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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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앞에 앉아 있는 사내는 딱 보더라도 경직된 얼굴이었다. 긴장이 되는 듯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킨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래 봤자 지금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건 명월과 사내뿐이었다. 물론 뒤쪽에 백호가 팔짱을 낀 채로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지만, 그게 사내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사내는 이곳에 들어온 후에도 계속해서 불안해했다. 앞으로 본인이 저지를 일이 엄청나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명월은 이런 식으로 시간 끄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일을 할 수 있는 게 눈앞에 앉아 있는 사내뿐인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점점 더 이곳에 앉아 있는 게 곤혹스러워진다. 조금 전에 계진이 맛있게 옥수수를 쪄 둔다고 했다. 명월은 바로 그 옥수수가 머릿속을 가득 차서 다른 걸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사내가 마음을 먹은 듯 아랫입술을 깨물곤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이 못생겼다. 요즘엔 백호 얼굴만 보고 살아서 그것에 익숙해진 모양인지, 웬만한 게 아니면 눈에 차지도 않는다. 저런 못생긴 얼굴로 쳐다보면 기분이 나빠진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저 외모 때문에 기분이 나빠질 리가 없는데―.

아, 그렇지. 이 사내는 그쪽이었다. 이병현 대감 쪽의 핏줄. 그리고 사내는 그간 그들이 저질러 온 악행이 적힌 장부를 건네겠다는 명목으로 지금 명월과 독대하고 있는 상태였다.

구린 일을 잔뜩 저질러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이제 와서 본인의 비리를 드러내려 하는 판에 더럽게 시간을 끈다.

명월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할 말이 없는 거라면 난 이만 일어나 보겠소.”

“그, 그러지 마시고 기다려 보십시오. 이겁니다. 이것 좀 봐 주십시오.”

말과 동시에 사내가 꺼낸 건 낡고 두툼한 장부였다. 검은색 가죽으로 앞뒤가 붙어 있는 장부는 딱 봐도 기분 나쁜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맨손으로 만지고 싶지 않을 지경이었다.

심드렁한 명월의 눈빛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사내는 급히 장부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것이 그동안 이병현 대감께서 저에게 지시를 내린 내용이 상세하게 적힌 장부입니다. 이것을 보면 대감께서 누구에게 어떤 걸 빼앗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죽여서 땅에 묻었는지도 나와 있는 것인가.”

사내의 말을 중간에 자른 후, 심드렁하게 물은 명월은 장부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사내는 헛숨을 삼키며 양손으로 장부를 가렸다.

여기까지 와서 뭘 가리는 건가 싶었던 명월의 표정이 굳어진다. 딱 봐도 불쾌함으로 굳어지는 명월의 얼굴을 본 사내는 아차 싶으면서도 쉽게 팔을 치워 내지 못했다.

“사, 사또. 약속을 해 주십시오. 이건 제 목숨을 걸고 가지고 온 것입니다. 만약 이걸 이병현 대감께서 아시면―.”

“죽은 사람 들먹이려거든 그냥 나가게.”

심드렁하게 대꾸한 명월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냥 가 버리려는 듯 구는 명월의 행동에 당황한 사내가 위로 손을 뻗었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여기에 있습니다! 살펴보십시오!”

사내는 기겁을 하며 본인 앞에 있던 장부를 명월 쪽으로 내밀었다. 앞으로 돌려진 검은 장부를 본 명월의 눈빛은 싸늘했다.

가뜩이나 사내를 앞에 두고 있는 게 짜증스러웠는데 그게 한계에 달한 기분이었다.

저런 장부 따위, 살펴보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동안 이것들이 저지른 죄목이 꼬박꼬박 적혀 있을 텐데, 그걸 왜 본단 말인가.

이 장부에 적혀 있는 이들의 원한은 이병현과 그 핏줄이 대거 죽는 걸로 어느 정도 해소된 마당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살아남은 이들은 몇 있었다. 눈앞에 있는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왜 저자는 아직 살아있는 건가, 그런 의문이 들면서도 이유가 있으니 그런 거겠지―정도로 생각하고 말자면서 명월은 선 채로 손가락 하나만 써서 장부를 넘겼다.

앉아서 자세히 살펴봐도 부족할 판에 성가신 얼굴로 대충대충 장부를 넘기는 명월을 두고 사내는 안절부절못했다.

이건 그가 바라는 상황이 아니었다. 장부를 건네면 명월이 크게 기꺼워할 테고, 그로 인한 대가를 한 가지 얻어 낼 셈이었는데―.

사내는 재차 명월의 안색을 살폈다. 혹, 표정을 숨기려는 게 아닐까도 싶었으나 그런 게 아니었다. 구겨진 미간은 펴질 기미가 없었다. 진심으로 짜증스러워하고 있었다.

결국 소리 내 장부를 닫은 명월은 그걸 들어서 사내에게 집어던졌다. 갑자기 날아오는 장부에 놀란 사내는 아이쿠―하는 소리를 내며 그걸 양손으로 받아 냈다.

왜 갑자기 이걸 던지는지 모르겠다. 진심으로 당황한 사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명월을 올려다봤다.

“사, 사또?”

명월은 왜 이러는 거냐면서 공포에 찬 눈길로 올려다보는 사내는 노려봤다.

“이 거지같은 놈아. 네놈은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나한테 들고 와서 보라고 한 거냐? 읽기만 해도 토악질이 나올 만큼 추잡스럽고 더러운 짓거리들이 여기저기 할 것 없이 가득 적혀 있는데―.”

“…….”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짓 한 가지만 해도 두 다리를 뻗고 자지도 못할 거다. 그런데 네놈들은 몇십 년 동안 여기서 그 짓거리만 해 왔던 거다. 그 결과로 이렇게 된 거다. 너희 놈들이 한 그대로 돌려받게 된 거란 말이야. 그런데 이제 와서 뭐가 억울하다고 그런 걸 들고 내 눈앞에 나타나는 거냐. 설마하니 그걸로 네놈의 목숨 구걸이라도 할 셈이었냐. 이 빌어처먹을 놈아―.”

이를 악문 채로 거칠게 내뱉는 명월의 얼굴 위로 숨겨지지 않는 혐오감이 드러난다. 할 수만 있다면 이놈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두들겨 패서 뭉개 놓고 싶을 따름이었다.

살벌한 명월을 앞에 두고 사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다. 장부 하나만 들고 있으면 모든 것들이 본인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거라는 희망적인 생각만을 하고 있었던 사내에겐 지금 이 모든 것들이 당황스러웠다. 대체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굴리는 사내를 두고 명월은 언성을 높였다.

“바깥에 아무도 없느냐! 이놈을 끌고 나가 곤장을 매우 쳐라!!”

“사, 사사사또! 기다려 보십시오! 전 그런 게 아니옵고―!!”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온 포졸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우악스러울 정도로 단단히 팔을 붙잡는 손길에 사내는 히이엑, 하는 소리를 내면서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리 저항을 해 봤자 아무 소용없었다. 포졸 둘에게 몸이 들려지다시피 해서 바깥으로 질질 끌려 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내는 계속 나불댔다.

“사또! 이 장부를 드릴 터이니 제 목숨을 구명해 주십시오! 이곳에서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서 양심적으로 잘 살아 보겠습니다! 절 믿어 주십시오! 사또! 도와주십시오!”

몇 번이나 연거푸 사또를 부르짖는 외침이 듣기 싫다. 명월은 혀를 차면서 “그놈의 입을 틀어막아라!”라고 소리쳤다.

기다렸다는 듯 포졸 하나가 사내의 주둥이를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입술을 얻어맞은 사내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뭐?”라고 태연하게 물은 포졸이 재차 입술을 내리쳤다.

찰싹, 찰싹, 하고 연거푸 두드리는 손길에 사내는 이번엔 신음을 흘렸다.

사내와 포졸이 보이지 않게 되자, 문 바깥에 서 있던 포졸이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눈앞에서 사내가 사라졌지만, 명월은 여전히 기분 나쁜 얼굴이었다. 재수 없는 일을 당했다면서 혀를 찬 명월은 손을 펼쳤다가 움켜쥐었다. 장부를 손에 쥐었을 뿐인데도, 그게 기분 더럽다면서 잔뜩 인상을 쓴 채였다.

그때 백호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조금 전까지 사내가 있었던 자리로 가서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장부를 집어 들었다. 그 기분 나쁠 걸 왜 집어 드는 거냐고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문 명월은 의자에 앉았다. 장부를 살피던 백호는 그런 명월을 힐긋 봤다.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건데? 저런 놈들이 한둘도 아니잖아.”

“한둘도 아니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뭐, 그도 그렇군.”

건성으로 대답한 백호의 입술 꼬리가 올라간다.

명월이 말한 대로 지금까지 저런 식으로 이병현 대감이나, 그들과 관련된 비리를 적은 장부를 들고 오는 이들이 적잖았다.

죽은 이들의 처리는 거의 마무리 되고 이후로 한 달의 시간이 지났다. 죽은 이들과 관련이 없던 자들은 이젠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워낙에 못된 짓을 해서 천벌을 받은 거야.’라고 언급하고 말았지만, 죽은 이들과 관련된 자들은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갑작스럽게 그리도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간 거다. 그게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이들은 사람들 시선을 피해서 몰래 명월을 만나고자 했다.

그러곤 치부책을 슬그머니 내밀며 ‘이걸 드릴 터이니 제 목숨을 구명해 주십시오.’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애초에 사람이라면 그런 짓을 해선 안 되었다. 이병현 대감이 하려는 이상한 짓거리에 대해 알게 되었다면 그걸 말렸어야 했다.

하지만 이병현 대감과 함께 승승장구할 때에는 입 다물고 조용히 있다가 이 사달이 일어나니 그제야 저런 식으로 도와달라 손을 벌리는 거다. 그저 본인들이 한 짓을 잘 정리한 장부를 내밀기만 하고 말이다.

그들은 이번 일에 대해선 눈곱만큼도 반성하지 않았다. 그저 본인들에게 화가 미치는 게 두려워 그걸 피하려 할 따름이었다. 장부에 적힌 이름 중에는 아직 살아남은 이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거다. 일단은 나만 살면 그만인 거였다. 이래서야 제2의 사건이 벌어질 수도 있음이었다.

호접화의 일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전에 있었던 일은 막을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앞으로 생길 일들에 대해선 어느 정도 정리를 하고 싶은 게 명월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런 것들을 도와주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저런 놈들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달리 있었다.

그때 백호가 장부를 흔들었다.

“너 이거 필요 없냐?”

“필요 없어. 그런 걸 읽어 봤자 기분만 나빠져.”

냉랭한 명월의 대꾸에 백호는 장부를 제 품 속에 밀어 넣었다.

“그러면 이건 내가 처분한다. 그보다 슬슬 움직이자. 옥수수 다 됐겠다.”

백호의 말에 재차 옥수수 생각이 난 명월이었다.

기분이 꿀꿀할 때에는 뭘 해도 안 되는 법이었다. 이럴 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먹는 게 제일이라면서 명월은 몸을 일으켰다.

* * *

“어? 오셨어요? 안 그래도 모시러 가려던 참이었어요.”

밝은 얼굴로 마중 나오는 계진의 머리를 쓰다듬은 명월은 대청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바구니에는 먹음직스러운 옥수수가 가득히 차 있었다. 더운 날이었지만, 원래 이럴 때 먹는 옥수수가 더 맛있는 법이었다.

명월은 대청에 앉아선 바로 전립을 벗었다. 계진이 그걸 보곤 “안에 들여다 놓을까요?”라고 묻는다. 고개를 저은 명월은 따끈한 옥수수 하나를 들어 계진에게 내밀었다.

“어차피 다시 쓰고 나가 봐야 하니 신경 쓰지 말고 먹자.”

내미는 옥수수를 받은 계진의 표정이 밝아진다. 맛있겠다, 라고 중얼거린 계진이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던 명월은 옥수수를 재차 집어 들곤 그걸 백호에게도 건넸다.

“하나 먹어 봐.”

“뜨거워서 싫다.”

단호한 거절을 하는 백호의 눈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옥수수가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정말로 뜨거워서 싫은 것뿐이었다.

실제로 미간으로 짙은 주름을 만든 백호는 커다란 부채를 꺼내선 그걸 마구 흔들면서 “덥다. 더워.” 같은 말을 반복했다.

확실히 덥긴 했지만, 그늘진 곳에 앉아 있으니 시원했다.

못 견딜 정도가 아닌데 엄살이 심하다면서 명월은 들고 있던 옥수수를 그대로 입에 댔다. 한입 베어 물고는 계진을 내려다보자 계진도 기다렸다는 듯 옥수수를 깨물었다.

입을 대자마자 그 주변을 동그랗게 베어 물고 나서야 입을 떼곤 행복한 듯 눈을 가늘게 접는다.

“정말 맛있어요.”

“천천히 많이 먹어라. 우리 둘만 먹으면 되는 것 같으니까.”

들으라고 하는 소리에 부채질을 하던 백호가 바로 끼어든다.

“식으면 먹을 거니까 남겨 둬―.”

백호의 말을 무시하고 여기에 담겨 있는 옥수수를 전부 다 먹으면 그것도 재미있겠다 싶었지만, 명월은 애당초 그 정도로 대식가가 아니었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한 개를 먹는 게 고작일 거라며 명월은 대꾸 없이 옥수수 알을 뜯어 먹었다.

올해는 볕이 좋아서 이것저것 다 풍년이었다. 알이 꽉 찬 옥수수 맛도 일품이다. 덥긴 해도 입에 맛있는 게 들어가니까 그게 좋다. 명월은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옥수수 먹는 데 집중했다.

눈을 내리뜬 채로 옥수수를 물고 있는 명월의 턱을 타고 땀이 흘러내린다. 투명한 땀이 턱 끝에 맺히는 걸 본 백호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다.

혀를 내밀어 저 땀을 핥아 먹어 볼까. 그런 생각을 실행으로 옮겨볼까. 그리 생각하고 있는 찰나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건 또 뭔가 싶었던 백호는 고개를 숙였고, 옥수수를 물고 있는 계진을 발견했다.

딱 앞에 선 채로 계진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백호를 올려다봤다. 달리 할 말이 있는 건가 싶었던 백호는 “뭐냐. 꼬마.”라고 물었다.

“그런데 스님은 여기에 계속 계시는 거예요?”

기다렸다는 듯 묻는 말에 백호의 눈썹이 올라간다.

“반양에서 스님 노릇하기로 했다. 왜? 내가 여기에 계속 있으니 싫으냐?”

“계속 있으면 좋긴 한데, 요즘엔 통 스님 복장도 안 입어서 걱정이 되었어요. 여기에 오래 계셔서 절에서 쫓겨난 건가 싶어서요.”

백호는 애초에 승려가 아니었으니 쫓겨날 절도 없었다. 저놈은 땡중이었다고 말하려다 말고 명월은 옥수수를 쥔 채로 계진을 내려다봤다.

“계진아. 서서 음식 먹는 거 아니다. 옆으로 와서 앉아라.”

계진은 냉큼 명월의 옆자리로 달려갔다. 자리를 잡고 앉아선 위를 올려다보는데, 눈동자로 ‘이렇게요?’라고 묻는 것 같다. 그런 계진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에 쓸데없이 흥분을 해서 일까. 이상하게 피곤했다. 누워서 쉬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명월은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방을 발견하곤 반쯤 먹어 가는 옥수수를 흔들었다.

“자네 왔나. 이리 와서 옥수수 좀 먹지그래?”

“맛있는 걸 드시고 계셨군요.”

이방은 사람 좋게 웃으며 앞으로 다가왔고, 명월은 그에게 옥수수를 건넸다. 아직은 따끈한 옥수수를 받아 든 이방은 “정말 맛있을 것 같습니다.”라면서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자신에게 달리 할 말이 있어 찾아온 거겠지만, 성급하게 굴고 싶진 않았던 명월은 계진 옆자리를 가리켰다.

이방도 전해야 할 말이 급한 게 아니었던 듯 계진 옆으로 가 앉았다. 알아서 자리를 조금 피해 주는 계진에게 고맙다고 말한 이방은 옥수수를 한입 베어 물고 느리게 씹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맛있군요. 더워서 안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거라면 하나 다 먹을 수 있겠습니다.”

“양은 넉넉하니 두 개 먹어도 되네.”

“아닙니다. 그쪽에 계신 스님도 좀 드셔야지요.”

그쪽에 계신 분이라는 건 백호를 일컫는 것이었다. 같이 지내다 보니 그가 여름날 뜨거운 걸 잘 못 먹는다는 걸 알게 된 거다.

다른 때에는 괜찮으면서 더운 여름이 되는 순간 갑자기 뜨거운 음식을 거부하게 되었다.

고기가 나와도 김이 모락모락 나면 인상부터 쓴다. 그러곤 “뜨거워. 더워.” 그리 말을 하는 거다.

그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는 동안 명월은 깨달았다. 백호가 여름을 탄다는 걸 말이다.

물론, 본인은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해서 ‘내가 무슨 더위를 탄다는 거야.’라는 말이나 한다. 더위를 탄다는 게 문제될 것도 아닌데, 왜 부득불 아니라 우기는지 모르겠다.

참 이상한 녀석이라며 명월은 옥수수 끝부분을 다 먹은 걸 손에 든 채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당에서 올라오는 지열을 확인하곤 혀를 찼다.

“온 세상이 펄펄 끓는 것 같군.”

“정말 징그러운 날씨야.”

맞장구를 치는 건 백호뿐이었다. 이 정도 더위엔 익숙해진 참이었던 계진과 이방은 옥수수만 먹었다.

하나를 다 먹었으니 두 개째도 먹어 볼까 싶지만, 내키지 않았다. 더워서 그런지 요즘엔 시원한 물 생각만 난다면서 명월은 이방을 돌아봤다.

“그래. 날 찾은 이유가 뭔가.”

이방은 아직 옥수수를 절반 정도밖에 먹지 못했다. 그런 사람에게 왜 날 찾아온 거냐고 바로 묻는 게 미안하긴 했지만, 궁금했다.

무슨 일인지 말이라도 들어봐야 그것과 관련한 처리를 어찌할 것인지를 계획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명월의 물음에 이방은 옥수수에서 입을 떼곤 말했다.

“전남에서 올라오기로 한 사람이 내일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 그 호방 자리 때문에 새롭게 뽑은 사람 말이군.”

“그렇습니다.”

대답을 하는 이방의 안색이 어둡다. 가라앉은 얼굴을 봐서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명월은 물었다.

“앞으로 같이 일할 사람이 생겨서 좋겠네.”

“―뭐, 그렇지요.”

대답한 후, 이방의 입가로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잘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호방이 없어져서 그 자리를 채울 다른 사람이 온다는 게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을 내린 일이었다.

명월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모집하다가 결국엔 다른 지역에서 인재를 뽑았다고 했을 때, 이방은 잘하셨습니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인사권은 명월에게 있었고 언제까지 호방의 자리를 비워 둔 채로 둘 순 없었다.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마음은 답답하다. 그걸 지워내기라도 하려는 듯 이방은 화제를 돌렸다.

“오늘 야시장이 서는 날인데. 가서 구경이나 하시죠.”

“할 일이 마무리되면 가고, 아니 되면 못 가는 거지.”

그리 말하는데 옆에서 누군가 움찔하는 게 느껴진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숙인 명월은 조금 충격 받은 얼굴로 있는 계진을 발견하곤 한쪽 눈썹을 올렸다.

탁하면 척이다. 지금 계진의 눈빛만 보더라도 원하는 게 무언지 알 수 있었던 명월은 조심스레 물었다.

“가고 싶으냐?”

“아니요. 아닙니다요.”

당황한 계진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다시 옥수수를 입에 무는 계진이지만, 그곳에 있는 어른 셋은 전부 ‘가고 싶은 거로군.’라고 생각했다.

계진은 아직 어리고 한창 나가서 놀고 싶을 나이였다. 관아 안에서 복운의 일만 돕는 게 힘들고 가끔은 지루하기도 할 거다.

그간 별 말썽 없이 열심히 일을 잘 하던 계진을 위해서 하루 정도 원하는 걸 해 줘도 나쁘지 않겠거니 싶었던 명월은 다 먹고 남은 옥수수 심을 그릇 안에 넣었다.

“복운에게 말해서 이따 저녁에 나갈 채비를 하거라. 모처럼 놀러 나가자꾸나.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미리 생각을 해 두거라. 오늘만큼은 내 다 사 주마.”

“그,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나도 한번 나가서 구경하고 싶어서 그런다. 야시장이라 하니 특이한 것들도 많겠지. 무척 재미있을 거다.”

그리 말한 후 명월은 입술 꼬리를 올렸다.

기분 좋게 웃는 명월을 올려다보던 계진은 뺨을 붉힌 채로 “고맙습니다.”라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 * *

야시장이라고 해도 이른 시간부터 준비가 한창이었다.

뒤숭숭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올해는 열지 말까, 하는 말도 오갔으나 누군가 ‘이럴 때일수록 열어서 사람들 기분 전환에 도움이라도 돼야지.’라고 말을 꺼내서 결국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매년 이 시기에 열리는 것이니만큼 따로 거창하게 준비할 게 없었다. 이병현 대감이 살아 있을 때에는 그쪽에게 아부를 하려는 이들이 이런저런 쓸데없는 등을 달곤 했으나 이번엔 그런 게 없었다.

사람들 다니는 길목에 소소하게 등 몇 가지만을 걸어 두었지만, 달이 휘영청 밝았기에 다니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다.

시장길 전부에 사람들이 나와서 가판을 올리고 그곳에 물건을 진열해 두었다.

시장에서와 달리 이번에 파는 물건들은 그 종류가 다양했다. 집안의 어린애가 입던 옷이나 쓰임이 없어진 물건, 그리고 그림이나 조각을 한 것들도 더러 올려져 있었다.

드문드문 먹을 걸 파는 곳도 있었다. 원래 야시장의 백미는 먹거리라 할 수 있었던 만큼 음식을 파는 곳 앞으론 어김없이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음식을 받아 드는 사람들을 보자니 명월도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들을 바라보다가도 명월은 사람들 시선이 느껴지면 고개를 숙이거나 갓을 아래로 내렸다.

본인은 그리하는 게 자연스럽다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이들 보기엔 꽤 튀는 행동이었다.

“사또. 자연스럽게 행동하십시오.”

복운의 지적에 명월은 무슨 말이냐며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날이 어두워서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사또가 여기에 계신지 모릅니다. 그러니 괜히 얼굴을 가리거나 몸을 피하지 마십시오. 이상한 선비다 싶어 한 번씩 더 쳐다보게 될 게 아닙니까.”

“어허, 난 그런 적 없대도.”

없다고 말하는 순간 근처를 지나치던 낭자가 고개를 드는 것에 맞춰 명월은 얼굴을 돌렸다. 그걸 복운에게 딱 들켜 버린 명월은 민망함에 표정을 굳혔다.

어쩔 수 없다는 양 바라보는 복운을 두고 명월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백호와 계진이 서 있었다.

백호는 심드렁한 얼굴이지만, 계진은 그게 아니었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앞에서 오는 사람하고 부딪칠 뻔하기도 한 걸 본 명월은 바로 그리로 손을 뻗었다.

“계진아. 이리로 와서 내 손을 잡아라.”

손을 잡으라는 말에 계진은 당황해선 명월을 올려다봤다.

정체가 들키면 곤란했기 때문에 일부러 늦은 시간을 골라서 나온 참이었다. 시간이 늦어지면 사람이 없겠거니 싶었는데 오산이었다.

한낮의 시장보다 훨씬 더 사람이 많은 것 같다면서 명월은 계진의 손을 잡아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이럴 때 재수 없으면 길 잃기 십상이니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거라. 알겠느냐.”

계진은 명월이 꼬옥 쥐고 있는 제 손을 보더니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위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이 수줍게 느껴진다.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건가 싶어서 생각해 보니, 이런 식으로 손잡고 바깥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그간 자신이 정말로 계진에게 무심했구나 싶었던 명월은 반성하자면서 계진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먹고 싶은 건 없느냐. 말해 봐라. 다 사 줄 터이니.”

“아닙니다. 저녁에 밥을 많이 먹고 왔습니다.”

“원래 밥 먹는 배하고 간식 먹는 배는 달리 있는 법이다.”

명월의 말이 우스웠다. 정말 괜찮다는 말을 하려던 계진은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냄새에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싶어 그쪽을 살피자 메밀을 말려 잘 간 가루와 꿀을 섞어서 그대로 녹인 후 굳힌 음식이었다.

원래 아이들은 저런 걸 좋아하기 마련이었다. 실제로 그쪽에서 시선 한 번 떼지 못하는 계진을 본 명월은 냉큼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명월에게 손이 잡힌 계진은 앞으로 질질 끌려 가면서 중얼거렸다.

“어, 정말로 괜찮은데―.”

하지만 결국엔 명월과 함께 그 앞에 서게 되었고,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원하는 모양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걸 보자니 마음이 훈훈해진 복운은 웃는 얼굴로 백호를 쳐다봤다.

“우리 사또는 참 자상하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런 훈훈한 장면을 보면 누구라도 똑같은 생각을 할 터였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한 맞장구를 쳐주면 그에 대해서 더 긴 설명을 하려 했던 복운이나, 백호는 그러거나 말거나 영 관심 없는 얼굴이었다. 심드렁하게 서 있기만 하는 모습에 복운은 입을 다물고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는 말을 받아 주지도 않다니. 더럽게 무안했다. 예전부터 백호에 대해선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던 복운은 점점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전에는 꼬박꼬박 승복을 입더니만, 요즘은 사냥꾼이나 심마니 같은 차림이었다. 즉, 편하게 대충 입고 다닌다는 거다.

다른 이도 아니고 사또 곁에 있을 거면 옷차림에 신경을 쓰기도 해야 하는 법이었다. 저렇게 망나니처럼 입고 다니면 사또의 체면에 누가 될 거다. 지금 슬쩍 그런 말을 꺼내 볼까.

하지만 그리 말을 했다가 백호가 엇나가면 어쩌나 싶었다. 웬만해선 쪼는 법이 없는 복운이었지만, 백호는 대하기가 참 어려웠다.

특히 아무 말 없이 빤히 볼 때에는 소름이 끼친다고 해야 할까나. 하여튼 그런 기분 더러운 느낌이 들곤 했다.

하지만 이건 자신이 아니라 사또 명월을 위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결심을 굳힌 복운은 당장 옆을 돌아봤다.

“저기―.”

그 순간 눈이 동그란 여인이 복운과 시선이 부딪쳤다. 막 옆을 지나치려 했다가 저기, 라고 부르는 소리에 놀란 듯 그 자리에 멈추어 선 여인은 주변을 둘러보다 수줍게 본인을 가리키며 “저요?”라고 되물었다.

아니다. 복운이 말을 걸고자 했던 건 그쪽이 아니라 다른 이였다. 당황한 복운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가고 저기 앞에 명월에게로 걸어가는 백호를 발견했다.

어느새 저만치 가 버린 걸까. 거기다 이런 일이 예전에도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일까.

복운이 혼란에 빠져 굳어 있는 동안 여인은 그의 모습을 위아래로 살피면서 곱게 빗어 올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총각. 나한테 관심 있수?”

여인이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지만, 관심이 있어서 그쪽을 불러 세운 게 아니었다. 뭔가 착오가 있었다면서 어버버거리는 동안 여자는 적극적으로 복운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저기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이야기나 나눠 봅시다.”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여자의 태도에 복운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큰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꽁꽁 얼어붙은 그의 상태에 아랑곳없이 여자는 전력으로 밀어붙였고, 결국 팔이 잡혀선 안쪽으로 질질 끌려 갔다.

막 계진에게 막대에 끼운 단 과자를 건네던 명월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보이는 건 팔짱을 끼고 있는 백호뿐이었다.

뭘 산 건지 구경이라도 하겠다는 양 차분한 얼굴로 눈을 내리뜨고 있는데 뭔가 좀 수상쩍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 뭔데? 뭔 일 있었나?”

태연하게 말을 받아치는 백호의 얼굴에서 어색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뭔가 좀 찝찝하다. 그게 무얼까 싶었던 명월은 다른 쪽에서 이리로 몰려오는 아이들을 확인하곤 뒤로 빠져 주었다.

그럴 때에도 계진의 손을 야무지게 잡은 채로 가운데 길로 나와서 걸어갔다.

정체를 들키면 안 되니까 가장자리 쪽으로 가려 했지만 그러면 계진이 주변 구경하기에 불편함이 있을 터였다.

실제로 계진은 아까부터 주변의 모든 것들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백호는 명월의 반대편 쪽에 서서 계진이 사람과 부딪히는 걸 막아 주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로 느릿하게 걸어가는 모습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다. 그게 무얼까 싶어 곰곰이 생각하던 명월은 주변을 밝히는 밝은 등에 시선을 줬다.

드문드문 걸린 등은 겉면에 연한 색이 들어간 한지를 덮어서 주변을 밝히는 색이 각기 달랐다. 가까이서 보면 등의 모양새가 허술했지만, 멀리서 보면 여기저기로 다른 색의 빛이 떠올라 있는 것 같아 보기에 좋았다.

그러다 나무에 걸린 등 아래에 서게 된 명월은 그리로 손을 뻗었다. 손등으로 노란 물이 생기는 걸 본 명월은 계진을 내려다봤다.

“계진아. 이것 봐라.”

안 그래도 명월이 하는 걸 보고 있었던 계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뻐요. 사또.”

계진의 순수한 감탄사에 기분이 좋아진 명월은 양손을 펼치고는 엄지를 맞닿게 했다. 그러곤 손가락을 팔락거리자 그 모양새가 나비가 나는 것 같다. 별거 아닌 손장난이었지만, 계진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한 손에 단 과자를 들고는 다른 손으로는 그걸 만지기 위해서 손을 뻗는다. 손을 움켜쥐었다가 펼치길 반복하는 모습이 귀엽다. 명월은 조금 더 계진 쪽으로 손을 내리면서 놀아 주었다.

즐거워하는 그 모습이 남들 보기에도 좋았던 것인지 지나치는 사람들이 종종 웃으면서 옆을 스쳐 지나간다.

그런 자들이 명월과 계진을 볼 수 없도록 뒤에 서 있던 백호는 묘한 시선을 감지하곤 뒤를 돌아봤다.

딱히 특이할 것 없는 모습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확인한 백호는 눈을 가늘게 뜬다.

그때 명월이 재차 계진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백호가 느리게 뒤를 쫓고, 그들이 이동하는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 * *

요상한 무늬의 하회탈이 있고 눈만 가리는 가면도 더러 있었다. 재미를 위해서 조각했다 하는 노인의 얼굴 위로 느긋함이 묻어난다.

그게 마음에 들었던 명월은 하회탈 하나를 사서 계진의 머리에 덮어 주었다. 꽤 묵직했던지 비틀거린 계진은 환하게 웃는다.

단 과자를 다 먹어갈 즈음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고기를 맛있게 익힌 걸 사서 손에 쥐여 주었다.

처음에는 여지없이 배부르다며 괜찮다 거절하던 계진은 그걸 받아들곤 맛을 보더니 “맛있어요.”라면서 눈을 반짝거렸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차력을 하는 이들도 있었고, 입에 기름을 머금고 있다가 뱉으면서 길게 불을 뿜어 내는 것도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것에 놀란 계진이 급히 명월의 등 뒤로 숨으면서 덜덜 떨었지만, 명월이 괜찮다고 달래 주자 조금씩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곤 금방 볼거리에 빠져들어 갔다.

인형극을 보다가 앞에 사람이 많아서 보이지 않게 되니 명월이 들어 주려 했다. 그때 백호가 조용히 계진의 몸을 들어선 목마를 태워 주었다.

이런 건 처음이었던 듯 계진은 정말로 당황해선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백호가 담담하니 “보기나 해라.”라고 말하자 조심스레 앞을 살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방해 없이 끝까지 인형극을 잘 볼 수 있었다.

처음엔 긴장한 채로 있던 계진은 인형극에 몰입하게 되면서 그것에 푹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다 보고 난 후에는 잔뜩 흥분해서 재잘거렸다.

“진짜 재미있었어요. 어떻게 인형이 그렇게 움직이지요?”

그러곤 제 손바닥을 눈앞으로 들어 올린다. 인형의 움직임이 어떤 식으로 이어지는지를 살피기라도 하려는 듯 손가락을 꼬물거리는 게 귀엽다.

명월은 재차 계진의 손을 잡으려 했고, 그때 계진이 누군가와 부딪치면서 당황한 소리를 냈다.

“왜 그러냐?”

별생각 없이 물은 명월은 계진의 굳어지는 표정을 보곤 안색을 굳혔다. 부딪칠 때 어딘가 다친 건가 싶어 허리를 굽히자 계진이 소매를 뒤로 숨기려 한다.

그때 백호가 계진의 손목을 잡아 위로 당겼고, 바로 당황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계진이 손목을 내리려 했지만, 단단히 잡혀서 어림도 없었다. 그리고 명월은 계진의 소매 중간에 검게 생긴 얼룩을 발견했다.

아, 부딪칠 때 묻은 모양이었다.

지저분해진 소매를 들키게 된 계진의 안색이 굳는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눈을 내리뜨는 걸 본 명월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새 옷을 사서 입어야겠다.”

“이, 이건 제가 빨면―.”

“생각해 보니 대충 구해다가 입히기만 했던 것 같구나. 이번 기회에 멋진 옷을 선물해 주마. 돈 많은 사또가 특별히 선물하는 것이니 너에겐 거부권이 없다.”

무언가를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던 계진은 입을 다물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으나 그걸 꾹 참고는 고개를 숙인다.

명월은 바로 주변을 살폈다. 야시장에 사람이 이만큼이나 몰려 있으니 포목점 문도 열릴 거다.

그때 저기 안쪽에 열려 있는 가게가 보였다. 명월은 그곳을 가리키면서 백호를 바라봤다.

“우리 저리로 가서―.”

진지한 표정으로 다른 곳을 응시하는 백호를 발견한 명월은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있는 건가. 직감적으로 감지한 명월의 표정이 덩달아 굳어진다. 그때 백호의 눈동자가 명월에게 향하고, 동시에 입술 꼬리가 올라간다. 느긋하게 웃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명월은 바로 간파했다.

아, 드디어 나타나셨군.

동시에 웃은 명월은 계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계진아. 옷은 다음에 사 줄 테니 일단 관아로 돌아가 있지 않으련?”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른 건 다 받을 수 있어도 옷은 아니었다. 명월이 자신을 위해서 그토록 큰돈을 써선 안 되었다. 그리 생각하며 단호한 표정을 짓는 계진을 본 명월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선 먹물이 든 소매를 잘 접어서 가려 주었다.

대충 안 보이게 한 후에 그곳을 두어 번 털면서 계진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복운이 안 보이는구나.”

초반부터 사라져 있었던 복운을 지금에서야 찾는 건 너무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복운이 언제부터 사라진 건지를 모르는 명월은 인상을 쓴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저기 앞에서 달려오는 복운이 보였다.

상당히 지친 모습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복운도 명월을 발견하곤 눈이 크게 떠졌다. 억, 하는 소리를 내며 서둘러 명월에게 달려갔다.

“사또. 대체―.”

“넌 어디서 뭘 하고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냐.”

기다렸다는 듯 던져지는 타박에 복운의 입이 크게 벌려진다. 심히 억울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복운이나 명월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진의 손을 복운에게 내밀었다.

“난 잠시 어디 가 봐야 할 곳이 있으니 넌 계진하고 먼저 들어가 있거라.”

“어, 어디를 또 가실 셈이란 말입니까?”

이제는 명월이 어디 가 봐야 한다는 곳이 있으면 불안해지기부터 한다. 당장 굳어지는 복운의 얼굴을 본 명월은 대답 없이 눈을 내리떠 계진을 가리킨 후에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이 앞에선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라. 그런 표시였다.

그 표시를 읽어 내긴 했지만, 복운은 입을 다문 채로 고민이 역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살며시 계진의 손을 잡고는 물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입니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터이니 걱정은 하지 마라.”

“너무 늦어지기 전에 들어오십시오. 그리고―.”

“계진이 소매에 물이 든 것 같다. 어서 들어가서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후에 재워라. 자는 시간을 훌쩍 넘긴 것 같구나.”

가만두면 걱정이 많은 복운이 잔소리하듯이 줄줄줄 말을 이어 나갈 걸 알기에 명월은 중간에 그냥 끊어 버렸다.

복운은 명월을 물끄러미 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곤 계진을 내려다본 그는 언제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냐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계진아. 이만 들어가자. 들어가는 길에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라.”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달리 필요한 건 없어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린 계진은 뒤를 흘깃하고 봤다. 명월이 느긋한 모습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웃는 얼굴로 배웅을 해 주는 모습에 계진의 입가로 웃음이 걸린다. 고개를 꾸벅인 계진이 복운과 함께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걸 보던 명월은 바로 몸을 돌렸다.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다가 가판에서 커다란 부채를 발견했다.

“그건 얼마인가?”

“아이고, 부채를 사러 오셨습니까. 안목이 높으십니다. 이건 제가 직접 대나무 살을 잘 발라서 만든 것이랍니다.”

무료한 얼굴로 지나치는 사람 구경을 하던 노인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본인이 만든 작품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던 노인은 이런저런 설명을 한 후 가장 좋은 것을 추천해 주었고, 명월은 망설임 없이 그걸 구입했다.

한 손에 든 부채를 흔들면서 걷자 조금 더 시원해진다. 사람이 많아도 답답하지가 않다면서 명월은 주변을 살펴봤다.

어느 순간 백호는 사라져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부채로 입을 가린 후 크게 입을 벌려 하품을 한 명월은 설렁거리며 주변 구경을 하는 듯싶다가 포목점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일부러 나와 보는 이는 없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양 편안하게 걸음을 옮기던 명월은 근처에 걸린 모시를 구경했다.

걸려 있는 모시가 유난히 좋고 시원해 보였다. 이걸로 옷을 지으면 무척 좋을 것 같다. 계진의 일도 있고 하니, 이걸 좀 끊어서 갈까.

그리 생각하던 명월은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경할 옷감이 많으니 느긋하게 충분히 다 본 후에 결정을 내리자 싶었던 거다.

안쪽에 세워진 옷감과 쌓인 것들 사이로 바깥으로 사람들이 보인다. 즐거운 얼굴로 구경하는 이들, 그저 빠르게 걷는 이들, 그리고 그 사이로 이쪽을 주시하는 자가 있었다.

검은 옷에 삿갓을 깊게 눌러쓴 사내의 차분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걸 확인한 명월은 부채를 반으로 접어선 그걸 흔들었다.

조금 더 가까이 오지그래. 그런 도발이 담긴 손짓에 상대가 천천히 움직인다. 신중하게 주변을 살피며 이리로 오는 걸 확인한 명월도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예전 이곳을 찾았을 때, 차 대접을 받았던 탁자 앞으로 가 의자를 끄집어내고 그곳에 앉았다. 다시 부채를 펼쳐서 두어 번 흔든 후에 눈을 내리떴다.

가게 안은 어두웠다. 서서 구경할 때에는 몰랐는데, 앉아 있으니 여기가 꽤나 으스스한 장소라는 걸 깨닫게 된다. 명월은 조금 더 부채를 흔들면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날이 참 덥군. 그렇지 않은가.”

태연하게 물은 후 옆을 확인하자 그곳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대꾸 없이 그냥 서 있기만 하는 모습이 마치 유령 같다. 그것에 명월은 부채를 접어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서 있지만 말고 이만 앉게나. 피곤해 보이는데 말이야.”

명월은 호의를 베풀려 한마디 꺼낸 거지만, 듣기에 따라서 상대방은 그걸 다르게 느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화소군을 두고 명월의 웃음이 한결 짙어졌다.

“왜 그리도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건가. 그리도 내가 그리웠나?”

차분히 묻는 목소리에 화소군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병현 대감이 실종되었다 들었습니다.”

“말이 실종이지. 이리도 긴 시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건 죽은 게 아니겠는가.”

“사또께서 이병현 대감과 그 일족이 죽은 일에 가담되어 있으십니까.”

나직한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것에서 지금 화소군의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 일에 가담되어 있다 한다면, 그러면 어찌할 건가.”

“의혹이 있으면 조사도 받으셔야 할 게 아닙니까. 수많은 사람을 죽인 이가 어찌 사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내가 한 일도 아니고, 그런 걸로 따지면 자네의 목숨이 아직 붙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전 괜찮습니다.”

굳은 목소리로 대꾸한 후, 화소군의 입술 꼬리가 위로 서서히 올라간다.

“구덩이 속에 있었던 건 전부 다 넘겨받은 이들이니까.”

“그러시겠지. 그래서 자네에겐 잘못이 없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거네.”

모든 나쁜 일들은 이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이병현 대감과 그 일당이 사람을 처리하는 와중에 몇몇은 화소군에게 넘어가서 그가 원하는 걸 얻어 내기 위한 재료가 되었을 터였다.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지금도 알아보고 있지만, 언제 끝나게 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였다.

그런 그들의 원통함이 얼마나 클 것인가.

“자네와 그들로 인해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은, 자네의 그 말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야.”

명월은 목소리를 낮추곤 말을 덧붙였다.

“대감은 내가 그리한 게 아니야. 함께 죽은 이들 또한 마찬가지지. 내가 그리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겠나. 그들이 그리된 건, 자초한 결과라 할 수 있지. 한 짓이 있으니 고대로 돌려받은 거고,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크고 작은 원한은 사라지지 않고 이승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하나의 계기가 마련된다면 그 원한은 형태를 띠어서 본인을 그리 만든 이들을 찾아가게 될 거다.

호접화가 그리했듯이. 다른 어떤 존재가 나타나 화소군에게 보복을 가할지 모를 일이었다.

이번 이병현의 일이 생겼을 때, 아주 잠시 화소군에게 뭔 일이 생긴 게 아닐까 싶었는데 용케도 살아 있었다. 거기다 재차 자신의 앞에 나타나다니. 정말로 대담한 사내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몸 상태는 성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낙낙한 옷으로 몸을 가리곤 있으나 오른쪽 팔의 모양이 이상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천을 보아 마치 팔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꼿꼿하게 서 있으나, 필사적으로 몸에 힘을 주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지금 그가 필사적으로 허세를 부리고 있음을 감지한 명월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직도 살아 있는 게 용하군. 난 이병현 대감이 그리되었을 때, 자네도 어딘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었지. 아, 이 말을 잊었군. 보내 준 독약은 아주 잘 먹었네.”

말은 이렇게 해도 자신이 정말로 그걸 마신 건 아니었다.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잘생기고 조금은 거친, 사람이 아닌 존재가 중간에 빼돌렸다.

백호가 도와주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꽤나 배가 아팠을 거다. 새삼 생각하니 고마워진다. 나중에 백호에게 확실하게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며 명월은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어둠 속에서도 확인이 가능할 만큼 환하게 웃는 명월을 두고, 화소군은 하아―하고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무서운 분이셨습니다.”

“내 보기엔 자네가 더 무서운데? 어찌 그런 일을 저지르고도 마음 편히 잘 수 있었나? 난 새가슴이라 눈을 감고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을 거야.”

명월의 말에 화소군의 입술 꼬리가 올라간다.

“그래서 익숙해진다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익숙해지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지. 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면 그게 나쁜 것인지도 모르게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 이미 완전히 적응되고 익숙해진 화소군이라면 달리 수작을 부려 두었을 거다.

명월은 접은 부채로 반대편 손바닥을 두드렸다.

“혼자 왔을 리는 없고. 누군가와 함께 들어온 건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눈치채신 걸 보아하니, 처리해 버리신 모양입니다.”

처리를 한 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였다.

실제로 화소군의 등 뒤에서 백호가 어슬렁거리면서 나타났다.

명월과 시선이 부딪친 백호는 엄지로 제 목을 긋는 시늉을 내다가 화소군 옆을 지나치면서 놈을 한 대 치는 시늉을 냈다.

이상한 느낌이 든 것일까.

화소군이 백호를 바라봤지만, 그 눈빛은 잠잠했다.

백호가 명월의 곁으로 와선 탁자 옆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는데도 화소군은 그걸 모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거다.

백호가 일부러 저런 식으로 군다는 걸 모르진 않았던 명월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부채질을 했다.

“―그래. 다른 곳으로 가서 하는 일들이 잘되지 않은 모양이로군. 원래 장사치들은 물건을 들고 흥정을 해야 하는데, 그 물건 자체가 사라졌으니 큰일이겠어. 전에는 당장 간이나 쓸개를 꺼내 줄 것처럼 굴던 이들이 자네가 빈손이라는 걸 알자마자 표정이 달라졌을 거야. 그렇지 않은가?”

넌지시 건네는 것 같지만, 정말은 화소군 그의 자존심을 완전히 너덜너덜하게 만드는 종류의 빈정거림이었다.

그러나 화소군은 흥분하지 않고 태연하게 그 말을 받아쳤다.

“그렇습니다. 제가 빈손이라는 걸 알자마자 만나려 들지도 않더군요. 전에는 제가 지닌 걸 어떻게든 구하기 위해서 바닥에 납작 엎드리던 자들이 말입니다.”

“전에도 바닥에 납작 엎드려도 속으론 칼날을 갈고 있었을 거야. ‘지금은 내가 이것 때문에 참고 있지만, 이것만 아니라면 새파랗게 어린 네놈에게 비굴해질 필요가 없다.’라고 말이지.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런 거네. 특히, 돈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고 있는 자네들 같은 사람들은 말이야.”

계속해서 부채질을 하려니 그쪽으로 신경이 분산되는 것 같다.

백호가 화소군의 눈에도 보이는 상태라면 그에게 건넬 수도 있었겠지만, 그리할 수 없었던 명월은 부채를 접고는 그걸 탁자 위에 올려놨다.

“온 세상이 제 것인 줄 알고 거드름을 피우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쪽박 차게 된 거로군. 천년만년 부자로 살 수 있는 게 아니거늘, 다른 곳에 재물을 빼돌려 두지 않고 뭘 했나. 한곳에 지나치게 밀어 넣으니 그곳을 잃게 되는 순간 그 꼴이 되는 게 아니겠나.”

진정으로 안 되었다며 혀를 차는 명월이지만, 화소군 듣기엔 조롱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거다.

화소군이 비밀스럽게 잘 보관해 두고 있던 것들을 모두 태우고 박살내 버린 게 바로 명월, 그였으니 말이다.

전부를 망쳐 버린 이가 안되었다며 걱정해 봤자 그리 고맙진 않았다. 오히려 속이 뒤틀릴 따름이었다. 하지만 화소군은 침착하게 물었다.

“용케도 그 장소를 아셨습니다.”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네.”

“누가 도와준 것입니까. 그곳이 있다는 걸 누가 알려 준 것입니까?”

“내 말했지 않나? 길을 걷다가 유연히 발견하게 되었네. 그뿐일세.”

“―그 말을 제가 믿을 것 같습니까.”

“믿거나 안 믿거나. 그건 자네 자유겠지.”

설령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신이 모든 걸 발설할 필요는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눈치 빠른 화소군은 무언가가 자신의 곁에 있음을 감지했을 터였다.

지금으로선 그저 감지한 채로 두는 게 나았다. 이런저런 것들을 전부 다 알게 된다면 그만큼 성가신 일이 생길 터이니 말이다.

화소군은 시종일관 태연한 명월을 바라봤다. 독약까지 건넨 자가 코앞에 서 있는데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다.

오히려 본인이 있는 곳으로 끌어들이는 대담한 행동을 취하기도 했다. 그런 명월의 행동에 견딜 수 없는 시기심이 치미는 걸 느끼며 화소군은 중얼거렸다.

“사또께서는 보이시기 때문에 그토록 태연하실 수 있는 겁니까.”

그간 화소군이 손에 넣기를 원하던 힘이었다. 명월이 그걸 쥐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졌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보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두렵지 않으신 겁니다.”

만약 명월과 같은 상태였다면, 이렇게까지 어이없이 당하진 않았을 거라는 게 화소군의 생각이었다.

노골적으로 그걸 드러내니 명월이 모를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자연스럽게 명월의 얼굴에서도 표정이 사라지고 만다.

세상은 참 넓고, 그곳에 존재하는 사람은 제각각이라는 걸 이런 상황에서도 느끼게 되다니. 재미있는 일이라며 명월은 입을 열었다.

“자네가 틀렸네. 오히려 보이기 때문에 더 두렵지.”

목을 타고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보다 편안하게 말을 꺼내 볼까도 싶었으나, 잘되지 않는다.

“자네가 나처럼 보였다면, 장담하건대 그런 짓을 할 수 없었을 거야.”

목소리도 표정도 굳어 버리게 된다. 그리 말을 하는 동안 백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자신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화소군과 대면하고 있음에도 옆에 있는 백호가 더 신경 쓰이니 그게 이상했다.

명월은 다시 부채를 펼쳤다. 느리게 흔들자 미지근한 바람이 느껴진다. 이제는 부채질을 해도 시원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슬슬 장소를 옮길 필요가 있었다.

“자네는 만만치 않은 상대인 것처럼 여겨졌네. 그런데 왜 나는 자네를 드문드문 생각할 뿐, 당장 어떻게 해야 한다거나 치워 내야 한다고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을까. 실제로도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하는 연장선상에 자네가 있었을 뿐이지, 자네만 붙잡고 깊게 파고든 적이 없었던 것 같아. 처음엔 그 연유를 알 수 없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으네.”

화소군이 자신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고 있음이 느껴졌다.

명월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느긋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네가 한 짓은 소름 끼치는 종류의 것이었지만, 자네 자체는 별 대단찮은 상대였기 때문에 그다지 위기감이 들지 않았던 것 같아.”

이런저런 일을 경험하면서 대범해진 것일까. 아니면 비워진 마음에 다른 것들이 채워진 것일까. 화소군을 봐도 예전의 그런 느낌이 없었다.

반양 땅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 반양은 자신이 사또로 부임한 곳이었다. 저런 자들이 더는 괜한 수작을 부릴 수 없도록 할 거다.

“내게 목숨 구걸을 하러 온 것 같은데, 쓸모없는 일이네. 내가 자네를 위해서 해 줄 일은 없고, 해 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네. 만약 자네가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도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면, 그때 한번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보세.”

이처럼 노골적으로 말하는데도 그걸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멍청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화소군의 손으로 힘이 들어간다.

흥분하는 쪽이 지는 상황이었다. 그리하니만큼 마음을 차분히 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여 봐도 잘되지 않을 터였다.

결국, 악문 이 사이로 분노가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사또의 곁을 지키는 수호신의 정체를 밝혀내고야 말 것입니다. 전 이대로 쓰러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살아남아서 다시 사또를 뵈러 올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네. 그땐 정말로 제대로 붙어 보세. 나도 지금보다 조금 더 단단해져 있을 테니 말이야.”

명월은 웃었다. 계속해서 부채질을 하면서 눈을 끔벅거렸다. 할 말을 마쳤으니 이만 물러나게. 그런 의미의 시선을 받은 화소군을 이를 악물었다.

화소군은 명월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본래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미인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또 봐서 완전히 머릿속에 각인한 후 화소군은 뒤로 한걸음 물러서선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다시금 일어설 의욕을 북돋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음이 담기지도 않은 인사에도 반응을 해야 하는 걸까. 무시하고 싶지만, 사람이 너무 냉정해도 안 되는 노릇이었다. 명월은 부채를 접고는 그걸 흔들었다. 알았으니 가 보게. 그런 손짓이었다.

그걸 노려본 화소군이 바로 몸을 돌리곤 밖으로 나간다. 서둘러 걸음을 옮겨 사라지는 걸 보고만 있던 백호가 명월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두 번 다시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도록 주둥이 좀 쳐 주고 올까?”

“그냥 내버려 둬.”

담담히 말한 명월은 백호에게 부채를 건넸다.

“이번 일을 거치면서,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벌을 받을 놈들은 그리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굳이 너나 내가 나설 필요는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서 놈이 어찌 되는지 구경만 할 거다.

본인이 대단한 존재인 양 착각하고 여기저기 활보하면서 전부 다 찌르고 다녔던 화소군에게 있어, 이와 같은 종류의 외면은 익숙하지 않은 것일 거다.

중심에 서 있던 존재가 그 모든 것에 밀려나 도태되고 무시를 받는 것만큼 굴욕적인 일이 없을 터였다. 손대지 않고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그것이 저 화소군이라는 인간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처법이었다.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더한 짓을 한다면, 그땐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그를 벌할 거다. 그건 분명 자신보다 훨씬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이겠지.

눈을 내리뜬 명월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긴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로 사색에 잠긴 명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호가 물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들어가 볼 거냐?”

목소리 안쪽에 은근하게 깔린 의도를 감지한 명월은 피식, 하고 웃었다.

“그럴 기분 아니야.”

“그럴 기분이 들게 해 주면 되는 거잖아.”

“…….”

가끔 백호에겐 섬세함이라는 게 존재하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애초에 그런 게 있다면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겠지만―.

명월은 고개를 들어 백호를 봤다. 건네받은 부채를 느리게 흔들면서 그는 웃고 있었다.

느긋함이 풀풀 풍기는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명월은 일어나 백호의 목을 끌어안고 바로 입술을 겹쳤다.

갑작스러운 명월의 행동에 백호는 이게 웬 떡이냐 싶어서 당장 허리에 팔을 감으려 했고, 그 전에 명월이 뒤로 물러섰다. 막 명월을 끌어안으려다 말고 그를 놓친 백호는 당황스러운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백호에게 손가락을 하나를 세워서 느리게 좌우로 흔든 명월은 바로 포목점 밖으로 나가 버렸다.

명월이 받아 주나 싶어서 좋아했던 백호의 표정이 싸늘히 식는다. 입술을 씰룩거린 백호는 “저 녀석이…….”라고 중얼거리곤 급히 탁자에서 내려왔다.

재빠르게 포목점을 나서자 저만치 멀어지는 명월이 보인다.

한달음에 명월에게 달려간 백호는 그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엉겨 붙어 오는 백호였지만,

명월은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백호가 고개를 숙이곤 얼굴을 가까이 붙이려 할 때에는 바로 옆으로 물러나 몸을 피했다.

그렇게 투닥거리는 둘의 머릿속에서 화소군의 존재는 잊혀진 지 오래였다.

* * *

똑바로 누워서 자던 계진은 코끝이 간지러운 느낌에 눈을 떴다. 멍하니 있다가 방 안에 어스름히 들어온 빛을 보았다. 계진은 그제야 일어나야 할 시간임을 깨닫곤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손을 들어 눈을 비비고 난 후, 크게 입을 벌려 하품을 한 계진은 옆을 보곤 깜짝 놀랐다. 그곳에 잘 개어진 옷이 있었던 거다. 뭔가 싶었던 계진은 그 앞으로 가선 무릎을 꿇고 앉아 위에 걸 건드려 봤다. 청색이 은은하게 들어간 예쁜 모시옷이었다.

“……우와.”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뭔가가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방에 있으니 이게 내 것이겠지 싶으면서도 뭔가 조심스러워서 그걸 가슴 앞에 대보면서 계진은 연신 신기해했다. 그러다가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옷을 내리곤 고개를 들었다.

아직 이른 시간일 텐데 누굴까 싶어서 조용히 문을 열고 바깥을 살피자, 대청 끝에 나란히 앉아 있는 사내 둘이 보였다.

하나는 사또고, 하나는 스님이었다.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아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스님이 이상한 말을 했는지 사또가 “아, 넌 진짜―.”라면서 잠시 언성이 커졌지만, 곧 조근조근 무언가를 설명했다.

처음에는 잘 듣나 싶던 스님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크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하면서 지루해하자 사또가 주먹으로 스님의 옆구리를 쳤다.

아프지 않게 때린 것 같은데 스님이 옆으로 세게 넘어지면서 “아프잖아.”라면서 투덜댄다.

그러자 사또는 스님의 팔을 잡아 다시 똑바로 앉혀 놓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스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 알았어. 알았다고.”

건성인 투였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무척 보기에 좋았다. 아주 오랫동안 저 모습을 보고 싶다면서 계진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그때 스님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다.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스님의 입술 꼬리가 올라가면서 손짓한다. 그것에 옆에 앉아 있던 사또도 고개를 돌렸다.

명월과 시선이 부딪친 계진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엿본 것 같아서 기분이 거시기했던 계진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저기, 그게―.”

그 순간 명월이 웃는다.

“일어났으면 방에 들어가서 옷 좀 입어 보고 와라. 안 맞으면 수선해야 하니까.”

역시나 방 안에 있던 건 자신의 옷이었나 보다. 그것도 사또가 선물해 주는 옷. 내심 알고 있었지만, 막상 확인받고 나니 그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뺨이 발갛게 물든 계진이 급히 방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백호가 다리를 꼬면서 중얼거렸다.

“저 녀석 귀엽네.”

“착하고 솔직해서 더 귀엽지.”

저대로만 자라 주면 더 바랄 게 없을 터였다.

명월은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토닥였다. 새벽이라 그런지 아직은 시원했다. 하지만 날이 밝는 순간 바로 소란스러워질 거다.

“지금은 한가롭지만 날이 밝으면 다시 시끌벅적해지겠지.”

“새로 온 호방이 나타나기로 한 날이던가. 이방이 보면 뒤집어지겠군.”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

중얼거린 명월은 입술 꼬리를 올렸다.

잠깐 다른 곳으로 보낸 호방이 다시 돌아오기로 한 날이었다. 다들 그를 죽은 걸로 알고 있을 터이니, 그가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놀랄 게 분명했다. 어찌 된 거냐면서 기겁할지도 모르지.

다시 돌아온 호방이 여기서 계속 일을 할지 어떨지 모를 일이었다. 일부러 다른 곳으로 보냈다가 돌아오라 한 건 그도 마음의 정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전과는 많이 달라진 참이었지만, 그것도 호방이 느끼기에 여전히 불안하다 싶으면 계속 여기에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은 말을 들어 봐야 했다.

백호는 느긋한 얼굴을 한 명월을 빤히 바라보다가 투덜대듯 말했다.

“네가 온 후로는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다.”

“그런 게 좋은 거야. 그날그날 뭔가를 하고 있어야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

백호를 돌아본 명월의 눈이 살짝 휘어진다.

“일을 잘하고 있든, 못하든, 일단은 하는 중이라는 느낌이 좋아.”

백호는 웃는 명월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곤 말없이 손을 내려선 명월의 엉덩이를 토닥인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그런 느낌의 토닥임에 가만히 있던 명월은 문이 열리고 계진이 신나서 달려 나오는 순간 재빠르게 백호의 손을 치워 냈다.

그러곤 급하게 입어서 엉망인 계진의 꼴을 보곤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다시 입혀 주기 위해서 계진에게 이리로 오라며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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