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깔끔하게 머리를 틀어 올리고 가채를 쓴 후에 그곳에 각양각색의 장식을 달았다.
버릇처럼 평소에 잘 꼽는 것들을 장식하던 중에 나무로 된 비녀가 눈에 들어왔다. 투박하지만, 동시에 묘한 맛을 풍기는 아이인지라 요 몇 달 동안 빼놓지 않고 머리에 장식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걸 머리에 꽂기 전에 망설이게 된다. 어떻게 할까 싶어서 두어 번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그걸 함에 내려놓은 후에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거울 앞으로 보이는 제 모습을 확인하는 호접화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모습을 살피다가 거울을 덮고는 몸을 일으켰다.
위에는 검은 저고리를, 아래는 붉은 치마를 입었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훨씬 더 강렬한 인상을 풍기며 밖으로 나서는 그녀를 맞이하는 건 자희였다.
몇몇 기녀들이 더 있었지만, 그녀들은 자희만큼 편안하게 호접화에게 말을 건넬 수 없는 입장이었다.
모여 있는 기녀들에게 “좋은 아침이다.”라고 인사를 한 호접화가 사뿐하게 걸음을 옮겼다.
바람처럼 가벼운 걸음을 옮기며 눈앞을 지나치는 그녀를 본 기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감탄했다.
어쩜 저리도 어여쁠까 싶어서 얼굴이 발갛게 물든 채로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았다. 오로지 자희만이 호접화의 옆에 붙어 설 수 있었다.
“이병현 대감이 눈을 뜨자마자 기행을 일삼는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사람이 변한 것 같다고들 말하네요.”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
“어제 찾아온 분이 그리 말씀을 하셨습니다.”
“직접 대감을 뵈었다 하더냐?”
“그건 아니지만, 사람들 말로는 변한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갑자기 친족들을 불러 모으더니 근래 들어 집안에 안 좋은 일만 생기니 제사를 치르자는 말을 했다 합니다. 각 집안의 장남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모이라 했다는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하더이다. 그 사람도 장남 중 한 사람인지라 제사에 참여하게 될 것 같은데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며 중얼거리니―.”
“이병현 대감은 욕심이 많은 사내다. 본인이 하고자 마음먹은 일이 있으면 밀어붙이겠지. 그리고 남의 집안에서 제사를 치르든 말든 우리는 상관할 바 아니다.”
“그건 그렇지만…….”
호접화가 하는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거기다 그녀는 대감에 대해선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암묵적인 경고를 하고 있었다. 자희도 그쪽에 대해선 함부로 입을 놀리고 싶진 않지만, 입술이 근질거리니 수가 없었다.
“대감이 형님을 불러내서 괴롭히거나 하진 않겠지요?”
“집안의 제사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당분간은 그쪽에 집중할 테니 날 신경 쓸 겨를이나 있겠느냐.”
“차라리 앞으로 계속 형님을 안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아, 그리고 사또께서도 대감을 만나 뵈러 가신 것 같은데 문전박대를 당했다 하십니다. 너무하지 않습니까? 걱정이 되어서 찾아간 사또를 만나 주지도 않고 쫓아내다니요. 정말 재수 없는 영감탱이입니다.”
양손을 움켜쥔 채로 분통을 터트리는 자희는 정말로 화난 얼굴이었다. 이병현 대감 주제에 명월에게 함부로 군 게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녀의 말에 호접화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사또는 참으로 속이 좋으시구나. 대감을 만나러 가시다니.”
“그렇지요? 다른 사람들하고는 그릇부터 다른 분이십니다.”
양손을 마주 잡은 자희의 뺨이 발갛게 물이 든다. 명월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좋아 죽겠다는 듯 생글거리고 웃는 자희를 두고 호접화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넌방의 열려진 문틈으로 앉아 있는 한 늙은 선비가 보였다. 간결한 차림새를 입고 있으나, 중후한 멋을 풍기는 사내였다.
“저분은 뉘시냐.”
명월에 대해서 생각하며 해실거리고 웃던 자희가 그쪽을 살폈다.
“아, 조금 전에 찾아온 손님이십니다. 외부에서 오신 것 같은데 기녀는 되었다 하시면서 차나 한잔 내오라 하시더이다. 기방에서 차라니. 사또 말고 그런 걸 주문하신 분은 처음입니다. 그렇지요?”
아무래도 오늘 자희는 명월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하루인 모양이었다. 호접화가 바라보는 시선의 의미를 모르는 그녀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그 해맑은 얼굴을 본 호접화는 자희의 뺨을 토닥였다.
찬 기운이 유난히 강하게 느껴지는 호접화의 손이 닿았을 때 몸을 움츠린 자희지만, 그 손길이 떨어질 때에는 왜인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면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행동할 때에는 뒤따라오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라는 걸 모르진 않았다. 이럴 땐 멀찍이 서서 지켜보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도 가끔은 섭섭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면서 자희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자희를 두고 호접화는 건넌방으로 향했다. 도움을 주려 뒤따라오는 새끼 기생에게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손짓을 주고 난 후, 홀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색에 잠겨 차를 마시던 늙은 선비가 고개를 들었다.
완고하면서 동시에 깔끔한 느낌을 풍기는 자였다. 그 앞으로 걸어간 호접화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호란을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호접화라고 합니다.”
양손을 마주 잡은 채로 다소곳이 서 있는 호접화를 바라보던 사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과연 듣던 대로 대단한 미색이로군.”
“과찬이십니다. 그래봤자 이 좁은 우물 속에서나 자랑할 만한 미색이 아니겠습니까. 산을 넘어 도성으로 들어가면 저만한 이는 말발굽에 치일만큼 많겠지요.”
“겸손이 지나친 것 같군. 일단은 앉으시게.”
“고맙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저를 내쫓지 않으셔서요.”
마지막 말에 대해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기만 하는 사내의 행동에 호접화도 다소곳이 움직여서 맞은편에 앉았다.
다른 때라면 바로 옆에 앉아서 빈 잔에 차를 따라 주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호접화는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사내를 바라볼 따름이었고, 그건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호접화를 봤을 때처럼 그녀를 탐색하는 시선으로 주시할 따름이었다. 차분하게 그 시선을 받아들이던 호접화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그거 아십니까. 기방에 찾아와 기녀를 그렇게 쳐다보는 건 나으리께서 처음이십니다.”
“내가 어떤 식으로 자네를 쳐다봤는가.”
“저 여인의 정체가 대체 무얼까. 그런 류의 눈빛이었습니다.”
“미색만 뛰어난 게 아니라 통찰력도 훌륭하군.”
“본래 기생은 사내의 마음을 헤아리고 즐겁게 하는 법을 알아야 한답니다. 이 정도 눈치도 없어서야 곤란하지요.”
“그런 식으로 아주 많은 사내의 마음을 빼앗았겠군.”
“빼앗은 적은 없습니다. 그저 그분들께서 제 마음을 저에게 일방적으로 두고 가시는 것뿐이지요.”
“그게 일방적으로 두고 간다 말할 수 있는 일인가.”
“제가 그분들께 마음을 달라 청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렇군. 자네 말대로라면 그들은 자네에게 억지로 마음을 준 것이로군.”
해석하기에 따라선 빈정거리는 투로도 들릴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호접화는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았고 그건 중년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호접화는 앞에 놓여 있던 차 주전자를 들어선 빈 잔에 차를 따랐다.
쪼르륵, 하고 청량하게 울리는 소리에 둘은 잠시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들고 있던 걸 내려놓은 호접화는 양손을 제 허벅지 위에 올리곤 차분한 억양으로 말했다.
“간혹 사내들 중에선 교활하기가 여인보다 더한 분들이 더러 계십니다. 그리고 그와는 완전히 다르게 저희를 친구처럼 대하는 분들이 더러 계시지요. 사또는 후자이십니다. 절 여인으로 본다거나 품고자 음흉한 마음을 드러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십니다.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중년 사내의 눈썹이 위로 살짝 올라갔다. 딱히 부정은 하지 않더라도 어찌 알게 된 것인지를 묻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호접화는 순순히 대답했다.
“눈빛이 닮으셨습니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습니다.”
“……눈빛이 닮았다는 말은 처음 듣는군.”
“그들은 저처럼 통찰력이 없었던 거지요.”
입을 다문 호접화는 유일선 대감을 조용히 바라봤다.
전체적인 이목구비는 다르나 눈빛은 아니었다. 말끔하게 잘 정리된 눈빛에 주시당하자 호접화는 마음 한쪽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왜인지 모르게 정말로 명월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 같아서 그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바쁘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왜 여기까지 내려오신 겁니까. 사또께서 별 볼 일 없는 기녀에게 홀려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헛소문을 믿고 찾아오신 겁니까.”
“다 큰 사내가 어떤 여인을 품고 버리는지에 대해선 내가 일일이 신경 쓸 필요가 뭐 있겠는가. 시간이 남아 어딘가를 가는 중에 들른 것뿐이네.”
“아버지란 존재들은 언제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부성을 드러내는 모양입니다. 조금은 솔직해지는 편이 손해를 덜 보는 일이 될 텐데요.”
말을 하는 내내 호접화는 얼굴에 닿는 시선을 느꼈다. 말은 저리하면서도 자신이 계속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런 내색을 감추지도 못하고 드러내면서 입으로만 아니라고 한다. 좋은 관계를 이어가는 게 힘든 부자지간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던 호접화는 고개를 들었다.
유일선 대감은 따라 준 차에 손을 대지 않고 같은 자세로만 앉아 있었다. 그에게 달리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었다. 누가 보더라도 알 일이라며 호접화는 조근하게 말했다.
“사또를 만나 뵙고 대화를 나누실 생각이 없으신 거라면 이대로 돌아가십시오. 지금 사또께선 아주 바쁘시고, 나으리 말고도 건드리는 자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그들 상대하기에도 벅차신 것 같으니 더 짐을 지우지 마십시오.”
유일선 대감의 눈동자 안쪽으로 이채가 서린다.
속이 읽힌 것 같아서 잠시 불쾌해하는 것 같았으나, 잠시 생각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들어와 보니 한적하고 사람들 얼굴엔 여유로움이 가득하더군. 딱히 문제는 없어 보이던데 그 녀석이 바쁠 게 무언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
그 순간 유일선 대감의 눈동자 안쪽으로 날카로운 빛이 번득인다.
모르는 척 호접화는 말했다.
“사또께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으시다면 그냥 돌아가십시오.”
거기까지 말한 후 호접화는 입을 다물었고, 그녀를 바라보는 대감의 눈빛은 매섭게 변했다.
그는 상을 가볍게 내리치면서 몸을 일으켰다.
“기녀 주제에 말이 많구나. 네년이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것이더냐.”
“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도움을 받으면 그에 대해 보답하는 방법만을 알 따름입니다. 이런 제 태도가 건방지게 여겨지실지도 모르나, 따지고 보면 모든 게 사또를 위한 일입니다. 제 마음을 곡해하지 마십시오.”
호접화는 자리에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유일선 대감을 올려다봤다.
차분한 그녀를 두고 유일선 영감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진다. 어금니를 악문 그는 한마디 더 하려다 말고 몸을 돌렸다.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본 호접화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영감이 마시던 찻잔을 들어선 그곳에 입술을 댄 채로 중얼거렸다.
“걱정이 된다면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을 하면 될 것을―.”
그저 말만 제대로 전달하면 복잡할 게 다 무언가.
제 감정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어설프게 숨기려하니 문제가 생기는 거라면서 호접화는 차를 전부 마셨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세운 무릎에 팔을 올리곤 정면을 응시했다.
아무도 없는 빈자리를 응시하던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늘 평온하던 그녀의 얼굴로 그늘이 내려앉는다.
무거운 한숨을 내쉰 호접화는 중얼거렸다.
“머지않았구나.”
* * *
포졸을 외부로 보내고 난 후 명월은 관아 내부를 한 바퀴 돌았다.
관아 내에도 이병현 대감이나 화소군의 사람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들 중에서 화소군의 부적을 지니고 있을 자가 없다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더 꼼꼼하게 확인을 했다.
자신이 그런 식으로 다니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되는 모양이었다. 시선이 부딪치는 포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몸을 움츠리곤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개중에서 이상한 태도를 보인다면 말을 건네거나 가까이 불렀겠지만, 그런 건 없었다.
화소군은 자신이 이상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적 같은 걸 가지고 있는 포졸 정도는 자신이 파악하는 게 가능하다 싶어서 관아 쪽으론 손을 대지 않은 게 아닐까.
하지만 자신이 부임하기 전에라도 수작을 부릴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사또, 잠시 괜찮으십니까?”
혼자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명월은 조심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낯선 얼굴의 포졸이 서 있었다. 이쪽 안색을 살피면서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포졸을 두고 명월은 눈빛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감옥에 들어가 있는 놈이 사또가 이리로 오신 걸 알고는 만나 뵙기를 청해서 말입니다.”
포졸의 말에 비로소 명월은 자기가 감옥 근처에 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의도하고 이곳으로 온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지금 이곳에 서 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감옥에 들어가 있는 놈이 자신을 찾는단 말인가. 원래 놈들하고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포졸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지 않겠다 한다면 포졸은 알았다 하면서 당장 몸을 돌리고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질 거다. 하지만 감옥 안에 있던 자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잠깐 이야기를 들어 봐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알겠다.”
명월은 포졸 앞을 지나쳐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안과 바깥에 보초를 서던 포졸들은 기합이 잔뜩 들어간 얼굴로 자세를 바로 했다.
한마디 다정하게 건네고 싶어도 당장은 저들 귀에는 들어오지 않을 테지. 이럴 때는 그냥 조용히 들어왔다가 빨리 나가 주는 게 돕는 것이었다.
명월은 감옥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들 중에서 자신과 대화를 하길 원하는 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걸어가는 명월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은 조심스러웠다.
숨소리를 크게 내지 않은 채로 바라보는 이들을 두고 명월은 가장 안으로 들어가 쪼그리고 앉았다.
명월이 들어오는 순간 그걸 알고 있을 게 분명했던 사내는 꽤나 긴장한 얼굴이었다. 바라보는 눈빛도 한결 조심스러워졌다. 전에 발칙한 그 시선은 어디로 가 버린 건가 싶었다.
“전보다 많이 차분해진 것 같군.”
건네는 말 속에 빈정거림이 섞여 있음을 모르진 않을 텐데도 사내는 조용했다.
명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사내가 입을 뗐다.
“이병현 대감이 죽었다 다시 살아나셨다 들었습니다.”
“감옥 안에 있으면서 용케도 바깥소식을 잘 알고 있군.”
“여기에 있는 포졸들이 이곳 벽이 생각보다 얇다는 걸 모르는 것뿐입니다.”
말인 즉슨, 여기 포졸들이 주고받는 말을 통해서 얻어낸 정보라는 거다. 사내의 말대로 감옥의 벽은 두터운 편이 아니었다. 예전에 명월도 그런 식으로 곳간에서 이방 딸의 증세에 대해서 알지 않았던가.
더 캐물어 봤자 포졸들의 잘못이고, 그들의 입단속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자신의 실수였다.
명월은 입을 다물고 사내를 빤히 바라봤고, 사내는 망설이는 듯싶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 별다른 일이 없었습니다. 분명히 사또께서 신경 써 주신 거겠지요.”
이곳에 있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 모양이었다. 적의로 가득 찼던 사내의 눈빛은 한결 차분해졌고 말도 조심스레 하고 있었다.
나름 도와주려고 해 주는 건데 그것도 모르고 함부로 대거리를 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기 때문에 명월도 일단은 상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우리들은 여기서 편안히 잘 있는데 바깥의 가족들은 괜찮을지 걱정이 됩니다. 이병현 대감이 다시 건강해졌다 하니 괜한 쪽으로 관심을 돌릴 수도 있음이고…….”
이병현 대감이 가족들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지 그게 염려가 되는 거다.
가족들 걱정이야 전부터 하고 있었던 거겠지. 하지만 이제서 말을 꺼내는 건, 사내의 경계심이 완전히 누그러졌음을 의미하는 거였다. 솔직한 속을 드러내고 도움을 받고 싶은 거다.
“너희 가족은 신경 쓸 필요 없다. 내가 알아서 손을 써 뒀으니까.”
엄밀히 말하지만 자신이 아니라, 백호의 도움을 받은 거였다. 백호가 손을 써 뒀고, 그에게 별다른 말을 듣진 못했으니 그들에게 이상한 일이 생기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것도 이병현 대감에게 일이 생겼기에 무사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병현 대감이 구미호니 뭐니 하는 것에서 당해서 앓아눕지 않았다면 이들의 가족은 분명 위험해졌겠지.
이 사내가 지금 가족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다 죽어 가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던 이병현 대감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무언가를 원기 왕성하게 진행하고 있다는 말에 불안해졌기 때문일 거다.
그 늙은이가 뭔가를 하려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게 이들의 가족을 처리하기 위함은 아닐 것 같았다.
확언은 하기 어렵지만, 당장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식으로 말해 주려 고개를 든 명월은 멍한 얼굴인 사내를 보곤 주춤했다.
……아니. 왜 또 저런 얼굴인 거야.
자신이 한 말 중에서 달리 이상한 거라도 있었던가.
미간 사이로 주름이 생긴 명월은 조심스레 사내를 바라봤고, 사내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길 반복했다. 그러고는 족쇄가 걸린 몸을 불편하게 움직여선 무릎을 꿇고 앉아 바로 큰절을 했다.
“사또. 정말로 고맙습니다.”
“……음?”
고맙다는 인사나, 큰절을 하는 거, 모든 것이 당황스러웠던 명월은 굳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일은 더 생겼다. 다른 감옥 안에 들어가 있던 자들도 모두 절을 해댔던 거다. 그러곤 여기저기서 고맙습니다, 같은 말을 하니 더는 이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명월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절 같은 건 하지 말고 고맙다고도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이들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바로 이자들의 가족들을 찾아가서 정말 지금 괜찮게 잘 있는 건지 어떤지를 확인해야만 할 것 같지 않은가.
당황한 명월이 어찌할 바를 모르며 우왕좌왕하는 동안 가장 먼저 절을 한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전 지금까지 사또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또께서 저희 땅을 구원하기 위해서 찾아오신 분이라는 것도 모르고, 사또를 음해하고 해하려 했습니다. 저희가 한 짓을 보면 지금 당장 죽이고 싶으실 텐데도 살려 두시고 저희 가족들까지 보살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갚겠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제 자식들에게도 말해서 사또께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하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제 자식들에게 사또께 입은 은혜를 정확하게 일러줄 것입니다.”
“이병현 대감의 권세가 두려워 그의 말만을 듣고 사또께 해를 가하려 했던 저희의 무지함을 꾸짖어 주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한 명만 이러면 모르겠지만, 감옥에 있는 자들이 똑같이 입을 모아 저리 말하니 머리가 아팠다.
난 정말로 한 게 없어. 지금은 모든 게 수습된 상황이 아니라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이병현 대감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명월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건 바로 화소군이었다.
너희가 지금 관아의 감옥을 전부 다 차지하고 앉아 있긴 하지만, 그런 걸로 내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지 마. 너희 자식들에게 나에 대한 말도 하지 마라. 그런 건 무겁고 정말로 부담스러우니까.
명월은 목구멍 바로 위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무릎을 꿇고 앉은 사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명월이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저 혼자 감동을 받아서 그걸 참아 내는 모습이었다. 그걸 보자니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알고 보면 정말로 순박하고 귀도 얇은 이들이었다. 권력이 강한 이들을 따라 움직이고 그들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는 전형적인 약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었다.
저런 자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가족이겠지. 그 가족을 지켜 주고 있는 자신이 그들에게 있어 이병현 대감보다 훨씬 더 우위에 선 인물일 테고…….
내내 조용히 있던 명월은 한숨을 죽이며 입을 열었다.
“―일단은.”
입을 열자마자 사내들이 모두 귀를 쫑긋이 세우고 말을 잘 들으려 하는 게 느껴졌다. 바로 그런 게 부담스럽다는 말을 애써 참으면서 명월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의 마음은 잘 알겠네. 하지만 아직 모든 일들이 끝난 게 아니니 일단은 조용히 있어 준다면 고맙겠군.”
“꼭 그리하겠습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꼭 조용히 있고야 말겠다는 듯 단호한 얼굴을 하는 사내를 보자니 웃음이 나오려 한다.
사람이 이렇게 순식간에 변하기도 하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재빨리 이곳을 벗어날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잠깐 드는 생각에 명월은 다시 쪼그리고 앉아선 사내에게 손짓을 했다.
손가락을 까닥이자 사내가 바로 앞으로 기어온다.
사람이라는 건 마음먹기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는 모양이다. 무척이나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내가 이제는 우습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숨긴 채로 명월은 조용히 물었다.
“자네에게 일을 시킨 게 이병현 대감뿐이었던가?”
“……대감이 시키긴 했지만, 그 뒤에 행수가 있었습니다. 행수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 대감께서 바로 저희를 불러 이런저런 일을 시키셨으니까요.”
“역시나, 그런 건가.”
화소군 이놈. 역시나 네놈이 배후였던 거였어.
놈을 너무 건드린 게 아닌가 싶어서 살짝 들려던 죄책감이 몽땅 사라진다.
놈이 날 건드렸으니까 나도 똑같이 해 주는 것뿐이야. 그리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는 명월을 바라보던 사내가 조심스레 말했다.
“대감은 모르겠지만, 행수와는 얽히지 마십시오. 몇 번 본 적 없긴 하지만, 느낌이 이상한 사내였습니다.”
“…….”
걱정해 주는 얼굴에선 진심이 묻어난다.
그것에 명월은 그냥 웃고 말았다.
“걱정해 줘서 고맙다.”
그리 말하고 난 후, 명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감옥 밖으로 나오자 입구에 서 있던 포졸이 눈을 내리뜨는 게 보인다. 그냥 지나칠 셈이었지만, 하나 걸리는 게 있었던 명월은 포졸 쪽으로 얼굴을 붙이곤 나직이 속삭였다.
“병방에게 말해서 빡세게 훈련 들어가게 하기 전에 알아서들 입 조심해라. 죄수들이 다 들을 정도로 뭔 수다를 그렇게 떨어대는 것이야.”
죄수들이 감옥 안에 앉아 있어도 바깥소식을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 준 모양이었다.
이건 포졸들의 명확한 잘못이었기 때문에 한마디 듣는다 한들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포졸도 본인의 잘못을 아는지 명월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 피하기에 급급했다.
혀를 찬 명월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다가 뒷덜미에 닿는 시선을 느끼곤 놀라선 바로 뒤를 돌아봤다. 명월은 감옥 위쪽 처마 끝에 앉아 있는 까마귀를 발견했다. 까마귀와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녀석이 날개를 넓게 펼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대로 동쪽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에 명월은 제 뒷목에 손을 댔다.
예민해진 걸까. 하지만 묘하게 기분이 안 좋다면서 인상을 쓴 채로 있으려니 뒤통수 쪽으로 후우―하고 가볍게 입김이 닿았다가 떨어진다.
“뭐 하냐.”
“……윽?!”
난데없는 공격에 놀란 명월은 헛숨을 삼키며 당장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 서 있는 건 백호였다.
낮에 나비와 관련한 승강이를 하던 중에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나 싶더니 이제야 나타나 이상한 짓을 하는 저의를 모르겠다.
제발 평범하게 행동했으면 좋겠다. 눈에 띄는 행동을 취하면 다른 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게 아니겠는가. 너 정말 이리 행동할 거냐고 한소리 해 주고 싶어도 더 소란스러워질까 봐서 할 수가 없었다.
명월은 주변을 살피다가 백호의 손목을 잡고 안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아까와 달리 백호는 명월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일단은 인적이 드문 곳에 백호를 끌고 온 명월은 재차 주변을 살폈다. 오른쪽, 왼쪽, 하늘에도 이상한 게 없었다.
혹시나 싶어 땅을 살피자 개미 한 마리 지나가지 않는다. 모든 게 완벽한 상태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명월은 재차 백호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 비만 고양이는 언제 여기서 내보낼 수 있는 거냐?”
“또 그 이야기를 하는 거냐. 그건 아침에 다 끝낸 이야기 아니었어?”
끝난 게 아니고, 대화가 깊이 들어가려던 찰나 백호가 약삭빠르게 자리를 피한 것뿐이었다.
입이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할 거 아니냐고 해 주려는데 백호가 왼쪽 귓구멍 안쪽에 새끼손가락을 넣은 채로 중얼거렸다.
“그 녀석이 있어야지 내가 잠시 떨어져 있을 때 여기에 이상한 것들이 들어오나 안 오나를 확인할 수 있을 게 아니냐. 내가 사방팔방 모든 것들을 다 보고 감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적어도 그런 놈들을 부려야 일 하기가 수월할 게 아니냔 말이야.”
구시렁거리는 건지 투덜대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명월은 백호의 그 말들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입을 다물고 지그시 바라보는 명월을 흘깃 보나 싶던 백호는 팔짱을 끼곤 고개를 숙였다.
“일단 하나하나 정리가 되면 그때 놈을 돌려보내도록 하마.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그 녀석은 내 부하 같은 게 아니라서 나가라 해서 나갈 놈이 아니야. 뭔가 납득 시킬 만한 게 있어야지. 억지로 내보내면 나중에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조심할 필요는 있다.”
그래. 지금 백호가 신경 써야 할 것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간간히 잊고 있기는 한데, 자신의 아버지 독각귀 일을 포함해서 이런저런 것들이 더러 얽혀 있었다.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을 때에는 생각나지 않다가도 이런 식으로 한 번씩 상기하게 되면 기분이 가라앉는다. 검은 가면을 쓴 존재를 떠올리며 명월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독각귀 놈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은 거냐?”
“덕분에 태어났으니 아버지는 맞잖아.”
가장 기본이 되는 것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명월의 말에 딱히 반박할 거리가 없었던 백호는 입을 다물긴 했으나 그 얼굴로 드러나는 불만까지는 감추어지지 않았다. 팔짱을 끼곤 고개를 돌린 채로 혀를 차는 백호의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백호가 이 정도로 신경 써서 막아야 하는 존재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다.
그런 그가 지금 어딘가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걸까. 이리도 정신없는 와중에 불현듯 나타나는 걸까. 만약 그리된다면 자신은 어찌해야 하는 걸까.
적어도 어렸을 때 갑작스럽게 만났을 때하고는 다른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만나게 되면 어떤 기분일지 모르겠군.”
“그런 말은 하지도 마라. 그놈은 미쳤어. 이상한 낌새만 느껴져도 당장 피해야 한다. 그게 네놈이 살길이야. 놈은 제 짝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널 희생시킬 수도 있는 놈이야―.”
“…….”
독각귀를 보는 즉시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우고 도망치는 게 최선이었다. 그것에 대해서 확실하게 교육을 시켜 줄 셈인데 명월은 별다른 대꾸 없이 말간 눈으로 빤히 바라봤다.
그간 입이 아플 정도로 열심히 말한 게 있는데 왜 저런 얼굴로 쳐다보는지 모르겠다. 이 녀석이 지금 자신이 한 말을 듣고나 있는 건가 싶었던 백호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왜 대답 없이 그런 이상한 표정을 짓는 거냐.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기나 한 거냐?”
명월은 대답 없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에 백호는 물으면 대답을 하라며 명월의 어깨를 붙들었다.
* * *
포졸들이 시장을 다니는 건 특별할 게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 수가 많다고 여기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포졸의 얼굴도 보면 다른 때와 달리 긴장해선 여기저기를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간혹 거동이 수상쩍은 자들이 보이면 중간에 길을 막거나 이름을 묻곤 했다. 평소에는 없던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을 다니는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그건 가게 사람들이라 해도 다를 게 없었다. 포졸들이 하나하나 가게를 다니면서 둘러볼라 치면 어색하게 웃으면서 “수고들 하십니다.”라는 말이라도 건넸다.
포목점 주인 곽가도 그런 식으로 인사를 건넸고, 포졸이 그를 흘깃 봤다. 빤히 보는 눈빛이 꽤 매섭다.
인사 좀 건넸다고 저리 쳐다보는 건가 싶었던 곽가는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말을 걸지 말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포졸이 앞으로 다가왔다.
“요즘 장사하는데 수상쩍은 무리가 다니는 걸 보지 못했나?”
“반양 땅에서 수상쩍은 이들이라 해 봤자 외지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자들이라면 포졸 나으리께서 뭐라 하시기 전에 저희들이 먼저 경계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고을 사람들은 외지인에 대해선 경계심이 높은 편이었다. 노골적으로 티를 내는 건 아니나, 본래 비밀이 많은 집단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리되는 거였다. 포졸 또한 그 습성에 대해 모르는 게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몸을 돌렸다.
그렇게 포졸이 멀어지는 걸 보고 나서야 곽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시에 저 포졸 놈들이 뭔가를 잘못 먹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 이상한 사또가 하나 들어왔더니 포졸이고 뭐고 하나같이 죄다 이상해지는 모양이라면서 곽가는 안으로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야 그냥 가게 문을 닫아 버리고 싶지만, 그건 너무 티 나는 짓이니 참아야만 했다. 포졸이 한 번 다녀갔으니 두 번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주변을 살피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곽가는 조심스레 비단을 돌돌 말아서 보관을 하는 으슥한 곳으로 들어갔다.
허리를 굽히고 안으로 들어서서 고개를 든 그는 코앞에 서 있는 이를 확인하곤 헛숨을 삼켰다. 힉,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자 그곳에 서 있던 자가 조용히 눈을 내리떴다.
평상시처럼 멋진 차림새인 화소군이나 유난히 표정이 쌀쌀맞았다. 그뿐이 아니라 아까부터 오른쪽 팔을 왼손으로 감싸는 게 마치 그걸 감추려 드는 것 같았다.
화소군이 갑자기 나타난 것도 이상한데 거동이나 표정도 전과 달랐다.
바깥에선 포졸들이 다른 때와 다른 거동을 보이는 것과 맞물려, 화소군의 이런 모습 등이 모두 불안하게만 여겨졌던 곽가이나 애써 그런 내색을 감추었다.
“행수님. 안쪽에 차를 준비해 드렸는데 왜 이곳에 서 계십니까.”
“바깥에 누가 왔다 간 것이냐.”
“포졸 놈들이 거들먹거리면서 다니는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전에는 가게 쪽으론 재채기도 못했던 놈들이…….”
그랬던 놈들에게 굽실거렸던 게 떠오르자 괜히 억울하기도 했던 곽가는 재차 화소군을 바라봤다. 하는 말을 듣는지 어떤지 알 수 없는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원래 대하기 편한 상대는 아니었지만, 오늘은 좀 이상했다.
늘상 데리고 다니던 복면인들도 없고……그제야 곽가는 바깥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상기했다.
혹, 그것이 화소군 때문인가. 문득 드는 생각에 곽가의 안색이 굳는다. 이상한 생각을 하지 말자 싶으면서도 의문이 들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양손을 마주잡은 곽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행수님…….”
그때 바깥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그게 무엇이냐고 묻지 않더냐!”라는 걸걸한 목소리는 들어 본 거였다. 조금 전 이리로 와서 으름장을 놓던 바로 그 포졸 놈의 것이었다.
가깝진 않지만 멀지도 않은 곳에서 들리는 호통에 불안해진다.
“행수님. 잠시 계십시오. 제가 금방 나가서 확인해 보고 오겠습니다.”
포졸 놈의 목소리가 들리니 그렇게 멀지도 않은 곳이라는 거다. 괜히 가게 앞을 지키지 않고 있다가 불똥이 튈 수 있음이기에 자연스럽게 걸음이 바빠졌다.
급하게 나온답시고 갓이 걸려서 고개가 뒤로 넘어가기도 한 곽가는 급히 갓을 정리하면서 가게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뭔가가 잔뜩 실린 수레를 막아선 포졸 놈을 발견했다.
남의 가게 앞에서 시끄럽게 군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저기서 대체 무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인상을 쓴 곽가가 그쪽을 빤히 쳐다보는 동안 수레를 끌고 가려는 자와 그걸 막는 포졸의 승강이는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수레를 끌고 가던 자의 목소리가 커진다.
“이 수레는 분명 이병현 대감 댁으로 들어가는 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 수레에 실린 물건이 무어냐고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않는 거냐?!”
“언제부터 이병현 대감 댁에 들어가는 물건이 무엇이라고 시시콜콜하게 보고를 하고 다녔답니까?! 대감께서 이제 다시 정정해지셔서 왕성하게 두루두루 살피고 계시는데, 관아에서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관아가 여기서 왜 나오느냐! 내가 분명 너에게 수레에 무얼 실은 거냐고 물었고, 네놈은 알 것 없다면서 그냥 지나쳐 가려 했다! 그러다가 큰소리가 나오자 이병현 대감 댁으로 들어가는 물건이라는 식으로 넘어가려 했고! 잘못은 네놈이 먼저 했으면서 이제 와선 관아를 업신여기고 협박할 셈이더냐?!”
포졸의 대찬 반문에 사내는 입이 쏙 들어갔다.
이건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다른 반응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이병현 대감의 이름 석 자만 나와도 알아서 물러나곤 했는데―.
포졸도 그렇지만 여기저기서 힐긋거리는 시선도 슬슬 부담스러워진 사내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제, 제가 언제 협박을 했다고―.”
“반양 땅에서 이병현 대감이 대단하다는 걸 모를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하지만 그렇다 해서 네놈이 대감이 되는 건 아니다. 어디서 감히 거들먹거리느냐! 내가 네놈에게 수레에 든 게 무언지 묻지도 못하는 것이었더냐! 난 엄연히 사또의 명을 받아 시장 조사를 하러 나온 것이니라! 그것에 대해 반항할 경우, 네놈을 관아로 끌고 갈 수도 있음이야!”
그제야 사내는 정신이 살짝 돌아왔다.
최근 사또에 대한 말이 돌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이병현 대감보단 사또를 더 쳐주는 분위기였다.
이병현 대감이 구미호에게 당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리되었다.
그런 사또 아래에서 일하는 포졸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이상할 거 하나 없는 법이었다.
따지고 보면 지난 날 동안 포졸들이 이상할 정도로 기 죽어 지내긴 했다. 어쩌면 그들은 이 틈을 타 그간의 수모를 풀 셈인지도 몰랐다.
잡음이 일지 않도록 조용히 처리하고 오라는 말을 들은 참이었다. 그런데 시장에서 이런 소란을 떨게 되다니. 안색이 돌변한 사내는 바로 굽실거렸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그저 대감께서 제사에 필요한 물건이 급하게 필요하다 하셔서 그걸 구하기 위해 바쁘게 다니다 보니 마음이 급해서 실수를 한 것뿐입니다. 수레에 든 것들은 모두가 다 제사에 사용될 것들입니다. 수상쩍은 건 단 하나도 없습니다.”
“네놈 말을 믿을 수 없으니 상자 중에서 몇 가지를 열어 보거라.”
사내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이쯤 되면 포졸도 알아서 물러나 주면 좋을 텐데 어지간히 깐깐하게 구는구나 싶었다.
이병현 대감이 재차 정정해지면 그때 가서 두고 보자. 사내는 손을 비비면서 비굴하게 웃어 보였다.
사내를 따라서 수레 뒤로 이동하는 포졸을 보던 곽가는 끌끌, 하고 혀를 찼다.
“사또를 등에 업고 거들먹거리는 건 저도 똑같으면서…….”
중얼거리던 곽가는 입을 다물었다.
이병현 대감이 왜 제사 물건을 이 시기에 저만큼 사들이는지는 모르겠으나, 대감 댁으로 들어가는 수레라는 걸 알고도 막는 포졸의 패기가 대단했다.
전이라면 어림도 없을 일이었는데―.
믿고 싶진 않았으나 슬슬 변화가 생기긴 하는 모양이었다.
그 곱상한 사또가 이렇게나 위상이 높아지다니. 사람들 말로는 귀신을 퇴치할 줄 안다는데, 그게 정말일까.
이윽고 곽가는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귀신을 퇴치할 수 있을 리가 없어―.”
다른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여기선 그런 잔재주는 통하지 않을 거다. 무거운 표정을 지은 곽가는 급히 안쪽으로 향했다.
지금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존재가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을 이것저것 챙기는 것도 그가 해야만 할 일이었다.
“행수님. 바깥에서 큰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별일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가볍게 넘길 셈으로 고개를 들었던 곽가는 조금 전까지 화소군이 있었던 자리가 텅 비어진 걸 확인하곤 움찔했다.
분명 전까지 화소군이 이곳에 서 있었는데 그 짧은 새에 어디로 간 건지 모르겠다.
당황한 곽가가 재차 “행수님?” 하고 불러봤지만, 그런다 해서 사라진 화소군이 나타나진 않았다.
* * *
최근 이런저런 일로 뒤숭숭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또를 뵙지 못하게 되었다.
전에는 하루걸러 오던 분이 며칠 동안 연달아 오지 않으니 서운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형님에게 사또가 오셨다는 말을 들은 새끼 기생은 해야 할 정리도 다 마치지 않고 건물 뒤쪽으로 달려갔다.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여서 가 봤지만, 이미 그곳에는 많은 기생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르르 몰려들어선 안쪽을 흘깃거리면서 보는 기생들을 보자니 그 사이로 끼어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사또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는 건 너무 아쉬웠다. 여기에 있는 걸 들키면 형님들에게 한소리씩 들을 게 분명했지만, 사또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새끼 기생은 살금살금 앞으로 이동했다.
기생들 뒤에 조심스레 자리를 잡고 있으려니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들렸다.
“오시자마자 바로 방으로 들어가셔서 나도 제대로 얼굴을 못 봤다니까.”
“그러면 사또는 지금 호접화 형님하고 단둘이 방 안에 계신 거야?”
“그렇다니까. 항상 그래 왔으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인데 괜히 아쉽네. 어찌나 급하게 움직이시던지 그 잘난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니까.”
“그동안 우리 고운 사또의 얼굴을 못 봐서 눈에 다래끼가 날 정도였는데, 오늘은 찾아왔다는 걸 알아도 안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한탄 섞인 그녀들의 말에 새끼 기생은 입을 다물었다.
사또가 오시긴 했지만, 얼굴 보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녀들이 저리 말하는 걸 보면 자신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에 자리를 잡고 있어도 사또 얼굴을 보기는 글렀다면서 새끼 기생은 낙담했다.
“그런데 저기 앞에 앉아 계시는 스님은 뭐야? 정말 스님이야?”
“나도 저렇게 머리가 긴 스님은 난생처음이네. 거기다 굉장히 잘생기지 않았어? 지금까지 본 사내들하고는 완전히 다른데?”
“그러게 말이야. 사또하고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데? 저 팔뚝 굵은 것 좀 봐. 방에 들어갈 때 번쩍 안아서 이불까지 가 줬으면 좋겠네.”
“어허. 암만 남자가 부족하다고 해도 그렇지, 어디 스님을 앞에 두고 그런 불경한 소리를 해?”
“스님은 무슨? 딱 봐도 파계승인데―.”
“그런데 말이야. 사또하고 같이 다니는 스님이라면 그분 아니야? 이번에 이방 나으리 댁 앞에서―.”
“아, 맞다. 그런 일이 있었지. 귀신 잡는다는 소문이 도는 바로 그 스님인 거 아니야?”
“어머나. 이쪽을 쳐다본다. 다들 피해―.”
주거니 받거니 이상한 말을 하던 기생들이 다급히 뒤로 물러나자 뒤에 얌전히 서 있던 새끼 기생도 덩달아 몸을 피하게 되었다.
잔뜩 몸을 움츠린 채로 고개를 돌리고 있으려니 기생들이 다른 쪽으로 우르르 달려간다.
물이 빠지듯 기생들이 나가자 자연스럽게 새끼 기생의 앞을 막는 것들이 모두 사라졌다.
천천히 고개를 든 새끼 기생은 형님들이 말하는 파계승이니, 뭐니 하는 특이한 스님을 볼 수 있었다.
승복을 입고 있지만, 머리는 산발로 자유롭게 풀어헤친 채였다. 거기다가 대청이 아닌 계단 옆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다리를 꼬고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마 모여서 구경하는 기생들이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조금 전에 이곳에 온 새끼 기생은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이쪽을 보는 스님의 눈빛이 싸늘한 게 묘하게 소름이 돋았던 새끼 기생은 옆으로 천천히 물러났다.
원래는 사또를 보러 달려온 건데,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었다. 괜한 시비에 휘말리기 전에 자리를 피하자면서 새끼 기생은 종종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하나의 구경꾼까지 전부 쫓아낸 백호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성가시게-.”
은연중에 본심이 나온 백호의 표정이 바로 굳어진다. 눈을 가늘게 뜨나 싶던 그는 당장 뒤를 노려봤다. 그런다고 해서 닫힌 문이 다시 열릴 리가 없는데 말이다.
안에 있는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를 엿듣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지만, 그리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모르는 채로 넘어가는 편이 나았을 텐데.
알아서 득이 될 게 있고, 아닌 게 있었다. 그래서 딴에는 열심히 “뭐 하러 그런 여자를 만나러 가. 가지 마.”라고 했건만 한 번 결정을 내린 명월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녀를 만나지 말아야 할 이유라도 있냐고 묻는데 뭐라 할 수 없었다.
만나지 말라 하려면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해 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본래 백호는 제 일이 아닌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은 그저 호접화에게 준 것이 있으니, 일이 다 끝나고 그걸 돌려받으면 그만이었다. 그동안 그녀가 무얼 하든지 자신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하지만 명월은 그게 아니지. 그래서 머리가 복잡했던 백호는 재차 뒤로 고개를 젖혔다.
“미치겠구만―.”
늘어지는 한숨을 내쉰 백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쪽 눈을 찡그린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백호는 콧잔등을 씰룩였다.
“……금방 퍼붓겠군.”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백호는 곧 에잇, 하는 소리를 내면서 발끝에 걸리는 돌멩이를 멀찍이 차 버렸다.
* * *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오른손이 차가 담긴 잔을 들고는 입까지 옮겼다. 바로 차를 한 모금 넘기기 전에 코를 대고 가볍게 향을 맡아 본 명월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향이 정말로 좋군.”
“특별히 더 신경을 써서 우려냈답니다.”
명월은 잔에 입술을 대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눈을 내리뜬 그의 얼굴 위로 만족감이 서리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자네의 정성이 담겨서 그런지 유난히 맛이 좋군.”
“워낙 좋은 재료가 담겼으니 맛도 훌륭한 게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탔다면 이런 맛이 나오진 않겠지. 난 그리 생각한다네.”
그리 말한 명월은 입꼬리를 양끝으로 올렸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명월의 입매에, 호접화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다.
둘의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봄바람이 살랑이듯 훈훈한 공기가 방 안을 감돌았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호접화도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눈을 내리뜬 채 잔에 입술을 대고 차를 한 모금 넘기는 그녀의 동작은 정적이었다. 여느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호접화는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모습을 유지하곤 했다. 무슨 말을 건네도 당황하는 일 없이 차분하게 반응했고, 명월은 그녀의 그런 점이 참 좋았다.
주변의 소란스러움과는 상관없다는 듯 늘 그곳에 한결 같은 모습으로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유난히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끌린 건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명월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는 제 오른손에 손을 댔다. 잠시의 망설임 후에 손목 쪽에 대어져 있던 매듭을 풀어내고 가죽 장갑을 벗겨 냈다. 그러곤 손바닥이 보이도록 돌린 후에 호접화를 바라봤다.
양손으로 찻잔을 쥔 호접화는 눈만 내리떠선 지금 명월이 하는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의 흔들림이 없다. 차분하게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며 명월이 입을 열었다.
“귀문으로 통하는 길이 내 손바닥 안에 있다고 하더군. 이 알 수 없는 문양이 그 통로가 되는 모양이야. 그래서 이걸 노리는 잡것들이 종종 있는 것 같더군. 잘은 모르겠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이상한 것들을 종종 봐 왔다네. 그리고 요즘에는 날 노리고 덤비는 것들을 몇 처리하기도 했지.”
백호 외에 다른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한번 말하기 시작하니 멈출 수 없었다.
“어렸을 때에는 이 손바닥을 가리기 위해서 필사적이었지. 이것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 없는 게 아닌가 싶어서 문양이 싫고 불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네. 이것만 아니었다면 어렸을 적에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존재가 나와 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갑작스럽게 낯선 곳에서 나 홀로 살아갈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싶었던 거야. 하지만 그건 다 옛일이고, 지금은 내 입장에 그럭저럭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네.”
귀물이 보이고 놈들이 사람을 해하는 것 같으면 처리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놈들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어 당혹스러운 일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백호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처리할 수 있었다.
물론, 자신 있게 떠벌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명월은 호접화를 바라봤다. 자신의 손을 보이고 이런 말을 하는 게 그녀에게 효과가 있을까.
바라건대 부디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부디,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기를―.
간절하게 바라보건만 원래 그런 것일수록 제 뜻대로 안 되는 법이었다. 차분하게 있던 호접화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고 그녀의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간혹 세상을 살다 보면 보이는 것도 못 본 척, 들은 것도 아닌 척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찌 사또의 비밀을 제게 보이시는 겁니까. 현명한 판단이 아니십니다.”
“다른 이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이 문양이 필요한 거라면 도와줄 의향이 있네.”
호접화가 입을 다물고 눈빛으로 물었다.
어떤 식으로 도와줄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속내를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기에, 명월이 생각하는 바를 입에 담는 게 최선이었다.
“귀문으로 넘어가고 싶은 거라면 도와줄 수 있다는 거야.”
그 순간 호접화의 미소가 한결 더 짙어졌다.
눈을 내리뜬 그녀는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그 웃음이 그리 호의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녀의 미소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고, 바로 입을 다문 호접화는 차분한 눈빛을 던져 왔다.
“사또. 통로가 된다는 의미가 무언지 아직 잘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
그러는 호접화는 통로의 의미를 안단 말인가. 저도 모르게 명월의 몸이 앞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명월은 한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역시나 호접화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던 거다. 이병현 대감의 집으로 갔을 때, 거기서 대감의 안사람을 만나고 나오는 순간 바람결에 묻어나는 향을 맡았다.
그 향은 익숙하게 명월의 뇌리에 남아 있던 것이어서 바로 호접화 그녀가 떠올랐다.
그때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나진 않았다. 하지만 백호가 한마디 거들었고 거기서 확신을 얻었다. 호접화의 정체에 대해서 말이다.
처음부터 특별한 여인이라고 느끼긴 했지만,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전개가 될 줄은 몰랐다.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니. 이토록 생생하고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걸로 따지면 백호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엔 사람이 아닌 것들이 정말로 많아서 이제는 머릿속에 자리 잡았던 상식이 무너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 아닌 존재들도 정말은 사람들 사이에 당연하게 어울려서 살아 숨쉬고 있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도 호접화가 사람이 아니었다는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지만, 충격은 은은하고 강하게 온다. 그래서 더더욱 눈으로 힘이 들어갔다.
노려보듯 바라보는 명월을 마주 응시하며 호접화는 차분히 말을 꺼냈다.
“몸 자체가 통로가 되어서 받아들여야만 그것들이 귀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들과 아주 긴밀하게 밀착된 상태가 되어야지만 비로소 문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지요. 말이 밀착된 거지, 행위 자체로만 본다면 교접과 다를 게 무엇이겠습니까. 사또께서는 불특정 다수와 교접을 하시면서 그들을 그곳으로 보내 주실 생각이셨습니까.”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그제야 명월이 이해를 했다는 걸 알게 된 호접화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기본적으로 절 품으셔야지만, 제가 귀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거겠지요.”
“…….”
거기까지 말한 후 호접화는 입을 다물었다.
자연스럽게 명월의 오른손으로 힘이 들어간다. 손을 움켜쥐곤 그것을 바라보던 명월은 마른침을 삼켰다.
백호는 거기까지 말해 주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손에 있는 것에 대한 간단한 언급만 했다.
전에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호접화가 하는 말을 고대로 자신에게 할 수 없었던 거겠지.
명월은 싸늘하게 내뱉었다.
“난 그런 것인 줄 몰랐네.”
“바깥에 계신 분이 알려 주지 않으셨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요. 그건 사또의 잘못이 아니니 당황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명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딱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경직된 그 표정을 눈에 담으며 호접화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말할 필요가 없다 생각하신 거겠지요. 저분은 내색하진 않아도 내 것이라 생각하는 것에 대한 소유욕이 강해서 본인 말고는 그 누구도 함부로 사또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실 생각이셨던 거지요. 교접이니 뭐니, 그런 걸 하게 할 생각이 없으니 말하지 않은 겁니다. 거기다―.”
호접화는 백호를 두고 ‘그분’이라 칭하는 것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도 호접화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가 잠시 말을 끌 때에는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명월과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에 맞춰서 호접화는 말했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사또에게 본인의 향을 묻혀서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게끔 해 두었군요. 지금 사또의 몸에서 풍기는 향을 맡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질려 버렸을 겁니다. 이토록 강하게 제 영역 표시를 하다니―. 그만큼 사또를 아끼는 마음이 크신 거겠지요.”
표정이 무너진 명월은 지금 대체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몸에서 나는 향이라니.
종종 백호가 ‘너한테서 좋은 냄새가 난다.’라고 했던 적이 있긴 했지만 그건 호접화가 말하는 것하고는 다른 종류의 것일 터였다.
명월은 손을 움켜쥐었다. 앞에 앉아 있는 게 호접화만 아니었다면 바로 팔을 들어선 냄새를 맡아 봤을 거다.
하지만 그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자신을 바라보는 호접화의 차분한 시선 때문이었다.
흔들림이라곤 거의 느껴지지 않는 눈빛에 주시된 명월은 점차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실제로 심호흡을 한 명월은 오른손을 상 아래로 내렸다.
“많은 걸 알고 있구려.”
“알고 있지요. 사또가 아시는 만큼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을 터였다. 자신이 모르는 것들을 알고, 무언가를 꾸미려 하고 있었다. 이병현 대감의 죽음이 그녀의 최종 목표인 것일까.
“내 눈앞에 앉아 있는 여인이 호접화인 게 맞소?”
“아닙니다. 호접화라는 인물은 그저 제가 만들어 낸 거지요. 이 땅에서 정착하기 위해 말입니다.”
“…….”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나오는 대답에 순간 할 말을 잊는다. 멍하다 싶은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던 명월은 몇 번 심호흡을 한 후,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 눈에는 사람으로 보이오. 지금껏 봐 온 귀물하고는 완전히 다르오. 그러니 난 그대가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존재해 주었으면 하오. 물론 기생으로 계속 있어 달라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참으로 다정하십니다.”
좋은 말로써 입을 막는다. 하지만 다정하다는 긍정적인 단어가 이토록 찜찜한 기분이 들게 할 줄은 미처 몰랐다.
자연스럽게 경직된 표정이 되는 명월을 두고 호접화는 본인 찻잔을 양손으로 감쌌다.
“본인 일 처리 하시는 것도 바쁘실 텐데 저 같은 것도 챙겨 주시고, 정말 다정하고 좋은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사또 같은 분만 계신다면 저 같은 게 생겨날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지요.”
그 순간 명월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난 좋은 사람이 아니오. 오히려 나와 관련되지 않은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 편이오. 내게 해를 가하는 이들은 미워서 어떻게든 정리하고 싶고, 그들을 무시하고 억누르고, 사라지게 하고 싶은 보통의 사람일 뿐이오.”
“…….”
“그런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호접화, 그대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오. 그대가 괜찮고, 마음이 통하는데다, 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니 챙기는 것뿐이오. 난 아무런 이득 없이 움직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외다.”
그러니 말장난 같은 걸로 자신을 밀어내지 말았으면 싶었다.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인 것인지, 무얼 할 셈인지 알려 주었으면 싶었다.
물론, 그녀는 그것이 본인의 일이니 자신이 알 필요가 없는 부분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그렇지 않았다. 그 진심을 곡해하지 말았으면 싶기에 자연스럽게 표정도 굳어진다.
한눈에 봐도 알 정도로 굳어 있는 명월을 바라보며 호접화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느리게 목을 넘긴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누군지 아셨을 테고, 제가 무엇을 할지도 모른다 걱정이 되셔서 찾아오신 거라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전 사또의 청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가 그동안 기다리던 일이 눈앞에 다가왔으니 전 해야 할 일을 할 것입니다.”
“이병현 대감을 죽이는 일 말이오?”
“그렇습니다.”
역시나 그런 건가.
알게 되었으니 더더욱 물러설 수 없었던 명월은 강하게 말했다.
“사람을 죽이면 그대에게 좋을 게 없소.”
“제가 죽이려는 건 사람이 아닌 짐승인 데, 어찌 제게 해가 되겠습니까. 오히려 그놈이 죽는다면 전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이승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 말하며 웃는 호접화의 얼굴에서 섬뜩함이 전해진다. 지금껏 그녀를 보면서 느껴 본 적 없는 감각에 명월의 어깨로 힘이 들어간다.
지금 명월이 느끼는 감각은 백호를 대할 때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래. 그를 앞에 둘 때와는 정말 다른 감각이었다. 그는 호접화 그녀처럼 이렇지 않다면서 명월은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암만 이병현 대감이라 할지라도 그대가 죽이려 한다는 걸 안 이상 그걸 막을 수밖에 없소.”
“막으십시오. 사또께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해서 그놈의 목을 비틀어 버리겠습니다.”
“그리도 원한이 깊은 거요?”
후, 하고 호접화가 가느다란 한숨을 토해 냈다.
이윽고 물어 무얼 하느냐면서 그녀는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저 하나가 죽었다면 이 정도로 한이 사무치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마음에 품고 있던 소중한 이를 빼앗겼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년설이 이보다 시릴까. 맞은편에 앉아 있음에도 호접화가 풍기는 싸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다.
이제야 그녀가 조금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그녀는 사람이 아니고, 원한이 깊은 존재였다.
원한을 풀기 위해서 이병현 대감을 죽일 것이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걸 알게 되었는데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마시오.”
목을 타고 흘러나오는 목소리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명령인지 간청인지 알 수 없는 말에 돌아오는 건 무척이나 싸늘한 거절이었다.
“전 할 것입니다. 그런 절 사또께선 막지 못하십니다. 사또를 우습게 봐서 이리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인간들이 나서서 그놈의 숨통을 죄어들 겁니다.”
“…….”
“인간이란 원한뿐만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움직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것들이 아닙니까. 모든 건 그들이 다 알아서 해 줄 것이고, 전 그걸 지켜만 볼 것입니다. 사또께서도 그리하시면 됩니다. 어차피 죽을 놈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오. 이병현 대감에겐 적이 많소. 그대가 아니라 할지라도 다른 누군가 그를 처리해 줄 것이오.”
“아니요. 놈을 죽이는 건 제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
무슨 말을 어떻게 하더라도 같은 반응만 돌아올 거다. 지금 호접화는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릴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명월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걸 두고 명월은 달리 더 무슨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본다 해서 달리 해결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희미한 미소를 지은 명월은 손을 움켜쥐었다.
“만약에―.”
명월이 입을 여는 순간 호접화가 그의 입술을 주시한다.
무슨 말을 할지를 바라보는 눈빛이 다소 굳어 있는 걸 보아하니, 그녀가 앞으로 나올 말에 꽤나 집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에 명월의 미소가 한결 짙어진다.
“무슨 일이 생겨 내가 나선다면 그건 이병현 대감이나 다른 자들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그대 때문이오. 그대가 걱정되고 염려가 되기 때문에 나서서 도와주려는 거지.”
“……사또 저는.”
“그대가 개입되지 않았다면 나도 오지랖 넓게 굴지 않을 것이오. 자네 때문에 나서는 거니 일단은 그리 알고 더 뭐라 하지 마시오. 차는 잘 얻어 마셨소. 다음에 또 찾아오겠소.”
무슨 말을 한다 한들 호접화의 마음을 돌릴 순 없었고, 그건 명월도 마찬가지였다. 호접화가 이런저런 말을 한다 해서 그것을 듣고 수긍할 순 없었다.
일이 터져서 그로 인해 그녀가 나선다 하면,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무엇을 하든지 그건 그녀가 선택한 일이 되겠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그녀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 인간의 됨됨이를 떠나, 인간을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겐 해가 될 순 있음이었다.
자신은 그저, 호접화 그녀가 자신이 알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유지해 주었으면 싶었다. 기억 속에서, 지금 보이는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말이다.
명월의 얼굴에서 고집 외에 다른 게 느껴진 것일까. 호접화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바라봤고, 그 표정 아래쪽에는 ‘정말 어쩔 수 없는 분이시로군요.’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웃고 있는 얼굴만을 본다면 평소와 다름이 없는 상황인 것 같았다. 마음이 불편하고 풀리지 않는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오면 그녀가 따라주는 차 한 잔을 얻어 마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더는 그리할 수 없겠지.
가죽 장갑을 다시 낀 명월은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바라보며 호접화는 본인 앞에 놓인 찻잔에 손을 댔다.
“죄송합니다만, 마중은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괜찮소. 앉아서 쉬시오. 피곤해 보이는군.”
피곤해 보인다는 말에 호접화의 미소가 한결 짙어진다. 느리게 한쪽 입꼬리를 올린 그녀는 고개를 들어 명월을 올려다봤다.
“사또. 제 어디가 그리도 마음이 드십니까. 어디에 꽂히셔서 절 이리로 아끼시는 겁니까.”
막 문을 열고 나가려던 명월은 손잡이에 손을 댄 채로 뒤를 돌아봤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그녀의 어디가 마음에 드냐니.
물론 그녀의 외관이 아름답기 때문에 호감을 가지긴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의 차분함과 때로는 대찬 부분은 미모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막상 던져온 질문에 대해선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만 있으려니 그녀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사또께서 제 얼굴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하시는 부분은, 원래 제 것이 아니랍니다. 바깥에 계신 분께 받은 것이지요.”
차분하게 나오는 말에 명월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두 눈동자를 주시했다.
사람을 빨아들일 듯한, 깊이를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눈동자는 평소에는 차분하다가도 때때로 묘한 일렁거림을 보여 줄 때가 있었다.
그리고 호접화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떠올리는 인물이 있었다.
명월의 눈에는 그녀와 그의 눈매가 너무도 흡사해서 한때에는 둘이 혈연관계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제 것이 아니라 말하는 거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굳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호접화의 미소는 한결 짙어졌다.
“그것이 무척 마음이 드셨을 텐데, 제 것이 아니니 어쩌면 사또는 제게 속으신 걸지도 모릅니다. 제 것이 아닌 것으로 인해 사또의 마음을 현혹한 발칙한 저이니 부디, 앞으로 제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마음 쓰지 마시고 사또께서 하셔야 할 일을 하십시오.”
“…….”
명월은 자신이 고집스러운 부분이 있다 생각했지만, 그건 호접화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에 걸쳐서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터이니 명월이 그것에 개입하지 말아 달라 말하고 있었다.
거듭되는 말에서 그녀의 결의가 느껴졌다. 동시에 그녀가 하려는 일이 머지않았음 또한 알 수 있었다.
이번 말에 대해선 명월은 제대로 된 대꾸를 하지 않았다.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눈인사를 남기고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려던 찰나 그 너머로 일어서는 사내가 보였다. 승복을 입고 있는 사내는 정확하게 호접화의 얼굴을 살폈다.
사내의 미간에 서린 주름을 본 호접화는 저도 모르게 하, 하고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고 동시에 완전히 문이 닫혔다.
그렇게 혼자 남겨진 호접화는 짧은 순간 본 백호의 눈빛과 얼굴을 떠올리며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웃음을 흘린 후 바로 입을 다문 그녀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그걸 양팔로 끌어안았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고, 그 부분에 대해선 간섭이 없던 사내가 마지막 순간에 가선 인상을 찌푸린다.
이쯤 하라는 그런 속내를 비춰 온 것이다. 전이라면 저런 표정은 어림도 없었을 거다. 어여쁜 사또의 품속에 푹 파묻혀서 그가 하고 싶어 하는 걸 가능한 다 들어주려 애가 탄 거다.
한때에는 너무도 무심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존재가 마음이 흔들린 후에는 저리도 변질될 수 있음이 놀라웠다.
“……변질이 아니라 당연한 일인가.”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제 마음에 드는 존재를 위해서 무엇이라도 하고야 마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감정일 거다.
사또를 품에 담은 백호는 어쩌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변화를 하는 것일 거다. 그리 보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에 품은 이를 위해서 뭔가를 하려 한다.
그런데 왜 이리도 마음이 싸하니 차갑게, 끝도 보이지 않는 저 바닥으로 침몰하는 기분이 드는 것이냐면서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 * *
앞서 걸어가는 명월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에서 그의 지금 감정 상태가 훤히 다 보이는 것 같았던 백호도 굳이 말을 건네거나 하진 않았다.
입을 다물고 명월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정확히 세 걸음 뒤, 거기서 더 떨어지거나 달라붙지 않고 그렇다고 명월의 뒤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
멀리서 보면 명월의 머리 위로 백호의 머리통이 언뜻 보였다.
처음엔 그걸 보고 놀라던 이들도 막상 가까워져서 단순히 ‘백호가 명월의 뒤를 따라 걷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굳은 표정을 풀었다.
그러다 곧 왜 저렇게 사람 뒤에 찰싹 붙어서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어 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상하다는 양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호는 명월의 뒤통수만 바라볼 따름이었다. 둔한 사람이라도 알아차릴 만큼 강렬한 시선이었다. 하물며 그걸 명월이 모를 턱이 없었다. 다 알고 느껴지면서도 모르는 척 구는 것뿐이었다.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고, 그때 명월이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걸 본 백호도 일단 멈추어 섰다. 명월이 다시 움직이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그 옆으로 접근하지 않을 셈이었다.
이번 일은 백호 그도 뭐라 조언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호접화를 만난 명월이니 그녀에 대해선 알게 되었을 터였다.
머리가 복잡해 보이는 건 보나 마나 그녀 때문이겠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계속 궁리를 하고 있을 테지만, 백호는 그걸 딱히 도와줄 수 없었다.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생각은 이리해도 마음은 무겁다. 언짢다. 답답하다.
명월과의 사이에서 이런 식으로 어정쩡한 사이로 있는 건 싫었다.
결국 백호가 먼저 움직여서 명월의 옆에 섰다. 마침 명월도 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무엇이 있기에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춘 것이냐고 물으려는데 저기 앞에서 움직이는 수레가 보인다.
줄지어 이동하는 수레 위에는 이런저런 것들이 잔뜩 실려 있었다. 저게 무언가 싶었던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고 이내 알게 되었다.
제사(祭祀) 용품이다. 그 양이 상당했다.
백호가 그쪽을 살피자 명월이 재차 움직인다. 그런데 이번에 향하는 건 관아 쪽이 아니라 수레가 이동하는 쪽이었다. 그걸 본 백호의 눈썹이 위로 올라간다. 그는 바로 명월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를 갈 셈이야? 관아는 그쪽이 아니라 저쪽이야.”
전부터 명월이 길을 잘 못 찾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큰 길가에서도 방향을 못 잡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당황해서 안색을 굳히는 백호였지만, 그런 그를 돌아보는 명월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나도 알고 있어.”
알고는 있는데 저 수레의 정체가 궁금하니 알아볼 셈이라는 거다.
명월다운 대답이었지만 백호는 한숨이 나왔다.
일단 명월은 피곤해 보였고, 호접화 일 때문에 정신이 없을 거다.
자신 외의 존재 때문에 명월이 신경 쓰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은 편하게 쉬게 해 주고 싶은 게 그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다시 관아로 돌아가자 말하려 하다가 명월의 눈동자를 보곤 입을 다물었다.
난 이미 마음을 정했어. 저걸 보고 나서 돌아갈 거야.
그리 말하는 눈빛을 읽은 백호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곤 고개를 푹 숙였다.
이 고집불통 녀석. 그래. 이제는 네 마음대로 해봐라.
백호는 명월의 옆으로 가선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덩치도 좋고 팔도 큰 백호가 어깨동무를 하자 무겁다.
더군다나 사또 차림새로 나왔는데 승복을 입은 백호가 어깨에 팔을 두르니 그 모습이 튈 수밖에 없었다.
“무거워.”
“좀 참아. 난 개새끼마냥 네가 어딜 갈 때마다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거든?”
“누가 따라오라고 했냐. 네가 좋아서 내 뒤를 쫓아다니는 거잖아.”
“우와―.”
백호는 고개를 들고는 크게 입을 벌렸다.
기가 막힌 일을 당하면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잠시 눈앞이 캄캄해진다고 하던데, 지금이 딱 그 모양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명월이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 거였다. 사고란 사고는 다 모아서 치는 주제에 이제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게 어디에 있단 말인가.
너 말 한번 예쁘게 한다면서 꼬아 줄까도 싶었던 백호는 막상 보이는 명월의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눈을 내리뜬 명월은 묘하게 뚱한 얼굴이었다. 토라진 건 아니고 단순히 무언가를 집중해서 생각하는 중이었다.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데 건드릴 필요가 어디에 있나 싶었던 백호는 명월의 어깨에 두른 팔에 더 힘을 주었다.
그냥 이대로 자신의 거처로 데리고 가서 방 안에 집어넣고만 싶었다. 문을 잠가 버리고 자물쇠를 걸어서 아무 데도 못 나가게 하는 거다.
지금의 이 소란이 다 사라지고, 일이 정리가 되면 그때에 다시 나오게 하는 거다.
지금 심정으로는 딱 그리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는 거다.
명월이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백호는 한숨이 나왔다.
내 팔자가 어쩌다 이리된 걸까. 원래 자신이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신경 쓰면서 질질 끌려다나는 편이 아니었는데. 애초에 독각귀 그놈에게 부탁을 받는 게 아니었……가 아니고.
어차피 그 녀석에게 부탁을 받지 않았어도, 언젠가 이리되었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문득 드는 생각에 백호는 입을 열었다.
“그녀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처참했다.”
그 순간 명월의 미간으로 얇은 주름이 잡힌다.
먼저 말을 꺼냈으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더 말하기가 망설여진다. 허락도 없이 이런 말을 한 걸 그녀가 안다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
뭐, 여기까지 와서 더 숨기는 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었던 백호는 순순히 말을 풀어냈다.
“원한이 너무도 깊었어. 그대로 풀려나면 여기저기 다 건드렸겠지. 죄 없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죽어 나자빠졌을 거야. 그리고 그녀는 귀물이 되었을 거고.”
“…….”
“원래 그런 존재가 나타나면 쫓아내선 안 돼. 애초에 그녀가 이 땅을 찾아왔고, 그런 상태였으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 물론 그런 놈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하진 않아. 대부분은 내 손에서 처리를 하곤 하지. 그런데 그녀가 이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명월의 어깨에 두른 팔에 들어간 힘을 느슨히 한다. 대신 명월의 오른쪽 팔을 감싸듯이 잡고 있던 손가락에 힘을 준 백호는 한결 낮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놈들의 악행이 도를 지나쳐 하늘이 노했기 때문에, 이쯤 되어서 한번 정리가 되어야 한다는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올해 저놈들의 뿌리는 절반이 갈려야 하는 운명이었어.”
이병현 대감의 핏줄. 그 핏줄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야만 했다. 누군가 그리 말을 꺼낸 건 아니나,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저놈들의 수를 줄여야겠구나.’라고 말이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때에 맞춰서 호접화가 나타났다.
피인지 흙인지 분간할 수 없는 오물로 뒤덮인 몸과 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검은 구멍.
그곳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모습엔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섬뜩한 무언가가 있었다.
다가오는 백호를 알면서도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말은 없어도 그녀는 온 몸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이 사라져선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백호에게도 전달되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죽어선 안 되었다.
그래서 백호는 그녀를 받아들였고, 그녀에게 자신의 신체 일부분을 주었다. 다른 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리한 건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백호는 그녀가 하는 일에 대해서 간섭할 수 없었다.
설령 이제 와서 중간에 손을 댄다 해도 이 정도까지 진행이 된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당장은 막을 수 있다 하더라도 재차 또 그런 일이 생기게 된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이다.
“인간들의 사정이 있듯이, 이쪽도 이쪽만의 규칙이 있다. 그러니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마라. 이번 일은 나도 어찌할 수가 없어.”
어찌할 수 없다는 말 자체가 이상했지만, 정말 어쩔 수 없다. 그 외에는 다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입을 다문 백호는 굳은 눈빛을 보냈고 명월도 똑같은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렇게 둘은 조용히 걸어갔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요란했다.
사또와 스님. 누가 보더라도 이상하지 않은가. 결국 앞서 수레를 끌고 가던 자들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대신 뒤를 따라오는 명월과 백호를 보곤 이상하다는 시선을 던지면서 경계했다.
저들이 이쪽을 흘깃거리면서 보는 이유에 대해 모르지 않으면서 명월은 그냥 계속 걸어갔다.
수레는 총 세 대였고, 명월이 두 번째 수레를 지나쳐 가자 첫 번째 수레에 서 있던 자는 알게 모르게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멈춘 명월은 바로 안심한 사내를 바라봤다.
“이 수레들 전부 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커헉.”
안심하고 있을 때 갑자기 명월이 멈춰선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저리 묻자 사내는 갑자기 숨이 턱, 하니 막혔다.
가슴을 움켜쥔 채로 비틀거린 사내가 뒷걸음질을 치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근처에 서 있던 자들이 놀란 얼굴로 그에게 달려갔다. 그러곤 곧장 명월을 올려다보는데, 그 얼굴 위로 ‘기습을 하다니. 비겁하다.’라는 생각들이 담겨 있었다.
가슴을 두드리며 헐떡거리며 숨을 고르는 자는 보지도 않은 채로 명월은 재차 수레를 가리켰다.
“이건 전부 다 어디로 가는 건가. 어떤 용도로 쓰이는 거지?”
애초에 많은 수레에 짐을 잔뜩 싣고 가면서 다른 사람들 눈에 튀지 않기를 바란 게 잘못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필이면 명월과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던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선 서로 시선만 주고받았다. 그들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명월은 그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무슨 일입니까?”
앞에서 들리는 소리에 명월은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선비 몇이 다급히 이리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한달음에 달려온 그들은 명월이 당장 수레의 물건을 빼앗아 갈 것 같았는지 그 앞에 서선 매서운 시선을 던졌다.
“이 물건들은 전부 이병현 대감 댁으로 옮겨 가는 것들입니다. 이번에 다 모여서 함께 조상님에 대한 제사를 올리기 위해 준비한 단상 같은 것들로, 문제 될 만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수레를 막아선 겁니까?”
명월을 발견한 수레가 알아서 멈춰 선 거지, 명월이 그들이 이동하는 거리를 막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수레가 어디로 가고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선비가 그에 대한 대답을 모두 해 주었다. 그러고도 경계를 풀지 않고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는 모습에 명월은 짧은 한숨을 내쉬곤 옆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뒷짐을 진 채로 선비를 바라봤다.
“꽤나 많은 수레가 이동하기에 궁금해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물었을 뿐이네. 대충 쓰임에 대해서 알게 되었으니 이만 되었네. 갈 길 가게나. 대감께서 이 수레를 기다리고 계실 테니.”
명월의 말에도 선비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계속 주시하면서 멈춰 서 있던 수레를 두드리면서 어서 움직이라 재촉한다.
그런 선비와 명월의 눈치를 살피던 사내들이 멈추었던 수레를 끌어당겼고,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수레가 움직였다.
세 대의 수레가 전부 움직이고 명월의 앞에서 멀찍이 멀어지고 나서야 선비도 당장 등을 돌렸다. 서둘러 걸어가면서도 뒤를 살피며 이쪽을 확인한다.
몇 번이나 흘깃거리면서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유난히 수상쩍다. 본인들은 그걸 잘 모르는 모양이라며 명월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백호를 올려다봤다.
“친족들을 전부 다 불러 모으다니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나 보군. 모여 있는 사람 전부 다 제사에 참여를 하려면 그 거대한 대갓집도 좁을 텐데.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제사를 지내는 걸까?”
“그건 저들이 알아서 할 문제지.”
대답을 하는 백호가 은근슬쩍 발을 빼려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걸 알면서도 명월은 잠자코 있었고, 재차 멀어지는 수레를 살폈다.
외부로 나가서 크게 제사를 지낼 셈이던가. 이병현 대감이 나서서 말이다.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인간들이 나서서 그놈의 숨통을 죄어들 겁니다. 인간이란 원한뿐만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움직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것들이 아닙니까.’
명월은 호접화의 말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려는 저들을 막는다 한들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인가.
그들은 반발하고 덤비려 들 게 분명했다. 언성이 높아질 테고, 관아로 쳐들어오는 자도 더러 있을 터였다. 자신에 대한 불만을 적은 상소가 도성에 올라갈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미 올라간 걸지도 모르겠다.
명월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눈에 빤히 보이는데도 전혀 도와주고 싶지가 않아.”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백호는 대꾸가 없었다. 조금 떨어져 있던 그는 명월의 어깨에 팔을 두르곤 가볍게 토닥였다.
말은 하지 않아도 그 행동에서 ‘이만 관아로 돌아가자.’라는 그의 속내가 전해졌다.
입을 다물고, 조금은 복잡한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던 명월은 짧은 한숨을 내쉬곤 느리게 몸을 돌렸다. 수레와는 반대 방향, 관아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 * *
애초에 이병현 대감이 쓰러졌을 때부터 호접화 그녀의 계획이 진행된 걸지도 모른다. 처음 그가 쓰러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찾아갔어야 했던가. 그때 모든 걸 눈치챘다면 지금보다는 나아진 상황이 되었을까.
아니다. 그녀는 멈추지 않을 거라고 분명히 말했다. 구체적으로 언급한 건 없으나 그녀의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 속에는 감추어지지 않는 분노가 잔뜩 묻어나 있었다.
그녀는 마음 깊이 이병현 대감에 대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그 일가 전체에 대해서 원한이 있어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을 당했던 걸까. 묻고 나서 그녀의 사정을 알게 된다면 그땐 자신은 어떤 마음이 들까. 그녀의 일을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까. 그게 아니라면 ‘역시 그래도 사람에게 해를 가해선 안 되니 멈추시오.’라는 말을 할까.
간혹 이런 생각도 든다.
무조건 살아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을 죽이면 나쁘다. 그래선 안 된다.
그리하는 말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일까.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고,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놓은 존재가 아직 살아있는데, 단지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것 때문에 그게 면죄부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어렵구나. 명월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숨을 토해냈다.
“하아―.”
그 순간 나뭇잎 한 장이 명월의 입술을 눌렀다. 갑자기 다가오는 것에 한숨을 쉬다 말고 반사적으로 입을 다문 명월은, 자신의 입술을 누르고 있는 게 나뭇잎이라는 걸 확인하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대체 무언가 싶었던 명월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던 백호가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기 빠지니까 한숨 같은 건 그만 쉬어라.”
“…….”
백호의 표정이 진지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은 아닌 거다.
명월은 제 입술을 누르는 나뭇잎에 손을 대곤 그걸 떼어냈다. 나뭇잎을 만지작거리던 명월은 “한숨을 쉬면 기가 빠지는 거냐.”라고 중얼거렸다.
“가슴이 답답해서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 내쉬는 한숨은 기를 허하게 한다. 그럴 땐 차라리 입 다물고 참는 편이 나아. 너처럼 아까부터 연달아 한숨을 내쉬면 갑자기 픽픽 쓰러질 수 있는 법이다. 무엇보다, 머리를 계속 굴려서 해결이 안 된다 싶은 일은 그냥 잊어버려. 뭘 그렇게 미련을 가지고 질질 끌려가는 거냐. 한심하게―.”
한심하다니. 딴에는 꽤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건데.
명월은 백호를 흘겨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세상 사람들이 너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면 편하긴 하겠다.”
“뭐라고? 이 몸이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지금 말하는 거냐?”
“용케도 바로 알아들었군. 그래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백호가 바로바로 반응을 취하자 그게 보기에 웃겨서 명월도 툭툭 말을 던지게 된다.
명월의 표정이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져서 그가 농을 건넨다는 걸 알게 된 백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간다. 이윽고 눈을 가늘게 뜬 그도 장난스럽게 “이 녀석―.” 하고 중얼거리면서 명월에게로 손을 내렸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가볍게 졸라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저기 멀리 보이는 관아 앞에 서 있는 복운이 눈에 들어왔다.
뭐 마려운 개마냥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이 이상했다. 저 똥개 놈은 왜 저러고 있는 건가 싶었던 백호는 이내 복운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명월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올려다보는 얼굴은 뚱했지만, 그래도 곱상하니 어여뻤다. 저런 얼굴로는 어떤 표정을 지어도 귀엽기만 할 다름이었다.
지금 명월을 보고 귀엽거나 예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이상한 건 아닐 거라면서 백호가 목에 팔을 두르는 순간에 맞춰서 외침이 들렸다.
“사또!!”
“……저 망할 놈의 자식.”
뭐를 하려고 할 때마다 사또, 사또, 시끄러워 죽겠다. 다음번에 자신과 명월이 함께 있을 때엔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가볍게 손을 봐줄까 싶었던 백호는 인상을 쓴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저 멀리에 있던 복운이 엄청난 속도로 이리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뭔가 싶어 당황한 백호가 굳어 있는 동안 어느새 명월 앞에 멈춰선 복운은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또! 주인어른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주인어른은 또 뭐야? 그게 뭔데 이 시끄러운 놈이 난리법석인지 모르겠다. 심드렁한 얼굴인 백호는 명월을 내려다봤다.
백호의 머릿속에는 이미 ‘주인어른’에 대한 존재는 지워지고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굳어 버린 명월을 보고 나서 바로 그 마음이 달라졌다.
정말 놀란 명월은 잠깐 숨을 들이마셨고 그걸 천천히 토해 냈다.
“……아버님께서 찾아오셨다고?”
명월의 말을 들은 백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사악 올라갔다.
* * *
반양으로 내려가기 전에 아버지는 바깥으로 나오지 않으셨다. 전날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아서 그거로도 충분했기 때문에 명월은 아쉬움이나 섭섭한 마음 없이 편안하게 반양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이후로도 아버지 생각을 하면서 그리워하거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전에 화소군이 진상품에 장난을 칠 때에 잠시 ‘아버지에게 폐가 될 수 있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로 인해서 자신에게 어떤 피해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인한 것이었다.
솔직히 반양에서 임기가 끝나면 도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조금 더 눌어붙어 있다가 아예 다른 쪽으로 부임이 되길 기다릴 마음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허울 좋은 가족들과 완전히 멀어질 셈이었는데 지금 눈앞에 아버지가 자리를 잡고 계셨다.
딱 보니 수행원은 하나만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집에선 이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알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골치 아플 일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왜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은밀하게 자신을 찾아온 것일까. 혹, 이번에 백호가 한 쓸데없는 짓 때문에 생긴 자신의 소문이 귀에 들어간 걸까.
그냥 평범하게 일을 하라 했는데 여기선 귀신 잡는 사또로 소문이 났으니 그 말이 도성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리 없었다. 시간을 헤아려 보니 그럭저럭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머리가 아파짐을 느끼며 명월은 인상을 썼다. 가능한 별일 없는 것처럼 편안히 있자 싶으면서도 그게 쉽지가 않았다.
차마 아버지를 볼 용기가 생기지 않아서 아까부터 내내 바닥만 보는 명월을 두고 유일선 영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좋아 보이는구나.”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건 입에 발린 말이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도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마당에 웃으면서 “네. 전 지금 무척 좋은 상태입니다.”라고 할 수도 없잖은가.
하나의 대답을 하고 나니 재차 주변이 조용해진다. 묘하게 싸해진 공기를 느낄 수 있었던 명월은 허벅지 위에 올린 제 손을 내려다봤다. 유난히 오른쪽 손에 끼워진 검은 장갑이 눈을 찌른다.
지금 이때까지 명월은 이 오른손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신경 쓰지 않은 적이 없었다.
혼자 있을 때에도 버릇처럼 오른손을 책상 아래에 두곤 했었던 거다. 하지만 얼마 전부턴 이 손을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지냈던 것 같다. 그 원인에 대해선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백호와 함께 있을 때엔 오른손은 흠이 되지 않았다. 그에게 보이고, 그가 만져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이 오른손을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 앞에선 항상 오른손 위에 왼손을 대서 그걸 가리곤 했다.
생각을 안 할 때에는 모르겠으나, 한번 의식하게 되자 오른손의 반장갑이 유난히 눈을 찌른다.
앞으로 오른손을 끌어당기고 그곳에 살며시 왼손을 댄 명월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사전 연락도 없이 찾아오셔서 솔직히 놀랐습니다.”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궁금할 때에는 직접적으로 묻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한 가지 말을 들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명월은 고개를 들어선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 순간 바로 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늘 자신이 앉아 있던 그 자리에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선 자신을 찾고 있는 진짜 아버지가 있었다. 독각귀가 정체인 바로 그 친부가 말이다.
그 사실에 대해서 눈앞에 있는 분에게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취할까. 어렸을 때부터 이상한 걸 보기만 할 것 같으면 당장 옆으로 와서 말없이 어깨를 붙잡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면 자신을 낳아 준 그는 아버지의 동생이었다. 그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동생이 자신과 같은 행동을 취했을 때에도 비슷하게 그걸 막으려 했던 걸까.
어깨를 세게 붙잡거나 본인을 바라보게끔 해서 ‘무엇이 보이는 거냐. 사람들 앞에선 이상한 모습을 보이지 마라.’라는 식으로 했을까.
숨이 막힌다. 그냥 문득 드는 생각에 명월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도성으로 올라온 진상품이 무척 훌륭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담담한 억양의 말에 명월은 잠자코 있었다.
다행이었다. 중간에 화소군이 이상한 수작을 부리진 않은 모양이니. 물론 지금은 수작 부릴 상황도 못 되겠지만.
“주상께서 무척 기꺼워하시면서 너를 칭찬하셨다. 지금껏 올라온 진상품 중에서도 가장 좋고 귀한 것들뿐이라고. 어떻게 이런 것들을 모아서 보낼 수 있느냐면서 감탄하셨지. 물론, 앞서 올라온 장부에 없던 것들도 더러 있었으나 주상께선 그 정도는 괜찮다면서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해 주셨다.”
“감사한 일이로군요.”
대답을 하는 명월의 목소리는 유일선 영감 못지않았다.
실제로 진상품이 무사히 도착하면 그걸로 될 뿐, 주상의 치하 따위는 신경 쓰이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주상이 확인을 하셨다.
어쩌면 앞서 보낸 장부를 보곤 특이하고 귀한 것들이 많으니 특별히 올라오자마자 먼저 확인을 한 걸지도 모르지. 정말 그런 것들이 담겨 있는지를 보고 싶은 마음에서 말이다.
“주상께선 네게 상을 내리고 싶어 하셨으나, 시기를 보아하니 진상품의 대부분은 네가 반양에 부임하기 전에 준비된 것들이니 네게 공이 없다 말씀드렸다. 이번 진상품을 받아 흡족해지신 만큼 사정이 힘든 지역에 사람들이 먹을 쌀을 하사하시는 게 어떨까 말씀을 드리자 허락을 하셨다. 결과적으로 너에게 이번에 내려지는 상은 없다.”
“당연한 일입니다. 이번 진상품 중에선 제 손을 거친 건 없었습니다. 잘 말씀드리셨습니다.”
“그래. 너라면 그리 말을 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유일선 영감이 말을 하면 명월이 받고, 그리고 대화가 끊긴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지금 뭐하는 거야.’ 싶겠지만, 명월에겐 무척 익숙한 상황이었다.
원래부터 이런 식으로 대화가 이어지곤 했으니 그게 이상할 것도, 특이할 것도 없었다.
그저 진상품과 관련된 말을 하러 온 거라면 좋을 텐데, 그게 아니라면 달리 갈 곳이 있어서 지나치는 중이라도 좋겠다. 그러면 하루 정도 여기서 주무신 후에 떠나실 터이니.
그래도 그간 키워 준 정이 있는 아버지인데 자신이 너무 딱딱하게 구는 게 아닐까. 갑작스러운 방문이라곤 해도 이런 식으로 구는 건 옳지 않았다.
문득 드는 생각에 명월은 마음을 다독였다. 조금 더 살갑게 굴자. 자신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일부러 이리로 오실 필요도 없었을 터이니.
그리 마음을 바꿔 먹은 명월은 고개를 들어 부친을 바라봤다.
“괜찮으시다면―.”
“이곳에 마음을 준 여인이 있더냐.”
“…….”
먼 길을 오셨을 터이니 간단하게 식사를 하시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꺼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던져진 말에 명월은 멍해졌다.
대답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명월을 두고 유일선 영감이 재차 말했다.
“기녀 하나에게 푹 빠졌다 들었다. 네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으나 우리 집안에서는 기녀를 첩으로 들인 바가 없었다.”
“…….”
“깊지 않은 마음이라면 정리를 해 두거라. 사내가 가장 큰 수치를 느껴야 할 때에는 일과 관련된 게 아니라, 여인으로 인한 것이니라. 지금 한창 일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여인의 미색에 홀리는 건 너에게 좋을 일이 아니다.”
이런 류의 대화는 지금껏 나눠 본 적 없던 거였다. 저 아버지의 입에서 여인과 관련된 말이 나오다니.
갓 성인이 될 무렵, 어머니가 혼인을 빙자해서 자신을 집안에서 내쫓으려 할 때에도 한귀로 흘려듣던 아버지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이토록 길게 말을 꺼내다니.
그제야 명월은 아버지가 왜 이곳을 찾아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복운. 그놈이 문제였다. 가끔 ‘이러시면 주인어른께 연락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하긴 했으나 정말로 편지를 보낸 것이던가. 안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는지 익히 짐작이 되었다.
아버지가 하는 말을 듣자하니 일단 여인과 관련된 말을 꺼냈을 터이고, 일도 등한시한다 했겠지.
하지만 도성으로 보낸 진상품은 주상전하의 치하를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일을 등한시한다는 부분은 알아서 생략하고 넘어갈 수 있음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힘을 사용해서 이곳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에 개입하고 있다는 건? 설마하니 그것과 관련된 말까지 한 건 아니겠지.
머리가 복잡해져서 할 말을 찾지 못해서 입을 다물고만 있는 명월이나, 그런 그를 바라보는 유일선 영감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대로 있어선 안 되겠다 싶었던 명월은 저는, 하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여자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물론, 초반에 기방 출입이 잦았던 건 사실이나 거기서 여색을 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술을 마실 때가 있었으나 처음 몇 번뿐이었고 이후로는 차만 마셨습니다. 거기서 제가 곁에 잘 두는 여인이 있긴 한데 그녀는―.”
호접화 그녀와는 바로 조금 전에 만났다. 그리 썩 좋지 않은 만남이었다.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준 명월은 아버지를 바라봤다.
“친구와 같은 관계입니다. 그녀를 옆에 두고 이상한 마음을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유일선 대감은 명월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바라봤다.
자세는 다소곳하고 전립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단정했다. 흠 하나 잡을 데 없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말을 많이 듣긴 했으나, 어느 정도 철이 든 무렵에는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 적도 없었다.
사또가 된 이후로는 모든 걸 제 스스로 처리하려 노력하기도 했고 말이다.
흠 하나 잡을 데 없는 아들이라 할 만했다. 그 아들은 지금껏 자신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 ‘부분’과 상관이 없을 때에는 말이다.
“기녀를 친구를 두는 건 옳지 않은 일이다.”
유일선 대감의 말에 명월의 눈썹이 꿈틀한다.
전이라면 자신의 생각과 어긋나는 말을 듣게 된다 할지라도 순종적으로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고치겠습니다.’ 정도로 끝냈을 터였지만, 이건 아니었다.
“아니요. 기녀와는 상관없이 호접화는 제 벗입니다.”
“…….”
그 순간 유일선 영감의 표정이 확연하게 굳어졌다. 안색을 굳힌 채로 바라보면 명월은 잠자코 있다가 이내 ‘죄송합니다.’라면서 제 뜻을 굽히곤 했다.
명월이 전과는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된 유일선 영감은 꾸짖듯 말했다.
“한 고을의 사또라는 자가 기녀를 옆에 끼고 다니면서 그걸 벗이라 칭하면 사람들이 믿을 것 같더냐. 웃음거리가 될 거다.”
“다른 사람들 시선이 뭐가 중요하답니까. 중요한 건 제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남들이 뭐라 하든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지금 네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지 알고 있더냐. 그래서 그 기녀를 계속 만나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네가 웃음거리가 되면 그걸로 끝날 것 같더냐. 우리 가문이 뭐가 되겠느냐.”
“가문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아버지 외엔 그 누구도 절 그 잘난 가문의 일원으로 생각하지도 않잖습니까.”
말하고 난 후 괜히 말했다 싶었다. 이런 말을 해 봤자 무슨 소용이라고. 하지만 한 번 말이 나오자 멈출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조롱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것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니 고작 그 정도의 것에 제 중요한 존재들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
“적어도 제 주변에 누구를 가까이 두고 마는지에 대한 간섭은 필요치 않습니다. 이런 괘씸한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앞으로 다시는 보러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절 신경 쓰지 않으시는 편이 아버님 마음도 편하실 게 아니겠습니까.”
입을 다무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진다.
정말은,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명월은 허벅지 위에 올린 손을 움켜쥐었다.
자신이 한 말을 들은 아버지는 과연 어떤 반응을 취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그리 말하면, 내가 고맙다고 하기라도 할 것 같았더냐.”
“…….”
입을 다문 명월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숙이고만 있는 명월에게서 눈에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걸 느낄 수 있었던 유일선 영감은 목까지 차오른 한숨을 죽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너를 안 본 지 몇 달뿐인데 마치 몇 년이 흐른 것마냥 낯설구나. 이곳의 생활이 그토록 힘들었던 것이냐. 아니면, 그만큼 너를 변하게 할 일이 있었던 것이냐.”
일일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다.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 한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그런 일들이 말이다.
어려서부터 경험을 통해 그런 건 차라리 말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걸 알기에 명월의 입은 여전이 굳게 닫힌 채였다.
“이리로 오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다. 반양은 사람 살기가 좋고 풍요로운 땅이라 들었으나 사람들은 외지인을 경계하고 웃어도 얼굴에 그늘이 있더구나. 마치 불행한데도 그걸 감추고 필사적으로 행복한 척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은 사또의 평판은 그리 나쁘지가 않더구나. 그들은 마치 네가 무언가를 변하게 해 줄 거라는 기대감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이곳으로 와서 무얼 했는지는 아직 모른다. 저들은 외부인인 내게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으니까.”
과연 아버지였다. 처음 왔는데 그걸 간파한 것인가.
아버지의 말을 듣는 동안에도 귀 한쪽이 먹먹했다. 실상 이렇게 무릎을 꿇고 앉아서 아버지와 대면하고 있는 것 자체가 불편한 명월이었다.
“네가 지닌 그 능력이 널 좋게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널 불행하게 할 거다. 어떻게든 숨겨야지만 넌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거다. 그걸 위해서 그토록 노력해서 지금 이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더냐. 더 고생할 것 없다. 사또 노릇 조금 더 하면 내가 힘을 써서 궁에 들여 주마. 작은 관직 하나 정도는 널 위해서 마련해 줄 수 있다. 그러니―.”
유일선 영감은 한숨과 함께 그 말을 흘려 내보냈다.
“위험한 일은 하지 말거라.”
“…….”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 잠자코 있을 순 없었다. 명월은 고개를 들어서 아버지를 바라봤다.
언제나처럼 흔들림 없이, 완고하기만 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아버지를 두고 명월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허벅지에 올린 손에 힘을 준 채로 명월은 몇 번이나 망설이던 말을 꺼냈다.
“아버님은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철없는 아들이 아비를 밀어내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명월의 말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제 마음을 모릅니다. 감추고 살아간다 해서, 보통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해서 제가 정말로 그들과 같아질 순 없습니다. 제가 아버님이 준비해 주신 길로만 걸어갈 순 없습니다. 제 삶은 제가 결정하고 싶습니다. 아버님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전…….”
머뭇거리던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 말을 해도 괜찮은 걸까.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더 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명월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가슴 안쪽에 응어리져 있던 그 말을 내뱉었다.
“모든 것에서 다 벗어나 혼자가 되고 싶습니다.”
정말은 혼자가 싫었다. 누군가 자신의 곁에 있어 주면서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 말해 주는 이해자가 있었으면 싶었다.
그리해서 자신의 존재가 이상하지 않고, 부끄럽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존재가 필요했다.
“집안과 아버님의 그늘에서 벗어나 그냥 혼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숨기려 하고 억누르려고만 하는 것들이 싫었다. 비록 그것이 자신을 진심으로 염려하기 위함이라는 걸 알아도 말이다.
근본적으로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무작정 억누르고 저들이 말하는 대로만 해 주기를 바라는 자들과는 함께 섞여서 살 수 없었다.
그런 곳에 있느니 차라리 혼자가 되는 편이 나았다. 혼자서 있으면 아무 데나 자유롭게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바닥에 깔려 있는 사무치는 외로움이 있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고, 지금은 있었다. 곁에 있어 주는 존재가 있었으니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거였다.
지금 방 안에는 아버지와 단둘뿐이었지만, 바깥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벽이 뚫어지라 자신이 앉아 있는 쪽을 응시하고 있을 거다. 팔짱을 낀 채로 서 있을 그 존재를 떠올리며 명월은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냥 아들 얼굴 보러 왔다 생각하시고, 하루 푹 쉬신 후에 도성으로 올라가십시오. 아버님의 도움은 두 형님과 도성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더 필요할 것입니다. 반양 땅은 제가 사또로 부임된 곳이니, 설령 무슨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귀신이 나오는 땅이라 들었다. 그런 곳에서 대체 무얼 할 셈이더냐.”
“무엇을 한다 말씀 드린다면 아버님께서 알기나 하시겠습니까.”
아버지 입에서 귀신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명월도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차 싶었으나 날카로워진 상태는 바로 수습되지 않았다.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분명 말리기만 하실 게 아닙니까. 그러니 말씀 드려 아버님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 또한 효가 아니겠습니까.”
거기까지 말한 명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쉬시는 동안에는 제 방을 사용하십시오. 복운을 시켜서 식사와 필요하신 것들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목욕 준비도 해 드릴 터이니 언제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방 안에 있으면 쉬시기 힘드실 터이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눈을 내리뜬 채로 재빠르게 말한 명월은 바로 몸을 돌렸다. 그대로 방을 나서려던 찰나 뒤에서 책상이 뒤로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명월아―.”
명월아. 이름이 불리는 순간 두근―하고 심장 안쪽에서 뛰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명월은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뒤로 손을 뻗어서 문을 닫고 고개를 든 채로 한동안 서 있었다.
만약 따라 나온다면 이쯤에서 문이 열려야 할 텐데 잠잠했다. 나와서 붙잡고 재차 이야기를 시작할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라며 명월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대청 끝에 앉아 있는 백호가 눈에 들어왔다.
아닌 척 등을 돌린 채로 앉아서 마당 구경을 하고 있었지만, 저게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보나마나 방 안에서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무척 궁금했을 거다. 그라면 엿듣는 것도 가능할 테지만…….
명월은 백호 옆으로 걸어가 바로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자 다리를 꼰 채로 있던 백호가 옆으로 고개를 기울여 명월의 얼굴을 살핀다. 의외로 차분한 명월의 표정을 확인한 백호는 꼰 다리를 풀면서 몸을 일으켰다.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아직 끼니때도 아니었다. 그놈의 배는 늘상 배고픈 상태인 거냐 싶으면서도 동시에 웃음이 나온다.
기분이 꿀꿀하니 그리 좋지가 않았다. 이럴 때에는 뭐라도 배부르게 먹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명월은 대꾸 없이 다리를 내려선 목화를 신었고, 그때 얼굴에 닿는 시선을 느꼈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자 저 끝에 복운이 서 있다가 급히 안쪽으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그런 복운을 보는 순간 명월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저 녀석.”
“왜? 붙잡아 줄까?”
그리 말하는 백호의 표정이 위험하게 보인다.
그저 단순히 붙잡기만 하는 게 아니라 두어 대 팰 것 같은 분위기인지라 명월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여기에 얌전히 있어. 절대로 따라오지 마.”
그리 말하며 몸을 일으키는 명월을 내려다보는 백호의 얼굴로 불만이 가득했다. 왜 따라오지 말라고 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걸 본 명월의 눈으로 힘이 들어간다.
절대로 쫓아오지 마. 안 그러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그리 알아.
마지막 경고를 보낸 후 명월은 급히 복운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갔다.
모퉁이를 돌아 안쪽으로 가는데 보이지 않았다.
바로 몸을 숨길 셈이겠지만, 이 관아 안에서 복운이 갈 만한 곳이라면 명월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예전부터 뭔가 실수를 했을 때 복운이 잘 숨어드는 곳. 그곳은 바로 부엌이었다.
* * *
끼니때가 아니라 할지라도 음식 준비는 미리부터 되고 있었다. 구석진 곳에 있는 널따란 부엌에는 이미 바쁘게 움직이는 여인들이 더러 보였고, 그녀들은 명월이 나타나자 무척 당혹스러워했다.
지금껏 이곳으론 걸음도 하지 않던 명월이 어쩐 일인가 싶었던 그녀들은 하던 일을 멈추었다.
“사또.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찾는 사람이 있어서 와 본 것뿐이니 난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마저 해라.”
명월이 그리 말을 한다 해서 마음 편히 하던 일을 속행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알게 모르게 눈치를 살피는 그들을 두고 명월은 부엌으로 걸어가 안쪽을 살폈다.
밥을 짓던 여인이 당장 “에구머니나.” 같은 소리를 내며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보였지만, 명월은 상관하지 않고 주변을 주욱 둘러봤다. 그런데 이곳에 있어야 할 복운이 보이지 않았다.
이 녀석은 대체 뭐야. 어디로 가 있는 거야.
그때 누군가 옷자락을 잡아 당겼고, 명월은 고개를 숙였다. 그곳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계진이 서 있었다.
계진도 여기서 일을 돕고 있었던 건가 싶어 명월이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 계진이 조용히 오른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손짓만으로도 전하고자 하는 말은 충분히 접수가 되었다.
그래. 그곳에 있단 말이지.
명월은 고맙다는 의미로 계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급히 가리키는 쪽으로 향했다.
오른쪽 모퉁이를 돌아 뒤로 가자 마른 장작을 쌓아 둔 곳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쪽으로 짚신 끝이 살짝 보였다. 안 봐도 뻔했다. 장작 뒤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거다. 저리 숨어 있는 걸 보니 제 놈이 무슨 잘못을 한 건지는 제대로 아는 모양이었다.
명월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튀어나온 짚신을 보다가 그리로 성큼성큼 걸어가선 발끝으로 짚신 앞을 툭, 하고 찼다. 그러자 “으악!” 하는 비명과 함께 복운이 벌떡 일어났고 명월과 시선이 부딪쳤다.
간격이 조금 떨어져 있었다면 도망부터 쳤을 거다. 하지만 지금 명월은 장작 위에 팔꿈치를 올린 채로 복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바라보는 명월이 부담스럽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일 터였다.
복운은 마른침을 삼켰고 고개를 숙였다. 손을 마주 잡고는 손가락을 부딪친다. 그러다가 그런 행동이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바로 손을 마주 잡고는 힘을 준다. 그 상태로 얼음이 되어 버렸다.
툭 치면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긴장하는 복운을 보자니 명월은 오히려 머리가 차갑게 식어 버렸다.
복운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따르고 있으나 가장 머리 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건 바로 아버지일 거다. 자신을 따라 이리로 올 때에도 분명 달리 들은 말이 있겠지.
예를 들어서 자신을 잘 돌보라든가.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을 하라든가. 그런 기타 잡다한 것들 말이다. 이번 일은 복운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의 일일 따름이었고, 앞으로도 그래선 곤란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복운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는 양 바라보는 그를 두고 명월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모시는 주인이 나인지, 아니면 내 아버지인지 정확하게 해라. 난 내가 부리고 있다 생각했던 놈이 시시콜콜하게 이런저런 걸 적어서 아버지에게 보내는 꼴은 앞으로 두 번은 못 본다. 이번엔 몰랐으니 실수로 넘어간다 쳐도 다음에도 그리할 것 같으면 이번에 아버지께서 도성으로 올라가실 때 너도 함께 따라가도록 해라.”
“……사또, 아닙니다. 전 그저 걱정이 되어서―.”
“네가 걱정을 한다 해서 내게 생길 일들이 없어지거나, 무마되는 건 아니다.”
그 순간 복운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잠시 망설여졌지만, 명월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지금 이 순간에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 언제나와 마찬가지인 상황일 거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네가 걱정이 되어서 이런 짓을 벌인 건 엄청난 실수였다. 쓸데없는 짓이었어. 이번 일은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덮어 주겠지만, 더는 아니다. 난 네 녀석의 아우가 아니고 네가 모셔야 할 주인이다. 앞으로 우리의 관계를 보다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겠다. 그래야 너도 편하고 나도 편할 것 같구나.”
마주 잡은 복운의 손으로 힘이 들어간다. 하는 말에 대해서 반박하거나 바로 아니라는 식으로 대꾸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런 건 없었다.
굳어지는 표정만큼, 그가 지금 자신의 말을 잘 듣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명월은 말을 이어 나갔다.
“난 널 믿는다. 네가 날 걱정하고 염려해 주는 마음은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뿐이다. 너도 날 주인으로 생각하고 믿음과 신뢰로만 대해 줬으면 좋겠구나. 물론 내가 네 눈에는 한없이 불안하고 엉성해 보이겠다만, 난 그런 인간이다. 너나 내 아버지가 나서서 일일이 뒤를 봐준다 해도 난 변하지 않아. 쓸데없는 기대는 가지지 마라. 그런 것들이 때때로 날―.”
숨이 막히게 한다.
마지막 말은 그냥 목구멍 안쪽으로 삼켜 버렸다. 이런 부정적인 말은 서로에게 안 좋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걸로도 충분히 전해졌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명월은 재차 복운의 안색을 살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복운을 봐 버렸다.
……아, 상처를 준 모양이다.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으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복운이기 때문에, 역시나 저런 얼굴로 바라보는 건 속이 편치가 않았다.
위로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걸 그냥 참기로 한 명월은 느리게 몸을 돌렸다.
전에는 복운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 말을 하고 난 후 늘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복운, 그도 이번 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복운에게 신분을 들먹이면서 잘난 척을 하자는 건 아니지만, 선은 그어 둬야만 했다. 그래야 나중에 복운이 더 큰 상처를 입지 않을 거다.
다시 부엌 쪽으로 나오자 그곳에 계진이 서 있었다. 복운이 어디로 갔는지를 알려 주긴 했어도 그 마음이 편치가 않았는지 표정이 굳어 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걸 확인한 명월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계진의 앞으로 걸어가 허리를 굽혔다.
“조금 있다가 복운에게 가서 좀 달래 주지 않을래?”
“……달래요?”
어른을 어린애인 제가 달래 줘야 하는 건가요?
의문이 담긴 눈빛을 확인한 명월의 미소가 한결 짙어진다.
“어른도 때때로 달래 줘야만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나 대신에 잘 좀 부탁한다.”
대신에 부탁한다는 말에 계진의 눈동자가 반짝인다. 아직은 명월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저의를 알 순 없으나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던 계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 미소가 짙어진 명월은 계진의 머리를 토닥인 후 옆을 지나쳐 갔다.
바깥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얼굴에 닿는 뜨거운 햇볕이 느껴졌다. 이제는 익숙해졌다 해도 때때로 더웠다. 한창 때가 되면 이보다 더 힘들어지겠지. 그때에는 구군복을 다 차려입을 수도 없겠다 싶었다.
복운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까.
아버지에게 너무 한 게 아니었을까.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위해서 해 주는 말과 행동이었을 터인데―.
“하지만 숨이 막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순간 정말로 숨이 막힌 듯 가슴이 답답해진다. 명월은 무거운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들었고, 저기 앞에 서 있는 백호를 발견했다.
아버지가 나타나 당황해서 멍하니 있는 동안 곁에 있으면서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를 알기 때문이겠지.
그래도 저 정도로 사람을 배려할 줄도 알고. 나름 생각이 있다면서 명월은 백호 앞으로 걸어가 그를 올려다봤다.
“배고프지 않냐?”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바로 나오는 말에 명월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응, 하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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