거나 알아서 앞을 피해 가곤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심마니 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다 해서 이렇게나 사람을 막 대하다니. 옷만 달리 입은 거고, 얼굴은 그대로였다. 자세히 보면 자신이 번듯하게 잘생겼다는 걸 알 텐데―.

거기까지 생각하던 명월은 문득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졌다.

다른 이들 몰래 움직이려 하는 주제에 잘난 얼굴 운운을 하다니.

그제야 명월은 백호나 이방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딱 봐도 잘나게 잘 차려입은 주제에, 그런 꼴로는 은밀하게 움직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겠지.

이방 같은 경우는 생각은 그리해도 그걸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던 거고, 백호는 그냥 솔직하게 말한 거였다.

명월은 오른손을 들었다. 검은 장갑 위쪽으로는 하얀 붕대가 칭칭 동여매져 있었다. 양손이 그 모양이니 언뜻 보면 다친 것 같기도 했다. 거기다 머리는 산발에 대충 묶고 다니는 꼴이었다.

옷차림이 이렇고, 머리 꼴도 엉망이니, 누가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보겠는가.

사람 많은 곳에서 어리바리하게 서 있다간 계속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함부로 행동을 취하겠지만, 그만큼 자신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 거였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함부로 대한다는 걸 서운하게 생각할 게 아니라,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자면서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명월은 어느덧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진 걸 확인하곤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끼어들어 갔다.

사람들 사이에 서서 좌우를 살피면서 간간이 가게도 확인했다. 이방이 알려 준 곳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머릿속에 기억해 두긴 했지만, 그래도 낯설기 때문에 그 가게를 봐도 바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살펴봐야 할 가게 앞을 지나치고 나서야 실수를 했음을 깨닫게 되곤 했다.

하지만 뒤늦게 알았다 해서 바로 돌아갈 순 없었다. 너무 눈에 띄는 짓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냥 지나쳐서 다른 가게로 향했다.

점심이 되기 전이었지만, 사람들은 활발하게 거래를 했다. 물건을 주고받는 이들 사이로 묵직한 엽전이 오가는 게 보이기도 했다.

대량으로 물건을 구입해서 그걸 따로 두었다가 나중에 조금씩 팔 생각인가.

간혹 명월이 보기에도 괜찮은 물건이 나오는 것 같았다. 이만한 물건이라면 화소군이 사들일 법도 한데―.

명월은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혹여라도 화소군이나, 그와 관련된 이들이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마땅히 수상한 이들은 없고, 화소군은 머리카락 끝도 보이지 않았다.

워낙에 대단한 놈이니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거래를 하진 않는 건가.

어딘가 안전한 곳에 들어가서 음침하게 물건을 주고받지 않을까.

그놈은 귀물이 나타나는 장소에서 나는 특별한 약초와 물건을 이용해서 지금 그 위치에 오른 거였다.

그 말을 듣긴 했지만, 얻은 물건들에 대해선 알 수 없었다. 대체 어떤 물건이기에 고가로 거래가 되는 것일까. 그리고 어찌 어머니가 그걸 구입한단 말인가.

어머니 운운했던 건 자신을 자극하기 위한 수였을지도 몰랐다.

무시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지만, 미우나 고우나 자신을 쫓아내지 않고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산 분이었다. 화소군이 판 물건 때문에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이 그 뒤처리를 해 줘야 할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명월은 뒷골이 쭈뼛하게 서는 느낌에 놀라선 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뒤에 붙어서 따라오던 사내가 인상을 썼다.

“뭐야? 길 막지 마. 멍청아.”

동시에 명월을 피해서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멀쩡한 사람을 두고 멍청이라 욕을 한 사내가 괘씸했지만, 명월은 유심히 뒤를 살폈다. 하지만 마땅히 수상한 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

……분명 묘한 기운을 느꼈는데. 그래서 백호가 따라온 건가 싶었는데.

이상하다는 듯 주변을 살피던 명월은 계속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의식하고 한쪽 발을 들었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명월은 백호를 떠올렸다.

아주 당당하게 제 어깨에 팔을 두른 백호는 계속 따라붙을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이런 차림인 사내가 둘이나 붙어서 움직이면 더 눈에 띌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백호는 당연한 듯 함께 움직이려 했지만, 명월이 밀어냈다.

혼자서 다닐 거다. 그리 말하자 백호는 처음에는 인상을 썼지만, 이윽고 표정을 풀고는 네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너무 선뜻 그렇게 하라고 하니 명월 쪽에서 더 의외였다. 조금 더 시끄럽게 굴 거라고 생각했는데.

혹 말은 저렇게 해도 뒤로는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던 명월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본인이 한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지 백호는 그대로 몸을 돌려선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명월 쪽에서 밀어낸 거니 가 버리는 그를 붙잡을 수도 없었다.

뭔가 달리 할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말은 그리해도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닐 셈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도 금방 지워졌다. 명월이 시장에 나온 지 꽤 되었지만, 백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워낙 재주가 많은 놈이니 어딘가에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장 눈에 보이지 않으니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다가 명월은 문득 제 손으로 떨군 놈에 대해서 뭘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건가 싶었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놈에 대해선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것 말고도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았다.

고개를 두어 번 턴 명월은 다시 주변을 살폈다.

그런 명월의 눈에 한 가게가 들어왔다. 주변엔 다른 가게도 몇 더 있고, 노점도 앞쪽으로 깔려 있었다. 사람들이 복잡하게 움직이는 곳에서 보면 가게는 특출 날 게 하나 없는 장소였다. 그런데 왜 이리도 눈길이 가는지 모르겠다.

명월은 그 가게 앞으로 걸어가 앞쪽으로 나온 물건을 살폈다. 매대 위쪽으로 물건이 절반가량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놓인 물건이라는 게 매끈한 돌 위에 그림을 그려 두거나 글씨를 적어 둔 거였다. 딱 보는 순간 해석이 어려운 글귀가 자잘하게 적혀 있었다.

무료할 때, 작은 글씨를 하나하나 풀어내서 의미를 달리해 맞추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고 같은 문장을 해석할 수도 있고, 같은 사람이 여러 개의 문장을 풀어낼 수 있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문장이 태반이었다.

평소 분명한 게 좋았던 명월은 이런 걸 별로 즐겨 하지 않았다. 그런 게 왜 지금 눈에 들어오는 걸까.

안색을 굳힌 채로 명월은 그것들을 살피다가 한곳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각양각색의 무늬와 색을 지닌 돌 중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흑 빛의 돌에는 바람과 나무를 표현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다른 것들에 비해서 투박하고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보이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건, 돌 자체에서 풍겨지는 기운 탓이었다.

안색을 굳힌 채로 돌을 살피던 명월은 그걸 집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위에서 뻗어져 나온 손이 명월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

돌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명월은 갑자기 뻗어진 손이 제 손목을 움켜쥐자 놀라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가게 안쪽의 작은 창에서 얼굴을 내민 인상 험악한 사내와 시선이 부딪쳤다.

지금 당장 칼을 들고 춤을 춰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인간 백정처럼 험악하게 생긴 사내였다. 이토록 무섭게 생긴 사내는 처음 보는 거였던 명월은 너무 놀라선 빠르게 눈을 끔벅였다.

그때 사내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지금 뭘 훔쳐갈 셈이더냐. 이 도둑놈아―.”

난데없는 도둑 소리에 명월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팠다.

모자라다거나, 멍청하다는 말은 듣고 한 귀로 넘길 수 있어도 도둑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은 물건을 훔치려 했던 게 아니라 이걸 살펴보려 했을 뿐이었다.

“너 같은 좀도둑놈은 달리 처리하는 방법이 있지. 내 네놈의 손목을 잘라 주마. 그래야지 앞으로 두 번 다시 남의 물건을 훔칠 생각을 하지 않겠지.”

그리 말하며 사내가 반대편 손을 들었고, 그곳엔 날이 시퍼렇게 잘 갈린 큼직한 칼이 들려 있었다. 흔히 크기가 있는 고기를 토막 낼 때 사용하는 저 칼은 힘이 좋은 자라면 성인 사내의 손목을 날려 버릴 수도 있었다.

지금 당장 칼을 휘둘러서 제 손목을 자를 것 같은 사내의 태도에 당황한 명월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자, 자자잠깐 기다리시오. 난 정말로 이걸 훔치려 했던 게 아니오. 그냥 구경만 할 셈이었소.”

“그 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기나 하느냐. 네놈의 더러운 손에 들려질 만한 물건이 아니다. 네놈 때문에 부정을 탄 것이니 마찬가지니. 네놈을 용서치 않겠다.”

“뭐 그리 살벌한 말씀을 하시오. 내가 구경을 하다가 마음에 들면 살 수도 있는 게 아니겠소?”

명월의 말에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네놈이? 그 돌을? 그만한 돈이라도 가지고 있느냐?”

“물론이오. 이게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금 열 돈이다.”

“…….”

움찔해선 입을 다무는 명월을 두고, 사내는 거듭 강조했다.

“금 열 돈이다. 그걸 네놈이 가지고 있느냐?”

금 열 돈이라면 가지고 있긴 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손에 들린 이 돌이 정말로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이쯤 되자 명월도 사내에게 낚인 게 아닐까 싶었다. 물건을 구경하고 있으면 시비를 붙여서 되지도 않는 높은 금액을 요구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사내의 눈빛이 너무도 흉흉했다.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정말 큰일이 생길 수도 있겠구나 싶었던 명월은 마른침을 삼키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금 열 돈이라면, 있소.”

그 순간 사내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그는 당장 대칼을 휘두를 것처럼 앞으로 크게 몸을 내밀었다.

“이놈이 지금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니―!”

“지, 진정하시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있소! 내가 보기에 이래도 꽤나 실력이 좋아서 값비싼 약초나 산삼 같은 걸 많이 캐서 알부자란 말이오!”

지금 옷차림이 심마니의 그것이라는 걸 상기하면서 명월은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상대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딱 봐도 가느다랗고 새파랗게 어린놈이 무슨 재주로 약초나 산삼을 캘 수 있겠나 싶었을 거다.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거다. 하지만 명월 딴에는 필사적이었다.

“정말로 그만한 돈이 있소. 지금도 어느 정도 수중에 돈이 있소―.”

“얼마나 있더냐? 엽전 몇 푼을 말하는 거냐?”

“사람 우습게 보지 마시오. 그보단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보여 줄 테니 이 손 좀 놓아 보시오.”

명월은 눈으로 사내가 붙잡고 있는 제 왼손을 가리켰다. 하지만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 말고, 손에 쥐고 있는 돌멩이나 내려놓아라.”

사내는 명월이 수중에 한 푼도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보자니 자존심이 상했던 명월은 다른 손으로 가슴팍과 허리춤을 더듬었다.

아무래도 저놈의 코앞에 돈을 보여 줘야 자신이 하는 말을 믿을 모양이었다. 사람을 물로 보지 말라면서 화난 얼굴로 열심히 몸을 더듬던 명월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다. 그제야 옷을 갈아입으면서 돈주머니를 따로 챙기지 않았던 게 떠오른 탓이다.

도포를 벗으면서 그 안쪽에 달려 있던 돈 주머니를 빼내지 못했다. 늘 도포 안쪽에 돈을 넣어 두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당연히 거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굳어지는 명월의 안색을 본 걸까. 안 그래도 험악한 사내의 표정이 더 일그러진다. 이― 하는 소리를 내면서 칼을 높이 드는 것에 맞춰서 명월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잠시 기다려 보라는 말을 하려던 순간 등 뒤에서 뻗어져 나온 손이 사내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손 좀 놓고 이야기하시지.”

익숙한 목소리에 명월은 헛숨을 삼켰다.

급히 고개를 들자 등 뒤에 딱 붙어 서 있는 백호가 보였다.

역시나 근처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하필이면 이런 꼴사나운 모습일 때 나타나다니.

당황한 명월이 무언가 말을 하려던 순간 가게 주인이 이건 또 뭔가 싶은 얼굴로 백호를 노려봤다.

“네놈은 뭐냐. 내 몸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면 네놈의 목을 날려 버리겠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보시지.”

느긋한 백호의 대꾸에 사내의 얼굴이 더 험악하게 변한다. 안 그래도 명월 때문에 단단히 화가 난 상태였던 사내는 더는 참지 못하고 칼을 높이 쳐들었다. 그대로 휘둘러서 백호의 손목을 잘라 낼 것 같았던 사내는, 백호의 눈을 봤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에 주시된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위로 큰 칼을 높이 든 채로 굳어 있던 사내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 불에 덴 듯 급히 명월의 손목을 놓았다.

손목이 풀린 명월은 반사적으로 돌을 놓았다. 제 손을 앞으로 끌어당긴 명월은 손을 움켜쥐었다가 펼쳤다. 그제야 멈춰 있던 피가 다시 흐르는 것 같았다. 아픈 손목을 주무르면서 고개를 들자 백호가 여전히 사내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명월을 놓았는데 왜 아직도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었던 듯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굳은 채로 있는 사내를 두고 백호는 입꼬리를 올렸다.

“함부로 객기를 부리다간 손목이 아니라 목이 날아갈 거다. 알아서 조심해라.”

백호의 경고에 사내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반박하면서 당장 뭐라 대거리를 할 것 같았던 사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숨죽인 채로 얌전해진 자를 두고 백호는 그제야 놈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팔을 안쪽으로 잡아당긴 사내는 이를 악문 채로 백호를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호는 허리에 양손을 올린 채로 매대 앞에 진열된 것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명월이 건드린 검은 돌을 주워 들었다. 그 순간 사내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지만, 백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눈앞으로 올린 검은 돌을 유심히 살피던 그는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면서 손을 놓았다. 검은 돌이 아래로 뚝 떨어지면서 매대 아래쪽으로 굴러간다. 백호는 괜한 걸 만졌다는 양 손을 털면서 중얼거렸다.

“저런 엉망인 돌이라니. 거저 준다고 해도 가지고 가고 싶지가 않군.”

들으라는 듯 말한 백호는 명월 쪽으로 몸을 돌리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게 왜 함부로 혼자 다니는 거냐. 그러니까 저런 쓰레기 같은 가치 없는 물건 때문에 옴팡 뒤집어쓸 뻔 했잖나―.”

여전히 손목을 감싸 쥔 채로 있던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백호를 보다가 재차 앞으로 시선을 돌린 명월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말이야.”

힘없이 중얼거린 명월은 먼저 몸을 돌렸다. 가게 앞에서 물러선 명월은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선 안쪽으로 향했다. 그런 명월의 바로 뒤에서 백호가 졸졸 따라왔다.

그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저리로 가 버리라 할 수도 없었다. 거기다 이런 차림으로 다니면서 여러 사람에게 홀대를 받은 것 때문에 기가 좀 죽은 상태였던 명월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였다.

그때 옆으로 온 백호가 명월의 손목을 툭 건드린다.

“아프냐?”

“…….”

묻는 말에 명월은 대답 없이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호는 계속해서 손목을 툭툭 건드렸다. 대답하지 않으면 계속 이런 식으로 사람 성가시게 굴거다.

목 끝까지 올라온 한숨을 길게 내쉰 명월은 손을 들어선 허리 뒤로 숨겼다. 그러자 백호가 아예 고개를 뒤로 빼선 그런 명월의 손을 내려다본다.

백호가 하는 행동이 우스웠다. 왜 저러나 싶어서 다시 앞으로 손을 빼자, 이번에는 앞으로 고개를 숙여 온다.

그 행동에 명월이 인상을 쓰면서 고개를 들었다. 한마디 해 주려던 명월은 비스듬히 올라간 백호의 입꼬리를 보곤 미간 사이에 서린 주름을 서서히 폈다.

예전에는 백호의 저런 웃는 얼굴이 참 싫었다.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바로 마음이 누그러진다. 따지고 보면 그에게 언성을 높일 필요도 없었다.

“……언제부터 따라다녔던 거냐.”

“계속해서 붙어 있었지.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역시나 그런 건가. 자신이 백호를 이기려면 아직도 멀었다면서 명월은 쓰게 웃었다. 그 웃음은 이어지는 백호의 말에 의해서 사라진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옆에 딱 붙어 있으라고 말하지 않았냐. 난 그 말대로 따르는 것뿐이다.”

“…….”

올라간 명월의 입꼬리가 내려간다.

콧잔등을 찡그린 백호가 고개를 숙이곤 사근사근하게 속삭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만 있는데 뭘 그렇게 조급하게 구는 거냐. 어차피 지금은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렇다 해서 언제까지 장님으로 있겠어. 물길이 뚫리면 그 뒤로는 네가 손을 쓰지 않아도 전부 쏟아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 차분하게 기다려라. 조급함은 결국 실수로 이어지는 법이야.”

거기까지 말한 백호의 입술꼬리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웃는 백호의 얼굴이 명월의 눈동자 가득 찬다.

숨죽인 채로 그를 올려다보기만 하던 명월의 눈이 감겼다가 떠지고, 다음 순간 천천히 입술이 열렸다.

“……열 받아.”

“뭐?”

웃던 백호의 얼굴이 경직된다.

딴에는 전에 명월에게 막 해 버린 게 미안해서 나름의 조언을 해 준 건데 열 받는다는 말을 들어 버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나오는 건가 싶어 똥 씹은 얼굴이 된 백호를 두고 명월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다른 이도 아닌 네가 바른 말을 하니까 그게 열 받는다고.”

“…….”

입을 다문 명월은 한숨을 쉬었고, 그 얼굴은 금세 뚱한 것으로 바뀌었다. 토라진 것마냥 고개를 돌리는 명월을 보던 백호는 짧은 탄성을 내며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을 보나 싶던 백호는 팔을 들어선 명월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백호가 달라붙자 반사적으로 밀어내려던 명월이지만, 어림도 없다는 양 더 세게 그를 끌어당긴 백호는 앞으로 팔을 뻗었다.

“원래 생각을 할 때에는 단 걸 먹는 게 좋은 법이다. 날 따라와라. 맛있는 걸 먹여 줄 테니까.”

“필요 없어. 난 먹으려고 나온 게 아니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꼬르륵, 하고 우렁찬 소리가 울렸다. 앞에서 오던 꼬마가 놀라 고개를 들 정도로 큰 소리였다. 그 소리를 낸 당사자인 명월은 바로 입을 다물었고, 그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드러나는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바로 고개를 돌리면서 다른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풋―하는 소리마저 감출 순 없었다.

뺨이 더 달아오른 명월은 팔꿈치를 세워 어떻게든 백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장난스럽게 명월을 잡아끌었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놓치지 않겠다는 듯 어깨를 끌어안은 팔 힘이 어찌나 센지, 명월은 그대로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 * *

기다란 나무판자로 만든 의자에 앉은 명월의 손에는 콩고물이 묻은 떡이 들려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게 지금 먹으면 정말 맛있을 것 같긴 했지만, 오가는 사람이 많은 길목 한편에 앉아서 뭔가를 먹기가 망설여졌다.

그래서 떡을 보고만 있으려니 어느새 백호가 옆자리로 와서 앉으면서 물었다.

“안 먹냐?”

아까처럼은 아니라 해도 배에서는 여전히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배고프지 않으니 먹지 않겠다―라는 말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명월은 앞을 흘깃 봤다. 빠르게 지나치거나 흥정을 하는 사람들 중에 명월을 살펴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냥 마음 편히 먹으면 되겠지만, 역시나 좀 망설여진다.

이걸 어째야 하나 싶어서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려니 백호는 본인 몫으로 챙겨온 걸 손으로 집어서 제 입에 넣었다. 우물거리면서 먹는데 괜히 입 안으로 침이 고인다.

이때 백호가 안 먹냐, 라고 물었으면 명월은 안 먹는다, 라는 식으로 엇나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백호는 그냥 제 몫의 떡을 먹을 따름이었고, 그걸 보자니 명월은 점점 더 속이 쓰려졌다.

어차피 여기서 자신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뭔가를 먹는다 해도 그걸 두고 뭐라 하진 않을 터였다.

딱 거기까지 생각하자 더는 망설일 게 없어진 명월은 떡을 하나 집어선 입에 넣었다. 그 순간 명월의 눈이 크게 떠진다.

콩고물이 달달하고 안에 들어간 찹쌀이 찰진 게 무척 맛이 좋았다. 원래 시장이 반찬인 법인지라 명월은 급히 다른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안 먹으려 했던 게 언제였느냐는 듯 순식간에 절반을 먹어치우던 명월은 문득 얼굴에 닿는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든 명월은 웃고 있는 백호를 봤다.

“……왜 그렇게 기분 나쁜 표정으로 사람을 보는 거냐.”

이유에 대해서 알면서도 묻게 된다. 그 목소리가 퉁명스러운 것이 본인 듣기에도 우습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안 먹겠다는 떡을 이렇게나 잘 먹으니 백호 보기에 우습기도 하겠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녀석의 눈치 같은 건 살피지 말자면서 명월은 더 크게 입을 벌려선 떡을 먹었다. 그러곤 우물거리자 백호가 넌지시 “맛있냐?”라면서 명월의 떡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안 먹는다 튕길 때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이걸 다 먹을 셈이었던 명월은 어허―하는 소리를 내며 손을 옆으로 물렸다.

“네 거나 먹어―.”

“난 다 먹었거든.”

그리 말하는 백호의 발치에는 떡을 올려 뒀던 커다란 호박잎이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야박하게 굴지 말고 하나만 먹자. 넌 원래 배 안 고프다고 했잖아.”

조금 전에 객기를 부린 걸 두고 빈정거리는 거다.

이놈이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이러는 꼴 좀 봐라 싶었던 명월은 안색을 굳힌 채로 떡을 쥔 손을 요리조리 피하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그걸 전부 다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찰진 게 입 안으로 그득히 들어오자 씹는 건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빼앗기지 않았다는 것에 마음이 편해진다.

억지로 떡을 씹으면서 명월은 백호를 흘겨봤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어쩔 거냐. 그런 느낌으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가만히 있었다.

조용히 응시하는 눈빛이 참 오묘했다.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백호가 저런 식으로 쳐다보는 게 싫고, 왜인지 모를 부끄러움이 느껴진 명월은 안색을 굳히면서 그의 얼굴을 잡아 뒤로 밀어냈다.

원래 남이 먹는 건 보는 게 아니었다. 손에 힘을 줘서 백호의 얼굴을 꾹꾹 밀어대면서 명월은 열심히 턱을 움직였다.

뭐든지 적당한 게 좋은 법이라는 말처럼, 지금 입 안에 너무 많은 게 들어와 있어서 그걸 씹는 게 힘들었다. 그래도 간신히 턱을 움직이면서 명월은 들고 있던 호박잎을 발 아래로 떨어뜨렸다.

발바닥으로 눌러서 뒤쪽으로 넘긴 후에 조금씩 떡을 삼키자 묘하게 옆이 잠잠했다.

결국에는 백호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안 먹을 것처럼 굴면서 떡을 한입에 털어 넣어 버렸으니 백호 보기에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습겠는가.

그걸 두고 한마디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묘하게 조용하다. 왜 이렇게 잠잠한 건가 싶어 의문이 들기도 했던 명월은 옆을 흘깃거리면서 봤고, 턱에 손가락을 댄 채로 정면을 응시하는 백호를 확인했다.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저런 얼굴인지 모르겠다. 혹, 자신이 모르는 뭔가를 감지한 게 아닐까.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명월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보이는 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뿐이었다.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상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그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앉아서 살피는 사람들의 표정은 다양하고 색달랐다. 아, 사람들은 저런 얼굴을 하기도 하는구나. 그런 걸 느끼면서 명월은 남아 있던 마지막 떡을 삼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작은 호리병이 건네진다.

뭔가 싶어서 그쪽을 보자 백호가 여전히 정면을 응시한 채로 말했다.

“이슬을 받아서 만든 차다. 시원하고 좋으니 마셔 봐라.”

“…….”

잘 보면 술도 그렇고, 이런 것도 그렇고, 스스로 만들어서 먹는 걸 즐겨 하는 것 같았다. 예전에 달빛주인가 뭔가를 마셨을 때에는 너무 독해서 목과 배가 뜨끈해졌었는데 이것도 그런 건 아니겠지.

반신반의한 기분으로 호리병을 받아 든 명월은 망설이다가 주둥이에 입술을 댔다. 그리고 한 모금 넘기자 연하게 퍼지는 단맛이 혀끝을 간질인다.

그렇게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입맛을 다신 명월은 그걸 백호에게 건넸다. 명월이 건넨 호리병을 받아 들곤 뚜껑을 닫은 후, 그걸 망태기 속에 집어넣은 백호가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허벅지에 팔을 기댄 채로 편안히 자세를 잡고 앉은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렇게 보면 이상한 게 종종 보일 때가 있다.”

백호의 말에 명월은 다시 사람들을 살폈다. 바쁘게 다니는 이들 중에선 특이한 건 없었다.

적어도 명월의 눈엔 그리 보였다.

“난 네가 보지 못하는 세세한 것들도 보인다. 인간이라는 건 꽤나 복잡하고 어렵지. 전에는 그걸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니 심드렁해지더군. 인간의 관계나, 그들에게 달라붙어 있는 걸 알아봐 봤자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던 거야.”

“…….”

“결국엔 저들이 자초한 일이니, 그로 인해 무슨 일이 생긴다 한들 그건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싶었지. 그래서 저들에 대한 관심을 끊어 버렸다. 산속으로 들어가서 눈과 귀를 막아 버린 거지. 너와는 다른 의미로 그리한 거지만, 덕분에 한결 편해졌어.”

편해졌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한 명월이었다.

백호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시작한 건지 영문은 알 수 없지만, 그냥 한귀로 흘려들을 수 없는 느낌이었다. 명월은 집중했고, 백호는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편하게 있는 동안 여기는 개판이 되어 버렸지만, 그 모든 것들이 결국엔 인간들로 인해 벌어지는 것일 테다. 그러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끝이 다가올 때 즈음 내가 나타나 이 땅에서 사는 모두를 몰살했겠지. 여긴 죽음의 땅으로 바뀔 테고, 오랫동안 사람이 걸음하지 않는 장소가 될지도 모르겠군.”

“…….”

“하지만 인간은 학습이라는 게 없는 놈들이니까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 누군가 이 땅을 찾을 거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새롭게 집이 세워지고, 사람이 모여들고, 그들이 번식을 하고, 새로운 삶을 이어 나가겠지. 그러곤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될 거다.”

그게 인간이었다.

명월 본인도 인간이었지만, 잘못을 알면서도 반복하게 되는 나쁜 습성에 대해선 부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제대로 된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 동안 백호가 제 턱을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든지 반복의 연속이야. 거기서 더 나아지거나 달라지는 건 없지.”

문득 백호가 왜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걸 알려 주고 싶었던 걸까. 비단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그가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명월은 백호가 보는 지금 인간의 삶이 어떤 식으로 비추어지는지가 궁금해졌다. 그의 눈에 저들이 어찌 보일까.

인간이 아니고, 귀물보다 훨씬 더 높은 존재인 그의 눈에는 저 사람들이 그저 자연을 구성하는 일부분으로 여겨지는 게 아닐까.

자연 속에서 나뭇잎이 흔들리거나, 바람이 불거나,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두고 신경 쓰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나뭇잎은 떨어지면 썩어서 거름이 되고, 쓰러진 나무는 뿌리가 이어져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살아나게 되어 있었다.

바람은 불다가도 멈추는 거고, 비는 내리고 눈은 쌓이게 된다. 그런 감각이라면 백호가 반양 땅에서 생기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게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백호의 시야에 비춰지는 세상은 어쩌면 늘 같을지도 모르겠다. 흑백으로 가려진 재미없는 곳일지도 모르지.

살짝 백호의 감각에 이입이 된 것일까. 명월은 자신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은 채로 앞에서 움직이는 이들을 응시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겠냐?”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던 명월은 백호의 물음에 그를 올려다봤다.

“이들이 잘못되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말라는 거냐?”

“아니. 그런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느리게 고개를 저은 백호는 재차 명월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차분하고 무척 깊었다. 속이 읽히는 것 같은 느낌이, 그리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명월은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서서 이동하는 명월은 튀지 않았다. 그가 가까이 붙어서 이동하는 걸 봐도 사람들은 그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굳이 얼굴을 볼 필요도 없이 입고 있는 옷만 보더라도 그가 어떤 사람이라고 지레 판단을 내리는 거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냉랭한 반응이 당황스러웠지만, 지금은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편안하게 움직이게 되어서 한결 편한 것 같았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껴선 명월은 이방이 알려 준 가게를 하나하나 찾아갔다.

가게를 지키는 이들은 하나같이 평범했다. 곰방대를 물고 있다가 손님이 찾아오면 웃으면서 맞이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예 일어서서 적극적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자들도 있었다.

고기나 약재상 같은 경우는 쉬지 않고 고기와 팔 상품을 준비했다. 이방이 알려 주지 않았다면 그저 평범한 상인이라고 여기고 넘어갔을 뻔했다.

아니. 저들이 화소군에 붙었다는 것만 빼면 평범한 자들이라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저들이 화소군에게 붙은 게, 크게 잘못한 일이 아니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화소군은 도성에까지 이름이 난 거상이었다. 반양 땅에 거점을 잡고 크게 장사를 하는 이니, 그를 따르지 않을 순 없었을 거다.

화소군과 연관된 가게는 건너마다 한 채씩 있었다. 이 정도라면 굳이 헤아리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장사를 하려면 그들만의 규칙이 있을 테니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법이었다. 무언가 한 가지를 팔고 거래를 하려 해도, 화소군이 뒤에 있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큰 법이었다.

반양에서 장사를 하면서 먹고 살기 위해서 화소군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걸 두고 자신이 파고들어 가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명월은 걸음을 멈췄다.

‘알아보신다 한들, 크게 얻어 낼 성과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정리를 해 주던 이방의 말을 상기하면서 명월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명월도 알고 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어서 시도를 한 건데, 결국 이리되는 구나 싶어서 마음이 무겁다.

명월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백호를 발견했다. 가라앉은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손을 뻗으면 닿겠지. 하지만 아직은 그렇게 도움을 요구하고 싶지 않았다.

명월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고, 저기 앞쪽에서 모여 있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고만고만한 키를 지닌 아이들은 모두 셋이었는데 얼굴이 낯익었다. 뭔가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자 고아들이었다. 그 아이들이 지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인절미 가게 앞에 주르륵 서 있었다.

당장에라도 침이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인절미를 보는 모습을 보자니 저도 모르게 허리춤으로 손이 간다. 그곳을 더듬던 명월은 수중에 돈이 없다는 걸 상기했다. 짧은 순간 고민을 하게 된다.

어찌할까 싶을 때에 맞춰서 어린애들 등 뒤로 나타나는 여인이 있었다. 화사한 차림새인 그녀들은 호란의 기생들이었다.

기생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그쪽을 흘깃거린다. 그때 가운데에 서 있던 호접화가 품에서 엽전 몇 개를 꺼내 가게 주인에게 내밀었다.

엽전을 받은 여인은 호접화를 힐긋거리면서 보더니 호박잎 위에 인절미를 가득 담았다. 그걸 호접화에게 내밀자, 중간에 서 있던 자희가 대신 받아선 아이들에게 건넸다.

어여쁘게 차려입은 기생이 나타나자 기가 죽은 채로 있던 아이들은 내밀어지는 인절미를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에는 이걸 정말로 자신들에게 주는 건가 싶어 긴가민가한 얼굴로 있다가 웃는 자희의 얼굴을 보곤 위로 손을 뻗었다.

인절미를 받은 아이들은 인사를 하곤 급히 달려갔다. 그렇게 도망가듯 사라지는 아이들을 살피던 명월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옆으로 물러나 자리를 피했다.

아무래도 이런 차림으로는 그녀들에게 아는 척을 할 순 없었다. 아마 호접화라 해도 자신이 이런 차림을 하고 있으면 바로 못 알아볼 거라면서 명월은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곳에 가 등을 기대고 서선 바깥쪽을 살폈다.

백호가 보이진 않아도 근처에 있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한숨을 쉰 명월은 품에 손을 넣어선 작은 책자를 꺼냈다. 그걸 펼쳐서 이름과 가게 상호를 살피다가 다시 덮고는 긴 한숨을 쉰다.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화소군을 건드리고 싶거든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게 아니라 정면으로 승부를 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건 그만큼 위험 부담이 높은 일일 터였다.

그래도 백호의 도움을 받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아니, 아니다.

“매번 도움을 받을 순 없어.”

언뜻 보이는 옆얼굴에 서린 고뇌가 읽혀진다.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락, 하고 비단이 스치는 소리를 들은 명월은 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었던 곳에 서 있는 여인, 호접화를 발견했다.

“아―.”

어떤 반응을 취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하는 명월을 대신해 호접화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사또.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라 하나 며칠 전 길거리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땐 멀쑥한 차림새였고, 지금은 아니었다.

“용케도 날 알아보는군.”

“옷을 달리 입는다 해서 어찌 사또를 못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시장에 나와 자신을 알아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눈썰미가 좋은 호접화이기 때문에 보는 순간에 알게 된 게 아니냐는 말을 하려다 말고 명월은 입을 다물었다.

이런 차림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시장에서 마주친 것이기 때문일까. 머쓱한 느낌이 든 명월은 어깨를 으쓱였고, 호접화가 앞으로 다가와 옆에 섰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선 둘은 바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각기 다른 장소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점점 더 서먹해진다. 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기억으로는 분명 이보다 편하게 그녀에게 말을 걸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

명월은 괜히 손을 들어선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걸 뒤로 넘기면서 어색함을 표현하는 게 전달된 것일까. 호접화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괜히 사또를 따라온 모양입니다. 그저 오랜만에 뵙게 된 게 반가워서 따라온 것뿐인데요.”

“내가 평상시와는 다른 차림이라 자신감이 없어서 그런 것뿐이네. 미안하게 되었네.”

“미안하실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의 차림새도 나쁘진 않습니다.”

호접화는 명월을 보곤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주 귀여우십니다.”

원래 입에 발린 말을 하는 호접화가 아니었다. 귀엽다고 하면 정말 그리 보이는 것일 테지만, 그래서 더 민망했다. 귀여워 보이고자 이런 차림을 한 게 아닌데.

여전히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명월을 두고, 호접화가 중얼거렸다.

“사또는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처음에는 관아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듯 구시더니, 지금은 반양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보이시면서 그걸 해결하려 드시는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단할 게 뭐가 있겠나. 지금 이런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네. 그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시장 구경을 하고 싶어서 나와 봤을 뿐이니까.”

“이런 큰 규모의 장이 열릴 때엔 사또의 마음에 차는 물건이 보이지 않으실 겁니다.”

명월의 웃음이 살짝 흔들렸다. 별 의미 없이 하는 말이라면 한 귀로 흘려 넘길 수도 있겠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러기가 힘들었다.

어느새 입가에 서린 미소를 지운 명월은 호접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런 명월의 눈빛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호접화는 차분히 말했다.

“원래 뒤로 주고받는 거래는 사람들 없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랍니다.”

그 일반적인 규칙에 대해서 명월이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호접화가 하는 말에 대해서 바로 긍정을 할 수가 없었던 그는 입을 다물었고, 호접화는 손을 들어 명월의 손목에 댔다.

닿아 오는 손가락 끝이 차게 식어 있다. 그래서 움찔하긴 했지만, 명월은 호접화의 손을 뿌리치거나 하진 않았다.

“전 사또께서 큰 어려움을 겪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부당한 해를 입은 자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그들을 도와주시려는 사또의 깊은 마음을 모르진 않사오나, 본래 인간이란 도움을 받은 일에 대해선 눈을 감았다 뜨는 것으로 잊고 마는 존재랍니다.”

“…….”

“지금은 매달릴 존재가 없어 사또 앞에서 온갖 아첨을 늘어놓겠지만, 모든 게 정리가 된다면 그때부턴 안면몰수를 하게 될 것입니다. 큰 위험이 닥치게 되면 사또를 배신할 것입니다. 그걸 잘 아시는 분께서, 왜 이런 피곤한 일에 손을 대려 하십니까. 호란을 찾아와 술 한잔 기울이시면서 세상의 근심을 잊도록 하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길고 긴 말을 하는 동안 명월은 호접화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왜일까.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꺼냈다면 대번을 정색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호접화를 상대론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이기에 모든 걸 알고 있고, 말을 꺼내는 게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거다.

실상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명월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호접화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어느 때와 다르게 위험한 일에 휘말려서 곤란한 일을 당하지 말라고 간청하는 그 눈빛은 마치, 정인을 염려하는 여인의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명월은 한결 마음이 차분해졌다.

“세상 사람들이 등을 돌린다 하더라도 자네는 내 편이 되어 주겠지?”

미소 띤 얼굴로 흘려보낸 말에 호접화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잡힌다.

결국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가. 그런 느낌으로 명월을 올려다보던 호접화의 손가락 끝으로 더 힘이 들어간다. 아플 정도로 세게 손목을 감싸 쥐는 손길을 느끼면서 명월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농담이네. 내 편이 되어 줄 필요는 없네. 위험하다 싶으면 알아서 몸을 피하게. 그래야 내 마음도 편할 테니까.”

호접화 쪽으로 몸을 돌린 명월은 그녀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린 채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염려 하지 말라는 양 웃는 얼굴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도 호접화의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경직된 눈빛으로 있던 그녀가 손을 떼는 것과 동시에 명월도 호접화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다시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을 때, 명월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저 사람 좋은 척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나대는 게 아니네. 이 모든 일들도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일이지. 그렇기 때문에 무모하고 위험하다 할 수 있는 일에도 손을 대는 게 아니겠는가.”

어느덧 명월의 입가로 쓴웃음이 걸린다.

“난 누군가를 위해서 이런 짓을 할 만큼 대단한 사내가 아니야. 그저 나 자신을 위해서 노력할 뿐이네. 살기 위해서 버둥거리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태연한 척을 하는, 그런 한심한 사내란 말이지.”

지금까지는 자신을 죽이고 숨기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마냥 그렇게 계속 살아갈 수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에 대해서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고, 모른다 쳐도 자신을 괴짜로 여기는 자들이 많았다.

지금은 사또로 있지만, 어느 순간 그 일도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못하고 숨만 쉬면서 살게 될지도 몰랐다.

집안사람들에게 자신이라는 존재는 숨기고 감추고, 가능한 없어졌으면 싶은 존재였다. 당장은 아버지가 있어서 괜찮다지만, 돌아가시거나 한다면 그땐 끝이었다.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지만, 명월은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자신도, ‘그’와 같은 상태가 될 거다. 어느 절로 보내져선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숨어 지내야만 하겠지.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았다. 지금 자신이 뭐라도 할 수 있을 때 그걸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이곳으로 오게 되면서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진짜 부친이라 할 수 있는 독각귀도 출몰한 마당이었다. 이미 너무 멀리 나가 버린 참이었다. 여기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날 순 없었다.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자신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멀리 나간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구석으로 약간의 흥분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 정도로 쑤시고 다니면서 무언가를 하려 한 적이 없었던 만큼, 그 자체에 대한 흥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일련의 모든 상황을 장난처럼 여기는 건 아니었다.

자신은 진지했다. 진지하게, 진심으로 부딪치고 싶었다. 그런다 해서 그 결과가 꼭 좋게 나리란 법은 없었다.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게 아니겠는가.

명월은 호접화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나중에 빈털터리가 되어도 날 외면하지 말고, 차나 한잔 따라 주게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라면 그리해 줄 거라고 믿네.”

웃는 명월의 얼굴론 한 점의 그늘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무슨 말을 한다 한들, 명월의 마음을 바꾸지 못할 거라는 걸 깨달은 호접화는 눈을 내리떴다. 반쯤 벌려진 그녀의 입술을 타고 묵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또. 사람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내 사람도 때가 되면 등을 돌리기 마련이랍니다.”

“아닐 거라고 믿고 싶네.”

내 사람이라 하는 순간 떠오르는 얼굴은 딱 하나뿐이었다.

이방도 있고, 복운도 있을 터인데, 백호의 얼굴만 커다랗게 떠올랐다.

왜 그럴까.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명월은 재차 중얼거렸다.

“그렇진 않을 거네.”

자신감이 결여된 중얼거림을 들은 호접화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눈을 내리뜬 채로 “그래요.”라고 중얼거린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호접화는 사라졌고, 명월은 그녀가 붙잡았던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가볍게 쥐었다 놓는 것 같았지만, 상당한 악력이 느껴졌다. 손을 움켜쥐었다 펼치면서 고개를 들자 다섯 걸음 앞에 서 있는 백호가 보였다.

마치 화가 난 것처럼 인상을 쓴 채로 바라보는 백호를 두고도 명월은 느긋했다.

“그녀하고 붙어 서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와서 방해라도 하지 그랬어?”

백호의 눈썹이 위로 살짝 올라간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곤 바닥에 침을 뱉은 백호는 설렁설렁 걸어와선 명월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세운 무릎에 팔을 올리곤 정면을 응시하는 백호의 미간으론 숨겨지지 않는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다. 호접화하고 함께 있던 게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전에 복운하고 있었을 때, 그의 손을 치워 내거나 하던 백호였다. 그 당시에는 왜 복운의 손을 치워 내곤 뚱한 얼굴로 있는 건가 싶었는데, 누군가 자신과 접촉하는 게 싫었던 거다.

그게 왜 싫은 걸까. 알 것 같으면서 모르는 척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 넣어 버리는 명월이었다.

여기서 더 생각을 해 버리면, 돌아가는 분위기가 정말 이상해질 것 같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녀하곤 너무 가까이 지내지 않는 편이 좋다.”

백호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작은 돌멩이를 집어 있는 힘껏 앞으로 던졌다.

“본인을 불행하다 생각하는 존재는 주변의 것들도 똑같게 만들지. 그런 것하고는 가까이 지내지 않는 편이 나아.”

“…….”

날아간 돌멩이가 앞쪽의 담벼락에 부딪쳐서 따닥,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호의 눈에는 호접화의 다른 무언가가 비추어지는 걸까.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호접화가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말이다.

명월은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쳤다.

여긴 정말로 알다가도 모를 곳이었다. 귀물이니 귀신이니, 그런 걸 제쳐 두고라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면 차차 알게 된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싶은 이 복잡한 마음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명월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백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명월 옆에 서선 건물 벽에 등을 기댔다.

“조금 전에 내가 한 말의 의미는―. 전에는 지켜보기만 했지만, 앞으로는 아닐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혼잣말처럼 이어지는 백호의 말에 명월은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눈을 내리뜬 채로 조용히 있는 명월을 두고 백호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소군, 그놈의 약점이 있는 장소를 알려 주지. 그리로 가자.”

“……그런 곳이 있었나?”

“당연히 있지.”

심드렁하다 할 수 있는 백호의 말에 명월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고개를 들고는 입을 벌리자 그 사이로 긴 한숨이 흘러나오고, 백호의 손이 명월의 손목을 붙잡았다.

조금 전, 호접화의 손길이 닿았던 바로 그곳이었다.

“다른 놈들처럼 나도 네가 여기저기 안 다니는 편이 낫다. 괜히 움직였다가 독각귀 그놈하고 만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

그래. 지금 백호도 자신처럼 복잡한 상황일 거다. 다른 것들은 무시하고 넘길 수 있다 쳐도 독각귀 일은 그게 아니었다.

자신의 부친이라는 그 독각귀는 아무래도 맛이 좀 가서, 자신을 이용해서 뭔가를 할 심산인 것 같으니까―.

명월의 눈빛은 차분했다. 고민의 흔적은 읽히지 않았기에 백호는 재차 물었다.

“어찌할 거냐. 지금 바로 그리로 갈 거냐.”

“위험한 곳이냐.”

“위험하다고 해도 나랑 같이 가는 것이니 괜찮다.”

백호의 확신에 찬 말에도 명월의 가라앉은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백호는 인간이 아니고, 무척 강한 존재였다. 그리고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가 개입할 필요가 없는 일들이었기 때문에 방관자의 입장에 서서 지켜보기만 했지만, 지금은 자신을 위해서 나서려 마음을 먹은 참이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찾고자 하는 화소군의 약점에 대해서 알려 주겠다는 거다.

혼자서 해결하고자 했다면 계속해서 겉면만 핥으면서 시간을 축냈을 거다. 하지만 여기서 백호의 도움을 받게 된다면 일은 한결 수월하게 해결될 거다.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고, 화소군 그놈도 단박에 처리할 수 있게 되는 거다. 아주 편하게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왜 망설여지는지 모르겠다.

자신만만한 백호의 눈을 봤을 때, 망설임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결국 그건 네가 아니라, 백호 그가 해내는 일이 아니겠느냐.

누군가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명월은 허벅지에 올린 손을 움켜쥐었고, 그 미미한 흔들림을 읽은 것인지 백호가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지금 그 작은 머리통을 굴려 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나는.”

“어차피 이 일은 인간들의 일이 아니다. 내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너 혼자선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지. 화소군 그놈이 먼저 비겁하게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짓을 해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 것이니 너도 똑같이 하면 된다. 그놈이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존재인 나를 써서 한 번에 일을 처리해라. 그리고 그 화가 놈의 손과 발을 묶은 후에 네가 처리를 하면 될 게 아니냐. 이러니저러니 해도 중간까지는 내 도움이 필요할 거다.”

백호의 말에 틀림은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명월의 마음은 시끄럽게 술렁거렸다.

“네가 도와주면 좋겠지. 훨씬 더 편하게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하지만, 라는 단서를 붙이고 난 후 명월은 속 시원히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뭔가를 말할 듯 말 듯하면서 망설이는 명월을 두고 백호의 안색이 굳는다.

여기까지 와서 뭘 망설이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래 결정을 내리면 그걸 밀고 나가야 성이 풀리는 백호였다. 결국 명월의 미적거리는 태도를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

“뭘 망설이는 거냐. 그냥 밀어 붙이면―.”

“네가 그동안 인간들 일에 개입하지 않고 방관자 입장을 고수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다. 그런데 이제 와 나 때문에 이런저런 도움을 주면서 인간들 일에 끼어들게 된다면 너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게 아니냐?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백호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그리 말을 하는 명월은 입을 다물었지만, 심각한 표정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명월도 지금 자신의 속을 종잡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얼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 백호가 나서는 게 능사가 아닐 것 같기도 했다. 그가 힘이 크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걸 남발해선 안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쪽에는 그쪽의 질서와 체계가 있는 게 아닐까. 이번 일을 처리하려 너무 끼어들고 나선다 하면 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게 아닐까.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싫을 것 같았다. 무척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았다.

솔직히 왜 이런 생각이 들고 기분이 드는지 알 순 없지만, 당장의 솔직한 표현이었다. 그리고 처음 명월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던 백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간다. 올라간 입매는 웃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정말로 웃는 거다.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매를 감추지 못한 채로 백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러운 억양으로 물었다.

“내가 어떻게 될까 봐 걱정이 되는 거냐?”

백호의 반문에 명월은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미 내뱉은 말에 대해선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말을 한 주제에 이제 와서 ‘그런 게 아니었다.’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잖아. 지금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너밖에 없는데.”

평소처럼 말하자 싶으면서도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내뱉는 말이 점점 더 꼬이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중간에 입을 다물고 자리를 피하고 싶은 걸 참으며 명월은 웅얼거렸다.

“네가 있으니까 내가 이렇게나 무모하게 굴 수 있는 건데…….”

말을 하다 말고 명월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조금은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었다. 덩달아 기분도 묘해진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괜히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거북해진다. 역시나 떡을 너무 급하게 먹은 걸까. 그게 중간에 얹혀서 이리된 걸지도 모른다면서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명월을 두고 백호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간다.

그는 팔을 들면서 명월에게 다가갔고, 그 순간 움찔한 명월이 급히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아직 접촉을 하기도 전인데 다가선 만큼 물러서는 명월의 행동에 바로 백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이건 대체 무언가. 그리 묻고 싶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백호를 두고 명월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머뭇거리던 명월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런 어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호와 이렇게 있자고 밖으로 나온 게 아니었다.

뭐든지 시간 싸움이었다. 백호가 귀가 솔깃해질 만한 말을 꺼냈으니, 그에 대한 대답을 하면 되었다.

어떤 식으로 대답하면 되는 걸까. 짧은 순간 그걸 궁리하는 동안에도 백호의 집요한 시선은 계속해서 얼굴에 달라붙은 채였다.

그 시선을 감당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던 명월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몸을 돌렸다. 그러곤 당장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혼자서 성큼성큼 멀어져 버리는 명월을 보던 백호는 한숨을 쉬었다. 저 녀석, 하고 중얼거린 백호는 바로 뒤를 쫓아갔다. 서둘러 걸어가는 명월에게 손을 뻗었다. 조금 더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데도 직전에 멈추었다.

여기서 조금 더 팔을 뻗으면 명월을 붙잡을 수 있다.

갑작스럽게 그 사실에 묘한 설렘을 느끼게 된다. 백호는 명월 쪽으로 한 손을 뻗은 채로 그에게서 시선 한 번 떼지 않았다.

엉성하게 묶어서 흔들리는 꽁지머리나, 나풀거리는 낡은 소매와 한쪽 어깨에 대충 걸친 망태기 등.

명월이 입고 걸치고 있기 때문일까. 묘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달랐다.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백호는 위로 손을 뻗었고, 명월의 긴 머리카락이 손가락 끝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 순간 손을 움켜쥔 백호는 명월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다 앞으로 크게 걸음을 옮겼다.

보폭을 넓게 해서 명월의 옆으로 간 백호는 당연한 듯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옆으로 와선 어깨동무를 하는 백호의 행동에 명월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명월을 확인한 백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고개를 숙인 백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너 말이야―.”

“꺄아아악―!!”

백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깥쪽에서 요란한 비명이 들렸다.

백호는 물론이거니와 명월의 얼굴에서도 표정이 사라졌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던 명월은 백호의 팔을 뿌리치곤 비명이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런 비명에 놀란 건지 몇몇 사람들이 소리가 들린 쪽을 살피면서 “무슨 일이야.”라고 중얼거렸다.

그때 저기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사, 사람 시체가 있어!”

그 순간 명월의 눈빛이 달라진다. 명월은 당장 소리가 들린 쪽으로 달려갔고, 백호도 혀를 차면서 뒤를 쫓았다.

* * *

예전에 내린 비로 인해서 수위가 높아졌던 냇가는 물이 많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들어가면 무릎 높이까진 물이 찼다. 그리고 바깥쪽으로 이어지는 수로 아래쪽에 누워 있는 사내가 보였다.

입고 있는 차림새를 봐서 사내라는 걸 알 수 있었던 그자는 엎드려 누운 채로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시체를 보기 위해서 몰려든 이들로 인해 냇가 위쪽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큰 장이 열리고 있던 참이었기 때문에 이 갑작스러운 일에 순식간에 사람이 몰려서 주변은 복잡했다. 그런 그들을 밀쳐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명월은 힘주어 그들을 밀쳐냈다.

처음에는 누가 미는 건가 싶어 험악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던 이들도, 명월의 경직된 얼굴을 보곤 움찔해선 알아서 물러났다.

힘겹게 가장 앞까지 나아간 명월은 아래쪽을 살폈다.

엎드려 있기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키와 체형 등을 보고 저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짧게 눈동자가 흔들린 명월이나 곧 손을 움켜쥐었다. 당장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시체를 구경하기만 하지, 근처로 다가서지 않던 사람들은 그런 명월의 행동에 기겁을 했다.

“거길 왜 들어가는 거야! 부정 타기 전에 냉큼 이리로 올라오게!”

“관아에 사람을 보냈으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냉큼 올라와!”

하나같이 시체를 건드리지 말고 올라오라 아우성이었지만, 명월은 거침이 없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시체를 바라보면서 명월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니겠지. 설마하니 저런 모습으로 나타날 리가 없었다. 아닐 터였다. 꼭 그래야만 한다면서 시체 옆으로 간 명월은 아래로 손을 뻗었다.

시체를 건드리려 하자 누군가 다급히 돌을 던지면서 그만두라고 했지만, 그 돌은 명월의 몸에 닿지 못했다. 시체에 맞으면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른다 생각해서 일부러 그 근처에 돌을 던진 거였다.

그렇게 몇몇 이들이 더 돌을 던졌고, 그것은 주변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명월의 집중력을 흩트릴 순 없었다.

이런 데서 발견된 것치고는 꽤나 말끔한 상태였다. 물에 빠져 죽은 거라면 이것보다 훨씬 더 퉁퉁 부어야 할 터인데.

어쩌면 살아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생각도 막상 사내의 어깨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 사라진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지나치게 차가웠다.

“…….”

이대로 손을 떼고 모르는 척 지나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다르게 손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사내의 어깨를 붙잡고 위로 세게 끌어당김과 동시에 축 처져 있던 사내의 고개가 뒤로 확 젖혀진다. 그리고 드러난 얼굴을 본 명월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는 명월의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호방 백전춘이었다.

* * *

관아 안의 분위기는 칙칙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최근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팽배했는데, 오늘은 완전히 초상집 같은 분위기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이 없었고, 그건 감옥 안에 들어가 있는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때가 되어서 저녁밥을 나눠 준 포졸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에 맞춰서 내내 가만히 있던 한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저기, 호방이 죽었다는 게 참인가?”

조심스러운 물음이었지만, 그 순간 감옥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귀가 이쪽으로 쫑긋 서는 걸 느낄 수 있었던 포졸은 혀를 찼다.

“감옥 안에만 있는 놈들이 왜 이렇게 정보에 밝아?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괜한 문제 일으키지 말고 일찍 자기나 하라면서 포졸은 몽둥이로 감옥 문을 두드렸다. 대답을 하지 않고 재빠르게 안쪽으로 사라지는 포졸이나, 그를 바라보는 사내는 굳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포졸들이 다들 쉬쉬하면서 말을 아끼고 있었지만, 이번에 화를 당한 게 호방이라는 건 파다하게 소문이 났다.

그가 며칠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설마설마 싶었는데, 결국 이리되었다.

더군다나 이번 호방의 죽음에 대해선 여러 말이 떠돌고 있었다. 몇은 언제나처럼 귀신의 소행이라 떠들어 대고, 몇은 호방이 누군가를 배신했기 때문에 그 본보기로 처리가 된 거라고들 떠들어 댔다.

하지만 너무도 예민한 사안이기 때문에 크게 말하는 자들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목소리를 죽인 채로 쑥덕거릴 따름이었다.

그리고 디딤돌 위에 앉아 있던 복운은 그런 포졸들의 술렁거림 때문에 귀가 가려웠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큰 목소리로 시원하게 할 것이지, 사내놈들이 왜 저렇게 쑥덕거리는지 모르겠다. 하는 꼴들을 보면 그냥 아랫도리를 떼어 버려야 한다면서 혀를 찬 복운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팠다. 그러고도 귀가 시원해지지 않는다.

그때 드르렁―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뜩이나 기분이 안 좋은 상태였던 복운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잡힌다.

저자는 원래부터 저랬다. 스님이라곤 하지만, 정말은 땡중일 테니 뭘 해도 신경 쓰지 않는 편이 나았다. 무시로 일관하는 것이 자신의 정신 건강에 좋다는 걸 알면서도 결국 두고 볼 수 없었던 복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청 위에 대자로 누워 있는 백호에게 다가갔다.

나갔다가 바로 돌아온 건 좋았지만, 저 호방의 시신도 함께 관아로 돌아왔다. 그 때문에 사또 명월의 안색이 말도 못할 정도로 어그러져 있었는데, 이 땡중은 오자마자 이렇게 대청에 누워서 들으라는 듯 코를 골아 댄다.

점심 때부터 저녁인 지금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계속해서 자고만 있었다. 다른 때라면 눈 딱 감고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냥 한 방 시원하게 갈겨 버렸으면 좋겠다면서 주먹을 움켜쥔 채로 허공에 든 복운은 이를 바득바득 갈아댔다.

이놈을 한 방 때릴 수 있으면, 십년 묵은 체증이 한 방에 다 내려갈 것 같은데 그리할 수 없으니 속만 터진다.

복운은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다가 괜히 바닥을 발로 찼다. 그러다가 재수 없게도 발가락이 디딤돌에 부딪쳤다.

발가락에서부터 올라오는 엄청난 통증에 복운은 눈을 크게 뜨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양손으로 발가락을 감싼 채로 어떻게든 아픔을 참아 보려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눈물과 콧물을 질질 흘리는 복운을 두고, 백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언제 자고 있었냐는 듯, 눈을 뜬 그의 눈동자는 맑았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검게 물든 허공을 바라보던 백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에 천천히 토해 냈다.

* * *

사인(死因)은 익사였다. 호방의 몸을 구석구석 살펴보던 의원은 익사로 인해 사망한 것 같다면서, 그 외에 다른 곳에 문제점은 없어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명월은 호방의 손목이나 팔뚝, 허벅지 안쪽에 남아 있는 멍을 발견했다. 의원이 호방의 몸을 살피는 동안 옆에 서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걸 의원도 모르지 않을 텐데, 바로 익사로 말하는 것에 어이가 없어 반문하자 의원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머뭇거리던 그는 ‘제 좁은 소견으로 알 수 있는 건 고작 이 정도입니다.’라면서 말을 아꼈다.

호방의 죽음에 분명 다른 원인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말하지 않으려 한다. 그걸 느낄 수 있었던 명월은 의원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고, 그 시선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의원은 시선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의원 그도 결국에는 약자의 입장에 있었다. 그로선 지금 이 일에 말을 아끼는 게 어쩔 수 없는 노릇일지도 모른다 생각을 하면서도 기분이 좋지가 않았던 명월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알았다, 라고 말했고 의원은 한참 만에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을 건넸다.

이미 고개를 돌려 버린 명월은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명월의 눈치를 살살 살피던 의원이 황급히 밖으로 나가고 이방이 들어왔고, 명월은 이종원을 불러올 것을 명했다.

다른 사람들 모르게 은밀하게 불러오라는 말에 이방은 물러났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이종원이 들어왔다.

이방도 바깥으로 나가게 한 후, 명월은 이종원에게 호방의 상태를 확인하라 했다. 처음에는 쭈뼛거리던 이종원은 찬찬히 호방을 살폈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얼마 되지도 않아서 바로 표정의 변화가 있었다. 이종원과의 사이에서 새삼 말을 가릴 필요가 없었던 명월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귀신의 짓이냐. 사람의 짓이냐.

그 물음에 이종원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긴 했으나, 막상 듣게 되자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자연스럽게 표정이 굳어지는 명월을 앞에 두고 이종원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러곤 저도 이곳에서 살아야 하니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하는 이종원의 대꾸에 잠자코 있던 명월은 나가 보라 말했다. 고개를 꾸벅인 이종원이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갔고, 명월은 한참 동안 호방의 옆에 서선 그 얼굴을 살폈다.

언뜻 보면 자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죽은 사람 같지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호방을 찾기를 그만두라 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 살아있을지도 몰랐다.

그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한쪽이 뻐근해진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을 느끼면서 고개를 든 명월은 긴 숨을 토해 냈다.

“사또, 아직도 이곳에 계십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에 명월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뒤에 서 있는 이방의 얼굴 가득히 염려가 묻어나 있었다. 그가 왜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르진 않았던 명월은 아예 그리로 몸을 돌려선 이방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두어 번 토닥이면서 옆을 지나친 명월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와도 바람이 불지 않으니 시원하지가 않았다. 고개를 든 명월은 눈을 감았고, 그 미간으론 짙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화가 나지만, 이게 어디서부터 오는 분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서 있던 명월은 고개를 숙였고, 옆에 선 이방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게.”

지금 명월의 상태는 누가 보더라도 심상치 않았다. 이러다가 일이라도 치는 게 아닐까 싶었던 이방은 머뭇거렸으나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멀어지는 이방을 두고 명월은 한참을 문 앞에 서 있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나지 않는 법이었다. 안에 있는 시체는 가능한 서둘러 처리를 하는 게 옳았다. 그 전에 호방을 저리 만든 자를 붙잡을 거다.

증거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지금 마음을 가득 채우는 의혹만으로도 사람 하나를 잡아들일 만했다.

화소군. 그를 떠올리며 명월은 이를 악물었다.

“왜 그런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냐.”

놀라 고개를 든 명월은 앞에 서 있는 백호를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백호는 평소처럼 승복을 입은 게 아니라, 하얀 호랑이 가죽을 쓰고 있었다.

관아 안에서 왜 저런 몰골로 서 있는지 모르겠다. 저러다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바로 그때 이리로 달려오는 포졸이 하나 보였다. 다급한 얼굴인 포졸을 보는 순간 명월은 아차 싶어서 재차 백호의 얼굴을 봤다. 하지만 백호는 태연했고, 포졸은 그 옆을 지나쳐 갔다. 애초에 그곳에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제야 명월은 지금 백호가 포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있던 명월이나 곧 화가 나 표정이 굳어진다.

그런 거라면 말이라도 해 주면 좋지 않은가.

이쪽도 쓸데없이 걱정하지 않았을 텐데.

백호 때문에 안색을 굳히는 명월이지만, 그걸 어찌 생각한 건지 앞으로 달려온 포졸은 우물쭈물거렸다. 망설이던 포졸은 조심스레 “사또. 이방께서 이리로 보내서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방이 그냥 관아를 뜨기엔 명월이 신경 쓰여서 믿을 만한 포졸을 보낸 모양이었다.

흠칫거리면서 계속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포졸을 두고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포졸은 안에서 보초를 서야 하는 자일 터였다. 그자에게 호방의 시신이 있는 곳을 지키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동안 백호가 움직였다.

이리로 다가오는 그를 본 명월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아니. 왜 갑자기 이리로 오는지 모르겠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묻기도 전에 백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화들짝 놀란 포졸이 문을 가리켰다.

“무, 문이 갑자기 열렸습니다!”

백호가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문이 열린 것일 뿐, 그 외에 특별할 거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포졸의 얼굴은 하얗게 질린 채였다. 그것에 당황한 명월은 다급히 말했다.

“바람이 불어서 그런 거다.”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이상하게 변하는 포졸의 얼굴은 ‘지금 대체 바람이 어디서 분단 말입니까.’라고 묻고 있었다.

실제로 바람 하나 불지 않는 습하고 더운 날씨였다. 당황해선 되지도 않는 말을 했다면서 입을 꾹 다문 명월은 일단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건물이 낡아서 문이 저절로 열릴 때도 있는 거다. 신경 쓰지 말고 저기 멀찍이 떨어져 있거라.”

“하지만 이방께선 사또 곁에서 잘 보살펴 드리라고―.”

“이방 보다는 내 말을 따라야 할 게 아니냐. 잔말 말고 하라는 대로 해라.”

눈에 힘을 주고 단호히 말하자 움찔한 포졸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자니 괜히 위압적으로 나간 건가 싶으면서도 더 신경 써 줄 수가 없었다.

명월은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 바로 닫았다. 닫힌 나무문을 등 뒤로 한 채로 안쪽을 살폈다. 백호는 누워 있는 호방 옆에 서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호가 왜 저런 차림새로 여기에 나타난 건지 모르겠다. 원래 그는 사람이 죽는 일에 대해선 무심했다. 그런데 왜…….

그때 백호가 천천히 손을 들어선 호방 얼굴 위를 덮으려는 듯 내리는 게 보였다. 움찔한 명월은 다급히 그리로 달려가 백호의 손목을 잡아챘다.

“기다려. 지금 대체 뭘 할 셈이야?”

“왜? 내가 이 인간에게 이상한 짓이라도 할 것 같아서 그러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며 장난스럽게 묻는 말에 명월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생각으로 지금 백호의 손목을 붙잡은 게 아니었다. 지금은 명월도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굳이 백호까지 나서서 이상한 행동을 취할 필요가 없었다. 마른침을 삼킨 명월은 차분히 말했다.

“죽은 사람이다. 건드릴 필요가 없어.”

“이건 죽지 않았다.”

“…….”

너무도 태연히 하는 말을 순간적으로 흘려들을 뻔했다. 하지만 백호가 하는 말의 의미를 파악한 명월의 눈동자가 서서히 크게 떠진다.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명월을 두고, 백호가 재차 말했다.

“죽지 않았어. 잘 봐라.”

백호를 보는 명월의 눈동자는 완전히 굳어 있었다.

지금 백호가 자신을 놀리기 위해 이런 말을 꺼내는 거라면 절대로 용서치 않을 셈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걸 두고 사람을 놀릴 자가 아니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명월이 발견을 했을 때, 호방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의 상태를 살핀 의원과 이종원은 분명 죽었다 말했다. 그랬는데 백호가 죽지 않았다 해서 정말 그럴 리가 없잖은가―.

의구심을 담은 명월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진다. 믿을 수 없어. 그리 말하고픈 듯 느리게 고개를 젓는 명월이나, 백호는 그 얼굴에서 시선 한 번 떼지 않았다.

얼굴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명월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호방을 보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백호가 죽지 않았다 해서 호방이 바로 눈을 떠 자신을 올려다볼 리가 없었다.

망설이던 명월은 호방의 목 부근의 맥에 손가락을 대 봤다. 맥이 잡히질 않았다. 명월은 이번엔 고개를 숙여선 호방의 심장이 있는 곳에 대 보려 했다.

직접 심장이 뛰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편이 훨씬 빠를 거라 생각했던 거다. 하지만 그때 백호가 “뭘 하려는 거냐.”라면서 명월의 어깨를 잡아 위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다른 손으론 호방의 뺨을 시원하게 올려쳤다. 짝―하는 소리와 함께 백호가 심드렁하니 말했다.

“이만 되었으니 일어나라.”

몸을 숙이려다 말고 백호에게 잡혀서 다시 일어선 명월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명월이 보기엔 죽은 자였다. 그런 존재에게 저렇게 손찌검을 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을 접한 듯 가만히 있는 명월을 두고 백호가 재차 호방의 뺨을 치려 했다.

“기다려―!”

놀란 명월은 급히 앞으로 손을 뻗었다.

처음엔 모르는 새에 벌어진 일이라 해도 두 번째마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죽든 살든, 누워 있는 사람에게 함부로 손찌검을 해선 안 되는 법이었다.

그러지 말라는 말을 하려던 순간 아래쪽에서 쿨럭―하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 놀란 명월은 백호의 손목을 잡은 채로 굳어 버렸다.

설마, 그럴 리가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을 경험하게 된 명월은 굳은 시선으로 백호를 바라봤고, 그는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의심스러우면 그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라. 그리 말하는 식으로 행동하는 백호를 두고 명월은 재차 마른침을 삼켰다.

명월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뒤엉켰다. 그걸 내리누른 채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을 때, 호방이 크게 기침을 하면서 가슴을 들썩였다. 그러곤 신음을 흘리나 싶더니 내내 감겨져 있던 눈동자가 서서히 떠진다.

실핏줄이 다 터져서 붉은 색으로 보이는 눈동자가 힘겹게 주변을 살피다가 백호를 보는 순간 크게 떠진다.

“히익―!”

“큰 소리 내면 넌 복날의 개처럼 두들겨 맞을 거다.”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백호의 말에 호방은 다급히 손을 들어선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워낙에 놀랐던 그는 입을 막은 채로 한참동안 기침을 해댔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인다. 얼굴이 벌겋게 될 정도로 힘겹게 기침을 하는 그를 두고 명월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을 해 줄 자라면 딱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명월은 백호를 올려다봤고,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 웃는 얼굴을 본 명월은 저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었다.

무슨 짓을 한 건지 알 수는 없으나, 자신 모르게 일을 이렇게 꼬이게 만든 백호 그가 얄미웠던 거다.

* * *

대체 누가 진주를 준 거냐고 연거푸 묻는 화소군을 앞에 두고 호방은 그저 울기만 했다.

화소군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가 묻는 질문에 대해선 바로 대답을 해야지만 그의 화를 사지 않음을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 없이 뜨거운 눈물만 쏟아졌다. 왜 이렇게까지 눈물이 흐르는지 본인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간 쌓인 회한 때문일까. 그도 아니라면 앞으로 자신이 어찌될지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대답을 하더라도 화소군은 자신을 살려 두지 않을 거다. 화소군에게 말할 수 없는 ‘그’의 존재는 시키는 대로만 하면 살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은 분명 이대로 죽게 될 터였다. 오로지 그 생각 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화소군이 하는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어딘가로 질질 끌려가게 되었다.

커다란 자루에 들어가선 어디로 운반되는지 알 수 없었다. 보이는 것 없이 덜컹거리면서 흔들리는 수레 소리를 들으면서 호방은 숨죽인 채로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바깥으로 끌려 나왔다.

무릎이 꿇려진 호방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검은 복면을 한, 화소군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자들이 서 있었다.

코와 입을 복면으로 가려서 눈만 보이는 그들이 두려웠다. 전에는 그들이 사람처럼 여겨지지 않아서 차마 똑바로 쳐다도 볼 수 없었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마지막이기 때문일까. 마음 편히 그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굵직한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올려다보는 게 재수가 없었던 걸까. 검집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호방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흙이 코와 입으로 들어왔다. 신음도 흘리지 못하고 침만 질질 흘리고 있는데 뭔가가 발목을 동여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팔도 뒤로 꺾어져선 묶여졌다. 그 순간 호방은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다.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걸로 정말 끝이라는 생각으로 인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도록 몸을 내리누르는 이들의 힘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셌다. 버둥거려도 입으로 더 많은 흙만 들어왔다.

입 안을 가득 채우다 못해서 목구멍으로도 넘어가는 흙을 뱉어 낼 수도 없었다. 버둥거리는 동안 그대로 몸이 들려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저항을 했지만, 호방의 몸은 그대로 던져졌다.

몸이 공중으로 뜨는 느낌이 들더니 이윽고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물속으로 들어갔다.

호방은 수면 위로 올라가려 했지만, 손은 뒤로 묶여졌고, 다리에는 무거운 게 매달려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아래를 살펴보자 돌이 매달려 있었다. 저런 걸 매다니 계속해서 몸이 가라앉는 거였다.

살아날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구나. 화소군이 두려운 자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같은 사람으로서 어찌 이럴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아니. 그자는 사람이 아닌 거다. 사람의 뼈와 피와 살이 붙어 있지 않는 거라면서 호방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렇게 끝이었다. 마지막 순간 떠오르는 가족들의 얼굴도 없다는 게 이토록 슬픈 일인지 몰랐다면서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저기 위에서 희끗한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왔다. 그 순간 호방의 흐릿한 정신이 맑아졌다. 정말 놀라선 눈을 크게 뜬 채로 다가오는 걸 바라봤다.

하얀 호랑이였다. 어마어마하게 큰 호랑이가 자신에게 다가왔고, 말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해서 그냥 죽은 척을 했다, 이거냐?”

어이가 없다는 억양의 물음에 감자를 입에 물고 있던 호방은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피부가 퍼렇게 물들어선 죽었다는 말을 듣던 호방이, 지금은 누워 있던 그 자리에 앉아 감자를 입에 물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속이 허하다면서 극심한 굶주림을 호소했기 때문에 급한 대로 준비해서 안겨 준 감자인데, 그는 벌써 그걸 거의 다 먹어 가고 있었다.

그나마 손에 들고 있던 것도 한입에 털어 넣은 그는 손가락을 삭삭 핥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죽은 척을 했던 게 아니라, 전 정말로 죽었던 겁니다. 의식을 잃은 동안 무슨 일이 생겼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안 그래도 그를 살피던 다른 이들은 하나같이 호방이 죽었다 했다. 그러니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신기해할 필요가 없었다.

팔짱을 낀 채로 호방의 말을 듣던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정말로 죽었다 생각하고, 그를 살리지 못했다는 걸 두고 자괴감을 느끼던 게 바로 조금 전이었다. 하지만 호방은 다시 살아났고 그 모든 게 전부 다 하얀 호랑이 덕분이라 말했다.

그 호랑이의 말을 들으니 무사히 살아난 거고, 그 호랑이는 분명 산신이 분한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막 눈을 떠선 그 호랑이가 보이는 것 같았지만, 자신의 착각인 모양이라면서 웃던 호방은 곧 안색을 굳히면서 ‘앞으로는 호랑이를 모셔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저 하고 싶은 말을 나불나불 해대는 걸 보자니 분명 호방이 맞았다. 어딘가 아픈 구석이나 잘못된 곳은 없어 보였다. 죽었다 살아나서 정말 괜찮은지 걱정이 되었는데 말이다.

명월은 내내 팔짱을 낀 채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복잡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그 얼굴을 살피던 호방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기 사또―.”

“널 죽이려 했던 게 화소군이었던 거냐.”

앞서 말을 해서 알고 있을 텐데도 묻는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상황이 이리되었는데도 호방은 말을 할 때 화소군을 ‘그’나 ‘그 존재’, 등으로 언급했으니 말이다.

다시 살아났다 하더라도, 화소군이 안다면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때문에 몇 번이나 망설이던 호방은 환상처럼 나타났던 호랑이를 떠올렸다.

그는 수호신 같은 존재였다. 다음번에도 화소군이 수작을 부리려 한다면 환상처럼 나타나 자신을 도와줄 거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호방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넌 화소군의 눈과 귀가 되어서 모든 걸 보고했던 것이냐.”

“그, 그래 봤자 많은 걸 발설하진 않았습니다. 사또께서 워낙 종잡을 수 없는 분이기도 하시고―.”

말을 하다 말고 호방은 입을 다물었다. 이건 영락없이 험담을 하는 거였다. 다른 식으로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 잠자코 있는데 명월이 재차 물었다.

“만약, 화소군의 이번 일에 관해서 내가 일을 처리한다 했을 때 네가 그의 악행을 증언할 수 있겠느냐.”

“…….”

호방의 입이 무겁게 다물렸다. 내리뜬 눈동자 안쪽으로 서리는 두려움이 감추어지지 않았다.

그간 꽤 오랫동안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한 화소군이니만큼 그를 배신하고, 그의 죄를 증언하는 일이 쉽진 않을 거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필요가 없어졌다고 해서 널 죽이려 했던 자이다. 두 번이라고 못하겠느냐. 넌 그때마다 당하고만 있을 거냐. 호랑이니 뭐니 헛소리는 그만두고 네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 봐라. 이번엔 운이 좋았지만, 다음에는 없다.”

명월의 단호한 말에도 호방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명월은 그 미련을 단박에 비벼 꺼 주었다.

“다음에 넌 반드시 죽을 거다.”

매달리듯 명월을 바라보던 호방의 눈동자로 힘이 들어간다.

제발 그런 말을 하지 말아 달라며 마지막 애원을 담아 바라보는 시선에도 명월의 태도엔 흔들림이 없었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그 모습에서 화소군이 보이는 것 같다면서 호방은 절망했다.

무거운 한숨을 내쉰 호방은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사또, 화소군 그자는 크나큰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이 반양에선 그의 뜻을 거역해서 살아난 이가 없습니다. 예전에 부임해 온 사또 중에서도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 이가 있었습니다. 제가 은밀히 알아보니 얼마 못 가서 죽었다 하더이다. 다른 곳에서도 제 뜻에 어긋난 짓을 한 자를 처리할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런 자를 어찌―.”

“그래 봤자 상인 나부랭이가 아니더냐.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그는 사람을 죽이려 했다. 그가 상인이 아니라, 영의정이라 할지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입으로는 무슨 말을 못하겠는가.

호방은 절망적인 얼굴로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자가 두렵습니다.”

“화소군은 살아난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네가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화소군을 먼저 치는 거다.”

“…….”

“그간 당한 일이 억울하지도 않은 거냐. 어떤 식으로든지 되갚아 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거냐.”

호방은 무겁게 입을 다물었다. 당장은 명월이 하는 말에 대해선 긍정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눈을 내리뜨곤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있는 호방을 두고 명월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이 뭐라 한들, 그 두려움을 바로 이겨내기란 어려울 거다. 죽었다가 살아난 호방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밀어붙인다 해서 그가 따라올 것도 아니었다. 명월은 이쯤 해 두기로 했다.

“일단은 이곳에서 생각을 정리해 보도록 해라. 넌 여기서 죽은 자이니 힘들고 고되더라도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한다. 끼니는 내 알아서 챙겨 줄 테니, 그 외의 시간에는 쓸데없이 움직이지 말고 누워만 있어라. 알겠느냐.”

내내 고개를 숙이고만 있던 호방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명월을 보나 싶던 호방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어쩌면 제가 꿈에서 본 건 하얀 호랑이가 아니라 사또이신 걸지도 모릅니다. 사또께서 제 수호신이셔서 제가 위험한 고비에 처하게 되면 절 도와주시는…….”

“나 또한 화소군과 별반 다르지 않은 자이다. 네가 이용 가치가 된다면 곁에 두겠지만, 아니라면 그냥 화소군에게 보내 버릴 거다.”

단호한 말에 호방은 헛숨을 삼켰다.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며, 진심은 아니실 거라며 매달리듯 바라보는 그를 두고도 명월은 단호했다.

“네놈의 목숨을 누군가에게 의지하려 들지 마라. 따지고 보면 네놈은 내 적이나 마찬가지다. 그간 날 속여 왔던 게 아니냐. 그런 네놈이 살아 돌아왔다고 해서 내가 두 팔 벌려 환영할 거라 생각하지 마라. 내게 다시 붙어서 살고 싶다면, 응당 그만한 성의를 보여야 하는 법이다. 그게 바로 사람 사는 이치지. 더 말하지 않아도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다.”

호방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명월은 그를 어르고 달래 줄 마음이 없었다. 여기까지 말했으니 알아먹는 건 호방의 몫이었다.

명월은 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고, 문을 닫았다. 근처에 서 있던 포졸이 놀라서 쳐다보는 걸 확인한 명월은 턱짓을 했다. 굳어 있는 명월의 얼굴만으로도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있었던 포졸은 저만치 떨어졌다.

포졸이 멀찍이 물러서자 명월은 허리에 한 손을 올리곤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기다렸다는 듯 옆에 선 백호가 한마디 건넸다.

“똑 부러지는군.”

“빈정거리지 마. 안 그래도 기분 굉장히 언짢으니까.”

실제로도 점점 더 기분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이럴 때 시비가 걸리면 주먹부터 휘두를 것 같다.

뭐든지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게 가장 안 좋은 건데 그리되고 있다면서 명월은 백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뚫어지라 올려다보는 명월의 얼굴을 본 백호의 눈썹이 살며시 올라간다. 왜 그런 식으로 쳐다보느냐는 눈빛이었다. 명월은 당장 백호 쪽으로 손가락을 세웠다.

“너 말이야―.”

그때 저 앞에 서 있던 포졸이 뒤를 흘깃거리면서 보는 게 느껴졌다.

지금 백호는 자신의 눈에만 보이고 있었다. 백호와 대화를 나눈다 한들, 다른 사람들 눈에는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목구멍 바로 앞까지 올라온 말을 삼킨 명월은 백호의 손목을 붙잡곤 몸을 돌렸다. 백호는 그런 명월의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 * *

거처로 돌아오자 명월을 맞이하는 건, 그 앞에 청승맞게 쪼그리고 앉아 있던 복운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반가운 얼굴로 맞이해 주는 복운을 두고 명월은 앞으로 걸어갔다.

“아직도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냐. 방에 들어가서 쉬어도 된다고 하지 않았냐.”

“사또께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는데 제가 어찌 쉴 수 있겠습니까.”

웃으면서 그리 말한 복운은 명월의 안색을 조심스레 살폈다. 눈빛 안쪽으로 자신을 염려하는 기색이 묻어났지만, 지금은 복운하고 길게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명월은 가볍게 손짓을 했다.

“되었으니 너도 이만 가 봐라. 난 방에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목욕물을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 괜찮다.”

하지만 복운이 보기엔 괜찮지가 않았다. 여전히 심마니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는 명월이었다.

거기다 낮부터 바깥에 다녔고, 조금 전까진 호방의 곁에 있었다. 원래 죽은 사람 옆에 있다가 올 때에는 그 몸에 소금을 뿌리는 법이었다.

실제로 지금 복운의 품 안쪽에는 소금 주머니가 들려 있었지만, 그걸 정말로 명월에게 뿌린다면 한소리 들을 터였다.

명월의 안색이 좋지도 않고 괜히 말을 섞으면 안 될 것 같았던 복운은 망설이다가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사또, 하고 입을 열었다.

“그 스님께서 내내 대청에 누워서 주무시다가 갑자기 일어나 어딘가로 가 버리셨는데 말입니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복운이나 그 눈동자 안쪽에는 백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기색이 잔뜩 묻어났다.

복운이 앞으로 어떤 말을 할지 알 것 같기도 했고, 그가 말을 꺼낸 대상이 뒤에 서 있기도 했기에 명월은 가벼운 한숨을 쉬면서 그대로 대청 위로 올라갔다.

말을 채 듣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명월의 행동에 복운의 얼굴로 못내 서운한 기색이 스친다. 하지만 피곤해 보이는 명월을 붙잡을 수도 없었던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복운을 두고 방으로 들어선 명월은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방 중간에서 멈춰 서선 바로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백호가 서 있었다.

아까부터 조용히 뒤를 졸래졸래 따르기만 하는 모습에 명월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녀석답지 않게 조용하다.

“호방이 저리될 걸 넌 이미 알고 있었던 거냐.”

“앞으로 죽을 사람은 그런 티가 나기 마련이다. 안 보고 싶어도 보이는 법이지.”

명월이 이런 걸 물을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백호는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래서 도와줬다는 거냐? 네가?”

“원래는 도와주지 않았겠지. 네가 그 화소군이라는 놈을 신경 쓰고, 놈도 널 건드리는 것 같으니 한번 손을 써 둔 것뿐이다. 이리해 두면 네 일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던 거지. 단지 그뿐이었다.”

“그래도 이런 일이 있다면 미리 말해 줘야 하는 게 아니냐. 내가 호방을 찾아 다녔다는 걸 알고 있었을 거 아니야.”

“내가 뭘 할 때마다 일일이 너에게 말해야 하는 거냐.”

“당연한 거 아니야? 네가 했다 하더라도 나와 관련된 일인데, 그걸 내가 모르고 있으면 그게 무슨 의미야. 지금처럼 갑자기 호방이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보통 사람들이 그런 걸 이해할 줄 알아? 아무리 나라 해도 이번 일을 그냥 이해하고 넘길 순 없는 노릇이야―.”

물론 백호가 달리 생각하는 게 있으니 그런 짓을 꾸민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자신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면 싶었다. 그래야 뭔가 해야 할 것들이 보다 선명해질 게 아니겠는가. 다 지난 후에 그런 일이 있었지, 라고 알게 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뭔가를 하려면 말을 해.”

“앞으로 하는 일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전부 다 말하라는 거냐.”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백호는 지금 이쪽이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투였다. 하지만 명월은 물러서지 않고 그래, 라고 단호히 대꾸했다. 그런 명월의 말에 잠자코 있나 싶던 백호의 한쪽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때로는 알지 않는 편이 나을 때가 있다. 그리고 지금 진행되는 일들이 모두 네가 나서야 할 것들도 아니야.”

“…….”

백호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지금 반양 곳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명월 그와 관련된 건 아니었다. 꼭 그가 해결해야 할 것들도 아니긴 했다.

그건 알지만 막상 저런 말을 듣게 되니 기분이 좋지가 않다. 자연스럽게 얼굴이 굳어진 명월은 아래로 내린 양손을 움켜쥐었다.

“그러면 내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라도 알려 줘. 화소군, 그놈의 약점이 있는 장소를 알고 싶어.”

“일단 쉬어라. 쉬고 일어나면 그때 알려 주지.”

지금 명월이 원하는 건 휴식 같은 게 아니었다. 당장 화소군 그놈의 약점을 알아내서 더 이상 이상한 짓을 할 수 없도록 할 셈이었다.

알려 달라 하면 당장 말을 꺼낼 것처럼 굴더니만, 왜 또 갑자기 말을 바꾸는지 모르겠다. 그런 백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고, 화도 났던 명월의 안색이 굳어진다.

“난 쉬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 당장 알고 싶으니까 말해.”

“지금은 안 된다. 지금의 너는 일단 눈을 좀 붙일 필요가 있어.”

“자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의 난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니까―.”

동시에 백호의 손이 위로 올라온다. 다가오는 백호의 손을 본 명월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쳐서 몸을 피하려는 명월의 행동에 맞춰서 백호의 손이 그의 이마에 닿더니 얼굴을 감싸듯이 눌렀다.

왜일까. 백호의 손이 닿는 순간 명월은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동시에 지금 자신의 몸 상태도 보다 확실하게 인지가 된다. 몸이 나른하고 눈도 침침했다.

호방의 일 때문에 지나치게 신경을 써서 그런지 약간의 두통도 있었다.

지금 이 상태로 움직인다면 중간에 지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백호는 그걸 간파해선 일단은 쉬고 나서 움직이자 먼저 말을 꺼낸 거다.

결국엔 자신이 걱정이 되어서 저리 말을 해 주는 건데 자신은 그걸 두고 예민하게 반응한 거다.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문득 드는 생각 후에 밀려오는 후회에 명월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차분하게 변한 명월의 얼굴을 살핀 백호가 물었다.

“괜찮은 거냐.”

무엇에 대한 괜찮음을 묻는 것인지 명월은 모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대답하지 않고 있자 백호가 재차 말했다.

“내가 지금 당장 가서 그 화소군이라는 놈의 목을 비틀어 버리면 모든 일이 끝난다. 그걸 원한다면 그리 말해라. 해 주겠다.”

“……그런 방식을 쓰고 싶진 않아.”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할 것 같으니까, 참고 있는 거다.”

명월 몰래 이런저런 일을 하긴 했지만, 곧장 화소군을 찾아가 그에게 해를 가하진 않았다.

정말로 화소군을 죽이고 와서 처리했다, 라고 하지 않은 한 명월이 화를 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게 지금 백호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명월이 정말 화를 내고 두 번 다시 자신을 보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참는 거였다.

이 정도로까지 생각하면서 움직이다니. 문득 드는 생각에 백호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면서 명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전히 백호의 손은 명월의 이마에 올려져 있었다. 명월은 눈을 내리뜨고 있었다. 묘하게 굳은 그 얼굴은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정말로 그런 건 아니었다. 아마도 속이 시끄럽겠지.

저렇게 신경 쓸 게 많아서야 금방 늙게 생겼다면서 백호는 명월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한 팔로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한 건지 명월이 버릇처럼 그 몸을 밀어내려 한다.

“가만히 있어라.”

차분한 백호의 말에 그를 밀어내려던 명월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는 손을 느끼면서 백호는 아예 양손으로 명월을 끌어안고는 그의 뺨에 제 뺨을 눌렀다. 호랑이 머리 때문에 자세가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명월을 양팔로 끌어안은 채로 백호는 중얼거렸다.

“서두르고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내가 네 곁에 있는 한, 너에게 나쁜 일은 생기지 않을 거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한없이 나긋하고 부드러웠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백호는 명월을 끌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런 백호의 품에 안긴 채로 있던 명월은 천천히 눈을 감고는 듬직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