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29/32)

3장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나뭇가지와 잎으로 뒤덮인 하늘이었다. 역시나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구나.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무언가 발아래에서 꾸물거리며 움직이고 있다.

명월은 눈만 내리떠 그걸 확인했다. 그러자 독각귀 그가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무표정을 하고 있지만, 저 얼굴도 계속해서 보니 조금씩 알 것 같기도 했다.

명월은 움직이지 않은 채로 그가 하는 걸 지켜봤다. 시선이 느껴진 것인지 그가 고개를 든다. 명월과 시선이 부딪치자 그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인상을 쓰긴 해도 그게 화가 났기 때문은 아니었다.

바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것에 맞춰서 명월은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얼마나 잔 건지 모르겠지만, 몸이 나른하고 머릿속도 몽롱했다. 멍하니 있다가 크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한 후, 명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오른쪽 발을 확인했다.

목화신은 벗겨지고 바짓단도 접혀서 무릎까지 올라가 있었다. 발목은 하얀 천으로 감싸여져 있었다. 간단하게 치료를 해 준 모양이었다.

묶인 천을 바라보던 명월은 눈을 내리떴다.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업어서 이동하고 발목의 상처도 살펴봐 줬을 게 분명한 독각귀는 저 아래에 내려가서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양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이 왜 이렇게 어색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명월은 오른쪽 다리를 세워서 발목을 양손으로 감쌌다. 크게 아프진 않았다. 이 정도라면 걸을 수 있었다.

발목을 꾹꾹 누르다가 접혀서 올라간 바짓단을 내리고 목화를 다시 신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에 맞춰서 바로 그가 이쪽을 바라본다.

“이제 괜찮습니다.”

덕분에 많이 좋아졌다는 말은 하려다가 말았다.

대신 명월은 누워 있던 바위에서 내려와 독각귀 옆으로 다가가 섰다.

“가지요.”

이제 괜찮아졌으니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의식을 잃는 동안 푹 쉬어서 몸 상태도 한결 좋아졌다. 이런 상태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동안에도 독각귀는 미동이 없었다.

무표정인 얼굴은 화가 난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었지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은 괜찮다 말했지만, 그가 보기엔 그게 아니니 내심 한 번 더 확인해 보는 거다.

그래서 명월이 정말로 움직여도 괜찮다는 판단이 내려진 후에야 그는 몸을 돌렸다.

독각귀가 앞장서고 명월이 뒤를 따른다. 그 느낌이 처음과 달랐다.

눈을 내리뜬 명월은 제대로 잘 움직이는 자신의 오른쪽 발목을 확인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흐트러짐 없는 단단한 독각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뜬다.

“당신, 이름이 뭡니까?”

그 순간 그의 어깨로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당신이 내 진짜 아버지라 들었습니다. 그런 존재라면 적어도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크게 이상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이름을 묻는 것 정도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내심으론 긴장한 채였다.

처음으로 듣게 되는 친부의 이름 때문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명월은 집중해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마찬가지로, 그는 여전히 앞서 걸어갈 따름이었다.

알려 주지 않을 셈이던가. 어쩌면 이름을 알려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고, 저들 사이에선 함부로 이름을 발설하면 안 되는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름 용기를 내서 물은 건데 저런 식으로 무시를 하면 무안해진다. 괜한 말을 꺼낸 건가 싶은 기분도 들었던 명월은 눈을 내리뜬 채로 이마를 긁적였다.

『월도연.』

이마에 닿아 있던 명월의 손가락이 멈춘다. 바닥만을 보고 있었던 명월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독각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월도연이다.』

이쪽이 반응이 없으니 제대로 못 들은 거라 생각한 건지 재차 알려준다. 하지만 명월은 그가 처음 이름을 말하는 순간 그걸 똑똑히 잘 들었다.

월도연. 그 순간 명월은 자신의 이름 한 글자가 어디서 나온 건지 알 것 같았다.

‘그’의 이름은 유명선이었다. ‘그’의 이름 한 글자와 독각귀의 이름 한 글자씩 따서 자신의 이름이 만들어진 거다.

철이 들 무렵부터 이름 때문에 놀림거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은 너무 이상한 이름인 게 아닌가도 싶어서,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는데.

명월은 이마에 대고 있던 팔을 내렸다.

궁금하던 부분이긴 했지만, 막상 이름을 듣게 되니 기분이 가라앉는다. 그렇다고 나쁜 건 아니고,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터덜거리면서 독각귀의 뒤를 따르던 명월의 걸음이 빨라진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는 명월의 행동에 독각귀가 그를 한번 바라본다. 왜 그러는 건가 싶었는지, 굳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명월이 물었다.

“제 이름이 뭔지 알고 있습니까?”

그 순간 그의 입매로 힘이 들어간다. 그걸 본 명월은 웃었다.

“알고 계시는군요.”

그래. 알고 있었단 말이지. 별거 아닐 수도 있는 사실인데도 계속 웃음이 나오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웃는 얼굴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독각귀의 눈빛이 이상해진다.

이 녀석이 왜 이럴까. 그리 묻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푹 잘 자고 일어났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꿈속에서 ‘그’를 봤기 때문일까.

기분이 싱숭생숭하니 이상하면서 자연스럽게 입이 가벼워진다. 이런 말을 해서 무슨 소용일까 싶은데도, 말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절 지금의 아버지가 계시는 집 앞으로 버려 두고 떠났지요. 처음에는 그게 참 당황스럽고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와 함께 있을 때에는 문제 될 게 없던 모든 것들이 사건 사고를 불러일으켰으니까요. 그리고 아무리 보통 사람인 척을 해도, 사람들은 제가 뭔가 다르다는 걸 귀신처럼 눈치채선 적잖은 괴롭힘도 당했지요. 그때마다 내심 그가 다시 나타나서 날 데리고 가 줬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다시금 어렸을 살던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라고도 생각했고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지만…….”

‘그’와 단둘뿐이었지만, 그래서 평화롭고 한적했다.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들도 없고, 모든 게 자유로웠다. 자신과 함께 사는 동안 그는 꿈속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똑 부러지고 단호한 성격이 되었지만, 그 외에는 무척 다정하고 따스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능한 자신과 떨어지려 하지 않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황은 급변했고,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겠지. 자신의 오른쪽 손바닥 안쪽에 있는 문양이, 그가 결단을 내리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까.

명월은 오른손을 들었다.

“이건 당신 때문에 생긴 겁니까? 전 이것 때문에 곤란한 일을 꽤 겪었는데 말이죠.”

지금도 검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손이었다. 가려져 있으나, 이 안에 무엇이 남겨져 있는지 독각귀인 그가 모르진 않을 거다.

그가 나타나 자신의 손을 잡는 순간 생겼으니, 문양이 생긴 것도 그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차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독각귀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가만히 있나 싶던 그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두었다면 성인이 된 후에 나타났겠지만, 그 순간 표적이 되어서 다른 놈들에게 노려졌을 거다. 어렸을 때 나타나게 해서 그 힘이 점점 희석되게 했지. 내 나름의 방식으로 널 보호하려 했던 거다.』

아, 그런 건가. 그런 거였던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진실을 알게 되는군.

그러니까 이 문양은 언제고 생겼어야 했던 거고, 어른이 되어서 생기는 것보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생기는 편이 자신에겐 더 안전했던 거라 말하는 거다.

그래. 그런 거였다. 그런 이야기는 애초에 해 주는 편이 좋았잖아. 한때 무슨 병에라도 걸린 게 아닐까 싶어 괜히 문양을 진지하게 바라보곤 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여겨진 명월은 허탈한 상태가 되었다.

괜히 오른손을 움켜쥐었다가 펼친다.

귀문으로 넘어갈 수 있는 통로가 되는 문양.

정말 어렸을 때부터 생겼었기에 점점 힘이 약해진 걸까.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백호는 별다른 말이 없었는데. ‘그’도 말이 없었고―.

명월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절 보호하려 했던 거겠지요.”

그 말에 얼굴에 닿는 시선이 느껴진다.

명월은 최대한 감정을 죽이며 담담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날 많이 보고 싶어 하던가요?”

『단 하루도 널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날카로운 가시가 심장 가운데를 쿡 찌르는 느낌이다. 숨이 막히고 마음이 아프다. 괜히 눈 안쪽이 시큰해지는 걸 느끼면서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부모의 사랑을 잘 아는 아이가 ‘내가 좋아?’라면서 심술을 부리는 거나 다름이 없는 거였다. 지금까지 해 본 적 없던 일이니 이런 식으로 구는 게 크게 나쁠 일은 아닐 터였다.

“그러면 당신은요?”

즉흥적으로 묻는 것과 동시에 발아래에 있던 마른 가지를 밟았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남과 동시에 ‘아, 괜한 질문을 했어.’라는 생각이 들면서 후회가 고개를 든다.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선. 명월은 안색을 굳힌 채로 눈을 내리떴고, 가느다란 한숨 소리가 들려 명월의 눈이 크게 떠졌다.

뭐야. 지금 독각귀 그가 한숨을 쉰 건가? 정말로? 내가 한 질문이 그렇게나 어이가 없었던 거야?

무척 당혹스러운 상태가 된 명월이 굳은 채로 있는 동안 그의 입을 타고 말이 흘러나왔다.

『둘 다 데리고 가려고 했다. 내 곁에 두고 싶었지. 함께 있고 싶었지만, 그리되면 전부가 위험해진다. 그는 그걸 알고 있었고, 네가 보통 사람들처럼 살기를 바랐기 때문에 널 두고 혼자 떠났던 거다. 그리고 그는 본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돌려 말하고 있으나 그걸로 그의 마음을 표현한 거다.

애초에 데리고 가려고 했던 건 ‘그’뿐만이 아니라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다.

정말은 둘 다 챙기고 싶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그리할 수 없었던 거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듣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내색하진 않지만, 지금 독각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지금 이 순간 무척 긴장한 채로 있는 명월이었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처럼 보여도 정말은 다음에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궁리하고 있었다.

다음에는 어떤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다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백호는 당신이 미쳐서 그를 되살려 내는 반혼술을 하는 데에 날 이용할 거라 하더군요.”

웃으면서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반혼이라는 단어가 주는 오싹함에 명월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역시나 긴장하고 있을 때에는 함부로 입을 여는 게 아니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더 이상해진 것 같다면서 굳은 채로 있던 명월의 머릿속으로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이건 앞서 한 질문보다 훨씬 더 무거운 것이었다. 해도 괜찮은 걸까. 망설여지지만 진실을 듣고 싶었다.

명월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에 내뱉었다. 그리고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수명이 줄어든 건 나 때문인 겁니까?”

『아니. 나 때문이었지.』

만약 대답이 늦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굉장한 상처를 받았을 것 같다.

어쩌면 그가 남자의 몸으로 자신을 낳았기 때문에, 그것이 무리가 되어서 일찍 죽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던 거다.

독각귀, 그 외에 다른 누군가에겐 물을 수도 없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 꺼낸 말에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그 때문이라니.

걸음을 멈춘 명월은 멍하니 독각귀를 바라봤다. 더 구체적인 말을 원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명월이지만, 독각귀는 더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다 왔다. 이 앞에 그가 있다.』

명월의 고개가 빠르게 앞으로 돌아갔다.

보이는 건 무성한 풀이었다. 거의 벽처럼 이루어져 있는 풀만 보이는데 이 앞이라는 건가.

의아한 느낌이 드는 것과 별개로 명월은 앞으로 손을 뻗었다. 풀의 장막에 손을 대자 그것이 알아서 양옆으로 갈라진다.

한 사람이 지나칠 수 있는 통로가 만들어지는 걸 확인한 명월은 냉큼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앞서 독각귀가 한 말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해도 안전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거다.

정확히 열 걸음을 옮긴 것 같다. 풀로 이루어진 통로를 빠져나온 명월이 다음으로 보게 된 건, 동그란 공터에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는 무덤이었다.

무덤을 보는 순간 가슴 안쪽에서 쿵, 하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보고 있는 걸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명월은 바로 움직이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곁으로 다가오는 자를 올려다봤다.

자신과 달리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독각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무덤인데?”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저건 분명히―.

“무덤이잖아.”

처음에는 망연자실한 채로 있던 명월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진다. 갑작스럽게 격해지려는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던 명월은 거칠게 내뱉었다.

“죽은 겁니까?”

『아직 죽진 않았다. 그저 잠들어 있을 뿐이지.』

독각귀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면 더 흥분했을 거다. 이성을 잃고 날뛸 뻔했지만 그건 금방 가라앉았다.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에 명월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죽지 않았다 하나 지금 보이는 건 분명 무덤이었다. 일반적으로 산 사람이 무덤에 들어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면 저곳은 ‘그’의 것이 아닌 걸까. 여기가 아니라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걸까.

이리로 오는 동안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고, 거기서 조금 더 기다리는 건 문제 될 것이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명월은 무척 초조한 상태였다. 여기서 조금도 기다릴 수 없었다.

지금 당장 ‘그’를 봐야만 했다. 이 두 눈으로 정말 괜찮은지, 무사한지를 확인하고 말 터였다.

굳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명월을 지나쳐 간 독각귀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가 무덤 앞에 서자 그곳으로 변화가 생겨났다.

동그랗게 솟아 있던 무덤이 사라지고, 대신 넓은 풀밭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 누워 있는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사내는 긴 검은 머리카락을 한쪽에 모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정말로 잠이 든 듯 미동 없이 있는 ‘그’를 확인한 명월은 입을 열었다.

반쯤 그리로 몸을 돌린 명월이나, 생각과 다르게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

가만히 서 있는 명월을 두고 독각귀는 ‘그’의 옆으로 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곤 하얀 뺨에 손을 댄 채로 나직이 속삭였다.

『선. 네 아들이 찾아왔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인 후 입을 다문다.

그리 부르면 상대가 눈을 뜰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점점 사라지고, 독각귀는 쓸쓸히 중얼거렸다.

『눈을 떠야 볼 수 있을 터인데―.』

독각귀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있었다. 움직임이 없는 그를 두고, 명월도 내내 한곳에 서 있을 따름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그’가 누워 있었다. 여기서 조금 더 다가서면 그를 만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두 발이 안 떨어졌다. 지금 보이는 이 광경이 어떤 것인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죽지 않고 잠들어 있는 거라 했다.

잠들어 있었지만, 그건 죽음과 별반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

‘그’를 바라보는 명월의 눈가가 가늘게 떨린다.

아래로 내린 두 손을 움켜쥔 명월은 오른쪽 발을 들었다. 그렇게 한 발자국 움직이자 두 번째 걸음은 훨씬 더 수월하게 따라왔다.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얼굴에서 표정을 지운 채로 앞으로 걸어간 명월은 ‘그’의 얼굴 옆에 서선 고개를 숙였다.

겉으로 보기엔 그는 무척 평온해 보였다.

고통이나 슬픔도 없이, 편안하게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를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은 왜 이리도 불편한지 모르겠다.

명월은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여전히 ‘그’에게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이렇게 저 얼굴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거의 20여 년 만인 것 같았다.

짧지 않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신은 어른이 되어 있었건만 이 사람은 조금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저를 못 알아볼까 봐서 일부러 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왜일까. 그와 자신이 같다는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그가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을 뿐, 자신들은 사람과 다를 게 없다. 그리 믿고 있었는데, 기억 속에서 고대로 빠져나온 듯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그를 보자니 심경이 복잡하다.

아, 당신하고 난 다르구나.

보통 사람은 아니었던 거로구나.

스스로 한 생각이 제 목을 죄여 온다. 가슴이 답답하면서 숨을 쉴 수가 없어진 명월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허벅지 위에 양손을 올린 채인 명월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내가 지닌 힘으로는 그가 이런 식으로 잠들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잠든 그의 곁에서 얼굴을 바라보며 지키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지.』

마치 해명하듯 이어지는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머릿속은 여전히 몽롱했다.

『그전에도 널 데리고 이리로 오고 싶었지만, 내 남은 힘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지. 서의 백귀의 땅이 피로 물드는 순간을, 말이야.』

서의 백귀. 그것은 백호를 일컫는 것일 거다.

그의 땅이 피로 물드는 순간이라는 건 호접화가 하는 일을 두고 말하는 것이던가.

호접화는 자신이 말려도 본인의 복수를 이루려 했다. 아마도 지금쯤 그걸 거의 다 끝내고 뒷정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녀라면 사람을 죽여 놓고는 그 뒤처리도 완벽하게 해선 ‘사또께 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할 것만 같았다.

그냥 막연히 그녀가 하려는 일이 잘못된 것처럼 여겨졌다. 그녀의 복수심이 나쁘다는 건 아니나, 그걸 위해서 그녀의 손에 피가 묻는 게 싫었다. 거기다 문제가 생길 거라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건 싫었기 때문에 떡하니 야외 훈련을 한다는 명목으로 옆 공터에 포졸을 데리고 간 거였는데―.

그 날은 이들 사이에서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는 날로 알려져 있었던 걸까. 그런 날로 정해져 있었고, 그것이 독각귀 그에게 유리하게 적용했기 때문에 그 틈을 노려 자신 앞에 나타난 거다.

백호는 두 눈 뜬 채로 자신이 사라지는 걸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고.

인간인 자신의 눈에는 이상하다 싶은 일이, 이들 사이에선 ‘당연한 일’로 구분되어서 진행되는 것인가.

문장으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감정적으론 아니었다. 힘들다. 어쩌면 이런 상태인 ‘그’를 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여전히 입을 다문 채인 명월을 두고 독각귀가 말을 이어 나갔다.

『오늘은 많은 인간이 죽어 나가도록 정해진 날이었다. 그땐 잠시 동안 증폭된 힘을 이용해서 그리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널 데리고 여기까지 왔지. 하지만 이런 상태를 유지하는 건 힘든 일이다. 여기서 더 늦어지기 전에 널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 줄 셈이다.』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서 자신을 이리로 데리고 오고 싶었던 거다.

그저 단순히 ‘그’와 자신을 만나게 하고 싶어서.

명월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오해하지 않았을 텐데―.”

『……선이 말했지. 난 말하는 게 참 서툰 사내라고.』

말하는 게 서툴지만 거짓말을 하진 않는다.

하나둘, 그렇게 옆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 알 것만 같았다. 그가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자신을 대하기 어려워서라는 것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아들이긴 했지만, 제대로 만나 대화를 나눠 본 적 없었다. 그런 자신을 여기까지 데리고 오는 동안 꽤나 긴장했겠지.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뿐인 거다.

그에 대해서 한 가지를 알게 되자 마음이 가벼워진다. 동시에 그가 조금은 더 친근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가 이런 상태인 건 여전히 충격적이었다.

이 상태로 계속 가는 걸까. 앞으로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않는 걸까.

명월의 입매로 힘이 들어간다.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동안 독각귀도 말이 없었다. 잠든 이를 바라보다가 옆으로 눈동자를 돌려선 명월을 본다.

명월의 눈매가 선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독각귀는 나직한 한숨을 토해 냈다.

『―서의 백귀가 미친 것처럼 굴어서 너에게 접근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 순간 명월의 눈꼬리가 파들거리고 떨린다. 바로 아, 하고 입을 벌린 명월은 독각귀를 돌아보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려 했다.

당신이 워낙 갑작스럽게 나타나니까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이어지는 독각귀의 말로 인해 목구멍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백귀가, 너에게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

어떤 의미의 이상한 짓을 뜻하는 건지 모르겠다.

입을 다문 명월은 할 말을 찾지 못했고, 그러는 동안 독각귀는 계속해서 명월을 응시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꼭 들어야겠다는 양 집중해서 응시하는 눈빛이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망설이던 명월은 어깨를 으쓱였고, 그것에 독각귀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해도 그는 그걸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나타난 것 자체만으로도 무척 적대적으로 굴었고, 내 입에서 네 이름이 거론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예전에 내가 그에게 널 부탁한 적이 있긴 했지만, 그 의미는 단순히―.』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문 독각귀가 바로 뒤를 돌아봤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명월이 그를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들이 들어온 풀의 통로 안쪽에서 반짝이는 두 개의 붉은 눈동자를 발견했다.

기척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던 그것은 정체를 들키게 되자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붉은 눈동자 아래로 길게 입이 나타나고 그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그것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것에 맞춰서 독각귀가 바로 그리로 몸을 날렸다.

놀란 명월이 앞으로 손을 뻗었다.

“―위험해!”

다급한 외침이 무색할 정도로 독각귀와 검은 그것이 곧바로 충돌했다.

그것은 덩치가 소만 했다. 그런데 얼굴은 개의 그것이었고, 꼬리가 길고 끝이 날카로운 데다가 앞발과 뒷다리에 달린 날카로운 발톱이 무시무시했다.

보기만 해도 기가 죽을 것 같은 외관이었지만, 독각귀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살벌하게 휘두르는 괴수의 앞발을 잡아서 다른 손으로 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강한 일격이었으나 괴수는 조금도 흔들림도 없이 눈을 부릅뜬 채로 독각귀를 노려봤다. 입을 크게 벌려 날카로운 울부짖음을 토해 내며 그를 위협했다.

고막 안쪽을 두드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신음을 흘린 명월이 급히 손으로 한쪽 귀를 막았다. 그러자 독각귀가 재차 괴수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이번에는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에 걸쳐서 빠르게 주먹을 내리꽂았다. 그렇게 거듭되는 공격에 괴수의 표정이 흔들린다.

맞은 쪽의 눈을 감나 싶던 괴수가 옆으로 몸을 틀더니 뒤쪽에 있던 꼬리가 재빠르게 앞으로 넘어왔다. 그러곤 독각귀의 목을 감아서 옆으로 세게 던져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에 독각귀는 미처 대비를 하지 못하고 오른쪽으로 날아가 나무 사이에 처박혔다. 바닥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그는 바로 일어나 재차 괴수에게 달려들었고, 그건 괴수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 노린 먹잇감을 놓치지 않겠다는 양 그에게 달려든다. 재차 둘이 부딪쳤고, 이번엔 독각귀가 밀리는 양상이었다.

괴수가 앞발을 사용해서 그의 몸을 두드릴 때마다 눈에 보일 정도로 다리가 흔들렸다. 재차 휘두르는 괴수의 공격을 팔을 들어 막는데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들리는 타격음과 점점 굳어지는 독각귀의 얼굴에 명월의 안색이 굳는다.

이대로 있다간 위험했다. 독각귀는 힘이 약해져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러는 동안에 저런 괴수 놈을 상대할 힘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명월은 오른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서 괴수 쪽으로 던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품에 넣어 둔 단검을 꺼내 들고 그대로 괴수에게 달려갔다.

괴수의 어깨와 턱을 잡고 있던 독각귀가 이쪽을 보곤 눈을 크게 뜨는 게 보였다. 굳은 그 표정이 무얼 말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이리로 오지 마.

그런 경고를 담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가 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명월은 재빠르게 움직여서 있는 힘을 다해 단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강철과 같은 괴수의 피부에는 아무런 상처도 남길 수 없었다. 단검은 부러졌고, 그로 인해서 명월의 오른손 가운데로 긴 상처가 생겼다.

피가 튀고 그 순간 괴수의 몸이 크게 떨린다. 독각귀만을 바라보고 있던 괴수의 고개가 완전히 뒤로 돌아가는 순간, 명월은 헛숨을 삼켰다.

“―헉?!”

갑자기 고개가 뒤로 돌아가다니. 정말로 놀랐다.

얼어붙은 채로 꼼짝도 못 하고 눈만 크게 뜨고 있는 명월을 두고 괴수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괴수가 크게 입을 벌리며 날카로운 포효를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독각귀가 외쳤다.

『피해라!!』

“그 전에 네놈이 처리를 하면 될 거 아니냐―.”

독각귀의 다급한 외침과 어울리지 않는 심드렁한 목소리였다.

명월은 이 목소리를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놀라 고개를 치켜드는 것과 동시에 괴수의 몸 위로 하얀 것이 내려앉았다.

하얀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사내는 괴수의 넓은 등짝에 가볍게 내려앉아선 바로 움켜쥔 주먹을 뒤로 뻗었다.

“이놈이 지금 누굴 노리고 있는 거야―.”

어금니를 악문 채로 험악하게 내뱉은 백호는 그대로 주먹을 내리꽂았다.

백호의 주먹이 괴수의 머리 가운데에 떨어지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소리가 들렸다.

놀란 명월이 고개를 돌렸고, 독각귀가 뒤로 빠졌다.

고개가 뒤로 돌아가 있던 괴수의 눈이 압력으로 인해 바깥으로 반쯤 튀어나왔다. 그러는 동안 백호는 괴수의 허리 가운데에 재차 주먹을 내질렀다.

쿵, 하고 육중한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괴수가 재차 포효를 하면서 비틀거렸다.

마지막 발악을 하려는 듯 꼬리를 휘두르지만, 옆으로 몸을 물리는 것으로 간단하게 피한 백호는 그 꼬리를 잡아선 위로 주욱 당겼다.

휘청거린 괴수가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과 동시에 독각귀가 명월에게 달려와 허리에 팔을 감았다. 독각귀는 그를 안아 들곤 뒤로 멀찍이 떨어졌다.

그 순간 여전히 괴수를 상대하고 있던 백호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너―!”라고 외쳤지만, 명월이 바로 삿대질을 했다.

“방심하지 말고 그놈부터 처리해!!”

명월의 지적에 백호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그러곤 눈을 내리뜬 그 얼굴 위로 탐탁지 않음이 서린다.

내가 왜 이런 놈을―. 그리 말하고픈 얼굴로, 백호는 엎드린 채 저항하는 괴수의 머리통에 재차 주먹을 휘둘렀다.

두어 번 더 때려 주는 동안 괴수의 머리통이 점점 함몰되어 간다. 그럴 때마다 끔찍한 포효가 좁은 공간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때마다 고막으로 시큰거리는 통증이 퍼진다.

안색을 굳힌 명월은 귀에 손을 올린 채로 인상을 썼고, 그걸 본 백호가 혀를 찬다.

“성가셔선 원―.”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백호는 옆으로 내려와 축 늘어진 괴수의 꼬리를 잡았다. 그리고 바로 풀 속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정신 차리지 못하고 끝까지 백호를 공격하려던 놈은, 어느 순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앞발로 열심히 바닥을 긁어 댔다.

백호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용을 썼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괴수는 그대로 백호와 함께 풀 속으로 사라졌고, 잠시 뒤 그곳에서 우지끈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번에 멈추지 않고 연거푸 들리는 소리에 명월은 한숨을 내쉰다.

“작작 좀 하지.”

하지만 조금 전에 본 괴수는 정말로 위험한 놈이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이상한 곳으로 왔더니 저런 괴물을 보기도 한다면서 명월은 제 팔을 쓰다듬었다. 그때 옆에서 나직한 신음이 들린다.

아차 싶었던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오른쪽 어깨를 감싸 쥐고 있는 독각귀를 보곤 안색을 굳혔다.

“다친 겁니까?”

다친 거냐는 말에 독각귀의 입매로 힘이 들어간다. 그러곤 옆으로 몸을 돌려서 무언가를 감추려 드는 것 같은 행동에 명월이 바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딜 다친 겁니까? 보여 주십시오.”

“다친 걸 뭐 하러 봐 주려고 그래? 다 지가 약해서 당한 건데. 그런 걸로 우는 소리를 낼 필요가 어디에 있어?”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명월의 어깨에 들어간 힘이 빠진다.

백호는 풀을 걷고선 바깥으로 나왔다. 호랑이 머리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고는 두어 번 긁적거리면서 점점 더 이리로 다가온다.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독각귀가 나타나 그가 자신을 데리고 갈 때에는 꼼짝도 못 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가 자신을 찾으러 올 거라고 내심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위급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날 줄은 몰랐다. 거짓말처럼 말이다.

그래서일까.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이는 그 얼굴을 앞에 두고도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러는 동안 명월은 얼굴에 닿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싶어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독각귀와 바로 시선이 부딪쳤다.

묘한 걸 보는 듯, 굳어 있는 눈빛과 마주한 명월은 순간적으로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독각귀가 명월의 팔을 잡아 뒤로 당기곤 앞으로 나섰다.

명월에게 다가오고 있었던 백호는 그런 독각귀의 행동에 바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곤 기분이 상한 듯 팍 인상을 썼다.

『더 가까이 오지 말아라.』

그 말이 백호의 심기를 건드렸다.

지금 자신이 명월에게 가려는데 더 가까이 오지 말라는 거다. 지금 저게 대체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어이가 없는 말을 들은 사람마냥 표정을 굳힌 백호가 손을 움켜쥔다.

조금 전 괴수를 가볍게 때려눕힌 주먹이었다. 이 주먹으로 힘이 다 빠진 독각귀 하나 상대하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백호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 녀석―.”

이를 갈면서 앞으로 다가오는 백호의 모습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더 가까이 오기 전에 명월이 앞으로 손을 뻗었다.

“기다려. 거기에 가만히 서 있어.”

독각귀가 하는 말은 열 받았고, 명월이 하는 말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 진심으로 저런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던 백호는 벙 찐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거냐며 인상 쓴 채로 바라보는 백호를 두고 명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제대로 해석한 거야.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헛웃음을 흘리다가 주먹으로 제 가슴을 두드렸다.

“난 네 녀석을 구해 주러 온 거야! 조금 전에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네놈은 그 괴수의 먹이가 되어서 뱃속에 들어갔을 거다!”

“알고 있어. 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분명 험한 꼴을 당했겠지. 하지만 적어도 여기선 언성을 높이면서 얼굴 붉히고 싶지 않아. 여긴―.”

잠시 말을 멈춘 명월은 작게 웅얼거렸다.

“……그가 있는 장소니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말에 백호도 눈을 내리떴다. 명월이 바라보는 장소에 누워 있는 사내를 확인한 백호의 안색이 굳는다.

잠든 것마냥 편안한 얼굴로 누워 있는 ‘그’를 보는 순간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그랬던가. 독각귀 저놈이 명월을 이용해서 반혼을 하려 했던 게 아니었구나.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가 자신의 눈앞에서 명월을 데리고 가 버린 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멋대로 군 것에 대한 대가는 혹독하게 치르게 할 셈이었던 만큼 백호의 표정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차 고개를 드는 명월과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백호의 화는 누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한번 명월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본 백호의 미간으로 진한 주름이 생긴다.

마음에 들지 않아. 화난다. 그런 여러 가지 감정 표현을 한 그는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굳은 옆얼굴을 확인한 명월도 속이 답답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백호에게 매번 지적받는 일은 ‘도움을 받았으면 고맙다는 말을 해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고마움의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겠구나 싶었던 명월은 독각귀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여전히 오른쪽 어깨를 감싼 채로 있었다.

아까 괴수와 겨루는 그는 힘겨워 보였다. 분명 적잖은 부상을 입었을 거다.

“다친 곳이 있다면 치료부터 하십시오.”

명월의 말에 백호는 바로 야유를 보냈다.

“고작 저런 놈에게 당해서 부상을 입다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몇 년 사이에 팍 갔구먼.”

“백호. 그만해.”

명월의 억양이 낮아진다. 그 순간 뜨끔한 백호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러지 마.”

“…….”

다른 때였다면 백호도 조금 더 건들거리거나 성가시게 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명월의 눈동자를 봐 버렸다.

한눈에 봐도 알 정도로 경직되어 있는 눈동자는 일부러 힘을 주고 있었다.

백호의 눈동자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간다. 다른 쪽을 바라보는 백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신경 쓰이긴 했지만, 지금은 달리 살펴봐야 할 쪽이 있었다.

명월은 독각귀의 상처가 있는 곳으로 손을 뻗으려 했고, 바로 그 손이 잡혔다.

독각귀의 손에 잡히는 순간 명월은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정말 놀란 듯 굳은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명월을 두고, 독각귀가 말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넌 그의 곁에 조금 더 있어 줘라. 더 오래는 못 있는다.』

가만히 있던 명월의 눈동자가 깜박거린다. 명월의 손에서 힘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던 독각귀도 손가락에서 힘을 뺐다. 명월의 손을 놓고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던 백호는 혼자 가 버리는 독각귀와 명월을 번갈아 보다가 엄지로 이마를 눌렀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명월의 옆에 붙어 있는다 해서 그에게 도움이 될 것도 없었다. 원래 이런 일에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게 도와주는 거였다.

한숨을 삼킨 백호는 독각귀가 서 있는 나무쪽으로 걸어갔다.

독각귀는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댄 채로 서선 다른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반대편 나무에 등을 기댄 백호는 팔짱을 끼었다.

어정쩡한 상황이었다. 전과 달리 독각귀를 대함에 있어 불편함이 있었다. 그래서 눈을 굴리면서 딴청을 부리던 그는 명월이 ‘그’의 옆에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는 걸 확인하곤 바로 안색을 굳혔다.

그리 썩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가 있을까도 싶었으나 명월이 자신의 시야 안에 없는 게 싫었다.

백호는 한숨을 쉬면서 독각귀를 바라봤다.

“말이라도 하면 좋았잖아.”

마냥 어색한 건 싫었기 때문에 뚱하니, 한마디 던지게 된다.

『네놈이 내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잖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네놈이 먼저 말을 꺼냈으면 내가 들어 줬을 거야.”

『…….』

독각귀는 굳은 표정으로 백호를 바라봤다.

퍽이나 그러시겠군. 그리 말하는 듯 싸늘하게 식은 눈빛을 본 백호는 화가 나 한소리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곤 곁눈질로 명월을 바라봤다.

명월은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그 심정이 오죽할까. 안색을 굳힌 백호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러는 동안 뺨에 닿는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무시할 요량이었지만,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바라보니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백호는 심드렁한 눈빛으로 독각귀를 바라보며 툴툴거렸다.

“뭘 쳐다봐? 그래도 약 같은 건 안 줘―.”

일단은 명월을 자신 앞에서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는 것에서 그에게 상당히 감정이 안 좋은 백호였다.

독각귀가 엎드려선 죄송하다고 해도 화가 풀릴까 말까 할 정도였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고 자신을 쳐다보는 거라면 가만있지 않을 셈이었다.

『저 아이와 어떤 관계인 거냐.』

“…….”

그 순간 백호는 심장 한쪽이 뜨끔거리는 걸 느꼈다. 딸꾹질이 나올 뻔한 것도 간신히 내리누른 백호는 눈을 한 번 굴렸다.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고 서 있는 백호를 두고 독각귀의 눈매가 점점 더 날카로워진다.

『전에도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설마 싶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닌 것 같군. 어떻게 된 거냐.』

머뭇거리거나 대답을 회피하면 그게 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음이었다. 원래 이런 건 더 당당하게 굴거나 태연하게 받아치는 게 상책이었다. 백호는 헛기침을 한 후에 입을 열었다.

“별 사이 아니다. 난 그저―.”

『별 사이가 아니라 한 주제에 저 아이에게 그토록 진하게 네놈의 체취를 묻혀 둔 것이더냐. 솔직히 좀 놀랐다. 저리도 노골적으로 향을 발라 두다니. 요력이 떨어지는 놈들이라면 저 아이를 백호 네놈이라 착각할 정도겠더군.』

시간이 지나도 저 특유의 비꼬는 말투는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역시나 싫은 녀석이라며 입술을 씰룩거리던 백호는 재차 잡아뗐다.

“정말로 별 사이 아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거나 상처에 발라.”

어색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선 뭐라도 물려 줘야 할 판이었다.

백호는 소매 안쪽으로 손을 넣어선 작은 주머니를 꺼내 독각귀에게 던졌다.

100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영험한 소나무 열매였다. 웬만한 상처는 대기만 해도 낫게 된다.

힘이 줄어들어서 별거 아닌 놈들 처리하는 것에도 애를 먹는 독각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걸 던져 줄 테니 알아서 입 다물고 조용히 있으라는 거였지만, 주머니를 받아 든 독각귀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실제로도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손에 들린 주머니를 바라보던 그는 그걸 다시 백호에게 던졌다.

백호처럼 가벼이 던진 것도 아니다. 엄청난 속도로 얼굴을 향해 날아온 걸 받아 든 백호는 기겁을 했다.

“아, 뭐 하는 거야!”

큰 소리를 내고 아차 싶었다. 반사적으로 명월을 살피는 백호를 보곤 독각귀가 싸늘히 내뱉었다.

『저 아이를 잘못되게 한다면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죽이겠다는 말에서 살의가 뚝뚝 떨어진다. 지금 그가 농담 삼아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자연스레 백호의 표정도 굳어졌다.

일단 명월과의 사이에 대해선, 독각귀 앞에서 당당해질 수 없는 부분이 있긴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추궁은 곤란했다. 기분이 나빠진 백호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걸 어찌 판단한 것인지, 독각귀가 재차 말했다.

『이상한 놈에게 걸려서 불행해지라고 우리가 저 아이 곁에서 떨어져 있었던 게 아니다. 보다 나은 삶을 살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 사라져 줬던 거야.』

백호는 바로 하―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비웃는 게 역력한 그 반응에 독각귀의 눈썹이 올라간다.

뭐가 우스운 거냐고 한마디 하려던 순간 백호가 바닥을 세게 걷어찼다.

“장난하나. 진짜-.”

발아래의 흙이 깊이 파이고, 날아간 흙이 독각귀의 발 근처에 떨어졌다.

백호는 팔짱을 풀면서 독각귀를 노려봤다.

“말은 번지르르하지. 따지고 보면 인간들 자체가 저놈하고 맞지 않는 것들이었다. 맹수 소굴이라 할 수 있는 곳에 어린애를 던져 두곤 그 아이가 더 잘 되길 바라서 그랬다니 뭔 개소리야. 그리도 걱정이 되었다면 이러니저러니 해도 곁에 데리고 있었어야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혼자 두면, 그 아이가 알아서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냐.”

『…….』

“혼자 있는 동안 저 녀석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워했는지 알기나 하냐. 적어도 저 녀석이 누구고, 어디서 태어났고, 그 손의 문양이 뭔지에 대해선 말을 해 줘야 될 거 아니야.”

『…….』

“아무리 처음 마음을 준 상대고, 첫 아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그리도 아이 키우는 법을 몰라? 저 아이는 반은 인간이야. 너희 독각귀처럼 방치해도 알아서 크는 그런 존재가 아니란 말이야. 지금 저 녀석은 내가 보기에 신기할 정도로 잘 큰 거야. 그런 녀석이야. 놈이 선택하고 결정을 내린 부분에 대해선 뭐라고 지껄여 대지 마.”

백호는 엄지로 제 가슴을 누르곤 당당히 말했다.

“저 녀석이 날 선택한 거다. 내가 저 녀석을 억지로 곁에 붙잡아 둔 게 아니란 말이야. 어디까지나 전부 다 합의였고―.”

하지만 처음 관계는 강제였다. 지금 여기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초 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아주 잠깐 머뭇거리는 게 있긴 했지만, 그래도 본인이 할 수 있는 말은 모두 했다.

명월에게 자신의 체취를 진하게 묻혀 놓긴 했다. 하지만 그걸 두고 독각귀 앞에서 죄인처럼 있고 싶지 않았다.

지금 자신들은 충분히 서로를 인지하고,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아직은 진행 단계라 할 수 있겠지만, 갑자기 나타난 독각귀가 ‘내 아들은 안 된다.’라고 하는 말에 바로 물러설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 그런 의지를 담아 바라보는 백호의 표정은 결연하기까지 했다.

백호가 하는 말을 듣고 반박 한마디 못하던 독각귀의 미간이 깊이 패인다. 복잡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그는 입을 열었다.

『저 아이를 부탁한다는 말의 의미는 그런 게 아니었다.』

“나도 알고 있어.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던 건 아니야.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 난 그 정도로 변태가 아니야―.”

라지만, 조금 그런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잠깐 속이 싸해진 백호지만, 금방 정신을 다잡았다.

지금 이 순간은 무척 중요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눈앞에 있는 건 저기 명월의 아버지였다. 무턱대고 무시하고 외면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반혼을 해서 명월에게 해를 가한 것도 아니고, 그 나름의 방식으로 이리 데리고 와서 ‘그’를 만나게 했다.

그런 그의 노력에 대한 어느 정도의 타협은 필요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저 녀석이 날 부려 먹는 입장이니까,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 저런 녀석 곁에는 나 같은 놈이 있어야 해. 요즘 인간들 세상이 얼마나 개판인지 알기나 하냐. 지나치다 보이는 게 귀물이야. 그런 곳에서 저 녀석이 지금까지 별 탈이 없었던 게 신기할 지경이다.”

그래. 지금까지 별일 없었던 게 신기할 정도로 사건 사고가 꼬이는 놈이었다. 저런 놈인데 어찌 전에는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있었던 걸까. 단순히 반양으로 와 자신을 만났기 때문에 이런저런 일에 휘말리는 건 아닐까.

가볍게 한 생각에 재차 가슴이 뜨끔해진다. 뭔가 좀 찔리는 걸 느끼면서도 그걸 바로 지워 버린 백호는 독각귀의 안색을 살폈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을 그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를 알고 싶었던 거다.

생각보단 괜찮았다. 여전히 표정이 굳어 있긴 했지만, 아까만큼은 아니었다. 괜찮은 건가. 그리 생각한 백호는 재차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조용히 있는데 분위기가 더 묘해졌다.

왤까. 독각귀와 마주하는 것뿐인데도, 왜 이렇게 몸 둘 바 모르는 기분이 드는 걸까.

좀 이상한데. 이런 건 좋지 않은데.

백호의 눈이 빠르게 굴러간다. 그러다 재차 명월을 보게 되었다.

명월은 아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아까도 보긴 했지만, 지금도 불편한 기분이 든다. 왜 저 녀석은 저렇게 불편하게 앉아 있는 걸까.

죄인인 것도 아니니 편하게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면 되잖아. 고개는 왜 또 저렇게 숙이고 있어.

……설마 지금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

명월을 바라보는 백호의 눈동자로 힘이 들어간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둔 백호는 조금 전 자신이 판 흙 안쪽으로 발끝을 넣으며 중얼거렸다.

“저 인간은, 저런 상태가 되는 걸 알고 있었던 거냐?”

『―본인이 원한 일이다.』

눈을 내리뜬 독각귀의 얼굴 위로 그늘이 서린다.

『죽으면 그대로 흙이 될 테지만, 저런 상태로 있으면 적어도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찾아와 얼굴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런 걸 생각했던 거겠지.』

얼굴만 보면 되는 게 아니었다.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끌어안아 체온을 확인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저건 볼 때마다 똑같은 모습으로 자리할 뿐이었다. 그게 벽과 다를 게 무언가 싶었다.

점점 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명월을 저곳에 두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드는 만큼 자연스럽게 거칠어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네놈 꼴이 말이 아니다. 저 인간을 숨만 붙어 있는 산송장으로 만든 대가가 그거냐? 조금 전에 그런 멍멍이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말이 되는 거냐?”

『그래도 같이 있고 싶으니까, 어쩔 수 없다.』

백호는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저 독각귀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오래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게 된다면서 재차 헛웃음을 흘렸다.

멱살을 잡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며, 저게 죽은 거지 어떻게 살아 있는 거냐고 한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독각귀를 바라보는 백호의 눈빛 안쪽으로 복잡함이 서린다.

“이렇게 이런 구질구질한 꼴을 보게 될 줄이야.”

하지만 그건 독각귀 본인이 자초한 구질구질함이었다.

처음으로 마음에 품은 상대. 함께 있으면서 행복과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었던 존재. 그 감동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감정은 영원히 이어지지 않았다.

한쪽은 인간이었다. 독각귀보다 먼저 죽어 흙이 되어 흩어져선, 나중엔 그 흔적을 찾을 수조차 없게 된다.

영원한 헤어짐 끝에 남는 건 홀로 남게 되는 죽을 듯한 고독함뿐이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그’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낸 걸지도 모른다.

그리해서 얼굴만이라도 보라고.

자신은 아직 죽은 게 아니니, 혼자서 외로워하지 말라고.

그리고 이 바보 같은 독각귀 놈은 그런 인간 옆에 아들을 데리고 온 거다. 잠들어 있다곤 해도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런 꼴로 있는데 상봉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갑자기 명월을 볼 수가 없어진 백호는 눈두덩이를 엄지로 꾹꾹 눌렀다.

“진짜 구질구질해.”

연거푸 하는 말에 대해서 독각귀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입을 다물곤 눈을 내리뜰 따름이었다.

그때 갑자기 명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순간에 명월에게 다가가 그의 옆에 있어 줄까, 하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던 백호는 놀라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독각귀도 마찬가지다. 둘의 시선을 받은 명월은 어깨를 가볍게 위로 올렸다가 내리곤 바로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됐습니다.”

독각귀를 보고 그리 말한 후, 이번엔 백호를 바라본다.

“이만 가자.”

입을 다문 명월은 웃었지만, 그 얼굴을 바라보는 백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다문 백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백호가 먼저 명월을 향해 걸어간다. 그걸 보고만 있던 독각귀도 뒤를 따랐다. 명월은 허리를 굽혀선 무릎에 묻어 있는 흙을 털어 내다가 옆으로 다가와 서는 백호를 올려다봤다.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다시 한 번 더 웃기는 하는데 그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자연스럽게 굳어 버리는 백호의 얼굴을 본 명월이 물었다.

“얼굴이 왜 그래. 이상하잖아.”

“너―.”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열던 백호나 곧 다문다. 그러곤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에 명월의 미소가 한결 짙어진다.

백호에게서 시선을 뗀 명월이 다음으로 바라본 건 독각귀였다.

네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그는 차분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바라만 보던 명월은 그에게로 걸어갔다.

독각귀 앞에 선 명월은 침착하게 물었다.

“그는 계속 저렇게 있어야 하는 겁니까?”

『계속 자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명월의 물음에 독각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자리에 누워만 있는 ‘그’를 바라봤다. 평온한 얼굴로 있다가도 잠든 이를 바라보는 독각귀의 눈동자 안쪽으로 아픔이 서린다.

『죽어서 흙이 되어 사라지는 걸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를 이리 묶어 두는 건 그저 내 욕심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독각귀의 말에 명월의 입꼬리가 차분하게 올라간다.

아니. 그건 아니다.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런 식으로 말을 해 주고 싶었으나, 입이 열리지 않는다. 명월은 독각귀를 바라만 봤다.

이제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이 자리에 마냥 있을 순 없었다. 머무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조금 전처럼 이상한 것들이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고, 마음만 무거워질 거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명월은 양손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가 있어 지금 본인이 느끼는 긴장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한숨을 쉰 후, 재차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내 아버지인……거지요?”

익히 알고 있는 부분이지만, 확인을 하려는 듯 묻는 말에 독각귀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나서야 명월의 표정이 풀린다. 그러곤 명월은 앞으로 다가가 팔을 벌리곤 독각귀의 몸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포옹을 했을 때, 상대의 몸으로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아마도 자신이 이런 식으로 행동할 걸 예상치 못한 것일 거다. 그래도 명월은 더 세게 그를 끌어안아, 그의 느낌을 기억하려 했다.

아직은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느낌으로 전달되는 게 있었다.

독각귀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가 든 명월은 떨어지려 했다. 그때 어색하게 올라온 독각귀의 두 팔이 명월의 등에 둘러진다.

그 조심스러운 손길에 명월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굳은 채로 가만히 있는 동안, 독각귀의 손이 느리게 명월의 등을 토닥였다. 두어 번 문지르다가 그 손이 떨어지면서 나직한 속삭임이 들렸다.

미안하다, 라는 속삭임이 말이다.

“…….”

그 순간 명월의 표정이 더 굳어진다. 화가 난 듯 인상을 쓰듯 미간이 좁혀지는 명월이었지만, 당장 그 앞에 대고 무슨 말을 하진 않았다. 잠자코 있던 그는 고개를 숙인 채로 독각귀에게서 떨어졌다.

가벼운 포옹이 있긴 했지만, 그게 둘 사이에 존재하는 낮은 담을 무너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처음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색한 상대였다. 낯선 존재였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당신은 이곳에서―.”

『선하고 함께 있을 거다.』

“……그렇겠지요.”

잠이 든 그의 곁에 계속 머물러 있을 터였다. 영원히 눈을 뜨지 않을 저 사람을 바라보고만 있겠지. 그런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것뿐인데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 이런 건 싫다. 그런 생각에 명월은 바로 몸을 돌렸다. 백호에게 이만 가자는 말을 재차 전달하려는데 하얀 무언가가 ‘그’의 몸 위에 덮어진다.

처음에는 그게 뭔지 몰라서 움찔했던 명월은 금방 하얀 것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건 백호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쓰고 다니면 하얀 호랑이 가죽이었다.

지금 그걸 ‘그’의 몸 위에 덮어 준 거였다.

“……백호?”

너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야? ‘그’의 몸 위에 그걸 내려놓다니. ‘그’를 그런 걸 보관할 용도로 사용해선 안 돼.

이상한 짓은 왜 하느냐고 타박하는 눈빛을 던지는 명월을 두고 백호가 먼저 바깥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자. 더 늦어지면 곤란해지니까.”

호랑이 가죽을 벗어 두고 혼자 가 버리는 백호의 행동에 명월은 당황했다.

단순히 벗어 둔 게 아니라, 저걸 저대로 두고 여길 뜰 셈이었던가.

그가 왜 그런 행동을 취하는지 모르겠다. 굳이 그리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해 줄 셈으로 명월은 급히 백호에게 달려갔다.

그의 팔을 붙잡곤 한마디 하려 했을 때, 백호가 담담히 말했다.

“괜찮아. 저런 거 없어도 난 약해지지 않고, 저게 슬슬 거치적거리던 참이었어. 빠르게 움직이고 싶어도 저게 벗겨질까 봐 항상 속도 조절을 하곤 했지. 너한테 보관을 잘하라는 말도 들었겠다, 여기에 두고 가면 되지. 이상한 것들이 접근을 할 수도 없고, 출입하는 이는 한정되어 있으니 더럽혀질 일도 없을 거 아니야. 뒀다가, 나중에 필요 없어지면 그때 다시 들고 오면 돼.”

“…….”

“왜 그런 얼굴이야? 내가 하는 말 못 들었어? 더 늦어지면 곤란하다니까?”

계속해서 올려다보는 명월의 시선이 머쓱했던 모양이다. 감정 표현이 서툰 사내들이 으레 그러듯, 백호는 화가 난 사람처럼 인상을 쓰면서 ‘시간이 없다고.’라며 투덜댔다.

명월은 그런 백호의 손목을 붙잡았다.

저 호랑이 가죽에 아무런 힘도 없을 거라곤 생각하진 않는다. 백호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분명 어떤 식으로든지 힘이 깃든 영험한 것일 테지.

그런 걸 저렇게 버려 두고 가면서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라는 척을 하는 건 전부 자신 때문일 거다.

‘그’는 저런 상태고, 저리 만들기 위해서 독각귀의 힘은 많이 빠진 채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백호이기에, 그걸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도움을 주고도 아닌 척을 하는 거다.

참 서툰 성격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가 아니라면 명월도 그의 호의를 제대로 받아들여 줄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면서 명월은 중얼거렸다.

“고마워.”

백호의 눈이 가늘게 떠지고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지금까지 명월에게서 들은 고맙다는 말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백호의 손목을 잡고 있는 명월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 매달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걸 확인 후, 백호는 똑같은 장소에 서 있는 독각귀에게 시선을 던졌다.

“지금부터 돌아간다. 내가 알아서 잘 데리고 갈 테니까 쫓아 나올 필요는 없다. 쓸모없는 네놈은 그냥 거기에 있기나 해.”

그러곤 재차 소매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그걸 던진다.

주머니를 독각귀가 받은 걸 확인 후 백호는 턱을 올렸다.

“나한텐 많은 거니까 하나 주겠어. 쓰든지 버리든지 네 마음대로 해라.”

독각귀는 제 손에 들린 작은 주머니를 오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별다른 대꾸 없이 그저 손에 들린 걸 보기만 하는 걸 확인 후 백호는 눈을 내리떴다.

명월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지금 명월이 고개를 숙이면서 우울해할 필요는 없는 건데. 백호는 명월 쪽으로 고개를 숙이곤 나직이 물었다.

“이제 여길 떠날 거다. 인사는 해야지.”

“……조금 전에 했으니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백호의 눈가로 씁쓸함이 걸린다. 그래, 라고 짤막하게 대꾸한 백호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괴수의 출몰로 엉망이 되어 버린, 풀로 만들어진 출구로 먼저 들어간다. 명월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그 뒤를 졸졸 따랐다.

들어올 때에는 열 걸음 정도 걸렸던 것 같은데, 왜 나갈 때에는 그보다 많은 시간이 드는 것 같은지 모르겠다.

백호의 손목을 꼬옥 쥔 채로 명월은 부지런히 걸어갔다. 그곳을 빠져나와서도 뒤돌아보는 일 없이 앞만 볼 따름이었다. 그러는 동안 백호는 별말이 없었다.

너 정말로 뒤를 안 돌아봐도 되는 거냐. 그러다가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런 말을 하는 건 백호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그’와 만났다. 하지만 잠이 든 ‘그’의 얼굴을 본 것뿐이었다. 그런 상태로 있는 걸 보고 ‘그’가 살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조금도 변치 않은 그 모습에 반가움이 들기도 했지만 아니었다. 혼자 옆에 앉아서 ‘그’의 얼굴을 보는 내내 머릿속이 멍했다.

이게 뭘까. 그는 왜 이런 상태로 있는 걸까. 이리되는 걸 그가 정말로 원한 일일까. 이런 모습을 자신에게 보인다면, 내가 정말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이것 말고도 다른 방법은 없었던 걸까.

마음이 술렁거리고 괴롭다. 안 좋은 생각이 계속해서 들면서 가슴이 답답해진 명월은 결국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자신이 빠져나온 곳 앞에 서 있는 독각귀를 봤다.

“…….”

떠나는 자신을 배웅 나온 듯, 가만히 서 있던 그는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천천히 손을 들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손을 흔들다가 이윽고 가볍게 바깥으로 뻗는다.

괜찮으니 가라. 그리 말하는 듯 말이다.

그 순간 꿈속에서 봤던 나무 아래에서 자라난 작은 꽃이 떠올랐다. 계절이 흘러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피어 있던 꽃이었다. ‘그’ 는 그걸 혼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했다.

언제나 찾아갈 때마다 변치 않은 똑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그 존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었을 거다.

그것과 같은 것일까.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갈 때마다 볼 수 있었다. 적어도 손을 만지고 얼굴을 쓰다듬을 수 있는 거였다.

저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관계가 있는 거였다.

그러니만큼 너무 마음 아파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들의 모습을 두고 섣부른 판단을 내려선 안 되는 걸까. 그런 모습이라 할지라도, 한번 자신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그’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었던 걸까.

계속해서 뒤를 돌아본 채로 걸음을 옮기는 명월의 두고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독각귀가 재차 앞으로 손을 뻗는 것에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물곤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보이는 건 백호의 널찍한 등이었다. 백호는 거의 매달리다시피해서 따르는 자신에게 뭐라 한마디 하지 않은 채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무뚝뚝하다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그 모습에 안심이 된다. 명월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백호의 뒤만 졸졸 따랐다.

처음에는 명월이 백호의 손목을 잡고 따라갔지만, 어느 순간 백호가 명월의 손을 잡게 되었다.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명월의 손을 꼬옥 쥔 채로 한참을 걸어가다 이제 슬슬 말을 걸어도 괜찮겠지 싶어서 고개를 돌렸다.

실은 계속 뒤를 돌아보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본 명월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던 백호는 조심스레 물었다.

“다리 아프냐?”

명월은 고개를 저었다.

“업어 줄까?”

이번에도 역시나 고개를 젓는다.

묻는 말에 전부 다 고개를 젓긴 하지만, 말을 무시하지 않고 반응을 취하는 게 어딘가 싶었던 백호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고개는 뒤로 돌아간 채였다. 명월의 얼굴을 봤더니 시선을 뗄 수가 없다. 그러다가 결국 앞에 있던 돌멩이에 다리가 걸려서 비틀거린 백호는 당황해선 앞을 똑바로 봤다.

아니. 왜 이런 곳에 돌멩이가 있어서 창피한 모습을 보이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민망하면서도 짜증이 났던 백호는 혀를 찼다. 그러곤 돌아갈 길을 찾으려 주변을 둘러봤다.

원래 이런 곳은 들어오는 게 어려울 뿐이지 나가는 건 문제될 게 없었다. 가만히 있다가 힘이 이지러지는 부분을 찾아서 그리로 들어가면 된다.

꽤 많이 걸었고, 주변으로 이상한 기척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여기라면 가만히 서 있어도 되겠다 싶었던 백호는 걸음을 멈추곤 한숨을 쉬었다.

“일단 여기서 기다려 보자.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명월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면 다시 활기차질 터였다. 그쪽에 명월이 벌려놓은 일들이 있음이 이렇게나 다행스럽게 여겨질 줄은 몰랐다. 그런 게 없었다면 자신이 무슨 일이라도 만들어서 그 품에 안겨 줬어야 할 판이었다.

그것도 돌아가고 나서 생각할 문제였다. 돌아가는 것에만 집중하자 싶었을 때 왼쪽에서 미묘하게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그 순간 눈을 번득인 백호는 명월을 돌아보면서 가자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명월은 왼팔로 제 눈을 누르고 있었다. 눈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백호가 바라보고 있음이 느껴진 걸지도 모른다.

팔로 얼굴을 비비면서 “뭔가가 들어갔어.”라고 웅얼거린다. 목소리는 너무 작고 발음도 불명확했다. 그래서 지금 명월이 어떤 상태인지 알 것 같았다.

명월을 내려다보는 백호의 표정은 굳은 채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리 말하고픈 얼굴로 명월을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손을 올렸다.

그러자 주춤거린 명월이 한발 물러서면서 “눈에 뭐가 들어간 거라니까.”라고 재차 말했다. 그 목소리가 아까보다 훨씬 더 엉망진창으로 들린다.

백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는다. 답답한 마음을 풀길 없었던 그는 당장 명월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처음에는 당황해하며 백호를 어떻게든 밀어내려 했던 명월이나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나 백호를 밀어내길 반복하던 명월은 끝까지 밀어붙이듯 끌어안는 대단한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작정하고 달려드는 백호를 떨어뜨릴 수 없었다. 그냥 이렇게 안겨 있는 것밖엔 수가 없었다.

간신히 그걸 깨닫게 된 명월은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위로 손을 들었다. 백호의 등에 양손을 댄 채로 그의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그러자 백호는 제 가슴 쪽이 뜨거운 무언가로 축축하게 젖어가는 걸 느끼곤 안색을 굳혔다.

아, 싫다. 이런 건 정말 싫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백호다.

다른 건 아무래도 좋지만, 명월이 이러는 건 싫었다. 왜냐하면 마음이 아프니까.

아까부터 날카로운 무언가가 쿡쿡 찔러대는 것 같더니만 지금은 유독 더 심해진다.

명월을 품을 때, 그가 우는 걸 보는 건 좋았지만, 이런 식으로 얼굴을 감추고 목소리를 죽이며 흐느끼는 소리는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았다.

들리니 못 들은 척할 수도 없고, 울고 있는데 안 달래 줄 수도 없었다. 계속해서 날카로운 게 심장을 찔러 대서 이제는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불편한 표정을 하면서도 백호는 명월을 끌어안은 팔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 * *

병방이 시키는 일이 있어서 뒷정리를 하고 돌아오는 내내 포졸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해댔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하품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닌데, 오늘따라 유난히 많이 나온다.

전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으니 그게 당연한 일일 거다.

연거푸 하품을 하던 포졸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앞을 봤을 때, 그곳에 서 있는 사또 명월을 발견하곤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잘못한 일이라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책잡힐 수도 있었기에 포졸은 무척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포졸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조용히 그 앞을 지나쳐 갔다. 그런데 바로 앞을 지나가는데도 명월은 쳐다만 볼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상하다 싶었던 포졸은 명월의 앞을 지나칠 무렵에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펴봤다.

그 순간 시선이 부딪쳤고, 바로 명월이 눈을 가늘게 휘며 미소를 지었다.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포졸의 심장이 강하게 뛴다.

사또의 미모가 대단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저리 웃으니 심장이 떨린다.

여인이라면 한눈에 반했겠다면서 포졸은 얼굴을 붉힌 채로 서둘러 앞을 지나쳐 갔다.

그렇게 포졸 하나가 가 버리자 바로 명월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지워진다.

무표정한 얼굴이 된 명월은 눈동자를 들어선 허공을 바라봤다.

파란 하늘을 물끄러미 보던 그는 혀를 내밀어 입술 주변을 사악 핥고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등 뒤에 서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등 뒤에 서 있는 걸 알고 있는데 묘하게 조용했다. 결국 명월이 먼저 고개를 돌려 이방을 쳐다봤다. 머뭇거리던 이방은 명월이 뒤를 돌아보자 바로 입을 열었다.

“사또, 조금 전엔 동헌에 계셨으면서 언제 또 이리로 나오셨습니까.”

동헌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이런 외진 곳에 홀로 서 있다. 원래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긴 했지만, 여긴 정말 뜬금없었다.

주변에 사람도 없고, 명월이 관심을 가질 만한 것도 없었다. 거기다 지금은 명월이 따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전이라면 명월이 먼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말을 꺼냈을 텐데, 이방은 그러지 못했다.

왜인지 오늘 명월은 무척 조용했다. 지금도 내려다보기만 할 뿐,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사또?”

말없이 보고만 있는 모양이 이상해서 조심스레 부르자 명월의 눈이 가늘게 휘어진다.

환하게 웃나 싶던 명월은 바로 몸을 돌려 이방 앞에 섰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곤 이방을 지나쳐 가 버렸다.

별말 없이 옆을 지나쳐 가 버리는 명월의 행동에 이방은 벙 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느리게 눈을 끔벅거리다 급히 뒤를 살폈다. 뒷짐을 진 명월이 느릿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고, 이방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나 오늘의 명월은 이상했다. 날이 밝아서 관아로 돌아가야 할 때에도 한참 동안 불러도 대답이 없었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던 이방은 무례를 무릅쓰고 천막으로 들어갔고, 안쪽에 다소곳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명월을 발견했다.

일찍 일어나 단장한 듯, 조금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앉아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명월을 봤을 때에도 약간의 이질감을 느끼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명월이 워낙에 대답을 하지 않아 그게 걱정되었는데, 천막 안에 무사히 있는 모습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던 거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사안으로 포졸을 데리고 외부 훈련을 나온 명월이었다.

포졸들은 거의 밤을 새워서 훈련을 하거나 쉬는 시간에는 돼지고기를 먹거나 했다. 시간이 늦어진 후에는 너무 큰 소리를 내면 안 될 것 같아 그들에게 목소리를 낮추라 하기도 했었다.

이방이 그리하는 동안 명월은 단 한 번도 천막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한 번 정도 나와서 둘러볼 만도 했건만, 천막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설마하니 그 시끄러운 상황에서 자는 건가도 싶었으나, 최근 명월이 주로 굳은 얼굴로 있었다는 걸 상기한 이방은 천막을 찾아가 명월을 성가시게 굴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후회가 된다.

낮에도 이방이 ‘훈련을 계속할까요, 아니면 이제 돌아갈까요?’라고 묻는 말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명월은 이방을 빤히 보더니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곤 제 것이 아닌 다른 말에 훌쩍 올라타 혼자서 그곳을 빠져나갔다.

다른 이들은 아직 주변 정리를 하지 못했고, 언덕 건너편에서 이병현 대감이 어찌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보지 못했다.

애초에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가 이병현 대감의 제사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런 걸 생각하며 이방은 다급히 명월을 불러 세우려 했지만, 그는 이미 저 멀리 사라져 버린 참이었다.

명월이 혼자 가 버리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이방은 다급히 주변에 있던 포졸들에게 짐을 챙기라 했다.

이방이 부랴부랴 관아로 돌아왔을 때, 명월은 동헌 의자에 바르게 앉아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낮잠을 자나 싶어서 바로 말을 건넬 수 없었다. 그런데 명월은 너무 오랜 시간을 그 자세로 있었다.

이방은 몇 번이나 명월을 흘겨봤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던 명월과 시선이 부딪치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명월은 바로 눈을 감고는 자는 척을 했다.

“……뭔가 이상해.”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상했다. 지금 관아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게 진짜 명월이 아닌 것 같은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

그 순간 차가운 무언가가 등을 타고 내려가는 걸 느끼며 이방은 안색을 굳혔다.

설마 아니겠지. 그런 일이 벌어져선 안 되었다. 만약 저것이 진짜 명월이 아니라면―.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이방은 재차 명월이 걸어간 방향을 살폈다.

* * *

눈만 움직여서 주변을 살피던 명월은 커다란 나무 아래에 똑바로 섰다. 그늘 아래에 서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기 어려울 터였다.

명월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재차 혀를 내밀어 입술 주변을 사악, 하고 핥았다.

그때 한 여인이 커다란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나타났다.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자 명월의 어깨로 바로 힘이 들어간다.

긴장한 듯,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는 명월이었으나 여인은 그런 그를 한번 보곤 인사를 하나 싶더니 바로 앞을 지나쳐 가 버렸다.

말을 걸면 성가셨을 텐데, 인사만 하고 가 버린다. 잘 되었다 싶었던 명월은 일부러 더 나무 쪽으로 등을 기대었다.

그러고 있는 동안 몇몇 이들이 더 나타났고, 명월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다가도 급히 인사를 하며 조용히 앞에서 사라졌다. 아까처럼 성가시게 말을 건네는 자들이 없었다.

자리를 잘 잡았다면서 명월은 더욱 만족스러워졌다.

그늘 아래에 들어가 있으니 볕이 따가운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있어도 덥지 않다면서 명월의 입술 양 꼬리가 위로 올라간다.

“그곳에서 무얼 하는 것이더냐.”

이곳에 서 있는 동안 그에게 말을 건네는 이들은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말을 건네도 그것이 자신에게 향해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눈을 감고 기분 좋게 서 있던 명월은 앞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막힌 걸 느끼곤 눈을 떴다.

그곳에 서 있는 유일선 영감을 본 명월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겉으로 보기엔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표정이었기에, 그걸 확인한 유일선 영감의 표정 또한 경직되었다. 그러자 바로 명월의 표정이 풀렸고, 그의 눈동자가 옆으로 슬그머니 움직였다.

얼굴을 보자마자 안색을 굳히더니 이번에는 시선을 피한다.

노골적이라 할 만큼 자신을 피하려 드는 명월의 행동에 유일선 영감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식으로 방을 나가선 한 번도 날 보러 오지 않더구나. 그저 복운을 보내선 내가 언제 여길 떠날 것인지를 물었지. 분명 오늘 당장 내가 떠나길 원하겠지만, 그리할 수가 없구나. 내가 이곳으로 온 이유는―.”

말을 하다 말고 유일선 영감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그의 얼굴 위로 어둠이 가라앉고, 움켜쥔 양손으로 힘이 들어간다. 고뇌가 짙은 표정을 하고 있던 영감은 입을 열었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갑자기 찾아온 내 잘못이 크긴 하다. 넌 다 큰 어른이고, 네가 해야 할 몫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이 성가신 간섭 정도로 여겨질 거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은…….”

“―저기요.”

쉽게 꺼낼 수 없던 말을 어렵사리 이어 나가고 있었던 유일선 영감은 그걸 방해라도 하려는 듯 중간에서 끼어드는 목소리에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온 건지 바로 곁에 계진이 서 있었다. 계진은 유일선 영감이 저를 내려다보자 기다렸다는 듯 뒤를 가리켰다.

“누가 찾아요. 저쪽에서요.”

누가 자신을 찾는단 말인가. 그보단 지금은 명월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입을 다문 유일선 영감은 완고한 사대부 그 자체였다.

도성에 있었을 때 그가 저런 표정을 지으면 다들 알아서 물러나거나 했다.

하지만 계진은 그게 아니었다. 계속해서 뒤를 가리킨 채로 영감을 올려다봤다.

지금 내가 이리 말하잖아요. 어서 가 봐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 같은 눈빛과 표정을 보고도 순순히 물러설 생각이 없었던 유일선 대감은 명월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여전히 눈을 다른 쪽으로 옮긴 채로 굳은 표정을 짓고 서 있는 걸 보곤 안색이 굳어진다.

명월의 태도가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던 그는 움켜쥔 손에 힘을 주고는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대로 계진이 가리키는 쪽으로 걸어가는 그 뒷모습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유일선 영감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난 후 계진은 명월을 올려다봤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계진의 시선이 느껴질 만도 한데, 명월은 계속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척이었다.

계진은 한숨을 쉬고는 그런 명월의 손을 붙잡았다. 손이 닿는 순간 바로 명월의 어깨로 힘이 들어간다.

본능적으로 손을 빼서 피하려 하는 것에 계진은 그러지 말라며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명월을 잡아당겨선 안쪽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버티고 움직이려 하지 않던 명월이지만, 계속해서 끌어당기는 손길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게 되었다.

그렇게 명월을 데리고 백호가 임시적으로 머무는 방 쪽으로 간 계진은 좁은 마루에 엉덩이를 대고 걸터앉았다.

“옆에 앉아.”

자연스러운 하대에 명월의 눈썹이 올라간다. 그 시선에도 계진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재차 소매를 끌어당겼다.

처음에는 버티듯이 가만히 서 있던 명월이지만, 연거푸 끌어당기는 손길에 어쩔 수 없이 마루에 엉덩이를 붙였다.

계진은 마루 한쪽에 둔 바구니를 앞으로 끌어당겨 거기서 감자를 하나 꺼내 명월에게 내밀었다.

“자, 먹어.”

명월은 내밀어진 감자를 내려다봤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게 무색해지게 계진이 그 손안에 감자를 쥐여 준다.

명월은 뜨끈한 감자를 쥔 채로 있다가 다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놓칠 수 없다는 양 계진은 바로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먹으면서 여기에 있어. 안 그러면 들킨다?”

아래로 당기면서 하는 말에 명월의 눈썹이 살며시 올라간다.

너 뭔가를 알고 있는 거냐. 그리 묻는 듯 바라보는 눈빛에 계진의 입술 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아까 나무에 붙어 서 있을 때, 엉덩이 쪽에서 튀어나온 하얀 꼬리를 봤어.”

“…….”

명월은 조용히 뒤로 고개를 돌려 제 엉덩이를 살폈다. 지금은 꼬리가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 전에 너무 방심하고 있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그렇군. 그걸 본 거라면 아니라고 잡아떼는 것도 우습겠구나. 그리 생각한 명월은 자리에 다시 앉아선 손에 들려 있는 감자를 한입 깨물었다. 부드럽고 고소하니 맛있었다.

냠냠거리면서 맛있게 감자를 먹는 명월을 올려다보던 계진도 감자에 입을 댔다.

“나비야. 우리 사또는 무사하신 거겠지?”

넌지시 건넨 말에 명월은 감자를 먹다 말고 행동을 멈추었다.

허공을 바라보듯 위로 눈동자를 드나 싶던 명월은 입을 열었고, 그 사이로 냥―하는 가느다란 고양이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걸 들은 계진은 놀라 새삼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너 사람 소리는 못 내는 거로구나.”

그것에 명월은 재차 냥―하는 소리를 냈다.

겉모습은 명월인데 내는 소리는 고양이 울음이다. 그 차이가 대단하게 느껴진 계진은 양손으로 감자를 감싼 채로 중얼거렸다.

“굉장하다.”

그 말을 들으면서 명월, 나비는 감자를 한입에 털어 넣고, 부스러기가 남은 곳에 혀를 대곤 샅샅이 핥았다. 계진은 아차 싶어서 다른 감자를 꺼내 내밀었다.

그렇게 사이좋게 감자를 먹고 있는데 누군가 이리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허둥지둥 뛰어오는 게 누군지 알 것 같다.

계진은 바깥쪽으로 얼굴을 내밀었고, 저 멀리서 달려오는 복운을 발견하곤 아차 싶었다.

복운이 명월을 보면 분명 말을 걸 거다. 명월이 조용히 있으면 그게 이상해서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수 있었다. 그 전에 명월이 다른 곳에 가 있게 해야만 했다. 계진은 명월의 팔을 잡아서 그의 몸을 뒤로 밀어냈다.

다른 곳으로 가 있으라 하려는 순간 이리로 달려오던 복운이 갑자기 멈춘다.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 채로 바라보는 것에 계진은 바로 아래로 내려왔다.

“아니. 그러니까―.”

“사또? 언제 여기에 와 계셨던 겁니까?”

복운의 물음에 명월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에는 감자 하나를 든 채로 복운을 보는데, 그의 얼굴로 혼란이 가득했다.

돌아온 모양이로군. 그걸 깨달은 명월은 감자를 계진에게 건네곤 복운에게로 걸어갔다.

갑자기 복운에게 가는 명월의 행동에 계진은 당황했다. 그러다가 들키는데. 위험한데.

말리기 위해서 앞으로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명월이 복운 앞에 멈추어 섰다.

“조, 조금 전에 스님과 함께 들어오시는 걸 봤는데 언제 여기에 와 계셨던 겁니까. 그런데 모습이 조금 달라지신 것 같은데…….”

웅얼거리던 복운은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깨닫게 된 거다.

분명히 명월은 조금 전 외문으로 들어왔고, 그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낮에 멀쩡한 모습으로 동헌에 나와 있었던 걸 본 것 같은데, 짧은 순간 왜 그런 꼴이 된 거냐고 물으려던 찰나 명월이 바로 말했다.

“스님이 갈아입으실 옷을 준비하거라.”

주변에서 하나같이 놀란 얼굴로 어찌 된 상황인지를 묻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성가신 일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일을 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긴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따르지 않을 수 없어서 지금 이곳에 온 거였다. 그런데 여기서 멀쩡한 모습의 명월과 마주하게 되었다.

둘 중 하나는 분명 가짜였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가짜인 건가 싶어 복운이 크게 입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명월이 손을 들었다. 그대로 세게 복운의 이마를 내리쳤다.

찰싹, 하고 시원한 타격음과 동시에 복운이 억, 하고 신음을 토해 냈다.

갑작스러운 일격이 꽤나 아팠다. 눈물이 찔끔 난 복운은 제 이마를 한 손으로 누른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앞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곤 바로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계진이 양손으로 입을 막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서 있었다.

왜 저런 얼굴로 자신을 보는지 모르겠다. 그보다 이마가 왜 이렇게 얼얼한 걸까.

이상하다며 연신 이마를 문지르던 복운은 발아래에서 들리는 야옹―하는 울음소리에 움찔해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나비를 발견하곤 입을 벌렸다.

뭔가 좀 이상했다. 머릿속이 검게 변했다가 다시 맑아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보다 왜 이렇게 이마가 얼얼한지 모르겠다.

명월의 명을 듣고 급하게 움직이다가 어딘가에서 부딪친 걸까.

“아, 맞다.”

그제야 복운은 자신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를 떠올렸다.

그 스님의 옷을 챙겨 가기 위해서였다. 기억에 혼선이 오긴 했지만, 명월이 시킨 일에 대해선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면서 복운은 서둘러 백호의 임시 방으로 들어갔다.

복운이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계진은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여전히 한곳에 앉아서 제 앞발을 핥고 있는 나비를 봤다.

계진은 나비가 순식간에 변하는 걸 봤다. 사또였다가 고양이가 되어 버렸다.

계진은 나비 옆으로 다가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내려다봤다.

“너 정말 대단한 아이였구나.”

감탄 서린 중얼거림에 나비는 그런 계진을 올려다봤다.

반쯤 감긴 눈이 웃는 것처럼 보였다.

* * *

여기저기 찜찜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당장 씻고 옷을 갈아입고 싶었지만, 그 전에 들어야 할 말이 있었다.

명월은 급한 대로 젖은 천으로 얼굴과 손을 닦아 내면서 대청 아래에 서 있는 이방을 쳐다봤다.

왜 저런 얼굴인지 모르진 않았다. 이리로 오는 동안 백호에게 대략 이야기를 들었다.

도저히 시간에 맞춰서 자신을 데리고 올 수 없을 것 같아서 자신처럼 보이는 걸 따로 준비했다 했다.

그 존재가 지금 대충 일을 수습하고 포졸들을 데리고 다시 관아로 돌아온 거였다.

하지만 자신이 돌아왔으니 흉내를 내던 놈은 사라졌을 터였다. ‘네 모습이 될 순 있어도 말 같은 건 못할 테니까―.’라고 백호가 덧붙인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만큼 명월은 젖은 수건을 옆에 내려놓고 이방에게 손짓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명월이 가까이 오라 손짓하는 것에도 이방은 선뜻 그리로 갈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묘한 행동을 취하던 사또가 이상하다 생각하던 참이었다.

내심으론 사또가 귀신에게 홀리거나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그 흉내를 내는 게 아닐까 싶어 초조한 상태였다.

정말 그런 거라면 신중하게 알아봐야 했기에 어떤 식으로 물어보는 게 나을까, 하고 생각하던 찰나 명월이 다시 나타났다.

전립은 없고, 구군복은 정리가 되지 않아 흐트러진 채였다. 거기다 흙이나 나뭇잎 같은 것도 묻어 있었다.

산속을 헤매다가 막 돌아온 모습으로 나타나선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더니 지금은 동헌 의자에 앉아서 가까이 오라 한다.

지금까지 명월을 옆에서 봐 온 게 있었던 만큼, 말없이 있던 쪽보단 이쪽이 더 사또 같긴 했다. 그래도 혹 모르는 일인지라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이방을 두고 명월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나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않아도 된다.”

그 말에 이방의 눈썹이 살며시 올라간다. 지금 하는 말의 억양으로 보아하니, 눈앞에 있는 존재가 진짜 사또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혹 모르는 일인지라 이방은 슬그머니 대청으로 올라가면서 물었다.

“그러면 사또께서 들어오시기 전까지 제가 봤던 존재는 대체 뭡니까?”

“가짜였지. 시간에 맞춰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으니 가짜를 세워 뒀다.”

“……그렇게 닮았는데 가짜였단 말입니까?”

그보다 그런 가짜를 어디서 데리고 온 거란 말인가. 아니. 어쩌면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궁금했지만 무서워서 물을 수 없었던 이방은 입을 다물었고, 명월은 재차 손짓을 했다.

“일단 더 가까이 오게. 물어볼 게 많으니까.”

이렇게까지 듣고 보니 지금 보이는 존재는 명월임이 분명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방은 명월의 곁으로 다가서선 새삼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이방이 마지막으로 명월을 본 건 천막 안에서였다. 그곳에서 계속 나오지 않는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그건 내가 무사히 돌아온 걸로 대답이 되는 게 아니던가. 그보단 이병현 대감 쪽은 어찌 되었는가?”

“그것이, 낮에 그쪽을 감시하라 보낸 포졸이 돌아오지 않아 살펴보러 갔더니 다들 엎드려 자고 있지 뭡니까? 하나도 아니고, 그리로 보낸 놈들이 죄다 곯아떨어져서 안 그래도 제가 한 소리 한 참입니다.”

“…….”

“급한 대로 제가 그리로 가서 반대편을 살펴봤는데 정리가 싹 되어 있었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도, 물건도 없었습니다. 그저 제사상이 차려진 곳 위로 붉은 얼룩 같은 게 보이긴 했던 것 같지만……느낌 탓이겠지요. 그냥 좀 흙이 진한 색이이었던 거겠지요.”

“아무도 없었단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방이 볼 때 그곳에 남아 있는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딱히 보고해야겠다고 여겨진 이상한 부분도 없었다.

하지만 차분하게 되묻는 명월을 보자니 조금 더 제대로 주변을 살펴봤어야 했던가 싶기도 했다.

절로 표정이 굳어지는 이방을 두고 명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됐다.”

됐다고는 하나 명월의 표정은 개운치가 않았다. 굳어 있으니 그 옆에서 바로 떨어질 수도 없었던 이방은 누군가 옆으로 다가오는 기척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백호가 서 있었다.

분명 스님 차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위압감이 드는 사내다. 그 앞에 서면 괜히 기가 죽는 걸 느끼며 이방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이방이 가 버리고 난 후, 백호는 명월의 바로 옆에 앉았다.

의자에 앉아 있는 명월과 달리, 바닥에 양반다리를 한 채로 앉은 백호는 보기에 이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둘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이다.

명월은 재차 젖은 수건을 들어선 손가락을 하나하나 닦아 냈다. 그러곤 그걸로 눈을 대고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이방하고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자신의 눈이 어떻게 보이는가 싶어서 그게 엄청나게 신경 쓰였다. 지금도 퉁퉁 부은 채인 건 아니겠지. 좀 열을 가라앉힌 후에 오긴 했는데―.

“일단은 씻고 쉬어라.”

젖은 수건으로 눈을 누르고 있던 명월의 손이 움찔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뒤처리는 그녀가 알아서 할 거다.”

“…….”

명월은 수건에 얼굴을 묻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무언가 말을 하면 대꾸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백호도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지금은,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아무래도 좋은 상태일지도 모른다. 지금 명월은 제 일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할 거다.

그걸 알기 때문에 백호는 잠자코 있었고, 명월도 꽤 오랫동안 젖은 수건에 얼굴을 묻고만 있었다.

* * *

밖으로 나온 점심상은 그대로였다. 손 하나 대지 않은 음식을 살피는 복운은 안색을 굳힌 채로 있다가 닫힌 문을 보곤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유일선 영감이 있을 저 방문을 열고 아무것도 안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건 대단히 주제넘는 짓일 터였다.

손도 대지 않은 상이 나오든, 아니든 간에 그걸 들고 가서 치우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아, 어렵구나. 그리 생각하면서 복운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대문 바깥에 서 있는 명월을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복운은 들고 있던 상을 내려놓곤 냉큼 명월 앞으로 달려갔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묻는 말에 대해선 대답하지 않고 명월은 대청 위에 올려진 상을 살필 따름이었다.

딱 봐도 제대로 먹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히자 복운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입맛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운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런 어설픈 변명을 명월이 믿을지가 관건이었지만 말이다. 이럴 땐 그냥 말을 돌리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어딜 가시는 길이십니까?”

“잠시 바깥에 나갔다 올 셈이다.”

“야외 훈련을 하고 바로 돌아오신 참이 아니십니까? 쉬시지―.”

“낮에 잠깐 눈을 붙였더니 많이 나아졌다. 걱정해 줘서 고맙다.”

“…….”

느낌 탓인지 모르겠지만, 명월의 분위기가 변한 것 같았다. 시종 차분한 모습으로 대꾸하는 것에 복운도 달리 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가만히 서서 제 뒷머리를 긁적이는 복운을 두고 명월은 몸을 돌렸다. 그렇게 가 버리는 모습에 복운이 “사또―.” 하고 명월을 불렀다.

“일찍 들어오십시오. 저녁에 좋아하시는 동태전을 해드리겠습니다.”

“네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다 시켜서 나오는 음식이니 무리하지 마라. 이런 산동네에서 동태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하느냐.”

타박하는 것도 평소의 명월이었다. 주인어른 때문에 사이가 서먹해지나 싶었는데 다시 예전처럼 돌아간 것 같아서 기뻤다. 표정이 환해진 복운은 씩씩하게 말했다.

“그러면 있는 걸로 알아서 맛있는 걸 준비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명월은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그것에 더 환한 미소를 지은 복운은 양팔을 흔들었다.

* * *

관아 밖으로 나온 명월은 주변을 둘러봤다.

관아의 외문을 지키는 포졸이 알아서 인사를 하고, 길을 지나치는 사람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묵례를 한다.

확실히 전과는 다른 반응들이었다. 조금 더 어려워하고 높이 쳐준다고나 할까.

뭐, 애초에 그런 걸 바란 적도 있었지만서도 말이다.

명월은 뒷짐을 진 채로 걸음을 옮겼다. 빠른 걸음을 옮기는 명월의 뒤로 백호가 따라붙는다.

언제나처럼 승복은 입고 머리는 하나로 대충 묶었다.

뭐가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심통 난 얼굴인 그의 입술은 앞으로 반쯤 나와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명월은 앞을 보고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처음에는 눈에 힘을 주고 명월을 바라보던 백호지만,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명월의 모습에 쯧―하고 혀를 찰 뿐이었다. 백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계속 뒤를 쫓았다.

아침에 관아로 돌아올 때에는 머리가 무거웠지만,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떡을 집어 먹었더니 속도 편하고 몸 상태도 괜찮아졌다.

그래서 바로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밖으로 나왔다. 어딘가를 가야겠다는 생각은 딱히 하지 않았다. 그냥 발길이 가는 대로 움직였다.

그렇게 주욱 걸어가다 보니 시장이 나왔고, 거기서 활기찬 얼굴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에겐 간밤에 벌어진 일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그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물건을 사고, 파는 거였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시원하게 웃고, 기분 좋게 그 순간을 누리는 것뿐이었다.

활기찬 그들의 분위기가 전염된 것일까. 명월도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그때 시장 한편에서 어린아이 몇을 보게 되었다.

그 아이들은 엿을 자르는 곳에 앞에 서선 금방이라도 침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두고만 보던 엿장수나, 여간해서 물러나지 않자 성가셔하며 엿을 자르는 가위를 휘둘렀다.

“이것들아. 너희가 붙어 있으면 장사가 안 되잖으냐. 당장 저리로 가지 못하겠느냐.”

엿장수의 말에 한 아이가 용기를 내 말을 꺼냈다.

“아저씨. 거기 구석에 있는 부스러기 좀 주면 안 돼요?”

“부스러기가 어디에 있다고 그래? 이것도 다 모아서 팔 것들이야―.”

“오늘은 날이 안 좋아서 사람이 많이 나오지도 않아요. 어차피 두면 못 팔아서 똥 될 텐데, 그 전에 우리들한테 주면 좋잖아요.”

“아니. 이것들이 장사하는 곳 앞에 와서 더럽게 왜 똥 타령을 하고 난리야―.”

아침부터 장사가 좀 되었다면 아이들의 말도 농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그게 아니니 화가 난다.

엿장수는 아예 가판 앞으로 나와서 아이들을 쫓아내려 했고, 그때 누군가 아이들 뒤로 스윽―하고 나타났다.

“그 엿 전부 다 해서 얼만가?”

아이들을 노려보고 있던 엿장수는 무슨 이상한 놈이 나타난 건가 싶어 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사또 명월을 발견하곤 눈이 크게 떠졌다. 이런 데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니만큼 순간적으로 정말 놀랐다.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경악을 담아 바라보는 엿장수를 두고 명월은 아이들을 내려다봤다.

“너희들은 웬일로 시장에 나와 있는 거냐. 함부로 멀리까지 나오면 어머니께서 걱정하시겠다.”

아이들은 전부 고아였다. 그래서 관아와 다른 곳의 도움으로 운영이 되는 곳에서 지냈다.

얼마 전에 아이들과 만난 이후로는 일이 바빠서 신경 쓰지 못했지만, 그래도 바깥에 나올 때마다 종종 마주치게 되는 것 같았다.

처음엔 엿장수처럼 놀란 얼굴로 있던 아이들은 금방 신이 나선 명월에게 매달렸다.

“사또! 여긴 어쩐 일이세요?!”

“저희 보고 싶어서 오시는 길이세요?”

명월에게 매달리는 아이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진다. 딱 봐도 알 정도로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올려다보는 모습이 귀여웠기에 절로 미소가 생긴다.

명월은 그런 아이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으며 재차 엿장수를 바라봤다.

“거기에 있는 거 절반 정도를 포장해 주게.”

“저, 절반씩이나요? 사또께서 드실 겁니까?”

“아니. 여기에 있는 아이들이 먹을 거네.”

집으로 가면 더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이 며칠 동안 넉넉하게 먹을 양을 한 번에 사 줄 요량이었다.

하지만 엿장수가 보기엔 아이들이 셋뿐인지라 양이 너무 많은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사또에게 대놓고 그런 말을 하기가 뭐했던 그는 시키는 대로 엿을 포장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사또 앞이었기에 괜히 손이 꼬인다. 그러는 동안 가장 어린 아이가 손가락을 문 채로 빤히 바라봐 왔다.

말은 없어도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를 알 수 있었던 사내는 슬그머니 엿 하나를 아이에게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환한 얼굴로 아이가 엿을 받아 들자, 다른 아이들도 손을 뻗어 왔다.

“어? 저도 주세요.”

“저도 주세요. 저도 엿 잘 먹을 수 있어요!”

엿장수는 아이들에게 하나씩 엿을 들려 주었고, 동시에 포장을 했다. 한 번에 절반을 다 팔아 보기는 처음인지라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중간에 찢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몇 겹이나 대마지로 감싸고 끈으로도 단단히 묶어선 명월을 흘깃 봤다.

“얼마인가.”

원래 파는 금액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사또이니만큼 조금 더 싸게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어찌해야 하나 싶어서 망설이는 눈동자로 바라보는 엿장수를 두고 명월은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거기서 열 냥을 꺼내 엿장수에게 내밀었다.

그걸 본 엿장수는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요. 이렇게 비싸지 않습니다요―.”

“받아 두게. 남은 돈은 나중에 이 아이들이 다시 찾아오면 그때 엿으로 주면 되잖은가.”

“……그리해도 괜찮습니까?”

“물론이지.”

명월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받지 않고 버티는 것도 이상했다.

결국 엿장수는 돈을 받고, 포장한 엿을 명월에게 건넸다. 묵직한 엿을 받아 든 명월은 고맙네, 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것에 엿장수는 바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인사를 하면서 연신 감사하다고 말했다.

엿장수를 뒤로하고 명월은 아이들을 데리고 한산한 쪽으로 이동했다.

입에 엿을 하나씩 문 아이들은 행복한 얼굴이었다. 아직 한참이나 더 남은 엿을 서로 비교하면서 ‘네가 더 많이 먹었다. 내가 제일 길다.’ 같은 말을 하는 걸 들으며 명월은 엿 뭉치를 내밀었다.

“자, 들고 갈 수 있겠느냐.”

그러자 가장 큰 아이가 입에 엿을 문 채로 명월이 내미는 걸 받아들였다. 묵직하긴 했지만, 여기에 들어가 있는 건 전부 엿이었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인 아이를 바라보던 명월은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 아이들 모두에게 똑같이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에 손을 뗀다.

“더우면 금방 녹을 터이니 어서 들어가 봐라. 가서 싸우지들 말고 골고루 나눠 먹거라.”

“사또. 우리랑 같이 가요. 다들 사또를 보고 싶어 해요.”

“아니. 난 가야 할 곳이 있단다. 다음에 꼭 시간을 내서 그리로 찾아가 볼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우리들 없을 때 오시면 안 돼요? 오시기 전에 온다고 전에 알려 주셔야 해요?”

“그러마.”

명월에게서 확답을 듣고 나서야 아이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입술 양 꼬리를 올리며 한껏 웃은 아이는 뒤를 돌아보며 가자, 라고 씩씩하게 말했다.

그렇게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걸 확인한 후, 명월은 제 갈 길을 갔다.

그렇게 몇 걸음 옮기지 않아서 뒤에서 사또,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돌아보자 조금 전의 엿장수다.

“이것 좀 들고 가서 잡숴 보십시오.”

엿장수의 손에는 파란 천에 감싸여 있는 묵직한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난 괜찮다. 아이들 먹일 엿은 그쪽으로 따로 보냈으니―.”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제가 또 언제 사또께 이런 걸 드려 보겠습니까. 그냥 제 성의라 생각하시고 받아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리 말한 엿장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긴장해선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엿장수를 바라보던 명월은 앞으로 손을 뻗었다.

명월이 별말 없이 주머니를 들고 가자 엿장수의 얼굴이 환해진다. 연거푸 고맙다 인사를 하는 엿장수에게 손을 흔든 명월은 재차 걸음을 옮겼다.

빈손으로 가볍게 나왔는데 오른손이 묵직하다. 아무래도 엿장수가 꽤 많이 넣어 준 모양이었다.

들어가서 계진에게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명월은 얼굴을 스치는 부드러운 감촉에 고개를 들었다.

바로 옆에 커다란 꽃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하얀 꽃송이가 눈처럼 흩날린다. 눈을 가늘게 뜬 명월은 눈발처럼 떨어지는 꽃잎을 응시했다.

* * *

생각보다 꽃잎이 너무 예뻐서 그 아래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호란 앞에 도착했을 땐 어정쩡한 시간대였다.

원래 이 시간에 도착하면 기녀들은 따로 휴식 시간을 갖곤 했다. 그럴 땐 알아서 피해 주는 게 선비의 덕목이었지만, 그래도 명월은 지금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호란의 뒷문에 서선 헛기침을 했다. 그 소리를 듣고 한 사내가 나왔다.

선비처럼 꾸민 것도 아니고, 당당히 구군복을 입고 온 명월이었다. 그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던 사내는 반색을 했다.

“아이고, 사또. 오셨습니까?”

다른 누구보다 반가운 손님이라 할 수 있었다. 일단은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라는 말을 하려 했던 사내지만, 그 전에 명월이 먼저 용무를 언급했다.

“내가 시간이 얼마 없으니 호접화 얼굴만 잠깐 보고 가겠네. 그녀가 지금 안에 있던가.”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 그녀는 원하던 목적을 이루었을 거다. 본인의 일을 다 끝낸 그녀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무슨 말을 할지를 듣고 싶었다. 그런데 상대의 반응이 의외였다.

“호접화라니요?”

이상하다는 듯 되물으면서 사내는 눈을 끔벅거렸다.

호란하면 호접화였다.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명성이 도성에도 닿을 정도라 했다.

그런데 이 사내가 왜 이런 반응인지 모르겠다. 명월이 처음 호란을 찾았을 때에도 안내를 해 주던 이였다. 신입도 아닌 자가 이리 천연덕스럽게 굴다니. 명월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 왜 이러나. 일부러 장난을 치지 않아도 되니 조용히 들어가서 호접화를 불러 주게. 내가 이상한 짓을 하려는 게 아니지 않나. 그저 그녀와 긴히 나눌 말이 있는 것뿐이야.”

사내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사또, 제가 아는 사람이라면 두말없이 안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하지만 호접화라니,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 봅니다.”

“…….”

“제가 이곳에 오래 일해서 새끼 기생이 들어와도 그 이름을 전부 다 아는데, 정말로 호접화, 그 이름은 처음 듣습니다. 한번 들으면 바로 기억할 만한 이름인데, 전 도통…….”

사내는 뒷말을 흐렸다. 지금 이 순간 명월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 경직된 눈빛으로 바라보는 명월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그래서 딸꾹질이 나온 사내는 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래도 한번 터진 딸꾹질은 멈추지 않았다.

꺽꺽거리면서 어깨를 들썩이는 이를 두고 그 뒤에서 “무슨 일이냐.”라는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살았다 싶었던 사내는 급히 뒤를 돌아봤고, 명월도 반사적으로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리로 걸어오는 자희가 보였다.

평소 호접화의 곁에서 그녀를 끔찍하게 챙기던 자희였다. 그녀라면 분명 대화가 통할 터였다. 명월은 급히 손짓을 했다.

“자희, 자네. 이리로 좀 와 보게.”

“어머나, 사또―.”

다른 선비가 와서 손짓을 하며 저리 부르면 자희는 표정을 싹 굳히며 “제가 똥개인 줄 아십니까?”라고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 상대는 명월이었다. 자희는 예쁜 웃는 표정으로 한달음에 달려와 명월 앞에 섰다.

“한동안 걸음이 뜸하셔서 안 그래도 서운하던 참이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죠.”

옆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팔을 잡아끄는 손길에 명월은 바로 그걸 뿌리쳤다.

자희가 휘청거릴 정도로 강한 힘으로 뿌리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자희도 당황한 듯 안색을 굳혔으나, 재차 웃는 얼굴로 돌아갔고 그때까지 옆에 서 있던 사내는 알아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단둘이 남게 되자 자희는 양손을 마주 잡은 채로 말했다.

“제가 갑작스럽게 손을 대서 당황하신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네. 자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나. 내가 잘못한 거지.”

그리 말을 하는 동안에도 명월은 머리 한쪽이 먹먹했다.

호접화와 늘 같이 있고, 그녀를 가장 잘 안다 할 수 있는 자희가 왔으니 재차 그녀에게 물어야만 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굳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명월이지만, 자희는 차분하게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다년간의 눈치로 그에게 다른 용무가 있음을 감지한 거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명월은 천천히 입술을 떨어뜨렸다.

“자네, 혹시…….”

하지만 계속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자희가 하고 있는 비녀를 봤기 때문이었다.

오른쪽 가운데에 꽂혀 있는 비녀를 발견한 명월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그 비녀는 무언가.”

명월의 물음에 자희는 제 머리에 손을 댔다.

“아아, 이거 말입니까? 방 청소를 하다가 나와서 오늘 해 봤습니다. 과연 사또께선 세심하십니다. 다른 아이들도 모르는 새 비녀를 알아보시네요.”

그러곤 재차 미소를 짓는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그 웃는 얼굴엔 거짓이 없었다. 조금 전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호접화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모르는 거였다. 이들에게서 호접화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과연, 이런 식으로 말끔하게 정리를 한다는 거였던가.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뒷목이 뻐근해진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허탈함에 명월은 입을 벌리곤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던 명월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군, 하고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게 된 거였어.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간다는 말도 없이 몸을 돌리는 명월이지만, 조금 전 그가 보인 표정이 워낙에 무거웠기 때문에 그를 붙잡을 수도 없었다.

그저 이상하다는 듯, 의아함을 담아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게 자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 *

명월은 바닥만 보고 걸어갔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긴장의 끈이 탁 풀리면서, 모든 게 다 귀찮아졌다. 생각을 해 봤자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도 싶었다.

그런 명월의 뇌리로 한 여인이 나타난다. 고혹적인 눈매를 지닌 대단한 미인이었다. 성격도 좋고, 차분한 데다, 어딘가 냉소적인 구석이 있어 유난히 잘 맞는 사람이었다.

명월은 자신의 곁에 내 사람이라는 걸 둬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마음을 터놓을 만한 존재는 없다시피 했고, 또 그런 인물을 만들 필요도 없다 생각했다.

그랬는데 호접화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잘 맞았고 편했기 때문에, 자신의 사람으로 곁에 두고 평생을 알고 지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끝이 이리도 허무하다니.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명월은 걷던 걸 멈추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고개를 숙인 채로 있는 그 앞으로 누군가 다가온다. 시야에 들어오는 발만 보더라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배고프지 않냐?”

이런 식으로 말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명월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백호를 바라봤다.

“국밥이나 한 그릇 말아 먹자. 내가 사지.”

엄지로 뒤를 가리키며 그리 말한 후, 백호는 입을 다물었다. 가능한 태연한 척을 가장하고 있으나 내심으론 긴장하고 있을 터였다. 자신이 어떤 식으로 반응을 취할지 알 수 없을 터이니 말이다.

“이리될 거라는 걸 넌 알고 있었겠지?”

생각보다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차분하다.

백호도 그리 느끼는지 콧잔등을 찡그린다. 인상을 쓴 그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라고 한마디 하고는 바로 입을 다문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콧잔등을 긁적였다.

“말하면 안 될 것 같았어?”

“……그런 건 아니고, 이게 그녀가 원했던 일이었지.”

이리 말을 하는 게 오히려 더 안 좋은 게 아닐까 싶었다. 호접화가 일부러 명월을 따돌린 것 같은 느낌이지 않은가.

애초에 그 일은 호접화와 백호 사이의 은밀한 거래 같은 거였다.

그건 명월이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고, 그것에 대해선 백번 대화를 나눈다 할지라도 생각의 간격은 좁혀 들지 않을 거다. 다른 식으로 포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널 정말로 마음에 들어 했으니까, 모든 걸 알려 주고 싶진 않았던 거야. 여자의 마음이란 원래 그런 거다. 복잡하고 어렵지. 그런 걸 사내인 우리가 어찌 헤아릴 수 있겠어. 평생 걸려도 그 복잡한 마음의 십분지 일도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여자라는 건 정말 무서운 존재지. 그러니 잘 대해 줘야 해. 괜히 원한 살 일도 만들지 말아야 해. 안 그러면 이병현 대감 꼴이 날 터였다.

지금도 떠올리면 정말 무서운 장면이었다. 거칠 것 없는 백호마저 그걸 보고 새삼 여자에게 원한 살 일은 만들지 말아야지. 그리 생각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팔짱을 낀 백호는 명월을 내려다봤다. 명월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든 반박하고 말겠다며 집중한 채로 있으려니 명월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일부러 그렇게 용쓰지 않아도 괜찮아.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러곤 옆을 지나쳐 간다.

나름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넘어가는 건가. 정말? 진짜로?

백호는 아까보다 걸음이 빨라진 명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딱 봤을 땐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눈을 가늘게 뜬 백호는 냉큼 명월 옆으로 가선 그의 어깨를 쳤다.

“기분이다. 국밥에다가 막걸리도 쏜다―.”

그러곤 명월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리하면 몸을 비틀거나 피하곤 하던 명월이었다. 이번에도 그리할 것 같아서 초반부터 힘을 줘서 감싸듯 끌어안는데 의외로 얌전히 있다.

너무 얌전하니까 그게 더 이상하다. 정말 왜 이러는 건가 싶었던 백호는 미심쩍어했다.

전립 때문에 명월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어도 못 보니까 더 보고 싶어진다. 백호는 명월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고개를 숙였다.

“너 말이야.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내 옆에 붙어 있을 거냐.”

고개를 숙여서 명월의 얼굴을 보게 되는 건 좋은데, 바로 저런 말이나 한다.

이런 식으로 옆에 붙어 있을 거냐니. 중요한 일은 다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라는 건가. 백호는 인상을 쓰며 혀를 찼다.

“네가 하는 짓을 봐라. 내가 따라다니지 않으면 분명 탈탈 털리게 될 거다. 나 같은 녀석이 옆에 붙어 있어야 제명에 살 수 있을 거야.”

호접화가 한번 물갈이를 했기 때문에 당분간은 이 근처로 귀물이나 귀신같은 것들이 얼씬도 하지 않을 거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 정말로 명월이 돌아가라 할 것 같았기에 백호는 바로 말을 덧붙였다.

“정말로 조심성 없는 놈이란 말이야. 별일 없어서 망정이지 그 독각귀 놈을 쫓아갔다가 최악의 상황이라도 당했으면 어쩔 뻔했어?”

“그의 눈을 보는 순간 괜찮을 거라는 걸 알았어.”

명월은 고개를 들어 백호를 올려다봤다.

“너랑 비슷했거든.”

자신과 비슷하다는 말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민이 되는 듯 인상을 쓴 채로 있던 백호의 고개가 점점 옆으로 기울여진다. 그의 이해를 돕듯이 명월은 덧붙여 말했다.

“날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무척 어렵고 고민이 되는 눈빛을 하고 있었지. 그건 미친 자의 눈빛이 아니었어. 오히려……. 종종 네가 날 볼 때의 눈빛이 더 위험하고, 미친 것 같을 때가 있어.”

“…….”

앞부분만 듣고선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 이건 나쁜 말이었다.

백호는 더 세게 명월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나 알고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당장 사과하지 못해?”

지금까지 자신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옆에 붙어 있었던 적 자체가 없었다.

누군가를 생각하고, 만지고 싶다 느끼고, 끌어안고, 옆에 있으면서도 계속 얼굴을 보려고 했던 자가 없었다.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끼어들어 도와주고, 금이야 옥이야 그렇게 보살피지도 않는단 말이다.

가진 것들이 더 하다고, 지금 명월이 배가 부른 모양이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선 책임을 지겠지만, 명월도 이 고을의 사또로서 처리해야 할 일이 몇 가지 남아 있었다.

그 일에 대해선 도와주지 않을 테니 네놈이 혼자 알아서 처리해 봐라―라는 식으로 말해 줄 셈이었다.

그때 명월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나직한 웃음을 들은 백호의 미간이 자연스레 펴진다.

언제 화를 내면서 툴툴댔느냐는 듯, 그는 명월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곤 기습적으로 그 뺨에 입을 맞췄고, 바로 명월의 웃음이 사라진다.

지금은 밖이고, 다른 누군가가 이 모습을 봤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 이게 대체 뭔 짓인지 모르겠다.

어이가 없어 바라보는 명월이지만, 백호는 떳떳했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으냐. 내 호랑이 털 값이다.”

그 순간 명월의 입가로 헛웃음이 걸린다.

백호가 종종 쓰고 다니던 호랑이 가죽이 얼마나 중한 것인지를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고작 뺨에 뽀뽀를 해 놓고는 그 값이라니. 이 녀석은 대체…….

그러거나 말거나 백호는 떳떳한 얼굴이었다.

불현듯, 자신 때문에 백호가 동분서주했던 것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그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로서도 상당히 노력하고 신경 쓴 결과라는 걸 왜 모르겠는가.

대상이 자신이기 때문에 이만큼이나 신경 써 주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마음 한쪽이 뭉클해진다.

명월은 자신이 솔직한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것에 대해선 거침이 없는 편이긴 했지만, 이런 쪽으로는 그게 잘 안 되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어떻게든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 상대가 백호이기 때문에 더더욱.

“고맙다.”

생각보다 쉽게 말이 흘러나온다. 그래서 두 번째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명월은 아예 백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게 전부 다 고맙다.”

고작 고맙다는 말로는 모든 걸 보답할 수 없었다. 앞으로는 잘해 줘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백호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런데 고맙다는 말을 들은 백호의 표정이 이상하다. 이건 대체 무언가 싶은 얼굴로 명월을 내려다보던 백호는 명월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열 있는 거 아니야?”

“…….”

어쩌면 이리로 바로 넘어와서 당장 움직인 게 좋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나간다 했을 때 보고만 있지 말고 말리는 거였는데.

실수했다면서 인상을 쓰는 백호는 진지한 얼굴이었고,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남이 기껏 노력해서 한 말인데.

순간적으로 부끄럽기도 하고 고맙다는 말의 진짜 의미를 파악해 주지 못하는 백호가 원망스러웠던 명월은 그를 세게 밀어냈다.

방심하고 있던 차라 백호는 그대로 두어 걸음 물러나선 급히 고개를 들었다. 명월은 어느새 저 앞까지 멀어진 채였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르게 혼자 가 버리는 모습에 당황한 백호가 다급히 손짓을 했다. 기다리라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명월은 앞만 보고 씩씩하게 걸어갔다.

<본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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