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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43)화 (43/60)

43화

달이 캄캄한 이른 새벽부터 도백저 안이 시끌벅적했다. 준비된 수레에 봇짐이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염옥화가 이리저리 다니며 하인들을 독촉했다.

불빛 환한 사랑채에선 김수남이 한창 외출 채비를 돕는 중이었다. 태백훈은 늘 입던 평복 차림 대신 검푸른 철릭을 꿰입고 있었다. 두루마기 앞뒤로 수놓은 호랑이와 동백 흉배에서 무관으로서의 위엄이 돋보였다.

광맥과 수렵이 도내의 주요 경제 자원인 만큼 산과 숲의 감찰은 도백이 가진 중대한 의무였다. 하여 매년 춘분과 추분마다 감영에서는 요수 사냥에 특화된 부대를 편성해 토벌을 나가곤 했다. 이른바 봄 사냥이었다.

대청에 서서 김수남이 걸쳐 주는 외투를 잠자코 받아 입던 그가 외당 바깥쪽을 쳐다봤다. 훤히 열린 중문 밖에는 유원이 제 애마를 정성스럽게 빗질하고 있었다. 그를 인지하는 순간 태백훈의 눈이 세모꼴로 날카로워졌다.

봄 사냥은 중대한 연례 임무인 만큼 들이는 품과 인력도 많았다. 동원되는 병력이 큰 만큼 말은 물론이고 식량, 노숙 때 필요한 침구와 막사용 천막 운반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올해는 그 품 중의 절반 가까이를 아낄 수 있었으니, 도사 연녹수가 이번 봄 사냥에 동행하겠다는 뜻을 보낸 덕이었다.

살상을 꺼리는 도사들의 규율상 전쟁에서는 도움이 안 되지만 요수잡이만큼은 도사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어지간해선 공사에 개입하지 않는 연녹수의 변덕스러운 동행은 분명 희소식이었으나 문제는 연녹수가 이번 여정에 홍유원까지 데려가겠노라 막무가내로 단정 지어 버렸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연녹수더러 오지 말라 하는 쪽이 나았을까. 그러나 불필요한 품값과 여비를 아낄 수 있음은 물론이고 든든한 병력까지 되는 이를 마다하기엔 실익이 분명했다.

어디까지나 사사로운 불편함 때문임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그러나 홍유원을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소꿉장난도 아니고 사냥이었다. 말 하나 죽었다고 속상해하던 그로서는 결코 감당하지 못하리라.

말이 머리를 비비자 유원이 이마를 대고 조곤조곤 속삭이더니 이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크게 긴장해도 모자랄 판에 뭐가 그리 좋아 웃고 있단 말인가. 평소에는 잘 웃지도 않으면서.

“영감마님. 뭐 언짢은 일이라도 계십니까?”

짜증이 서린 태백훈의 눈치를 살피던 김수남이 조심스럽게 하문했다. 대답 대신 외투 매듭을 꽉 조여 맨 그가 성큼성큼 사랑채 바깥으로 나섰다. 말과 가볍게 장난을 주고받던 유원이 그를 보고는 흠칫 물러났다.

“…출발 전에 건초를 든든히 먹였습니다. 발굽도 튼튼하게 수선하여 산길을 종일 다녀도 거뜬할 거라 했고요.”

“전날부터 준비시켰으니 그래야 마땅하겠죠.”

퉁명스러운 대꾸에 유원이 조심스럽게 고삐를 그에게 건네자 태백훈은 앗아가듯이 거칠게 잡아챘다. 움찔거리는 손길에 순간 과했나 싶었지만 곧장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막둥이란 노비 아이를 불러오거라.”

난데없는 명령에 염옥화는 의아해하면서도 하인을 시켜 서둘러 막둥이를 찾아오게 했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때라 마침 그는 행랑채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비몽사몽으로 끌려온 막둥이가 태백훈 앞에 납작 엎드렸다.

“소, 소, 소인을 차, 차, 찾으셨, 다고….”

밤하늘에 휘날리는 서릿발 같은 얼굴에 겁먹은 막둥이가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걱정스럽게 막둥이를 쳐다보는 유원을 흘낏 쳐다본 태백훈이 말안장에 걸어 뒀던 보조용 장도칼을 잡아 뺐다. 갑자기 칼을 꺼내 든 태백훈의 태도에 다들 놀라기도 잠시, 태백훈이 막둥이 앞으로 장도칼을 던졌다.

“너 또한 이번 사냥에 동행할 것이다. 준비해서 따르거라.”

“예, 예, 예에?”

“어느 상황이든 주인을 지키는 것이 아랫것의 도리인 법이다.”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거리기 바쁜 막둥이를 내려다보던 태백훈이 말에 올라타자 유원이 다가왔다.

“영감.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굳이 사냥에 데려가시려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그대한테 붙일 호위며 몸종이 없으니, 그 대신 저 아이라도 데려가야지 않겠습니까.”

“제 안전은 스스로도 지킬 수 있습니다.”

“잘도 그러시겠습니다.”

다소 날카로운 비아냥거림에 유원이 입을 다물었다. 고삐를 잡은 태백훈이 손짓하니 수레를 매단 나귀가 출발했다.

흙먼지 뿌옇게 일어난 문 너머를 살피던 유원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 그는 곧장 막둥이를 일으키고 등을 도닥거렸다.

“얼른 들어가서 좀 더 자렴.”

“아, 아니에요. 얼른 준비할 테니까 기, 기다려 주세요.”

“아니, 괜찮다. 따라오지 않아도 돼.”

“여, 영감, 마님이, 며, 명령하셨, 잖아요.”

“내 말 들어.”

적게는 한 달, 그 이상도 걸리는 여로였다. 무슨 일이 닥칠지도 모르는 자리에 막둥이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눈을 벅벅 비빈 막둥이가 장도칼을 꼭 쥐었다.

“소, 소인더러, 아, 아우 삼으신댔잖아요. 아우가 혀, 형을 어찌 안 따라가요?”

“막둥아.”

“나, 나, 나중에 영감한테 아기씨 크게 혼나는 것보다는, 그, 그냥 같이 갈래요. 저, 사, 산도 잘 타고요. 그러니까… 아, 아기씨 지킬 수 있어요.”

코를 연신 훌쩍거리면서도 막둥이는 물러나지 않았다. 혼도 내고 달래 보기도 했으나 유원은 끝내 막둥이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 * *

“그러니까 저 꼬맹이가 아가의 몸종이란 말이지?”

말수레 뒤편에서 씩씩하게 따라오는 막둥이를 흘낏 살핀 연녹수가 작게 속닥거렸다. 고개를 끄덕인 유원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전후 사정을 전부 들은 연녹수가 킬킬거렸다.

“근엄한 척은 다 하면서 유치하다니까.”

“……죄송합니다.”

“죄송은 뭐가 죄송하니. 저기 앞에 있는 영감이 죄송할 일이지.”

고삐를 고쳐 잡은 그가 턱짓으로 저기 앞쪽을 가리켰다. 손청준과 곽현욱을 좌우에 둔 채 대열 가운데를 지킨 태백훈이 보였다. 일찍 일하러 나온 백성들이 도백의 사냥 행렬을 보고는 무운을 빌었다.

“아무튼 걱정하지 말거라. 아가의 안전은 이 연녹수가 지켜 줄 거니까.”

“저야말로 녹수 님께 방해되지 않게 조심할게요.”

“암만 조심해도 쉽지 않을 거야. 사실 태 영감이 아주 틀린 말만 한 것은 아니란다. 이맘때 산은 아주 위험하거든. 그런데도 내가 고집을 부려서 널 동행시켰으니 책임은 져야지.”

염려 말라면서 거듭 안심시킨 연녹수를 올려다보던 유원이 물었다.

“헌데 이번 사냥에는 왜 동행하신다 하셨어요?”

“황 부윤이 말해 주길 이번에는 현운산 쪽으로 간다더구나. 여기서 가장 큰 산이자 영산(靈山)으로 꼽히는 산으로 도보(圖譜)에만 기록된 대형 요수들이 서식하거든.”

봄 사냥은 서부인 원혜에서부터 북동부로 이어져, 남부를 통해 다시 원혜로 돌아가는 여정이었다.

특히 이번 여정에는 현운산맥 끝자락에 있는 큰 산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북쪽 산맥은 여름에도 이유 없는 한파가 들이닥치곤 해 어지간한 산쟁이들도 산행하기 힘들어했다. 그러나 여름 전에 미리 변경을 넓게 살피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행선지였다.

“거기서 사는 요수 중에 검은 지네가 있는데 엄니에서 추출되는 독이 아주 특별해. 짐승이든 사람이든 몽혼(夢魂) 상태로 만들어 주는데, 어떤 통증도 느껴지지 않거든. 그런데 해독은 또 아주 간단하니, 큰 부상을 입었을 때 요긴하지.”

일전 그가 말한 생약 연구의 일환 때문에 사냥에 따라나서기로 한 모양이었다. 하긴 아무리 유능한 도사라 해도 혼자 가기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가는 편이 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연녹수가 고삐를 당겨 수레를 앞질렀다. 뒤늦게 가져왔던 물건을 떠올린 유원은 등 뒤에 놔둔 봇짐을 더듬거렸다. 이전에 담갔던 복숭아주를 밀봉한 술병이 덜그럭거리며 손가락 끝에 걸렸다. 나중에 전해 드려야지. 도사들은 태반이 술을 아주 좋아한다고 들었으니 연녹수 또한 좋아할 터였다.

말타기가 익숙하지 못한 유원은 수레에 짐과 함께 올라타야만 했다. 산길이 가팔라질수록 수레가 흔들리긴 해도 심하게 어지럽진 않았다. 가마보다 훨씬 편안하기까지 했다.

저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이며 청명한 하늘까지 더하니 분명 위험한 사냥길임을 알면서도 경치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건너편 산을 가만히 쳐다보던 유원은 슬쩍 고개를 돌려 태백훈이 있는 방향을 확인했다. 관병들 사이로 그가 손청준과 무어라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오늘 새벽에도 그렇고, 뭔가 그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 거둬 달라 할 땐 언제고 연녹수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한 것이 불쾌했던 걸까. 하지만 왜? 오히려 유원이 연녹수 밑에 있으면 마주칠 일이 줄어들 것이니 그로선 골칫거리를 눈 밖에 치울 수 있어 편할 텐데.

“모르겠다….”

“무, 뭐가요?”

작게 혼잣말하던 유원의 한숨을 엿들은 막둥이가 되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 유원이 애꿎은 외투만 다시 여몄다.

* * *

느지막한 밤이 되어서야 그들은 한 주막집에서 멈춰 섰다.

도백의 행차임을 알아본 주모가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그날따라 먼저 온 객들로 방이 잡혀 있어 쓸 만한 독방이라곤 좁은 한 칸뿐이었다.

봉놋방 세 칸을 잡아 두 방은 병졸들 스무 명과 관노들 셋이 모여 쓰고, 남은 방은 곽현욱을 비롯한 중직들과 호위들이 쓰기로 했다는 말에 연녹수가 질색했다.

“지금 나더러 저 좁은 방에서 자란 말이냐?”

“그럼 어쩌겠습니까? 굳이 동행까지 자청하셨으면 이 정도는 감수하셔야지요. 아무리 종친이시라지만 궁도련님처럼 구셔야겠습니까?”

“차라리 나무 위에서 누워 자는 편이 낫겠구나!”

“그러시든가요. 나중에 가면 차라리 그 방에라도 끼워서 재워 달라 하시게 될 겁니다.”

곽현욱이 투정하지 말라며 모나게 받아쳤다. 당장이라도 으르렁거리며 싸울 기세에 손청준이 웃으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 자, 연녹수 어른께서 불편하지 않다면 주모에게 부탁해 주인채에 있는 방이라도 좀 내 달라 하겠습니다. 그쪽도 안방은 아니라 작기는 매한가지겠지만 그편이 좋으실 테지요?”

“저 고약한 놈 코 고는 소리보다야 낫겠지.”

“예, 예, 소인은 코로 피리를 불어 바람을 일으키는 사나이입니다.”

귀를 휘휘 판 곽현욱이 후, 귓밥을 부는 시늉을 하자 연녹수가 경망스럽다는 얼굴로 소매를 탈탈 털었다.

차례대로 방을 전부 배정하는 사이에 유원은 수레에 짐을 정돈했다. 수레를 끌고 오느라 지쳤을 말이 밥은 잘 먹는지 물은 마시는지 확인하고 있노라니 손청준이 슬그머니 다가와 있었다.

“고단하시지요?”

“예? 괜찮습니다. 고작 첫날인걸요.”

“오늘은 그나마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민가가 보였지만, 며칠만 되어도 야숙해야 할 일이 많아질 겁니다.”

북부 산을 먼저 올라간다 했으니 나흘만 지나도 사람보다 짐승의 자취가 더 많이 보이게 될 터였다. 유원은 그의 친절한 설명에 감사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대편에서 태백훈이 돌아오는 모습에 손청준이 그를 반기며 앞으로 나섰다. 주막에서 돈을 받지 않겠다 하는 말에, 인근에 불순한 짐승이나 요수가 없는지 확인하고 온 차였다.

“다행히 독방이 하나 있어 영감의 방으로 잡았습니다. 필요하시면 목간도 바로 준비해 두겠다 하고요.”

“알겠네.”

“식사는 방으로 올리라 하겠습니다.”

안내받은 방으로 태백훈이 향하는 모습을 확인한 유원이 몸을 돌렸다. 막둥이가 배정받은 주막방에 가려던 순간이었다.

“이리 오세요.”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에 유원이 눈을 깜빡였다. 방 앞에서 문도 아직 열지 않은 태백훈이 유원에게 눈짓했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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