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밤기운에 소슬해진 바람으로 입술이 까칠하게 말랐다. 아랫입술을 핥으며 숨을 삼킨 유원은 오른손으로 왼쪽 팔 토시를 만지작거렸다.
“마침 나와 계셨네요.”
안쪽에서 나온 주모가 살갑게 말을 붙였다.
“다름이 아니라 목간이 마침 비었는데, 혹시 더운물을 쓰시렵니까?”
간드러진 목소리에서 수줍음이 느껴졌다. 태백훈은 곁눈질로 주모를 살폈다. 급하게 치장하고 나왔는지 새것 같은 저고리 하며 입술에 바른 연지까지 붉은빛이었다. 의중이 뚜렷한 몸치장에 그가 담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간단하게 씻을 정도로만 준비해 주게.”
“예, 바로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식사는 어찌해 드릴까요? 마침 어제 잡힌 꿩이 있는데 푹 고아 탕으로 올릴까요?”
“괜찮군. 이따 두 사람 몫으로 준비해서 방에다 올려 주겠나.”
“어머, 두 사람이요?”
주모가 의아한 얼굴로 두 눈을 깜빡거렸다. 분명 독방을 내줬을 텐데 식사로 두 사람 몫을 준비하라니. 실수로 한 말은 아닌 듯한데 방에 다른 사람을 들이시려나. 주모가 슬그머니 맞은편을 보려는 순간, 안쪽 부엌에서 와장창,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님! 빨리 여기 좀 와 보세요!”
다급히 주인장을 찾는 목소리에 주모가 혀를 찼다. 최근 머물고 간 행상인들 말로는 도백이 색줏집 여기저기를 드나드니 밤이 외로우신 모양이 아니냐 수군거렸다.
하여 모처럼 맞게 된 고관대작 양반님 밤 시중 좀 들어 보려 했건만,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 놈들 때문에 공을 칠 판이었다.
태백훈은 부엌 쪽을 쓱 돌아보며 너그럽게 말했다.
“주인장을 찾는 모양인데 식사는 필요하면 다시 말할 테니 가서 볼일 보시게.”
“…예에, 그럼 소인이 필요하시거든 언제든 불러 주셔요.”
아쉬운 내색을 삼킨 주모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발 빠르게 안쪽으로 돌아갔다. 태백훈은 방문을 열고 유원에게 눈짓했다.
“저는 마루방에서 자면 됩니다. 그러니 편히 쓰세요.”
얼핏 봐도 한 사람용으로 쪼개 놓은 작은 방이었다. 마다하며 물러나는 유원을 뚫어져라 보던 태백훈이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 방은 병사들에다 노비들까지 더하면 그대 누울 자리가 딱히 없을 텐데요.”
“따라온 노비 아이가 그쪽에서 잔다고 했습니다. 잘 붙어서 누우면 충분히 괜찮을 거예요. 게다가…….”
말을 하다 말고 멈춘 유원이 숨을 삼켰다. 저번에 연녹수를 따른 일로 화나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었다. 근래 퉁명스러운 언사만 하더라도 유원한테 영 못마땅한 기색이 뚜렷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나간 일을 캐물었다가 화만 더 키울지도 모르니 애써 모른 척했다.
“혹시 관병들한테 괜한 추태를 보일까 염려하시는지요. 조심하고 또 조심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그대께선 본분을 잊으신 모양입니다.”
“본분, 이라니요?”
“향시 분명히 그대가 자청하여 제 수발을 드시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려면 내 방에서 지내심이 타당할 텐데요.”
“그야 그렇지만, 여긴 중노미들도 있고, 방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까…….”
“아무리 내가 그대를 부인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하기로서니, 저들 사이에서 면치레 없이 재울 정도로 어리석게 보입니까?”
그 말에 유원도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안 그래도 이번 봄 사냥에 종친은 물론, 죽은 듯이 지내던 안주인까지 따라나선단 말에 의문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곽현욱이나 손청준 같은 직속 수행원들이야 세세한 사정까지 다 알고 있으나 관병들은 그렇지 않았다. 웬 희멀건 사내놈이 따라왔냐며 숙덕거리는 이도 있었다. 그런 판에 유원이 저들과 같은 방을 쓴다면 필시 불편한 상황이 생길 터였다.
방 안은 군불을 꽤 오래 땠는지 따뜻하다 못해 더웠다. 여느 쪽방들보다는 큰 편이었지만 막상 태백훈까지 들어오니 방 한 칸이 금세 좁아졌다.
유원은 태백훈이 벗은 겉옷을 받아 주름을 펴고 횃대에 걸었다. 방한구로 꽁꽁 싸매고 있던 얼굴과 몸이 드러나자 평소보다 더욱 그의 인상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은분을 얹은 듯한 하얀 얼굴에 위아래 속눈썹이 길고 빽빽하니 화려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매. 우뚝하고 반듯한 콧날과 모양 좋은 입술까지. 다소 차가운 인상이지만 얼핏 봐도 빼어난 미인이었다.
고운 외모와 달리 기골은 장대하며 훤칠하나 검을 업으로 삼는 사람의 기민함과 날렵함 또한 돋보였다. 이다지도 돋보이는데 어느 여인인들 그를 모른 체하겠는가. 방금 봤던 주모만 하더라도 태백훈을 보고 뺨을 붉히며 웃음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어명으로 정해진 혼인이 아니었다면 저 같은 것과는 감히 마주할 일도 없는 사람이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배필임이 더더욱 느껴졌다. 하물며 태백훈은 오죽하겠는가. 별수 없이 참아 주는 와중에 면치레 때문에 유원을 직접 내칠 수도 없으니 사사건건 짜증이 날 만도 했다.
만약, 제가 사내가 아니라 여인이었다면 조금은 나았을까.
“뭘 그리 뚫어져라 보십니까?”
“예? 그냥… 방이 좁아 불편하실까 걱정돼서요.”
“하나도 안 불편합니다. 예전엔 이보다 더 좁은 방에서도 잘만 지냈고요.”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덤덤한 대답에 유원은 그렇다면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태백훈은 유원의 변명을 구태여 의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머지않아 중노미가 상을 가져왔다. 그는 방에 앉은 객이 하나가 아닌 둘임에도 딱히 궁금한 내색조차 없어 보였다. 상차림은 태백훈이 요구한 대로 두 사람분이었다. 무와 대추를 넣고 푹 끓인 꿩고기 탕과 수수 요리, 그리고 모주 한 병.
두 사람은 한 아름 정도 되는 소반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와 겸상하는 일이 처음은 아니라지만 적어도 상이라도 넓었다. 지금은 유원이 손을 살짝 내밀기만 해도 태백훈의 손날에 부딪힐 만큼 지척이었다. 그렇다 해서 상 하나를 더 가져다 달라 하기엔 방이 좁아 둘 자리도 없었다.
“한 잔 따라드릴까요?”
태백훈이 앞쪽에 놓인 잔을 가리키며 묻는 말에 유원은 고개를 저었다. 워낙 방이 훗훗해 술 몇 모금에도 금세 취기가 돌까 싶은 탓이었다. 진심으로 술을 권할 뜻은 없었는지 태백훈은 더는 묻지 않고 제 잔에만 술을 따라 단숨에 비웠다.
“꿩고기는, 먹어 보셨습니까.”
“아… 아니요, 처음입니다.”
“닭과 달리 잔뼈가 많고 억센 편이라 처음에는 가슴이나 넓적다리같이 살 많은 쪽이 먹기 수월할 겁니다.”
그는 제 쪽에 놓인 그릇을 한 번 살피더니 유원의 국그릇과 자리를 바꿨다. 둘 다 양은 비슷했지만 유원한테 내준 그릇에 좀 더 큼직한 살코기가 들어 있었다.
달그락, 놋그릇에 수저 부딪치는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유원은 억지로 밥그릇에만 눈을 뒀다. 고개를 들었다가 그와 눈이 마주칠세라 괜히 조마조마했다. 내리깐 시야로 그의 손이 움직이며 만들어 낸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가져온 봇짐이 꽤 무거워 보이던데.”
문득 태백훈이 입을 열었다. 수저로 국물을 수저로 휘젓던 유원이 슬쩍 눈을 들어 그를 쳐다봤다.
“뭘 그렇게 바리바리 들고 온 겁니까.”
“연고랑 환약, 여분의 밀초, 그리고 약주를 조금 챙겼습니다.”
“대부분 약제란 소린데, 그 정도는 따로 수레 하나로 실어 올 텐데요.”
“예, 압니다. 하지만 제 몸은 스스로 거둘 줄 알아야 영감과 녹수 님께 폐를 덜 끼칠 듯해서요.”
잠자코 듣고 있던 태백훈이 모주를 마셨다. 슬쩍 올려다본 그의 창백한 뺨에 옅은 홍조가 돌았다.
“사흘 전, 장명길의 처분이 결정되었습니다.”
“…….”
익숙한 이름에 유원은 수저를 꽉 움켜쥐었다. 태백훈은 손에 쥔 술잔을 살살 돌리며 말했다.
“병방에 종사하는 일개 말단이 군납에 가담하여 뇌물을 여러 번 받았다는 혐의가 증거로 드러났습니다. 정인이던 계집 또한 패물을 훔치는 동안 망을 봤었다 실토했고요. 그리하여 어제 호패에서 집안과 이름을 깎아 내 아무개로서 자자형(刺字刑)을 내리고 인근 숲으로 내쫓았습니다.”
“…….”
“헌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뭡니까. 비록 내 눈이 뒤통수에는 달리지 않아 모든 상황을 주시할 수만은 없다지만, 그대가 온 이후로 주변에서 자꾸 어수선한 사건이 생기니 말입니다. 마치 나를 음해하려고 작정한 것처럼요.”
“괜한 일에 휘말려 영감께 폐를 끼쳤습니다. 송구합니다.”
그저 송구하다는 상투적인 대답밖에 올릴 말이 없었다. 물끄러미 유원을 쳐다보던 그가 더운 숨을 느른히 내쉬었다.
“스스로 몸을 거두시려 들 필요 없이 수레에 얌전히 짐짝처럼 앉아 계세요. 나서지도 마시고요.”
“영감.”
“연녹수만 아니었다면 이번 사냥에 그대를 동행시키지 않았을 겁니다.”
“…….”
“애초에, 나였다면 무모하게 따라오지도 않았겠지만.”
다그치는 듯한 말투로 말한 그는 식사나 마저 들라며 눈짓으로 그릇을 가리켰다. 이미 싹 비운 태백훈과 달리 유원은 절반이나 겨우 먹은 듯싶었다. 유원은 그가 보는 눈앞에서 마지못해 꾸역꾸역 국과 밥을 떠먹었다.
목간에서 손발과 얼굴을 닦고 돌아오니 태백훈은 이부자리의 왼편을 차지하고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방이 좁아 이불 한 채만으로도 바닥을 거의 차지할 정도였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이 누우려면 몸이 맞닿아야만 했다.
이제 와서 다른 방으로 가기에는 앞방 뒷방 모두 소등하고 취침 중이라 그들 사이를 비집고 눕기도 곤란했다. 얼굴에 남은 물기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유원은 비어 있는 오른편으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캄캄한 방 안, 머리맡 독창으로 스며들어 온 등롱 불빛이 은은했다. 가만가만 머리를 빗던 유원은 옆을 슬쩍 살폈다. 등을 돌리고 누운 그의 등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벌써 잠이 드신 모양이었다. 오전부터 저녁까지 내리 말을 탄 데다 술로 몸을 데웠으니 고단함을 견디기 어려울 만했다.
유원은 곧바로 눕지 않고 구석에 놔둔 봇짐을 끌어당겼다. 연고, 환약. 유사시에 쓰려고 가져왔다고는 했으나 태반은 태백훈에게 쓰려고 정성껏 골라 온 물건이었다.
봄 사냥은 나들이가 아니라 그의 막중한 임무였다. 칼 하나도 제대로 못 다루고 말타기도 서툰 마당에 고작 약 좀 챙겨 온 정도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연녹수가 아니었다면 데리고 오지 않았다는 그의 말도 마땅했다. 유원은 바리바리 들고 온 짐이 못내 부끄러워져 납작하게 포개 구석으로 멀리 숨겼다.
모로 누운 유원은 그의 자리에 닿지 않게 벽으로 가까이 붙였다. 발끝을 모으고 숨을 참았다. 잠이 안 올 듯한데, 차라리 나가 있을까. 그리 고민하던 차였다.
“……하아.”
옆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잠결에 내쉰 숨인가 하여 돌아보니 부스럭, 이부자리가 걷히며 옆에 누워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덩달아 일어난 유원이 외투를 챙기는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영 불편하신 모양이니 내가 저기 옆방으로 가겠습니다.”
“예? 하지만……!”
“잔말 말고 나오지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태백훈은 성큼 방을 나가 버렸다. 문이 콱 닫히고 그림자까지 멀어졌다.
딱히 불편한 티를 내려던 건 아니었는데. 방이 좁으니 넓게 주무시라 옆으로 비키던 몸짓이 도리어 방해가 된 모양이었다.
여전히 헤아릴 수 없고 아득히 머나먼 사람이었다.