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태실 사건이란 말에 태백훈이 쉬이 말문을 열지 못했다. 자못 심각한 표정이던 그가 대답을 이었다.
“…궁중 태실(胎室)에 독사와 벌레를 넣은 독을 넣어 저주하려다 실패했지. 당시 태실을 관리하던 내관, 상궁 모두 역모죄로 참수되었고.”
“그래, 그 독사와 벌레를 넣은 독. 뱀과 두꺼비, 지네. 삼충(三蟲)을 넣어 두면 서로 물어뜯다 하나만 남는데, 마지막 남은 것이 굶주려 죽게 되면 고(蠱)라는 악귀가 되어 역병을 퍼트린다고 해. 그리고 그 역병은 쉽게 막기 힘들고.”
“악귀라…….”
“천년 새매한테서 짐독을 채취할 능력이라면 고를 만드는 방법 정도는 알 것이야. 게다가 그 지네나 두꺼비가 아니라 요수를 갖고 고를 만든다면, 더더욱 끔찍한 악귀가 만들어지겠지. 예전에 왕도에 창궐했던 그 역병처럼 말이야.”
연녹수가 두 손을 깍지 꼈다. 음울하게 가라앉은 얼굴이 마치 도자기 인형처럼 창백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오십여 년 전에 있었던 역병의 첫 번째 사망자는 어린 나인이었다. 길바닥에서 쓰러진 나인의 죽음을 막연히 돌연사 정도로 여겼을 때만 하더라도 그 누구도 역병이라 여기지 않았다.
한 달. 원인 불명의 역병이 전국적으로 퍼지기까지의 기간은 고작 한 달이었다. 당시 그 역병을 잡으려 왕실에서는 온갖 의원을 불러 모았으나 해결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종국에는 존재를 금기시하던 도사들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를 지경이었다. 전무후무했던 병은 수십만에 다다르는 사망자를 만들고 나서야 간신히 잡을 수 있었다.
그보다도 더 강한 역병이 또 발발한다면, 왕실과 전하의 안위에도 해악을 끼칠 것이 틀림없었다. 잠자코 생각을 정리한 태백훈이 말했다.
“그럼 이 짐독을 만든 자가 악귀를 사역하려고 준비 중일 수도 있겠군.”
“그렇게 될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진 말란 거야. 물론 아닐 수도 있지. 단순히 독극물 관리를 못 한 얼간이일지도 모르고.”
“얼간이라기엔 약삭빠른 구석이 있어 보이니 전자에 가깝지 않겠나.”
“뭐, 근심부터 하진 마시고. 그런 야차 같은 표정 지어 봤자 악귀가 무서워하진 않을 테니까.”
실실 웃으며 농담한 연녹수가 슬그머니 귓속말을 했다.
“그건 그렇고.”
멀찍이 서서 기다리는 유원을 슬쩍 곁눈질한 연녹수가 말했다.
“어디가 그리도 못났다는 거야?”
“무엇이?”
“영감의 새색시 말이야. 하도 영감께서 못났다 구박하신대서 얼마나 박색인가 했더니만, 예쁘기만 하구만. 철천지원수 집안 출신이래도 모질게 구실 필요가 있나?”
그 말에 태백훈이 코웃음을 쳤다.
“예뻐 봤자 쓸모없는 사내일 뿐이지.”
“쓸모없기는? 영특하고 재주도 많아 보이는데.”
“아무리 재주가 많니 뭐니 해도 나한텐 홍세환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에 불과해.”
“그럼 내치지 그랬어? 굳이 곁에 데리고 다닐 필요가 있나?”
“그럴 사정이 있어.”
“이런, 이런. 언제부터 남의 사정을 그리 봐줬다고?”
“연녹수.”
“예전에 만났던 그 여인한테 남은 죄책감 때문은 아니고?”
연녹수가 말하는 순간, 태백훈이 연녹수의 멱살을 잡아챘다. 얼굴 가득 역정이 담겨 있었다. 어느 틈에 빠져나갔는지 연녹수는 언제 붙잡혔냐는 듯 유원의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이것 보렴! 저 무뢰배가 나를 이리도 괴롭히니까 내가 만나기 싫은 것 아니겠니? 나는 성심껏 도와줬는데 냅다 멱살을 잡으려고 하다니, 정말 너무하지 않니?”
연녹수가 유원에게 동조를 구했다. 어린애가 투정을 부리는 듯한 태도였다.
“그 무뢰배한테 멱살 잡힐 소리를 한단 생각은 안 드나?”
“세상에, 무서워라.”
태백훈이 노려보자 연녹수는 처량한 얼굴로 유원의 등 뒤로 숨었다. 구미호도 저리 가라 할 능구렁이가 따로 없군. 끓어오르는 욕을 참아 누른 태백훈이 상종하는 대신 몸을 돌렸다. 연녹수를 살살 어르던 유원은 성큼성큼 대각을 나서는 태백훈을 보고 허둥지둥 따라 움직였다.
“영감! 돌아가시려고요?”
큰 소리로 물어봐도 태백훈은 돌아볼 기미조차 없었다. 슬그머니 옆에 선 연녹수가 쯧쯧, 혀를 찼다. 방금까지만 해도 태백훈이 무섭다며 벌벌거리던 태도와는 딴판이었다.
“이립(而立)에 닥칠 액운을 막아 줄 귀인이 찾아와도 못 알아보는 둔치로구나.”
이립? 액운? 중언부언 알 수 없는 혼잣말을 하던 손을 탁탁 턴 연녹수가 유원을 보며 생긋 웃었다..
“무뚝뚝한 신랑 때문에 고단하지?”
“…….”
“첫날밤에 소박을 놓고는, 무슨 까닭인지 새색시를 내쫓지도 않고. 참으로 속 모를 사내라 속상하겠구나.”
말할수록 부끄러운 치부라 유원은 고개만 푹 수그리고 있었다. 연녹수가 발랄하게 말했다.
“빈손으로 보내기 아쉬우니 선물이나 챙겨 줄까?”
“예? 아니요! 안 주셔도…!”
어느 틈에 유원의 품에 바구니가 아기처럼 안겨 있었다. 묵직한 바구니 안에는 탐스럽게 익은 열매가 가득했다.
“녹수 님?”
당황한 유원이 두리번거리며 연녹수를 찾았다. 그러나 눈 깜짝할 새에 연녹수는 사라진 뒤였다. 아름답던 꽃나무 정원도, 폭포 소리도, 따오기 한 쌍이 지저귀던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정신 차리고 보니 측백나무 숲으로 돌아와 있었다. 덩그러니 서 있던 유원은 제 뺨을 한 번 꼬집었다.
통각으로 봐선 꿈속은 아니고 생시인데. 순식간에 여러 일을 겪고 나니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얼떨떨했다.
한가롭게 풀을 뜯던 조랑말이 콧등으로 유원을 건드렸다. 건너편에서 태백훈은 묵묵히 말안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매듭을 단단히 고정한 그가 유원을 돌아보더니 품에 든 바구니를 뚫어져라 봤다.
“녹수가 줬습니까?”
유원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구니에 든 과일을 확인한 그가 여상한 얼굴로 말했다.
“복숭아로군요.”
“다시 돌려 드리려 했는데 그대로 사라지셨습니다.”
그 말에 태백훈이 천천히 다가오자 유원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러나 거리가 벌어지긴커녕 점점 좁혀지기만 했다. 어느 틈에 유원의 코앞에 태백훈이 서 있었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흐려졌다.
“예로부터 복숭아는 불로장생의 과일이라 불렸죠.”
유원이 들고 있던 바구니에서 복숭아 한 알을 꺼낸 태백훈이 보란 듯이 한 입 베어 물었다. 달큼하고 끈적한 과즙이 입술을 타고 턱 끝으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정염(情炎)을 의미하기도 하고요.”
“정염이요?”
“잠자리에서의 정분 말입니다.”
그 말에 유원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설마 연녹수가 복숭아를 준 이유가 그런 짓궂은 의미는 아니겠지. 제게 몸 정 붙일 이유 하나 없다며 빈정거리던 분이지 않던가.
태백훈은 잠자코 복숭아를 우물거렸다. 아니, 정확히는 복숭아를 먹으며 유원을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낯선 것을 쳐다보듯 빤한 시선에 유원은 목깃을 만지작거렸다.
“그 눈은….”
태백훈이 뭐라 말하려던 그때였다. 멀리서 불빛이 일렁거렸다. 말발굽이 지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차츰 가까워졌다.
“두 분 무사하셨군요.”
말에서 뛰어내린 곽현욱이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손청준도 같이 있었는지 까마귀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연녹수 님은 만나신 겁니까?”
“보다시피.”
태백훈이 눈짓으로 유원을 가리켰다. 바구니를 본 곽현욱이 입을 쩍 벌렸다.
“그 인색한 도사 양반께서 자기가 아끼는 복숭아를 내어 줬단 말입니까?”
“원래도 제멋대로 구는 사람이잖나. 이번엔 웬일로 기분이 좋았나 보더군.”
“어찌 되었든 간에, 용건은 잘 해결하셨습니까?”
“그럭저럭. 자세한 사정은 가면서 이야기하지.”
곽현욱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능숙하게 말에 올라타려던 태백훈은 문득 유원 쪽을 돌아봤다. 그는 옆구리에 바구니를 낀 채 안장 앞에서 한참을 낑낑거리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승마가 서툰 몸짓이었다. 말은 그리도 어화둥둥 아이 돌보듯 다루면서 정작 말타기를 못한다니, 참으로 우스운 꼴이었다.
“말도 못 타면서 내내 말씀도 안 하셨습니까?”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닙니다. 걸어가자니 못 따라갈 것 같아서….”
유원은 풀 죽은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이맛살을 찌푸린 태백훈이 말에서 내렸다. 그는 가벼운 짐을 싣듯 유원을 번쩍 들어 안장에 앉혔다. 남은 조랑말의 고삐를 곽현욱에게 내민 그가 말했다.
“이 말은 네가 챙겨서 와라.”
“같이 타고 가시렵니까?”
“이러다 날밤을 새울 거 같으니 별수 없지.”
곽현욱은 조금 놀란 듯했지만 곧바로 고삐를 받아 들었다. 태백훈은 손쉽게 말 위로 올라탔다.
“앞쪽으로 바짝 당겨 앉고, 고삐 잡으세요.”
유원은 그가 시키는 대로 고삐를 잡았다. 동시에 태백훈이 박차를 가했다. 이랴! 말이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며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아까보다는 훨씬 나았으나 유원은 좀처럼 안도할 수 없었다. 귀를 스치는 바람 소리도, 메마른 낙엽 냄새와 차가운 밤공기도 아스라했다.
그저 등 뒤에 닿는 숨과 체온만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