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휘영청 밝은 달은 아름답기도 하지.
이런 날에 술잔을 들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시조 몇 편이 완성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백호는 손에 술잔도 없고, 등에 만취한 인간을 업고 있었다.
그 이름을 들어는 봤을까. 성은 유, 이름은 명월이라. 이름도 참 특이했다.
독각귀 놈, 사내 이름을 명월이라 지을 건 대체 뭔가 싶었다.
암만 저들의 사랑의 결실이니 뭐니 해서 이름을 하나씩 넣은 건 좋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어감을 고려했어야 할 게 아니던가.
뭐, 이제는 하도 불러서 입에 짝짝 달라붙는 게 오히려 다른 이름이었으면 그게 더 이상할 것 같기는 했다.
그때 등 뒤에서 으음, 하는 신음이 들린다. 백호는 바로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어깨에 얼굴을 묻은 명월은 전립도 벗겨져서 그걸 목 뒤에 걸고 있었다. 그 상태로 축 늘어져선 앓는 소리를 낸다. 그 모습을 보자니 나오는 건 혀 차는 소리뿐이었다.
그러기에 작작 좀 마시지. 오기에 차서 계속 술잔을 기울일 건 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래도 오늘 처음으로 제대로 국밥을 다 먹고 막걸리도 몇 잔이나 기울였다.
술과 관련해선 미각이 예민한 백호가 받아들일 만한 수준이 아닌 투박하고 걸쭉한 막걸리였지만, 명월과 함께하니 맛이 색달랐다.
혀끝에 착착 감기는 맛이 유난히 좋았던 것 같다. 그건 분명 명월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실제로 내내 명월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얼굴만 보고 있어도 술이 잘 넘어갔다.
백호는 명월을 몇 번이나 추슬렀다.
제대로 업혀 있는지. 혹 불편하진 않을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조심해서 업는데도 계속 신경 쓰여서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때마다 명월의 머리가 제 어깨에 잘 놓여 있는 걸 보고 나서야 안심이 된다.
그렇게 느긋하게 다리를 넘어가려는데 저 끝에 서 있는 여인이 보였다.
검은 그림자처럼 보이는 모습만을 보고도 그녀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던 백호는 곧장 그리로 향해서 앞에서 멈추어 섰다.
눈앞으로 온 백호를 올려다보며 호접화는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는 길이십니까.”
“그래.”
대답하는 백호의 목소리가 굳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 이 순간 명월이 눈을 뜨면 어쩌나 싶었던 거다.
하지만 여전히 색색거리면서 고른 숨을 내쉬는 걸 들으며 백호는 미간 사이로 주름을 만들었다.
그때 호접화가 제 품에 손을 넣어선 작은 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여기에 있습니다. 그동안 잘 얻어 썼습니다.”
백호는 호접화가 내미는 걸 내려다볼 따름으로 그걸 받아 들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호접화는 그의 품속에다가 작은 주머니를 넣어 두곤 그 위를 토닥였다. 제대로 잘 들어갔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손을 뗀 그녀는 명월을 바라봤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백호에게 업혀서 축 늘어진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의 입술 꼬리가 올라간다.
천천히 움직인 그녀의 손이 명월의 머리에 닿는 순간 백호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하지만 대놓고 만지지 말라거나 손을 치우라는 둥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었다.
호접화는 명월의 머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그러곤 그의 이마에 손가락을 댄 채로 속삭였다.
“때로는 이런 분의 사랑을 받으면 기분이 어떨까 싶으면서도, 또 때로는 이런 아들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했더랬지요. 여자의 마음이란 왜 이리도 복잡한 것인지…….”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그녀는 손을 떼곤 백호를 올려다봤다. 눈을 가늘게 휘며 미소를 짓나 싶던 그녀는 품에서 잘 접힌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이건 당신이 마음 내킬 때 사또께 전해 주십시오.”
명월을 업고 있기 때문에 백호는 두 손을 하나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아까와 별반 다름이 없는 상태로 무뚝뚝하게 서선 내려다보기만 하는 그였지만, 호접화는 상관없다는 듯 다시 그의 가슴 안쪽에다 한지를 밀어넣었다.
이번 건 길고 두툼한 편이었던 지라 위쪽으로 살짝 튀어나오게 된다. 이번에도 그걸 토닥이며 호접화는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마지막입니다.”
마지막이라 하는 순간 백호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마지막 인사 정도는 얼굴을 보고 해야 하는 게 아니겠나.”
“이래 봬도 여자랍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가벼운 농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겠지만, 그리 말하는 호접화나 말을 듣는 백호나 누구도 웃는 이가 없었다.
천천히 손을 떼고 뒤로 한걸음 물러선 호접화는 양손을 배 앞에 모으곤 앞으로 머리를 숙였다.
“떠납니다. 반양 땅에 저 같은 걸 받아들여 줘서 고마웠습니다. 서의 백귀 나으리.”
그리고 호접화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엔 있던 자는 오간 데 없이 사라졌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양 텅 비어 버린 자리를 확인한 백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곤 눈을 내리떠 제 가슴팍에 넣어진 것들을 확인했다.
작은 주머니는 원래 돌려받으려 했던 것이니 자신에게 오는 게 맞지만, 이 편지는 대체 무언가 싶었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명월에게 선뜻 줄 수 없었다.
일단은 안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를 확인한 후에 넘기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본인에게 올 편지를 자신이 먼저 본 걸 알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겠지. 편지를 전달한 호접화도 마찬가지다. 떠난 이가 다시 나타나서 ‘왜 그러셨습니까.’라고 할 것만 같았다.
이래서 기가 센 것들이랑 같이 있으면 피곤하다니까.
재차 명월을 추스른 백호는 긴 한숨을 토해 내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 * *
제 방에 이불을 깔고 그곳에 옷을 갈아입힌 명월을 눕혔다.
자리에 눕자마자 인상을 쓰면서 옆으로 몸을 돌린 명월이 손으로 앞을 더듬는다.
마치 무언가를 찾듯이 이불 위쪽을 더듬는 손길에 왜 그러나 싶어 옆에 쪼그리고 앉은 채로 있던 백호는 이윽고 무언가를 생각해 냈다.
설마, 싶은 기분에 백호는 슬그머니 명월의 옆으로 기어 들어가 자리에 누웠다.
눕자마자 명월이 기다렸다는 듯 백호의 가슴팍에 매달린다. 달라붙어선 팔로 몸을 꼬옥 끌어안는다. 그제야 명월의 표정이 풀리면서 안도한 얼굴이 된다. 그걸 본 백호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 녀석, 왜 이렇게 예쁜 짓을 하는 거야.”
술에 취하면 누구나 다 솔직해지곤 하는데, 명월도 그런 경우였던 모양이다.
백호는 안겨 오는 명월의 등에 팔을 두르곤 눈을 내리떠 그 얼굴을 살폈다. 어둠 속에서도 아주 잘 보이는 어여쁜 얼굴이었다.
술에 취해서 곯아떨어진 건데도 이 정도로 예쁜 건 이 녀석밖에 없을 거라면서 조금 더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팔에 머리를 벨 수 있도록 했다.
처음엔 그게 불편했는지 몸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지만, 이윽고 본인이 편하게 누울 수 있는 자세를 찾아선 더 깊은 호흡을 토해 낸다.
팔베개를 해 준 팔로 명월의 어깨까지 단단히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그러곤 뺨에 손을 올린 채로 지그시 바라본다.
지금처럼 자신의 품 안에만 있으면 문제 될 게 없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그 누구도 자신의 품 안에서 명월을 데리고 가지 못할 거다. 그리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이 혈기왕성한 녀석은 품 안에서만 있으려 하지 않겠지. 해야 할 일은 해야 하고, 의문이 생기는 일에 대해선 알아보려 들 거다.
보통 사람은 귀찮아서라도 그만둘 터인데 이 녀석은 정말이지…….
하지만 그게 또 명월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거기까지 생각한 백호는 헛웃음을 흘렸다.
“나도 갈 때까지 갔구먼.”
무슨 생각을 해도 결국 마지막엔 명월을 두둔하고 말잖는가.
왜 이렇게 된 거냐면서 재차 명월을 내려다보던 백호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새근거리면서 고른 숨을 토해 내는 명월을 보다가 그 이마에 입술을 대고 진하게 입맞춤을 했다. 그러곤 재차 명월을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머리카락 사이에 코를 묻고 있자니 달달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품에 쏙 안기는 날씬한 몸도 그렇고, 적당히 따끈한 것도 마음에 든다.
사내이기 때문에 뼈대가 있고 단단한 편이긴 했지만, 엉덩이는 정말 부드럽고 말랑거렸다.
엉덩이 생각을 하자 만지고 싶어진다. 안고 싶다.
하지만 이런 상태일 때 하면, 다음날 명월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일단은 참아야겠지만, 하고 싶다고 생각한 참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사타구니 사이로 열이 몰리는 것 같다.
거기가 뜨끈해지면서 점점 더 강해지는 욕구를 억누르기 위해 백호는 더 강하게 명월을 끌어안아 버렸다.
* * *
품 안에서 흐트러진 하얀 나신이 눈부시다. 단정한 차림새를 하고 있을 때에는 떠올릴 수조차 없을 음란함을 드러내면서 먼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그러다 제 스스로 아래를 벌리고 자신의 몸 위로 올라탄다.
두터운 사내의 양물을 끝까지 먹어치운 후에, 힘겨운 듯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눈을 내리떠 누워 있는 사내를 본다. 긴 머리카락을 풀어 내서 몸을 가린 채로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를 가늘게 휜다.
‘여기까지 들어왔어.’
그러곤 제 배꼽 부근을 손으로 누르면서 고개를 숙인다.
‘움직여 줄까?’
그런 건 일부러 물을 필요도 없었다. 알아서 허리를 흔들어 주면 그보다 고마운 게 없는 법이었다. 그런데 장난을 치듯 엉덩이를 조금씩 들썩이면서 자신의 양물을 가지고 논다.
굴처럼 깊고 쫀득거리는 내벽의 살이 요망하게 움직인다. 성기를 물곤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굴다가 예고도 없이 놓아주는 감각에 취한 백호는 앓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벌리고 앉아 있는 허벅지에 두 손을 올리곤 허리를 들썩이자 성기를 물고 있던 내벽의 죄임이 강해진다. 절로 탄성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왜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는 건가 싶었던 백호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명월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백호의 가슴에 양손을 올린 채로 고개를 숙여 왔다.
평소보다 가쁜 숨을 몰아쉬어서 엄청나게 야하게 보이는 얼굴로 명월이 눈웃음을 친다.
‘기분 좋아?’
그런 건 굳이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기분이 좋은지 안 좋은지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바로 몸 위에서 일어나 가 버릴 것만 같았기에 더 세게 허벅지를 잡아 누르면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분 좋아. 단순히 좋은 것뿐만이 아니라 미칠 것만 같으니 애타게 하지 말고 조금 더 움직여 봐라. 차라리 네가 누워라. 그러면 내가 그 몸 위에서 열심히 흔들어 줄 테니까.
정말 그리할 셈으로 백호는 몸을 일으키려 했고, 동시에 명월이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 이건 꿈인데?’
그것도 개꿈인데―.
골리듯 내뱉은 말에 백호의 눈이 크게 떠진다. 설마 싶기도 하고, 믿을 수 없어서 멍하니 올려다보는 동안에도 명월의 입가에는 기분 좋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빙글거리면서 웃는 얼굴이 예쁘다. 하지만 조금 전 들은 말은 좋게만 들리지 않았다.
꿈이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여기까지 해 놓고 꿈이라고 하면 나는 어쩌라고?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 아닌가?
백호는 다급히 위로 손을 뻗었고, 그 순간 명월이 사라지면서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 순간 느껴지는 엄청난 허탈감에 백호는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처절하다 할 수 있는 부르짖음 후, 백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천장을 향해 허망하게 뻗어져 있는 제 손을 보곤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엄청난 실의에 빠져서 백호는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이불 옆이 휑했다.
여전히 꿈의 여운에 젖어서 몸은 흥분으로 뜨거워진 참이었지만, 자신의 곁에 있어야 할 상대가 없다는 것이 백호의 모든 잠을 달아나게끔 만들었다.
눈을 부릅뜬 백호는 바로 몸을 일으켜선 방을 둘러봤다.
없다. 떨어뜨리기 싫어서 품에 꼬옥 안고 잤던 명월이 사라졌다.
“이런 젠장―.”
혀를 차면서 가볍게 욕설을 토해 낸 백호는 냉큼 몸을 일으켜선 밖으로 향했다.
만약에라도 명월을 발견할 수 없으면 어째야 하나 싶었던 그는 멈칫했다. 문을 열자마자 왼쪽에 명월이 앉아 있었던 거다.
어디서 얻어 온 건지 알 수 없는 작은 등을 옆에 둔 명월은 입에 엿을 물고, 손에는 두툼한 편지를 들고 있었다.
편지를 보는 순간 백호는 어―, 하는 소리를 내며 인상을 썼다. 백호가 거칠게 문을 열고 나왔을 때부터 그를 주시하고 있었던 명월이 태연히 물었다.
“이거 읽으면 안 되는 거야?”
입에 엿을 물고 있으니 발음이 불명확하다. 그리고 좀 귀여웠다.
애초에 편지는 호접화가 명월에게 전해 달라며 건네주고 간 거였으니, 그가 읽으면 안 될 건 없었다.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명월이 바깥에 앉아 있는 것에 안도감을 느낀 백호는 한숨을 쉬면서 마루로 나와서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자 명월이 바로 방문을 가리키면서 “모기 들어가니까 문 닫아.”라고 말한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른 백호는 하라는 대로 뒤로 손을 뻗어선 문을 닫았다. 그러곤 편지를 펼치는 명월을 바라봤다.
입에 엿을 물고 있는데, 입술이 유난히 붉게 보인다. 저 입에 다른 걸 물려 주고 싶은데―.
자신이 하는 생각에 그냥 헛웃음이 나온다. 이런 한심한 생각이나 하고 앉았다니. 차라리 생각을 말자면서 백호는 무릎을 세우곤 앉았다.
이상한 꿈을 꿔서 놀라기도 했지만, 약간 흥분한 상태였다. 명월이 보면 바로 알 일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이런 식으로 감추는 거였다.
그리고 그때 명월이 백호 쪽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왜 그렇게 불편하게 앉는 거냐는 듯 바라본다.
백호는 그냥 모르는 척했다. 알게 되면 명월이 싫어할 걸 알기 때문이었다.
명월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백호는 명월의 뒤쪽에 놓여 있던 파란 천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엿을 하나 꺼냈다.
어제 만취한 명월을 업고 오면서 곁다리로 챙긴 놈이었다. 어디에 둬야 하는지 몰라 대충 마루에 던져 두었는데, 그새 조금 녹았다.
다 녹아서 달라붙지 않은 게 어디냐면서 그걸 입에 물자 달착지근한 맛이 퍼진다. 이를 세워서 녹은 부분을 긁어 먹는데 명월은 이미 편지 내용에 푹 빠진 것 같았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일까. 살짝 궁금했던 백호는 은근슬쩍 명월의 뒤로 접근했다.
달라붙는 걸 알면서도 명월은 가만히 있었고, 백호는 편지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또. 지금 이 편지를 읽으실 무렵에 저는 먼 길을 떠나 있을 겁니다. 아마도 그곳은 사또께서 찾아오실 수 없는 곳으로, 어쩌면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사또께서 무슨 생각을 하실지 짐작이 갑니다. 제가 왜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는지, 그 일에 도움을 주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일은 그저 단순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고, 그로 인해 죽어야 할 이들이 사라지게 된 것뿐이랍니다.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고,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건 당사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 피를 이어받거나 그와 관련된 이들 모두를 일컫는 것이랍니다. 그렇게 한번 정리가 되어야지 다음이 있는 법이랍니다.
저와 그들이 사라져야만 반양이라는 곳이 정화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또가 다스리는 고을에 사는 무고한 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겠지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전 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하려면 제 지루한 과거가 나와야 하고, 그러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차가워집니다. 종내에는 심장까지도 꽁꽁 얼어붙어서 오로지 복수만을 생각하게 되지요.
제 이름은 원초혜입니다. 살던 곳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생겨난 일은 알고 있습니다.
제 아버지는 반양의 한쪽에 커다란 땅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본인이 원해서 얻은 땅도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살던 이가 위로 올라와 아버지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고, 그걸 은혜로 여긴 사내가 아버지에게 땅문서를 넘겨 주었던 겁니다.
아버지는 받지 않으려 했지만, 사내는 부득불 문서를 넘겼고 적지 않은 땅이 아버지의 것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도움받은 일에 대한 보답이라기보단, 끊을 수 없었던 악연을 제 아버지에게 억지로 떠넘긴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착하고 심성이 여린 제 아버지는 그 문서를 받곤 사내에게 이런저런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사내는 떠나갔고, 우리 가족은 행복하게 잘 살아왔습니다.
사람이 많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으나, 부모님은 인덕이 있으셔서 아쉬울 것 없이 부유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원치 않아도 재물이 쌓였습니다. 겉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부자였던 겁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 가족에게 별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원하는 건 서로 함께 있고,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사는 것뿐이었지요. 그러다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있으면 언제고 쌀 한 가마니, 말 한 필, 소 한 마리를 제공해 줬지요.
부모님은 다정했고,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착실했으며, 주변 사람들은 예의가 발랐습니다. 지금 떠올려 보면 정말 그런 곳이 존재했을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낙원과도 같은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부모님께 사고가 생기셨습니다. 기억을 더듬으면 어느 날 이상한 자들이 부모님께 접근을 했었던 것 같고, 그들에게 연락을 받아 비가 많이 오는 날 가마를 타고 산을 넘어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산사태가 일어났고 두 분은 그대로 흙에 깔려 돌아가셨습니다.
다음 날 그 연락을 받았고 전 부모님의 시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흙에 깔려 돌아가셨다는 분들 몸에서 자상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어릴 땐 그게 무언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만이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왔을 따름이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잠도 오지 않고, 밥도 넘길 수 없었습니다. 눈을 뜨고 있어도 산송장과 다름이 없었지요.
그런 절 지탱해 준 것은 어려서부터 곁에서 함께 자라 한 몸인 것처럼 여겨지던 지기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통하여 어느 순간 그것이 애틋하게 변하고 조금씩 남자와 여자의 눈으로 서로를 인지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생긴 일을 자신의 일인양 진심으로 아파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위로를 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전 스스로를 추스를 수 없었습니다. 그저 제 안의 어둠 속으로 조금씩 파고들어 갔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즈음 그들이 나타났습니다.
제 먼 친척이라 스스로를 소개한 이들은 부모님의 집으로 쳐들어와 마치 갖은 재물과 곡식들이 저들의 것인양 행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곤 생전 부모님들이 저들에게 진 빚이 있다면서 보도 못한 문서를 내밀면서 윽박을 질러댔습니다.
평화롭고 조용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던 저나, 다른 이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벌어지는 일이 대체 무언가 싶어 혼란스러웠지요.
바보 같은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그때까지 사람을 의심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람이라는 게 거짓말을 하고, 본인의 욕심을 위해선 끔찍할 정도로 잔인해지는 존재라는 것 또한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하는 말이 거짓일 거라는 생각도 못 하고, 그들이 제 친척이 아닐 거라고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부모님들은 고아로, 원래 가족이 없던 분이셨지만 저 모르는 사이 몇 년 전에 연이 닿아서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면서 아버님의 필체로 된 편지를 내미는데, 어린 제가 무얼 할 수 있었을까요? 모두가 그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달랐습니다. 저들이 이상하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고,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한다고 했지만, 전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그 말에 귀를 기울일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후로는 모든 것들이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전 그 누구와도 만날 수 없게 되었고, 답답한 방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 거라는 통보식의 말을 듣고, 혼인 날짜가 정해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혼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어서 싫다고 거부를 했지만, 그리하지 않으면 이 집안이 망하고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게 될 거라는 식으로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제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되어 결국, 그들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전 꽃가마에 앉혀진 채로 산을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날이 흐려서 맑을 때 보내 드리고 싶다며 울면서 청하는 이들의 말을 묵살한 그들은, 아침 일찍 서둘러야 비를 만나지 않는다는 말도 무시했습니다.
오전에는 저들이 일이 있어서 바쁘니 오후에 출발하겠다 했고, 결국 날이 다 저물어서야 저를 태운 꽃가마가 움직였지요.
축하를 해 주는 사람도 없고 기뻐해 주는 이들도 없었습니다. 제 등 뒤로는 울음소리만이 가득했지요. 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를 만나고 싶어서 한번 말을 꺼내 봤지만, 묵살 되었습니다.
양갓집 규수인 줄 알았더니 벌써 남자 맛을 본 거냐는, 당시엔 이해하지 못한 희롱을 들어야 했지요.
모든 것들이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진행이 되었고, 그렇게 산속으로 끌려 들어간 전 죽임을 당했습니다.
가마에 앉아서 저항도 할 수 없을 때 사방에서 꽂히는 칼에 고스란히 제 몸은 뚫려야 했습니다. 그거로도 부족했는지 마지막엔 가마를 열어서 확인도 하더이다.
눈을 가늘게 떴을 때 본 게 바로 이병현 그놈이었습니다. 그놈은 제 얼굴을 보곤 그냥 죽이긴 아까운 미색이라는 말을 하고는 안으로 손을 뻗었습니다.
마지막 순간 전 그놈의 손가락을 깨물었고, 화가 난 그는 단검으로 제 눈을 그어 버렸습니다. 세상이 붉은 빛으로 번지고 어둠이 내려앉았습니다. 전 가마에서 끌려 내려져선 사람의 손이 닿지도 않은 깊고 깊은 절벽 아래로 던져졌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죽게 된 과정입니다.>
본인의 죽음일 텐데도 무척 담담하게 글을 적어 내려갔다. 오히려 글을 읽은 쪽이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안색을 굳힌 명월은 두어 장 정도 남은 편지를 들고 이마에 손을 짚었다. 굳은 안색을 보아 지금 명월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를 알 것 같았던 백호는 말이 없었다.
무거운 한숨을 내쉰 후, 명월은 계속 이어지는 내용으로 시선을 옮겼다.
<알고 보니 이병현 대감은 예전에 어떤 사내가 넘긴 반양 땅을 원했던 겁니다. 이미 그에겐 많은 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도 제 뱃속에 넣고 싶었던 거지요.
그러다 제 부모님에 대한 사정을 알게 되었고, 어리석을 정도로 순박한 그분들을 처리하고 저도 없애 버리면 땅뿐만이 아니라 적잖은 재물도 손에 넣게 될 거라 생각했던 겁니다.
마지막으로 저까지 없애고 저를 찾으려 했던 그도 죽인 그는 무척 만족스러웠겠지요. 사람 죽이는 일에 대한 죄책감은 하나도 느끼지 않고 그저 제 목구멍으로 들어갈 재물에 눈에 어두워진 겁니다.
그는 부모님의 집을 처분하고, 재물을 몽땅 들고 반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원한이 깊었던 전 죽어서도 저승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보이는 게 없고, 몸도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제 육신은 말도 못할 정도로 엉망이 되어 버렸지요. 그 상태로 갔다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힘을 얻고자 했고,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을 이용해서 조금씩 힘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사또를 만나 뵌 적이 있었습니다. 예전 다리 위에서 제가 떨어뜨린 주머니를 주워 주신 일을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명월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주머니라고?”
무언가가 기억날 듯 말 듯 했다. 그러다 어렸을 때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다리 가운데에 놓여 있던 가마를 떠올렸다.
딱 봐도 수상쩍었기 때문에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는데 가마 안에서 나온 하얀 손이 바닥을 더듬으며 무언가를 찾으려는 시늉을 냈고, 그때 명월의 눈에 작은 주머니가 들어왔다.
못 봤으면 모를까. 그런 게 있음을 봤는데 모르는 척할 수 없어서 발로 밀어 준 기억이 있다.
그때 가마에 타고 있던 자가 뭐라 말을 했던가. 이 은혜는 꼭 갚는다―와 같은 말을 했던 것 같고, 자신은 다 필요 없으니 앞으로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말라 했다.
하나를 떠올리자 그 뒤는 수월하게 기억이 난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하지만 그것이 호접화였다니. 정말 의외였다.
하지만 그것과 관련해 꾼 꿈이 있었다. 상황은 비슷했지만, 달랐던 건 자신이 주워 든 주머니 속에서 두 개의 사람 눈알이 굴러 떨어지는 거였다. 그것도 무언가 관련된 일이었을까.
명월은 급히 아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그때 사또의 도움을 받았고 우연찮게 서의 백귀라 불리는 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자가 왜 그곳에 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절 보자마자 가까이 다가와 가마를 발끝으로 차며 시비를 걸었습니다.
왜 여기에 있느냐며. 죄 없는 사람을 건드리면 안 되는 게 아니냐면서 건들거리는 그에게서 그 이병현 놈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 바로 가마에서 나왔고, 서의 백귀에게 어디서 온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게 시작이 되어서 그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전 그에게서 약간의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곤 본인을 다시 찾아오면 그땐 도와주겠다 말한 백귀가 사라진 후, 전 오로지 냄새에만 매달려 반양을 찾게 되었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백귀를 만난 전 그에게서 두 눈을 받았습니다. 새롭게 세상을 보게 된 저는 그곳에서 돼지처럼 잘살고 있는 이병현과 그놈의 핏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내내 참아 왔던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때 백귀가 옆에 있어 주지 않았다면, 반양 땅은 더 난리가 났을 겁니다. 죽어야 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죄 없는 이들 또한 죽게 되었을 테니까요.
반양이라는 땅은 참 이상한 곳입니다. 사람들은 아닌 척해도 두려움에 질려 있었고, 귀물은 그 두려움을 스스럼없이 이용했지요. 그토록 귀신의 왕래가 수월하게 이루어지는 곳은 처음 봤습니다.
게다가 이병현을 비롯한 그 핏줄은 그 땅에서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반양 땅의 특수성을 이용해서 저들의 배를 불리고 그걸 위해선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게 저들이 한 일이 아니라 귀신이 한 일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말도 안 되었지만, 이 땅은 그게 통용되었습니다.
이병현과 그 핏줄의 계략으로 수많이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진짜로 귀신이나 귀물로 인해서 피해를 입거나 죽음을 당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 되었지요. 하지만 모든 것들이 지나치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으로 인해 처절하게 한 맺힌 원한이 응축되어서 그게 한 번에 해방되는 날이 있었고, 전 그 날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보다 수월하게 제 복수를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백귀가 해야 할 수고를 조금은 덜어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그에 대한 보답은 해야 하는 법이지요.
전 제가 그 일을 함으로써 백귀의 수고를 덜어 주고, 사또에 대한 보답을 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또께서 이 땅에서 정의를 실현하려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제가 처리할 겁니다. 그들의 추잡한 혼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끌고 저승길로 갈 것입니다. 명계의 가장 밑바닥에 놈들의 혼을 뿌려서, 그간 한 일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게 해 줄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게 된 저를 이해하지 못하실지도 모릅니다. 이해를 바라진 않습니다만, 이건 제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 점은 알아주십시오.
살아계시는 동안 건강하시고,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에는 좋은 모습으로 마주하고 싶습니다.
이만 글을 마칩니다.>
마지막으로, 진한 색의 점이 하단에 찍혀 있었다. 그 점이 눈물처럼 보이는 건 자신이 감상적이 되었기 때문일까.
다 읽은 편지에서 시선을 뗄 수 없다. 보고, 또 보게 된다. 그런 명월의 상태를 알 것 같았던 백호도 굳이 말을 걸거나 건드리지 않았다.
옆에 앉아 있던 그는 엿을 씹었다. 아그작―하는 소리는 작았지만, 그걸 명월이 신경 쓰면 어쩌나 싶어서 움찔해선 그를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명월은 여전히 편지만 바라봤다.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아닌 저런 편지만 보고 있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호접화 그녀는 이미 떠났고, 앞으로는 만날 수 없었다. 그녀가 한 일이 있기 때문에 저승으로 가서 고생을 하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한을 풀었다.
그거로도 충분히 만족한 여자였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까 싶지만……명월이라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백호는 엿을 문 채로 한숨을 쉬었고, 명월은 편지를 반으로 접었다.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접은 후, 그걸 허벅지 위에 올린 명월이 중얼거렸다.
“처음 반양 땅에 귀신을 불러들인 게 이병현 쪽 사람이었던가.”
“그랬지. 그리고 나선 귀신을 이용해서 저들 좋을 대로 굴었고.”
진짜 귀신은 존재했지만, 없는 귀신도 만들어 내던 놈들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좋은 걸 지녀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으면 억지로 빼앗고, 상대가 저항하면 죽이고, 그 죽음조차도 귀신에게 당해서 저주를 받은 거라면서 모독했다.
정직한 방법으로는 평생을 가도 손에 쥘 수 없는 재물이 사람 하나 처리하는 것으로 굴러 들어온다.
그 달콤한 맛을 알게 된 놈들은 점점 더 극악해졌다. 그렇게 계속 빼앗고 제 배를 불리다 보니 역으로 당할 거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 거다.
결국 그걸 그대로 되돌려 받은 거다. 인과응보. 저들에게 이보다 어울리는 사자성어가 달리 없었다.
“사람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야. 개중에는 죽어 마땅한 놈들도 있어.”
백호는 절반 정도 남은 엿을 그냥 한입에 밀어 넣었다.
“놈들이 죽어서 앞으로 더 좋아질 거야. 그게 네가 신경 써야 할 쪽이야. 더 나아지는 상황 속에서 해야 할 일들을 정하고, 그걸 밀어붙이면 되는 거야. 그게 그녀가 바라는 일이기도 할 테니까. 말도 안 되는 일 때문에 그녀와 같은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거겠지. 그걸 위해서라도 네가 좀 많이 노력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괜히 엿을 다 물은 모양이었다.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인상을 쓴 채로 오물거리는 동안 입 안으로 단맛이 가득 퍼지면서 이로 찐득거리는 게 묻어난다.
그래도 뱉어 내지 않고 열심히 엿을 먹는 동안 명월이 꼬물거리면서 옆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편지를 반대편에 내려놓은 명월은 백호 옆에 가까이 앉아선 엿을 입에서 뗐다.
입이 심심해서 하나 물긴 했는데, 계속 먹기가 그랬다. 배가 허전하면서 밥 생각이 간절했다. 전날 국밥도 꽤 많이 먹고 막걸리도 몇 잔이나 비웠는데 왜 이러는가 싶었다.
그때 백호의 손을 들어선 명월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제 쪽으로 단단히 끌어안는 팔 힘을 느끼면서 명월이 눈을 끔벅이더니 고개를 든다.
여전히 입에 엿을 물고 있어 오물거리는 백호가 우습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긴장이 풀린 명월은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러곤 별생각 없이 눈을 내려뜨고는 안색을 굳혔다.
“―너 아침부터 건강하다?”
“…….”
명월의 지적에 백호는 슬그머니 다리를 마루 아래로 내리곤 다른 손으로 사타구니 사이를 가렸다.
잠자코 있나 싶던 그는 고개를 숙이곤 은근하게 “방으로 들어갈까?”라고 했지만, 명월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일없다.”
매몰차다 싶을 정도로 바로 나오는 거절에 백호의 표정이 굳어진다.
거절당할 걸 알면서 말을 꺼내긴 했지만, 막상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진 않다면서 백호는 더 열심히 엿을 씹어 먹었다.
* * *
이른 아침에 감옥의 문이 열렸다. 그동안 감옥 안에서 나름 편안하게 지내 왔던 이들은 갑작스럽게 감옥 밖으로 나오게 되어서 얼떨떨한 듯 쉽사리 움직이질 못했다.
이병현 대감 아래에서 일을 하던 그들은, 제대로 일을 수행하지 못해서 목숨을 위협받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다가 명월을 믿고 따르기로 마음을 먹어서 감옥 안에서 얌전히 지내왔는데, 왜 바깥에 나와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마치 어디로 가면 되는지를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사내들을 두고 이방이 말했다.
“이제 괜찮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건 확실히 해야 하는 법이었다. 이곳으로 나가는 순간 이병현 대감이 어찌 나올지 알 수 없었던 만큼, 사내가 앞으로 나서선 조심스레 물었다.
“사또께서 정말 우리를 내보내라 하셨던 겁니까? 그 말씀만 하셨습니까?”
묻는 사내의 표정은 굳어 있었지만, 동시에 걱정과 염려가 짙었다.
사내가 왜 저러는지 모르진 않았던 이방은 순순히 말해 주었다.
“이병현 대감이 실종되었다. 그리고 최근 고을 안으로 이상한 돌림병이 도는지 자는 도중에 숨이 끊어지는 이들이 많다. 그러니 너희들도 이만 돌아가서 가족들을 보살피거라. 떨어져 있는 동안 서로에게 문제가 생기면, 안 되잖으냐.”
“…….”
지금 여기서 놀라워야 할 일이 이병현이 대감이 실종된 것인지, 아니면 돌림병인지 알 수 없었다. 설명을 듣고도 이해가 되질 않아 멍하니 있는 사내를 두고 이방은 한숨을 쉬었다.
“너희들이 바깥으로 나가도 더는 위험할 게 없다는 말이다. 돌아가서 가족들과 함께 있거라. 위협이 없다 하더라도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는 편이 나을 거라는 걸,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다. 그동안 감옥 안에 있느라 고생 많았고, 다음부터는 절대로 사또께 해가 되는 일은 하지 말거라.”
물론, 앞으로 두 번 다시 사또 명월에게 해를 가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아직도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기만 하는 사내들을 두고 이방은 입을 다물었다.
그도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너무도 갑작스러운지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으로선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말했고, 그것에 대해 이들이 더 깊은 의문을 제시한다면 그에 대한 대답을 해 줄 자신이 없었다. 제대로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존재는 딱 하나뿐이었는데, 그는 지금 바깥에 나가 있었다.
이병현 대감이 실종되어서, 그 부인이 난리인지라 일단 찾아가 수색하는 시늉이라도 하기 위함이었다.
* * *
포졸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풀을 헤집었다. 이곳은 물길이 있던 곳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떤 문제 상황이 발생할 만한 곳도 아니다. 일부러 풀을 헤집으면서 확인해야 할 정도로 풀이 길게 자란 것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숲에 있는 너른 풀밭일 뿐이었다.
보이는 건 풀, 오로지 풀. 그런 곳은 한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뭔가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극성스러운 여자는 이곳 어딘가에 남편이 있을 거라는 주장을 굽히질 않았다.
명령을 받아 탐색을 하게 된 포졸들의 표정은 그리 썩 밝지 않았다. 힘든 일을 시키기 위한 가장 기본은 바로 끼니 제공인데, 이들은 그걸 거른 채로 오로지 수색 작업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저들끼리 있으면 가볍게 끼니를 때울 수 있었겠지만, 지금 이곳엔 사또 명월이 있었고 실종된 이병현 대감의 안사람도 와 있었다.
굳이 가마에서 내린 그녀는 돌처럼 굳은 얼굴이 되어선 풀을 수색하는 포졸들을 감시했다. 그들 중 누군가 수색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당장 달려들어 뭐라 하기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명월이 등채로 풀을 옆으로 툭툭 치면서 앞으로 조금씩 이동했다. 눈을 내리뜬 채로 풀을 살피다가 발끝으로 그곳을 눌러 본다.
부드러운 흙이다. 이런 곳에 씨를 뿌리면 뭐라도 잘 자랄 거다.
심드렁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포졸 하나가 명월에게 다가왔다.
“사또. 다 찾아봤으나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더는 이곳에서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식의 말에도 명월은 여전히 눈을 내리떠 흙 위를 살필 따름이었다.
포졸은 자신이 괜한 말을 꺼낸 건가 싶었다. 명월이 멈추라 하기 전까진 이 부근을 계속 수색해야 했던 게 아닐까.
포졸은 죄송하다며 이만 물러나 보겠다는 말을 하려 했지만, 그 전에 명월의 입이 열렸다.
“그래. 내가 봐도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 별 의미가 없다. 이만 물러나자. 가서 밥이나 배불리 먹어야지 머리가 좀 굴러갈 것 같구나.”
명월의 말에 포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는 고개를 돌리면서 팔을 흔들었다.
“이만하고 돌아가자. 철수다―.”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포졸들이 손을 털고 일어섰다. 다들 하라고 해서 하긴 하는데, 지금 이 작업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떠날 준비를 굳이 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손에 묻은 흙만 털어내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포졸들이 자리를 뜨려 하자 바로 여인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지금 대체 뭣들 하는 건가?! 아직 대감을 찾지 못했는데, 어딜 갈 셈이야?!”
날카로운 것뿐만이 아니라 신경질적이었다. 가장 듣기 힘든 종류의 음성이었고, 명월은 곧장 소리를 친 이에게로 걸어갔다.
풀을 밟으면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명월을 두고 부인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화가 나기도 하고, 흥분한 것 같기도 한 그녀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모습이었고, 명월은 그녀 앞에 멈추어 서선 말했다.
“우린 최선을 다했고 여기엔 대감이 없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이게 마지막이오. 더는 대감을 찾는 일에 우리가 나서지 않을 것이니, 나머지 일은 그쪽에서 알아서 해야 할 겁니다.”
명월의 말에 부인의 입가로 헛웃음이 걸린다.
그도 잠시, 그녀는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을을 관리하시는 사또께서 어찌 그리도 무책임한 말씀을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응당 책임을 져서 찾아주셔야 할 게 아닙니까. 제 남편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 반양에서는―.”
“벌써 나흘째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일부러 대감이 모습을 감추신 게 아니라면 못 찾을 이유가 없지요. 아니면, 안 좋은 일을 당하셔서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깊숙이 모습을 감추고 계실지도요. 그런 거라면 암만 포졸들이 노력한다 한들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쉽게 들키는 곳에 대감의 시신을 버려 두진 않았을 테니까요.”
죽어서 찾기 힘든 곳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도 염두에 두라는 의미의 말이었다.
나흘 동안 이병현 대감을 찾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 자들은 있어도, 부인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이들은 없었다. 때문에 경악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이들을 두고도 명월은 태연했다.
조금의 흔들림 없는 표정과 눈빛으로 주시해 오는 것에 부인은 이를 악물었다. 움켜쥔 손이 덜덜 하고 떨린다. 그래도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던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대감께서는―.”
“요즘 반양 땅에 떠도는 흉흉한 소문을 들어 보셨습니까?”
말을 끊고 오히려 되묻는 말에 여인은 입을 다물었다. 얼굴색이 변하는 걸 보니 들어본 모양이었다.
그간 이병현 대감을 찾는다고 여기저기 난리를 치고 다닌 결과, 부인의 안색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살만 빠져서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면 마치 귀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약간의 농을 덧붙이자면, 지금껏 명월이 본 귀신들 중에서 가장 무서운 얼굴인 것 같기도 했다.
나흘 동안 그녀가 제멋대로 굴게 해 주었지만, 더는 아니었다. 딱 나흘만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슬슬 그걸 마무리 지을 필요가 있었다. 부인을 비롯하여,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함께 온 자들을 바라보며 명월은 나직이 속삭였다.
“귀신을 믿으십니까? 전 믿습니다.”
부인 뒤에 선 사내가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을 떠는 걸 확인한 후, 명월은 등채의 끝과 끝을 힘주어 붙잡았다.
“이번 일은 제가 나설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부인께서도 적당히 하시고 몸을 추스르십시오. 잘못 하다간 부인께도 화가 미칠까 걱정이 됩니다.”
이번 말에는 그녀도 어느 정도 타격을 입은 모양이었다.
반쯤 벌려진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처음에는 분노뿐이었지만, 어느 순간 그 안쪽으로 공포와 두려움이 서린다. 그 원인에 대해 모르지 않았던 명월은 바로 부인의 옆을 지나쳐 갔다.
사또 명월이 앞장서니 뒤를 따르는 포졸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포졸 하나가 명월 옆으로 붙어 섰다. 눈치를 살피던 그는 얼굴을 붙이곤 나직이 속삭였다.
“표정이 엄청납니다.”
“자네 부인도 저런 식으로 화를 내나?”
명월이 바로 대꾸를 해 줄 줄은 몰랐기에 의외다 싶었던 포졸은 바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암만 화가 나도 한 번은 참는 사람입니다.”
“그래? 자네는 참 복이 많군. 만약 내가 이병현 대감이었으면, 저런 부인이 무서워서 젊었을 적에 도망 나왔을 것 같은데 말이야.”
가만히 있던 포졸의 입술 꼬리가 올라간다. 급히 손을 들어 입을 가리긴 했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까지 숨길 순 없었다.
“사또께서 그런 농담을 하실 줄도 아셨습니까?”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다.
아무리 재물이 좋다 해도 저런 여자랑은 한시도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이병현 대감이 살아서 말썽을 일으킬 때에는 당장 사라지길 바랐으면서 막상 그에게 문제가 생기고, 여기저기 잡음이 많이 들리니 어떻게든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니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겠지.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다. 지금 이런 상황에선 말이다.
정말 재미있는 말을 들은 양 웃음을 참지 못하는 포졸을 두고 명월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끼니를 놓쳤더니 슬슬 배가 고프다. 포졸 하나를 먼저 관아로 보내서 음식 준비를 해 두라 말해야 하는 걸까. 그리 생각을 하면서 산길을 계속 내려왔다.
애초에 명월이 수색을 한 곳은 지대가 낮아서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 쑥이나 쌈으로 먹을 것들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어린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욕심이 많은 두꺼비가 발에 채여서 뒤집혔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버둥거려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동안 이놈 집, 저놈 집, 아무 데나 들어가서 제 마음대로 했다가 천벌을 받았다. 두꺼비가 뒤집혀서 버둥거리다가 그대로 죽어 버렸다. 천벌이다. 천벌을 받았다―.”
어린아이들의 귀여운 목소리하고는 영 어울리지 않는 노랫말이었다. 그래서일까. 잠자코 있는 명월과 다르게 근처에 있는 포졸들의 안색이 굳어진다. 일단 명월의 눈치를 살핀 그들 중 하나가 “제가 가서 조용히 시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요즘 아이들이 저런 노래를 자주 부르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저런 식으로 노래를 부르고 노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냥 둬라. 아이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저런 노래를 부르지 말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달리는 말보다 더 빠른 게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 하지 않느냐.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다 정리될 거다.”
명월의 말과 다르게 포졸의 생각으로는 이번 일은 쉽게 정리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들은 말이 있으니 더 뭐라 할 수 없었던 그는 알겠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포졸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저 아래에서 올라오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자리에서 콩콩 뛰면서 발랄하게 올라오던 아이들은 포졸과 명월을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하는 소리를 낸 아이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선 반짝거리는 눈으로 명월을 올려다본다.
그 눈동자에 담긴 게 선망이라는 걸 왜 모르겠는가. 처음에는 근엄한 모습으로 내려오던 명월도, 아이들 옆을 지나칠 때에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줬다. 그러자 아이들 사이로 “우와!” 하는 함성이 터져 나온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귀여워 일부 포졸은 소리 내 웃었다. 시끄러우니 조용히 하라는 말에도 아랑곳 않고 재차 “진짜 사또를 봤어!” 같은 소리를 내는 아이들을 두고 명월은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아이들의 함성이 잦아들고 재차 그 노래가 들려 왔다.
“두꺼비가 천벌을 받았다-.”
재잘거리듯 불러대는 노래를 들으면서 명월은 느린 한숨을 내쉬었다.
* * *
제사가 있던 날, 이병현 대감을 위시한 다른 자들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은 집으로 와서도 말이 없었고, 가족들이나 안사람들이 묻는 말에도 대답이 없었다. 그저 피곤하니 조용히 해 달라 하고 낮부터 이불을 깔고 누웠다는 거다.
처음엔 왜 저러는가 싶어 이상하다 싶다가도 밤을 지새워서 제사를 보내서 그런 거겠거니 싶었던 자들은 더 뭐라 하지 않았다. 쉬고 싶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는 주변에서 사람을 물리고 조용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하루가 꼬박 지나서 다음 날 해가 떴을 때, 반양 땅 곳곳에서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이 죽어 나간 거다. 하나같이 제사를 지내고 나서 피곤하다면서 일찍 잠자리에 든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두려운 걸 본 것마냥 눈을 부릅뜨고 입을 크게 벌린 채로,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숨이 끊어져 있었다.
하나뿐이라면 가벼이 넘어가겠지만, 그 수가 오십이 넘는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남편이, 식구가 죽었다는 것에 놀라서 울부짖던 이들은 제사에 참가한 사내들이 똑같은 몰골로 숨이 끊어졌다는 걸 알게 되곤 공포를 느꼈을 터였다.
처음에는 울부짖다가, 죽은 자들이 더 있다는 말을 듣고 아연해졌다가, 곧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다음엔 자신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들은 이병현 대감을 떠올렸다.
구미호에게 당해서 쓰러졌다 하던 대감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제사를 지낸답시고 사내들을 불러 모았던 거다.
애초에 그가 사람을 모으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도 않았을 게 아닌가, 하는 그들의 생각이었다. 왜인지 억울하고 분통이 터진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으나, 대감에게라면 물으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이병현 대감의 대문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이병현 대감을 부르면서 바깥으로 나와 해명을 해 달라 했다. 왜 우리 그 사람이 죽은 거냐면서 대문 앞에 주저앉아 곡을 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왜 저러는가 싶어 밖으로 나와 구경을 하던 이들도 사정을 알고는 하나같이 안색을 굳힌 채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시장이나 거리에 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개미 한 마리도 지나치지 않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오로지 사람을 잃은 자들만 길바닥에 나앉아 곡을 했던 것이다.
그 곡소리를 듣다 못해 이병현 대감 집에서 사람이 나왔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이가 나와서 “대감은 안 계십니다.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같은 말을 했지만, 그 말에 수긍하고 흩어질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끔찍한 일을 경험하고, 다음으로 자신들이 그리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문 앞에 서서 이병현 대감이 없으니 여기서 이러지 말고 돌아들 가라는 사내를 밀치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미친 것처럼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었던 사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흥분한 사람들이 그런 그를 발로 차고 흙 위로 굴려 버렸다. 죽는 소리를 내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넓은 저택을 구석구석 다니면서 이병현 대감을 찾았다.
예전에는 대문 앞을 지나칠 때에도 고개를 푹 숙이고 차마 똑바로 쳐다도 보지 못했던 곳이었다. 이병현 대감이 불러 주기를 기다리면서 하루하루 전전긍긍하던 시기도 있었다.
반양 땅에서만큼은 나라의 임금님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행세하던 이병현 대감이었다. 그런 그의 저택에서 이런 행패라니. 지금껏 없던 일이었다.
여기저기서 왜들 이러냐고, 다들 미친 거냐면서 악쓰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뭔가에 씐 것마냥 이병현 대감을 찾으려 들었다. 그리고 안쪽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이병현 대감의 처가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사람들의 행패에 놀란 것인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신을 신은 채로 대청 위로 올라오거나 방 안으로 들어선 이들을 본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대체 무슨 짓들을 하는 것이더냐! 매질을 당하고 싶은 거냐!”
“이병현 대감은 어딨소! 우리는 당장 대감을 만나 봐야 하오!”
보통 땐 매질을 한다 하면 다들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려선 벌벌 떨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게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부릅떠서는 그녀 앞으로 다가와 이병현 대감을 내놓으라 하는 것이다.
처음엔 분위기 파악을 할 수 없었던 부인은 화가 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놈들이 단체로 미친 것이냐!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지금 당장 다들 죽게 생겼는데 미치지 않고 배기겠소?! 어제 제사에 참가한 사내들 중에서 절반이 죽어 나갔소! 피곤하다면서 일찍 잠자리에 든 이들이 자다가 죽어 버렸는데, 그걸 본 우리가 제정신이 될 수 있겠소?! 다 필요 없으니 이병현 대감을 내놓으시오! 숨겨 봤자 아무 소용없소!”
“그렇소! 대감에게 나오라 하시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이 대감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오?! 대감이 죽다 살아난 게 아니라, 귀신이 붙어서 눈을 뜬 게야! 그래 놓고는 멀쩡한 사람들 다 데리고 가서 제사를 한답시고 말만 번지르르 해 놓고는 오히려 저주를 내린 거지! 그러니 내 아들이 그리 허망하게 죽어 버린 거야! 내 아들 살려 내시오!”
“내 남편을 살려 주시오! 나쁜 일이라곤 살아생전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대감이 몇 번이나 협박을 하면서 시키는 대로 하라 해서 이상한 일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리된 것이 아닙니까!”
“모든 건 대감 때문에 벌어진 일이오! 우리는 아무 죄가 없소! 그저 하라는 대로 따랐을 뿐인데 왜 그들이 죽어야 한단 말이오! 정말로 죽어야 할 건 이병현 대감이 아니오!”
“그렇소! 죽어야 할 건 이병현 대감이오! 그를 당장 내놓으시오!”
여기저기서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는 동안 부인의 얼굴은 점점 창백하게 질려 갔다.
마당 앞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흉흉했다. 개중에는 손에 막대나 낫 같은 걸 들고 있는 자도 보였다. 약간이라도 수틀리면 당장 저걸 휘두르면서 달려들 것만 같았다.
보통 때와는 다른 분위기에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인지 집 안에서 일하는 여인이 달려와 “마님. 그냥 안에 들어가 계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때 뒤에서 뻗어진 손이 그 여인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어딜 안으로 들어가라 해?! 지금 당장 대감더러 나오라 해라! 어째서 우리 아들만 죽어야 한단 말이냐! 대감이 나오기 전엔 난 여기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에구머니나―!”
갑자기 머리가 잡힌 여인은 계단을 굴러서 아래까지 떨어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곳에서 몰려든 이들이 그녀에게 매질을 해 댔다. 사방에서 떨어지는 매질에 여인은 소리도 크게 내지르지 못했다.
그걸 보는 부인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맞는 건 다른 자인데 마치 자신이 매질을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거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로 있던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만해라.”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작았기에 그들에게 들리진 않았다. 조금 더 크게 말해야만 했다 싶었을 때, 다른 곳에서 머슴이 나타났다.
“다들 그만하시오! 안 그래도 대감 나으리께서 사라지셔서 우리도 찾아보던 중이었소! 우리도 어제 낮에 들어오신 대감께서 피곤하시니 들어오지 말라 해서 오늘 새벽에나 그분이 사라진 걸 알게 되었단 말이오!”
그리 말하는 머슴도 어디서 맞은 건지 얼굴에 멍이 들어 있었다.
지금 머슴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지만, 흥분한 이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거짓말 마라! 그런 식으로 대감을 우리들에게서 숨기려는 게 아니더냐!”
“이런 마당에 뭐 하러 그런 짓을 하겠소! 정말로 대감은 안 계시오! 정 믿을 수 없거든 뒤져 보시오! 뒤져서 대감이 나오신다면 내가 목을 매고 자결을 하겠소!”
“그래! 이놈아, 어디 두고 보자! 반드시 대감을 찾아낼 것이야!”
그 말이 신호가 되어서 사람들이 다시 흩어졌다.
그들이 살피지 않은 게 없었다. 흥분한 그들은 손에 집히는 대로 집어 던졌고, 책상이나 장, 그리고 화분 같은 것들이 문이나 창밖으로 던져졌다.
마당에 떨어져서 요란하게 박살 나는 것들을 보는 부인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하게 질려 갔다. 그때 사람들에게 얻어맞아서 엉망이 된 몰골의 여자가 기어와 그녀의 발아래에 엎드렸다.
흐느껴 울면서 “마님.”을 부르는 소리에 부인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아서일까. 순식간에 늙어 버린 양,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있던 그녀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때 누군가 외쳤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사또를 찾아뵙시다!”
그 말에 미친 것처럼 난동을 부리던 사람들의 행동이 멈추었다.
“사또를 찾아가 이 억울함을 호소합시다!”
귀신을 보고 그걸 퇴치한다는 사또였다. 그라면 지금 이 사태를 어떻게든 정리해 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 말에 다른 이들은 쉽게 동조할 수 없었다.
사람이 죄를 짓고 잘못을 하면 찾아가는 게 바로 관아였다. 그리고 그 관아에 있는 사또는 조금 특이한 이였다.
정말로 죄가 없고 억울함만 있는 거였다면 여기에 있는 자들 모두 관아를 찾았을 거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기에 쉽사리 움직이질 못했다.
얼어붙은 것마냥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들이 답답하다는 양, 말을 꺼낸 이가 먼저 몸을 돌렸다.
“난 사또를 찾아갈 것이오! 날 따라올 사람들은 따르시오!”
여기서 암만 난리를 쳐 봤자 대감이 나타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관아를 찾는 게 나았다.
당당하게 대문을 빠져나가려 했을 때, 누군가 나타나 그들 앞을 막았다.
그 앞에 서 있는 건 한 선비였다. 키가 크고 눈이 찢어진 데다 코가 삐뚤게 나서 좋게 봐도 잘생겼다 할 수 없는 외모를 지닌 자였다.
지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자들은 멀고 가까운 친척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문을 막아선 자가 누군지 바로 알아봤다. 그도 친척 중 하나였고, 이번 제사에 참가한 이 중 하나였던 거다.
다만 그는 죽지 않고 아직 살아 있는 쪽이었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나타나 앞을 막아서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면서도 사내는 그를 지나쳐 가려 했고, 그때 사내가 양팔을 벌렸다.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
사내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이상했다. 녹슨 쇠를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였다.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가 대신 말을 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걸 앞에서 들은 이의 얼굴은 자연스럽게 일그러졌고, 동시에 선비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동안 여기서 사람을 죽인 놈들이 천벌을 받는 것이다! 남들에게 해를 가하고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 와 뭐가 억울하다고 관아를 찾는단 말이더냐! 그런 짓을 해 봤자 아무 소용 없을 것이다!”
“…….”
“너희 모두 저주를 받았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서 죽을 날만 기다리거라! 그걸 억울하다 하지도 말거라! 너희에게 당하고 죽어 간 이들이 정말 억울한 이들이다! 그들이 이번 일을 꾸민 것이다!! 네놈들이 진정으로 반성하지 않는 한, 그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뒈져 버린 놈들은 대충 화장을 하거나 처리를 하고, 어서 돌아가서 진정으로 억울하게 죽어 간 이들의 넋을 기리는 제사라도 지내거라!!”
걸걸하기도 하고 날카롭기도 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다. 그 말 하나하나가 모여 있는 자들의 몸을 호되게 후려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때마다 히익, 거리면서 헛숨을 삼키거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했다.
“그동안 승승장구하면서 제멋대로들 굴었겠지만, 더는 아니다! 여기가 너희의 끝이다! 주제도 모르고 죄 없는 사람을 해하거나, 괜한 일을 벌여서 그들을 성가시게 만들면 너희들도 그 자리에서 죽어 나갈 것이다! 이병현 대감을 찾지도 마라! 죄가 깊은 그놈은 영혼뿐만이 아니라 육신도 갈가리 찢어져 크나큰 고통 속에서 뒈져 버렸으니까―!”
그리 외친 선비는 양팔을 벌리곤 큰 소리를 내 웃었다. 그 웃음이 벼락이나 천둥보다 무서웠다.
남아 있던 자들은 사색이 되어서 그 자리를 피하려 했고, 계속해서 웃던 선비는 갑자기 숨을 몰아쉬더니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이후로는 아수라장이었다. 이병현 대감을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리던 이들은 다들 저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문을 걸어 잠그고 신속하게 죽은 이를 처리했다.
그들 중에서 관아를 찾아가는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죄가 없다고, 억울하다고 말을 하긴 했으나, 다들 찔리는 구석은 하나씩 있었던 거다.
반양이기 때문에, 사람이 아닌 귀신도 존재하는 땅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그들이 두려움에 질려 집 안에만 꽁꽁 들어가 있을 때에, 그들과 관련이 없는 보통 사람들은 이튿날부터 그들의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은밀하게 노래가 만들어졌다. 그 노래를 아이들이 부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
* * *
그간 당연한 듯 악행을 일삼던 이병현 대감은 실종되었고, 그의 수족이 되거나 앞장서서 나쁜 짓을 했던 이들은 전부 죽어 버렸다. 죽은 이들의 수는 적지 않았다.
이 정도로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면 도성으로 보고서를 올려야만 했다. 명월은 그걸 작성해 나갔고, 수많은 이들의 죽음에 대한 사유를 돌림병으로 적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돌림병이 돌아서 멀쩡한 사내들이 죽어 나가고 있으니, 당분간 외부 사람들의 출입을 금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과 정리가 되면 재차 공문을 올리겠다는 식으로 작성을 해서 위로 보냈다.
명월이 죽음의 사유를 돌림병으로 적어 넣는 것에 대해서 뭐라 하는 이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
원래 바깥에서 유입되는 사람들로 인해서 생활을 연명하던 이들은 없었다. 반양은 온전히 그들끼리 똘똘 뭉쳐서 살아온 폐쇄적인 땅이었다. 이번 죽음의 사유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못된 짓을 해서 귀신에게 저주를 받았다, 라고 믿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외부인들은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다른 이유로 알려지는 편이 나았다.
알아서들 쉬쉬하고 묻어 두려고 하니 그걸 전체적으로 정리해서 처리하는 입장은 편하긴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일만 처리하려 했다면 이상하다 싶어서 파고들어 갈 수도 있겠지만, 사건의 전후 사정을 전부 다 알기 때문에 괜찮았다.
명월은 저들이 모르는 진실을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초반에 열심히 돌아다녔던 것에 반해서 지금은 그냥 해야 할 일만 하는 실정이었다.
모든 이들의 억울함을 다 풀어 줄 필요는 없었다. 본인이 잘못한 게 있다면 그걸 책임질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그런 것들을 알게 되었을 때, 몇 가지는 그냥 눈 감고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도 필요한 부분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게 영 마음에 걸리면 할 수 있는 일만 따로 하는 게 나았다.
명월은 어린 아기를 품에 안은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그간의 고생을 알려 주듯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여인의 품에서 잠든 어린 아기가 귀엽다.
새근거리면서 깊은 잠이 들 수 있는 건, 여인이 피곤한 상태에서도 아이의 엉덩이를 토닥이면서 잘 잘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일 터였다.
“어려 보이는군. 얼마나 되었나?”
“갓 돌을 지났습니다.”
갓 돌을 지난 아이를 여자 혼자서 키우긴 힘들 거다.
본래 외부 사람이었던 여인은 어떤 남자를 만났다. 반강제적으로 몸을 빼앗겨서 울며 겨자 먹기로 후처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어떻게든 마음을 붙이고 살려 하던 중에 이 사달이 일어난 거다.
남편이었던 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었고, 그로 인해 집안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다들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방에 들어가 나오지도 않았고,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대략적인 사정을 알게 된 여인은 때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아기만 데리고 나와 관아를 찾았다. 그리고 명월에게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 청을 했다.
집안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할 순 없었다. 문제가 커질 수 있음을 알기에 그녀는 마음을 비우고 찾아온 거였다.
된다고 하면 집으로 돌아가는 거고, 안 된다고 하면 그 기분 나쁜 곳으로 되돌아가면 그만이었다.
포기를 했기 때문일까. 시종 담담한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던 명월이 물었다.
“본가로 돌아가면 그 아이를 잘 키울 수 있겠나?”
“무슨 일이라도 해서 아이를 먹여 살려야지요. 그 어디를 가든 이곳보단 나을 거라는 생각에 사또를 찾아온 겁니다. 안 된다면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애초에 저도 꼭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찾아온 건 아니랍니다.”
가녀린 외모와 달리 당당한 구석이 있는 여인이었다.
아마도 아이 때문이겠지.
“자네가 이리로 와서 이런 말을 한 걸 안다면 그쪽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네.”
“다들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습니다. 작은 시비가 붙어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처럼 닦달을 하니,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차라리 제가 사또를 찾아온 게 알려져서 저들 손에 맞아 죽어야 이 불편한 상황이 끝날 것만 같습니다.”
“아기를 품에 안고 맞아 죽는다는 말을 해서야 되겠나. 그런 말은 하지 말게.”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눈을 내리뜬 여인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곳은 모든 것들이 다 이상합니다. 치욕을 당했을 때 포기를 하고 이리로 오는 게 아니었습니다. 암만 어머니가 말씀을 하셨어도 그냥 목을 매고 자결을 했어야 했습니다.”
“자네가 그리되었다면 품에 안고 있는 아기는 태어나지 못했을 거네.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말게. 내 돌아갈 수 있도록 손을 써 두겠네.”
여인은 놀라 고개를 들어 명월을 바라봤다. 명월의 입에서 도와준다는 식의 말이 나올 거라곤 예상치 못했던 거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 여길 벗어날 생각도 못 하고 있지. 여길 떠나겠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건 용기가 있는 사람들뿐이고, 자네가 그런 종류인 것 같군. 많은 고민을 한 후에 찾아온 것이니, 도와주는 게 맞지 않겠나.”
“―그리고 전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
긴장한 채로 말을 덧붙인 여인은 명월의 얼굴을 살폈다.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눈앞의 사또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두렵게 여겨지지 않았다. 집안의 다른 이들처럼 방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질려서 덜덜 떨 필요도 없었다.
“귀신의 저주를 두려워할 만한 나쁜 일을 저지른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 말한 여인은 입을 다물었다. 내내 생각하고 있던 말을 해 버려서 속이 시원한 듯하지만, 동시에 눈빛은 굳어 있었다. 이런 말을 공공연히 해도 정말 괜찮을까 싶어, 그게 두려운 거겠지.
여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고, 지금 그녀의 복잡한 마음도 알 것 같았던 명월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지금 바로 출발할 준비를 하라 덧붙였다.
바로 떠난다는 말에 여인은 당황한 듯싶었으나, 곧 자신이 관아를 찾은 것에 대해 집안사람들이 알지도 모른다는 것에 생각이 미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여인과의 면담을 끝내고 명월은 밖으로 나왔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기지개를 한 명월은 한숨을 쉬었다.
“……피곤하군.”
전에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그곳으로 달려가 여기저기서 쑤시면서 다녔다.
지금은 자리에 앉아만 있긴 해도 그에게 찾아와 이것 좀 해 주십시오. 저것 좀 해결해 주십시오―라면서 징징거리는 일들이 많았다.
그런 일을 앉아서 처리하는 것뿐인데도 묘하게 피곤했다. 그냥 다 무시하고 푹 쉬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고작 나흘이 지났을 뿐이었다.
이만한 일이 완전히 마무리 지어지기 위해선 족히 몇 년이 걸릴 터였다.
사람들 뇌리에서 이 끔찍한 사건이 사라지고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단다.’라는 말을 하려면 적어도 10년은 걸리겠지. 그때까지 자신이 이곳에서 사또로 부임해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명월은 걸음을 옮겼다.
그때 저 앞에서 달려오는 이방이 보였다. 그도 달리 할 일이 있어 바쁜 상태였다. 전보다 훨씬 더 홀쭉해진 얼굴을 보자니 마음이 아프지만, 지금으로선 그만큼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수가 없었다.
앞으로 점점 더 부탁하는 것들이 많아질 거라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멈춰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이방을 바라봤다.
“여기에 계셨습니까. 한참을 찾아 다녔습니다.”
“갑작스러운 손님이 찾아와서 어쩔 수 없었네. 자네 괜찮으면 가마에 체격이 좋은 가마꾼. 그리고 그걸 호위할 만한 포졸 몇만 추려 주게.”
“가마와 가마꾼이 왜 필요합니까?”
“어린 아기와 그 어미가 본인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청을 해 왔네. 그런 부탁이라면 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명월의 말에 이방은 바로 입을 벌리고 아―하는 소리를 냈다.
상을 당한 집안에서 몇몇 이들이 이런 식으로 은밀하게 찾아와 이곳을 떠날 수 있도록 부탁해 주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개중 대부분은 명월이 심드렁한 반응을 취하거나 쫓아내곤 했다. 그대들이 알아서 떠나든지 말든지 하시오―라면서 말이다.
물론, 그렇게 굴어도 될 만한 자들이기 때문에 거절한 거였다. 하지만 이번엔 하나하나 준비해 주는 걸 보아하니, 사연이 있는 여인인 모양이었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던 이방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해서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안쪽 별채에 있도록 해 두었다. 포졸을 붙여 두었으니 괜찮겠지만, 내가 바쁜 것 같으면 자네가 지시를 내려서 그녀가 고향에 갈 수 있도록 해 주게. 듣자 하니 멀지도 않은 것 같더군. 꼬박 걸어서 하루 거리지만, 아기가 있는 여인에겐 그조차도 까마득한 일이 아니겠나.”
“하루라. 그러면 금방 다녀올 수 있겠군요.”
명월이 하는 말을 토대로 이방은 어떤 이들을 써야 하는지를 머릿속에서 착착 끼워 맞춰 갔다.
최종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만 입력한 이방은 곧장 품에서 서류를 꺼내 명월에게 내밀었다.
“이건 이번에 화장을 하는 이들의 명단입니다.”
명월은 종이를 받아서 펼쳐 보았다.
다섯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보아하니 반양에서 꽤나 이름이 날리던 자도 있었다. 이러면 가족묘가 있을 텐데, 화장을 선택하는 것인가. 의외다 싶은 표정이 얼굴로 드러난 건지 이방은 나직이 속삭였다.
“시신을 그대로 두면 저들에게도 해가 올 거라고 생각들 하는 거겠지요.”
그리 말하는 이방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이런저런 일이 있어 사람이 이상하게 죽어도 그걸로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정황을 살피지도 못하는 이들이었다. 심지어 정상적인 장례를 치르는 것도 아니고, 화장을 선택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최근 여기저기서 역한 냄새 때문에 힘들다는 민원이 들어온 적도 더러 있었다.
명월이 나서서 화장을 하고 난 후 주변 청소를 제대로 하고, 냄새가 심하게 나지 않도록 하라 말을 한 후에는 정리가 되는 것 같긴 했지만―.
도대체 뭐가 이리도 찔리는 구석이 많아서 사람이 죽어도 그걸 쉬쉬하고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걸까. 심지어 자신을 두렵게 여기고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이대로 조금 더 갔다간 그들 중 몇몇은 그간 저들이 한 악행을 길게 적은 장부나 편지를 들고 올 판이었다.
명월은 종이를 접어선 그걸 제 품에 넣었다.
“이건 내가 보관하겠네. 이번 일 때문에 고생이 많군. 힘들겠지만, 조금 더 신경 써 주게.”
“제가 하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대부분 사또께서 처리하지 않으십니까.”
“호방이 없어서 힘들진 않은가.”
갑작스럽게 호방에 대한 말을 꺼내는 것에 이방은 입을 다물었다.
일이 많을 땐 호방과 나누거나 그쪽으로 부탁하는 경우가 더러 있긴 했다.
그의 빈자리가 아쉽지 않은 건 아니지만, 죽은 사람이 아니던가. 이방은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전 아직도 그 사람이 죽은 것 같지가 않습니다. 언제 갑자기 살아났다면서 나타날 것만 같습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자네는 놀라지 않겠나?”
“놀라긴 하겠지만, 반가운 마음도 클 것 같습니다. 그 사람하고는 안 맞는 구석이 있긴 했어도, 꽤 오랫동안 함께 일을 했으니까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마당에, 나중에 일을 그만두면 그 친구랑 장기나 두면서 남은 여생을 보내려 했지요.”
그런데 이리되었으니 마냥 씁쓸할 따름이었다. 그런 이방의 말을 듣고만 있던 명월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곤 잠시 방에 가서 눕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뒷짐을 지고 느린 걸음을 옮기는 동안 명월은 눈이 자꾸만 감기는 걸 느꼈다. 낮 동안에 별 시답지 않은 곳에서 수색을 한답시고 풀을 헤집고 다닌 게 꽤 피로했던 모양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런 일에 사또인 내가 오지 않으면 안 된다니. 이병현 부인이라 하더니 덩달아 이상해졌다. 다들 그리되었는데, 이병현만 살아 있을 리가 없잖은가.
가장 먼저 죽었을 거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 피곤하게 한다면서 명월은 크게 입을 벌리며 하품을 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하는 동안 어느새 버릇처럼 대문 앞에 멈춰 서게 되었다.
여기로 가면 바로 앞에 자신의 거처가 있긴 했다. 하지만 요즘 그곳을 사용하는 사람은 달리 있었다. 거의 바깥으로 다니지 않고 방 안에서 책만 읽고 계시는 아버지 유일선 영감이 말이다.
이곳에 와서 벌써 며칠째 머무르시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하루만 묵으시고 돌아가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 오늘은 일찍 들어오셨네요?”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명월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 보이는 건 육중한 나비를 끌어안고 있는 계진이었다.
방긋거리면서 환하게 웃는 계진과 달리, 아이에게 들려진 나비는 칙칙한 얼굴이었다. ‘날 건드리지 마. 그냥 자유롭게 놔둬.’ 그리 말하고픈 얼굴로 있는 게 보기에 우습다. 실제로도 피식―하고 웃은 명월은 계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돼지 고양이를 들고 다니면 안 무거우냐?”
“운동하는 느낌으로 들고 다니고 있어요. 그래야 나비도 말썽을 부리지 않을 테니까요.”
나비는 평범한 고양이가 아니었다. 그걸 알고 계진이 이런 말을 하는 걸까도 싶었던 명월은 계속해서 계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뭔가가 생각난 듯, 아―하는 소리를 낸 계진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안에 계시는 대감마님이요. 내일 날이 밝으면 여길 떠나신대요.”
계진의 머리를 쓰다듬던 명월의 손이 멈춘다.
“―그건 어디서 들었느냐.”
“오늘 아침에 우연히 만났다가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곳에 오래 있었던 것 같다면서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하셨어요.”
“…….”
그런 말이라면 우선 자신에게 해야 하는 게 아니던가. 하긴. 그간 일부러 피해 다니던 걸 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딱히 아버지에게 불만이 있거나 한 건 아니지만, 한번 피하기 시작하니 계속 그 얼굴을 보기가 민망하고 괜히 그랬다. 그래서 자꾸만 요리조리 피해 다니다가 결국 이 상태가 된 거였다.
전에 도성에서 함께 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어색하고 묘한 분위기였다.
그걸 다들 알고 있어서 딱히 언급을 하지 않는데, 계진은 달랐다.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돌아가시고 혼자 남아 있게 되어서 그런지 종종 ‘아버지하고 왜 사이가 안 좋지?’ 그런 눈빛으로 바라볼 때가 있었다.
명월은 손을 떼곤 물었다.
“내일 아침, 내가 배웅을 하는 게 맞는 거겠지?”
“당연하죠. 아버지잖아요. 기분 좋게 보내 드리세요.”
계진이 이런 식으로 말할 줄 알고 있었다. 이 말을 듣고 등 떠밀리듯 행동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지. 자신이 어린애보다 못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계진이 위로 제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꼭 좋게 해서 보내 드리기예요. 저랑 약속해요.”
입을 다문 계진은 단호한 얼굴이다. 이대로 새끼손가락을 걸고 흔들면서 약속이다, 라는 말을 하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았다.
덕분에 양손으로 힘들게 안고 있었던 나비가 탈출에 성공해서 저 멀리로 도망쳤지만, 그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단호함 속에서 자신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던 명월도 순순히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명월의 손가락을 단단히 잡으면서 계진이 물었다.
“약속한 거예요? 사나이는 약속한 걸 어겨선 안 되는 거예요.”
“그래. 알았다. 너를 봐서 오늘 저녁에는 술상을 차려서 아버지를 찾아뵈어야겠구나.”
“술상이요? 술 드시게요?”
“그래.”
손가락을 푼 명월은 한숨을 쉬면서 계진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우리는 둘 다 솔직하지 못해서 술기운을 빌리지 못하면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할 것 같거든.”
명월을 바라보는 계진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진다.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과 술이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다.
계진이 기억하는 제 아버지는 언제나 술을 마시면 어머니를 때리고 괴롭히곤 했다. 그러다 술병에 걸려 죽었기 때문에 안 좋은 인식을 품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술 같은 거 마시지 말라고 했겠지만, 상대가 명월이었다.
훌륭한 어른이니까 알아서 잘 할 거라 생각하면서도 걱정이 되었던 계진은 머뭇거리면서 팔을 들어선 명월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계진의 행동에 놀란 명월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명월의 목을 한 번 더 꼬옥 끌어안은 계진은 뒤로 물러서면서 쑥스러운 듯 웃었다.
“힘내서 잘하시라고 힘을 좀 불어넣어 드린 거예요.”
그러곤 바로 팔을 푼 계진은 뒷짐을 지었다. 본인이 한 행동이 생각할수록 부끄러웠던지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발끝으로 바닥을 두드린다.
그런 계진을 보던 명월은 한쪽 입술 꼬리를 올리면서 고맙다, 라고 속삭였다.
* * *
계진에게 말을 했으니 저녁은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따로 방으로 술상을 차리는 것도 좋겠지만, 그런 건 좀 소홀하겠다 싶어서 호란을 찾았다.
그렇다고 옆에 기녀를 붙인 건 아니었다. 사전에 말을 해 두어서 널찍한 방을 빌려 조촐한 술상을 차리게 하고, 그곳에 명월과 유일선 영감만 자리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기방에 술상을 차렸다 말을 했을 때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던 유일선 영감이지만, 명월 쪽에서 먼저 한잔하는 게 어떠냐며 말을 꺼낸 게 처음이기도 했고, 이번이 아니라면 언제 명월과 재차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거절하면 다음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그는 결국 승낙했다.
요즘 반양이 뒤숭숭하고, 기방을 주로 이용하던 자들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기 때문에 호란은 아주 조용했다. 오늘은 자신들 외에 다른 곳에 손님을 받지도 않은 것 같았다.
예전 호접화가 있었을 때, 빈 방이 없어서 외곽의 전각에서 술상을 차리기도 했었다는 걸 떠올리면 엄청나게 큰 변화였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명월은 얼굴에 닿는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아버지를 확인한 명월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운아. 넌 이만 나가 있어라.”
나가 있으라는 말에 복운은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유일선 영감 또한 그리하라는 시선을 보내 왔고, 중간에 끼어서 눈치를 살피던 복운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을 불러 달라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둘은 부자지간이었다. 그런 둘이 술을 마시다가 일이 생길 리가 없잖은가.
생겨서도 안 되는 일이니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자면서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복운이 나가고 난 후, 명월은 술병을 들면서 자세를 바로 했다. 무릎을 꿇고 앉아선 양손으로 술병을 들고 유일선 영감을 바라봤다.
“제가 한 잔 따르겠습니다.”
유일선 영감은 별말 없이 잔을 내밀었다. 그 잔에 술을 따르는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중간에 술이 떨려서 다른 곳에 따라지면 어쩌나 싶어서 숨을 멈춘 채로 천천히 술병을 기울였다.
너무 긴장해서일까. 흘리진 않았지만, 너무 많이 따랐다. 그래도 유일선 영감은 뭐라 하지 않았고, 명월이 들고 있던 술병을 가지고 갔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기에 명월은 잔을 양손으로 들었다. 그곳에 술이 채워지고, 둘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술잔을 비웠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로 술잔을 비운 명월은 혀끝에 남는 쌉싸래한 향에 입맛을 다셨다. 그러자 다시 유일선 대감이 술병을 내밀었다.
다른 음식으로 입가심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명월은 급히 빈 잔을 내밀었다.
다시 술이 차서 앞을 살피자 아버지의 잔도 비워져 있었다.
명월은 술병을 들어 빈 잔에 술을 채웠고,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재차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로 술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두 번째보단 못하지만 그래도 쓴맛은 여전했다. 혀끝에 남는 알싸한 향에 입맛을 다시자 재차 아버지가 술병을 든다.
그것에서 명월은 설마, 싶었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잔에 술이 따라졌다.
“…….”
아버지가 따라 준 잔을 바라보는 명월의 표정은 진지했다.
자신이 호란에 술상을 차리게 한 것을 오해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된 자리를 마련해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건데, 아버지는 단순히 술을 마실 셈인 걸까.
그러고 보니 아버지와 함께 이런 자리를 가진 적이 없으니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뭐가 최선인 걸까. 그런 생각으로 인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결국 명월은 별다른 말없이 열심히 따라 주는 술을 마시고, 아버지의 잔이 비워지면 그곳에 술을 채웠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빈속으로 많은 양의 술이 채워졌다. 술만 마셨는데도 배가 부르구나 싶어서 상 위를 살피자 빈 술병이 세 개나 놓여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명월은 다급히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봤다.
이렇게 마셨는데 정말 괜찮은 걸까 싶어 살피는 아버지의 얼굴은 의외다 싶을 정도로 멀쩡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새롭게 술병을 집어 드는 것에 맞춰서 명월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술은 얼마든지 있으니 천천히 마시고, 음식도 좀 드시죠.”
말을 하는데 트림이 나오려 한다. 이 모든 게 술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명월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재차 말했다.
“여기 음식 맛도 썩 괜찮습니다. 한번 드셔 보시지요.”
그런데 이리 말을 하는데도 음식이 아닌 술병을 집어 든다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다시 술을 마셔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명월은 긴장한 눈빛을 한 채로 있었고, 그때 유일선 영감의 손이 술병이 아닌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걸 보는 순간 명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 마시면 취할 것 같았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명월은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계속해서 나오려는 트림 때문에 속이 거북하다. 술기운이 빠르게 올라오는 걸 느끼며 일단 물을 마셨다. 그런데 술이 그득 찬 뱃속에 물이 들어가니 느낌이 이상한 것 같다.
결국 고기전을 집어 들곤 그걸 우물거리면서 먹었다.
고기가 두툼하니 맛이 괜찮았다. 그 외에 김치나 나물, 잡채도 맛이 좋았다. 조금씩 맛을 보면서 앞을 살피자 아버지의 표정도 그리 썩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이대로 가다간 계속 먹기만 하다가 다시 술을 마시게 될 것 같았다.
이 자리를 마련한 건 자신이었다. 말을 꺼냈을 때 아버지가 그걸 받아들인 건 자신이 무언가 말을 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겠지.
건너 들은 말로는 내일 떠난다 하셨다. 말은 없으셔도 이곳이 뒤숭숭한데 떠나려는 마음이 복잡할 수도 있었다. 그 외에도 도성으로 올라가서 반양 땅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지도 몰랐다.
명월은 위에다가 돌림병이라고 해서 보냈지만, 아버지는 다른 견해를 언급할 수 있었다. 워낙에 대쪽 같은 분이신지라, 아들 일이라 해서 무조건 이쪽 편을 들어주실 리도 없고―.
원래 이런 건 생각하지도 않던 부분인데 머리가 자꾸만 그쪽으로 돌아간다.
그때 앞에 놓인 접시 위로 고기전 하나가 올려졌다. 이건 무언가 싶었던 명월은 눈을 끔벅이다가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봤다. 명월 접시에 고기전을 올려 준 유일선 영감은 시선을 피했다.
“요즘 많이 마른 것 같더구나. 고기를 충분히 먹어서 살을 좀 찌워야겠다.”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명월은 고기전을 입에 넣었다. 맛이 좋은 건 여전했다. 그런데 처음 자신이 집어먹던 것하고는 묘하게 느낌이 다르다. 왜 그럴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명월의 시선이 잡채에 꽂힌다. 용기를 낸 명월은 잡채가 담긴 그릇을 들어서 유일선 영감 앞에 내려놓았다.
“드셔 보십시오. 맛이 괜찮습니다.”
조금 전 자신처럼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것에 명월은 웅얼거렸다.
“잡채를 좋아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니면 창피한 일이겠지만, 일단 명월은 그리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알고 있던 부분이 잘못된 게 아니었던지, 아버지는 순순히 잡채에 젓가락을 대곤 그것을 맛봤다. 입 안에 있던 걸 다 삼킨 후, “맛이 좋구나.”라고 하는 것에 명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술도 괜찮지만, 음식도 정갈하게 잘 나오는 곳이랍니다. 차도 잘 끓이지요.”
“차라. 난 여기서 차를 마신 적이 없는데, 맛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구나.”
부친의 말에 명월은 입을 다물었다.
앞서 복운에게 아버지가 우선 호란에 들러서 차를 얻어 마시고 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그리 말을 했을 땐 복운도 호접화를 기억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모든 걸 끝내고 사라지면서, 그녀에 대한 모든 기억들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그래서 아버지도 이곳에서 그녀에게 차를 대접받았음에도 그걸 기억하지 못했고, 이리로 찾아온 것도 반양 땅에서 자신이 곤혹스러운 일을 겪고 있다는 것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미묘하면서도 정교하게 변경된 기억들에서 종종 호접화가 떠오르고, 그때마다 명월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건 쉽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면서 명월은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나신다 들었습니다.”
명월이 먼저 말을 꺼내자 유일선 영감은 입을 다물었다. 굳은 표정을 지은 채로 잠자코 있나 싶던 그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냥 이곳에 있을 순 없잖으냐. 내가 도성에서 해야 할 일도 많은데.”
“그러시겠지요. 도성으로 돌아가시면 형님과 어머니께 안부 전해 주십시오.”
그들은 자신의 안부 인사에 관심이 없을 거다. 이건 그저 입에 발린 말일 뿐이었고, 그걸 아버지도 알고 있을 터였다.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고 해서 갑자기 회포를 풀어서 관계가 급격하게 회복된다거나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술기운이 올라옴에도 여전히 어색한 자리였다. 시선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명월은 눈을 내리뜬 채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이곳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터이니, 아버님께선 마음 쓰지 마십시오.”
말이 마음을 쓰지 말라는 거지, 정말은 이곳 일에 대해서 함구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걸 유일선 영감이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표정이 굳어지는 것일 거라며 명월은 재차 말했다.
“제 고을입니다. 제가 이곳의 사또로 있는 이상,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제가 책임질 일입니다. 그러니, 그냥 저를 믿고 맡겨 주십시오.”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돌림병이라는 걸로 정리하겠다는 말이냐.”
“그 외에 어떤 것으로 이곳 일을 덮을 수 있겠습니까.”
“덮는다고? 이 일을 덮겠다고 말한 것이냐.”
“그렇습니다. 전 이곳 일을 덮을 것입니다.”
유일선 영감의 입 밖으로 기가 막힌 듯한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것이 네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더냐. 어찌 그리 부끄러운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단 말이야.”
“무엇이 부끄러운 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선 그 방법이 최선입니다. 돌림병이 아닌 다른 걸 들먹인다면 조사가 나오게 될 것이고, 이곳은 풍비박산이 납니다.”
“…….”
“이 알 수 없는 땅에서 적응해서 간신히 조용하게 살 수 있게 된 이들을 자극해 봤자 좋을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반양 사람들은 반양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괜히 건드리지 마십시오. 간신히 안정을 찾고 있는 중이니, 그냥 지켜만 봐 달라는 말입니다.”
“너는―.”
“제가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드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알았다고 말씀하시고 그걸로 끝내시면 안 되는 겁니까?”
이런 식으로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명월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유일선 영감은 당황해선 입을 다물었고, 명월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귀신 때문에 사람이 죽고, 저주 때문에 하룻밤 사이에 50여 명이 죽었다고 한다면 그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모두가 조롱하고 비웃을 겁니다. 그러곤 저에 대해서 들먹이겠지요. 귀신을 본다는 그 집 업둥이 때문에 아버지마저 이상하게 된 거라는 조롱을 뒤따를 것입니다.”
“…….”
“다른 진실이 있는데 그걸 덮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면서 많은 이들이 이 땅에 관심을 보이겠지요. 낯선 사람이 이 땅으로 오면 안 됩니다. 이 땅은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고, 그냥 있는 사람들로만 유지되고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다가 천천히 사람들 뇌리에서 잊혀져야 한단 말입니다.”
명월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었지만, 유일선 영감의 굳은 표정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경직된 눈동자 안쪽에서 스치는 혼란스러움을 읽어 낼 수 있었던 명월은 그럴 줄 알았다며 쓰게 웃었다.
“아버지께선 이리 말을 하는 저를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
명월은 어려서부터 이상한 걸 보는 아이였다. 하지만 유일선 영감은 명월이 보는 걸 볼 수 없었다.
아이가 간혹 겁에 질리거나 놀라서 옆으로 몸을 피할 때에도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걸 피하고, 몸을 사리고 두려워한다. 그러곤 그런 본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을 혼란스러운 듯 올려다본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지요? 그리 묻는 눈빛에 대답해 주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상처 입고 좌절된 아이의 표정이 어둡게 변하는 걸 몇 번이나 봐 왔다. 아니. 그 이전부터 봐 왔다.
유일선 영감은 자신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던 아우를 떠올렸다. 그 아이와 지금 눈앞에 있는 명월이 겹쳐지면서, 그의 혀끝을 얼어붙게 만든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이 되어 버린 영감을 오해한 명월은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께서 절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신다면, 그 누구도 저를 믿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은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을 거다. 미쳤다면서 손가락질할 것이고, 뒤숭숭한 소문을 퍼트린다면서 자신을 멸시할 거다.
상처를 주기 위한 말을 쏟아 낼 테고, 자신이 이룬 모든 것들을 빼앗아갈 터였다. 파면이 되고, 먼 곳으로 쫓겨나듯 도망쳐야 할지도 모르지.
자신이 그리되면 남은 가족들에게도 안 좋은 영향이 미칠 거다.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눈앞에서 빤히 그려지는 일들이었다.
명월은 그런 최악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거였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아직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명월은 긴 한숨 속에 마음의 답답함을 실어서 내보낸 후,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는 반양의 사또로서 드리는 말이었고,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말을 드리겠습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굳어진 것처럼 들리는 건 느낌 탓이 아닐 거다. 실제로도 경직되어 있었다. 일과 관련해선 혀가 잘 굴러갔지만, 이번엔 그리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쪽이 무슨 말을 꺼낼지 알 수가 없어 경직된 눈빛으로 바라보는 유일선 영감을 두고 명월은 입을 열었다.
“……제가 걱정되어서 이리로 오신 걸 알고 있습니다. 제가 늘 아버지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화가 나신 얼굴로 절 바라보셨지만, 그것이 저를 걱정하기 때문이라는 것 또한 모르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를 속박하고 곁에 묶어 두려고만 하시면 안 됩니다. 앞으로는 알아서 제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넌 내 보호가 필요하다. 내가 네 곁에 있어 주어야 한다.”
기다렸다는 듯 흘러나오는 아버지의 말에 순간적으로 ‘아, 역시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반발심이나 싫은 감정에서 떠오르는 것들이 아니었다.
명월은 고개를 들어 기억보다 훨씬 더 늙고 노쇠해진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래야 무슨 일이 생길 때 내가 널 지켜줄 수 있잖으냐.”
그리 말하는 이는 여전히 완고한 모습이었지만, 눈동자는 아니었다. 저 눈동자 가장 밑바닥에서 자신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명월은 저 눈빛을 다른 존재에게서도 본 적이 있었다. 독각귀인 자신의 친부를 떠올리며 명월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제 아버지도 그런 식으로 묶어 두려 하셨지요.”
아버지라 칭하는 게 본인을 일컫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유일선 영감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흔들린다.
이런 말을 하는 게 그간 자신을 키워 준 아버지에게 할 만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어도 한 번 정도는 거론했어야 할 일이었다.
둘 다 생각을 하면서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던 말. 그걸 털어놓아야지만, 지금의 이 관계가 정리가 될지도 모른다.
“곁에 붙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보호해 주려 하셨던 거지요. 그게 아버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걸 알지만, 저는 그것이 너무도 숨이 막히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유일선 영감의 손이 상 위로 올라왔다.
그런 게 아니다.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어 했지만, 결국 움켜쥐고 마는 주름진 손을 바라보며 명월은 입을 열었다.
“제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으로 절 감싸 주려 하셨던 걸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이제 괜찮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제 앞가림을 스스로 할 수 있으니 저에 대한 관심을 줄이시고, 그걸 형님과 어머니께 주신다면 집안이 한결 화목해질 겁니다. 원래 아버님이 누리셔야 했던, 편안한 생활을 즐기시면 됩니다. 그리되면 어머님도, 다른 곳에 두신 관심을 거두시겠지요.”
어머니가 화소군이 만든 물건을 사들인 것 같은 의혹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놈이 단순히 도발을 하기 위한 꺼낸 말일 수도 있음이었다. 깊이 파고들 필요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명월은 화제를 달리했다.
“―그분도 잘 지내고 계실 겁니다.”
그 순간 아버지의 몸이 앞으로 내밀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에 대해서 알고 싶었으나 방도가 없었다. ‘그’는 자신을 버려 두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후로 꽤 오랫동안 아버지가 ‘그’를 찾기 위한 노력을 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그’가 어떤 식으로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그’에 대해서 마음을 비우게 된 참이었다. 그 상태가 딱 좋았다.
“마음속에서 제 자리를 조금만 덜어내시고 편안해지십시오.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님.”
진심을 담은 이 말들이 그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질지 의문이었다. 곡해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 주었으면. 아버지가 그의 진짜 가족들과 행복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명월은 고개를 들어 유일선 영감을 똑바로 바라봤다.
“종종 편지를 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버님에게 도망가려는 것이 아니라, 저 혼자서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더는 제가 감추고 부끄러워야 할 아들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습니다. 이 땅에서, 이곳 반양에서 말입니다.”
입을 다문 명월의 표정엔 흔들림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말을 하는 것이니만큼 일부러 그의 시선을 피하려 들지 않았다. 그게 느껴진 것일까. 유일선 영감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진다.
그는 몇 번이나 망설였다. 하지만 그 망설임도 금방 무너져 내리고 가장 밑바닥이 드러나 버리고 만다. 자식을 걱정하는 아비의 본성이 드러났다.
“여긴 위험하다. 그런 곳에 널 두고 갈 수가 없다.”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진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던 명월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저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겁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곳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 이유를 길게 열거하지 않아도 이곳에서 며칠간을 머물렀던 유일선 영감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의표가 찔린 듯 입을 다무나 싶던 유일선 영감은 재차 고개를 저었다.
“명월아. 나는 죽을 때까지도 네 걱정을 덜 수가 없을 거다.”
명월아. 하고 이름이 불리는 순간 명월은 마음 한구석에서 차오르는 따스함을 느꼈다. 그 순간 정말로 ‘다 되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유일선 영감은 여전히 힘든 듯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은 채로 신음을 흘렸다.
“명선이가 생각나서, 너를 도무지 마음에서 덜어 낼 수가 없구나.”
거의 끝에 끝까지 내몰린 후에야 감춰 둔 속내를 드러내는 아버지를 바라보던 명월은 눈을 내리뜨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곁에 두고 어떻게든 지켜내려 했던 아우가 갑자기 사라졌고,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나타난 아우의 아들이었다.
잘 키워서 보호해 주는 것이 아우에 대한 보답을 하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던 만큼,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들을 정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보면 더더욱 생각이 나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거겠지. 그래서 다른 가족들에겐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던 거고.
지나치게 오랫동안 이어져 온 뒤틀린 관계였다. 그걸 이제 와서 되돌린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런 노력을 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명월이 앞으로 손을 뻗어 유일선 영감의 어깨에 올렸다. 그 손길이 닿았을 때, 유일선 영감은 움찔했지만 고개를 들진 않았다.
“아버지.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저에겐 충분할 정도로 잘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마음 편히, 스스로를 위해서 사세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유일선 영감은 오랫동안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은 채로 미동이 없었지만, 명월은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유일선 영감이 긴 한숨을 내쉬면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하는 말을 들어주기로 한 것인가. 잘된 일이었기 때문에 명월의 표정이 밝아진다.
아버님, 하고 그를 부르면서 앞으로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유일선 영감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이윽고 쿵, 하는 소리를 내면서 그의 머리가 상 위에 놓이는 순간 명월은 눈을 끔벅였다.
“……아버님?”
왜 갑자기 쓰러지는 건지 모르겠다. 혹, 초반에 술을 빨리 마셔서 그게 무리가 된 건가.
명월은 놀라선 급히 아버지 옆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붙잡곤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얼굴을 확인하자 아버님은 눈을 감고 조용히 코를 골고 있었다. 갑자기 쓰러진 게 아니라 단순히 술에 취해 잠든 거였다.
역시나 초반에 무리해서 마신 게 무리가 된 거다. 명월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을 내리뜬 채로 잠든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그의 주름진 이마를 손가락으로 더듬어 봤다.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 주름살은 점점 더 많아질 테고, 기억하던 것보다 체격은 작고 몸도 약해질 터였다.
사람이기에 나이를 먹어 노인이 되는 과정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는 아니었다. 그림으로 그려 둔 듯, 언제나 그런 모습으로 잠들어 있겠지.
“……복운아.”
생각을 하면 할수록 마음만 무거워질 거다. 그래서 그걸 중단하고 복운을 부르자 바로 문이 열리고 복운이 들어왔다.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온 복운은 상 위에 엎드려 있는 유일선 영감을 보곤 화들짝 놀랐다.
“주, 주인어른이 왜 쓰러져 계신 겁니까?”
“술을 너무 많이 드셔서 주무시는 거다. 걱정하지 말거라.”
“아이고, 몸에 맞지도 않는 술을 왜 이리도 많이 드셨단 말입니까.”
자신처럼 아버지도 단둘이 있는 상황이 어색해서 초반에 무작정 술을 마신 거다. 쓰게 웃은 명월은 옆으로 와서 아버님의 팔을 잡아서 몸을 일으키는 복운을 도왔다. 원래 의식을 잃은 사람이 가장 무거운 법이었다.
혼자선 유일선 영감을 옮길 자신이 없었던 복운은 고맙습니다, 라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의 아버지를 부축하는 것뿐이었다. 고작 그 일을 한 건데도 고맙다는 말을 한다는 건, 애초에 자신이 도와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었기 때문에 명월은 별말을 다 한다고 하고 말았다. 차분한 대꾸에 본인이 말실수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든 복운은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둘은 유일선 영감을 부축하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엔 가마가 준비되어 있었고, 천천히 그 안에 유일선 영감을 앉힌 명월은 흐트러진 복장도 바로 해 주었다.
다른 때와 달리 살뜰하게 영감을 챙기는 명월의 모습에 복운은 감동받은 얼굴이 되었다.
“……사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는 복운이건만, 명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마의 문을 닫고 몸을 일으킨 명월은 가마꾼들에게 흔들림 없이 잘 들고 가라는 말을 잇지 않았다. 알았다며 고개를 숙이는 자들을 확인한 명월은 뒤에 서 있는 복운을 바라봤다.
“넌 아버님을 모시고 먼저 관아로 돌아가도록 해라. 주무실 때 불편하지 않도록 옷을 잘 벗겨 드려야 할 거다.”
“사또께선 함께 가시는 게 아닙니까?”
“난 여기서 달리 만날 이가 있다. 일찍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으니 그리 알거라.”
명월이기 때문에 이다음으로 만날 게 기생이 아니라고 믿고는 있었다. 그래도 장소가 장소인지라 찝찝해지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조잘거리면서 이런저런 말을 아무렇게나 던졌던 게 언제인가 싶었다. 지금은 그런 식으로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차분하게 바라보는 명월에게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낀 복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더 드시지 마십시오. 얼굴이 붉습니다.”
“네가 그리 말을 하지 않아도 내 알고 있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뜨끈뜨끈했다. 더 마셨으면 가마 한 대를 더 준비해서 그걸 타고 관아로 돌아가야 했을 거라면서 복운의 팔을 토닥였다.
어서 가 보라는 토닥임에 복운은 가마꾼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들이 알아서 가마를 들고 일어서는 걸 확인한 복운은 명월의 얼굴을 한번 보고 난 후, 먼저 앞장섰다.
유일선 영감을 태운 가마가 천천히 움직이는 걸 확인한 명월은 느린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하품이 나온다.
입이 찢어져라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하자 눈물도 찔끔 나왔다. 덩달아 딸꾹질도 한 명월은 인상을 썼다.
술 좀 마셨다고 골고루 한다. 사내가 적당한 술을 마실 줄도 알아야 하는데 자신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또다시 하품이 나올 것 같았던 명월은 잽싸게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안쪽으로 가서 자리에 앉자 아직 따끈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버님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양반다리를 한 채로 편안히 앉아 있던 명월은 슬그머니 방석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고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술기운이 머리 안쪽으로도 닿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여기저기 딱히 정할 필요 없이 전부가 다 뜨거웠다.
덥다면서 전립을 벗어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겉옷도 벗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 드르륵, 하고 문이 열렸다. 명월은 반쯤 풀린 눈으로 고개를 들어 안으로 들어오는 백호를 봤다.
“아, 덥고 힘들다.”
한 손에 들고 있는 커다란 부채를 흔들면서 성큼성큼 걸어온 백호는 맞은편 자리에 털썩, 소리가 날 정도로 주저앉았다.
한쪽 무릎을 세워 그곳에 팔을 올린 그는 부채를 초고속으로 흔들면서 “덥다. 정말 더워.”라면서 투덜댔다.
인상을 쓰고 있는 거나, 강한 억양으로 내뱉는 말 등을 들어 보면 진짜 더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말 더운 여름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그때가 되면 어쩌려고 벌써부터 저렇게 엄살인지 모르겠다면서 명월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런 명월을 본 백호의 표정이 바로 요상하게 변한다.
“누구한테 잡아먹히고 싶어서 그런 요망한 표정을 지어? 그만두지 못해?”
그러곤 부채를 명월 쪽으로 돌려선 세게 흔든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닿자 명월은 눈을 감았고, 바람이 약해지자 바로 눈을 떠선 백호의 손목을 잡아챘다. 얼굴을 앞으로 주욱 내민 명월은 눈에 힘을 주곤 말했다.
“멈추지 말고 계속 흔들어.”
“……뭐라고?”
요상하게 변하는 백호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명월은 눈으로 부채를 가리켰다.
이놈을 멈추지 말고 계속 흔들란 말이야. 지금 여기저기 안 더운 곳이 없다고. 내가 술을 얼마나 많이 마신 줄 알아?
명월은 아예 잡고 있는 백호의 손목을 흔들었다. 말없이 그냥 손목만 잡고 흔들어 대는 것에 백호는 한숨을 쉬었다.
멀리까지 갔다가 지금 막 돌아온 참이었다. 그런데 지금 부채질을 시키는 건가, 싶으면서도 명월이 하라 하니 그걸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정말 미치겠군.
그리 생각하면서 백호는 양손으로 부채를 잡아 느리게 명월 쪽으로 흔들어 주었다.
팔랑팔랑거리면서 시원한 바람이 불자 명월은 턱을 괸 채로 눈을 내리떴다. 적당히 취기가 돌아 딱 기분 좋은 상태였다.
온몸이 따끈따끈했는데 부채질을 해 주니 시원해서 좋다. 명월의 입술 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그 순간 부채를 옆으로 치운 백호가 상을 넘어가선 입을 크게 벌려 명월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읍!”
방심 상태로 당한 일에 놀란 명월은 눈을 크게 떴고, 백호는 아예 명월의 입술을 쪽쪽 빨아댔다. 이대로 가다간 위험하다 싶었던 명월은 양손으로 백호를 밀어 내곤 뒤로 멀찍이 물러나 앉았다.
“뭘 하는 거야! 내가 부채질하라고 했잖아!”
“두 번 부쳐 줬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지.”
백호의 말에 명월의 표정이 요상하게 일그러지면서 “대가?”라고 되물었다.
“이 몸께서 지금까지 다른 누군가에게 부채질을 해 준 적이 없었어. 고작 뽀뽀로 대가를 치르는 거면 거저야 거저. 알기나 하냐?”
그런 것 따위 알 리가 없었다. 지금 명월이 아는 건, 저런 억지를 부리는 이는 백호뿐이라는 거였다.
갑작스럽게 당한 입맞춤에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던 명월은 인상을 쓴 채로 입술을 닦아 냈고, 그걸 본 백호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생긴다.
“뭐야? 왜 지금 입술을 닦는 건데?”
“네가 갑작스럽게 구니까 그렇지.”
“갑작스러울 게 뭐가 있어. 하고 싶어서 하는 것뿐인데.”
애초에 그런 식으로 게슴츠레하게 쳐다본 명월이 잘못한 게 아니던가. 그리 말하고픈 얼굴로 바라보는 백호를 두고 명월은 인상을 쓴 채로 재차 제 입술을 닦아 냈다.
보고만 있어도 화가 나는 모습이다. 백호는 아예 상 너머로 넘어갈 것처럼 굴면서 한마디 했다.
“그만 닦지 못해?”
그러거나 말거나 명월은 계속 입술을 닦으면서 툴툴거릴 따름이었다.
얼굴은 발갛게 물들어선 심통 난 얼굴로 입술을 닦아 대는 모습이 얄미우면서도 귀엽게 보인다. 왜 저런 모습조차도 귀엽게 보이는지.
자신의 눈이 이상해진 거라면서 백호는 혀를 차다가 아예 명월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선 부채질을 해 주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자 명월의 미간에 생겨 있던 주름이 서서히 펴진다. 한결 안정된 상태로 명월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얌전해졌다.
기분이 바로바로 변한다. 그 모습에 백호는 어이가 없어 한마디 던졌다.
“좋으냐?”
명월은 대답하는 대신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제 목덜미에 손을 댔다.
“―몸이 뜨거워.”
웅얼거리면서 뒷목을 주무르는 걸 보던 백호가 그리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명월이 뒤로 몸을 물리면서 그 손길을 피하려 한다.
백호는 혀를 찼다.
“가만히 좀 있어. 자꾸만 그렇게 피하려고만 하면 확 덮쳐 버린다?”
본인은 의도하고 하는 짓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명월이 인상을 쓰면서 제 목덜미에 손을 대거나 하는 모습이 꽤나 동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정말로 덮쳐지는 게 싫으면 일부러 몸을 피하면 안 되는 거였다. 괜한 자극만 될 따름이라는 느낌으로 바라보는 백호를 두고 명월은 긴 한숨을 쉬고는 뒷목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백호는 그런 명월의 하얀 목에 손을 댔다.
확실히 열이 나서 따끈했다. 목이 이 정도라면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 백호는 눈을 내리뜬 채로 얌전히 있는 명월의 얼굴을 살폈다.
명월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던 백호는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기습적으로 목을 깨물었다. 나른해서 방심한 상태로 있었던 명월은 바로 아―하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들었다.
너 대체 뭐야. 맞을래?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명월을 확인한 백호는 바로 부채질을 해 주었다.
팔랑거리면서 시원하게 부는 바람에 재차 명월의 표정이 무너진다. 몽롱한 얼굴이 되는 걸 확인한 백호는 이건가, 싶었다.
일단 건드리고 부채질을 해 주면 다 넘어가게 되는 건가. 그렇다면 다른 곳도 손을 대 볼까―싶었을 때, 명월이 웅얼거렸다.
“그쪽 일은 어떻게 되었어?”
나직하게 묻는 말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술김에 묻는 말인데, 대답을 해 줘도 그걸 기억이나 할까 모르겠다. 살짝 염려스럽기도 했지만, 상대는 명월이었다.
“살짝 살펴보니 네가 여기로 내려오게 된 데에는 네 어머니의 입김이 적용한 모양이다.”
백호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덤덤한 말에 명월은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
아, 역시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원래 사람이란 무언가를 포기하게 되면 오히려 더 편해지는 그런 게 있었고, 지금 명월의 상태가 그랬다.
처음에 말이 나온 건 화소군이 어머니와도 거래를 한 것 같다, 라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 말을 들은 백호는 ‘네가 이리로 내려왔을 때,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한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그런 일이 있는데 알고나 있으라는 느낌으로 꺼낸 말에 명월은 바로 백호를 바라봤다. 이쯤 되면 눈빛만으로도 명월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기 마련이었다.
처음에는 반양에 난리가 나서 그걸 수습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명월의 곁에서 떨어지는 것 자체가 신경 쓰이는 일이었던 백호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고개를 저었다. 싫다는 의사 표현을 한 것이었지만, 명월은 집요했다. 얼굴에 달라붙어선 떨어지지 않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 눈빛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올라가서 조금 더 정확하게 확인해 달라는 거였다. 겸사겸사 화소군이 어머니에게 재차 연락을 취하진 않았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도 알아봐 달라 했다. 그리고 백호는 꼬박 하루 만에 그걸 조사하고 내려온 참이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왕복으로만 한 달이 걸릴 터였다. 금방 갔다 왔다고 해서 백호가 일을 대충 정리하고 온 건 아니었다.
다른 누구보다 정확하게 일 처리를 하고 왔을 거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이리로 내려오게 된 데에는 어머니가 손을 썼음을 알게 되었다.
싸늘한 인상의 어머니를 떠올린 명월은 한쪽 입술 꼬리를 올렸다. 역시나 그런 건가. 그리 생각을 하자 마음 한쪽이 무거워진다. 나직한 한숨을 내쉰 명월을 살피며 백호가 말을 덧붙였다.
“화소군 놈이 접근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네가 이리로 오고 난 후에는 네 어머니도 그쪽 일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더군.”
“그렇겠지. 일단은 내가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하실 테니까.”
이건 나쁜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난 아이에게 남편의 사랑을 모두 빼앗긴 여인이라면 누구나 다 이리 행동할 거다.
제 몸으로 낳은 두 아들마저도 외면을 받는 걸 보는 마당에 그걸 참기란 힘든 일일 터였다. 그래도 막상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생각했던 일이 진짜라고 확인받자 기분이 좀 그렇다. 마음 한쪽이 씁쓸해지는 걸 느끼면서 눈을 내리뜨고만 있으려니 백호가 묻는다.
“속이 상하냐?”
“음? 안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중얼거린 명월은 가볍게 웃었다.
“그냥 입맛이 좀 쓸 따름이지.”
“…….”
아버지와는 대충 풀어냈지만, 어머니하고는 힘들 것 같았다. 뿌리 깊은 반감이 있는 만큼, 그걸 해소하는 데에는 굉장히 길고 긴 시간이 필요할 텐데, 명월은 자신의 시간을 그런 데에 쏟아붓고 싶지 않았다.
일단 서로가 보이지 않는 장소에 와 있는 만큼 굳이 그 정도의 노력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자신이 싫다는 사람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무작정 저자세로 나가는 것도 비위에 맞지 않았다.
솔직히 이번 일을 알아보자 싶었을 때에만 어머니 생각이 났지, 그 외에는 떠오르지도 않던 존재였다. 내막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나저나 자신을 반양으로 보내려 손을 쓰다니. 그녀는 이곳이 어떤 땅인지를 알고 있었을까. 그냥 단순히 먼 곳이기에 이리로 보내려 했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하고 말 거야.”
가족의 일은 아버지와의 관계 개선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거면 된다. 그렇게 딱 선을 긋고 정리해 버리자 속이 다 시원해진다. 긴 한숨을 토해 낸 명월을 두고 백호가 물었다.
“여기 일은 돌림병이 도는 것으로 무마할 셈이더냐.”
“뭐, 그게 가장 무난하지 않겠어?”
“그렇긴 하지만, 성가신 일이 생길지도 몰라서 가볍게 손을 써 두었다.”
명월의 눈썹이 가볍게 위로 올라간다.
대체 어떤 식으로 손을 써 두었기에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굳은 명월의 얼굴을 본 백호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여기가 네 부임지긴 하지만, 동시에 내 땅이기도 하지. 더 이상 이상한 인간 놈들이 들어와서 활개 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간단하게 조사가 나오거나 잡음이 일어나는 것만 막아 두었으니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도 가능한 거냐.”
“어느 곳이든지, 나 같은 놈들은 있기 마련이야. 도성도 마찬가지지. 그곳에 있는 놈에게 좋은 술 몇 병을 넘겨 주고 왔다. 한 10년 동안은 협조를 해 주겠지.”
백호 같은 존재가 도성에도 있었던 말인가. 그건 좀 의외였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귀신이니 귀물 같은 건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그런 놈들만 있으면 인간들이 사는 곳은 개판이 될 터이니, 그걸 조절해 줄 인물은 필요했다.
백호 같은 존재가 각 도(道)마다 존재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들도 모두 백호 같은 힘을 지니고 있는 걸까. 빤히 바라보는 명월을 응시하며 백호는 한쪽 입술 꼬리를 올렸다.
“넌, 2년이 아니라 더 긴 시간을 이곳에서 지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
내내 차분히 있던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그건 어떻게 보면 싫다고 하는 의사 표현으로도 여겨지는 것이었다.
나름 좋아할지도 모른다 싶어서 꺼낸 말에 저런 반응이니 백호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는 부채를 접고는 당장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뭐냐? 방금 그 얼굴은? 내가 한 말이 싫다는 거야? 뭐야?”
“아니. 뭐, 싫은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라고나 할까.”
알쏭달쏭한 말이지만, 백호 듣기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끔 분위기가 좋다가도 밉살스러운 말을 해서 그걸 망치는 명월이었다. 이번도 그와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확 구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노골적일 정도로 인상을 쓴 백호는 바로 명월의 턱을 잡고 본인 쪽으로 끌어당겼다.
갑자기 입술이 닿고, 백호가 턱을 눌러 억지로 입을 벌려지게 한다. 그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백호의 혀를 느낀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읍!”
갑자기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백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하지만 잡아당기고 밀어내도 백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예 명월의 얼굴을 붙잡고 현란하게 혀를 놀렸다. 명월이 이를 세워도 워낙에 빠르게 움직이다 보니 혀를 깨물 수조차 없었다. 그러는 동안 백호는 명월의 입 안 구석구석을 야무지게 건드리고 다녔다.
입천장을 혀로 긁듯이 사악 눌러 주자 명월의 몸으로 힘이 들어간다. 막힌 입술 대신에 가느다란 콧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야한 소리에 백호의 하반신으로 불끈, 하고 힘이 들어갔다.
크게 입을 벌리곤 명월의 입술을 쪽쪽 빤 후에 그대로 명월의 몸을 뒤로 쓰러뜨렸다.
방바닥에 엎어진 명월은 갑작스럽게 당한 거친 입맞춤에 입술 주변이 침으로 질척하게 젖은 상태였다.
술에 취해서 바로 반응을 취하지 못하고 토끼마냥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이 구미에 당긴다.
백호는 혀로 제 아랫입술을 핥으면서 급하게 옷가지를 풀어헤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상의를 탈의하자 듬직한 맨가슴과 복근이 드러난다. 그걸 본 명월은 놀라 손을 뻗었다.
“기, 기다려. 난 하고 싶지 않아―!”
“내가 하고 싶다.”
하고 싶지 않다는 명월의 말을 가볍게 묵살한 백호는 얼굴을 가린 명월의 손목을 잡아 양옆으로 벌리곤 재차 입술을 겹쳤다.
반사적으로 입을 막고 피하려 했던 명월이지만, 백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입을 벌리지 않으면 다른 곳에다가 하면 된다는 듯 다물린 입술을 쪽쪽 빨다가 턱을 타고 내려가 목을 빨아댄다.
그러다 목젖에 입술을 대곤 세게 빨아들이다가 명월의 옷고름에 이를 세웠다. 고개를 위로 들면서 고름을 당기는데, 워낙에 힘이 장사다 보니 그대로 옷이 뜯어진다. 옷이 찢어지면서 몸이 들썩거린 명월은 버둥거렸다.
“그, 그만두지 못해? 난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단 말이야!”
“뭐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거냐?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그딴 소리를 하는 거라면 정말 호되게 당할 줄 알아라.”
경고를 하듯 말하는 백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처음 방에 들어섰을 때부터 얼굴이 발긋하게 달아오른 명월을 보곤 하반신으로 신호가 왔던 백호였다.
그런데 눈앞에서 귀엽게 구는 데다가 유혹하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는 데 그걸 보고만 있을 수 없잖은가.
이건 대놓고 자신을 유혹하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행위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근잘근 씹어서 예뻐해 주겠다면서 백호는 다시 고개를 숙여선 명월의 뺨을 세게 빨아들였다.
강한 흡입에 뺨이 뜯어져 나갈 것 같다. 가뜩이나 술기운이 올라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상태였던 명월은 죽을 맛이었다. 도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는데―.
그때 명월의 뺨과 귀를 정신없이 핥던 백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 네 냄새 정말 못 참겠어. 미치겠네.”
그리 말하며 명월의 하반신 위로 본인의 하반신을 마찰한다. 위아래로 세게 마찰하자 무서울 정도로 뜨겁게 발기한 백호의 성기가 느껴졌다.
위험했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든 하고 마는 백호였다.
새벽에 아버지가 도성으로 떠나고, 그때까지만이라도 제대로 된 모습으로 배웅하고 싶은 게 명월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백호가 너무 집요하게 달라붙으면 곤란했다.
어찌할까 싶었던 명월이 눈을 굴리는 동안 백호는 한 손으로 능숙하게 명월의 옷을 벗겨 냈다.
결국 속옷도 날아가고 백호 앞에서 알몸인 상태가 되어 다리까지 벌려진 명월은 황급히 양손을 내려 남성을 가렸다.
“자, 잠깐만 기다려―.”
다급한 외침에 명월의 얼굴 옆에 손을 내리고, 반쯤 열에 들뜬 얼굴로 있던 백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싫다면?”
싫다면―이라는 말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신이 잠깐 기다리라 하면 알았다고 해야 할 게 아니겠는가.
다른 때라면 이런 말을 하면 통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명월은 바싹 탄 목구멍 안쪽으로 침을 넘기곤 조심스레 말을 이어 나갔다.
“오늘은 정말로 안 돼. 그러니까, 내, 내가 입으로 해 주면―.”
“싫어. 난 지금 당장 네 몸으로 들어가고 싶어.”
단칼에 거절을 당한 명월의 얼굴이 붉어진다.
평소엔 백호가 입으로 해 달라 은근슬쩍 말을 꺼내면 들은 체도 하지 않던 명월이었다. 그런 자신이 이번에 용기를 내서 먼저 말을 꺼냈는데 싫다니.
이것도 술에 취한 정신머리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제정신일 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으냐면서 기가 막혀 하는 얼굴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백호는 코웃음을 쳤다.
“네 앙증맞은 입술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만, 지금은 여기에 들어가고 싶다.”
어느새 아래로 내려가 있던 백호의 손가락이 하얀 엉덩이 사이에 감추어져 있던 비밀스러운 봉오리를 쿡, 하고 찔렀다.
본능적으로 움찔거리는 주름을 덧그리듯 움직이면서 기어이 손가락 한 마디를 넣은 백호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네 여기도 뜨겁겠지. 얼마나 뜨거울지 상상이 안 가. 그러니까 이번엔, 여기다가 넣을 거야.”
“…….”
별거 아닐 수도 있는 말인데도 왜 이렇게 낯 뜨거운지 모르겠다. 실제로 깊이 숨을 들이마시면서 가슴을 들썩거리자 백호가 씨익, 웃는다.
“하자. 기분 좋게 해 줄게.”
백호를 올려다보는 명월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이런 상황에서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저 천진난만한 웃음을 뭔지. 술기운과는 다르게, 갑자기 체온이 상승하면서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얼굴이 붉어지는 게 지금까지와는 다르다는 걸 간파한 것일까. 백호가 바로 고개를 숙인다.
“뭐야? 얼굴이 왜 이렇게 붉어지는 거야?”
“그, 그런 거 아니니까 떨어져―.”
명월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 제 얼굴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기에 어떻게든 그걸 감추려 한다.
하지만 백호는 놀려 먹을 마음이 한가득이었기에, 반쯤 일어선 명월의 성기를 한 손으로 꼬옥 움켜쥐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서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섰어?”
“크윽―.”
갑자기 성기가 잡힌 명월은 당황해선 허리를 비틀었다. 어떻게든 피해 보려 하지만, 백호는 끈질겼다.
명월의 성기를 한 손에 쥐고 주무르면서 얼굴을 가린 손등을 혀로 길게 핥으며 물었다.
“그거 아냐?”
앞이 자극받는 상태여서 정신이 없었던 명월은 묻는 말에 손가락을 벌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백호를 올려다봤다. 눈물이 반쯤 차오른 명월의 검은 눈망울을 내려다보며 백호는 시원하게 웃었다.
“네가 입으로만 싫다고 거부하면서 아래는 이런 상태인 거, 난 진짜 미치도록 좋더라.”
그러니까 오늘로 정말로 예뻐해 줄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백호는 명월의 손목을 잡아 억지로 바닥에 누른 채로 재차 입술을 겹쳤다.
거칠게 밀어붙이는 백호의 행동에 명월은 눌린 입술 사이로 “오늘은 안 된다―.” 까지만 말할 수 있었다.
* * *
굵직한 성기가 질펀하게 젖은 살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빡빡했지만, 젖어서 적당하게 풀어진 그곳을 강하게 찔러 넣을 때마다 끊어 낼 것처럼 성기를 죄여댔다.
그때마다 막힌 숨을 토해 내던 백호는 한 손가락에 쥔 명월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면서 고개를 돌렸다. 품에 안겨서 꼼짝도 못한 채로 안기는 명월의 젖은 뺨에 입술을 비비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안에 힘 좀 빼 봐. 아, 진짜 좋아―.”
헐떡거리면서 내뱉나 싶더니 곧 신음을 내뱉는다. 하악, 하악, 하면서 거칠게 토해지는 숨이 고막에 닿을 때마다 머릿속이 몽롱해지는 것 같다.
명월은 빠르게 눈을 깜박거렸고, 맺혀 있던 눈물이 모두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한결 시야가 또렷해졌지만 의미가 없었다. 여전히 몸은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때마다 시야가 무너진다. 때마침 몸을 가르고 깊숙이 들어와 내장까지 압박하는 두꺼운 성기에 명월은 떨리는 신음을 토해 냈다.
“하아, 아, 아―.”
힘이 빠져서 더는 큰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명월은 제 몸을 끌어안고 있는 백호의 팔에 손톱을 박은 채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힘겹게 버티는 명월의 뺨에 제 뺨을 댄 채로 백호는 빠르게 허리를 놀렸다.
굵은 성기가 명월의 몸 안에서 제멋대로 들쑤시면서 난동을 부린다. 그 성기가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가 빠져나갈 때마다 속이 도려내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오금이 저렸다.
수백 번은 족히 넘을 정도로 마찰이 된 내벽은 백호의 성기가 당연히 그곳에 있어야 하는 존재인 양 반기면서 찰지게 물어댔으나, 동시에 지속적인 마찰로 인해 점막이 쓰라리고 따끔거린다.
아프고 힘든데도 명월은 백호가 움직이는 대로 허리를 흔들었다. 그때마다 장하다는 듯 얼굴 가득 입맞춤이 떨어진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그걸 세게 빨아 당기는 느낌에 명월은 재차 눈물을 떨구었다.
“흐윽―.”
“쉿, 울지 마.”
이토록 힘겹게 하는 주제에 울지 말라면서 달래다니.
몽롱해진 머릿속으로 순간적으로 열 받는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그래 봤자 지금 할 수 있는 건 백호의 팔뚝에 손톱을 박은 채로 버티는 것뿐이었다.
크게 벌어진 다리는 백호가 진입 운동을 할 때마다 덧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게 명월을 찍어 누르며 끝나지 않을 것처럼 허리를 놀리던 백호가 세 번째 사정을 했다.
“크윽―.”
몸 가득 뿌려지는 뜨거운 정액을 느끼며 명월은 눈을 감았다. 입을 벌리자 그 사이로 다 죽어 가는 신음이 흘러나온다.
드디어 끝났다.
이제 더는 안 하겠지.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바로 커다란 손이 가슴을 움켜쥔다. 엄지로 유두를 잡아 비트는 순간 명월의 손톱이 아프게 백호의 팔뚝을 긁어내렸다.
움찔한 백호는 안색을 굳힌 채로 눈을 내리떴다.
“왜 그래?”
턱 끝까지 찬 숨을 고르며 묻는 말에 명월은 헐떡거렸다.
“……아파.”
“어디가? 그렇게나 힘들어?”
좀 심하게 몰아붙인 건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아파하는 건가 싶었던 백호의 안색이 굳는다. 그때 명월이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젓는다.
“가슴, 건드리지 마.”
“아아―. 그쪽인가.”
아래가 아니라 위가 문제인 모양이었다. 백호는 눈을 내리떠선 명월의 가슴을 확인했다.
여기저기 빨아들인 자국이 난잡하게 남아 있고, 가슴에 달린 두 개의 유실은 평소보다 거의 두 배는 부풀어 올라 있었다.
딱 봐도 잘못 건드리면 아플 것 같았다. 너무 좋아서 집요하게 매달렸더니, 그게 심했던 건가.
안색을 굳힌 채로 가슴을 내려다보던 백호는 쯧, 하고 혀를 차면서 여전히 명월의 안을 그득히 채우고 있던 제 성기를 빼냈다.
몸에서 성기가 빠져나가자마자 아래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린다. 이상한 감각에 명월은 다리를 오므리면서 신음을 흘렸고, 백호는 바로 가슴 쪽으로 고개를 숙여 왔다.
혀를 내밀어 유두를 살살 핥자 바로 명월의 손이 올라온다. 머리카락을 움켜쥐긴 하지만, 힘이 들어가진 않았다. 아직은 버틸 만하다는 거다.
그래.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 그런 마음을 담아서 백호는 신중하게 유두를 핥았다. 혀를 위아래로 핥아 주면서 입술로 빨아 주자 긴장되어 있던 명월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안심한 듯 길게 내쉬는 한숨이 나른했다. 백호는 명월의 유두를 입에 문 채로 눈을 깜박거렸다.
은근슬쩍 명월의 날씬한 허리를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어선 명월의 얼굴 앞까지 올라갔다.
눈을 감은 명월은 여전히 힘들어 보였다. 하도 울어서 눈이 벌겋게 익은 걸 본 백호는 그리로 입술을 내렸다. 눈꺼풀 위로 덮듯이 입술을 대곤 쪽쪽 빨아들이자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처음에는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피하려 들었지만, 백호는 집요하게 따라갔다. 눈꺼풀에 매달려 있는 눈물을 하나하나 핥아 내곤 오른쪽 뺨 가운데에 난 점을 이로 살짝 긁어 낸다. 마지막으로 쪼는 듯한 입맞춤을 떨구자 명월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 내몰려서 힘들어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너무 집요하게 달라붙으면 곤란했다. 명월은 피로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제 그만해. 진짜로 힘들어.”
너무 힘드니까 화를 내거나 밀어낼 기운도 없다면서 명월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러자 백호가 명월의 양 뺨을 감싸곤 도장을 찍듯이 입술을 꾸욱 눌렀다.
몇 번이나 그리하자 명월이 백호의 얼굴을 밀어내려 한다. 그러자 백호는 고개를 저으면서 명월의 코앞으로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자꾸 밀어내려 하는 거냐. 난 조금 더 달라붙어 있고 싶어.”
느낌 탓인지 모르겠지만, 응석 부리는 것 같다.
사람을 한계까지 몰아붙여서 힘들어 죽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한 주제에 지금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곤 귀여운 표정을 짓는다. 명월은 혀를 찼다.
“그런 식으로 귀여운 표정 지으면서 어영부영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마―.”
“귀여워? 내가 귀여운 거냐?”
백호는 나직이 웃었다.
“귀엽다는 말은 또 처음 들어 보는군.”
서의 백귀에게 귀엽다라.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정말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라며 백호는 쓰게 웃었다. 그런 백호를 바라보던 명월은 밀어내기 위해서 백호의 이마에 대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러곤 백호의 뺨을 토닥거렸다.
귀엽다는 말은 농담 삼아 한 거지만, 때때로 정말로 이 덩치만 큰 녀석이 사랑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밀어붙이듯 격렬한 관계를 가질 때에 몸은 힘들지만, 또 그만큼 자신을 원해 준다는 느낌이라 나쁘지만은 않았다.
명월은 백호의 얼굴선을 덧그리듯 어루만지면서 백호의 턱 아래를 간질이듯 만졌다. 그러자 눈을 내리뜬 백호가 끙, 하고 묘한 신음을 흘린다. 그게 하나의 신호라는 걸 알면서도 명월은 멈추지 않았다.
백호의 목을 타고 내려간 손이 그의 가슴에 닿는다. 조금 더 내려간 손이 백호의 성기에 닿았다. 손가락 끝에 닿은 성기는 젖은 채로, 여전한 두께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했던 것 같은데 이 말도 안 되는 회복력은 대체 무언가 싶었다.
명월은 질린 표정을 지으며 백호를 올려다봤다.
“또 섰어?”
“네가 그렇게 만지는데 어쩔 수 없잖아.”
성기가 선 건 본인의 자제심 부족으로 인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명월이 묘한 손길로 어루만졌기 때문이다.
고자라도 당장 발기가 될 만큼 요망한 손놀림이었다면서 백호는 당장 명월의 어깨를 잡아선 그 몸을 뒤집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엎드린 채로 엉덩이만 높이 들려진 자세가 된 명월은 헛숨을 삼켰다.
“자, 잠깐만. 난 이런 거―.”
“부끄러워서 싫다는 건 알지만, 넌 이 자세로 할 때 더 많이 느끼잖아.”
정면으로 할 땐 시선을 마주하고 있어야 하고, 서서 할 때에는 가슴을 같이 만져 줘야 좋아한다. 그런데 뒤로 할 때에는 계속해서 흥분 상태로 딱히 뭔가를 더 해 주지 않아도 되었다.
손으로 꼽을 만큼의 관계를 가졌지만, 횟수는 많았기에 명월의 잠자리 특징에 대해서 훤히 다 꿴 백호는 몸을 돌리면서 벗어나려 하는 명월이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가만히 있어.”
그리 말하고 난 후, 백호는 명월의 엉덩이 볼기 한 짝을 붙잡았다. 하얀 엉덩이는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속적인 마찰과 백호가 내내 주물렀기 때문에 이 꼴이 된 거였다.
먹음직스러운 복숭아마냥 발그랗게 잘 익은 엉덩이를 벌리자 약간 부어오른 주름이 눈에 들어온다.
엄지로 누르자 사이가 벌어지면서 붉은 속살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난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정액을 확인한 백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감탄사를 토해 냈다.
“절경이로군.”
“―이 호색한이!”
그냥 하는 거면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엉덩이 사이를 벌리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건 싫었다.
더는 견딜 수 없었던 명월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른다. 백호의 망할 희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을 뒤트는 것과 동시에 백호가 바로 하반신을 붙여 왔다.
앞선 관계를 통해서 진탕하게 정액을 쏟아 놓은 내벽은 별 위화감 없이 백호의 성기를 받아들였다.
좁혀 있던 주름이 좌악 펴지면서 한계까지 늘어나고, 동시에 엎드린 명월의 배가 급격하게 오르내린다. 고개를 돌리고 백호에게 뭐라고 하려던 명월은 헛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방바닥에 이마를 댄 채로 헐떡거리는 동안 백호는 기어이 끝까지 제 물건을 밀어 넣었다.
명월의 몸속에 그득히 쏟아 넣은 정액이 제 성기에 눌려서 바깥으로 쏟아진다. 명월의 다리 사이가 축축하게 젖어가는 걸 느끼면서 백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정말 최고야.”
갑작스러운 삽입에 처음에 놀라선 경직되어 있던 내벽이 이윽고 적응을 마치고 백호의 성기를 틈 없이 감싸 온다.
목덜미를 치고 올라오는 쾌감에 백호는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그러면서도 갑작스러운 삽입에 명월이 힘들어하지 않을까 싶어 아래쪽으로 손을 내렸다.
명월의 성기는 반쯤 일어서 있긴 했지만, 이런 상태라 해서 온전히 괜찮은 상태라 확신할 수 없었다.
“명월. 괜찮은 거냐?”
이미 넣은 주제에 괜찮으냐고 묻는 건 뭔 속셈인지 모르겠다.
움켜쥔 양손을 바닥에 댄 채로 명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정말 망할 놈이었다. 꼭 이럴 때만 제멋대로 군다. 마치 평소에 자신의 말을 뭐든지 들어주는 동안 쌓인 화를 풀기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정말 그런 거라면 자신도 딱히 뭐라 할 수 없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거기는 재차 확장되어서 욱신거리고 배 안쪽은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백호가 계속해서 정액을 쏟아 부어서인지 몰라도 속은 거북하고 몸은 뜨겁다.
뜨겁고 뜨거워서 다른 생각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명월은 제 몸이 기다렸다는 듯 백호의 성기를 옥죄어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백호의 손길에 자신의 성기가 서서히 힘을 얻어가는 것 또한 느껴진다.
입으로 암만 싫다고 해 봤자 몸이 이 모양이면 말짱 도루묵이 아니던가.
명월은 어금니를 악물곤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때 백호가 허리를 굽혀선 명월의 등 뒤로 달라붙어 왔다. 등을 덮고 있던 긴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기곤 명월의 어깨에 입을 맞춘다.
“괜찮은 거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면서 커다란 손으로 성기를 자극한다.
“아프진 않은 거지? 느끼고 있지?”
그러니까 지금 움직여도 되는 거지?
그 속에서 정말로 백호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이 들리는 것만 같았던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쩌자고 이런 녀석하고 붙어먹고 있는지―.
하지만 그런 생각도 전부 다 제 얼굴에 침 뱉기밖에 안 되었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명월은 계속해서 어깨와 귀 등으로 떨어지는 입맞춤을 느끼곤 모든 걸 포기한 사람마냥 웅얼거렸다.
“……여.”
“응? 뭐라고?”
드디어 명월이 입을 여는구나 싶었던 백호는 그리로 귀를 기울였다.
방바닥에 엎드린 채로, 얼굴을 묻고 있었던 명월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움직이라고.”
“…….”
백호는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 그러곤 고개를 숙여 엎드리고 있는 명월을 내려다봤다.
딱 보이는 명월의 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백호의 입술 꼬리가 천천히 올라간다.
하아, 하고 나른한 한숨을 내쉰 후 백호는 바닥에 손을 짚고는 명월의 얼굴 옆에 제 얼굴을 갖다 댔다. 그러곤 나직이 속삭였다.
“넌 정말로 귀여워.”
그래서 때때로 정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째로 집어삼켜서 뱃속에 넣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 때가 있다.
거기까지 생각한 백호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빛조차 반사하지 않을 만큼 어둡고 깊은 눈빛이 된 백호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명월의 뺨에 입을 맞추곤 몸을 일으켰다.
명월의 허리에 한 손을 올린 그는 바로 움직였다.
“……!”
갑자기 안을 치대듯이 빠른 삽입에 명월의 눈이 크게 떠졌다. 놀라서 경련을 일으키듯 죄어 오는 내벽에 백호는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제길, 하고 중얼거린 후 재차 허리를 내돌렸다. 격렬하게 파고 들어오는 성기의 움직임에 놀란 듯 움찔거리는 엉덩이가 음란하게 느껴진다.
행위를 하는 도중인데도 목이 타는 갈증을 느낀 백호는 혀로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러곤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성급하게 명월의 몸을 꿰뚫었다.
* * *
언제나처럼 든든한 품속에서 눈을 뜬 명월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오늘도 맛있게 단잠을 푹 잘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잠시 눈을 붙이고 눈을 뜬 거라고 해도 머리는 맑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몸은 여전히 묵직하고 아래쪽의 예민한 부분이 욱신거렸다.
여전히 이물감이 느껴져서 단지 기분 탓인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여전히 백호의 성기가 몸속에 들어차 있었다.
“…….”
나름 기분 좋게 잠에서 깨어난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이 녀석이―.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은 마음을 추스르곤 뒤를 돌아봤다.
명월을 뒤에서부터 끌어안고 제 물건도 당당히 엉덩이 사이에 끼워 넣은 백호는 단꿈에 젖어 있었다. 너무 편안하게 푹 잠이 든 모습을 보자니 깨워선 안 될 것 같기도 했지만, 일어나 봐야만 했다.
아버지가 오늘 떠난다 하셨다. 보통은 아침을 먹고 난 후에 움직이겠지만, 본인이 떠나는 걸 보이고 싶지 않을 터이니 이른 새벽부터 움직일 게 분명했다. 지금부터 자신도 서둘러 일어나 이런저런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아직 안에 넣어져 있는 이 물건을 어떻게 빼내야 할지 모르겠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있는 명월은 자못 심각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슬쩍 몸을 움직이자 바로 백호의 입술을 타고 나른한 한숨이 흘러나온다.
하아, 하고 뒷덜미에 닿는 한숨에 피부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자 안에 들어찬 성기가 조금 더 커지고 단단해지는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안색을 굳힌 채로 아랫입술을 깨문 명월은 재빠르게 눈을 굴려댔다.
이리저리 고민해 봤자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럴 땐 그냥 백호를 깨워서 알아서 떨어지게 하는 수밖엔 방법이 없었다.
명월은 입을 열었다. 목 안쪽이 따끔거린다. 하도 소리를 질러댔더니 이 모양이라면서 마른침을 삼킨 명월은 백호를 불렀다.
“백호. 이만하고 슬슬 떨어져.”
어제 하는 도중에 분명히 오늘 일찍 일어나 봐야 한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 말에 백호는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혀를 차더니 더 거칠게 밀어붙였었다.
하여튼 제멋대로 구는 건 알아줘야 한다. 늘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것 같다가도 중요한 순간에는 제멋대로 굴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걸 두고 보면 안 되는 게 아닐까. 강하게 나갈 땐 그리해야 하는 법이라면서 명월은 몸통을 끌어안고 있는 백호의 팔을 두드렸다.
“이봐. 이만하고 떨어지라니까. 일어날 거야.”
연거푸 이어지는 말에 등 뒤에 매달린 백호가 으음, 하고 나직한 한숨을 내쉰다. 그러곤 머리를 뒤통수에 비벼대는 것에 명월은 속이 간질거렸다.
또 이렇다. 최근 들어서 백호하고 함께 있으면 이런 식으로 가슴 안쪽이 간질거릴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땐 백호가 무얼 하든지 다 받아 주고 싶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것에 질질 끌려가선 안 되었다. 보다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다면서 명월은 백호의 팔을 양손으로 꼬옥 쥐었다. 그리고 살을 반대편으로 비틀 듯이 돌렸다. 바로 백호의 몸이 움찔하고 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명월은 황급히 앞으로 몸을 빼냈다. 단단하게 박혀 있던 성기를 빼낼 땐 조금 그랬지만, 어떻게든 다시 백호에게 붙잡히지 않을 수 있었던 명월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엎드린 채로 백호를 돌아봤다.
백호는 명월이 빠져나간 팔 모양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신음을 흘렸다.
“……뭐야. 아프잖아.”
불만에 가득 차서 중얼거린 백호는 명월이 비튼 팔을 문지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곤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가 윽, 하고 신음을 흘리며 허리 뒤에 손을 올리는 명월을 확인하곤 인상을 쓴다.
“뭐야. 왜 떨어져 있는 건데. 이리로 들어와.”
아직 이른 시간이니 조금 더 자도 괜찮았다. 백호가 팔을 뻗자 명월은 고개를 뒤로 물리면서 말했다.
“분명히 말했잖아. 오늘 새벽에 일어나 봐야 한다고 말이야.”
“뭐야. 그런 거 몰라. 기억도 안 나.”
웅얼거리듯 말한 백호는 이내 크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했다. 한 번에 멈추지 않고 연달아서 계속 하품을 하는 모습에서 피곤함이 묻어난다.
도성을 하루 만에 왔다 갔다 하는 건 백호에겐 쉬운 일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진한 피로가 묻어나는 모습에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여기서 더 미적거리면 시간에 맞출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백호의 것이 들어가 있어서 아래가 벌어진 느낌이 생생했다.
이래선 걸을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지겠다면서 인상을 쓴 명월은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반쯤 잠에 취해 있던 백호는 끈질기게 명월에게 팔을 뻗으면서 웅얼거렸다.
“이리로 와, 들어와.”
그래도 대꾸 한 번 없이 옷을 입는 데에만 집중하는 명월의 모습에 혀를 차나 싶더니 급기야 그쪽으로 꾸물거리며 다가온다. 발목을 붙잡는 백호의 손등을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때린 명월은 단호히 말했다.
“지금은 안 돼.”
어제도 백호가 강제적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집어넣고는 ‘들어갔으니 어쩔 수 없네?’라는 식으로 굴었던 거다.
거기까진 제멋대로 굴 수 있도록 놔두었지만, 더는 아니었다. 거기서 그만둬야 할 거라며 명월은 눈에 힘을 준 채로 백호를 내려다봤다.
매서운 눈빛이 느껴진 것일까. 아이고, 하고 한숨을 쉰 백호는 방바닥에 엎드린 채로 늘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드르렁, 하고 코 고는 소리가 들리자 명월은 헛웃음을 흘렸다.
“어이없는 녀석.”
사람을 그렇게 괴롭힌 주제에 이렇게 늘어져 있으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눈만 뜨면 등짝에 손바닥 자국이 날 정도로 때려 줄 셈이었는데, 이렇게 피곤해하니 그리할 수도 없었다.
혀를 찬 명월은 백호를 내려다보다가 아래쪽으로 기어갔다. 욱신거리는 하체의 통증을 숨기고는 구석에 돌돌 말려져 있는 이불을 당겨 백호의 몸 위에 덮어 줬다. 그러자 바닥에 놓여 있던 손가락이 꿈틀거리면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잠결에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백호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명월아. 같이 자자.”
“…….”
이건 대체 뭔 소린지―.
어이도 없고 우습기도 했던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허리를 세우고 똑바로 앉아서 백호를 내려다보던 명월은 손을 들어선 산발이 된 백호의 뒤통수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숙여선 널찍한 등 가운데에 입술을 눌렀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그때까진 착하게 잘 자고 있어라.
덩치는 산만 한 백호지만, 이런 식으로 행동할 땐 어린애 같아서 살살 달래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백호의 등도 가볍게 토닥인 후 명월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 *
작은 등을 들고 서 있는 복운은 졸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일찍 방에 들어가서 자긴 했지만, 이른 시간이 일어난 게 힘든지 병든 닭마냥 꾸벅거린다.
그러다가도 등이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면 화들짝 놀라선 바로 고개를 든다. 바로 옆에 서 있는 명월을 흘깃 본다. 뒷짐을 진 명월은 멀쩡한 얼굴이었다.
분명 어제 호란에 남아서 늦게 들어온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 관아에 돌아와서 저렇게 말끔하게 잘 차려입은 건지 모르겠다.
오히려 명월이 깨워서야 일어나게 된 복운은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늦게 일어난 마당에 명월보다 더 피곤해하니, 그것도 창피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면서 고개를 가볍게 턴 복운은 곧 어, 하는 소리를 내며 아래쪽 길을 가리켰다.
“사또. 저기, 주인어른이 보이십니다.”
복운이 알려 주지 않아도 명월은 알고 있었다. 저기 멀리서 말 두 필이 보였다. 새벽이라 숲에는 짙은 안개가 깔려 있어, 말이 달리기엔 위험할 수 있었다.
같이 도성에서 내려온 사내와 느긋하게 말을 끌고 가는 모습을 확인한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유일선 영감의 말과 수행원의 뒤쪽에는 상자나 짐이 묶여서 고정되어 있었다. 챙겨 준 것들을 제대로 다 들고 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한결 마음이 놓인다.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내곤 느른한 한숨을 토해 내는 명월이나, 그 옆에 있는 복운은 괜히 눈치가 보였다.
눈을 굴려대던 복운은 조심스레 물었다.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냥 잘 가시는지 그 모습만 지켜보면 된다.”
대화는 어제 술잔을 기울이면서 충분히 나누었다. 다시 내려가서 얼굴을 본다 한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어색하게 있으면서 시간을 잡아먹는 것처럼 낭비가 없었다.
명월은 단호했지만, 복운은 많이 아쉬운 얼굴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냥 여기에 서서 보기만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얼굴로 초조하게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뭐 마려운 사람 같았다. 결국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일이 급한 거라면 말해라. 등은 내가 들고 서 있을 테니, 저기 풀 뒤로 넘어가서 후딱 싸고 와라.”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왜 이렇게 짓궂으십니까.”
그런 것 때문에 지금 자신이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 말이다.
놀림을 당한 복운은 억울하다며 얼굴이 잔뜩 붉어졌고, 그걸 본 명월의 웃음이 한결 짙어졌다. 웃는 얼굴에 그늘이 없었다.
개운한 표정에서 복운은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등불을 제대로 잡은 복운은 눈을 내리떴고, 천천히 앞을 지나쳐 가는 두 필의 말을 내려다봤다.
찾아오실 때도 갑작스럽더니만, 떠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멀어지는 유일선 영감의 뒷모습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걸 물끄러미 보던 복운은 등불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사또, 이번 일은 제가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반양 땅에서 명월에게 곤혹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고, 이상한 사건에 휘말리는 것 같아 그게 걱정이 되어 어쩌다 보니 도성으로 연통을 보내고 말았다.
그것 때문에 유일선 영감이 내려왔고, 명월이 상당히 언짢아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때 명월은 본인을 따를 것인지, 아버님인지를 결정하라 했다.
그땐 그 질문을 듣고 멍해졌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걸 두고 고민을 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여겨졌다.
그래선 안 되었다. 묻는 순간 망설이지 말고 바로 명월을 선택했어야 했다. 이번 일을 통해서 복운은 많은 걸 깨닫게 되었다. 그걸 이 자리에서 털어놓을 셈이었다.
“제가 정신이 나가서 그랬던 겁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전 오로지 사또만을 믿고 따를 것입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생겨도 사또께서 알아서 잘 처리하실 거라 믿고, 전 그냥―.”
명월만을 바라보며 살겠다 말하며 고개를 돌리던 순간 복운의 얼굴이 벙 쪄 버린다.
조금 전까지 명월이 서 있던 자리가 텅 비어져 있었다. 당황한 복운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고, 저기 멀어지는 명월을 발견했다.
아니. 말도 없이 혼자 가 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조금 전 자신이 용기를 내 꺼낸 말을 들은 거야, 못 들은 거야.
얼굴이 일그러진 복운은 급히 명월의 뒤를 쫓았다.
“사또오~.”
진득한 원망이 담긴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명월은 정면을 응시했다.
그때 멀리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친다. 기분 좋은 숲의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저기 멀리 떨어진 곳의 나무 꼭대기에 걸터앉아 있는 백호를 발견했다. 달랑 바지 한 장만 입고 있는 백호를 발견함과 동시에 명월의 입술 꼬리가 올라간다.
결국엔 걱정이 되어서 나와 봤군. 그럴 줄 알았다면서 명월은 더 경쾌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