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설광 (18)화 (18/60)

18화

“짜잔!”

막둥이가 자루를 펼쳐 소쿠리에 와르르 쏟아부었다. 갖은 나무 열매부터 우슬(牛膝), 나무뿌리, 지구자, 버섯 등이 수북했다.

“이렇게나 많이 가져왔어?”

“아, 아기씨 주려고 여, 열심히 주웠어요!”

방글방글 웃는 막둥이의 두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마치 칭찬해 달라는 듯 넙죽 제 배를 내민 강아지 같은 얼굴이었다.

지난번에 도토리며 밤을 가져다준 걸 받아 준 이후로 막둥이는 꼬박꼬박 열매를 모아 유원에게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어찌나 손이 야무진지 산에 있는 열매란 열매는 죄다 가져오는 듯했다.

“그러다 한눈판다고 아범한테 혼나면 어쩌려고.”

“개, 괜찮아요. 할아버지보다 제가 더, 어, 걸음이 빠르구, 할아버지두 아, 아무 말 안 하시는걸요.”

염려 말라는 듯 막둥이가 주먹 쥔 손으로 가슴을 탁탁 두드렸다. 제 주인도 아닌 자에게 참으로 갸륵한 정성이 아닐 수가 없었다.

유원은 젖은 수건으로 막둥이의 뺨과 손에 묻은 검댕을 닦아 주었다. 종일 나무 캐고 장작 패느라 얼굴이며 손이 꾀죄죄했다.

“옷은 어쩌다 이리 찢어졌어?”

적삼 군데군데 벌레 먹은 듯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가지에 걸리고 긁히며 닳은 자리가 터진 모양이었다. 마침 챙겨 둔 바느질함을 꺼내자 막둥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기씨, 바, 바느질도 하실 줄 아셨어요?”

“응. 근데 왜 그리 놀라?”

“사내가 하는 건 처, 음 봐서요.”

“그냥 옷을 바늘로 꿰매는 일인데 남녀 할 것이 어디 있어.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그만이지.”

막둥이는 그저 고개만 또 끄덕끄덕했다. 그는 능숙하게 바늘을 이리저리 꿰었다. 한두 번 한 솜씨가 아닌 듯했다. 옆에서 바느질을 구경하며 새참으로 받아 온 식은 찐 토란을 야금야금 먹던 막둥이가 입을 열었다.

“그, 근데요, 아기씨. 저 새는 어, 어쩌시려고요?”

막둥이의 눈이 소쿠리에 장식품처럼 얌전히 앉아 있는 까마귀를 향했다. 인형인 줄 알고 건드렸다가 움직이는 까마귀에 깜짝 놀라 유원에게 달려온 이후로 줄곧 소쿠리를 경계 중이었다.

“날개가 찢어졌길래 약을 발라 줬어. 어제만 해도 움직임조차 없더니, 이제 좀 덜 아픈 모양이더구나.”

“아기씨도 참, 저, 저런 까마귀한테까지 수, 수고를 다 하시고요. 그냥 내버려 두시지.”

“날이 아직 추운데 얼어 죽게 둘 순 없잖아. 예전에 내가 자란 산사에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제아무리 미물이어도 정을 주면 그것이 덕이고 복이라 하셨거든.”

죄 없는 미물을 살생하는 행위는 나쁜 인과가 되어 돌아온다. 그러니 어떤 동식물이든 긍휼히 살펴야 한다. 큰스님께선 그것이 부처님의 자비로움이라고 늘 말씀하시곤 했다.

막둥이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다만 유원이 하는 말이면 좋은 것이려니 하는 듯 유순한 눈빛이었다.

“뭐, 게다가 저 까마귀들이 나중에 은혜라도 갚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바, 박씨 물고 온 제비처럼요?”

활기찬 대답에 유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박씨 물고 온 제비는 봄에만 오는 새라 다르긴 하지만, 아무렴 어떨까. 토란 조각을 한입에 꿀꺽 삼킨 막둥이가 말했다.

“그, 근데 아, 아기씨는 어, 언제까지, 여, 여기 계셔야 한대요?”

“아마, 일 년 정도려나?”

“일 년이나요?”

태백훈에게 유원이 제안한 유예 기간은 일 년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일 년만 이 집에 남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리하여 외당 쪽방 한 칸이나마 빌붙을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면, 일, 일 년 뒤에는요? 아, 안채로 가실 수 있대요?”

“글쎄.”

안채는커녕 당장 쫓겨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옆에 붙어 별 수발을 다 들어보려 해도, 쓸모없다며 질색하는데 조만간 내쫓기는 건 아닐까. 일 못 하는 종놈이라 더는 곁에 두기 싫다 하면 그만이니까. 어쩌면 이렇게 트집거리를 잡으려고 의도적으로 유원을 무시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자연히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 테니까.

그렇게 제가 꼴 보기 싫은 걸까. 아무리 제 생부에게 원한이 있다 해도 그렇지. 그 원한은 유원이 한 일도 아니거니와 태백훈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조차 아는 바가 없었다.

“영감께선 오, 오랑캐 장수들 목도, 이렇게 많이 벤 천하의 대장부시면서, 어, 어찌 아기씨한테는 졸장부처럼 구신대요.”

“쉿, 막둥아.”

“그치만, 그치만요. 영감마님이 쪼, 쫌생이처럼 구시는 건 맞잖아요….”

목소리를 낮춘 막둥이가 작게 구시렁거렸다. 쫌생이, 졸장부. 영감 귀에 들어갔다간 경을 칠 소리긴 하지만, 한편으론 통쾌했다.

천하를 주름잡는 대장부면서 저한테는 졸장부 같은 행동이라. 괜히 웃음이 비실비실 샜다.

“아기씨? 왜,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아서.”

차마 막둥이 말에 웃었다고 할 순 없는지라 유원은 그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윽고 바느질을 마무리 지은 그가 옷을 탁탁 털어 막둥이에게 도로 입혔다.

“다 고쳤다. 입어 봐.”

“와아.”

두 팔을 벌리고 빙그르르 돈 막둥이가 방싯거렸다. 근사한 꼬까옷이라도 해 입은 듯 기쁜 얼굴이었다.

세답터에 빨랫감을 주고 돌아오니 태백훈은 방 안에 없었다.

“방금 나가셨는데?”

하품을 늘어지게 한 문지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주인어른 나가신 줄도 몰랐냐는 듯 한심하단 눈이었다. 출타한단 귀띔도 듣지 못했는데. 내심 억울했지만 문지기한테 그런 변명이 통할 것 같진 않았다. 한숨을 꾹 눌러 참은 유원이 재차 물었다.

“허면 어디로 가셨답니까? 언제 오시고요?”

“어디로 가기는? 당연히 감영(監營) 가셨겠지. 돌아오시는 거야 주인어른 마음이고.”

다소 무시가 섞인 대답이긴 했지만 알려 주는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감영을 갔다면 오늘도 종일 자리를 비울 작정인 듯했다.

도백의 하루 일과는 의외로 훨씬 한가로웠다. 오경 전에 일어나 강무를 나갔다가 점심을 먹고는 방 안에서 담배를 피우며 빈둥거렸다. 그러다 저녁때는 또 어디론가 말없이 나가 버리고, 문 닫히는 이경 전에나 어슬렁거리며 돌아오곤 했다.

명예직이라 해도 엄연히 당상관급인 만큼 이리저리 바쁘게 다닐 법도 한데, 유원이 보기에는 한량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침 드물게 볕도 좋아 갓끈 말리기도 좋을 날이었다. 마루를 싹 쓸어 내고 탁자에 수건부터 갓끈까지 죄다 넓게 펼쳐 두었다. 허리를 두드린 유원은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이 없는 걸 재차 확인한 다음 납작한 바구니를 열었다. 안에는 사흘 만에 다친 부위가 말끔하게 나아 새살이 돋아난 까마귀가 들어 있었다.

“사람들 오기 전에, 얼른 날아가렴.”

유원은 두 손으로 까마귀를 둥실둥실 띄워 올렸다. 받고 날리고를 몇 차례 반복하자 활개를 편 까마귀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조금 휘청거리는 듯했으나 금세 자연스럽게 날갯짓을 했다.

그때, 청아한 휘파람 소리가 났다. 저 멀리 날아갈 줄 알았던 까마귀가 향한 곳은 뜻밖에도 담장 바깥쪽이었다.

휘익, 또다시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소리를 따라 조심스레 중문 바깥쪽을 살피자 감나무 밑에 웬 남자가 서 있었다. 남빛 도포에 붉은 목도리를 두른 모습이 꽤 근사한 미남자였다. 그는 담장에 앉은 까마귀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이 녀석, 어디 들개가 물어간 줄 알았더니 무사했구나.”

이에 까마귀가 대답하듯 깍, 울었다.

“그래, 그래. 나도 알아.”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흐뭇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흡사 까마귀와 말이 통하는 듯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누구일까. 차림새를 봐서는 일개 하인은 아니었다. 그렇다 해서 불경한 침입자는 아닌 듯하고, 문지기와 하인들이 득시글한 행랑채를 지나왔으니 태백훈을 뵈러 온 방문객임이 자명했다.

“오호라, 여기, 계셨습니까?”

“흐악!”

어느 틈에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기겁한 유원이 뒤로 물러나며 손으로 비명을 틀어막았다. 다가오는 기척도 못 느꼈는데 언제 여기 문 앞까지 왔지. 도깨비라도 되는 걸까.

“…실례지만, 누구신지요?”

유원은 두 주먹을 꼭 쥔 채 조심스럽게 남자의 신원을 물었다. 그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이런. 소개가 늦어 송구합니다. 소인은 영감 밑에서 호위 수행 중인 손청준이라 합니다.”

“손청준, 나리시라고요?”

“예.”

손청준, 손청준….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었더라. 기억을 더듬던 유원은 사흘 전 들은 여비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청준 나리가 돌아오셨다며 호들갑을 떨었지.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그 청준 나리가 아마도 눈앞의 남자일 듯했다.

“영감을 뵈러 오셨는지요? 지금은 출타 중이신데.”

“지금은 영감이 아니라 유원 아기씨를 찾아온 겁니다.”

“예? 저를, 어찌 아십니까?”

“귀인이신 아기씨를 왜 모르겠습니까. 이 집의 주인댁이시잖습니까.”

청준이 생긋 웃었다. 주인댁이라는 민망한 호칭은 둘째치더라도, 태백훈이 아니라 유원을 찾아왔다니?

“혹시, 영감께서 나리더러 저를 쫓아내라고 해서, 그래서 일부러 찾아오신 것인지요?”

“도백 영감께서 아기씨를 왜 쫓아내십니까?”

“…아니에요?”

그러자 손청준은 대답 없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태백훈이 저를 쫓아낼 작정으로 사람을 보낸 것도 아니라면 왜 찾아온 거지. 쪽방살이하는 사내 색시 구경이나 하려고 온 건 아닐 텐데.

때마침 어디론가 날아갔던 까마귀가 손청준에게 돌아왔다. 유원은 그의 손에 얌전히 앉아 있는 까마귀를 보며 말했다.

“그 애가 나리의 까마귀였습니까?”

“예, 제 소중한 벗입니다.”

“저 위에 까마귀들도요?”

유원이 가리킨 곳은 나무 위였다. 가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까마귀 무리를 확인한 남자가 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 녀석들 전부 다요.”

언뜻 볼 때도 까마귀를 수족처럼 잘 다루기에 혹시나 했었다. 그렇다면 원혜에 오기 전부터 계속 보이던 까마귀들도 설마….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