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가마를 들고 움직이던 사내가 헛숨을 삼키면서 한쪽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가마에 앉아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화소군은 갑작스럽게 휘청거리는 가마에 당황해선 고개를 들었다.
무얼 하는 거냐는 말을 하기도 전에 다른 쪽에 있던 사내들도 비슷한 모양으로 그 자리에 하나, 둘 쓰러졌다.
막 산길로 들어서던 중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은 없다 하나 갑작스러운 일이 당황스러웠다.
가마가 크게 휘청거리긴 했지만, 넘어지진 않았던 화소군은 급히 아래로 내려와 앞에 있는 가마꾼의 어깨를 붙잡았다.
“지금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고작 이런 가마 하나 못 드는 거냐고 한소리 하려던 화소군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사내를 보곤 입을 다물었다.
설마 싶었던 그는 급히 다른 쪽에 있는 자들의 얼굴도 확인했다. 그러다가 뒤에 서 있는 자의 품에 손을 넣어선, 그의 돈주머니를 끄집어냈다.
화소군이 눈앞에서 돈주머니를 빼는 걸 알면서도 사내는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했다. 그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보고만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거친 숨을 몰아쉰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그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화소군은 사내의 돈주머니를 열고 거기서 붉은 종이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걸 펼치려 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불이 붙었고, 부적이 재가 되어서 공중으로 흩어졌다.
“……윽?!”
부적은 바로 사라졌지만, 짧게나마 스친 불씨는 화소군의 손가락에 뚜렷한 화상 자국을 만들었다.
손가락 끝이 얼얼할 정도의 통증에 화소군은 놀라서 손을 움켜쥔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저 앞에 검은 복면을 쓴 사내가 보였다.
원래 이런 일이 생기면 그 누구보다 먼저 가까이 다가와야 할 사내가 멀찍이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상한 모습이었다. 화소군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기서 뭘 보고만 있는 거냐!”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 외침에도 사내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따름이었다.
복면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이상했다. 그걸 본 화소군은 이를 갈았다. 그러곤 당장 몸을 돌려 산길을 뛰어 올라갔다.
명월에게 붙인 자들이 모두 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래서 바로 거점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모르겠다.
설마하니 저들이 저리된 것이나 부적이 사라진 게 명월 때문인 것인가. 그가 그 정도의 일을 해낼 수 있는 존재였단 말인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위험의 고비를 넘어서긴 했지만, 이처럼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 무언가 끝나 버릴 것 같은 그런 불길함이 숨통을 조여 온다.
아닐 거라고, 자신이 그리 쉽게 무너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화소군의 얼굴은 초조함으로 물들어 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산을 타고 올라가던 화소군은 오른쪽 손가락 끝에서 올라오는 날카로운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움켜쥐고 있던 손을 눈앞으로 들었다 그의 오른쪽 손가락 가운데 두 마디가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
그걸 본 화소군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진다. 멍하니 제 손가락을 보던 화소군은 헛웃음을 흘리다가 바로 뒤를 돌아봤다.
정신없이 뛰어 올라와서 꽤 멀리까지 왔다. 뒤를 돌아보니 보이는 게 없고, 그건 앞도 마찬가지였다.
저기 멀리 보이는 처마로 가기 전까진, 자신의 주변엔 그 무엇도 없을 거다.
죽으나 사나, 일단은 저리로 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화소군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가야 할 곳이 명확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손가락 끝에서 올라오는 통증도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던 그는 간신히 거대한 저택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단단하게 닫힌 대문 앞에 멈춰 선 화소군은 문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손이 아파서 세게 두드릴 수 없었으나, 안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점점 더 힘이 들어간다.
나중에는 대문이 흔들릴 정도로 거세게 문을 치게 되었다. 그러자 안쪽에서 “누구냐?”라는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달려와 문을 열려 하자 화소군은 대문을 두드리던 손을 내렸다.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세게 문을 두드렸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손가락에서부터 올라오는 얼얼한 통증에 화소군은 세게 손을 움켜쥐었다가 펼쳤다. 동시에 대문이 열리고 노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시끄럽게 구는―. 행수님?”
웬 정신 나간 놈이 시끄럽게 구는 건가 싶었는데 나와 보니 바로 화소군이었다.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고, 땀을 흘리는 모습이 급하게 달려온 듯했다.
사람이 급한 일이 있으면 뛸 수도 있는 법이지만, 지금껏 이런 행수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만큼 노인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하니 혼자 여기까지 온 건가 싶어 바깥을 살피자 아무도 없다.
“가마꾼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혼자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믿을 수 없는 일에 그리 물으며 고개를 돌리자 화소군이 급히 옆을 지나쳐 간다.
묻는 말에 대꾸도 없이 서둘러 안쪽으로 들어가 버리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노인은 급히 뒤를 쫓았다.
지금 화소군의 모습은 암만 봐도 이상했다. 일단 쫓아가서 달리 필요한 것이 있지나 않은지 말이라도 건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화소군이 뒤를 돌아보면서 한마디 했다.
“날 따라오지 마라.”
그리 말하는 화소군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광기가 스며든 그 눈빛을 본 노인은 놀라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상대가 멈춘 걸 확인하고 나서야 화소군은 재차 움직였다. 빠르게 안으로 들어가서 이윽고 사라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노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노인을 뒤로하고 화소군은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다른 사람들은 거의 걸음을 하지 않는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을 찾기 위해서였다.
서둘러 움직이는 동안 허벅지 안쪽이 찢어질 것처럼 당기는 통증이 느껴졌다. 몇 번 비틀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꺾어진 복도로 들어서는 순간 검은 무언가가 눈앞으로 나타났다.
“―행수님!”
갑작스럽게 나타난 존재에 놀란 화소군은 걸음을 멈췄다. 벽에 등을 기대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주저앉았을지도 모를 정도로 크게 놀랐다.
그는 눈을 크게 떠 앞에 서 있는 복면인을 노려봤다. 양손으로 목을 감싸 쥔 복면인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행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해, 행수님. 살려 주십시오. 숨을 쉴 수가…….”
사내의 말은 계속 이어질 수 없었다. 크게 가슴을 들썩이나 싶더니 붉은 피를 토해 낸다. 마치 바가지로 물을 붓듯이 피를 뱉어 내는 복면인을 두고 화소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복면인은 살고자 화소군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화소군은 냉철하게 그 손을 뿌리쳤다. 매달려 오는 복면인을 밀어내곤 그를 지나쳐 갔다.
지금은 다른 이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롯이 자신에게만 집중해야 하는 때였다. 어금니를 악문 화소군은 절뚝거리면서 걸었다. 이렇게까지 걷는 건 정말 오랜만이지 않으냐면서 그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닫혀져 있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을 가로질러 들어가선 벽 한쪽에 걸린 그림을 잡아 뜯어내고 그 뒤의 벽에 손을 올렸다.
왼손을 올렸을 때 화소군은 움찔했다. 그러곤 눈을 내리떠 제 오른손을 확인했다.
아직도 손에선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고, 그 손은 언뜻 보기에도 이상하게 변형되어 있었다. 그걸 확인한 화소군은 이를 악물었고 힘을 줘서 벽을 밀었다.
벽이 밀리고 그 사이로 나타난 검은 통로로 서둘러 들어갔다. 어두워서 보이는 건 없었지만, 망설일 게 없었다.
빠른 걸음으로 내려간 화소군은 그대로 굴러 떨어질 뻔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크게 휘청거린 그는 곧 중심을 잡고는 고개를 들었다.
“…….”
공기 중에 퍼지는 알싸한 향이 그의 기분을 급격히 떨어지게 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불길한 예감은 어긋나지 않는 법이었다.
설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렇게나 빨리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머릿속이 점점 더 복잡해진다. 화소군은 마른침을 삼키곤 옆으로 손을 뻗었다. 오른손에선 이미 손가락 두 개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썩어 문드러져서 떨어져 나간 것일 터였다.
차라리 그리되는 편이 나았다. 손가락 두 개를 잃는 대가로 다른 걸 얻어낼 수만 있다면―.
그리고 화소군은 손에 닿는 등을 느끼곤 그 위를 더듬었다.
전등 안쪽으로 긴 막대가 잡혔다. 그걸 잡아서 오른손으로 단단히 쥐고는 외손으로 감쌌다.
긴 막대의 중간에 둘러져 있는 끈을 풀어내고는 위로 세게 당겼다. 그러자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고 그 주변으로 환한 빛이 몰려든다.
어둠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빛이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그제야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을 확인한 화소군의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 * *
달칵, 하는 소리에 맞춰서 명월의 어깨로 힘이 들어간다. 정말 놀랐던 명월은 뒤를 돌아봤고 느긋하게 따라오던 백호가 그런 명월을 보곤 어깨를 으쓱인다.
뭘 그렇게 놀라는 거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에 명월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지금 명월과 백호는 어두운 곳을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건지 말은 해 주지 않아도, 이제서 그런 걸 하나하나 묻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백호가 커다란 바위를 밀어내고 뻥 뚫린 구멍으로 들어가라고 할 때에도, 그래서 지금 그 어두침침한 동굴을 탐험하고 있어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쪽은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그걸 두고 놀리려는 듯 이런 식으로 장난스럽게 구는 건 아니지 않나 싶었다.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지만, 그게 계속 반복이 되면 참지 않을 셈이었다. 그런 의사를 담아 바라보는 명월이었지만, 백호는 느긋했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를 알면서도 왜 저런 식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자신이 지나치게 긴장해 있으니 그걸 풀어주기 위해서 저러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그냥 이쯤에서 한마디 하려던 찰나, 명월은 막다른 곳에 다다르고 말았다.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 사이로 보이는 건 흙으로 된 벽이었다. 이리로 가기만 하면 바로 그 ‘장소’에 도착할 것 같더니만 아니었던 건가.
명월은 별다른 말없이 조용히 백호를 돌아봤다.
여기까지 왔어. 여기서 더 어디로 가야 하는 건데.
백호는 그 무언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대신에 행동으로 보여 줬다. 한걸음 옮기는 것으로 명월의 옆에 선 백호는 손을 뻗어 흙으로 된 벽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 흙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천천히 좌우로 갈라졌다.
양옆으로 갈라지고 나서 생겨나는 새로운 길에 놀란 명월의 눈이 크게 떠진다.
앞으로 한 손을 내민 채로 백호는 그런 명월을 내려다봤다.
“앞으로는 조심해서 움직여야 할 거야. 안쪽으로 갈수록 독기가 응축되어 있거든.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내 옆에 붙어서 떨어지지 말도록.”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호는 명월의 허리를 잡아채듯이 끌어당겼다. 백호에게 딱 붙은 자세가 된 명월은 당황해선 그를 올려다봤다.
“지금 장난이나 농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너한테 수작 부리려고 하는 것도 아니니까 절대로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혹, 머리가 아프거나 몸에 이상이 생길 때에는 말을 해 줘야 한다. 알았냐?”
지금 그가 농담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던 명월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백호는 명월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러다가 곧 콧잔등을 찡그린다.
“이건 움직이기가 좀 성가실 것 같군.”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나 싶더니 허리를 굽힌다. 뭘 하려는 건가 싶었을 때 백호는 명월의 무릎 뒤쪽을 끌어안듯이 팔로 감싸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졸지에 백호의 팔에 안겨 들어올려진 명월은 당황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안기다니. 바로 내려가기 위해서 백호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그 순간 그가 고개를 저었다.
“장난하는 거 아니야. 얌전히 있어.”
“…….”
꽤나 단호한 어조에 명월은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백호는 진지했고 지금은 시간적 여유가 없는 상태였다.
이쪽에서 해골을 태워 버렸으니, 그걸 화소군이 모를 리가 없었다.
사람은 공격을 받게 되면 자연스럽게 급소부터 막게 된다. 그와 같은 이치로 지금 화소군이 이쪽보다 먼저 움직여서 그 장소에 와 있거나 뭔가 수작을 부려 놓을 수도 있음이었다.
거기다 백호가 이 정도까지 하는 건 어디까지나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이리하고 싶다고 하니 그걸 따라 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거기서 더 방해를 할 순 없었다.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빼고 편안히 몸을 의지하는 명월을 느끼곤 백호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대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분명 처음에는 단단한 흙벽이었는데, 백호가 손을 뻗는 것으로 이런 통로가 생겨났다. 원래 존재하고 있었던 통로였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백호가 새롭게 만들어 내는 걸까.
정체를 알 수 없는 통로는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백호가 앞으로 걸어 나갈 때마다 조금씩 길이 열리는 것처럼, 새롭게 생겨나는 통로가 신비롭게 여겨진다.
멍하니 그걸 바라보던 명월은 전립이 뭔가에 걸리는 느낌에 눈을 들었다.
천장이 낮아서 걸을 때마다 전립이 스치고 있었다. 그러나 제 두 다리로 걸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백호에게 안긴 상태인데 신경 쓰이게 할 순 없었다.
머뭇거리던 명월은 백호의 목을 끌어안고는 고개를 숙였다. 자연스럽게 백호의 머리에 제 뺨을 댄 상태가 된 명월은 처음에는 긴장이 되어서 바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긴장하고 있기 때문일까. 신경이 다른 쪽으로 분산되는 것 같다.
지금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단단한 백호의 팔이라든가. 끌어안고 있는 그의 목에서 전해지는 체온과, 닿아있는 곳에서부터 울리는 나직한 심장 박동 소리. 그리고 그의 호흡 등에 집중하게 된다.
목이 탄다. 알 수 없는 갈증을 느끼며 명월은 중얼거렸다.
“……너랑 같이 있는 게 점점 더 자연스럽게 느껴져.”
원래는 조용히 있으려 했지만, 막을 새도 없이 말이 흘러나왔다. 만약 여기서 백호가 멈추거나 쳐다보려 했다면 굉장히 민망했을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걷는 데에만 집중하는 그를 두고 명월은 중얼거렸다.
“여기서 널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어떻게든 만났을 거다.”
단호함이 느껴지는 말에 명월은 가만히 있었다.
“만나게 될 인연이라면 어떻게든 만났을 거다.”
“…….”
재차 가슴 안쪽으로 묵직한 무언가가 내려앉는 느낌이 든다. 이상한 기분이라면서 백호의 목을 끌어안는 팔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너무 답답하면 안 되기 때문에 중간에 살짝 힘을 풀기도 했다.
명월은 눈을 감고는 가만히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기만 하면 어딘가에 도착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스스로 움직이고 알아봐야 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거기까지 생각하던 명월은 머리 한쪽에서 올라오는 두통에 안색을 굳혔다. 느낌 탓인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다. 머리 한쪽이 지끈거리는 걸 느끼면서 명월은 눈을 떴고, 그걸 감지한 백호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냐?”
“아니. 머리가 좀 아픈 것 같아서……신경 쓸 정도는 아니야.”
앞서 백호에게 머리가 아플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고작 이런 걸로 신경 쓰이게 할 순 없었던 명월은 정말 괜찮다는 말을 하고 넘어가려 했건만 바라보는 백호의 눈빛은 진지했다.
흐릿한 빛이 들어오긴 해도 어두운 곳이었다. 저런 식으로 이쪽을 보면서 움직이는 건 무리가 있었다. 저러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는지.
걱정되었던 명월은 백호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이면서 “앞을 보고 걸어.”라고 말했다. 명월의 말에도 백호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시선 한 번 떼지 않고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다시 괜찮다 하려던 순간 백호가 다른 쪽 손을 위로 들었다.
“이것 봐라.”
뭘 보라고 이러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머뭇거리다가 눈을 내리떴고, 백호가 손을 펼쳤다. 동시에 그 안쪽에 들어가 있었던 반짝거리는 것들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반딧불 같은 거였다. 그것들이 백호의 손바닥 안쪽에서 나타나서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반짝거리는 빛을 뿌리는 그것들을 보고 당황했던 명월은 몸을 움츠렸다.
그때 괜찮다는 양 끌어안은 백호의 팔로 힘이 들어간다. 그것에 안도감을 느끼며 명월은 제 눈앞으로 날아오는 것들을 유심히 살폈다.
반짝거리는 것들은 명월의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어둡던 동굴 안쪽으로 빛이 가득 차고, 여기저기서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예쁜 볼거리였다.
멍하니 빛이 움직이는 걸 따라 눈동자를 굴리던 명월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 빛 중에서 하나가 명월의 손가락 가운데에 내려앉았다.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는 걸 바라보던 명월은 제 손을 앞으로 천천히 당겼다. 자세히 보고 싶어서 그리한 거였지만, 거리가 더 가까워지기 전에 그것은 다시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어, 하는 소리를 내면서 명월은 고개를 들었지만 보이는 건 낮은 천장뿐이었다. 명월은 손을 들어 그 천장을 쓰다듬었다. 축축하게 젖은 흙이 느껴진다.
원래 이곳에 이런 통로가 있진 않았을 거다. 이동하기 위해서 백호가 새롭게 만든 길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이 들어올 걸 모르는 화소군은 당하고 난 후에 무척 당황스럽겠지.
그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도 하는 걸까. 그게 아니면 다른 수작을 부리려 할까.
그렇다 하더라도 두렵진 않았다. 한없이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끼며 명월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춤을 추듯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것들을 바라보는 동안 머리의 아픔도 사라져 있었다. 한결 편안해진 명월은 여전히 백호에게 들린 채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백호가 멈춰 서는 것에 맞춰서 명월이 물었다.
“도착한 거야?”
“그래.”
백호가 말함과 동시에 명월은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두 다리가 흙 위에 닿았지만, 그렇게 한다 해서 백호에게 떨어질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백호는 명월의 어깨를 끌어안아 자신 쪽으로 밀착시켰다.
이제는 이런 식으로 백호에게 안긴 게 익숙해져서 그가 끌어당겨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편안한 얼굴로 가만히 있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위로 손을 뻗었다.
“이제 눈을 감았다가 뜨면 바로 도착이다.”
백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바닥이 흔들린다.
똑바로 서 있던 곳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느낌에 당황한 명월은 백호를 붙잡았다. 그러자 괜찮다는 양 백호가 명월의 어깨를 더 단단히 끌어안는다.
동시에 땅이 위로 솟구쳤고, 천장에 부딪치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고개를 돌린 채로 눈을 감았다.
잠시 차가운 무언가가 뺨을 스치는 것 같았지만, 부딪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공기의 밀도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이상한 냄새가 났다. 그건 흙의 냄새가 아니었다.
명월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느낀 건 이곳이 땅 속이 아니라는 거였다. 어떤 공간 속에 와 있었다.
땅 속에 있었을 때가 훨씬 더 밝았다 여겨질 정도로 어두운 곳이었다. 칠흑같은 어둠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움직이지 않은 채로 가만히 있자 백호가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화르륵, 하고 불붙는 소리가 들렸다. 명월은 소리가 들린 쪽을 살폈고, 백호가 들고 있는 횃불을 확인했다.
백호는 들고 있던 걸 명월에게 내밀었다.
“들고 있어. 그리고 가만히 서 있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명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만족스러웠던 걸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백호가 고개를 숙여선 명월의 뺨에 입을 맞췄다.
쪽, 하고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에 명월은 당황해선 저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떨어지기 전에 명월의 허리를 살짝 잡아끈 백호가 속삭였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가만히 있고 싶어도 백호가 이상한 짓을 하려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움직이는 게 싫다면 이상한 짓도 하지 말라고 하려는데 백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러곤 바로 떨어져선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지금 명월이 볼 수 있는 건 횃불이 비치는 곳뿐이었다. 그 범위에서 벗어난 백호가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 명월은 숨이 막혔다. 막연하게 드는 두려움에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가 없었다.
고작 백호가 옆에서 떨어진 것뿐인데, 이런 식으로 몸을 움츠리게 되다니.
알게 모르게 정말로 그가 옆에 있는 것에 익숙해졌구나. 그런 생각이 든 명월은 횃불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원래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거였다. 자신을 이해해 줄 존재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과 같은 사람은 없다. 오롯이 혼자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 가슴 한편이 저밀 정도의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
혼자는 쓸쓸하고 무섭다. 두려워서 싫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애써 머릿속을 깨끗하게 정리하려 하곤 했다. 어린애도 아닌데 이 무슨 유치한 생각인가 싶었던 거다.
하지만 동시에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혼자라는 쓸쓸함을 이겨 내고 외로워하지 않는 존재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은가.
“…….”
명월은 횃불을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혼자는 싫다. 곁에 누군가 있는 것에 그새 익숙해졌고 의지하는 방법을 익혔기 때문에 더 이상 혼자는 싫었다.
반양 땅으로 오게 되면서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일에 휘말리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던 건 달리 이유가 있었다.
백호가 곁에 있어서 외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생겨도 그것에 대해서 의논을 함께하고 힘이 되어 주는 든든한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반양 땅에 머무르게 되는 건 고작 2년뿐이었다. 기한이 지나면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연하게나마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고 싶어. 그리 생각함과 동시에 앞에서 달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명월은 고개를 들었고 정면 쪽으로 화르륵, 하고 불이 붙었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백호가 언뜻 보인다.
이쪽을 바라보던 백호와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명월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의도하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짓게 되는 미소였다. 그 웃음을 본 백호는 무언가 눈이 부신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가 그도 웃는 얼굴로 옆으로 물러섰다.
불이 비추는 곳을 벗어나자 재차 주변이 보이지 않게 된다. 하지만 아까처럼 불안하지 않았다. 다른 쪽에서 불이 붙으면 그곳에 서 있는 백호가 보였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공간을 돌면서 모든 곳에 불을 붙인 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명월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서 있던 백호는 명월을 내려다봤다. 둘의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횃불을 들고 있는 명월의 손가락 끝으로 힘이 들어간다.
아까부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백호를 쳐다보는데 왜 이런 묘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면서 느리게 눈을 깜박거리던 명월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건 백호도 마찬가지였다. 허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명월을 내려다보던 그는 다른 손을 들어선 하얀 뺨을 건드렸다.
손가락이 뺨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순간 명월의 몸으로 힘이 들어간다. 입을 꾸욱 다무는 걸 확인한 백호의 손가락이 명월의 뺨을 타고 내려가 턱에 닿았다가 더 아래로 내려갔다. 명월의 어깨를 붙잡고는 엄지로 쇄골 부근을 가볍게 눌렀다가 뗀다. 그러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참아야지.”
뭘 참겠다는 건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면서 명월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어색한 이 분위기에서 도피하기 위해서 횃불을 바깥으로 내밀었다.
“여기가 화소군의 비밀의 공간인 거냐.”
가능한 어색하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때까지도 명월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백호는 그래, 라고 대답하면서 손가락을 부딪쳤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불빛이 조금 더 강해지고 내부가 밝아졌다.
생각보다 좁은 공간이었다. 무슨 공방처럼 벽 쪽으로 나무 판을 붙여 두었는데 그곳에 어른 주먹만 한 항아리 같은 게 일렬로 놓여 있었다.
점점 더 환해져서 이윽고 안쪽을 완전히 다 볼 수 있게 된 명월은 횃불을 든 채로 한 바퀴 돌았다.
저 화소군의 비밀의 장소이기 때문에 뭔가가 더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기대한 것과 달리 평범한 장소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저 항아리 속에 무엇이 들어가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알아봐야겠다 싶으면서도 건드리고 싶지가 않았던 명월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선반 쪽으로 향했다.
횃불을 앞으로 내밀어 항아리 주변을 살피다가 붉은 종이를 발견했다.
한쪽에 잘 놓인 부적을 보는 순간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저것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지를 알기 때문에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명월은 당장 그리로 횃불을 가져다 댔고, 처음에는 불이 붙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종이 모서리 쪽으로 불길이 피어오른다.
조금씩 붙은 불이 야금야금 부적을 태우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명월은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주변을 살펴도 마땅히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이 장소가 존재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월은 고개를 돌려 백호를 바라봤다.
“만약 여기가 엉망이 된다면―.”
“누구는 무척 속이 상하시겠지.”
그저 단순히 속이 상하는 걸로만 끝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명월은 횃불로 항아리를 옆으로 밀어냈다. 선반에서 밀려난 항아리가 호선을 그리면서 떨어진다.
바닥에 닿는 순간 쨍그랑 소리를 내면서 깨지는 항아리를 본 백호가 혀를 차면서 이런, 하고 중얼거렸다.
“누군가 무척 안타까워하겠군.”
“고작 이 정도로 안타까워하면 곤란하지.”
깨진 항아리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것도 이러리란 법은 없었다. 명월은 다른 항아리들도 전부 다 횃불로 밀어 버렸고 그것들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하나가 깨질 때보다 훨씬 더 소리가 크다. 이 소리를 듣고 누군가 오는 게 아닐까 싶었던 명월은 어깨에 힘을 줬다.
“괜찮다. 고작 그 정도 소리는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아.”
명월이 머뭇거리는 이유를 알고 있었던 백호가 한마디 하는 순간 명월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더 망설일 게 없었다. 명월은 위쪽에 있던 항아리들도 전부 다 아래로 떨어뜨렸다. 간혹 단단한 놈이 깨지지 않으면 발로 차 버리곤 했다.
빠르게 날아간 항아리가 선반에 부딪쳐서, 그곳에 놓여 있던 것들까지 한 번에 떨어져 요란하게 박살나는 순간, 백호는 재차 혀를 찼다.
그런 백호의 중얼거림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명월이었다. 항아리를 깨는 것뿐인데 그때마다 속에 쌓여 있던 것들이 조금씩 내려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화가 풀려서 가슴으로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린다. 무척 개운하고 시원한 기분이 드는 걸 느끼면서 명월은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그러곤 아예 선반 한쪽을 들어서 위로 높이 올렸다.
항아리가 미끄러지면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뒤에서도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건 뭔가 싶었던 명월은 뒤를 돌아봤고, 항아리를 양 손에 든 채로 서 있는 백호를 발견했다.
명월이 돌아보는 것에 맞춰서 백호는 그걸 있는 힘껏 앞으로 던졌다.
항아리가 날아간 것은 횃불 아래쪽이었다. 불에 타서 그을린 것인지 그 아래쪽으로 검은 얼룩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거기에 항아리를 명중시킨 백호는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난 저렇게 할 수 있는데 넌 어떠냐.
그런 느낌으로 바라보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 백호를 확인한 순간 명월의 눈썹이 살며시 올라간다.
백호가 하면 자신도 할 수 있었다. 다른 거라면 몰라도, 저 정도는 말이다.
명월은 작은 항아리를 들고는 검은 얼룩이 있는 곳으로 있는 힘껏 던졌다. 유려한 호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항아리는, 그러나 얼룩진 곳이 아닌 다른 쪽으로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박살나는 항아리를 보는 순간 백호는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이것 참. 유감스럽게도 명중시키진 못했네.”
그러곤 보란 듯이 다른 항아리를 던진다.
이번 것도 어김없이 얼룩 아래쪽에 정확하게 부딪쳤고, 요란하게 박살나는 순간 백호는 손뼉을 쳤다.
“그렇지―.”
정확한 명중에 기분이 좋아진 듯 신나 하는 백호와 달리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백호는 할 수 있는데 왜 자신은 안 되는지 모르겠다.
아니다. 고작 처음 실패한 것뿐이었다. 두 번째에는 조금 더 정확하게 할 수 있을 거라며 명월은 다른 항아리를 손에 쥐었다. 양손으로 항아리를 쥔 채로 집중한 후에 있는 힘껏 던졌다.
이번엔 느낌이 좋았다. 그래서 명중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빠르게 날아간 항아리는 얼룩진 곳 바로 옆에 부딪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났다. 그 순간 백호는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됐다.”
“…….”
정말로 안되었다고 생각해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단순히 놀리기 위함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명월의 얼굴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굳어 있었다.
인상을 쓴 채로 정면을 응시하나 싶던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뒤로 가선 항아리를 잔뜩 들고 나타났다.
그걸 바닥으로 던지듯이 내려놓자 몇 개는 부서지고 몇 개는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명월은 거기서 멀쩡한 걸 들고는 검은 얼룩을 노려봤다.
“이번에는 잘 해 봐라.”
“……시끄러워.”
백호가 옆에서 한마디씩 하는 게 그렇게 약 오를 수가 없다. 그가 굳이 저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할 셈이었다.
바둑을 둘 때에도 안 풀릴 때 옆에서 훈수를 둔답시고 한마디 하는 사람이 더 얄미운 법이었기에, 명월은 저 검은 얼룩 앞에 서 있는 게 백호라고 생각하고 있는 힘껏 던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확하게 그곳에 명중했다.
“그렇지―!”
별거 아닌 일인데도 기분이 확 좋아진다.
양손을 불끈 쥔 명월은 만세를 부르다 말고 얼굴에 닿는 시선에 움찔했다. 설마 싶어서 천천히 옆을 확인하자, 그곳엔 팔짱을 끼고 있는 백호가 서 있었다.
귀엽기는.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백호를 보는 순간 얼굴로 열이 오른다.
지금 유치하게 이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백호의 수작에 넘어간 거다.
명월은 혀를 차면서 발아래에서 굴러다니는 항아리들을 걷어찼다.
날아간 항아리가 여기저기에 부딪치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난다. 명월이 다시 움직이는 걸 보곤 백호도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항아리가 부서지는 음향은 고막 안쪽을 징징 울릴 정도였지만, 둘 다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 게 더 쉽고 빠르게 항아리를 깨는 방법인지를 연구하는 사람인마냥 한 번도 쉬지 않았다.
그렇게 항아리를 던지고 발로 차고 선반을 무너뜨리고, 횃불을 세게 휘둘렀다.
좁은 공간인지라 금방 끝날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간단한 일도 계속하다 보면 힘들다고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지금 명월이 그런 상태였다. 뒤로 갈수록 점점 체력적인 한계를 느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 항아리를 머리 위로 올리곤 있는 힘껏 아래로 던져 버렸다. 바닥에 부딪치자마자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흩어지는 항아리를 보는 순간 백호가 한마디 했다.
“다 끝났군.”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그 말에 명월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 끝났다. 드디어 이 안에 있는 항아리를 전부 다 깨 버린 거다.
얼마나 신나게 움직였는지 팔이 다 얼얼하다.
어깨가 묵직하니 알이 박힌 것 같은 걸 느끼면서 명월은 느리게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그러곤 고개를 푹 숙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몸은 피곤하고 팔도 아팠지만, 기분은 정말 좋았다.
벌려진 입술을 타고 웃음이 흘러나온다.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웃음을 흘리면서 명월은 백호를 올려다봤다. 웃는 명월을 보고 백호도 웃었다.
백호는 땀에 젖은 명월의 얼굴을 쓰다듬고는 전립을 위로 올리곤 바로 고개를 숙여 왔다.
이를 세워 명월의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바로 그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가 바로 놓는다.
힘없이 서 있었던 명월은 백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떨어지는 순간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속 시원하다.”
정말로 시원했다. 10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앉는 걸 느끼면서 명월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뻐근하다. 피곤하긴 하지만 오히려 기분 좋은 나른함에 속하는 것이었다. 입술을 벌리자 그 사이로 가느다란 숨이 흘러나온다.
이곳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모든 걸 박살내 버렸다. 설령 남아 있는 게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화소군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그가 이리로 와서 이곳의 참상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무척 궁금했다. 아마도 그 자리에 얼어붙지 않을까.
이곳의 일은 그에게 크나큰 타격을 입히게 될 터였다. 당장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
명월은 눈을 뜨고는 고개를 숙였다.
들고 있던 횃불은 바닥을 뒹굴고 있었지만, 불은 꺼지지 않았다. 백호가 건넨 것이니 평범한 횃불은 아닐 거다. 그러니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은 게 아니겠는가.
허리를 굽힌 명월은 횃불을 집어 들고는 그걸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항아리가 깨져 있는 곳 위에 댔다.
처음에는 불이 안 붙는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아니다. 금방 불이 붙어선 옆으로 점점 퍼져나간다.
몸을 돌린 명월은 선반과 항아리의 잔해가 남아 있는 모든 곳에 불을 붙였다. 그렇게 한 바퀴 다 돌고 나서 마지막으로 확인한 건 백호였다.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백호가 물었다.
“할 만큼 한 거냐.”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한 거다.
백호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저렇게 차분한 얼굴로 바라보는 게 아니겠는가. 명월은 들고 있던 횃불을 내려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곤 백호에게 다가가서 그의 앞에 멈추어 섰다.
주변은 불타고 있었지만, 두렵진 않았다. 여길 엉망으로 만들었으니 남은 건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명월은 백호의 손목을 붙잡았다. 단단한 손목을 움켜쥔 후 그대로 타고 내려가선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얽는다.
얽힌 손가락이 단단히 서로를 붙잡는 순간,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에게 다가섰다.
명월은 백호의 품에 얼굴을 기대었고, 백호는 다른 팔로 명월의 등을 끌어안았다. 둘이 서로를 끌어안는 것과 동시에 몸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바닥 아래로 가라앉는 것처럼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위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면서 누군가 뛰어 내려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얼마 안 있어 기나긴 침묵과 헐떡거리는 거친 호흡, 그리고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 * *
점심때까지는 하늘이 맑았는데 어느 순간 먹구름이 낀다. 순식간에 어둡게 변하는 하늘을 본 복운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러다가 쏟아지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굵직한 빗방울이 떨어진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에, 옆에 서 있던 포졸이 혀를 찬다.
“소나기인가. 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네.”
작년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인상을 쓰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포졸은 아래를 확인했다.
비가 오는데도 복운은 그걸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금까지 있던 자리에 고대로 쪼그리고 앉아 있으니 자신만 뒤로 물러나 몸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비를 맞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원래 여름 고뿔이 더 독한 법이었다. 포졸은 들고 있던 당파 끝으로 복운을 툭툭 건드렸다.
“비도 오고 하니 이만하고 안으로 들어가지 그래?”
복운은 사또 명월이 돌아오길 기다린다면서 저런 꼴로 앉아 있었다. 누가 보면 사또의 딸랑이라 여겨질 만큼 충성스러운 모습이지만, 다르게 보면 한심하기도 했다.
그래 봤자 머슴이 아니던가. 그런 주제에 사또가 하는 일에 왜 이렇게 간섭인가 싶었다.
나가면 나간 거고, 돌아오면 돌아온 거였다.
마치 그림자처럼 사또의 모든 걸 알고 있어야 한다는 듯 구는 모습이 조금은 우습기도 했다.
포졸이 건드려도 복운은 미동이 없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바깥만 쳐다보고 있는 모습에 포졸은 한숨을 쉬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들은 체라도 할 것이지. 왜 무시하고 지랄인지 모르겠다. 사또를 모신다고 해서 저가 뭐 대단한 놈이라도 되는 줄 알고…….
속으로는 불만이 많아도 그걸 솔직하게 내색할 수 없었던 포졸은 겉으로 표정을 굳힐 따름이었다.
탐탁지 않아 인상 쓴 채로 복운을 바라보던 포졸은 문득 어떤 궁금증이 생겨났다. 직접 물어봐도 되는 걸까.
포졸은 복운 쪽으로 허리를 굽혔다.
“사또께서 도성에 있었을 때에도 그렇게나 유명하셨다면서. 그게 참인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요?”
잠시 한눈을 팔면 그사이에 명월이 저기 골목길 안쪽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어 그쪽만 바라보고 있던 복운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잡힌다.
안색을 굳힌 채로 뒤를 돌아보는 복운의 표정은 살벌했다. 매서운 눈빛에 질문을 한 포졸은 움찔해선 고개를 저었다.
“그, 그냥 사람들이 하는 말을 물은 것뿐인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가?”
포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운은 벌떡 일어났다.
“누가 감히 우리 사또에 대해서 그딴 소리를 지껄인단 말입니까? 그게 누구요?”
묻는 복운의 표정은 점점 살벌해졌다. 여차하면 멱살을 잡고 흔들 것 같은 기세에 포졸은 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 내가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러니까 누가 그딴 헛소리를 지껄인단 말입니까? 여기는 대체 왜 이리도 남의 일에 관심이 많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지껄여 대는 말이 전부 사실인 것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아닌 말을 해 대면 기분 좋습니까? 그렇습니까?”
“내, 내가 한 말이 아니지 않은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러니까 그게 누구란 말입니까? 누구기에―.”
“거기.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냐.”
나직한 호통에 성을 내던 복운은 바로 입을 다물었고, 그건 포졸도 마찬가지였다.
무서울 정도로 복운에게 밀어붙여졌던 포졸은 당장 안쪽을 살폈다. 그곳에 서 있는 이방을 보고 나서야 포졸은 살았다는 얼굴이 되었고, 복운은 안색을 굳혔다. 이방의 뒤로 익숙한 말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포졸이 말 두 마리를 끌고 안쪽으로 향하는 걸 본 복운은 냉큼 이방에게 달려갔다. 심하게 내리는 빗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달음에 달려간 복운은 이방의 뒤쪽으로 멀어지는 말을 가리켰다.
“저건 낮에 사또께서 타고 나가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저게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사또께서 돌아오신 적이 언제인데 너는 그런 곳에서 시끄럽게 구는 거냐. 다른 곳도 아니고 외문에서―. 지나치는 사람들 다 보라고 일부러 시끄럽게 구는 거냐, 뭐냐?”
복운이 명월의 뒤만 졸졸 쫓는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건 지나친 게 아닌가 싶었다. 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 들어서 더 심해진 것 같다.
걱정하는 마음이야 모르는 게 아니었지만, 뭐든지 적당히 하는 편이 좋다고 말하려던 찰나, 복운이 물었다.
“관아에 돌아오신 겁니까?”
그리 묻는 복운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순간적으로 움찔했던 이방은 가만히 있다가 머리에 떨어지는 차가운 빗방울을 느끼곤 고개를 끄덕였다.
사또 명월이 조금 전 뒷문으로 들어와선 마침 근처를 지나치던 포졸에게 말을 맡기려는 걸 이방이 보게 되었다. 그래서 몇 마디 주고받았고 명월은 몸을 씻는다면서 안쪽으로 들어간 참이었다.
구군복이 흐트러져 있고 약간 피곤해 보였지만, 기분은 좋아 보였다. 일이 잘 풀린 것인가 싶었던 이방은 한마디도 못하고 고개를 꾸벅이기만 했다.
느낌은 나쁘지 않았으니 복운에게 괜한 걱정하지 말고 이만 들어가서 쉬라는 말을 해 주려 했는데,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도 강렬해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 다물고 있는 이방을 두고, 답답하다는 듯 복운이 재차 물었다.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그런데 왜 저를 부르지도 않으신 겁니까?”
외문 쪽으로 온 게 아니라 뒷문으로 온 거였다. 보지를 못했으니 부르지 않은 거고, 명월이 매번 복운을 챙기는 것도 아니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대꾸를 바로 못하고 있자, 그사이 복운은 잽싸게 안쪽으로 달려갔다.
서둘러 달려가는 모습을 본 이방은 저―하고 그리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붙잡기도 전에 복운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이방은 혀를 끌끌 차면서 팔을 내렸다.
“저 녀석 점점 이상해지는군.”
누가 보더라도 지나치게 사또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전과 조금씩 달라 보이는 모습이 염려스러웠다.
외부에서 온 사람이니 괜찮겠거니 싶었는데, 혹 이상한 게 들러붙은 게 아닐까.
아니다. 그런 거라면 사또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잖은가. 그저 어려서부터 곁에서 지켜봐 온 명월이 점점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것 같으니 그게 염려가 되는 것뿐일 터였다.
……정말 그런 것뿐이라면 좋겠는데.
그리 생각하는 이방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 * *
한달음에 달려온 복운은 대청 앞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그곳엔 명월의 목화가 보이지 않았다.
돌아왔다고 했는데 왜 신이 안 보이는 건가 싶어 주춤거리는데 왼쪽에서 문이 열리고 계진이 나왔다.
계진과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복운은 “사또는?” 하고 물었고 계진은 바로 바깥쪽을 가리켰다.
“땀을 많이 흘리셔서 씻으러 가신다 하셨어요.”
계진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거 보면 이리로 오긴 했던 모양이었다.
“돌아왔으면 말이라도 해 주실 것이지…….”
서운함이 강하게 들어 자연스럽게 이런 말이 흘러나온다.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복운은 냉큼 목욕탕 쪽으로 향했다.
몸을 씻으려면 통에 들어가야 할 텐데, 이런저런 도움이 필요했다. 그런 거라면 먼저 자신을 찾아서 시키면 될 일이 아니던가.
서둘러 가면 아직 몸을 씻지 않았을 테고, 맞춰서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다. 그렇게 한달음에 도착한 복운은 목욕탕의 문이 단단히 닫혀 있는 걸 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닫혀 있으니 안에 사람이 있는지를 알기 위해선 소리 내어 사또를 부르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왜인지 망설여지게 된다.
복운은 머뭇거리면서 앞으로 걸어가서 문에 손을 댔다. 입을 열어서 명월을 부르려던 찰나 문이 가볍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놀라서 급히 손을 뗀 복운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재차 문이 덜컹, 하고 흔들렸다. 안에 누군가 있는 거였다. 그런데 문이 왜 이렇게 흔들리는지 모르겠다.
“사또?”
그러자 문의 흔들림이 멈추었다.
“…….”
뭔가 이상한데.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복운은 조심스레 문에 손을 대곤 흔들어 봤다.
“사또, 지금 이 안에 계시는 겁니까?”
묻는 것과 동시에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땐 목욕탕 쪽이 아니라 방 쪽이었다. 그때에도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오묘한 기분이 들곤 했었다. 그때와 지금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라면―.
안색을 굳힌 복운은 손을 움켜쥐었다. 문을 두드릴 셈으로 손을 드는 것과 동시에 안에서 “왜 그러느냐.”라는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명월의 음성이었다.
평소처럼 차분하게 울리는 음성을 듣는 순간 복운의 어깨에 들어간 힘이 빠진다. 안도한 얼굴이 된 복운은 손을 내렸다.
“사또. 오시자마자 씻으러 가셨다 들었습니다. 그런 거라면 제게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목욕 준비는 혼자 하기 힘드실 텐데, 만약 옷을 벗기 전이시라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옷은 이미 벗었고 네 도움은 필요치 않다. 내가 알아서 씻고 나갈 테니 물러나 있거라.”
“하지만 목욕하실 때 필요한 도구 같은 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실 텐데―.”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아서 씻고 나가겠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딱 끊어 내는 것에 복운은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평소 명월이 혼자서 몸을 씻은 적이 없었다면 조금 더 밀어붙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명월은 복운 모르게 몰래 몸을 씻은 적이 있었고, 그때에도 도구를 쓰지 않아도 어찌어찌 잘하고 나온 것 같았다.
두 살배기 어린애도 아니고 목욕하는 게 뭐 대수라고 이렇게 매달려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자신의 태도가 누군가 보기에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초조하고 불안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명월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일이었다.
복운은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씻고 나오십시오. 시원한 꿀 차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고맙다는 말을 들어도 마음이 즐겁지가 않았다. 왜 이렇게나 기분이 가라앉는지 모르겠다면서 복운은 느리게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몇 걸음 옮기지 못하고 뒤를 돌아본다. 처량맞은 눈동자로 바라보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어기적거리면서 멀어졌다.
* * *
문에 등을 기댄 명월은 그쪽으로 완전히 얼굴을 붙인 채였다. 귀를 댄 채로 신중하게 바깥소리를 들으려 하는데 복운의 인기척이 조금씩 멀어졌다.
목까지 찬 숨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힘겹게 목소리를 냈던 명월은 그제야 안심한 듯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저 녀석 쓸데없이 눈치가 빠른 것 같아.”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명월은 눈동자만 앞으로 움직였다. 그곳엔 백호가 있었다. 완전히 밀착한 채로 명월에게 달라붙은 백호는 보란 듯이 혀를 내밀어선 명월의 뺨을 길게 핥아 냈다.
“그래 봤자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말이지.”
속삭이면서 혀를 뗀 백호는 웃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웃는 얼굴이 나른하니 지독히도 야하게 느껴졌다. 느낌 탓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런 분위기를 풍기면서 일부러 저렇게 웃는 것일 터였다.
옷을 제대로 벗기도 전에 달라붙는 백호 때문에 지금 문에 완전히 문에 밀어붙여진 채로 있었던 명월의 표정은 좋을 수가 없었다.
전처럼 이대로 선 채로 하는 건 절대로 사양이었다. 방이 아니니 이불 위에서 하는 건 무리겠지만, 그래도 이대로는 싫다는 말을 하려는데 커다란 손이 올라와선 아플 정도로 세게 살을 움켜쥐었다.
“아―.”
손바닥 전체로 명월의 가슴을 쥐고는 손톱 끝으로 작은 살덩이를 긁듯이 자극한다.
그곳에서 퍼지는 저릿한 통증에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가까스로 삼키며 명월은 백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밀어내려 하자 오히려 더 달라붙는다. 나무 문에 밀어젖혀진 명월의 귀로 덜컹, 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 고개를 들자 재차 문이 밀리면서 끼익―하는 소리가 들렸다. 온 힘으로 밀어붙이는 백호이다 보니 이러다가 문짝이 나갈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정말 그리된다면 강제로 백호와의 사이가 다른 이들에게 들통 나게 될 거다.
명월은 주먹으로 백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잠깐만 떨어져―.”
“싫어. 난 이미 많이 참았어.”
쉰 목소리로 거부한 백호는 명월의 턱을 깨물곤 위로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겹치려던 순간 명월은 인상을 쓰면서 고개를 돌렸다.
“여기선 싫다니까. 그보다 아직 씻지도 않았잖아―.”
화소군의 비밀스러운 공간을 엉망으로 만든 순간부터 살짝 흥분한 상태긴 했다. 그리고 그 흥분을 욕정으로 전환시킨 백호는 관아로 돌아오자마자 발정해서 달려들었다.
명월도 살짝 그런 기분이 들긴 했지만, 다짜고짜 달려드는 백호가 당황스러웠다.
도움을 받은 것도 있고, 거부하고 싶진 않아서 발로 찰 순 없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부둥켜 앉고 바닥을 뒹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은 급한 일부터 정리하고 하자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건만 백호는 그런 게 없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면 안 될 것처럼 성급하게 굴었다. 그래서 어찌어찌 이리로 오긴 했지만, 너무 집요했다.
땀을 꽤 흘렸던 명월은, 입술을 순순히 내어 주지 않자 턱과 목, 귀 등을 혀로 핥아대는 백호의 행동이 당혹스러웠다.
혀로 진득하게 핥아 댈 때마다 그가 토해 내는 뜨거운 숨이 피부에 닿아서 간질거렸다.
밀어붙여지고는 있지만, 덩달아 흥분하게 된 명월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고, 그러는 동안에도 백호의 손은 계속해서 명월의 몸을 더듬었다.
가슴을 주무르면서 다리를 세워선 허벅지 안쪽을 가른다.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려 해 봐도 역부족이었다.
기어이 다리를 벌리고 들어온 단단한 허벅지가 사타구니 사이를 마찰하듯 문지르자 자연스럽게 성기가 발기된다. 이미 절반가량 발기된 상태였기 때문에 여기서 백호를 밀어내는 것도 우스웠다.
그때 재차 문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백호가 밀어붙이는 열기로 인해 머릿속이 점점 뜨거워지려 했던 명월은 그 순간 정신이 잠깐 돌아왔다.
암만 생각해도 여기선 안 되었다. 하지만 흥분한 백호에게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잠시 생각을 하던 명월은 몸을 끌어안으면서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 백호의 등을 재빠르게 두드렸다.
“이, 일단은 씻고 나서 하자.”
지나치게 집요하게 밀어붙이니 이런 마당에 ‘떨어져. 너랑 안 할 거다.’라는 말은 역효과일 터였다.
씻고 나서 하자는 건 지금 명월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그 외에 달리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명월의 목과 쇄골에 달라붙어서는 마치 살을 씹어 먹을 것처럼 이 사이에 넣어 잘근거리던 백호가 행동을 멈추었다.
계속해서 밀어붙이다가 멈추는 백호를 느낀 명월은 눈을 끔벅였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이 통한 건가.
하지만 함부로 방심해선 안 되었다. 멈춘 것 같다가도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취할지도 모르는 게 바로 백호였다.
명월은 천천히 눈을 내리떴고, 그러는 동안에도 백호는 명월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 몸을 꼬옥 끌어안은 채로 목덜미에 얼굴을 마구 비빈다.
세게 문지르는 것 같아도 이상하게 간지러우면서 소름이 돋는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자 백호가 갑자기 허리에 두르고 있던 팔을 풀고는 뒤로 뻗는다.
밀어붙여져선 문에 달라붙어 있었던 명월은 백호가 한쪽 팔을 뒤로 뺀 채로 무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게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설마 이상한 짓은 하지 않겠지, 그런 기대감을 담아 바라봤다.
그때 백호의 팔이 다시 앞으로 넘어왔다. 그런데 팔이 위로 올라간다.
느낌이 이상했던 명월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동시에 차가운 물을 그대로 뒤집어썼다.
촤아아―하고 시원하게 물을 뒤집어쓴 명월은 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 때문에 눈을 감아야만 했다.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가 벌리자 재차 백호가 뒤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설마 싶었던 명월은 다급히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기, 기다려―!”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호는 재차 명월의 머리 위로 물을 뿌렸다. 양손으로 들어 얼굴을 막는 명월을 한쪽 팔로 단단히 끌어안은 채로 몇 번이나 물을 뿌린 백호는 소리 내 웃었다.
“이러면 됐지? 깨끗해졌다.”
“……!!”
별다른 말도 없이 다짜고짜 물을 뿌려 놓고는 깨끗해졌다니.
지금 이게 대체 뭔 소리인가 싶었던 명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지금 물 뿌려 달라고 이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꺼낸 것인지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굴다니.
화가 난 명월은 당장 고개를 들곤 백호를 노려봤다.
“너―!”
기다렸다는 듯 다가온 백호가 명월에게 입을 맞췄다.
쪽, 하고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자 마찬가지로 물에 푹 젖어 있는 백호가 보였다.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은 채로 백호는 웃었다.
“이래 젖나 저래 젖나, 젖는 건 마찬가지인데 화내지 마.”
입장이 반대가 되었으면 절대로 저런 말은 못할 거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젖은 채로 웃는 백호를 보는 순간 화를 낼 마음도 사라진 명월은 입을 다물었고, 백호는 재차 그런 명월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에 명월은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팔을 들어선 백호의 목을 끌어안았다.
다 젖었기 때문일까. 이렇게 달라붙어 있으니 서로의 체온이나 몸의 굴곡이 더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잔뜩 서선 배를 찔러대는 백호의 성기를 느끼면서 명월은 목을 끌어안는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런 명월의 허리에 팔을 감은 백호는 다른 손으로 명월의 젖은 뒷머리를 감쌌다.
움직일 수 없도록 머리를 단단히 고정하고는 명월의 입술을 뭉개듯이 비비다가 벌려진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아직은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명월의 혀를 휘어 감고는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넘어온 혀를 잘근잘근 깨물다가 혀를 사용해선 강하게 빨아들이자 명월의 몸으로 힘이 들어간다.
아직은 서투르고 덜 익은 육체였다. 가끔은 놀랄 정도로 대담해지지만, 경험이 없기 때문에 가끔씩 드러나는 이런 반응이 백호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명월의 혀를 씹어서 삼킬 것처럼 빨고 핥고 깨물다가, 그 사이로 흐르는 타액까지 빠짐없이 샅샅이 핥아먹은 후 백호는 명월의 몸을 더듬었다. 젖어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허리와 엉덩이를 쓰다듬고는 명월의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밀어 넣었다.
아까처럼 사타구니 사이로 허벅지를 끼워 넣고 세게 비비자 바로 막힌 비음이 흘러나온다.
아직도 연결되어 있는 입술 사이로 뜨겁게 헐떡거리는 호흡마저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빨아들이고 싶었다.
힘겨운 듯 고개를 떼려고만 하는 명월을 억누른 채로 백호는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나중에는 허리가 점점 더 뒤로 넘어간 명월이 참다못해서 백호의 등을 두드렸다. 그래도 백호가 떨어지려 들지 않아 아예 머리통을 내리쳤다.
숨이 막힐 즈음에 내지른 주먹질에 백호의 머리가 잠깐 흔들린다. 그 틈을 타 급히 입술을 떼어 낸 명월은 내내 참고 있었던 숨을 몰아쉬었다.
백호에게 허리가 잡혀서 쓰러지지 않은 것일 뿐, 이미 반쯤 허리가 뒤로 젖혀진 명월은 젖은 입술을 손으로 막은 채로 백호를 노려봤다.
“……숨넘어갈 뻔했잖아!”
그리고 혀가 뽑혀나갈 뻔했다.
진짜로 먹어치우고 싶은 건지, 그걸 하려는 건지 목적을 명확히 하라면서 노려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의 눈이 가늘게 휘어진다.
머리를 맞아서 이상해진 모양이다. 웃기는.
더 인상을 쓰는 명월을 두고 백호가 재차 고개를 숙여 왔다.
재차 입술을 들이밀자 명월은 기겁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기다려! 지금은 하지 마―!”
입술도 아프고 혀도 얼얼했다.
백호는 지나칠 정도로 집요했다. 정말 왜 이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안색을 굳힌 명월이 필사적으로 거부를 하려 고개를 옆으로 물리거나 턱을 뒤로 젖히는 등의 행동을 했다. 그런 명월을 보고만 있던 백호의 입꼬리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그러곤 내내 뒤로 꺾은 자세로 있던 명월을 붙잡아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잠시 동안이라곤 해도 머리를 젖힌 채로 있었더니 피가 그쪽으로 쏠려 있던 모양이었다.
핑글, 하고 머리가 도는 것 같은 느낌에 안색을 굳히자 백호가 제 입술을 가리고 있던 명월의 손목을 바로 붙잡았다.
그대로 손목을 주욱 당겨서 도착한 곳은 백호의 가슴 쪽이었다.
왼쪽 가슴 아래쪽에 명월의 손을 댄 채로 백호가 고개를 숙인다. 목을 움츠리는 명월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 댄 채로 백호가 물었다.
“느껴져?”
나직한 속삭임이 귓가를 간질인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잡고 있는 손목을 더 세게 붙잡았다.
“너랑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더 이래.”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건 묵직하고 뜨겁게 울리는 고동이었다. 보통 사람들하고는 미묘하게 다른 심장 박동이었다.
원래 심장이 이렇게 뜨겁고 확실하게 뛰는 것이었던가. 애초에 누군가의 가슴에 이런 식으로 손을 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명월은 할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입을 다문 채로 가만히 있는 명월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부비면서 백호는 중얼거렸다.
“……정말 미치겠어.”
백호의 말에 눈을 감은 명월은 내내 참고 있었던 숨을 힘겹게 토해 냈다.
미칠 것 같다는 그 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결국 참지 못한 명월은 백호의 목을 끌어당겼고, 백호는 기다렸다는 듯 명월을 허리를 휘어잡았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하고 정신없이 옷을 벗었다.
방 안이 아니었다. 딱딱한 바닥 위에서 누운 채로 하면 분명 살가죽이 다 벗겨지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백호는 한쪽에 놓여 있던 천을 전부 꺼내서 바닥에 대충 깔아 버렸다. 그곳에 젖은 옷가지도 대충 벗겨 낸 후, 그 위에 명월을 눕혔다.
잠시 떨어져 있는 찰나를 참지 못하고 바로 엎드린 백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월의 몸을 샅샅이 핥고, 깨물고, 빨아 댔다.
명월의 다리를 벌려서 엉덩이를 위로 든, 수치스러운 자세로 만든 백호는 명월의 은밀한 곳을 혀로 애무했다. 그때에는 내내 얌전히 있던 명월이 잠시 반항했지만, 백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쉽게 닿을 수 없을 정도의 깊숙한 곳까지 혀를 밀어 넣어서 애무하고는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던 명월의 몸이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 자세를 달리했다.
명월 쪽으로 올라와선 벌려져 있는 다리 사이로 허리를 내렸다. 이미 뜨겁게 발기된 성기의 끝으로 제가 들어가야 할 입구를 찾아선 바로 그리로 밀어 넣었다.
마치 제집인양 명월의 안으로 파고드는 성기의 움직임은 당당하기까지 했다.
백호의 성기가 워낙에 양질의 것이었기에 그걸 받아들이는 명월은 힘겨운 듯 몇 번이나 가쁜 숨을 헐떡거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밀어내거나 하진 않았다.
어깨에 팔을 두른 채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명월을 다독이면서 백호는 멈추지 않고 끝까지 제 성기를 밀어 넣었다.
백호가 끝까지 성기를 밀어 넣자 아랫배가 그득히 차면서 속이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백호의 팔에 손톱을 세운 채로 명월은 심호흡을 하면서 숨을 골랐고, 그때 뺨 가운데로 뚝―하고 뜨거운 땀방울이 떨어졌다.
명월은 내내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떠 백호를 올려다봤다.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백호는 바로 고개를 숙여선 명월의 오른쪽 뺨을 길게 핥았다.
“그거 알고 있어?”
으차―하면서 자세를 바로잡자 몸속에 있던 성기가 더 깊이 들어오려는 것 같았다.
고통스러운 듯 안색을 굳힌 명월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백호는 이번에는 입술을 오므려서 명월의 오른쪽 뺨 가운데에 있는 점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하는 중에 종종 네 뺨에 있는 점이 지독히도 야하게 보일 때가 있어.”
“……헛소리.”
이것도 간신히 쥐어짜내듯이 내뱉은 말이었다.
한마디 하고 난 후 명월은 바로 입을 다물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명월의 대꾸에 백호는 작게 소리 내 웃고는 성기를 빼냈다.
아래를 그득히 채우고 있던 성기가 빠져나가자 몸속이 함께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시큰함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그러자 조이지 마, 라고 중얼거린 백호가 명월의 몸을 한 팔로 끌어안고는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백호가 밀어붙이는 대로 몸이 흔들리는 가운데 명월의 미간에 생긴 주름이 점점 짙어진다. 괴롭게 인상을 쓰면서 신음을 흘리긴 하지만, 내뱉는 호흡은 뜨거웠다. 괜찮다는 거였다.
백호는 명월의 반응을 살피면서 손을 내려 그의 성기를 잡아 주었다. 처음 삽입의 통증으로 반쯤 시들어 있던 성기를 잡아 주자 바로 단단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명월의 성기를 세심하게 문질러 주면서 백호는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였다. 일정한 속도로 박혀 오는 성기가 점점 빨라진다.
지속적인 마찰로 인해서 내벽이 뜨거워지고 동시에 쓰라리면서 묘하게 다른 감각이 퍼져 나가자 명월의 헐떡거림이 깊어졌다.
내내 소리를 참고만 있던 명월이지만, 끝에 가서는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꿀처럼 다디단 그 신음을 들으면서 백호는 명월의 뺨에 제 뺨을 갖다 댔다.
성기를 애무하던 손을 떼고는 아예 명월의 얼굴 앞에 팔꿈치를 단단히 고정한 채로 결합 쪽에 조금 더 신경을 썼다.
끝까지 빠져나간 성기가 한 번에 깊게 쑤셔 넣어지자 명월의 입이 크게 벌어진다. 백호의 단단한 어깨에 매달린 채로 명월은 헐떡거렸다. 그런 명월의 엉덩이 사이에 파묻힌 거근이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처음에는 움직이기가 힘겨울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계속되는 삽입으로 어느 정도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안쪽 깊숙한 곳을 귀두가 자극하자 명월의 허리가 휘면서 내벽의 죄임이 좋아졌다.
“하아―.”
명월의 뺨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있던 백호가 앓는 소리를 내자 그에게 매달려 있던 명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악문 이 사이로 참지 못한 신음이 계속 흘러나온다. 응, 읏, 하고 막힌 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백호의 허리 짓은 더 성급해졌다.
빠르게 움직이는 허리 짓에 명월의 몸도 마구 흔들린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배 안쪽을 두드리는 성기가 무서워서 몸을 빼 보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서로가 땀을 흘려도 결국에는 밀착된 피부 사이에서 섞일 정도로, 틈도 없을 만큼 이어져 있었다.
고작해야 허리를 휘거나 엉덩이를 흔드는 정도로 기피를 하는 명월이었으나, 백호에겐 그 또한 쾌감의 일환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백호가 건장한 제 몸을 전부 다 밀어 넣을 것처럼 밀어붙일 때마다 살의 마찰음과 음란하게 젖은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 사이로 둘의 거친 호흡이 섞이자 이제는 뭐가 뭔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도 않았다.
아예 등 뒤로 양팔을 두른 채로 마지막을 향해 허리를 놀리는 백호 때문에 명월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아, 아앗, 하윽, 아―.”
그만하라거나, 잠시 멈추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혀끝이 빳빳하게 굳어 버린 양 아무 소리도 내뱉을 수 없었다. 명월은 어린아이처럼 백호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그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계속해서 엉덩이 안쪽을 매질하듯 두드리는 몸놀림에 여기저기에서 불꽃이 튄다. 요란한 쾌감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명월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바로 보이는 백호의 귀를 깨물다가 입을 벌려서 세게 빨아들였다. 그러자 백호의 호흡이 한결 더 깊고 거칠어진다.
하아―하고 긴 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백호는 격렬한 전후 운동을 이어 나갔다. 그때마다 미친 듯이 흔들리던 명월은 백호의 등에 손톱을 세웠다. 그렇게 단단히 박아 넣지 않으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백호가 명월의 얼굴에 입술을 눌렀다. 뺨을 세게 물고 빨아들이고 나서는 명월의 입술을 찾았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재차 백호에게 입술이 빼앗긴 명월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으읍, 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미 도가 넘은 흥분 상태였던 백호의 눈에 그런 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일단 명월의 혀를 빨아들이고, 입 안에 고여 있던 침을 샅샅이 모아선 그대로 꿀꺽꿀꺽 삼켜 버렸다. 마지막으로 크게 입을 벌려선 명월의 입술을 깨물 듯이 덮고는 다시 한번 세게 빨아들이고 나서야 만족해서 떨어진다.
계속해서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고 혀로 핥아서 명월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과했다. 그만하라면서 등짝을 때려 주려는데 성기가 몸 가장 깊숙한 곳을 찔러 왔다.
“아아―!”
느닷없이 날카로운 교성을 흘리며 명월은 그대로 사정했다. 토해 낸 정액은 맞닿은 백호와 자신의 배에 뭉개졌다. 단단한 복근이 잡힌 배에 성기가 눌리는 느낌에 명월은 젖은 헐떡거림을 토해 냈다.
사정을 한 후에 내벽이 수축하면서 성기를 강하게 죄여 줬다. 그 감각에 백호는 막힌 숨을 토해 내면서 허리를 뒤로 빼냈다가 앞으로 강하게 치댔다.
그렇게 몇 번이나 끝까지 성기를 박아 넣고는 마지막 순간 명월의 몸 깊숙한 곳에 정을 토해 냈다.
뜨거운 게 울컥거리면서 뱉어 내지는 감각에 명월은 눈을 감아 버렸다. 감겨진 눈꺼풀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느끼면서 바로 눈을 떴다.
제정신일 때에 운 기억은 별로 없는데, 백호와 할 때에는 꼭 이런 식으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 같다면서 명월은 입술을 열었다.
그 사이로 탄식과도 같은 깊은 숨이 흘러나왔다. 하아―하고 긴 한숨을 내쉬고도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한 채로 있으려니 백호가 사정을 한 후에도 느리게 허리를 놀렸다.
사정한 후인지라 몸속이 이상했다.
징징거리면서 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작은 마찰만으로도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육체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더 백호를 받아들이는 건 무리였다. 명월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움직여 백호의 등을 두드렸다.
“떨어져.”
목을 타고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목이 말랐다. 아까 복운이 시원한 꿀 차를 타주겠다 했던 게 갑작스럽게 떠오른다.
설마하니 꿀 차를 타 놓고 자신이 나오길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정말 그런 거라면 바로 나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백호는 떨어지라는 명월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단단한 성기로 내벽을 찔러댔다. 아까보단 풀이 죽긴 했지만, 그래도 예민해진 내벽을 찔러대는데 그게 좋을 리가 없었다.
주먹을 쥐고는 더 세게 등을 치자 그제야 뺨을 비벼대던 백호가 고개를 든다.
명월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아 땀에 푹 젖은 모습으로 내려다보는 백호를 보곤 너무 놀라 숨을 삼켰다. 입을 다문 채로 멍하니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입을 벌리곤 긴 숨을 토해 냈다.
“―뭔데.”
느낌 탓인지 모르겠지만, 말투가 딱딱했다. 그리고 거기서 아직 식지 않은 정념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런 걸 감지해선 안 되었다. 오늘을 무사히 넘어가기 위해선 모르는 척 외면해야만 했다.
한 번뿐이었지만, 언제나처럼 거칠어서 몸 안쪽이 욱신거리고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더 하는 건 절대 무리였다.
언제나처럼 명월은, 씨알도 안 먹힐 저항을 시도했다.
“그만 네 물건을 빼고 나한테서 떨어져. 난 씻고 일을 해야 해.”
“…….”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한 것 같은데 아래를 내려다보는 백호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 묻어났다. 지금 대체 뭔 소리를 들은 건가 싶은 양, 미간으로 생기는 주름을 본 명월은 단호히 말했다.
“그만할 거야. 두 번은 없어.”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는 의지를 담아서 짧게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백호가 재차 달라붙으면 그땐 어떤 식의 행동을 취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갑자기 백호가 명월의 가슴으로 손을 내려선 꼿꼿하게 선 유두를 꼬집듯이 비틀었다.
“아흑―.”
갑작스러운 자극에 명월의 입을 타고 이상한 신음이 터져 나온다. 놀란 명월은 급히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명월의 야한 신음을 들은 백호는 그것 보라는 시선을 던졌다.
“아직 부족한 것 같은데 그만하긴 뭘 그만해. 원래 처음보단 두 번째가 더 기분 좋은 법이야.”
유두에서 손을 뗀 백호는 명월의 오른쪽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내렸다.
질척하게 젖은 그곳을 커다란 손으로 움켜쥐었다가 놓고는 다리를 벌려 제 어깨에 걸쳐지게 한다. 그러곤 아직 박혀 있던 제 성기를 반쯤 빼내곤 자랑하듯 안을 찔러댔다.
질척하게 젖은 내벽이 젖은 소리를 내면서 틈 없이 백호의 성기를 감싸 주었다.
노골적인 그 감각을 느낀 명월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명월은 급히 위로 손을 뻗어 백호를 밀어내려 했다.
“하, 하지 마. 정말로 힘들단 말이야―!”
“걱정하지 마. 기분 좋게 해 줄 테니까. 넌 그냥 나한테 매달려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기분이 좋은 건 백호뿐이었다. 자신도 기분이 좋아질 거라는 생각을 해선 안 되었다.
화소군의 비밀 장소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는 백호와 이 짓을 하는 게 아니었다.
이상할 정도로 흥분해선 달라붙는 백호를 밀어내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꼭 이렇게 된다면서 명월은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백호가 명월의 허리를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그러곤 재차 허리 짓을 시작했다.
첫 번째 사정을 하고 난 후라 괜찮을 거라 생각한 건지 초반부터 거칠게 밀어붙이는 백호의 몸짓에 놀란 명월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호는 열심히 허리를 놀렸다.
* * *
딱딱한 곳에서 그 짓을 한 건 역시나 멍청한 짓이었다. 할 때에는 바닥이 딱딱하다거나 그것 때문에 살이 쓸려서 벌겋게 되는 걸 몰랐는데, 다 끝나고 나니 무척 처참한 상태가 되었다.
일단 등과 어깨는 심하게 쓸려선 살이 다 붉게 일어났고 팔꿈치와 무릎도 마찬가지였다. 벗어나려고 버둥거린 탓에 뒤꿈치 살은 까졌고, 발가락도 쓰렸다.
명월은 즙을 낸 약초를 바른 제 팔꿈치를 보다 말고 앞으로 고개를 들었다. 책상 너머엔 양반다리를 한 백호가 앉아 있었다.
평소에는 자신이 책을 읽을라치면 ‘뭐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냐.’라고 했던 주제에, 지금은 어디서 구한 건지 알 수 없는 책을 한 손에 든 채로 그걸 읽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저 책을 빼앗아서 얼굴을 한 대 쳐 버렸으면 좋겠다면서 명월은 혀를 찼다.
그 소리가 들렸는지 책에서 시선을 뗀 백호가 명월을 흘깃 본다. 그러다 시선이 부딪치자 바로 고개를 숙이곤 헛기침을 한다.
다 끝나고 나서 저렇게 꼬리를 내리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하지 말라고 할 때 멈출 것이지.”
그냥 한 번으로 끝냈으면 이 지경이 안 되었을 게 아니던가.
피부도 피부지만, 허리 아래쪽으론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거기는 쓰라리고 엉덩이는 얼얼하고, 아직도 무언가가 박혀 있는 듯한 불편한 느낌이 말도 못한다.
아직 해가 저물지도 않았으니 자리에 누울 수도 없고, 까진 피부에 약즙이나 바르고 있으려니 신세가 처량맞게 느껴진다.
아랫도리 자제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에게 자신은 대체 무얼 기대했던 걸까. 백호는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은 휩쓸리지 말아야 했는데. 달려들면 한 대 때려 주는 거였는데―.
그때 백호가 읽고 있던 책을 덮고는 책상에 팔꿈치를 올렸다.
“많이 아프냐? 내 혀로 좀 핥아 줄까?”
혀로 핥아 준다는 말에 명월의 얼굴이 눈에 보일 정도로 일그러진다.
그 표정에 혀를 내민 채로 있던 백호가 움찔해선 고개를 뒤로 물렸다.
“이번에는 네가 싫다는 곳은 절대로 핥지 않으면 되잖아. 그냥 거기 팔꿈치만 좀 핥아 준다니까. 살이 벌겋게 까여서 되게 아플 것 같은데―.”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래?”
“꼭 내 잘못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게, 막판에 가선 누가 더 적극적으로 허리를 흔들었던 것 같은데―.”
명월은 바로 책상을 내리쳤다. 하지만 조준을 잘못해서 딱딱한 부분에 손가락 뼈마디가 부딪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명월은 안색을 굳히면서 급히 제 손을 붙잡았다. 정말 아팠다. 원래 이런 데 부딪치면 그게 더 아픈 법이기도 했고 말이다.
손가락을 움켜쥔 채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처음엔 뭘 하는 거야, 라는 눈빛을 보내다가 슬그머니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렇게 아프냐? 좀 보자.”
명월은 백호의 손을 피해서 옆으로 몸을 틀었다.
“됐어. 건드리지 마.”
성질부리다가 부딪친 거니 그걸 두고 백호에게 우는 소리를 내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이런 엉성한 모습을 보이다니. 명월은 뺨을 붉힌 채로 더 세게 손가락을 붙잡았다.
모르는 척 해 줬으면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었지만, 백호도 그 못지않게 집요했다. 손 좀 보여 달라면서 손목을 잡아당기자 그리로 몸이 끌려간다.
안 그래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명월은 일부러 소리를 내면서 아픈 척을 했지만, 그렇게 한다 해서 끌어당기는 백호의 힘이 약해지는 건 아니었다.
일단 명월을 붙잡아 제 쪽으로 돌리는 것에 성공한 백호는 오른쪽 손바닥을 펼쳐 보이게 했다.
검은색 가죽 반장갑을 낀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조금 부은 곳을 확인하곤 바로 그곳으로 혀를 내린다.
할짝, 하고 백호의 혀가 손가락을 핥는 순간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일부러 그렇게 핥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백호는 계속해서 명월의 손가락을 핥아댔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리 해 주니 점점 통증이 엷어지는 것 같다.
백호의 손길을 피한 게 언제냐는 듯 명월은 제 손을 내민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손가락을 핥던 백호는 명월의 손목을 잡고는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러곤 팔소매를 위로 걷어 올려선 약즙을 바른 팔꿈치에도 혀를 댔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지라 미처 피할 수 없었다. 이미 백호의 혀는 명월의 팔꿈치에 닿아 있었고, 그는 바로 인상을 썼다.
“쓰고 떫잖아.”
약초의 즙을 낸 걸 발랐으니 그게 당연했다. 굉장히 이상한 맛이 나는지 인상을 쓴 채로 혀를 내밀더니 그대로 굳어버리는 백호를 두고 명월은 피식, 하고 웃었다. 그러곤 일부러 더 팔을 내밀었다.
“쓰다고 하다가 말 셈이야? 조금 더 정성스럽게 못 핥아?”
다 너 때문에 생긴 상처잖아. 중간에 그만두는 건 용납하지 않겠어.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입맛을 다셨다. 재차 맛보고 싶진 않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건가 싶어 속으로 구시렁거리던 백호는 결국 재차 명월의 팔꿈치에 혀를 댔다.
쓰기는 정말 쓴 모양이었다. 미간에 진한 주름이 생긴 채로 백호는 열심히 명월의 팔꿈치를 할짝였다. 그 모습이 보기에 이상했지만, 명월은 가만히 있었다.
백호가 하는 걸 물끄러미 보고 있으려니 가슴 한편이 근질거린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싶었을 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백호의 혀는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좀 까끌하고 표면이 거친 게 있었다. 그런 혀로는 암만 정성스럽게 핥는다고 해도 느낌이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한창 할 때에도 정신없이 얼굴을 핥아대면 그게 쓰라리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면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애를 먹었던 거다.
백호의 붉은 혀가 팔꿈치에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걸 보는 것뿐인데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든다.
가슴 한쪽이 쓰라려지면서 날카로운 무언가가 심장을 콕콕 찌른다. 왜 이러나 싶었던 명월은 팔을 뒤로 당겼다.
“―이제 되었으니 그만해.”
“그러면 다른 쪽 팔도 내밀어 봐.”
바로 혀를 뗀 백호는 입맛을 다셨다. 약즙 특유의 맛이 감도는 듯 이상한 표정을 지은 채로 혀로 제 아랫입술을 핥아대는 걸 확인한 명월은 팔을 앞으로 끌어당기곤 소매를 내렸다. 백호가 내내 핥던 곳을 손으로 주무르면서 몸을 슬쩍 뒤로 물렸다.
“이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지 말긴. 쓰라릴 때마다 뭐라 할 거면서. 원래 이런 건 시작했을 때 한 번에 처리하는 게 최고다. 어서 다른 쪽 팔이나 내놔.”
명월이 아프다고 하는 곳은 전부 다 핥아 줄 셈이었다. 팔꿈치든, 무릎이든, 등이든, 그리고 엉덩이 안쪽의 그 귀여운 주름까지도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백호는 입맛을 다셨다.
약즙의 맛은 최악이었지만, 명월을 핥는 건 나쁘지 않았다. 얼얼한 혀끝의 감각이 다시 돌아오는 걸 느끼면서 백호는 명월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놀란 명월은 팔짱을 끼면서 제 몸을 가렸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경계심이 가득한 명월의 얼굴을 본 백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내가 어떤 눈으로 쳐다봤기에 그렇게 경계하는 거냐? 음?”
마지막으로 되묻는 목소리에 비위가 상한다.
뭔가 좀 능글맞아진 것 같다면서 명월은 조금 더 몸을 사렸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 그리고 내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마.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내가 너랑 다시 무언가를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몸을 사리는 거냐.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어서 더 하면 안 되는 걸 알고 있어. 그저 아픈 곳을 핥아 주겠다는 것뿐이라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 핥아 줄게. 전에도 말했지만, 이 몸의 타액은 보약이나 다름이 없어. 너에게 결코 나쁘지 않을 일이니까 응? 이리로 와 봐라.”
책상 위에 올려진 손이 은근슬쩍 명월 쪽으로 뻗어진다.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닌데, 저런 식으로 말한다 해서 속아 넘어갈 것 같았나 보다.
이놈이 사람을 가지고 놀려 한다면서 인상을 쓴 명월이 당장 입 다물지 못하겠느냐고 하려 할 때 바깥에서 “사또.”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방이었다.
나갔다 들어오면 명월 쪽에서 먼저 이방을 불렀는데 이번에는 그게 아니니 이방 쪽에서 먼저 찾아온 모양이었다.
이병현 대감을 찾아가긴 했으나 결국 그를 만나지 못했고, 화소군의 비밀스러운 장소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후자 쪽이었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화소군, 그도 엉망이 된 그곳을 확인했을 거다.
지금 생각해도 꽤나 요란하게 손을 봤다. 만약 자신이 화소군이라면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동시에 정말로 중요한 게 싸그리 없어진 것이니만큼 타격이 커서 당장 움직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몸을 사리고 있던 명월은 백호에게 물었다.
“화소군이 쓸데없는 짓을 못하도록 할 방도는 생각해 둔 거냐?”
“그만한 일을 당했으면 지금쯤 폐인이 되었겠지. 달리 뭘 할 수 있겠어.”
“그 녀석은 만만치가 않아. 당했으니 다른 방식으로 이쪽을 치려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은 무리고 놈은 널 건드릴 수 없어. 내가 곁에 있으니까.”
“…….”
“내가 네 옆에 있으니까 그 누구도 널 건드릴 수 없어.”
뒤로 뻗은 손을 바닥에 디딘 채로 백호는 느슨하게 앉았다.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고 그냥 저렇게 말하고 넘길 뿐이었다. 늘 그런 식이라는 걸 알면서도 매번 그 말에 넘어가게 된다.
명월은 바깥에 있는 이방에게 말을 전했다.
“피곤하니 이야기는 내일부터 하지. 오늘은 쉬겠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의외다 싶었던 걸까. 이방은 바로 대답이 없다가 잠시 후 “알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방의 기척이 점점 멀어지는 걸 확인한 명월은 뒤로 몸을 물렸다. 미리 깔아 둔 이불 위에 누운 명월의 미간으론 주름이 잡혀 있었다.
역시나 움직일 때에는 힘들구나. 그래도 이렇게 누워 있다 보면 금방 괜찮아지겠지. 그리 생각하면서 명월은 입을 벌렸다. 그러자 큰 하품이 나온다. 입이 찢어져라 벌리고 하품을 하고 나서 입을 다물자 바로 백호가 보였다.
어느새 옆으로 온 건지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로 누워 있는 명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하니 다시금 덤벼들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몸이 움츠러들게 된다. 몸에 힘을 준 채로 명월은 백호를 노려봤다.
“뭐야?”
“허리도 아프고 등도 쓰리지? 주물러 줄게.”
명월의 표정이 훨씬 더 심각하게 변하는 걸 확인한 백호는 웃었다.
“이상한 짓은 하지 않아. 그냥 주무르기만 할 거야.”
이런 식으로 하기만 할 거라는 듯 허공에 손을 대고 주무르는 흉내를 내는 백호를 보고도 명월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마냥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 앞에서 계속 인상 쓴 얼굴인 채로 있을 순 없었다.
“이상한 녀석.”
명월은 중얼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상태가 안 좋았기 때문에 빠르게 움직일 순 없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느리게 엎드린 명월이 베고 누울 수 있도록 백호가 베개를 끌어당긴다.
머뭇거리던 명월은 그의 도움을 받아 베개에 오른쪽 얼굴을 댄 채로 뒤를 흘깃 봤다. 소매를 걷어 올리면서 다가오는 백호가 보였다.
“이상한 짓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이상한 짓이 뭔지 잘 모르겠는데? 그게 뭐지? 먹는 건가?”
“…….”
천연덕스러운 백호의 모습에 달리 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말을 말자 싶었던 명월은 입을 다물곤 베개에 턱을 올렸고, 바로 백호의 두 손이 명월의 허리에 닿았다.
커다란 손이 닿는 순간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문지르듯이 쓰다듬던 손이 강약을 조절하며 주무르기 시작하자 서서히 힘이 빠져나간다.
―의외로 나쁘진 않았다. 이러다가 갑자기 덤비면 어쩌나 싶어 긴장한 채로 있던 명월이지만, 그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간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있던 명월의 눈꺼풀이 감기고 곧 고른 숨이 퍼져 나간다. 그걸 확인한 백호는 위로 손을 뻗었다.
명월의 턱 아래를 한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고는 그가 베고 있던 베개를 옆으로 치워 버렸다. 그리고 이불에 뺨에 댄 자세로 바꾸어 주었다. 아까는 베개가 높아서 불편해 보였는데 지금은 한결 나아 보인다.
편안한 얼굴로 고른 숨을 토해 내면서 점점 더 깊은 잠에 빠져드는 명월을 확인한 백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백호는 아까보다 더 열심히, 정성스럽게 명월의 허리를 주물렀다.
* * *
산속에서는 해가 더 일찍 저문다. 아직 저녁때가 아님에도 어두운 그늘이 서리기 시작하자 마당에 나와 서 있던 노인은 불안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원래 사람이 있어도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던 곳이긴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난히 을씨년스러운 것 같았다.
조금 전 화소군이 이상한 모습으로 안으로 들어가고 난 후부터 점점 더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화소군을 오래 모신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거의 5년간을 그의 곁에 있었다. 그 시간 동안 그가 다급한 표정을 짓거나 초조해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까 화소군 그는 분명 조급해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노인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건 자신이 괜한 생각을 하는 것일 거다. 화소군이 누군데.
다른 사람은 당황해서 실수를 하거나 일을 틀어지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매사에 완벽하고 철저한 사내였다.
그는 본인이 하려는 일에 대해서 실수한 적이 없었다. 들어간 지 오래 되었지만, 조금 더 있으면 모든 게 다 정리된 얼굴로 나올 터였다.
그러곤 평상시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자신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릴 거다. 그걸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이곳으로 와 화소군의 곁에서 일하면서 이상한 일을 경험한 게 처음도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일들도 경험하고, 말도 안 된다 싶은 일이 일어난 적 있었다. 개중에는 노인을 극한의 공포로 몰아넣은 일도 더러 있었다.
그 일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만두거나 사라진 이들도 허다했다. 많은 이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동안에도 노인이 5년이라는 시간을 이곳에서 함께할 수 있었던 건, 보고도 안 보이는 척, 들려도 못 들은 척, 입을 막고 모르는 척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다 보면 이 이상한 현상들도 모두 알아서 해결될 거라면서 노인은 양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괜찮을 거다. 별문제 없을 거다.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 듯이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는 동안 노인의 눈동자는 점점 텅 비어져 갔다.
문득 도망가고 싶어졌다. 여기가 아닌 다른 장소로 가 버리고 싶은 그런 욕구가 치미는 걸 느끼면서 마른침을 삼키던 노인은 등 뒤에서 올라오는 스산한 기운을 감지하곤 그대로 굳어 버렸다.
“…….”
이상한 기분이 들어도 모르는 척,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 척하는 게 현명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저절로 돌아가려는 고개를 어찌할 수 없었다.
느리게 고개를 돌린 노인은 건물로 올라가는 계단 가운데에 서 있는 검은 복면인을 발견했다.
저자들은 화소군의 옆에 붙어서 그를 보호하고 지키는 게 주 임무였다. 그런데 왜 저렇게 서 있는지 모르겠다.
혹 화소군도 밖에 나와 있는 건가 싶어 주변을 살피는데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은 따로 서 있는 저 사내만 보일 뿐이었다. 그 순간 피가 모두 빠져나가는 듯한 서늘한 기운을 느낀 노인은 천천히 눈동자를 들어 복면인을 바라봤다.
화소군의 곁을 지키는 이들은 대부분이 저런 모습으로 있었다. 똑같은 복장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쳐도 모두가 같은 인물처럼 보이는 건 아니었다. 사람마다 제각각 체격이 다르고 눈빛이나 거동도 다르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그림자처럼 존재하고 있으니 그들에 대해서 더 깊이 알거나 이름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게 후회가 된 적이 없었다. 이럴 때 상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면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떨리는 눈동자로 복면인을 바라보던 노인은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동시에 가만히 서 있던 복면인이 따라 움직였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그 거동이 이상했다.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으면서도 용케 중심을 잡고는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왔다. 노쇠했던 노인은 그런 복면인을 피하지 못하고 멱살이 잡혀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세게 바닥에 뒷머리를 부딪친 노인은 엄청난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노인은 양손으로 목을 조르는 복면인의 행동을 알면서도 그걸 막을 수 없었다.
입을 벌렸다가 다물길 반복하던 노인은 기침을 했고, 거기서 붉은 피가 토해져 나왔다. 노인의 머리 뒤쪽으로 붉은 피가 점점이 퍼져나가고 그걸 본 복면인의 눈동자는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복면인이 크게 입을 벌리면서 노인에게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목 가운데를 뚫고 날카로운 검날이 튀어나왔다.
“……쿨럭!”
기침을 하면서 피를 토해 낸 복면인은 검에 목이 꿰뚫리고도 한참을 노인의 목을 조른 채로 있었다.
하지만 육체에 남아 있는 힘보단 혼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광기로 얼룩져 있던 눈빛이 검게 죽어 버리고 난 후, 복면인은 끈 떨어진 인형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그 아래로 보이는 노인도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점점 더 많은 피가 노인의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그걸 확인한 화소군은 복면인의 목을 꿰뚫은 검을 놓았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검이 바닥에 떨어지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검게 얼룩진 하늘을 바라보다가 뒤를 확인했다. 조용했던 곳은 마치 폐가처럼 보였다. 실제로 폐가가 맞았다. 애초에 저곳엔 살아 있는 사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앞으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화소군의 검은 눈동자가 점점 차분해진다. 화소군은 검은 천으로 돌돌 감싼 오른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견딜 수 없는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그의 눈두덩이로 힘줄이 오른다. 어금니를 악문 채로 어떻게든 통증을 참아내면서 그는 쓰러져 있는 자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단단하게 닫혀 있는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고, 그가 사라지고 난 후 강한 바람이 불어 대문이 활짝 열렸다. 하지만 열린 대문 너머에는 이미 화소군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 * *
간지러운 무언가가 가슴팍을 더듬는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무시하고 그냥 자도 괜찮겠지만, 그게 아까부터 얼굴을 건드리고 있었다.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이것이 과연 무얼까. 의문을 가지게 되자 어떻게든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도 피곤한데. 더 자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일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동안 이런 상태로는 편하게 잠을 잘 수도 없겠거니 싶었던 명월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너무 푹 잤던 걸까. 눈을 떠도 시야가 부옇게 보였다. 그래서 잠시 멍하니 있던 명월은 가슴 한쪽에서 퍼지는 오싹한 감각에 음,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바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곤 고개를 숙여 아래를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백호의 손이 떡하니 오른쪽 가슴에 달라붙어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명월은 바로 백호의 손목을 잡아 그걸 떨어뜨리고는 팔꿈치로 등 뒤에 달라붙은 몸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명월이 밀어내는 순간 더 강하게 달라붙는다.
아예 다리를 들어선 자신의 다리를 감아 단단히 끌어당기는 걸 느낀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으니 답답했다. 이불 위에 손을 올린 명월은 끙끙거리면서 어떻게든 앞으로 기어가려 했으나 백호는 끈질기고 집요했다.
거기다 너무 무거웠다. 그냥 밀어내는 것만으로는 떨어뜨릴 수 없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명월은 인상 쓴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못생긴 고양이 얼굴을 발견하곤 그대로 얼어붙었다.
“…….”
눈을 크게 뜬 채로 얼어붙은 명월을 본 나비는 가만히 있다가 크게 입을 벌렸다. 그 사이로 바로 냥―하는 기다란 울음이 흘러나온다. 동시에 명월은 팔꿈치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윽―하고 나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 * *
제가 사람인양 당당하게 방석에 앉아 있는 못생기고 뚱뚱한 고양이 한 마리.
그리고 배를 문지르면서 불평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을 하고 있는 백호.
그렇게 나란히 앉은 둘을 보는 명월은 기분이 이상했다. 동시에 구렸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던 명월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로 책상 앞에 앉아선 둘을 번갈아 보다가 곧 길게 한숨을 토해 냈다.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고는 머리가 아픈 양 그곳에 손을 짚는 명월의 행동에 백호의 눈이 옆으로 길게 찢어진다.
“왜 한숨을 쉬고 그래. 한숨 쉴 쪽은 따로 있는 거 아냐?”
명월에게 달라붙어서 달콤한 냄새를 질릴 정도로 맡으며 기분 좋게 자다가 난데없는 일격을 당한 셈이었다. 당황했던 만큼 힘 조절이 되지 않아서 굉장히 아팠다.
내장이 터져서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였다는 말도 하고 싶었지만, 명월은 그런 걸 들어 줄 상태가 못 되어 보였다. 여전히 머리를 움켜쥔 채로 고개를 숙인 명월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흔들어 댔다.
눈을 떴더니 코앞에 나비가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게 저렇게나 심각해져야 할 일인가 싶었던 백호는 눈을 내리떴다.
설마하니 이 못생긴 놈이 이상한 짓을 한 게 아닐까 싶었던 백호는 손가락으로 나비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바로 나비가 고개를 들어선 백호를 올려다본다. 여전히 특유의 졸린 눈을 하고 있지만, 바라보는 눈빛이 꽤나 매서웠다.
네가 뭔데 지금 날 건드리는 거냐.
그런 눈빛으로 주시하는 나비를 두고 백호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숙였다.
“뭐냐. 그 눈빛은? 지금 나한테 반항하겠다는 거냐?”
그 순간 나비의 눈으로 더 힘이 들어간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백호를 노려보더니 바로 고개를 팩, 돌린다. 그러곤 자기 앞발을 혀로 핥아 대는 모습에 백호의 표정 또한 점점 굳어진다.
이 녀석이 지금 자신을 무시하는 건가 싶었던 백호는 기분이 좋지 않았고 바로 한쪽 손을 위로 들었다. 동시에 명월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둘은 어떤 관계야?”
명월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백호는 위로 손을 든 채로 가만히 있었고, 나비도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는 사람이고, 하나는 고양이다. 비슷한 구석은 하나도 없었지만, 명월은 아직도 저 나비가 백호로 변하든가 아니면 동일한 존재가 아닌가 싶은 의혹이 들었다.
전에 물어보자 싶으면서도 그냥 넘어가곤 했는데, 이렇게 셋이 모여 있으니 마침 잘되었다.
명월이 아침부터 머리를 쥐어뜯은 건, 백호가 달라붙은 모습을 나비에게 들켰기 때문이었다.
보통 짐승이었다면 백호가 달라붙어 있든 말든 그냥 넘어갔겠지만, 나비는 평범한 짐승이 아니었다. 숨기고 싶은 치부가 들통 난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나.
그래서 잠시 암울해 있었던 건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자신이 눈앞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어도 둘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냥 자신도 궁금한 것에 대해서 묻고 말자 싶었던 명월은 팔짱 낀 팔을 책상에 올린 채로 둘을 주시했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말을 듣고 넘어가고야 말겠다는 듯,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위로 든 손을 내리곤 제 배를 문질렀다.
이제는 아프지 않았음에도 이런 행동을 취함으로써 명월의 신경을 분산시키려 했지만, 통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여전히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러니까 내 부하 같은 거야.”
“그건 알 것 같으니까 조금 더 정확한 단어로 설명하도록 해.”
기다렸다는 듯 받아치는 말을 들은 백호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눈을 내리뜬 백호는 나비를 내려다봤다. 나비는 반쯤 뜬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무언가를 보는 건지 조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저런 얼굴을 해도 정말은 지금 돌아가는 모든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저 얼굴로 이 곤란한 상황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런 걸 알면서도 두고 볼 순 없었던 백호는 당장 나비의 뒷덜미를 붙잡아 그 몸을 주욱 들어올렸다.
아무리 백호라 할지라도 나비를 한 손으로 들기엔 버거웠다.
무거워, 하고 인상 쓴 채로 중얼거린 백호는 나비를 흔들었다.
“이 녀석이 먼저 다가와 내 옆에 달라붙은 거야. 난 애초에 누군가를 곁에 둘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고, 이 녀석도, 그 꼽추도 내 허락도 받지 않고 옆에 들러붙어 있는 거야. 그저 단순한 내 부하일 뿐이야.”
“전에 저 고양이가 너로 변한 것 같았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거야?”
“……음, 그건 말이지.”
백호는 입을 다물곤 어깨를 으쓱였다.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고 ‘그건 이런 거야.’라는 식으로 대충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명월은 책상에 양손을 올린 채로 백호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숨기는 것 없이 모든 걸 솔직하게 다 말해야 할 거야.”
“…….”
뚫어지라 바라보는 명월은 진지했다.
다른 때에는 이방이나 복운이 눈치도 없이 찾아오더니만 지금은 왜 이렇게 조용한 건지 모르겠다. 아직 새벽이라서 그런가.
백호는 곁눈질로 명월을 봤고, 명월은 눈을 크게 떴다.
어서 대답하지 않고 뭘 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데 마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순 없었다.
아, 정말 성가시네. 혀를 찬 백호는 나비를 던지듯 내려놨다.
“그냥 좀 연결을 해 놔서 이 녀석이 보는 게 내게도 보이고 그럴 때가 있어. 가끔은 이 녀석의 몸을 이용해서 편하게 이동할 때도 있고―.”
“……뭐?”
“이 녀석 몸을 좀 이용한다는 거지. 내가 원할 때에는 이 녀석이 보고 듣는 것들이 내게도 전달되기도 하고, 편의에 따라서 이 녀석의 몸을 통해서 살짝 이동하기도 하고 뭐, 그런 거지.”
듣고 보니 별거 아닌 일이지? 백호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면서 명월을 바라봤다.
하지만 모든 걸 듣게 된 명월은 따라 웃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무표정이 된 명월의 움켜쥔 손으로 힘이 들어가는 걸 본 백호는 목을 뒤로 뺐다.
“재미없게 되었네.”
직후 명월이 뒤로 손을 뻗어선 베개를 집어 들었고, 그걸 던지기 전에 눈치가 빠른 백호가 재빠르게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도주를 실행했다.
그 뒤를 따르던 나비가 육중한 몸과 달리 가볍게 뜀박질을 하면서 백호의 등을 타고 올라가 앞발로 그의 머리를 꾸욱 밟고 앞으로 훌쩍 뛰어 내려갔다.
졸지에 머리가 눌려진 백호가 “너 이 녀석―!” 하고 소리를 쳤지만, 동시에 등 뒤로 날아오는 베개를 피하기 위해서 마당으로 맨발로 뛰어 내려갔다. 그 뒤로 붓이나 벼루 등이 더 날아왔다.
* * *
말끔하게 차려입고 전립까지 쓴 명월은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사또의 모습이었다. 간밤에는 피곤해서 일찍 잔다 해서 걱정을 했는데, 지금은 뚱한 모습이긴 해도 피로해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혹 모르는 일인지라 이방은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간밤에는 편히 잘 주무셨습니까?”
“잘 잤네. 신경 써 줘서 고맙네.”
억양이 딱딱하게 느껴지는 건 단순히 느낌 탓일 터였다.
“어제 이병현 대감 댁에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사람이 많이 몰렸다 하던데 안 좋은 일을 당하시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다들 상식이 있는 자들이니만큼 험한 일은 당하지 않았지만, 어지간히 견제를 하더군. 그리고 이병현 대감은 만나지 못했네. 문 앞에도 갈 수 없었지. 보아하니 반양의 모든 친족을 다 끌어 모은 것 같더군. 대감의 친족이 그리도 많을 줄은 내 몰랐네.”
“이병현 대감이 데릴사위로 들어갔는데, 당시에 반양 땅에서 가장 많은 성씨의 대표로 팔려 갔다는 느낌이 들긴 했었지요.”
“내 보기에 팔려 간 게 아니라 어떻게든 데릴사위로 들어가기 위해서 본인이 뒷 공작을 상당히 해댔을 것 같은데.”
“그자라면 그리하고도 남음이 있지요.”
“데릴사위로 들어간 자가 새삼스럽게 자기 친족을 불러 모으다니. 죽다 살아난 사람의 행보가 수상쩍군. 그 댁 안주인의 심기가 불편하실 것 같으네.”
그리고 명월은 그 안주인을 만나 봤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가녀린 척을 해서 명월을 앞세워 이병현 대감과 맞서게 할 셈이었다.
하지만 그 속내를 알고 있었던 명월은 넘어가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가 지니고 있던 화소군의 부적을 발견했다.
쓰러진 그녀가 이후에 어떤 행동을 취할지 알 수 없었다. 당시에는 그녀를 보살피는 것보단 당장 화소군을 어찌 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병현 대감의 안사람으로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할 겁니다. 그녀에게 다른 주머니가 있다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요.”
대감의 안사람을 떠올린 명월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만한 여인이라면 알아서 제 앞가림을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병현 대감이 뭔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쪽으로 계속해서 사람이 몰리는 건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손을 써 두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포졸을 보내 그곳에 세우면 그들이 가만히 있겠나. 이병현 대감이 이놈저놈 할 것 없이 다 불러들이니, 놈들끼리 뭉쳐서 아주 기세가 등등하더군.”
“……역시나 어제 가셔서 안 좋은 일을 당하신 게 아니옵니까?”
묻는 말에 명월은 대답 없이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어제의 중요한 일은 이병현 대감 따위가 아니었다.
화소군이 지금 무얼 하고 있을지. 그가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를 알아보는 게 중요했지만, 이방이나 포졸을 부릴 순 없었다.
놈이 이상한 짓을 해서 사람에게 귀신이 달라붙는 부적을 쓴다는 걸 알고 있는데 호랑이 아가리 속에 먹이를 던져 줄 순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지금까지는 사람을 가려서 부적을 심어 두었겠지만, 일이 이리 되었으니 눈에 보이는 모두에게 부적을 나눠 줄 가능성이 높았다.
아침에 백호와 나비 일만 아니었다면 붙잡고 이런저런 의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인상을 쓴 명월은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어제 이병현 대감의 뒤뜰에서 느꼈던 그 알싸한 향과 차디찬 공기를 떠올렸다.
“…….”
언뜻 백호가 자신을 두고 ‘쓸데없을 정도로 감이 좋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는 그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 그때 자신이 느낀 게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건데.
“사또. 뭔가 일이 또 생긴 것입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에 생각에 잠겨 있던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무릎을 꿇고 앉은 이방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무척 진중한 얼굴을 하시니, 혹 혼자서 무언가를 모색하심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사또 혼자서 해결하실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게 해 주십시오.”
거기까지 말한 이방은 입을 다물곤 명월을 바라봤다. 신중하게 응시해 오는 시선을 마주 바라보던 명월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 순간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은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이방, 자네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자네 같은 사람이 사또였으면 좋겠는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전 제 그릇을 압니다. 지금 사또의 아래에서 이런저런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한마디 들은 게 그토록 부끄러운 모양이다. 시선 둘 곳을 찾으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방을 지그시 바라보던 명월은 웃었다.
일단은 자신이 사또이니, 그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는 게 최선일 거다.
이방과 포졸들이 할 수 있는 일. 그런 쪽으로 생각하면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명월은 바로 입을 열었다.
“시장에 포졸을 풀어 수상한 거동을 보이는 자들이 없는지를 확인해라. 그리고 이병현 대감 쪽으로 이동한 사람들 중에서 정보를 빼낼 수 있는 자가 있는지도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드디어 할 일이 생겼구나 싶었던 이방은 한참을 잘 말하다가 입을 다무는 명월을 보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명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지막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점심 후에 외출을 나갈 터이니 그리 알아라.”
“어디를 또 나가시려 합니까.”
“오랜만에 호란에 가서 차나 한잔 얻어 마셔야겠다.”
이런 시기에 기방을 찾는단 말인가. 종잡을 수 없는 명월의 행보에 안색을 굳히는 이방이나, 곧 생각이 있겠거니 싶었던 그는 입을 다물었다.
* * *
명월이 지시를 내린 건 별거 아닐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신중하게 잘 처리를 해야만 했다.
방에서 나와 가죽신을 신은 이방은 마당을 가로질러 가려다가 대문 근처에 서 있는 백호를 발견하곤 움찔했다.
팔짱을 낀 채로 서 있는 백호는 꿍한 얼굴이었고 그 옆에는 나비가 앉아 있었다. 특유의 졸린 표정을 지은 채로 있는 나비와 백호를 번갈아 보던 이방은 옆을 지나칠 때 인사를 하곤 걸음을 서둘렀다.
그렇게 이방이 대문을 넘어서 나가고 나서야 백호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명월의 방 쪽을 살폈다.
방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이쯤 되면 열린 만도 한데.
문을 바라보던 백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까부터 이쪽을 외면하는 나비의 행동이 보기에 괘씸했다.
백호는 발끝으로 그런 나비를 툭툭 건드리면서 야, 라고 쌀쌀맞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자 고개를 슬쩍 드나 싶던 나비가 옆으로 걸어가려 한다.
이쪽을 피하려 하는 움직임에 백호의 눈으로 힘이 들어간다. 백호는 당장 나비의 꼬리를 붙잡으려 했고, 그때 명월이 밖으로 나왔다.
대청 위로 올라서선 바로 뒷짐을 지는 명월을 확인하는 순간 백호는 입을 다물었다.
“…….”
입을 다물고 침묵을 하게 되는 이 순간이 무척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왜 이렇게까지 명월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건가 싶은 기분도 들었다.
크게 잘못한 건 없잖아. 그리 생각하면서도 싸늘한 명월의 시선에 눈을 내리뜨게 된다.
똑바로 사람을 쳐다보지 못하고 딴청을 피우는 백호를 보자니 명월도 한숨만 나온다. 그러다가 새벽에 눈 뜨자마자 백호에게 베개를 던진 건 너무한 게 아닐까 싶었던 명월은 아래로 내려왔다.
목화를 신으려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 결국 걸터앉아서 제대로 신으려는데 옆으로 무언가가 슬그머니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명월은 눈동자만 옆으로 힐긋 움직였고, 그곳에 백호가 앉아서 다른 쪽을 쳐다본다.
아닌 척 다가오는 모습에 명월은 허리를 세웠다. 목화를 신은 발바닥으로 바닥을 두드리면서 나비를 확인하자 녀석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 버린 참이었다.
“저 고양이가 보는 것들은 다 볼 수 있는 거냐.”
“그런 건 아니다. 그냥 필요할 때에만 내가 이용하는 거지. 매번 저 녀석이 보는 걸 볼 필요는 없어. 저놈이 보는 건 쓸데없는 것투성이니까.”
“저 녀석을 복운에게 보낸 건 일부러 그런 거냐.”
“그럴 리가 없잖아. 말했다시피 언제나 저놈을 통해서 보고 듣는 게 아니야. 어디까지나 저놈은 제멋대로 다닐 뿐이고, 그러다가 얻을 게 있으면 내가 살짝 이용하는 느낌이야. 내가 저놈을 이리로 보낸 건 절대로 아니다.”
마지막 말에 명월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의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시선에 백호도 지지 않고 눈을 크게 떴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눈빛을 바라보던 명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짱을 낀 채로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 때가 제일 불안했다. 저러다가 갑자기 또 뭔 소리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때 명월이 복운은, 하고 입을 열었다.
“어려서부터 나와 함께 있어서 중요한 존재다. 저 고양이 때문에 복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 적당한 선에서 나비가 다른 곳으로 가게끔 해 줘.”
“저 복운 녀석을 위해서 그렇게 해 달라는 거냐.”
“그래. 평범한 고양이가 아니라면 복운의 곁에 둘 순 없어.”
백호와 관련된 거라면 평범하지 않은 고양이였다. 그 고양이 때문에 복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었다. 일은 터지기 전에 미리 수습해야 하는 법인지라 백호를 내려다보는 명월의 눈빛은 진지했다.
백호의 표정도 만만치 않았다. 다른 이도 아닌 복운을 위해서 나비를 돌려보내라 하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여기서 말이 길어지면 명월이 또 뭐라 할 수 있었다.
고작 고양이 하나 때문에 명월과 언성을 높이고 싶진 않았던 백호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알았다, 라고 대답했다.
“저 녀석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이야기를 나눠 볼 게 뭐가 있어. 그냥 네가 여기서 나가라고 하면 되는 거잖아.”
“그 녀석은 내 부하가 아니야. 내가 여기 말고 다른 곳으로 가라 해도 놈이 싫다고 하면 그만이다.”
“아까는 부하라더니, 그런 게 어디에 있어?”
설사 부하가 아니라 해도 그가 말을 하면 듣기는 할 게 아니겠냐고 말하려던 찰나 등 뒤에서 사또, 하고 복운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버릇처럼 뒤를 돌아보자 어색한 표정인 복운이 보였다.
저 녀석이 왜 저런 얼굴로 서 있는지 모르겠다. 상대가 달리 말을 꺼내지 않아도 어색한 모습에서 달리 문제가 생겼음을 감지한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의혹이 서린 눈빛으로 복운을 보는 동안 눈치를 살피던 백호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난다. 명월이 깨달았을 때에는 냉큼 저 멀리 도망친 후였다.
제대로 된 말도 해 주지 않고 도망치다니. 녀석을 놓친 게 아쉽기만 했던 명월은 혀를 찼다. 그 전에 복운이 무슨 이유로 자신을 부른 건가 싶었던 명월은 재차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
지금 복운의 얼굴만 봐선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다. 그래서 묻는 말에 어깨를 움츠린 채로 눈을 굴려대는 게 암만 봐도 이상했다.
뭔가 이상한 촉이 오는 걸 느끼며 명월이 “복운이 너―.”라고 먼저 말을 꺼내는 순간 복운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불러본 것뿐입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급하게 말한 복운은 명월이 붙잡을세라 그 자리를 피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복운은 사라지고 백호도 이미 다른 곳으로 피신한 참이었다.
홀로 서 있던 명월은 잠자코 있다가 중얼거렸다.
“대체 뭘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