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완결)-1장 (27/32)

신사또전 6권 (완결)

1장

언제나처럼 열정적으로 밥을 먹어 치우는 백호를 앞에 두고도 딱히 식욕이 생기지 않았다. 깨작거리면서 먹는 명월을 두고도 백호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전이라면 먹는 게 왜 그러는 거냐면서 한마디 할 만도 한데.

아마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배려를 해 주는 거겠거니 싶었다. 명월은 절반 정도의 밥을 남기고 방 한편에 누웠다가 일어났다.

원래 자신이 쓰던 방은 아버지가 사용하도록 해 두었다. 그리로 가면 다시 얼굴을 보게 될 것 같아서 일부러 피하는 중이었다.

당분간은 백호의 방을 사용해야만 할 것 같았다.

말은 하루만 자고 내일 도성으로 돌아가시라 하긴 했지만, 그분이 정말 그리할 리도 없고―.

멍한 얼굴로 있던 명월은 얼굴에 닿는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이방이 앉아 있었다.

갑작스럽게 방이 바뀌고, 아버지가 찾아와서 당혹스러울 만도 한데 이방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아마도 굳어 있는 자신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겠지. 그 부분에 대해선 건드리지 말자고 스스로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가 저렇게까지 해 주는데 자신도 마냥 이런 모습으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되었다.

명월은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병현 대감은 집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제사를 보내겠다고 하는 건가.”

오늘 이병현 대감의 집 쪽으로 이상할 정도로 많은 수레가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명월도 호란에서 관아로 돌아가는 길에 본 게 있었기 때문에 그게 무언지 알고 있었고, 이방은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 말로는 내내 의식을 잃은 채로 있던 대감이 갑자기 일어나 집안사람들을 불러 모으더니 서둘러 제사를 지내야겠다고 했다는 거다.

본인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건 보통 일이 아니라면서 다른 사람도 자신과 같은 일을 당할 수 있으니 그 전에 조상들께 제사를 치르자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그분들께 본인들을 보호해 달라 청할 셈인 모양이었다.

죽다 살아난 사람이 제사를 해서 조상에게 매달리는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나 갑작스러운 느낌도 없잖아 있었다. 제사라는 게 가볍게 치를 수 있는 것도 아님에도 너무 크게 일을 벌이고 있었다.

낮에도 대감 댁으로 들어가는 수레를 두고 포졸이 승강이를 벌였다 한다. 이 정도라면 반양 땅에서 이병현 대감이 큰 제사를 준비하고 있음을 모르는 이가 없을 터였다.

“온 집안 식구들을 다 불러 모은 주제에 제사는 하루라도 빨리 치르겠다고 서두른다지?”

“그렇습니다. 지금 시각이 늦었음에도 이병현 대감 댁의 불빛이 안 꺼지고 있습니다. 밤을 새워서 이틀 안에 준비를 해 바로 밀어붙일 모양입니다.”

“동쪽의 숲에 있는 공터에서 제사를 치르고 싶다 했다지?”

이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병현 대감 쪽에서 제사를 지내겠다고 하는 곳은 그 집안의 사유지였고, 바로 옆이 관아에 속해진 땅이었다.

조금만 옆으로 넘어온다 하면 관아의 땅이니 사사로이 제사를 치르는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 할 수 있을 터인데, 이건 그럴 수도 없었다.

일부러 관아 옆 땅을 보란 듯이 이용하고 있었다. 그리할진대 너희가 어찌 나올 것이냐, 라고 도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단순히 자신들이 예민하게 반응할 뿐이고, 그들은 원래부터 그 땅을 이용할 생각이었던 게 아닐까.

그런데 왜 동쪽일까. 그쪽은 반양의 외곽이었다. 중심으로 치면 상당히 바깥쪽에 해당되는 부분이었다.

이병현 대감이라면 다른 사람들 보란 듯이 반양 땅 중앙에서 제사를 치러도 이상할 게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봐 주었으면 하는 과시욕이 있는 사내였으니 말이다.

눈을 내리뜬 명월의 표정이 점점 더 진지하게 변한다. 무언가에 집중하듯 아랫입술에 엄지를 댄 채로 눈을 가늘게 뜨는 그를 두고 이방이 입을 열었다.

“급하게 일을 진행하는 것도 그렇고, 사람이 몰리는 것도 그렇고, 무언가 좀 이상합니다.”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제사를 지낸다 하는 일에 뭐라 할 순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어느 집안이든 제사라는 건 예민한 부분이었다. 그들의 사유지에서 모든 준비를 해서 온 친족을 불러 모아 제사를 보내겠다 하는 걸 막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미친 척 눈 감고 제사 당일 그 땅을 점거해서 ‘사람이 많이 몰려든 게 이상하다. 정말은 제사가 아니라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니다. 그냥 그렇게 밀어붙여 볼까?

미친 척 땅에 드러누워서 그들이 절대로 제사를 못 지내도록 하는 거다. 그리한다면 호접화 그녀의 일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녀가 무엇을 할 셈인지 모르겠으나, 노리는 건 이병현 대감이고, 백호도 분명 말했다. 그쪽의 피가 절반은 줄어들어야 한다고―.

그 시기가 지금일지도 모른다. 제사를 위해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기에 일이 터질 수도 있음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명월은 고개를 들어 이방을 바라봤다.

“이병현 대감을 본 자들 중에서 접촉한 이는 있는가?”

“안 그래도 대감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서 사람을 풀어서 은밀히 알아보곤 있으나 그와 직접적으로 대면한 이들은 모두가 무겁게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다만 건너 들은 말로는 이병현 대감이 변한 것 같다 하더이다. 무언가 사람이 달라진 듯 예민하고, 과묵해진 것 같다고…….”

하지만 그것밖에 알아낸 것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이방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이윽고 입을 다무는 이방을 두고 명월은 제 턱을 쓰다듬었다.

무언가 진행이 되고는 있는데 그걸 어찌 처리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을 하는 게 최선일까. 자신이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명월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잡힌다.

“―그런데 유일선 영감께선…….”

안 그래도 속이 복잡한데 이 와중에 아버지에 대한 말이 나온다. 명월의 표정이 당장 굳어지는 게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명월의 표정을 보고 실수를 감지한 이방은 입을 다물었다.

이방에게 있어 유일선 영감은 대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아주 높은 분이었고,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하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잘 모시는 게 옳았다.

하지만 명월은 간단하게 ‘아버지가 오셨네. 식사 준비와 목욕, 그리고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주게. 하루 정도 묵으실 거고, 그러는 동안 내 방을 사용하실 걸세. 잠자리는 원래 있던 이불을 사용하면 될 거야.’라고만 했다.

본인은 상대가 아버지이기 때문에 저리 말할 수 있는 거였다. 하지만 그를 잘 모셔야 하는 입장에선 이래저래 신경 쓸 것들이 많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는 걸까 싶었는데 그냥 입 다물고 있을 걸 그랬나 보다.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눈을 굴리던 이방이나 그때 명월의 뒤에서 요란한 코골이 소리가 들렸다.

드르렁―하는, 마치 커다란 짐승이 내는 것 같은 소리에 이방과 명월은 동시에 움찔했다.

“…….”

놀라서 어깨를 움찔한 명월의 표정이 다음 순간 굳어진다. 눈을 가늘게 뜬 명월은 ‘저놈―.’ 하고 한마디 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으나, 이방은 아니었다.

지금 이곳은 백호의 방이었다. 원래는 빈방이었으나 백호가 갑자기 나타나 그에게 사용하라 마련해 준 곳이었고, 여기서 명월도 당분간 보내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이방도 그 방에 찾아와 이런저런 보고를 하는데, 그러는 동안 방 주인인 백호는 밖에 나가 있지 않았다. 그는 나름 중요하다 할 수 있는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명월의 뒤에 이불을 깔고 그곳에 누워 있었던 거다.

처음 그걸 본 이방은 움찔하긴 했지만, 애써 안 보이는 척을 하면서 명월에게만 집중했다. 하지만 더는 힘들 듯싶었다. 코를 고는 사람이 있는데, 그를 앞에 두고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이방이나, 그건 명월도 마찬가지였다.

백호 저 망할 놈. 그런 생각을 잘 갈무리하면서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느리게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그곳에 보이는 건 대자로 누워서 세상 편하게 코를 골고 있는 백호였다.

“…….”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도 재차 입을 다물고 만다.

이 녀석이 누워 있는 방에서 내가 지금 대체 무얼 하는 걸까. 애초에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선택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설마하니 이방과 막 이야기를 시작하려 할 즈음, 백호가 돌돌 말아진 이불을 펼쳐선 그 위에 올라갈 줄은 몰랐다. 백호가 눕는 걸 보는 순간에 딱 맞춰서 뭐라 했으면 이런 이상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백호를 바라보는 명월의 눈빛이 점점 싸늘하게 식는다. 당장 큰 소리가 나올 것 같은 명월의 안색을 살피며 이방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이병현 대감이 바로 움직이는 건 아니니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이야기를 나누지요.”

그 말에 명월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방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오늘 백호 덕분에 이래저래 창피만 당하게 되었다면서 명월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수고해 줘서 고맙네.”

그 말에 이방은 신경 쓰지 말라는 눈빛으로 인사를 건네곤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이방이 나갔다고 바로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일단은 속으로 열까지 세었다.

지금 자신의 속이 부글부글 끓으면서 화가 나는 게 이상한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몇 번이나 하고 난 후, 이를 악물곤 백호를 돌아봤다.

다시 본다고 해서 그의 모습이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편하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더 화가 난 명월은 주먹을 위로 들었다. 있는 힘껏 한 방 먹이면 속이 좀 풀릴 것 같아서 그리할 셈으로 휘두르는데 동시에 백호가 눈을 뜨곤 명월의 손목을 잡아채 세게 당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에 명월은 미처 대응할 수 없었다. 윽, 하는 짧은 소리를 냄과 동시에 끌어당겨져선 백호의 넓은 가슴에 엎드린 상태가 된 명월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만 있는 명월이 쓰고 있던 전립을 솜씨 좋게 벗겨서 방구석으로 던져버린 백호는 상투를 튼 머리를 토닥였다.

“그래. 늦은 시간까지 열심히 일했다. 그러니 이만하고 자자.”

동시에 백호의 손이 등을 타고 내려와선 엉덩이 부근에 닿으려 한다. 정신을 차린 명월은 백호의 위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배를 주먹으로 퍽, 하고 때렸다.

“억?!”

바로 신음을 흘린 백호가 양손으로 본인 배를 감싼 채 명월을 올려다봤다.

“무방비 상태로 있는데 배를 치면 어떻게 해?”

어떻게 이런 심한 짓을 할 수 있는 건데?

그런 원망 섞인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백호를 두고 명월의 주먹으로 더 힘이 들어간다.

백호가 튼튼하다는 걸 알기는 해도 누워 있는 상태라는 걸 고려해서 정말 가볍게 때렸다. 저렇게 배를 문지르면서 엄살을 떨어댈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면 자신이 어떤 식으로 나올 줄 알고 미리 선수 치는 걸 수도 있음이었다. 그런 얄팍한 수에 넘어가지 않는다면서 명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지금 내가 차나 마시자고 이방을 방으로 부른 줄 알아? 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자마자 드러눕는 건데?”

“여긴 내 방 아니었어? 앉아만 있기가 피곤해서 살짝 누운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 내가 실수했던 거야?”

지금 이게 진짜로 몰라서 하는 소리인지 단순히 자신을 열 받게 하려고 이러는 건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명월은 별말 없이 백호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래 봤자 체격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백호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기만 할 따름이었다. 본인은 그것도 힘들다는 양 어, 어, 하는 소리를 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에만 그러지 뒤로 갈수록 웃고 만다. 웃는 얼굴로 흔들리는데, 이런 상태로 멱살잡이를 해 봤자 무슨 소용인가 싶었던 명월은 결국 손을 놓고야 말했다.

그러자 다시 이불 위에 뒷머리가 닿은 백호가 눈을 가늘게 뜬다.

“고작 이걸로 그만둘 셈이야?”

“기다려 봐. 어떻게 해야지 잘 혼냈다는 말을 들을지 궁리 중이니까.”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듯 말하는 명월이지만, 백호가 보기엔 귀엽기만 했다.

백호는 명월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당연한 듯 위로 올라온 손바닥이 뺨을 감싸려 하자 명월은 바로 인상 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건드리지 마.”

하지만 그런 말을 해도 아무 소용없다는 양 계속해서 얼굴로 다가오는 백호의 손길에 결국 명월은 쯧, 하고 혀를 찬다.

사람이 하는 말을 듣지도 않고 왜 자꾸만 성가시게 구는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나올 거냐고 한마디 하려는데 백호의 엄지가 명월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눌렀다가 떨어진다.

“입술에 잇자국 생겼다.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해대기에 입술을 씹어대고 난리야. 당장 이거다, 라고 해결되지 않는 고민은 생각을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아. 그럴 땐 그냥 누워서 자는 게 최고야.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바로 해결책이 떠오를 테니까.”

“잘도 그러시겠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반응을 보이는 명월이지만, 백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는 당당하게 명월의 손목을 붙잡곤 아래로 끌어당겼다.

“내가 너보다 밥을 한 끼는 더 먹고, 하루라도 더 살았다. 내 말 들어서 안 좋은 일 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일단 누워서 눈이나 붙여라. 지금 네 얼굴 좀 봐라. 미간으로 주름이 잔뜩이고, 안색도 나쁘고. 그런 화난 얼굴로 다니면 잘 풀릴 일도 꼬이기 마련이다. 네가 일어나 앉아서 잔뜩 심각해져 있다고 해서 생길 일이 멈추는 것도 아니고, 안 풀릴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

“사람은 푹 쉬어서 머리가 맑아져야 생각도 바로바로 나는 거다. 지금 같은 상태론 암만 눈을 뜨고 머리를 굴려 봤자 해결책은 나지 않아. 그러니까 내 말 들어라.”

백호가 하는 말이 틀린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가 잡아당기는 데도 버티고 앉아 있는 건 기분상의 문제였다. 왜인지 모르게 그의 말을 호락호락 듣고 싶진 않다는 이상한 오기 같은 게 생겼다고나 할까나.

그런 명월의 상태를 다 알고 있다는 양, 백호는 차분한 눈빛으로 바라봐 왔다.

흔들림 없이 마주 바라보는 눈빛에 명월은 입을 벌렸고, 그 사이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곤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안쪽이 따끔거렸다. 그 순간 내가 피곤하긴 피곤했구나, 싶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호접화를 만나러 가서 엄청난 걸 알게 되었고, 아버지도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한 가지씩 생겨도 충격이 클 텐데 그런 일이 연달아 있었으니 머리가 멍한 게 사실이었다.

둘 다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런 거면 다른 날짜에 맞춰서 해 주면 좋지 않은가.

이렇게 연달아 사람 뒤통수를 치면 좋으냐고 생각하면서도, 지금 자신이 얼마나 억지를 부리는지 모르진 않았다.

지금 이 상태로 버티고 앉아 있는 것 또한 억지를 부리는 것뿐일까.

하긴, 자신이 모든 걸 한 번에 해결할 만한 능력자인 것도 아니고. 그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듣고, 놈들과 접촉하는 재주만 지니고 있었다. 고작 그런 걸로는 무적이 될 수 없지.

그러다가 조금 전 이방과의 대화를 떠올려 봤다. 다른 말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언제쯤 아버지에 대한 말을 꺼내면 될까.’라고 궁리하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기회를 틈타 그 말을 꺼내려 했는데 갑자기 백호가 코를 골았다.

내내 조용히 있다가 하필 그때 코를 곤 백호의 도움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건가.

명월은 바로 눈을 떠선 고개를 숙였다. 백호는 여전히 자신의 한쪽 손을 잡은 채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말은 없어도 바라보는 눈빛 안쪽에선 ‘이만하고 누워서 쉬라니까?’라는 의사가 묻어난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대답하기 곤란한 말이 나오자 일부러 코를 곤 게 아닐까.

그 정도로 배려심이 깊은 놈일 거라곤 생각하지……아니. 아니었다.

이 녀석은 적어도 자신에 한해선 배려심이 차고 넘치는 놈이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자신도 그 점을 이용한 적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싫은 얼굴을 해도, 부정적인 말을 해도, 결국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던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손을 잡아 주고 곁에 있어 준다. 분명 그리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는 순간 마음이 누그러진다. 동시에 긴 한숨을 토해 낸 명월은 천천히 몸을 기울여선 백호의 가슴 위에 얼굴을 묻었다.

웅크린 채로 엎드려 오는 명월을 두고 백호가 기다렸다는 듯 양팔을 들어 그의 등에 두른다. 그러곤 꼬옥 껴안는다. 그 듬직한 느낌에 명월은 바로 눈을 감았다.

익숙한 체온과 체취. 그리고 등을 토닥이는 손길 등.

그 모든 것들이 편안하다. 안심이 된다.

“……일일이 하나하나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난 어린애가 아니야.”

“널 어린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숨을 죽인 명월은 백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과연 이다음으로 무슨 말을 할까. 집중해서 기다리는 동안 백호가 나른한 한숨을 토해 내며 중얼거렸다.

“어린애라면 이런저런 짓을 할 수가 없잖아.”

“…….”

일단 명월은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백호가 한 말에 다른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한번 포장을 시도했다. 하지만 별 소용없었다.

백호가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고 화가 난다.

불끈, 하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명월은 주먹으로 백호의 옆구리에 한 방 먹였다.

* * *

한창 잘 자다가 중간에 소변이 마려운 것만큼 곤혹스러운 일이 없었다. 처음에는 참고 다시 잘 생각도 했지만, 너무도 쉬가 마려웠다.

이러다간 자는 도중에 갑자기 쉬를 쌀지도 모르겠다 싶었던 계진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쪽에 둔 요강에 손을 댔다

하지만 여기에 쉬를 싸는 건 싫었다. 그건 어머니도 그랬다. 사람이 자는 방 안에 오물을 함께 두는 게 싫다 하시면서 바깥으로 나가 일을 보곤 하셨던 거다.

갑작스럽게 어머니 생각이 나자 계진은 꾸물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조용히 문을 열고는 밖으로 나가려 했을 때, 대청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곤 너무도 놀라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다리에도 힘을 주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분명, 선 채로 실수를 할 뻔했을 거라며 계진은 앞에 서 있는 사내를 유심히 살폈다.

처음엔 사또인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복운도 아니다. 이내 그가 손님이라는 걸 깨달았다.

언뜻 사또의 아버지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도성에서 굉장히 높은 분이니 그 앞에선 실수하는 일이 없어야 할 거라고 누군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계진은 조심스럽게 유일선 영감 옆에 서선 그를 올려다봤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난 후, 계진은 유일선 영감을 빤히 올려다봤다.

이런 식으로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쳐다보는 이는 지금껏 없었기 때문에 유일선 영감도 마냥 모르는 척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일하는 아이가 이처럼 스스럼없이 다가온 건 처음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살짝 안색을 굳히나 싶던 그는 사타구니 사이를 양손으로 쥔 채 서 있는 계진을 보고 표정이 풀렸다.

“뒷간에 가는 것이더냐.”

묻는 말에 계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에 요강이 있을 게 아니냐.”

“저희 어머니는 용변은 바깥에서 보는 거라고 하셨어요.”

그 말을 하는 순간 더더욱 쉬가 마려 왔다.

아, 나올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계진은 급히 대청 아래로 내려가 짚신을 신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바로 고개를 들어 유일선 영감을 올려다봤다.

“왜 안 주무세요? 안 졸리세요?”

“잠이 안 오는구나.”

밤이 되면 졸리고 그러면 잠을 자야 한다.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 자체가 이해가 되질 않았던 계진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짚신을 바로 신었다. 그렇게 다 신고 난 후에 일단 똑바로 선 계진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불현듯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고, 그것에 대해서 제대로 묻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던 거다. 짧게 고민을 하던 계진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우리 사또 데리고 가러 오신 건 아니지요?”

뒷간을 가야 할 아이가 지나치게 꾸물거리는구나 싶었던 유일선 영감은, 아이의 질문에 일순 당혹감을 드러냈다.

이런 어린아이가 그런 걸 궁금해하는 것인가 싶었던 것과 동시에, 자신이 명월을 데리고 갈 것처럼 여겨진 것인가도 싶었던 거다.

뭐라고 해야 할까 싶어서 잠자코 있던 영감의 입을 타고 말이 흘러나왔다.

“너희 사또가 여기에 계속 있었으면 좋겠느냐?”

“네. 계속 여기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데려가지 않으시는 거지요?”

이번에는 얼굴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더 빤히 바라봐 온다.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영감을 올려다보며 그의 대답을 요구하는 계진이었으나, 상대방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속을 읽을 수 없는 차분함을 무기로 계진을 내려다본다.

쉽게 말을 꺼낼 것 같지 않은데, 계진은 점점 더 쉬가 마려웠다. 움찔하고 몸을 떤 계진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급히 달려갔다. 달려가는 계진을 바라보던 유일선 영감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유난히 구름이 많이 끼어서 하늘이 흐린 날이었다.

“구름에 달이 가려서 보이지 않는군.”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영감은 입을 다물었다.

어두운 뒷간에 들어가는 건 무서웠기 때문에 그냥 풀 근처에 쉬를 누고 흙으로 그 부분을 덮은 계진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근처 담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하얀 덩어리를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전에는 큰소리를 지르면서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계진은 하얀 덩어리 앞으로 달려가 고개를 들었다. 손을 뻗으면 아래로 늘어뜨린 하얀 꼬리를 붙잡을 수 있겠지만, 그러면 싫어한다는 걸 알기에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렇게 빤히 올려다보자 그게 성가시게 느껴졌는지 나비가 느리게 고개를 숙여 온다.

나비가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에 맞춰서 계진은 “뭐해?”라고 물었고, 그것에 나비는 크게 입을 벌리곤 하품을 했다. 그러더니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려선 반대편으로 훌쩍 뛰어 내려갔다.

“어딜 가는 거야?”

당황해서 그리 물은 계진은 나비를 따라가려다가 말았다. 늦은 시간엔 함부로 다니는 게 아니었다. 지금도 쉬를 봤으면 다른 곳으로 샐 게 아니라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면서 계진은 냉큼 몸을 돌렸다.

서둘러 움직이던 계진의 눈앞으로 반짝거리는 붉은 무언가가 스윽, 하고 지나쳐 갔다. 소스라치게 놀란 계진은 깜짝 놀라 제 발아래쪽에 떨어진 걸 내려다봤다.

그것은 흙 위에 떨어져서 반짝거렸다가 서서히 빛을 잃어 갔다. 무언가 싶어 허리를 숙이고 유심히 살피자 불씨였다.

지금은 완전히 꺼져 버린 불씨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계진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왜 불씨가 여기까지 날아온 거지? 어디선가 불이라도 난 건가.

재차 고개를 든 계진은 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정말로 불이 났다면 이렇게나 조용할 리가 없었다. 지금 자신이 본 것도 무언가 이상한 게 아닐까 싶었던 계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일단은 방으로 돌아가자. 이불 속에 들어가 누워서 눈을 감자. 그러면 날이 밝고 금방 낮이 될 거라면서 계진은 재빠르게 달려갔다.

* * *

숲 속에 있던 화소군의 저택 안에서 움직이는 이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화소군 본인도, 검은 복면을 쓴 사내들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 100명이 들어가서 너끈히 살 만한 곳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니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어쩌면 저곳엔 정말로 사람이 살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이상한 짓을 해서 사람에게 귀신이 달라붙게 해서 본인이 원하는 걸 얻어 제 욕심을 채우려던 화소군이다. 그런 녀석이니만큼, 곁에 두고 있던 것들이 제대로 된 인간일 리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찰나 당장 귀신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저택이 살짝 이지러진다. 그리고 저기 끝에서부터 붉은 불길 같은 게 피어오르더니 그것이 점차 번져 간다.

처음엔 저것이 무언가 싶었던 명월은 곧 알게 되었다.

저건 불이다. 화소군의 저택이 불에 타고 있었다.

화소군의 저택이니만큼 인명 피해는 염려되지 않으나, 근처에 있는 숲은 걱정이었다. 불이 번져서 산불이라도 일어나면 어떻게 하지. 거기까지 생각하는 찰나 명월의 눈이 떠졌다.

아이처럼 옆으로 누운 채로 멍하니 있던 그는 가슴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감촉에 눈을 내리떴다.

보이는 건 제 가슴에 달라붙어서 살을 주물러 대는 백호의 손이었다. 그 손이 가슴을 위아래로 더듬으면서 만지작거리는 걸 확인하는 순간 명월의 입술이 살짝 벌려진다. 동시에 백호의 손가락이 명월의 유두를 잡아 비틀었고,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슬아슬했다. 이상한 소리를 낼 뻔했다면서 명월은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백호가 워낙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 움직이기가 힘들다. 그래도 어떻게든 뒤돌아보는 것에 성공한 명월은 눈을 감고 있는 백호를 봤다.

겉보기로는 자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 그냥 넘어갈 명월이 아니었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백호를 바라봤다. 얼굴 구멍이 뚫릴 정도로 응시해 오는 시선을 무시할 순 없다.

백호도 결국에는 눈꺼풀을 느리게 들어 올렸다.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명월의 가슴을 더듬던 손길이 조금 더 노골적으로 변해 가는 것 같았다.

명월은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손 치워.”

막 자다 일어나서일까. 목소리가 가라앉은 게 묘하게 요염하게 들렸다. 저런 목소리로 말하는데 순순히 손을 뗄 수 있을 리가 없다.

더 집요하고 노골적으로 만지고 싶은 걸 꾸욱 참으면서 백호는 천천히 손을 뗐다. 대신 명월의 배 앞으로 손을 내려 그 부근을 더듬는다.

치우라고 했는데도 위치만 달라졌을 뿐, 집요하긴 매한가지였다. 재차 말해 봤자 본인 입만 아플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명월은 다른 말을 꺼냈다.

“화소군의 저택이 불타는 꿈을 꿨어.”

“나도 간밤에 어딘가 타는 냄새를 맡았다.”

“그런데 가만히 있었어?”

“…….”

타박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것 같지도 않다. 입을 다무나 싶던 백호는 다른 쪽을 쳐다보는 흉내를 내다 말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월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람 하나가 편하게 누울 만한 이불에 용케도 둘이 붙어서 잤구나 싶었다.

본인이 앉아 있는 이불 위를 살피던 명월은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잡아서 뒤로 넘겼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백호가 다가와 허리를 끌어안는다. 그러곤 제 얼굴을 비벼대는 것에 맞춰서 명월이 중얼거렸다.

“불을 낸 건 화소군일까.”

만약 그렇다면 저택에 불을 내고 어디로 갈 셈이던가.

녀석이 비밀스럽게 감추고 있었던 걸 몽땅 망가뜨려 버렸다. 부적을 태우고 항아리를 깨트려 버렸지. 그곳에 불을 질렀고, 산처럼 채워져 있던 해골도 불타 없어져 버렸다.

놈이 여기서 하던 것들이 모두 사라졌다 할 수 있었다. 그런 곳에 놈이 미련이 있을까.

여기저기 다니면서 장사를 하던 놈이었으니, 다른 곳에서도 이 짓을 했을 거라고도 생각했지만……아니. 그건 아닐 것 같았다.

놈이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던 건 이곳이 반양이기 때문이었다. 이 땅과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특수성을 이용해서 놈도 끔찍한 짓을 벌이고 있었던 거다.

그런 놈이 반양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곳을 제 손으로 불태워 버리다니. 이건 선전포고일까. 마지막 순간 자신을 치겠다는 경고의 의미일까.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화소군을 붙잡아 뒀어야 했던 걸까.”

“뭐 하러 그렇게 하나.”

대수롭지 않은 억양에 명월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엔 무척 위급하고 바로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일처럼 여겨지는 것도, 이처럼 백호가 한마디 하면 정말로 별거 아닌 것 같다.

저도 모르게 ‘그래. 뭐 하러 그렇게 할 필요가 있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들이 무기를 점검하고 무리를 지어서 사냥하는 건 늑대나 곰,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라지만, 토끼나 새를 잡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나서진 않잖아. 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러니 덫 하나만 놓고 기다리면 알아서 머리를 들이밀게 될 거다. 그때 잡아 버리면 그만인 거야.”

“……놈이 토끼였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잔뜩 허세를 부리던 토끼였지. 진짜 토끼는 고기를 먹고 가죽은 조끼나 신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 있지만, 놈은 그런 것도 아니야. 잡아도 쓸데가 없지.”

끙, 하는 소리를 내면서 일어나 앉은 백호는 명월을 바라봤다.

머리카락은 풀어져 있고, 막 일어나서 피부는 뽀얗다. 신경 쓰는 일들이 많아 안색이 초췌하긴 하나 그래서 분위기가 더 사는 것 같다.

백호는 흘러내린 명월의 머리카락을 잡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녀석이 너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았을 테지만, 놈은 널 건드릴 수 없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귀 뒤로 넘어간 손가락이 천천히 떨어져서는 무릎 위로 내려온다. 그러곤 감싸듯이 붙잡는 손길을 느끼고 명월은 입을 열었다.

“화소군 그놈이 나에게 달리 무슨 짓을 하기 전에 네놈이 처리를 해 주겠다는 의미냐?”

“내가 나서야 할 정도로 놈이 거물이라고 생각해? 내가 손대지 않아도 그런 놈들을 처리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귀신보단 사람이고, 그 사람의 한은 무척 깊고 끈질기지.”

“…….”

백호의 말에 명월은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커다란 구멍 속에 들어차 있던 수많은 해골들. 그것들을 떠올리다가 만 명월은 눈을 감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백호는 일어서는 명월을 올려다보기만 할 뿐,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렇게 명월은 혼자서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앞으로 좁은 마루가 있었다. 그곳에 선 채로 가만히 있으려니 오른쪽으로 누군가 걸어오는 게 느껴졌다. 분명 훨씬 더 일찍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이 나오는 걸 보곤 다가오는 것일 거다.

이방은 명월 앞으로 다가와선 양손을 마주 잡았다.

“사또 기침하셨습니까. 실은 간밤에―.”

“알고 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알고 있다는 말로 그걸 잘라 내는 것에 이방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명월은 차분하게 말했다.

“소란스럽게 굴지 마라. 사람이 죽지 않았다면 그건 별일 아니다.”

이방도 조금 전에 보고를 들어서 알게 된 내용을 명월이 어찌 벌써 알고 있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라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리 생각한 이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방의 대답을 들은 명월은 뒷짐을 지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날씨만을 보면 쾌청하니 좋은 날이긴 한데―.

“오늘은 모처럼 동헌에나 박혀 있어야겠다.”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소리에 이방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한다.

지금 상황은 명월이 동헌에 나가서 앉아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가 싶으면서도 그 나름의 뜻이 있겠거니 싶었던 이방은 별 대꾸가 없었다.

* * *

화소군의 저택이 불에 타 버렸고, 이병현 대감은 계속해서 제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간밤에 자지도 않고 준비를 하더니 오늘부터 벌써 제사 물건들이 동쪽 공터로 이동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보고를 하는 이방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저들이 이렇게 하고 있는데 괜찮으신 겁니까. 그리 묻는 눈빛으로 바라봐도 명월은 묵묵부답이었다. 그저 알았다. 수고 했다. 그 정도의 대답만 할 따름이었다. 그러고 나서 동헌 마당이 훤히 내다보이는 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앉아서 머릿속을 지우고 가능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마음이 차분해진다. 마음이 차분해지니 머리도 맑아지고 초조함이나 불안도 사라진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꾸만 등을 떠다미는 것 같아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 의자가 참 용하구나. 그저 앉아만 있는 것뿐인데도 이렇게나 마음이 차분해지다니.

“평화롭군.”

명월의 중얼거림에 아래쪽에 서 있던 이방이 고개를 든다. 지금 들은 말에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하는 건가 싶어 조심스럽게 바라보기만 하는 이방을 두고 명월은 팔짱을 끼었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바깥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군. 보이는 풍경이 한적하고 하늘이 높으니, 기분도 점점 좋아지는 것 같아.”

지금 보이는 이 장면만 두고 있으면 더 이상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고 마냥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멍하다 할 수 있는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는 명월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모처럼 편안해 보이는 그 얼굴에 이방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바깥에선 이런저런 일들이 끊임없이 귀에 들려오고 있으나, 당장 무얼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무얼 하겠다고 할수록 문제가 더 꼬이기 마련이었다.

저들도 움직이기만 할 뿐, 바로 문제가 발생하진 않을 터이니 일단은 두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오늘 하루는 편히 보내십시오.”

하루 정도 마음을 비우고 편안히 있는다 해서 달리 큰일이 생기는 것도 아닐 거다. 이방의 말에도 명월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 보기에 좋았다.

매번 저런 상태로 있을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마음과 달리 자신의 능력이 받쳐 주지 못함이 아쉬웠다. 마음 한편이 쓸쓸해지는 걸 느끼며 이방은 앞으로 고개를 돌리려다 말고 움찔했다.

저기 한쪽 구석에 가만히 서 있는 복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사또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가까이 다가오든가 할 것이지 저기에 서서 대체 무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복운을 두고 이방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녀석은 왜 저기에서 저러고 있는 거야.”

기가 잔뜩 죽은 모습으로 이쪽을 흘깃거리고 본다. 그 눈빛 안쪽으로 좀 도와주었으면 하는 의사가 진하게 묻어나 있었다. 정말 왜 저러는 건가 싶었던 이방은 이상하다며 연신 그쪽을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봤다.

명월이 무슨 일이냐고 눈빛으로 묻자, 이방은 바로 복운이 서 있는 곳을 가리켰다.

“복운이 저놈 말입니다. 아까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저러고 있습니다.”

명월이 앉은 자리에선 복운이 보이지도 않는다.

이방의 말에 처음에는 잠자코 있던 명월은 곧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방이 가리키는 곳을 살피자 과연 복운이 서 있었다.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헛숨을 삼키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에 명월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러곤 바로 손짓을 한다.

“뭐 마려운 똥개마냥 그러고 있지 말고 할 말 있으면 가까이 와라. 이놈아.”

명월의 말에 복운은 바로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어찌할까 싶어서 눈을 굴리면서 망설이던 복운이 어기적거리면서 다가온다.

복운도 명월도, 뭔가 좀 이상했다. 뭔 일이 있었나 싶으면서도 자신이 끼어들 자리는 아닌 듯싶어 이방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었다.

그러는 동안 명월의 앞까지 걸어온 복운은 그를 흘깃거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또. 저기 주인어른께서 기침을 하셨는데…….”

“지금은 내가 일이 바빠 문안 인사를 하러 가기 어렵겠다 전해드리거라.”

복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명월은 그리 말했다. 바로 고개를 드는 복운의 눈동자는 동그랗게 떠져 있었고, 그건 이방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명월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떠나실 채비가 되신 것 같으면 그때 말을 전하러 와라. 배웅은 해 드려야 할 터이니.”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뜬 명월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지금 한 말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거였다.

복운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마주 잡은 손으로 힘이 들어갔다. 명월이 전하라고 한 말이 있긴 했으나, 이걸 정말 주인어른 앞에서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지 말고 한번 가서 얼굴을 뵙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이 목구멍 바로 앞까지 올라왔지만, 복운은 그걸 가까스로 삼켰다. 지금 여기서 다른 말을 덧붙이는 건 쓸데없는 짓이었다.

“알겠습니다.”

느리게 몸을 돌리는 복운의 걸음은 무거웠다. 딱 봐도 불쌍할 정도로 축 처진 어깨를 보던 이방은 재차 의자로 가 앉는 명월을 살폈다.

사실 그도 이런 시기에 유일선 영감이 갑자기 이곳을 찾아온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지체 높은 분이 수행원 하나만 데리고 은밀하게 명월을 찾아왔던 거다. 처음엔 단순히 아들 얼굴을 보러 온 거라고도 생각했지만, 지금 명월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어느 집안이든 말 못할 사정은 한두 가지쯤 있는 법이었다. 명월이 직접적으로 말을 꺼내지 않는데 내색하는 것도 이상했다. 이방은 조용히 있었고, 재차 명월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정말 평화롭군.”

지금은 저 혼잣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정말 지금 상황이 평화롭다 느끼기에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무언가를 하기 전에 지금이 잠잠하다 하는 것인지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별일 없던 시기에도 한자리에 있는 법이 없던 명월이었다. 어쩌면 지금 그는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중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게 정답이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로 편안히 앉아 있던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상태로 보이는 것들을 눈에 담던 그는 손을 들었다.

일단은 동헌 마당을 가리자 파란 하늘이 보인다. 위로 들자 이번에는 하늘 대신에 동헌 마당이 보였다. 오른쪽을 가리자 이방이 사라졌고, 왼쪽으로 손을 옮기자 대청 한쪽이 잘려서 보인다.

잘려서 보이지 않는 저 자리에 백호가 앉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곳에 없었다.

백호의 도움을 받는다면 모든 것들을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가 몇 번이나 말하는 것처럼 ‘자신은 괜찮고, 별일 생기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 말만을 듣고, 그것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 것일까.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지.

언제나처럼.

“…….”

명월은 손가락 사이를 벌렸다.

그 사이로 보이는 대청의 끝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백호 그 녀석은 아침에 맞은 일로 토라져서 지금 방구석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에겐 지금 바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관심 밖인 것들이었다.

그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일은 그 무엇도 없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고, 인간들이 알아서 처리해야 할 것들이었다. 그러다가 막판에 문제가 커지기 시작할 때에나 나설 터였다. 그걸 두고 그를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몇 번이고 그와 자신이 다름을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근본적으로 다르다. 종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는 좁혀 들지 않았다.

그런 자신이 그처럼 행동하고, 그가 자신처럼 사고를 할 순 없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는 순간 한결 더 머리가 맑아졌다.

“병방을 불러와라.”

복잡하게 머리를 굴릴 필요가 뭐 있나 싶었다.

당장은 내가 할 수 있는 일만을 하면 그만이었다.

손을 내린 명월은 왜 갑자기 병방을 찾느냐며 의아해하는 이방을 내려다봤다.

“날은 좋고 할 일은 없으니 포졸들을 데리고 야외로 나가 훈련이나 시키면 딱 좋겠다.”

그리 말하고 난 후 웃는 명월의 얼굴엔 티 한 점 없었다.

* * *

무언가가 어깨 가운데에 뚝 떨어지는 느낌에 놀란 포졸은 움찔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참새가 보였고,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설마 싶어서 오른쪽 어깨를 보자 아니나 다를까, 참새 똥이 묻어 있었다.

“―저 망할 놈의 참새가.”

그냥 지나갈 것이지 왜 남의 어깨에 똥을 누고 가는 거야.

혀를 찬 포졸은 당파를 문 앞에 세워 두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달리 닦을 만한 게 없을까.

흙이라도 손에 묻혀서 비벼야 하나. 그래 봤자 손에 묻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인상을 쓴 포졸은 끼익―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 맞춰서 문이 열리고 당파가 그 안쪽으로 벌러덩 넘어가 버렸다.

“……억!”

갑작스럽게 생긴 일에 놀란 포졸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지금 그는 죽은 호방의 시신을 지키는 중에 있었다. 안쪽에 넣어 두긴 했지만, 시신이 든 문 앞에 서 있는 것도 무서워 죽겠는데 당파가 왜 안쪽으로 넘어가 버린 건지 모르겠다.

당파가 넘어간 것 자체가 불길하게 여겨진 포졸의 안색이 자연스럽게 굳어진다. 더럭 겁이 나면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다독인 포졸은 안쪽으로 살금살금 들어가 쓰러진 당파를 주워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안쪽에 놓여 있는 건 호방의 시신이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아는 사람이니 좋은 곳에 가라고 말이라도 해야지 나중에 안 좋은 일이 생기지 않는 게 아닐까.

처음에는 무섭기만 했지만,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리하지 않으면 당장 큰일이라도 생길 것만 같았다.

사또는 이곳을 잘 지키라고만 했지, 안에 들어가선 안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금방 호방의 옆으로 가서 간단하게 좋은 말을 해 주고 말자면서 포졸은 당파를 양손으로 움켜쥔 채로 안쪽을 살폈다.

“……어?”

처음엔 자신의 눈이 잘못된 건가 싶었다. 포졸이 지키는 곳은 전에는 창고로 사용하던 곳으로, 그렇게 넓지도 않았다.

주변을 둘러볼 것도 없이 바로 모든 것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규모였다. 그리고 안쪽에 놓여 있는 널찍한 탁자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포졸의 기억으론 저곳에 호방의 시신을 올려 둔다고 했던 것 같은데―.

“…….”

멍하니 있던 포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다.

설마,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암만 부정을 해봤자 사라진 시체가 다시 나타나는 건 아니었다.

* * *

정해진 시간마다 포졸이 당파를 휘두르거나 간단한 체력을 다지는 운동, 그리고 전술 훈련 같은 게 이루어지곤 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외부로 나가 훈련을 하는 건 거의 없던 일이었다.

지금까지 이리 온 사또들 중 누구도 시킨 적이 없을뿐더러,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하지 않기도 했다.

지금 그들에게 있어 외부 훈련이라 한다면 귀한 약초가 많이 나올 때 산으로 올라가서 그걸 캐는 것, 또는 산의 길을 새로 만들기 위해서 무리를 지어서 낫을 휘두르는 것뿐이었다. 그런 마당에 명월이 원하는 ‘외부 훈련’을 위해선 이래저래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았다.

본래 사람이란 늘 하던 일을 할 때에는 한없이 평온한 상태가 되지만 거기서 조금의 변화라도 생기면 예민해지게 된다.

별거 아닌 일에도 언성이 높아지고 화가 나는 것이다.

지금처럼 말이다.

“병방 나으리. 이것도 챙겨 가야 할까요?”

그리 묻는 포졸의 손에는 두툼한 담요가 들려 있었고, 그 순간 병방의 미간으로 깊은 내 천(川)자가 생겼다.

“이 더운 날 그런 담요가 다 무슨 소용이야? 멀리 떠나는 것도 아니고,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왜 담요를 챙겨? 아니면 뭐냐? 네놈이 두르고 있을 거냐? 온몸에 땀띠가 일어나서 피부가 뒤집어지길 원하는 거라면 챙겨 가도 뭐라 하지 않으마―.”

악담도 이런 악담이 없었다.

그냥 안쪽 창고에 있어서 꺼내와 본 것뿐이었다. 이 더운 날 담요를 둘러서 열병에 걸리고 싶진 않았던 포졸은 식겁한 얼굴로 죄송하다 말하고는 당장 몸을 돌렸다.

그가 다시 창고로 들어가는 걸 살펴본 병방은 혀를 찼다. 그러곤 재차 진지한 얼굴이 된다.

포졸들이 사용할 당파나 무기를 챙겼고, 활도 몇 개 넣어 놨다. 혹 몰라서 화승총도 챙겼지만, 그걸 사용하는 일은 없겠지. 성능을 시험해 볼 거라면 수박도 몇 개 챙겨야 하지 않을까. 지금 바로 나가서 잘 여문 수박을 챙겨 와야 할까.

포졸들은 땅바닥에 앉아도 그만이지만, 사또는 그리할 수 없었다. 사또가 앉을 만한 의자도 준비를 해야겠구나 싶었던 병방은 급히 몸을 돌렸다.

뭐든지 생각이 난 김에 준비할 셈으로 바쁘게 움직이던 그의 시야로 잘난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뒷짐을 진 채로 이방과 함께 이리로 다가오는 건 사또 명월이었다. 지금 병방을 예민하게 만든 주범이었다.

지금까지 이를 갈면서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야.’라면서 투덜대던 병방이나 막상 이리로 다가오는 명월을 보는 순간 바로 고개가 숙여진다.

“사또,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일부러 걸음하지 않으셔도 제가 알아서 잘 준비를 할 터인데―.”

“그럴 것 같아서 찾아 온 거네. 세세하게 모든 것들을 준비할 필요는 없고 포졸들 손에 당파 하나씩만 쥐여 주면 되니 다른 것들은 다 안으로 집어넣게.”

“……다 집어넣으라굽쇼?”

그리 물으며 고개를 드는 병방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분명 외부 훈련만을 한다 들었는데 왜 당파만 들고 간단 말인가. 이해가 되질 않았던 병방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명월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훈련을 빙자해서 누군가에게 과시를 할 게 좀 있네. 당파만 들고 가면 내가 심심할 것 같으니 활 몇 개와 튼튼한 과녁 준비나 해 주게. 거기다가 간단하게 칠 수 있는 천막 두어 개를 챙기고. 그 외에 다른 건 필요 없으니 그리 알고 있게.”

“정말 그것만 들고 가면 되는 겁니까?”

“그래. 평소에 관아에 남겨 두는 포졸들 외에 전부 다 데리고 갈 터이니 빠지는 이들이 없도록 마지막까지 확인을 잘해 주게.”

“벌써 정해진 놈들은 내문 안쪽에서 기다리게끔 했습니다.”

명월이 준비하라는 것들만 들고 가라면 일 처리가 한결 수월해진다. 이것저것 전부 다 가져가고도 사또 명월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당장 뭐라 한소리 듣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잘되었다.

내내 머리가 터질 정도로 고민을 하던 병방은 고민하던 게 머릿속에서 말끔하게 사라지자 두통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실제로 입을 벌리고 긴 한숨을 내쉰 병방은 손을 들어선 명월이 준비하라는 것들을 하나하나 꼽아 봤다. 그러곤 실례하겠다는 말을 남기곤 급히 안쪽으로 달려간다. 그 모습을 본 명월은 웃었다.

“자네 말대로 와 보길 잘했군.”

고개를 숙인 채로 은밀하게 건네는 말에 이방은 고개를 조아렸다.

“하나하나 알려 주지 않으면 무기고를 통째로 옮겨 갈 사람입니다. 착실하기는 한데―.”

“융통성이 없는 사내로군.”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었기에 이방은 대답 대신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걸 따라 똑같이 웃어 보인 명월은 주변을 살폈다. 바쁘게 움직이는 포졸들 몇이 보였다. 그들을 확인하고 눈을 가늘게 뜬 명월이 파란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은 정말 날이 좋았다. 이러다가 갑자기 벼락이 치거나 날이 흐려지진 않겠지. 그런 일이 생기면 낭패겠다면서 명월은 조금 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파란 하늘을 가르면서 검은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치는 게 보였다.

“…….”

그것은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빠르게 사라졌다.

명월은 고개를 내리곤 이방을 돌아봤다.

“조금 전에 하늘을 가로지르던 걸 보았나?”

“하늘을요? 글쎄요?”

명월의 갑작스러운 질문이 당황스러웠던 걸까. 이방은 바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확인해 봤지만, 이미 사라져 버린 걸 확인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마에 손을 댄 채로 꼼꼼하게 하늘을 살피는 모습에 명월은 되었다는 말을 하려 했고, 그때 저 멀리서 외침이 들려왔다.

“사또!!”

갑작스러운 큰 외침에 이방이 더 놀랐다.

누가 이렇게 절절하게 명월을 찾는 건가 싶었던 그는 바로 뒤를 돌아봤고, 사색이 되어 이리로 달려오는 포졸을 발견했다.

“저놈이 미쳤나. 왜 이렇게 소란스럽게 굴어.”

다른 사람도 아닌 사또 명월 앞에선 오두방정을 떨어선 안 되었다.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관아 내에선 달려서도 안 된다고 한마디 하려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앞으로 달려온 포졸이 다급히 뒤를 가리켰다.

“사또! 호방 나으리의 시체가 사라졌습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리 말한 포졸은 멀찍이 떨어져 있던 다른 포졸이 이쪽을 돌아보는 걸 확인하곤 급히 양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다 명월을 의식하곤 조금 손을 떼곤 빠르게 내뱉었다.

“그, 그것이 말입니다. 제 어깨에 참새 똥이 떨어져서 그걸 치우려고 당파를 문 앞에 두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당파가 안으로 쓰러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문득 호방 나으리가 가시는 마지막 길에 인사도 제대로 못 했구나 싶어서 무슨 말이라도 해 드릴 셈으로 들어갔는데 글쎄 그곳에 있어야 할 시체가 사라졌지 뭡니까? 제가 교대를 해서 점심 때 들어오긴 했지만 그 전에 이상한 일은 없었습니다. 제 앞으로 보초를 서던 포졸에게서도 별다른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전 정말 억울합니다.”

“이 녀석아, 왜 이리 말이 많으냐. 횡설수설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구나. 왜 갑자기 호방의 시신이 사라져? 분명 그곳에 잘 넣어 두었는데―.”

포졸은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으나 그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호방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것이고, 그건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워낙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니 만큼, 호방의 시신이 사라진 게 또 다른 무언가를 예고하는 일이 아닐까 싶었던 거다.

자연스럽게 안색이 굳어지는 이방이었으나 명월은 여전히 태연했다. 그 상태로 그는 지금 막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호방의 시신 말인가? 그건 내가 처리했다.”

내내 가만히 있던 명월이 갑작스럽게 나서선 호방의 시신을 처리했다 하자 이방과 포졸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은 듯 멍하니 바라보려니 명월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명색이 호방이 아니었더냐. 그런 자를 마냥 그 꼴로 둘 수 없지 않겠나. 보기에 좋지도 않고, 마음도 쓰여서 겸사겸사 시신을 수습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방 자네에겐 말했어야 했는데 내가 임의대로 처리해서 미안하게 되었네.”

“……아닙니다. 사또께서 생각이 있으셨던 거겠지요.”

그래서 명월이 알아서 처리한 거라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나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 하려 해도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호방의 시신을 두고 무언가 알아낼 것이 있어서 안쪽에 둔다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별말 없이 그냥 수습한 것인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갸웃하는 이방을 두고 명월은 여전히 멍한 얼굴인 포졸의 팔을 두드렸다.

“당연히 시신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안에 아무것도 없어서 많이 놀랐겠군. 미리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게 되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포졸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미안하다니요. 그런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명월에게 사과를 듣는 것처럼 송구스러운 일이 없었다. 재차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도 말라며 양손을 젖는 포졸을 두고 명월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는 고개를 들어선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로 날이 좋군. 훈련을 하기에 오늘이 딱이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소리에 대꾸하는 소리는 없었다.

뭐라 딱 짚어 말할 순 없지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이방과 포졸은 입을 다문 채로 있었다.

* * *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여기저기서 술렁거리는 게 들린다. 큰 소리는 아니지만 귀 안쪽을 사각거리면서 긁어대는 것 같은 미묘한 자극이 성가셨다.

무시하고 그냥 낮잠이나 자고 싶으나 그리할 수 없는 이유가 달리 있었다. 양반 다리를 한 채로 좁은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백호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런 그의 옆으로 나비가 다가온다. 느릿하게 움직여선 옆에 와서 앉은 나비는 백호가 바라보는 쪽을 응시했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로 정면을 바라보나 싶던 나비가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하는 순간에 맞춰서 백호가 바로 손을 내려선 기다란 수염을 잡아 흔들었다.

고양이에게 있어서 수염이란 예민하고 소중한 부위였다. 그런 곳을 허락도 받지 않고 함부로 건드리다니.

이놈이 왜 또 이러는 건가 싶었던 나비는 인상을 쓰면서 옆으로 고개를 물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백호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서늘했다.

“네놈, 무언가를 느끼고 있으면서도 내게 숨기는 건 아니겠지?”

싸늘하게 묻는 말에 나비는 대답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뜰 따름이었다.

괜한 걸로 날 성가시게 굴지 말고 이 건방진 손이나 치워라. 그리 말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나비를 두고 백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왜 아직까지 독각귀를 찾아내지 못한 거냐. 그놈이 네 눈을 피할 정도로 용한 놈이었던 거냐.”

백호가 관리하는 건 서쪽 땅, 바로 반양이었다. 거기서 조금만 벗어나면 상대적으로 감지하는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못생긴 고양이에게 살짝 청탁을 넣어 두었는데 이놈 하는 일이 영 시원찮았다.

늘 똑같은 얼굴이니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고, 답답해서 거꾸로 잡아 흔들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백호는 나비의 머리통을 붙잡았다.

“내가 네놈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여기저기를 헤집어야 제대로 된 말을 할 셈이더냐? 응?”

머리가 잡혀서 얼굴이 눌리자 안 그래도 못생긴 나비의 얼굴이 우습게 변했다. 본인은 굴욕감을 느끼는 듯 눈을 감은 채로 말이 없는 나비지만 백호는 그게 아니었다.

“이 녀석아, 입만 다물고 있으면 다인 줄 아는 거냐. 이놈이고 저놈이고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어. 왜 하나를 시켜도 제대로 처리해 오는 일이 없는 거야. 자꾸만 이런 식으로 나올 거냐? 응?”

“왜 죄 없는 고양이를 괴롭히는 건데?”

나비의 머리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어대던 백호는 움찔했다.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허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서 있는 명월이 있었다.

명월을 보는 순간 백호는 나비의 머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팔짱을 끼었다. 슬그머니 본인은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척을 하지만 명월은 이미 모든 걸 봐 버린 후였다.

이제 와서 저리 꾸민다고 해서 모르진 않았던 명월은 백호 앞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다른 쪽을 바라보는 백호를 내려다보는 명월의 얼굴은 차분했다. 그런 둘을 번갈아보던 나비가 아래로 훌쩍 뛰어 내려간다.

방심한 틈을 노려서 도망치려는 나비의 발칙한 모습에 백호가 당장 아래로 손을 뻗었지만, 그 전에 명월이 한마디 한다.

“보내 줘.”

그것에 백호는 뒤로 물려야만 했다.

언제 나비를 붙잡으려 했느냐는 듯 뒤로 손을 뻗은 채로 다리를 꼰다. 참 용쓴다 싶은 모습에 명월은 한숨을 쉬었다.

“난 지금부터 동쪽으로 이동할 거야.”

“가지 마.”

바로 나오는 말에 명월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재차 말했다.

“갈 거야. 포졸들 훈련을 하는 곳에 사또인 내가 없어서야 되겠어?”

“왜 하필이면 동쪽인데? 그 인간 놈들이 제사를 치르러 자리를 잡은 곳 바로 옆에서 대체 뭘 하겠다는 건데?”

백호의 예리한 지적에 명월의 눈썹이 살짝 올라간다. 말해 주지 않았는데도 용케도 그걸 알고 있군. 그리 말하는 눈빛과 마주한 백호는 가슴이 답답해져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말했잖아. 호접화를 막을 순 없고, 거기에 모여 있는 놈들은 어차피―.”

“난 그런 것 따위는 몰라.”

백호의 말을 중간에 자른 명월은 느긋한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인간인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할 거야. 포졸들이 관아나 마을만 돌고 있으니 심심해하는 것 같으니 야외 훈련을 하려는 것뿐이야. 의도치 않게 이병현 대감이 제사를 보내려는 곳 바로 옆에 관아의 땅이 있을 뿐이고, 여기저기 알아봐도 거기만 한 곳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리로 가는 것뿐이야.”

“…….”

“대감은 제사를 지내면 되는 거고, 우리는 훈련을 하면 되는 거야. 서로가 각자 할 일을 하는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어? 아무 문제 생기지 않을 거야.”

웃으면서 아무 문제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마치 ‘그러니 내가 문제를 일으켜야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

화사하게만 보이는 명월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백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가 보기엔 명월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 안쪽에 가만히 앉아 있어야만 했다.

뭐하러 바깥에 나가 험한 일을 당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것들은 알아서 굴러가고 어떻게든 결말이 날 터인데―.

답답함에 결국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려는 일이 위험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거냐.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다 굴러갈 일이다.”

“난 원래 초치는 걸 좋아하거든. 게다가 날이 밝았으니 뭐라도 해야지.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지어다. 반양의 사또로서 해야 할 일은 해야지. 그래야 나중에 어떤 일이 생겨도 부끄럽지가 않지.”

거기까지 말한 후 명월은 자신이 그리 썩 나쁘지 않게 말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막 일어났을 때에만 해도 심란해서 죽을 것 같아 하더니만 지금은 저렇게 활짝 웃는다. 사고를 치러 나가는 게 어지간히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점점 더 기분이 꿀꿀해질 수밖에 없었던 백호는 혀를 찼다.

“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놈이다.”

“나도 너희를 이해할 수가 없으니 피차일반이 아니냐. 바로 이동할 거다. 따라 오고 싶으면 따라와라. 마다하진 않을 거다.”

“…….”

입을 다문 백호의 미간엔 여전히 짙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앞에 두고 어떤 반응을 취하는 게 옳은 것인지를 궁리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머리를 굴려 봤자 결국엔 따라올 거면서. 그리 생각을 해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명월은 몸을 돌려선 걸음을 옮겼다.

느릿하게 걸어가는 동안에 내내 바닥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백호의 방은 자신의 거처 뒤쪽에 있었다. 만약 아버지가 바깥에 나와 계신다면 마주칠 수도 있음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아버지와 마주쳐 봤자 좋을 게 없었다. 분명 안 좋은 말만 튀어 나가게 될 거다.

이런 자신을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할까.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어들이는 게 아니라 생각할까.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진작 내쫓아야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자신이 아버지 같은 입장이 되면 상당히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래도 거두어서 이렇게까지 자라게 해 주었는데 머리 좀 굵어졌다고 잘난 체 굴고 있으니.

하지만 무엇을 어찌하든지 서로를 이해할 순 없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명월은 걸음을 서둘렀다.

언뜻 아버지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명월은 뒤돌아보는 일 없이 대문을 넘어갔다.

* * *

점심때가 훌쩍 넘어섰는데도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 요즘 들어 기방을 찾는 이들의 걸음이 뜸한 것 같다.

원래 사람은 오다가도 마는 거였기 때문에, 이럴 때 쉬어 두는 편이 낫다는 걸 알지만 무료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전에는 꽃처럼 어여쁜 사또가 종종 찾아와 눈을 즐겁게 해 주더니만 요새는 그런 것도 없었다. 물론 사또가 찾아와도 찾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러고 보니 요즘 호접화 형님의 상태가 이상한 것 같았다. 전에 사또와 만나고 난 후에는 기분이 안 좋아 보였지.

혹,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그 순간 자희의 얼굴로 약간의 희망이 생겨났다.

“……그러면 사또께서 날 찾아 주시지 않을까.”

호접화 형님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다른 기녀들보단 자신의 인물이 가장 낫다고 자신했다. 원래 사내라는 건 첫 번째가 아니면 두 번째를 찾기 마련이 아니던가. 정말로 사또가 자신을 찾으면 어쩌지.

자희는 꿈에 부풀어선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눈을 반짝이며 잔뜩 들뜬 모습으로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새끼 기생이 얼굴을 집어넣었다.

“형님. 나와 보세요. 사또께서 찾아오셨어요.”

“뭐라고? 그게 정말이더냐?”

안 그래도 막 사또를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때에 맞춰서 자신을 찾아오다니. 그녀는 당장 거울을 세워선 그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오늘따라 못나 보이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입술 색이라도 다시 발라 볼까 싶은데 새끼 기생이 “어서 나와 보세요.”라고 재촉한다.

머뭇거리면 사또가 바로 다른 곳으로 가 버릴 것만 같았던 자희도 우왕좌왕하다가 바로 몸을 일으켰다.

“어디에 계시니? 방을 잡으신 거니?”

“아니요. 뒷문에서 기다리세요. 형님을 몰래 불러 달라 하셨어요.”

그리 말하는 새끼 기생의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호접화가 아닌 형님을 찾다니, 대단하세요. 그리 말하는 것 같은 눈빛에 자희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자희는 냉큼 밖으로 나와 뒷문으로 달려갔다. 얼마나 서둘렀는지 중간에 가죽신이 몇 번이나 벗겨질 뻔했다. 그때마다 가죽신을 고쳐 신으면서 힘겹게 뒷문에 도착했다.

그곳에 뒷짐을 진 채로 서 있는 명월을 발견한 자희는 숨이 턱 하니 막혔다.

급하게 뛰어와서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면서 자희는 이마를 손으로 닦아 냈다. 작은 손거울을 들고 올 것을, 이제 와서 후회가 된다. 그렇다고 다시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던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명월에게 걸어갔다.

명월이 자신을 보면 가장 먼저 어떤 말을 꺼낼까. 희망을 가져 봐도 괜찮을까. 점점 더 크게 부풀어지는 마음을 달랠 길 없었던 자희는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떨렸다.

여기까지 와서 정신을 잃을 순 없었던 그녀는 숨을 가다듬고는 조금씩 명월에게 걸어갔다. 거리가 많이 좁혀질 즈음 명월이 그녀를 돌아봤다.

명월과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자희는 쿵, 하고 울리는 커다란 소리를 들었다. 이 소리가 어디서 들리는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가슴 한편이 뻐근해짐을 느끼며 자희는 명월의 앞에 멈추어 섰다. 달려올 때에는 한 번도 쉼 없이 왔는데 막상 명월 앞에 서려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때 명월의 손이 자희의 오른쪽 가체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천천히 와도 되는데 급하게 뛰어왔나 보군.”

그 순간 자희는 제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심장 박동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었고, 호흡도 가빠짐을 느끼며 그녀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명월의 미소가 한결 짙어진다.

“별것은 아니고 전해 주었으면 싶은 게 있어서 자네를 불렀네. 자네가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니 말이야.”

내내 미친 것처럼 빠르게 두방망이질 치던 심장 박동이 느려진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에 자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명월을 올려다봤다.

“……전해 주었으면 싶은 물건이라니요?”

“이걸 호접화에게 전해 주었으면 하네.”

그리 말하며 명월은 소매 안쪽에서 붉은 천에 감싸인 기다란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길이에 손가락만 한 두께였다. 붉은 천 가운데를 묶은 금줄이 가지런하니 정갈했다.

기녀로 기방에서 일하다 보면 선물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매듭이 지어져 있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던 자희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걸 받아 들었다.

양손에 물건을 든 채로 고개를 숙이는 자희에게서 별다른 이상함을 감지할 수 없었던 명월은 재차 말했다.

“근 시일 내에 차 한잔 더 얻어 마시고 싶다고도 전해 주게.”

“…….”

자희는 손에 들린 걸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떤 이상함도 느끼지 못한 명월은 한 번 더 전달을 잘해 달라 말을 남기고는 몸을 돌렸다.

명월이 걸어가는 쪽에는 백마가 세워져 있었고 그 옆에는 승복을 입은 사내가 있었다.

한 손에 고삐를 쥔 채로 있던 그가 이쪽을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로 바라본다.

이상한 기분이 들게끔 하는 눈빛이었으나, 그것과 마주하면서도 자희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승려 쪽이었고 명월이 그가 붙잡아 준 말에 올라탔다.

말에 올라탄 후 둘은 바로 자희의 눈앞에서 지워졌다. 아무도 없는 곳을 바라보던 자희는 느리게 몸을 돌렸다.

……바보 같다. 고작 이런 일에 마음 설레하면서 기대감을 품은 자신이 정말로 바보처럼 여겨졌다.

이렇게나 어리석다니. 자신의 모습을 다른 누군가가 보게 된다면 분명 비웃을 터였다.

그때 앞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자희는 고개를 들었고 그곳에 서 있는 호접화와 시선이 부딪쳤다.

안 그래도 그녀에게 줄 것이 있었다. 조금 전 만난 명월에게 부탁 받은 일이 있었으나 자희의 입은 꾹 다물려선 열리지 않았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서 있는 그녀를 두고 호접화가 천천히 다가온다. 눈앞으로 걸어오는 그녀를 보면서도 자희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자희 앞에 선 호접화는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고마웠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녀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던 저희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이윽고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형님?” 하고 되물었다. 그 정겨운 부름에 호접화의 미소가 한결 짙어진다.

“여기서 가장 날 따르고 좋아해 주던 너에게만큼은 작별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얼굴을 보러 왔다. 잘 있거라.”

명월의 일 때문에 머리가 몽롱하고 가슴이 답답했던 자희다. 호접화를 너무도 좋아하긴 했지만, 질투 때문에 속이 답답하기도 했는데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게 사라진다.

지금 호접화가 다른 어딘가로 가 버리겠다 말하고 있었다. 그 말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던 자희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어딜 가시려고요. 형님이 안 계시면 여긴 어쩌라고요. 그러지 마세요.”

호접화는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한번 떠난다 한다면 떠날 사람이었다. 손을 붙잡고, 다리에 매달려도 그걸 다 뿌리칠 거다.

그래도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자희의 머릿속으로 조금 전 받은 물건이 떠올랐다.

“형님. 이것 보세요. 사또께서 비녀를 준비해 오셨어요. 며칠 후에 다시 찾아올 터이니 그때 차를 대접해 달라 하셨어요.”

“…….”

“사또께선 분명 형님께 마음이 있는 거예요. 반양 땅을 떠나실 때 형님을 데리고 가실 게 분명해요. 그때 떠나세요. 그때에는 바로 보내 드릴게요. 하지만 지금은 떠난다는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자희는 양손에 쥐고 있던 걸 호접화 앞으로 내밀었다. 이 작은 물건이 그녀의 마음을 돌려 주었으면 싶은 마음뿐이었다.

매달리듯 바라보는 자희를 두고 호접화는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그녀의 마음을 돌려세울 순 없을 터였다.

자희에게도 그게 느껴졌으나 어쨌든 포기할 수 없었다.

재차 말을 꺼내려 하는 순간에 맞춰서 호접화는 손을 들어 자희의 뺨을 감쌌다.

차디찬 손길이 닿는 순간 자희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린다.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으나 그걸 참은 자희는 비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건강하게 잘 살거라. 그동안 고마웠다.”

“……형님.”

왜 자꾸만 고맙다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사또에게 마음을 빼앗겨서 그가 호접화만 챙기는 걸 두고 투기를 하던 자신이었다. 그런 속 좁은 년에게 고맙다는 말은 사치였다.

이상한 말이랑 하지 말고 그냥 이곳에서 함께 오래오래 살자 말하려던 자희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 한 번 떼지 않던 호접화는 손을 뗐다. 그 순간 그녀가 사라지고, 자희는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자희가 쓰러지는 순간에 맞추어 저 멀리서 그걸 본 새끼 기생이 화들짝 놀라며 그리로 달려왔다.

* * *

지금까지 제사를 야외에 나와서 지낸 적은 없었다.

언제나 이병현 대감의 으리으리한 저택 안에서 며칠에 걸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몰려들어도 쾌적하고 편안하게 치를 수 있었건만 지금은 아니었다.

바깥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전부 신경 쓸 것들투성이였다.

훨씬 전부터 말이 나와서 차근차근 준비해도 부족함이 있을 판에, 당장 제사를 치러야 한다는 이병현 대감의 성화로 이틀 안에 급하게 준비가 되고 있었다.

간단하게 약식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반양 땅에 있는 모든 친족들을 불러 모아 하는 건데 지나치게 급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이만한 규모라면 소홀히 할 수도 없으니 열흘만 말미를 달라는 말을 꺼냈던 이는 이병현 대감의 매서운 시선에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사람이 아프다가 정신을 차려서인지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전과는 사뭇 달랐다.

전에도 호감형은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시선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지금의 이병현 대감은 누가 보더라도 이상했다.

“암만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널찍한 공터에 자리를 깔고 천막을 치는 곳에 서 있던 사내는 중얼거리는 소리에 옆을 돌아왔다.

내내 밤을 지새워서 함께 준비를 했기에 얼굴이 말이 아니었던 선비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지금의 대감은 마치 무언가에 홀리신 것 같습니다.”

“쉿.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하는가. 입 다물게.”

자신들끼리라면 모르겠으나, 지금은 준비를 위해서 하인들도 여기저기서 움직이고 있었다.

혹여라도 그들 귀에 이상한 말이 흘러 들어가선 안 될 일이었다. 그런 대화는 나중에 자신들끼리 있을 때 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잠을 자지 못해서 머리가 멍한 상태였던 선비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양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갑자기 이런 시기에 제사를 치른단 말입니까. 그것도 집안의 모든 사내들을 모아서, 이런 공터에서 말입니다.”

“대감이 크게 편찮으셨지 않나. 다른 이들도 그리되면 큰일이니, 문제가 생기기 전에 제사를 치러서 조상들의 가호를 받고자 서두르시는 게 아니던가. 결국 모든 건 우리 모두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 힘들어도 더 이상 군말 말게.”

“하지만 그리 말씀하시는 대감의 얼굴을 보셨잖습니까. 눈에 초점이 맞지 않고 싸늘한 기운이 가득하지 않았습니까. 누군가 질문을 던져도 그에 대한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이고, 그렇다고 제대로 된 대답을 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저 우리 모두를 위해서 제사는 꼭 필요하다는 말로 이렇게 밀어붙이시는 게 아닙니까. 제사라는 것도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진행해선 아무런 효과가 없는 법입니다. 적어도 한 달 전에 모두가 몸을 정갈히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지만―.”

“누가 그걸 모르나. 그렇다고 대감이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앞에다 대고 못하겠다고 할 수 없잖은가.”

결국은 참다못한 자가 선비를 노려봤다.

“이상하다는 건 모두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안 할 수가 없는 거야. 대감이 하라고 하니 우리는 그 말에 따르기만 하면 되네. 언제나 그리해 왔지 않나. 그런데 왜 새삼 이렇게 말이 많아? 하고 싶지 않다면 자네는 이번 일에서 빠지게. 그러면 될 게 아니겠는가!”

가뜩이나 예민한 상태였기에 누군가 건드리면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언성이 높아지면서 근처에서 움직이던 자들이 놀라 토끼 눈이 되어 쳐다보자 선비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가 멍한 채로 꺼낸 말에 이토록 예민한 반응이 돌아올 줄 몰랐던 그는 우물쭈물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실수를 했다 여기거든 서둘러 움직이게. 이따 오후에 대감이 이리로 나오시기로 했어. 오늘 저녁부터 바로 제사를 시작한다 하셨으니 가만히 서 있으면 안 될걸세.”

안 그래도 한숨도 자지 못하고 움직이던 참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서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나 듣게 되다니.

하지만 앞서 상대의 기분을 언짢게 만드는 말을 꺼낸 실수가 있으니 대놓고 싫다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선비는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알겠습니다, 라고 웅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선비가 옆에서 떨어지자 사내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큰소리가 들려 이쪽을 흘깃거리고 보던 자들이 움찔해선 재차 움직이는 게 보였다.

속도를 내는 것 같아도 사내의 눈에는 느리기만 했다. 저런 식으로 해선 언제 끝날지 모른다. 적어도 날이 저물기 전에는 끝내야만 대감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을 터인데.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움직이는 자들을 살피던 사내의 귀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건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다. 이건 분명 대화 소리였다.

조용하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해도 부족할 판에 이 무슨 소리인가 싶었던 사내는 안색을 굳힌 채로 주변을 살폈다.

일을 하지도 않고 시끄럽게 떠드는 자가 있으면 당장 불러와서 혼꾸멍내 줄 셈이었는데 마땅히 노는 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그쪽으로 넘어가면 안 돼. 안으로 들어와.”

“그래도 여기에다가 과녁을 달아야 할 게 아닌가.”

“그러다 화살이 넘어가면 큰일이야. 사람이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

점점 더 또렷해지는 목소리에 사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이번 건 비단 그에게만 들린 게 아니었던지 바쁘게 움직이던 자들이 손을 놓곤 뒤를 흘깃거린다. 안 좋은 예감이 듦을 느끼며 사내는 바로 주변을 살폈다.

넓은 공터,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낮은 언덕과 크게 자란 나무들, 반대편에는 수레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땅히 이상한 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설마 싶었던 그는 언덕 쪽을 살폈다. 경사가 가파르긴 해도 낮아서 못 오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곳을 멍하니 쳐다보려는데 그 건너편으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자는 사내와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역시나 여기다가는 과녁을 묶으면 안 될 것 같아. 다른 곳으로 가자고.”

“무슨 소리야. 거기가 제일 좋다니까.”

“아, 글쎄. 내가 하자는 대로 해. 그냥 내려가자니까.”

다급히 말한 포졸은 아래로 내려갔고,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사내는 그곳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오늘 이곳에서 이병현 대감과 그 친족들이 모여서 제사를 치를 예정이었다.

이곳은 이병현 대감의 사유지로, 그가 마음먹은 대로 어떤 식으로든지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임금이 찾아온다 한들 지금 이 공터에서 벌어지는 일을 방해할 순 없었다. 그런데 저것들은 대체 무언가 싶었던 사내는 그리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왜 포졸이 보인단 말인가. 저놈들이 길을 잘못 든 거겠지. 일단 얼굴을 보고 나서 여기서 중요한 일이 있으니 시끄럽게 굴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라며 돈주머니를 찔러 넣어 주면 간단하게 일이 해결될 거다.

안 좋은 쪽으로는 아예 생각도 하지 말자면서 사내는 언덕 위로 올라갔다.

“나으리. 위험하십니다.”

“시끄럽다. 잔말 말아라!”

누군가 걱정이 되어서 한마디 해 주었으나, 그조차도 듣기 싫었다. 예민한 상태였던 사내는 단숨에 언덕을 올라갔다.

낮았지만 경사가 심해서 미끄러질 뻔하기도 했던 그는 비틀거리면서 위에 똑바로 올라섰다.

주변을 살피자 포졸은 보이지 않았지만, 건너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나무에 못질하는 소리나 말 울음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지금까지 잘 진행이 되었는데 여기까지 와서 일을 망칠 순 없었다.

사내는 달리다시피 해서 앞으로 걸어갔고, 경사가 험하게 난 곳 앞에서 멈추어 아래를 살폈다.

제사를 위해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는 공터 바로 건너편, 낮은 언덕으로 경계가 지어진 곳에는 상당수의 포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공터 자리를 정리해 천막을 세웠고, 끌고 온 말을 나뭇가지에 매거나 했다. 그리고 이쪽으로 향하도록 과녁을 걸고 거리가 잘 맞는지 확인할 요량으로 시범 삼아 화살을 쏘는 자도 더러 보였다.

당파를 양손에 든 채로 한쪽에 마련된 곳에 세우는 자도 있고, 가운데 쪽에는 불을 지피는 포졸도 보였다. 그걸 본 순간 사내의 입이 크게 벌려졌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다리에서 힘이 풀린 사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 *

이병현 대감이 자신의 사유지에서 제사를 지낸다 하면 그걸 두고 뭐라 할 수 없었다.

반대로 관아에 속해진 공터에 포졸을 데리고 야외 훈련을 하겠다 하면 그 또한 뭐라 할 수 없음이었다.

일단 소소한 모든 훈련은 장부에 작성이 되고, 그것들은 때가 되면 감사를 받는 자료들 중 하나가 된다. 일단 장부에 적었으면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게 응당 옳았다.

그 부분에 대해선 사또가 뭐라 해도 중간에 변경하는 게 어려웠다. 하물며 아무 상관도 없는 자가 나서서 야외 훈련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자리를 뜨라 한들, 그런 헛소리를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자네들도 눈이 있으면 봐서 알 게 아닌가. 이 언덕 너머에서 제사가 치러질 예정이란 말이네. 이병현 대감이 가족들을 다 데리고 나올 거란 말이야. 그런데 여기서 자네들이 훈련을 한다는 게 말이 되나?”

따지듯 묻는 사내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심하게 흥분한 그 뒤로는 선비들이 열도 넘게 모여 있었다.

머릿수로 밀어붙일 요량으로 찾아온 거겠지만, 그들을 상대하는 포졸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들도 위에서 시켜서 이리로 나온 거였다. 소문으로 이병현 대감이 제사를 치른다 어쩐다 하긴 했지만, 그게 건너편이라는 것도 지금 들어서 알게 된 일이었다.

이병현 대감이 반양의 실세라 그의 눈 밖에 나는 건 조금 거시기했지만, 그 전에 이곳 정리를 하는 게 그들의 주 임무였다. 때문에 앞에 우르르 몰려들어 있는 자들이 참으로 불편했다.

웬만하면 말도 듣지 않고 꺼지라 하겠지만, 자꾸만 이병현 대감을 들먹이니 어떤 식으로 처리를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저 인상만 쓴 채로 있는 포졸을 두고 이때다 싶었던 사내가 다시 밀어붙였다.

“남의 집안의 제사를 방해하면 삼대가 재수 없다는 말이 있잖은가. 더군다나 이번 제사가 보통 일인가? 이병현 대감이 온 가족을 불러들여서 진행하는 거란 말이네. 이 제사가 얼마나 중한지, 그걸 모르겠나?”

사내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선비들이 한마디씩 힘을 보탰다.

“우리들의 제사를 방해하면 네놈들도 좋을 게 없을 거다.”

“그래. 너희들뿐만이 아니라 네놈 가족이나 자식들에게도 해가 갈 거다.”

“―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그냥 이쪽만 물고 늘어지면 모르겠지만, 가족들 운운하는 건 너무했다. 저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없을 거라며 포졸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도 뭐 좋아서 여기에 온 줄 아시오? 위에서 명령이 내려왔으니 이리 훈련 준비를 하는 게 아니오. 우리를 붙잡고 그리 말해 봤자 아무 소용없으니 있다가 사또가 오시면 그때에나 말을 꺼내 보시오.”

“사또가 오면 재차 말을 해 볼 터이니 네놈들도 행동을 멈추거라. 그 잡다한 것들 좀 그만 늘어놓으란 말이다. 어차피 곧 정리하고 이곳을 뜨게 될 텐데, 나중에 네놈들 일만 많아지는 셈이다―.”

한 선비의 말에 포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저들이 사또에게 항의를 해도 자신들이 이곳에서 뜰지 안 뜰지는 모를 일이었다.

책만 붙잡는 놈들이라 그런지 사또에 대한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이라면서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런 포졸의 얼굴을 본 선비가 앞으로 나섰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 거냐.”

차분하고 낭랑한 음성에 내내 똥 씹은 얼굴로 있던 포졸 둘의 표정이 펴지고, 대신에 몰려 있던 선비들은 움찔했다.

설마 싶었던 그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그리고 말을 타고 이리로 오는 명월과 체격 좋은 승려를 확인했다.

사또 명월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기세가 등등하던 자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서로 눈치만 살필 뿐인 그들의 모습에 포졸들은 속이 좀 시원해졌다. 그래서 일부러 큰 목소리로 명월에게 인사를 건넸다.

“사또. 오셨습니까!”

“어서 오십시오!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안쪽에 천막을 쳐 두었습니다!”

우렁찬 목소리 안쪽에 서린 반가움은 감추어지지 않는 법이다. 실제로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자들을 두고 명월은 천천히 앞으로 이동했다.

말에 앉은 채로 다가온 명월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쓴다든가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 아니었다.

눈을 내리떠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모여 있는 선비들을 응시했지만,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압박감을 느끼는 듯 차마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거나 했다.

그렇게 모두가 시선을 피하는 와중에도 명월을 똑바로 바라보는 자가 있었다. 그리고 명월은 그 사내 앞에 멈추어 서선 물었다.

“뭔가.”

짤막한 물음에 사내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전에도 명월을 본 적이 있었기에 그때의 느낌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말 위에 올라탄 명월은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압박감을 느끼며 사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낮은 언덕이 보이십니까.”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지금 이곳으로 몰려온 이유나 말하게. 난 그쪽을 일일이 상대할 만큼 시간적인 여유가 넉넉하지가 않네.”

“……언덕 바로 너머에서 저희가 준비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그러면 그쪽으로 넘어가서 그대들이 준비하는 거나 마저 이어서 하게.”

네놈들 일이나 할 것이지 왜 여기에 몰려와서 시끄럽게 구느냐는 말이었다.

사내는 이를 악문 채로 명월을 노려봤다. 하지만 고작 노려보는 것으로 눈 하나 깜박일 명월이 아니었다.

명월은 아직도 서 있는 포졸들에게 손짓을 했다.

“거기에 서서 뭘 하는 거냐. 어서 안쪽으로 가서 훈련 준비나 해라. 그리 굼떠서야 해가 지기 전에 활시위 한번 제대로 당기지 못하겠군.”

명월의 말에 서로 시선을 교환한 포졸들은 다급히 뒤로 달려갔다. 가만히 서 있어 봤자 상대하기 껄끄러운 선비들 얼굴을 보며 그들의 듣기 싫은 목소리만 듣게 될 터이니 말이다.

포졸들이 안으로 달려가자 선비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난입에 잠시 일에서 손을 떼고 있던 포졸들은 명월의 명에 따라 다시금 속도를 높였다.

훈련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눈을 감았다 뜨면 여기저기로 갖가지 것들이 세워진다.

선비 중 하나가 “저, 저놈들이―.” 하고 중얼거리는 순간 더는 참지 못하고 사내가 사납게 내뱉었다.

“언덕 바로 너머에서 제사가 치러질 것입니다. 이병현 대감 가문의 사내들이 전부 다 모이는 자리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곳에서―!”

“여긴 관아에 속한 땅이고 난 오늘 여기서 포졸들의 야외 훈련을 실시할 것이오. 그에 대해서 내 그쪽에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소? 우리가 우리 땅에서 훈련을 하는데, 그쪽이 신경 쓰이니 제사는 다른 곳에서 해 달라 말을 꺼낸 적이 있느냔 말이오.”

“어, 어찌 그리도 불경한―!”

“불경할 게 뭐 있소. 그래 봤자 고작 가문 한 곳에서 제사를 치르는 것뿐인데. 누가 알면 왕묘라도 옮겨 오는 줄 알겠소.”

“…….”

여기 이병현 대감보다 더한 존재가 있었다.

명월이 왕묘를 운운하는 순간 선비들의 얼굴빛은 칙칙하게 죽어 버렸다.

지금 자신들이 들은 게 진짜인가 싶어 의혹을 드러내는 그들을 두고 명월은 등채를 꺼내 그걸로 사내를 가리켰다.

“하필이면 훈련할 시기에 바로 옆에서 제사를 한답시고 난리이니 이쪽이야말로 불쾌하오. 그걸 참고서 조용히 있어 주는 건데도 불만을 토로할 셈이라면, 그대들 말고 이병현 대감이 직접 와야 할 것이오.”

말 위에 앉아 눈을 내리뜬 채 등채까지 겨누고 있으니 그 박력이 대단했다.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있던 사내는 점점 더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곤 명월의 기에 눌린 걸 상기하고는 재차 언성을 높였다.

“이럴 순 없습니다! 이 반양에선―!”

“목소리 낮추시오. 여기서 더 문제를 일으키거나 시끄럽게 군다면 그대들 모두 감옥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오.”

싸늘하게 내뱉는 말에 사내는 재차 입을 다물어야 했다.

모여 있는 건 열이 넘어도 하나같이 한심한 낯짝들이었다.

본인들이 원하는 게 있으면 더 세게 요구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인데. 이런 나약한 놈들.

쯧, 하고 혀를 찬 명월은 등채를 거두었다.

“어찌 선비들이 관아의 일에 간섭을 한단 말인가. 세상에 이런 법도는 없소. 내 이번엔 이병현 대감의 얼굴을 봐서 그냥 넘어가 주지만 두 번은 없소. 더 이상 내 화를 돋우지 말고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시오.”

명월의 기세는 대단했다.

지금 모여 있는 자들만으로는 명월을 상대할 수 없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이 든 사내는 마지막 용기를 끌어모았다.

“후회―.”

“후회하고 싶지 않거든 오늘 거기서 제사 같은 건 치르지 않는 게 나을 거요.”

사내의 말을 자른 명월은 말의 고삐를 잡았다.

“―살고 싶다면 말이지.”

지나치듯 덧붙이는 말에 모여 있는 선비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사내는 완전히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래야 할 거다. 거기서 한마디 더 하는 순간 자신의 주먹이 놈의 잘날 것 없는 턱을 후려칠 테니 말이다.

그들에게서 완전히 고개를 돌린 명월은 안쪽으로 향했다. 야외 훈련은 처음이었지만, 걱정과 달리 포졸들은 준비를 잘하고 있었다.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수준임을 확인한 후 명월은 옆을 돌아봤다.

입을 일자로 다문 백호가 보였다. 내내 조용히 옆을 따라붙고 있지만, 그렇다 해서 그가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 이곳에 명월이 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굉장한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경고를 했음에도 이리 행동하는 데에 대해 화도 날 터였다. 다 알고 있는데도 왜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명월은 실실 웃으면서 물었다.

“아까 그놈들 얼굴 봤어?”

묻는 말에 대해 대답 없이 백호는 명월을 흘깃 볼 따름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명월은 계속해서 웃고 있었고, 결국 백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 방 먹여서 좋기도 하겠다.”

“우리는 그저 여기서 훈련을 할 뿐이야. 별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신경 쓰지 말고 걱정하지 마라. 괜찮다. 늘 백호가 하던 말이었다. 그걸 지금 명월이 하는 거다.

문제의 여지가 있는 곳 바로 옆에서, 저런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하는데 그걸 누가 믿겠는가.

입꼬리를 씰룩인 백호는 “퍽이나.”라고 중얼거렸고, 그 말에 명월의 웃음이 한결 커졌다.

* * *

해가 저물 즈음, 제사 준비는 착착 진행이 되었다.

넓은 공터에는 많은 자리가 깔리고 천막이 처졌다. 줄을 걸어서 그곳에 등을 달자 주변이 환해진다.

앞쪽으로는 거창하다는 표현이 걸맞은 제사상이 차려졌고, 외부이기 때문에 뒤쪽으로는 막대를 세워서 검은 천을 넓게 걸었다. 그리하자 나름 보기에 훌륭했다. 급하게 준비한 티가 나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이병현 대감이 봐도 뭐라 하지 않을 거다. 간신히 안심할 수 있었던 사내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지기 직전, 등 뒤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아아아아―.”

하나둘 모인 사람들이 이미 자리의 절반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앞으로 있을 제사를 위해서 경건한 마음으로 있었던 자들은 그걸 깨트리는 요란한 함성에 절로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재차 울리는 함성. 이번에 그곳에는 사또를 연호하는 외침이 섞여 있었다. 아까부터 저런 식이었다. 대체 무얼 하는 중인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방해였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가서 입 좀 닥치거나 여기서 꺼지라고 하고 싶지만, 그리할 순 없었다.

앞서 찾아갔다가 명월에게 처참하게 깨진 기억이 있었던 그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머리를 맞대고 이를 어쩌면 좋으냐는 의미로 시선을 교환할 따름이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공터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들은 반대편에서 들리는 환호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에게 있어 지금 이 순간은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임해야 할 소중한 제사인 거다. 그래서 어떻게든 집중하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뒤에서 울리는 환호성에 앉아 있는 이들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화가 단단히 난 듯 인상을 쓰는 그들을 조롱하듯 더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결국 참다못한 선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언덕 쪽으로 넘어가려는 것에 근처에 있던 다른 자들이 그를 붙잡았다.

“그냥 가만히 있게. 쓸데없는 문제 일으킬 필요는 없어.”

“쓸데없는 문제라니요. 저들이 일부러 소란스럽게 굴어서 우리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데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가서 말을 해 봤자 저들이 제대로 듣기나 하겠나. 괜한 꼬투리를 잡으려 들 걸세.”

“그래도―.”

지금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려던 찰나 뒤쪽에서 작은 술렁거림이 일어났다.

선비는 인상 쓴 채로 뒤를 돌아봤고, 안쪽으로 들어오는 가마를 발견했다.

커다란 가마를 타고 올 만한 사람이라면 몇 안 정해져 있었다. 가마의 화려함을 보아하니 드디어 이병현 대감이 온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조용히 앉아만 있던 자들이 일어나고 가마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와 가장 앞까지 이동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제사를 준비했던 사내가 냉큼 옆으로 달려갔다.

“대감. 오셨습니까.”

조심스레 말을 건네고 나서 대감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런데 조용했다. 그래서 처음엔 이병현 대감이 타지 않은 건가 싶었으나, 가마를 들고 있는 자들의 얼굴이 익숙했다.

머뭇거리던 사내는 재차 “대감?” 하고 웅얼거렸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 거냐.”

끝이 갈라진, 걸걸한 목소리로 묻는 것에 사내는 뜨끔했다.

사또는 사내가 대적하기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렇다고 이제 막 온 대감에게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면 이르듯이 말한 후, 사또 좀 처리해 달라 하는 것도 한심했다.

어찌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끙끙 앓기만 하는 사내를 두고 가마가 천천히 내려갔다. 그걸 따라서 사내도 허리를 굽혔다.

이병현 대감은 재차 조용해졌지만, 그렇다 해서 그가 지금 이 상황을 언짢지 않게 생각하는 건 아닐 터였다.

내심으론 일을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두고 보고 있었던 걸 타박하고 싶지 않을까. 대감에게 무슨 소리를 듣기 전에 다시 가 봐야 하는 걸까. 망설이던 사내가 용기를 내 말을 꺼냈다.

“이번에 이곳에서 우리 가문의 제사가 치러질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새파랗게 어린 사또 놈이 야외 훈련을 한답시고 많은 포졸을 끌고 나타났습니다. 낮에 제가 가서 그들을 쫓아내려 했으나, 사또 놈이 워낙에 맹랑한지라―. 제가 다시 가서 말을 하고 오겠습니다.”

단순히 말만 해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아예 저쪽으로 넘어가서 바닥에 드러눕거나 무슨 짓을 해서라도 놈들을 쫓아내야 할 판이었다.

“그냥 둬라.”

어떤 수를 써야 저 건방진 사또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하던 사내는 한참 후에 “뭐라고 하셨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지금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분명 대감이 그냥 두라고 했던 것 같다.

이제부터 제사가 치러질 것인데 저토록 소란스럽게 구는 놈들을 그냥 두라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싶어 멍하니 있는데 가마꾼이 옆으로 와서 문을 열어 주었다.

대감이 가마에서 내릴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하고 싶던 참이었기에 사내는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가마에 앉아 있던 이병현 대감이 느릿하게 바깥으로 나왔다.

양손으로 가마의 옆을 잡은 채로 천천히 바깥으로 빠져나온 대감은 똑바로 서선 사내를 바라봤다.

“우린 우리의 일을 하면 그만이다. 저들이 와서 훼방을 놓는 게 아니라면 딱히 손을 쓸 필요는 없다.”

“…….”

이병현 대감이 이런 식으로 말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무척 의외였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사내를 더 당황스럽게 만드는 건 이쪽을 바라보는 대감의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였다.

근처에 건 등불로 확인이 될 만큼 그의 눈빛은 차가웠고, 표정은 경직되어 있었다.

낮에 한 선비가 대감이 이상하다는 말을 꺼낼 때에도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며 호통을 치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강한 두려움을 느꼈다.

내 눈앞에 서 있는 이 존재는 대체 무어란 말인가. 이병현 대감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이건 다른 존재였다. 대감이 아니었다.

불현듯 드는 생각이 그를 두렵게 만든다.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공포를 억누를 수 없었던 사내는 양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곤 눈을 내리떠 시선을 피했지만, 이마에 닿는 서늘한 시선은 여전했다.

네놈이 무언가를 알아차린 것이더냐. 하지만 이미 늦었다.

누군가 그리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 사내는 턱에 힘을 주었다. 새파랗게 질려선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는 사내를 두고 이병현 대감은 부축을 받으면서 앞으로 이동했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서 있던 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공손히 인사를 건네 온다. 그렇게 모여 있던 자들이 한 번에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장관이라 할 만했다.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자들만 어림잡아도 200명이 넘었다. 그들이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앉아서 앞으로 있을 제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둘러보는 이병현 대감은 흡족한 듯 제 턱수염을 한 번 쓸어내렸다. 동시에 언덕 건너편에서 기다렸다는 듯 함성이 터져 나온다.

그 사이로 백발백중, 같은 외침이 들리자 사뭇 경건한 모습으로 서 있던 자들이 움찔하고 몸을 떤다.

가능한 신경 쓰지 말자 생각을 해도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왜 이리도 시끄럽게 구는 건가 싶어 저도 모르게 언덕 너머로 차가운 시선을 던지게 된다.

“다들 모였으니,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언덕 건너편에서 시끄럽게 구는 자들에 대한 미움을 담아 노려보던 자들은 이병현 대감의 말에 재차 그를 바라봤다.

조용히 치러져도 부족할 판에, 건너편은 아직도 소란스러웠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말로 제사를 진행하는 것인가. 일단은 이 소란을 정리하는 게 옳지 않을까.

그리 생각을 해도 먼저 말을 꺼내는 이들은 없었다. 대감이 시작하자고 했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 시선을 주고받던 자들은 가지런히 서선 양손을 마주 잡았고 다른 몇몇은 제사를 진행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실수 없이 일을 진행하려 바쁘게 움직이는 그들과 다르게 이병현 대감은 계속해서 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 * *

한쪽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과녁을 응시하던 명월이 시위를 당기자 주변이 조용해진다.

직후 숨을 들이마신 후 손가락을 튕겼고 빠르게 날아간 화살이 정확히 과녁 가운데에 꽂혔다.

이미 열 개도 넘는 화살이 과녁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빼곡하게 들어찬 곳에 여지없이 박히는 화살을 본 포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함성을 내질렀다.

“사또, 정말 굉장하십니다!”

“활을 왜 이렇게 잘 쏘십니까?! 전 이런 건 처음 봤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구경거리에 다 큰 어른인 포졸들은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손뼉을 치거나 그 자리에서 뛰면서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자들도 허다했다.

원래 칭찬을 마다할 인간은 없는 법이었다.

저들이 치켜세워 주는 말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명월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그러곤 재차 활을 붙잡다가 얼굴에 닿는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이방이 서 있었다.

말은 없어도 불안을 담은 눈동자가 전하려는 뜻은 명확했다. 그런 이방을 바라보던 명월은 근처에 모여 있던 포졸에게 턱짓을 했다.

“화살을 뽑아 와라. 그리고 구경만 하지 말고 너희들도 안쪽으로 가서 당파라도 휘둘러라.”

자신이 활 쏘는 걸 구경시켜 주려고 저들을 이리로 데리고 온 게 아니었다.

포졸도 그걸 알고 있었다. 정말은 공터의 빈자리에 서서 당파를 휘둘러야 했지만, 명월의 실력이 워낙에 출중해서 저도 모르게 이리로 와 구경을 하게 되었던 거다.

덕분에 좋은 구경을 잘했다. 사람이 어떻게 저리도 활을 잘 쏠 수 있는 거냐면서 흥분해선 활을 쏘는 시늉을 내는 포졸들 사이로 이방이 움직였다.

“대감이 조금 전에 도착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리로 오는 것 같던가?”

“도착하자마자 제사 준비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른 이들도 그걸 거들고 있고요.”

이방의 말에 명월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유난히 크고 동그란 달이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달을 기울기를 보아하니 아직 늦은 시간이 아니었다.

“때가 이른 것 같은데 바로 제사를 치르는 건가? 그 전에 이리로 넘어와서 나에게 꺼지라는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암만 대감이라 할지라도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방은 뒷말을 흐렸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진 않았다. 이병현 대감이 왔고 저들이 제사를 치르려 하니 일단은 조용히 해 주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거다.

하지만 그런 말을 꺼내면 자신이 어떤 반응을 취할지 모르니 눈치를 살피는 것일 거다.

명월은 웃었다. 기분 좋게 웃으면서 옆구리에 차고 있던 통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걸 본 이방의 눈동자가 불안으로 흔들린다.

재차 화살을 쏠 셈이던가. 그러면 포졸 놈들이 다시 몰려들어서 환호를 올리고 난리도 아닐 터인데―.

“돼지는 좀 잡아 왔나?”

명월이 화살을 당장 쏘면 어쩌나 싶어서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이방은 명월의 질문을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명월의 명을 받아서 이리로 오는 길에 돼지 두 마리를 잡아 온 걸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실한 것으로 두 마리를 업어 왔습니다.”

“그러면 가운데 자리에다 솥을 걸고, 따로 돼지를 걸어서 익히도록 하게.”

“……지금 바로 구워서 드실 겁니까?”

“물론이지. 애초에 난 구워 먹으려고 사 들고 오라 한 거야. 두 마리 정도는 있어야 여기에 있는 놈들 배를 불릴 수 있을 게 아니던가.”

“…….”

화살로 제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하는 명월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지금 본인이 하는 말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뻔뻔하다 할 정도로 태연한 모습에 이방은 한숨이 나왔다.

돼지를 구우면 냄새가 심하게 날 터였다. 흥분한 포졸 놈들은 더 소란스럽게 굴 테고, 자연스럽게 언덕 건너편에 모여 있는 자들 귀에도 들어가겠지.

말이 언덕이지 일반적인 돌담보다 더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도 정말 괜찮은 것인지 불안한 마음이 든다.

다른 거라면 모르겠지만 제사였다. 저만한 인원이 모여 제사를 치르려 하는데 그걸 방해한다면 명월에게도 좋을 게 없었다.

이런 말을 꺼내도 되는 걸까 싶어 몇 번이나 망설이는 동안 명월이 자네, 라고 이방을 부른다.

“난 저놈들이 하는 짓을 구경만 하러 온 게 아니야. 그렇다고 도와주고 싶은 것도 아니지. 내가 하고 싶은 건 초를 치는 거야.”

이방 쪽으로 고개를 숙인 명월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건 비밀인데, 너만 알고 있어. 그런 억양으로 말했다.

“저놈들이 하려는 일에 초를 치기 위해서 내가 여기에 온 거지.”

엄밀히 말하자면 단순히 초를 치기 위해서 이곳에 서 있는 건 아니었다.

저 건너편에선 분명히 무슨 일이 생길 것이었다.

그것에 대해서 아는 건 자신뿐이었기에 이리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이방이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을 보낸다 한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실제로 명월이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이방은 멍하니 있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건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십니다.”

“위험한 건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야. 어쩌면 정말 위험한 짓을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저쪽일 수도 있네.”

거기까지 말한 명월은 재차 활을 잡았다.

시위를 세게 당긴 채로 정면을 응시하는 명월의 얼굴은 진지하다. 그것에서 말을 걸지 말라는 무언의 의사가 느껴졌던 이방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조금 전 명월이 시킨 일을 떠올렸다.

돼지고기를 통째로 굽는다라.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곳에 있는 포졸들은 분명 좋아할 거라며 체념한 이방은 느릿하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방이 다른 곳으로 가 버린 후, 명월은 화살을 놓았다. 날아간 화살이 아무것도 없는 과녁의 가운데에 꽂혔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옆에서 나타난 손이 그 화살을 뽑는다. 명월은 과녁 옆에 서 있는 백호를 바라봤다.

한 손에 들린 화살을 유심히 살피던 백호는 고개를 들었다. 명월을 바라보던 백호는 느긋하게 그리로 걸어갔고, 그러는 동안 명월은 다시 통에서 화살을 뽑아 들었다.

원래 어려서부터 이런 게 특기였다. 활을 쏘든, 말을 타든, 검을 다루든, 모든 걸 잘하는 명월이었다. 분명 위에 있는 두 형님들보다 나을 거다.

하지만 형님들은 지금 도성에서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고 자신은 이곳에 내려와 있었다.

사람에겐 각자 맞는 자리가 있기 마련이었다. 어쩌면 자신이기 때문에

반양에 내려와 있는 게 아니냐면서 명월은 시위를 당겼다.

“계속 하다 보면 손가락 아프지 않나?”

바로 옆으로 다가온 백호가 묻는 말에 답하지 않은 명월은 재차 화살을 놓는다. 이번에도 정확하게 가운데에 꽂혔고, 그걸 보는 순간 명월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쏴서 명중시키면 기분이 좋아진다. 다시 화살을 뽑으려 했던 명월은 백호가 건네는 화살을 보곤 그걸 받아 들었다. 그러자 백호가 바로 명월의 손목을 붙잡는다.

당황한 명월이 손을 빼내려 하자 백호도 더 힘주어 잡아 온다. 명월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꼬옥 쥐나 싶더니 바로 힘을 뺀다.

떨어지기 전에 은근히 명월의 손가락을 잡았다가 놓으면서 “생각보단 부드럽군.” 하고 중얼거렸다.

화살을 잘 쏘는 사람은 손가락의 특정 부위에 굳은살이 박이기 마련이었다. 백호는 그 부위를 만져 보고 나서 부드럽다고 하는 거였다.

원래 명월은 손에 굳은살이 잘 박이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손해 보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깨끗한 손은 마치 그가 다른 이들보다 노력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던 거다.

그저 단순히 굳은살이 없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걸로 노력을 하고 안 하고가 판단 내려지는 거다.

거기다 집안 때문에 괜한 선입견도 끼어들어서 ‘아버지를 믿고 빈둥빈둥 놀기만 하는 거지.’라는 소리도 들어야만 했다.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안 좋은 과거의 일이 떠오른다.

괜히 기분이 언짢아지는 걸 느끼면서 명월은 백호에게 활을 건넸다. 그걸 받아 든 백호는 만지작거리다가 명월이 쥐고 있던 화살까지 빼앗듯이 들고 갔다. 그리고 그가 뭐라 하기도 전에 시위를 세게 당겼다가 바로 놓았다.

화살은 빠른 속도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그쪽에는 과녁이 없었다.

당황한 명월이 뭘 하는 거냐고 물으려던 찰나 저기 언덕 너머에서 으악, 하는 비명이 들려왔다. 뒤를 이어서 “화, 화살이 날아왔어!” 같은 경악이 담긴 음성이 들리자 명월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려 버렸다.

지금 백호는 일부러 언덕 너머를 겨냥한 거였다.

지금 그곳엔 적잖은 사람이 모여서 제사를 치르는 도중일 텐데, 갑자기 화살이 날아왔으니 분명 기겁했을 터였다. 보지도 않고 날린 것이니 누군가 화살에 맞았을 수도 있음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호는 태연했다.

“생각보단 간단하군.”

퍽이나 그러시겠다.

눈을 가리던 손을 치운 명월은 당장 백호에게서 활을 빼앗아 들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방해를 하고 싶은 거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암만 과녁에 맞추어 봤자 별 소용이 없어. 그냥 이곳에 모여 있는 놈들에게 언덕 너머로 화살을 몇 발씩 날리라 하면 저놈들은 꽁무니를 빼면서 달아날 거다.”

“…….”

빈정거리는 말에 입을 다문 채로 매섭게 노려보나 싶던 명월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내내 서 있던 나무판에서 내려와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 자신의 뒤를 따르는 백호가 느껴졌다.

조용히 따르는 거라 해도 누군가 자신의 뒤에 붙어서 있다는 게 신경 쓰였던 명월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진다.

명월은 그대로 천막 안으로 들어갔고, 백호도 뒤따라 들어왔다.

“보아하니 놈들은 한창 제사를 치르는 중인 것 같던데 어떻게 할 거야?”

명월은 조용히 활을 가운데에 세워 둔 나무 기둥에 걸고, 화살통도 내려놓았다. 그대로 안쪽에 놓인 의자에 털썩, 소리가 날 정도로 주저앉았다.

“놈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할 때에 일이 터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잖아. 일 터지기 전에 지금이라도 저쪽으로 넘어가 봐야 하지 않겠어? 그곳에 있는 놈들은 네 똘마니들이 한 번만 겁주면 알아서 사방으로 흩어질 텐데―.”

“저들은 포졸이지 똘마니 같은 게 아니야.”

자신에게만 한정된 말을 한다면 잠자코 있겠지만, 포졸을 두고 똘마니 운운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만약 일이 생기면 저 똘마니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도움 하나도 안 되는 것들을 머릿수만 채우고 데리고 와서 뭘 하겠다는 거야.”

백호가 저런 말을 할 줄 알았다. 어째 조용히 있는다 했더니만 그게 아니었다. 잔소리를 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저런 말을 듣고 나니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자연스럽게 굳은 얼굴로 손목에 두르고 있던 끈을 풀어 낸 명월은 전립도 벗어서 근처에 올려 두었다. 그러곤 천으로 땀이 살짝 배어 나오는 이마를 닦아 냈다.

목이 마르다. 물을 마시고 싶어서 입을 열려다가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복운을 데리고 오지 않았던 거다.

그간 수족처럼 부리던 자가 곁에 없으니 불편하다. 아니. 달리 부려먹을 자가 있던가.

천을 내려 둔 명월은 앞을 흘깃 바라봤다. 그곳엔 팔짱을 낀 채인 백호가 서 있었다.

매섭게 뜬 눈동자에서 ‘지금 당장 일어나.’라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순순히 물러날 명월이 아니었다.

“여기에 왔다고 해서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난 고작 인간일 뿐이니까.”

“불리할 때에만 인간임을 앞세우는 거냐. 그런 주제에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갈 게 아니냐.”

명월은 입을 다물었고,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곤 재차 고개를 숙여선 천으로 얼굴을 닦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속이 답답해지는 걸 느끼며 백호는 허리를 굽혀선 명월을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갑자기 코앞으로 접근한 백호 때문에 당황하긴 했지만, 물러서지 않고 명월도 그를 똑바로 응시해 주었다.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냄새가 난다.”

“……또 그 이야기냐?”

종종 백호가 자신을 두고 달콤한 냄새가 난다는 식으로 말한다는 걸 떠올리고 묻는 말에, 그는 바로 고개를 젓는 것으로 부정을 했다.

“그런 거 말고. 피 냄새가 난단 말이야.”

“…….”

“슬슬 그녀가 움직이려는 거겠지.”

그녀라는 건 호접화를 일컫는 것인가. 벌써 그녀가 나타난 것인가.

명월은 바로 일어나려 했고 백호가 그런 명월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명월은 꼼짝도 못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지나칠 정도로 가까이에 있는 백호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무표정으로 응시하는 얼굴에 의자에 앉은 채인 명월은 팔걸이에 올린 손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있는 힘껏 백호를 밀어 볼까도 싶었으나 그리할 순 없었다. 지금 백호는 진지했다. 간단한 방식으론 그를 떨어뜨릴 수 없을 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덩달아 굳어진 얼굴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느리게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명월을 응시하던 백호가 입을 연다.

“사또 나으리는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하고 싶으신 건가?”

명월의 눈썹이 꿈틀하고 흔들린다.

사또 나으리라니. 구원이라니. 묘하게 빈정거리는 느낌이 든다. 아니. 실제로도 비꼬는 거다. 그걸 느낄 수 있었던 명월은 싸늘히 내뱉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거냐?”

“내가 하는 말이야 늘 똑같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밖에는 할 게 없어.”

명월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선 팔뚝을 잡는다. 살을 옥죄듯이 단단히 붙잡은 후에 백호는 재차 말했다.

“이곳은 내 땅이고, 그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조절하는 건 나다. 이번 일에 네가 나설 필요가 없어. 이 일은, 이리되어야 한다. 그래야 정말로 죄 없는 다른 자들에게 해가 가지 않아. 네가 누군가를 살린다면 그자를 대신해서 다른 자가 죽게 될 거야. 네가 노력하는 일에 대해서 돌아오는 보답은 고작 그 정도지. 그 얼마나 배은망덕한 결과냐. 그런 걸 위해서 네가 고생할 필요는 없어. 그러니 그냥 자리에 앉아 있어라.”

꼭 이렇게 끝까지 가서야 한 가지씩을 실토한다.

그런가. 언덕 너머에 있는 저들을 하나 살리면 정말로 죄 없는 다른 누군가가 죽는 건가. 그건 안 될 일이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언덕을 사이에 두고, 저 너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방관만 해야 하는 것인가.

솔직히 말해서 저곳에 있는 모든 자들보단 호접화 하나가 더 마음에 걸렸다.

만약 그녀가 원하는 일을 다 끝낸다면, 그때 그녀는 어찌 된단 말인가.

그 끝에서 그녀가 맞이할 결말이라면 하나밖에 없잖은가.

그리고 그때 백호가 명월의 턱을 붙잡아 위로 들었다. 고개를 든 명월은 재차 백호를 바라봤고,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그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명월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백호는 고개를 돌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 정말 미치겠군.”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백호는 턱에서 손을 떼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냥 물러서는 건가? 의외다 싶었던 명월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순간에 맞춰서 재빠르게 몸을 돌린 백호가 명월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갑자기 뒤로 밀고 들어오는 백호의 행동에 놀란 명월은 어, 어, 하는 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백호가 당당하게 제 허벅지 위에 앉아서 무거운 체중을 고스란히 싣고 있었다.

얼결에 당한 일에 명월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봤자 보이는 건 백호의 널찍한 등짝뿐이었다. 그 등을 보자니 지금 자신이 뭔 일을 당한 건지, 보다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너 지금 뭘 하는 거야?”

어이가 없고 화도 난다. 이 녀석이 미쳤나.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던 명월이나, 그의 위에 올라타 앉은 백호는 당당했다.

“내가 네 얼굴을 보면 안 된다.”

팔짱을 긴 백호는 눈에 힘을 준 채로 말했다.

“네놈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지니 이 방법밖에 없어.”

명월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지고 방심하게 된다.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다.

그래선 안 되었다. 이번 일은 자신도 나설 수 없는 일, 그런 일에 명월이 개입하게 두고 볼 순 없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백호의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명월이 백호의 등을 마구 두드려댔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백호는 눈을 감고 무념무상의 상태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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